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7/8)

“내가 저 겨울 산맥에서 얼마나 고생하고 왔는지 알아?”

“왕녀님.”

“이제야 방 좀 넓어졌다고 좋아했는데 이렇게 내 인생에 초를 치려고 해?”

“왕녀님.”

“게다가 헤세온 그 정신병자까지 보내서?”

“……후사께서 계십니다, 왕녀님.”

안젤리나의 나지막한 말에 카놀라가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카놀라가 턱을 괴고 있던 자세를 바르게 했다. 그러곤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내내 곁에 조용히 서 있던 에델은 괜찮다는 의미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그런 반응이 더 민망했다. 카놀라는 괜히 머리를 쓸어 올리며 새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에델에겐 이미 알려 줬어. 그 인간 정신병자라고. 에델, 안젤리나에게 물어봐요. 내 말이 맞다니까요? 그치, 안젤리나?”

“아주 정확한 표현이십니다.”

안젤리나가 기다렸다는 듯 카놀라의 말을 받았다. 손발이 척척 맞는 두 사람의 모습에 반사적으로 웃음이 터지려 했으나, 에델은 그것을 겨우 억눌렀다. 어쨌든 지금 상황은 전혀 웃기지 않았다. 카놀라는 서신을 보고 무척 기분 나빠했지만 일단 그들을 받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디라즈는 카놀라의 청을 선뜻 받아들였고, 카놀라가 지목한 사람들의 방문을 허가했다.

일단 들어오라고는 했지만 카놀라는 여전히 서신을 보며 끙끙대는 중이었다. 그런 그녀가 걱정된 에델은 사냥에서 돌아온 직후 종일 쉰다는 자신의 생활 방식까지 무시하며 이렇게 곁에 붙어 있었다. 물론 그 걱정 속에는 ‘정신병자’에 대한 경계심도 섞여 있었다. 카놀라의 반응과는 별개로, 이곳까지 쫓아올 정도의 사내라면 아예 무시할 수 없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건 정말 우스운 일이에요. 에델. 이 인간들이 내가 궁을 좀 떠나 있었다고 감이 다 죽은 줄 아는데, 사람을 물로 봤어. 진짜.”

“이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해 주겠습니까?”

카놀라는 편지의 내용을 에델에게 기꺼이 공개했고, 그는 신중하게 서신을 읽었다. 그러나 서신의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에델의 요청에 카놀라가 안젤리나에게서 서신을 받아 들었다. 한 손에는 서신을, 한 손에는 봉투를 든 카놀라가 두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이걸 봐요. 오빠가 편지를 쓰고 언니가 봉투를 봉했어요.”

그것은 참 의외라고 생각했다. 왜 굳이 그런 번거로운 작업을 해야 한단 말인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에델의 표정에 카놀라가 친절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이 인간들이 손을 잡은 거예요! 샤를만에선 해가 서쪽에서 뜰 일이라고요!”

“그들이 손을 잡고 이 정혼의 무효를 주장하려는 겁니까?”

에델이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이렇게 심각한 데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서신에는 분명 지참금을 트집 잡는 내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쪽이 되레 성내는 꼴이 우습긴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굳이 문제 삼자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안이다.

어쩌면 저들은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선 일부러 지참금을 반절만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자 카놀라 덕분에 잠시나마 풀어졌던 긴장이 다시금 팽팽하게 조여졌다.

역시 그 왕녀의 연인이라고 떠들어 대는 사내만큼은 당장…….

“그런 짓을 하려 했으면 여행단을 저따위로 꾸리진 않았을 거예요. 오히려 더 깍듯한 자들로 꾸렸겠죠. 지금 바깥의 저 난봉꾼들이 아니라. 저건 오히려…… 트집잡히려고 작정한 거라고요. 어쩜 이런 발상을 했는지. 분명 큰오빠의 생각이었을 거야.”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어쨌든 뒷이야기는 샤를만 사정이니까 우리가 신경 쓸 필요는 없어요. 자기들끼리 지지든 볶든 알게 뭐람?”

서신의 내용은 사실 특별할 게 없었다. 지참금으로 인해 샤를만의 왕녀가 난처함을 겪지 않았을지 걱정이다. 연락이 여의치 않은 지역이라 이제야 안부를 묻는다. 우리의 신실한 관계에 대해서 논의해야 하지 않겠나. 에데사로부터 불미스러운 소문이 들려와서 심려가 크다. 유언비어가 때로는 무고한 생명을 앗는 법 아니겠냐. 또한, 양국이 아직 신뢰의 증표조차 제대로 나누지 못한 듯해 안타까움이 크다. (이 부분에서 카놀라는 자신만큼 확실한 증표가 어디 있느냐며 분개했다.) 왕녀의 오랜 지인인 베르긴 공자가 이번 여행을 자청했다. 우리는 그의 신중한 태도가 훌륭한 가교 구실을 해 주리라 믿는다. 베르긴 가문은 톨레앙을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귀족 가문이자 샤를만 학회와도 막역하다. 베르긴 가문은 어쩌고저쩌고…….

안부를 묻는 그럴듯한 문장들과 베르긴 가문을 치켜세우는 온갖 수식어들, 그리고 뻔한 마무리까지. 미문들 사이에서 건질 만한 단어들이라곤 몇 가지 없었다. 불미스러운 소문, 신뢰의 증표 정도일까? 거기에 더불어 베르긴 공자가 이번 여행을 자청했다는 말까지. 카놀라는 이 글을 써 내리는 라우렐의 표정을 선연히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치미는 짜증을 꾹꾹 참으며 관자놀이를 눌러 댔을 것이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은 여기에 글로리오사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이었다. 끙끙거리며 둘의 관계를 유추하던 카놀라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봤자 샤를만에서 벌어지는 후계 다툼의 연장이겠지. 이미 트리폴로 시집온 카놀라에겐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러는 사이 에델은 제 생각을 모두 정리한 것 같았다. 사실 그에겐 정리랄 것도 없었다. 애초 서신을 읽고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으므로, 그는 카놀라의 설명에 전적으로 의지해서 자신만의 결론을 내렸다.

“그럼 저는 트집을 잡는 데에 집중하면 되겠군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에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기쁨이 느껴졌다.

“쉽네요.”

카놀라와 함께하며 어지간한 일로는 눈 하나 깜짝 않던 안젤리나가 놀란 표정으로 에델을 보았다. 급기야 그녀는 에델에게 ‘왕녀님과 너무 어울리셔서 나쁜 물이 드신 거 같다’라며 걱정스러운 말까지 건넸다. 그런 안젤리나를 흘겨보던 카놀라가 관대한 표정으로 에델을 보았다. 겨울 산맥에서 돌아온 지 채 하루도 못 되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행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스트레스가 쌓인 것도 당연하지. 에델도 어디 스트레스 풀 구석은 있어야지 않겠나. 기왕 이렇게 된 거 철저하게 이용해야지.

카놀라는 에델을 향해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도와줄게요, 에델!”

안젤리나는 슬며시 이마를 짚었다. 벌써 그라그포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트리폴을 방문한 자는 예외 없이 군주에게 먼저 인사를 해야 한다.

당장 카놀라부터 만나고 싶었던 헤세온은 이것이 아주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금방 수긍했다. 이 나라의 법도가 그러하다는데 뭐라고 할까. 다만 그들 주변을 둘러싼 이 위협적인 전사들의 모습은 좀 미심쩍었다. 이들의 태도는 마치 죄인을 호송하는 듯했던 것이다. 하다못해 동행하는 오스카나 루덱도 그들을 안내해 주기 위해서라기보단 감시하기 위한 목적이 더 커보였다.

감시라니! 헤세온은 샤를만에서 만났던 에데사인을 떠올렸다.

트리폴이 얼마나 야만적인 나라인지 들었을 땐 과장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의심했다. 하지만 이렇게 실재 트리폴인들을 마주하고 나니 그 말을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차림을 보나 도시 풍경을 보나 낙후되었다고 느껴지는 곳이었다. 에데사인의 말 중 거짓이 있다면, 전설의 치료약이니 뭐니 하는 부분일 게 틀림없다. 이런 곳에 신의 영약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헤세온은 하루빨리 카놀라를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시 풍경을 보며 예상은 했지만, 왕궁의 꼴은 아주 투박했다. 왕궁이라고 누가 일러 주지 않으면 전혀 모를 것 같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불만스러운 건 바로 저 거대한 체구의 트리폴 군주였다. 군주는 아주 무례했다.

“나흘 주겠다. 그 안에 해후를 마치고 돌아가라.”

일방적으로 그렇게 통보한 군주는 여행단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고 그들을 알현실에서 내쫓았다. 생전 이런 천대는 받아 본 적이 없어서, 헤세온은 잠시 이것이 꿈인가 돌이켜 볼 지경이었다.

게다가 해후를 마치고 돌아가라니? 헤세온은 이 정혼의 무효를 알리고 카놀라를 데리러 온 것이지 그녀의 안부나 살피고자 이 척박한 땅까지 온 게 아니다. 저절로 못마땅한 침음이 나왔다.

“이제 왕녀님을 뵈러 가도 되겠지?”

헤세온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루덱을 돌아보았다. 카놀라에게 서신이 전달되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카놀라도 이 여행단의 진정한 목적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분명 기쁘게 그들을 맞아 주겠지. 유쾌한 카놀라의 웃음소리를 떠올리자 그나마 치밀던 불쾌감이 조금 사그라졌다.

“아, 네. 저…….”

루덱이 어물거리며 오스카를 힐끗 보았다. 여기까지 감시차 따라오긴 했지만, 이 이상 당부받은 내용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헤세온이 혼자 온 궁을 헤집고 다닐 기세라, 루덱은 오스카의 등을 쿡쿡 찔렀다. 무슨 이야기라도 해서 헤세온을 붙들고 있으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오스카는 말도 섞기 싫다는 듯 무표정하게 서서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덱의 불안감에 전혀 동조해 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

대체 안젤리나는 뭘 하는 건가. 분명 카놀라와 함께 있을 테고, 헤세온과 그 일행들이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을 텐데 말이다.

“샤를만에서 온 여행단이시죠.”

초조해진 루덱을 구원해 준 이는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카놀라가 자릴 비운 며칠 사이 부쩍 친근해진 티보치나였다. 반갑게 그녀를 맞이하려던 루덱이 티보치나를 보곤 멈칫했다. 늘 수수하고 편한 차림으로 다니던 그녀가 오늘은 몹시 희고 고급스러운 정복을 입고 있었다. 게다가 티보치나의 등 뒤로는 어린 신녀들이 두 줄로 서서 그녀를 따르고 있었다. 루덱은 상황도 잊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얼굴은 티보치나가 맞는데, 이 나라에 저런 얼굴을 가진 사람이 한 명 더 있었나?

“전 트리폴의 수석 신녀입니다. 대표가 누구시죠?”

그 물음에 헤세온이 헛기침을 하며 앞으로 나섰다.

“내가 대표입니다. 난 톨레앙의 기름진 북쪽 땅 지배자이자 유서 깊은 베르긴…….”

“트리폴을 방문한 이방인은 신들께 이 땅을 방문하였노라고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따라오십시오.”

티보치나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 뒤를 어린 신녀들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말이 끊긴 헤세온이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으로 티보치나를 노려보다가 루덱을 돌아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굳어 있는 루덱 대신, 가만히 서 있던 오스카가 넌지시 말을 얹었다.

“저 말이 맞습니다. 얼른 가시죠.”

헤세온과 일행들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오스카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그들을 마주 보았다. 헤세온은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렇지 않아도 호위를 모두 떼 놓고 들어온 터라 쉽게 험악한 분위기를 만들 수도 없었다. 그들은 의심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신녀들의 뒤를 따라갔다.

“저기, 오스카 님.”

막 걸음을 떼려던 오스카가 의아한 눈으로 루덱을 돌아보았다.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서 있던 루덱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런 절차가 있었나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루덱을 한심하다는 듯 보던 오스카가 무심하게 대꾸했다.

“오늘부터 생겼나 보지.”

루덱은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했다. 오늘은 법도든 절차든 뭐든 새롭게 생겨날 것투성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신녀들은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처음과 같이 정갈한 표정과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티보치나의 모습에 루덱은 감탄을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저들은 막 무릎을 굽히고 온몸을 숙여 마흔여섯 번째 신에게 인사하고 있었다. 스무 번째부터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던 헤세온은 헉헉거리며 느릿느릿 몸을 굽혔다. 그는 때때로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제단 주변에 위협적으로 서 있는 덩치 큰 트리폴 전사들을 발견하곤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사인 루덱도 트리폴 전사들의 덩치를 보며 내심 위압감을 느꼈었는데, 저 헤세온은 오죽할까. 확실히 보이는 이미지를 무시할 수는 없는 모양이다. 자신도 저들처럼 덩치를 좀 더 키워야 할까 고민하는 루덱의 옆에선 오스카가 지루하다는 눈으로 먼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원칙대로라면 백 명의 신에게 인사를 해야 하지만, 이방인이고 트리폴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것을 참작해 가장 중요한 상급 신 오십 명에게만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헤세온은 경악을 했지만 티보치나는 트리폴의 법도를 지킬 생각이 없다면 이 나라에서 머무르게 둘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오스카도 ‘우리 왕녀님은 백 명의 신에게 인사를 드린 후 훌륭한 환대를 받으셨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릎이 아프긴 했으나 못 할 일은 아니었다는 둥 상상 속 경험담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루덱 역시 그런 분위기에 떠밀려 얼떨결에 있지도 않았던 일을 묘사해야 했다.

결과적으로 헤세온과 그 일행들은 아주 열심히 신께 인사를 드리고 있었다. 이쯤 되니 루덱은 티보치나가 조금 무서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 골탕 먹일지 미리 고민해 온 게 틀림없다.

“왕녀님이 오셨군.”

질린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고 있던 루덱이 반색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멈칫했다.

“저건 또 뭡니까?”

루덱은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겨우 되삼켰다. 대체 우리 왕녀님이 언제부터 저렇게 시중인들을 떼로 끌고 다녔답니까?

“루덱!”

카놀라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가까워지자 차림도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루덱이 생전 처음 보는 옷차림이었다. 저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옷감은 샤를만에서 가져온 옷 중에선 찾아볼 수 없는 종류였다. 이곳에 와서 맞춘 몇 벌 안 되는 옷 중에서도 저렇게 화려한 것은 본 적이 없다. 겨울 산맥에서 옷이라도 맞춰 온 것인가?

“아주…… 좋아 보이시네요.”

루덱이 더듬더듬 인사를 했다. 그의 심경을 다 안다는 듯, 카놀라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오스카 역시 조금 놀란 듯 눈썹을 추켜세우고 카놀라를 보고 있었다.

카놀라가 두 사람에게 자랑하려는 듯,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 화려한 천으로 만들어진 스커트가 둥글게 펼쳐졌다. 들려진 치마 안쪽에 입은 방한용 바지가 살짝 보였다가 가려졌다. 허리에 양손을 올리고 의기양양하게 선 카놀라를 얼떨떨하게 보던 두 사람 중, 오스카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또’ 새 옷을 맞추셨습니까?”

“돔돔이 굳이 줘야겠다지 뭐야? 후사비에게만 허락되는 천이니 내가 아니면 입을 사람도 없다면서 말이지!”

“오, 후사비……이시니까요.”

제아무리 노련한 오스카라고 해도 이번만큼은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후사비? 두 사람에겐 그것이야말로 금시초문이었다. 이방인이라고 눈초리를 받은 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언제 후사비로 확정되었단 말인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그들은 모든 의문을 속에 꾹꾹 묻어 두는 수밖에 없었다. 겨우겨우 오십 명의 신에게 인사를 마친 헤세온이 어기적거리며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느릿느릿 걷는 헤세온을 쌩하니 지나친 티보치나가 얼른 카놀라에게 다가갔다. 꽤 오랜만에 만나는 까닭인지, 티보치나의 표정은 살짝 상기되어 있었다.

“무사하셔서…… 아니. 절 보러 오신 거 맞죠?”

그녀는 뒤편에 있는 헤세온과 그 일행들을 의식해서인지 얼른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카놀라의 얼굴과 몸을 살피는 눈길은 무척 세심했다. 그녀가 무사히 겨울 산맥을 다녀왔다는 걸 알게 되자 티보치나의 안색은 더없이 밝아졌다.

그렇지 않아도 흰 정복을 차려입은 그녀가 환하게 웃자 온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화려한 옷을 입었다며 들떠 있던 카놀라는 자신의 눈을 가리며 탄성을 뱉었다. 저렇게 무늬 없는 흰 정복을 입고도 빛날 수 있다니, 역시 옷은 주인을 잘 만나야 하는 모양이다.

“옷이 꼭 맞네요. 누구라도 후사비를 알아볼 거예요.”

카놀라의 양손을 잡은 티보치나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카놀라는 자꾸만 벌어지는 입매를 주체하지 못하고 헤실거렸다. 티보치나의 입에서 ‘후사비’라는 단어를 들으니 정말로 실감 났다.

이제 겨우 한 개의 시험만 앞둔 카놀라는 그라그포드에 의해 사실상 ‘후사비’로 인정받은 상태였다!

카놀라가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입은 옷은 후사비를 위한 화려한 문양의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두 개의 시험을 통과한 시점에서 잠정적 후사비로 인정된 것이 알려졌는지, 카놀라는 내려오자마자 이런 화려한 옷을 선물받았다.

옷을 만든 사람은 일전에도 카놀라의 옷을 만들어 본 돔돔이었다. 카놀라는 어찌나 신났던지, 마음 같아선 직접 옷을 주러 왕궁까지 온 그와 수다를 떨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헤세온 일행이 궁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별수 없이 몸을 일으켜야 했다.

겨울 산맥에서 돔돔의 옷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는지는 다음에 읊어 주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카놀라는 의욕적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허리끈을 매 준 사람은 에델이었다.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심혈을 기울여 리본의 주름을 잡아 주었다. 내친김에 헤세온 일행을 만나는 자리에 동행하겠다고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생활 방식을 아는 카놀라가 강제로 그의 등을 떠미는 바람에, 마지못해 침실로 걸음을 돌린 참이었다. 그러면서도 차마 카놀라를 혼자 보낼 수 없었는지, 에델은 자신의 다섯 전사를 죄다 카놀라에게 붙여 버렸다.

카놀라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방 바깥에는 왕궁 시중인들이 우르르 그녀를 보고자 몰려와 있었다. 황금 산양 한 쌍을 떠맡은 피아가 온 동네에 카놀라의 활약상을 떠벌린 덕분이었다.

백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황금 산양 한 쌍은 없던 존경심을 전파하는 위력을 보였다. 마침 돔돔이 준 후사비의 의상까지 입고 등장하니, 시중인들이 대번에 선망의 눈길로 카놀라를 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결론적으로 카놀라의 뒤엔 이렇게나 많은 시중인들이 따라붙게 되었다. 자발적인 움직임이자, 신기함과 선망이 뒤섞인 추앙이었다.

대충 상황을 짐작했다는 듯 티보치나는 카놀라의 뒤를 힐끗 보았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결과는 흡족하다. 티보치나는 기어코 카놀라의 앞으로 다가온 헤세온을 싸늘한 시선으로 힐끗 보았다. 행여 바깥에서 했던 헛소리를 이 자리에서 또 한다면, 저 자발적으로 몰려온 시중인들에게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을 테지. 더불어 못 이기는 척 카놀라의 뒤를 따라온 후사의 다섯 전사가 보내는 살기까지 더해서 말이다.

“에델이 묶어 줬어! 너무 귀엽지?”

카놀라가 제 배를 앞으로 내밀며 자랑했다. 누군가 묶어 줬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게 에델이었으리라 생각하진 못했던 티보치나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못마땅한 눈초리로 리본을 노려보던 그녀가 빙긋 웃으며 카놀라와 눈을 맞추었다.

“전 꽃 모양으로 매어 드릴 수 있어요.”

“진짜? 이게 꽃 모양이 된다고?”

리본이 두꺼워서 꽃 모양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카놀라를 귀엽다는 듯 보던 티보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다음엔 제가 묶어 드릴게요.”

카놀라의 뒤편에 서 있던 아이누는 티보치나의 말을 열심히 귀담아들었다. 에델이 특별히 그에겐 ‘들은 것을 전부 고해라’라는 추가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보고 들은 것을 당당하게 떠들 권리를 얻게 된 아이누는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고취된 상태였다. 특히나 그는 에델이 티보치나가 방금 내뱉은 말에 무척 관심을 보일 것 같다는 예감을 느꼈다.

대놓고 이야기를 듣느라 몸을 숨기지도 않고 있는 아이누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던 라다크가 힐끗, 앞을 보았다. 비실비실하고 곱상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카놀라의 시야에서 알짱거리는 게 보였다. 그는 카놀라와 티보치나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신녀들이 슬금슬금 몸으로 막아서는 탓에 좀처럼 뜻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사내는 신녀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라다크와 시선을 알아채곤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는 곧 제 행동을 인식하곤 얼굴을 붉히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카놀라 왕녀님!”

부끄러움을 지우기 위해서인지 그의 목소리는 필요 이상으로 크고 날카로웠다. 잡담하느라 바쁘던 롬과 투갈마저 그 소리를 듣고는 시선을 앞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울란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한 대만 쳐도 부러지겠군.”

그 혼잣말을 용케 들은 롬이 실실 웃으며 대꾸했다.

“붙으면 후사비께서 이기겠는데?”

“다 들었어, 롬.”

“어이쿠, 후사비께선 귀도 밝으십니다.”

카놀라가 뒤쪽의 롬을 흘겨보았다. 롬은 능청스럽게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자신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헤세온이 울컥한 표정으로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카놀라 왕녀……!”

“베르긴 공자. 눈치도 없으세요?”

“……예?”

헤세온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조금 전까지 장난스러움이 가득했던 카놀라의 목소리가 이렇게 차갑게 돌변했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표정하게 자신을 응시하는 카놀라의 얼굴을 보니 들은 게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헤세온이 당혹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카놀라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후사비요. 왕녀가 아니라 후사비라고 부르세요. 아, 설마 후사비가 무슨 뜻인지 모르세요? 세상에! 트리폴에 오면서 기본적인 언어도 익히지 않고 오신 건 아니죠? 명색이 샤를만 학회에서 수학하는 학자인데, 설마 그런 무식한 짓을 하진 않았겠죠.”

오스카와 루덱과 안젤리나는 아주 빠르게 서로의 시선을 마주쳤다. 그러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먼 산으로 시선을 돌렸다. 정말이지 늘 감탄을 해도 모자랄 정도로 뻔뻔한 주인이었다. 어쩜 저렇게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기소개 할 수 있지?

세 사람은 아직도 ‘후사’가 무슨 뜻이냐고 묻던 카놀라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세 사람이 아니어도 ‘무식한’ 카놀라의 모습을 기억하는 티보치나가 옆에서 뻔히 보고 있는데 저런 말을 천연덕스럽게 뱉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도 티보치나는 카놀라의 뻔뻔함을 지적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녀는, 카놀라를 도와 한술 더 떴다.

“트리폴의 문화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 설마 학자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물론 학자라고 다 유식할 수는 없겠지만요.”

지식이야말로 헤세온의 가장 큰 자존심이자 자부심이었다. 이 순간 무참히 부서지는 자신의 자존심에 헤세온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건 그가 상상했던 재회가 결코 아니었다.

“어쩔 수 없지. 딱 한 번만 알려 줄 테니까 새겨들으세요. 후사비란, 내가 이 나라 후사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뜻이에요. 후사가 무슨 뜻인지는 알죠?”

어쩌면 즐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루덱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와서 내내 착하게만 지내느라 좀이 쑤셨을 것이다. 샤를만에서 했듯 자유롭게 연애를 하지도 못하고, 웃으며 비아냥거리거나 물 먹일 일도 없으니 얼마나 지루했을까. 속에 맺힌 게 있지 않고서야 저렇게 신나게 사람 속을 긁을 리가 없었다.

측은한 눈으로 헤세온을 힐끗 본 루덱이 시선을 옮겼다. 카놀라의 뒤에 서 있는 다섯 전사의 표정도 루덱과 썩 다를 바가 없었다. 같은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갑자기 다섯 전사가 친근하게 보였다.

그런데 저 다섯 전사는 에델의 곁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여기까지 어쩐 일입니까?”

슬금슬금 그들의 곁으로 다가간 루덱이 넌지시 질문했다. 그 물음에 루덱을 힐끗 본 아이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원 나왔습니다.”

어투가 어찌나 비장한지, 전쟁에 참여하는 기사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기야 트리폴 입장에서는 전쟁과 비슷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까지 이방인이 나라 안에 넘쳐 났던 때도 없을 듯하니까.

루덱은 헤세온과 샤를만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딱히 구해 주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지만 카놀라가 신난 모습을 보니 절로 안쓰러워졌다. 타이밍도 더럽지, 어쩌다 후사비로 인정받은 시점에 와서 저런 꼴을 자처하나.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니 감개무량합니다. 글로리오사 님의 심려가 크셨는데 이 모습을 아시면 무척 기뻐하실 겁니다.”

예상치 못한 공세에 정신을 못 차리는 헤세온을 보다 못한 켈튼 백작이 나서서 말을 했다. 이대로 몰아붙여서 당장 되돌려 보낼 작정이었던 카놀라는 안타깝다는 듯 짧게 혀를 찼다. 켈튼 백작이나 돌로레스 자작 부인은 헤세온에 비하면 상황 파악이 빠른 사람들이었다. 아마 헤세온이 나서는 동안 뒤에서 눈치를 보며 대충 사태를 이해했으리라. 루덱은 느슨해졌던 경계심을 다잡았다. 그러나 그런 루덱을 비웃기라도 하듯, 카놀라가 즉각 그의 인사를 받았다.

“아, 그대도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켈튼 백작. 잘됐다. 온 김에 언니에게 말 좀 전해 주겠어요?”

카놀라의 유쾌한 목소리엔 조금의 긴장감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루덱은 잠시나마 했던 긴장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이었는지를 몸소 체감하게 되었다.

“황금 마차 아주 요긴하게 썼다고 말이에요. 난 겨울 산맥을 넘어가는 여동생에게 황금 마차를 떠안기기에, 눈밭에서 엿 먹어 보라는 뜻인 줄 알았지 뭐예요? 하마터면 언니의 깊은 뜻을 곡해할 뻔했잖아.”

너무 발랄하게 말해서 다들 무심코 카놀라의 말을 넘길 뻔했다. 켈튼 백작이 당혹스러운 낯빛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런 그를 향해 티 없이 해맑은 미소를 짓던 카놀라가 휙 고개를 돌렸다. 켈튼 백작의 옆에 무방비한 꼴로 서 있던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의미심장한 눈길로 그녀를 본 카놀라가 눈을 가늘게 뜨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근데 왜 다들 빈손이지? 선물은 군주께 모두 드렸어요? 내 것은?”

켈튼 백작은 슬그머니 카놀라를 외면했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도 난처한 눈치였다. 헤세온이야 아까 받은 충격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다른 일행들도 이렇다 할 대답을 못 했다. 눈치를 보기 바쁜 그들을 흘겨보며, 안젤리나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빈손이었습니다.”

“설마! 안젤리나가 못 본 거겠지.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돌로레스 자작 부인은 그럴 사람이 아닌걸? 하루가 멀다고 오빠와 언니에게 선물 공세 하던 걸 내가 옆에서 똑똑히 봤는데, 설마 빈손으로 왔으려고? 타국을 방문하는 사절단인데 그런 무례한 짓을 할 리가 없잖아?”

콕 찍어서 한 사람을 지목하니 말문을 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은 괜히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태연함을 가장했다. 그러나 애써 만들고 있는 미소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선물은, 물론 있지요. 하지만 오는 길이 험해서 챙기기가…….”

“어쩜,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나도 빼먹지 말고 당장 보내라고 해요. 트리폴의 기술력으로는 얼마든지 겨울 산맥을 넘어 다닐 수 있으니 기꺼이 수레를 보낼게요. 난 황금 마차도 끌고 왔는걸?”

사실 수레는커녕 말 한 마리도 동원할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들은 선물 따위를 들고 오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평소 샤를만에서 엄청난 뇌물 공세를 해 온 것은 사실이고, 그것을 카놀라가 뻔히 보아 온 것도 사실이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은 숨을 몰아쉬며 어떻게든 회피할 만한 대답을 찾아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카놀라는 그녀가 답변을 궁리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채근했다.

“응? 왜 대답이 없지? 설마 있지도 않은 선물을 준다고 한 건 아니죠? 괜히 사람의 기대감만 높여 둔 거면, 나는 정말 슬플 거야. 너무너무 슬퍼서 언니에게든 오빠에게든 하소연이라도 하지 않고선 못 배길 텐데. 그럼 언니랑 오빠가 되게 짜증나겠다. 그치, 안젤리나?”

“그리고 그 짜증은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테고요.”

안젤리나는 그 어느 때보다 부드럽고 인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은 결국 빨개진 얼굴로 겨우 목소리를 냈다.

“걱정하지 말고 당장 챙기라 당부하겠습니다.”

“고맙기도 해라! 난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참 좋아!”

두 번 좋아했다간 저택을 통째로 바치라 할 기세다. 손뼉까지 치며 즐거워하는 카놀라의 모습에 루덱은 조용히 숨을 되삼켰다. 솔직히 구경하는 처지라서 그런가 재밌었다.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개 치는 카놀라가 너무 신나 보여서 흐뭇했고, 눈꼴 시린 글로리오사의 수하들이 쩔쩔매는 꼴을 보는 것도 고소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트리폴인들 앞에서 상대방을 훌륭하게 깔아뭉개는 카놀라가 아주 자랑스러웠다. 이미 후사비로 인정받은 상황이라곤 해도 이런 멋진 모습을 봤으니 진심으로 카놀라를 존경하게 되었겠지!

루덱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다섯 전사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멀뚱멀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어떠한 감탄도, 놀람도 없이 말이다!

“샤를만인들은 다 체력이 안 좋은 모양입니다.”

“예?”

“아직 해가 저물려면 멀었는데 벌써 저리 지치면 하루를 어떻게 보냅니까?”

티 없이 순수한 아이누의 물음에 루덱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아이누는 루덱의 반응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롬과 투갈도 헤세온 일행들의 나쁜 안색을 지적하며 혀를 차는 중이었다. 더불어 같은 샤를만인임에도 기운이 넘치다 못해 폭발하는 카놀라에 대해 감탄했다. 그러니까 저들이 감탄하는 부분은 카놀라의 지칠 줄 모르는 쾌활함이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감탄을 자아냈으니 좋은 것이겠지.

루덱은 그렇게 정신 승리 하기로 했다.

*

분명 몸은 피곤한데, 저절로 눈이 떠졌다.

평소보다 유독 무거운 몸의 감각을 느끼며 에델은 상체를 일으켰다. 기껏해야 몇 시간 잔 것으로는 다 풀릴 피로가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스스로 제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더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는 아직 해가 뜨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그는 기상하기로 했다.

얼추 시간을 따져 보니 그럭저럭 열 시간가량 잔 것 같다. 그는 목덜미를 주무르며 잠을 깨기 위해 노력했다.

사냥을 다녀오면 보통 스무 시간이 넘도록 잠만 잔다. 그러니 열 시간이라고 해 봐야 겨우 평소의 반절 정도 쉰 것에 불과하다. 에델은 뻐근한 근육을 풀고자 침대에서 내려와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했다.

평소보다 더 신중하게 스트레칭을 한 그는 아침 운동을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새파란 하늘은 이제 겨우 밝아지려는 기색을 보였다. 시원한 새벽 공기를 마시자 몽롱하던 정신이 완전히 깨어났다. 조용한 궁내에 에델의 발소리만 작게 울려 퍼졌다.

훈련장에 도착한 그는 우선 가벼운 달리기를 했다. 전신을 움직이자 축축 처지던 몸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온몸에 열기가 돌 정도로 뛰고 났을 즈음엔 이미 하늘이 환해진 뒤였다. 새 지저귀는 소리가 산중에 울려 퍼졌다. 뛰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잠시 서 있던 에델이 대련용 인형 쪽으로 향했다. 너무 멀지 않게 자리를 잡은 그가 보폭을 넓히고 서서 자세를 잡았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힘을 실어 말아 쥐자 팔뚝도 단단하게 변했다.

잠든 건 열 시간. 하지만 생각에 빠져서 몇 시간을 누워서 허비했었다. 족히 열두 시간이 넘도록 방에 틀어박혀 있었고 그사이에 카놀라는 옛 연인을 만나러 갔다. 다섯 전사를 모두 딸려 보냈지만 속은 여전히 편치 않았다. 어서 빨리 그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고 싶었다. 훈련이 끝나고, 방에 돌아가서 씻으면 얼추 아이누가 올 시간이 될 것이다. 그는 아이누의 긴 수다를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입술을 꾹 다문 에델이 인형을 노려보았다. 얼굴도 모르는 사내를 떠올리자 절로 투지가 불타올랐다. 평소처럼 기본자세부터 시작하기엔 이 기분을 다 풀어낼 수 없을 것 같다. 에델은 왼발에 힘을 주며 몸을 비틀었다.

퍽!

인형의 머리가 에델의 오른 다리에 차여 크게 요동쳤다.

인형을 실컷 두드려 패고 돌아온 에델은 느긋하게 아이누의 수다를 듣겠다는 자신의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겨울 산맥을 다녀오는 사이 책상에 일감이 잔뜩 쌓여 있던 까닭이었다. 정오에 하는 대련마저 미뤄야 할 지경이었다.

오늘은 누구라도 가차 없이 때려눕힐 준비가 되어 있던 에델은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몇 주간 에델이 딴생각을 하느라 종종 업무를 미뤄 왔음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오늘마저 제대로 하지 않으면 출장을 죄다 에델에게 넘길지도 모른다. 에델은 마지못해 책상 앞에 앉았다.

물론 책상 앞에 앉았다고 일이 뚝딱뚝딱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에델은 십 분에 한 번씩 창밖을 내다보았다. 일감을 처리해야 하는 게 왜 하필 오늘인가. 불청객이 제 정혼녀를 노리고 왔는데 자신은 왜 집무실에 묶여 있어야 하는 건가. 온갖 불만이 치밀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후사, 얼른 일을 끝마치시고 오후에 후사비를 뵈러 가시는 게 낫지 않습니까?”

보다 못한 아이누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그 말에 에델이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네 눈에는 이게 오전 내로 끝날 일인 것 같아?”

물론 절대 그렇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해야 할 일이라는 건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아이누는 헛기침하며 에델의 눈치를 보았다. 괜히 아이누에게 짜증을 낸 에델은 결국 체념 어린 표정을 지었다. 창가를 서성이던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펜을 들었다.

국경? 여긴 저번 달에도 보고했으면서 왜 벌써 새로운 보고서를 올린 거지? 벌목장? 이 정도는 자기들이 판단해도 되는 거 아닌가? 사육장? 그러고 보니 황금 산양은 어떻게 됐으려나? 예비 후사비에게 배정될 방과 물품? 이건 꼼꼼하게 확인해 봐야지. 불청객들에게 내줄 처소와…… 이건 넘어가고.

눈으로 서류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던 에델은 정확히 십 분 후, 탁 소리 나게 펜을 내려놓았다.

“아이누.”

“네?”

“……내 얼굴을 잊어버리면 어쩌지?”

“누가요?”

에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멀뚱멀뚱 에델의 뒤통수를 보던 아이누가 설마 하는 목소리로 물었다.

“후사비께서요?”

여전히 에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초조한 듯 펜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이누는 헛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후사의 얼굴을요?”

“중요한 문제야.”

후사가 이렇게까지 망가지다니,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이누는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을 되삼키며 대신 한숨을 내쉬었다.

“두 분은 어제도 만나셨는데요.”

그런 말은 양심상 나흘 정도 안 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아이누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지만, 얼핏 보이는 에델의 옆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차마 지적할 수가 없었다. 대신 아이누는 그가 좋아할 만한 내용을 머릿속에서 골라 보았다. 지금은 에델의 기운을 북돋을 만한 이야기를 해 줄 타이밍이었다.

“어제 후사비께서 수석 신녀에게 허리 리본을 자랑하셨습니다. 후사께서 묶어 주신 그 리본이요.”

과연 아이누의 의도가 먹혀들었는지, 에델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그는 아이누를 돌아보며 더 이야기해 보라는 듯 눈짓했다. 그의 의욕을 고취했다는 데에 보람을 느낀 아이누가 신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수석 신녀도 놀란 눈치였습니다. 속으로 시샘이 났는지, 자신은 꽃 모양으로 맬 수 있다며 유치한 대답을 하지 뭡니까? 다음엔 자기가 꽃 모양으로 묶어 드린다는 둥…….”

에델의 안색은 다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아니, 리본 이야기를 꺼내기 전보다도 더 어두워진 것 같다. 아이누는 자신의 촐싹맞은 주둥이가 또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누가 재빨리 수습하기 위해 주절주절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에델의 표정은 이미 차갑게 굳은 상태였다. 에델은 느리게 몸을 돌려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손등에 힘줄이 살짝 돋은 거로 보아, 펜을 움켜쥔 손에 과도한 힘이 들어간 것 같았다.

“아이누.”

“네.”

“오전 내에 꽃 모양으로 묶는 방법 알아 와.”

“……네?”

오전 내로 이 징그러운 문서들을 모두 처리하고, 꽃 모양으로 묶는 방법도 완벽하게 숙지한 뒤에 카놀라를 찾아가야겠다.

에델은 의욕에 불타서 펜을 놀렸다. 당황한 아이누가 몇 번이나 에델을 불렀으나 이미 그는 자신의 모든 감각을 서류에 집중한 뒤였다. 씁쓸하게 몸을 돌리며 아이누는 스스로 달랬다. 어쨌든 후사가 일할 의욕이 생기도록 만들었으니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냐며.

*

에델이 바쁘다는 소식은 카놀라에게도 전해졌다.

어쩔 수 없었다. 카놀라가 트리폴에 오기 전에도 에델은 이미 꽉 찬 일정에 맞춰 살아가던 남자니까. 그가 카놀라에게 시간을 쏟을수록 기존에 해 오던 업무들은 밀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며칠 정도는 온종일 일만 한다고 해도 이해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게 왜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왜 하필 저 꼴 보기 싫은 헤세온이 와 있을 때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하나? 왜 저 인간에게 멋진 에델을 자랑할 수 없단 말인가!

카놀라는 제 불만을 숨기지 못하고 정면을 응시했다. 못마땅한 카놀라의 눈빛에도 헤세온은 의기양양했다. 그는 카놀라와 대화할 기회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눈치였다. 일단 대화를 하고 나면 이 모든 상황이 바뀔 것이라고 믿는 게 분명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사실 카놀라는 이렇게 헤세온과 독대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지금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잠정적으로 후사비라 인정받았다고는 해도 신전의 시험 하나가 남아 있는 이상 그녀는 여전히 ‘예비’ 후사비였다. 빨리 티보치나에게서 쉬운 시험 하나를 받아 제대로 자리매김해야 했다.

또한, 그녀가 덜컥 납치해 온 황금 산양도 살펴야 한다. 그라그포드에게 하와르나 산양에 대해서도 논의할 일이 있었다. 이 나라에 온 이후로 모처럼 할 일을 찾은 상황이다.

그런데 그 귀한 시간을 이 정신병자에게 내 줘야 한다니!

“이곳의 낙후함을 익히 들었지만, 눈으로 보니 기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곳에서 견디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내가 지금 몹시 바쁘거든요? 오빠가 전하는 말이 뭔지 빨리 알려 줄래요?”

아까운 시간을 헤세온에게 내 주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전하러 왔다는 오라비의 말을 듣기 위해서. 상투적인 말들이 가득하던 서신은 그냥 대외적인 보여 주기에 불과했다. 진짜 할 말이 있다면 이렇게 입에서 입으로 전하려 했겠지. 이미 여행단의 구성 인원들만 보고도 대충 그의 의중을 짐작할 수는 있었지만 헤세온이 전하는 말 속에 다른 게 있을 수도 있다. 카놀라는 별수 없이 헤세온과 독대하기로 했다.

라우렐 혼자 벌인 일이면 사실 이 정도로 신경 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라우렐과 글로리오사가 손잡았다는 게 못내 신경 쓰였다. 아주 어릴 적부터 못 잡아먹어 안달 나던 두 사람이 손잡을 만한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

“왕자께서는 이 결혼이 정당한 절차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우려하고 계십니다.”

“아, 그래요? 잘됐네. 나도 그게 좀 마음에 걸리던 참이거든요.”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카놀라의 모습에 헤세온의 얼굴도 화색이 되었다. 그는 신난 표정으로 말을 이으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카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남은 지참금 반절도 얼른 채워서 보내라고 전해 주실래요?”

“네?”

“응? 왜요? 오빠의 말을 전해 주셨으니, 내 답변도 받아 가셔야죠.”

당혹스러운 표정을 짓던 헤세온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제는 너무 순식간에 진행된 이야기들에 놀라 어리벙벙하다가 하루를 보냈지만, 오늘은 다르다. 그는 오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다잡고 온 터였다.

“아뇨, 전 이 부당한 결혼의 무효를 선언하고 왕녀님을 다시 안전하게…….”

“베르긴 공자, 어제부터 참 말귀 못 알아들으시네. 후사비라고요. 왕녀님이 아니라.”

“말씀대로 이 결혼은 정당한 절차로 진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후사비라 칭함은 맞지 않습니다.”

간밤에 용어 공부 좀 했나 보네.

카놀라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했더니만, 오늘은 좀 힘들겠다.

“그래서 오빠가 전하려는 말이 그거란 소리예요? 내 결혼이 무효다?”

“저는 왕녀님이 총명한 분이시라는 걸 압니다. 왕자께서도 왕녀님의 판단력을 믿고 계시더군요.”

카놀라는 들으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판단력은 무슨. 카놀라가 백날 머리를 굴려 봐야 라우렐을 따라갈 수는 없다. 그리고 그걸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라우렐이었다. 카놀라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헤세온을 외면했다.

“내 판단력이 필요한 일이 있대요?”

“이런 말씀 드리기 외람되나, 이 결혼으로 샤를만이 얻을 수 있는 이득은 전혀 없질 않습니까?”

직설적인 그의 말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게 지금 싸우자는 거지?

“아시다시피 베르긴 가문은 톨레앙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적으로도 위상이 드높습니다. 이런 시골 땅덩어리를 통째로 가져와도 그 가치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요.”

“와, 베르긴 가문은 위상만큼 낯도 두꺼운가 봐요. 그 시골 땅덩어리의 안주인이 될 사람 앞에서 이런 소릴 다 늘어놓고.”

입만 웃고 있을 뿐,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그녀의 반응에도 헤세온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 헤세온은 이런 남자였지. 평소엔 우물쭈물하다가도 자신의 권위를 내세울 만한 자리다 싶으면 신나서 활개를 쳤다. 카놀라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런 놈과 연애한 자신의 등을 매우 치고 싶었다.

아무리 얼굴이 번지르르하고, 체격이 날씬해 옷맵시가 좋았어도 이 인간은 좀 아니잖아! 과거의 나 미쳤어?

“베르긴 가문은 관대합니다. 파혼 정도는 실수로 웃어넘길 수 있는 배포를 지녔지요.”

“어쩜 좋아. 난 속이 좁아서 사소한 외교적 결례도 웃어넘길 배포가 없는데.”

아주 비협조적으로 대꾸한 카놀라가 그나마 짓고 있던 미소조차 지워 버렸다. 냉랭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헤세온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는 에데사 왕실연구원과 합동 연구를 준비 중입니다. 샤를만 학회와 맺은 협약과는 그 규모가 다르지요. 갑작스러운 소식이라 왕자께서도 당황하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저는 이러한 정세에 발맞춰 샤를만과 베르긴이 긴밀한 우호를 맺어 둘 필요가 있다는 왕자님의 판단에 동의합니다.”

카놀라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침묵했다. 그녀는 정세가 어쩌고 협약이 어쩌고 하는 문제에 전혀 관심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헤세온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베르긴 가문이 샤를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 에데사와 손잡으려 한다는 소리였다. 베르긴의 무시무시한 자금력을 아는 라우렐은 둘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둘 사이를 훼방 놓기 위해 헤세온을 이용했다는 의미였다. 헤세온 역시 카놀라에게 목매고 있으니 냉큼 라우렐의 손을 잡았고.

“오, 긴밀한 우호. 아주 중요한 문제죠. 잘 알아들었어요.”

에데사 왕실연구원과의 합동 연구 내용이 대체 뭔지는 짐작도 가지 않는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도 않을 것이다. 솔직히 카놀라는 그 합동 연구로 인해 샤를만이 받게 될 피해에도 관심이 없었다. 그녀에게 중요한 부분은 다른 것이었다. 이 자리에서 갑자기 끼어든 나라가 ‘에데사’라는 점. 그리고 지금 제 오라비가 에데사와 트리폴을 두고 저울질하는 중이라는 사실.

“역시 왕녀님…….”

“이만 가 줄래요?”

“네?”

“나도 군주께 말씀을 드려야 할 거 아니에요.”

카놀라가 퉁명스럽게 대꾸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에게 등을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헤세온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아, 물론입니다. 왕녀님께서도 준비하셔야 할 테니까요. 그리고 저…….”

헤세온은 곱게 나가는 대신 아련한 시선으로 카놀라를 응시했다. 우물거리는 그 목소리에 카놀라가 힐끗 뒤를 보았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헤세온의 저 느끼한 눈빛만 보아도 불안감이 엄습한 까닭이었다.

“왕녀님께서 그렇게 떠나시고, 하루도 편히 잠든 날이 없습니다. 후회와 자책으로 가득한 밤이었지요. 그때 제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맙소사.

“제게 실망해서 더 매몰차게 대하고 계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저는 예전의 제가 아닙니다.”

카놀라는 겨우 웃음을 지었다.

“정신 나갔어요?”

어이쿠, 실수. 작게 덧붙여진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할 정도로 성의가 없었다. 그러나 헤세온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팍을 부여잡았다.

“저는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왕녀님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 불타는 심장을 꺼내 보여 드릴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겁니다!”

“공자, 심장이 불타면 죽어요.”

한심하다는 뜻이 가득 묻어나는 어투였다. 카놀라는 제 심경을 도저히 숨길 수 없었다. 몇 년이라도 사귀었으면 이해하겠는데, 헤세온과 만난 건 기껏해야 몇 개월이다. 그나마도 호감을 쌓겠다고 허비한 시간을 생각하면 실질적인 연애 기간은 길지도 않다. 헤세온의 외모나 몸은 금방 질려서 카놀라가 아쉬운 것도 없었다. 게다가 카놀라는 이미 인생의 동반자를 만났다! 에델에 푹 빠져있는 카놀라의 눈에 헤세온은 지나가는 젭과 다를 바 없었다.

아니, 젭은 귀엽기라도 하지.

“왕녀님, 저에게 이 모든 외교적 관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왕녀님만 돌아와 주신다면요.”

저 말을 베르긴 가문의 가주 앞에서 했다간 당장 두들겨 맞을 텐데. 아쉬운 마음에 탄식이 나왔다.

“공자 빼고 다 중요하게 생각할 거예요. 그걸 꼭 말해 줘야 알아요?”

“저희의 사랑이 지금은 시련을 겪고 있지만, 이 고통 뒤에 더 빛나는 미래가 있음을 믿고 있습니다. 오직 그것을 바라보며 이 자리에 섰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카놀라는 작전을 바꾸기로 했다. 그녀는 아주 잠잠한 문밖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응? 안젤리나 뭐라고? 손님이 오셨다고?”

“제 바람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스카! 이 인간……적인 공자께서 가신다네! 얼른 내쪼…… 내보내 줄래?”

막무가내로 말을 이어 가던 헤세온은 결국 오스카에 의해 끌려 나갔다. 마지막까지 사랑 타령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려 퍼졌다. 진저리를 치며 제 팔을 문지르던 카놀라가 고개를 내저었다.

“와, 정신병 걸리는 줄 알았어.”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카놀라가 힐끗 뒤를 보았다. 안젤리나가 문가에서 누군가를 안내하고 있었다. 겨우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저건 또 뭐람? 카놀라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야?”

“손님입니다. 알고 절 부르신 게 아니셨어요?”

무뚝뚝한 표정의 안젤리나 옆에 켈튼 백작이 거드름을 피우며 섰다. 사실 방금 전 카놀라가 부르지만 않았어도, 안젤리나는 이들을 적당히 상대하다 돌려보낼 작정이었다. 묻지 않아도 카놀라가 이들의 방문을 질색하리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카놀라가 제 입으로 손님을 들이라는 뉘앙스로 외쳐 버렸으니 어쩌겠나. 안젤리나는 시선을 회피했다.

“하…… 그래. 오빠 말을 들었으니 이제 언니 말을 들어야겠구나. 앉아요, 켈튼 백작.”

카놀라는 체념했다. 생각해 보니 헤세온의 말만으로는 글로리오사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다. 켈튼 백작은 글로리오사를 따르는 자이니 뭔가 말을 전해 주겠지.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척박한 나라에서…….”

“요점만 짧게 말해요. 말 길어지면 귀에 전혀 안 들어오니까.”

딱 잘라서 말한 카놀라가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녀는 눈가를 문지르며 켈튼 백작의 앞에 털썩 앉았다. 괜히 헛기침하던 켈튼 백작이 눈치를 보다가 말문을 열었다.

“흠흠. 글로리오사 님께서는 샤를만의 새로운 병과를 시험할 좋은 기회가 있으리라 믿으십니다.”

너무 갑자기 본론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카놀라는 이해하는 데에 약간의 시간을 소요했다. 그러니까 글로리오사가 새로운 병과를 만들었다고? 기존에 있는 병과들로는 만족이 안 돼서? 카놀라는 샤를만에 살던 시절을 떠올렸다. 글로리오사는 병과 하나하나를 세분화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온 국민을 병사로 훈련할 계획이래요? 이번에도 기병?”

창기병들로 이루어진 글로리오사의 직속 부대 외에도, 샤를만엔 온갖 종류의 기병 부대가 존재한다. 그 모두가 글로리오사의 주도로 신설되었다. 그녀가 부대를 하나 더 신설했다면 당연히 기병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카놀라의 물음에 켈튼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경보병입니다.”

심드렁하게 턱을 괴고 있던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보병은 뭐 하는 병과인데? 그런 물음을 하기도 전에 켈튼 백작이 설명을 이어 나갔다.

“기존 부대들이 깊은 산중 전투에 취약함을 인지하시고, 선지적인 관점으로 특별 훈련에 앞장서고 계십니다.”

여기서 산중 전투가 왜 나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켈튼 백작을 보던 카놀라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샤를만은 대체로 평야 지대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임펠이나 발트칸 쪽으로도 깊은 산중이랄 게 없다. 글로리오사가 유독 기병에 집중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물론 다른 병과가 없는 건 아니지만 샤를만은 압도적으로 강한 기병 부대를 자랑한다. 그들을 이끌고 어지간한 싸움거리는 죄다 찾아다니며 쑤셔 댔었지.

카놀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글로리오사는 늘 싸움거리를 찾아 헤매는 언니였다. 누가 전쟁광 아니랄까 봐.

“그리고 그들의 경험을 쌓을 만한 장소가 필요하고?”

“왕녀님께선 이해해 주실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구체적으로 따지면 라우렐과 글로리오사 사이엔 더 계산적인 협상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들은 것으로 내릴 만한 결론은 하나였다. 라우렐은 트리폴에 넘긴 막내 여동생을 다시 빼내 올 궁리를 하고 있고, 글로리오사는 전쟁의 빌미를 찾고 있다는 것.

“사흘 남았죠?”

“예?”

“그대들이 머무르도록 허락된 시간.”

카놀라는 턱을 괴었다. 그러니까 이 인간들이 지금 꽃길만 남은 내 인생을 망치려고 달려들었다는 거잖아? 그렇게 정리가 되자, 머릿속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서늘하게 식었다. 덕분에 빙긋 짓는 미소도 덩달아 싸늘했다.

“그래, 잘 이해했으니까 돌아가서 기다려요.”

켈튼 백작이 나가고도, 카놀라는 한참이나 혼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생전 이렇게 진지한 모습을 본 적이 없던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내심 걱정스러운 마음에 카놀라의 주변을 서성였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끙끙 고민하던 그녀가 결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안 되겠어.”

카놀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후다닥 곁으로 다가온 안젤리나와 오스카를 돌아본 그녀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당장 세 번째 시험을 봐야겠어!”

*

카놀라가 먼저 자신을 찾아온 건 처음이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티보치나는 기분이 좋았다. (티보치나는 그간 시중인 중 누구도 카놀라에게 자신의 거처를 알려 주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을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샤를만에서 온 불청객들이 3일 동안 수행해야 할 다양한 종교적 절차를 정리하던 업무를 기꺼이 뒤로 미뤘다.

그리고 카놀라는 자리에 앉기도 전 대뜸 본론을 꺼냈다.

“티보치나, 시험!”

“네?”

“당장 시험을 내 줘!”

“……그 시험이 찻잎을 말씀하는 건 아니시죠?”

어떤 차를 낼까 고민하고 있던 티보치나가 무심코 속내를 중얼거렸다. 그녀의 혼잣말 같은 물음이 어찌나 진지했던지, 카놀라는 안부 인사도 건네지 않은 자신의 태도를 빠르게 반성했다. 그렇지 않아도 불청객들 때문에 피로할 티보치나의 입장은 생각하지도 않고 제 볼일만 보려 하다니. 자신이라면 모를까 티보치나는 저렇게 헛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할 정도라니, 이것이야말로 티보치나가 짙은 피로감에 짓눌려 있음을 방증하는 게 아닌가!

“전 괜찮으니 그 시선은 거둬 주시겠어요?”

티보치나가 웃으며 카놀라를 의자로 안내했다. 세상의 모든 안타까움을 담아 티보치나를 바라보던 카놀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니, 티보치나도 안쓰럽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닥쳐 있었다. 그러니까 오늘만큼은 안부 인사를 건네지 않아도 이해해 줘야 했다.

“있지, 티보치나. 아주 급한 일이야.”

차를 준비하려던 티보치나는 결국 카놀라의 재촉에 못 이겨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나 막상 티보치나가 앉으니 카놀라는 입술을 벙긋거릴 뿐 이렇다 할 말을 하지 못했다. 막상 앉히긴 했는데, 설명하려니 또 애매해진 까닭이었다. 머리를 감싸고 끙끙대던 카놀라가 겨우 적절한 표현을 찾아냈다.

“내가 악의 무리를 처단해야 하는데, 지금보다 권한이 쪼금 더 많이 필요해.”

그러니까 그 악의 무리란 내 언니와 오빠인데, 그 언니는 글로리오사고 오빠는 라우렐이야. 두 사람은 사실 앙숙인데 자기들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손을 잡는 뻔뻔스러운 종자로 진화한 것 같아. 그렇게 손을 잡은 두 사람이 글쎄 무례하고 상식 없는 여행단을 꾸려서 꽃길만 남은 막냇동생의 미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라고 보내온 거야! 젭보다도 못난 정신병자가 아침 댓바람부터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머릿속으로 정리할수록 설명이라기보단 하소연에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카놀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신 ‘그게 무슨 소리냐?’는 티보치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사실 조금 한탄하고 싶은 욕구도 있었다. 티보치나라면 전후 사정을 이해하기도 전에 일단 공감부터 해 줄 테니까. 나아가 그들을 괴롭히고 처단할 구체적인 방법까지 함께 고민해 줄 것이다! 정말이지 훌륭한 친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군요.”

긴 설명을 늘어놓을 만만의 준비를 하고 있던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연히 뭔가 물어볼 줄 알았는데, 티보치나는 너무나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시험을 내겠습니다.”

지금? 이렇게 고민 없이?

“불순한 이방인이 트리폴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무찔러서, 당신의 현명한 머리를 증명하세요.”

얼빠진 카놀라의 표정에 티보치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불청객이 방문한 이후로 내내 가시지 않던 피로와 짜증이 단숨에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 즐거움이 그 빈 자리를 차지했다. 티보치나는 새삼, 카놀라가 겨울 산맥으로 간 이후 자신에게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이 누적되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그것은 모두 카놀라에 대한 걱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행여 겨울 산맥에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브리도에게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래서 카놀라가 마중 불을 피우라는 두 번째 시험까지 통과했다는 소릴 듣고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티보치나는 못마땅함이 가득한 브리도의 앞에서 그만 환하게 웃고 말았다. 곧장 표정을 추스르긴 했지만, 자꾸 미소가 번져서 한동안 입가에 잔뜩 힘을 주어야 했다. 브리도는 티보치나에게 남은 하나의 시험을 신중하게 내야 한다고 단단히 당부했다.

티보치나는 어렵지 않게 마지막 시험을 결정했다. 이미 두 개의 시험을 통과했고, 잠정적으로 후사비라 인정받았다. 후사비로서 카놀라가 취해야 할 행동이란 아주 명확했다.

저 불청객들의 의도가 무엇이든 카놀라가 직접 차단하고, 나아가 내쫓는 일.

“급하시다면서요.”

넋을 놓고 있던 카놀라는 티보치나의 채근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눈을 깜빡거리던 카놀라가 이내 활짝 웃었다.

“완벽해!”

카놀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티보치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이제 디라즈께 가자!”

“디라즈요?”

아무리 카놀라의 제안이라면 뭐든 좋은 티보치나래도 지금의 말은 약간 꺼려졌다. 카놀라를 반기는 것과 별개로 왕가와 신전의 사이는 여전히 냉랭했기 때문이다. 군주 또한 카놀라로 인해 전보다 아주 부드러워졌다지만 그건 카놀라와 있을 때뿐이었다. 카놀라가 끼지 않은 자리에서 트리폴인들은 여전히 무뚝뚝하고 자신의 맡은 일에만 집중했다. 티보치나 역시 일이 아니고선 디라즈를 만나러 가지 않는다.

티보치나는 선뜻 카놀라의 손을 잡지 못했다. 카놀라가 그런 티보치나를 재촉했다. 그녀의 목소리엔 자신감이 넘쳤다.

“아무리 으르렁거리던 사이래도 외세 앞에선 하나가 되는 법이니까!”

그리하여 지금의 이런 조합이 탄생했다. 떨떠름한 표정의 디라즈와, 어색하게 앉은 티보치나, 그리고 생글생글 웃는 카놀라까지. 멋쩍은 표정의 티보치나는 찻잔에 코를 박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라그포드는 갑작스럽게 집무실을 쳐들어온 두 사람 때문에 반강제로 업무를 중단했다. 사실 그는 업무를 먼저 처리하고 싶었지만, 괜히 카놀라를 건드렸다가 또 그림을 그려 준답시고 매달릴까 걱정스러워서 차마 내쫓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지금 그려진 것만으로도 그 양은 충분했다.

어쨌든 각자가 가진 모종의 이유로 세 사람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셋 중 유일하게 의욕적인 카놀라였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어요. 다들 아시죠?”

카놀라가 짐짓 심각한 목소리로 말하며 상체를 앞으로 수그렸다. 둥근 원탁에 팔꿈치를 댄 그녀가 양손을 모아 깍지를 껴 그것을 코앞으로 가져갔다. 딴에는 의미심장하고 진지한 모습을 연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것은 카놀라 혼자만의 시도였다. 팔짱을 끼고 앉아 있던 그라그포드가 무뚝뚝하게 질문했다.

“그대가 말하는 우리가 대체 누군가?”

“당연히 트리폴이죠! 참고로 전 후사비나 다름없으니까 당연히 트리폴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는 거고요.”

“아, 그렇군.”

감흥 없이 대꾸한 그라그포드가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필 고개를 돌린 방향이 그의 책상 쪽이라, 한가득 쌓인 업무가 눈에 들어왔다.

저거 얼른 처리해야 다음 주에 예정대로 출장을 갈 텐데. 다 못하면 에델이라도 보내야 하나? 요즘 부쩍 출장을 꺼리는 에델을 떠올리니 괘씸해서라도 다음 주 출장을 그에게 미룰까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마 카놀라가 이런 생각을 알면 기함할 테지만 말이다.

“저 악독한 샤를만인들을 물리치기 위해 우린 힘을 모아야 한다고요! 하지만 제 시험이기도 하니까, 제가 앞장설게요.”

세 번째 시험이 이방인을 무찌르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그라그포드는 조금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되어서 수석 신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그라그포드의 눈을 피했으나, 볼에 떠오른 약간의 홍조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것을 보며 그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브리도는 수석 신녀가 카놀라를 어떻게든 눌러 앉히려고 온갖 수를 쓰고 있음을 알고 있을까? 아마 제사장은 수석 신녀가 이렇게 찾아와 앉아 있는 것도 모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대의 시험이니 그대가 홀로 치러야 마땅하지. 이렇게 둘러앉아 상의할 만한 일이 아니다.”

“어머, 제가 후사비라곤 하지만 마음대로 공문서를 남발할 순 없잖아요. 나라 이름을 걸고 하는 약조인데 당연히 상의를 거쳐야죠.”

공문서? 약조?

그라그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샤를만 여행단의 목적은 파혼인 줄 알았는데, 사실 교역을 신청하러 온 건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무척 미흡한 행차였다. 게다가 교역이 목표였으면 카놀라를 찾아갈 게 아니라 그라그포드에게 직접 찾아와야 한다.

이방인이 나라를 갉아먹을 것이라던 제사장의 성난 음성이 떠올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카놀라와 손을 잡고 트리폴에서 뭐라고 뽑아 먹을 작정으로 온 건가?

“대체 무슨 꿍꿍이이기에?”

“자, 이 지도 좀 보세요.”

카놀라가 원형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의 위엔 세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나무에 스민 검은 염료가 겨울 산맥의 거친 선을 굵게 표현했고, 그 속엔 트리폴 국경선과 곳곳의 지역명이 적혀 있었다. 중앙에 그려진 산맥을 중심으로 오른편엔 에데사가, 왼편엔 샤를만이 있었는데 글자와 국경선으로만 나라가 표시되어 있었다. 타국의 지도까지 이곳에 그려둘 필요성을 못 느껴서였다. 카놀라는 그중 샤를만이라는 글자의 한참 위쪽을 짚었다.

“여기에 톨레앙 공화국이라는 곳이 있어요. 톨레앙의 의회에서 제법 힘깨나 쓰는 가문이 바로 베르긴이고요.”

베르긴이라는 말에 티보치나가 힐끗 시선을 들었다. 분명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었다.

“여행단의 대표라던 자가 아마…….”

“응. 베르긴 공자. 베르긴 가문의 직계 혈통. 샤를만에서 유학 중인데 친하게 지내서 나쁠 거 없으니까 오빠, 음. 샤를만 1왕자가 돌봐 주고 있는데 정신병자야.”

카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뭐라고 주장하든 다 헛소리야. 디라즈께서도 확실히 아셔야 해요. 그 인간이 한 말은 다 거짓부렁이에요. 베르긴 공자는 관심받으려고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중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뭐 누구의 연인이었다는 둥 그런 정신 나간 소리.”

특히나 뒷부분을 말할 땐 힘주어서 또박또박 뱉었다. 어떻게든 헤세온이 뱉은 말을 수습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카놀라를 가만히 보던 티보치나가 티끌의 사심도 묻어나지 않는 순수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교제를 한 건 사실이었다고 그러던걸요?”

“누가 그런 소릴 해?”

즉각적으로 튀어나온 물음은 ‘눈앞에 그 말을 한 당사자가 있으면 당장 머리털을 뽑겠다’라는 의지를 포함하고 있었다. 반쯤은 놀리는 심정으로 말을 내뱉었던 티보치나는 차마 ‘두 명의 시중인들’이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여기서 그들의 이름을 말했다간 두 사람이 평생 카놀라에게 괴롭힘당할 것 같았다. 아마도 거의 확실할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괴롭힘을 당할 때마다 티보치나를 원망하겠지.

하지만 티보치나가 함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카놀라는 대충 짐작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그런 말을 할 만한 후보가 몇 없었다.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보나 마나 눈치 없는 루덱이겠지!

“그건 아주 짧게 스쳐 간 수치스러운 역사일 뿐이야.”

차마 거짓말이라곤 할 수 없어서, 카놀라는 마지못해 변명했다. 그러면서 그라그포드에게 냉큼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에델에겐 비밀로 해 주실 거죠? 물론 과거가 있으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전 지금도 충분히 매력적이니까요. 매력도 과하면 탈 난단 말이에요.”

물론 에델은 이미 헤세온이 ‘왕녀의 애인’이라고 떠들었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의 진위는 모를 것이다. 이미 카놀라가 ‘정신병자’라고 몇 번이나 단언했으니 내심 거짓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카놀라는 괜히 제 과거를 들추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카놀라의 말에 그라그포드는 침묵했다. 좀처럼 대답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막 채근하려는 찰나, 등 뒤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과거요?”

“으헙, 깜짝이야!”

기겁하며 어깨를 움츠린 카놀라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단정하게 선 에델이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그는 카놀라와 눈이 마주치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카놀라는 방금 놀랐던 것도 잊고 마주 웃었다. 간밤에 잘 잤느냐는 물음이 어찌나 정중하고 다정한지, 카놀라는 상황도 잊고 그에게 뽀뽀할 뻔했다. 사실 그라그포드가 헛기침을 하며 존재감을 피력하지 않았다면 정말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른다.

“심각한 논의 중이라기에 조용히 들어왔습니다. 제가 끼어도 되겠습니까?”

그의 물음은 무척 형식적이었다. 딱히 누군가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라기보단 앉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그러나 카놀라는 혼자 꺄꺄 소리를 내며 냉큼 제 옆의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러곤 에델의 옆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이렇게 가까이에 앉혀 두니 존재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했다. 카놀라는 얼른 옆 의자를 빼준 자신의 순발력에 감탄했다. 행여 그라그포드가 붙어 있는 꼴을 못 보겠다며 다른 곳에 앉히기라고 했으면 싸웠을 것이다.

흐뭇하게 웃는 카놀라의 귓가로 에델의 차분한 물음이 들렸다.

“그런데 심각한 사안이란 게 과거 이야기였군요. 그 연인이라는 자와 관련된 일입니까?”

카놀라는 곧장 후회했다. 에델이 너무 코앞에서 묻는 바람에 못 들은 척할 수가 없다.

“크흠, 그 인간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어요. 자꾸 헛소릴 해 대고 있는데, 실은 죄다…….”

“괜찮습니다.”

“네?”

주절주절 군소리를 늘어놓으려던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델은 무척이나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혹 그의 말이 문제가 될 것이라고 걱정하셨다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외국에선 자유연애를 권장한다고 들었습니다. 그와의 인연 또한 그러한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정말 괜찮아요?”

“물론입니다. 신경 쓰지 않습니다.”

심지어 에델은 빙긋 웃기까지 했다. 그가 신경 쓰지 않는다니, 다행이긴 한데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델을 보던 카놀라가 괜히 멋쩍은 감정을 숨기고자 헛기침했다. 좋은 거겠지? 근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생각해 보니 이게 다 헤세온 때문이다. 애초에 헤세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렇게나 기분 나쁠 일도 없었을 텐데. 쉽게 원흉을 찾아낸 카놀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번 시험에 임할 때 개인적인 억하심정도 담뿍 담아서 처리해 버려야지.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어…… 그럼 계속 이야기를 진행할게요.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너무 당황해서 바로 직전 하던 말을 죄 까먹었다. 카놀라는 티보치나와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는 대화에 거의 집중하고 있지 않았던 터라 딱히 해 줄 말이 없었고, 티보치나는 헤세온에 대한 이야기 때문에 곧장 본래 주제를 떠올리지 못했다. 약간의 고민 끝에 세 사람이 둘러앉은 본래 목적을 떠올린 티보치나가 카놀라에게 알려 주려는 찰나, 잠자코 있던 에델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그래서 그 자식을 어떻게 엿 먹이겠다고요?”

네?

웃는 낯을 고수하며 묻는 에델의 어조는 무척 침착했다. 그래서 카놀라는 상황의 부자연스러움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불청객을 깔끔하게 치워 버리겠다는 내용의 논의 아니었습니까?”

그러니까 방금 뭐라고 하셨죠? 무심코 되물을 뻔한 카놀라가 혀를 깨물며 말을 참았다. 그라그포드는 어처구니없다는 시선으로 에델을 바라보았다. 티보치나 역시 말을 잃었다.

에델이 원래 저런 단어를 썼던가?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딱히 생각나는 건 없었다. 하지만 온종일 붙어 다녔던 건 아니니까 평소에 저런 말을 썼을 수도 있지. 게다가 저렇게 말하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카놀라가 문득 자신에게로 향한 시선을 느끼곤 고개를 돌렸다. 그라그포드의 묘한 눈빛과 마주치자, 영문 모를 죄책감이 치밀었다. 카놀라는 정색하며 스스로 변호했다.

“내가 물들인 거 아니에요. 진짜로.”

절대 물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냥 상대방이 자처해서 물들겠다는 것을 막지 않았을 뿐.

*

열린 창문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아니, 흐반에겐 시원하지만 비디움에게는 차가울지도 모른다. 해돋이 협곡의 바람은 유난히 매서운 편이다. 깎아지른 절벽에 바람을 막아 줄 만한 큰 나무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온종일 창을 열어 두면 방 안의 가벼운 것은 죄다 날려서 엉망이 되곤 했다. 평소 그 난장판을 정리하는 일은 흐반의 몫이라, 그는 종종 비디움에게 불평을 해 댔지만 비디움은 저렇게나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흐반은 바람에 크게 날리는 비디움의 머리칼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느슨하게 묶은 머리칼이 금방이라도 풀어지듯 거침없이 날렸다.

“흐반, 너는 어떻게 생각해?”

창문을 닫을까 말까 고민하던 흐반이 퍼뜩 시선을 들었다. 비디움의 얼굴은 여전히 창밖을 향해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물음은 분명 흐반에게 건네진 것이었다.

“무엇을 물으시는 겁니까?”

“서신 내용. 하와르 말이야.”

비디움의 물음에 흐반이 제 손에 들린 서신을 힐끗 보았다. 긴급하게 전달받은 서신엔 의외의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해돋이 협곡에 하와르 재배지를 만들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디라즈는 장애로 인해 해돋이 협곡으로 떠밀린 트리폴인들에게 재배지를 맡기겠노라 전해 왔다. 그리고 그 책임자로 비디움을 선택했다.

“하와르 재배는 디라즈의 숙원 사업입니다.”

비록 내내 실패했지만.

하지만 이 서신의 내용에 따르면 이번엔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시험 때문에 겨울 산맥 꼭대기를 다녀온 샤를만 왕녀가 황금 산양을 산 채로 잡아 왔기 때문이다. 후사와 왕녀의 말에 따르면 황금 산양의 주식이 하와르였으며, 산양들의 서식지에 하와르 군락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 환경과 가장 비슷한 장소가 협곡이라고 했다. 물론 토질까지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산양의 배설물이 하와르의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기대하는 것 같았다. 재수가 좋으면 배설물에서 하와르 씨앗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다.

아직 모든 건 예상에 불과했다. 이전의 시도들에서 그랬듯 분명 변수가 생길 것이다. 그런데도 흐반은 이 시도가 그리 헛되게만 보이진 않았다. 그간의 전적을 생각하면 회의적인 마음이 들다가도, 왕녀를 생각하면 왠지 이번에야말로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해질 것 같았다. 그 이방인 왕녀는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만 불러일으키니까.

게다가 그것과는 별개로, 디라즈는 하와르를 재배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아주 약간의 희망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추진할 사내였다.

“하와르가 있었다면 그의 연인은 살았을지도 모릅니다. 그 가정이 하와르에 대한 집착을 놓지 못하게 만들겠죠. 서신은 의견을 묻는 게 아니라 통보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먹여 살렸으니 이제 너희도 이 나라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해라. 그렇게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냥해 온 동물들을 하염없이 축내는 해돋이 협곡 사람들을 두고 신전이 얼마나 못마땅해했는지 알고 있다. 신전의 항의를 무시하고 막아 준 게 디라즈였다. 그러니 그가 이런 통보를 한다면 협곡에선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정말 살았을까?”

비디움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흐반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스타티스가 아플 때, 그라그포드는 간절히 하와르를 찾아 헤맸으나 얻지 못했다. 만약 그때 하와르가 있었다면 스타티스는 죽지 않았을까? 흐반은 장담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스타티스는 트리폴의 추운 기후를 견뎌 내지 못하고, 이미 체력의 한계를 느끼던 와중이었다. 하와르가 아무리 영약이라고 한들 이미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사람까지 되살려 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무능함에 치를 떨었다. 그런데도 그가 디라즈로서 버티며 모두를 이끌어 온 건 순전히 후사 때문이었다.

“적어도 재배에 성공하면,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비디움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확인한 흐반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래전 일로 인해 비디움이 상심에 빠지는 것을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흐반의 노력 덕분인지 비디움은 금방 상념을 털어 냈다. 디라즈는 지금 당장 재배지를 만드는 일에 착수하길 바란다. 해돋이 협곡에서만큼은 모두를 통솔하고 있는 비디움이 나서서 틀을 잡아 주어야 했다.

“관리는 네가 해. 보고는 디라즈께 직접 올리고.”

어차피 나에겐 말해 줘도 몰라. 나지막하게 덧붙여진 말을 들었음에도 흐반은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의 보고를 받는 분은 비디움 님이십니다.”

설사 그가 비디움 대신 모든 관리를 맡는다고 해도 보고는 비디움에게 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한 절차라고 해도 말이다.

그의 고집을 알아챈 비디움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그라그포드도 결국 실무가 흐반에게 넘어가리라는 걸 짐작하고 있을 것이다. 그녀의 남동생은 어릴 적부터 흐반을 탐내 왔다. 이참에 흐반을 전면으로 내세우면 그가 잃어버린 전사의 명예도 되찾게 될지 모른다.

“흐반.”

“디라즈는 트리폴을 등질 수 없지만, 저는 가능합니다.”

비디움이 손가락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저런 소릴 도시에서 했다간 당장 몰매를 맞을 것이다. 트리폴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훌륭하게 역할을 해냄으로써 나라를 지킨다. 모두가 전사가 되어 나라의 안전을 담보해야만 겨우 버틸 수 있는 곳이다. 분명 어릴 적부터 그리 배웠을 텐데, 유독 흐반은 흐미르보다 고집불통에 반항심도 가득했다.

“손가락 두 마디 때문에 묶여 있기엔 너무 긴 시간이었어.”

협곡은 장애가 있는 트리폴인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그리고 흐반의 장애는 잘린 손가락이었다. 딱 두 마디의 손가락. 그 이유만으로 이곳에 두기에 흐반은 아까운 사내라고, 비디움은 언제나 생각했다. 물론 흐반은 언제나 비디움의 의견을 부정했지만 말이다.

“이곳에 있기 위해 손가락이 더 필요하다면, 기꺼이 끊어 낼 겁니다.”

몇 번 더 재촉하려던 비디움이 입을 다물었다. 흐반은 일단 결심하면 두 번 생각하지 않는 사내다. 그리고 방금의 목소리를 미루어 짐작건대, 비디움이 한 번만 더 말을 꺼냈다간 두말없이 제 손가락을 자를 것이다. 그가 처음 협곡에 들어올 때처럼.

“비디움 님을 보필해야 하니 모두 자르진 않겠습니다. 그건 양해해 주십시오.”

가만히 침묵하고 있는 비디움을 달래려는 듯, 흐반이 말을 덧붙였다. 위로되기는커녕 그의 굳은 의지만 돋보여서 문제이긴 하지만 말이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비디움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흐반이 그녀의 곁으로 다가서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비디움은 제 어깨에 내려앉은 손의 무게를 인지했다. 그 위로 자신의 손을 얹으니, 거칠고 건조한 살갗이 느껴졌다. 뭉툭한 그의 손가락을 제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비디움이 결국 체념 어린 미소를 지었다.

손의 주름만으로도 그와 함께한 세월을 가늠 해 볼 수 있다. 너무 오래 함께했고, 지금도 함께 늙어 가는 중이다. 그녀는 늘 그에게 떠나라 말하지만,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간 그녀 자신이 버티지 못할 것을 사실 알고 있었다.

“넌 지독한 사내야.”

바람에 내내 휘날리던 머리칼이 결국 부드럽게 풀어졌다.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머리끈이 소리 없이 떨어지려는 것을, 흐반이 손으로 잡아챘다. 비디움의 어깨에서 손을 뗀 흐반이 능숙한 손길로 머리칼을 그러모았다. 비디움은 잠자코 그에게 머리칼을 맡겼다.

마구잡이로 뒤엉키려던 흰 머리칼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가는 것을 느끼고 있으려니, 조금은 나른한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잠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그녀는 눈을 감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와르 재배에 성공하면 협곡의 전사들은 명예를 회복할 수 있어.”

“네.”

그것의 성공 여부는 단기간 내에 알 수 없다. 하지만 트리폴을 위해 뭔가 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협곡의 전사들은 활기를 띨 것이다. 밥만 축내고 쓸모없는 전사라는 자격지심을 벗고 나라의 발전에 일조한 떳떳한 전사로 다시 태어나겠지. 이것은 기회였다.

“내게 성공을 가져와.”

11. 차근차근

모든 일은 여행단이 방문해 있는 3일 안에 마쳐야 한다.

카놀라가 제시한 내용은 실로 간단명료했다. 하와르 재배에 성공해서 그 어떤 주변국도 섣불리 덤비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자는 내용이었다. 물론 성공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와르가 훌륭한 협상 미끼가 될 터이므로 어떻게든 그것을 이용하자는 게 요지였다. 이미 몇 번 재배에 실패했던 그라그포드는 그녀의 의견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이어지는 카놀라의 설명에 심각한 얼굴로 돌변했다.

‘에데사가 샤를만과 톨레앙을 끌어들이려 하고 있어요. 자기들 역사가 있으니 독단적으로 트리폴을 건들진 못하겠다는 거죠. 우린 그 인간들 사이를 이간질해야 해요. 적어도 샤를만만 우리 편으로 만들면, 샤를만이 알아서 톨레앙과 에데사 사이에 어깃장을 놓을 거예요. 그런 데엔 선수거든요.’

동맹국이란 트리폴에선 굉장히 낯선 개념이다. 카놀라와 에델이 정략혼을 맺었다고는 하나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우호 선언과는 궤가 달랐으므로, 여전히 트리폴 입장에선 샤를만도 다른 나라들과 다를 바 없는 이방이었다. 그러니 카놀라의 말에 당장 거부감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카놀라를 응원했던 티보치나마저 꺼림칙한 내색을 숨기지 못했다. 다만 에델만 처음과 다름없는 얼굴로 앉아 그녀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하와르 하나로 다 해결할 수 있어요. 우리의 안전이 담보되면, 하와르를 거래하겠다고 약속하는 거죠. 제가 후사비로 나서서 약속하면 샤를만 쪽에서도 믿을 거예요. 이런 말씀 드리기 좀 민망하긴 한데…….’

주저하던 카놀라가 떨떠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빠는, 그러니까 샤를만 1왕자는 이 결혼에서 어떤 이득을 바라고 있어요. 대사냥 때 제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에데사가 뭔가를 바라고 이 산맥을 계속 침범해 왔다고. 결국, 그건 이 산맥에서 얻을 수 있는 자원이겠죠. 가령 하와르 같은. 디라즈께서도 하와르의 상품 가치를 인정하셨다면서요?’

‘감언으로 맺어진 관계는 검 한 자루로 끊어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제가 있는 거죠!’

카놀라는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짐짓 헛기침했다.

‘제 입으로 이런 거 상기시키고 싶지 않지만, 트리폴과 샤를만은 엄연히 정략혼을 맺은 관계라고요! 게다가 이런 식으로 먼저 경고를 해 온 걸 보면, 오빠는 분명 아직도 절 아끼고 있는 거예요.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 말에 그라그포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샤를만은 아끼는 마음을 이상하게 표현하는군.’

‘저도 알아요. 되게 살벌하죠?’

에델은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하지는 못했다. 카놀라의 설명은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었고, 그들끼리 공유하는 감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다지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고 했으나 그 자리에서 카놀라의 말을 정확하게 이해한 사람은 그라그포드 정도일 것이다. 실은 그라그포드도 제대로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티보치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는데, 아무래도 브리도를 오랫동안 섬겼으니만큼 이방에 대한 거부감을 지우지 못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카놀라의 말을 수용했다. 카놀라가 아주 열심히 자신의 의도를 설명했기 때문이었다.

카놀라는 아예 제 오빠가 보냈다는 서신을 꺼내서 펜으로 한 줄 한 줄 그으며 해석을 해 주었다. 도입부의 인사말부터 마지막 서명 한 줄까지 말이다. 원탁에 둘러앉은 세 사람은 ‘날씨를 묻는 인사 속에 그토록 심오한 의도가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겨울 산맥의 낮은 기온’이 어떻게 ‘정략결혼으로 맺어졌음에도 여전히 냉랭한 양국의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서명을 약식으로 했는지 정식으로 했는지가 어째서 서신의 신뢰성과 진지함을 표현하는 방편이 되는 건가?

서신의 본래 내용이 카놀라의 주석으로 인해 알아보기 어려울 지경이 돼서야 세 사람은 대충 샤를만의 의도를 이해했다. 그라그포드가 극구 사양하지 않았으면 카놀라는 봉투에 찍힌 인장의 의도까지 해석해 주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라그포드의 표현을 빌려 정리하자면 이랬다. 첫째 왕자는 그 어떤 나라도 성공하지 못한 미지의 약초를 최초로 국내에 들임으로써 주목받고 싶어 하고, 둘째 왕녀는 자신이 새롭게 편성한 부대의 위력을 보여줌으로써 주목받고 싶어 한다. 결국, 첫째 왕자는 트리폴과의 독점 계약을 노리고 있으며 둘째 왕녀는 겨울 산맥 너머 에데사를 노린다는 것이다.

약초 하나로 인기를 관리하겠다는 발상도 이해되지 않고, 굳이 전쟁을 찾아서 하겠다는 의지도 이해되지 않는다. 카놀라는 이를 두고 ‘이해하지 않으면 편하다’라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한 것 같았다. 다만 이용당하고 있지만은 않겠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긴 했지만.

그 모습을 보며, 에델은 뜬금없게도 그녀가 참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모든 것이 그러했다. 제 형제들이 괘씸하다며 길길이 날뛰는 눈빛도 그러했고, 서신을 빼곡하게 채운 그녀의 악필도 그러했다. 이참에 정신적 손해 배상까지 모두 청구해서 부족한 지참금의 두 배를 뜯어내겠다며 사악하게 웃는 입매가 그러했고, 이 정도면 후사비로서 완벽한 자질이지 않겠느냐며 의기양양하던 표정이 그러했다. 무엇 하나 놓칠 수 없이 사랑스럽고 애틋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기에 그리 웃으십니까?”

그 물음을 듣고서야 에델은 자신이 웃고 있음을 깨달았다. 카놀라에게서 제법 심각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웃을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그녀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난다. 일종의 습관이 된 것 같았다. 그렇다곤 해도 전사들 앞에서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는 게 못내 민망해서, 그는 애써 안색을 가다듬었다.

그라그포드는 하와르 재배를 위해 해돋이 협곡으로 서신을 보낸다고 갔고, 카놀라는 티보치나와 함께 제사장을 만나러 갔다. 역사적으로 첫 교역을 시작해 보려 하니 제사장의 동의도 받아야겠다는 이유였다. 제사장이 카놀라에게 했던 짓을 생각하면 걱정스러웠으나 카놀라는 단호하게 티보치나와 단둘이 가겠노라 선언했다.

에델은 쫓겨나듯 바깥으로 나왔다. 그도 맡은 소임이 있었다. 카놀라가 직접 신신당부하며 맡긴 아주 중요한 임무였다.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불청객들을 진정시키는 동시에, 실컷 트집 잡기.

“후사. 오셨습니까.”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당부했음에도 도통 말을 듣지 않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적어도 샤를만의 귀족이라는 이들은 거대한 전사들의 위압감에 주눅이 들어 얌전히 구는 듯했는데, 문제는 이들의 대표라는 작자였다. 카놀라의 연인이라고 떠벌리던 사내. 이름이 헤세온이라고 했던가?

카놀라는 그의 말이 모두 거짓부렁이라며 틈틈이 강조했지만 에델은 그녀의 말을 반절만 믿었다. 과거에 연인이었음은 맞을 것이다. 다만 카놀라가 지금 그에게 마음이 없는 것도 확실하다.

“어디 있나?”

“후원으로 나갔습니다.”

어떻게든 헤세온을 말렸으나 결국 막지 못한 시중인이 에델의 눈치를 보며 고개 숙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시중인을 보던 에델이 묵묵히 걸음을 돌렸다. 후원이라 불릴 만한 곳이라면 한 군데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이곳은 엉망진창이군!”

샤를만인들은 죄다 저렇게 목청이 큰가? 그렇게 생각하던 에델은 금세 제 생각을 지웠다. 목소리가 큰 카놀라와 시끄러운 헤세온을 같이 묶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카놀라가 저리 목소리를 높이면 유쾌하게 들리지만, 저치의 음성은 듣기에 아주 많이 거슬릴 따름이니까.

“꽃 한 송이 없는 꼴이, 이곳의 척박함을 아주 잘 알겠어!”

헤세온도 에델과 똑같은 목적이 있는 듯했다. ‘트집 잡기’ 말이다. 저렇게 보이는 것마다 물고 늘어지는 꼴이 신나 보일 정도였다. 에델이 가던 길을 멈추고 힐끗 뒤를 보았다.

“아이누. 잘 적고 있지?”

“네.”

아이누는 종이에 코를 박고 들리는 말들을 적느라 정신없었다. 증거가 필요하다는 카놀라의 말을 수용한 까닭이었다. 평소에도 말 옮기는 데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누는 즉각 적임자로 선택되었다. 그리고 지금 보니 무척 적절한 선택이었음이 느껴졌다. 아이누가 열심히 적고 있는 내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델이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이런 곳에서 여태 지내셨다니!”

“잠자리가 불편했다고 불평을 해 댔다더니 그도 아닌 것 같군.”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헤세온이 기세등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 트집부터 잡고 보려던 헤세온은 에델의 얼굴을 마주하곤 갑자기 조가비처럼 입술을 다물었다.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그의 얼굴에 에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목청을 들어 보니 무척 편했던 모양이다.”

사실 에델의 말은 사실이었다. 내내 야영을 하다 와서 그런지, 헤세온이 평소 지내던 침실에 비교하면 훨씬 형편없는 침구임에도 아주 안락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대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헤세온은 최대한 험악한 표정을 짓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이 하얀 머리칼의 남자는 아주…… 심하게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티보치나를 만나 본 헤세온은 그녀의 외모에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에게 무척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트리폴에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에 좀 놀라긴 했지만 그뿐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대체 뭔가.

“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근데 당신은 누구지?”

“후사께 예우를 다해라.”

아이누가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후사라는 걸 알게 된 헤세온이 눈을 크게 떴다. 후사, 카놀라의 정혼자이자 군주의 외아들이었다.

“……이렇게 생겼다는 소린 못 들었는데?”

혼잣말 같은 그의 중얼거림에 에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생김새로 예우를 결정하는 건가?”

헤세온에 대해서 몇 번이나 같은 설명을 강조하던 카놀라의 목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했다. 아무래도 거기에 하나를 더 덧붙여야 할 것 같다. 저 예의도 모르는 정신병자 같으니.

“흠, 흠! 군주께 인사를 할 때 뵙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따라서 못 알아보는 것을 나무라시는 건 부당하지요. 게다가 귀국을 방문한 손님에게 인사도 없이 위압을 가하고 계시니, 이것이야말로 무례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델의 외모에 넋을 놓고 있던 헤세온이 민망함을 삼키며 언성을 높였다. 그는 잠시나마 한심한 꼴을 보였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서인지, 에델의 시선을 피하며 의미 없는 헛기침을 연발했다. 괜스레 어깨에 힘을 주고 가슴팍을 빳빳하게 펼친 그가 뒷짐을 지며 짐짓 거드름을 부렸다. 에델의 눈에는 무척이나 같잖은 거만이었다.

에델이 고개를 반쯤 돌려 제 뒤에 선 아이누를 돌아보았다.

“오라고 청하지 않았는데 굳이 찾아온 손님을 뭐라고 부르는지 아나, 아이누?”

심드렁한 그의 물음에 아이누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불청객이라 부릅니다.”

그 말에 헤세온이 발끈한 표정으로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누굴 불청객 취급하시는 겁니까? 우린 샤를만에서 왔습니다! 모국이 이런 취급을 받고 있음을 안다면, 카놀라 님도 몹시 분노하시겠죠!”

억지스럽게 내뱉는 카놀라의 이름은, 필시 에델을 자극하기 위한 말일 것이다. 뻔히 보이는 도발이니 넘어갈 필요도 없다. 알고 있음에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는 에델 대신 아이누가 먼저 나서서 험악한 음성을 냈다.

“일국의 후사비시다. 입을 조심해라!”

아이누의 말에 헤세온이 찔끔한 얼굴로 시선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용케 입으로는 주절거렸다.

“하, 하하! 아직 못 들으셨나 본데, 이 정혼은 불완전함은 카놀라 님도 인정하셨습니다.”

정혼의 불완전함. 이미 카놀라로부터 이 상황에 대한 해석과 대비책을 듣지 못했다면 이 시점에서 대화를 중단했을 것이다. 대신 헤세온을 당장 감옥에 가둬 버렸겠지. 아니면 대련장으로 던져 넣어 버렸거나.

실은 지금도 불쑥불쑥 그런 충동이 일었다.

“내 연인의 이름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연인?”

헤세온이 미간을 좁히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연인’이라는 단어가 헤세온의 신경을 건드렸다는 사실이 에델은 불쾌하게 느껴졌다. 헤세온의 저런 반응이야말로 그가 카놀라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는 걸 증명해 주었으니까 말이다.

“그분이 무엇에 혹하셨는지 쉬이 알 수 있겠습니다. 틀림없이 그 외견이 단단히 제 몫을 했겠지요. 샤를만인들은 본래 아름다운 것에 쉽게 마음을 뺏기거든요. 저 역시 겪어 보았으니 그 사정을 백번 이해합니다.”

카놀라는 헤세온을 두고 가혹한 평가를 늘어놓았다. 과거에 어쨌든 지금 카놀라의 안중에 헤세온은 전혀 들어오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그러니 저치의 말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일 잡소리다.

에델은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생각을 정리하며 무심코 손을 내지르지 않기 위해 뒷짐을 졌다. 잠자코 선 에델의 모습에 아이누도 차마 먼저 나서진 못했다. 대신 치미는 화를 담아 헤세온의 말을 꾹꾹 받아 적었다.

“하지만 이것도 아셔야 합니다. 그 마음이 절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지금은 당신의 미에 취했는지 몰라도 언젠가는 질릴 겁니다. 게다가 샤를만의 그 누구보다 쉬이 마음을 내주는 이가 바로 그분입니다. 그분의 남성 편력이야 샤를만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

“성히 돌아갈 기대는 버려라.”

자신이 뭐라고 떠드는지도 모르고 홧김에 말을 쏟아 내던 헤세온이 멈칫했다. 그는 뒤늦게 제 눈앞의 예쁘장한 사내가 아주 위협적인 눈빛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단지 덩치가 우락부락하다는 이유만으로 아이누에게 위축되었는데, 정작 에델은 그 아이누의 덩치도 잊게 할 정도였다. 오히려 덩치로 위협하는 아이누가 편히 느껴질 정도다. 에델의 눈동자는 마치 아무런 감정이 없는 유리알처럼 보여서 더 섬뜩했다.

“무, 뭐라고 하셨습니까?”

“네 발언은 도를 넘어섰다.”

에델의 목소리는 평온했으나, 그를 들은 헤세온은 말 속 글자 하나하나에 돋은 가시가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단지 예쁘장한 후사일 뿐이라고 여겼던 제 생각은 틀렸다. 헤세온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그의 자존심도 그렇거니와 이 결혼을 깨러 온 대표로서도 굽힐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게 털끝 하나라도 손을 댄다면 베르긴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톨레앙이 나설 것이고 베르긴과 연을 맺은 온갖 우호국들이 기꺼이 힘을 보탤 터이니 이런 산중 시골 따위!”

퍽!

헤세온의 말은 시원한 타격 음과 함께 중단되었다.

언성을 높이던 헤세온은 상황도 잊고 얼얼한 자신의 뒤통수를 감쌌다.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뒷짐을 지고 있던 에델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헤세온을 보고 있었다. 종이와 펜을 든 아이누는 벌레가 들어가지 않을까 걱정될 만큼 입을 크게 벌리고 섰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헤세온이 뒤통수를 감싼 채로 옆을 돌아보았다. 씩씩대며 자신을 노려보는 이를 확인한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와, 왕ㄴ…….”

찰싹!

찰진 소리와 함께 헤세온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양손으로 제 뺨을 감싼 헤세온이 흔들리는 눈으로 상대방을 보았다. 여전히 씨근덕대고 있는 상대방은 도통 화가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불끈 쥔 주먹은 누가 봐도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직도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헤세온이 뭔가 말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퍽!

“억……!”

상대방이 정강이를 차는 바람에 말을 걸려다 대신 혀를 깨물고 말았다. 혀와 다리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고통에 헤세온이 어정쩡하게 허리를 굽히며 낮은 비명을 뱉었다. 끙끙거리며 고개를 수그리는 그의 뒤통수를 겨냥하고, 상대방의 손이 다시 번쩍 치켜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넋이 나가 있던 에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다가왔다.

“이만하면 됐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말리지 마요, 아주 본때를 보여 주려니까! 뭐야? 산중 시골?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막말을 하는 거야?”

씨근덕거리며 헤세온을 노려보는 이는 카놀라였다. 티보치나와 함께 제사장을 만나러 간 사람이 어째서 여기에 서 있는지는 나중에 묻더라도, 일단 그녀를 진정시켜야 했다. 에델이 카놀라를 조심스럽게 잡고 당겨 안았다.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고 헛발질을 해 대던 카놀라가 씩씩대며 행동을 멈추었다.

충격으로 얼어붙은 헤세온을 한참 노려보던 그녀는 갑자기 아이누에게 휙 시선을 돌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멍청하게 서 있던 아이누가 그녀의 시선을 느끼곤 움찔 놀랐다. 무심코 뒷걸음질 치는 아이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 카놀라가 그에게 손바닥을 휙 내밀었다.

그녀의 의도를 눈치챈 에델이 다급하게 아이누를 말리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아이누가 들고 있던 종이를 냉큼 넘겼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갈수록 카놀라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하! 질려? 남성 편력?”

종이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종이를 찢어발기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녀는 용케 그러지 않았다. 그나마 이것을 증거로 활용할 예정이라는 걸 생각할 만한 이성이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잔뜩 구겨진 종이를 아이누에게 다시 넘겨준 카놀라가 헤세온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허리에 양손을 올린 그녀는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으름장을 놓았다.

“용서받고 싶거든 종이에 당신의 무례함을 낱낱이 적어서 사죄하세요.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니까!”

헤세온은 억울하다는 표정이었으나 뭐라고 말을 하진 못했다. 당장이라도 다시 정강이를 찰 것 같은 카놀라의 기세에 눌린 것이다. 얼떨떨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던 에델은 아주 소소한 의문이 들었다.

마지막 시험을 폭력으로 해결하고자 작정한 건가?

그 역시 헤세온을 곱게 돌려보낼 생각이 없었지만, 그것이 이렇게 대놓고 폭력 사건을 일으키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물론 카놀라가 바란다면 무슨 의도이든 적극적으로 지지해 주겠지만 말이다.

에델은 일단 카놀라의 곁에 다가갔다. 마침 겨우 충격에서 벗어난 헤세온이 가까스로 반박을 시도했다.

“왕녀님의 과거는 없던 일이 아닙니다!”

“누가 없던 일이랬어요?”

헤세온은 곧장 다시 꼬리를 말았다. 사실 그가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 모든 추문마저 감싸 줄 수 있다는 자신의 대인배적인 면모를 보이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대화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이건 그가 절대 바라지 않은 방향이었다.

“있죠, 난 매 순간을 후회 없이 살았어요. 따라서 미련도 없어요. 그리고 지금도 후회 없이 살기 위해 공자를 좀 더 패고 싶은데 도와주실래요?”

냉소적인 카놀라의 말에 그는 조가비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결국 이렇다 할 반박도 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다. 아무리 그래도 더 맞기는 싫은 모양이었다. 이미 맞은 것만으로도 혼란스러울 것이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생각을 정리할 테고, 나름대로 이성적인 대응을 하려 하겠지.

카놀라는 뒤늦게 ‘베르긴’이라는 글자를 떠올렸다. 갑자기 머릿속이 차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또 냅다 일부터 저질러 버렸잖아? 입술 사이로 절로 탄식이 나왔다. 그런 그녀의 곁에서 잠자코 상황을 보고 있던 에델이 넌지시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헤세온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끈질기게 그를 노려보던 카놀라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곤 휙 돌아 에델을 마주했다.

“제사장님이 날 안 보겠다고 문을 걸어 잠그셨대요. 하지만 걱정 마요. 티보치나가 꼭 설득해서 자리를 만들겠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난 괜찮아요. 어, 정말로요. 여기 온 건, 그러니까 도와주러 왔어요. 도움이 되었는지 모르겠지만요. 도움이 된 거 맞죠? 당신이 때리는 것보단 내가 패는 게 더 문제가 없을 것 같은데. 아닌가?”

어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가볍고 발랄했다. 그러나 에델은 그녀가 꽤 횡설수설하고 있음을 쉽게 눈치챘다.

“……괜찮으십니까?”

재차 묻는 말은 아까보다 더 조심스럽고 정중했다. 그 물음에 부산스럽게 말을 잇던 카놀라가 우물거리며 입을 닫았다.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서 에델의 시선을 피하고 서 있던 그녀가 조금 작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곳은 모두가 자기 역할이 있지만, 샤를만은 달라요. 나는 그런 걸 가지면 안 되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죠. 대신 내가 해도 되는 걸 했어요. 그것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는데…….”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문 카놀라가 시선을 조금 더 아래로 내렸다.

“방금 처음으로 부끄러웠어요.”

어쩐지 목이 탄다.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뿐이에요.”

에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카놀라는 점점 초조해졌으나, 먼저 무언가 말을 건네기에도 멋쩍어서 괜히 헛기침만 연발했다. 발끝으로 초조하게 바닥만 문지르고 있으려니 귓가로 차분한 목소리가 와닿았다.

“그렇군요.”

카놀라가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에델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말을 이었다.

“말씀드렸다시피 전 당신의 과거를 외국의 자유연애 풍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하나 내심 신경 쓰이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실은 퍽 거슬립니다. 숱한 사내들이 당신에게 애정을 속삭이고, 당신이 그들에게 답을 주었으리라 생각하면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카놀라는 흥청망청 살았던 지난날의 저 자신을 호되게 혼내고 싶어졌다. 그 잠깐의 욕망을 못 참아서 지금 평생의 행복에 찬물을 끼얹어? 정말이지 인내심이라곤 쥐뿔도 없던 과거의 카놀라 같으니!

이건 단지 제 입을 때려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카놀라가 열심히 반성하고 있는 와중에도 에델의 말은 이어졌다.

“게다가 저렇게 정신을 놓고 매달리는 사내를 눈앞에서 보니, 두 사람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알면 화가 날 것 같은데 상상만 하자니 그도 괴롭군요. 하지만 솔직히 말하지 마십시오. 빈말이라도 별거 없었다고 말씀해 주신다면 믿을 겁니다.”

“빈말 아니고 정말 별거 없었어요. 맹세해요.”

카놀라가 재빨리 대답했다. 에델은 언제나처럼 덤덤한 표정이었다.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면 마음이 편할 텐데, 저렇게 침착하게 있어서 더 눈치 보였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카놀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실망했어요?”

실망해서 혹시라도 마음이 식었다면 지금 빨리 말해 줬으면 좋겠다. 얼른 다시 꼬셔야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카놀라가 그의 답을 기다렸다. 미간을 살짝 좁히고 잠시 고민하던 에델이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굳이 실망했다고 한다면 제 자신에게 했다고 하는 게 정확합니다. 제 속이 이렇게 좁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어서요.”

에델은 빙긋 웃었다. 어쨌든 그녀에게 실망해서 당장 이 결혼을 깨고 싶어졌다는 소리는 아닌 게 확실했다. 카놀라가 조금 밝아진 안색으로 뭐라 말하려는 찰나, 에델이 태연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기분이 상한 건 사실입니다.”

카놀라는 다시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어졌다.

슬그머니 시선을 내린 그녀는 헤세온에게로 자신의 분노를 돌렸다. 역시 곱게 보내는 게 아니었다. 머리털을 죄다 뜯어 놓든가 해야 했는데, 에델 앞이라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에델이 들으면 절대 동의하지 못할 핑계를 대며 카놀라는 헤세온에 대한 분노를 삼켰다. 애초에 그 인간이 여기 나타난 게 문제야. 라우렐이고 글로리오사고 도통 도움이 안 되는 형제들이다.

“그러니까 제 기분을 풀어 주십시오.”

“어떻게요?”

방법을 제시해 준다면 지금 당장 시행할 의지가 충만했다. 카놀라의 의욕적인 모습에 에델이 말을 멈추고 숨을 되삼켰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카놀라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지금 에델의 뺨에 떠오른 것은 틀림없는 홍조였다. 홍조라니?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부자연스러울 만큼 딱딱한 에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 누구에게도 그림을 그려 주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눈을 깜빡이던 카놀라가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녀의 반응을 오해한 건지, 에델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당분간만요. 취미를 금할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키스할래요?”

“네?”

에델이 그답지 않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카놀라가 여전히 손으로 입을 막고 있어서 그녀의 말은 웅얼거리듯 들렸다. 그래서 잘못 들은 것일 수도 있다. 잘못 듣기에 그녀의 목소리는 아주 크고 똑똑했으나 에델은 순간 그렇게 생각했다. 상식적으로 ‘그림을 그려 주지 말라’는 말에 대뜸 ‘키스하자’라는 답이 돌아올 리가 없었다.

잠시 현실 파악을 못 하는 에델의 귓가로 아까보다 더 또렷한 물음이 들렸다.

“아니면 뽀뽀?”

한 걸음, 에델의 앞에 다가선 카놀라가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그냥 포옹만 해도 되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녀는 사실 자신의 행동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글거리는 파란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에델은 저도 모르게 숨을 되삼켰다. 손바닥에 까닭 모를 땀이 찼다. 아랫배가 저릿한 감각은 생전 처음 느껴 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강렬했다.

흔들리는 에델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카놀라가 속삭이듯 말했다.

“손만 잡는 거로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사뭇 결연하기까지 한 그녀의 선언에 에델은 뒷짐 진 손을 맞잡았다. 열 오른 손끝이 땀으로 인해 미끈거렸다. 맞잡은 손등에 힘줄이 돋을 만큼 강하게 힘을 준 그가 아이누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이누.”

숨소리도 못 내고 서 있던 아이누가 슬금슬금 몸을 돌렸다. 멀어지는 아이누의 등 뒤로 카놀라의 낮은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물론, 그 소리는 금방 끊겼고 말이다.

*

“제사장님.”

“내가 사람을 단단히 잘못 봤군. 설마하니 네가 이렇게나 세뇌되었을 줄이야!”

브리도는 티보치나의 말을 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배신감에 치를 떨며 티보치나를 노려보았다.

“사악한 주술을 쓴 게 틀림없어! 대체 트리폴인들에게 무슨 짓을!”

꽉 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메마른 손은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했다.

그녀의 곁을 오래 지킨 티보치나는 저 손이 앙상하게 변해 가는 과정을 지켜봐 왔다. 저 손이 얼마나 펜던트를 매만져 왔는지. 간절하게 움켜쥔 적이 얼마나 많았던지. 제 나이에 맞지 않는 급격한 노화 속에서 브리도가 얼마나 질긴 고목이 되어 갔는지 말이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 손을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그저, 웃어 주었을 뿐이에요.”

언제부터 카놀라에게 마음이 빼앗겼나? 그러한 물음을 스스로 건넸을 때 답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자신을 보던 그 첫 만남 때부터.

이 나라에 그토록 스스럼없는 기쁨으로 자신을 반겨 주던 이는 없었다. 제사장의 뒤를 이을 티보치나에게 감히 ‘친구’를 운운할 사람도 없을뿐더러, 평소 티보치나가 나서는 업무들이 웃으며 맞이할 종류가 아니었다.

시선을 내리깔고 서 있던 티보치나가 느릿느릿 입술을 달싹였다.

“언제나 제게 웃어 주었을 뿐입니다. ……저는 그녀의 첫 번째 친구거든요.”

차분한 티보치나의 대답에, 노성을 터뜨리려던 브리도가 멈칫했다. 말을 잊고 가만히 티보치나를 응시하던 브리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티보치나, 네 행복을 부순 건 이방인들이야.”

“저는 단 한 번도 제 가족의 죽음을 잊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러는 겁니다. 이제라도 더는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니까요.”

신전에서 보살피는 아이들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가족을 잃었다. 그리고 그 아이 중 일부가 신녀로 키워진다.

티보치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국경 지대에서 살았던 그녀는 아주 어릴 적에 가족을 잃고 신전에서 자랐다. 너무 까마득한 기억이라 희미한 잔상뿐이지만 몇 가지는 똑똑히 기억했다.

가령 그때 살아남았던 건 그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 같은 것.

“제 가족을 공격한 건 이방인이지만, 그 끝을 결정한 건 신전이었죠. 제사장님, 저는.”

티보치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수석 신녀의 판단으로 트리폴인들의 생사가 갈라진다는 건, 그녀가 정식 신녀가 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녀는 그때 제 가족을 떠올렸다. 자신은 살아남으라고 선택받은 것이었음을 그때 깨달았다.

평생 빚진 목숨이었다. 그러니 한 사람의 인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녀의 삶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석 신녀의 칭호를 달고 다른 이의 생사를 결정짓게 되었다. 그녀는 숱한 선택을 했고, 그 앞에 선 아이들은 모두가 저를 닮아 있었다.

“……목숨을 저울질하고 싶지 않습니다.”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담담했다. 하지만 달싹이는 입술의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가라앉은 시선으로 그 떨림을 응시하던 브리도가 고개를 돌렸다. 펜던트를 움켜쥔 그녀가 목소리에 감정을 비우고 말했다.

“그건 우리가 짊어져야 할, 그리고 잊어선 안 될 업보다.”

“얼마나 더 견뎌야 행복을 바라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겁니까?”

“티보치나, 이방인들은 우리의 가족을 죽인 적이다. 우리가 이방인과 타협한다는 건 이제껏 그들에게 목숨을 잃은 모든 조상을 등지는 일이야.”

“살아남은 게 죄는 아니잖아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브리도의 시선이 크게 흔들렸다. 이를 악다무는 브리도의 귓가로 티보치나의 간절한 물음이 들렸다.

“저는, 트리폴은, 언제까지 죽은 자들에게 생을 허락받아야 하나요?”

브리도는 치미는 탄식을 애써 견뎌 냈다. 그러다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안의 펜던트. 하도 만지고 만져서 이젠 세게 쥐지 않으면 그 감촉을 세밀하게 느끼기 어려웠다. 마치 무디고 무뎌진 제 마음처럼 말이다.

그녀는 티보치나도 이 펜던트를 물려받을 때쯤엔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티보치나는 신을 모시기 위해 선택받은 아이니까. 비극 속에서 유일하게 선택받은 생존자니까. 죽은 모든 이들의 분노를 응당 이어받고 짊어진 아이니까.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무책임한 발언이구나. 너는 수석 신녀다, 티보치나. 신전이 아니고서야 그 거대한 슬픔을 어떻게 견뎠겠느냐? 신께서 내리신 막중한 사명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브리도는 여전히 차가운 어조를 유지했으나, 그녀의 말은 끝에 가선 불분명하게 흐려졌다. 차마 숨기지 못하고 비죽 튀어나온 참담함 때문이었다. 이미 무뎌졌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다시 가시를 세우고 온몸을 찔러 왔다.

모두 사라졌다고, 초월했다고 믿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실은 그저 깊이 묻어 두었을 뿐이었던 숱한 감정들.

“돌아가거라. 나는 이방인 왕녀를 만나지 않는다.”

단호한 제사장의 목소리에 티보치나도 더는 매달릴 수 없었다. 티보치나가 집무실을 나가고도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 있던 브리도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집무실 바깥은 조용했다. 대신전에 사는 모든 이들은 철저한 시간표에 따라 생활한다. 지금은 예비 신녀들의 교육 시간이었기에 돌아다니는 이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적막하다 못해 춥게 느껴졌다.

텅 빈 복도를 따라 쭉 걷던 브리도가 걸음을 멈추었다. 열린 창밖으로 낯익은 이가 보인 까닭이었다. 중앙을 가로질러 들어오던 방문객 역시 창가에 선 브리도를 발견하곤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 멈춰 서는가 싶던 방문객이 다시 걸어 들어왔다. 브리도도 느릿느릿 정문으로 향했다. 신전은 따로 문지기를 두지 않고, 누구나 드나들 수 있도록 정해진 시간 동안 문을 개방해 둔다. 덕분에 방문객은 따로 누구에게 방문을 알릴 필요도 없이 브리도의 앞에 도달했다. 제 앞에 선 이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브리도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어쩐 일이십니까. 한창 바쁘실 텐데.”

“그러는 제사장도 이렇게 마중 나올 만큼 한가하진 않으실 텐데.”

“디라즈께서 손수 신전까지 와 주셨으니 마땅히 마중 나와야죠.”

그 말에 그라그포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기실 맞는 말이긴 했다. 그는 자신이 신전에 발을 들인 게 몇 년 만의 일인지도 가늠하지 못할 정도로 이곳을 멀리했다. 그라그포드가 참석해야 할 정도로 큰 신전 행사는 주로 광장에서 열린다. 피치 못할 일이 아니고선 신전 자체와 얽히는 걸 꺼려 왔으니 오늘의 방문은 무척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게 제사장이 직접 마중을 나와 주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희한한 일입니다. 마침 궁을 방문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그라그포드의 굵은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그가 신전을 멀리한 만큼이나 브리도도 왕궁을 멀리했다. 브리도가 왕궁에 방문한 날을 가늠하자면 그라그포드만큼이나 까마득하게 멀 것이다.

“마음이 맞았다니 기껍네요.”

그 말이 진심처럼 느껴지니, 이것이야말로 가장 이상한 일이었다.

떨떠름하게 브리도를 응시하던 그라그포드가 먼저 몸을 움직였다. 오랜만에 찾아왔다곤 해도 신전의 구조까지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본래 트리폴의 건물은 큰 문제가 없는 한 유지 보수만 이어 갈 뿐, 크게 부수거나 바꾸지 않는다.

과연 그라그포드의 예상대로 그가 향한 곳엔 신전에서 관리하는 텃밭이 있었다. 정원수 하나를 심는 것보다 약초 여러 개를 심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라 정원을 없애고 마련한 공간이었다.

텃밭을 둘러 걸을 수 있도록 마련된 길을 따라가며, 그라그포드가 말문을 열었다.

“왕녀가 받은 세 번째 시험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까?”

“들었습니다.”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까?”

“시험은 티보치나의 주관이니까요.”

그 말은 의외였다. 그라그포드가 힐끗 제 오른쪽을 보았다. 어깨선쯤의 높이에 있는 브리도의 안색은 차분했다.

“수석 신녀를 그렇게나 신임하는 줄 몰랐군요. 대사냥 때엔 독단적으로 두 번째 시험을 진행하시더니.”

무심히 정면을 응시하던 브리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라그포드의 눈빛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곧 외면했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냉담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세 번째 시험에 훼방을 놓을까 봐 걱정돼서 오셨습니까?”

그라그포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뒷짐을 진 그는 이내 한숨을 삼키며 시선을 거두었다. 대신 텃밭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의미한 눈길로 약초들을 바라보던 그라그포드가 여상한 어조로 말했다.

“대사냥 때, 내 말이 과했음을 사과하러 왔습니다.”

브리도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와 걸음 속도를 맞추던 그라그포드도 한발 늦게 멈춰 섰다. 뜻밖의 말을 들어서일까? 브리도는 드물게 제 표정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조금쯤은 충격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대사냥 때보다도 더.

우두커니 서 있던 그녀가 휘청이듯 다시 걸음을 옮겼다. 느릿느릿 내딛는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묵묵히 걷기만 하던 브리도가 불쑥 입술을 뗐다.

“왜 나를 여태 두셨습니까?”

“무슨 의미입니까?”

“디라즈께선 틀림없이 내게 억하심정이 있을 텐데요.”

그라그포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라그포드는 브리도가 스타티스의 죽음에 간접적으로 일조했음을 한시도 잊어 본 적이 없다. 직접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브리도가 그때 나서지 않았더라면, 그런 시험을 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생각들이 마음을 어지럽히기 일쑤였다. 만약 스타티스를 닮은 에델이 없었다면 그라그포드는 정말로 이성을 잃고 신전을 뒤엎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참았다. 그의 앞에 제 연인의 목숨과 바꿔서 얻은 귀한 아이가 숨 쉬고 있는 까닭이었다. 무엇보다 브리도를 향한 원망 이상으로 그는 자책감에 휩싸여 있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군주로서 나라의 백성들을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은 그라그포드의 전신을 꽁꽁 묶고 놔주지 않았다.

“개인적인 억하심정으로 내 백성들의 믿음까지 뒤흔들 생각은 없습니다.”

기실 브리도의 분노를 이해 못 하는 바도 아니었다. 스타티스가 에데사의 정찰대였음은 그라그포드도 알고 있었으니까. 에데사가 그간 얼마나 트리폴을 간교하게 괴롭혀 왔는지를 떠올리면, 되레 브리도가 그라그포드에게 배신감을 느껴야 했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도 아닌 브리도였으니 말이다.

“신실한 자는 많습니다. 내 자리를 대신할 신녀를 찾자면 못 찾을 것도 없었을 텐데요.”

그 말에 그라그포드는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누구보다 그 자리가 필요한 건 당신이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이 뒤집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자신이 믿고 있던 모든 것이 단숨에 부정당했을 때의 그 처참한 기분이란.

그라그포드는 그 기분을 감히 짐작할 수 없었다. 에데사는 트리폴인들 개개인의 역사에 참 많은 상흔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브리도의 사례는 아주 특별하다. 사실 전쟁이 잠정 중단된 이후부터는 혈족이 몰살당하는 예는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단지 그것 때문만은 아니다.

아주 옛날, 국경 지대 탈본엔 에데사인들을 믿고 그들과 교류하고자 나섰던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유서 깊은 혈족의 라딘이자, 그라그포드의 친구이기도 했다. 외국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그 시절, 둘은 마음이 잘도 맞았다. 그라그포드가 디라즈가 되고, 그녀가 혈족을 대표하는 라딘이 되면 함께 이 나라를 강건하게 만들자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순진할 정도로 사람을 쉬이 믿었다. 상대방이 내 마음과 같으리라고 생각했다. 그 믿음이 제 혈족의 목을 칼 아래로 떠미는 줄도 모르고.

그녀는 배신당했고, 그녀의 세상은 무너졌다. 치 떨리는 자기혐오로 뒤덮인 그녀에게 허락된 것은 엄중한 신심뿐이었다.

“그 자리가 아니면 버티지 못했을 사람이 당신이었습니다.”

숨을 뱉는 것조차 무거워서, 브리도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전부 바랬다고 생각했던 기억과 감정의 잔재들이 속에서 꿈틀거렸다. 브리도는 습관적으로 펜던트를 찾았다. 그것을 움켜쥐고도,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까진 시간이 필요했다.

“왕녀를 위한 감언입니까?”

“내 말이 감언입니까?”

그 물음에 가까스로 나온 브리도의 말문은 다시 닫혔다. 그녀가 힐끗 그라그포드를 올려다보았다. 테드라고의 후손 그라그포드. 그 이름보다 더 많이 불린 것이 디라즈라는 호칭일 것이다. 브리도가 언젠가부터 제 이름보다 ‘제사장’이라는 호칭으로만 불리기 시작한 것처럼.

때아닌 감상 때문일까, 브리도는 아득히 밀어 두었던 감정이 일렁이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눈앞의 위험에 집중하느라 매여 있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묻었던 그리움.

“기억하십니까? 탈본의 푸른 하늘. 울창한 나무와 따뜻한 볕을.”

그리고 그곳에서 뛰어놀던 날들. 뒷말을 듣지 않았음에도 그라그포드는 쉬이 그녀의 말을 알아들었다.

“기억합니다.”

“난 기억나지 않습니다.”

탈본. 잿빛 먼지로 무덤을 만들어 두었던 글자다. 그 먼지를 털어 냈다간 도통 피가 멎지 않을 것 같아서 고이 피딱지라도 앉으라며 내버려 뒀던 글자. 그리 속 깊은 곳에 묻어 두었음에도 겨우 몇 마디 말로 다시 선명하게 각인되는 그녀의 고향.

글자에서 털어 낸 먼지가 목구멍을 간질이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브리도는 탄식과도 같은 숨을 뱉었다.

“눈 닿는 모든 정경이 피로 물든 탈본입니다.”

잊고 싶어 외면하였으나 실은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산 아래, 국경과 가장 가까운 지역인 탈본에 안 가 본 지 오래되었다. 신전에 들어오며 자연히 갈 일이 없었지만 갈 엄두를 내지 못한 까닭도 있었다.

탈본에 가면 불타고 짓밟힌 가옥들과 검게 말라붙은 핏자국이 그녀를 맞이할까 덜컥 겁부터 났다. 이젠 무성한 잡초만 가득할 게 뻔한데도 말이다.

“모두가 나와 같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일입니다.”

“해돋이 협곡에서 하와르를 재배할 겁니다.”

무뚝뚝한 그라그포드의 선언에 브리도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것을 미끼로 내밀 겁니다.”

“굳이 보고해 주시는 까닭은, 역시 묵은 원한 때문입니까?”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브리도의 표정은 침착했다. 그녀의 안색을 힐끗 살핀 그라그포드가 덤덤하게 대답했다.

“당신은 트리폴의 제사장입니다.”

브리도의 시선이 자신에게 향해 있음을 느꼈으나, 그는 굳이 그녀를 보지는 않았다. 대신 여상하게 말을 맺었다.

“까닭은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브리도가 쓰게 웃었다. 이방인 왕녀를 만나지 않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이 나라의 변화는 시작될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이례적으로 신전을 찾아올 정도로 그라그포드가 작정한 이상에야 아무리 제사장이라도 막을 수 없다. 그라그포드는 제사장인 브리도의 위치를 존중해 주고 있으나 동의를 구하진 않고 있었다.

그것이 장차 무엇을 불러일으킬지는 모르겠으나, 어떤 식으로든 큰 변화를 맞게 될 것은 자명했다. 잠자코 생각에 잠긴 브리도를 힐끔 본 그라그포드가 넌지시 말했다.

“그녀가 봄 햇살 같다고, 후사가 그러더군.”

봄 햇살이라니, 참 유치하고 우스운 비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브리도는 일견 맞는 것 같다고 여겼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그 화려한 황금색 머리칼만 보자면 확실히 햇살과 닮아 있었다.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사느라 언젠가부터 받지 못하던 그 따뜻한 햇볕.

트리폴은 울창하고 거대한 나무숲에 둘러싸여 볕을 받지 못하고 늘 얼어붙어 있었다. 그러니 다들 봄 햇살 같은 사람에게 이리도 쉽게 홀렸겠지. 너무 오랫동안 찬 대지 위에서 사느라.

“디라즈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후사를 믿습니다.”

“하기야 테드라고는 겨울 산맥의 가호를 받는 혈족이죠.”

트리폴인들은 저마다 자신이 잇는 혈족에 대해 자부심이 강하다. 그중에서도 테드라고는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유서 깊은 군주의 혈족이다. 군주라는 자리가 피로 이어지는 자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대째 군주 자리를 이어 갔을 정도로 강인한 혈족. 그러니 그라그포드가 저렇게 제 아들을 신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브리도의 중얼거림에 그라그포드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후사를 믿는 이유는, 그 애가 나의 아들이지만 스타티스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브리도가 멈칫했다. 그라그포드는 그런 브리도를 응시하며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녀의 피가 그 애를 지금에 이르게 한 겁니다. 테드라고의 공은 반절에 불과합니다.”

“디라즈.”

“내 아내는 끝내 군주비의 명예를 되찾을 겁니다.”

스타티스는 애초 군주비의 명예를 가진 일도 없다. 브리도는 그것을 지적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무슨 소릴 해도 그라그포드의 마음을 돌리진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는 탓이었다. 그라그포드는 예전부터 그래 왔으니까.

뒷짐을 진 브리도가 그라그포드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그보다 앞서 걸음을 내디뎠다.

“당신은 예나 지금이나 고집불통이십니다.”

퉁명스러운 중얼거림에 대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묵직한 발소리만 들렸다. 그것은 브리도와 약간 떨어진 거리를 유지하며 이어졌다. 허리춤에 모아 쥔 손으로 펜던트를 꽉 쥐고 있던 브리도가 혼잣말을 했다.

“봄 햇살이라.”

마침 구름이 걷히고, 약초밭 위로 환한 빛이 쏟아져 내렸다. 짙은 녹색의 잎사귀가 겹겹이 풍성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브리도가 덤덤하게 고개를 들었다. 구름 사이로 드러난 푸른 하늘을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요, 언 땅이라도 볕을 받으면 언젠가 녹기 마련이겠죠.”

*

견딜 수 없으니 당장 떠나겠다고 노발대발하는 헤세온을, 켈튼 백작이 겨우 말렸다.

“도대체 무슨 일을 당하셨는지 말씀해 주셔야 저희가 항의를 하지요.”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헤세온을 달랬으나, 그는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엄청난 모욕을 당했으니 반드시 이 굴욕을 잊지 않겠노라는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모르는 이상 정식으로 항의할 수는 없었다.

켈튼 백작은 헤세온이 또 제멋대로 나섰다가 뭔가 심사가 뒤틀렸던 모양이라고 이해했다. 정말로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면 말하지 못할 까닭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당장 떠날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카놀라 님께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으니까요. 가장 좋은 건 그분과 함께 떠나는 것이지만, 현재 상황으로서는 그게 힘들 것 같습니다.”

켈튼 백작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씨근덕거리며 서 있던 헤세온이 눈을 부라리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된 이상, 억지로라도 모셔 가야 합니다.”

“네?”

“그분은 지금 단단히 세뇌되셨습니다. 틀림없이 이곳의 야만인들이 그분을 강압한 겁니다.”

이쯤 되니 헤세온은 오기로라도 카놀라를 데려가려는 것 같았다. 켈튼 백작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샤를만 입장에서도 헤세온은 손님이라 함부로 대할 수 없다. 그래서 처음 이 여행단이 꾸려질 때도 켈튼 백작은 헤세온의 합류를 반대했다. 헤세온이 초래할 갈등이 너무나 뻔하게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감한 문제를 다른 사람이라고 예감하지 못할 리 없는데도 라우렐은 헤세온의 합류를 묵허했다.

정확히는 가라고 떠민 것도 아니었다. 라우렐은 그냥 헤세온이 있는 자리에서 ‘카놀라에게 서신을 보내야 하는데 어쩌나.’ 하고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냉큼 서신을 챙겨서 여행단에 합류한 사람은 헤세온이다. 전적으로 헤세온의 돌발 행동이라고 발뺌한다면 딱히 틀리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그런 점을 염두에 두자면 라우렐은 헤세온의 합류 자체가 큰 문젯거리도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지만…….

그래도 켈튼 백작은 헤세온이 무슨 역할이든 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명색이 왕녀의 옛 연인 아닌가. 왕녀의 심경을 뒤흔들거나 옛 추억에 빠져 잠시라도 눈 돌리게 만들면 그것만으로도 큰 역할을 할 터였다. 이런 소국이 아니라 더 쓸모 있는 다른 나라와의 인연을 만드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고 말이다.

“그건 납치…….”

똑똑

갑작스럽게 이어지는 노크 소리에 세 사람의 대화가 중단되었다. 침묵하던 세 사람 중 켈튼 백작이 나섰다.

“누구인가?”

“왕녀님의 명을 받고 켈튼 백작을 뵈러 왔습니다.”

드디어 왕녀의 답변이 도착한 모양이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좋지 않아서 내심 답변을 못 들을 각오도 하고 있던 켈튼 백작이 반색했다. 과연 문을 여니 깐깐한 표정의 안젤리나가 서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녀의 수족이나 다름없는 안젤리나가 직접 왔다면 틀림없이 중요한 내용일 것이다.

“마침 계셨군요. 이야기가 길어질 듯한데 따로 뵐 수 있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켈튼 백작!”

헤세온이 항의하듯 그를 불렀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도 내색은 안 하지만 못내 불만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켈튼 백작은 단호하게 그들을 무시했다. 저들과 함께 오긴 했지만, 성과를 독점하려는 꿍꿍이는 다 같다. 왕녀가 자신을 선택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켈튼 백작이 짐짓 점잖은 어투로 말했다.

“꼭 좋은 소식을 안고 돌아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열린 문 앞에서 꼿꼿하게 서 있던 안젤리나가 돌로레스 자작 부인에게 힐끗 시선을 주었다. 우연히 안젤리나와 눈이 마주친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안젤리나의 입가에 미미하게 스민 조소를 확인한 까닭이었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얼굴을 붉히며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안젤리나가 먼저 등을 돌렸다. 그 뒤로 켈튼 백작이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둘만 남은 방 안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어쩐지 분이 치밀어서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헤세온도 딱히 그녀를 잡지 않았기에 그녀는 누구의 방해도 없이 방을 나왔다. 시중인의 안내도 없이 제 방으로 돌아가는 걸음은 무척 짜증스러웠다. 스커트를 걷어차듯이 걷다 보니, 그녀는 금방 제 방에 도착했다.

“돌로레스 자작 부인?”

막 방으로 들어가려던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멈춰 섰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던 복도의 기둥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뒷짐을 지고 반듯하게 서 있는 그는 오스카였다.

“언제쯤 오시나 싶었습니다.”

“나를 기다렸다고요?”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미심쩍은 시선으로 오스카를 훑었다.

“네. 사실…… 아르뒤앙 백작 부인께서는 반대하셨지만, 전 그분이 틀렸다고 생각합니다.”

안젤리나의 이름이 나오자 돌로레스 자작 부인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오스카의 표정을 찬찬히 살피며 의중을 짐작해 보았다. 안젤리나는 왕녀의 명을 켈튼 백작에게 전달하러 왔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왕녀의 뜻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안젤리나만큼이나 오스카도 왕녀의 최측근인데.

“사적인 감정으로 인해 왕녀님의 명을 곡해하는 건 시중인의 자세라 할 수 없으니까요.”

사적인 감정. 안젤리나와 자신은 사이가 좋지 않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돌로레스 자작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녀는 애써 제 기분을 감추려 했으나,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만으로도 그 머릿속을 훤히 알 수 있었다. 오스카는 그런 그녀를 무덤덤하게 응시하다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짐작하시다시피 아주 중요하고도 은밀한 내용입니다. 그러니 전령의 역할에 충실해 주신다면 그 노고에 대한 보답을 받으실 겁니다. 어쩌면 가문의 미래까지요.”

“당연히 왕녀님의 말씀을 엄중하게 받아들일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들어가서 나누실까요?”

돌로레스 자작 부인이 직접 방문을 열며 오스카를 돌아보았다.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오스카의 입매가 희미한 미소를 그렸다.

“그러시죠.”

*

“그렇게 강경하실 줄은 몰랐어요.”

“아냐, 어쩔 수 없지. 나 싫어하시는 거 몰랐던 것도 아니고.”

카놀라가 거듭 괜찮다고 했으나 티보치나의 표정은 영 밝아지지 않았다.

“하지만 급한 일이잖아요. 행여 문제가 생기면…….”

“정말로 괜찮아. 지금 당장 거래를 시작하겠다는 것도 아닌걸? 하와르 표본을 보내면, 저쪽에서도 그 가치를 분석하는 데에 한참 걸릴 거야. 그동안 열심히 힘써 보지, 뭐!”

카놀라가 힘차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티보치나가 적극적으로 나서 준다고 했으나 단번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제사장의 원한은 얕게 쌓인 눈밭과는 다르니까.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몇 겹으로 쌓여서, 얼고 또 얼어 본래의 대지를 잃어버릴 정도로 깊고 단단했다. 그러니 시간이 필요하다. 카놀라는 피아를 죽게 놔두려 했던 그녀의 방식에 여전히 동의하지 않았으나 그녀가 겪어 온 불행까지 매도할 생각은 없었다.

이번엔 문전 박대를 당했지만, 하루가 멀다고 찾아가다 보면 문간 정도는 넘을 수 있겠지. 물론 만난다고 호락호락하게 말을 들을 사람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뇌물로 그림이라도 그려 줘야 하나? 에델과 한 약속은 당분간이니까, 그때쯤이면 그려도 상관없겠지? 솔직히 그림을 그려 줄 만큼 어여쁜 관계는 아니지만 디라즈에게도 통한 뇌물이니 제사장에게도 분명 효과가 있을 것이다!

그런 태평한 생각을 하던 카놀라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제사장을 만나서 뭘 할지는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일단 급한 일들은 어느 정도 끝났다. 남은 것은 디라즈의 최종 허가뿐. 그라그포드는 하와르 재배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나서는 눈치였으면서 최종 결론에 대해선 확답해 주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사장에게도 직접 가서 이야기하겠다고 말했지만, 여전히 그는 뜨뜻미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아무리 이전부터 교역에 대한 의지를 키웠다고 해도, 막상 눈앞에 닥치면 꺼림칙한 마음이 먼저 들겠지.

이미 트리폴의 폐쇄성에 대해서라면 체감하고 들어온 카놀라는 디라즈의 모호한 반응을 이해했다. 지금 그녀가 저지르려는 짓은 기존의 트리폴 역사를 생각하면 너무 급진적이다. 조금만 틀어져도 반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니 오히려 그녀를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나서는 티보치나나 에델이 이상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티보치나는 걱정되지 않아?”

“뭐가요?”

“내가 외세를 끌어들이려 하잖아.”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일이다. 에데사를 견제하기 위해서 샤를만을 끌어들이겠다는 소리니까 그것도 온전히 트리폴을 위한 일이라 할 수 없다. 어디까지나 카놀라는 결혼에 성공하려는 방편으로써 제 모국의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선 지독하게도 이기적인 판단일 터다.

“바뀌어야 한다고, 언제까지 이대로 살 수 없다고 말씀하신 건 왕녀님이시잖아요.”

티보치나의 부드러운 음성에도 카놀라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라우렐이나 글로리오사에 대한 제 판단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두 사람은 분명 카놀라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려고 지금 헤세온과 저 일당들을 보낸 게 틀림없으니까.

카놀라가 걱정하고 있는 쪽은 샤를만이 아니라 트리폴이었다. 트리폴인들은 이방인에 대해, 심각히 왜곡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샤를만과의 교역이 시작되면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텐데 그것이 행여 부정적으로 발전한다면 큰일이었다.

“왕녀님이 이곳에 오셨을 때부터, 이미 트리폴의 문은 조금씩 열리고 있었던 거예요. 전 왕녀님을 믿어요.”

티보치나가 카놀라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일종의 정원이라고 부를 만한 뜰에 앉아 있었는데, 내내 볕을 받고 있었던 탓인지 티보치나의 손이 아주 따뜻했다. 제 손을 꽉 잡는 티보치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문득 입술을 뗐다.

“있지, 내가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인데.”

“말씀하세요.”

“내게 말을 놓으면 안 돼? 우린 친구잖아. 그것도 엄청 친한 친구.”

생각을 한 건 꽤 오래되었는데 말을 건넬 타이밍 잡기가 힘들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보내 온 건 사실이니까. 축제에 대사냥에 겨울 산맥에 헤세온까지.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어떻게 임했나 싶을 정도로 별일이 다 있었다.

트리폴에 와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던 카놀라가 슬쩍 시선을 들었다. 티보치나의 표정에서 딱히 불쾌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하지도 않으니 제 제안을 거절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지레짐작한 카놀라가 조금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 청이 너무 경우 없었나?”

처음에는 티보치나에 대해 잘 몰라서 얼결에 말을 놓고 편히 어울렸다. 하지만 지금은 티보치나가 이 나라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 신전의 수석 신녀이자 사실상 다음 대 제사장이 될 여자. 카놀라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트리폴인들이 티보치나에게 경외감을 표한다. 그녀는 에델과는 다른 의미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갈 차세대 권력자였다.

티보치나의 신분을 차근차근 생각해 보니 제 부탁이 너무 무리한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놀라가 제 말을 취소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티보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차분한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았다. 그러나 카놀라는 그녀의 허락에 도리어 미간을 좁혔다. 티보치나는 언제나 자신의 처지를 최대한으로 배려해 주었으니 이번에도 그런 것으로 생각한 까닭이었다. 당장 티보치나가 제사장이라도 되면, 도리어 카놀라가 그녀에게 공대해야 할 것이다. 카놀라는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수석 신녀로서 지켜야 할 위엄 때문이라면…….”

“카놀라에게 나의 신분은 아무런 힘을 가지지 않아. 너는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카놀라는 아주 오랜만에 티보치나의 외모가 어떤 위력을 가졌는지 체감했다. 정말이지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설레게 하고, 설레게 하고, 또 설레게 하고…….

“있지, 티보치나.”

“응?”

“한 번만 안아 봐도 돼?”

티보치나는 웃는 얼굴로 굳었다. 눈만 겨우 깜빡거리던 그녀는 침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카놀라가 기쁨을 가득 담아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두 팔을 활짝 벌려 제 옆에 앉아 있던 티보치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직 가시지 않은 얼떨떨함으로 눈만 깜빡이던 티보치나가 조심스럽게 손으로 카놀라의 등을 감쌌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접촉은.

티보치나는 사람을 끌어안는 게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이라는 걸 이제야 깨달았다.

“너무 고마워. 네가 아니었으면 난 정말 적응하기 힘들었을 거야. 진짜 멋진 후사비가 될게!”

안은 팔에 힘을 꽉 주었다가 놓으니, 티보치나도 느리게 손을 풀었다.

“곤란하네.”

“응?”

“후사비로 적응하게 도우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 여전히 네가 후사의 정혼녀가 아닌 신전의 손님으로 눌러앉는 편이 더 좋은걸?”

진심이 듬뿍 묻어나는 티보치나의 말에 카놀라가 유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친구의 순수한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실은 꼭 순수하다고만은 할 수는 없지만, 티보치나는 애써 카놀라의 착각을 정정해 주지는 않았다. 게다가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를 와장창 깨뜨리는 불청객이 등장하기도 했고 말이다.

“가당찮은 꿈이군.”

티보치나와의 대화에 푹 빠져 있던 카놀라는 뒤늦게 제 뒤편에서 나타난 에델을 발견했다. 이미 진즉 에델의 존재를 알고 있던 티보치나가 조금 삐뚜름한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아, 눈치도 없는 후사께서 여긴 어쩐 일로.”

“수석 신녀께선 그 속이 나날이 시커멓게 변하는 중이야.”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한 에델이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무뚝뚝하게 굳어 있던 그의 표정이 카놀라의 얼굴을 보자 봄눈 녹듯 풀렸다. 그가 막 카놀라에게 다정한 인사말을 건네려는 찰나, 카놀라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먼저 말했다.

“어머, 에델! 바쁜 거 아니었어요? 디라즈께서 밀린 일 다 못 끝내면 출장 보내 버린다고…….”

물론 그런 말을 하긴 했다. 그라그포드는 제법 진중하고 무섭게 으름장을 놓았다. 에델 역시 제 아버지의 말을 충분히 이해했다. 하지만 이해한 것과 이행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까 그라그포드의 실책이라면 늦바람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랑하는 연인과 노는 맛에 눈을 뜬 에델은 자체적인 융통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지금 밀려 있는 일의 경우 굳이 따지자면 카놀라보다 우선순위에서 한참 뒤처졌다.

게다가 디라즈는 자신이 처리할 수 있는 업무까지 은근슬쩍 에델에게 미뤘다! 에델은 제 몫이 아닌 업무를 거절하고 이에 대한 부당함을 호소할 권리가 있었다.

“제가 나온 게 싫습니까?”

“물론 아니죠!”

오히려 디라즈에게 에델 좀 그만 괴롭히라고 항의할 생각까지 하고 있던 카놀라다. 당장은 급한 일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만 헤세온만 내쫓고 나면 그녀는 에델과의 데이트 시간을 충분히 확보하기 위해 디라즈에게 적극적으로 뇌물 공세를 할 의사가 있었다.

대번에 에델의 말을 부정하는 카놀라의 모습에 이번엔 티보치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나랑 단둘이 있는 게 싫었던 거야?”

“물론 그것도 아니지!”

다 알면서 그게 무슨 물음이야? 카놀라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 모습에 티보치나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떨떠름하게 그런 티보치나를 바라보던 에델이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언제부터 말을 놓기로 했습니까?”

“우린 말을 놓을 정도로 절친한 관계랍니다. 이참에 알아 두시면 좋겠네요.”

카놀라에게 물었으나 정작 달갑지 않은 쪽에서 대답이 나왔다. 미간을 좁힌 에델이 조금 냉소적인 어투로 중얼거렸다.

“그렇군. 우린 서로를 귀하게 여기느라 말을 놓을 수 없던데, 그쪽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야.”

카놀라 덕분에 잠시 떠올랐던 엷은 미소가 점차 흐려졌다. 티보치나가 눈을 가늘게 뜨며 카놀라의 손을 슬며시 잡았다.

“아, 그럼 앞으로도 멀찍이 서서 귀하게 지켜만 봐 주시겠습니까? 전 친밀하게 부대낄 예정이라.”

그 행동에 질세라, 에델이 카놀라의 다른 손을 잡아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하지만 귀하게 어루만지는 건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지.”

왜일까. 말하는 사람 따로 있고 부끄러워하는 사람 따로 있는 것 같다. 생전 남을 부끄럽게 만들기나 했던 카놀라는 난생처음으로 남의 말에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는 경험을 했다. 각각 다른 사람에게 잡힌 양손에 땀이 차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미인들이 자신을 두고 싸우다니 기분 좋긴 한데, 이 손은 제발 놓아 줬으면 좋겠다. 손에 땀이 많다는 오해를 사서, 누구도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지 않으면 정말로 슬플 테니까. 그러나 생각지도 않게 불이 붙은 두 사람은 신경전을 하느라 바빴다. 둘은 카놀라의 얼빠진 표정도 모르고 서로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유치한 과시입니다.”

“그러는 신녀는 유치한 시샘이 아니고?”

“어, 음. 저기?”

대화가 이상하다. 아주 많이 이상하다는 걸 카놀라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이러다간 정말 할 말 못 할 말까지 다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아니, 무슨 말을 하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카놀라는 단지 이러다 둘 중 누구 하나의 편을 들어야 할 것 같은 상황이 싫었다. 한 사람은 소중한 친구고, 한 사람은 사랑스러운 연인이니까.

카놀라는 아쉽지만, 양손을 모두 뿌리치기로 했다. 손이 잡혀 있기는 했으나 강제적인 힘이 아니었던 덕에 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두 손을 휙 빼자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동시에 카놀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놀라가 벌떡 일어나서 둘을 마주 보고 섰다.

“둘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겠는데, 우리에겐 무찔러야 할 공통의 적이 있잖아요? 적 앞에서 분열되면 안 된다고요!”

카놀라가 오른팔을 힘차게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지로 텅 빈 복도를 가리켰다. 그 끝에는, 헤세온이 서 있었다.

응? 헤세온?

“무, 무슨……?”

놀라긴 헤세온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직도 카놀라에게 맞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헤세온은, 본의 아니게 마주친 세 사람을 보고 눈에 띄게 당황했다.

사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켈튼 백작과 돌로레스 자작 부인을 기다리다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도로 뛰쳐나온 참이었다. 길을 모르니 무작정 걸음 닿는 곳으로 향하던 그는 말소리를 듣고선 냉큼 방향을 잡았다. 누구라도 붙잡고 안내를 시키려는 마음에서였다. 더불어 이렇게 돌아다니다 트리폴의 약점을 발견하는 요행도 기대했다. 단지 무례하다는 둥 수준 낮다는 둥의 사사로운 트집이 아니라 좀 더 거창한 것. 가령 식인을 한다든가, 야만스러운 성생활을 즐긴다든가 하는 항간의 소문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 말이다.

아직 카놀라를 마주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헤세온은 희게 질린 안색으로 주춤거렸다. 그는 재빨리 자리를 피하고자 했으나, 자신을 가리키고 있던 검지의 주인은 득달같이 다가와 그의 퇴로를 차단했다.

“베르긴 공자!”

무슨 영문일까? 아까 분노에 가득 차서 따귀를 날리고 발길질을 하던 여인이 지금은 아주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헤세온이 혼란스러운 눈으로 제 앞에 선 카놀라를 보았다. 헤세온은 동시에 뜰 중앙에 있던 다른 두 사람의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그는 본능적으로 뭔가 좋지 않은 상황에 부닥쳤음을 직감했다.

두 사람의 불만스러운 시선이 헤세온에게 향한 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한껏 눈웃음을 지었다. 역시 공공의 적은 아주 중요하다. 저 두 사람도 당장 서로를 선택해 달라는 식의 대화를 나누진 않겠지. 이제라도 헤세온의 쓸모를 깨닫자 그녀는 한껏 뿌듯해졌다. 그녀는 아이를 칭찬하듯 헤세온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

“왕녀님. 저는 역시 돌아가는 게…….”

“아니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돌이켜 보니 내가 생각이 너무 짧았더라고요. 공자가 트리폴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그런 헛소릴 했을 테니, 이 나라를 소개하는 게 먼저여야 했는데! 아 참, 그렇다고 사과를 안 받겠다는 소리는 아니에요. 그건 별개의 문제니까. 사과문은 잘 쓰고 계실 거라고 믿어요. 돌아가기 전에 꼭 제대로 된 사과는 하고 가세요.”

“이게 도대체 어떻게 트리폴을 이해하는 방안이 될 수가…….”

“왜냐면, 겨울 산맥의 짐승들은 절대 이방인을 따르지 않거든요! 이건 겨울 산맥의 유일한 지배자가 누구인지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인걸요?”

그럴듯하게 꾸며 대고 있긴 하지만 조금만 집중해서 들으면 정말이지 억지의 향연이었다. 하지만 헤세온은 정신이 나가서 깊이 생각할 여유도 없어 보였다. 그는 도대체 자신이 왜 이 사육장 앞에 서 있어야 하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종교 제의야 이 나라의 문화라니 그렇다 쳐도 사육장이라니! 벌써 코가 아려왔다. 책 냄새에 길들어서 살던 헤세온에게 짐승의 뒤섞인 냄새란 인생에 다시없을 악취였다.

“이곳은 손님에게 짐승을 만지라고 강요한단 말입니까?”

“배울 만큼 배운 분이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하세요? 어휴, 직접 보여 줘야 알아들으시겠네.”

카놀라가 혀를 차며 사육장에 당당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심하다는 눈으로 헤세온을 바라보던 에델이 그 뒤를 따랐고, 고민스럽다는 눈으로 카놀라를 보던 티보치나도 선뜻 몸을 움직였다.

사육장 입구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던 헤세온은 마지못해 그들의 뒤를 따랐다. 결단코 입구를 지키고 선 두 명의 그라사들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이렇게 된 이상 동물을 숭배한다는 소문의 진위를 이곳에서 확인하겠노라는 희생적인 정신이었다.

냄새가 심하긴 하지만 의외로 사육장은 깨끗했다. 높은 나무 기둥을 엮어 만든 울타리나 줄기를 얽어서 만든 울타리가 보였다. 그 너머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작업복을 입은 그라사들이 먹이가 담긴 자루나 빈 철망을 들고 바쁘게 오갔다. 그런 와중에도 갑작스러운 방문객에 놀란 그라사들이 이쪽을 힐끗거렸고, 낯선 사람의 등장에 몇몇 사냥개들이 날카롭게 짖어 댔다. 그러나 카놀라는 개의치 않고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찾던 이를 발견했는지 한 손을 번쩍 들고 반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피아!”

중년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피아가 그 소릴 듣고 고개를 돌렸다. 얼떨떨하던 피아의 얼굴이 점차 경악으로 물들었다.

“카놀라 님? 후사에 수석 신녀님까지……! 대체 여긴 어쩐 일이세요? 미리 말씀을 주셨으면 마중 나갔을 텐데요!”

“이 방문객께 트리폴의 훌륭한 사육장을 소개해 드리고 있지! 라디는 어디 있어?”

흔들리는 동공으로 카놀라를 보던 피아가 에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에델이 허락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동물의 주인인 에델이 허락했으니 데려오긴 하겠는데…….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피아는 라디를 안아 들고 왔다. 그사이 카놀라는 헤세온에게 그라사들이 산맥의 짐승들을 다스리는 절대적인 지배자라고 헛소릴 늘어놓고 있었다. 티보치나나 에델이 굳이 그녀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던 데다 사육장의 규모도 컸고, 처음 보는 동물이 많아서인지 헤세온은 그 말을 의심할 생각도 못 하는 듯했다.

제 앞에 들려 온 라디를 확인한 카놀라가 씩 웃었다. 코를 벌름거리며 바둥대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피아의 손에서 벗어나고 싶은 눈치였다. 체구가 작고 족제비처럼 생긴 젭은 그 성질이야 어찌 되었든 외관은 아주 귀엽고 사랑스럽다. 덕분에 처음 젭을 보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짐승이 그라사의 사냥 파트너임을 못 알아볼 정도였다. 내내 떨떠름하게 짐승들을 둘러보던 헤세온이 그나마 누그러진 표정으로 젭을 보았다.

“그거 알아요, 공자? 트리폴은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나라예요.”

“네?”

헤세온이 얼토당토않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이번만큼은 에델과 티보치나도 모른 척하지 못했다. 세 사람의 시선을 받은 카놀라가 태연자약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이 많은 동물을 지배할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그래서 공자처럼 평범한 외국인들은 절대 겨울 산맥의 가호를 받지 못하는 거고요.”

사나운 짐승들을 길들이느라 고생하고 있는 사육사 피아를 앞에 두고 그 노고를 외면하자니 조금 미안하긴 했다. 하지만 카놀라는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자신의 설명에 과장을 덧붙여 갔다.

“공자도 역사 공부는 했을 테니 알 거 아니에요? 에데사가 그리 탐욕스럽게 굴어도 끝내 이 산맥을 들어오지 못했다는 거. 그게 다 이 나라만 드래곤의 축복을 받고 겨울 산맥에서 살도록 허락받았기 때문이에요. 하여간 트리폴인들은 워낙 자신들의 빼어남을 바깥에 내보이지 않으려 한다니까. 나라도 이렇게 진실을 알려야지 어쩌겠어?”

전혀 없는 소린 아니다. 브리도는 겨울 산맥의 가호를 귀에 못 박히도록 이야기했으니까. 그냥 겨울 산맥의 가호라고 하면 너무 막연하니 드래곤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조금 덧붙인 것뿐이었다. 더불어서 에데사가 여태껏 정복에 실패한 건 객관적인 사실이고. 무엇보다 꼭대기엔 드래곤의 성역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겨울 산맥에는 드래곤이 살았을 가능성이 있고, 트리폴은 이 겨울 산맥에 무사히 자리를 잡아 여태 이방인의 침입을 잘 막아 온 데다 짐승들을 부려서 먹고사는 나라라는 소리다. 카놀라의 말은 이걸 좀 더 듣기 좋게 설명한 것에 불과했다. 이것이야말로 합리적인 추론에 따른 결론이 아니면 무엇이겠나. 빠르게 합리화를 마친 카놀라가 진심 어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 합리화는 지극히 카놀라에게만 해당한 것으로, 헤세온은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왕녀님. 이 나라에서 전승되는 우화가 꽤 흥미로우셨던 모양이십니다만, 그 허무맹랑한 말들을 진실로 믿으시는 건 아니시죠?”

“하지만 당신은 이 작은 동물 하나 제대로 다루지 못할 거예요. 겨울 산맥의 짐승을 다루는 건 트리폴인에게만 허락되었거든요. 나야 트리폴의 후사비니까 마찬가지로 가호를 받지만, 당신은 이방인이니까.”

헤세온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으며 젭을 보았다. 갓 성년이 된 게 분명한 피아마저 맨손으로 쉽게 안고 있는 동물이었다. 크기를 보아 성체도 된 것 같지 않고, 날카로운 발톱이나 이빨이 보이지도 않는다.

샤를만에서의 카놀라를 기억하고 있는 헤세온은 그녀의 말이 허세라는 걸 쉽게 알아챘다. 기껏해야 두어 달 사이에 동물을 다루는 연습을 한다고 한들 얼마나 실력을 늘릴 수 있겠나. 그런 그녀가 다룰 수 있는 동물이라면, 헤세온 역시 못 다룰 이유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짓을 왜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보세요, 공자. 이 짐승은 내 앞에 납작 엎드리고 얌전하게 굴 거예요.”

의기양양하게 팔짱을 낀 카놀라가 보란 듯 한쪽 발을 내밀었다. 눈치를 보던 피아가 조심스럽게 라디를 내려놓았다. 코를 킁킁대던 라디가 대번에 카놀라의 발등 위로 뛰어올랐다. 얌전히 발등 위에 안착한 짐승을 보며 헤세온은 대체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발등에 짐승을 올릴 줄 안다고 자랑하는 건가?

“당신도 올려 볼래요?”

“이게 대체 무슨 광대 짓입니까?”

“손대는 것을 무서워하시기에 발등을 선택했는데, 이도 무서워요?”

“무서운 게 아니라 의미가 없는 짓입니다.”

“공자.”

카놀라가 꺄르르 웃으며 말했다.

“말했잖아요. 트리폴은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다고. 이 작은 짐승조차 그 의지를 받들고 있음을 보여 주는 거예요. 당신에겐 백 번 말해 주는 것보다 한 번 보여 주는 게 나을 것 같으니까. 어디 가서 여기가 산중 시골이라는 무식한 소리 하지 마시고, 드래곤의 수호를 받는 유일한 축복의 땅이라고 말하세요.”

“저런 짐승 하나 다루는 일로 드래곤의 축복을 논하는 건 비약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 작은 짐승 하나도 내 발등에서 떼어 놓지 못할걸요?”

발랄한 목소리에 언뜻 조롱의 감정이 스쳤다. 겨우 이 작은 짐승 하나 때문에 이런 상황에 부닥쳤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헤세온이 사나운 눈으로 라디를 내려다보았다. 내내 이 모습을 구경하던 에델이 넌지시 주의 주었으나 헤세온은 그의 말을 보란 듯 무시하며 라디에게 손을 뻗었다.

“이까짓!”

털신 위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라디가 자신의 앞에 불쑥 다가오는 손을 발견하곤 털을 세웠다.

“으앗!”

날카로운 라디의 이빨이 허공을 깨물었다. 헤세온은 그저 귀엽고 어리게만 보였던 짐승이 사납게 이를 드러낸 것에 놀라 뒷걸음질 쳤다. 짐승은 언제 이를 드러냈냐는 듯 다시 발등에 고개를 묻었다. 그런 헤세온을 보며 혀를 차던 티보치나가 보란 듯 라디를 잡아들었다. 라디는 발등에서 떨어지기 싫다는 듯 버둥댔으나 티보치나는 아주 깔끔하게 떼어 냈다. 피아만큼이나 능숙하게 짐승을 제압하는 티보치나의 모습에 헤세온이 이를 악물었다.

“이런 멍청한 짓으로 저를 놀리려 하셨다니, 정말 어이가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어머, 트리폴에 대한 설명은 극히 일부분밖에 못 했어요. 게다가 드래곤이 내 결혼을 축하해 주기 위해 선물한 황금 산양도 못 보셨잖아요. 들어는 보셨어요? 오직 트리폴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귀한 동물이자 축복의 상징인데.”

카놀라는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그녀는 황금 산양의 눈부신 빛깔을 설명했으나 이미 마음이 상한 헤세온은 단호하게 그 말을 잘랐다.

“됐습니다!”

“나가는 길은 저쪽이다.”

기다렸다는 듯 에델이 어느 한쪽을 가리켰다. 티보치나는 에델이 가리킨 방향을 확인하곤 미미하게 조소를 흘렸다. 헤세온은 인사도 없이 그곳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피아가 놀라서 뭐라고 말을 하려 했으나, 그는 곧 무슨 생각에서인지 입을 다물어 버렸다. 카놀라는 예의상 두어 번 헤세온의 이름을 불러 주었으나 금방 포기했다. 사육장에서 일하는 그라사 중 누구도 헤세온의 행동을 막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마음껏 화를 내며 가 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멀리서 아련하게 비명이 들려왔다.

라디와 아쉬운 이별을 하느라 바쁘던 카놀라가 놀란 눈으로 소리 난 쪽을 돌아보았다. 에델과 티보치나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 태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피아는 저 비명의 원인을 짐작했다는 듯 혀를 찼다.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습니다.”

티보치나가 평온하게 말을 하자 에델이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순순히 몸을 돌렸다. 다만 어쩐 일인지 카놀라에겐 피아와 남아 있으라고 당부했다. 그러곤 티보치나와 함께 비명이 들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졸지에 피아에게 맡겨진 카놀라가 조금 불만스럽게 입술을 삐죽였다.

“뭐야, 나도 궁금한데. 저쪽에 뭐가 있는데? 출구 아니었어?”

“음…… 출구가 있긴 한데 가는 길이 좀 미끄러워서 발을 헛디디셨을 거예요.”

“죽진 않았겠지? 내가 가 봐야 하는 거 아냐?”

“안 보시는 게 나을 거예요. 좀…… 흉한 꼴일 게 뻔해서. 후사께서도 그래서 남으라고 하셨을 거고요.”

나지막한 피아의 중얼거림에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피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저쪽에 배변장이 있거든요.”

*

샤를만에서 온 불청객의 체류 기간은 불가피하게 늘어났다.

똥독이 올라 버린 까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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