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델.
당장에 그 이름을 뱉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카놀라를 끌어안은 채로 전방을 주시하던 에델이 누군가에게 눈짓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울란이 카놀라 옆으로 뛰어왔다.
에델은 그에게 카놀라를 맡기려는 듯 팔을 풀었다. 그러나 곧장 외투 자락을 움켜쥐는 카놀라의 손길에 멈칫했다. 에델의 시선이 희게 질린 카놀라의 얼굴로 향했다. 잠시 침묵하던 에델이 장갑을 벗은 손으로 카놀라의 볼을 가볍게 문질렀다.
“눈을 감고, 귀를 막으십시오.”
에델의 손은 따뜻했지만 축축했다. 그 축축함이 카놀라의 눈물 때문인지, 그의 손에 난 식은땀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움켜쥐고 있던 옷자락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카놀라가 그것을 따라 반사적으로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울리는 곰의 포효에 화들짝 놀라 기겁하며 뒤로 물러섰다. 울란이 거대한 덩치로 시야를 가려 주었다. 하지만 짐승의 울음소리와 전사들의 외침,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가 생생하게 귀를 때렸다. 보지 않아도 그 상황이 쉽게 상상되었다. 카놀라는 자리에 주저앉아 두 눈을 감고 귀를 틀어막았다.
뇌리에 곰의 커다란 송곳니와 머리 위로 드리워지던 앞발이 떠올랐다. 카놀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움츠린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거대한 앞발이 지금 당장이라도 머리를 후려칠 것만 같았다. 마치 뱀의 앞에서 얼어붙은 개구리가 된 기분이 들었다. 등줄기로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카놀라는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이나 몸을 웅크린 채 버텼다. 귀를 막아도 아련하게나마 들려오는 곰의 울음소리 때문에 무서운 상상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고개를 무릎에 처박고 있던 카놀라가 문득 눈을 떴다.
아주 강한 피 냄새가 후각을 자극하고 있었다. 카놀라는 뛰어오르듯 몸을 일으켰다. 울란의 거대한 등을 옆으로 밀치며 고개를 내민 카놀라가 숨을 되삼켰다. 그녀는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구름 속에서 있는 듯 없는 듯 했던 달빛이 환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피로 얼룩진 흰 머리칼이 그 빛을 받아 반짝였다. 헐떡거리느라 어깨가 들썩이는 게 카놀라가 선 위치에서도 보였다. 그는 카놀라를 등지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입을 쩍 벌린 곰이 앞발을 들고 있는 찰나였다.
곰의 아가리에 먼저 창을 박지 못했다면, 앞발이 에델의 머리통을 날려 버렸을 것이다.
곰의 머리 뒤편으로 날카로운 창끝이 튀어나와 있었다. 짙은 피 냄새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헐떡이던 에델이 천천히 창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곰의 육중한 몸뚱이가 앞으로 쿵 하고 넘어졌다. 제 앞에 고꾸라진 곰을 힐끗 내려다본 에델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수그렸다.
앞머리 끝에 맺혀 있던 붉은 땀방울이 투둑 떨어졌다.
“카놀라 님? 카놀라 님!”
멍청한 표정으로 에델을 바라보고 있던 카놀라는 자신의 팔을 잡고 흔드는 피아 덕분에 정지했던 머릿속을 겨우 움직였다. 곰이 죽었다. 곳곳에 화살을 맞고, 사냥개에게 물어뜯기고, 창에 꽂힌 너덜너덜한 상태로. 사방이 피 냄새인지 뭔지 모를 역한 것으로 진동했다. 속이 매스꺼웠다.
모든 게 처음이었다. 위협적인 야생 동물들과 마주해 생명의 위협을 느낀 것도, 그 짐승이 사냥당하는 장면도, 이렇게 피투성이가 된 사람들의 모습도 모두.
“괜찮으세요? 카놀라 님?”
피아가 다시 한번 카놀라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이 매스꺼운데 자꾸 흔드니까 더 안 좋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등을 두드려 줬을 때 기겁을 하며 도망가던 헴슨의 심정이 이랬던 모양이다.
카놀라는 일그러진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공포로 얼어붙었던 정신이 점차 깨어났다.
“다치셨습니까?”
피 냄새가 갑자기 확 끼쳤다. 카놀라가 반사적으로 헛구역질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가까이 오던 에델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당혹스러운 눈으로 카놀라를 보던 그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과 갑옷이 피에 젖어 있었다. 손으로 문질렀으나, 그것은 번지기만 할 뿐 닦아지진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물고 제 몸뚱이를 내려다보던 에델이 작은 숨을 뱉었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영지에 연락해서 곰의 사체를 수거하라고 전해. 사냥개들 진정시키고, 정리하도록. 그리고 울란.”
울란은 카놀라를 지키느라 유일하게 상태가 멀쩡했다. 그는 에델의 부름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델이 내리려는 명령이 무엇인지 알아챈 것이다. 속을 다스리느라 연신 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카놀라를 가만히 보던 에델이 조금 풀죽은 꼴로 걸음을 돌렸다.
“돌아가자.”
“잠ㄲ…….”
에델의 등 뒤로 다급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힐끗 뒤를 돌아보는 에델의 눈에, 카놀라가 가슴에 손을 올린 채로 다가오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카놀라는 채 한 걸음을 다 떼기도 전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버렸다. 그 모습에 놀란 에델이 그녀와 빨리 멀어지려던 것도 잊고 황급히 다가서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으십니까? 어딜 다치신 겁니까?”
“아니, 그게 아니고 다리…….”
“다리를 다치셨습니까?”
“……힘이 풀려서.”
두 손으로 땅을 짚은 채로 숨을 몰아쉬던 카놀라가 시선을 들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가까이 다가온 에델에게서 피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카놀라의 눈이 피투성이 장갑으로 향해 있음을 깨달은 에델이 황급히 손을 뒤로 뺐다. 그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려는 기색을 보였으나, 카놀라가 외투 자락을 와락 움켜쥐는 바람에 제 행동을 멈추어야 했다.
“전 수습을 해야 하니 울란과 먼저 야영지로 돌아가십시오.”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하던 에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카놀라는 대답 대신 외투를 쥔 손에 힘을 쥐었다. 외투에 묻어 있던 피가 쥐어짜이듯 그녀의 장갑에 스며들었다.
“피가 묻습니다.”
걱정스럽게 지적하는 그의 말에 카놀라가 눈을 들었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있던 그녀가 애써 입매를 끌어 올리며 빠르게 말을 뱉었다.
“당신이 나타나지 않았으면 난 죽었을 거예요. 진짜 고맙고…… 고맙고…….”
떨리는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평소와 같은 웃음을 만들려던 카놀라는 결국 포기했다. 가시지 않은 공포의 잔재가 온몸을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었다. 외투를 잡은 손아귀의 힘이 그녀가 쥐어짤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손을 올렸다. 잠시 주저하던 그는 피에 젖은 장갑을 벗고, 제 외투를 부여잡은 카놀라의 손 위에 맨손을 덮었다.
“죄송합니다. 다치게 두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지키지 못했습니다.”
“……나 안 다쳤어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듣자, 둑이 허물어지듯 긴장이 무너졌다. 카놀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붉어져 있던 눈시울에서 눈물이 샘솟았다. 내내 참고 있던 서러움이 한방에 폭발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 사이로 두서없는 말이 서러운 울음과 함께 섞여 나왔다.
“내가! 내가 얼마나…… 나 진짜 열심히 했는데! 늑대가 막, 미친 할머니가 나한테…… 흑, 사람이 아무리 싫어도 그렇지이…… 곰이 날 잡아먹으려고…… 흐어어엉…… 무서운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에어어어엉……!”
카놀라는 외투를 놓고 본격적으로 두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 흐느낌이 어찌나 서러운지, 그걸 듣는 피아는 자기도 모르게 동화되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뭐 어쩌라고! 결혼 좀 하겠다는데……. 으어어엉! 나 진짜 무서웠어…… 흐윽, 알아요? 진짜로 무서웠는데 티도 못 내고오…….”
“죄송합니다.”
“당신이 왜 죄송해애어어엉……! 곰은 왜 저렇게 무섭고 난리야아…….”
“제 욕심이었습니다.”
서럽게 울던 카놀라가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에델은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카놀라를 보다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날이 밝는 대로 궁에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시험은 그만 치르십시오. 이런 위험을 감수할 가치가 없습니다.”
카놀라가 훌쩍거리며 에델을 보았다. 그 와중에도 눈물은 볼을 타고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것을 닦아 낼 정신도 없는지, 카놀라는 미동도 없이 에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에델이 한숨을 내쉬며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주었다. 그러고서야 그는 볼에 난 긁힌 상처를 발견했다. 에델의 얼굴에 죄책감이 어렸다.
욕심인 걸 알았을 때 그만뒀어야 했다. 카놀라가 이런 일정을 버텨 낼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제 욕심에 그것을 외면했다. 뻔히 알면서도 모른척했다.
에델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를 보며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카놀라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그러잖아도 서러운데 지금 파혼하자는 거예요……?”
“네?”
아니, 의미가 잘못 전달된 것 같다.
에델은 아까보다 더 당황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에델을 보고 있었다. 잠깐 잦아들었던 눈물이 다시 홍수처럼 터져 나왔다. 그녀는 아예 엎어져서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으어엉……! 나보고 가래! 두 번째 시험 통과했는데! 나보고 가래!”
“아니, 그게…….”
“내가 거추장스러운 거잖아요! 다음엔 안 구해 주겠다 이거잖아!”
“그럴 리가요! 다만 산맥은 너무 위험합니다. 하물며 꼭대기까지 가는 건 말도 안 됩니다.”
에델은 필사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고자 노력했다. 이 광경이 어찌나 긴박하고 흥미진진했는지, 체온이 식지도 않은 곰의 사체는 모두의 뇌리에서 잊힌 지 오래였다. 대신 전사들과 피아는 자신들도 모르게 홀린 듯 두 사람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따금 사냥개가 컹컹 짖는 소리가 배경 음악처럼 두 사람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당신과 내 결혼이 말도 안 된다고요? 세상에!”
“물론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당신과 함께하길 바랍니다.”
“……진짜?”
“그럼요. 당신께 무슨 일이 생겼다면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에델은 무척이나 초조했다. 자꾸만 의도와 다르게 해석되는 말에 답답함이 느껴졌다. 이대로 오해를 쌓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는 카놀라에게 미움을 받거나 그녀를 슬프게 만드는 어떠한 짓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카놀라에게 내려가라고 한 건 오직 그녀의 안위를 위함이었지, 결코 그녀와의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물론 시험을 포기하면 결혼이 더욱 요원해지겠지만……. 그렇다고 위험한 짓을 계속하게 할 수는 없잖나.
그런 에델의 귓가로 카놀라의 나지막한 물음이 들렸다.
“그럼 다신 그런 소리 안 할 거예요?”
“네. 그러겠습…….”
냉큼 대답하려던 에델이 멈칫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 카놀라의 흐느낌이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고개를 수그리고 있고, 목소리에서는 울음기가 묻어 나왔지만 아까보다 훨씬 침착해진 상태였다.
몸을 수그리고 있던 카놀라가 천천히 상체를 들었다. 눈두덩이가 벌겋게 부어오르긴 했지만 눈물은 멈춘 것 같았다. 그녀는 에델을 흘겨보다가 잔뜩 잠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나 무서웠어요. 눈물 날만큼 무서웠는데 그래도 살았으니까 됐어. 앞으로도 당신이 날 살려 줄 거니까 괜찮아요. 서럽지만 이겨 낼 거예요. 피 냄새에도 도망가지 않을 거고, 앞으로 더 조심할 거예요. 난 당신 곁에 있고 싶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그냥, 평생 날 지금처럼만 여겨 줘요.”
꼴이 엉망이었다. 얼굴은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으로 범벅이 되어 있는 데다 머리카락도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모자 아래로 튀어나와 있다. 볼의 흙과 상처는 눈물 때문에 구정물처럼 얼룩져 버렸다. 그런데도 제 눈에는 세상에 그 누구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에델이 한숨과 함께 시선을 내렸다.
지금이라도 내려보내야 한다. 카놀라의 안전을 생각하면 그것이 옳다는 걸 알지만 차마 가라는 소리는 할 수가 없었다.
“……당신은 제 평생에 가장 귀한 사람입니다.”
그 말에 카놀라의 얼굴에 비로소 웃음꽃이 피었다. 울다 웃느라 꼴이 기괴해졌지만 어쨌든 그녀는 배시시 웃음을 지었다.
“그럼 됐어요. 우리 이제 그만 이 빌어먹을 곳을 벗어날까요?”
에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먼저 몸을 일으켰다. 카놀라 역시 손으로 대충 얼굴을 닦은 뒤 자신에게 내밀어진 에델의 손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손이 닿기 직전, 카놀라가 문득 심각한 표정으로 에델을 올려다보았다.
“근데 에델.”
촉촉한 눈동자 덕분에, 그녀의 목소리가 아주 애처롭게 들렸다.
“나 발에 쥐 났어요.”
카놀라와 에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내내 발등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라디가 말똥말똥한 눈으로 두 사람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곰의 날카로운 발톱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묵직하고 갑갑한 그 느낌에 숨이 턱 막혔다. 본능적으로 숨을 쉬고자 입을 크게 벌렸다.
“헉!”
눈이 번쩍 뜨였다. 온통 깜깜했다. 카놀라는 한참이나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입 안이 텁텁해서 몇 번 입술을 달싹였더니, 메마른 곳이 살짝 찢어져 통증이 느껴졌다. 숨 쉬는 게 답답했다. 두꺼운 털 이불을 옆으로 마구 밀어 내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꿈을 꾸었다는 걸 인식했다. 곰이 나오는 꿈이었다.
힘겹게 몸을 일으킨 그녀가 긴 한숨을 내쉬며 기억을 더듬었다.
마중 불을 피우고, 늑대에게 쫓기다가, 곰에게 죽을 뻔했었다. 하지만 에델이 나타나서 살려 줬고, 함께 야영지로 돌아왔다. 사실 돌아오자마자 지쳐 쓰러지고 싶었지만 카놀라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제사장의 막사로 향했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모든 전사 앞에서 성공했음을 공표하라고. 제사장은 진저리를 치면서도 마지못해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소식을 들은 전사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카놀라는 피아와 함께 한참이나 자신들이 겪은 고초를 떠들다가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식은땀이 범벅되어서 깨어난 것이었다.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뇌리에 각인된 공포가 쉽게 사라지진 않았다.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던 카놀라가 결국 침대에서 내려왔다. 찬 바람이라도 쐬지 않으면 이 갑갑함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대충 보이는 대로 옷을 껴입은 카놀라가 무심코 나가려다 멈칫했다. 밤에 함부로 나갔다가 봉변을 당하면 어쩌지? 그러잖아도 시험에 성공해서 제사장의 속이 단단히 뒤틀려 있을 텐데, 밤을 틈타 습격이라도 하겠다며 달려들면 큰일이지 않나. 문 바로 앞에서 심각한 얼굴로 서 있던 카놀라가 결국 문을 반절만 열었다. 문고리를 잡은 상태에서, 그녀는 고개만 바깥으로 쑥 내밀었다. 이렇게 찬 바람을 쐬다가 여차하면 고개만 집어넣어야지!
불안하긴 했어도 막상 고개를 내미니 속은 좀 진정되었다. 카놀라는 눈을 감고 잠시 찬 바람에 얼굴을 맡겼다.
“……그게 무슨 꼴인가?”
한가로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생각지도 않은 목소리에 카놀라가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뒷짐을 진 거대한 형태를 발견한 그녀는 무심코 비명을 지를 뻔했으나,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야영지 곳곳에 불이 밝혀져 있지 않았다면 곰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를 만큼 거대한 체격이었다.
“놀랐잖아요!”
“그대의 상태는 생각하지 않나?”
“그야…….”
카놀라가 헛기침을 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막사 문틈 사이로 고개만 내밀고 있는 꼴이 밤에 보기엔 더 무섭겠다. 멋쩍게 헛기침을 하던 카놀라가 완전히 문을 열고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당장 싸우러 나가도 이상해 보이지 않는 상태로 무장한 그라그포드가 뒷짐을 지고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전 악몽을 꿔서 잠깐 머리를 식히고 있었어요.”
“묻지 않았다.”
무뚝뚝한 그라그포드의 대꾸에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였다. 추위를 이기고자 팔짱을 낀 카놀라가 어깨를 잔뜩 움츠리며 말했다.
“어차피 물어보실 거였잖아요. 근데 디라즈께선 안 주무세요?”
대부분 잠이 들어서 야영지는 아주 적막했다. 이렇게 무장을 하고 돌아다닐 만한 시간이 아닌 건 확실했다. 카놀라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라그포드의 차림을 확인했다. 그런 카놀라를 떨떠름하게 보던 그가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야간 경계 중이다.”
“그건 보초의 일이 아닌가요? 디라즈께서 하시기엔…….”
“디라즈도 한 명의 전사이니, 언제든 필요하면 다른 전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법이다.”
카놀라는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디라즈가 보초를 서는 중이라니!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후사 역시 그러할 것이고, 그대 또한 후사비가 된다면 그러해야 한다.”
적어도 이곳 왕이 다른 나라의 왕들과 좀 다르다는 건 확실하게 알겠다. 그러니 에델이나 자신 또한 그래야 한다는 것도.
카놀라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다른 나라 왕녀들과는 조금 성격이 다르다. 역시 자신이 이곳에 온 건 운명이었던 게 틀림없었다. 발트칸 출신 왕녀라도 왔었으면 채 일주일도 못 버티고 줄행랑을 쳤을 테지. 어디 발트칸뿐인가? 자신이나 되니까 이렇게 시험도 잘 치르고 꿋꿋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카놀라는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는 저 자신을 아낌없이 칭찬하며 말했다.
“여긴 저만 할 수 있는 역할이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을 찾았나?”
“장담할 수는 없는데,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가벼운 대꾸에 그라그포드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느리게 고개를 돌려 캄캄한 야영지를 돌아보았다.
“곰에게 죽을 뻔했다고.”
“아, 네. 그랬죠.”
살아생전 곰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줄은 몰랐다. 곰은커녕 늑대를 마주한 것도 처음이었다. 늑대를 마주했을 땐 너무 놀란 나머지 무서움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샤를만에서 사냥을 한 번도 따라간 적이 없었던 카놀라는 박제된 동물이나 보았을 뿐, 살기를 뿜는 야생 동물은 볼 일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무지가 늑대와 코요테 앞에서 과감히 도망치게 한 것 같기도 했다.
“후사가 곰을 잡았으니 앞으로의 일정에서 자신을 빼 달라고 하더군. 제 연인을 지켜야 한다고.”
아직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아까 전의 상황을 되새김질하던 카놀라가 번개처럼 고개를 들었다. 그라그포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는 카놀라의 눈빛을 냉정하게 외면한 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불허했다.”
카놀라의 표정이 대번에 불퉁해졌다. 잘은 모르지만 곰을 잡은 게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는 건 카놀라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다른 전사들도 도왔고, 사냥개도 동원되었지만 곰의 숨통을 끊은 건 에델이다. 당연히 뭔가 칭찬의 의미로 작은 보상이나마 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기왕이면 그가 원하는 것으로. 가령 연인과 함께하고 싶다면, 며칠만이라도 빼 주는 융통성을 발휘할 수도 있지 않나! 절대 카놀라가 연인이라서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무척이나 각박한 처사였다!
카놀라는 당장 항의를 하기 위해 입술을 뗐지만, 그보다 먼저 그라그포드가 말을 덧붙였다.
“그대가 후사비가 되겠다면, 혼자서도 견뎌 낼 줄 알아야 한다.”
항의하려던 카놀라가 미묘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가 곧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델에게 저만 봐 달라고 떼쓸 생각 없어요. 물론 또 그런 상황이 닥치면 당장 달려와 달라고 소리치겠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잖아요? 앞으로도 전 곰과 싸워서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카놀라는 무기를 쥘 줄 모른다. 몸으로 하는 건 스킨십 빼곤 도통 재능이 없다. 그러니 앞으로도 무언가를 배워 볼 마음은 딱히 없었다. 다만 그녀는 자신이 잘하는 것이나 더 잘하도록 노력할 작정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생산적이고 발전적인 선택 아닌가?
“자신의 힘으로 살아남고, 견디고, 뭐 다 좋아요. 그래야 한다는 거 알겠어요. 하지만 서로 도울 수 있는데 돕지 않는 건 멍청한 짓이라고 생각해요. 혼자 죽을 만큼 힘든 일이 함께여서 쉬워진다면, 당연히 함께하는 게 좋잖아요? 도움받는 게 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앞으로도 전 도움을 마다할 생각이 없어요.”
그러니 카놀라는 앞으로도 에델에게 살려 달라고 칭얼거리는 것을 자제할 생각이 없었다. 물론 꼭대기에 올라가는 일도 말이다. 당당하게 앞으로도 신세를 지겠노라 선언하는 카놀라의 모습이 그라그포드는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카놀라가 누군가를 배려한답시고 혼자 끙끙거리면 그것이 더 의심스러울 지경이 되었다.
차라리 저렇게 솔직한 편이 낫다. 그렇게 생각하는 그라그포드의 귓가로 카놀라의 질문이 와 닿았다.
“근데 대체 그 미, 후. 그 제사장님은 저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혹시 아세요?”
중간에 치미는 무언가를 꾹 참느라 부자연스럽게 말을 끊었던 카놀라가 겨우 침착함을 유지했다. 하마터면 험한 표현을 쓸 뻔했다. 속으로야 백 번 천 번도 넘게 말했지만 차마 디라즈 앞에서까지 미친 할망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카놀라의 물음에 그라그포드는 눈살을 찌푸리며 침묵했다. 고민스러운 듯 먼 곳을 응시하던 그가 답지 않게 주저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가 느릿느릿 입술을 떼었다.
“제사장은…… 이방인을 경계하는 마음이 강할 뿐이다.”
카놀라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그녀는 결국 치미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경계요? 그게 경계로 보이세요? 그건 증오예요! 하마터면 피아까지 죽을 뻔했다고요!”
“소수의 희생으로 미래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다면,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절로 입이 벌어졌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굳어 있던 카놀라가 제사장의 막사 쪽을 휙 돌아보았다. 소수의 희생? 정말이지 황당하고 기가 찬 표현이었다. 피아가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희생하려 들었던 게 생각났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어야만 지켜지는 미래가 정말 안전한 건가요?”
비난이 가득한 물음에 그라그포드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역시 그것이 옳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그는 제사장이 어째서 저렇게 행동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안다는 게 문제였다. 그라그포드는 제사장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고 어떤 부분에선 극명하게 대립했지만, 제사장을 온전히 비난하지는 못했다.
“제사장의 혈족은 이방인에게 몰살당했다.”
막사를 노려보던 카놀라가 멈칫하며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는 무덤덤한 눈으로 제사장의 막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제 혈족의 불행이 이 나라를 지키기 위한 신의 경고였다고 믿고 있고.”
네 불행으로 전부를 단정 짓지 마.
그렇게 말했지만, 그 말이 제사장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들렸을지도 안다. 한 사람의 불행으로 치부하고 넘기기엔 그 규모가 너무 컸다. 그라그포드는 자신을 바라보던 브리도의 눈빛을 상기했다. 충격으로 굳어 버린 그녀의 표정 역시 기억했다. 그라그포드는 제사장을 원망했으나 또한 연민했으므로, 그 눈빛에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지금 이렇게 카놀라에게 제사장의 사정을 넌지시 일러 주는 것도 죄책감의 발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제사장의 사연에 카놀라는 꽤 놀란 얼굴이었다. 할 말을 잃고 그라그포드를 보던 그녀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러지 않고선 견디지 못했겠군요.”
여긴 왜 다들 이 모양이지? 불쑥 치미는 짜증에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카놀라가 심술궂은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짓을 정당화할 수는 없어요. 제사장님만 그런 특별한 사연을 가진 것도 아닐 거고.”
“물론 이방인에게 혈족을 잃은 자들은 많다.”
그라그포드는 선선히 긍정했다. 물론 제사장처럼 본인을 뺀 전부가 몰살당한 경우는 찾기 힘들다. 하지만 혈족마다 이방인의 손에 제 식구를 잃어 본 경험 하나 정도는 있었다. 그런 일이 없는 혈족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수도의 사람들은 덜하지만, 변두리 쪽 사람들은 이방인을 후사비로 들이려는 디라즈를 향해 비난을 퍼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니 곧 국경 지대를 순회할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 그라그포드는 요즘 워낙 정신이 없어서 잠시 잊고 있던 다음 일정을 떠올렸다. 올해는 작년보다 에데사와의 충돌도 적었으니 국경의 상황이 좀 나을 것이다. 대사냥이 끝나는 대로 국경 쪽 보고서를 다시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라그포드의 귓가로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디라즈 님은 대단하시네요.”
그것은 무척 뜬금없는 감탄이었다. 그라그포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 난리통에도 에델을 지켜 내셨잖아요.”
많은 것이 생략된 말이었지만 그라그포드는 쉽게 이해했다. 그는 묘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다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후사는 내 유일한 아들이다. 자신을 지킬 힘이 충분한 녀석이고.”
트리폴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강인한 혈통이 우선시된다. 그가 이어받은 핏줄이야말로 그의 미래를 결정짓고, 그의 가능성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었다. 테드라고의 피를 이어받았다면 응당 누구보다도 강인한 전사가 될 사내여야 한다.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에델은 그것을 해냈으므로, 다시 한번 테드라고의 강인함을 증명한 셈이었다. 누구도 이방인의 피를 들먹이며 에델의 자격을 논할 수 없었다. 에델이 스스로를 증명해 낸 순간 이후로, 그라그포드는 그 어떤 잡음도 허용하지 않았다.
단호한 그의 말에 카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방인의 피 때문에 에델이 고생했다는 건 들었어요. 다만 그 고생이 에델 혼자만의 것은 아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틀림없이 누군가는 디라즈에게 순혈 트리폴인을 군주비로 맞이하라고 청했을 테죠. 신의 분노를 사지 않은 후사를 얻기 위해.”
그라그포드가 힐끗 카놀라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카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뻔하잖아요.”
카놀라는 샤를만에 있을 때 정치적인 문제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지만, 이해관계가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그것은 왕족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녀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선 알아야 할 수밖에 없는 것. 이곳이라고 그 사정이 다르진 않을 터다.
생글거리는 카놀라를 가만히 보던 그라그포드는 금세 무심한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무의미한 청이었지.”
“그래서 군주비께서도 끝까지 버티셨을 거예요.”
그라그포드의 눈매가 가늘게 접혔다.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무심함이 아닌 다른 어떠한 감정이 떠올랐으나, 그것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했다. 카놀라는 그라그포드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 물론 저는 잘 모르지만요. 그냥 그러셨을 것 같아요. 저도 이방인이고, 에델과 결혼하기 위해 시험을 치르는 처지로서 상상해 보면 말이에요. 그때 상황은 좀 달랐겠지만, 어쩌면 더 안 좋았겠지만 그래도 에델을 끝까지 지킨 이유는 디라즈를 믿었기 때문이겠죠. 그래서 두 분께 감사해요. 사실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쉽거든요.”
요즘 들어 부쩍 ‘에델의 어머니’에 대해 생각한다. 제사장에 대해서 알게 될수록, 이 시험이 진행될수록 더욱더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이렇게 힘든데 그때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보다도 더 폐쇄적이었을 트리폴인들 사이에서 어떻게 버텼을까?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자신이 힘든 건 오히려 쉽게 보였다.
“그대는 오늘 곰에게 죽을 뻔했다.”
찬물을 끼얹듯 튀어나온 발언에 카놀라의 표정이 불퉁해졌다. 물론 쉬워 보인다고 해서 거저먹을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임신한 사람을 죽이겠다는 심보로 괴롭혔다는 제사장인데 아무렴 자신에겐 더하지 않겠나. 별로 예상하고 싶진 않지만, 너무나 뻔한 미래였다. 하지만 뻔하다고 해도 굳이 저렇게 콕 집을 건 뭐람?
“상기시키지 말아 주실래요? 자꾸 그러시면 저 울어 버릴 거예요.”
그녀가 에델을 만난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렸다는 소리는 들었다.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그 자리에 있던 전사들은 죄다 두 번째 시험이 과했다고 쑥덕거렸다고 했다. 심지어 그렇게나 카놀라를 못마땅해하던 라다크조차 그 자리에선 측은함을 느꼈다고 했다. 에델이 자신을 빼 달라며 득달같이 찾아왔을 때 덩달아 한마디씩 얹던 다섯 전사의 모습이 얼마나 기가 막혔던가.
우는 것도 재주이니, 그 재주 많은 울음을 여기서 터뜨렸다간 자신도 넘어갈지 모른다. 그라그포드는 누군가의 울음에 큰 면역이 없었으므로 즉각 경계심을 가졌다. 그는 절대 우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대번에 입을 다무는 그라그포드의 모습에 카놀라가 키득거렸다.
“어쨌든 무섭긴 했지만 괜찮아요. 저도 에델을 믿거든요. 제가 그의 평생에 가장 귀한 사람이래요. 어쩜 말을 그렇게 예쁘게 하지? 아무리 봐도 디라즈를 닮은 것 같진 않은데, 역시 군주비를 닮은 거죠? 얼마나 다정하고 아름다우셨을까!”
무척 뜬금없긴 하지만, 그라그포드는 그의 외관을 빼면 자신과 아주 판박이라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그라그포드의 주장이 아니라 주변인들의 증언이니 틀림없이 맞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카놀라가 무척 상심할 것 같았다. 어째서 상심하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그 사람 너무 예뻐서 전 이제 절대 포기 못 해요.”
그라그포드가 쓸데없는 충동에 휩싸인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놀라는 마냥 제 볼을 감싸며 한참이나 에델의 출중한 외모와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주절거렸다. 어쩌면 이게 본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라그포드는 불현듯 그런 추측을 했다. 제 연애를 어디에든 자랑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하다가 옳다구나 하고 잡은 타이밍이 지금인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준비했다는 듯 말을 늘어놓을 수는 없으리라.
물론 그라그포드는 제 아들을 아끼는 아버지였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아들이 연인으로서 얼마나 훌륭한 사내인지까지 알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떨떠름하게 카놀라를 보던 그라그포드가 초를 치기에 적합한 화제를 머릿속에서 골랐다. 물론 카놀라가 울지 않을 만한 것으로 신중하게.
“꼭대기로 갈수록 경사가 가파르고 암벽이 많아질 거다.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곧장 추락할지도 모르지. 그대라면 꼭대기는커녕 초입부에서 굴러떨어질 거다.”
두 손을 맞잡고 서 있던 카놀라의 얼굴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굳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라그포드를 보던 그녀가 불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제 칭찬에 악담으로 답하시는 거예요?”
“조언이다.”
그라그포드가 시선을 돌렸다. 새카만 하늘 너머로 짙은 그림자처럼 자리 잡은 산봉우리가 보였다. 카놀라가 올라가야 하는 장소였다.
“길이 있다. 우리는 그곳을 드래곤의 성역이라고 부르지. 그리고 꼭대기에 오르기 위해선, 드래곤의 성역을 반드시 지나가야 한다. 그대가 암벽을 기어 올라갈 작정이 아니라면 더욱.”
가파른 산 정상에 오르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드래곤의 성역을 가로지르는 길이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곳을 가로지르는 일조차도 선택받은 이가 아니면 불가능하지만, 어쩐지 카놀라는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까지 길을 알려 주는 건 그로서는 무척 큰 호의였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듣는 카놀라는 다른 부분에 꽂힌 것 같았다.
“거기에 진짜로 드래곤이 살아요?”
휘둥그레진 눈으로 되묻는 그녀의 모습은 아주 진지했다. 정확히는 ‘진짜로 있죠?’라고 묻는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덕분에 그라그포드는 잠시나마 없는 드래곤이라도 만들어 주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올라가면 다 알게 될 일인데 당장 거짓말을 하는 건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는 정직하게 그녀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그곳엔 아무것도 없다. 위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만 존재할 뿐.”
다만 그 공간의 존재 자체가 드래곤이 아니고선 설명이 되지 않아서 이름만 그렇게 붙여 둔 것이다. 그 대답에 카놀라가 눈에 띄게 탄식했다.
“피아에게 드래곤을 소개해 주기로 했는데! 망했네…….”
지금 그게 걱정할 일인가?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어져서, 그라그포드는 저도 모르게 진심을 담아 물었다.
“그대는 올라갈 일이 걱정되지 않나?”
“어머나, 디라즈께선 아직 절 모르시네요. 전 가망성 없는 일에 매달리는 성격은 아니에요. 아니다 싶으면 빨리 포기하는 게 이롭거든요.”
도통 근본을 알 수 없는 자신감이었다. 바로 몇 시간 전에 곰에게 생명을 위협당했던 사람이 보이기엔 더더욱. 숱한 짐승을 마주하고, 다양한 전사들을 이끌었던 그라그포드는 첫 사냥에서 심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는 그라사들을 종종 보아 왔다. 카놀라처럼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던, 이런 환경에 조금도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겪기엔 의미가 큰 사건이었다. 당장 내려가겠노라 날뛰진 않더라도 최소한 겁에 질려서 한동안 막사 바깥을 나오지 않는 꼴 정도는 예상했다.
그런데 오히려 드래곤 타령이나 하면서 여전히 태평한 소리를 하고 있다. 정말로 트리폴의 그 무엇도 카놀라 앞에선 버티지 못할 것 같다. 저 대책 없는 태도는 여태껏 트리폴의 누구도 접해 보지 못한 종류였다. 에델의 말대로 카놀라라면 이곳을 변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사는 그대를 두고 봄 햇살 같다고 칭하더군. 그러니 한겨울의 추위를 몰아내 주리라고.”
그라그포드의 말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델이 그라그포드에게 가서 제 칭찬을 하다니! 정말이지 뒤에서조차 이렇게 완벽하면 어떡하라는 건가!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히죽거리던 그녀가 볼을 감싸며 탄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봄 햇볕이 따뜻한 이유는 겨울이 있기 때문이잖아요? 어머, 역시 난 여기에 눌러앉을 운명인가 봐!”
카놀라는 발을 동동 구르며 에델과 자신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 한 쌍인지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나마 관대한 마음으로 그녀를 응시했던 그라그포드는 다시 경계심을 공고하게 세웠다. 넋 놓고 있다간 기력을 온통 빼앗기고도 남을 것이다. 주변 경계를 하는 일보다 카놀라의 저 치솟는 기쁨을 상대하는 게 더 피곤했다. 그는 치미는 한숨을 삼켰다.
아무래도 단둘이 대화하는 건 이제 좀 피해야겠다.
*
“이걸 꼭 읽어 둬야 합니까?”
“당연하지! 그럼 왕녀님이 이걸 다 읽으시겠나?”
“우리가 미리 읽어 놔야 왕녀님이 물어보셨을 때 필요한 부분을 바로 찾아 드리지!”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두 노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루덱이 제 앞에 미뤄진 책 더미를 가만히 보았다. 눈대중으로 보아도 제 앞에 놓인 것이 가장 두껍고 어려워 보였다. 두 노인은 눈이 침침하다는 핑계로 진즉 글자가 크거나 내용이 적은 것들만 골라서 가져간 뒤였다.
상당히 불합리한 배분은 둘째 치고, 일단 루덱은 자신이 왜 이것들을 읽어야 하는지 잘 이해되지 않았다. 카놀라는 자료를 찾아 두라고 했지 읽고 보고서를 써 오라고 하진 않았는데.
“하지만 자료를 찾아 두라는 건 직접 보시겠다는 의미가…….”
“쯧, 자네는 아직 멀었군. 멀었어.”
“이렇게나 왕녀님을 몰라서야.”
루덱의 가냘픈 항의는 두 노인의 까랑까랑한 대꾸에 막혔다. 고개를 내저으며 보란 듯이 한숨을 내쉰 안젤리나가 검지를 세우며 말했다.
“장담하는데, 아마 채 한 권이나 읽으시면 다행일 걸세.”
“아무렴, 한 권만 읽으셔도 기특하지!”
오스카가 고개를 끄덕이며 안젤리나의 말에 동조했다. 싸울 땐 아주 세상 그 누구보다 매정하게 서로를 타박하는 주제에, 좋을 땐 저렇게나 쿵짝이 맞는다. 어쩐지 얄미워 보이는 두 노인을 지그시 노려보던 루덱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애써 참으려 하고 있지만 미미하게 씰룩이는 입술을 보니 어지간히도 불만스러운 모양이었다.
“왕녀님이 돌아오시면 이를 겁니다.”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에 오스카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 기사가 되어 이렇게 소심해서야!”
“기사인 것과 소심한 것은 전혀 관련이 없는, 완전히 다른 문제입니다. 편협한 사고를 하고 계시군요.”
단호한 루덱의 대꾸에 안젤리나가 낮게 혀를 찼다.
“에잉, 왕녀님께 물들어서 귀여운 맛이 사라졌어.”
누구보다 카놀라에게 물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두 노인일 것이다. 루덱은 그 점을 지적해 주기 위해 입술을 뗐지만, 크게 울려 퍼지는 노크 소리에 입을 다물어야 했다.
“안에 계십니까?”
차분한 음성은 이 낯선 나라에서도 그나마 귀에 익은 것이었다. 루덱이 의아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문 앞에 곧은 자세로 서 있는 이는 티보치나였다.
루덱과 두 노인이 있는 이 방은 카놀라의 숙소였다. 하지만 카놀라가 대사냥을 간 뒤로 티보치나는 이곳에 먼저 찾아온 적이 없다. 루덱이 자료 문제로 몇 번 티보치나를 찾아간 적은 있지만, 그조차 그리 길게 만날 수 없었다. 디라즈며 후사며 제사장까지 자릴 비운 지금 티보치나는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누구보다 바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어쩐 일로 여기까지…… 일단 들어오십시오.”
방 내부를 슬쩍 둘러본 티보치나가 선뜻 안으로 들어섰다. 두 노인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책과 자료들을 서둘러 정리하곤 몸을 일으켰다. 비록 세 사람이 이 방의 주인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방문했으니 차라도 대접해야 맞지 않나 싶어서, 루덱이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티보치나는 길게 대화를 나눌 생각이 없다는 듯 꼿꼿하게 서 있었다. 그녀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이걸 확인받고 싶어서 왔습니다. 당신들이라면 알 것 같아서요.”
그녀가 내놓은 것은 봉투였다. 어정쩡하게 서서 눈치만 보던 사람 중 먼저 움직인 이는 오스카였다. 그는 티보치나가 내려놓은 봉투를 집어 들어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이건…….”
오스카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말을 잇지 못하고 봉투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그의 모습에 답답함을 참지 못한 안젤리나가 그의 손에서 봉투를 뺏어 들었다. 그러나 안젤리나 역시 봉투를 확인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심각하게 굳은 두 노인의 표정에 루덱이 궁금하다는 듯 다가갔다. 차마 봉투를 뺏지는 못하고 옆에서 곁눈질로 살피니, 봉투를 봉인한 인장이 얼핏 눈에 보였다. 루덱이 모호한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입니까?”
티보치나의 물음에 오스카가 안젤리나에게 봉투를 받아 들었다. 그가 봉투를 고쳐 쥔 덕분에, 루덱도 인장의 형태를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샤를만 왕실의 문장이었다.
“예, 진짜입니다. 샤를만 왕실에서 보내온 겁니다. 정확히는…….”
오스카의 눈길이 인장의 세부적인 형태에 머물렀다. 왕실 인장은 용도에 따라 그 형태가 약간씩 다르다. 그리고 오스카는 그 모든 인장의 형태를 알고 있었다.
“샤를만의 둘째 왕녀이신 글로리오사 님의 서신입니다. 이걸 어디서 받으신 겁니까?”
“정찰대가 가져왔습니다.”
“네?”
티보치나는 붉은 인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덤덤하게 눈을 들어 오스카를 보았다.
“정찰대는 지금 골짜기에서 여행단과 대치 중입니다. 그들이 트리폴에 입국을 요청하며 내민 것입니다.”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경악 어린 눈으로 서신을 내려다보았다. 마른침을 삼키며 한참이나 인장을 바라보던 오스카가 천천히 봉투를 뒤집었다. 인장에 정신이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카놀라의 이름이 하단에 적혀 있었다. 글로리오사가 카놀라에게 보낸 서신이라면, 세 사람이 먼저 뜯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진짜 샤를만 왕실에서 보낸 자들이라 해도 디라즈가 자릴 비우신 이상, 나라 안으로 들일 수는 없습니다.”
“정말 둘째 왕녀님이 보내셨다면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그들은 성미가 무척…… 급하니까요.”
루덱은 애써 말을 돌려 표현했다. 하지만 사실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 ‘고약하다’라거나 ‘더럽다’ 따위의 내용이었음은 티보치나에게도 충분히 전달되었을 것이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몇 번이나 봉투를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그러나 인장과 이름 외엔 달리 확인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기껏해야 종이의 재질 정도나 알아보았지만, 그것은 왕실에서 온 서신이라는 걸 확신하는 증거가 될 뿐이었다.
“그들의 성미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우린 어떠한 사전 연락도 받지 못했으니 그들의 요구에 응할 까닭도 없습니다.”
티보치나의 차가운 목소리에 루덱이 이마를 짚었다. 당연히 티보치나의 입장을 이해했다. 누가 보내서 온 것이든 샤를만의 이러한 행보는 무척 무례하다. 아무리 정략결혼이라는 형식적인 관계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이렇게 고지 없이 불쑥 찾아와도 된다는 초대장은 아니다. 하물며 첫째 왕자도 아니고 둘째 왕녀의 사람들이라고? 그들이라면 정말로 전쟁 선포를 하고도 남을 위인들이다. 하루라도 분쟁을 만들지 않고선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자들이니까!
초조하게 입술을 깨무는 루덱을 힐끗 본 안젤리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저희가 그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저희도 왕녀님이 자릴 비우신 지금 무방비하게 그들을 맞이하고 싶지 않습니다.”
루덱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봉투를 내려다보던 오스카도 고개를 끄덕이며 안젤리나의 말을 거들었다.
“왕녀님이 오실 동안 저희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갑자기 왜 찾아왔는지도 알아야 하고.”
“가능하겠습니까?”
“가능해야죠.”
그렇게 말하는 오스카의 표정은 무척 딱딱하고 차갑게 굳어 있었다. 어찌 보면 냉담한 트리폴인들을 대할 때보다 더 나빠 보여서, 티보치나는 저도 모르게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들의 방문이 반갑지 않은 모양입니다.”
“좋은 사이는 아닙니다. 특히 글로리오사 님과 카놀라 님은 사이가 나쁘거든요.”
마찬가지로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덱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맛을 다시며 말을 멈추었던 그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당연히 시중인들 간의 사이도 나쁩니다.”
*
당연히 무언가 보복을 할 줄 알았던 제사장은 의외로 조용했다.
의아하게 여기는 카놀라에게, 헴슨이 넌지시 ‘아무래도 디라즈와 충돌이 있으셨던 것 같다’라고 귀띔을 해 주었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또 그런 듯했다.
그래서 카놀라는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지 않기 위해 자신도 얌전하게 있기로 했다. 어차피 며칠만 더 있으면 에델과 따로 이동해야 한다. 그녀는 그때까지만 제사장의 눈에 거슬리지 않도록 조용히 지낼 작정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그것을 아주 잘 지키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스스로는 말이다.
“으악! 이건 좀 아니지 않습니까?”
“어머, 부러워하기에 그려 줬더니 왜 그리 질색하는 거야?”
“제가 언제 부러워했습니까?”
야영지가 아무리 넓고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카놀라를 못 찾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에델은 소리 난 방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카놀라의 눈앞에서 알짱거리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는 제 충동을 꾹 억눌렀다. 이미 며칠간 보인 모습들만으로도 평소와 크게 달라서, 한차례 그라그포드의 주의를 들은 뒤였다. 첫사랑에 첫 연애이니 그 심경이야 오죽 설레겠느냐만은, 감정에 휩쓸려 제 본분까지 망각하지는 말라는 으름장이었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어서, 에델은 조용히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고 막사로 돌아갔다. 역시 곰을 잡았다고 남은 사냥을 모두 빠지는 일은 과한 요구였구나. 에델은 울적한 마음을 제 화살과 검에 가득 담았고, 며칠간 유례없이 우수한 사냥 솜씨를 뽐내었다. 그 결과물이 대사냥 기간 동안 그가 잡았어야 했을 양과 비등할 정도라 마침내 에델은 정당한 하루의 휴식을 얻을 수 있었다.
어차피 내일이면 그는 카놀라와 함께 이탈하여 꼭대기로 향해야 한다. 오늘의 휴식은 그 예외적인 일정을 위한 그라그포드의 배려일 수도 있었다. 꼭대기에 올라갈 땐 그의 다섯 전사를 대동할 수 없으니까, 충분히 체력을 회복해야 했다.
“하하하! 후사! 후사!”
화살촉을 하나하나 닦고 있던 에델이 힐끗 시선을 들었다. 촐싹 맞은 목소리로 에델을 부르고 있는 이는 투갈이었다. 번쩍 치켜든 손에는 종이 한 장이 펄럭거리고 있었다. 듣지 않아도 그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아서, 에델은 잠시나마 들었던 눈을 다시 내렸다. 부지런히 무기를 준비해 둬야 내일 이른 새벽에 곧장 챙겨서 떠날 수 있었다.
“후사, 이것 좀 보십시오!”
화살촉을 가리며 불쑥 내밀어진 종이 위엔 빼곡하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누군가의 얼굴이나 전신이었다.
“……롬?”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아니, 후사! 이게 어떻게 접니까? 제가 이렇게 말라깽이입니까?”
곧장 뒤따라온 롬이 억울함을 가득 담아 항변했다. 그의 목소리가 얼마나 절절했는지, 에델은 자신의 성급한 대답에 약간의 미안함마저 느껴야 했다. 에델은 그의 항의를 수용해 다시 한번 찬찬히 그림을 확인했다. 그러곤 롬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림과 롬을 몇 번 번갈아 보던 에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 맞는데.”
에델의 대답은 흠잡을 곳 없이 단호했다. 롬이 입을 떡 벌리곤 에델을 보았다. 그의 눈에 배신감이 넘실거렸다.
“아, 후사! 후사까지 이러시깁니까?”
“하하하! 포기해라, 동생아!”
“동생은 니가 동생이고!”
“하하하! 내게 너 같은 말라깽이 형은 없다!”
두 사람은 에델 옆에 자릴 잡고 본격적으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림으로 시작된 논쟁은 이제 두 사람의 서열 싸움으로 번졌다. 평생 결판이 나지 않을 주제였다. 화살촉을 내려놓은 에델이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뱉었다. 에델의 근처에 있는 듯 없는 듯 대기하고 있던 아이누가 보다 못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누의 발길질을 받은 두 사람이 야영지 구석으로 사라지고서야 먹먹하던 귀가 좀 나아졌다. 에델이 놓았던 화살촉을 다시 집어 들려는 찰나, 그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바쁩니까, 후사?”
“……제사장님.”
요 며칠간 필요할 때 빼곤 좀처럼 막사 밖으로 나오지 않던 브리도였다. 어둡게 그늘진 브리도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에델이 쥐고 있던 도구를 모두 한쪽으로 밀어 두고 몸을 일으켰다. 당연히 어딘가로 이동해 따로 이야기라도 나누자는 의미인 줄 알았는데, 브리도는 일어선 에델을 보고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쩐지 조금 지친 것 같은 안색이었다.
“제사장님?”
“트리폴 소식 들었습니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역시 디라즈께선 아무 말씀도 안 하셨군요.”
브리도가 힐끗 시선을 돌렸다. 그녀가 시선을 둔 방향은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이었다. 아마도 이번엔 라다크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라다크와 실랑이를 벌이는 듯한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다. 이따금 피아와 헴슨이 끼어드는 목소리도 들렸다.
“눈앞의 일에 집중하라는 의미로 하지 않으셨겠지만, 이걸 후사가 모르고 있는 건 안 될 일이니 전하러 왔습니다. 저 이방인이 연인이라 말한 사람은 후사니, 직접 듣고 판단하세요.”
“그게 무슨.”
“이방인 왕녀의 모국에서 트리폴로 무장한 사람들을 보내왔답니다. 당장 들여보내 달라며 저 이방인의 이름을 들먹이고 있다더군요.”
제사장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냉담했다. 그 속에는 약간의 질책도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놀라운 게 뭔지 아십니까? 그 일행을 이끄는 책임자가 제 입으로 이리 주장하고 있다는 겁니다.”
제사장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자신이 왕녀의 연인이라고요.”
멀리서 카놀라의 시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에델은 그 웃음소리에 집중할 수 없었다. 할 말을 마친 브리도가 ‘지금이라도 제대로 된 생각을 해 보라’라고 툭 말을 던진 뒤 몸을 돌렸으나, 에델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왕녀의 연인? 샤를만에서 온 무장객들? 이게 다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라그포드는 트리폴에서 정기적으로 서신 보고를 받고 있다. 그는 한 번도 이에 대한 언질을 에델에게 해 주지 않았다. 에델은 지금 당장이라도 치미는 물음들을 그라그포드에게 쏟아 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라그포드는 그라사들을 이끌고 사냥을 하는 중이었다. 그가 돌아오는 건 늦은 밤이 돼서일 테고, 내일을 위해 곧장 취침할 것이다. 에델은 새벽 일찍 야영지를 나서야 하므로 이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다.
넋이 나간 듯 서 있던 에델이 돌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성큼성큼 걸어 카놀라의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곧 어깨를 늘어뜨린 라다크와 그 앞에 새침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카놀라를 발견했다. 싫다는 라다크의 손에 억지로 종이를 쥐여 주던 카놀라가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델을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에델!”
에델은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었다. 햇살을 받아 유독 더 밝게 보이는 웃음을 마주하자, 그녀에게 물으려던 말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호한 표정으로 멈춰 선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왜 그래요?”
카놀라가 에델의 코앞까지 왔음에도, 에델은 여전히 미묘한 눈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에델?”
“……내일, 준비는 끝나셨습니까?”
카놀라의 표정에서 미소가 흐려질 즈음, 에델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그로서는 유례없이 힘겨운 한마디였으나 다행히도 겉으로 표가 많이 나진 않았다. 평소에도 말문을 닫고 서 있는 일이 많던 그라, 카놀라도 고개를 갸우뚱하긴 했으나 순순히 그의 말에 넘어가 주었다.
“그럼요! 내 철저한 준비성을 보면 에델은 날 존경하게 될지도 몰라요! ……물론 거의 다 당신이 챙겨 준 거지만.”
“……그렇군요. 새벽에 일찍, 가야 하는데 쉬셔야지 않겠습니까?”
“아직 해가 저리 쨍쨍한걸요? 오히려 너무 오래 누워 있음 그게 더 힘들어요. 그보다 이것 좀 봐요. 완전 똑 닮았죠? 날 구해 준 건 당신이지만 다섯 전사도 열심히 싸워 줬으니까, 특별히 선물로 그림을 그려 주고 있었어요!”
카놀라가 신난 목소리로 몇 장의 종이를 펼쳐 보여 주었다. 꺄르르 웃으며 라다크의 얼굴 옆에 종이를 가져다 대는 그녀의 행동에, 라다크가 진저리를 치며 도망갔다. 그러나 울란이 그의 앞을 막아서는 덕분에 그는 멀리 갈 수도 없었다.
왁자지껄한 그들의 모습을 보던 에델은 애써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도통 그것을 유지할 수가 없어서, 결국 그는 무기 손질을 핑계로 재빨리 그곳을 벗어났다. 마른침을 삼켰으나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이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왕녀의 연인, 무장한 샤를만 사람들.
어쩌면 제사장이 과장된 말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라그포드가 여태 별말도 없이 대사냥을 진행한 걸 보면, 무장한 사람들이라는 게 그리 심각한 상황은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었다면 그라그포드가 나섰을 것이다. 그러니 당장 침략을 받거나 전쟁이 터질 상황은 아닌 게 틀림없다. 또한, 국경을 지키는 그라사들은 하나같이 용맹한 전사들이니 절대 패배하지도 않을 것이다.
에델이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사실 무장한 사람들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그들을 이끌고 있다는 책임자였다. 왕녀의 연인이라고 말한다는 그.
생각해 보면 연인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하다. 에델과 달리 그녀는 이성과의 관계가 무척 능숙해 보였고, 또한 익숙해 보였다. 게다가 그녀는 사내나 여인 할 것 없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사람이 아닌가. 어쩌면 그 책임자라는 이는 정말 연인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에델과 사귀기로 했다지만 그거야 이곳에 온 뒤의 일이 아닌가. 애초 에델과의 관계는 정략혼에서 시작했으니, 일방적으로 이곳에 와야 했던 카놀라가 과거의 누군가와 강제로 인연을 끊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문제는 에델이 한 번도 카놀라의 또 다른 연인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분명 가능한 일이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에델에겐 카놀라의 과거는 애초에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었다. 현재 그녀와 함께하고, 앞으로 그녀와 함께할 사람이 자신이라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알게 된 연인의 존재는 정말이지, 불쾌한 충격이었다.
그라그포드는 혼자 오해를 하느니 솔직하게 말해서 사전에 오해할 위험을 없애 버리라고 말했다. 그러니 지금 그가 생각하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을 얼른 카놀라에게 털어놓고 무슨 말이든 듣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체 뭐라고 이야기한단 말인가? 당신에게 두고 온 연인이 있느냐고? 그가 지금 무장한 사람들을 이끌고 트리폴에 찾아왔다더라고? 행여 카놀라가 그에게 마음이 남은 상태라면 어쩌지? 카놀라와 마주치기 전에 그들을 얼른 내쫓으라고 해 둬야 하나?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당장 내일 새벽부터 그는 카놀라와 단둘이 산꼭대기를 올라가야 했다.
단둘이. 이런 기분으로 단둘이?
“에델!”
머리를 싸매고 끙끙거리던 에델이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다가왔는지, 카놀라가 뒷짐을 서고 에델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눈을 도르르 굴리며 에델의 안색을 살피던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다.
“혹시 내가 에델만 안 그려 줘서 맘 상한 거면 그러지 마요. 절대 에델이 싫어서 안 그리고 있는 거 아니에요. 난 못 그리고 있는 거예요.”
얼떨떨한 표정의 에델과 눈이 마주치자 카놀라는 빙긋 웃었다. 똑바로 마주한 파란 눈동자엔 조금의 거짓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잘 그리고 싶은 욕심이 커서, 오히려 망칠까 봐 이젠 선뜻 펜을 못 잡겠거든요.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래요. 그러니까 화내지 마요. 네?”
에델은 입술을 뗐으나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몇 번이나 숨을 들이켜고서야 에델은 마음을 조금 진정시킬 수 있었다. 평소의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가 손을 들었다. 살짝 흘러내린 카놀라의 앞머리를 조심스럽게 쓸어 올려 준 에델이 엷게 웃었다.
“화 안 났습니다. 전 당신에게 화를 낼 수 없습니다.”
카놀라가 휘둥그레진 눈을 깜빡였다. 주근깨 박힌 볼이 또 빨간 딸기로 변해 가는 것을 보며, 에델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생각했다. 설사 진짜 카놀라의 연인이 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고.
그녀를 지키는 건 여전히 자신만의 일이라고.
겨울 정원의 하와르 합본
지은이|미나토
펴낸이|정 필
펴낸곳|(주)뿔미디어
출판등록|2002년 9월 11일 (제1081-1-132호)
주소|경기도 부천시 소향로 17, 303(두성프라자)
전화|032)651-6513 / 팩스 032)651-6094
E-mail|[email protected]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angs
비북스|http://b-books.co.kr
ISBN 979-11-6565-348-4(05810)
※이 책은 (주)뿔미디어를 통해 독점 계약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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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정원의 하와르 3
♥목차♥
9. 겨울 산맥 꼭대기
10. 마지막 시험
11. 차근차근
0. 우리의 봄
외전. 여전히, 봄
9. 겨울 산맥 꼭대기
새벽의 야영지는 조용했다.
에델은 몇 번이나 카놀라의 짐을 확인해 주고 자신의 무기를 점검한 뒤 몸을 일으켰다. 사전에 언질을 받은 다섯 전사가 그를 마중 나온 상태였다. 그들에게 가볍게 손짓한 에델이 조용히 심호흡하곤 걸음을 내디뎠다.
새벽 내에 날린 싸라기눈 때문인지 바닥엔 얇고 하얀 눈밭이 만들어져 있었다. 해가 뜨면 금방 녹을 테지만 그래도 미끄럼을 조심해야 했다. 에델은 앞서 걷는 카놀라에게 경고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바닥에 발로 희한한 모양을 찍어 대며 키득거리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는 금세 입을 다물었다.
익숙지 않을 새벽 기상에 행여 피곤해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카놀라는 그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쌩쌩했다. 조금은 들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간밤에 기분 좋은 꿈을 꾸셨습니까?”
넌지시 묻는 에델의 목소리에 카놀라가 퍼뜩 고개를 돌렸다.
“응? 아, 나 붕 떠 있는 거 티 나요?”
“네. 많이 납니다.”
에델이 덤덤하지만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말에 카놀라가 머쓱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붕 떠 있을 수밖에 없어요. 우리 이렇게 딱 단둘이만 있는 거 처음이잖아요. 진짜 둘만의 데이트라고요! 게다가 산꼭대기를 다녀오면 시험을 두 개 통과하게 되는 거고. 티보치나가 다음 시험은 쉽게 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이번 일만 잘 마무리되면 시험은 모두 통과한 거나 마찬가지예요!”
세 개의 시험 중 두 개를 통과하면 거의 끝난 거나 마찬가지다. 게다가 티보치나가 다음 시험은 쉽게 내 준다고 약속했으니까, 분명 이것보다는 훨씬 수월한 시험을 내 주겠지! 시험만 통과하면 결혼을 승낙받을 수 있는 데다 트리폴인들도 트집을 못 잡을 테니 이후로는 에델과의 행복한 신혼 생활만 남은 셈이었다. 저 어여쁜 사내를 곁에 두고 구경만 해야 하는 슬픈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단 말이다!
이번에야말로 허리끈을 풀어 줄 게 분명한 에델을 상상하자 절로 열이 올랐다. 양 뺨을 감싸며 꺅꺅거리는 카놀라를 묘한 눈으로 보던 에델이 차분하게 말했다.
“이곳에서 꼭대기까지는 멀지 않지만, 그래도 주의를 해야 합니다.”
그의 말대로 막판이니 더 주의해야 한다. 카놀라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래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당당하게 들이밀었다.
“그래서 내가 준비했죠. 짠! 티보치나가 준 향갑인데, 저번에 곰을 보니까 효과가 좋은 거 같더라고요. 그래서 약초를 왕창 넣었어요. 동물들이 우릴 피해 갈 거예요!”
마중 불을 피우는 시험에서 동물들의 무서움을 충분히 겪은 그녀는 가장 먼저 이 향갑 안의 약초부터 새롭게 채웠다. 혹시 잘못 넣을까 봐 피아와 헴슨에게 두 번이나 확인받은 참이다. 야영지에서 출발하는 순간부터 향갑을 열었으니 어지간한 동물들은 알아서 도망칠 테지!
칭찬을 기대하는 듯 눈을 빛내며 자신을 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에델이 엷게 웃었다. 그러나 그는 잊지 않고 재차 주의를 시켰다.
“이 위로부터는 동물보단 길을 조심해야 합니다. 미끄럽고 험한 암벽이 가득합니다.”
사냥 팀의 이동 경로를 따라 산맥을 꽤 올라왔다. 일정은 이미 반절 넘게 진행되었고, 아마 근방에 위협적인 동물들은 사냥당했을 것이다. 사냥 팀의 수확물들을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문제가 될 것이 있다면 산길 그 자체였다. 높아질수록 길이 험해질 테고, 숨쉬기도 버거워져 더욱 힘들 것이다.
“그러잖아도 디라즈께서 알려 주셨어요. 암벽 대신 드래곤의 성역을 지나면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대요. 에델은 들어 봤어요?”
“아득히 먼 용의 시대에 만들어졌으리라 추정하는 곳입니다. 물론 전 가 보진 않았으나…… 역대 디라즈의 말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오르는 것만으로도 힘든 위치에 그만한 공간이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인간의 작품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게다가 그 공간은 트리폴인들이 산맥에 정착하기 전부터 존재하고 있던 것이었다. 그라그포드는 에델이 성역에 도착하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바깥의 춥고 척박한 풍경과는 전혀 다른 세상처럼 느껴진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둘만의 데이트 장소로 드래곤의 성역이라니! 이보다 더 멋진 데이트를 해 본 연인은 없을 거예요.”
그라그포드의 말을 떠올리고 있던 에델이 문득 시선을 들었다. 별 뜻 없이 나왔을 카놀라의 말에 반사적으로 어제 들었던 소식이 떠올랐다. ‘연인’이라는 단어는 산 아래에 있다는 샤를만의 연인을 연상케 했다. 마음을 가라앉혔다고 그 생각까지 떨쳐 버린 건 아니다. 에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샤를만에는 이보다 훌륭한 장소가 많았을 것 같습니다.”
“네?”
“드래곤의 성역은…… 낭만적인 곳이 아니니까요.”
카놀라는 애써 좋게 포장하고 있지만, 결국 두 사람은 지금 부당하고 가혹한 시험을 통과하기 위해 산맥에 오르는 중이다. 운 나쁘면 목숨을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정략혼으로 엮이지 않았다면 임할 필요도 없는 시험이었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한다 한들, 이 상황이 실은 불필요한 것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카놀라가 샤를만에 계속 있었다면 적어도 이런 꼴은 면했을 텐데. 훨씬 풍요롭고 안락한 곳에서 다른 누군가와 즐겁게 지냈을 테지. 곰이나 늑대에게 공격당하지도 않고, 외국인이라고 텃세를 받지도 않고 말이다.
이곳까지 쫓아올 정도라면 카놀라의 연인이라는 그자와도 보통 사이가 아니었을 텐데, 드래곤의 성역보다 훨씬 멋진 곳들을 함께하지 않았을까?
에델은 깊이 숨을 들이켰다. 상상할수록 점점 더 울적해지는 기분을 떨쳐야 한다. 눈치 빠른 카놀라는 그의 이상한 상태를 금방 알아챌 터였다.
“장소는 중요하지 않아요. 누구와 함께하느냐가 중요한 거죠.”
샤를만의 연인에게도 그런 달콤한 말을 해 주셨습니까?
불현듯 떠오르는 물음을 참기 위해, 에델은 이를 꾹 물었다. 치졸하고 옹졸하다. 이게 대체 무슨 꼴이란 말인가! 자신의 좁은 속내에 어처구니가 없을 지경이었다. 과거가 다 무슨 소용인가.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마음을 다독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참으려 해도 불쑥불쑥 생각이 끼어들었다. 저 다정한 눈빛과 어투는 자신이 그녀의 연인이기 때문일 텐데. 그녀가 자신에게 반했기 때문일 텐데. 그렇다면 옛 연인에게도 똑같이 저리 해 주었겠지.
자신에게 해 주듯 다른 사내에게도 했을 카놀라가 너무나 쉽게 상상되었다. 어쩌면 과거의 연인에게는 지금보다 더 애절했을지 모른다. 에델과의 관계는 정략적으로 시작했지만, 적어도 과거의 연인과는 정략적이지 않았을 테니까.
“방심하다 얼어 죽을지도 모르는 장소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치미는 감정을 억누르는 건 어렵지 않다. 에델이 평생 해 온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부당하고 억울한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후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야말로 에델이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그러니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에델은 날뛰는 생각과 감정을 지근지근 밟았다. 없앨 수는 없어도 억누르는 건 자신 있었다.
장소를 핑계 삼아 제 울적함을 포장하니, 카놀라도 쉽게 수긍했다.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에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불쑥 손을 내밀었다. 이미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을 반복해 왔던 덕분에, 에델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스스럼없이 제 손을 잡는 에델의 행동에 카놀라가 설핏 웃었다.
“우릴 따뜻하게 하는 건 두꺼운 가죽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예요. 당신이 나에게 주는, 내가 당신에게 주는 체온이요. 당신과 함께 있는 한 난 절대 얼어 죽지 않을 거예요. 물론 당신도 그렇게 되게 두지 않을 거고요.”
두꺼운 장갑 때문에 손가락을 접는 게 무척 불편해 보였다. 하지만 카놀라는 꿋꿋이 에델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씩씩하게 발맞춰 걸었다.
한껏 힘을 주었을 텐데도 전혀 아프지 않은 카놀라의 악력을 가만히 느끼던 에델이 맞잡은 손을 고쳐 쥐었다. 그러곤 자신이 그 손을 꼭 잡았다. 카놀라의 힘보다 훨씬 강하고 단단했다.
“온기에 익숙해지면 추위를 더 잘 느끼게 됩니다.”
“응?”
씩씩하게 걷던 카놀라가 의아한 눈으로 옆을 보았다. 에델은 덤덤하게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눈만 살짝 굴려 카놀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니 이제 당신은 제 손을 놓으시면 안 됩니다.”
녹색 눈동자 안에 무언가 일렁이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카놀라가 그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놀라를 가만히 보던 에델이 덤덤하게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당신의 손이 얼마나 따뜻한지 알게 되었으니, 전 이제 추위를 견디지 못할 겁니다.”
“놓을 리가 없잖아요!”
에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놀라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나 추운 거 못 참거든요.”
에델의 입가에 미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며 부지런히 걸음을 재촉했다.
두 사람은 계속 손을 잡고 가고 싶었으나, 좁아지는 길목에 어쩔 수 없이 손을 놓아야 했다. 앞장선 에델이 긴 막대를 주워 들어 땅을 찔러 보며 걸었다. 카놀라의 향갑 덕분인지 야생 동물이 튀어나오는 일도 없었고, 길이 좁긴 하나 이동하는 데엔 무리가 없어서 순탄한 산행이 이어졌다. 기울기가 가팔라서 잦은 휴식이 필요했지만, 날이 밝고 해가 중천을 향해 오를 즈음엔 얼추 중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암벽 등반에 앞서 배까지 든든하게 채우고 난 카놀라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무거운 다리를 끌고 오는 데에 집중하느라 주변을 둘러보지 못했던 그녀는 이제야 풍경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흰 눈이 쌓인 앙상한 나무들이 아래로 빽빽하게 펼쳐진 광경은 장관이었다. 비탈길에서 발을 헛디뎌도 나무 덕분에 멀리까지 굴러떨어질 것 같진 않았다.
“이렇게 보니 산이 무척 크고 깊네요. 이런 건 처음 봐요!”
생전 이렇게나 높이 올라온 적이 없어서 더 신기했다.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면 얼마나 더 멋질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래로 보이는 나무숲은 그 속에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싶을 정도였다. 저곳을 뛰어다니며 사냥할 그라사들을 상상하니 신기하기도 하고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이곳에 서니 자신은 마치 이 산맥의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한 느낌이었다. 트리폴인들이 온갖 자연의 신들에게 기도하는 그 심정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이렇게 거대한 자연을 마주하고 살다 보면 없던 경외심도 쌓일 것이다.
“샤를만에선 산에 오르지 않습니까?”
“정확히는 오를 만한 산이 없다는 게 맞아요. 굳이 오를 까닭도 없고요. 기껏해야 언덕으로 소풍이나 가는 정도였을까?”
인공적으로 꾸민 사냥용 숲이나 산책용 언덕이 아니고서야 좀처럼 이런 장소를 찾기 힘들다. 도시와 도시 간에 아직 개발이 덜 된 곳이야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샤를만은 지형 자체가 평지에 가까웠다. 그나마도 길이 잘 닦여 있어서 어지간히 외지지 않고서야 오가는 데에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 편한 환경에 길들어 있으니 누가 이런 산골짜기를 일부러 찾겠는가?
“그렇군요.”
평소엔 샤를만에 대해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듯했는데, 오늘따라 안 하던 질문을 한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카놀라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샤를만이 궁금해요?”
“당신이 살았던 곳이니까요.”
그가 지극히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나 그 대답을 듣는 카놀라는 그것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끝이 조금 찡해졌다. 카놀라는 이러한 제 반응을 무시하기 위해 애써 입매를 끌어 올렸다.
말도 안 돼. 지금이 울 타이밍이야?
속으로 스스로를 매섭게 다그친 그녀가 짐짓 가벼운 어조로 되물었다.
“그리고 또 뭐가 궁금해요?”
“다 궁금합니다. 당신에 대한 것이라면 뭐든.”
카놀라를 따라 산 아래를 응시하고 있던 에델이 옆을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소처럼 무덤덤했지만, 전혀 차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감정이 넘쳐흘렀다. 다만 그 감정이 대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을 뿐.
카놀라는 멍청한 표정으로 에델을 바라보았다.
“너무 늦은 질문이라 죄송합니다.”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하던 카놀라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침 삼키다가 사레라도 든 사람처럼 무척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걱정스럽게 그녀를 부르려던 에델은 얼핏 보이는 그녀의 귓바퀴가 무척 빨간 것을 확인하곤 멈칫했다. 그러는 동안 카놀라는 찬 공기를 한껏 들이켜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치밀었던 울음을 겨우 가라앉힌 그녀가 목을 가다듬으며 말문을 열었다.
“샤를만은, 꽤 잘사는 나라예요. 대부분 먹을 것 걱정 없이, 불편한 것 없이 살아요. 궁에선 밤낮으로 연회가 열리고 백성들은 한가롭게 희극을 보러 다니죠. 왕가는 강인하고 군대 또한 막강해요.”
“행복한 곳이군요.”
“행복하지 않아요.”
그렇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무척 차가웠다.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냉소적인 어투라, 에델은 저도 모르게 카놀라의 안색을 살폈다. 카놀라의 표정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래서 나오는 말들이 더 냉담하게 들렸다.
“무료한 샤를만인들은 아름답고 빛나는 것에 열광해요. 자극적이고, 강렬해야만 하죠. 외모든, 체격이든, 하다못해 목소리라도. 무엇 하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독보적이지 않으면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에요. 왕족이고 귀족이고 평민이고 할 것 없이 싸움 구경을 즐기고 이간질을 일삼아요. 겉으론 누구보다 문명인인 척 굴지만 속은 하나같이 음흉한 작자들이에요.”
카놀라는 힐끗 시선을 내렸다. 제 발치를 가만히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내 동복형제의 외모는 아주 훌륭해요. 나와 같은 배에서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덕분에 내 주근깨와 여자치고 꽤 큰 덩치는 훌륭한 조롱거리였죠. 난 어릴 적부터 아름다운 게 옳다고 배웠어요. 훌륭한 외모와 체격을 찬양해야 한다고 배웠죠. 그 모든 것들은 눈을 즐겁게 해 주는 요소고, 눈이 즐거우면 마음도 즐거우니까 마땅히 아껴야 한다는 거예요.”
난 글렀구나. 태어날 때부터 낙오했구나. 빛나는 외모를 가진 형제들 속에서 그녀는 빠르게 자신의 위치를 파악했다. 평민으로 태어났다면, 하다못해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이 지경까진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왕녀였다. 이미 다양한 방면에서 탄탄대로를 걷는 형제들 속에서 태어난 막내 왕녀.
그녀는 라우렐처럼 아주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낼 만큼 똑똑하지 않았고, 글로리오사처럼 우수한 신체 능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동복형제인 마티올라와는 가장 많이 비교되었다. 마티올라는 잘난 외모만큼이나 그것을 이용할 줄 아는 교활함도 지닌 형제였다.
그렇다면 저 형제들이 가지지 못한 게 뭐지? 카놀라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고, 그것이 그녀의 웃음을 만들어 냈다. 왕족답지 않은 쾌활함과 시원한 성격은 그녀에게 새로운 방패가 되었다. 빛나지 않는 외모 덕분에 그녀의 긍정적이고 활발한 성격이 주목받았다.
이것이 제 능력이구나. 그것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조롱을 무시하고 오히려 시원스럽게 그것을 받아들이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더 열광했고, 넷째 왕녀는 순식간에 백성들의 환심을 샀다.
“그건 이상합니다.”
“하지만 샤를만에선 그게 옳아요. 에델은 상상할 수 없겠지만 거긴 그런 곳이에요.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가…… 처음 당신을 보고 홀딱 넘어간 것도 그래서일지도 몰라요.”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죄를 고백하듯 은밀하고 나지막했다. 에델은 그녀가 때때로 그의 외모를 두고 이야기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울란의 근육을 칭찬하거나, 흐미르의 비율이 좋다며 감탄하기도 했다고 들었었다. 에델은 그때마다 카놀라가 그저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칭찬을 건네는 성격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처음 이곳에 올 때 수행원이 이상할 정도로 적었던 건, 다들 트리폴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그들은 트리폴인들이 다 우락부락하고 털북숭이 거인인 줄 알거든요. 만약 당신이나 티보치나를 봤으면 전혀 태도가 달라졌을 텐데. 아니, 당신의 다섯 전사만 봤어도 마음을 고쳐먹었을걸요?”
객관적으로 보자면 트리폴인들은 대체로 군살 없이 보기 좋은 체구를 지녔다. 물론 골격 자체가 거대해서 덩치도 크게 보이지만, 보다 보면 샤를만인들이 환장할 외관들이었다.
아, 상상만으로도 지긋지긋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카놀라가 슬쩍 눈을 들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에델의 표정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그 올곧은 시선을 마주하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심장이 흐물흐물 녹는 기분이 들었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그래서 난 트리폴이 좋아요. 이곳 사람들의 서툴고 솔직한 모습들이 얼마나 나를 기쁘게 하는지 당신은 모를 거야.”
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그녀를 기쁘게 하는 건 단연 눈앞의 사내다. 이제 와선 에델의 외모가 가끔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건 당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득 에델이 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에델의 미간이 설핏 좁혀졌다.
“당신이 트리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전혀 모를 겁니다. 지금의 변화는 상상도 못 했던 일입니다. 당신이 와 준 건 트리폴의 기쁨입니다.”
에델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러다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또한, 제게도요.”
이러니 내가 이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카놀라는 헤실헤실 웃음을 흘렸다. 할 수만 있다면 대화할 때마다 서기를 곁에 두고 토씨 하나 놓치지 않고 적게 하고 싶다. 머릿속에 목소리를 통째로 저장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허공에 흩어지는 단어 하나마저 아쉬워 탄식이 났다. 카놀라는 이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두 팔을 벌렸다.
그러곤 에델을 와락, 끌어안아 버렸다.
두꺼운 옷 가죽 때문에 사람을 안고 있는 건지 거대한 인형을 안고 있는 건지 분간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이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한껏 힘을 줘서 에델의 경직된 몸을 실컷 끌어안고 있던 카놀라가 천천히 팔을 풀었다. 그러곤 후련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어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역시 얼른 꼭대기까지 가야겠다. 이거야 원 언제까지 앞에 두고 군침만 흘릴 수도 없고, 이대로 있다간 눈이 돌아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카놀라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에델의 팔이 쑥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끌어당겼다. 휘청거리는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휘둥그레 뜬 눈에 곱게 감은 흰 속눈썹이 보였다. 차갑고 습한 입술이 벌어지고 잇새로 뜨거운 혀가 밀려 들어왔다.
입 안을 휘젓는 감촉은 아주 찰나였다. 마치 달콤한 디저트를 한 입 베어 문 정도의 수준이다. 맞대었던 살결이 멀어지며, 입술은 금세 차가워졌다.
정말로 온기에 익숙해지면 추위를 더 잘 느끼게 되는구나. 아까 들었던 에델의 말이 절실히 이해되었다. 가까이 보이는 녹색 눈동자를 멍청하게 응시하며, 카놀라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입술 진짜 따뜻하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덕분에 엄청 추워졌는데.”
에델은 말을 멈추고 카놀라를 물끄러미 마주했다. 여전히 얼빠진 표정을 한 카놀라가 혼잣말을 하듯 툭 말했다.
“나 입술 얼어붙으면 어떡하죠?”
녹색 눈동자가 엷은 웃음기를 머금었다. 허리춤에 느슨하게 걸쳐졌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카놀라는 두 팔을 들어 에델의 어깨에 걸치듯 올렸다. 살짝 기대듯 기우는 몸을 따라 멀어졌던 입술이 다시 가까워졌다.
예민하게 달아오른 아랫입술에 속삭임 섞인 숨결이 닿았다.
“……다시 녹이면 되죠.”
*
“꽉 막힌 건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군.”
힐난하는 목소리가 막사 안을 찌렁찌렁 울렸다.
“대체 언제까지 날 여기에 묶어 둘 작정인가! 이런다고 너희들의 야만적인 행태가 숨겨질 것 같아?”
급기야는 삿대질까지 했다.
“당장 왕녀님을 뵙고 싶단 말이다!”
이대로 함께 있다간 귀가 먹을지도 모른다. 때마침 교대 시간이 되어서, 루덱은 재빨리 병사에게 자리를 맡기고 막사를 나섰다. 뒤에서 헤세온이 뭐라고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절대 돌아보지 않았다. 트리폴인들에게 조금 먼 곳에서 지켜봐 달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들이 이런 난동을 보았으면 루덱은 앞으로 얼굴도 못 들고 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막사 바깥으로 나와도 상황은 똑같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오스카의 앞에 누군가가 씨근덕거리며 항의를 하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3일이면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연장되었습니다.”
뒷짐을 지고 꼿꼿하게 선 오스카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그의 앞에 선 화려한 차림을 한 이는 루덱도 아는 사람이었다. 샤를만의 귀족이자 글로리오사를 따르는 인물 중 하나였다.
“정말 왕녀님께 소식이 전달된 것이 맞긴 합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본인께선 나타나지 않으시고……!”
그 항의에 대답한 사람은 오스카의 뒤에서 불쑥 모습을 드러낸 안젤리나였다.
“왕녀님이 이곳을? 하!”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던 그녀가 차가운 시선으로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이제 한 나라의 군주비가 되실 분입니다. 침략자들을 맞이하러 오시기엔 무척 바쁘신 분이랍니다.”
“침략자라니!”
“미리 언질도 없이 이렇게 찾아와선 환대를 받으리라 믿으셨습니까? 못 뵌 사이에 더 무도해지셨네요, 켈튼 백. 게다가 베르긴 공자까지 동행하다니. 카놀라 님의 모국이 무례한 나라라는 걸 천하에 알릴 작정이셨다면 성공하셨습니다. 부끄러운 줄 아십시오.”
켈튼 백작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안젤리나는 그런 그를 향해 아낌없는 조소를 지어 주었다. 그녀는 말을 잇지 못하는 켈튼 백작을 두고 오스카에게 눈짓했다. 오늘 치 난동은 대충 정리가 되었으니 물러나자는 의미였다. 요 며칠 동안 그들은 이런 식으로 일행들의 발을 묶어 놓고 지켜보는 중이었다. 일단 카놀라가 돌아올 때까진 카놀라의 근황 자체를 이들이 알 수 없게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쉽게 보내 줄 생각이 없었는지, 켈튼 백작의 뒤에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작 부인께서는 못 뵌 사이에 아주 남루해지셨군요. 이곳의 대접이 여의치 않으신 모양입니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내내 막사 안에서 머무르느라 얼굴을 비치지 않았던 여인이었다. 글로리오사와 라우렐의 사이를 애매하게 넘나드는, 그리 좋은 입지를 가지지 못한 여자. 제 딴에는 처신을 잘한다고 자부하는 것 같지만 라우렐이나 글로리오사나 귀찮아서 저 여인을 두고 있을 뿐이다.
안젤리나는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보았다. 안젤리나와는 족히 스무 살 정도 차이 날 테니, 날뛰어 봤자 가소롭게만 보였다. 왕실에서 보낸 경력만 따져도 안젤리나의 경력이 저치의 나이를 넘어설 것이다.
“아, 돌로레스 자작 부인. 예까지 오시다니, 돌로레스 가문의 빚이 아직도 남은 모양입니다?”
돌로레스 부인이 눈썹을 위로 치켜세웠다. 얼굴에 살이 없어서 선이 날카로웠는데 표정까지 사납게 지으니 그 인상이 더욱 나쁘게 보였다.
“야만인들과 어울리시더니 언사가 더욱 거칠어지셨네요.”
“대접할 만한 이와 자격이 안 되는 이를 거를 줄 아는 게죠. 부인께선 그런 차림으로 용케 버티고 계시는군요. 기후에 맞는 차림을 갖추는 것이 바로 지혜랍니다. 부인께서는 잘 모르시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도 산맥의 찬 바람이 옷감 구석구석으로 파고드는 중이었다. 이곳의 기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온 탓에 돌로레스 부인의 옷은 죄다 얇고 나풀거렸다. 몸이 떨리는 건 애써 참고 있지만 새파랗게 질린 입술은 감추지 못한 돌로레스 부인이 이를 악물었다. 억하심정을 빼고 솔직히 말하자면 안젤리나의 저 투박한 외투와 바지 차림이 훨씬 따뜻해 보였다. 그러나 그것을 순순히 인정하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 찬 바람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나이가 든 까닭이시겠죠.”
안젤리나는 요즘 나이에 예민해진 상태였다. 무서운 줄 모르고 위험한 화제를 선택한 돌로레스 부인의 모습에 오스카가 짧게 혀를 찼다. 저 패기는 인정해 줄 만하다. 하지만 이런 곳으로 왔다고 안젤리나의 냉소적인 입담이 죽었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건 잘못된 판단이었다. 안젤리나는 평소에도 얄밉지만 저런 소릴 들으면 더 투지에 불타는 여자였다.
“사람이 지혜롭지 못하면 명의 절반도 보존하지 못하는 법이거늘. 부인께선 일찌감치 포기하신 듯하니 그도 나름의 방편이시겠지요.”
“내 명줄이 짧을 거라 말씀하시는 겁니까?”
“흉하게 살아남는 것보다야 낫겠노라 말하는 겁니다만, 그리 해석할 수도 있겠네요.”
“부인!”
“내기나 할까요? 누구 명줄이 더 길지?”
“이만 돌아가시죠. 왕녀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보다 못한 루덱이 넌지시 끼어들고 나서야 안젤리나와 돌로레스 부인의 신경전은 마무리되었다. 흥미진진하게 두 여성을 구경하고 있던 오스카가 아쉽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말리지는 못할망정 아쉬워하고 있는 그의 모습에 루덱이 배신감을 느낀 듯 울컥했으나, 그는 빠르게 제 감정을 수습했다. 그러곤 알게 모르게 이곳을 주시하고 있을 트리폴인들에게로 걸음을 재촉했다.
군주나 후사가 없는 트리폴에 이방인을 들이는 건 말이 안 된다. 트리폴인들의 정색이 아니어도 루덱은 충분히 이해했다. 예의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샤를만 여행단의 작태에 그는 매일매일 창피함의 최대치를 갱신하고 있었다. 이렇게 비교하고 보니 오히려 무례하게 느껴졌던 트리폴인들이 더 점잖아 보일 지경이었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던가?”
샤를만 여행단의 야영지와 거리가 조금 떨어지고서야 오스카가 넌지시 루덱에게 물었다. 루덱이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전히 헛소리만 합니다.”
“핍박받고 있는 왕녀님을 구하러 왔다는 그 헛소리 말인가?”
안젤리나가 헛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첫날, 트리폴 정찰대와 대치한 헤세온은 아주 호기롭게 저런 말을 외쳤다고 했다. 첫째 왕자의 지참금 액수가 애초 약조한 합의와 맞지 않으므로 이 정략결혼은 무효라고 주장했단다. 왕녀의 정당한 배우자이자 연인은 자신이라는 막말까지 이어졌다는 소릴 듣고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혼비백산하여 여행단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다행히 정찰대들은 섣부르게 움직이지 않았고, 선뜻 오스카와 안젤리나에게 여행단을 넘겼다. 어쩌면 티보치나의 명이 따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저 원수 같은 여행단 때문에 세 사람은 며칠째 국경 지대에서 먹고 자는 중이었다. 정찰대가 사냥 팀으로 소식을 보냈지만, 대치 상태를 유지하라는 명만 돌아왔다. 카놀라의 반응은 알 수도 없었다. 어쩌면 전달 자체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 뭐가 되었든 그들이 저 눈치 없는 샤를만 여행단을 막아야 한다는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저 인간 정신병자인 거 진즉 알아봤어. 내가 뭐랬어! 정신병자랬지?”
안젤리나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오스카에게 버럭 말을 했다. 그녀의 짜증에 오스카가 억울하다는 듯 혀를 차며 대꾸했다.
“그걸 왜 나한테 따져? 왕녀님께 따져야지.”
“그러게 영감이 애초에 왕녀님을 말렸어야지! 그 인간, 가죽만 멀쩡한 줄 알아봤었다며!”
그야 그렇긴 했다. 처음 카놀라가 헤세온에게 반했던 그 순간에 함께 있었던 오스카는 그가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귀족의 태라곤 배운 적 없다는 듯 삐딱한 자세부터 정돈되지 않은 머리칼까지 뭐 하나 눈에 안 거슬리는 게 없었다. 얼굴이야 번지르르했지만 정말 그것뿐이었다. 아니, 솔직히 몸매도 번지르르 하긴 했다. 덕분에 무슨 옷을 입혀놔도 그럴듯해 보이긴 했지.
입맛을 다시며 당시를 회상하던 오스카가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왕녀님이 한번 반하시면 어디 주변 말 듣는 분이시던가?”
“그러니까 저자가 왕녀님의 연인이었던 건 맞는군요?”
“그렇긴 하지만…… 에구머니나!”
안젤리나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의 요란한 대화는 사방으로 퍼진 뒤였다. 무표정하게 서서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번갈아 보던 티보치나가 힐끗, 멀리 보이는 샤를만 여행단의 야영지를 응시했다. 티보치나의 시선이 어찌나 차가운지, 당장이라도 전사들을 보내 야영지를 쓸어버리라고 명령할 것만 같았다.
헛기침하던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재빨리 눈을 굴렸다. 이미 티보치나를 발견하곤 멀찌감치 피신해 버린 루덱이 저만치에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두 시중인들의 서슬 퍼런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루덱은 연신 먼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분명 신호를 줬다. 오스카의 팔을 쿡쿡 찌르고, 기침하며 신호를 줬으나 알아듣지 못한 건 오스카와 안젤리나였다.
“맞긴 하지만…… 왕녀님이 아주 매몰차게 차 버리셨답니다.”
“그럼요! 애초 길게 만난 적도 없습니다!”
두 시중인들의 말을 들으며 티보치나는 야영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몇몇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가끔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오스카와 안젤리나 등 카놀라의 시중인들이 뭐라고 말을 해 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더는 이쪽으로 오지 않았다. 물론 그 행동이 긴장을 풀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왕녀의 연인이라고 주장한 사내가 나타나고는 더욱.
그중 단연 신경이 날카로워진 사람은 티보치나였다.
“알아서 잘 이야기했겠지만, 다시 한번 주의를 드리겠습니다. 저자가 허가받지 않은 상태에서 트리폴로 한 발자국이라도 들어오면.”
티보치나가 침착한 얼굴로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돌아보았다.
“발목을 잘라 버릴 겁니다.”
이렇게 차분한 목소리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슬금슬금 다가왔다가 덜컥 티보치나의 말을 들어 버린 루덱이 반사적으로 기침을 해 댔다. 하필 침을 삼키는 타이밍에 들어서 사레가 걸리고 말았다. 목이 아플 만큼 격렬하게 기침을 하고서야 겨우 진정한 루덱이 쉰 목소리로 티보치나를 달랬다.
“아예 병사들을 상주시켜서 감시하는 중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헤세온의 막사에 상주하는 병사들은 감시보다 목숨을 지키기 위해 머무른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지금의 티보치나는 그를 없애 버리라고 밤중에 암살자를 보낼 기세였으니까. 루덱의 말에 티보치나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버티면 디라즈께서 돌아오십니다. 모든 것은 디라즈와 제사장님이 돌아오신 후 결정하겠습니다. 그 전에 저들이 무언가 행동한다면 그건 저희를 향한 위협으로 간주할 것입니다. 타당한 결론이니 서운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물론이죠.”
“그리고 자꾸 왕녀님에 대해 언급하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던데.”
헤세온 이 멍청한 자식! 루덱은 치미는 욕설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무리 거리를 둬도 크게 외치면 몇몇 말들은 들리기 마련이다. 헤세온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카놀라의 이름을 불러 댔다. 루덱이 한번 으름장을 놓은 뒤로는 자중하는 것 같았는데, 이미 티보치나에겐 보고가 들어갔던 모양이다.
루덱이 어색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했다. 그런 그를 가만히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빙긋 웃음 지었다.
“계속 이렇게 ‘우리’ 카놀라 님을 모욕하면, 다신 말을 못 하게 만들어 버린다고 전해 주시겠습니까?”
아, 그럼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무조건 전하겠습니다.
루덱은 애써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카놀라는 언제 돌아오는 건가. 이때처럼 그녀가 그리웠던 적이 없었다. 정말이지 울고 싶은 마음만 치밀었다.
제발 빨리 돌아오세요, 왕녀님!
*
‘누구보다 절제력이 뛰어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이누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했던 말을 이런 식으로 깨닫고 싶진 않았다.
제 앞에 보이는 듬직한 등을 보며, 카놀라는 치미는 한숨을 겨우 참았다. 시원스러운 풍경을 바라보며 달콤한 키스를 한 것까지는 참 좋았다. 여태까지 받았던 모든 설움에 대한 보상을 받은 듯했다.
샤를만에선 내키는 대로 했던 스킨십이라, 이 분야에서는 누구보다 능수능란하다고 자부했는데 에델과의 키스는 전혀 느낌이 달랐다. 첫 키스를 했을 때도 이렇게나 설레진 않았던 것 같다.
먼저 키스를 시도한 주제에 막상 입술을 맞대고서는 한껏 조심스러워지는 그의 태도 또한 애타는 원인이었다. 이곳이 산중 눈밭이 아니었다면 당장 쓰러뜨렸을 정도로!
“힘드십니까? 천천히 갈까요?”
문제는 그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카놀라와 달리, 에델은 너무나 빠르게 이성을 되찾았다는 점이었다. 카놀라는 아직도 에델의 얼굴만 보면 속에서 뭔가 부글부글 끓고 입 안이 바짝 말랐는데, 에델은 너무나 평온했다.
그렇게 달콤한 키스를 했는데 어떻게 저렇게 순식간에 침착해질 수 있단 말인가!
어쩐지 억울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칭얼거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든 지금 산꼭대기를 올라가는 게 가장 중요한 건 사실이니까. 카놀라는 점점 더 가빠 오는 숨을 고르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아뇨, 괜찮아요. 아까 충분히 쉬었잖아요. 점심 먹고 나서.”
일부러 점심 먹고 나서를 강조했건만 에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카놀라의 말을 키스와 연관 짓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정말 처음 연애하는 거 맞아? 실은 엄청 노련한 거 아냐? 왜 나만 이렇게 안달 난 거야?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물음표에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는 맛이 무섭다고, 키스를 한 번 해 보니 잘 참고 있던 욕망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참지?
“조금만 더 가면 드래곤의 성역입니다. 힘내십시오.”
제 앞으로 내밀어진 에델의 손을 잡으며, 카놀라는 마음을 다잡았다. 그래, 이 정도까지 진도가 나간 게 어디야. 첫날밤이 되도록 손만 잡아 볼 줄 알았는데 키스까지 하다니. 적어도 에델이 자신에게 욕망을 느끼긴 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건 아주 중요했다. 스킨십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을 상대로 혼자 애타는 것만큼 우스운 꼴이 또 어디 있겠나. 자신이 변태가 되느냐 마느냐의 기로이기도 했다.
“근데 정말 이런 곳에 산양이 산단 말이에요?”
에델에게 의지해 열심히 걸음을 내딛던 카놀라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아찔하게 펼쳐진 가파른 암벽과 까마득히 멀게 보이는 숲이 발아래에 펼쳐져 있었다. 완만한 암벽을 따라 오르고는 있지만 점점 경사가 더 심해지는 중이고, 발을 디딜 곳을 찾기도 어려워지고 있다. 에델이 없었다면 카놀라는 진즉 저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떨어지고도 남았을 길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있는 것이라곤 앙상하고 낮은 나무 몇 그루와 바위뿐이다. 도통 무언가 살고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닌 것처럼 보였다.
“꼭대기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먹을 게 없는데?”
“……위에 있지 않을까요?”
이번만큼은 에델도 명확한 답을 해 줄 수 없었다. 그도 들은 정보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산꼭대기에 관한 내용은 거의 전해져 오는 게 없다. 다만 역대 디라즈들이 산꼭대기에서 황금 가죽을 가져왔었으니 당연히 산양이 살겠거니 했을 뿐.
생각해 보니 조금 의아하긴 했다. 산양의 주식은 초목인데 지금 이 지점에서 보이는 건 바위와 마른나무 몇 그루뿐이다. 산꼭대기에 갑자기 없던 숲이 나타나진 않을 텐데, 진짜로 뭘 먹고 사는 거지?
그런 의문을 가지는 동안에도 두 사람은 착실히 위로 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곧 걸음을 멈춰야 했다. 카놀라가 두통을 호소했기 때문이다. 에델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빠르게 대처했는데, 그나마 평평해 보이는 바위를 찾아 그녀를 앉히곤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현기증과 호흡 곤란으로 끙끙거리는 카놀라가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반사적으로 받아 들었다. 그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린잎이었다.
“하와르입니다. 높은 지대로 올라갈수록 숨이 가빠지고 두통이 생길 수 있는데, 그럴 때 씹으면 낫습니다.”
견딜 수 없는 통증에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카놀라가 냉큼 그것을 입에 넣었다. 적나라한 풀 맛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그녀는 열심히 잎을 씹었다. 신기하게도 금방 머릿속이 맑아지는 게 느껴졌다. 가쁘던 호흡도 점차 안정적으로 돌아왔다.
삼킨 것도 아니고 그냥 씹고 있을 뿐인데 이렇게 엄청난 효능을 발휘하다니! 카놀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효과 장난 아니네요!”
샤를만에서도 이렇게까지 즉각적으로 효과가 생기는 약은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카놀라의 감탄에 에델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와르는 무엇하나 버릴 부분이 없는 약초입니다. 어지간한 병도 나을 수 있을 정도로요. 다만 발견하기 어려울 뿐이죠.”
열심히 턱을 움직이던 카놀라가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그럼 엄청 귀한 거 아니에요? 나한테 이렇게 막 주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건 당신에게 주기 위해 가져온 겁니다. 그게 없이는 올라가다 말고 쓰러지실 겁니다.”
“당신 몫은요?”
“전 이 정도의 높이에는 단련되어 있습니다.”
하기야 한평생 산을 오르내리며 살아왔을 테니 신체도 그것에 맞게 적응했겠지. 카놀라야 이렇게 높은 곳까지 올라오는 게 처음이라지만 에델은 그녀와 같은 증상을 보일 리 없다. 그러나 에델의 말에도 카놀라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몇 번 더 입 안에 있는 하와르를 씹어 보던 그녀가 혀로 가만히 그것의 양을 가늠했다.
“그래도 나 지금 너무 많이 먹은 거 같은데…….”
정확히는 아직 목구멍으로 넘기지 않았다. 본래 씹다가 뱉어 낼 생각이었는데 그렇게나 좋은 거라고 하니 뱉어도 될지 의문이었다. 먹으면 더 좋은 거 아니야? 영구적으로 체력이 늘어난다든가?
진지하게 이걸 삼켜야 하나 고민하는 카놀라에게 에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비교적 최근에 작은 군락을 발견했었습니다.”
“혹시 예전에 전염병 치료제를 찾았다는 게 이거였어요?”
“들으셨습니까?”
“전에 시고모님 뵈러 갔을 때요.”
얼핏 비디움과 흐반이 나누던 이야기들이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정확한 대화는 기억나지 않지만 두 사람이 전염병과 치료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건 확실했다. 후사가 치료제를 찾았다고 말했던 비디움의 목소리가 무척 뿌듯해서 인상 깊게 들었던 까닭이었다.
“신이 도우신 덕분입니다.”
“근데 발견하기 어려운 거면 저장을 잘해 둬야 하잖아요? 이렇게 과소비하다가 또 필요해지면 어떡해요!”
“필요한 것 이상을 바라는 건 욕심입니다.”
차분한 목소리에 카놀라는 조금 민망해졌다. 도통 여기 사람들은 재산이라는 것에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어쩜 이렇게 필요한 만큼만 수확한다는 말을 철저하게 지키는지 원! 물론 그것이 나쁜 건 아니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어찌 될지 모르는 거 아닌가! 게다가 이렇게나 가치 있는 식물이라면 더 챙겨 두어서 나쁠 일이 뭐 있담? 불퉁한 마음에 입술을 삐죽이는 카놀라의 귓가로 에델의 설명이 이어졌다.
“실은 그게 신전의 공식 입장이지만, 디라즈는 이걸 재배하려 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빌리자면 이 약초는…… 상품 가치가 있으니까요.”
그것은 꽤 의외의 말이었다. 카놀라가 동그래진 눈으로 에델의 옆모습을 보았다.
“디라즈께선 알면 알수록 엄청…… 열린 사고를 하시네요.”
이방인이라면 치를 떠는 나라의 군주임에도 이방인을 부인으로 맞이하려 들고, 며느리도 이방인으로 들이려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놀랍다. 그런데 이 폐쇄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교역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확실히 디라즈의 말대로 하와르는 상품 가치가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높았다. 정말로 이 약초가 전염병을 치료할 정도라면 말이다. 적어도 치료제의 원료만 되어도 족하다. 구성원들 모두를 먹여 살리느라 애쓰던 그간의 고생이 이 약초 하나로 해결될 수도 있다.
물론 눈치를 보니 재배는 실패한 것 같지만 말이다. 카놀라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을 때까지 하와르를 열심히 씹었다. 야생의 하와르는 발견하기 어렵다고 했지. 그렇다면 일단 이것에 대해선 함구하는 게 낫다. 괜히 알려져 봤자 주변국에서 얼씨구나 하고 온 산맥을 들쑤셔 놓기만 할 테지. 거기까지 생각하던 카놀라는 문득 제사장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에데사의 침략 전쟁은 한참이나 오래된 과거고, 이제 와선 그들이 이곳을 침략할 이유가 없어요.’
‘어째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쩌면 에데사에서 이미 하와르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트리폴에서 하와르를 독점하고 있는지, 혹은 재배하고 있는지 무엇 하나 알지 못하니까 차마 대놓고 싸우진 못하고 정찰만 해 대면서…….
“아, 도착한 것 같습니다.”
생각에 잠겨 에델이 이끄는 대로 걷던 카놀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가 상상한 성역은 뭔가 엄청난 신전이라도 서 있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막상 눈앞에 펼쳐진 것은 돌뿐이었다. 그냥 여태껏 올라온 암벽과 똑같이 생긴, 아니 조금 더 가파르고 발 디딜 곳이 없어 보이는 바위.
멀뚱멀뚱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카놀라를 두고, 에델이 먼저 바위 옆 틈새를 더듬었다. 뭔가를 찾는 듯 한참이나 주변을 살피던 그가 마침내 어느 한 곳의 바위틈에 섰다. 그러곤 틈을 가리고 있던 작은 바위를 힘껏 밀어 냈다. 약간의 돌가루가 부스스 떨어지고, 한 사람 정도가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입구가 생겨났다.
에델이 먼저 그 틈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아주 깜깜해서 입구 쪽에 선 에델의 옆모습만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미심쩍은 눈으로 입구 앞에 선 카놀라가 천천히 주변을 훑어보았다. 이 이상은 암벽을 타고 올라가기 어려워 보였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이 없는 건 알겠지만, 아무리 봐도 길이라기보단 그냥 비나 좀 피할 공간 정도로 보였다.
“……갑자기 바위가 무너지진 않겠죠?”
“절 믿고 들어오십시오.”
그렇게까지 말하니 안 들어갈 수도 없어서, 결국 카놀라는 에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바위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몇 겹으로 껴입은 덕에 통통하게 나온 배가 바위틈에 걸릴 뻔했으나 그녀는 필사적으로 숨을 참아 냈다. 에델도 순탄히 들어간 틈을 배가 끼어서 못 들어간다니, 그런 굴욕적인 광경을 연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곧 밝아질 테니 조금만 참으십시오. 절대 손 놓지 마시고요.”
놓으려야 놓을 수도 없었다. 워낙 어두워서 에델의 손을 잡지 않고선 한 걸음을 떼기도 힘들었으니까. 카놀라는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에델 몰래 씹던 하와르를 한쪽에 뱉었다. 아무리 좋은 것이래도 차마 삼키진 못하겠다.
“얼마나 가야 해요?”
“예상하기론 길지 않습니다.”
그렇다곤 해도 앞쪽에 빛이 보일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카놀라는 얌전히 에델의 손을 잡고 걸음을 옮겼다. 간간이 돌에 채여서 살짝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귀신같이 알아챈 에델이 그녀의 몸을 잡아준 덕분에 곧잘 나아갈 수 있었다. 그러는 동안 눈도 어둠에 익숙해져서, 어렴풋이나마 서로의 형체를 알아보게 되었다.
앞서 걷는 에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카놀라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쩜 저렇게 형태마저도 잘생겼지? 게다가 이름마저 에델이다. 에델! 이젠 에델이 아닌 에델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있잖아요, 에델. 왜 다들 에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아요?”
조용한 동굴에 카놀라의 목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카놀라는 자신의 손을 잡은 에델의 손에 살짝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녀는 모른 척 에델의 대답을 기다렸다. 에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기에 카놀라의 물음 직후엔 두 사람의 발소리만 한참이나 울려 퍼졌다. 그렇게 내내 대답하지 않을 것 같던 에델이 문득 입술을 뗐다.
“제 이름은 이방인의 흔적입니다.”
에델은 걸음을 늦추지 않은 상태에서 말을 이었다.
“어머님이 지으셨거든요.”
“그렇다면 군주비께 감사드려야겠네요!”
거침없던 에델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손을 잡고 있으니 카놀라가 뒤에 있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렴풋이 보이는 그 형태만으로 그녀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만 당신 이름을 실컷 부를 수 있게 됐잖아. 앞으로도 나만 부를 거예요. 이건 디라즈께도 양보할 수 없어요!”
카놀라의 눈에도 에델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 역시 목소리만 듣고도 그의 얼굴을 그릴 수 있었다. 확실히 단언할 수 있다. 카놀라는 보이지도 않을 미소를 해맑게 머금었다.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제 앞에 선 에델도 틀림없이, 엷은 미소를 짓고 있을 테니까.
상상만으로도 흐뭇한 마음이 들어서 괜히 헤실거리고 있는데, 에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러니 당신도 누구에게든 허락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눈치 빠른 카놀라라고 해도 지금의 이 말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뭘요?”
설마 이름을 허락하지 말라는 건 아니겠지? 이미 제 이름은 사방팔방에서 불리고 있는데.
카놀라가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에델은 더 이상의 설명을 하지 않고, 멈추었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뒤따라가던 카놀라가 몇 번 그를 부르며 대답을 재촉했으나 에델은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앞뒤 대화를 되뇌고 있는데 전방에서 희미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카놀라는 궁금하던 것도 잊고 화색이 되어 탄성을 내뱉었다. 에델도 빛을 보곤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이윽고 두 사람은, 들어온 곳과 비슷한 너비의 구멍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역시나 이번에도 먼저 들어간 사람은 에델이었다. 그는 내부가 안전한지 둘러보고 난 뒤 카놀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놀라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배에 힘을 잔뜩 주었다. 흡, 하는 소리와 함께 최대한 뱃가죽을 당긴 그녀가 구멍으로 살살 비집고 들어갔다. 하마터면 배꼽 부근에서 살짝 걸릴 뻔했지만, 카놀라는 힘으로 그것을 꾸역꾸역 밀어 냈다. 절로 숨이 턱턱 막혔다. 가슴이 아니라 배꼽에서 걸렸다는 사실에 조금 자존심이 상했으나, 다행히 에델은 카놀라의 손을 잡은 상태에서 주변을 둘러보느라 그것까진 보지 못한 상태였다.
“어우! 입구 좀 크게 만들어 놓지!”
다리까지 완전히 들어오고서야 카놀라는 혀끝에서 맴돌던 불만을 토로했다. 딱히 큰 소리로 툴툴거리진 않았는데 목소리가 꽤나 크게 주변을 울렸다. 제 목소리에 지레 놀란 카놀라가 그제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머, 세상에.”
드래곤의 성역이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만 해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드래곤이라는 생물체 자체를 허황한 것으로 치부하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기엔 믿을 수 없는 장소라는 말도 솔직히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인간이 못 만들 만한 곳이면 뭐, 풍파에 바위가 깎이기라도 했나 보지. 다소 태평한 생각을 품고 있었던 카놀라는 자신의 무신경함을 반성했다.
일단 이곳은, 정말 넓었다. 단순히 물방울이 오래 떨어져서 만들어 내는 동굴과는 차원이 다른 넓이였다. 게다가 벽면을 따라 위로 길게 이어진 나선형 계단은 마모되고 여기저기 부서지긴 했지만, 분명 누군가 인공적으로 만든 게 틀림없어 보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의미를 알 수 없는 아주 넓은 공간과 벽면의 나선형 계단. 조금 특이한 게 있다면 이 공간의 중앙에 매끈한 반구가 박혀 있다는 점이었다.
카놀라만큼이나 에델도 이 공간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우두커니 서서 중앙을 응시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위로 시선을 옮기고 이리저리 확인하던 그가 놀랍다는 듯 탄성을 뱉었다. 카놀라가 설명해 달라는 듯 에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이 장소도 놀랍지만, 그녀의 입장에선 좀처럼 감정 표현을 크게 하지 않는 에델이 이렇게까지 놀라는 게 더 신기했다.
“천장을 보십시오. 볕이 들어오는 구멍은 기껏해야 사람 한 명이 빠져나갈 수 있을 만한 크기입니다.”
그 말에 카놀라가 한껏 고개를 젖혔다. 과연 에델의 말대로 콩만 한 구멍 하나에서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가까이에서 보면 다를지 모르겠으나 여기선 그냥 점으로 보였다. 사람은커녕 팔이나 하나 들어갈까 싶은 그런 크기의 점. 그런데 저게 왜?
“저기서 들어온 빛이 이곳 전체를 밝히고 있습니다. 곳곳에 박혀 있는 수정으로 빛을 반사해서요.”
“아…….”
그제야 카놀라는 벽면에 박혀 있는 것들이 수정이라는 걸 알아챘다. 신기하게도 그것들은 과하지 않게 빛나고 있었는데, 꼭 자체적으로 발광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정말 드래곤이 사나 봐요! 그쵸?”
카놀라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중앙으로 다가갔다. 흙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반구는 꽤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 역시 수정인 것 같았다. 반구는 정확히 천장 구멍의 아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해가 중천에 뜨면 정확히 이 반구를 비출 것이다. 상상만으로도 멋있었다.
“얼른 올라가죠.”
꿈결 같은 상상은 오래가지 않았다. 카놀라는 제 앞에 닥친 현실을 깨닫고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앞에는 위로 끝없이 이어진 나선형 계단이 놓여 있었다.
카놀라는 다시 한번 고개를 젖혀 천장을 보았다. 계단이 저기까지 이어져 있는 것 같기는 한데, 과연 오늘 안에 올라갈 수 있긴 한 건지 의심스러운 높이였다. 게다가 난간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그녀는 까마득한 높이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벽면에 붙어서 조심조심 올라가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높은데 속도도 낼 수 없는 계단이라니. 벌써 숨이 찼다.
아까 씹다가 뱉어 버린 하와르가 괜히 아쉬워졌다. 맛없어도 그냥 삼킬 걸 그랬나 싶다.
“……하와르 더 있죠?”
“물론입니다.”
여차하면 다 먹어 버려야지. 카놀라는 굳게 다짐하며 결의에 찬 얼굴로 계단에 한 걸음, 발을 올렸다. 그래, 하와르가 있는데 못 올라갈 건 뭐람!
하와르가 문제가 아니었다.
카놀라는 떨어지지 않는 다리를 겨우 끌어 올리며 숨을 턱 뱉었다. 어지럽고 숨이 찬 것은 높은 곳에 올라와서가 절대 아니었다. 이건 순전히 그녀의 저질 체력에 의한 결과물이었다. 정말이지 이 계단은 끝도 없이 많았고 높았고 지옥 같았다!
“거의 다 왔습니다.”
“……아까도 그렇게 말한 거 알아요?”
아무리 사랑하는 에델이라도 이런 희망 고문은 용서하지 않을 테다. 그런 마음을 담아 눈에 힘을 주던 카놀라는 그마저도 힘들어서 포기했다. 고개를 푹 숙이니 이마에 송골송골 맺혀 있던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미쳤다. 이 계단은 미쳤어! 비명이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조끼도 벗는 게 어떠십니까?”
“아뇨, 괜찮아요.”
카놀라는 애써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자신의 두꺼운 털가죽 외투 따위 벗어던진 지 오래였다. 털 안으로 차오르는 열기를 감당할 수 없었던 데다, 체력이 떨어질수록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 탓이었다. 약간의 땀방울이 맺히긴 했지만 힘든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에델이 그녀의 무거운 외투를 들어 준 덕분에 여기까지 올라왔지, 아니었으면 카놀라는 모든 걸 포기하고 이 계단을 굴러서 내려갔을 것이다.
“우리 조금 쉬다 갈까요?”
결국 카놀라는 벌써 수십 번도 더 내뱉었던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애처롭게 들렸다. 그 물음에 에델이 안타까운 숨을 내뱉었다. 슬프게도 그것은 동의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분명 카놀라를 많이 배려해 주었지만, 그러면서도 가차 없었다. 바로 이렇게 말이다.
“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더 힘들어집니다. 그리고 5분 전에 쉬었습니다.”
언제 쉬었는지가 뭐가 중요해요, 지금 쉬고 있지 않은데!
징징대고 싶은 욕구를 이토록 제어하기 어려웠던 적이 없다. 카놀라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억누르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세상에, 산에 오르는 것보다 이 계단 오르는 게 더 힘들 줄 누가 알았겠어! 이럴 줄 알았으면 가벼운 신발이라도 하나 더 챙겨 올걸 그랬어!
“정말로 거의 다 왔습니다. 위에서 쉬는 게 나을 겁니다.”
그나마 이 계단이 보기보다 폭이 넓어서 다행이지, 폭마저 좁았으면 온종일을 투자해도 반절이나 올랐을 것이다. 난간이 없긴 해도 넓은 계단 폭 덕분에 높이로 인한 불안감이 많이 해소되었다.
카놀라는 벽을 짚으며 탁 트인 제 오른편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언제 멀어지나 싶었던 땅이 꽤 멀어지긴 했다. 에델의 말대로 얼마 남지 않긴 한 모양이지.
“진짜 성질 더러운 드래곤이야. 길 좀 곱게 만들어 주지.”
애꿎은 드래곤 탓을 하며, 카놀라가 다시 다리에 힘을 주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어서라도 올라갈 테다! 속에서 오기가 일었다. 그녀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눈앞의 계단에 또 한 다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녀의 오기는 채 1분도 못 되어 갈대처럼 푹 꺾였다.
“아니, 근데 진짜로, 내 종아리 터지면 어떡해? 내 다리 불타고 있지 않아요? 자세히 봐 봐.”
“전혀요.”
저 옳은 말만 하는 남자 같으니.
결국 쉬는 걸 포기한 카놀라가 무거운 고개를 들어 천장 쪽을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결혼 생활이 바로 저곳에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카놀라는 에델의 손을 잡고 질질 끌듯 다리를 옮겼다. 그리고 마침내, 찬 공기가 가까워지는 게 피부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카놀라의 얼굴에 진심으로 기쁜 마음이 서렸다.
“진짜 다 왔어! 에델! 이제 도착했어요!”
“거의 다 왔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깐 거의 다 온 거였지만 지금은 완전 다 왔어요!”
‘거의’와 ‘완전’은 전혀 다른 의미다. 고지가 눈앞에 있음이 보이자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기운이 어딘가에서 솟아났다. 카놀라의 얼굴이 다시 의욕적으로 변했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승리다! 인간의 위대한 승리! 돌아가면 이 엄청난 업적에 대해서 반드시 자랑해야지!
“근데 이 계단 여기서 끝났는데?”
나선으로 솟아났던 계단은 천장의 어느 한 곳과 연결되어 있었다. 당연히 천장의 구멍과 연결된 줄로만 알았는데, 계단이 끊긴 곳은 그냥 평평한 벽뿐이었다.
“……잘못 왔다고만 하지 마요. 그럼 나 진짜 굴러서 내려갈 거야.”
무척 진지한 카놀라의 음성에 에델은 상황도 잊고 웃음을 터뜨렸다. 심각하게 천장 구멍을 노려보던 카놀라가 칭얼거리듯 그를 타박했으나, 그것이 무섭기보단 귀여웠다. 에델은 재빨리 벽면을 확인했다. 얼른 나가는 문을 열지 않으면 카놀라가 정말 외투를 몸에 돌돌 말고 굴러 내려갈지도 몰랐다.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 달라는 에델의 청에 디라즈가 일러준 내용은 성역의 입구와 출구에 대한 것이었다. 성역의 존재를 알아도 들어가는 곳을 알아야 하고, 나가는 곳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역대 디라즈들만 알고 있는 정보였다.
에델이 주먹으로 벽면을 툭툭 쳐보다가 어느 한 군데에서 손을 멈추었다. 그러곤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있는 줄도 몰랐던 바위틈으로 날을 살살 맞춰 넣으니, 부스스하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검날이 제법 두꺼운데도 막상 틈에 넣으니 곧잘 쑥쑥 들어갔다. 날이 거의 끝까지 들어간 것을 확인한 에델이 그것을 조심스럽게 아래로 내렸다. 바깥쪽에서 뭔가 툭툭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더는 내려가지 않을 정도까지 그것을 끌어 내린 에델이 검을 다시 뽑았다. 그러곤 몸으로 힘껏 벽을 밀었다. 발을 디디고 있는 공간에서 조금만 바깥으로 튕겨 나면 그대로 추락이기에 반동을 크게 줄 수는 없었다. 다리로 단단히 몸을 지탱한 그가 이를 악물었다. 이 바위 문을 밀어 내는 건 디라즈로서 적합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열어야…….
“……뭐 하십니까?”
“응? 이거 밀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입술을 앙다물고 결연한 표정으로 벽에 손을 내고 있던 카놀라가 멀뚱멀뚱 에델을 보았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그녀의 표정에 도리어 당황한 건 에델이었다.
“쉬십시오. 제가 열겠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둘인데 왜 혼자 힘써요? 물론 내가 지금 멀쩡하진 않아서 별로 도움이 안 되겠지만…… 어쨌든! 이런 건 힘을 합쳐서 빨리 해 버리는 게 나아요.”
“문을 여는 건 군주로서 가져야 할 힘을 시험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당신까지 힘들 필요는…….”
“나도 지금 군주비 시험 보고 있잖아요!”
당당하게 대꾸하던 카놀라가 문득 헛기침하며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흠흠, 정확히는 후사비지만…… 후사비나 군주비나 똑같지 뭐.”
그녀의 말은 무척 지당해서 반박할 수 없었다. 허탈한 웃음을 흘리던 에델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다리에 힘을 주고, 밀려나지 않게 조심하십시오.”
마치 바위처럼 단단한 트리폴의 그라사들. 언제나 자신보다 큰 그라사들을 상대해야 했던 에델은 과거에서부터 쭉 이어져 온 자신의 상대들을 떠올렸다. 처음엔 거대하고 굳건한 그들이 움쩍달싹도 안 하는 바위처럼 느껴졌었다. 하지만 에델은 끊임없이 몸을 부딪쳤고, 마침내 모두를 넘어뜨렸다.
자신은 트리폴에서 가장 강인한 그라사, 군주가 될 자다. 게다가 지금 그의 곁에는 자신보다도 귀한 제 연인이 함께하고 있다.
쿠구궁.
바위가 밀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악다문 잇새로 약간의 피 맛이 났다. 다리에 준 힘을 조금이라도 놓치면 도리어 그 반동으로 넘어질 것이다. 이대로 밀어붙여야 했다.
그그극.
밀리는 발치만큼이나 벽에 댄 상체를 앞으로 나아갔다. 에델은 숨을 참고 최대한 몸에 힘을 주었다.
열릴 것이다. 자신은 후사니까. 제 옆의 연인은 후사비가 될 사람이니까.
쾅!
상체가 갑자기 앞으로 확 쏠렸다. 균형을 잃은 에델이 반사적으로 옆에 있던 카놀라를 확 끌어당겼다. 바위와 함께 몸이 아래로 강하게 넘어졌다. 등으로 찌릿한 통증이 퍼졌다. 에델이 입술을 꾹 다물고 신음을 삼켰다.
누워 있는 에델의 위로 안기듯 넘어진 카놀라가 먼저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들었다. 에델 위에 납작 엎드려서 눈만 데구루루 굴리던 카놀라가 입을 벌렸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카놀라는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산꼭대기.”
정말로 산꼭대기다.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산꼭대기. 이게 산꼭대기가 아니면 뭐가 산꼭대기란 말인가!
“산꼭대기예요! 우리 다 올라왔어요!”
카놀라가 주체할 수 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제 아래에 깔린 에델을 내려다보았다. 에델 역시 누운 상태로 대충 주변을 둘러봤는지, 안도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긴장이 풀어진 그의 표정이 너무 예뻐서, 카놀라는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고 대뜸 쪽, 뽀뽀를 해 버렸다. 갑작스러운 뽀뽀에 에델이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런 그를 향해 카놀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날 여기까지 끌고 와 줘서 고마워요.”
내다 버리고 싶었던 순간이 많았을 텐데. 특히 지옥 같은 계단에서.
슬그머니 덧붙여지는 목소리마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세라, 카놀라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늘어졌다. 주변 풍경이 머리카락에 가려지니 카놀라의 새파란 눈동자가 더욱 잘 보였다. 그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델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와 주어 감사합니다.”
카놀라의 눈동자에 웃음이 가득 찼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에델의 난처해하는 목소리가 덧붙여졌다.
“그런데 지금 호흡이 좀 어렵습니다.”
온몸으로 에델을 짓누르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은 카놀라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마른기침하며 몸을 일으키는 에델을 민망하게 힐끔거리던 카놀라가 먼 하늘을 돌아보았다.
몸무게 들킨 건 아니겠지?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그럼요! 에델은, ……갈비뼈가 부러졌다거나, 그런 거 아니죠? 나 그 정도로 무겁진 않은데.”
에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조그맣게 덧붙여지는 말이 웃기는데, 웃으니 통증이 느껴졌다. 뒤로 넘어지며 어떤 식으로든 충격이 오긴 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티를 냈다간 카놀라가 기겁을 할 테지. 그는 덤덤한 척 표정을 꾸미며 몸을 일으켰다.
“물론 괜찮습니다. 곰에게 깔려도 부러지진 않을 겁니다.”
솔직히 그건 뻥이었다. 하지만 워낙 천연덕스러운 어조인 데다 바로 며칠 전에 곰과 싸워 이기는 모습을 봐서인지 카놀라는 에델의 말에 별다른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뼉을 치며 일정 부분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런 카놀라를 귀엽다는 듯 보던 에델이 비로소 주변을 제대로 살피기 시작했다.
산꼭대기라는 걸 증명하듯, 땅의 끝에는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의외로 꼭대기는 무척 평평하고 제법 공간이 있었는데, 춥고 구름이 잔뜩 끼어 있던 아래쪽 날씨와는 다르게 무척 화창했다. 오늘 운 좋게 맑은 날씨를 만났다고 하기에는 또 모호해 보였다. 바닥엔 의외로 푸릇한 잡초가 깔렸기 때문이다. 공기가 차긴 하지만 햇볕을 가리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 바람만 안 불면 오히려 아래보다 덜 춥게 느껴졌다.
“그런데 에델. 여기에 산양이 살까요?”
풀이 자라기는 하는데 그뿐이다. 몇 걸음만 걸어도 주변을 온통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좁은 지역이라 멀리 찾아볼 것도 없었다. 에델은 난처한 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산양은 털 한 올 보이지가 않았다. 막막하게 하늘만 보고 있는 그의 귓가로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아까 하와르 더 남았다고 했죠?”
벼랑 아래를 힐끔대는가 싶더니, 그새 속이라도 안 좋아진 모양이었다. 카놀라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후다닥 다가왔다. 에델이 얼른 제 품에 있는 하와르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에 들린 몇 장의 잎을 한꺼번에 쥐려던 카놀라가 바로 직전 멈칫하더니, 잎사귀 한 장만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두 번째 씹는 거라도 맛없기는 똑같았다. 혀를 마비시키는 것 같은 풀 맛에 향마저 강해서 숨 쉴 때마다 풀 냄새가 섞이는 느낌이었다.
“으, 이 맛은 앞으로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한 장으로 충분하십니까?”
“더 씹으면 내 혀의 감각이 사라질지도 몰라요.”
투덜거리면서도 카놀라는 순순히 하와르를 더 받아 들었다. 혀의 감각도 중요하지만 여기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혀의 감각을 지켜 낸 보람도 못 느낄 것이다.
“이걸 누가 먼저 씹었는지는 몰라도 참 큰 결심 하셨다고 칭찬해 드려야…….”
막 잎을 한 장 더 물려던 카놀라가 문득 말을 멈추었다. 카놀라의 안색이 나아지는 것을 확인하고 있던 에델은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음을 깨닫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녀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카놀라의 시선은 그녀가 조금 전까지 알짱거렸던 벼랑 끝이었다.
보이는 거라곤 멀지 않은 곳에서 끊긴 벼랑길과 청명한 하늘, 그리고 암갈색 눈동자 한 쌍뿐이었다.
……암갈색 눈동자?
우두커니 굳어 있던 두 사람 중 먼저 움직인 사람은 카놀라였다. 그녀는 우선, 잠깐 멈췄던 턱을 다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질겅질겅한 풀의 감촉과 풀에서 나온 즙이 온 입 안을 휘감고 돌았다. 코끝으로 치미는 풀 냄새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렇게 열심히 풀을 씹으며, 카놀라는 제 손에 들려 있던 풀잎을 슬그머니 허공에 휘저었다. 허공에 박혀 있는 듯 움직이지 않던 암갈색 눈동자가 또르르 굴러가는 게 보였다. 카놀라는 아예 천천히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암갈색 눈동자가 다시 굴렀다. 그 시선의 끝이 향한 곳은 명백했다. 카놀라의 손끝에 걸린 하와르 잎사귀가 어찌나 야들야들하게 흔들리는지, 꼭 치마폭이 날리는 듯했다.
암갈색 눈동자만 빼꼼 내놓고 이쪽을 보던 짐승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쭉 튀어나온 주둥이 끝에 코가 벌름거리고 있었다. 에델이 조심스럽게 무기 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러나 카놀라가 잎사귀를 들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를 만류했다. 그녀는 검지를 세워 입가에 가져다 댄 뒤, 다시 산양에 집중했다. 산양은 뿔도 나지 않고 덩치도 작은 거로 보아 한참 어린 새끼 같았다.
카놀라는 들고 있던 하와르 잎 하나를 바닥에 슬그머니 내려놓고선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코를 벌름거리던 산양이 조금 더 목을 위로 뺐다. 산양의 황금빛 털이 빛을 받아 진하게 그 색을 드러냈다.
“어머.”
분명 저긴 깎아지른 암벽뿐이었는데. 다소 얼빠진 생각을 하는 사이 산양이 킁킁거리며 잎사귀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곤 날름 혀로 그것을 단숨에 먹어 버렸다. 쩝쩝거리며 하와르를 씹는 산양을 멀거니 보던 카놀라가 다시 한번 또 한 장의 하와르를 집어 내밀었다. 산양은 아까보다 더 스스럼없이 몇 걸음 다가왔다.
에델이 그라그포드에게 들었던 내용과는 아주 다른 풍경이었다. 분명 그의 아버지가 잡았다는 산양은 동그랗게 말린 두껍고 까만 뿔, 풍성한 황금 털에 어지간한 사냥개보다 큰 체구를 가진 짐승이었다. 그런데 이건 아무리 봐도 새끼였다. 잎사귀 몇 장으로 꾀어낼 수 있는 정말 아무 근심 걱정 없는 새끼 산양.
이러다가 어디에선가 어미가 나타나진 않을까 걱정되어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다행히도 아직까진 평화로운 풍경이 이어졌다.
“어머, 잘도 먹네.”
산양과 카놀라와의 거리는 꽤 가까워졌다. 손에 든 하와르 잎을 한 장씩 내밀며 산양을 끌어들이던 카놀라가 문득 말문을 열었다.
“내가 지금 뭘 생각해 냈는지 알아요?”
그녀는 제 입을 틀어막으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나 진짜 천재인가 봐.”
*
“이번 대사냥은 성공입니다.”
그라사들의 얼굴에 기쁨이 어렸다. 그들의 앞엔 정수리에 커다란 도끼날을 박고 죽은 늑대의 거대한 사체가 놓여 있었다. 검은 늑대 우두머리는 교활했으나, 그라그포드는 짐승보다 더한 끈질김으로 추적을 감행했다. 이번 대사냥 때 승부를 보지 않으면 겨우내 수많은 외곽 지역이 늑대 무리에 시달릴 게 자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우두머리의 머리를 도끼로 쪼갤 수 있었다.
그라그포드는 사냥감을 정리하고 돌아갈 것을 명했다. 그의 명에 그라사들이 후다닥 무기와 덫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에델 없이 사냥에 참석한 그의 다섯 전사도 다른 그라사들처럼 자신의 일을 찾아 움직였다.
“후사께선 언제쯤 돌아오실까?”
사냥감들을 챙기던 울란이 문득 중얼거렸다. 그의 옆에서 함께 짐승의 사체를 들던 아이누가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우거진 까닭인지 유독 날이 어둡게 느껴졌다. 다행히 정말로 밤이 된 건 아니지만, 해가 꽤 많이 기울었다. 밤에 산길을 내려오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었다.
“하루 내로 다녀오신다고 했으니 곧 오시겠지.”
“밤길에도 능한 분이시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고 얼른 옮기기나 해.”
지나가던 라다크의 타박에 울란과 아이누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라다크의 뒤통수를 은근슬쩍 째려보던 두 사람 중 울란이 입술을 뗐다.
“외모는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겼으면서.”
“속은 꼬인 녀석 같으니.”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하는 두 사람의 행동에 라다크가 쌍심지를 켜고 둘을 노려보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라다크의 시선을 피했다.
“아이고, 이놈이 뭘 먹었는지 무겁네!”
“이런, 내가 도와주지. 아이누!”
혼자서도 충분히 들 것 같은 늑대 한 마리를 굳이 나눠 들고 후다닥 지나쳐 버리는 둘의 모습에 라다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놀라랑 몇 번 어울려 놀더니 죄다 이상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저 호칭이었다. 돌아오면 이번에야말로 이상한 호칭 좀 못 부르게 막아야지.
“놀지 말고 이거나 좀 묶어! 외모는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겼으면서 속은 꼬인 라다크, 너 말이야!”
기필코 왕녀의 입을 막아 버릴 테다. 라다크는 이를 박박 갈며 롬에게 다가갔다. 그가 막 사냥감을 고정하는 밧줄을 팽팽하게 당기는 찰나, 상황을 점검하던 그라그포드가 그의 옆을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기긴 했군.”
반대편에서 밧줄을 잡고 있던 롬은 줄을 놔 버렸다. 거의 쓰러져서 우는 꼴로 끅끅대는 롬을 물끄러미 보던 라다크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먼 산을 응시하며 라다크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포기하는 게 더 빠를지도.
“어?”
“아하하……학…… 아 진짜 미치겠네! 아하학…… 아이고, 내 배야!”
“야, 저거.”
“아이고, 하하학! 뭐어…… 아하하하!”
“아니, 내 얼굴은 그만 보고 저기 말이다. 저기.”
라다크의 타박에 롬이 눈물을 닦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라다크가 가리키는 곳을 물끄러미 보던 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응?”
위쪽 길에서 뭔가 보이는 것 같았다. 한번 알아채고 나니 움직임을 따라가는 게 어렵지 않아서, 두 사람은 한참이나 그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점점 가까워진 그 형체를 유심히 관찰하던 라다크가 밝아진 표정으로 그라그포드를 향해 외쳤다.
“후사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각자의 일에 전념하고 있던 전사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멀리 보이는 두 사람의 내려오는 속도는 무척 더뎠다. 올라가는 것보단 내려오는 게 더 위험하니 저렇게 신중한 것도 이해해 줄 수는 있었다. 게다가 카놀라는 누구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시험을 치르고 오는 참이 아닌가. 비록 대사냥과 맞물려 전사들의 도움으로 여기까지 온 셈이 되었지만, 대사냥 첫날 그녀가 치렀던 두 번째 시험을 생각하면 그 노고를 무시할 수 없다.
어쨌든 산꼭대기는 디라즈의 계승 때나 한번 올라가는 장소이니만큼, 전사들은 내심 여러 가지 궁금증을 가지고 후사를 기다렸다. 정말로 산꼭대기에 다녀왔을까? 아무리 정혼녀에게 눈이 멀었어도 후사는 거짓말을 할 성격이 아니다. 당연히 다녀왔을 텐데, 그럼 황금 가죽도 가져왔겠지? 그럼 군주의 자리를 계승할 때 다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건가?
전사들의 시선이 자신들에게 고정되었다는 걸 두 사람은 모르는 것 같았다. 둘은 길이랄 것이 없는 산비탈을 조심스럽게 디디는 중이었다. 이따금 에델이 카놀라의 손을 잡아 주기도 했고, 나무에 기대어 잠시 쉬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발치만 내려다보고 오던 두 사람은 전사들의 지척에 다다라서야 고개를 들었다.
하던 일도 멈추고 멀거니 두 사람을 구경하는 전사들의 모습에 카놀라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마중 나와 있던 거예요?”
“그럴 리가.”
무심하게 대꾸한 그라그포드가 에델을 돌아보았다. 그는 덤덤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디라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델의 모습이 뭔가 부자연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다.
“꼴이…… 그보다, 가죽은?”
에델도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몫의 가죽을 가지러 올라간 것이었다. 그러니 마지막까지 카놀라와 함께 다녀온 것에 떳떳하려면 제 몫의 가죽을 짊어지고 왔어야 했다. 그런데 카놀라도 에델도 등에 가죽을 짊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따로 들고 온 짐도 없었다.
떨떠름하게 두 사람을 훑어보던 그라그포드가 뭔가 입을 열려는 찰나, 카놀라가 불현듯 비명을 질렀다.
“엄마야!”
그녀는 뭐에 놀랐는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제 외투 앞섶을 약간 열고 속을 들여다보았다. 저게 무슨 꼴인가 싶어 보고 있으니, 카놀라의 열린 앞섶에서 뭔가 꿈틀거렸다. 한쪽 팔로 제 몸을 둥글게 감싸고 있던 카놀라가 얼른 놀고 있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곤 잎사귀 하나를 꺼내 품 안으로 넣었다. 몇 번 더 꿈틀거리던 외투가 다시 잠잠해졌다. 카놀라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외투를 추스르려던 그녀는 그라그포드의 시선을 깨닫고는 눈을 깜빡였다. 고민하듯 눈을 굴리던 그녀가 외투를 조금 더 열었다. 열린 옷 가죽 사이로 벌름거리는 코와 주둥이가 보였다. 그리고 선명한 황금색 털까지.
“가죽을 벗겨 오라고 하진 않았잖아요?”
카놀라의 품 안에는 잠든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를 황금색 산양이 안겨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 꼴을 보고 있으려니,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외투를 잠그며 말을 이었다.
“어미 몫까지 열심히 키울게요. 얘 취향도 벌써 알아 놨다고요!”
황금 가죽을 가져오랬더니 황금 산양을 통째로 들고 오면 어쩌나.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을 잇지 못하던 그라그포드가 에델을 돌아보았다.
“너는 함께 올라갔으면서 대체…….”
그라그포드는 말을 잇지 못했다. 눈치를 보던 에델이 제 외투 앞섶을 슬그머니 연 까닭이었다. 카놀라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암수 한 쌍이에요. 한 마리만 데려왔다가 외로워서 죽으면 어떡해요?”
“……크흠.”
에델은 작게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의 품에 납치된 또 다른 황금 산양 새끼는 참 곤히도 자고 있었다. 그라그포드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한참이나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 시선에 민망함을 느낀 에델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놀라는 뭐가 문제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급기야는 낯이 익은 다섯 전사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다 자라면 사냥개보다도 덩치가 커! 이 녀석들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것 같아.”
“죽은 거 아닙니까?”
“아냐! 그냥 약초를 먹고 잠든 것뿐이야! 올라갈 때 덫에 사용하는 약초를 챙겨 갔거든!”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 있던 롬이 에델을 돌아보았다. 에델은 그녀의 말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어미 몰래 빼돌리신 겁니까?”
“몰래 빼돌린 거 아냐. 대놓고 데려왔는데?”
“예?”
“이 녀석은 둥지에서 아예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거든. 어미가 돌보지도 않더라고. 그래서 내가 먹을 거 주고 데려왔어. 에델이 데려온 애는 살짝 꾀어내야 했지만.”
그라그포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생전 느껴보지 않은 통증에 온 머리통이 욱신거렸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두통인가. 나라를 이끌면서 이렇게까지 두통을 느꼈던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 카놀라와 마주하지 않아야 건강이 좀 좋아질 텐데.
“근데 우리 야영지로 안 돌아갈 거예요?”
천진난만한 그녀의 물음에 그라그포드가 전사들에게 손짓했다. 전사들이 얼른 멈추었던 일들을 다시 시작했다. 이미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무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늘이 금세 어두워진 탓에, 준비가 끝난 이들은 각자의 짐을 들고 재빨리 선두에 섰다. 야영지는 사냥터에 맞춰서 가까운 곳으로 옮긴 상태였기에 그들은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야영지로 이동하는 동안에도 카놀라는 쉴 새 없이 떠들었고, 에델은 묵묵히 곁을 지켰다. 그리고 전사들은 혼란에 빠져서 이 상황을 이해하고자 애썼다.
후사가 정말 산꼭대기를 다녀오긴 한 모양이다. 그런데 황금 가죽을 가져오랬더니 새끼 산양을 통째로 안고 왔다. 그것도 두 마리나. 도대체 왜? 아니 그런데, 저렇게 되면 시험은 통과한 건가? 그럼 저 여자가 이제 정말 후사비가 되는 거야?
전사들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카놀라의 얼굴을 힐끔댔다. 그러는 동안 일행은 야영지에 도착했다.
“어머, 피아!”
야영지 입구의 횃불 아래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카놀라가 한쪽 팔을 번쩍 들어 허공에 붕붕 저었다. 피아는 뭣도 모르고 반갑게 마주 인사했다. 그런 그에게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간 카놀라가 자랑하듯 앞섶을 열었다.
“내가 드래곤은 소개해 주지 못하지만, 아무도 못 키워 본 동물을 소개해 줄게. 인사해, 황금 양이야. 아니, 황금 산양. 아니, 황금 가죽 산양?”
“……세상에.”
반갑게 인사를 건넸던 피아의 얼굴은 금세 얼빠진 꼴이 되었다. 카놀라는 깔깔 웃으며 그를 놀렸다. 그런 그녀에게 피아가 당황한 얼굴로 뭐라고 외쳤다. 떠들썩하게 귀환을 알리는 카놀라를 멀리서 응시하던 에델이 그라그포드에게 다가갔다. 그라그포드는 여전히 이마를 짚고 끙끙대는 중이었다.
“디라즈.”
“황금 가죽이 크고 탐스러울수록 후사의 명예도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더냐?”
“하와르 군락으로 추정되는 곳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에델을 돌아보았다. 에델은 새끼 산양을 조심스럽게 안고 있었다.
“이 녀석들의 배설물은 하와르 씨를 키우고, 그것이 이 녀석들의 서식지에 하와르 군락을 만들었습니다.”
그라그포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그는 묘한 눈으로 잠든 산양을 내려다보았다.
“처음 보는 열매껍질들을 발견했습니다. 이 새끼 산양은 분명 하와르 열매를 먹고 자랐을 겁니다.”
하와르의 재배에 뭐가 필요한지 알아내는 일은 너무 어려웠다. 애초 하와르 열매는 본 적도 없다. 열매를 맺는지조차 모른다. 그들은 몇 번 살아 있는 하와르를 뿌리째 옮겨 심어 보려 시도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씨를 얻으려면 살아 있는 하와르를 채취하지 않고 관리해야 한다. 그러나 몇 안 되는 하와르를 먹지 않고 일 년 내내 관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와르가 필요한 순간도 종종 생길뿐더러, 그들이 손대지 않아도 야생 동물들에 의해 짓밟히거나 먹혔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약간의 하와르를 관리하기 위해 위험한 산맥을 오간다는 것 자체가 비효율적이었다. 아무리 하와르가 좋다 한들 전사들의 목숨이 더 귀했다.
그라그포드는 산양을 노려보았다. 에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성과였다. 하와르 재배에 성공한다면 트리폴의 형편은 지금과 비견되지 않을 만큼 나아질 것이다.
“그것을 모두 어찌 알아냈느냐?”
“제 연인 덕분입니다. 그녀가 알아챘습니다.”
그라그포드와 에델의 시선이 야영지 입구로 향했다. 카놀라는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전사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녀가 어떻게 산양을 홀렸는지를 묘사할 때마다, 피아나 헴슨이 기겁을 하며 뭐라고 대꾸하는 모습도 보였다. 그라그포드는 그런 카놀라를 오래 응시했다. 그의 귓가로 에델의 나지막하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니 산 아래에 와 있다는 그녀의 옛 연인은 문제 될 수 없습니다.”
카놀라의 유쾌한 웃음소리에 결국 제사장까지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온 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는 황금 산양을 발견하곤 경악 어린 표정으로 멈춰 섰다. 카놀라가 제사장을 향해 해맑은 웃음을 보였다.
“이 나라에, 그리고 제게 무엇보다 귀한 사람입니다.”
그라그포드는 덤덤하게 시선을 거두었다. 꾹 다물고 있던 입술 사이로 굵고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렇다면 지켜 내어라. 너는 트리폴의 그라사다.”
에델은 디라즈에게서 한 번도 보지 못했던 표정을 보았다. 난생처음 보는 표정인데도 이렇게나 쉽게 그 심경이 짐작되는 까닭은, 아마 에델이 과거의 그라그포드와 같은 처지에 놓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 실은 과거의 그라그포드보다는 사정이 낫다. 적어도 에델은 그를 내심 지지해 주는 디라즈가 있으니까. 과거에 비교하면 지금은 차라리 수월하다고 표현할 수 있다.
에델은 내내 잊고 살던 제 어머니를 떠올렸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라 그녀를 떠올려도 아무런 감흥이 일지 않았다. 다만 디라즈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적어도 두 사람이 어떤 모습이었을지는 상상할 수 있었다.
아마도 과거의 그라그포드는 에델보다도 절박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자신 또한 이해해 줄 테지.
“지켜 내겠습니다. 그러니 이제 그녀를 제 정혼녀로 대우해 주십시오.”
에델의 요청에 그라그포드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에델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물었다.
“대우가 소홀하다고 불평하더냐?”
“제가 불만스럽습니다.”
대답은 즉각적으로 나왔다. 단호한 에델의 모습에 그라그포드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산 아래의 방문객들에게 흠잡히기 싫은 게 아니고?”
만나 봐야 알 일이긴 하지만, 보고받은 서신으로만 미루어 짐작했을 땐 결코 호의적인 여행단이 아니었다. 카놀라가 사전에 합의되지 않은 시험을 치르고 있다는 것만 알게 되어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짐작되었다. 아니, 당장 그녀의 차림만 보아도 기함할 것이다. 젊은 시절 몇 번 외국을 다녀 보았던 그라그포드는 자신들의 차림이 이방인들의 눈에 얼마나 투박해 보이는지 알고 있었다.
“그녀의 모국에서 온 자들입니다. 지난 인연까지 끌고 왔으니 이 정혼을 파기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에델의 추측이 맞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이제 와 더 좋은 정략혼 자리를 찾게 되어서 왕녀를 다시 데려가려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적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었다면 왕녀의 옛 연인이라는 사내만큼은 절대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다.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라그포드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왕녀에겐 아직 하나의 시험이 남았다.”
“그녀는 반드시 통과할 겁니다.”
“불확실한 근거구나.”
그들은 잠시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카놀라와 실랑이를 벌이는 듯하던 제사장이 결국 포기했는지 고개를 내젓는 게 보였다. 야영지를 지키던 일꾼들에게 산양을 실컷 자랑하던 카놀라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몇 전사들마저 알짱거리며 카놀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슬쩍 시선을 내렸다. 외투 안에 웅크린 산양의 몸뚱이에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상관없습니다.”
에델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시험은 상관없습니다.”
후사가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불호령이 떨어질지도 모른다. 디라즈는 노성을 토하며 나태한 정신머리를 책망할지도 모른다.
에델은 고개를 숙이고 디라즈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디라즈는 아무 말이 없었다. 에델이 느리게 시선을 드는 찰나, 그의 어깨로 묵직한 무게감이 툭 닿았다.
에델의 어깨를 무겁게 두드린 그라그포드가 무심한 표정으로 멀어졌다. 그런 그라그포드의 등을 한참 바라보던 에델이 깊은숨을 뱉었다. 그러곤 카놀라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처음엔 아닌 척 엿듣던 전사들은 이제 그녀를 동그랗게 둘러싼 채 대놓고 경청하는 중이었다.
에델이 가까이 다가가자 몇몇 전사들이 얼른 몸을 일으켰다. 덕분에 무시무시하고 악질적인 지옥의 계단 이야기에 몰입했던 카놀라도 에델의 인기척을 느꼈다.
“아, 에델! 그렇지 않아도 당신이 엄청난 괴력으로 바위를 부쉈다는 이야기를 지금 막 하려던 참이에요!”
카놀라의 말에 전사들이 눈이 반짝였다. 후사의 활약상이라니 얼른 듣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미 카놀라의 이야기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려져서, 이제 와 정정해 줘도 누구 하나 믿지 않을 태세였다.
헛웃음을 흘리며 전사들을 보던 에델이 고개를 내저으며 카놀라를 보았다.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응? 그래요! 피아, 이 산양 좀 데리고 있어 줄래? 어, 에델의 산양도!”
에델의 외투 안에서 두 번째 산양이 등장하는 것을 본 피아가 튀어나올 듯한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평소 후사의 모습을 상상하면 외투 안에 새끼 산양을 품고 오는 행동은 도통 어울리지 않는 까닭이었다.
충격받은 전사와 일꾼들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산양을 넘긴 카놀라가 에델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야영지 한쪽으로 자리를 옮긴 카놀라가 티 없이 해맑은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왜 그래요? 산양 때문에 디라즈께 혼났어요? 혹시 이거 포획 금지된 보호종이래요?”
“아니요. 사실…… 미리 말해 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에델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산 아래의 불청객들을 온 줄도 모르게 돌려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제 귀환할 테고, 카놀라는 늦으나 빠르나 누가 왔는지 알게 될 것이다. 카놀라의 시중인들이 산 아래에 있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지금 말을 해 주는 게 에델이 할 수 있는 제일 나은 선택이었다. 카놀라가 어떤 반응을 보이든 말이다.
“국경 지대에 무장한 샤를만 여행단이 와 있습니다.”
“샤를만 여행단? 우리나라에서 사람을 보냈다고요?”
“네.”
카놀라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카놀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그들의 방문 목적을 추측해 보았으나,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런 그녀에게 에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일행을 이끄는 책임자가 샤를만 왕녀의 연인이라고 합니다.”
까딱까딱 움직이던 고개가 우뚝 멈추었다. 카놀라는 굳은 목을 뻣뻣하게 돌려 에델을 마주 보았다. 녹색 눈동자는 고요하게 카놀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당신의 연인이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귀를 시끄럽게 울렸다. 어쩌면 카놀라에게도 들릴지 모르겠다. 에델은 애써 안색을 평온하게 꾸몄지만, 심장 소리까지 죽일 수는 없었다. 그나마 목소리가 떨리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등줄기로는 땀이 흐르는 것 같다. 카놀라의 대답을 기다리는 짧은 시간이 꼭 천년처럼 느껴졌다.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굳어 있던 카놀라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곤 입술을 떼었다. 그 사이로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건 몰라도 정신병자인 건 확실하네요.”
에델은 결국 웃어 버렸다. 언제 긴장했냐는 듯 아주 큰 소리로.
10. 마지막 시험
하루 이틀 정도의 야영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하지만 삼 일이 넘어가자 등이 배기고 허리가 쑤셨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들은 애초 이런 식으로 야외에서 임시 천막을 세우고 지낼 만한 준비를 해 오지 않았다. 길에서 몇 날 며칠을 보내다니! 당연히 환대를 받으리라 생각했고, 귀빈으로서 궁의 가장 좋은 방을 안내받을 것이라고 믿었다.
허리를 두드리며 끙끙대던 헤세온이 결국 분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이제 더는 참지 못한다. 매일 똑같은 핑계를 들으며 지지부진하게 구는 꼴을 보는 것도 지쳤다. 이건 명백히 그를 무시하는 처사였고, 나아가 샤를만 여행단 전체를 무시하는 처사였다. 조금 더 크게 보자면 카놀라를 무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더는 못 참아! 당장 왕녀님께 안내하지 않으면 기필코 이 무례를 샤를만에 소상히 보고하겠네!”
헤세온은 막사를 박차고 나섰다. 마침 오스카가 그들의 임시 야영지에 와 있었다. 헤세온이 씨근덕거리며 오스카에게 다가갔다. 켈튼 백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오스카가 헤세온을 발견하곤 살짝 몸을 틀었다.
“도대체 이……!”
“축하드립니다.”
“……게에, 뭐? 뭘 축하한다는 건가?”
오스카는 입술을 꾹 다물고 헤세온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무심하게 고개를 돌리며 중얼거렸다.
“발목이 잘릴 일은 없으시겠습니다.”
“흠흠, 방문이 허가되셨습니다.”
불안한 눈으로 오스카의 말을 듣고 있던 루덱이 얼른 끼어들었다. 오스카의 말에 트집을 잡으려던 헤세온이 반색하며 루덱을 돌아보았다.
“오! 왕녀님께 전달하긴 했던 모양이군? 너무 연락이 없어서 전달조차 안 한 줄 알았더니!”
쓸데없이 예리하다. 그런 생각을 하며 루덱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어쨌든 카놀라가 돌아와서 다행이었다. 아직 루덱이나 오스카는 그녀를 만나지 못했지만, 안젤리나가 소식을 듣기 무섭게 마중을 나갔으니 이곳 상황을 소상히 전달했을 것이다. 글로리오사가 보낸 서신도 함께 들고 갔으니 샤를만 여행단의 방문 목적 또한 확인했을 테고. 이렇게 무례한 방문을 허락해 줄 정도면 그 사안이 심각하긴 했던 모양이다.
“자, 어서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라!”
헤세온이 신나서 일꾼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꾼들은 서로의 눈치만 볼 뿐, 이렇다 할 행동을 하지 않았다. 헤세온이 재차 재촉하려는데, 루덱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모두가 국경을 넘을 순 없습니다.”
“뭐?”
“남은 이들은 이곳에서 기다릴 겁니다. 방문을 허가받은 다른 분들에겐 말을 전했으니 베르긴 공자께서도 준비하십시오.”
헤세온이 펄쩍 뛰며 정색했다.
“하인도 호위병도 없이 어떻게 들어가란 말인가?”
“그게 꺼림칙하시다면 이곳에 남으셔도 됩니다. 참고로 다른 분들은 모두 이에 동의하셨습니다.”
물론 그들도 헤세온처럼 기겁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들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본인들이 생각하기에도 지금의 작태는 여행단의 실수였기 때문이다. 트리폴을 얼마나 만만하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안이했던 생각을 인정했고, 어쨌든 방문이 허가되었음에 안도했다.
헤세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상황이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너무 준비 없이 왔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술을 씹으며 인상을 구기고 서 있던 헤세온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샤를만에서 온 방문객은 왕녀님의 이름 아래에 보호받을 것입니다.”
사실 왕녀의 이름 아래에서 어디까지 보호받을 수 있을지는 루덱도 장담할 수 없었다. 카놀라는 아직 후사비로 인정받지도 못한 손님 신세가 아니던가. 카놀라 본인은 트리폴 사람들 사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해도 샤를만 출신 시중인들은 여태 편치 않은 생활을 하고 있다. 하물며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첫 단추를 낀 헤세온이나 다른 사람들은 오죽할까? 왕궁에 제대로 된 방이나 내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을 모르는 헤세온은 그나마 안심했다는 듯 숨을 내쉬었다.
“왕녀님께서 그리 장담해 주신다면야 믿을 수밖에. 왕녀님께선 어떠신가? 여기 와서 고초를 겪지는 않으셨…….”
마치 자신이 왕녀의 무엇이라도 되는 양, 헤세온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불쾌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서 있던 오스카가 단칼에 그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명심해 주십시오. 왕녀님의 명예에 흠이 된다는 판단이 설 경우, 지체 없이 이를 철회할 것입니다.”
명백히 위협적인 그의 말에 헤세온이 표정을 굳혔다. 아무리 무례를 저질렀기로서니 이렇게까지 모욕을 당하는 게 맞나? 헤세온은 슬슬 속 깊은 곳에서부터 못마땅함이 치미는 것을 느꼈다.
“철회한다?”
철회하면 어쩔 건가.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그랬다간 그거야말로 트리폴의 큰 실수가 될 것이다. 비록 헤세온이 샤를만 여행단의 일행으로 이곳을 방문했지만, 그의 국적은 엄연히 다른 나라다. 헤세온의 신병에 문제가 생겨서 난처해지는 쪽은 샤를만이었다. 특히나 헤세온은 교환 학생으로 샤를만에 가 있는 상태다. 사실상 교수를 기정사실로 하는 학회의 회원이기도 하다. 학회에서 베르긴 가문이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하면 도리어 귀한 대접을 해도 모자랄 것이다.
헤세온은 입술을 비틀었다. 그간 책에만 묻혀 사느라 정치적 역량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그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알았다. 제 가문, 베르긴의 힘 말이다.
“왕녀님께선 이미 샤를만 여행단의 무례한 방문에 큰 실망을 표하셨습니다. 감히 조언해 드리자면, 이 이상 그분의 심기를 거스르지 마십시오.”
그러니 저렇게 살벌한 오스카의 충고도 귓등으로 들을 수 있었다.
*
“하, 우습잖아?”
턱을 괴고 있던 카놀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한 손에는 안젤리나에게서 전달받은 서신이 들려 있었다. 손끝으로 서신을 들고 내용을 한참이나 읽던 카놀라가 그것을 휙 던졌다. 그러곤 옆에 놓아두었던 봉투를 집어 들었다. 몇 번이나 들여다보았지만, 인장의 문양은 변하지 않았다. 이것은 글로리오사의 문양이었다.
“샤를만에선 앞으로 해가 서쪽에서 뜬다나 봐?”
경쾌한 어조는 평소와 같았지만, 속에 담긴 감정은 분명 달랐다. 트리폴에 오고선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모습이지만, 샤를만에선 곧잘 보아 온 모습이기도 했다. 안젤리나는 떨어진 서신을 집어 들었다.
“친절하기도 해라.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나 답장도 써야 하나, 안젤리나?”
“왕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