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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문 플레이스 (4/47)

제3장 문 플레이스

거울 속의 남자는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라파엘은 거울 속의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창백한 얼굴에 차가운 눈,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표정. 그게 자신이었고, 지금은 자신의 모습 그대로 거울에 비치고 있었다.

“안네마리 님.”

마리의 유모였다던 소피아가 그를 불렀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소피아와 그녀의 뒤로 정렬해 있는 시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체인 남자를 보고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그녀들이 갑자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십여 벌의 드레스가 동시에 내려앉는 것을 라파엘은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희를 써주십시오.”

소피아의 말에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일은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다. 무슨 일이든 인간이 많으면 배는 산으로 올라가기 마련이다. 라파엘이 거절하려고 했지만 소피아의 뒤, 왼쪽에 있던 하녀가 말했다.

“저희는 마리 님이 태어나신 후부터 왕세자빈이 될 때까지 모셨습니다.”

“그분은 자살하실 분이 아닙니다.”

“모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살이 아닙니다. 그분은 신실한 분이었습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고 여인들이 줄지어 말했다. 그녀들은 라파엘을 여자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었다. 라파엘의 목젖까지는 약으로 누를 수 있었지만 본래 남자인 그가 여자로 보이기 위해서는 상당히 공이 들었다. 라파엘은 2주일간 가능한 한 달콤하고 기름진 것들을 먹으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근육을 없애고 지방을 채우기 위해서였다. 라파엘은 살이 잘 찌지 않는 타입이라 지방이 채워지진 않았지만 2주일간 누워만 있자 확실히 근육이 조금은 소실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2주일밖에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큰 효과는 없었다.

라파엘의 발이나 손에 맞는 물품들을 만들어낸 것도 다 그녀들의 몫이었다. 마리와 키는 비슷해도 라파엘은 남자였다. 손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 손발을 작게 보이게 하기 위해, 그리고 여성 사이즈가 아니라는 것이 들통 나면 안 되니 업자를 부를 수 없었다. 모든 것은 직접 하녀들이 만들었다. 라파엘은 이 계획을 아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우려를 표했지만 하녀들은 도리어 적극적이었다.

“저희를 데려가주십시오.”

“시녀로서 완벽히 해내겠습니다.”

“저희가 안네마리 님을 지켜드리겠습니다. 누구도 안네마리 님의 진정한 모습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의 위장은 우리가 지키겠다, 그러니 우리의 주인이었던 그 가여운 아가씨의 사인을 밝혀달라, 그녀들은 그렇게 애원하며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위험할지도 모릅니다.”

“어차피 왕의 특수군이 오게 되면 저희도 죽은 목숨입니다. 떠들 입은 전부 땅에 묻는 것이 그들의 법도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는 진실을 알고 싶습니다. 어째서 저희의 자랑스러운 아가씨가 그렇게 되셨는지.”

마리는 왜 죽었을까.

몰락을 앞에 둔 사람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것이었다. 가장 자랑스럽고 찬란하고 고귀하던 여자는 왜 죽음을 선택했는가. 그녀가 홀로 죽음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 심지어 아무도 정확한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 모두를 고통에 빠뜨렸다.

“안네마리 님께서 암살의 전문가시라면 저희는 위장과 치장의 전문가입니다. 맡겨주십시오. 어느 누구보다도 아름답게, 어느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게 도와드리겠나이다.”

“모쪼록 도와드릴 수 있게 해주세요!”

유모와 시녀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는 걸 내려다보던 라파엘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들의 말이 옳았다. 라파엘은 여자에 대해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없었고, 친하게 지내는 여자도 없었다. 여자로서 위장을 하기엔 그 자신이 너무나 부족했다. 그러나 유모의 말대로 그녀들은 전문가였다. 그녀들이 그를 여자로 보이게 해줄 것이다.

“만에 하나의 경우, 저는 여러분을 지키지 못합니다.”

“저희의 몸은 스스로 지킵니다.”

“절대 폐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거치적거리지 않을 겁니다.”

라파엘이 데려갈 것 같자 여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얼굴을 보면서 라파엘은 단 한 번 보았던 미소녀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의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도 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유모와 하녀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라파엘은 나체인 상태로 성큼성큼 걸어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유모가 무릎걸음으로 다가와 두 손으로 검을 받았다. 잠입하면서 이 검을 가져간 적은 없었다. ‘트윈스’라고 불리는 쌍검이었다. 하나는 루비가, 하나는 사파이어가 장식되어 있는, 장인이 만든 검이었다. 양날의 검이었는데, 그 검은 라파엘이 길드에서 자유롭게 되고 나서도 1년 뒤에나 살 수 있었던 물건이었다. 그나마도 1년치의 수입 대부분을 쏟아부어서 사야 했다.

라파엘은 길드에서 검을 배울 때 후퇴는 배우지 않았다. 길드에서 살수를 기르는 방식은 늘 그러했다. 도망칠 바엔 죽어라. 잡힐 바엔 죽어라. ―그렇다고 해도 죽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 대부분은 도망치지 못하고 잡혀서 고초를 당하다 죽었지만.

반드시 죽여라.

필살의 검술만을 배우는 살수들이었다. 그러나 사실 양날의 검을 쓰는 건 라파엘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자신을 벨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을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라파엘은 검에 대한 경고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타인의 검은 빼보지 않는 것이 예의이고, 하녀나 유모들도 그 점을 잘 아는지 한 번도 검을 빼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녀가 가져온 구두에 몸을 올려놓는다. 처음엔 발가락에 체중이 실려 움직이지도 못할 것 같았지만 이제는 그래도 움직일 수는 있었다.

하녀들이 라파엘의 몸에 철사로 된 올인원 페티코트를 고정한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강하게 허리를 조여 여성의 잘록한 허리를 억지로 만들어내고, 그 위에 눈부시게 하얗고 레이스가 아름답게 장식된 속옷을 입힌다. 다시 그 위에 눈처럼 흰 드레스를 입혔다.

페티코트와 구두 때문에 라파엘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옷을 입을 때 앉는 전용 의자 위에서 하녀들이 머리 위로 드레스를 씌워주길 기다릴 뿐이었다. 옷을 입고 구두를 확인한 하녀들이 고개를 저으며 다른 구두를 가져왔다. 수십 켤레의 구두를 신어본 뒤 구두가 결정되자 구두를 벗기고 스타킹을 신겼다. 가랑이까지 올라오는 스타킹은 끝이 레이스로 장식되어 있었다. 라파엘이 다시 구두에 올라서자 구두의 흠집 하나, 장식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살핀 하녀들이 이번엔 머리를 손질했다.

“맙소사.”

들어오던 제럴드가 탄식했다.

“정말 아름답군.”

“……여자로 보입니까?”

“보일 뿐이야? 정말로 아름다워. 사교계의 모든 남자들이 너를 원할 거다, 안네마리.”

라파엘이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까진 필요 없는데요. 왕이 모를 정도기만 하면 됩니다.”

“그 남자는 족제비 같은 놈이지만, 알아채지 못할 거다. 너는 지금 너무나 아름다워.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거야.”

“율레즈여.”

다시 탄식이 들렸다. 제럴드가 몸을 비키자 그의 뒤에 가려 있던 공작부인이 부채로 입가를 가리고 라파엘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곧 매서운 눈이 되어 “소피아!”라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유모를 불렀다.

“머리를 풀게 하란 말이야. 머리를 올리다니, 처음 왕비가 되는데 유부녀가 재가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머리를 내려!”

공작부인을 알게 된 이래 가장 험악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마님, 이 목선을 드러내야죠.”

“그래도 머리를 조금은 내려. 그 꼴이 뭔가, 품위 없게.”

공작부인과 유모가 살벌하게 의견을 나누는 동안 라파엘은 그녀 둘이 따라오든가 말든가 무심히 발을 옮겨 침실 중간에 들여놓은 마호가니 책상에 다가갔다. 커다란 책상에는 지도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왕궁의 정밀 지도였다.

“이건 제대로 된 거야?”

라파엘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라파엘은 입궁으로 들어가기 전 고서점에서 지도를 사서 확인했었다. 하지만 그 지도는 알고 보니 가짜였다. 왕궁 측에서 일부러 흘린 조작된 지도인 게 분명했다.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것보다 가짜를 뿌려 진짜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하는 게 혹여 지도가 정말 나돌더라도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이기 때문이다.

“근위대에서 쓰는 지도다. 물론 제대로 된 거지.”

“여기가 왕후궁 문 플레이스로군.”

왕후궁은 왕궁의 가장 안쪽 약간 왼쪽으로 세워져 있었다. 그리고 왕후궁의 탑과 이어지는 궁을 보고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왕의 침전과 이어져 있어?”

왕후궁에서 왕의 침전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였는데 그 사이를 잇고 있는 다리를 보고 라파엘이 눈살을 찌푸렸다.

“못 봤어? 허공에 길게 이어져 있는 그 다리를?”

제럴드가 못 본 게 신기한 것처럼 물었다.

“못 봤는데.”

“이어져 있어. 심지어 마법으로 떠 있는 다리지.”

“마법으로 떠 있는 다리.”

“그래.”

라파엘이 손을 들어 지도를 더듬었다. 왕후궁, 그리고 왕의 침전. 일곱 개의 문과 다른 궁을 지나 도착하는 최내부의 성. 만약 도망칠 일이 있다 하더라도 도망치는 게 어려울 듯했다.

“탈출은 어려워 보이는군.”

라파엘이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자 제럴드가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네가 원한다면 서대륙의 별장에…….”

“아니, 됐어.”

라파엘이 고개를 젓고 다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라파엘이 가본 것은 정문에서 문 플레이스까지였지만, 그가 가본 바로는 정확한 지도였다. 다른 곳은 어떤지 몰라도 그 길만은 정확해 보였다.

지도를 내려다보던 라파엘이 정원 내의 작은 표시를 가리켰다.

“이건 뭐지?”

“가든 하우스야.”

문득 라파엘의 머릿속에 메모가 떠올랐다. 마리의 시체에서 떨어지던 메모.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

“어디가 중앙 정원이지?”

라파엘이 묻자 제럴드가 “중앙 정원?”이라고 묻더니 한중간의 정원을 손가락으로 그려보았다.

“한 이 정도지. 특별히 중앙 정원이라는 게 나뉘어 있는 건 아닌데 이 정도야. 여기에 있는 게 사람들이 ‘왕궁’이라고 부르는 이그나치오궁이거든. 연회나 대전회의 등이 전부 여기서 열려. 이 궁을 둘러싸는 정원을 중앙 정원이라고 하지. 그런데 중앙 정원은 왜?”

“왕후궁의 외정원과 이어지는군?”

“그렇지. 정확히 나누는 게 아니라 대충 말하는 거라니깐.”

“왕궁의 외정원과도 이어지고?”

라파엘이 지도를 내려다보며 확인하듯 물었다. 왕궁의 가장 안쪽에는 세 개의 궁이 역삼각형을 이루며 서 있었다. 왕의 침궁인 선 플레이스, 왕후의 침궁인 문 플레이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한 발짝 나와 있는 듯한 모습으로 이그나치오궁이 서 있었다.

“중앙 정원은 왜?”

제럴드가 진지하게 물었다.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어서.”

“재미있는 이야기?”

마침 들어오던 에드워드가 제럴드보다 먼저 물었다.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에 뭐가 있다는 이야기. 당신들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인데.”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에? 그럴 리가.”

제럴드가 먼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고, 그 뒤를 이어 에드워드도 머리를 흔들었다.

“중앙 정원에 있는 거라고는 밀회하는 연인들뿐일 텐데. 그것도 파티에서나 볼 수 있는 거지,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을걸.”

“왜 없어. 지 물건 잃어버린 병신 같은 귀족들의 하인들이 가든 하우스에서 엉덩이를 쳐들고 바닥을 싹 훑어대는 모습이 있지. 밀회를 할 거면 그 정도는 미리 챙겨두란 말이야.”

제럴드의 말에 에드워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있지.”

바이런과 클레르.

그들이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에 있었다는 건가.

라파엘은 중앙 정원의 가든 하우스의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총 백여섯 개였다. 일일이 다 찾아보는 수밖에 없으려나. 라파엘은 혀를 찼다.

“내가 왕비가 되어서 할 일이 많을까?”

라파엘의 질문에 에드워드와 제럴드가 시선을 마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티파티와 알현 등등 몇 개 있긴 한데, 특별히 많진 않을 거야.”

“……그래.”

그렇다면 낮에 자면서 가든 하우스부터 뒤져봐야겠다. 마리는 죽을 때 그 메모를 몸에 지니고 있었다. 메모를 굳이 몸에 지니는 경우는 두 가지 중 하나의 경우에 해당한다. 하나는 바로 닥칠 일을 위한 메모인 경우. 어디를 찾아가거나 할 때의 메모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남이 봐서는 곤란한 메모의 경우.

아마도 이 메모는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는 건 마리가 곤란해하는 일 중 하나가 중앙 정원 가든 하우스 어딘가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라파엘은 고개를 들었다. 이제 곧 궁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네마리 제1왕비의 책봉식은 저녁에 있을 예정이었다.

§  §  §

“오늘 왕비를 맞이하신다지요?”

남자가 요염한 얼굴로 물었다. 아이브리는 한 달이 넘은 정부의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며 대답했다.

“왜, 네가 원하는 자리인가.”

왕의 입술이 떨어지려 하자 남자가 왕의 목에 나긋하게 팔을 감고 입술을 붙이며 속삭였다.

“전하, 농은 싫습니다. 왕비 전하가 또 쇼어 가문의 사람이라 들었습니다.”

“왕비 최다 양산 가문 아닌가. 그 정도밖에 쓸모가 없으니 왕비라도 재깍재깍 갖다 바쳐야지.”

“허나, 또 불경한 일이 생기면…….”

“건국 이래 망하지 않던 유일한 가문이 망하고,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사람들이 깨우치게 되겠지.”

왕이 아무렇지도 않게 멸문을 말했다.

왕은 냉혹한 남자다. 남자는 왕의 냉혹함을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왕이 5백 명의 대귀족 중 3백 명을 죽이고 그들의 2백여 가문 사람들을 몰살한 이야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것이다. 즉위 축하연에서 정적을 전부 처리하고 그 피가 검에서 채 사라지기도 전 그들의 저택으로 달려간 특수군이 귀족들을 몰살했다. 단지 하룻밤이었다. 단 하룻밤에 모든 것이 달라진 것이다.

심지어 왕은 사람들이 떨고 있는 그 축하연에서 한 남자를 안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40대의 백작이 알궁둥이를 까고 범해졌다. 그 모습을 보진 못했으나 듣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서늘해질 일이었다. 그 백작은 심지어 한때는 왕의 검술 스승이었던 자였다.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범해지고 나중에는 왕을 받아들인 구멍으로 검까지 받아들여야 했다. 검집째 받아들여 죽진 않았으나 차라리 죽이는 것이 더 자비로웠으리라.

“전하.”

침대에 아직 누워 있는 정부가 옷시중을 받고 있는 왕의 곁으로 기어와 눈웃음을 지었다.

“청이 있나이다.”

정부의 마디 굵은 손가락이 왕의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다. 단단한 허벅지였다. 왕이 쌍꺼풀이 없는 대신 크고 긴 눈을 내리깔았다. 그림에서나 본 것같이 아름다운 눈이 정부를 향했다.

“해봐라.”

“태양이 빛나는 토지를 봐두었습니다. ……한때 서부 신전의 것이었더군요.”

“고시아 말이냐.”

“예. 그곳에 별장을 지으면 아름다울 것 같나이다.”

그렇게 말하며 정부가 왕의 사타구니를 어루만졌다. 끈적끈적한 눈길에 왕이 웃음을 터뜨렸다.

“베갯머리송사가 제법 깜찍하단 말이지. 어디, 그 입이 얼마나 비싼 입인지 즐겨봐주지.”

왕의 말에 정부가 허겁지겁 왕의 옷차림을 풀어헤치고 반쯤 선 성기를 물었다. 커다란 성기였다. 지난밤 내내 그의 엉덩이를 쑤시던 페니스를 다시 보자 정부는 자신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이면서 왕의 것을 물고 느릿하게 머리를 움직였다. 전후로 느릿하게 움직이자, 스치는 점막의 느낌으로 참을 수 없는지 왕이 신음을 터뜨렸다. 왕의 언뜻 보면 가늘어 보이는 긴 손가락이 정부의 갈색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거칠게 머리칼을 휘어잡은 왕이 짐승처럼 허리를 움직였다.

읏, 하읏―. 정부가 신음 소리를 내며 왕의 엉덩이를 잡고 매달렸다. 목젖까지 닿을 듯한 길고 두꺼운 몽둥이 때문에 침이 계속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숨이 막혔다. 끝이 날 듯 끝이 나지 않는 사이 정부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괴로운 얼굴을 보며 왕이 혀를 내밀어 스스로의 입술을 훔쳤다.

그리고 퍼억, 소리가 나도록 하반신이 정부의 얼굴에 부딪쳤다. 왕의 허리가 움찔거렸다. 정부가 숨이 막힌 듯 벗어나려 했지만 왕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왕의 것을 마셔야 했다. 입술을 타고 침과 정액이 섞여 흘러내렸다. 투둑, 투둑. 붉은 천 위로 정액이 떨어지는 것이 마치 피 위에 눈이 떨어지는 듯했다.

왕이 사정의 마지막을 즐기며 뒤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종장에게 물었다.

“왕비의 이름이 뭐랬지?”

“안네마리 라 쇼어입니다.”

“너무 타이밍이 좋다고 생각하지 않나.”

사라졌던 계집이 갑자기 나타난다, 라. 이렇게나 타이밍이 좋게? 왕이 스산한 얼굴로 묻자 시종장이 허리를 깊게 숙였다.

“확인해보겠습니다.”

왕은 정부를 내려다보았다. 옷을 다 벗은 채로 자신의 것을 먹고 있는 정부의 엉덩이가 달달 떨렸다. 정부는 다른 곳은 다 괜찮았지만 저 펑퍼짐한 엉덩이가 별로였다. 제법 남자 맛을 아는지 구멍도 느슨했다. 이제 슬슬 처리할 때가 되었는데, 라고 생각하면서도 왕은 정부의 입에 계속 정액을 들이붓고 있었다. 정부가 눈을 까뒤집은 채 경련하고 있는 꼴을 보니 정액이 기도로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뭐, 상관없지.

왕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부의 입에서 성기를 빼내고 있었다. 정부가 바닥으로 엎어져 쿨럭쿨럭 기침을 뱉었다.

“베갯머리송사를 하기엔 입이 별로구나. 차라리 헐렁한 구멍이 낫겠는데.”

“저, 전하?”

“다음부터 나라 최대의 초원을 달라 할 거면 능력을 좀 키우도록 해. 네 몸이 그 정도의 가격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말이지.”

시종들이 왕의 성기를 깨끗하게 닦고 섬세한 손길로 옷을 추스르는 동안 왕은 정부를 내려다보았다. 기침을 뱉을 때마다 정부의 입에서 정액이 튀어나온다. 그것이 욕정을 자극하는 때도 있었는데, 이젠 그저 짜증이 날 뿐이었다.

“왕비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전히라.”

왕이 싱긋 웃으며 시종장을 돌아보았다.

“이쁘더냐?”

시종장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어떤 대답을 바라시나이까?”

“훌륭한 시종장의 고견을.”

“……평범하더이다. 시녀들의 실력이 제법이더군요. 잘 가리긴 했는데 여인치고는 선이 살짝 굵었습니다.”

왕이 흐음 하는 소리를 냈을 때 마침 치장이 끝났다. 왕이 움직이자 시종장과 시종 둘이 바짝 따라붙고 그 뒤로 근위병들이 길게 늘어섰다. 왕이 걸으면서 시종장에게 재차 물었다.

“사내 같은 여인이더냐?”

우락부락한 남자 같은 여자를 생각했는지 왕이 키득거렸다. 시종장이 고개를 저었다.

“작고 몹시 말라서 낯이 아주 창백했습니다. 건강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묘하게…… 선이 굵었습니다.”

“뭐, 사내놈 같으면 옆에 낄 맛이 나니 차라리 잘되었지.”

“사내처럼 보인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당연히 아니어야지. 사내처럼 보일 바에는 사내를 들여앉히는 게 낫지 않겠는가.”

왕의 말에 시종장이 그저 고개를 숙여 보일 뿐이었다.

“어떤 여자지?”

“안네마리 라 쇼어. 올해 스물세 살입니다. 마리 트리지아 왕비와 같은 나이이고, 사촌동생입니다. 몸이 아주 약한 듯합니다. 아무래도 그런 고초를 겪었으니까요. 쇼어가 측에서는 시녀들을 대동하겠다는 연락을 해왔습니다.”

왕이 문득 멈춰 섰다.

“시녀?”

왕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시종장의 허리가 더 낮아졌다.

“예.”

왕이 무슨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시종장은 그런 그를 바라보지 않고 있었다. 길고 높은 복도에서 모두가 왕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것을 둘러본 왕이 “그래”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죽어 자빠질 바에는 시녀라도 붙여줘 숨통을 좀 틔워주는 게 낫겠지. 그러나 시녀를 제외한 가족들에게는 알현 외의 만남은 허락하지 않겠다.”

모두가 알아들었다는 듯이 허리를 더 숙였다. 왕이 다시 걷기 시작하자 사람들도 따라붙었다. 왕이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할 즈음이 되자 경비병 넷이서 문을 힘겹게 열었다. 왕이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도록 타이밍을 맞춰서 문이 활짝 열리자 왕이 바로 들어섰다. 대전의 옥좌에 앉은 왕이 이미 옥좌 앞에 무릎을 꿇고 대기하고 있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들어라.”

안네마리 라 쇼어가 고개를 들었다.

왕은 시종장의 대책 없이 높은 눈에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남자밖에 관심이 없는 왕의 눈에도 안네마리는 아주 아름다웠다. 반짝이는 검은 눈도 그렇거니와 반은 올려 뒤통수에서 동그랗게 말고 나머지 반은 자연스럽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도 그랬다. 입술은 싱싱하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선명하고 화장을 한 얼굴에선 기품이 넘쳤다.

비록 화장 아래의 얼굴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이 상태로는 대단한 미녀가 아니던가. 마리 트리지아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만년 소녀 같던 마리 트리지아와는 달리 안네마리 쪽은 요염함이 있었다.

“아쉽군.”

머릿속으로 생각한다는 게 입 밖으로 나와버렸다. 정말 아쉽기 때문에 나온 말이리라.

왕은 피식피식 웃음의 잔재를 흘리며 말을 이었다.

“사내였다면 내 품에 넣었을 텐데. 아무리 마음에 들어도 계집이니 아쉽기 그지없구나.”

안네마리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왕이 남색가라는 이야기는 분명 들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이 왕비로 추대된 것도, 사촌 자매가 자살한 것도, 영문을 몰랐을 테니까.

남색가이긴 해도 남색질에 대해 대놓고 말할 줄 몰랐던 건가. 왕은 냉랭하게 생각했다.

“안네마리라고 했던가.”

“예, 전하.”

목소리는 묘하게 낮았다. 영롱하다 찬사받던 마리 트리지아의 목소리와는 달랐지만 왕은 이쪽의 목소리가 더 마음에 들었다.

“제1왕비로 책봉한다. 의무만 다한다면 어떤 놈과 뒹굴든 상관하지 않겠으나, 의무를 저버린다면 너와 단 한순간이라도 닿은 자들은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하리라.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느냐?”

자살을 선택하면 조금이라도 안면이 있는 자는 전원 죽여버리겠다는 살벌한 경고였다. 안네마리는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라파엘은 고개를 숙인 채 머리 위에 있을 남자에게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는 아름다웠다. 라파엘이 본 사람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쇼어가는 대대로 미형을 배출하는 가문이었고, 그래서 유독 왕비 배출이 잦았던 가문이기도 했다. 공작부부는 물론이거니와 에드워드처럼 섬세한 미남자도, 제럴드처럼 근육질 미남자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왕처럼 아름답진 않았다.

아니, 어쩌면 왕은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는 에드워드처럼 섬세하지 않았고, 제럴드처럼 근육질이 두드러지는 사내다운 외모도 아니었다.

태양.

그를 보는 순간 라파엘의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그것이었다. 태양. 너무나 반짝이게 아름다운 자. 왕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는 얼굴이 몹시 작았고, 목이 길었고, 몸매는 적당한 근육질이었다. 구름을 밟는 듯 가벼운 그의 걸음걸이는 그가 무술 고수임을 알려주는 표식과 같았다. 시원한 입술은 청량감이 넘쳤고 금빛 머리칼은 반짝였다. 그의 푸른 눈은 지독하게 차가워 보였지만 다른 것들과 어우러지자 그저 아름다운 그림을 보는 기분만 들었다.

“뭐지? 짐이 그렇게 좋은가?”

왕이 피식 웃었다. 제 사촌 자매를 죽게 한 원흉이 앞에 있는데도 그저 넋만 잃고 있는 순진한 여자에게 던지는 조롱이었지만 상대는 알아듣지도 못한 듯 멍하니 입을 열었다.

“아니요, 좋지는 않습니다.”

“좋지는 않다라?”

“네, 좋지는 않습니다.”

제법 강단도 있네.

왕은 잠시 팔짱을 끼고 안네마리를 내려다보았다. 팔이라도 살짝 꺾어서 강단 대신 순종을 알려줄까 하는 생각이 안 들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내내 자신과 시선도 못 마주치고 떨기만 하던 인간들만 보다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는 타인을 만나자 조금 더 즐기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즐기다 짜증이 났을 때 꺾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래? 싫은 남자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야 하다니 유감이겠군. 그러나 벌써부터 싫어하지 않는 게 나을 거야.”

한 달쯤 지나면 정말 싫은 게 어떤 건지 알게 될 거거든.

왕이 말하면서 슬쩍 입술을 올렸다.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그 입술 끝을 주시했다. 몹시 청량감이 느껴지는 입술이었다. 그런데 왜 내 입술이 마르지?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며 왕을 바라보다 아 하고 가볍게 신음했다. ‘싫은 남자와 결혼 생활을 이어가야 하다니 유감’이라는 부분에 신경이 갔기 때문이었다. 싫어한다고? 왕을 좋아할 일도 없지만 싫어할 일도 없다. 그들은 지금 처음 만난 것이었다. 아니, 만나기는 예전에 한 번 더 만났지만, 모포로 둘러싸였을 때는 왕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왕비를 궁으로 안내해라.”

왕이 대전을 나서려다 말고 라파엘을 돌아보았다. 싸늘한 얼굴이라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몹시 냉혹해 보이는 얼굴인데, 그런데도 그 얼굴이 아주 근사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분명 매혹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은 일단 쉬는 게 좋겠지.”

‘오늘은’이라든가 ‘일단’이라는 단어가 상당히 차가웠는데도 라파엘은 이제 더 이상 그런 냉기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는 멍하니 왕을 바라볼 뿐이었다. 마리 트리지아가 저 왕을 싫어해서 목숨을 끊었다는 것이 일반적으로 도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라파엘은 순간적으로 ‘어떻게 그를 싫어할 수가 있을까’라고 생각했다.

그 스스로도 자신이 이상했다. 왕은 몹시 아름다웠지만 그러나 에드워드나 제럴드와는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에드워드나 제럴드도 분명히 아름다운 남자였다. 공작 부부도 나이는 들었지만 아주 아름다웠다. 그러나 라파엘은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선 시선을 돌릴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렬한 무언가가 있다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왕비?”

왕이 그를 불러서 라파엘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그대가 기거할 궁이 문 플레이스라는 이야기는 들었나?”

그 말에 라파엘의 뒤에 있던 시녀들이 순간 움찔 몸을 떨었다. 왕후가 자살한 궁을 준다는 건 공개적으로 핍박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왕의 냉혹한 말에 각오를 하고 왔음에도 시녀들이 떠는 것과는 달리 라파엘은 멍하니 왕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듣지 못했습니다.”

왕이 혀를 찼다.

“네 궁은 문 플레이스다.”

그건 왕후궁일 텐데 일개 왕비인 자신이 써도 되는가 하고 잠시 의문을 가졌던 라파엘이 고개를 숙이며 “황공합니다, 전하”라고 법도에 맞는 인사를 했다.

“문 플레이스 안이라면 어디에 있어도 괜찮다.”

다시 말하자면 문 플레이스 밖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라는 경고였다. 즉, 감금하겠다는 의미였다.

“식사나 기타 생활비는 예산안 안에서 써라. 추가 예산 요청은 받지 않겠다.”

돈에도 제한을 두겠다는 말이었다.

“매일 아침 티파티는 반드시 해라. 손님이 있든 없든 의무를 저버리지 마라. 티파티든 알현이든 마찬가지다.”

왕후가 자살한 왕후궁에 들어선 얼굴마담에 불과한 왕비. 어느 귀부인이 왕비의 티파티에 참석하겠는가.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비참해보라는 뜻과 다름이 없었다.

“알아들었나?”

왕이 다시 돌아보자 라파엘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문 플레이스에서 기거하며 그 안에서만 움직일 것, 생활은 예산안 안에서 할 것, 추가 요청은 하지 말 것, 매일 아침 티파티를 비롯한 모든 의무를 저버리지 말 것.”

왕은 안네마리가 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녀는 그저 담담히 왕의 명령을 읊어볼 뿐이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안네마리의 얼굴에선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았다. 여전히 시선은 좀 멍했지만 그녀는 전혀 동요하지 않고 있었다. 자살한 왕후궁을 줘도, 돈에 대해서 치사하게 굴어도, 치욕적인 매일의 일과를 내려도 그녀는 담담할 뿐이었다.

왕은 심술이 조금 가시고 말았다.

“그럼 나중에 보지. 볼 일이 있다면 말이야.”

그렇게 말하고 왕은 서둘러 대전을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는 시종장에게 “문 플레이스에 예산을 넉넉히 배치해라”라고 명령했다. 시종장이 조금 커진 눈으로 바라보자 그가 피식 웃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냐. 내가 저 여자를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았느냐.”

웬만한 귀족 아가씨를 강제 수단을 동원, 왕비로 들어앉혀놓고선 자살한 왕후의 궁을 주며 한 발짝도 나오지 말라고 하면 그것만으로도 그녀는 미칠 것 같은 심정이 될 것이다. 게다가 생활비에 대해서는 일절 참견도 못 하게 하면서 아무도 오지 않을 게 분명한 티파티 따위를 하라고 하면 수치심에 죽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짓을 저질러놓고선 왕은 태연하게 잡아먹기라도 할 줄 알았냐고 되묻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지만, 시종장은 티를 내지 않았다.

“관대하신 듯하여…….”

“사실은 더 쥐어 짜내줄까 싶었는데 의외로 강단도 있고 표정 관리도 좋지 않은가. 어차피 다른 것만으로도 돌아버리려 할 텐데 돈 정도는 풀어줘.”

하긴, 예산이 아니어도 미칠 것 같긴 하겠지.

시종장은 “황공합니다”라고 대답하며 왕비를 떠올렸다. 그래도 왕비가 되면 티아라도 씌워주고 하는 책봉식이 있기 마련인데 왕은 그 정도도 해주지 않았다. 티아라는 왕후궁으로 이미 보내놓았다. 쓰려면 네 손으로 직접 쓰라는 뜻이었다. 하나하나가 빈정거림으로 가득 찬 모욕이었다. 잘해줄 생각 따위는 일절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너는 얼굴마담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처음부터 길을 들일 생각이었던 것이다. 왕의 뜻을 잘 알고 있는 시종장은 그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물론 다른 귀족 아가씨였다면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유모를 붙잡고 울었을 것이다. 이제 나는 어쩌면 좋냐고, 이 어둡고 무서운 왕실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느냐고 아가씨는 유모에게 안겨 두려워했을 것이다. 아름다우나 아내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왕과, 왕의 뜻에 따라 왕비에게 예를 차리지 않는 시종들을 보며 그녀는 며칠 밤을 눈물로 지새워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파엘은 왕이 가자마자 멍한 눈으로 왕이 나간 문을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지? 그는 멍하니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왕을 만났을 뿐이었다.

여장을 한 채로 무릎을 꿇고 앉아 왕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도 뭔가 대단한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역시 왕을 만난다는 건 정신적으로 꽤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라파엘과 일행이 마차를 타고 문 플레이스로 향하는 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하녀들 사이에서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왕이 노골적으로 왕비를 모욕했다. 그렇다는 건 그들의 어린 여주인, 마리 트리지아도 이런 치욕을 참으며 왕후가 되었던 것일까. 그 고귀한 아가씨는 결국 이런 모욕을 참지 못하고 목숨을 버리고 말았나.

문 플레이스에 도착하자 하녀들의 입에선 노골적으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왕후궁은 을씨년스러웠다. 밖에서 보았을 때는 하얀 건물이 아름다웠지만 안쪽은 엉망이었다. 먼지에 거미줄까지 너무나 엉망이라 하녀, 아니, 이제 시녀가 될 여성들의 입에선 신음만이 흘러나왔다.

“일단 치워야겠군.”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그는 궁으로 오는 마차 안에서부터 시녀들에게 반말을 했다. 안네마리인 그가 시녀들에게 존대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처음엔 좀 어색하더니 곧 익숙해졌다.

라파엘의 말에 시녀들이 딱딱하게 표정을 굳힌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치운다고? 여기를? 그녀들은 질린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여기를 도대체 어떻게 치운단 말인가.

그러나 라파엘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자 일은 일단락되었다. 시녀들이 찾아낸 청소 도구를 가지고 라파엘도 궁을 치우기 시작했다. 창문을 죄다 활짝 열고 일단 그가 쓸 침실부터 치우기 시작했다. 시녀들도 각자 자신들이 쓸 방부터 치웠다. 왕후궁답게 시녀들이 쓸 방도 참 넓어서 모두 꽤 오랫동안 치워야 했다. 시녀들이 방을 다 치우고 돌아오자 라파엘도 자신의 방을 거의 다 치운 상태였다. 새하얀 웨딩드레스는 이미 먼지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이날을 위해 만든 하얀 송치가죽 구두도 이미 갈색과 회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유모가 달려와 라파엘의 뺨을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저희가 해드릴 것이온데…….”

“다른 데를 치워. 나는 확인할 게 있으니까.”

시녀와 유모가 잠시 머뭇거리자 라파엘이 한숨을 쉬며 그들을 돌아보았다.

“거치적거리지 않겠다고 했었잖아.”

그 말에 결국 그녀들은 나가버리고 라파엘 혼자 남게 되었다. 문 밖은 소란스러웠다. 소란스러운 이야기 소리, 꺄악 하고 놀라는 소리. 물걸레가 움직이고 뭔가를 쓰는 소리까지 다양한 소리가 났다. 라파엘은 홀로 방에 남아 밖의 기척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왕후궁에서 나왔다는 열쇠. 깃털 펜으로 위장된 열쇠를 떠올린 라파엘은 일단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거칠게 열었다. 단정하게 놓여 있는 편지지며 메모지 따위를 확인하고 서랍을 뒤집어 틈이 있는지 꼼꼼히 살폈다. 어딘가에 열쇠가 맞는 홈이 있을 것이다. 열쇠가 깃털 펜이라는 건 자물쇠도 이 근처 어딘가에 있을 확률이 컸다. 가능한 한 남이 이상히 여기지 않는 곳에 자물쇠를 두었을 테니까.

도대체 뭘 숨긴 것일까.

라파엘은 책상을 샅샅이 뒤졌다. 특별한 메모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장신구도 없었다. 아마도 왕후궁의 시녀였던 여자들이 팔아먹었기 때문이겠지.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손가락으로 책상을 더듬었다. 그러나 손끝에도, 시야에도 자물쇠로 보이는 구멍 따윈 보이지 않았다.

책상이 아닌가?

라파엘은 다음으로 깃털 펜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딜까 생각했다. 책장일까 싶어 책장을 살폈지만 어디에도 자물쇠는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책을 하나하나 살펴보았지만 금고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은 없었다. 모두 다 그냥 책이었다. 책이 꽂혀 있는 것도 특별한 기준이 있어 보이진 않았다. 책을 전부 빼고 안쪽을 살펴도 별다른 장치는 없었다.

이렇게 금방 나올 리가 없나.

라파엘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주변을 휙 둘러보았다. 깃털 펜이 있을 만한 곳이 어디일까.

“왕비 전하.”

라파엘이 방 한가운데에서 방의 구석구석을 눈으로 훑으며 자물쇠가 있을 만한 위치의 후보를 꼽아보는 사이 유모가 들어왔다.

“일단 침실부터 궁의 입구까지는 치웠습니다만 제대로 치우는 데는 한 달이 넘게 걸릴 것입니다. 문 플레이스는 큰 궁인데다 소소한 가구가 많아 오늘 내에 치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천천히 치워도 돼.”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며 주변을 살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에 자물쇠의 열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왕비가 뭔가를 넣어놓았을 비밀 금고가 어딘가에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가 없다.

방을 둘러보며 고민에 빠진 라파엘의 옆에서 유모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대체 저흰 어떻게 되는 걸까요?”

“뭐가.”

“전하께오선 왜 문 플레이스를 내리신 걸까요. 그분은 전하를 싫어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라파엘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날 싫어한다고?”

왕은 왕 자신을 싫어하냐고 물었지, 라파엘을 싫어한다고 말하진 않았다. 그런데 유모는 당연한 듯이 왕이 그를 싫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라파엘이 고개를 돌리자 유모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오지 않는 티파티를 멈추지 말라니, 얼마나 냉혹한 말씀이십니까.”

좀 꼴이 웃기긴 하겠지만 냉혹하다고 할 것까지야. 왕의 말마따나 의무라면 더더욱 냉혹하다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라파엘이 그 점을 지적하자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유모가 코웃음을 쳤다.

“본래 티파티란 귀부인들의 알현을 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왕비 전하를 알현하고자 하는 귀부인들을 따로 만나 보호하기 위해서지요. 그런데 귀부인들이 여기로 올 리가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여긴 왕후 전하께서 스스로 돌아가신 궁이니까요.”

게다가 하고 유모가 목소리를 낮췄다.

“그 악랄한 자들은 쇼어가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 거대한 재산의 콩고물이라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이니까요. 왕비 전하가 쇼어 가문 사람이라는 걸 아는 이상 오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파르르 떠는 유모를 보고 라파엘이 피식 웃었다.

“잘 모르겠지만 사람은 오지 않을수록 좋아.”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밤에는 바쁠 테니 아무도 없으면 잘 수 있겠군.”

“차라리 그러면 좋으련만, 반드시 티파티를 하라는 명령이지 않았습니까?”

“사람도 없는데 말까지 하라고 할 순 없잖아? 의자에 앉아서 졸면 되지.”

라파엘이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유모의 반응을 보고 왕이 한 말이 상당히 모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제야 했다. 하지만 라파엘에게는 모욕적이지 않았고, 그는 도리어 왕의 얼굴을 보느라 정신을 팔고 있었다. 왕이 아름답긴 했지만 그 생각으로 그에게 홀렸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냥 그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마음 편하신 분이로군요.”

유모가 억울하다는 듯이 라파엘을 책하자 그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뿐. 나머지야 무슨 생각을 하든, 어떻게 돌아가든, 내가 알 바 아니야.”

그 말에 유모가 입을 다물었다. 라파엘은 팔짱을 끼고 열린 창 밖을 직시했다. 황량한 정원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같이 황량한 정원. 마치 왕후궁의 진정한 주인이 죽어 모든 생명이 피어나길 거부하는 것처럼 황폐한 곳을 내려다보는 라파엘의 얼굴은 차가웠다. 유모는 그런 라파엘의 옆모습을 바라보며 눈을 내리깔았다.

그날 밤, 라파엘은 검은색 잠행복을 입었다. 유모를 비롯한 시녀들이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로 라파엘을 배웅했다. 라파엘은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자 결국 그녀들을 뒤로한 채 창 밖을 나섰다. 2층 침실에서 가볍게 잔디 위로 뛰어내린 라파엘은 중앙 정원으로 달려갔다. 마침 이그나치오궁에선 연회가 한창인 듯했다. 라파엘은 조심스럽게 벽에 붙어 천천히 움직였다. 아무래도 궁 가까이보다는 좀 멀리 움직여야 할 것 같았다.

“빌어먹을 남색가 새끼.”

누군가가 욕설을 뱉었다.

“괜찮아?”

어떤 여자가 그를 부축하며 속삭였다.

“아아, 괜찮아. 재스민.”

어, 어라?

설마 그 ‘재스민’? 라파엘은 당황해서 벽에 가까이 붙은 채 눈을 깜빡였다. 입궁 첫날 마주칠 줄은 몰랐는데. 아니, 재스민이라는 이름은 몹시 흔한 이름이니 다른 사람일 확률도 적지 않다. 라파엘은 단정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후크. 이렇게나 여위어선.”

……같은 사람이 확실했다.

의외로 궁중이라는 데는 한 발 걸으면 만나는 곳인가. 이렇게나 방대하고 드넓은데. 작은 도시만 한 크기의 왕궁에서 이토록 쉽게 만나다니 운이 지나치게 좋았다. 라파엘은 차마 고개를 내밀지 못한 채 너무 좋은 운에 대해 약간의 경계심을 품었다. 라파엘의 머리 위 발코니에서 누군가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라파엘은 숨을 죽였다.

“아아아―.”

“백작부인, 이런 데가 이렇게 젖어서는.”

“으응, 그러는 자기는 여길 이렇게 세우고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흑, 앙, 아앙, 좋아―.”

발코니에 나와서 하는 짓이 이런 짓인가. 라파엘은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머리 위에서 남녀가 정사를 벌이고 있다. 어딜 세웠다는 건지, 어디가 젖었다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하는 짓이야 비슷하겠지. 라파엘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정확히 모르지만, 정사라는 게 옷을 벗고 몸을 문대고 그러는 걸로 아는데 그럼 발코니에서 옷을 벗고 있는 건가.

귀족이란 독특하군. 라파엘은 혀를 내둘렀다. 사람이 나오자 곤란해진 건 그만이 아닌지 후크와 재스민은 살금살금 움직이고 있었다. 하필이면. 라파엘이 낭패감으로 남녀의 뒤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사방이 환하게 트여 있는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있었고, 라파엘은 그 뒤를 쫓아갈 수 없었다.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으니 다음에 만나도 알아챌 수 없으리라. 이렇게 놓치는 건 곤란했다.

라파엘은 손에 쥐고 있는 검의 손잡이를 휘익 돌렸다. 발코니의 남녀를 죽이면 벽을 타고 지붕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궁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도 그가 입궁한 날 사건이 일어나면, 그도 감시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

어째 운이 좋다 했지.

라파엘은 이미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정원 깊숙한 곳으로 사라지는 남녀의 등을 노려보았다.

“아앙, 자기, 응, 아, 좋아― 거기 더 찔러― 응, 앙, 크고 두껍잖아―.”

크고 두꺼워?

라파엘은 머리 위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크고 두꺼워? 남자가 덩치가 좀 있는 모양이지? 그런데 왜 크고 두꺼운 게 앙앙거릴 일인지 그는 잘 알 수가 없어 머리를 긁적였다. 이럴 때마다 매춘가에 가서라도 정사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알아놓을까 싶기도 하지만, 왠지 저렇게 가까이에서 스킨십을 한다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는 살수인데 옷을 벗는다는 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다는 뜻이었다. 그런 건 내키지 않았다.

“부인, 과연 문어단지로군. 쫙쫙 빨아들이는 게 일품이야. 더 조여, 더!”

라파엘은 단지에 문어가 가득한 것을 떠올리고 더욱 의아해졌다. 신사 숙녀는 알고 보면 문어가 가득 든 단지를 사이에 두고 뭔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걸까. ……대귀족은 문어를 가지고 장난을 치나, 그것도 파티에서? 대귀족들은 돈 많고 여유로워 심심해 미칠 것 같은 사람들이라 별걸 가지고 다 논다고 듣긴 했지만 문어라. 문어란 말이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

라파엘은 일단 물러서기로 했다. 발코니의 남녀는 쉬 돌아갈 조짐이 보이지 않았고 이미 그가 목표했던 타깃은 그의 시야를 벗어났다. 다음에도 만날 일이 있겠지.

라파엘은 이그나치오궁에서 물러났다. 살금살금 물러나 허공에서 한 번 크게 도약한 그가 나무 위로 뛰어올라 나무와 나무 사이를 점프해 문 플레이스에 도착했다. 2층 발코니에 도착하자마자 시녀들이 발코니 문을 양쪽에서 열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유모, 아니, 이젠 문 플레이스의 시녀장이 인사하자 그녀를 필두로 모든 시녀가 치맛자락을 들고 무릎을 굽혀 보였다.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발코니에서 내려왔다.

후크, 재스민.

하나 확실한 건 그 둘이 이그나치오궁에서 열리는 연회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둘은 왕궁의 시종과 시녀, 혹은 노예일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참석객이었을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연회장에서 나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참석자 명단은 입수가 가능할 것이다. 그 자신은 아닐지라도 쇼어가의 나머지 세 남자 중 누군가는 입수가 가능할 게 분명했다. 외무대신에 재무 비서관에 근위대장이니 명단을 입수하는 데 부족한 레벨은 아니리라.

“공작이든 소공작이든 제럴드든 상관없으니까 아무나 만나려고 하는데, 알현으로 그들을 만날 수 있을까?”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고개를 저었다.

“왕비가 되셨으니 당분간은 사가와의 연락을 자제하여야 하실 겁니다.”

“그건 왕궁의 예절인 건가.”

어차피 왕비가 되기 위해 들어온 곳이 아닌 만큼 왕궁의 예절을 지킬 이유가 없다. 라파엘이 그런 의미로 묻자 시녀장이 고개를 저었다.

“법도입니다.”

“……어떻게 안 되나? 그쪽의 힘이 필요해.”

“일단은 시간을 좀 흘리신 다음에 천천히…….”

라파엘이 혀를 찼다. 밤에는 움직일 수 있겠지만 그때는 이미 셋 다 출궁한 뒤일 것이다. 왕궁 내도 웬만한 소도시만 한데 이 왕궁을 검 두 자루만 달랑 들고 빠져나가는 것도 어림없겠지만 빠져나간다 쳐도 쇼어가까지 걸어갈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편지는 가능한가?”

“가능하긴 하지만 분명 내용이 전하의 귀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인편으로 보낼 수밖에 없겠군.”

라파엘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당신이 가도록 해.”

라파엘이 시녀장에게 말했다. 시녀장이 놀란 눈으로 라파엘을 바라보았지만 곧 허리를 숙였다. 마리 트리지아를 위해서라면, 그리고 그녀의 명예를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칠 수도 있다더니 허언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시녀장은 진중한 얼굴로 라파엘이 할 말을 기다렸고 라파엘은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셋 중 누구라도 괜찮아. 집무실에서 하룻밤 새우라고 전해줘.”

라파엘의 말에 시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에 바로 가.”

그렇게 말하고 라파엘이 침실로 들어오자마자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는 도자기 욕조가 들어왔다. 라파엘이 그 욕조 앞에 서자 시녀장을 비롯한 시녀들이 일제히 방을 나섰다. 나체를 보이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씻으려면 꽤 오랜 시간 동안 검을 손에서 놓게 된다. 치장 때도 무기를 몸에서 떼지 않는 라파엘로서는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목욕 시중만은 거절했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자 몸이 노곤해졌다. 겨울에도 따뜻한 물에 씻어본 적이 없는 라파엘이었지만 이 일에서 유일하게 좋은 점은 이런 사치를 누린다는 게 아니겠냐고 그는 생각했다.

근육이 풀리는 감각을 느끼며 라파엘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멍하니 무늬를 세던 라파엘은 혹시나 천장이나 샹들리에 따위에 자물쇠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천장은 상당히 높았다. 라파엘이야 물론 천장에 있는 자물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뭔가에 매달려서라도 열면 그만이지만, 마리는 그럴 수 없을 테니까 천장은 아니었다. 그녀가 뭔가를 숨겼다면 그곳은 그녀의 손이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어야 했다. 사람은 은밀한 비밀을 바로 옆에 감추고 싶어하는 법이니까.

오늘 내에 방 안에 있는 비밀 금고를 찾아내려 했는데 전혀 찾아내지 못했다. 그리고 찾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 후크와 재스민은 바로 눈앞에 나타났다가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마리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이는 건 일단 그 두 가지밖에 없으니 거기서부터 훑어볼 수밖에 없으리라.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티파티의 기원은 왕가에서 찾을 수 있다. 

이그나치오 4세의 왕후였던 로즈 왕후가 연 티파티가 기원으로, 후에 수많은 변형이 이루어졌으나 당시에 말하는 티파티의 형태는 조식 후의 디저트를 즐기는 형태였다. 쇼어 가 출신인 로즈 왕후에게는 소꿉친구가 여럿 있었다. 이그나치오 4세는 왕후에게 큰 관심이 없었으며, 왕후 또한 왕의 애정을 바라지 않았다. 왕후는 왕의 배경을 든든하게 해주었고, 왕은 왕후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왕후는 매일 밤 연회를 열었고, 소꿉친구들을 왕후궁인 문 플레이스에 머물게 하였으며, 그녀들과 함께 아침식사와 티파티를 즐겼다. 이 티파티에 초대된 인물들은 당시 사교계의 거물들로, 후에 이 티파티는 왕후의 세력을 보여주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그나치오 10세의 왕후였던 줄리아 왕후의 경우 몰락하여 한미한 집안에서 태어나 사교계에서 따돌려진 탓에 그녀의 티파티에는 아무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런 티파티를 ‘유령 티파티’라고 부른다. 이 ‘유령 티파티’는 당시에는 줄리아 왕후를 비참하게 만들고 왕을 분노케 하였을 뿐이나, 그 이후 왕과 왕후의 대립이 계속되며 왕이 왕후를 압박하기 위해 사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

‡『차와 쿠키와 케이크―티파티의 모든 것』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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