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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낯선 얼굴의 친구 (6/47)

제5장 낯선 얼굴의 친구

식사를 하고 오라고 하자 안네마리는 눈을 크게 뜨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귀엽잖아. 왕은 그렇게 생각하고 픽 웃었다. 시간이 흐르니까 여자가 귀엽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구나. 나라는 놈은 참 비위도 좋아. 왕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어머니의 주도하에 여인들과 동침할 때마다 그는 정말이지 토할 것 같았다. 욕정이 전혀 일지 않는데 여자를 안으라는 건 죽을 맛이었다. 여자의 앞에서 서지 않는 것을 손으로 문지르며 그는 태어나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굴욕감을 맛보았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지 않으리라고 결심하고 또 결심하게 되었다. 아무리 예뻐도, 귀여워도, 사랑스러워도―그는 여자를 상대로는 되지 않았다. 그도 눈이 있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얼마나 아름다운 미소녀인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안 되는 걸 어쩌란 말인가.

기다릴 겁니다.

마리 트리지아는 그렇게 말했던가.

저는 전하를 기다릴 겁니다.

그런 말을 하며 마리 트리지아는 울었던가.

왕은 그런 말을 한 주제에 자살을 선택한 전 아내를 떠올리며 혀를 찼다. 안네마리가 아무리 귀여워 보여도 그는 여자와는 안 되는 몸이었다. 마리 트리지아처럼 자살을 선택하기 전에 안네마리를 사교계에 풀어놔야 했다. 이제 유부녀이니 유혹도 많이 받을 거고, 지금은 순진한 것 같은 그녀도 결국 남자를 알게 되리라. 자신을 안는 남자와 안을 수 없는 남자를 비교하게 될 테고, 왕비로 누릴 것은 누리면서 사교계에서 남자를 골라잡아 살게 되리라. 많은 사교계의 여자들이, 그리고 또 남자들이 그러하듯.

“씨발.”

왕이 천박한 욕설을 중얼거리자 마침 귀족들에게서 올라오던 상소를 읊고 있던 비서관이 움찔거렸다. 단상 위 옥좌에 앉은 왕의 왼쪽 뒤에 있던 총비서관의, 오른쪽에 있던 시종장의, 그리고 옥좌에서 바로 이어지는 카펫의 근처가 아니라 조금 먼 곳에 서 있던 주르륵 기립해 있던 비서관들의 시선이 덜컹 움직였다. 왕의 양쪽에 놓인 긴 탁자에 앉아 있는 문신과 무신들이 일제히 왕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뭐가 문제냐. 귀족이 돈이 없다고? 없겠지. 그따위로 펑펑 써대는데 돈이 있겠는가.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거냐. 나라에서 그네들의 유흥비를 내놓으라는 이야기냐. 나라에 버팀목이 되지는 못할망정 나라의 등골을 빼서 유흥비로 탕진하겠다는 거란 말이냐. 그딴 걸 상소랍시고 하는 개새끼는 도대체 어떤 가문의 개냐.”

최근 귀족들이 깝죽거리는 것을 넘겨온 왕이었는데 오늘따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이 순간 모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것은 6년 전의 즉위 축하연이었다. 모두를 놀라게 했던 그 귀신과도 같은 광경.

“빈센트 라 포 백작입니다.”

“개가 가문을 맡고 있으니 그 가문 꼴이 제대로 돌아가겠는가. 이 기회에 아주……… 잠깐. 포 백작이라고?”

왕이 다시 물었고 비서관이 “그렇사옵니다”라고 대답하자 혀를 찼다.

왕이 포 백작가를 건드리지 않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였다. 대체 왜 안 건드리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었다. 포 백작은 무능했고, 포 백작부인은 방탕했다. 포 백작부인이 왕에게 자신의 정부였던 라 프시스 남작을 갖다 바쳤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신빙성 있게 퍼졌지만 그것만으로는 언뜻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사실이었다.

“포 백작이라.”

왕이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끝장이 나는 건가 하고 사람들이 모두 긴장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까지 짖나 보지.”

왕은 그 말을 끝으로 계속 보고해보라는 듯 뒤를 향해 손을 까딱 움직였다. 역시나 이번에도 포 백작은 용서받았다. 도대체 왜일까. 왕이 남색가라 여자를 안지 못하고 따라서 후손을 보지 못한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사실 사교계에 남색을 하는 자가 왕만 있느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왕처럼 남자‘만’ 안을 수 있는 자는 없어도, 남자와 하는 걸 즐기는 자들도 꽤 많았다. 그들 중에서 왕의 정부로 꽤 승승장구했던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니 왕의 정부를 소개한―혹은 갖다 바친―포 백작부인의 노고가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도리어 왕은 사교계에서도 얼마든지 남자를 낚을 수 있었고 라 프시스 외에도 왕의 정부는 두엇 더 있었다. 알려진 게 두엇인데 왕이 과연 몇 명과 몸을 섞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걸 아는 건 왕의 건강을 책임지는―따라서 왕의 정부들의 성병이나 기타 등등을 확인하는―궁정의 한 명뿐일 것이다.

그런데 포 백작에게는 묘하게 관대한 왕이었다. 그렇다고 포 백작이 왕의 정부일 가능성이 있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의 부인조차 그와 자는 게 역겹다고 떠들 정도이니 왕이 포 백작에게 손을 뻗을 가능성은 없다. 게다가 왕은 무능한 자를 거의 증오했다. 사실 왕이 몰살한 3백 명의 대귀족은 무능한 축에 드는 인간들이었다. 다른 장점이 많은 자들도 안타깝게 졌지만, 어쨌거나 ‘유능하다’는 장점은 가지지 못한 자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사실 포 백작이 그 몰살 리스트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총비서관이 귀족들의 세금 납부 현황에 대해 읊고 있는 동안 왕은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눈을 내리깔았다.

“세금 납부를 못 하겠다는 귀족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라.”

“뭐라고 보낼까요?”

“목숨 값이라 생각하고 내라고.”

대전 안에는 싸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을 왕이 문득 피식 웃었다. 안네마리의 동그랗게 뜬 눈이 생각나서였다. 식사를 하라고 했더니 깜짝 놀랐었지.

“시종장.”

왕이 부르자 왕이 보지 않는데도 시종장은 허리를 숙였다.

“예, 전하.”

“문 플레이스에서 점심을 하겠다.”

귀족들의 시선이 어지럽게 오간다. 왕비는 얼굴마담에 불과할 것이다. 왕은 그 명망 높던 왕후도 얼굴마담으로 전락시킨 전적이 있다. 그가 왕비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는 건 불가능했다. 왕비가 남자가 되는 게 불가능하듯이. 그러나 지금 왕은 웃으면서 문 플레이스에서 식사를 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왕비에게 인간적인 어떤 호감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정치적인 계산인가.

귀족들이 시선을 교환하는 걸 보면서 왕은 피식 웃었다. 정치적인 계산이라고 생각하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았다. 왕비는 변하게 될 것이다. 사교계의 화려함과 음험함을 겪으며 지금은 차분하고 조용할 뿐인 여자가 곧 장미처럼 화려해져서는 독을 품게 되겠지. 그리고 시들어버릴 것이다.

본디 꽃이란 한순간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게 아니던가.

왕은 자신의 변덕을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점심 식사를 취소하진 않았다.

그리하여 토할 만큼 바쁜 와중에 왕이 문 플레이스로 점심까지 하러 오겠다고 하자 문 플레이스는 말 그대로 뒤집어졌다. 시녀들이 뛰어다니는 속도는 배로 빨라졌고, 라파엘은 아침과는 다른 치장을 해야 했다. 본래 왕가의 여인들은 아침과 점심과 저녁에 각각 다른 드레스를 입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라파엘은 어이가 없었지만 원래 그렇다는 데 할 말은 없었다.

여자들이란 놀라워.

하이힐은 거의 발가락으로 체중을 지탱하는 수준이고, 코르셋은 폐와 위와 갈비뼈를 모두 압박한다. 철사로 된 페티코트는 놀라울 정도로 불편하고 화장을 하고 나면 눈꺼풀이 무거운데다 답답하다. 그녀들은 이 짓을 매일매일 하는 것으로 모자라 하루에 서너 번도 더 바꾼다는 것이다. 귀부인이란 예쁜 옷을 입고 유유자적 노는 존재라고 생각했던 라파엘은 왕궁에 와서 많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녀들은 결코 놀고 있지 않았다. 그녀들이 ‘예쁜 귀부인’이 되기 위해서 하는 노력은 가히 백조의 물장구에 필적한다 할 수 있었다.

제럴드와 만나야 하는데.

라파엘은 구두에 올라탄 채―도저히 구두를 신었다고 할 수 있는 높이가 아니었다―제럴드 라 쇼어를 생각했다. 그를 만나려면 전갈을 보내어 약속을 잡아야 하는데 지금 시녀들이 몸이 열 개였으면 좋겠다고 울상을 지으면서도 발은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으니 전갈을 보낼 수가 없었다.

“전하께서 왜 갑자기 파티니 식사니 하시는 걸까요?”

시녀 하나가 익숙한 손짓으로 라파엘의 머리를 매만지며 물었다. 물론 라파엘에게 묻는 건 아니고 라파엘의 드레스와 구두를 손보고 있는 선배 시녀에게 묻는 것이었다.

“평범한 분이면 왕비님께 반했나 할 텐데.”

다른 시녀의 말에 머리를 만지는 시녀가 픽 웃었다.

“에이, 말도 안 돼요. 남색가로 유명하시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말하며 시녀가 라파엘의 화장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보이진 않는데.”

그런데 웬 관심이시지.

시녀의 목소리에서 불안감이 느껴졌다. 라파엘은 인형처럼 앉아서 왕을 떠올렸다. 빈정거릴 때조차 그 목소리가 마치 시를 읊는 듯 매끄럽고 매혹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얼굴은 그 모든 것들을 지울 만큼 고혹적이었다. 남자인 게 들킨 건가. 라파엘은 왕의 태도를 다시 한 번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남자라고 눈치챘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도리어 남자다운데다 오랜 검술로 인한 특징까지 지닌 손을 보고도―물론 손바닥을 보지 못해 검술을 수련했다는 특징까지 확인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겠지만―그는 비싼 손 아니니 드러내라고 말했다.

들키지 않았어.

복면을 하고 마주쳤을 때도 왕은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예 상상도 못 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별거 아니야. 라파엘은 자신의 마음속에 피어오르는 여러 가지 가정들을 부정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왕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그저 식사를 하러 올 뿐이었다. 아마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

라파엘이 “그래서 언제 온다는 거지?”라고 주어를 빼고 묻자 시녀들이 대답했다.

“곧입니다.”

“전하의 전용 요리사가 거의 요리를 마쳤다고 하니, 아마 한 시간 내일 것입니다.”

라파엘은 멀리 보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눈을 깜빡였다. 창백하고 건조한 얼굴의 자신은 우윳빛 얼굴의 아름다운 여자가 되어 있었다. 이제껏 아름답다 여겼던 많은 여인들이 정말 ‘아름다운 여인’이었을까, 그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전하가 이그나치오궁에서 출발하셨다는 전갈입니다!”

다른 시녀가 달려 들어와 소리치자마자 라파엘과 시녀들은 벌떡 일어섰다. 왕을 맞이하기 위해 궁의 입구에 나가 있어야 했다.

왕은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는 안네마리와 식사를 하러 오던 도중에 자신의 정부 바이런 라 프시스를 만났다. 딱 봐도 만나기 위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보이는데도 상대는 ‘대단한 우연’이라며 가증스러운 애교를 떨었다. 그러면서도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바이런을 보고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으니 웃음을 보진 못하고 소리만 들은 바이런은 왕이 그냥 웃었다고 생각했는지 그의 목에 팔을 두른 채로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오늘 맛있는 사슴 고기가 들어와서 뵈러 왔습니다. 아직 식전이시라 들었사온데…….”

그가 왕비에게 관심을 보인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달려온 것이 분명한데 아닌 척 굴고 있는 바이런을 그는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이 가증스러운 애교가 꽤 귀엽다며 봐주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실제로도 얼마 되지 않았다―지금은 짜증이 났다. 네가 뭔데 길을 막고 지랄이냐, 라고 성질대로 한 번 지르려던 왕은 멀리 보이는 문 플레이스를 보고 관두었다.

“하러 가는 길이다. 사슴 고기는 홀로 즐기려무나.”

왕이 그렇게 말하며 바이런의 허리를 안았다.

“아니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고 싶은 거냐?”

바이런이 화들짝 놀라 왕의 목에서 팔을 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왕은 기분이 좋아 보였지만, 바이런을 향해서는 불쾌감을 표하고 있었다. 왕은 남들이 보는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해댈 남자지만, 바이런은 여기서 엉덩이를 깐 채 왕을 받아들이고 싶진 않았다. 문 플레이스와 이그나치오궁 사이의 정원에서, 근위병들을 모두 앞에 두고, 노예들도 오가는 곳에서 줄줄 울면서 항문으로 왕을 받아들이는 건 바이런의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할 일이었다.

“저, 전하.”

“나는 네가 꽤 마음에 든다만.”

왕이 손을 들어 바이런의 뺨을 매만졌다. 그 손길은 몹시 부드러웠지만, 바이런은 덜덜 떨며 그 손길을 견디고 있었다. 왕의 손이 목에 도달하자 바이런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해서 네가 특별하다는 뜻은 아니다. 너는 총명한 자이니 무슨 말인지 알 거라 믿는다.”

그리고 왕이 손을 거두었다. 그가 문 플레이스로 향하자 그 뒤로 왕의 시종과 근위병이 말없이 따랐다. 그 긴 꼬리를 바이런은 노려보았다.

왕이 여자에게 보이는 관심은 초유의 것이었다. 안네마리 라 쇼어. 사촌 자매가 자살한 틈을 타고 뻔뻔스럽게도 그 자리를 차지한 계집에게 왜 왕이 관심을 보이는지 바이런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던 그 검은 눈동자. 비아냥거려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간 큰 계집의 얼굴을 떠올리고 바이런은 입술을 깨물었다.

‘네 여자친구와 네가 뭘 생각하든 내 알 바가 아니나.’

클레르 포 백작부인의 소개로 왕에게 처음 안겼을 때 바이런은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왕은 무자비할 정도로 거칠게 바이런을 범했다. 평민이었어도 옷맵시나 타인의 눈길에 대단히 신경 쓰는 바이런이 눈물과 콧물로 얼굴이 엉망이 될 정도였다. 왕에게 안긴 다음에는 일주일 가까이 침대에서 벗어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안기다 쓰러졌고, 그다음 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왕은 옷시중을 받고 있었다. 바이런이 한 번 눈을 깜빡인 것에 불과했는데도 왕은 그가 깨어난 것을 알아챈 것처럼 입을 열었었다.

‘몸 간수만 잘한다면 나머지는 상관하지 않겠다.’

몸만의 관계이니 몸만 깨끗하게 유지하라는 말이었다. 왕은 그렇게 말하고 방을 벗어났다. 그때는 명예고 나발이고 다신 왕의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왕은 선뜻 바이런에게 궁을 하나 내주었다. 물론 주인으로서가 아니라 객으로서 그 궁을 사용하라는 것이었지만 그 궁은 비어 있는 궁이었고, 바이런에게는 궁과 함께 시종들도 내려졌기 때문에 결국 그 궁을 자기 멋대로 사용할 수 있게 해준 것과 다름없었다.

왕과의 정사도 곧 익숙해졌다. 왕은 거칠고 매너도 없었지만, 바이런을 상처 입히진 않았다. 게다가 그 자신이 내킬 때는 테크닉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바이런은 여자하고도 가지 못한 천국을 보았다. 지금도 왕이 무서웠다. 왕은 냉혹한 자였고, 그가 마음만 먹으면 바이런은 몰락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왕을 볼 때면 몸이 근질거리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젠 왕이 난폭하든 달콤하든 왕에게 안기면 환희의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의 정부가 되어 누리는 특권들에도 중독되어 있었다.

‘왕비라고?’

어차피 얼굴마담이다. 그를 만족시킬 수조차 없는 여인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왕은 성욕이 강한 자였고, 그를 만족시킬 수 있는 건 사내뿐이었다.

‘어차피 내 적수는 못 돼.’

옛날엔 바이런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내를 경멸했다. 이런 식의 생각을 하는 놈이 세상에 있다니, 역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젠 생각이 바뀌어 그는 당연하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권은, 돈은, 타인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은, 이토록이나 달콤하고 대단한 것이라는 걸 예전의 그는 미처 알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러나.

‘빼앗기지 않아.’

다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일단 바이런 자신의 손에 들어왔었던 것이라면 빼앗길 생각이 없었다. 절대로.

바이런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왕은 마침 문 플레이스에 도착해 있었다. 겨울의 초입, 날씨는 쌀쌀하고 건조했다. 안네마리는 초록색 드레스에 흰여우털 숄을 두르고 있었다. 왕을 보자 안네마리를 비롯한 모든 이가 허리를 숙였다.

문득 왕은 몇 주 전에 놓친 은여우가 생각났다. 잡았다 하더라도 안네마리에게 주진 않았을 테지만, 지금 잡는다면 이 여자에게 줄지도 몰랐다.

“가자.”

왕이 그렇게 말하며 안네마리에게 팔짱을 끼라는 뜻으로 팔을 내밀었다. 그러자 늘 차분하기만 했던 안네마리가 몹시 곤혹스러운 얼굴로 왕의 얼굴과 팔뚝을 번갈아 보았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안네마리가 왕의 팔짱을 꼈다. 왕은 안네마리를 내려다보았다. 안네마리는 언제나와 비슷한 얼굴이었지만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것만은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아주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팔짱을 낀 안네마리를 보며 왕은 웃었다. 하지만 사실 웃고는 있어도 좋은 기분만은 아니었다.

이 여자가 오늘 사교계에 나간다.

남편의 팔짱도 잘 못 끼는 이 여자가 사교계에 나가 뭇 남자들의 눈에…….

온실에 마련된 식탁에 앉아서도 왕은 내내 안네마리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속성이군. 평민을 정부로 둔 왕은 안네마리의 어딘가 어설픈 식사 예절을 보며 또 웃었다. 안네마리가 건너편에서 살짝 왕의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안네마리의 목을 몇 겹으로 두르고 있는 진주 초커와 그 밑을 내려오는 쇄골을 보고 왕은 또 웃었다. 여자만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그는 진심으로 아쉬웠다. 사실 안네마리는 그의 취향과 정확히 맞지는 않았다. 그는 남자다운 자들을 범하는 편이었다. 뼈대가 얇아도 근육이 탄탄한 자들을 좋아했는데 안네마리는 가늘고 여리게 보였다. 그러나 안네마리의 성격은 상당히 좋았다. 그녀는 떠들지 않았고, 요구도 없었다. 하지만 왕을 똑바로 쳐다보곤 했다. 그 담담한 시선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오늘 연회에서.”

라파엘은 왕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그리고 그런 티를 내지 않으려고 무던히 애쓰면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왕은 그를 보며 웃기도 하고 그를 보며 노골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내 곁에서 떨어지지 마라.”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왕이 평소의 그 삐뚤어진 미소를 매력적인 입가에 걸쳤다.

“다른 데서 실수하지 말고 딱 붙어 있어. 무슨 뜻인 줄 알겠나?”

“예, 전하.”

“특히나 다른 놈들에게 눈길을 주지 마라. 괜한 입치레에 들떠서 방정을 떤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예, 전하.”

“그리고 옷은 좀 조신하게 입어라. 그게 뭐냐.”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쇄골을 살짝 드러내는 정도의 드레스였고 그나마도 두꺼운 진주 초커로 반이 가려 있었는데 조신하게? 색이 문제인가? 색이 문제라면 초록색의 드레스가 문제일까, 흰색 숄이 문제일까.

당황한 건 라파엘뿐이 아니었다. 라파엘의 뒤에서 식사 시중을 들던 시녀도 라파엘을 보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결국 시녀는 ‘역시 트집이구나!’라고 결론을 내리고 속으로 왕을 욕했다. 쪼잔한 새끼. 예쁘기만 하구만, 아니지, 넌 남자하고만 그 짓을 하느라 여자를 보는 감이 떨어졌구나! ……물론 속으로밖에 할 수 없는 욕이었다.

“시녀장.”

“예, 전하.”

“안네마리의 옷을 신경 써라.”

충분히 신경 썼는뎁쇼. 시녀장은 허리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목을 가려라.”

지금도 가려 있지 않은가. 시녀장이 흘낏 라파엘의 옷차림을 확인했다. 라파엘은 매일 약을 먹어 목젖을 누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시녀들은 가능한 한 라파엘에게 목을 가리는 차림을 시켰다. 목을 반드시 드러내야 할 때는 라파엘은 혹시 몰라 약을 한 번 더 먹을 정도였다. 목이 뜨거울 정도로 강한 약을 두 번이나 먹으라 해도 묵묵히 먹는 라파엘이었기에 가능한 짓이었다.

“장갑도 꼭 끼우고.”

언제는 비싼 손도 아니라며 드러내라 하지 않았던가!

“머리도 올리지 마라.”

비록 남자만 안는 왕이었지만 남자들의 취향을 꿰뚫고 있는 그가 여러 가지로 당부했다. 쇄골, 목 뒤쪽의 유연한 선, 긴 손가락 따위도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뭐 하는 짓일까.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스스로가 우스워졌다. 그는 이 여자를 결코 안을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여자를 다른 놈에게 주는 것도 싫은 것이다.

마치 한눈에 반하기라도 한 것처럼.

“안네마리.”

그가 부르자 안네마리가 고개를 든다. 그가 이런 간섭을 해도 안네마리는 그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왕은 그 눈이 정말이지 마음에 들었다. 따뜻하지는 않으나 왜곡도 없는 눈이었다.

“내 말 알아들었느냐? 너는 왕비다. 품위를 지켜라.”

“예, 전하.”

그 스스로도 과한 트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안네마리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라파엘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왕의 말을 듣다 보면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의 고혹적인 목소리만이 귀를 떠돌 뿐이다. 

“식사도 하고. 왜 안 먹는 거냐.”

당신을 보느라 음식이 넘어가질 않아. 그렇게는 말할 수 없는 노릇이라 라파엘은 애매하게 먹고 있다며 말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아까 팔짱을 끼라고 했을 때는 정말 놀랐었다. 팔이 닿는다고 생각하자 너무 긴장되어서 왕을 밀칠 것 같았다.

이상하다, 도대체 이 감정이 뭘까.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이 감정을 사람들은 뭐라고 하는 걸까.

제대로 식사도 하지 못하는 안네마리를 본 왕의 시선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비루먹은 노새는 싫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서 먹어라. 그리고, 너희들. 왜 풀 쪼가리나 가져오는 거냐? 제대로 고기 같은 걸 가져와라. 너희들은 눈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저 장작 같은 몸을 보고도 이런 풀 쪼가리를 낼 마음이 나더냐? 주인의 몸을 불쏘시개로 쓸 셈이냐? 당장 육류를 가져오지 못할까!”

왕이 라파엘을 윽박지르는 걸로 모자라 버럭 소리를 지르자 왕의 시종들이 허둥지둥 움직였다.

§  §  §

연회장에는 유독 사람이 붐볐다. 왕은 사람들의 심사를 알아채고 시니컬하게 말했다. “아주 날을 잡았군.” 그가 그렇게 말하자 시종장이 그의 소매 단추를 채우며 “트뤼포아 후작까지 온 모양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왕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다. 몸을 다쳐서 거동이 불가능하다는 트뤼포아 후작이 나타날 정도라니. 왕은 미남에 바람둥이로 이름이 높던 후작을 떠올리며 불쾌한 듯 미간을 좁혔다가 곧 고개를 저었다. 안네마리가 그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안네마리의 그 홀린 듯한 눈만은 그의 것이었다. 어떤 놈의 것도 아닌 그만의 것이었다.

그래, 트뤼포아고 나발이고 간에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그 검은 눈에 있는 건 나야.

왕은 그렇게 생각하며 트뤼포아 후작을 머릿속에서 내몰고 왕의 침전에서 왕후궁으로 이어지는 다리에 올라 안네마리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안네마리가 나타났다. 달빛을 받으며 안네마리가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연한 푸른색 드레스에 반묶음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는 청초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눈이 내린 듯한 피부에 붉은 피가 한 방울 떨어진 듯한 입술. 그녀가 걷다 말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연미복 차림의 그를 보더니 그녀가 입술을 조금 벌린 채 그의 모습에 넋을 잃는다.

왕은 아주 충동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머리채에 손가락을 꽂아 넣고 부드럽게 당겼다. 안네마리가 영문도 모른 채 그냥 딸려온다. 그 얼굴에 대고 왕은 가볍게 이마를 맞대었다.

거기까진 좋았으나, 다분히 충동적인 짓이라 왕은 당황했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알 수 없어서 그는 이마를 맞댄 채 나직하게 말했다.

“열은 없군.”

변명이 조잡하다는 걸 스스로도 느꼈지만 딱히 할 말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왕은 이마를 떼었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기분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처럼 왕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 여자한테 너무 관심을 두고 있다고, 이제 정말 그만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안네마리에게서 머리를 떼었을 때였다.

안네마리가 당황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뺨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밤이라 거의 보이지 않았으나, 주황색 등 때문에 그런 것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러나 왕은 알아볼 수 있었다. 안네마리의 뺨은 붉어져 있었다.

왕은 안네마리의 뺨이나 목 같은 데를 쓸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그녀는 여자였다. 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도, 아무리 귀여운 여자도, 심지어 그 짓의 프로인 여자조차 자신과는 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옷을 입었을 때는 저 여자라면 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몸을 보는 순간 식고 말았다. 조각상을 보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조각상을 상대로 욕정을 일으킬 수 있으면 여자를 상대로도 가능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 정도가 아니라면 여자를 상대로는 불가능하겠지.

왕이 팔을 내밀었다. 안네마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 팔에 자신의 팔을 끼는 게 좋을지 좋지 않을지 걱정하는 얼굴이다. 안네마리가 더 갈등하기 전에 왕은 안네마리의 팔을 잡아 자신의 팔에 꼈다.

둘은 왕후궁과 왕의 침전을 잇는 다리를 건너 왕의 침전으로 돌아왔다. 안네마리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 보는 궁에 대한 호기심인 듯했다. 왕비가 되었는데도 왕의 침전을 처음 보는 그녀에게 피식 웃으며 왕은 속삭였다.

“다음에 오게 될 거다.”

왕의 말에 안네마리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향긋한 체취가 왕의 코끝을 간질였다. 그가 경고한 대로 안네마리는 오후의 드레스보다 더 노출도가 적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그러나 쇄골 밑까지 드러내는 게 아닌 만큼 안네마리의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 외에는 걸려 있는 게 없었고 그녀의 하얀 목은 검은 머리칼에 대비되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왕이 자꾸 다가온다. 왕이 목을 숙일 때마다 왕의 체취가, 왕의 체온이, 왕의 숨결이 느껴져 라파엘은 굉장히 긴장하고 있었다. 왜 이 남자만 다가오면 이렇듯 긴장이 되고 숨이 막힐까. 남자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리고 그가 왕이라서? 그래, 그런 것일 게 분명하다. 고작 그런 이유일 것이다. 남들도 그의 앞에서는 이렇게 긴장을 하겠지.

왕의 팔은 단단했다. 그 팔에 자신의 팔을 걸고 걷자니 어지러웠다. 라파엘은 자신이 구름 위를 떠 가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맞아도, 피를 흘려도, 심지어 왕이 그에게 총을 겨눌 때에도 이런 느낌은 가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왕의 곁에서 걷고 있자니 자신이 자꾸 허공으로 뜨는 기분이 들어 곤란해졌다.

연회가 한창인 홀로 들어갔을 때 오케스트라가 음악을 멈추었다가 발랄한 행진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왕과 함께 그녀는 긴 카펫 위를 걸었다. 카펫의 끝에는 왕과 왕비의 자리로 보이는 자리가 놓여 있었다. 사람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서서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예를 갖춰 허리를 숙이고 무릎을 굽혔다.

문득 라파엘은 프시스 남작을 발견했다.

“전하.”

프시스 남작이 우아하게 인사하며 왕을 불렀다. 왕이 말을 건네지 않았는데 자신 쪽에서 말을 건 것이다. 그러나 그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정부였고 왕조차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듯했다.

“성대한 연회에 감사드립니다.”

감사를 왜 하지?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자 프시스가 활짝 웃었다.

“생애 가장 기쁜 생일이옵니다.”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예 대놓고 안네마리를 긁을 셈이다. 왕은 슬쩍 안네마리의 얼굴을 살폈다. 안네마리는 그의 팔짱을 끼고 걷는 동안 희미하게 붉은 얼굴로 따라왔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표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바이런이 안네마리에게 “왕비님께도 감사드립니다”라며 노골적으로 비웃자 안네마리가 언제나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프시스 경.”

바이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네마리는 축하한다고 할 뿐 별말이 없었다. 왕비로 맞은 뒤 안네마리에게는 책봉 뒤에 당연히 열어줘야 할 축하연도 열어주지 않고 사실상 궁에 감금을 했었다. 심지어 정부의 생일연에서 처음 사교계 데뷔를 하는 셈이 되었는데도 안네마리는 전혀 관심도 없어 보였다. 왕이 슬쩍 안네마리의 팔을 잡아 자신 쪽으로 끌자 안네마리가 눈을 크게 떴다. 다시 희미한 홍조가 떠오르는 것을 보고 왕은 환하게 웃었다.

왕이 웃는다. 환하고 남자다운 미소에 가슴이 설렌다. 대체 내 심장에 무슨 문제가 있나. 왜 이러지? 라파엘은 당황한 채로 왕에게 이끌려 홀 중간으로 나왔다.

왕이 춤을 출 채비를 마치자 오케스트라가 마주르카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저, 전하.”

안네마리가 다급히 그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전 춤을 못 춥니다.”

기본적인 왈츠를 배우는 게 고작이었다. 아직 마주르카를 배우지 못한 상태라 안네마리가 당황하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잡고 따라오면 된다.”

“발을 밟을 겁니다.”

“다른 놈의 발을 밟는 것보다 낫겠지. 한 번은 춰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상대해주겠다.”

왕이 그렇게 말하며 안네마리의 손을 잡은 채 천천히 스텝을 밟았다.

“저, 전하.”

안네마리가 당황해서 그를 올려다본다. 늘 그를 올려다보는 그 차분한 검은 눈이 좋았다. 하지만 당황스러워하며 그에게 몸을 맡기는, 아니, 도리어 몸을 붙인 채 자신의 곤혹을 털어놓는 안네마리는 더 마음에 들었다. 왕은 능숙하게 그녀를 리드해나갔다. 그녀가 어려워하는 곳은 허리를 잡고 아예 공중으로 띄운 채 움직였다. 그때마다 안네마리가 놀라면서도 안심하는 얼굴을 보고 그는 몇 번이나 웃음을 터뜨렸다.

‘전하가 웃으시네요?’

사람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둘이 뭘 저렇게 속닥여요?’

‘설마, 여자와 되시는 건가요?’

‘그럼 저 재수 없는 프시스는 끈 떨어지는 거네요. 어머, 재밌어라!’

사교계의 음험한 수군거림은 끝이 없었다.

‘여자와 되면 좋죠. 첫 발자국 찍는 게 어렵지, 두 번부터야 뭐―.’

‘그러고 보니 프시스 남작이 고시아를 달라고 청했다가 거절당한 이야기 들으셨어요? 꼴값이야. 지가 뭐라고 고시아를 달라고 해요? 지가 무슨 건국 공신이라도 되는 줄 알아요. 기껏해야 엉덩이 구멍 하나 가지고 남작 자리까지 먹은 주제에.’

바이런 라 프시스가 수군거림이 들려오는 쪽을 무시무시한 눈길로 홱 노려보자 갑자기 귀부인들이 딴청을 부린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부채를 펼치고 서로 속닥이는 모습을 보자 바이런은 짜증이 나서 돌아버릴 것 같았다.

그는 왕비를 노려보았다. 왕비가 아무리 그 자리에 있어도, 왕의 바로 곁에 있는 것은 바이런 자신이었다. 왕비가 여자인 이상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음악이 끝나자 왕과 왕비가 자리에 앉았다. 바이런은 서둘러 왕에게로 향했다. 왕을 유혹해서 안길 생각이었다. 왕도 자신의 몸을 안으면 생각이 달라지리라. 안을 수 없는 여자라는 것이 좀 더 확실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때 누군가가 바이런을 스쳐 지나가며 부딪쳤다.

“아, 실례.”

남자는 왕보다 키가 컸다. 그러나 왕보다 몸이 좋지는 않았기 때문에 조금 싱거워 보였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한쪽이 가린 얼굴이어도 다른 한쪽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미남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원래라면 타인을 압도할 만한 미모였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왕에게 안겼던 바이런은 그저 대단한 미남이라고 생각하며 넘길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도리어 이 남자보다 훨씬 아름답고 남자다운 왕에게로 가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가면을 쓴 남자가 왕과 왕비의 앞에 무릎을 꿇는 게 아닌가. 졸지에 선수를 빼앗긴 바이런이 이를 갈았을 때였다.

“오랜만입니다, 왕비님.”

상대가 그렇게 말했다.

라파엘은 당황해서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랜만이라니, 안네마리 라 쇼어를 아는 남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가 당혹감을 감추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상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얼굴은 그가 아는 얼굴이었다. 라파엘이 분명히 아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저토록 값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보석으로 장식된 가면을 쓰고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지뢰 때문에 불구가 된 남자였고, 라파엘이 일자리를 소개시켜주기까지 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은 ‘루’였다.

“루…….”

안네마리가 신음한다. 루? 왕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안네마리의 검은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그녀는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나 차분하던 시선은 온데간데없었다. 놀란 눈이다.

“트뤼포아, 내 비와 아는 사이냐?”

왕은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비’라고 안네마리를 지칭했다. 그러자 트뤼포아가 고개를 들었다. 안네마리와 트뤼포아의 시선이 얽힌다. 트뤼포아가 안네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천천히 미소 지었다.

“예, 유학하던 시절 만났던 사이지요.”

“유학이라? 안네마리, 어디서 유학을 했었지?”

안네마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트뤼포아를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놀라움으로 가득했던 시선이 고요히 가라앉고 있었다. 대답은 트뤼포아로부터 나왔다.

“서대륙에서 뵈었습니다. 이분이 저를 구해주셨지요. 다정하고 관대하신 분.”

“마치 사모라도 한다는 말투로군.”

왕의 말에 트뤼포아가 그제야 시선을 돌려 왕을 바라보았다.

“열렬히, 사모하고 있습니다. 저를 떠나서 왕비가 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만.”

트뤼포아와 사귀다가 그를 버리고 왕비가 되었다는 뜻이었지만, 그 말을 알아들은 건 왕뿐이었다. 라파엘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나야말로, 네가 여기에 올 줄은 몰랐는데.”

안네마리의 목소리가 급격히 차가워졌다. 그런 목소리를 처음 듣는 왕은 놀라면서도 한편 흐뭇해졌다. 별 사이가 아니거나 이미 끝난 사이인 게 분명하다. 대놓고 적대적이지 않은가.

“저런, 미리 언질을 주셨더라면 돌아오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내가 너에게 맡겼던 아이들은 어떻게 했지?”

“아아, 당신이 주웠던 그 동물들 말입니까? 태웠습니다.”

라파엘의 시선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당신이야, 라파엘. 루 라 트뤼포아는 그 시선을 도전적으로 받아냈다. 라파엘이 떠나지 않았더라면, 라파엘이 ‘영원히’ 떠나는 것처럼 말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 집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리라. 라파엘이 주워온 개와 고양이와 새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도 기쁘게 라파엘을 기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라파엘과 함께 같은 침대에 눕고 같이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 미래를 꿈꾸었으리라. 그것을 위해서 그는 사교계도, 귀족으로서의 안온한 생활도 모두 버릴 수 있었으리라. 그가 떠나지만 않았다면.

“왕비님, 다음 댄스를 신청해도 되겠습니까?”

라파엘은 눈앞의 남자를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이 알던 루가 맞았다. 충실하고 신의 있는 친구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친구라는 단어를 꼭 써야 한다면 이 남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는 라파엘이 전혀 모르는 자였다. 그리고 그의 동물들도 모두 태웠다고 한다. 태웠다고? 산 채로?

“댄스라.”

라파엘이 중얼거리자, 트뤼포아가 진한 미소를 지었다.

“아니면 가든 하우스로 가는 것도 괜찮겠지요.”

왕의 앞에서 왕비에게 대놓고 유혹을 뿌리고 있다. 그러나 라파엘은 가든 하우스가 무엇을 하는 곳인지 떠올리지 못했다. 좋아, 라파엘이 말하자 왕은 어이가 없어서 그 대화를 막지 못했다. 안네마리가, 자신과의 가벼운 접촉에도 홍조를 떠올리던 안네마리가, 그의 앞에서 다른 놈의 유혹에 응하고 있다. 사교계에 나오면 결국 남자를 알게 되리라는 생각에 씁쓸해 있었는데, 알고 보니 옛 남자가 대기하고 있는 판국이었다.

“가시죠.”

트뤼포아가 일어났다. 라파엘은 왕을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도 아주 기분이 좋은 것 같던 왕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유학에서 알던 친구와 잠시 이야기를 하겠다는데 뭐가 문제일까. 라파엘은 거의 표정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생각했기에 그의 불쾌감에 당황했다.

“10분 안으로 돌아와라.”

왕이 나직이 속삭였다. 그 목소리가 이를 가는 것과 비슷하게 들려 라파엘은 몹시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얌전하게 생겼는데 제법이네요?’

귀부인들이 쑥덕거리려는 조짐이 보였다. 왕이 방금 말을 꺼낸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녀가 화들짝 놀라서는 부채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왕은 그녀를 가리켰던 손가락으로 목을 그어 보이는 시늉을 했고, 그것만으로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오늘 생일을 맞은 바이런은 왕의 그런 행태에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왕비가 자리를 비운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는 왕에게 다가가 교태를 부렸다.

“전하, 기분 푸소서.”

바이런이 왕비의 자리에 앉아 왕에게 나긋하게 기대어 속삭였다.

“본디 결혼한 여인은 그것으로 의무를 다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이제 왕비도 자유롭게 살아야지요.”

“닥쳐!”

왕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바이런이 어깨를 움츠렸다. 왕은 트뤼포아와 나가는 안네마리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아마 그들이 남들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가서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더라면 그 시선은 조금 누그러졌을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현실과 그의 상상은 몹시 달랐으므로 그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둘이 자리를 옮기자마자 트뤼포아는 컥, 소리를 내며 무릎을 꺾었다. 라파엘이 트뤼포아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잡았기 때문이었다.

“내 집을 태웠다고?”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손에 힘을 주었다. 그의 검은 눈에 차가운 날이 서는 것을 보며 트뤼포아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말을 잘못하면 라파엘이 정말 자신의 목을 꺾어버릴지도 모른다.

“라파엘, 안 그러는 게 좋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과 내가 같이 나갔음을 압니다. 내가 죽으면 그 혐의는 당신에게 갈 겁니다.”

그러면 왕후가 죽은 이유를 알아내기 전에 개죽음을 당하겠죠.

트뤼포아가 얄밉게 말했고 라파엘은 손아귀에 더 힘을 주었다. 자신이 살려내서, 대소변을 다 받아가며, 돈을 써서 몸을 완치시키고, 일자리까지도 구해주었는데―알고 보니 그 남자는 귀족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집을 태우고 자신이 기른 동물들을 전부 태워 죽였다고 한다.

“검에는 검을.”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트뤼포아의 목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목이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서 트뤼포아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 순간 라파엘은 트뤼포아를 밀치고 말았고, 트뤼포아는 바닥에 쓰러졌다. 쿨럭거리는 그를 보며 라파엘이 하이힐로 그의 팔을 겨냥했다.

“이건 뭐냐.”

그가 아는 루는 분명 외팔이였는데.

“나무로 만든 가짜 팔입니다.”

그 순간 라파엘이 하이힐로 내리눌렀다. 진짜 팔이었다면 뼈가 으스러지고 구멍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팔은 으스러질지언정, 트뤼포아의 얼굴에는 고통의 기색이 없었다.

라파엘은 혀를 찼다. 이렇게 만나고 싶은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의 있는 친구로 영원히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배신감이 들었다. 그 배신감에 가짜 팔을 부숴버리려다 그는 문득 자조하고 말았다. 단순히 목숨을 구해주었고 그가 자신의 말에 따라주었으니 친구라고? 아니, 그건 일방적인 관계였을 뿐이다.

라파엘이 가든 하우스를 나가려 하자 트뤼포아가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당신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으니, 당신을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관계를 끊은 건 너 같은데.”

트뤼포아의 형형한 눈빛을 받으며 라파엘이 말했다.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 단어가 그의 인생에 허락된다면 눈앞의 이 남자가 유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라파엘이 트뤼포아를 버려두고 미련 없이 돌아섰다. 그 뒤에서 트뤼포아는 두 번째 고백이 물 먹은 걸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왜 못 알아채는 거야, 라고 생각했지만 라파엘을 쫓아갈 수는 없었다. 라파엘에게 밀쳐지면서 머리를 부딪쳤기 때문이었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멈춰 선 사이 라파엘은 다시 이그나치오궁으로 들어가버렸다.

라파엘이 들어갔을 때는 왕과 프시스 남작이 질척한 키스를 하고 있을 때였다. 프시스 남작은 왕의 옆자리, 즉 라파엘의 자리였던 자리에 앉아 있었고 라파엘은 거기서 벗어나야 할지 아니면 그 키스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벗어난다고 해도 어디로 가야 할지 잘 모르겠고, 더욱이 왕이 10분 내에 돌아오라고 한 만큼 라파엘은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것을 선택했다. 왕이 라파엘을 흘끗 보더니 보란 듯이 프시스 남작과 키스를 질척하게 이어갔다. 혀와 타액이 오가고 몇 번이나 각도가 달라지는 모습을 보면서 라파엘은 눈을 껌뻑였다.

잘은 모르지만……, 왕은 키스를 잘하는 게 아닐까.

그에게서 키스를 받고 있는 프시스 남작은 눈을 완전히 감은 채 열정적으로 키스에 응하고 있었다. 도리어 왕은 키스를 하면서 라파엘을 흘끗거렸다. 처음에는 잠깐 보고 다시 눈을 감았던 왕의 눈이 가면 갈수록 라파엘을 응시했다. 너무 뜨거운 불꽃은 파랗게 타오른다고 했던가. 왕의 푸른 눈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시선에 사로잡혀, 라파엘은 고개를 돌리지조차 못하고 말았다.

누군가가 뭐라고 떠드는 것 같다. 결국 왕비가 지는군요, 라는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리는 것 같은데 머리가 몽롱해서 제대로 모르겠다. 눈에 보이는 건 왕의 시선뿐이다. 그리고 라파엘과 시선을 얽으면 얽을수록 거칠어지는 키스뿐이다. 마치 자신이 왕과 키스를 하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럽다.

왕이 프시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라파엘을 향해 손짓했다. 라파엘은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휘청휘청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미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더 이상한 건, 이 상태가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이다.

왕이 라파엘의 목걸이를 붙잡아 자신의 앞으로 잡아당겼다. 라파엘이 왕의 앞으로 넘어졌을 때 마침 목걸이가 끊어졌다. 진주알이 알알이 흩어져 내렸다. 라파엘의 검은 머리칼과 왕의 금발이 섞였다.

“왕비의 의무다.”

왕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밤시중을 들어라.”

안네마리가 눈을 깜빡인다.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잘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냉소하며 안네마리를 밀었고, 그녀가 뒤로 한두 걸음 휘청거렸다. 왕이 일어나자마자 바이런이 따라 일어섰다. 왕비의 ‘밤시중’이 뭔지 안네마리보다 더 잘 알 남자는 음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왕은 그 얼굴을 보면서도 딱히 욕정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더욱 짜증스러웠다. 그의 것을 내부에 품을 수 있는 눈앞의 남자보다, 그가 억지로 외면하고 있는―그의 것을 품지도 못할―여자가 더 신경 쓰인다.

왕이 냉랭히 연회장을 빠져나가자 그 뒤에 바짝 바이런이 붙었다. 그리고 라파엘도 잠시 눈치를 보다가 시종장의 시선을 받고 바이런의 옆에 서서 나란히 왕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문득 옆을 보자 바이런이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그의 새빨간 혀를 보면서 라파엘은 왕이 핥아서 혀가 저렇게 빨갛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도 왕이 핥게 된다면 혀가 저렇게 빨갛게 될지도 모르겠다.

왕의 방에 들어가자마자 왕이 바이런의 팔을 잡아 침대로 내팽개쳤다. 어, 어라. 정사를 벌일 생각이 아닌 건가. 라파엘이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자 시종장이 속삭였다. “일단 전하께서 행위에 집중하시면, 그때는 바닥을 보셔도 됩니다.” 그렇다는 건 가능한 한 왕의 정사를 지켜봐야 한다는 게 아닌가.

남색가인 왕에게 그의 아내가 드는 밤시중이라는 게 이런 건가.

라파엘은 당황했지만, 똑바로 쳐다보았다. 뭐든 보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도리어 왕이 아까 키스를 한 것처럼 퇴폐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목이 너무 말라 목구멍이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왕을 보고 있으면 계속 갈증을 느끼게 되는데 도대체 왜일까. 지금도 왕을 보고 있자니 자꾸 목이 말랐다. 그렇다고 이 분위기에 물을 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라파엘은 가만히 침대 위를 바라보았다.

안네마리는 평소보다 조금 열에 들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왕은 짜증이 났다. 씨발, 뭐 좋은 거라고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야. 감히 자신을 물 먹였다는 생각에 정부를 끌고 왔고, 눈앞에서 안아서 모욕을 줄 셈이었는데 그녀가 바라보자 왕은 갑자기 내키지가 않아졌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는 원래 변덕이 심한 편이었지만 이번만은 도가 지나쳤다고 생각했다. 바이런도, 안네마리도 쫓아내고 머리를 좀 식혀야겠다고 생각하며 그가 바이런을 놓아주었을 때였다.

안네마리의 혀가 입술 사이로 살며시 나왔다. 루주를 바른 입술 위를 스친 혀가 들어가고, 안네마리가 꿀꺽 침을 삼켰다. 언제나 차분하기만 한 눈이 완전히 들떠 있었다. 그 순간, 왕은 바이런의 팔을 낚아채고 있었다. 정욕이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누구 때문에 치솟은 정욕인지, 지금 누구에게 이런 기분이 드는 건지, 그가 왜 이렇게 저 작고 마르고 별 볼일 없는 여자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지.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아읏!”

바이런이 그의 밑에서 바르작거렸다. 왕은 바이런을 찍어 누른 채 그의 옷을 찢고 그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풀어주는 것 따윈 없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읏, 전하, 아응, 흣, 조금, 조금만 천천히―.”

도대체 네가 뭔데.

“전하, 앙, 아응, 조, 조금만 천, 헉――――아응 좋아아―.”

바이런의 교태 섞인 신음을 듣자 몸이 식을 것 같았다. 그럴 때마다 왕은 안네마리를 바라보았다. 그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안네마리를 보고, 또 보았다. 내가 왜 너 같은 것에 이렇게 휘둘려야 하는 거야. 그는 바이런을 찍어 누르면서 생각했다. 요즘 그는 정상이 아니었다. 저 여자가 왕비로 들어앉은 순간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 여자에게 휘둘리고, 저 여자에게 신경 쓰고.

도대체 네가 뭐라고!

“전하아――흣, 흐윽―.”

“읏…….”

바이런이 뒤에 힘을 줘 쥐어 짜는 느낌에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마리 트리지아 생전에도 종종 하던 짓이었다. 태후가 왕후와도 제발 동침하라고 울며 애원해서 그는 말 그대로 동침했다. 왕후는 가만히 대기하고 서서 그의 정사를 지켜봐야 했다. 그때마다 마리 트리지아는 고개를 돌린 채 그를 외면하며 덜덜 떨었다. 모욕감에 부들부들 떠는 그녀가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태후의 애원을 뿌리치기에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태후가 울며 애원하면 그런 식의 ‘동침’을 하고, 그럼 마리 트리지아가 태후에게 가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정을 하고, 그럼 태후가 입을 다무는, 이 사이클이 몇 번이나 계속되었었다.

이제 더는 이럴 필요도 없는데, 저 여자에게 자신이 모르는 사내놈이 있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이토록 화가 치솟다니. 더 짜증스러운 건 그녀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정욕이 들끓는다는 사실이었다. 부인할 수 없게도 이 섹스는 씁쓸하면서도 환장하게 좋았다.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는 가버릴 것 같았다.

씨발, 끝내.

왕은 뒤에서 범하던 바이런을 일으켰다. 그를 어린애 용변 누이듯 안아 올렸다. 저 여자의 들뜬 눈도, 차분한 시선도 다 필요 없었다. 그런 것들이 없으면 자신은 다시 아무것에도 휘둘리지 않는 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저 여자가 다시는 그를 바라보지 않도록, 바라보는 게 지긋지긋하도록 끝장내기로 마음먹었다.

라파엘은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은 정사라고 생각했다. 라파엘은 정사라는 게 어떻게 하는 건지 정확히 몰랐으나, 대충 저런 체위로 몸을 문대는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왕이 라파엘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사납게 욕설을 뱉더니 프시스 남작을 끌어당겼다. 그를 어린애 용변 누이듯 안아 올리자 왕의 성기도, 프시스 남작의 개폐를 반복하는 항문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설마― 하고 생각한 순간 왕이 남작의 그 작은 구멍에 자신의 것을 쑤셔 박았다.

그건…….

그건 마치…….

그래, 저런 고문을 들은 적이 있다. 항문에 불쏘시개를 쑤셔 박아 벌려 찢어 죽인다는 이야기. 사실 라파엘은 그게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 자신도 고문을 자행해본 적이 있었고, 고문을 받아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간에 그런 고문은 나온 적이 없었다. 산 채로 살점을 뜨인 적도 있었지만 이건 그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 이건 정사가 아니었나? 라파엘이 다시 바라보자 왕은 이를 갈면서 바이런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말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 뭘 말해?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자 바이런이 고개를 저었다. 왕의 성기가 바이런의 작은 항문을 들락거리고 있다. 검붉은데다 미끈미끈한 것이 믿을 수 없는 곳에, 믿을 수 없는 길이까지 들어간다. 라파엘은 더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고 말았다. 뭐야, 저게.

“말해, 바이런.”

“저, 전하―.”

바이런의 앓는 목소리에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바이런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라파엘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도 잠입과 암살을 하는 입장에서 정사를 벌이는 이들을 여러 번 구경했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본 적은 없었다. 이건, 이건 분명히―――.

이게 말로만 듣던 그――――성고문인가.

“말해, 바이런. 모두가 듣게 소리치란 말이다!”

왕이 윽박지르자 바이런이 다시 앓는 소리를 내며 거절하는 게 보였다. 둘은 연인 사이가 아니었나. 이건 정말 그, 말로만 듣던, 항문을 찢어 죽인다는 그 성고문인가? 문득 라파엘의 머릿속에 제럴드와 왕이 떠올랐다. 그들은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싫어하는 기색이 너무나 완연했다. 왕은 제럴드 라 쇼어에게도 저런 짓을 할 생각이었단 말인가.

제럴드가 그렇게 싫어할 만했다. 세상에, 저런 짓을 하는 건가? 라파엘은 다시 고개를 돌려 접합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왕이 마치 그에게 보라는 듯이 바이런을 들다시피 해서 그 결합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었다. 아기 팔뚝만 한 것이 바이런의 항문으로 들어간다. 뭔가 찌익찌익 하는 소리가 날 것만 같다. 바이런의 항문에는 주름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항문이 조금 솟아 있었다. 저게 이 고문의 후유증인 듯했다.

라파엘은 더 보지 못하고 눈을 내리깔았다. 이게 뭘까? 왕은 그에게 뭔가를 경고하는 것일까? 왕의 연인으로 알려져 있는 자들은 알고 보면 왕과 정적이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것일까.

퍼억, 퍼억 소리가 환청처럼 귀를 울렸다. 말해! 바이런에게 하는 소리가 자신을 압박하는 것처럼 들렸다. 라파엘은 입술을 깨물며 바닥만을 노려보았다. 저런 고문을 해주겠다는 건가? 그는 모든 고문을 다 당해보았지만 저런 고문은 당해본 적이 없었다.

‘아, 안 돼.’

차라리 산 채로 살을 조금씩 회 뜨던 그 고문이 낫지, 저게 뭐란 말인가.

“저, 전하.”

바이런의 음색이 비통하기 이를 데 없다.

“좋아요…….”

좋기는! 라파엘은 그쪽을 보지도 못한 채 어깨만 떨었다. 좋기는 뭐가 좋아. 당신 떨고 있어, 떨고 있다고! 라파엘은 바이런이 어떤 통렬한 심정으로 저런 말을 하고 있을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좋아?”

“네, 히익!”

바이런이 히익, 소리를 낼 때마다 안네마리의 어깨가 심하게 떨린다. 처녀였나, 아니면 항문 섹스를 처음 보는 건가. 왕은 바이런의 내부를 거칠게 쑤시면서 안네마리를 노려보았다. 그가 예상한 대로 안네마리는 더 이상 그와 시선을 마주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다.

그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러울까.

바이런이 그를 조인다. 오랜만의 거친 정사에 흥분한 듯, 최근 꽤 느슨했던 구멍이 바짝 그를 조이고 있었다. 바이런은 안네마리를 상대로 라이벌 의식이 있었던 듯하니 그녀의 앞에서 하는 정사가 더욱 짜릿했는지도 모른다.

“하윽, 앙, 아앙, 전하, 히익― 흐아앙―.”

바이런은 제대로 흥분하고 있었다. 바이런의 성기가 덜렁거린다. 바이런이 스스로를 위로하며 엉덩이를 계속 조였다. 어느 순간 바이런이 정액을 쏘아 올렸다. 멀리 있어 닿지 않았으나 정액을 배출한 방향은 안네마리가 있는 그쪽이었다.

또 기분이 더러워진다.

“응, 조금만 천천―하윽, 아앙―.”

“누가 혼자 가라고 했나?!”

왕은 소리 질렀다. 이쯤 되면 자포자기였다. 안네마리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으나 그녀는 가지지 못할 여자였다. 그렇다면 그 시선을 없애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그 시선이 사라지자 짜증만이 들끓었다. 그 짜증이 성욕으로 화하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안네마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왕은 계속 바이런의 내부를 쳐올렸다.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안네마리. 그녀의 흰 목덜미. 맞잡은 두 손.

마리 트리지아를 저기 세웠을 때는 어땠지? 그는 그녀가 어떤지 바라보지도 않았다. 자신의 정사를 느긋하게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도대체 이게 무슨 꼴인가. 안네마리는 바라보고 있지도 않다. 이제 다신 그녀가 그를 향해 홀린 듯한 시선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다.

그 시선을 잃었다는 게 이렇게 화가 날 수가.

“전하아아―.”

바이런이 흥분하여 다시 성기를 세우고 있다. 또다시 안네마리의 방향으로 정액을 사출할까 봐 왕은 바이런의 방향을 살짝 틀었다. 성기를 꽂은 채 바이런을 돌리자 바이런이 “흐아앙―” 소리를 내며 자지러졌다. 천박한 교성이다. 왕은 바이런을 돌린 상태로 허리를 움직였다. 짐승처럼 움직이고 움직여서 바이런의 안쪽에 사정했을 때는 정신적으로 꽤 지쳐버렸다.

“흐읏!”

신음을 내며 사정했을 때 반쯤 감은 눈으로도 안네마리가 보였다. 안네마리는 바닥을 보며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은 그녀를 보자 씁쓸해졌다. 그녀는 어쩌면 그를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이 닿는 것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고 열에 들뜬 눈으로 그를 바라볼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 더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그를 알아버렸다. 남자를 안는 그를 알았고, 그녀를 안지 못하는 그에 대해 익히 들었을 것이고, 그가 남자를 어떻게 안는지도 알았으니 모든 낭만적인 것들은 다 사라지고 지긋지긋한 혐오만이 남게 되리라.

빌어먹을.

왕은 눈을 감았다.

안네마리 라 쇼어는 솔직히 미인은 아니었다. 그녀의 사촌누이이자 자살한 왕후 마리 트리지아를 떠올리면 더욱 그녀는 미인이 될 수 없었다. 남자의 품에 쏙 들어올 자그마한 체구 외에는 목석같이 무표정한 얼굴에 음침한 검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었다.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인들 틈에서 안네마리 왕비는 때때로 그 존재가 완전히 가려져 찾을 수조차 없었다. 그녀는 남자처럼 쉰 목소리와 큰 손발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창피하게 여겨 장갑과 구두만은 반드시 시녀들이 직접 만들었다고 한다. 

수많은 제도를 정비하여 현대 행정 체계의 기초를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그나치오 23세는 대단한 미남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태양신처럼 아름다운 남자였고, 때때로 남자들조차 그를 흠모하여 열정적인 사랑에 몸부림쳤다고 한다. 그런 그가 왜 안네마리 제1왕비를 총애하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이그나치오 자신이 대단한 달변가였던 만큼 조용한 여인을 원했던 것일 수도 있고, 안네마리 왕비가 워낙에 몸이 약해 자주 쓰러지는 탓에 동정심이 사랑으로 변했다는 설도 있다.

여하간 이그나치오 23세는 마치 선조인 이그나치오 1세가 사라 왕후를 사랑하듯이 그렇게 안네마리 왕비를 사랑했다. 그는 그녀에게 많은 선물을 갖다 바쳤는데 뭇사람들은 그걸 가리켜 까마귀에게 다이아몬드를 갖다 바치는 꼴이라고 비웃었다.

그리하여 안네마리 왕비의 별명은 ‘까마귀 왕비’가 되었다. 본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정숙하고 순종적인 고전적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사로잡은 여인들: 까마귀 왕비 안네마리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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