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티파티의 첫손님
다음 날, 라파엘은 왕명대로 티파티를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준비는 시녀들이 했으며 라파엘은 그 시간에 티파티 자리에 그저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밤을 새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특별히 졸리지도 않았다.
햇빛이 환히 비쳐드는 섬세하게 아름다운 정원에서 라파엘은 멍하니 앉아 일곱 명분의 차와 쿠키와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티파티, 차라리 시녀들이라도 앉혀서 즐기라고 하고 싶었지만 왕이 바라는 것은 그런 게 아닐 테니 라파엘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지나가는 누군가가 왕에게 보고라도 하면 곤란하다. 빈자리가 있는 티파티 자리에 멍하니 앉아 있는 것 외에는 왕의 귀에 들어가면 안 되었다.
후크와 재스민.
어젯밤 둘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정원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그 정원에서 뭘 했을까. 거기도 분명 중앙 정원인데, 그중 한 가든 하우스에 갔을까? 가서, 도대체, 뭘 했을까?
“소피아.”
라파엘이 부르자 시녀장이 라파엘의 어깨에 모포를 덮어주며 “예, 전하”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이그나치오궁 앞쪽의 정원은 내가 갈 수 없는 곳이던가?”
“……네, 왕명에 따르면 그렇사옵니다.”
그럼 밤에 가는 수밖에.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일이 없었다. 아니, 할 일은 많은데 낮에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려니 아쉬울 따름이었다. 라파엘이 차를 홀짝이며 한 시간 정도 지나 방 안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길 바라고 있을 때 누군가가 다가왔다.
남자는 꽤 핸섬했다. 창백한 피부에 마른 몸이었지만 키는 꽤 컸다. 상체보다는 하체에 좀 더 살이 있는 편이었는데 옷으로 맵시 좋게 엉덩이와 허벅지를 가리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왕비 전하.”
라파엘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시녀들의 기가 단숨에 차가워진 것을 깨달았다. 시녀들이 싫어할 만한 남자가 왕 말고 또 있었단 말인가. 라파엘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인사도 안 해주시는 겁니까?”
“누군지 몰라서.”
라파엘은 왕비니 존대를 할 상대는 세상에 왕이나 왕의 혈육밖에 없었다. 그러나 남자가 누군지 확신할 수는 없어 말끝을 지워버렸다.
남자가 활짝 웃었다.
“프시스 남작이라고 합니다.”
남작이면 왕족은 확실히 아니다.
“그렇군.”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작은 라파엘과 앞에 놓인 긴 야외 테이블을 보고 피식 웃었다. 웃거나 말거나 라파엘은 관심도 두지 않았건만 그는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이거, 실례”라고 중얼거렸다. 뭐가 실례라는 건지 몰라 라파엘이 고개를 들자 그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귀부인들이 정말 너무나 아름답군요. 꽃이 만발한 티파티입니다. 왕비 전하를 비롯, 이토록 아름다운 분들이 다 같이 모여 차와 말씀을 나누시다니 지나가는 남자로서 찬탄하지 않을 수 없었나이다.”
라파엘의 시녀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귀부인은 고사하고 아무도 없는데 대놓고 귀부인들이 아름답다느니 하고 있다. 꽃이 만발하다는 건 테이블에 꽃밖에 없다는 뜻이었고, 게다가.
‘왕비 전하를 비롯, 아름다운 분들이 다 같이 모여’라는 부분은 왕비가 유령과 티파티를 하고 있는데 왕비조차 유령이라는 뜻의 고난도 이죽거림이었다. 이를 빠득 가는 소리가 라파엘의 귀까지 들려왔다.
그러나 그 이죽거림은 너무 고난도라 라파엘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테이블을 한 번 보고 남자를 한 번 더 올려다보았다. 미친놈인 건가, 아니면 이게 궁중의 예의범절인가. 라파엘이 고민하는 사이 남작은 말을 이었다.
“특히나 왕비님께서 어찌나 아름다우신지요! 왕비님의 격에 맞는 천 따위는 아무것도 없을 겁니다. 아무리 비싼 천이라 할지라도 왕비님의 미모를 가릴 뿐인데 비싼 천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값싼 천을 걸치시어 값싼 천에게 귀함을 베푸는 인덕이야말로 왕비님의 진정한 자비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새끼 양가죽의 구두를 신지 않는 자비도 베푸셨군요! 양이 가엾지요. 게다가 어린 것의 가죽을 신기엔 왕비님의 기품이 용서치 않으신 게 분명하군요. 인자하신 왕비님, 송치 구두보다는 인자한 왕비님께 어울리는 건 질긴 말가죽이나, 아, 차라리 군화가 어떨지요?”
혼자 말하고 혼자 즐거운 듯이 으하하 웃는 남자를 보며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웃긴 건지, 뭐라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천에게 귀함을 베풀어? 양가죽 구두를 안 신는 게 자비야? 인자하니 군화를 신으라고? 이게 무슨 말이야? 라파엘이 흘끗 시녀장을 바라보자 그녀는 분노가 극에 다다른 듯 남자를 무시무시한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안 좋은 말인가? 라파엘은 찻잔을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안 좋은 말인가 싶지만 욕이 나온 것도 아니니 뭐라 말하기가 그랬다. 그리고 사실 어디가 안 좋은 말인지 전혀 모르겠다.
“왕비님, 답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미친 듯이 웃어놓고선 갑자기 답을 달라고 한다. 라파엘은 떨떠름히 대답했다.
“군화는 별로라.”
“그럼 말가죽 구두는 괜찮으시겠군요? 물론 여성용은 없고 남자 하인용밖에 없지만 그래도 괜찮으시겠지요? 워낙 고귀하신 분이니 말입니다. 바다에서조차 살아남으신 연약한 분 아니십니까? 워낙 소탈하신 분이라 예산도 별로 없으실 테니 사치가 워낙 심하여 전하께서 예산을 주실 수밖에 없었던 제가 하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영 모르겠어서 라파엘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뭘 어쩌라는 걸까.
“왕비 전하?”
“전하!”
갑자기 시녀장이 달려왔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시녀장이 그렇게 말하면서 라파엘의 몸을 부둥켜안았다. 뭐가 괜찮냐는 건지 영 알 수가 없지만 마치 시녀장은 그가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그 목소리를 신호로 다른 시녀들도 “전하, 왕비 전하!”라고 소리치며 달려와 라파엘을 내려다보고 매달렸다. 라파엘은 그녀들이 왜 이러는지 몰라 그저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는데 시녀장이 “눈을 감으세요, 어서!”라고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다.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지만 가느다란 시야 속의 남작이 낭패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는 걸 보자니 이게 맞는 것 같기도 했다. 남작이 자신에게 적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그가 검을 빼들었다면 라파엘도 쉽게 대응을 결정할 수 있었을 텐데, 그는 라파엘이 전혀 모르는 말로서 공격했고 라파엘은 멍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시녀들이 호언장담한 대로 그녀들은 라파엘이 할 수 없는 이런 일의 전문가인 듯했다. 남작의 일그러지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뭐, 왕비가 쓰러져?”
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어제 처음 만난 왕비의 얼굴을 떠올렸다. 멍하게 홀린 눈동자에 창백한 얼굴, 당장에라도 부러질 것 같은 몸이 인상적인 여자였다. 그 여자가 첫날 쓰러졌다고 한다. 이러다가 죽어 자빠지면 왕비로 들일 여자도 없는 판이라 왕은 혀를 차며 “왜 쓰러졌다고 하더냐?”라고 물었다. 왕의 목소리에서 귀찮은 기색을 읽은 시종장이 허리를 낮게 숙이며 대답했다.
“정신적인 이유로…….”
“정신적인 이유? 스트레스란 말이냐? 하, 유령 티파티 한 번에 쓰러지기까지 했다고?!”
질질 짜기야 하겠지만 설마하니 쓰러질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한 왕이 혀를 찼다. 그 말에 시종장은 그저 고개를 숙일 따름이었다.
프시스 남작이 모욕을 주었다는 보고도 들었지만, 쓰러지는 척을 한 왕비 또한 만만치 않은 자였다. 일단 왕비가 쓰러지는 척을 했으니 보고를 하긴 하지만 시종장으로서는 왕비 손에 놀아날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프시스 남작에 관한 보고를 슬쩍 숨겼다.
왕이 서류를 뒤적이다 말고 혀를 찼다. 어제 자신을 올려다보던 시선이 자꾸 생각났다. 모두가 그와 시선도 마주치지 못한다. 그에게 안기는 정부조차 시선을 주는 척하면서 시선을 빗겨가곤 했었는데 상대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에서 보이는 건 순수한 감탄이었다.
“씨발, 그래봐야 뭐해. 계집인데.”
그는 여자를 안을 수 없다. 왕세자이던 시절 그는 여자를 안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왕세자빈이었던 마리 트리지아도 그렇고 다른 여자들과도 몇 번이나 침소를 같이했었다. 당시 섭정을 하던 태후의 명 때문이었다. 후계자를 낳으라는 어머니의 명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여자들을 안으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자신이 성인이 되어 즉위식을 치르게 되면 다시는 이런 짓 따위 하지 않겠다고 그는 결심하고 또 결심했었다.
‘좋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주제에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계집이, 입궁 첫날 쓰러졌다고 한다. 왕은 거칠게 서류를 내팽개쳤다. 자신이 왜 이런 변덕을 부리는진 모르지만 그는 그 여자가 하고 있는 꼴이 보고 싶어졌다. 그는 왕답게 서류가 허공에 날리거나 말거나 시선도 주지 않고 집무실을 나왔다.
이그나치오궁에서 문 플레이스까지는 멀지 않았다. 그는 마차 대신 걷는 것을 선택했다. 유독 아름답게 조경된 정원의 하얀 돌길을 지나던 왕은 왕후궁의 내정원에서 쓰러져 있는 의자와 깨진 찻잔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의자에 앉은 채 쓰러진 건가. 왕은 팔짱을 끼고 자신이 명한 유령 티파티의 잔재를 살폈다. 케이크며 쿠키가 그가 명한 그대로였다. 요령 없기는. 어차피 유령 티파티이니 케이크도 하지 말고 쿠키도 한 종류로 두면 좋았을 텐데 티파티의 테이블은 정석 그대로였다.
“주변머리가 없군.”
왕의 말에 시종장이 ‘충분한 것 같던데’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가서 깽판을 놓은 남작도 웃기지만 그 앞에서 보란 듯이 쓰러지는 척을 하는 왕비도 보통은 아니었다.
그러나 윗사람들의 싸움에는 괜히 끼어드는 게 아니었다. 아랫사람은 입은 닥치고 명령엔 따르고 모쪼록 구경이나 하다가 콩고물만 받아먹고 불똥은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시종장으로서는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있을 뿐이었다.
문 플레이스는 엉망이었다. 겨우 거미줄이나 걷어낸 꼴이 엉망이라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 플레이스를 준 것은 다분히 기를 죽이고 얼굴마담으로서 최선을 다하라는 엄포였지, 학대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귀족 아가씨라면 이 꼴을 보고 슬픈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잠이 오지 않는 밤을 새워야 했을 것이다.
“도대체 꼴이 이게 뭐냐.”
왕의 말에 시종장이 “확인해보겠습니다”라고 작게 대답했다. 왕후는 자살했고 왕은 분노했다. 그 상태에서 왕후궁을 치우려는 궁인이 어디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런 변명은 꺼내지 않는 게 현명한 일이었다.
시종장의 대답에 왕은 2층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왕을 발견한 시녀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고, 문 근처에 있는 시녀들이 문을 양쪽으로 열었다.
여자는 어제와는 다른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치웠는데도 궁이 이렇게 더러웠으면 웨딩드레스 꼴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 왕은 혀를 찼다. 그는 남을 학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지만,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학대에 대해서는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왕에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흰 가마가 보일 뿐 그 검은 눈이 보이지 않자 왕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들어라”라고 말했고 여자는 고개를 들었다. 여전히 그 눈이었다. 뭔가 홀린 듯이 바라보는 듯한 눈동자.
왕이 혀를 찼다.
“아랫것들에게 궁을 치우게 할 것이지, 이 꼴이 뭐냐.”
왕은 안네마리가 뭔가 변명을 하리라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며 죄송하다 말할 줄 알았지만 안네마리는 역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녀는 허리는 고사하고 고개를 숙이지도 않고 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왕의 푸른 눈을 직시하는 시선은 깨끗했다.
왕은 왠지 모를 초조함을 느끼며 그녀를 재촉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왕의 말에 안네마리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치우겠습니다.”
“왕비씩이나 되어서 더럽게 살아야 쓰겠느냐.”
“깨끗이 만들겠습니다.”
안네마리는 창백하고 보호받아야 할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말이 짧았다. 쓰러졌었다든가 의사를 불러달라는 말도 없었다. 왕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왕비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면 그의 정부조차 깜짝 놀라곤 한다. 마리 트리지아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채 그를 올려다보았었다. 그 두려워하는 얼굴을 보고 있자면 그럴 생각이 없다가도 잔인하게 대해주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안네마리는 여전히 창백한 얼굴이기는 했어도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쓰러졌다던데.”
키가 큰 왕이 허리를 조금 숙여 안네마리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속삭였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티파티 도중이라 들었다.”
안네마리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일이 생겼는데……, 별거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티파티 도중에 생긴 일치고는 말투가 뭔가 미묘했다. 왕은 안네마리가 아닌 그녀의 곁에 서 있던 시녀장에게 물었다.
“어쩌다 보니 생긴 일이 뭐냐?”
그러자 시녀장이 허리를 숙이며 대답했다.
“프시스 남작이 티파티에 잠시 들렀을 뿐입니다.”
시종장은 왕비도 만만찮더니 시녀장도 능구렁이를 삶아먹은 거냐고 생각하며 그녀를 흘낏 노려보았다. 저렇게 말하면 당연히 뒤를 물어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제 입으로 고자질하진 않겠다는 뜻이리라.
“프시스 남작? 바이런 말이냐?”
그 순간 안네마리의 시선이 왕을 향했다.
왕은 상황을 알 것 같았다. 바이런 라 프시스가 문 플레이스까지 와서는 왕비를 약올린 것이다.
그는 자신의 정부를 떠올리곤 혀를 찼다. 본디 욕심이 많은 자였다. 그 몸과 얼굴이 마음에 들어 안고는 있지만, 가당찮게도 나라 제일의 초원을 제 별장으로 쓰게 해달라던 놈이었다. 왕비에게 와서까지 해코지를 했다니 제법 담이 큰 놈이었다.
본래라면 그런 깜찍한 점을 재밌게 여겼었는데, 이번만은 그렇게 재밌지가 않았다. 왕은 쓰러졌다는 안네마리를 내려다보며 “너도 참 딱한 계집이구나. 고작 그런 일에 쓰러지는 거냐”라고 짜증을 냈다.
안네마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왕은 자신이 벽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문득 왕은 안네마리의 손에 시선이 갔다. 자신이 갑자기 찾아왔기 때문인지 장갑이나 모자 같은 장신구를 완벽하게 갖추지 못한 탓에 안네마리의 손이 노출되어 있었다. 마르고 여리하다 생각했는데 손은 의외로 살짝 큰 편이었다. 말라서인지 손가락 마디마디가 돌출되어 있었는데 마치 남자의 손 같다고 생각하며 왕은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
왕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를 깨닫자 안네마리가 놀라 손을 뒤로 가렸다.
“왜 가리는 거냐?”
왕이 물었다.
“손이 예쁘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안네마리가 말을 더듬었다. 설마하니 그녀가 사실은 남자이고 남성 특유의 손이라 노출을 꺼려한다는 걸 상상도 못 하는 왕은 안네마리의 그런 점을 보고 혀를 찼다. 사교계의 것들이란 모든 것이 완벽하길 바랐다. 세상엔 완벽한 인간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놈들은 그런 점만 보길 원했다. 여자도 남자도 약점은 모두 가리고 허세로 자신을 위장하며 서로의 약점을 잡아 어떻게 하면 깔아뭉개고 자신이 우월할 수 있을까 생각하는 놈들뿐이었다. 아마 그런 놈들 때문에 손을 내보이는 것조차 꺼리는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왕은 안네마리가 내성적인 성격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말았다.
“어차피 계집의 손에는 관심 없다. 예쁘든 예쁘지 않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내놓고 다녀라, 숨길 만큼 값비싸 보이지도 않으니.”
안네마리가 불편한 얼굴로 허리를 한 번 숙여 보이자 왕이 피식 웃었다.
“예산청에서 예산을 받아가라. 이 꼴이 뭐냐. 왕비의 구두가 송치 구두라니, 남들이 나를 비웃겠다.”
내가 이 여자한테 왜 이렇게 관대하지?
왕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구두를 신어도 자신보다 훨씬 작은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얼굴마담이니 치장에는 신경 쓰라는 뜻이다. 보는 자가 유령밖에 없어도 말이지, 알겠느냐?”
왕의 말에 안네마리는 말없이 허리를 또 숙여 보일 뿐이다. 지독히 말이 없는 계집이다. 왕은 혀를 찼다. 자신을 두려워하는 인간들도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의 환심을 사려고 필사적이 되곤 했다. 그가 여자를 안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여자들은 그에게 달라붙으려 했고, 아양을 떨려 했다. 그런데 안네마리는 왕에게 아첨은 하지 않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똑바로 바라본다.
“괜히 왔군.”
쓰러졌다는 소리에 와봤는데 괜히 왔다는 생각만 들었다. 올 때도 자신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왔는데 하는 짓도 내내 자신답지 않은 짓뿐이었다.
가능하면 멀리하는 게 좋겠군.
첫날은 아예 올 생각이 없었는데 둘째 날에는 ‘가능하면 멀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는 자신의 모순을 깨닫지 못한 채 왕은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는 간다는 말도 없이 등을 돌렸다. 그가 등을 돌리자 그의 긴 꼬리가 되었던 자들이 일제히 그의 행보를 따른다. 그가 복도 끝까지 움직였을 때에야 그의 뒤에 붙은 마지막 근위병이 침실을 나갈 수 있었다. 왕의 일행이 모두 나가고 시녀들이 문을 닫자마자 그녀들은 일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왕이 갑자기 찾아오는 바람에 제대로 치장도 마치지 못한 상태였다. 왕이 알아채면 모두가 죽는 날이 더욱 가까워올 뿐이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도 용케 그냥 넘어갔네요.”
시녀 하나가 중얼거렸다. 라파엘은 심지어 가발도 쓰고 있지 않아 처음 외모와 머리 길이도 차이가 있었다. 왕이 오고 있다는 말에 부랴부랴 장식을 덧댔지만 그래도 조금만 자세히 봤으면 들키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왠지 모르게 심술궂은 말만 잔뜩 하고는 방을 나서고 말았다.
시녀장 또한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도 카펫 위에 주저앉은 채 라파엘을 바라보았다. 들키면 어쩔 뻔했나 하는 마음에 그냥 시선이 갔을 뿐이었으나 그녀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라파엘은 멍하니 왕이 나간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응이 영 심상찮다? 시녀장은 라파엘과 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가 익히 들었던 라파엘 에반스는 살인 기계라 불리는 살수였다. 그녀가 겪은 라파엘 에반스는 일 외에는 만사에 무심한 인간이었다. 그는 음식도 옷도 잠자리도 일절 가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것은 일, 현재로서는 마리의 사인을 알아내는 것이었다. 그런 그가 다른 자가 나간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라파엘은 아쉽게 문에서 시선을 떼었다.
왕이 뭐라고 했었던 것 같다. 남들이 라파엘 때문에 왕 자신을 욕할 거라는 둥, 꼴이 그게 뭐냐는 둥―. 다정한 말은 하나도 없었는데 왠지 그 울림이 몹시 따뜻했던 것 같다. 사람의 목소리가 이토록 따뜻하게 들릴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었는데, 게다가 상대는 냉혹한 왕이지 않은가. 마리와 결혼해놓고 남자만을 안은 남색가이고, 즉위 축하연에서 3백 명을 몰살했다는 냉혈한.
너무 살인 기계로 오래 살았나.
라파엘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래서 이젠 따뜻함이 뭔지도 모르게 된 건가. 목소리가 몹시 근사했다. 그래서 내용이 뭐든 간에 이토록 기분 좋은 울림으로 귀에 남는 걸까.
‘쓰러졌다던데.’
그렇게 말하며 왕은 허리를 숙여 라파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었다. 그 푸른 눈이 몹시 가까이에 있었다. 언젠가 보았던 아름다운 바다와 색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눈이 너무나 가까이에 있어 목이 말랐다.
왕은 아름다웠다. 금발도, 푸른 눈도, 그 거리낌 없는 태도도, 빈정거리는 목소리도 너무나 매혹적이었다. 어째서 저런 사람이 있는 거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도 오지 않는 알현 시간에 라파엘은 멍하니 빈 공간을 바라보며 왕을 생각했다. 아름다웠다. 라파엘의 손가락을 보고 ‘숨길 가치도 없다’고 했던 왕의 손가락은 몹시 하얗고 길었다. 가늘어 보이기까지 했다. 마디가 분명하고 곧게 뻗은 손가락이 아름다워 그냥 변명이었던 ‘예쁘지 않다’는 말이 자신의 진심이 나온 듯, 조금 부끄러웠다.
마리가 그 왕 때문에 죽은 건가.
라파엘이 눈을 내리깔았다.
마리가 그 아름다운 왕 때문에 죽은 건가.
라파엘은 내내 알현실의 빈 공간에서 왕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단 한 번의 만남으로 그의 가슴을 희미하게 흔들었던 쌍둥이 여동생보다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은 왕 쪽이 훨씬 선명히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청량감이 느껴지는 웃음, 차가운 눈, 그리고 다가오던 그 얼굴.
라파엘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을 눌렀다.
“왜, 아프지.”
아프긴 한데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니, 아픈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저…… 심장이 이상했다. 굉장히 이상했다. 아주 오랫동안 뛰었을 때처럼 심장이 두근거린다. 아픈 것 같기도 했고, 아프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 나쁜 기분은 아니어서, 이대로 계속 있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묘하게 초조해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이대로 뭐 어떤가 싶을 정도로 무력하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날 밤, 라파엘은 다시 잠행복을 입었다. 그는 지붕과 나무 사이를 건너뛰며 남아 있기로 한 에드워드에게로 향했다. 재무 비서관 집무실은 사라궁의 왼쪽 구석에 있었고, 라파엘은 미리 에드워드에게서 건물의 배치도를 이미 받아둔 상태였다. 발코니로 뛰어들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에드워드가 바로 문을 열고 그를 맞아주었다.
“라피!”
에드워드가 그를 반갑게 맞으면서 서둘러 발코니 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그러는 사이 라파엘은 복면을 벗으면서 의자로 걸어가 앉았다. 에드워드가 등을 돌렸을 때 라파엘은 멍하니 방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피?”
“아,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에드워드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어제 이그나치오궁에서 열렸던 연회의 참석객 명단과 시중인 명단이 필요해. 여하간 그 연회에 존재했었던 모든 자들의 명단이 필요한데, 확인해봐줄 수 있을까.”
라파엘의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물론이지, 라피.”
“그리고 프시스 남작이 누구야?”
라파엘이 물었다. 오늘 왔던 남자가 분명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프시스 남작이라고. 그렇게 묻자 에드워드의 얼굴이 가볍게 찌푸려졌다.
“그 이름은 어디서 들었어?”
“본인에게서.”
“본인? 네가 프시스를 어떻게 알아? 어디서 만났는데?”
에드워드의 사나워진 표정을 보자 라파엘은 대답을 먼저 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저었다.
“누군지 먼저 말해줘.”
그러자 에드워드가 이를 갈았다. 그가 집무실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 그 손가락을 보자 왕의 손가락이 떠올라 라파엘은 눈을 내리깔았다. 아마 이 관심은 상대가 왕이기 때문일 것이다. 귀족하고는 사이가 안 좋을지언정 평민에게서는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왕. 자신도 평민이니 왕에게 관심이 있었나 보다.
“바이런 라 프시스. 왕의 정부인 남자지. 벌써 남작이 되었나? 본래는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의 정부였는데 왕이 범해서 가져버렸어.”
바이런과 클레르.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 이름을 되새겼다. 마리의 몸에서 떨어졌던 그 메모의 이름들이다. 라파엘의 동요를 모르는 에드워드는 말을 잇고 있었다.
“마리가 죽은 건 놈이 왕과 배를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에드워드의 말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가 왜 죽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메모를 끝까지 가지고 있었다. 바이런과 클레르, 라고 적힌 그 메모는 마리가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았던 메모였다. 뭘 적어놓은 걸까.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에는 뭐가 있는 걸까.
백여섯 개든 천육백 개든 가든 하우스를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나. 라파엘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에드워드.”
동생의 죽음을 곱씹고 있는지 표정이 좋지 않은 에드워드를 부르자, 에드워드가 시선을 맞춰왔다.
“응.”
“재스민이나 후크라는 이름을 아나?”
“……그게 누구야?”
에드워드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 모르는 얼굴이다. 재스민이나 후크라는 이름이 클레르나 바이런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면, 즉 동일 인물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귀족들은 이름을 신성히 여긴다. 가명을 쓰지 않는 건 물론이고, 이름을 바꾸는 경우도 거의 없다.
“바이런 라 프시스와 클레르 라 포에 대해서도 좀 알아봐줘. 주로 둘의 관계에 대해서. 가능해?”
라파엘이 묻자 에드워드가 의아한 듯 물었다.
“글쎄. 알아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둘은 노골적인 사이인데.”
“노골적인?”
“그래, 노골적인. 클레르 라 포 백작부인이 어느 날 사교계에 데리고 온 게 바이런 프시스지. 평민이었는데 왕의 눈에 들어 자작, 그리고 이젠 남작이 된 모양이네.”
에드워드의 말에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둘은 요즘 뭐 하는데?”
“클레르야 다른 남자와 지내고 있고, 바이런은 왕과 지내지. 왕의 애첩이니까.”
왕은 애첩을 자주 바꾸지만 일단 지금은 그가 왕의 애첩이지, 라고 말하며 에드워드가 피식 웃었다. 그 경멸이 담긴 웃음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재스민과 후크가 클레르와 바이런을 의미한다면 둘은 어제 서로를 의지한 채 잔디밭을 건넜다. 머리 위의 발코니에 누군가가 나와서 문어단지로 노는 통에 쫓아갈 수는 없었지만 둘의 사이는 몹시 친밀해 보였다. 둘은 정원으로 몸을 숨겨서 도대체 뭘 했을까. 왕의 정부와 그의 옛 애인이 현재도 만나고 있다면?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에 있는 것이라곤 밀회하는 연인들뿐이라고 했다. 왕의 정부와 그의 옛 애인이 중앙 정원에서 밀회를 즐기고 있다면?
그러나 그것을 왜 마리가 숨기고 있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이유로?
“마리는 성격이 어땠지?”
라파엘이 물었다.
“착했지.”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어 에드워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눈이 가늘어져 있었다. 이제는 가버린 여동생을 회상하는 남자의 얼굴은 몹시 따뜻했다.
“다정했어. 남이 다치는 걸 보지 못했지. 공평하고, 총명했어. 공부를 게을리 하는 법도 없었고, 가족을 위해서 자기희생을 할 줄도 알았지. 누가 뭐라 해도 그 아이는 완벽한 왕후였어.”
“완벽한 왕후.”
“그래. 모두가 좋아했어. 게다가 그 아이는 정숙하기까지 했지. 남편이 빌어먹을 남색가라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도 그 아이는 결코 몸가짐을 흐트러트리지 않았어.”
에드워드가 눈을 감았다.
“다정한 애였어.”
라파엘은 에드워드의 표정을 가만히 바라보다 다시 방구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까 그가 멍하니 보고 있던 방구석이었다. 책상과 벽이 닿아 있는 부분을 가만히 바라보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일어서자 에드워드도 일어섰다.
“가는 거야?”
에드워드가 따라오자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파엘이 발코니 난간을 넘어 훌쩍 뛰어내리더니 곧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에드워드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집무실로 돌아갔다.
그날 이후 한동안 라파엘은 완전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중앙 정원에는 가든 하우스가 참으로 많은데다 왠지 모르게 이그나치오궁에서는 매일 밤 연회가 열렸다.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는 듣던 대로 연인의―하룻밤 연인일지 정말 연인일지는 알 수 없지만―밀회 장소였다. 가든 하우스에 도착했다고 해서 바로 뒤질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뒤지다가도 사람의 기척에 바로 몸을 숨겨야 했다. 나흘이 지났을 때 라파엘은 50개 정도의 가든 하우스를 확인했다. 아무것도 없었다. 가든 하우스에 뭐가 있다는 게 아니라 둘이 가든 하우스에서 만나고 있다는 뜻의 메모일까. 하지만 왕후는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깃털 펜으로 위장된 열쇠는 분명 맞는 자물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든 하우스에 있지 않을까.
라파엘은 에드워드 라 쇼어의 집무실에서 보았던 방 한구석을 떠올렸다. 묘한 홈이 있었다. 대체로 뭔가를 숨길 때 그런 홈을 만든다. 대부분의 경우 책상은 정면보다 측면에 판을 대기 마련이다. 서랍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기 마련인데 에드워드 라 쇼어의 책상은 벽에 딱 붙어 있었다. 측면의 판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에, 판이 없다면 그 책상은 기성품이 아니라 에드워드가 직접 주문한 책상이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리고 책상과 벽 사이의 묘한 홈. 그게 만약 위장문이라고 한다면 그 안에는 뭐가 있을까? 비밀 금고?
비밀 금고는 흔한 아이템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을 만한 아이템이었고, 특히나 대귀족들은 몇 개씩 가지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가든 하우스의 바닥을 훑고 있던 라파엘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사람의 기척이다. 너무 가까워 몸을 피하기에는 이미 여의치 않은 듯했다. 어째서 듣지 못했지? 라파엘은 제자리에서 도약했다. 가든 하우스의 천장을 붙잡은 라파엘의 몸이 반 바퀴 빙글 돌았다. 천장을 받치는 기둥에 무사히 안착한 라파엘이 몸을 최대한 붙였다.
“전하, 여기서 말입니까?”
전하, 라고 하는 순간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 가장 적당한 장소지 않은가?”
전하는 역시나 왕이었다. 전하라고 불릴 만한 인간은 이 궁에서 왕과 태후, 그리고 왕비인 라파엘 자신뿐이었다. 태후는 태후궁에서 거의 나오지 않는다고 하니 전하라는 소리를 들을 만한 인간은 왕뿐이었다.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린 건 왕이 여기에 왔기 때문이 아니었다. 전하, 라고 부르는 남자가 그가 아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제럴드 라 쇼어.
왕후의 작은 오빠인 근위대장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왕을 부르고 있었다.
“빨리 해.”
라파엘은 나무판의 틈으로 밑을 바라보았다. 왕은 피식 웃고 있었고, 제럴드의 표정은 굳을 대로 굳어 있었다. 군복이 아닌 연미복을 입은 제럴드가 거칠게 목에 두른 크러뱃을 풀었다.
제럴드가 옷을 벗는다. 크러뱃부터 조끼, 셔츠, 바지, 구두까지 벗는 동안 왕은 경멸의 웃음을 지은 채 제럴드의 스트립쇼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제럴드가 옷을 다 벗자 “여전히 몸은 괜찮군”이라며 왕이 그를 품평했다. 그러자 제럴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라파엘은 그 광경을 보면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눈만 껌뻑였다. 이건 마치 왕후의 오빠와 왕이 불륜이라도 벌이는 것 같지 않은가.
“자, 이제 기어와서 빨아. 어차피 행위는 늘 같은데 어째서 매일 말해줘야 아는 거냐.”
왕이 빈정거렸다. 애증의 관계라도 되는 건가 싶었는데 왕의 눈은 몹시 차가웠다. 그는 정말 제럴드를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건 제럴드도 마찬가지인 듯 그가 이를 갈고 있다는 걸 천장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 싫어하는 이유로 정사를 벌이는 경우를 알지 못하는 라파엘이 이해할 수 없어할 때였다.
아름다운 푸른 눈과 정통으로 마주쳤다.
라파엘은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은 잠입을 거의 들킨 적이 없었다. 게다가 나무 틈이었는데도 시선은 정통으로 마주쳤다. 정말 눈이 마주친 건가, 아니면 이쪽을 보고 있을 뿐인 건가. 라파엘이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을 때 왕이 말했다.
“너 같은 새끼가 근위대장이니 쥐새끼가 들어올 수밖에.”
왕의 바지춤으로 손을 뻗는 제럴드에게, 왕이 차갑게 뇌까렸다.
“쥐새끼…… 말입니까?”
제럴드가 더듬는 순간 라파엘은 전광석화처럼 몸을 일으켜 천장에서 뛰어내렸다. 정원을 가로지르려는 라파엘의 뒤에서 왕이 허리춤을 더듬다 칫 하고 혀를 찼다. 그는 제럴드가 벗어놓은 옷의 총을 잡았다.
신력(神力)을 가진 자가 아니면 쏠 수 없는 총을 든 왕이 정확히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하는 총소리가 조용하던 정원의 공기를 찢는다. 라파엘이 본능적으로 몸을 수그렸다.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자 왕이 피식 웃고 있었다.
“제법 몸이 괜찮구나. 마르긴 했지만, 이런 짓을 할 정도면 근육이 탄탄하겠지. 조이는 맛도 일품이려나, 응?”
어둠 때문에 라파엘에게는 보이지 않았지만 왕의 푸른 눈이 검게 변하고 있었다. 제럴드 라 쇼어는 왕의 눈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왕은 신력을 끌어올리고 있다. 역대 왕 중에서 신력이 가장 강하다는 평을 받고 있지는 않으나 그 컨트롤만은 제일이라는 말을 듣는 왕이 총을 쏘려 한다. 그는 시선을 돌려 수십 미터 앞에 서 있는 남자를 확인했다. 검은 옷에 복면까지 하였지만 그는 손쉽게 그가 라파엘임을 알아보았다.
“저, 전하! 손이 더러워지십니다. 제가!”
제럴드가 필사적으로 왕에게 간청했지만 왕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지랄 떨지 마라. 너희 같은 새끼들이 녹봉을 받고 있으니 이런 쥐새끼가 생기는 것이다.”
왕의 총구는 라파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라파엘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한 채 왕과의 기싸움을 벌였다. 라파엘은 긴장한 상태로 왕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왕은 라파엘의 몸을 바라보고 있었다. 안는 맛이 제법 좋을 것 같은 몸이었다. 게다가 살수라면 어떻게 다뤄도 그만이지. 요즘 정부가 까부는 꼴이 짜증스러웠던 왕은 저놈을 잡아 멋대로 즐겨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어디를 쏘는 게 좋을까 하고 팔과 다리 중 고민했다. 그때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화들짝 총을 집어던지고 말았다.
신력을 너무 끌어당긴 탓인지 총신이 녹고 있었다. 그가 총을 집어던지고 낭패 어린 얼굴로 고개를 들자 이미 복면 남자는 숲으로 사라진 뒤였다.
제럴드는 안도의 한숨이 나올 것 같은 심정을 숨기며 왕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왕이 등을 돌렸다.
“옷 입어라.”
기분 잡쳤다는 뜻이다. 라파엘이 여러모로 날 구해주는군. 제럴드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든 하우스로 돌아가 옷을 입었다. 그가 옷을 다 입었을 때 마침 근위병이 달려오고 있었다. 왕이 근위대장을 능욕하기 위해 물렸던 근위병들이었다. 근위병들이 “전하!”라고 소리치며 달려오는 것을 보고 왕은 삐죽 웃었다.
그는 쇼어가의 차남이자 근위대장인 남자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키가 크고 남자답게 생겼다. 왕의 취향에 가까웠다. 사실 왕은 뼈대가 얇으면서 근육이 있는 자들을 좋아했지만, 뼈대가 얇으면서 그냥 마른 자보다는 차라리 뼈대가 굵고 남자다운 놈들이 나았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제럴드가 이가 갈릴 것 같은 심정을 감추고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를 필두로 근위병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왕은 입술을 올렸다.
“쥐새끼를 찾아내라.”
그리고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상대는 검은 복면에 검은 잠행복을 입고 있었다. ‘난 살수’라고 쓰여 있는 듯한 옷차림이었다. 그리고 등 뒤에 엑스자로 고정되어 있는 쌍검이 인상적이었다.
“쥐새끼는 남자다. 왜소하고 마른 자로, 쌍검을 사용한다. 즉, 신력이 없다는 뜻이다.”
“신력을 숨기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총은 흔적을 남기니까요.”
제럴드가 고했고, 왕은 과연―하고 중얼거렸다.
“그래. 귀족과 평민, 신력을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양쪽 다 신경 써라. 찾아내라. 찾아내서…….”
그 시체를 가져와라, 라고 할 것이 분명해 제럴드는 이미 마음속으로 결정하고 있었다. 장기수들 중 비슷한 체구를 가진 자를 죽여 왕의 앞에 내보일 셈이었다. 그러나 왕은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급기야 이렇게 말했다.
“팔다리 정도는 못 쓰게 되어도 좋다. 그러나 살려서 데려와라, 반드시.”
맛있어 보이는 몸이었지.
왕이 비릿하게 웃자 제럴드는 몸이 덜덜 떨릴 것 같았다. 그는 입술 안쪽을 콱 깨문 다음 가능한 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고했다.
“살수는 즉살이 원칙입니다.”
“지금 너 따위가 내게 원칙을 운운하는 거냐?”
왕이 불쾌한 낯으로 물어 제럴드는 재빨리 이마를 땅에 대었다.
“아닙니다.”
“살린 몸이 필요해.”
왕의 말에 제럴드가 “복명하겠나이다”라고 말하자 모두가 그 말을 제창했다.
그때 라파엘은 빠른 속도로 문 플레이스로 향하고 있었다. 몸을 숙였지만 왕의 총은 아슬아슬하게 그를 스쳤다. 두건의 끈을 스치고 지나가는 총알의 감촉이 섬뜩했다. 두 번째는 피할 수 있었을까. 라파엘은 확신할 수 없었다. 사실 요즘 거의 잠을 자지 못해서 컨디션도 좋지 않은 편이었다. 역시 잠을 자야 해. 라파엘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일이라는 걸 깨닫고 있었다.
그가 문 플레이스의 2층 발코니로 들어가자마자 오늘의 침번인 시녀들이 재빨리 문을 열었다. 라파엘의 몸에서 서둘러 잠행복을 벗겨낸 그녀들을 스쳐 라파엘은 욕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욕조가 자리 잡고 있는 그곳을 치운 건 사흘 전이었다. 드디어 사용하게 된 욕실은 너무나 호사스러웠다. 라파엘은 평생 단 한 번의 사치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며 욕조라기보다는 연못에 가까워 보이는 곳을 향해 발을 내딛었다. 계단을 내려가자 물에 몸이 잠긴다. 가장 깊은 곳은 라파엘의 머리끝까지 잠길 정도였다. 물에 떠 있는 연꽃이 아름다우면서도 퇴폐적이었다.
그와 단 한 번 만났던 여동생은 이 욕실을 매일 사용했을 것이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이 거대한 욕실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녀는 자신의 오라비와 자신의 남편이 그런 관계임을 알고 있었을까.
당신밖에 없어.
자꾸 그 목소리가 귀에 맴돈다.
라파엘은 몸을 숙였다. 물에 완전히 잠긴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되짚어보았다. 왕은 제럴드를 가든 하우스로 데려왔고, 제럴드는 옷을 벗었다. 둘은 친밀해 보이지 않았으나, 그 일이 처음은 아닌 게 분명했다.
라파엘이 허리를 펴 물에서 솟구쳐 나왔다. 그의 머리칼이 허공에서 호를 그렸다.
제럴드 라 쇼어를 추궁해봐야겠다. 그가 모르는 일이 뭔지.
다음 날 아침, 티파티에서 라파엘은 졸고 있었다. 이미 날씨가 너무 추워져 더는 내정원에서도 티파티가 불가능해져 티파티의 장소를 온실로 옮긴 참이었다. 시녀들은 라파엘을 대신해 충실히 초대장을 써서 대귀족의 여인들에게 보내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오지 않았고, 라파엘은 이 시간에 잠을 잤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앞에 두고 라파엘은 모포를 덮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자더라도 그는 살수답게 예민했기 때문에 누군가의 기척만으로도 바로 잠에서 벗어나곤 했다. 그래서 시녀들은 라파엘이 잠들면 일제히 온실에서 벗어나 한 시간가량은 들어오지 않았다.
탁 하고 온실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라파엘의 눈이 번쩍 뜨였다. 아직 시녀들이 올 시간은 아닌데 누군가 싶어 고개를 돌리고 라파엘은 눈을 크게 떴다. 어젯밤 보았던 왕이 서 있었다.
그는 오늘도 불만스러운 얼굴이다. 하지만 오늘도 역시나 아름다웠다. 아침 햇살이 가득 들어오는 온실에서는 그의 아름다움이 한창 빛났다. 다시 심장이 묘하게 두근거려 라파엘은 내색하지 않았지만 조금 곤란하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그에게 총을 쏜 남자인데 오늘 여전히 아름다워 보인다니.
“인사도 안 하는 건가?”
그 말에 라파엘은 허둥지둥 일어났다. 치맛자락을 들고 허리를 숙여 보이자 왕이 혀를 찼다.
“넌 혀가 끊어진 건가? 왜 좋은 아침이라는 말 한 마디 못 하느냐? 도…….”
왕은 그렇게 구박하려다 여전히 빈 티 테이블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좋은 아침일 수가 없었다. 매일 이런 유령 티파티를 하고 있는데 좋은 아침은 무슨 얼어 죽을 좋은 아침이겠는가. 여전히 쿠키는 3종, 케이크도 성의 있는 것이라 왕은 내심 예산금을 좀 더 넉넉히 배정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왕이 라파엘의 건너편에 앉았다. 털썩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앉았지만 그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찻잔을 들었다. 입술을 잠깐 축여보더니 바로 차를 바닥에 부어버렸다. 그러자 왕의 시종이 티 포트를 들어 우아하게 차를 따랐다. 길게 늘어지는 찻물 줄기를 바라보던 라파엘이 왕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왕이 또 혀를 찼다.
“다리가 굳었느냐. 당장 앉아라.”
“예, 전하.”
라파엘이 재빨리 앉자 왕이 찻잔을 고갯짓했다. 마시라는 건가 싶어 라파엘이 잔을 들자 왕이 참지 못하고 테이블을 가로질러 잔을 빼앗았다.
“너, 진짜 혀가 잘못된 거냐? 식은 차에 왜 입을 대려는 거냐.”
왕이 건네자 어느새 라파엘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왕의 시종이 잔을 공손히 받았다. 찻물을 버리고 왕에게 했듯이 우아하게 차를 따라 라파엘의 앞에 밀어주었다.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어제.”
왕은 자기가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입을 열었다.
“어제 살수를 발견했으나 놓쳤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왕비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란 얼굴도 아니지만 관심이 없지도 않았다. 확 뒈져버리지, 라는 반응도 아니었다.
그는 사실 지금 좀 헷갈리고 있었다. 그에게 시집오지 않기 위해 번갯불에 콩이 아니라 혼인을 볶아버린 무엄한 계집들을 알고 있었다. 무엄하긴 하지만 사실 이해가 안 가는 건 또 아니었다. 그래도 자기를 안을 수 있고 아이도 안겨줄 수 있는 놈과 결혼하고 싶겠지. 하지만 그에겐 공식적인 여성 파트너가 필요했고 그래서 결국 쇼어가를 윽박질러 나온 게 이 안네마리였다. 사실 이 안네마리가 정말 안네마리인지 아니면 아무 여자나 대충 데리고 온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명분만 서면 되는 게 이 세계가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도 굳이 이 여자가 안네마리 라 쇼어가 정말 맞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모르고 있는 편이 나중에 안네마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 자신의 책임은 없이 쇼어가 하나 망하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는 좀 이상했다. 사람들이 모두 마다한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오게 된 주제에 그를 볼 때 멍하니 바라본다. 사랑에라도 빠진 것처럼. 왕은 혀를 내밀어 자신의 입술을 핥았다. 이 여자의 시선을 대하면 우월감과 함께 갈증이 든다. 사내놈도 아니고 쓸모도 없는데도 이 시선이 꽤나 기분 좋았다. 왕을 유혹하는 여자는 여럿 있었다. 왕은 남색가이지만 그건 다시 말하면 그가 발기할 수 있도록 만드는 여자는 모든 걸 다 가지게 되는 것이었다. 그 높은 산을 정복해보겠다는 여자는 꽤 많았다. 게다가 왕의 외모는 미형을 배출하는 가문으로 유명한 쇼어가도 한 수 접고 들어간다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를 이렇게 바라보는 여자는 없었다. 눈을 빤히 쳐다보고 그가 뭐라고 해도 그 시선이 달라지지도 않는, 심지어 그 시선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 여자는.
‘정말 귀족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귀족들은 어릴 때부터 자신의 감정을 숨기는 법에 대해 훈련받는다. 열 살이 지날 무렵에는 표정을 숨기는 것이 능숙해진다. 스물이 넘었는데도 이렇게 표정도 시선도 숨기지 못하는 여자는, 왕은 안네마리밖에 보지 못했다.
“넌 걱정도 안 되냐?”
“예?”
걱정이 될 리가 없지, 살수 본인이니까. 라파엘은 멍하니 되물었다. 혹시 왕 자신을 걱정하라고 하는 걸까? 그러나 라파엘은 역시 그도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살수는 라파엘 자신이었고, 그는 왕을 해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누구도 해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바라는 건 마리가 왜 죽었는가, 그걸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이그나치오궁 근처에서 발견되었단 말이다. 네 궁에서 얼마나 가까운지…… 모르겠군.”
궁에 감금한 건 그 자신이었다. 안네마리는 분명 궁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왕은 쯧 소리를 내며 차를 마셨다. 쇼어가의 여인이라 처음부터 콧대를 꺾어놔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괜한 짓을 했다고 그는 후회했다. 괜히 윽박질렀다. 이런 유령 티파티를 하고 있을 안네마리를 생각하자 왕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 티파티에는 먹을 거나 있지, 알현실에서는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이런 주변머리로 책이라도 들고 가 읽는 유연함을 발휘할까, 과연? 옷만 하더라도 굳이 궁인들을 시키지 않겠다며 시녀들에게 맡기는 통에 아직도 안네마리의 옷은 왕비치고는 허름했다. 언제나 유행의 첨단을 달리던 마리 트리지아와 비교해보면 허름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옷은 언제쯤 되는 거냐?”
남자 특유의 몸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옷과 구두 등을 시녀들이 제작해야 하는 여건상 오래 걸릴 수밖에 없는데 왕은 라파엘의 옷차림이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라파엘은 “최대한 빨리 하도록 노력하고 있나이다”라고 대답하며 왕의 옷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사실 라파엘로서는 그가 뭘 입는다고 완벽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핸섬했지만, 그러나 그의 옷들이 그의 아름다움을 한층 부각시키는 건 사실이었다.
“쯧, 피부는 유령보다 창백한 게……, 왕궁 식사가 너무 고급이라 너같이 촌스러운 것의 입맛엔 맞지 않는 거냐. 아니면 네가 너무 고급이라 왕궁 요리사가 따라갈 수 없는 거냐.”
사실 라파엘은 식사를 제한하고 있었다. 근육을 일부러 소실시켜놓은 상태라 먹어서 근육이 될까 봐 상당히 조심하던 차였는데 마치 그걸 아는 것처럼 왕이 묻자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닙니다.”
“꼴 보니 알겠군. 다이어트를 하고 있는 거냐?”
사교계는 완벽을 요구한다. 물론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그래서 사교계는 ‘겉보기의 완벽’을 요구한다. 속이야 어떻게 썩어 문드러지든 알 바 아니라는 태도로.
마리 트리지아도 그러했고, 다른 자들도 겉보기에 심혈을 기울인다. 다들 미친 것 같다고 왕은 생각했다. 다이어트를 하고 몸을 키우고 그러느라 건강도 정신도 망쳐가는 인간들. 그의 정부조차도 풀 쪼가리나 씹어대며 그 화풀이를 궁인들에게 하고 있는 실정이다. 거기에 안네마리까지 더해진다고 생각하자 왕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먹어라. 너 같은 얼굴로 몸 가꾼다고 안 달라진다.”
그렇게 말하며 왕은 그제야 달려온 시녀들을 향해 일갈했다.
“너넨 뭐 하는 인간들이냐!”
왕이 도착했다는 말에 서둘러 달려온 시녀들이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자 왕이 혀를 찼다.
“피골이 상접한 제 주인은 가만두고 지들은 아주 피둥피둥 쪘군그래? 누가 이 여자를 왕비로 알겠나. 비루먹은 노새로 알겠다. 당장 제대로 먹여라. 주인의 살이 이렇게 뚝뚝 내리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도 안 쓰이더냐? 사가에서 시녀를 데려온다기에 어지간히 잘 모시는 시녀들인가 싶어 인정해주었더니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잘못 잡으면 부러질 것 같지 않느냐. 말 한 마디 잘못 들어도 쓰러지는 심약하고 여린 주인을 제대로 모시지는 못할망정!”
시녀들은 그저 죽었다 복창하고 허리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그러나 왕의 사각 지대에서 시녀들은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상대는 살인 기계였다. 라파엘 에반스, 가장 어리지만 가장 무서운 살인 청부업자. 무슨 일이든 의뢰는 완벽히 해낸다는 그가 뭐? 부러져? 쓰러져? 물론 라파엘의 정체를 들키면 안 되지만 지금 당장 억울한 건 억울한 것이었다.
“한 번 더 왕비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하나씩 목을 따버리겠다!”
헉.
시녀들은 허리를 숙인 채 시선을 교환했다. 왕이 도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그녀들은 잠시 눈으로 의견을 교환하다 결론을 내렸다. 왕은 왕비가 꼴 보기 싫어 왕비가 사가에서 데려온 시녀들도 떼어놓기 위해 이런 트집을 잡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트집을 잡힐 줄 알고? 시녀들은 옹골차게 결심했다. 어떤 흠집 하나 잡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라파엘은 화를 내는 왕을 바라보았다. 정말 아름다운 얼굴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해도 듣기 좋은 노래처럼 들리는 건 분명 자신의 귀가 미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젯밤 왕은 제럴드와 정사를 벌이려 하고 있었다.
대체 왜.
둘이 무슨 사이이기에.
게다가 둘은 서로를 좋아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왕은 노골적으로 빈정거리고 있었고 제럴드는 이를 악물고 있었다. 둘은 도대체 무슨 사이일까.
증오한 나머지 몸으로 욕보일 수 있다는 걸 라파엘은 알지 못했다. 욕정으로 인해 사랑하지 않아도 정사를 벌일 수 있고, 충동적으로 지나가는 자를 범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부정적인 감정으로 상대를 욕보이기 위해 하는 정사는 라파엘이 알지 못하는 범위라 그는 도대체 그 행위가 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 매일 심심하지 않은가?”
왕이 갑자기 물었다.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심심하지 않습니다.”
심심하긴커녕 바빠서 미칠 지경이었다. 뭔 놈의 가든 하우스는 그렇게나 많은지 아직도 반을 다 못 돌아봤는데 눈앞의 남편은 공식적으로 자신의 사촌 오빠, 비공식적으로는 친형인 놈과 그렇고 그런 사이―정확히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지만―였다.
“매일 밤 이그나치오궁에서 연회가 열린다.”
알고 있었다. 매일 밤하늘을 화려하게 수놓는 폭죽도 그렇거니와 끝없이 들려오는 음악 소리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알기 쉬운 것은 라파엘이 매일 밤 그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라파엘이 대답하지 않자 왕이 혀를 찼다.
“눈치는 또 왜 그렇게 둔하냐.”
“예?”
“연회에 오라는 이야기다.”
그건 곤란한데. 라파엘은 당황했다. 연회에 가면 밤 시간을 빼앗긴다. 그러면 가든 하우스를 확인할 시간이 줄어든다. 내키지 않는 일이라 라파엘이 입을 다물었다.
왕은 안네마리를 유심히 보고 있었다. 연회에 오라고 하면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안네마리는 그냥 봐도 내키지 않는 분위기다. 역시 내성적인 성격인 모양이다. 툭 하면 쓰러져, 조금 굶었다고 유령이 마누라 하자고 할 만큼 낯빛은 창백해, 게다가 성격도 내성적이라니. 정말 가지가지 하는 여자라고 생각하면서도 왕은 안네마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그는 많이 봤었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마리 트리지아 왕후가 있다. 안네마리에겐 없는 것들이 마리 트리지아에게는 있다. 사과처럼 발그레한 뺨이라든가 작고 고운 손, 카나리아보다 아름다운 목소리……. 안네마리보다 아름다운 여자가 당장도 서넛씩 떠오른다.
그러나 안네마리만큼 그의 흥미를 끈 여자는 없었다. 사실 그는 여자에게 흥미를 보이는 게 처음이라 그 자신도 태도에 갈피를 못 잡을 지경이었다.
“얼굴마담이니 한 번은 보여야겠지. 그러나 그 낯짝을 내 파티에 두 번이나 보일 필요는 없다.”
내성적인 여자에게 그 뱀 같은 사교계를 두 번이나 겪게 할 필요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은 험하게 나왔다. 왕은 쓴웃음을 삼켰다. 이제껏 이따위로 말을 해댔지만 그는 왕이었고 타인이 어떤 감상을 가지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그런데 이 여자의 얼굴을 살피게 된다. 혹시나 속상해하지는 않을까 해서 그 낯빛을 살피는 자신이 짜증스러웠지만 그렇다고 멈출 수도 없었다.
“예…….”
내키지 않는 얼굴로도 그녀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모습을 본 적은 없었지만 웃으면 예쁠 것 같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장.”
왕이 부르자 시녀장이 “예, 전하”라고 대답했다.
“안네마리가.”
이름을 부르자니 어색했다. 왕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여전히 그를 바라보고 있는 안네마리의 시선을 받고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 연회에 참석할 수 있겠나?”
“물론, 가능합니다.”
“내 왕비다. 치장에 신경 써라.”
왕의 말에 시녀장이 “명을 받드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그 대답을 확인하고 온실을 떠나려다 여전히 자리에 앉아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여자를 보고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이 다가와도 안네마리는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 끝까지 잠긴 드레스가 금욕적으로 보였다. 작은 입술과 귀, 그리고 언제나 고요한 검은 눈을 그는 내려다보았다. 다른 여자라면 벌써 울고불고 했을 짓을 여러 번 했는데도 언제나 고요하기만 한 눈은 밤의 색이다.
“안네마리.”
왕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검은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예, 전하.”
“연회에서 보지. 이따위로 비루먹은 노새처럼 하고 나오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무슨 말인지 아느냐?”
“치장에 신경 쓰겠습니다.”
안네마리가 시선을 내리깔며 왕에게 차분히 고했다. 그 시선이 내려간 것에 왕은 묘한 불쾌감을 느끼고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식사를 하고 오라는 이야기다.”
안네마리가 당황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왕이 설핏 웃는 것도 같았지만 그는 곧 등을 보이고 말았다. 왕이 온실을 나서자 시종이며 근위병들이 다 따라나서고 라파엘과 시녀들만이 남았다. 라파엘이 멍하니 왕의 웃음 짓는 얼굴―빈정대는 웃음이 아니라 정말 기분 좋게 웃는 얼굴―을 계속 생각하는 순간 시녀들은 서로 뭔가를 속닥거렸다. 창가에서 밑을 내려다보던 시녀가 “갔어요!”라고 소리 지르자마자 시녀장과 시녀들은 “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 뭐부터 하죠?”
“옷은 뭘 하죠?”
“악, 라…… 아니, 안네마리 왕비님, 뭘 그렇게 앉아 계세요? 어서 욕실로 가세요, 어서!”
누군가가 라파엘의 등을 밀어 라파엘은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모두 악악 소리를 내며 이리로 저리로 뛰어다녔다. 라파엘은 시녀와 함께 욕실로 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왜 그러는 건데?”
“사교계에 공식적으로 왕비로서 첫발을 내딛는 거잖아요! 게다가 아까 전하의 말씀 들으셨죠? 왕비님한테 무슨 일이 있으면 저희의 목을 따버린다잖아요! 이렇게 급히 준비하라 하면서 그런 말을 하다니, 분명히 저희를 전부 잘라내고 왕비님을 고립시킬 심산이신 게 분명해요.”
그러나 저희가 누군가요? 저희는 악착같이 곁에 붙어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셔요!
시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전의를 불태웠다.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없으면 사실상 그는 움직일 수도 없었다. 다른 시녀들이 오면 그가 남자라는 것은 바로 들키게 될 것이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피식.
왕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청량감이 있는 입술이 시원하게 올라가는 것을 홀린 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라파엘은 피식 웃었다. 그와 같이 걷던 시녀들의 눈이 커진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는 웃는 얼굴로 욕실로 향했다. 왕의 얼굴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식사를 하고 오라던 그 목소리는 이미 잊혔다. 목소리가 근사한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얼굴이 훨씬, 훨씬 근사했다.
이그나치오 23세가 여자를 안을 수 없는 남색가라 알려진 일은 후대의 왕들에게 다음의 교훈을 전해준다.
결코 대귀족과 완전히 척을 지지 말 것. 멀쩡히 자식이 있어도, 여자를 안을 수 없는 남색가라 알려질 수 있으니.
‡『정치의 기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