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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관대한 명령 (3/47)

제2장 관대한 명령

경비병은 흘끗 상대를 확인했다. 소개서에는 제럴드 라 쇼어 근위대장의 사인이 되어 있었고, 입궁 사유는 마리 트리아즈 왕후, 아니, 이젠 격하되어 왕비가 된 마리 트리아즈의 시체를 회수하려 한다는 내용을 읽은 그는 사색이 되어 상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상대가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후드 끝을 잡아 내리자 경비병의 얼굴이 흐려졌다. 너도 인생 참 불쌍하다. 어쩌다가 자살한 시체를 회수할 정도로 인생이 막장이 되었니. 얼굴을 보여주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도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소개서를 돌려주는 경비병의 앞에서, 라파엘 에반스는 더욱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게.”

경비병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안쓰러웠다. 반대편에서 경비를 서던 병사가 무슨 일이냐는 듯 눈짓으로 묻자 경비병도 눈짓으로 대답했다. 나중에 말해줄게. 그런 둘 사이에서 말 등으로 훌쩍 뛰어오른 라파엘이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말이 달렸다. 등에 매단 검집이 달그락거리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은 주변을 흘끗거렸다. 확인했던 지도와는 조금 다른 길이다. 아무래도 20년 전 왕궁 지도라더니 그동안 개축을 좀 한 모양이다.

나 혹시 길 잃은 건가. 라파엘은 주변을 둘러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다, 20년 전 왕궁 지도라고 해도 대충 길은 비슷할 거라고 했는데 어째서 전혀 다른 기분이 들지. 아무래도 지도 자체가 거짓이었나. 고서점에서 구한 것이었는데, 가짜 지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라파엘은 말을 세우고 주변을 살폈다. 그가 외우고 온 지도에 이런 곳은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 잘못 온 모양인데. 그는 자신의 정보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자 단호히 말을 돌렸다. 경비병이 있는 곳까지 돌아가 왕후궁의 방향을 물을 생각이었다. 덤불에서 튀어나온 여우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냥 보기에도 여우는 부상이 심해 보였다. 라파엘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말에서 내리고 말았다. 은여우였다. 그 털 때문에 귀한 동물인데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는 개처럼 쉽게 보일 정도라니 확실히 왕궁은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라파엘이 은여우를 덥석 붙잡았다. 여우가 그를 물려는 듯 이를 드러내는 걸 손으로 막은 라파엘이 손목의 붕대를 풀어 여우의 입을 막고 힘을 주어 다친 곳을 확인하려고 했을 때였다.

“라피, 왔구나!”

멀리서 들리는 이 목소리가 익숙하게 느껴지는 걸 이상야릇하다고 생각하며 라파엘은 고개를 돌렸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제럴드가 그의 앞까지 달려와 말에서 뛰어내리고 있었다.

“왜 없나 했더니 반대쪽으로 돌았구나. 그러게 내가……, 라피? 그게 뭐야?”

제럴드가 쪼그려 앉아 있는 라파엘의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라파엘의 손에 붙잡힌 것을 확인하더니 얼굴을 굳혔다. 그러나 라파엘은 이미 제럴드가 아닌 은여우를 내려다보고 있는지라 제럴드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총상인가.”

라파엘이 중얼거렸다.

탄환의 크기가 상당했다. 라파엘은 환부를 자세히 들여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위해 호흡도 가늘고 길게 하는 라파엘의 어깨 너머로 상처를 들여다보던 제럴드가 “빌어먹을” 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만난 내내 호들갑스럽고 뇌가 맑아 보였던 제럴드의 사나운 목소리에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씨발. 그래, 오늘이었지. 참.”

그리고 라파엘과 제럴드는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일반인이라면 듣지 못했을 말굽 소리와 땅의 진동을 동시에 느낀 그들이 서로를 마주 본다. 라파엘은 본능적으로 숨으려다 자신이 소개서를 내고 입궁했다는 걸 깨닫고 그냥 서 있으려 했지만 제럴드 쪽이 더 빨랐다. 제럴드는 라파엘의 말 등에 얹힌 붉은 모포를 꺼내 라파엘의 몸에 뒤집어씌웠다.

라파엘의 시야가 붉은 천으로 가려졌다. 라파엘은 모포를 쳐내려 했던 손을 주먹 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여긴 왕궁이었고 상대는 근위대장이다. 트러블을 일으켜서 좋을 상대가 아니었다. 게다가 멀리서 누군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아마 제럴드는 누군가의 시야에서 자신을 감추려 하는 듯했다. 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쇼어 근위대장?”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전하.”

왕의 목소리인 모양이다. 라파엘이 모포 속에서 조금 머리를 움직였다. 그 작은 움직임에도 제럴드가 모포 위로 움켜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제럴드의 긴장이 느껴져 라파엘은 왕이 보고 싶어졌다. 넉살 좋고 호들갑스러운 남자를 이토록 긴장하게 만든 사람은 도대체 어떤 인물일까.

“은여우 못 봤나? 분명히 맞혔는데 보이질 않는군.”

“못 봤습니다.”

“못 봤다……? 피가 유독 자네 옆에 고여 있는 기분이 드는데. 내 눈이 나쁜 건가, 자네 눈알이 상한 건가?”

“제 눈에도 보입니다만, 저는 모르는 피입니다.”

흐응, 왕이 코웃음을 쳤다. 어딘가 나른한 목소리라고 라파엘은 생각했다.

“그나저나 뒤에는 누구지?”

그 순간 제럴드가 라파엘의 팔을 세게 움켜쥐었다.

“……동생입니다.”

“동생? 그대에게는 동생이 하나밖에 없지 않았던가? 그나마도 이젠 없지만.”

“사촌 동생입니다. 저와는 조금 먼…….”

“남자?”

말이 천천히 움직여 가까이 오는 게 느껴졌다. 제럴드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모포를 사이에 두고 팔을 잡은 제럴드가 떠는 것을 느끼며 라파엘은 모포를 살짝 치우려던 걸 포기했다. 그는 왕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애가 아닌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왕은 좀 빈정대고 있긴 해도 귀에 부드럽게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떠는지 알 수가 없어진 라파엘이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왕이 말했다.

“실루엣은 사내놈의 실루엣인데.”

“여성이옵니다.”

“사촌이라. 쇼어가에 왕비 말고 또 여자가 있었단 말인가?”

“……송구하오나 안네마리이옵니다.”

“오호라, 그 실종되었던 계집을 찾았다라?”

왕과 쇼어가의 사이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왕후의 자살 때문인가. 라파엘은 왕의 조롱 섞인 목소리를 들으며 숨을 죽였다. 눈썰미가 좋은 남자였다. 방습 모포에 가려진 둔탁한 실루엣을 보고도 ‘사내’라고 생각할 정도라니.

제럴드가 떨리고 있는 팔과는 달리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율레즈와 전하의 덕분입니다.”

“그런데 왜 보고하지 않았지?”

“찾은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사옵니다.”

갑자기 왕이 호쾌하게 웃었다.

“사흘이라! 타이밍 한 번 죽이는군. 어째서 신은 이토록 타이밍을 기가 막히게 잘 맞출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인간이 그 타이밍에 신을 들먹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왕의 말에 제럴드의 체온이 서늘하게 식는 것을 느끼면서 라파엘은 왜 제럴드가 자신을 필사적으로 여자라 우기고 있는지 알 수 없어졌다.

“그래, 안네마리의 얼굴을 좀 보지.”

순간 제럴드의 팔이 채찍으로 맞은 것처럼 튀었다.

“전하께 보여드릴 얼굴이 아니옵니다.”

제럴드의 목소리는 여전이 여상한 듯 들렸지만, 라파엘은 제럴드가 상당히 당황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팔을 잡히지 않았더라면 제럴드의 당혹감을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그 떨리는 팔과 멀쩡한 목소리의 대비가 제럴드의 필사적인 허세를 느끼게 해주어,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알 수 없었던 탓이었다.

“어째서지?”

“화장도 하지 않은 얼굴입니다. 아뢰기 송구하오나 실종된 동안 좋지 않은 일들이 많아서…….”

“그렇게 상태도 안 좋은데 왜 입궁한 거냐?”

“왕비 전하를 거두기 위해서입니다.”

제럴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목소리는 진정하려 노력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철철 넘치는 원한이 있었다.

“이상하군. 분명 입궁한 자는 남자이지 않았던가? 그렇게 보고받았는데?”

“그자는 이미 왕후궁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쪽은 반대편이지 않사옵니까? 안네마리는 왕비 전하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따라왔을 뿐입니다. 정결한 분의 유품을 남자인 제가 만질 수는 없…….”

“자살을 했는데 정결해? 웃기지도 않는군.”

왕이 비웃었다. 아내의 자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시니컬한 태도였다. 당신밖에 없어, 라고 비통하게 울던 마리가 생각나 라파엘은 눈을 감았다. 마리가 왕세자빈 후보에 올랐을 때 그는 말로만 듣던 쌍둥이 여동생의 행복을 빌었다. 누군가의 행복을 비는 게 어색하긴 했지만 단 한 번 만난 것만으로도 눈이 환해지는 것 같은 분신이 잘되길 바라는 건 당연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죽었다. 삶을 빼앗는 자인 자신의 여동생은, 삶을 스스로 종결했다. 그리고 그의 남편은 그녀가 죽어도 애도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다.

제럴드의 팔이 떨렸다. 그는 모든 감정을 그 팔에 밀어붙이고 평소와 같은 태도를 보이려 애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안네마리라. 잘됐군. 그대들에게는 고마운 일이겠어.”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깃털 펜을 만지작거렸다. 입수한 이래 계속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마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자살한 걸까. 그녀의 구해달라는 간청이, 무엇에 대해서 구해달라는 건지 궁금해졌다. 그때는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마리 트리지아는 무엇 때문에 그토록 간절히 구해달라고 한 걸까.

“분명, 고아였지? 안네마리 라 쇼어.”

제럴드가 대답하지 않았다.

“쇼어가 태생이니 됐군. 어차피 얼굴마담이니 신력이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얼굴마담? 이게 무슨 소리야.

라파엘이 귀를 세우다시피 했을 때 제럴드의 가면이 떨어져 나갔다. 제럴드가 이를 가는 것처럼 나직하게 신음했다.

“전하.”

“그대들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계집이 어제 신전에 혼인 신고서를 제출했다는 걸 알고 있나?”

제럴드의 태도에도 왕은 전혀 거리낌이 없는 듯 물었다.

“자, 이제 내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고. 건국 이래 가장 명줄이 긴 명문가라고 해도 안심하지 않는 게 좋아.”

난 원래 오래 지속된 걸 부수는 게 취미거든. 그대도 잘 알 거야.

왕은 웃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는 내내 웃음기를 머금고 있어, 그냥 들으면 정말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용을 정확히는 알 수 없어도 왕은 지금 협박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 냉혹한, 용건의 기색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목소리에 라파엘은 입을 벌리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뺨에 닿았다. 모포를 사이에 두고 닿은 손에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잘 교육시키도록 해. 이번에도 무엄한 짓을 저지르면 그땐 가문에 책임을 묻겠다.”

손이 떨어졌다.

그리고 말굽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들으며 라파엘은 은여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종종 버려지거나 다친 동물을 구제해왔지만, 그렇다고 위험을 감수하고 구할 정도로 애착이나 사명을 느끼는 건 아니었다. 그냥 지나치지 않는 정도에 불과했는데 졸지에 여우 한 마리 구하려다 이런 꼴이 되었다. 라파엘이 가벼운 한숨을 쉬었을 때 갑자기 시야가 환해졌다.

제럴드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혼란스러운 눈을 올려다본 순간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라파엘은 자신도 모르게 왕이 사라졌을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밖에 없어.

마리의 절망으로 가득 찬 목소리는 아직도 라파엘의 귀를 울리고 있는데, 정작 그녀의 남편이었던 남자는 태연했다. 라파엘은 로브의 주머니 안에서 깃털 펜을 움켜잡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가자.”

제럴드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지만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마리를 데려가겠어.”

여동생에게 특별한 애정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곳에는 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울며 매달렸을 때 당연히 그는 왕세자빈 후보가 된 여자가 과민해졌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왕세자빈이 될 몸으로 길드에 거액을 주고 자신의 집까지 찾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어리석은 짓이라고만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다. 길거리를 지나다 다친 동물이 있으면 결국 안아서 집으로 데려갔었다. 지금도 라파엘의 손에는 은여우 한 마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피를 나눈 여동생은 구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괴로운지 알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살했다. 열두 개의 죄 중 가장 큰 죄를 선택했다. 그녀는 그 정도로 괴로웠던 것이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오빠를 찾아올 정도로 절박했던 것이다.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제럴드가 말한다. 그 얼굴에서 마리의 시체에는 다가갈 수 없다는 제럴드의 의지를 읽고 라파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어차피 이기적인 동물이다.

“그래.”

그리고 라파엘은 제럴드에게서 왕후궁 문 플레이스로 가는 길을 듣고, 홀로 말을 몰았다.

왕이라. 라파엘은 얼굴도 보지 못한 왕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 비아냥거림이 섞인 목소리는 그러나 풍부한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의 왕은 마리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문 플레이스는 왕궁 중심부에 있었다. 왕의 침전 근처에 있다고 들었는데 사람도 거의 보이지 않고 황량했다. 내궁마다 대기하고 있는 경비병에게 왕비의 시체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그가 반은 두렵고 반은 기쁜 얼굴로 물었다.

“쇼어가에서 오신 라파엘 님이십니까?”

라파엘은 습관처럼 후드 끝을 잡고 내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군인이었고 얼굴이 노출되어서 좋을 리가 없다. 근위병 정도면 라파엘과 얼굴을 마주한 적이 없다고 생각해도 무방했지만, 그가 언제 수도 경비대로 쫓겨 올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가능한 한 얼굴이 노출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냥 길거리에서 마주하는 정도는 괜찮겠지만, 이런 식으로 어떤 가문과 엮여서 얼굴이 기억되는 것은 상당히 곤란했다.

“궁 뒤쪽입니다. 이쪽으로 계속 걷다 보시면 나올, 텐데요……. 제, 제가 안내는 안 해도 되죠?”

혹시나 죄가 전염이라도 될까 봐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은 경비병에게 라파엘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의 옆구리를 박찼다. 흰색의 대리석 궁이 석양을 받아 붉게 빛나고 있었다. 너무나 아름다운 궁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을 몰다 보니 바람을 타고 지독한 냄새가 풍겨왔다. 시체의 썩은 내다. 사람을 상당히 많이 죽인 라파엘조차 이런 지독한 냄새는 처음이었다. 하긴, 시체의 썩은 내를 맡는 건 라파엘의 몫이 아니었다. 라파엘이 맡는 냄새는 피비린내였다. 쇠 냄새가 섞인 그 비릿한 냄새야말로 라파엘의 코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라파엘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체 앞에 멈춰 섰다. 한 달이 넘은 시체는 처참했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 어디에서도 그 아름다운 미소녀의 얼굴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가 입고 있는 잠옷이 핑크색이라는 걸 알 수 있는 것은 땅에 떨어진 작은 리본 덕분이었다. 그 외에는 온통 더럽혀져 있어 본래 무슨 색이었는지 알 수도 없었다.

라파엘은 일단 그녀의 몸 위에 모포를 펼쳤다. 허공에서 펼쳐진 붉은 모포가 천천히 시체의 위를 덮었다.

『붉은 천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이미 운명은 결정 나 있었다.』

그런 글이 어딘가에 있었었다. 어디였지? 라파엘은 머릿속으로 그 문구를 보았던 책을 떠올리려 했다. 책도 별로 안 읽는 편인데도 정확한 제목이 기억나지 않았다. 신화…… 쪽이었을까? 그러나 신화 쪽이었다고 해도 어느 책인지 알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다른 대륙들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헤수스에선 신화에 관련된 것들이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 노래, 소설……. 전부 신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특히나 인기 있는 것은 포르타미스 여신과 이그나치오 1세의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붉은 천이 허공에서 떨어지는 순간 운명이 결정 나 있다며 자조한 쪽은 포르타미스일까.

마리를 모포로 둘둘 싸고 양쪽 측면을 닫을 수 있게 되어 있는 날개를 닫은 뒤 모포에 달린 끈으로 고정한다. 고정하는 끈은 다섯 군데. 측면의 날개를 덮어 고정하는 두 개와, 시체에 모포를 고정하는 끈 세 개. 사람을 죽이는 것도, 고문하는 것도 이제는 일단 시작되면 습관처럼 해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했는데 시체를 모포에 넣어 보이지 않게 고정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세 번이나 실패한 끝에 손에서는 진득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

라파엘이 멍한 소리를 냈다. 겨우 모포로 두르는 데 성공했더니 모포 안쪽에서 종이가 살랑살랑 떨어졌다. 라파엘은 그 종이를 줍기 전 고개를 들어 탑을 올려다보았다. 왕후―지금은 왕비로 격하되었지만 어쨌거나 그때는 왕후였던 마리―는 탑에서 떨어졌다고 한다. 실족사로 인정되지 않은 것은 창이 높은데다 왕후의 신발이 창틀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창틀로 굳이 기어 올라가, 신발을 벗고, 뛰어내렸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탑 꼭대기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뾰족한 것이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저런 곳에서 떨어졌는데도 멀쩡히 붙어 있었던 종이가 지금 이 순간 바닥으로 떨어지다니.

왕후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충동적으로 내뱉었던 ‘휴업’이라는 단어는 어쩌면 이런 일을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후, 라파엘은 한숨을 쉬며 종이를 주웠다. 종이를 펼치자 끈적끈적한 것이 묻어나왔다. 라파엘은 한참이나 그 종이를 들여다본 끝에 글을 읽을 수 있었다.

『클레르_17번가. 재스민.

 바이런_23번가. 후크.

 _반지. 중앙정원 가든 하우스.』

……죽는 와중에 쓴 메모치고는 참 뜬금없는 내용이었다. 라파엘은 종이를 흔들어보았다. 종이가 두꺼워 혹시나 비밀 메모라도 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런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종이 한 장에 할 수 있는 장치라는 건 한계가 있었으므로, 라파엘은 그 종이가 달랑 한 장짜리 종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그녀가 죽기 전 관심을 둔 내용이었음은 분명하다. 라파엘은 손수건으로 싸서 종이를 로브에 넣었다. 혹시나 싶어 겨우 싼 모포를 풀고 맨손으로 그녀의 시체를 더듬었다. 다른 게 있을까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오직 저 뜬금없는 종이뿐이었다.

다시 그녀를 묶어 말에 고정하고 나서 문 플레이스의 정문을 지나려 했을 때 경비병이 으아악―하고 비명을 질렀다.

“뭐가 잘못되기라도……?”

“가, 꺼져! 어서 가! 으악, 내 쪽으로 오지 마!”

라파엘은 열네 살에 사람을 죽였고 열일곱 살에는 이미 살수의 세계에서 유명인이었다. 스물셋인 지금은 가장 유명한 청부업자를 꼽으면 다섯 손가락에는 무리여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고, 실력으로 치면 세 손가락 안에도 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토록 오랜 살수 생활에서도 이런 격렬한 거부를 당해본 적이 없었다.

고작 자살한 시체를 모포에 덮어 운반하고 있을 뿐인데도 경비병은 덜덜 떨었다. 혹시나 털끝 하나 닿아서 죄가 전염될까 봐 두려워하는 그 꼴에 라파엘은 살짝 얼굴을 찌푸릴 뿐이었다.

말을 달려 궁의 정문으로 가는 길에 라파엘은 호수를 발견했다. 주변에 펌프 같은 것이 있고 수도관도 보이는 게 아무래도 이게 상수원인 듯하다. 라파엘은 호수 앞에 내려 더러워진 손을 씻었다. 죄의 전염이라니, 그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치자면 살인은 자살의 바로 밑에 있는 큰 죄지만 그의 손이 닿은 자들의 대부분은 10년 전에도 잘 살았고, 지금도 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설사 죄가 정말로 전염되어 이 물을 마시는 궁의 모든 이가 죄인이 된다 하더라도 라파엘은 크게 신경 쓰이지 않을 것 같았다.

손을 깨끗하게 씻고 말을 몰아도 경비병들은 비슷한 태도를 보였다. 그나마 소리는 지르지 않을 뿐 덜덜 떨고 당장 가달라고 애원하는 건 매한가지였다. 왕궁을 나오자 왠지 지친 기분이 들어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저택에 가기 전 라파엘은 말이나 소의 질병을 살피는 수의사에게 들렀다. 물론 수의사들은 늘 가격이 나가는 동물만 진단하기 마련이다. 소나 말, 돼지를 전문으로 보는 수의사는 대체로 왕진을 나가는 일이 잦았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현관문에 작은 종을 걸어놓았다. 이 종이 아무리 울려도 나올 사람이 없다는 뜻이었다.

라파엘은 문 앞에서 멍하니 기다렸다. 품에 안고 온 은여우가 축 늘어져 있는 게 수의사를 만나기 전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죽었다면 모를까 죽을지도 모르는 정도로는 여기서 벗어나기가 애매했다.

“또 왔어?”

어느새 돌아온 수의사가 라파엘을 보고 진저리를 쳤다.

“개나 고양이, 이딴 건 그냥 죽게 내버려두라니깐 말도 더럽게 안 듣네. 넌 도대체 뭐 하는 놈이기에 이딴 데에 돈을 쓰냐. 집이라도 지키고 쥐라도 잡는다면 모를까, 대부분은 병신이 되잖아. 그딴 걸 도대체…….”

시끄럽게 중얼거리던 수의사가 라파엘이 꺼낸 은여우를 보고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이건 또 제법이네.”

수의사가 열쇠로 문을 따고는 왕진 가방으로 문을 밀면서 고갯짓을 했다.

“들어와.”

라파엘은 그 말대로 따라 들어갔다.

수의사가 은여우를 확인하는 동안 라파엘은 자주 왔던 수의사의 집 내부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익숙해진 실내였지만 다시는 오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살인을 하면서 얻은 것 중 하나였다. 사람의 목숨을 빼앗을수록 어떤 감각이 예민해진다. 직관이 발달한다. 위험에 처하고 또 처할수록 민감해진다. 길드의 교관이 말하던 ‘사람을 죽일수록 귀신에 가까워진다’는 건 이런 감각일지도 모른다.

“총알이 크기도 하다. 신력이 보통이 아니었나 봐.”

그거야 그렇겠지. 상대는 왕이니까. 헤수스 최고의, 아니, 세계 최고의 신력을 가졌을 지배자.

“그래도 이놈은 운이 좋았는데? 많이 다치지 않았어. 한 사나흘이면 다 나을 것 같아.”

“언제 데리러 와야 하는 거지?”

“넉넉잡아 나흘. 그 정도면 데려가도 이상 없어. 그런데 너 말이야, 정말 뭐 하는 놈이야? 돈이 썩어나는 놈인가 했더니만 총 맞은 은여우를 데리고 오질 않나…….”

“얼마야?”

수의사가 은여우를 철창 케이지에 넣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꽤 오래 알고 지냈는데 네 입에서 들은 말이라고는 언제 데리러 올까, 얼마야, 얼마나 살 수 있지? 이런 거밖에 없네.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수의사가 투덜거리다 말고 라파엘의 얼굴을 보더니 혀를 찼다.

“아, 그래. 마음대로 해. 은여우라 꽤 까다로웠지만 5백 헤레라만 받을게.”

웬만한 노동자의 두 달 월급을 말해도 재깍 현금으로 내놓는 착한 손님을 잃기 싫은 수의사가 라파엘의 안색을 살피며 금액을 말하자 라파엘이 순순히 돈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나흘 뒤, 오후에 오지.”

라파엘이 문을 닫고 나가자 수의사는 은여우와 돈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 좋은 손님이긴 한데 묘하게 세상물정에 어둡단 말이지…….”

바가지를 씌워도 군말 없이 내는 게 좋긴 한데, 늘 무표정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게 흠이다. 수의사는 잠시 고민하다 결국 돈을 집어넣고 말았다. 어쨌거나 말이나 소를 보는 것보다 더 돈이 되고, 말이나 소의 주인들―자신의 재산에 흠집 하나라도 날까 봐 벌벌 떨며 수의사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그들―보다 훨씬 신사적이니 그것으로 된 게 아니겠는가.

은색 여우라고 해봐야 결국 그냥 여우의 변종에 지나지 않는다. 즉 사람들에게는 귀한 여우일지언정, 수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여우를 진단하는 것과 은여우를 진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그런데도 좀 귀하다며 네 배가 넘는 돈을 후려쳐도 순순히 내놓는 손님이라니. 알고 보면 귀족이라든가 거상의 아들이나 정부 같은 게 아닐까. 수의사는 끝도 없는 망상을 거듭 하며 실실 웃었다.

라파엘이 쇼어가 본저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었다. 하지만 쇼어가는 낮처럼 불을 환히 밝혀놓고 있었다. 하인들을 뒤에 거느리고 쇼어가 전원이 내정원 한구석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이미 구덩이는 깊이 파여 있었고, 그 옆에는 자단과 마호가니를 써서 만든 최고급 관이 놓여 있었다. 하인들이 관을 열자 라파엘은 모포째로 관에 마리를 넣었다.

“저 꼴로 보낼 순 없다.”

공작부인이 울음 섞인 목소리를 냈다.

“저 꼴로 보낼 수는 없어. 그렇게 예쁘던 애인데, 그렇게 다정했던 아이인데. 절대 저렇게 못 보낸다. 난 저렇겐 못 보내.”

공작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울었다. 당장이라도 시체로 달려올 것 같은 그녀를 아들 둘이 양쪽에서 붙들었다.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고 공작이 “제발, 진정하오”라고 몇 번이나 속삭였다.

“저렇겐 못 보내요. 세상에, 저 꼴이 다 뭡니까. 그런 놈에게 시집가서 그 고생 하다 죽은 가여운 아이에게―.”

“풀면 됩니까?”

라파엘이 물었다. 남이야 울거나 말거나 관심도 없어 보이는 차가운 얼굴이었지만, 그 얼굴로 라파엘은 모포를 풀고 시체라기보단 쓰레기에 가까운 듯한 마리의 시체를 아마포가 깔린 관에 잘 넣어주었다. 시체를 보는 순간 사람들의 눈에 충격과 공포가 번뜩였지만 라파엘은 마리를 잘 넣고 아마포를 그녀의 몸 위로 잘 여민 뒤 그들을 돌아보았다.

“제사라도 드릴 게 아니라면 묻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도 이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할 것임을 아는 라파엘이 관을 봉하고 어깨에 짊어졌다. 혼자서 들 수 있는 무게가 아닐 텐데도 라파엘은 쉽게 관을 메고 구덩이로 뛰어내렸다. 제법 넓게 파인 구덩이 바닥에 관을 내려놓고, 라파엘은 혀를 찼다. 그가 마리를 묻어주고 싶었던 건 흙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두꺼운 관 속에 있으면 마리의 육체가 땅에 녹아드는 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하지만 생전의 마리를 아는 건 라파엘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라파엘은 그녀를 관에서 꺼내지 않고 구덩이 위로 올라왔다.

라파엘이 삽을 잡으려 했을 때 누군가가 라파엘의 손목을 붙잡았다. 에드워드였다.

“네가 그런 것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몸이 좋아 보이는 하인 몇이 나섰다. 하녀들은 서로에게 기대어 울고 있었다. 마리 님이 저렇게 되실 줄이야……. 그녀들의 울음은 친지를 잃은 것처럼 몹시 비통했다. 남편처럼 냉혹한 자들에게만 둘러싸여 있었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라파엘은 에드워드의 말에 이끌려 다가오는 하인에게 삽을 건넸다. 그들도 근위병들처럼 저어할 줄 알았는데 몸을 떨긴 했지만 순순히 삽을 받아 들었다.

흙을 다 덮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훌쩍거리는 소리가 커져갔다가 어느새 수그러드는 것을 들으며 라파엘은 어서 집에 가고 싶었다. 검과 고양이와 개가 넘쳐나는 집으로 가서 눈을 감고 싶었다. 그 어떤 의뢰보다 진이 빠지는 일이었다. 심지어 돈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라파엘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충동에 휩쓸려 벌인 짓이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마리를 묻었고, 가슴은 꽤 후련했다. 이제 슬슬 간다는 말을 하려고 했을 때 아직도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에드워드가 “이제 드디어 본론이군”이라고 중얼거렸다. 본론? 라파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결론이 아니라 본론이라고?

라파엘은 에드워드에게 이끌려 응접실로 들어갔다. 라파엘과 에드워드뿐만 아니라 제럴드나 공작, 공작부인도 같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인이 문을 닫고 나가자 공작부인이 의자에 털썩 무너져 앉았다.

“이 일을 어쩌면 좋으니.”

그녀의 목소리는 곤란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라파엘은 에드워드의 손아귀에서 교묘하게 손목을 비틀어 빼낸 뒤 “저와 관계있는 일이 아니면 전 이만……”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가 그를 바라보았다.

“네 이야기야!”

공작이 소리쳐서 라파엘의 얼굴이 슬쩍 굳었다. 대부분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탓에 표정이 적은 편인 라파엘이었지만, 응접실 내의 인물들은 라파엘의 희미한 표정 변화를 쉽사리 알아챘다.

“무슨…….”

“너에겐 말할 수 없었는데, 지금 우리 가문은 좀 위험하거든.”

제럴드가 중얼거렸다. 에드워드가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는 조금 지친 기색이었지만 섬세한 미모는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그의 유연한 목이 드러났다.

“「관대한 명령」이라는 걸 아니?”

에드워드의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왕족이 가끔 내리는 허접한 명령이지. 간단히 말하자면 이런 거야. 내가 잘못했지만 네가 수습해. 수습을 못하면 그건 네 잘못이지―라는 요지의 명령이야. 그런 걸 관대한 명령이라고 하지. ……우리는 그 관대한 명령을 일주일 전에 받았어.”

“마리의 자살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지라는 거지. 감히 대죄를 저지를 여자를 왕후로 만든 게 우리 책임이라는 거야. 지가 남색질을 해댄 건 생각도 안 하고 있는 거지.”

“오, 가여운 마리.”

공작부인이 탄식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왕은 남색가다. 왕은 마리를 안지 못했고, 다른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왕의 침실에 들어갔던 여자가 제법 많았지만 아무도 안기지는 못했다. 태후는 왕에게, 그러니까 당시 왕세자에게서 후손을 보려고 필사적이었지만 잘되지 않았어. 그리고 왕세자가 스물이 넘어 정식으로 즉위했다. 그리고 왕의 남색 기질도 노골적으로 드러났지. ……마리가 죽은 건 왕의 탓이다. 왕이 그 약하고 바른 아이를 괴롭게 만든 거다.”

왕이 남색가라는 사실도, 왕후가 왕 때문에 자살했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했다. 왕이 지독한 남색가이니 왕후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것이라고. 귀족들은 어떨지 몰라도 평민들은 거기에 대한 책임이 왕후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왕이 왕후를 죽였어도 사람들은 그게 왕후의 탓이라 여길 것이다.

현재의 왕인 이그나치오 23세는 평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자였다. 헤수스는 특별히 발전하고 있진 않았지만, 헤수스의 평민 계급 중에서 굶어 죽거나 얼어 죽는 자는 확연히 줄었다. 그것만으로도 국민은 왕에게 몹시 만족했고, 그를 떠받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왕은 치세에 능했다. 생존이 보장되고 나서는 농토도 보장되었다. 왕은 많은 귀족들의 땅을 빼앗아 농민에게 골고루 나눠주었고, 그들이 정당한 세금을 냄으로써 안쪽으로 곪아가고 있던 강대국은 그 위세에 걸맞은 부국이 되었다.

“그러고선 관대한 명령이랍시고, 우리에게 명령서가 내려왔다. 왕비를 보내라는 명령이지.”

그 말에는 라파엘도 눈을 조금 크게 뜨고 말았다.

“다시 한 번, 이번에는 대죄를 저지르지 않을 왕비를 보내라는 게 왕의 관대한 명령이다.”

“왕비 자리는 많은 사람이 노리고 있을 텐데 어째서 그런 명령을……?”

“아무도 노리지 않아.”

제럴드가 이를 갈았다.

“누가 노리겠나, 그런 자리 따위. 마리는 훌륭한 왕후였어. 그러나 그런 마리도 버티지 못한 척박한 자리에 누가 앉으려 하겠니. 지난 한 달간, 쓸 만한 귀족 아가씨는 결혼을 하든가 해외로 나가버렸다. 중매쟁이들은 혼인을 신속히 진행시키기 위해 신전의 혼인 신고서를 아예 들고 다닌다는 이야기까지 있었다.”

라파엘의 머릿속에 ‘막장’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왕의 옆자리에 여성을 앉혀놓긴 해야 할 거 아닌가. 그래서, 왕은 지금 우리에게 없는 여자를 내놓으라고 떼를 쓰는 거다. 사실…… 없지는 않았지. 왕비가 되기에 적합한 여자가 하나 있었다. 본래라면 왕비가 될 수 없었겠지만 지금은 특수한 상황이니까. 하지만 왕비로 책봉될 것 같자 평민과 혼례를 올려버린 모양이다. 알겠니? 차라리 평민과 결혼하는 게 낫다고 할 정도로 왕은 형편없어.”

에드워드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이제 관대한 명령이고 뭐고, 우리에겐 방법이 없어진 거지. 사실 언제 특수군이 올지 알 수 없다. 가히 바람 앞의 등불이라 할 수 있지.”

“이 이야기가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멸문의 가능성을 들어도 라파엘은 태연했다. 아무리 해도 그들에게 혈육으로서의 애정이 피어오르질 않았다. 마리를 처음 봤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어떤 감정이 가슴 안에 희미하게나마 깔렸었다. 그러나 지금 이 혈육들에겐 그 감정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악감정도 호의도 없었다. 자주 가는 무기상 주인보다도 흐릿한 존재들이었다.

공작이 설명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나에게는 동생이 하나 있었다. 너에게 숙부가 되지. 그에게는 안네마리라는 딸이 있었는데, 서대륙의 별장으로 가던 길에 배가 풍랑을 맞아 침몰하고 말았다. 동생과 제수의 시체는 찾았지만 안네마리의 시체는 찾지 못했지. 너와 같은 나이였다.”

안네마리.

라파엘은 그 이름을 깨닫고 제럴드를 바라보았다. 제럴드는 왕에게 자신을 안네마리라고 소개했고, 왕은 마침 잘되었다면서 얼굴마담이 어쩌고 했었다. 그제야 라파엘은 왕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이해했다. 왕은 안네마리 라 쇼어를 왕비로 책봉하겠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너한테는 폐 끼치지 않겠다.”

제럴드가 단호히 말했다.

“믿을 만한 여자를 수배해보겠어. 절대로 너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안심…….”

겨우 찾은 동생에게만큼은 절대로 폐가 되게 하지 않겠다는 게 식구들의 결심이었다. 다행인 것은 멸문을 당해도 라파엘은 무사하리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긴 세월 동생이 겪었을 고초의 유일한 장점이었다.

그러나 라파엘은 뜬금없이 물었다.

“혹시 마리가 금고를 가지고 있었습니까?”

공작부인과 공작이, 에드워드와 제럴드가 시선을 마주했다.

“아니, 금고는 없었는데.”

그 말에 라파엘은 로브의 주머니 속에서 깃털 펜을 만지작거렸다. 며칠간 끊임없이 주물럭거리고 있었다. 펜에서 열쇠로, 다시 펜으로 바꾸면서 라파엘은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니, 이미 하려던 것들은 대체적으로 머릿속에 정렬되었다. 단지, 그 자신이 왜 이런 것을 하고 싶어하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어 기가 막힐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없던 사람이었다. 그가 탐내는 것이라고는 기껏해야 검이 전부였다. 뭔가에 흥미를 느낀 적도 없었고, 무엇을 필요로 여기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난생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저.”

라파엘이 스스로를 가리켰다.

“여장을 하면 여자처럼 보이겠습니까?”

“……네가 그럴 이유는 없어.”

제럴드가 거칠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라파엘이다. 그들이 버려 살인 청부업자로 살아남아야 했던 가여운 동생. 그를 그런 사지로 밀어 넣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라파엘은 태연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에드워드가 눈살을 찌푸렸다.

“뭘?”

라파엘이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마리가 왜 죽었는지.”

어째서 자살을 선택한 걸까. 삶이 너무 괴로워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라파엘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살을 하면 이런 결과가 일어나리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시체는 방치되고, 평생은 조롱거리로 전락하며, 혈육이 곤란을 겪게 되리라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심지어 마리는 다정한 성품이라고 했다. 혈육을 걱정해서라도 그런 짓은 하지 않는 게 일반적이었다.

라파엘은 왜 마리가 죽었는지 궁금했다. 꽤 단순한 이유였지만, 난생처음 든 의문이기도 했다.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직접 부딪치기로 마음먹었다.

마리가 왜 죽었는지, 그리고 이 열쇠의 자물쇠는 도대체 뭔지도.

나른한 아침 햇살이 집안을 비추고 있었다. 밤새도록 정리한 끝에 집은 거의 다 정리되어 있었다. 라파엘은 최종적으로 집 안을 둘러보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들과 고양이들, 새까지 엉겨 붙으며 라파엘에게 애교를 부렸다. 라파엘이 문을 열자 푸드득, 새들은 집 안으로 날아 들어왔고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문 앞에 서서 라파엘을 올려다보았다.

“다 끝나셨네요?”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물었다.

“아아, 그래.”

외팔이에 얼굴 한쪽은 날아가 있는 남자에게 라파엘이 대답하며 문을 잠근 뒤 열쇠를 건넸다. 남자, 루는 열쇠를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이번에도 몸 건강히 돌아오세요.”

지뢰가 터져 육체가 망가진 채 버러지처럼 기어가던 그를 구한 건 라파엘이었다. 그가 거동도 하지 못할 때 대소변을 받아내고 의사에게 끌고 가 그를 기어코 살려준 것도 라파엘이었다. 그가 거동을 할 수 있게 되자 일자리를 알선해준 것도 라파엘이었다. 그는 라파엘에게 무거운 빚이 있었지만, 라파엘은 단 한 번도 그에게 갚으라 한 적이 없었다. 라파엘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이 장기간 부재중일 때 라파엘의 집을 보살펴줄 것. 단지 그뿐이었다. 루는 라파엘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힘들고 고되다 하더라도,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 할지라도, 그는 해낼 것이다. 루에게 있어 라파엘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은인이었다.

언제나처럼 ‘노력할게’라고 말하려 했던 라파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안네마리로 분해 있는 것은 약 4개월 정도 될 예정이다. 마리가 왜 죽었는지만 알게 되면 바로 빠져나올 생각이었다. 왕궁은 들어가기가 어려울 뿐 나오기는 어렵지 않은 곳이었다. 왕비가 홀연히 사라지는 것까지 왕이 가문의 탓을 할 순 없으리라. 죽은 것도 아닌 이상 왕비의 보호자는 엄연히 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다시 이 집에 못 올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루.”

라파엘이 부르자 루가 싱긋 웃었다.

“말씀하세요, 라파엘.”

“내가 혹시 돌아오지 않으면 이 집을 가지도록 해. 그리고 잡화점의 존 알지? 그에게 가서, 내가 맡긴 것을 달라고 해.”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고 떠나려 하자 루가 황급히 붙잡았다.

“무슨 말이에요, 라파엘.”

루의 눈이 휘둥그레져 있는 것을 보고 라파엘이 “뭐가” 하고 무심히 물었다.

“돌아오지 않는다니요!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일입니까? 얼마나 위험한 일이기에…….”

루가 라파엘을 붙잡았다. 라파엘보다 훨씬 키가 크고 거구인 남자가 팔을 세게 움켜잡았지만 라파엘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그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라파엘!”

루가 험악하게 소리치자 라파엘이 “돌아오도록 노력은 할 거야. 아마도, 돌아오게 될 거야”라고 중얼거렸다.

루는 고개를 저었다. 라파엘은 언제나 정확한 말을 하고는 했다. 그러면 그런 거고, 아니면 아닌 거였다. 그가 ‘노력은 할 거야’라고 말한다는 건 노력은 하겠지만 결과는…….

루가 놓아주지 않자 라파엘이 다시 입을 열었다.

“돌아올 예정이야. 단지 예감이 좋지 않을 뿐.”

라파엘의 ‘예감’. 루는 그 예지 능력을 실감한 적이 있었다. 어느 밤, 루와 술을 마시고 들어오던 라파엘이 여인숙에서 묵는 것이 낫겠다고 말했다. 라파엘의 말이라면 진흙이 빵이라고 해도 먹을 루는 당연히 여인숙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아침, 라파엘은 방에 없었고 루는 서둘러 라파엘의 집으로 달려왔다. 라파엘은 시체를 태우고 있었다. 매복이 있었던 것이다. 루를 여인숙에 재우고 라파엘은 집으로 돌아와 적을 해치운 뒤, 돌아온 루를 보고 의아한 눈을 했다.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게 말하는 라파엘의 얼굴은 태연자약했다. 매복을 알고 있었냐고 했더니 라파엘은 그냥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진실이었다. 라파엘은 위험을 감지하는 예감이 뛰어났다. 루는 그것이 예지 능력에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라파엘이 말한다. 노력은 하겠지만 돌아오지 않으면, 이라고.

“가지 마세요.”

루가 절박하게 만류했다.

“가지 마세요, 라파엘.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가지 마요.”

라파엘이 루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를 주운 지도 벌써 1년. 이 남자는 그가 장시간 집을 비울 때마다 충실하게 집을 돌봐주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라파엘의 인생에서 친구라는 단어를 굳이 써야 하는 날이 온다면, 그 단어는 이 남자를 지칭하게 되리라. 덜렁거리는 빈 소매와 완전히 망가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한쪽 얼굴을 본 뒤 라파엘이 자신의 팔을 잡은 루의 손목을 다른 손으로 잡았다.

“그래, 안 가는 게 좋겠지. 모두가 그렇게 말해. 사실은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지.”

핏줄 따위가 뭐라고.

단지 존재만으로 라파엘의 가슴을 미약하게나마 흔든 건 그녀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봐야 남들이 예쁜 여자를 보고 잠시 가슴을 두근거리는 정도의 미약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건 그답지 않았다.

하지만 가야 했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가야 한다고. 분명히 처음엔 아무도 묻어주지 않아 삽으로 온몸이 짓이겨질 불쌍한 여자를 구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하지만 갈 거군요.”

루가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그래.”

라파엘이 그렇게 말하면서 루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팔에서 떼놓았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루의 말에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루에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무슨 일을 하는지 말해준 적이 없었다. 라파엘이 암살자라는 것은 루도 알고 있었다. 알 수밖에 없었던 것이 라파엘이 의뢰를 수행하던 도중 루를 만났기 때문이다. 사람을 죽이고 지나가는 길에 만난 루를 라파엘이 어깨에 얹었던 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어디로 가는지라도 말해줘요.”

“모르는 게 좋아.”

언젠가 라파엘의 적에게 잡히더라도 아무것도 몰라야 살 확률이 높아진다. 라파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루는 끈질겼다.

“라파엘, 제발. 어디로 가는지라도. 이렇게는 못 보낸다고요.”

난 저렇겐 못 보내.

공작부인의 비명이 귓가를 울린다. 그녀가 죽은 딸을 묻는 심정과 라파엘을 보내는 루의 심정이 얼마나 닮았을지 알 수 없었지만, 라파엘은 루의 그 쉰 목소리가 공작부인의 비명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라파엘.”

“……네가 올 수 없는 곳.”

그러나 라파엘은 결국 그렇게 말했다.

“제가 갈 수 없는 곳?”

루가 물었다.

“그래, 네가 올 수 없는 곳.”

“타 대륙으로라도 가는 건가요?”

“비슷하지. 루, 내 걱정은 하지 마.”

“쫓아가지 않을게요. 절대 방해되지 않을 테니까, 라파엘. 제발.”

이렇게는 못 보내요, 라고 루가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라파엘은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라파엘!”

“루, 내 걱정은 하지 마. 내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야.”

라파엘은 그렇게 말했다. 그는 문득 쇼어가 사람들을 떠올리고 아쉬워졌다. 라파엘 자신도 그 핏줄이라면, 그 언변을 타고났어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파엘은 루를 안심시킬 말을 찾을 수 없었다. 도저히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내 걱정은 할 필요 없다는 말이 전부였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 아니에요.”

루의 팔을 떼고 말로 걸음을 옮기는 라파엘의 등 뒤에서 루가 중얼거렸다.

“내가 걱정하는 건 당신이 없을 때의 나예요.”

라파엘이 고개를 돌렸다.

“존에게 맡겨놓은 게 있어. 그거면 내가 없어도 될 거야.”

“아니요.”

루가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뭘 맡겨놓았든 전 당신이 없으면 안 될 겁니다.”

루가 간절히 말했다. 그는 지금 사랑을 고백하고 있었다. 라파엘 에반스, 살인 기계라고 불리는 외롭고 고독한 남자에게, 그를 구해주었던 유일한 사람에게. 언제나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던 사람에게.

하지만 라파엘은 말 등으로 뛰어오른 뒤 고삐를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넌 혼자서도 잘할 거야.”

고백은 통하지 않았다.

“우리 애들 좀 부탁할게.”

마지막은 개와 고양이와 새에 대한 부탁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라파엘을 태운 말은 전속력으로 멀어졌다.

루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반년이나 고민한 끝에 한 고백이었는데, 심지어 상대는 그가 고백을 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라파엘 에반스. 올해 23세. 루가 아는 것은 그게 전부였다. 하지만 아마 라파엘에 대해 알아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라파엘이 아는 성실하고 근면한 루가 아닌 냉혹한 얼굴을 한 루가 라파엘의 집을 노려보았다.

안네마리 라 쇼어의 제1왕비 책봉설은 이미 온 나라에 퍼져 있었다. 안네마리 라 쇼어. 극적으로 살아 돌아온 쇼어 가문의 유일한 여성. 왕비 최다 배출 가문인 쇼어가의 여식답게 검은 폭포수처럼 흘러내리는 흑발에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검은 눈, 눈이 내린 듯한 흰 피부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마른 몸이 인상적이라는 소문이 나라 안에 돌았다.

누군가는 또 쇼어가냐며 싫어했고, 누군가는 역시 쇼어가라며 환영했다. 역대 스물세 명의 왕 중 열다섯 명의 왕이 쇼어가에서 왕후를 맞았다. 이번에는 왕후의 불행한 일로 인해 왕후가 아닌 왕비로 책봉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따라서 왕세자빈이나 왕후라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들도 생략한다는 설명이 곁들여졌다.

“웃기고 있군요.”

제럴드가 찬 목소리로 빈정거렸다.

“생략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지. 라피가 아니면 그놈의 마누라가 될 미친년 따윈 이 나라에 없으니까.”

“안네마리, 다. 실수하지 않도록 지금부터 습관을 들여.”

에드워드가 경고했다.

이것은 왕을 상대로 하는 대 사기극이었다. 왕은 웃으면서 정인의 목을 따는 냉혈한이었다. 이 일이 들통 나면 쇼어가는 멸문이었다. 몰살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일을 벌이지 않는다고 해서 쇼어가가 무사할 리도 없었다. 그렇다면 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고 싶은 것은 모두의 당연한 소망이었다. 전원이 각오하고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그 아름답고 가여운 여동생이 왜 죽어야 했는지는 알고 싶다고.

“입궁 뒤에는 알아서 할 거야.”

제럴드가 불퉁히 대꾸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해.”

에드워드가 차갑게 말했다.

“아, 알았어. 라피, 아니, 안네마리는 그런데 왜 이런 일을 하겠다고 나선 거지?”

제럴드가 소파에 모로 앉아 팔걸이에 다리를 올린 채 중얼거렸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그의 손안에 있는 유리잔에서 얼음이 달그락거렸다.

“혈육이기 때문인가.”

제럴드가 천장을 바라보며 자문자답했다.

“혈육이기 때문에 안네마리가 되려는 건가.”

혈육은 소중하다. 제럴드는 그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사교계에서 믿을 만한 건 혈육밖에 없었다. 혈육이 아니라면 누구도 믿을 수 없다. 제럴드와 에드워드는 둘 다 유부남이었지만 집에는 거의 들어가지 않고 본저에서 죽치고 사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혈육이 아니기 때문에 섹스는 할 수 있어도 맘을 놓을 수는 없으니 본저가 훨씬 마음 편한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은 처녀는 따져도 일단 유부녀가 된 다음에는 자유분방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제럴드의 제비꽃 같은 아내도, 에드워드의 장미 같은 아내도 이미 정부가 두셋씩 있었다. 그녀들도 남편을 귀찮아했다. 정략결혼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들도 그렇게 버석거리는 결혼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마 아내도 그녀들의 혈육을 위해서라면 그를 배반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배신을 용서하지는 못할망정 이해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도 에드워드나 부모님을 위해서라면 아내를 배신할 테니까. 사교계라는 곳이 본디 그러했다.

“마리가 죽은 게 그토록 원통했나.”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파엘은 마리가 죽은 것으로 분노하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라파엘은 마리를 가엾게 여기고 있긴 했지만 그녀가 자살하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는 게 분명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위험한 외줄타기에 몸을 던지는 걸까.

“어차피 그는 살인 청부업자야.”

에드워드가 대답했다.

“그는 위험한 일이 직업이야. 아무리 위험하고 빠져나오는 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라 할지라도 가장 안쪽에 숨어 있는 자를 죽이고 나오는 게 그의 직업이지. 돈을 받고 그런 일을 하는 자가, 한 번은 단순한 흥미로 그 일을 하는 거야. 그뿐이야.”

에드워드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차가워 제럴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난 형을 모르겠어. 형은 라피가 싫어?”

에드워드도 라파엘을 보고 싶어했었다. 라파엘을 만났을 때 진심으로 기뻐하지 않았던가. 제럴드의 질문에 에드워드가 실소했다.

“아니, 당연히 좋아하지. 그 가여운 아이를 어떻게 싫어할 수 있겠어. 단지, 자신의 목숨을 너무 함부로 여기는 것 같아서…… 걱정일 뿐이야.”

제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찾아내서 안아주고 싶었다. 너를 버리는 것만이 최선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들을 미워하더라도 끝까지 용서를 빌고, 받아주지 않더라도 모든 사랑을 주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라파엘이 찾아왔고, 그들이 거두지 못했던 사랑스러운 여동생을 거둬 묻어주었다. 자신들을 미워하기는커녕 관심도 없었다. 사랑을 줄 수도 없었다. 차라리 증오했다면 나았을 텐데 무관심해서는 말 한 번 붙여보는 것도 온 힘을 다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결국 여동생의 죽음에 관한 한을 풀어주겠다고 하고 있었다.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도, 증오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리움 한 조각조차 없었던 것 같은 라파엘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궁으로 들어간다. 마치 이 관심 없는 가족들보다 그 자신의 목숨이 밑에 있는 것처럼 단호한 결정이었다.

“걱정이네.”

제럴드는 자신은 죽더라도 라파엘만은 살리고 싶었다. 부모님과 에드워드가 죽더라도 라파엘만은 살리고 싶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마음일 것이라고 믿었다. 아무것도 누려보지 못한 채 더운 피를 묻혀가며 살아남아야 했던 가여운 동생만은 꼭 살리고 싶었는데, 그를 적진 한가운데에 밀어 넣게 되었다.

“말릴 걸 그랬어.”

좀 더 말려볼 걸 그랬다. 마리가 왜 죽었는지는 제럴드도 궁금했다. 그 스스로의 능력이 닿는 데까진 알아보려 했지만 알아낸 게 없었다. 마지막에 마리가 반쯤 미쳐 있었다는 게 그가 아는 전부였다. 그나마도 소문에 불과했다.

궁금했다. 사랑스럽고 다정하면서도 기품 있던 여동생이 어째서 대죄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그렇게까지 여동생을 몰아붙인 게 뭔지. 그리고 라파엘은 그런 일에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전문가였다. 게다가 라파엘은 마리만큼 키가 작았고 몹시 말랐다.

라파엘이 그 말을 꺼냈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거, 말이 되는데’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게 하면 동생이 왜 죽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도 자신도 불가능했지만 라파엘은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알고 싶었다. 미친 듯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말리는 척하면서 라파엘을 사지로 밀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씨발, 난 인간 말종이야.”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제럴드는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이그나치오 1세는 서른 명의 왕비와 백오십 명의 첩을 두었으나, 그가 사랑한 것은 왕후 사라뿐이었다. 

여신 포르타미스의 사랑을 거부하고 결국 그녀를 자살로 이끈 이그나치오 1세. 가장 훌륭한 왕이었으되 인간계의 저주가 되었던 전설의 왕이 사라 라 쇼어를 만난 것은 천신들이 대지를 버린 이듬해였다. 포르타미스가 죽고, 티오안은 신적에서 지워져 인간으로 떠돌게 되었고, 루스엔느는 이그나치오를 저주하며 사라졌다. 그러나 북대륙의 쿠치아노만은 사라지지 않았다. 쿠치아노는 어느 날 왕족과 귀족들을 불러모아놓고 그들의 계급에 맞는 신력을 부여해주었다. 『너희가 내 힘을 원할 때, 자격이 있는 자는 내 힘을 타고난 만큼만 사용할 수 있게 되리라.』 그리고 쿠치아노는 다신 인간계에 나타나지 않았다. 쿠치아노의 힘을 빌린 북대륙은 동, 서, 남대륙을 차례로 정벌해나갔다. 가장 처음 동대륙을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던 해, 세 명의 신이 죽고 한 명의 신이 사라졌던 해의 이듬해인 그 해, 이그나치오는 평생의 파트너가 될 철혈의 여인 사라 라 쇼어를 만난다. 이미 수많은 왕비와 셀 수 없는 첩이 있었던 이그나치오의 끈질긴 구애를 받던 사라 라 쇼어는 세 가지를 요구한다.

「저를 왕후로 만들어, 당신의 총애가 저를 향하고 있음을 만천하에 증명해주세요.」

「제 집안에 여식이 나온다면, 왕후 후보로서 무조건 고려한다는 조항을 법에 새겨주세요.」

「제 궁을 지어주세요.』

사라 왕후는 특히 세 번째 조건에 주목했다.

「달도 해도 품을 수 있을 듯이 아름다운 궁을 만들어주세요. 새하얀 대리석으로 된 외관, 하늘로 올라갈 수 있을 듯한 높은 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을 지어주세요. 그리고 전하의 침전과 제 궁에 다리를 놓아주세요. 어느 누구도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없도록.」

‡『왕을 사로잡은 여인들: 전설의 철혈 여인 왕후 사라 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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