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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고문과 키스 (7/47)

제6장 고문과 키스

라파엘은 그다음 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는 상태로 몸도 일으키지 못했다. 꿈에서도 그 장면만이 나왔다. 왕이 바이런을 깔아뭉개고 말하라고 협박하며 사람 팔뚝만 한 것으로 바이런의 항문을 쑤신다. 라파엘은 자신의 팔을 들었다. 분명히 이만 했다. 아니, 이보다 큰 것 같았다. ……사실 왕이 아무리 거물이라 할지라도 그렇게 클 리가 없다. 그건 사람도 아니고 말도 아니다. 그건 동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충격받은 라파엘에게는 왕의 것이 아주 커 보였고(실제로 왕의 것이 큰 건 사실이었다. 단지 사람의 용적을 좀 벗어나는 정도지, 라파엘이 기억하는 그 용적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 검붉고 미끈미끈한 것은 무시무시해 보였다. 

고문이 끝나고 나서 왕은 앞을 제대로 추스르지도 않고 안네마리의 팔을 잡아끌었다. 거칠게 끄는데도 팔이 아프거나 하진 않은 걸 보니 왕이 당기는 힘에 비해 쥔 힘은 꽤 약한 것 같았다. 그는 그렇게 안네마리를 끌고 왕후궁으로 향하는 다리로 떠밀었다.

‘가라.’

왕의 잘생긴 얼굴은 피폐해져 있었다. 자신이 고문을 자행해놓고 자신이 상처 입은 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사실은 애인 사이가 맞았나? 그런데 고문이라도 한 걸까? 라파엘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가라기에 등을 돌렸다. 그 순간 뭔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지만 고개를 돌려보진 못했다.

라파엘은 종일 자신의 팔을 들어보고 한숨을 쉬었다. 도대체 그 행위는 뭘까? 그가 생각하는 대로 고문 행위라고 생각하자면 앞뒤가 안 맞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그게 고문이 아니면 뭐가 고문이란 말인가.

“트뤼포아 후작입니다!”

알현실에서 멍 때리다 방으로 돌아가게 된 지 2주 만에 처음 알현 신청이 들어왔다. 상대는 루 라 트뤼포아였고, 라파엘에게는 알현 신청을 거부할 만한 명분이 없었다. 결국 트뤼포아가 알현실로 걸어 들어왔다. 한쪽 얼굴을 가린 트뤼포아가 성큼성큼 다가오는 것을 보며 라파엘은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라파엘의 앞에 온 트뤼포아가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었다.

“밤새 생각했습니다.”

트뤼포아가 나직이 말했다.

“어떻게 해야 이 마음을 전할 수 있을지.”

네가 너무 둔해서 어떻게 말해야 한 방에 이해시킬 수 있을지 정말 밤새도록 고민했다―는 뜻이지만 라파엘은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트뤼포아가 말을 꺼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쾅, 소리가 나서 트뤼포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라파엘이 뭔가를 부순 건가 싶었는데 라파엘은 여전히 인형처럼 앉아 있을 뿐이다. 도리어 라파엘도 경악의 눈으로 트뤼포아의 등 뒤를 바라보고 있어 그도 고개를 돌렸다. 왕의 손에 긴 장총이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보고 라파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 총은 라파엘이 본 어떤 총보다도 길었다. 1미터가 조금 못 되지 않을까 싶은 장총을 들고 있었는데 그 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으로 보아 총을 쏜 게 틀림없었다.

총은 신력이 있어야만 사용이 가능한 무기다. 그리고 신력에 따라서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무기이기도 했다. 왕이 쓰는 무기는 이그나치오 1세가 썼다는 그 무기로 역대 저 총을 사용한 자는 네 명뿐이었고, 최근 3백 년 간은 왕이 유일했다. 왕이 저 총을 사용함으로써 전설에만 나오던 총을 처음 봤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전설에서는 이그나치오 1세가 용을 잡았다는 그 총으로 왕이 기껏 쏜 것은 알현실 바닥이었다. 바닥이 움푹 파인 것을 보고 트뤼포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사교계에서 일단 결혼의 의무를 다한 자들에게는 방종을 허락한다지만.”

왕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 코앞에서 내 비에게 사랑을 고백해?”

왕의 말에 트뤼포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왕의 말대로 사교계에서는 결혼의 의무를 다한 자들, 즉 유부남, 유부녀에게는 방종을 허락한다. 가든 하우스에서 남자와 한창 정사에 몰입하고 있는데 다른 여자와 남편이 들어오더라―는 건 우스갯소리도 될 수 없는 흔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대귀족 사교계라는 게 사람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결국 거기서 다 돌고 돌며 사귀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 또한 흔한 일일 뿐이다.

게다가 왕은 남색가이지 않은가. 세상이 다 아는 남색가.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트뤼포아는 말을 함부로 꺼내지 않았다. 왕은 총을 들고 있었다.

“내가 분명 조신하게 입고 다니라 했을 텐데?”

왕의 말에 라파엘은 자신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쇄골도 보이지 않는 차림이었다. 물론 어젯밤보다는 조금 더 노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봤자 다른 귀부인들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는 차림이었는데도 왕은 형형한 눈을 하고 있었다.

안네마리의 흰 목덜미와 갸름한 턱선을 보며 왕은 일단 짜증이 났다. 오늘의 안네마리는 유독 화사한 것 같았고, 그 화사한 옷차림이 다 저 새끼를 위해서인 듯한 기분에 그는 다짜고짜 짜증을 내고 말았다.

그러다 안네마리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안네마리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안네마리도 이제 더는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그 꼴을 보였으니 당연한가. 그렇게 생각해도 부아가 치밀어 오른다.

어떤 놈한테서는 사랑을 고백받고, 나와는 눈도 안 마주쳐?

“내 비는 나와 선약이 있다.”

왕의 말에 트뤼포아는 노골적으로 불신의 얼굴을 했지만 상대는 왕이었다. 왕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지 거기에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왕의 물러나라는 암묵적인 명령을 받은 트뤼포아는 어쩔 수 없이 물러섰다. 그러나 그냥 물러서기엔 상당히 억울했으므로 심술궂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왕비 전하, 다음에는 우리의 과거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그래도 한때는 몹시 친밀하던 사이가 아닙…….”

콰앙, 소리와 함께 총성이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는 트뤼포아의 바로 옆에 구멍이 파였는데 그 범위며 깊이가 아까보다 더 위협적이었다.

“꺼져.”

왕의 말에 그는 더 말을 붙이지 못하고 알현실에서 퇴장했다. 그러는 그를 라파엘은 시선으로 멍하니 좇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했다. 살인 기계로 살아온 지 벌써 10년째, 그는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그래서 더욱 트뤼포아가 신기했다.

아, 혹시 루는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는 건가.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와 ‘이러한 짓도 저러한 짓도 그러한 짓도 했었던 살인 기계 라파엘 에반스’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아마 루는 살인 기계라는 별칭은 들었어도 그가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는 것일 테다. 그렇다고 해도 남자인데다 창백하고 키가 작고 남루한 남자를 좋아하다니…….

취향이 독특했구나, 루.

라파엘은 진정 그를 동정했다. 이로써 루의 세 번째 고백조차 그 결실이 미미하게 끝나고 말았다.

왕은 안네마리에 흘끗 시선을 주었다. 안네마리는 어딘가 아련한 시선으로 트뤼포아의 떠나는 뒷모습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 또한 빈정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제까지―정확히는 어제 ‘밤시중’을 들기 전까지―자신을 들뜬 눈으로 보더니 오늘은 다른 놈을 아련한 눈으로 보는 이 여잔 도대체 뭐란 말인가.

트뤼포아가 알현실을 완전히 떠나서야 안네마리는 시선을 떼었다. 그러나 그녀는 왕에게 시선을 주지는 않고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사 좀 보였다고 당장 이렇게 눈을 피하는 꼴 좀 보라지! 안네마리의 시선이 정신 산란하다며 일부러 그런 짓을 해놓고선 이젠 눈을 안 마주친다고 화를 내고 있는 왕이었다. 왕이 “네 눈엔 추라도 붙은 거냐, 축축 내려가게?”라고 빈정거리자 그제야 안네마리가 왕을 올려다보았다.

“남색가가 혐오스러워 시선도 못 마주치겠느냐?”

왕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왕은 오늘도 근사했다. 그런 모습을 본 뒤라 이제 더 이상 왕이 근사하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오늘은 왠지 더 근사한 것 같았다. 태양빛을 머금은 머리칼이 눈이 부셨다. 내내 청량해 보인다고 생각했던 시원한 입가가 오늘따라 왠지 좀 야해 보이지만, 우아하다고 생각한 손가락이 남작의 허벅지를 파고들던 장면이 떠올라 음탕해 보이지만, 잘 뻗은 야생마 같은 다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오늘따라 그 중간 사타구니에 시선이 가지만…….

아, 안 되겠다.

라파엘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이상하다. 오늘은 아예 대놓고 심장이 펄떡펄떡 뛴다. 물 밖으로 쫓겨난 물고기처럼.

“아니라더니 왜 눈을 마주하지 않는 거냐!”

왕이 으르렁거리며 라파엘의 팔을 잡아당겼고 라파엘이 휘청거렸다. 구두를 신고 있다기보다는 탑승하고 있는 것에 더 가까운 라파엘로서는 당연한 일이었고, 왕은 황급히 라파엘을 붙잡았다.

둘의 얼굴이 코앞에서 닿아 있었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서로의 눈동자에 자신을 비춰 볼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가까웠다. 그 순간 라파엘은 왕을 떠밀고 말았다. 왕이 두어 걸음 밀려나갔다. 왕을 떠밀고 나서야 실수했다고 생각한 라파엘이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하고 있을 때 왕이 더 낮아질 수 없을 듯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오늘 밤에도 시중을 들어라.”

그, 그것만은 제발―!

라파엘이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왕은 알현실을 나가고 있었다. 감히 왕을 불러 세울 수는 없는 노릇이라 라파엘은 울상을 지었다.

그리하여, 또 밤이 다가오고 말았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 모습을 또 봐야 하는 건가. 말로만 듣던 성고문이 그것일 거라고 라파엘은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물론 고문의 경우 대체적으로는 자백을 받기 위함으로 쓰인다. 그런 경우 왕의 성고문은 목적에 어긋났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고문은 원한에 의해 자행되기도 한다. 왕의 경우 후자가 아닐까, 라파엘은 생각했다. 만약 전자였다면 라파엘은 왕에게 자신이 고문해 자백을 갖다 바칠 테니 남작에게 자비를 베풀라고 간언하고 싶을 정도였다. 라파엘은 어떤 고문을 당하면서도 결코 자살을 하려 해본 적이 없지만 왕의 성고문을 당한다면 자살을…… 아니, 그 검붉고 미끈거리는 몽둥이만 봐도 자살을 선택하고 싶을 것 같다. 사실 고문이 아니라는 생각을 조금만 해보면 알 수 있을 텐데도 사람은 가끔 자신이 믿고 싶은 대로만 믿기 마련이다. 지금의 라파엘이 그랬다.

“흐아앙, 전하―.”

이 앓는 소리. ……벌써 하는 중이로구나.

라파엘은 시녀들을 문 밖에 대기시키고 홀로 들어갔다. 왕의 시종들이 라파엘을 안내했고, 침대 근처에 서 있던 시종장이 자리를 권했다. 침대의 정면에 있는 1인용 소파였다. 라파엘은 무표정하게 그 소파에 앉았다. 소파의 감촉이 기가 막히도록 좋았지만 지금 머리가 뒤죽박죽이 된 라파엘에게 그 감촉까지 즐길 여유는 없었다.

왕이 바이런의 몸에 그의 것을 푹푹 꽂고 있었다. 오늘 다시 보니 꿈속에서 본 것보다는 작아 보였지만 어쨌거나 그 위용은 오늘도 무시무시했다. 바이런의 항문은 어제보다 좀 더 솟아올라 있어서 저러다 항문이 뾰족해지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다.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형처럼 앉아서는 그 행위를 지켜보다 결국 눈을 돌렸다. 어떤 고문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이것만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왕은 안네마리가 고개를 돌리자 짜증을 내며, 애꿎은 바이런에게 그 짜증을 풀었다. 바이런이 느끼는 곳을 연속으로 퍽퍽 찔러주자 바이런이 말 그대로 자지러졌다. 어제는 그래도 잘 조이더니 오늘은 아예 헐렁해져 있었다. 바이런이 침을 질질 흘리는 꼴을 보며 왕은 이제 슬슬 정부를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이런을 뒤에서부터 찍어 누르고 범했다. 왼손으로는 바이런의 뒷목을, 오른손으로는 바이런의 허리를 잡은 채 난폭한 추삽질을 계속하던 왕은 갑작스러운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왕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쳐 라파엘은 당황하고 말았다. 처음에는 바이런이 불쌍해서 도저히 못 보겠다고 생각했는데 잠깐 고개를 든 게 화근이었다. 왕이 움직이고 있었다. 바이런을 사냥감처럼 찍어 누른 채 육식동물처럼 유연하게 허리가 움직인다. 흐앙, 앙, 아응,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앓는 소리가 요상한 바이런과는 달리 왕은 낮은 신음을 내고 있었다. 가볍게 풀린 입가가 슬쩍 올라가자 그 옆에 보조개가 살짝 패었다. 보조개가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왕이 저토록 나른한 얼굴을 한다는 것도 처음 안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왕에게 시선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들자 왕이 고개를 들고 라파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네마리가 그를 바라본다. 어제처럼 열렬하지 않으나 촉촉이 젖은 시선이다. 안네마리가 시선을 피하려 해서 왕은 더욱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그녀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고 왕을 바라본다. 문득 그녀의 입술이 가볍게 열렸고, 그 순간 왕은 자신도 모르게 사정하고 있었다. 바이런의 안에 사정하면서 왕은 안네마리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예쁜 입술이다. 저보다 더 고운 입술을 가진 여자가 여럿 있었을 텐데도, 그리고 그는 루주를 바른 붉은 입술 따위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는데도, 지금만은 그 입술이 몹시 예뻤다.

바이런에게 아직도 사정하고 있으면서 왕은 손을 까딱였다. 안네마리가 소파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왔다. 그녀가 한 발짝씩 가까워올수록 숨이 막힌다. 그녀의 체취가 희미하게 느껴지자 손가락이 떨렸다.

왕은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그는 절대 여자를 안을 수 없다. 그가 여자를 안을 수 있는 확률이 아주 조금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여자를 안았을 것이다. 이렇게 끌리는 것과는 별도로, 그는 절대 여자를 안을 수 없었다. 그러니 이 여자에게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이 여자에게 자유를 줘야 한다. 얼굴이 반쪽이나 날아가긴 했지만 핸섬한데다 이 짓도 잘할 거고 돈도 제법 있는 트뤼포아 후작 정도면 그녀의 좋은 상대가 되리라.

모르는 건 아니었다.

왕이 땀으로 축축한 팔을 뻗었다. 라파엘은 그 팔이 다가오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잘 뻗은 팔이다. 날씬한 근육이 붙어 있는, 역동적인 팔이었다. 길고 아름다운 팔이 다가와 라파엘의 뒷머리를 잡고 가볍게 당겼다. 어젯밤에도 그는 이렇게 라파엘을 잡아당겨 이마를 맞대고는 열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때 얼마나 가슴이 떨렸던가. 미친 것처럼, 혹은 미칠 것처럼 가슴이 떨렸다. 그러나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심장이 아프도록 뛰어도 그 기분은 분명히 좋은 것이었다. 중독될 것처럼 좋은 기분임이 분명했다.

왕은 안네마리의 얼굴이 다가오는 것을 보다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여자에게 하고 싶어한 적이 없는 짓을, 그는 안네마리에게 하고 싶어졌다.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그리고 닿은 입술이 살짝 떨리는 것도 같았다. 안네마리가 거부한다면 더는 하지 않으리라고 왕은 결심했다. 그는 남색가였다. 안아주지도 못할 남자가 키스하는 것을 달가워하는 여인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안네마리는 살며시 입술을 열었다. 왕은 그 순간 미쳤다. 자신이 누구에게 무슨 짓을 하던 도중인지, 그런 건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왕은 열정적으로, 다시는 못할 것처럼, 안네마리에게 키스했다. 각도를 바꾸어가면서, 그녀의 입술을 점령했다. 그녀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아주 조심스럽게 혀를 내밀자 그 혀를 빨아 당겼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빨면서 왕은 목 안쪽으로 탁한 신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다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그녀의 타액이 너무나 달았다. 숨결이 너무나 상쾌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지만, 마법처럼 그렇게 느껴졌다. 안네마리가 몇 번 망설인 끝에 왕의 입안으로 살며시 혀를 밀어 넣자 그는 입을 벌려 안네마리를 마주했다. 안네마리의 혀가 볼 뒷면의 점막을 잠깐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탁한 신음은 더욱 거칠어졌다.

머리 위에서 연놈의 키스 신이 불거지자 바이런은 이가 갈렸다. 이가 갈리면서도 믿을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왕은 지독한 남색가였다. 그는 여자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여자가 무생물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다. 혹은 개나 돼지라고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그는 여자들이 달라붙을 때마다 애완동물이 달라붙는 것을 보는 듯한 눈으로밖에 보지 않았다. 한 번도 성욕 따위를 느낀 적이 없었다.

왕의 밤시중을 마리 트리지아도 종종 들었었다. 바이런은 그때도 마리 트리지아에게 보란 듯 다리를 벌려주었고 그때마다 그녀는 치욕감으로 얼굴을 붉힌 채 그들을 외면했다. 눈물을 떨구는 일도 두어 번 있었다. 그 자존심 높은 마리 트리지아가 울 때마다 바이런은 가슴이 터질 것같이 즐거웠다. 평민인 그로서는 왕족을 제외하고 가장 고귀한 핏줄이라는 쇼어가의 왕후가 우는 것을 볼 때마다 자신이 그녀를 꺾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왕은 누구와 키스하고 있는가.

문득 바이런은 사납게 시트를 물어뜯었다. 왕이 다시 한 번 사정하고 있었다. 바이런의 몸에 성기를 꽂은 채 마리 트리지아에 비하면 볼품없고 남루한 여자와 키스하며 허리를 움찔거렸다. 그는 여자와 키스하며, 키스로만 사정하고 있는 것이다. 평소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왕의 탁한 신음이 머리 위에서 계속 터졌다. 그는 키스만으로도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꽂은 채 여자와 키스하며 사정하다니. 졸지에 정액받이가 된 바이런은 비참함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트를 계속 물어뜯었다. 여기서 반항할 수는 없다. 반항하기엔 왕이 너무 무서웠다. 하지만 화가 난다. 노여워서 견질 수가 없다. 마리 트리지아도 바이런의 앞에서는 비참해져야 했다. 그런데 이 계집이 뭐라고!

“전하, 그만―읏!”

안네마리가 입술을 떼며 말하려는 순간 왕은 다급히 그녀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지독하게 좋았다. 키스만으로 사정하다니,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신의 성기를 감싸고 있는 점막이 누구의 것인지는 이미 잊었다. 누구와 정사를 벌이던 중인지도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안네마리의 입술뿐이었다.

정사가 끝나고 왕이 목욕을 하러 가자 방에 남은 건 바이런과 안네마리, 그리고 왕의 시종들이었다. 바이런은 안네마리의 앞에서 은대야에 왕의 정액을 배출해냈다. 안네마리는 시선을 돌리려고 했지만 바이런이 그녀를 도전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확실히 여자 앞에서 왕의 정액을 빼내는 작업은 비참한 일이었다. 그러나 왕의 정액은 중요한 물건이라 밖으로 빼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바이런은 의자 위로 올라가 등받이를 안고 볼일을 보듯 쪼그리고 앉아서 시종들이 엉덩이 안에 남은 정액을 세심하게 긁어내는 동안 안네마리를 훑어보았다.

미인이 아니라곤 할 수 없었다. 확실히 미인이었다. 저 두꺼운 화장을 지워봐야 정확한 얼굴을 알 수 있겠지만 흰 피부에 검은 머리칼이 분명 미인은 미인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마리 트리이자를 능가하는 미인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도리어 발끝도 못 쫓아온다고 하는 편이 더 옳았다. 마리 트리지아는 세기의 미인이었다. 역대 왕비들의 초상화를 걸어둔 회랑에서도 그녀의 미모는 유독 빛이 났다. 그런데 마리 트리지아도 감히 성공하지 못했던 일을 이 초췌한 여자는 금세 이루어내버렸다.

“왕비님, 잘난 체하지 마세요.”

바이런이 말했다.

“전하는 원래 특이한 걸 좋아하시거든요. 마리 트리지아 왕후처럼 아름다운 여자가 아니라 특이한 걸 좋아하시죠. 장미꽃보다는 호박꽃에 관심을 주시는 분이세요. 하지만 그분은 같은 벌을 더 좋아하시는 분이니 기껏해야 잠깐 꿀이나 빨리고 말 거라는 걸 명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이건 제가 비전하가 너무 가엽고 안타까워 드리는 말씀이에요. 전하의 침을 가지실 수 있는 분이 아니잖아요. 그분은 꽃을 가지려 하시지 않는답니다. 비전하가 남자가 되지 않는 한 그분을 가질 수는 없어요.”

라파엘은 머리가 멍해지는 걸 느꼈다. 아직 키스의 여운도 채 가시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말, 정말 키스를 잘했다. 각도를 바꿔가며 온 입을 헤집을 때마다 라파엘은 눈앞이 번쩍거렸다. 무릎이 떨릴 지경이었다. 아직도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바이런이 꽃과 벌 이야길 하고 있었다. 왕과 마리와 꽃과 벌이 뭘 어쨌다는 건가. 라파엘은 가뜩이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머리에 왕의 얼굴과 마리의 얼굴과 장미와 할미꽃과 벌이 둥둥 떠다니는 통에 어지러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새로 시트를 간 침대에 털썩 앉자 왕이 마침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왕의 침대에 앉은 라파엘을 보고 시종장이 아 하고 신음했다. 그가 다가와 라파엘에게 속삭였다.

“전하께서 동행하신 분이 아니면 침대에 닿으셔서는 안 됩니다.”

특히 새 시트로 간 다음에는 동행하신 분도 전하의 침대에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게 궁중 법도입니다, 라고 시종장이 말한 순간 왕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옷시중을 받던 도중이라 상의만 겨우 입은 차림으로 다가온 왕이 “그냥 둬라. 그깟 침대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가뜩이나 여린 여자에게 핍박이냐, 핍박이”라고 시종장을 구박했다. 평소에는 바이런의 손끝만 스쳐도 시트를 다시 갈라고 하는 까다로운 성미인데 여자는 그냥 앉히라니. 시종장이 눈을 크게 뜨거나 말거나 왕은 시종장의 말에 벌떡 일어났던 안네마리를 다시 앉히고 그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왜 얼굴이 붉으냐? 열은 없는데.”

“아, 아니, 그게…….”

왕이 다가오자 더 얼굴을 돌리려는 라파엘이었지만, 왕은 다정한 음색으로 재차 물었다.

“어지러우냐?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하지?”

왕이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안네마리에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지 시종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시종들이 대단히 난처한 눈으로 바이런 쪽을 보았다. 왕이 나오기 전 정액을 다 긁어낸 바이런은 스스로 옷을 입던 중이었다.

“또 너냐, 바이런.”

그 말에 바이런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런 바이런을 찬 눈으로 노려보던 왕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군. 돌아가라”라고 축객령을 내렸다. 바이런이 왕의 냉랭한 기색에 말 한 마디 붙여보지 못하고 방을 나섰다. 축 처진 어깨를 하고 싸움에서 진 개마냥 돌아가는 바이런을 배웅해주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사라지는 바이런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은 채 라파엘의 양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바이런이 뭐라고 했든 마음에 담지 마라. 쓸모 있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니까.”

“예, 전하.”

좀, 옆으로 가시면 안 되겠습니까.

라파엘은 왕의 손아귀에서 슬쩍 벗어나볼까 했지만 왕이 놓아주질 않았다. 도리어 라파엘이 몸을 뒤트는 기색이 보이자 왕은 도리어 팔에 힘을 줘 라파엘이 움직일 수 없도록 했다.

“피곤한가? 안색이 별로 좋지 않군.”

아아, 왕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나와 키스한 걸 후회하느냐?”

“아니요.”

안네마리가 고개를 들었다. 들어본 그녀의 목소리 중 가장 단호한 것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한 번 더 저었다.

“아니요.”

왕은 피식 웃었다. 그녀의 검은 눈이 차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말하려는 그녀의 입술을 손으로 만지며 왕은 “그래, 알았어”라고 속삭였다.

그래, 알았어. ―뭐 별다른 속삭임도 아니었는데 약간 쉰 듯한 목소리가 너무나 육욕적이라 라파엘은 고개를 숙였다. 그는 성적으로 좀 무지한 편에 속했지만, 키스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이것이 첫 키스였다. 첫 키스를 왕과 하다니, 참 사치스러운 추억이 되겠구나.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그는 어째서 마리가 죽게 됐는지 알아내고 나면 곧 떠나야 했다. 왜 마리가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를 적었는지는 모르나 바이런과 클레르의 사이는 알게 되었다. 에드워드에 따르면 바이런은 왕과 이런 사이가 되기 전 클레르와 이런 사이였다. 그리고 둘의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다는 것은 둘이 뭔가 타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될 짓을 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일이 끝나면 그는 돌아가게 된다. 왕은 이 화려한 왕궁에 남고, 자신은 집으로……. 이미 불타 없어졌다는 그 집으로. 그곳에 다시 집을 짓고, 지나가다 버려지고 다친 동물을 보면 데려오고, 이제는 루조차 없이 홀로 거기서 살게 되리라.

“왜 쓸쓸한 얼굴을 하는 거냐.”

왕이 물어서 라파엘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은 나를 얼마나 기억할까. 내가 사라진 뒤 당신은 나를 얼마나 기억할 수 있을까. 그래도 왕비였으니 나를 찾으려고는 할까. 나는 당신을 얼마나 있어야 잊을까. 내 입술에 닿았던 유일한 사람을 나는 잊을 수 있을까. 아직도 입가에 남은 이 감촉은 언제쯤 지워지게 될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피곤한 거냐?”

왕의 그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왕이 안네마리를 안아 올렸다. 안네마리가 놀라 왕을 붙들자 왕은 크게 웃으면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왕의 그림자 같은 시종들이 따라붙는다. 어두운 왕의 침전, 왕이 복도로 나오자마자 시종들이 왕보다 앞서 나가 복도의 등에 불을 붙인다. 불이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퍼져나간다.

점점이 밝아져오는 복도에서 라파엘은 왕에게 안겨 있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가벼운 포옹을 받아본 게 스킨십의 전부였는지라 몹시 어색했다. 그가 몸을 딱딱하게 굳히자 왕이 귓가에 대고 놀렸다.

“그렇게 몸을 굳히지 말거라. 가뜩이나 무거운데.”

“내려주시면…….”

“너 같은 거 하나 못 지탱해서야 어디 왕 노릇 하겠느냐. 됐다.”

여장을 하고 있지만 라파엘은 남자였다. 뼈며 근육의 무게가 상당할 텐데도 왕은 그를 내려놓지 않았다. 허공에 떠서 침전과 문 플레이스를 잇는 다리의 한중간에 오자 왕은 라파엘을 내려주었다. 그러자 왕의 긴 꼬리 중 가장 끝에 있던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이번에는 라파엘의 뒤에 꼬리를 만들었다.

“푹 자고, 아침에 보자.”

“예, 전하.”

“정말 식사를 하고는 있는 건지 감시하러 갈 테니, 얌전히 기다리도록.”

아침을 같이 하자는 말조차 심술궂게 하는 왕이었다. 라파엘의 뒤에 있는 시녀들이 허리를 숙인 채 서로 시선을 교환한다. 왕의 침실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그녀들로서는 갑자기 저토록 다정한 왕이 의아할 지경이었다. 이건 신종 트집인가. 그녀들이 경계하고 있을 무렵 라파엘은 치맛자락을 살짝 들고 무릎을 굽혀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토록 길고 열정적인 키스를 한 주제에 안네마리는 여전히 말이 없다. 허리를 숙이는 그녀의 태도는 단아하기만 하다. 굿나이트 키스를 기대했던 왕은 허를 찔린 얼굴로 안네마리를 내려다보다 오늘만 날이 아니라는 생각에 등을 돌렸다. 그가 가지 않으면 안네마리도 갈 수 없다. 그래서 다리 한중간에서 등을 돌린 왕은 등 뒤에서 따뜻한 기운이 퍼져오는 것 같아 웃음이 났다. 긴 꼬리를 끌고 사라지는 왕이 다리를 거의 벗어났을 무렵 라파엘과 시녀들도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다리 위에 있던 한 무리는 두 무리가 되어 서로 반대 방향으로 사라졌다.

§  §  §

라파엘은 새벽 일찍 눈을 떴다. 밤새도록 왕의 입술이 나오는 꿈에 시달렸다. 벌과 꽃과 마리와 왕과 왕의 입술이 둥둥 떠다니는 꿈이었다. 여백에 조그맣게 바이런과 제럴드, 에드워드도 나왔다. 둥둥 떠다니는 것들에 시달리다 눈을 뜨자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새벽 4시. 언제나처럼 자신이 마음먹은 시간에 일어난 라파엘은 잠행복을 입고 발코니 창을 열었다. 이미 날씨가 추워져 잠행복만으로는 추위를 막을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이제 겨울의 시작일 뿐이니 북대륙의 살벌한 겨울은 더욱 추워지리라.

왕후궁을 벗어나 나무를 타고 근위대 건물 근처까지 이동한 라파엘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근위대장실에서 희미하게 불빛이 새어나오는 것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먼저 온 손님인가, 아니면 주인이 돌아가지 않고 이 시간까지 여기 남아 있었던 건가. 라파엘은 근위대장실의 발코니로 뛰어올라 일단 구석에 몸을 숨겼다. 고개를 돌려 유리문 안쪽의 상대를 확인했다.

이 방의 주인은 아니었다. 뒷모습만 보였지만 제럴드라고 하기에는 키가 좀 작았다. 조심스럽게 책상을 뒤지고 있는 폼은 분명 정상적인 행위가 아님을 시사한다.

누구지.

라파엘은 잠시 고민했다. 저 남자가 지금 뭘 하는 걸까. 누군지는 몰라도 제럴드의 방 안에서 조심스레 뭔가를 뒤진다는 건 제럴드에게 이득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몸을 숨긴 채 상대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그가 궁금한 것은 마리가 왜 죽었는지, 무엇으로부터 구해달라고 한 건지에 관한 일일 뿐이다. 제럴드 라 쇼어를 비롯한 쇼어 가문 다른 이들의 안위는 그 알 바가 아니었다. 잠시 그를 반갑게 맞이하던 쇼어가 사람들이 떠올랐지만 라파엘은 굳이 제럴드를 구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다.

희미한 불빛 앞에서 남자가 흘끗 고개를 돌렸다.

‘뭐야, 이거.’

라파엘은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시 발코니 문 앞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는 라파엘이 예상한 대로 제럴드 라 쇼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라파엘이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으니,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었다. 공작이며 왕후의 아버지였고 지금도 유일한 왕비의 백부이자 의부가 되는, 근위대장과 재무 비서관의 아버지이고 그 자신도 외무대신인―권력자 중에서도 권력자라 할 수 있는 남자가 아들의 집무실에 와서 책상을 뒤지고 있는 것이다.

라파엘은 결국 뒤로 물러섰다. 그는 제럴드에게 메모를 남길 생각이었다. 밤에 남아 있으라는, 찾아오겠다는 메모. 제럴드와 왕이 무슨 사이인지 알아야 했다. 그 관계가 마리의 죽음에 영향을 주었는지 주지 않았는지도 알아야 했고. 그래서 찾아왔을 뿐인데 의외의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 라파엘에게 인자하게 웃던 그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급한 기색이 역력한 몸짓으로 아들의 책상을 뒤지는 그는 어딘가 귀신 같았다. 새벽 4시의 귀신이라. 귀신치고는 너무 늦군. 아니면 너무 이르든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려던 라파엘은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어 방법을 바꾸었다. 그는 위층의 발코니로 뛰어올라서는 우거진 나뭇가지에서 나무에서 열매를 하나 떼어내 아래층의 발코니 유리문에 던졌다. 탁, 소리가 나자마자 그는 재빨리 위로 올라왔다. 발코니에 엎드려 틈새로 확인하고 있자니 곧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누군가가 나왔다. 그는 브라이튼 라 쇼어 공작이 맞았다. 라파엘의 눈은 틀리지 않은 것이다.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시간이니만큼 이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타고난 조심성으로 고개를 돌리던 라파엘은 또 익숙한 얼굴을 보고 재빨리 문에서 비켜섰다.

바이런 라 프시스였다.

왕의 정부인 바이런이 책상 위에 엎드린 채 엉덩이를 벌리고 있었고, 근위대복을 입은 남자가 그 엉덩이 사이를 게걸스럽게 핥아대고 있었다. 혹시 제럴드인가 싶어 자세히 살폈지만 상대는 제럴드는 아니었다. 라파엘 자신은 모르는 남자였다. 남자는 바이런의 항문을 핥고 또 핥았다. 그럴 때마다 바이런이 끊어질 것 같은 교성을 터뜨렸다.

저건 뭐 하는 짓이지?

바이런이 괴로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왕궁은 참 신기하고 다채로운 곳이라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그가 아는 한 정사란, 남녀가 옷을 벗고 서로 몸을 문대는 것이다. 그게 그가 아는 정사였다. 그런데 왕은 몽둥이만 한 자신의 성기로 바이런의 뒤를 찢어놓더니, 바이런은 근위병에게 그 찢긴 곳을 핥게 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살짝 문을 열자 둘의 말소리가 작게나마 들려오기 시작했다.

“아, 거기, 더― 더― 흐응, 더―.”

“여, 여기 말입니까?”

“그래, 거― 응, 거기―.”

“저, 정말 이렇게 하면 구해주실 겁니까?”

근위병의 말에 바이런이 고개를 홱 돌렸다. 고양이처럼 신음하고 있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바이런의 눈은 흉흉했다.

“네 여동생을 구하고 싶다면 입 닥치고 빨아! 아니면 확―.”

“아, 알겠습니다. 알았다고요.”

근위병이 눈을 질끈 감고 바이런의 엉덩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얼굴을 파묻기 전 보았던 얼굴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생각하며 라파엘은 그곳에서 벗어났다. 정황으로 보건대 바이런은 근위병에게 항문을 빨도록 강요하고 있는 듯했다. 근위병이 저 강요에 응하는 것은 아마도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여동생이라.

라파엘은 일단 근위대 건물에서 벗어났다. 일단은 돌아가야 했지만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일이 복잡해 보여 그는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하긴, 자신만 해도 이미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지 않은가. 왕은 명목상의 왕비를 내팽개칠 거라고 예상했었고, 그는 왕의 사각지대에서 재빨리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떤가. 왕과는 가까워지고 있지 않은가.

어젯밤의 그 키스가 떠올라 나무에서 나무로 이동하던 라파엘은 하마터면 떨어질 뻔했다. 허공을 가로지르던 팔부터 그 키스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서 도리어 환상처럼 느껴졌다.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기분에 라파엘은 나무 위에서 멈춘 채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왕의 탁한 신음 소리가 아직도 그의 귓가를 맴돌고 있었다.

“누구냐!”

이런, 들켰다.

라파엘은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몸을 날리며 등 뒤의 검을 뽑았다.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상대가 그를 돌아본 건 그가 몸을 날리기 전으로 상대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딴생각을 하느라 지레 찔려서 몸을 드러내고 만 것이다. 어쨌거나 드러낸 이상 어쩔 수가 없다.

그의 검이 양쪽에서 상대의 옆구리를 베었다. 중간에서 만나 검이 교차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눈 한 번 깜빡일 시간 정도였다. 상대는 갑자기 튀어나온 검은 복면인을 인식하고 놀랐을 뿐 자신의 허리가 양쪽으로 깊숙이 베인 것은 인지하지도 못했다. 놀란 얼굴로 상대가 즉사했다.

“도와준 건가?”

누군가가 물어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웬 남자가 서 있었다. 훤칠한 키에 어딘가 선량한 얼굴을 한 사내였다. 라파엘은 입을 열지 않고 그를 경계했다. 사내는 고급 천으로 만든 값비싼 옷을 입고 있었는데 어디를 봐도 대귀족으로 보였다.

“저기.”

그가 다가오려고 해서 라파엘은 뒤로 물러섰다. 사내의 허리에는 총이 꽂혀 있었는데 그렇다는 건 그가 신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것이었고, 즉 그는 신에 가까운 피를 가진 가문의 일원이라는 자가 되었다. 총을 쏠 수 있는 건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신의 피―쿠치아노의 피를 이어받아 그 힘을 사용하는 북대륙 헤수스의 대귀족과 왕족뿐이었다.

상대는 권력자다.

라파엘의 시선이 흘끗 남자의 손을 향했다. 남자는 서류를 들고 있었다. 힐끗 고개를 돌려서 본 바로는 이그나치오궁에서 나오는 길임이 분명했다. 왕의 집무궁이자 왕권의 상징인 이그나치오궁에서 이런 새벽에 서류를 들고 나온다는 건 제대로 된 용건일 리가 없었다. 분명 삼엄한 경비망을 뚫고 잠입해서 가져오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은 라파엘이 알 바가 아니었다. 라파엘은 손을 들어 집게손가락을 자신의 입에 대어보았다.

“물론. 이쪽도 입을 열기엔 꽤 구리거든. 딱 봐도 알잖아.”

남자가 웃으면서 서류를 흔들었다. 감히 이그나치오궁에서 나오다 근위병에게 걸린 주제에 여유작작한 모습이었다. 라파엘은 그를 검으로 겨눈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어, 어. 통성명도 안 하는 건가? 난 말이지…….”

그때까지 집게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있던 라파엘은 그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그어 보였다. 입을 다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경고에 남자가 입을 다문다.

아무래도 찜찜하다. 이 남자를 그냥 죽여서 후환을 없애는 게 좋을까. 라파엘은 잠시 고민했지만 어차피 그의 존재는 알려져 있었다. 왕과 마주친 적이 있으므로 새삼스러울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왕궁에서는 하룻밤에도 오만가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니 살수 한두 명쯤 잠입해 있다고 해서 놀랄 일도 아닌 모양이다.

그리고 날이 곧 밝아올 것 같았다. 식사를 감시하러 왕이 온다고 했으니 속히 돌아가야 한다. 상대는 총을 가지고 있었고, 괜한 짓을 했다가 그 총에 맞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일단은 돌아가자.

라파엘은 남자를 마주 본 상태로 뒷걸음질 치다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걸 보고 선량한 외모의 남자는 입술을 올렸다. 어느새 선량한 외모는 사라지고 음산한 미소만이 입가에 감돌았다.

“저게 바로 그가 말한 검은 여우인가.”

제법 앙칼져 보이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며 경비병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품에서 물약 병을 꺼냈다. 그 병을 가볍게 흔든 다음 그는 오른손 검지와 중지를 붙이고는 병의 홈에 대고 가볍게 주문을 외웠다. 병속의 물약이 휘몰아쳤다. 사납게 마개를 치면서 으르렁거리는 액체를 확인한 그가 마개를 뺐다.

「피다…….」

어디선가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액체가 제 스스로 병에서 나온다. 허공으로 솟구친 액체는 약 병에서 나왔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많았다. 액체가 두리번거리듯이 좌우로 움직였다.

「피 냄새가 어디서 나는 거냐.」

「피다.」

「피가 어디에서 나를 부르는가.」

남자는 언제 써먹어도 참 시끄러운 물약이라고 생각하며 물약이 시체를 발견하길 기다렸다. 물약은 곧 시체에게로 향했고, 시체의 피가 허공으로 솟구쳐 사라지기 시작한다. 피가 다 사라지자 쩝쩝 소리를 내며 피부까지 사라지게 만든다. 아득아득 소리가 나며 뼈까지 사라지는 동안 남자는 멀뚱히 서서 아까 보았던 검은 복면인을 떠올리고 있었다.

“키가 작은 게 여자일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럼 딱 내 타입인데. 여우는 여우이되 암놈이냐 수놈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거창한 목소리로 말한 그가 씩 웃었다.

“전하! 늦으셨어요!”

발코니로 들어서자마자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라파엘을 탓했다. 라파엘은 옷을 벗으면서 욕실로 들어갔다. 탕에 몸을 가라앉히고 있는 사이 시녀들이 바쁘다며 라파엘의 목욕시중까지 들었다. 처음에는 목욕 중에도 검을 놓지 않는 라파엘에게 서운한 기색을 보이던 그녀들도 이제는 일상이 되어 그런가 보다 하고 있었다.

라파엘이 장미꽃잎을 가득 띄운 물에 몸을 담가 장미향을 배게 하는 동안 시녀들은 너무 바쁘다며 탕 가장자리에 앉아 라파엘의 머리를 먼저 감기고 말리면서 화장을 했다. 본래는 이렇게 안 하지만 이제 왕이 오기까지는 한 시간도 채 안 남은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라파엘이 옷을 입고 구두 위에 탑승을 마쳤을 때 시녀가 달려와 문을 활짝 열었다.

“전하께서 오신답니다!”

“비전하, 서두르세요!”

시녀장이 악 소리를 내며 그를 이끌었다. 라파엘은 당연히 예전처럼 문 플레이스 정문에서 대기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번엔 그곳이 아니라 마법의 다리 위였다. 아무리 마법으로 떠 있다지만 언제 떨어질지 몰라 두려워 라파엘은 이 다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못해서 겨울바람에 머리가 어는 듯했다. 바싹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을 때, 저 멀리서 왕이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오늘도 매혹적이었다. 어제보다 조금 더 그 얼굴이 육욕적으로 보여 라파엘은 당황했다. 처음 봤을 때 라파엘은 그에게서 태양을 떠올렸다. 어딘가 이미지가 비슷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태양 같았다. 왠지 그를 보고 있자니 몸이 더워지는 기분이 들어 라파엘은 더 당황하고 말았다.

왕이 다가와 팔을 내밀었다. 라파엘이 그 팔을 살며시 끼자 왕이 바싹 다가오도록 팔을 깊숙이 겹치게 했다. 그리고 둘은 문 플레이스 쪽으로 걸었다. 왕비와 왕의 꼬리가 각자의 뒤에 길게 늘어섰다.

“늦잠을 잤느냐?”

왕이 물어서 라파엘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몸이 따끈따끈한 게 씻은 지 얼마 안 되었구나. 넌 미인도 아닌데 늦게 일어나서야 쓰겠느냐?”

라파엘이 눈만 깜빡이자, 왕이 픽 웃었다.

“무슨 꿈을 꿨지? 문 플레이스에서 불편한 점은 없느냐?”

“없습니다, 전하.”

“문 플레이스가 아니라 다른 궁으로 가고 싶으냐? 옮겨줄까?”

왕의 시종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종종 변덕을 부리듯이 남자에게 잘해준 적은 있지만, 여자에게 이토록 사근사근한 왕은 처음 보는지라 그는 당혹스러워졌다. 게다가 언제는 말려 죽일 것처럼 문 플레이스에 가둬두려는 듯 굴더니 이제는 다른 궁으로 옮기겠다고? 무슨 꿈을 꿨냐고?

왕은 지금 왕비를 상대로 연애질이라도 할 셈인가? 고작 어제 입 좀 맞춘 게 다이지 않은가. 왕은 놀 만큼 놀아본 인물이다. 그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섹스부터 강압적인 강간까지 두루두루 거쳤고 그를 원하는 여자도 남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아마 그가 여자를 안을 수 있는 몸이 되는 즉시 사교계는 그의 하렘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요, 전하. 저는 이곳이 아주 좋습니다.”

왕비가 깜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시종장은 흘끗 왕비의 얼굴을 확인했다. 미인이긴 하지만, 평범한 미인이다. 사교계에서 회자되는 몇 명의 미인들―가장 선두에 마리 트리지아가 있는―에 비하면 인상적이지 않은 얼굴이다. 소녀처럼 청초한 미인 마리 트리지아나 독초처럼 화려하여 몇 명을 잡아먹은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을 떠올리면 그럭저럭한 얼굴이라는 게 시종장의 총평이었다. 왕은 그보다 더 눈이 높으니 왕의 눈에도 그렇게 놀랄 만한 미인은 아니리라. 그런데 왕은 하루가 다르게 이 왕비에게 넋을 빼고 있었다. 시종장은 왕비가 왕의 음식에 독을 탔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그래, 넌 여기가 어울린다. 여기서 얌전히 날 기다리도록 해.”

“예, 전하.”

둘이 온실에 마련된 식탁에 도착하자 왕비는 당연히 건너편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나 왕이 잡아끌어 자신의 옆에 앉혔다. 왕비가 깜짝 놀라 올려다보자 왕은 능글맞게 웃으면서 말했다.

“네 목소리가 개미만 하여 나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다. 옆에서 말하라.”

그렇게 말하면서 왕비의 어깨에 팔을 감은 왕이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왕비의 옆에서 왕비와 같이 어쩔 줄 몰라 하는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우둔한 계집들 같으니. 몸이 약한 것으로 아는데, 이 추운 겨울에 머리칼도 제대로 안 말려 내보내다니, 정말 하나씩 목이 떨어지고 싶으냐.”

왕의 목소리가 몹시 살벌해졌다. 시녀들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머리칼이 얼지 않았는가. 너희가 그렇게나 자랑스러워하던 마리 트리지아였으면 벌써 너희는 채찍질을 당했을 것이다. 주인이 천진하고 무르다 하여 이토록 모시는 데 소홀하다니. 이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쩔 거냐? 폐렴으로라도 발전하게 되면? 너희의 그 값싼 목숨이 왕비를 대신할 수 있다는 건가? 스스로의 목숨값이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다면 시장에 나가 돼지의 값을 알아보면 그게 너희의 아둔한 목숨값이다. 자신의 목숨을 괜한 시험에 드는 일이 없게 하라.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느냐?”

“예, 전하―!”

시녀들의 목소리에 기합이 실렸다. 왕이 혀를 차면서 안네마리를 안아 올렸다. 마법으로 떠 있는 다리도 싫어하는 라파엘로서는 왕이 자신을 들어 올리자마자 다시 왕에게 달라붙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육체를 맡긴다는 게 상당히 낯설고 두려운 기분이 들어 그는 이 행위가 별로 좋지 않았다.

“다시 안아봐도 무겁군. 넌 마른데다 낯빛도 창백하고 몸도 약한데 도대체 왜 이렇게 무거운 거냐? 몸에 쇠붙이라도 붙이고 다니느냐?”

라파엘은 뜨끔했다. 자신이 사용하는 쌍검은 쓸 수 없었지만 그의 허벅지에는 단검이 묶여 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일이었다. 라파엘이 내려달라고 하자 왕이 “가만있어라”라며 그를 내려주지 않았다.

“장미로군.”

왕이 고개를 숙여 라파엘의 목덜미 냄새를 맡았다.

안네마리가 그의 목을 어설프게 감았다. 왕은 그녀를 안은 채 그녀의 침실로 움직였다. 시종들의 당황이 그에게도 분명히 느껴졌다. 당황스러울 만하지. 그는 어떤 여자도 이렇게 가까이해본 적이 없으니까.

“머리를 제대로 말리고 다녀라. 널 소홀히 대하는 시녀가 있다면 말하고. 이런 건 내게 말하는 거다.”

“아무도 소홀히 대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순진해 빠지니까 시녀들이 기어오르는 거다. 감히 왕족의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이 추운 겨울에 내보내다니, 저것들이 미친 게 아니고서야. 너는 저들의 윗사람이다. 저들의 사정 따윈 볼 필요 없다.”

“전하, 정말로 소홀히 대한 게 아니라 제가 늦게 돌아와서…….”

라파엘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실수다. 라파엘의 얼굴이 어두워지자 왕이 고개를 숙여 라파엘의 이마에 자신의 입술을 대었다.

“어디를 다녀왔는데?”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할 판에 스스로 고백해버리다니. 라파엘은 당황한 채로 입을 열지 못했다. 가뜩이나 그는 오는 길에 웬 남자와 부딪쳤다. 모르는 자였지만, 나중에 화가 될지도 모른다. 역시 싹은 잘라버리는 게 옳았을까. 라파엘은 선량한 외모와 훤칠한 키를 가졌던 남자를 떠올렸다.

“안네마리, 어디를 다녀온 거냐?”

“산책을…….”

“산책? 아아, 알았다. 내 명을 어기고 문 플레이스를 벗어났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겁먹었느냐. 명을 풀어줄 테니, 너무 겁먹지 말거라. 네가 무슨 사슴도 토끼도 아니고 뭐 그런 일에 다 겁을 먹는 거냐. 아무 데나 마음대로 가려무나. 네 다리로 갈 수 있는 어디든 가도 좋으니 시선을 피하지 말고 나를 봐라.”

대체 전하가 왜 저러세요?

시종 1이 시종장에게 시선만으로 물었다.

혹시 뭐 잘못 드셨나요?

시종 2가 시종장의 음독설을 지지했다.

시종장은 눈을 한 번 부라려 시종들의 무례한 시선을 내리깔게 만든 다음 들리지 않는 한숨을 쉬었다. 왜 저렇게 달짝지근하게 구시는 건지 그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왕은 쇼어가에 상당한 경계심을 품고 있지 않았던가. 안네마리도 결국 쇼어 가문의 여자였다. 비로 책봉되어 왕족이 되었지만 혈육이란 질긴 것이다. 이 음험한 귀족 세계에서 혈육이라고 믿을 바 있겠냐마는 그래도 혈육이 남보다 나은 건 사실이었다. 왕비도 쇼어가의 이익에 따라 움직일 여자였고, 왕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왕은 왜 저렇게 혼이 빠진 걸까.

“……감사합니다.”

“왕궁을 돌아보지 못했던가. 그래서 그렇게 강아지처럼 이리저리 다니다 처신없이 머리도 못 말리게 된 거냐. 한심하기 이를 데 없구나. 왕궁 따위 크기만 컸지 다른 곳과 뭐 그리 다르다고 새벽부터 돌아다니느냔 말이다. 하지만, 뭐.”

왕은 잠시 헛기침을 했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별로 내키지 않지만, 궁을 안내해주겠다.”

“아, 아니. 괜찮습니다.”

별로 내키지 않는다는데 뭐 할 말이 있겠는가.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사실 그는 궁이 궁금하지도 않았다. 이미 왕궁의 건설도며 배치도를 숙지하고 있는 그였다. 아마 왕보다 더 자세하게 알지 않을까 하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그래?”

왕의 눈이 슥 움직였다. 싸늘한 푸른 눈이 아름답다고, 차가운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아름답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었다. 그때는 눈이 그토록 아름다웠는데, 지금은 입술에 자꾸 눈이 간다.

이런 새벽에 산책을 나갈 정도로 궁금해하면서도 괜찮다고 거절하는 안네마리가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던 왕은, 그녀의 시선을 받고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안네마리는 노골적으로 왕의 입술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꽤나 복잡하다. 남색가와 키스했던 것에 후회하는 걸까. 잠시 그런 생각을 하던 왕은 곧 그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안네마리의 눈은 너무나 깨끗했다. 그녀의 눈은 아름다운 보석을 보는 여인들의 것보다 더 깨끗한 갈망을 나타내고 있었다. 사교계 여자들이 환장하는 보석이 아니라 왕을 보면서 그녀는 몹시 아름다운 것을 찬탄하는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네가 유혹한 거야.”

왕은 그렇게 말하며 안네마리를 끌어당겼다. 안네마리의 턱을 잡고 왕은 가볍게 키스했다. 그렇게 끝내려고 했던 그는 안네마리가 눈을 감자 사납게 그녀의 입술을 잡아 물었다. 정말이지, 맛 좋은 입술이었다. 안네마리가 덜덜 떨었다. 무서운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왕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떨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가 남색가에게 받는 키스에 마음 상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녀의 어깨를 안아주었다. 가능한 한 달콤하게, 키스했다. 그녀의 혀에 탄식을 터뜨리면서도 그녀를 즐겁게 해주려 했다.

라파엘은 두 손을 주먹 쥐고서 참아내고 있었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이 키스는 심지에 불을 붙이듯 몸을 뜨겁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왕을 눕히고 싶은 그런 키스였다. 왕이 고개를 기울이며 키스해올수록, 그의 입술이 더욱 깊게 겹쳐질수록 라파엘의 몸은 뜨거워졌다. 그는 참으려 애를 쓰며 입술을 벌렸다. 왕의 혀가 닿을 때마다 왠지 미칠 것 같았다. 라파엘은 수십 번의 유혹을 뿌리쳤지만 결국 유혹에 져서, 왕을 잡아당겼다.

안네마리가 그를 잡아당겼다. 왕은 눈을 크게 떴다. 안네마리의 손이 거칠게 그를 당기고 있었지만, 그보다 놀란 것은 안네마리의 손이 뜨겁다는 것이었다. 장갑으로 가린 그녀의 손이 뜨거워 왕은 눈을 감았다. 안네마리가 덜덜 떨면서 왕의 입술을 혀로 핥았다. 독약의 맛을 보는 것처럼 신중하게 핥은 그녀의 혀가 그의 입술 안으로 들어왔다. 몇 번이나 탄성이 터졌다. 그녀의 키스는 어설펐다. 능란한 점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래서 더 왕은 흥분했다. 트뤼포아 후작과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나 육체적인 사이는 아니었다는 점이 그를 기쁘게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이야.

왕의 시종과 왕비의 시녀들은 의아한 눈으로 국왕 부처의 키스신을 목견했다. 그들의 키스신은 길고 열정적이었다. 왕의 시종들은 왕이 이런 키스를 할 수 있는 인물이라는 것에 일단 놀랐다. 물론 왕은 여러 명과 여러 번 키스했지만, 그러나 그 대부분은 음탕한 키스들이었다. 그가 이렇게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마치 첫사랑을 시작한 청년처럼, 이런 키스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는 지금 그러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여자였다. 아름답긴 한데 원하면 어떤 여자든 취할 수 있을 왕을 생각해보면 살짝 딸리는 감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굉장히 단아한 외모이긴 하지만 화려함은 부족했다. 그런데 왕이 그 여자를 상대로 몇 번이고 키스를 하고 있었다. 여자가 조금 혀라도 움직일라치면 왕은 탄성을 뱉으며 몸을 떨었다. 이건 뭐 마성의 여인에게 당하는 것도 아니고 (조금 과하게 말하자면) 촌스러운 시골뜨기나 다름없는 여자한테 백전노장인 왕이 당하고 있는 꼴이다. 그리고 왕은 남색가이지 않은가. 막말로 저 여자는 취할 수도 없다. 여기 있는 시종들은 다 왕의 오래된 시종들, 왕이 여자와 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어떤 굴욕을 겪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왕은 안네마리 왕비를 만나기 전까지 살짝 여성 혐오증 환자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런데 마치 날벼락이 떨어지듯이 이렇게나 왕비를 애지중지하고 있지 않은가. 역시 왕비가 독이라도 먹였나, 아니면 부적이라도 몸에 지녔나. 시종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왕비의 시녀들, 즉 라파엘의 시녀들은 라파엘을 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들의 진정한 주인은 라파엘이 아니라 마리 트리지아였다. 가엾게 죽은 주인을 위해서 그녀들은 적진으로 뛰어들었는데 이게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전개란 말인가. 사실 왕이 하고자 마음먹으면 라파엘이 반항할 수 있는 게 아닌지라 라파엘에게 항의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불쾌하기 그지없는 일이긴 했다.

왕의 손이 거침없이 왕비의 드레스를 들췄다. 손이 드레스를 들춰 다리를 만지는 순간 둘은 화들짝 놀라 서로 물러났다.

진짜 여자로군. 왕은 혀를 찼다. 흥분하던 몸이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여성 특유의 스타킹을 만지는 순간 몸에 찬물이 들이부어진 기분이 들었을 정도였다. 안네마리는 여자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눈이 아닌 성으로 인지하는 순간 발기가 수그러들 지경이다. 자신이 남색가임을, 안네마리를 가질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 왕은 씁쓸하게 웃었다.

라파엘은 크게 뜬 눈으로 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키스를 하게 된 자신도 믿을 수 없지만, 키스에 빠져서 왕이 드레스를 들추는데도 가만히 있었던 자신을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느끼지도 못했다. 왕의 혀가, 왕의 목에서 나는 그 낮은 탄성이, 왕의 우아한 손가락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이 일의 가장 무서운 적은 왕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왕을 멀리해야 해. 다음에는 옷이 벗겨져도 인지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조금만 더 올라왔으면 허벅지에 가죽으로 묶여 있을 검이 들통 날 뻔했다. 몸이 약한 왕비가 허벅지에 단검을 차고 있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렇게 들통이 나서 성별까지 들통이 나는 날엔…….

라파엘의 머릿속엔 ‘성고문’이 떠올랐다. 자신은 모든 고문의 프로였고 또한 모든 고문을 견딜 수 있다고 자부했지만, 그 성고문만은 제외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옷이 벗겨진 채 남자의 성기로 그 구멍을 찢긴다. 율레즈여. 라파엘은 그런 일만은 없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게다가 왕의 그것은 라파엘의 팔뚝만 하지 않았던가!

“안네마리, 나는.”

안네마리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 혼란스러운 눈을 보고 왕은 갑자기 심장이 아팠다. 누군가와 키스를 하다가 그의 옷 안으로 손을 넣고, 그리고 갑자기 물러선다면……, 상대는 수치심을 느낄 것이다. 안네마리도 그런 수치심을 느끼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왕은 뭐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달싹이다 다시 다물었다. 그때마다 안네마리의 시선이 더욱 짙어진다. 결국 왕은 안네마리의 손을 잡았다. 손을 잡는 순간 안네마리가 심하게 움찔거렸다. 어깨를 굳힌 안네마리의 손을 가져와, 왕은 장갑을 낀 손등에 입을 맞췄다.

“나는, 남색가야.”

왕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나는 여자를 안을 수 없어.”

왕의 말에 안네마리가 눈을 감았다.

“그대를 모욕 주고자 한 게 아니야. 단지 내가, 내가 신의 불량품일 뿐이다.”

그리고 왕은 안네마리의 손등에 한 번 더 키스하고 그녀의 손을 내려놓았다. 왕이 일어나도 안네마리는 일어나지 않았다. 안네마리가 키스받은 손등을 다른 손으로 감싼 채 손을 떨고 있었다. 새하얀 레이스가 안네마리의 흰 피부에 녹아 자국을 만들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눈을 감고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신이여.

왕은 안네마리를 보며 비스듬히 입술을 올렸다.

제게 남자만을 안을 수 있는 성벽을 주시려면, 이 여자도 남자로 태어나게 하셨어야죠.

다 부질없는 소망이다. 그런데도 지금 이 순간 왕은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은 자신을 배웅하지도 못하고 작은 새처럼 떨고 있는 안네마리를 내려다보다 그녀의 머리칼에 손을 대었다. 이미 그 머리칼은 말라 있었다.

“간다. 나오지 마라.”

왕이 등을 돌렸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왕의 등을 바라보았다. 왕의 고혹적인 목소리가 다정한 울림으로 말한다. 너를 모욕한 게 아니다. 내가 남색가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신의 불량품이라고, 세상 모든 것을 가졌을 저 남자가 속삭였다. 그가 왜 그러는지는 알지 못했다. 라파엘이 먼저 왕을 떠밀었고, 왕은 거기에 놀란 게 아니었나? 그는 왜 저렇게 말하는 걸까.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그가 자책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살인 기계의 굳은 혀는 이럴 때 뭐라 말하지 못한다. 언제나 말을 해야 하는 때에 하지 못한다. 라파엘은 그저 멀어지는 왕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슴이 지끈거렸다. 독을 먹었을 때처럼 가슴이 뜨겁게 지끈거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이제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루가 그렇게 말했었다. 그를 속이고 그의 집과 그의 동물들을 태운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취향이 독특하다 생각했었다. 사람을 속이고 사랑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여겼었다.

이 감정은 그 감정이다. 라파엘 자신은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그 감정.

처음 봤을 때부터 특별했었지. 어쩌면 처음부터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 라파엘은 희미해진 왕의 등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사람들이 흔하게 쉽게 말하던 그 감정은 사실은 너무나 무거운 것이었다. 심란하고 힘겨운 감정이었다.

그래도 마치 중독처럼…….

이 감정을 놓고 싶진 않았다.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완벽한 비극은 단절이 아닌 교차이다. 

단절은 그 순간 서로의 시간과 감정이 정지되지만, 교차는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잘난 체를 하고 싶다면 이 책을 봐라: 초급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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