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당연히 알 것으로 생각했던 부분들을 카놀라는 전부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카놀라는 당장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듯 울상이 된 얼굴로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에델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러니 제가 안내해 드릴 겁니다.”
나오려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있던 카놀라는 이번엔 다른 의미로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네?”
“제가 당신과 함께 꼭대기에 오를 겁니다.”
카놀라가 휘둥그레 뜬 눈으로 에델을 빤히 보았다.
“전 후사입니다. 오를 자격은 충분합니다.”
나중에 군주에게서 자리를 물려받을 때나 한번 올라가는 거라면서요? 불쑥 물음이 치밀었지만, 그보다 먼저 다른 질문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건, 내 시험인데?”
시중인도 못 데려가는데 이 나라의 후사가 직접 나서서 안내하면 그거 엄청난 반칙 아닌가? 게다가 에델은 산맥을 여러 번 오갔던,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전사가 아닌가. 산맥의 절반을 그라사들과 함께 올라가는 것도 모자라 나머지 절반을 후사와 함께 간다면 시험이 아니라 나들이가 되는 거 아니야?
의문 가득한 카놀라의 눈빛이 에델을 빤히 응시했다. 어쨌든 더는 울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그것에 안도하며, 에델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이 다치게 두지 않을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이 ‘함께 꼭대기에 오르겠다’는 의미라는 건 누구도 모를 거예요.”
혼잣말처럼 튀어나온 카놀라의 말을 용케 들은 에델이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럼 이제 알게 되셨군요.”
아무래도 심장 마비에 걸릴 것 같다. 카놀라는 자신의 가슴팍을 움켜쥐며 살기 위해 호흡했다. 당사자에게 말해 주지도 않고 일을 진행했다는 데에서 오는 화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 위험하다는 겨울 산맥을 직접 함께하겠다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게다가 저렇게나 치명적인 미소를 지으면서 말하는데!
“크흠. 흠. 근데 에델이 함께 가면 반칙 아니에요? 무효라고 하면 어떡해요?”
“굳이 함께 간다고 알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설사 안다고 한들, 제 몫의 황금 가죽을 가지러 가는 데에 문제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그 황금 가죽은 자리를 이어받을 때나 가지러 가는 거라면서요.
홀린 듯 중얼거리던 카놀라는 에델과 눈이 마주치자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웃음기가 감도는 눈동자를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도 심장이 다시 요동치고 있었다. 새빨개진 얼굴로 연신 헛기침을 하는 카놀라가 귀여워서, 에델은 한참이나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겨우 심호흡을 해서 이성을 되찾은 카놀라가 다시 에델과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하며, 에델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권력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겁니다.”
에델의 입에서 저런 소리가 나오다니! 소리 없는 비명을 되삼키며, 카놀라가 슬며시 입가를 가렸다. 아무래도 바르게 살아온 남자를 그녀가 나쁜 길로 인도한 것 같다. 그녀와 놀면서 물든 게 틀림없었다.
디라즈가 우리 착한 후사 돌려 내라며 쫓아오면 어쩌지?
*
매가 날개를 퍼드덕거리며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털북숭이 말들은 투레질을 하며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고삐를 단단히 말아 쥔 전사들은 얼굴에는 검은 칠이 되어 있었다. 보급품을 담당하는 일꾼들이 말 사이사이를 뛰어다녔다. 전사들 뒤엔 젭과 사냥개들이 들어 있는 우리가 수레에 실려 있었다.
자신들의 무기를 재차 점검한 전사들이 다시 한번 울려 퍼지는 뿔피리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열한 전사들의 가운데에 한 사람 정도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길이 마련되었다.
길의 안쪽에서 향로를 든 브리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긴 막대에 연결된 향로에선 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는데, 그 향이 무척 강해서 거리에 선 구경꾼들에게까지 퍼질 정도였다. 그라사들의 기운을 북돋아 주고 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향이었다. 향로를 든 브리도의 뒤로 잿빛 털가죽 외투를 두른 그라그포드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등에는 두 손으로도 들기 힘들 것 같은 거대한 도끼가 단단히 매여 있었다.
에델은 그보다 반보 뒤에서 따라오고 있었다. 새까만 털가죽 외투를 입은 덕분에 그의 흰 머리칼이 유독 빛나 보여서, 카놀라는 잠시 넋을 잃고 한참이나 에델을 응시했다. 일찌감치 마차에 올라 있던 카놀라는 창문을 통해 그들을 보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엄숙하고 거대한 규모라 평소처럼 촐싹거릴 수는 없었지만, 마차에서 목을 내밀어 구경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물론 그녀의 그런 행동에 몇몇 전사들이 힐끗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그거야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브리도가 든 향로엔 작은 종이 달려서 그녀가 걸을 때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느릿느릿 걸어 무리의 가장 선두에 선 브리도가 마지막으로 허공에 크게 향로를 치켜들었다. 짤랑거리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그라그포드와 에델은 선두에 도착하자마자 준비되어 있던 말에 훌쩍 올랐다.
카놀라가 탄 마차는 무리의 중간 쯤에 자리 잡고 있었다. 덕분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에델의 뒤통수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다른 그라사들의 덩치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카놀라는 에델을 보는 걸 포기하고 다른 주변으로 시선을 돌렸다. 얼굴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칠을 한 그라사들이 흉흉한 눈빛으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길의 양옆에 선 다른 구경꾼들이 신에게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몇몇 여성들은 아이를 안고 서서 말에 오른 남편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모습들을 찬찬히 둘러보던 카놀라가 마차 안으로 돌아와 엉덩이를 붙였다.
대사냥은 수도의 식량 창고를 채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연례 일정이라고 했다. 사냥하지 않고선 남은 겨울을 버틸 수 없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에델과의 연애에 들떠서 체감되지 않았던 것들이 새삼 피부로 와닿았다. 이 나라는 무척 열악한 곳이다. 산맥 가운데에 있어서 지형적으로도 좋지 않고, 기후적으로도 나쁘다. 어쩌면 신에게 이토록 의지하게 된 것도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사냥만으로도 이렇게까지 버틸 수 있었다는 건, 신의 가호가 있지 않고선 불가능해 보였다.
샤를만에서의 사냥은 그저 귀족들의 여흥거리였다. 흔한 취미 중 하나였고 특별할 것 없는 활동이었다. 상상이나 했을까? 겨우 산맥을 하나 넘어가면 그 별거 아닌 취미 생활이 중요한 생존 수단으로 사용되는 나라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버틸 수는 없다.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할 것이다.
“뭔가 없을까?”
“네?”
무심코 중얼거리던 카놀라가 맞은편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어색한 자세로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두 명의 일꾼이 보였다. 그들은 카놀라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얼른 시선을 내렸다. 마치 고양이 때문에 구석에 몰린 쥐 두 마리처럼 보였다.
바들바들 떠는 모습이 가엽기 그지없었는데 카놀라로서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꼴이었다. 저들은 마치 무슨 괴물과 함께 마차에 오른 사람들 같았다. 자신이 괴물인가?
“저기, 여기 엄청 넓은데?”
“괜, 괜찮습니다!”
이제 갓 성인식을 치렀을까? 목소리는 앳되었고 얼굴엔 젖살이 빠지지 않아 동글동글했다. 야영지에서 잡다한 보조 업무를 담당할 일꾼들이라고 했던가.
카놀라를 위해 따로 마차 하나를 더 낼 수 없었던 디라즈는 카놀라를 일꾼 마차에 태워 버렸다. 물론 에델은 즉각 자신의 말에 태우겠다며 반발했지만, 찬 바람을 맞으며 달릴 마음이 없던 카놀라는 기꺼이 마차에 올랐다. 사실 자신을 위해 마차 하나를 더 추가하라는 떼를 쓰기엔 이미 이들의 형편을 너무나 잘 알게 된 이후였다.
문제는 저 함께 탄 일꾼들이었는데, 도대체 무슨 연유인지 저들은 카놀라와 최대한 멀리 앉아서 저렇게 서로를 끌어안고 바들바들 떠는 중이었다. 이방인을 싫어하는 트리폴인이야 꽤 만나 보았지만 저렇게 무서워하는 트리폴인은 또 처음이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저들이 겁을 먹었다고 해서 딱히 카놀라가 불편할 건 없었다. 그러나 종일 저 모습을 보고 있을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와서, 카놀라는 선심을 쓰기로 했다.
“안 잡아먹을 테니까 제대로 앉아.”
딴에는 농담이라고 한 말이었다. 누가 들어도 농담일 말이었다. 그런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두 명의 일꾼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카놀라에게 되물었다.
“저, 정말입니까?”
“……빨리 제대로 안 앉으면 먹어 버릴 거야.”
“악!”
맙소사.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 앉는 일꾼들을 보며, 카놀라는 경악 어린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람? 진짜로 잡아먹힐까 봐 걱정한 거야? 진지하게?
“저희는 머, 먹을 게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부디, 부디…….”
“세상에…….”
카놀라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일꾼 하나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인정에 호소하는 중이었다. 대충 들어 보니 뭐, 맛이 없다는 둥 살이 없다는 둥 하는 소리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이방인이 식인종이라는 소문이 돌았지?
“내가 어딜 봐서 사람을 먹게 생겼어? 지금 제정신이야? 진짜 그런 짓을 할 것처럼 보여? 봐 봐! 이렇게나 연약한 팔목 안 보여?”
울컥한 심정을 참지 못한 카놀라가 제 팔뚝을 걷어 허공에 휘둘렀다. 복슬복슬한 방한복을 꾸역꾸역 걷어 낸 자리에서 팔목이 드러났다. 아주 튼튼해 보이는 골격이었다. 발끈해서 옷을 걷긴 했지만 제 눈에도 그리 연약해 보이진 않아서, 카놀라는 슬그머니 다시 옷을 내렸다. 이건 절대 뚱뚱하거나 두꺼운 게 아니다. 그냥 통뼈여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사나운 이방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저희를 제물로 태우는 거라고…….”
일꾼 하나가 카놀라의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말문을 열었다. 카놀라가 열성적으로 항의를 한 덕분인지 처음보다는 많이 누그러진 모습이었다. 그렇다곤 해도 말의 내용까지 누그러진 건 아니라서, 카놀라는 정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카놀라가 대번에 반박했다.
“사나운 이방인? 눈은 장식이야? 내가 어딜 봐서 사나워?”
말을 내뱉었던 일꾼이 슬쩍 고개를 돌려 카놀라를 외면했다.
“지금 굉장히 사나운데…….”
“그거야 너희가 사나워지게 만들었으니까 그렇지!”
억울함을 가득 담아 언성을 높인 카놀라가 눈을 빛내며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제대로 알도록 해. 난, 아니. 이방인은 식인종이 아니야. 사납지도 않고 못되지도 않아. 아니, 아니. 그건 취소. 어쨌든 그냥 너희와 똑같은 사람이야. 성격이 나쁜 사람이 있으면 좋은 사람도 있는 거잖아? 그리고 난 그중에서도 최고로 좋은 성격을 가진 샤를만 왕궁의 자랑! 카놀라란 말씀이야!”
이방인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정정해 주려는 시도는 자부심 넘치는 자기 자랑으로 끝났다. 오스카나 안젤리나가 있었다면 대번에 그녀의 말에 토를 달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모두 이번 일정을 함께할 수 없었다. 덕분에 카놀라는 마음껏 콧대를 높이며 잘못된 정보를 유포할 수 있었다.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카놀라의 말을 듣던 두 일꾼이 떨떠름하게 입맛을 다셨다. 아리송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본 일꾼들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적어도 그들이 걱정하던 사나운 식인종은 아닌 게 확실했다. 여전히 이상해 보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카놀라가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활기찬 목소리로 말했다.
“자, 내가 이름을 말했으니까 너희도 알려 줘야지. 원래 처음 만나면 통성명을 하는 거야.”
“헴슨입니다.”
“전 피아입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일꾼들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경계심을 완전히 벗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이름을 밝히는 게, 아까보단 훨씬 마음을 열었다는 것을 증명했다. 카놀라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양손을 일꾼들에게 하나씩 내밀었다.
“좋아, 잘 부탁해!”
환하게 웃는 그녀는 조금 전까지 언성을 높이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얼결에 악수를 한 두 일꾼이 어색하게 헛기침을 했다. 이상한 이방인이지만 위험한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러는 사이 바깥에서 뿔피리 소리가 길게 세 번 울려 퍼졌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놀라가 재빨리 바깥으로 시선을 돌렸다. 도열하고 있던 말들이 비로소 지면을 박차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구경꾼들이 함성을 내질렀다.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큰 소리였다.
아마 바깥에서, 조금 높은 곳에서 전체가 다 보이게 구경했다면 더욱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저기요.”
창밖으로 펼쳐진 장관을 감상하느라 정신이 없던 카놀라가 밖에 시선을 둔 채로 대꾸했다.
“‘저기요’가 아니라 ‘카놀라 님’이라고 불러. 아니면 ‘왕녀님’도 괜찮아. ‘예비 후사비’라고 하면 더 좋고.”
“아, 네. 그…… 카놀라 님.”
매들이 하늘로 높이 치솟으며 날갯짓을 했다. 뒤쪽에선 으르렁거리던 사냥개들이 짖는 소리도 들렸다. 그 요란스러운 가운데에, 피아의 조심스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안전띠 매셔야 할 것 같은데.”
오스카가 들었다면 한껏 비웃었을 것이다. 안전띠라니! 우리 왕녀님은 그런 답답한 것은 쳐다도 안 보시는 분이란다! 라면서 말이다.
카놀라는 피아의 말을 당연하다는 듯 흘려들으며 창문에만 매달려 있었다. 일꾼 마차라서 그런지 탑승감이 좋지 않아, 마차는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창틀에 매달려 움직임에 몸을 맡기니 꼭 재미있는 기구를 탄 느낌이 들었다. 그런 카놀라의 뒤로 이번엔 헴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가는 길은 험한 절벽 길이라…….”
“자고로 마차에선 전 좌석 안전띠지. 암.”
빠르게 자리를 잡고 앉은 카놀라가 자신의 띠를 찾았다. 입고 있는 옷이 워낙 부피가 커서 띠를 매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어쨌든 신속하게 띠를 묶은 카놀라가 시선을 들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두 일꾼의 모습에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왜? 뭐? 전 좌석 안전띠! 이 당연한 걸 몰랐던 거야? 그래, 몰랐을 수도 있지. 앞으로는 알아 두도록 해. 사고가 났을 때 안전띠의 유무가 얼마나 중요한데! 우리는 많은 실례를 통해 안전띠의 중요성을 알 수 있지. 가령, 이건 샤를만의 어느 항구에서 일어났던 사건이야.”
카놀라는 뻔뻔스러운 표정으로 ‘안전한 마차 탑승’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두 일꾼은 울상을 지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엄마, 이 사람 이상해.
7. 두 번째 시험
“어머! 괜찮아?”
“괜찮습…… 우욱!”
“저쪽 가서 속 비우고 와. 등 두드려 줄까?”
“아뇨, 아뇨! 두드리지 마십시― 읍!”
헴슨은 결국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냅다 어딘가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등을 두드려 주던 카놀라의 손이 허공에 우뚝 멈췄다. 딴에는 도와준답시고 두드렸는데 그게 헴슨의 매스꺼운 속을 더욱 자극한 모양이다. 눈치를 보던 피아가 슬금슬금 헴슨을 따라 달려가는 걸 보며, 카놀라가 낮게 혀를 찼다.
둘 다 마차를 타고 이렇게 멀리까지 나오는 게 처음이라고 했다. 특히나 헴슨은 평소에도 협곡까지 걸어갈 정도로 마차를 기피하는데, 이번 대사냥에선 어쩔 수 없이 마차를 타게 된 거라고 했다. 그런 그가 반나절이 넘도록 요동치는 마차를 타야 했으니, 그 속이야 말이 아니게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첫 번째 야영지에 도착할 때까지 구토를 참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오시는 길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습니까?”
팔짱을 끼곤 혀를 차던 카놀라가 퍼뜩 뒤를 돌아보았다. 분주한 그라사들 틈에서 바쁘게 일해야 할 에델이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있었다.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반갑게 그를 불렀다.
“에델! 바쁜 거 아니에요?”
“안 바쁩니다.”
단호하고 빠르게 대답하는 에델의 어깨 너머를 힐끗 본 카놀라가 애매하게 웃었다.
“……저 뒤에서 울란이 애타게 부르고 있는데?”
그녀의 말에 에델도 고개를 반쯤 돌려 제 뒤를 확인했다. 오매불망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울란은 후사가 자신을 돌아보자 화색이 도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반색이 무색하게도, 에델은 가차 없이 그를 외면했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울란의 한숨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와서, 카놀라는 한참이나 입술에 힘을 주곤 애써 호들갑스러운 마음을 억눌렀다. 첫 만남에선 그렇게나 무뚝뚝했던 사람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난 아무 문제 없어요. 마차는 탑승감이 안 좋았지만 나름 재미있었고, 같이 타고 온 일꾼들과도 금방 친해졌는걸요? 그러니까 그렇게 물가에 내놓은 애처럼 보지 않아도 돼요.”
일꾼들과 금방 친해졌다는 말에 못마땅한 표정을 짓던 에델이 퍼뜩 고개를 저었다.
“어린애 취급하려던 건 아닙니다.”
“오, 기분 나쁘단 말은 아니었어요. 그만큼 날 생각해 주는 거니까 오히려 좋아요. 하지만 당신은 후사로서 해야 할 일들이 있잖아요? 난 그 일에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아요.”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방해가 될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잠깐 얼굴 볼 시간은 있습니다. 그리고…….”
내내 거침없이 말을 이어 오던 에델이 문득 말끝을 흐렸다. 그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며 말을 이었다.
“대사냥의 첫 번째 사냥감은 디라즈께서, 두 번째 사냥감은 제가 잡아야 합니다. 그러니 곧 사냥하러 출발할 겁니다. 아마 밤이 돼서야 돌아오겠죠.”
카놀라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뭔가 설명이 끝난 어투는 아니었는데, 에델은 말을 멈추었다.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던 카놀라가 결국 먼저 질문을 했다.
“뭐 하고 싶은 말 있어요?”
에델은 답지 않게 머뭇거렸다. 조금은 곤란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고 고민하던 그가 마침내 느릿느릿 입술을 떼었다.
“……샤를만에서는 레이디의 기도가 기사의 무운을 불러낸다고 하셨죠.”
그것은 카놀라가 대련장에서 했던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카놀라는 에델이 이렇게 머뭇거리는 이유를 깨달았다.
세상에! 어쩜 사람이 이렇게나 귀엽지?
카놀라는 당장에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켰다.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하고 싶었지만, 자꾸 입가가 풀어져서 헤실댈 수밖에 없었다. 세상 사람들! 내 애인이 이렇게나 귀여워요! 멋지고 귀엽고 예쁘고 혼자 다 하는 남자예요! 확성기라도 들고 뛰어다니며 외치고 싶었다.
헛기침하며 날뛰는 심정을 꾹꾹 밟은 카놀라가 씩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내 기도는 당신에게 완벽한 승리를 선물할 거고 말이죠.”
경쾌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은 그녀가 손을 불쑥 내밀었다. 살짝 시선을 내리고 있던 에델이 슬그머니 제 손을 그녀의 손 위에 올렸다. 기도를 받고 싶어서 미리 장갑까지 벗어 둔 그의 준비성에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카놀라는 어금니를 꾹 깨물어 겨우 그것을 참아 냈다. 그러곤 투박한 에델의 손을 꼭 잡았다.
“당신의 검에 무한한 찬사를.”
제 손등에 키스하는 카놀라를, 에델은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고개를 든 카놀라와 눈이 마주치자 엷은 미소를 지었다. 크지 않은 표정 변화였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기쁨을 담아내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카놀라는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 남자에게 반하지 않는 날이 오긴 할까? 한평생 그런 게 가능하긴 할까?
“이곳은 검은 늑대들이 최근 무리 지어 출몰하고 있는 곳입니다. 절대 야영지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전사들을 두고 가고 싶지만, 첫 사냥이라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요! 나 몸 사리는 데엔 선수예요!”
카놀라가 의기양양하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빈말이 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제 몸 사리는 데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에델이 없는 야영지에선, 바깥을 나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아무리 가죽이 내장된 방한복으로 온몸을 무장했다고 해도 말이다.
늑대는커녕 토끼도 못 잡는 저 자신을 아주 잘 알고 있는데 뭐 하러 위험을 자초하겠는가?
카놀라의 자신만만한 대답에 에델이 나지막하게 숨을 뱉었다. 정해진 지점에 다다르기 전까진 에델도 남들처럼 사냥을 나갔다 와야 한다. 야영지에서 종일 곁을 지켜 줄 수 없으니 아쉬운 대로 울란이나 롬을 붙여 두고 싶지만, 첫 사냥이라 그것도 불가능했다. 첫 사냥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첫 사냥만 다녀오면, 그 이후엔 다섯 전사 중 둘 정도는 카놀라에게 붙여 둘 수 있다. 물론 눈치껏 그가 직접 빠질 수도 있고. 그러니 오늘만 저 두 명의 일꾼에게 맡겨야지.
에델은 풀숲에서 어기적어기적 걸어 나오는 헴슨과 그 옆의 피아를 힐끗 보았다. 그의 전사들만큼은 아니지만, 저 두 명의 일꾼들은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그라사들이었다. 에델이 직접 저들을 골라 마차에 태울 정도로 말이다.
“막사에 콕 박혀서 절대 안 나올게요.”
다시 한번 확답하는 카놀라의 모습에 에델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그는 울란의 부름을 무시할 수 없었다. 아쉽게 손을 놓아준 카놀라가 에델의 뒤통수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두 사람의 모습을 목격하게 된 헴슨과 피아가 주춤거리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짜 정혼녀가 맞으셨군요?”
파리한 안색의 헴슨이 에델과 카놀라를 번갈아 보았다. 환한 표정으로 에델을 바라보던 카놀라가 안색을 바꿔 헴슨을 흘겨보았다.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단 말야? 우린 정략적이기 이전에, 연애하는 사이라고!”
연애라니! 피아는 기겁을 하며 헴슨의 팔에 매달렸다.
“이방인과 연애라니!”
이건 단순히 식인종이라는 누명을 벗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다. 그것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에델 때문에 한껏 둥둥 떠다니던 마음이 수직으로 추락하는 것을 느끼며, 카놀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선 당장 사냥을 떠날 그라사들이 준비를 하느라 바쁘고, 일꾼들은 야영지를 세우느라 정신없었다. 두 명 정도의 일꾼은 잠깐 붙잡아 둬도 아무도 모를 테지.
“봐 봐, 이리 와. 여기 앉아 봐.”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은 카놀라가 제 옆을 손으로 탕탕 내리쳤다. 두 사람이 엉거주춤 카놀라의 앞으로 다가왔다. 앉지는 않고 어색하게 서 있기만 한 두 사람의 모습에, 카놀라가 한숨을 내쉬며 팔짱 꼈다.
“자, 이방인이 왜 문제인 건지 설명해 봐.”
이글거리는 카놀라의 눈빛에 피아가 마지못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누군가 불쑥 끼어들어 먼저 말을 했다.
“제가 아주 잘 설명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세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카놀라의 뒤로 향했다. 새롭게 등장한 사람의 정체를 확인한 피아와 헴슨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제사장님!”
카놀라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에델은 사냥을 나갈 준비를 하느라 제사장이 카놀라에게 접근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어쩌면 제사장은 에델이 바쁜 타이밍을 골라서 접근했을지도 모른다.
티보치나에게 어느 정도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브리도의 저 주름진 손이 아주 소름 끼치게 보였다. 자연히 나오는 목소리도 곱게 들리지 않았다.
“그럼 해 주실래요? 납득이 가능한 설명이요. 비논리적인 설명 말고, 앞뒤가 맞는 설명.”
퉁명스러운 카놀라의 대꾸에 브리도가 한쪽 입매를 슬쩍 끌어 올렸다.
“마치 제가 비논리적인 주장을 할 것이라고 믿으시는 듯하군요.”
그야 당연하다. 이방인이라고 배척하는 주제에 제대로 된 이유도 여태껏 제시하질 못하고 있지 않았나. 기껏해야 전쟁의 역사나 내내 들먹이면서 말이다. 하다못해 이방인 때문에 병이라도 옮는다고 하면 이해를 하겠다. 팔짱을 낀 카놀라가 턱을 추어올리며 말했다.
“이방인과 얽혀 좋았던 역사가 없다는 소린 지긋지긋하게 들어서요. 그놈의 역사는 천 년이 지나도 우려먹을 거예요?”
전쟁은 물론 잊어선 안 될 역사다. 일방적으로 당한 역사라면 더욱 그러겠지. 하지만 그것이 이 세상 모든 이방인을 배척하게 만드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때와 지금은 엄연히 상황이 다르질 않나. 게다가 자신은 에데사인도 아닌데!
“역사를 잊고서 어찌 미래를 맞이하겠습니까?”
“역사를 반추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거죠. 역사에 갇히는 게 아니라. 에데사의 침략 전쟁은 한참이나 오래된 과거고, 이제 와선 그들이 이곳을 침략할 이유가 없어요.”
기다렸다는 듯 대꾸하는 카놀라의 모습에 브리도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어째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네?”
브리도는 묘한 시선으로 카놀라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곧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외면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언급하기엔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을 잇지 못하던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지금 얘기해요!”
“당신과는 달리 전 제사장으로서 해야 할 책무가 많습니다. 놀러 온 게 아니니까요. 여유가 생기면 전갈하겠습니다.”
여유가 생기면 전갈을 하겠다는 소리는, 지금 말해 줄 생각이 없다는 거였다. 공개적인 장소라고 해 봤자 지금 듣고 있는 사람은 일꾼 둘뿐인데, 얼마나 은밀한 이야기기에 이들 앞에서도 언급을 못 한다는 건가. 아무리 봐도 그냥 핑계처럼 보였다. 카놀라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지금 되게 상투적인 악당의 대사를 하고 있다는 거 아세요? 이런 식으로 꾀어내는 거 아주 수상해요!”
“의심스러우면 안 들으시면 되겠네요.”
브리도는 아쉬울 게 없다는 듯 잘라 말했다. 그녀야 아쉬울 게 없긴 하겠지. 저렇게나 이방인을 싫어하는데 무슨 내용이든 설명해 주고 싶을까. 다만 실컷 뭔가 있는 것처럼 운을 띄우고선 정작 알맹이를 숨기는 게 영 미심쩍어 보였다.
카놀라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의심스러운데 궁금하다.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에데사가 아직도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는 건가? 하지만 에델의 어머니가 에데사인이었는데? 에데사가 왜 여길? 생각할수록 궁금증만 늘어나서, 나오는 목소리도 자연히 짜증스러워 졌다.
“감질나게 운만 띄울 거면 대체 왜 여기까지 와서 말을 건 거예요?”
“놀고 있는 일꾼들이 보여서요. 손이 한참 모자라거든요.”
제사장의 말에 헴슨과 피아가 뜨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노려보던 제사장이 혀를 차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돌아갈 것 같던 브리도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카놀라를 힐끗 보았다. 냉소적인 시선으로 카놀라를 응시하던 그녀가 냉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리고 정말 후사비가 되고 싶다면, 뭐라도 돕지 그러십니까? 트리폴엔 아무것도 못 하는 귀한 공주님은 필요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니 할 말이 없어졌다. 카놀라는 분하다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사장은 이번에야말로 할 말이 끝났다는 듯 성큼성큼 멀어졌다. 카놀라는 씨근덕거리며 그런 브리도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어우, 얄미워!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곁에 있었다면 함께 욕해 줬을 텐데! 지금처럼 두 사람의 부재가 아쉬운 적도 없었다.
카놀라가 분통 터져 하는 사이, 두 명의 일꾼들도 슬금슬금 걸음을 옮겨 일을 찾아 나서려 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카놀라에게 각각 팔을 잡히는 바람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딜 가? 우리 대화 안 끝났잖아. 얼른 말해 봐. 이방인인 게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하지만 제사장님이 말씀해 주신다고…….”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멀어진 제사장을 힐끗 확인한 카놀라가 재촉하듯 두 사람의 팔을 흔들었다. 어색하게 서로를 돌아보던 헴슨과 피아가 헛기침을 했다. 먼저 입을 연 건 피아였다.
“그야 이방인들은 언제나 우릴…… 공격했으니까요?”
“하지만 정복 전쟁은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잖아.”
“그들은 이후로도 계속 산맥을 침범했는걸요. 전쟁은 없었지만…….”
카놀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제사장이 말한 침략과 같은 의미인 걸까? 정말로 에데사인들이 지속적으로 이곳을 공격했다고?
카놀라는 에데사에 대해 아는 것들을 떠올려 보려 했으나 딱히 유용한 정보는 생각나지 않았다. 샤를만의 입장에서 에데사는 먼 나라다. 겨울 산맥을 넘어가야 나오는 나라이니, 근방에 국경을 대고 있는 다른 나라를 두고 굳이 그 먼 곳을 찾아갈 까닭이 없었다. 트리폴보다는 알려진 게 많았지만 그래 봤자 아주 기본적인 내용뿐이었다. 드래곤의 가호를 받은 신성 제국이라든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얼마나 자주?”
“그건 잘 모릅니다. 그런 정보는 함부로 유출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국경을 지키는 그라사들은 신전 출신들이라서 우리 같은 평범한 그라사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거든요.”
“신전 출신…… 부모를 잃은 아이들 말이야?”
“네. 맞아요. 그들은 오직 트리폴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선택받은 그라사들이죠. 그래서 가장 위험한 곳을 지키러 가는 거예요.”
부양할 가족이 없다는 건 한목숨을 오롯하게 나라에 바칠 수 있다는 의미다. 그 믿음이 가족을 잃은 그라사들을 지탱했다. 신녀가 된 이들도, 그라사가 된 이들도 오직 그 믿음으로 버티며 성장한다. 카놀라는 언젠가 티보치나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부모를 잃었다는 건 신을 위해 봉사할 사명을 타고났다는 증거라고 했던 말.
묘한 표정으로 피아를 바라보던 카놀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사냥 준비를 마친 그라사들이 무리를 지어 출발하는 게 보였다.
“답이 없는 거구나.”
뭉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개인을 죽이고 하나의 집단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다.
에데사가 정말로 아직 호시탐탐 이곳을 노리고 있는 거라면, 트리폴 입장에선 그들을 막아 내기 위해 똘똘 뭉치는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똘똘 뭉쳐서 얻은 게 이토록 숨 막히는 폐쇄성이라면 결국 결과는 똑같겠지. 디라즈는 이 숨통을 트이기 위해 에데사의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린 것일지도 모른다.
“저희 이제 일하러 가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 응. 그래. 얼른 가 봐.”
카놀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두 일꾼의 등을 떠밀었다. 일꾼들이 엉거주춤 일감을 찾아가는 것을 물끄러미 보던 카놀라가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도대체가 이 나라는 답이 없다. 문제점을 찾아낸 순간 사실 더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아낸 기분이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대체 여긴 뭐 이렇담? 에데사는 대체 왜 여길 탐내는 거지? 에데사는 이 근방에서도 제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거대한 나라다. 비옥한 평야와 발달한 문화를 가진 나라. 이 추운 산맥을 탐낼 이유가 전혀 없었다.
‘어째서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째서 없긴. 이곳은 그냥 춥고 험준한 산맥이니까 그렇지. 땅이 부족해서 침략했을 리는 없지 않나. 비옥한 땅을 가지고 있는 주제에! ……비옥한 땅. 평야. 평야? 설마 평야에 만족을 못 하고 이 산맥을 탐내는 건가? 하지만 뭐 하러?
“아, 머리 아파.”
카놀라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역시 이런 고민은 자신과 맞지 않는다. 속 편하게 놀러 다니는 게 체질에 맞는데!
마음 같아선 에데사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녀는 후사비를 목표로 하는 처지였다. 단지 에델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눌러앉는 건 부족하다. 후사비가 되고, 장차 군주비가 될 텐데 귀한 공주님처럼 앉아만 있는 건 이제는 불가능할 것이다. 늦으나 빠르나 결국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에델의 곁을 한평생 지킬 작정인 이상.
앉아 있던 바위에서 폴짝 일어난 카놀라가 후다닥 낯이 익은 일꾼들을 찾아 나섰다.
“헴슨! 피아! 나 전서응이 필요해!”
트리폴 공부만으로도 지긋지긋한데 에데사까지 공부해야 한다니!
*
“잘못 읽은 거 아니고?”
“직접 봐 봐.”
자신에게 건네진 서신을 받아 든 안젤리나가 돋보기를 꺼냈다. 잔뜩 눈살을 찌푸리곤 글자에 바짝 돋보기를 가져가니, 글자가 읽기 좋도록 커다랗게 보였다. 고개를 조금 뒤로 빼서 찬찬히 글자를 읽어 내린 안젤리나가 헛웃음을 흘렸다.
“우리 왕녀님이 철드셨나. 다신 안 보겠다던 책을 이렇게나 많이 찾으시다니.”
“갑자기 웬 에데사 타령이신지.”
혼잣말하듯 중얼거리던 오스카가 힐끗 서신을 보았다. 카놀라가 떠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서신이 날아왔다. 혹시 카놀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싶어 혼비백산한 마음으로 서신 앞에 모여 앉은 오스카와 안젤리나와 루덱은 생각지도 않은 명령을 받게 되었다. 에데사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라는 내용이었다. 책이며 문서며, 뭐든 좋으니 돌아왔을 때 바로 확인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당연히 세 사람은 눈을 의심했다. 트리폴과 관련된 지식을 공부할 때에도 그림만 찾던 분이 이렇게 자처해서 책과 문서를 본다고 하니 대뜸 의심부터 들었다. 혹시 다른 사람이 왕녀님을 흉내 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
“역시 제가 따라갔어야 했습니다. 벌써 이런 이상한 소릴 늘어놓으시다니.”
루덱이 자책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퍽이나 갈 수 있었겠나? 왕녀님은 몰라도 우린 여전히 저들에게 경계 대상인데.”
카놀라는 상대방을 저도 모르게 제 편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것이 시중인들에게까지 적용되느냐 하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달랐다. 여전히 시중인들은 많은 트리폴인들의 의심과 경계 어린 눈초리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그나마 안젤리나나 오스카는 많은 나이 탓에 좀 덜하지만, 혈기왕성한 청년 루덱은 특히나 전사들의 살벌한 시선을 받는 중이다. 루덱이 이끄는 병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상적인 훈련조차 눈치를 보며 하고 있는데, 저 중요한 행사를 따라가게 했을 리가 없다.
“그나저나 책은 어떻게 빌립니까? 빌려줄까요?”
“음? 당연히 왕녀님을 팔아야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한 안젤리나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무릎을 짚으며 앓는 소리를 내는 그녀의 뒤로, 오스카도 허리를 두드리며 일어섰다.
“자, 얼른 가세.”
혼자 심각한 눈으로 서신을 바라보던 루덱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노인의 모습에 루덱이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저도 말입니까?”
루덱은 카놀라와 사이가 좋은 티보치나에게 정보를 물어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셋이 도서관을 우르르 찾아가는 것보단 흩어져서 정보를 찾는 게 더 빠를 테니까. 루덱의 의아한 시선에 안젤리나가 혀를 찼다. 오스카도 한심하다는 눈으로 루덱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목소리에는 책망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하지. 우리가 그 많은 책을 어찌 다 들고 오나?”
“우리 나이에 뼈라도 부러지면 다시 붙지도 않을 걸세.”
“……아.”
루덱이 더는 반박하지 않고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생각했다. 어쩌면 카놀라가 그를 애써 데려가지 않은 건, 이 두 노인의 수발을 들게 하려는 심산이 아니었을까 하고.
*
“이번에야말로 제 걱정을 공감하실 겁니다!”
라우렐은 치미는 짜증을 억누르기 위해 깊은숨을 들이켰다.
“트리폴의 야만성은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었습니다!”
전보다 족히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책과 문서들을 양팔에 끼고 나타난 헤세온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동안 책을 쌓아 놓고 산다기에 마음을 잡고 공부에 몰두하는 모양인가 보다 짐작했는데. 설마하니 헤세온이 내세우고 있는 저 쓸데없는 주장을 뒷받침해 줄 자료를 모으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지겨운 놈 같으니.
“여태 포기 안 하고 뭘 하셨습니까?”
“네?”
무심코 속마음을 말한 라우렐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다시 한번 깊은 심호흡을 한 그가 냉담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아닙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이것 좀 보십시오. 글쎄, 에데사에선 트리폴을 아예 나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헤세온은 들고 있던 몇 개의 책 중 하나를 라우렐의 앞에 펼쳐 두었다. 라우렐이 눈만 힐끗 굴려서 내용을 훑어보았다. 딱 세 줄만 읽어 봐도 이 책의 저자가 에데사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에데사와 트리폴의 악연이야 역사를 배울 때 한 줄 정도로 읽어 보긴 했다. 험준한 겨울 산맥 너머의 나라들이라서 그 이상의 관심을 가진 적은 없지만 말이다.
“그렇습니까?”
무미건조한 라우렐의 대꾸에 헤세온이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이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에데사는 언제고 다시 정복 전쟁을 재개할 겁니다!”
“에데사가 심심하답니까?”
“와닿지 않으시겠지만 사실입니다. 제가 우연히 순례 중인 에데사인들을 만났는데, 겨울 산맥의 조사가 지속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 보십시오.”
펼쳐진 책 위에 문서 하나가 얹어졌다. 겨울 산맥의 지도였다. 지도라고 해 봤자 구체적이진 않았다. 다만 헤세온이 짚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헤세온의 손가락 주변으로 여러 가지 기호가 그려져 있었다.
“트리폴의 영토군요. 남의 나라를 멋대로 조사하는 중이랍니까?”
이 지도에 표시된 기호대로라면, 에데사는 트리폴의 국경 땅을 파헤친다는 소리였다.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묻는 라우렐에게 헤세온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설명을 이었다.
“에데사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트리폴이 에데사에 전혀 굽히지 않는 바람에 에데사에선 막심한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겁니다!”
“인명 피해라, 마을 하나 잃었다던가요?”
“두 개의 도시가 날아갔답니다.”
책을 옆으로 치워 버리려던 라우렐의 손이 멈칫했다. 제국의 도시 두 개를 날려 버렸다면 전혀 가볍게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다.
“무슨 소립니까?”
“에데사에서 전염병이 돌아서, 도시 두 개를 날려 버렸다지 뭡니까!”
전염병. 얼핏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에데사에 전염병이 돌아서 도시를 폐쇄해 버렸다더라 하는 풍문. 굳이 확인할 까닭은 없는 이야기라 에데사인들의 샤를만 입국만 제지하는 정도로 그쳤던 일이었다. 어차피 에데사 쪽에선 샤를만까지 찾아오는 일도 드물어서, 수가 적은 에데사인들을 격리하는 데엔 무리가 없었다.
“그게 트리폴과 무슨 상관입니까?”
“그 전염병을 트리폴에서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겁니다! 이 얼마나 악독한 자들입니까? 게다가 겨울 산맥에 신의 영약이 있다는 소문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그게 사실이랍니다. 그런데 트리폴이 내놓지 않아서 사람들을 다 죽게 만든 겁니다.”
사람이 죽어 나가니 책임 전가는 해야겠고, 그래서 만만한 트리폴로 화살을 돌렸다는 소리로 들렸다. 게다가 신의 영약이라니. 물론 치료제를 찾을 수 없는 전염병이었다면 공포에 질려서 뭐라도 믿고 싶었을 테지만 신의 영약이라니?
라우렐은 작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설사 그런 게 있다고 해도 트리폴과 에데사의 관계를 생각하면 내놓지 않는 게 얼핏 당연해 보이기까지 했다.
“트리폴은 야만스러운 나라입니다. 오히려 에데사는 낙후된 트리폴을 교화시켜야 한다는 희생정신을 가지고 접근했는데 글쎄 트리폴과는 도통 말이 안 통했다는 거죠!”
아무래도 새로 사귄 에데사인 친구가 말을 아주 잘하는 모양이다. 설명하다 혼자 감정이 격해져서 주먹을 불끈 쥐는 헤세온의 모습에, 라우렐은 이마를 짚었다.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침묵하던 라우렐이 느릿느릿 그의 말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베르긴 공자의 말은, 에데사가 트리폴에 협조 요청을 하지 않고 멋대로 영토를 침범했다가 공격을 받고선, 상대가 야만인이라고 온 주변국에 호도하는 중이라는 거군요.”
“어…… 아무튼! 에데사와 샤를만의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얼른 왕녀님을 다시 모셔 와야 합니다.”
친분이라고 부를 만한 게 존재했던가? 샤를만의 왕자인 자신도 모르는 에데사와 샤를만의 친분을 운운하는 모습이 참 눈물겨울 정도였다. 라우렐은 조소를 참지 못하며 그에게 되물었다.
“그 애가 이곳을 떠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공자는 그 애를 데려올 수 있으리라 봅니까?”
정말 문제가 있었다면 누구에게든 연락이 왔을 것이다. 카놀라 본인에게서든 루덱에게서든, 트리폴의 군주에게서라도. 그런데 깜깜무소식이다. 심지어 지참금을 반절만 보냈는데도 깜깜무소식이다. 더 보내 달라는 청도, 우릴 무시하느냐는 항의 서한도 없었다. 라우렐은 카놀라가 아주 잘 적응하고 있으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저 머저리 같은 새끼는 그와 전혀 생각이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물론 파혼이 큰 흠이긴 합니다. 그러나 왕녀님에 대한 애정만으로 그 모든 흠을 무릅쓸 관대한 사내가 틀림없이 있을 겁니다. 가령 저 같은…….”
“베르긴 공자. 저는 같은 말을 반복하는 걸 싫어합니다.”
라우렐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신이 나서 말을 잇던 헤세온이 찔끔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그제야 그는 라우렐의 심기가 불편해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안타까우면, 직접 가 보십시오.”
“크흠, 저는 그저…… 타국인인 제가 직접 나섰다가 혹 입장이 난처해지시진 않을까 저어되어서…….”
우물거리며 변명을 늘어놓는 꼴이 아주 많이 보기 싫었다. 라우렐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정말이지 마음 같아선 내쫓아 버리고 싶다. 저놈의 집안이 아니었으면 진즉 학회에서 탈퇴시키고 당장 강제 출국시켜 버렸을 텐데.
당장 내쫓아 버리라는 명령이 목구멍까지 치솟아도, 베르긴 가문이 학회에 낸 기부금을 생각하면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게다가 지금 베르긴 가문과 틀어지면, 그의 호전적인 여동생이 옳다구나 하며 냅다 가로채 갈 것이다. 아니면 간사한 남동생이 끼어들지도 모르고.
역시 뭔가 트집거리가 필요했다. 헤세온의 안위를 신경 쓰지 못할 정도로 납작 엎드릴 만한 그런 트집거리.
“그 애가 스스로 돌아오길 바란다면, 제가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반대로 그 애가 원치 않는데 억지로 데려온다면 문제가 되겠죠. 저는 지금 어떠한 국제적 문제도 일으키고 싶지 않습니다. 공자께선 공식적으로 먼저 나서지 못하는 제 상황을 잘 이해하실 수 있으시겠죠?”
“무, 물론입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라우렐이 팔꿈치를 팔걸이에 기댄 채로 턱을 괴었다.
“아셨으면 이만 나가 주십시오.”
헤세온은 대화를 더 이어 나가고 싶은 눈치였으나, 결국 엉거주춤 책과 문서들을 정리해서 옆구리에 끼웠다. 주섬주섬 책을 챙겨 나가려는 그를 물끄러미 보던 라우렐이 문득 입을 열었다.
“아, 공자.”
그 부름에 헤세온이 밝아진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도 라우렐이 나서서 카놀라를 데려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라우렐은 그의 바람을 이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혹시 그 신의 영약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뭔지 들으셨습니까?”
기대했던 말이 아니라서인지, 들떴던 표정이 시들하게 가라앉았다. 입맛을 다시던 헤세온이 미간을 좁히며 기억을 더듬었다.
“아……그게 무슨, 약초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만병을 고칠 수 있답니다. 이름이 하아르였나?”
“하와르요.”
가물가물한 기억을 애써 돌이키던 헤세온이 밝아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습니다! 왕자님도 역시 진즉 그들의 야만성에 대해 깊은 공감을 하고 알아보신 거군요!”
더 들을 필요도 없었다. 라우렐은 아예 그를 외면하며 무심한 목소리로 인사말을 뱉었다.
“멀리 안 나가겠습니다. 살펴 가십시오.”
뭉그적거리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고서야, 라우렐은 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병통치약 하와르에 대한 전설이라면 들어 본 적이 있다. 드래곤의 피를 머금고 자란 식물이라 그 잎사귀 하나면 못 고치는 병이 없고 줄기만으로 죽어 가는 이를 살리고 뿌리로는 죽은 사람도 일으킨다는 전설의 꽃.
‘겨울 산맥 꼭대기에 드래곤이 산다더라.’라는 우스갯소리를 생각하면, 하와르가 그곳에 있을 거라고 주장하는 에데사의 입장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도시 두 개를 잃을 정도로 극심한 전염병에 시달렸다면 그런 전설에라도 기대고 싶었겠지.
그렇다고는 해도 조사를 이렇게나 지속해 온 걸 보면 뭐가 있긴 한 모양이다. 그게 진짜 하와르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뭐가 되었든 유용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라우렐은 턱을 문지르며 헤세온이 서 있던 자리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신의 영약이라.
매번 전쟁의 구실만 찾아다니며 병사들을 사선으로 이끄는 왕녀보단, 신의 영약을 찾아내 그것으로 한 명의 백성이라도 더 살리려 노력하는 왕자 쪽이 좀 더 보기 좋겠지?
*
카놀라는 브리도의 말대로 뭐라도 도와 볼까 싶어서 야영지를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그녀가 도울 만한 일이 딱히 없었다. 게다가 물건 나르는 일이라도 도우려 하면 하나같이 기겁을 해 대는 통에, 그저 얌전히 구경이나 하며 기다리는 게 진정으로 돕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처 없이 구경이나 하던 카놀라의 눈에 어느 장소가 들어왔다. 철장이 쌓여 있는 야영지 외곽이었다. 정확히는 그 철장 안의 동물에게 시선이 꽂혔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 이렇게 쭈그리고 앉아 눈을 바짝 들이대는 중이었다.
어차피 쇠창살에 막혀 가까이에 얼굴을 댈 수도 없다. 그렇다곤 해도 이렇게나 바짝 다가왔는데 쇠창살 안의 젭은 그녀에게 경계심을 보이지 않았다. 납작 엎드려서 까만 코를 벌름거리던 젭이 앞발로 쇠창살을 마구 긁었다. 당연히 조금의 흠집도 나질 않았다. 그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카놀라는 확신했다.
이놈이구나!
“앗, 위험합니다! 보기엔 귀여워도 사실 사나운 동물입니다!”
비어 있는 철장을 옮기던 헴슨이 카놀라를 발견하곤 놀라서 다가왔다. 카놀라는 그런 그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확신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얘는 그냥 젭이 아니야.”
“네?”
“얘는 라디야.”
도통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라, 헴슨은 대꾸할 말도 떠올리지 못하고 멀뚱멀뚱 카놀라를 보았다. 젭의 행동을 좀 더 관찰하던 카놀라가 손으로 젭을 가리키며 설명을 했다.
“자, 봐 봐. 내 신발에 집착하잖아.”
들고 있던 철장을 내려놓은 헴슨이 슬그머니 카놀라의 곁으로 다가왔다. 과연 젭은 카놀라의 털신 쪽에 코를 박고 연신 킁킁거리는 중이었다. 홀린 듯 카놀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헴슨이 카놀라와 함께 젭의 행동을 구경했다. 젭의 눈동자는 카놀라의 신발에 고정되어 있었다. 젭은 당장이라도 나가고 싶다는 듯 발톱으로 쇠창살을 긁어 댔는데, 나중엔 급기야 낑낑거리는 소리까지 내고 있었다. 애처로운 젭의 울음소리에 카놀라와 헴슨은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작고 귀여운 동물이 뱉는 안쓰러운 울음은 보는 사람이 당장 철장 문을 열어 주고 싶게 만들었다.
“신발에 뭐라도 바르셨습니까?”
“악, 깜짝이야!”
“으악!”
머리 위에서 불쑥 들리는 물음에 카놀라와 헴슨이 동시에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짧은 비명에 되레 놀란 피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보았다.
“뭐야, 언제 왔어?”
“아니,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시나 궁금해서…….”
멋쩍게 설명한 피아가 고개를 쭉 빼곤 앞을 살폈다. 순식간에 세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된 젭은 여전히 카놀라의 신발에만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젭 말이야. 내 신발에 엄청 집착하는 라디라는 녀석이거든.”
“라디요?”
“응. 이름이야. 라디. 반드시 기억해 뒀다가 자주 불러 주도록 해. 가능하면 주변에 소문도 많이 내고. 참고로 라디라는 이름은 라다크에게서 따온 거야. 라다크랑 내기했는데 내가 이겼거든.”
자랑스럽게 말한 카놀라가 싱글벙글 웃으며 젭을 돌아보았다. 그러다 퍼뜩 무언가를 떠올리곤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피아와 헴슨에게 속닥거렸다.
“아 참! 내가 라다크에게 반말한 건 절대 비밀이야.”
눈까지 마주치며 신신당부를 하는 그녀의 모습에 피아와 헴슨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언급한 ‘라다크’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낼 겨를도 없었다.
두 사람의 대답을 확인하고서야 카놀라는 다시 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헴슨과 피아도 얼떨결에 그녀를 따라 눈을 돌렸다. 철장 안을 몇 번 빙글빙글 돌던 젭이 다시 카놀라의 신발 쪽으로 코를 처박았다.
“근데 정말로 이 녀석 왜 이러는 걸까요?”
헴슨이 미간을 찌푸리며 혼잣말을 하듯 물었다. 그 말에 헴슨과 마찬가지로 카놀라의 옆에 쭈그리고 앉은 피아가 대신 대답했다.
“아무래도 신발에서 이 녀석이 좋아할 만한 냄새가 나는 모양입니다. 젭은 후각이 예민한 만큼, 좋아하는 냄새엔 사족을 못 쓰거든요. 어쩌면 둥지로 착각한 것 같기도 하고…….”
내내 젭을 관찰하던 카놀라가 슬쩍 옆을 돌아보았다.
“……내 발을?”
“흠흠.”
피아가 카놀라의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런 피아를 흘겨보던 카놀라가 다시 젭에게 시선을 돌렸다.
“근데 얘는 왜 사냥에 안 따라간 거야?”
“아, 첫 사냥은 가장 우수한 짐승을 이끌고 가야 합니다. 아마 이 녀석은 훈련 때 뭔가 실수를 한 모양입니다. 그래도 후사의 젭이니 두 번째 사냥부터는 함께 다니겠죠.”
“후사의 젭?”
사육장에서 기른다기에 따로 주인을 두고 있는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 녀석은 이번 사냥이 첫 사냥이라고 했는데. 카놀라가 의외라는 눈으로 라디를 내려다보았다.
신발에 코를 박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것 같은 이 녀석이 에델의 젭이었어?
대련장에서 에델은 딱히 자신의 것이라는 티를 내지 않았었다. 게다가 이름도 다섯 전사가 자기들 마음대로 지으려고 했었고. 아니, 생각해 보면 애초에 다섯 전사가 훈련을 시켰다는 것 자체부터가 특별하다는 의미였나?
에델의 젭에게 멋대로 라디라는 이름을 붙여 주다니. 카놀라는 갑자기 에델에게 무척 미안해졌다. 그런 카놀라의 생각을 알 리 없는 피아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모처럼 태어난 우수한 품종의 젭이니까 당연히 후사께서 다루셔야죠. 여기 이 털을 보면, 다른 젭들에 비해 굵고 빽빽한 데다 깁니다. 추위에 강하다는 의미죠. 겨울 산맥을 돌아다녀야 할 동물에겐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게다가 이 매끈한 수염을 보십시오. 중심이 완벽하게 잡혀 있죠? 수염은 적을 감지하고 반응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좀 더 자라면 뛰어난 추적 능력을 보여 줄 겁니다.”
손가락으로 젭의 등줄기를 가리키며 주절주절 늘어놓는 설명이 아주 자세했다.
그는 급기야 철장 문을 열었는데, 당장 카놀라의 신발로 뛰어들려는 라디를 능숙하게 잡아챘다. 그러곤 들어 올려 눈앞에서 젭의 긴 수염을 보여 주었다. 충분히 보여 주고 다시 철장에 넣는 솜씨까지 완벽했다. 놀란 눈으로 피아의 행동을 보던 카놀라가 신기하다는 마음을 숨기지 않으며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잘 다뤄?”
그제야 자신이 좀 흥분했다는 것을 자각했는지, 피아가 아차 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렸다. 피아의 얼굴에 약간의 홍조가 돌았다.
“어머니가 사육장에서 일하십니다. 그 밑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여기 있는 짐승의 상당수는 피아의 어머니가 키운 녀석들일 겁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헴슨이 넌지시 말을 얹었다. 카놀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피아를 보았다.
“와, 대단하다!”
생각해 보면 전사들만큼이나 많은 동물도 함께하는 일정이다. 저 동물들을 관리하고 돌볼 일꾼도 필요하겠지. 피아는 동물을 돌보기 위해 파견된 일꾼인 것이다. 정말로 허투루 끼어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자신만 빼면.
얼떨떨하게 피아를 보던 카놀라는, 자신이 아까 그와 함께 마차를 타고 왔다는 걸 상기해 냈다.
‘하지만 사나운 이방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저희를 제물로 태우는 거라고……’
……설마 사나운 이방인을 짐승으로 생각해서 사육사인 피아를 함께 태운 건 아니겠지?
“피아는 정말 대단한 녀석입니다. 성인식 직전에 직업을 바꾸겠다고 결정했는데도 저렇게 잘 해내고 있으니까요.”
카놀라를 상념에서 깨운 건 헴슨의 말이었다. 헴슨은 피아를 자랑스럽다는 듯 보고 있었다. 그의 말에 피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전 어머니가 가르쳐 주시는 대로 할뿐입니다.”
“성인식 직전에 직업을 바꿨다는 건 엄청 큰 결심 아니야? 특히 트리폴에서는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은데?”
이곳에서는 들어 보면 다들 맡은 소임에 순응하고 산다. 뭔가를 더 하려고 하지도, 덜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모두가 배역에 충실히 하려고 하는 이 나라에서 자신의 진로를 바꾸었다는 건 제법 대단해 보였다.
카놀라의 물음에 피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살짝 일그러진 얼굴로 젭을 내려다보던 피아가 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그냥 젭을 한 마리 다뤄서 찾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피아의 표정이 너무 슬퍼 보여서, 카놀라는 더는 뭔가를 물어볼 수 없었다. 울적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피아를 대신해 헴슨이 입을 열었다.
“저기…… 정말로 겨울 산맥 꼭대기에 올라가시는 겁니까?”
“‘저기’가 아니고 ‘카놀라 님’. 그리고 대답은 응. 맞아.”
태연한 카놀라의 대답에 헴슨이 눈을 굴렸다. 괜히 주변의 눈치를 살피던 헴슨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곳은 올라가면 안 됩니다.”
“하지만 난 올라가야 하는데?”
카놀라의 목소리엔 긴장감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너무 당당한 나머지, 헴슨은 자신이 괜한 소릴 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이번엔 피아가 나서서 카놀라를 말렸다.
“거긴 드래곤의 영역입니다. 저주를 받을지도 모릅니다.”
“괜찮을 거야. 난 드래곤과도 금방 친해질 자신이 있거든.”
물론 피아의 시도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자신만만하다 못해 대책 없어 보이는 카놀라의 모습에 피아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마차에 오를 때만 해도 무서운 식인종이라는 마음밖에 없었는데, 이제는 그저 과하게 유쾌하고 시끄러운 이방인처럼 보였다. 한 번도 이방인을 본 적이 없는 피아나 헴슨은 그저 귀로만 들어온 악명 높은 이방인이 눈앞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카놀라 님은 에데사에서 오신 게 아니죠?”
“나의 모국은 샤를만이야. 에데사와는 정 반대편에 있지.”
트리폴에서의 ‘이방’이란 ‘에데사’와 동일어나 마찬가지다. 그래서 더 이렇게 신기한 것일지도 모른다. 에데사가 아닌 다른 나라에 대해선 들어 본 적이 거의 없으니까. 사실 누구도 알고자 하지 않았다. 한평생 트리폴 안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인 이곳에서는 알 필요가 없는 지식이었다.
“그 나라 사람들은 다 카놀라 님 같습니까?”
헴슨의 물음에 카놀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제 모국을 떠올리던 카놀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다 그렇진 않아. 내가 특별한 거지. 난 특별하니까!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피아가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가 떠밀리듯 더듬더듬 대답했다.
“특이한 것 같습니다.”
“어쨌든 좋은 의미지? 그럼 됐어.”
아뇨, 그게 그렇게 꼭 좋은 의미라고는 할 수 없을 거 같은데요.
피아는 카놀라의 말을 조심스럽게 정정해 주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꾹 억눌렀다. 대신 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전히 카놀라의 신발에 집착하고 있는 젭의 모습이 보였다.
이전에도 많은 젭을 보았지만, 이렇게까지 사람의 신발에 집중하는 젭은 피아도 처음 보았다. 혹시 후사의 정혼녀라는 걸 알아보고 이러는 걸까? 문득 떠오른 가정에 피아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좋은 품종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후사의 정혼녀를 알아보다니! 주인을 닮아서 천재인 건가!
“너라면 다룰 수 있을 것 같아.”
“네?”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던 피아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쪼그리고 앉아 제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기댄 카놀라가, 눈만 굴려 피아를 보고 있었다.
“드래곤 말이야. 넌 사육장에서 일한다며? 지금도 동물을 잘 다루니까 나중엔 드래곤도 다룰 수 있을 거야.”
드래곤을 다루다니요?
얼빠진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던 피아가 입을 벙긋거렸다. 드래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생명체다. 사육사 따위가 다룰 수 있는 동물이 아니라 지상에서 가장 강한 생명체! 갓 사육사의 길을 걷게 된 피아는 이제 겨우 젭이나 다루는 수준이다. 설사 피아가 나중에 호랑이를 다루게 된다고 해도 드래곤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생명체였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있던 피아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저, 저, 저 정도는 사육장 일꾼이라면 누구나 다 합니다!”
“사육장의 다른 사람들이 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해서 네 능력이 대단하지 않은 건 아냐. 난 너처럼 동물을 다루지 못하는걸?”
카놀라가 검지를 라디의 머리 쪽으로 살짝 가져다 댔다. 코를 박고 있던 라디가 손가락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봐 봐. 난 손도 못 대잖아.”
그야 그렇게 손을 막 가져다 댔으니 그렇죠. 눈앞에서 손을 막 가져다 대면 젭이 경계를 하는 게 당연하잖습니까?
젭을 다룰 때 지켜야 할 주의 사항이 피아의 머릿속에 우수수 떠올랐다. 할 말이 많아 보이는 피아의 표정에 카놀라는 키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양옆에 쭈그리고 있던 헴슨과 피아가 고개를 젖혀 일어선 카놀라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양손을 허리에 짚고는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잘 다루지 못하니까 대신 친해질 거야. 친해지면 소개해 줄게! 그럼 너희는 처음으로 드래곤을 소개받은 트리폴인이 되는 거지!”
“……말도 안 됩니다.”
멍청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올려다보던 헴슨이 무심코 대답했다. 피아도 헴슨의 생각에 동의했다. 말도 안 된다. 정말이지 어떻게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소릴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는담? 그렇게 생각하며, 피아가 툭 말을 했다.
“하지만 멋있네요.”
피아의 말에 카놀라가 활짝 웃었다.
“그렇지?”
헴슨과 피아는 생각했다. ‘이 사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라고.
무엇이 괜찮은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뭐든 괜찮지 않을까?
*
‘난 바보가 아니에요.’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말은 무척 실망스러웠다.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반항적인 시선을 들었다. 부르튼 입술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희게 질린 안색이나 야윈 체구가 그녀의 안쓰러운 분위기를 더해 주었다. 하지만 브리도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트리폴의 모두가 이 여자에게 속아도, 자신만큼은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다짐이 브리도의 심장을 더욱 차갑게 식혀 주었다.
‘시험을 포기하겠다는 의미입니까?’
조롱 섞인 물음에 스타티스가 입술을 악물었다. 촉촉한 눈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보다는 분노에 의한 것이었다.
‘이건 부당해요!’
‘부당?’
브리도의 입가가 미묘하게 비틀렸다. 부당하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는 걸까? 저절로 비웃음이 났다.
‘이방인이 이렇게나 정의로운 줄은 몰랐네요.’
냉소적인 목소리에는 숨기지 못한 적대감이 묻어났다.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적의에 스타티스는 깊은숨을 뱉었다. 머리가 지끈거리며 숨이 가빠 왔다. 몸이 무겁고 당장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녀는 강가에서 치른 시험으로 자신의 노력을 충분히 증명했다고 생각했다. 우는 소리도 않고 시험에 응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이 이따위 세 번째 시험이라니.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몸과 마음을 깨끗하게 정화하는 약. 그럴듯한 말로 포장했으나 실상은 그저 낙태약일 뿐이다. 단지 낙태를 조장하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스타티스는 이 약초를 알고 있었다.
이건, 영영 아이를 가지지 못하게 만드는 약이었다. 이미 눈에 띄게 배가 부른 상황에서 낙태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목숨이 위험할 일이고, 설사 목숨을 부지한다 한들 평생 아이를 못 가질 몸이 된다. 의도가 너무 악한 나머지 소름 끼쳤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스타티스는 제 아이를 포기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브리도는 애초 그것을 짐작했을 것이다. 이건 절대로 통과할 수 없는, 일방적인 시험이다.
‘다들 순진해서 조금만 연약한 척 굴어도 마음을 쉽게 열어 주었겠죠. 우리가 만만하게 보였을 것을 압니다. 하지만 난 속지 않아요.’
‘뭐라고요?’
‘나는 당신들의 오만함으로 인해 피 흘린 조상을, 이런 외지로 쫓겨나 하루하루 힘겹게 사투를 벌이는 모든 이들의 희생을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당신은 절대 이 나라에서 살 수 없어요.’
스타티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집 때문에 죽어 가는 사람들은 안 보여요?’
‘이 추운 산맥에서 죽어 가지 말고 당신들의 침략을 고맙게 받아들이라는 건가요? 그럼 말해 보세요. 당신네 나라에서 우릴 뭐라고 부르는지.’
브리도의 즉각적인 반박에 스타티스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모국 에데사는 넓은 땅덩어리를 가진 제국이다. 주변국들을 빠르게 흡수해 세력을 넓혔고, 지금에 이르러선 자만심과 긍지로 똘똘 뭉친 제국.
에데사가 트리폴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는 누구보다 스타티스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에데사의 눈에 트리폴은 나라가 아니다. 그저 들짐승과 다를 바 없는 야만족일 뿐.
‘……내 배 속의 애가 증명해 줄 거예요. 공생할 수 있다는 걸 보여 줄 거라고요. 에데사가 잘못하고 있다는 건 나도 인정해요. 당신의 말도 이해해요. 그러니까 바꿔 나가야죠.’
에데사는 풍족하고 평화로운 나라다. 우수한 문화 발전을 이뤄 나가고 있다. 따뜻한 모국에서 충분한 교육적 환경을 누리며 살아온 스타티스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의 충격을 잊을 수 없었다.
에데사에서 가르치는 트리폴의 정보는 모두 틀렸다. 모두 잘못되었는데 누구도 그것을 모른다. 그건 반드시 정정되어야 할 부분이었다. 똑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더더욱.
‘건방진 소리. 트리폴인으로 살아 보지 못한 이방인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단 말입니까?’
브리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에데사인들이 얼마나 교활하게 구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미끼를 던져서 순진한 트리폴인을 낚아채면 실컷 사리사욕을 채우고는, 그것이 모두 야만인을 교화하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합리화하는 주제에.’
나지막한 중얼거림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냉랭한 브리도의 얼굴에 한 줄기 분노가 스쳤다. 이방인들의 목적은 모두 하나다. 이 풍족한 산맥의 축복을 강탈하고, 자신들이 야만족이라고 폄하하는 트리폴을 잔인하게 짓밟는 것.
‘우린, 에데사 따위가 교화해야 할 미개한 짐승이 아닙니다. 당신 하나 이곳에 들어온다고 뭐가 바뀔 것 같아요? 천만에. 당신은 아무것도 아냐. 우리보다 우월한 존재도 아니지. 당신들은 그냥 강도떼일 뿐이야. 저 바깥의 늑대 떼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짐승들.’
스타티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브리도의 악담이 스타티스의 심장을 후벼 팠다.
‘그라그포드는 속았을지 몰라도 난 아냐. 네가 왜 겨울 산맥에서 조난당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아?’
브리도의 목소리가 한층 나지막하게 내리깔렸다. 그녀의 시선은 스타티스를 집어삼킬 듯 날카롭게 노려보고 있었다. 스타티스의 안색은 이제 핏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하게 질린 상태였다. 겨우 숨만 몰아쉬는 스타티스를 향해 상체를 조금 기울인 브리도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죽은 네 동료들이 에데사에서 파견한 정찰대인 걸, 그라그포드는 알고 있나?’
‘우린 트리폴을 염탐하러 온 게 아니에요.’
‘그러시겠지.’
브리도가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건 우연이었다. 그녀는 일개 평신녀일 뿐이라, 고급 정보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그녀가 수석 신녀를 보좌하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것이다. 아마 이렇게 스타티스를 시험하게 되지도 않았겠지.
브리도는 이게 바로 신이 내린 자신의 운명임을 직감했다. 자신은 이방인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켜야 하는 사명을 받았다. 트리폴을 위기에서 구해 낼 사람은 물러 터진 수석 신녀가 아니라 바로 자신이었다.
‘에데사의 접근이 섣불렀다는 거 알아요. 알았으니 이제 다시 알려야 할 거 아니에요. 제대로 된 교류를 하도록 누군가는 올바른 정보를 전달해야 한다고요.’
‘교류는 필요 없습니다. 우린 이제껏 그래왔듯 잘 버텨 낼 거고, 당신들은 겨울 산맥의 가혹한 심판을 받고 죽어 가겠지. 앞으로도 이방인은 절대 트리폴을 침범하지 못할 거예요.’
스타티스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브리도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물러섰다.
세 번째 시험은 실패했다. 첫 번째 시험도, 세 번째 시험도 실패한 스타티스는 군주비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제사장에게 이 사실을 전하러 가야 했다. 브리도가 냉담하게 몸을 돌렸다. 그런 그녀의 뒤에서, 지친 표정으로 제 앞에 놓인 약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스타티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라그포드에 대한 마음은 진심이에요. 모든 걸 의심해도 그것까지 매도하진 마세요.’
부질없는 소리. 브리도는 고개를 반쯤 돌려 스타티스를 보았다.
‘겨울 산맥의 가호는 이방인에게 절대 닿지 않습니다.’
브리도의 말은 스타티스의 죽음으로 증명되었다. 브리도는 신이 내린 명을 훌륭하게 수행했고, 마침내 제사장이 되었다. 진통을 겪었지만 트리폴은 이겨 냈고, 이제야 겨우 평화를 되찾았다. 마뜩잖은 후사도 테드라고의 핏줄이라 결국 관대히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런데 이렇게나 힘들게 찾은 평화를 군주라는 작자가 깨부숴?
“오셨습니까?”
천막을 밀어 내고 고개만 빼꼼 들이민 카놀라가 내부를 둘러보았다. 안쪽에 앉아 있던 브리도가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들어오세요.”
“암살자 숨어 있는 거 아니죠?”
카놀라의 물음에 브리도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들었다. 짜증 섞인 그 시선에 카놀라가 찔끔한 표정으로 냉큼 천막 안에 들어섰다.
“농담이에요.”
농담이라고 생각한 사람치고는 여전히 경계심이 넘쳤다. 문가에서 거의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 자리 잡은 카놀라의 모습에 브리도가 혀를 찼다.
그라그포드는 자꾸 외세를 끌어들여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려 든다. 이미 스타티스의 사례를 겪고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어째서 신이 이방인을 밀어내고 있음을 모르고 부질없는 시도를 반복하는 걸까?
“그래서, 이제 좀 말해 줄 시간이 나셨나 봐요?”
“하루라도 빨리 알려 드려야 시간을 덜 낭비할 테니까요.”
보고 있던 지도를 차곡차곡 접은 브리도가 몸을 일으켰다. 우뚝 서서 카놀라를 응시하던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방인의 문제가 무엇이냐. 그것이 물음이었지요. 대답은 아주 쉽습니다. 이방인들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파괴할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굉장히 감정적으로 들리네요. 혹시 어렸을 때 이방인에게 뒤통수 맞으셨던 적 있으세요?”
사실 아주 예전부터 묻고 싶었던 말이다. 브리도의 태도는 단순한 경계심을 넘어서 어떠한 억하심정을 품은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카놀라의 물음에 브리도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카놀라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이내 냉랭한 표정으로 그녀를 외면했다.
“겨울 산맥은 깊고도 높아,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이곳에서 황금 광맥이나 신의 영약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고 있죠. 겨울 산맥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니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는 것뿐, 다들 더러운 군화를 들이밀 준비가 되어 있더군요. 그리고 국경의 그라사들은 그 침략으로부터 이 산맥과 우리의 터전을 지키고 있습니다.”
트리폴이 겨울 산맥의 가호를 받을 수 있는 이유는, 언제나 필요한 만큼만 청하기 때문이다. 산맥의 그 무엇도 함부로 탐내지 않고,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을 취하지 않는다. 그러한 규칙은 이제까지 산맥의 환경을 해치지 않고 트리폴인들이 공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만족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이방인들은 다르다. 주어진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많은 것을, 더 좋은 것을 찾아 끊임없이 주변을 파괴해 나가고 있다. 트리폴인들에게 드넓은 평야의 자유를 빼앗은 그들은 이제 산맥의 자비로운 축복마저 탐내고 있다.
브리도는 습관적으로 펜던트를 꽉 움켜쥐었다. 에데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주변의 어느 나라도 믿을 수 없었다. 행여라도 이 땅마저 빼앗기면 트리폴인들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그 말은, 에데사가 여전히 이곳을 침략하려 한다는 말인가요?”
“그들은 트리폴을 나라로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이곳은 그들에게 있어 미개척지고요.”
카놀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샤를만에서도 트리폴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곧잘 돌곤 했다. 그 소문만 듣고는 누구도 카놀라를 따라오려 하지 않았다. 카놀라만 해도 처음에 얼마나 한탄을 했었나. 카놀라가 트리폴로 오기 전, 샤를만에서 가진 한 달의 유예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는 ‘야만인’이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선 카놀라를 가만히 보던 브리도가 슬쩍 시선을 내렸다. 손안에서 굴리던 펜던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20년 전, 에데사의 정찰대가 겨울 산맥에서 조난됐습니다. 그들은 짐승들의 습격을 받았고, 단 한 사람만 겨우 살아남았죠.”
브리도는 엄지로 펜던트의 문양을 꾹 눌렀다. 울퉁불퉁한 감촉이 엄지에 화인처럼 찍혔다.
“그게 스타티스. 후사의 어머니입니다. 순진한 디라즈는 그녀에게 속아, 하마터면 적군을 이 나라 심장에 들일 뻔한 겁니다. 아니, 알았다 해도 외면했을 겁니다. 여자에 눈이 멀어 한 치 앞도 살피지 못하셨으니. 그로 인해 이 나라가 침몰할 뻔한 것을 막아 낸 건 신전입니다. 게다가 이방인의 후손을 후사로 인정해 주기까지 했으니, 이보다 더 관대할 수 있겠습니까?”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끈질기게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훌륭한 그라사들을 기어코 이겨 먹었다.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외관을 제외하면 그 노력과 인내는 인정해 줄 법했다. 브리도는 에델을 후사로 인정했고, 비로소 그는 모든 트리폴인들에게 받아들여졌다. 10년은 족히 넘기고도 남을 시간 동안 노력해서 얻어 낸 것이었다. 반쪽이나마 이방인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런데 다시 똑같은 짓을 벌일 줄이야. 관대함이 과했던 모양이에요.”
제 아들이 그리 고생하는 꼴을 보고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브리도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디라즈는 이방인을 불러들였을 뿐만 아니라, 시험까지 도와주려 한다. 어째서 이런 짓을 벌이는 걸까?
“디라즈는 이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계실 뿐이에요. 이 나라는 어떤 식으로든 바뀌어야 한다고요.”
스타티스는 이 나라를 개방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망할 것이라는 듯 이야기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그들은 산맥의 가호를 받고 있다. 국경을 지키는 그라사들도 에데사의 정찰대를 잘 견제해 주고 있다. 추운 기후와 사나운 짐승들도 모자라 그라사들의 경계까지 더해지니, 에데사는 좀처럼 산맥 안으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몇 년 전에 전염병으로 크게 곤욕을 치른 뒤로는 과거보다 더 적극적으로 변하긴 했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타티스도 똑같은 말을 했었죠. 그녀가 죽고 20년이 지난 지금? 우린 여전히 잘 버텨 내고 있습니다. 바꿔요? 대체 무얼요? 트리폴이 이 산맥을 개방하는 것이 진정 답이라고 생각합니까? 탐욕스러운 이방인들이 몰려들면 트리폴은 얼마나 버틸까요?”
브리도는 냉소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신전은 이제까지 해 오던 것을 지켜 나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자신하는 그녀의 귓가로 카놀라의 또렷한 대답이 닿았다.
“당연히 조금도 못 버티겠죠.”
브리도가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 방금의 대답은 당연히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내용과 약간 달랐던 것 같은데?
“네?”
“제사장님 말이 맞아요. 트리폴 사람들은 너무 순진해서 조금만 잘해 줘도 쉽게 마음을 열 거예요. 요령도 없이 속내를 다 보여 줄 거고, 배신은커녕 거짓말도 못하고 상대에게 마음을 다하다가 뒤통수를 맞을 거예요. 겨우 한 달 남짓 산 내가 봐도 앞날이 뻔한걸요?”
브리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카놀라는 팔짱을 낀 채 아주 당당한 어조로 트리폴의 취약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마도, 브리도가 이야기하려 했던 부분을 말이다.
브리도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예상치 못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같은 생각이라니 의외이긴 한데 카놀라의 입으로 들으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요.”
일단 긍정의 말을 뱉었지만, 기분은 영 석연찮았다. 그런 브리도에게 카놀라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그게 내 결혼이랑 무슨 상관이래요? 제가 언제 샤를만 사람들을 이 나라로 끌어들인다고 했어요? 그랬다간 큰일 나요! 샤를만인들이 얼마나 교활한 줄 아세요? 행여 그런 기대 하고 있음 꿈 깨세요. 사실 저 이런 말 잘 하지 않는데, 트리폴 사람들은 다 내 가족이다 생각해서 귀띔해 드리는 거예요.”
“뭐라고요?”
아무래도 카놀라에겐 브리도의 어처구니없는 듯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보다. 심지어 카놀라는 아주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브리도를 얼렀다.
“외부랑 억지로 오갈 필요는 없어요. 지금 당장 그걸 감당할 만한 사람도 없고요. 디라즈든 제사장님이든 여기서나 의기양양하지, 밖에 나가면 기도 못 펼 게 뻔한데! 그런 건 할 줄 아는 사람이 해야 해요. 그래서 제가 이 나라에 필요한 거고요.”
당혹감에 물들어 어지럽던 머릿속이 찬물을 뒤집어쓴 듯 식었다. 브리도는 혼란스럽던 정신을 애써 가다듬으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런 식으로 현혹하고 포장해 봤자 속지 않습니다. 결국, 당신도 우리의 내부를 갉아먹으려는 것일 테니!”
단호한 목소리는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카놀라의 표정은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미쳤어요?”
무심결에 말을 뱉은 그녀가 아차 한 표정으로 제 입을 가렸다. 눈을 도르르 굴려서 제사장의 눈치를 보던 카놀라가 뭐라 할까 싶어 얼른 말을 이었다.
“어머, 이건 실수. 죄송해요. 하지만 방금의 발언은 그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으니까 반성하셔야겠어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내 남편이 트리폴 군주의 후계자인데 뭘 빼돌리겠어요? 그리고 저, 뭘 갉아먹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없이 살진 않았거든요? 설마 지금 제 지참금 적다고 무시하시는 거예요? 저 돈 많았어요! 다 못 가져와서 그렇지! 여기서 급한 불 끄고 나면 상속권 주장할 거거든요?”
미안함에 잠시 움츠러들었던 어깨가 다시금 당당하게 펴졌다. ‘남편’을 운운할 즈음부터는 양손을 허리춤에 올리고 도리어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지참금’에 다다라서는 울컥한 마음까지 더해져 가슴을 쭉 펴고 호기롭게 제사장을 마주 볼 지경이 되었다. 씨근덕거리며 말을 맺은 카놀라가 원망스럽다는 시선으로 브리도를 보았다. 살면서 돈 때문에 설움을 당하게 될 줄이야!
도통 적응할 수 없는 카놀라와의 대화에 브리도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도대체 이 이방인은 어떻게 생겨 먹은 여자인 건가? 그녀는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모습에 씨근덕거리던 카놀라가 점차 안정을 되찾고는 슬그머니 눈을 굴렸다. 그러곤 선심 쓴다는 듯 새침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예비 남편이라고 정정할게요. 됐죠?”
이 대화는 엉망진창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브리도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이방인의 이상한 언변에 휘말리는 기분이 들었다. 저런 잔재주로 디라즈를 홀린 게 틀림없었다. 자신까지 휘말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브리도는 자신의 마음을 굳건하게 다지며 다시금 딱딱한 목소리를 냈다.
“논점을 흐리지 마십시오. 가벼운 웃음과 듣기 좋은 말로 순간적인 호의는 살 수 있겠지만, 당신도 끝내 우리의 절박함과 절실함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어머, 제 말이 듣기 좋았어요? 세상에! 제사장님 취향이 보기보다 거치신가 봐요?”
브리도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자신의 신경을 긁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없었다. 하다못해 스타티스도 이런 황당한 말을 늘어놓진 않았었는데!
“말장난하고 싶지 않습니다.”
“장난하고 있는 거 아닌데요?”
눈에 띄게 짜증이 늘어난 브리도의 얼굴을 빤히 보던 카놀라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착각하고 계신가 본데, 전 그냥 결혼을 하고 싶다고요! 아니, 이렇게 말하면 결혼 못 해서 안달 난 사람 같으니까 바꿀게요. 전 에델과 한평생 한 이불을 덮고 싶다고요. 그런데 에델은 군주가 될 사람이고, 그럼 자연히 전 군주비가 되어야 하니까 군주비로서 이 나라를 위해 힘쓸 의향이 있어요.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힘쓰겠다는 건, 밖에서 가져올 수 있는 건 죄다 챙겨 오겠다는 소리예요. 그렇지 않아도 살기 팍팍한 이 나라에서 뭘 더 빼돌려서 망하게 만들겠다는 게 아니라!”
브리도는 침묵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녀가 상상했던 대화는 이런 게 아니었다. 그러나 카놀라는 브리도의 침묵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더욱 큰 목소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이해가 되세요? 너무 어렵게 설명했나요? 좀 더 쉽게 알려 드릴까요? 전― 에―델―과― 한― 침―대―를― 쓰―고―싶―!”
“그만! 그 말은 그만 듣고 싶습니다.”
브리도가 가까스로 카놀라를 제지했다. 말은 저 여자가 뱉고 있는데 부끄러움은 어째서인지 자신이 더 크게 느끼고 있었다. 브리도는 제발 카놀라의 언성을 좀 낮추고 싶었다. 바깥의 그라사들에게 저런 낯부끄러운 소릴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후, 원하시면 얼마든지 다시 말해 드릴 테니까 기탄없이 물어보세요.”
“당신의 고집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아들었습니다. 애초에 설득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다지만, 참으로 대단하네요.”
따져 보면 그리 길지도 않은 대화였는데, 브리도는 아주 많이 지친 기색이었다. 카놀라는 낮게 혀를 찼다. 아무래도 나이가 많으니 금방 기력을 잃어서 그런 모양이다. 두 명의 노인들을 거느리고 있는 카놀라는 브리도의 빠른 기력 저하를 쉽게 이해했다. 젊은 그녀가 이해해야지 어쩌겠나.
“아쉽네요. 전 우리의 대화가 아주 발전적이었다고 생각하던 참인데.”
브리도는 이마를 짚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던 그녀가 몸을 휙 돌렸다.
“그리 바란다면, 하루빨리 시험을 치르고 이 모든 일을 끝내는 게 좋겠군요.”
“이미 첫 번째 시험이 시작 됐…….”
“두 번째 시험을 내겠습니다.”
말을 멈춘 카놀라가 못 들을 것을 들었다는 듯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네?”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브리도가 고개를 반쯤 돌려 카놀라에게 시선을 주었다. 얼핏 보이는 브리도의 입매가 묘한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당신은 정당하게 시험을 통과하고 혼약의 승인을 받겠노라 장담했습니다. 그러니 뜻대로 해 드리겠다는 겁니다.”
“……제 시험은 티보치나가 주관하는 거로 알고 있는데요.”
떨떠름한 카놀라의 반박에 브리도는 태연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수석 신녀의 시험이 적절하지 않을 경우, 제사장은 임의로 관여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그녀가 낸 첫 번째 시험은 너무 과하지 않았습니까.”
예감이 좋지 않다. 아니, 예감이 좋지 않은 정도로 그칠 일이 아니다. 이건 아주 수상하고 의심스러웠다. 카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브리도를 노려보았다. 브리도는 쥐고 있던 펜던트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느릿느릿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미 만인의 앞에서 공표한 시험을 무를 순 없으니, 대신 제가 보상의 의미로 당신의 수준에 맞는 두 번째 시험을 내 드리겠습니다.”
“지금요?”
백번 양보해서 시험을 낼 수야 있다. 그렇다곤 해도 지금? 에델도 디라즈도 자릴 비운 지금? 해가 다 저물어서 야영지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지금 시험을 내겠다고?
“네. 이건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시험이니까요.”
카놀라는 티보치나가 해 주었던 말을 떠올렸다. 후사의 어머니에게 낙태약을 건넸다던 브리도다. 그녀가 저런 듣기 좋은 핑계를 대며 준비한 시험이 쉬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차라리 대놓고 어려운 티보치나의 시험이 나을 수도 있겠다 싶을 정도로. 불안하게 눈을 굴리던 카놀라가 헛숨을 삼켰다.
이상한 약을 먹으라고 하면 어쩌지? 그런 걸 구분하는 눈은 없는데!
“우린 사냥을 나간 전사들을 위해 야영지 바깥에 불을 지핍니다. 당신이 그 불을 밝히고 오세요.”
다행히도 브리도는 약을 내밀지 않았다. 하지만 카놀라의 표정은 여전히 심각했다.
“불……이요?”
얼핏 듣기엔 이보다 더 쉬울 수가 없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카놀라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브리도를 노려보았다.
“북쪽으로 쭉 나가면 아래로 난 오솔길이 있습니다. 그 길의 끝에 모아 둔 장작들이 있을 겁니다. 거기에 저 꾸러미를 던져 넣고 불을 지피십시오.”
브리도가 가리킨 곳엔 천으로 꽁꽁 묶은 둥근 꾸러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꾸러미와 브리도를 번갈아 보던 카놀라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꾸러미는 크기가 큰 데 비해 무게가 가벼웠다. 그것을 허공에 대고 흔들어 보았지만 특별한 소리는 나지 않았다. 다만 잡은 부분에서 작게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마른 풀 같은 게 들어 있는 것 같았다.
“트리폴을 위해 힘쓰겠다고 했나요? 그렇다면 참 적절한 시험이 되겠군요. 이 시험을 통해 당신의 올곧은 마음을 확인하겠습니다. 전사들을 위해 이 꾸러미를 태우세요.”
떨떠름하게 꾸러미를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브리도를 힐끗 보았다. 브리도는 등을 진 상태에서 고개만 돌려 카놀라를 보고 있었다.
“제게 거부할 권한이 있긴 해요?”
“실패해도 상관없다면 거절하십시오.”
“없다는 거네요.”
시험에 통과하려면 일단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니. 부당함을 지적하려면 온종일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카놀라는 제 마음을 꾹 억눌렀다.
후사비만 되면 반드시 여론을 휘어잡아서 본때를 보여 줄 테다. 남몰래 복수를 다짐하던 그녀가 크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성큼성큼 막사의 출입구로 향했다.
“좋아요. 나오세요.”
“어딜 말입니까?”
그 물음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시험 통과해도 제사장님이 딴소리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다 보는 앞에서 말씀해 주셔야죠.”
이런 중대한 합의를 밀실에서 할 수는 없다. 모두가 보고 듣는 곳에서 공표해야지. 당연하다는 듯 말을 한 카놀라가 되레 브리도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았다. 그 시선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리던 브리도가 성큼성큼 카놀라의 뒤를 따랐다.
“좋습니다.”
처음 브리도의 막사에 들어갈 때만 해도 날이 제법 밝았는데, 잠깐 대화를 하고 나온 사이 하늘은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막상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을 확인하고 나니 조금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막사 바깥으로는 절대 안 나가겠다고 에델과 약속했는데.
미간을 좁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카놀라의 뒤로 브리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브리도는 야영지 곳곳에서 바쁘게 각자의 일을 하는 그라사들을 훑어보았다.
“그라사들이여!”
이목이 쏠린 것을 확인한 브리도가 엄숙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 이방인에게 횃불을 주어라. 신전의 두 번째 시험으로 마중불을 맡길 것이다!”
짧은 선언이었지만 그 여파는 컸다. 멀리에 서 있던 그라사들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다가왔고, 가까이에 있던 그라사들은 하던 일을 아예 멈추었다. 그들의 표정에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떠올랐다.
“마중불?”
“이방인에게 마중불을 맡기시다니요?”
가까이에 서 있던 몇 명의 그라사들이 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러나 브리도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라사들은 뭔가 할 말이 많은 듯해 보였으나, 브리도의 단호한 태도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반응을 본 카놀라가 조용히 침을 삼켰다.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시험이 단순히 불을 지피고 돌아오면 되는 쉬운 시험은 아니라는 것.
“어서.”
브리도가 주위의 그라사들을 재촉했다. 그라사들은 난처한 시선으로 브리도와 카놀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런 그라사들의 안색을 살피던 카놀라가 브리도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불을 지피면, 두 번째 시험에 통과하는 거 맞죠?”
“그렇습니다.”
“근데 마중불이라는 게 무슨 뜻이에요?”
‘마중불’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사냥 나간 전사들을 위해 피우는 불이라고 했으니, 그들을 마중 나간다는 의미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걸까? 단어만 두고 유추하면 그게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이었다. 그라사들이 저렇게 경악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을 것이다.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 브리도는 설명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다녀오면 알려 드리죠. 사냥을 나간 그라사들이 돌아오기 전에 불을 피워야 하니 서둘러 주십시오.”
퉁명스럽게 말을 한 브리도가 가까운 그라사에게 눈짓했다. 마침 횃불을 들고 있던 그라사가 머뭇거리며 그것을 카놀라에게 건넸다. 일렁이는 불꽃을 가만히 보던 카놀라가 한 걸음 물러나며 말했다.
“저 그럼 제 막사 좀 다녀올게요!”
“말씀드렸다시피 마중불은 지금 당장…….”
“해도 저물었는데 더 따뜻하게 무장해야죠.”
그 말에 브리도가 인상을 찌푸렸다. 카놀라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어본 그녀가 냉담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보다 더 껴입을 작정입니까?”
그 싸늘한 지적에 카놀라가 민망하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지금 카놀라는 그 어느 때보다 완벽한 무장을 하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야윈 새끼 곰으로 착각할지도 모른다.
복슬복슬하고 통통한 제 몸을 내려다보던 카놀라는 이내 뻔뻔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물론 지금의 꼴은 아주 완벽했지만! 그녀는 더 완벽해져야 했다. 이건 두 번째 시험이니까!
“지금 장갑도 안 끼고 모자도 안 썼어요!”
제 손을 활짝 펴서 보여 준 카놀라가 냉큼 몸을 돌렸다. 야영지가 엄청 넓은 건 아니었기에 제 막사까지 달려가는 건 금방이었다.
막사에 들어선 카놀라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다가, 얼른 자신의 가방을 열었다. 조금만 늦어져도 누군가 막사 안으로 그녀를 데리러 들어올 것 같았다.
“뭐든 가져가면 도움이 되겠지!”
가방째로 들고 간다면 참 좋겠지만, 그러면 야영지 바깥을 나가기도 전에 브리도에게 가방을 뺏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대뜸 횃불을 쥐여 주고 보내려는 꼴을 보면 아마 그 예감이 맞을 것이다. 브리도는 카놀라를 맨몸으로 내보내려 하고 있었다.
막막한 마음에 가방 안을 헤집던 카놀라가 손에 잡히는 대로 무작정 품에 넣기 시작했다. 이미 뚱뚱한 옷 속에 뭔가를 숨기려니 영 공간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녀는 꾸역꾸역 주머니들을 옮겨 넣었다. 티보치나가 준 주머니들을 옷 속 곳곳에 끼워 넣고, 에델이 준 단검도 허리춤에 맸다. 그리고 막 지도를 바지 주머니에 넣는 찰나, 막사 바깥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아른거렸다.
“뭐 하십니까?”
카놀라가 기겁하며 제 가방을 덮었다. 간이침대 밑으로 가방을 밀어 넣은 그녀가 후다닥 모자를 집어 들었다.
“가요, 가요!”
모자를 대충 눌러쓴 카놀라가 장갑을 끼고선 후다닥 막사 바깥으로 나갔다. 브리도가 의심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카놀라는 그런 브리도의 시선을 모른 척하며 그라사에게 횃불을 받아 들었다. 몸 곳곳에 쑤셔 넣은 각종 주머니 때문에 움직이는 게 불편했지만, 그녀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가늘게 뜨고 카놀라를 응시하던 브리도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
“꾸러미도 챙기셔야죠.”
아, 맞다.
제 앞에 내밀어진 꾸러미를 보며 카놀라가 미간을 좁혔다. 제 몸 하나 움직이기도 조심스러운데 이 꾸러미에 횃불까지 들고 눈 쌓인 내리막길을 내려가야 한다니. 어쩌면 짐 들고 눈길을 내려가다가 구르길 바라는 게 브리도의 진정한 목적 아닐까?
떨떠름하게 꾸러미를 노려보던 카놀라가 한쪽 팔을 내밀었다.
“내 품에 잘 안겨 줘 봐.”
두 손으로 안아 들던 꾸러미를 한 손으로 안으려니 쉽지는 않았다. 손잡이라도 만들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낑낑거리며 한 손으로 어떻게든 안아 보려 용을 쓰는데, 이쪽을 구경하고 있던 그라사들 사이에서 누군가 외쳤다.
“제, 제가 꾸러미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엉거주춤 서서 무릎으로 꾸러미를 받치고 있던 카놀라가 고개를 들었다. 브리도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피아?”
주춤거리며 손을 들고 앞으로 나온 피아는 브리도와 눈이 마주치자 매우 놀랐다. 그러나 뒷걸음질 치진 않았다. 우물쭈물 카놀라에게 다가온 피아가 꾸러미를 번쩍 받아 들었다. 브리도는 황당하다는 눈으로 피아를 보았다. 그녀는 피아를 나무라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카놀라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그럼 피아가 내 시험관을 하면 되겠네! 그쵸, 제사장님? 제가 제대로 불을 지피는지 누군가는 확인해야 할 거 아니에요? 피아는 훌륭한 그라사이니 제사장님도 믿을 수 있을 테고요.”
손뼉을 치며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카놀라의 모습에 브리도가 눈살을 찌푸렸다.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피아를 응시하던 브리도는 결국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꾸러미를 태우는지 확실히 확인해라.”
“네, 네!”
“자, 그럼 진짜로 출발할게요!”
카놀라가 발랄하게 손을 흔들었다. 몇 명의 그라사들이 얼떨결에 함께 손을 흔들어 주다가 뒤늦게 브리도의 사나운 시선을 깨닫고 얼른 손을 내렸다. 덩치 큰 그라사들이 쩔쩔매며 눈치를 보는 모습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키득거리며 그들을 보던 카놀라가 후다닥 앞장섰다. 꾸러미를 두 손으로 안아 든 피아도 카놀라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라사들 사이에 서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헴슨이 걱정스럽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이른 별이 어두운 하늘의 구석에서 반짝였다.
*
투갈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피를 흘리며 도망가던 늑대의 사체를 찾아낸 것이다.
“이 근방은 정리가 된 것 같습니다. 남은 무리는 흩어져서 도망갔을 겁니다.”
울란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에델은 들뜬 기색 없이 덤덤하게 자신의 활을 뒤로 돌려 맸다.
“긴장을 늦추지 마. 아직 우두머리를 잡지 못했어.”
한 명의 그라사가 실수로 낙오되었다가 늑대 무리에게 둘러싸여 목숨을 잃을 뻔한 게 바로 몇 시간 전의 일이었다. 이 녀석들은 그라사들을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다. 덕분에 그라사들은 평소와 다르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갈 수 없었다. 대신 그라사들은 똘똘 뭉쳐서 다수로 늑대들을 상대했다.
다행히도 예기치 않게 공격당한 그라사는 불구 신세를 면할 것 같았다. 그래도 시작부터 피를 봤다는 사실이 다른 그라사들을 흥분하게 만들어서, 첫날의 성과가 꽤 높았다.
“아직 첫날이잖습니까. 일단 꼬리를 잡으면 금방 처리할 수 있습니다.”
롬도 넌지시 울란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나 에델은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았다. 겨울 산맥에 사는 늑대 무리는 여럿이다. 그중에서도 최근 트리폴인들을 습격하고 있는 무리는 검은 늑대의 무리였다. 그동안 상대해 왔던 다른 늑대 무리와는 확실히 다르다. 더 지능이 높고, 사납다.
“디라즈는 어디 계시지?”
그라그포드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그는 죽은 동물들의 사체 앞에서 침묵하고 있었다. 죽은 생명을 위한 기도였다. 이러한 기도는 그들이 사냥의 잔혹함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심어 주는 절차이기도 했다.
그라그포드의 짧은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던 에델이 천천히 눈을 뜨는 그라그포드를 확인하곤 입술을 뗐다.
“디라즈.”
“우두머리는 아직도 못 찾았느냐?”
“네. 오늘 밤은 어려울 듯합니다.”
그라그포드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동물의 사체를 바라보던 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날이 어두워져서, 그라사들은 곳곳에 횃불을 밝혀 둔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대사냥은 밤낮을 번갈아 가며 진행한다. 당연히 그라사들은 야간 사냥에도 능하다. 그렇다곤 해도 확실히 낮 사냥보다는 신경 쓸 것이 많아서 어려움이 있었다. 게다가 이번 대사냥의 목표물은 호락호락하지 않은 동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아직 어떠한 덫에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똑똑한 녀석들이야. 게다가 대범하기도 하지.”
미리 설치해 둔 덫에는 무엇도 걸려들지 않았고, 하울링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그라사들에게 격렬히 저항하던 늑대들은 어느 순간 빠르게 도망쳤다. 이제껏 검은 늑대들에게 습격당한 민가들을 생각하면, 이상할 정도로 빠른 포기였다. 강한 적이라는 것을 인식해서 도망가는 것일 수도 있다.
검은 늑대가 아닌 다른 늑대 무리였다면 그렇게 생각하고 이대로 전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검은 늑대들이 초반부터 그라사들에게 역습을 감행하던 꼴을 그라그포드는 똑똑히 기억했다. 그놈들이 그라사들의 강함에 겁을 먹고 도망칠 리 없었다.
“여기가 본래 붉은 곰의 서식지였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곰의 서식지마저도 침범하는 무리인데 그라사들과 잠깐 다투고 도망을 가? 역시 말이 안 된다.
“붉은 곰은 순한 편입니다. 동굴을 침범하지 않은 이상 늑대들과 굳이 다투진 않았을 겁니다.”
에델의 말에 그라그포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무서운 줄 모르고 활개 치는 늑대 무리라고 해도 곰에게 먼저 싸움을 걸진 않았을 테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곰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곰의 서식지를 자유롭게 돌아다녔다는 소리가 된다. 역시 쉽게 상대할 짐승이 아니었다.
“마지막 한 마리까지 확실하게 숨통을 끊어 놓지 않으면, 반드시 보복해 올 거다.”
에델은 힐끗 시선을 들었다. 나뭇잎 사이로 별이 반짝이는 게 보였다. 평소라면 달이 중천에 오를 때에야 야영지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아직 이르지 않느냐?”
“낮에도 쉽지 않은 녀석들이었습니다. 야간 사냥은 더 불리할 겁니다.”
그라그포드는 제 앞에 놓인 사체를 눈으로 가늠했다. 첫날의 성과치곤 확실히 평소보다 많다. 조금만 더 욕심낸다면 남은 날들이 더욱 부담 없어지겠지. 하지만 그는 에델의 권유를 수용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순순히 도망간 늑대들의 행동이 미심쩍었다. 늑대들은 마치, 그라사들이 산맥 깊은 곳으로 더 쫓아오도록 유인하고 있는 듯했다. 살면서 육감을 따랐다가 실패한 적은 없으니 이번의 이 찜찜함도 괜한 것이 아닐 터다.
“그라사들에게 전해라. 귀환할 것이다.”
*
야영지를 나선 지 기껏해야 5분이 지났을까?
곳곳에 횃불이 있을 땐 몰랐는데, 산속에서 맞이하는 밤은 아주 캄캄하고 차가웠다. 벌써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치밀었다.
점점 더 멀어지는 야영지의 불빛을 연신 돌아보던 카놀라가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곤 옆을 휙 돌아보았다. 커다란 꾸러미를 끌어안은 피아가 그녀의 곁에서 주춤주춤 걷고 있었다. 긴장감으로 잔뜩 굳어진 피아의 얼굴을 보니 더욱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봐.”
“예?”
“마중불이 뭐야? 뭔데 이렇게 긴장해?”
횃불이 비쳐서 그런지, 카놀라의 눈동자가 더욱 이글이글 타오르는 듯 보였다. 어깨를 움츠리며 그녀의 시선을 피한 피아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모르시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알아야 대책을 세우지!”
야영지는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근데 앞으로 뻗은 오솔길은 도통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져 있었다. 주변이 어두우니 꼭 거대하고 새카만 아가리에 자진해서 걸어 들어가는 기분마저 들었다. 길도 험해서 조금만 부주의하게 발을 내디뎠다간 된통 구를 것 같았다.
그냥 불이나 밝히고 오는 길이라기엔 너무 험하고 멀지 않나.
“대책이랄 것도 없습니다. 그냥 불을 피우자마자 야영지로 죽어라 뛰어오는 수밖에는…….”
우물쭈물 얼버무리는 피아의 모습에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함정이라도 설치된 거야?”
“함정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사실 피아도 직접 마중불을 밝히는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사냥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니 당연할 테지만……. 말로만 들어 온 덕분에 긴장감은 더했다. 차라리 몰랐으면 겁이라도 덜 먹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첫 사냥 날에 마중불을 밝히러 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중불은 노련하고 몸이 날쌘 그라사들이 맡는 임무였다. 도대체 자신이 무슨 정신으로 이 꾸러미를 들어 주겠다고 했을까? 아무래도 잠깐 뭐에 홀렸던 모양이다.
“마중불은 사냥에 지친 그라사들의 귀환길을 편하게 만들어 주기 위한 것이에요. 혹시나 돌아오는 길에 마주칠 수도 있는 사나운 맹수들을 유인해 주는 거죠.”
“……유인?”
“이 꾸러미로요.”
꼭 꾸러미를 태우라고 강조하던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랐다. 불을 피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저 꾸러미를 태우는 게 중요한 것이다. 카놀라가 입을 떡 벌렸다.
“아마 이건 리키누스일 거예요. 태우면 그 냄새가 사방의 맹수들을 끌어들여요.”
어쩐지 너무 쉬운 걸 시킨다고 했지. 뭐? 보상으로 수준에 맞는 시험을 내 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보상’을 운운한단 말인가!
“지금 나보고 대놓고 미끼가 되라고 한 거였어?”
카놀라는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사람이 아무리 사악해도 그렇지, 생전 험한 일정을 겪어 보지 않은 사람한테 대뜸 이런 일을 시켜? 그것도 ‘보상’이랍시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연신 헛숨을 내쉬는 그녀의 모습에 피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했는데 제사장은 카놀라에게 이 일에 대해 일언반구의 설명도 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기야, 알았다면 카놀라가 이렇게 순순히 야영지를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미끼를 설치하고 오는 거죠. 불길로 짐승들을 유인하면, 근처에 미리 설치해 둔 덫에 몇 마리쯤은 걸려들거든요.”
피아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대꾸하며 다시 걸음을 뗐다. 어깨를 늘어뜨리곤 털레털레 앞서 걷는 피아의 뒷모습을 황당하다는 듯 보던 카놀라가 후다닥 그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태우면 야생 동물이 모여들 거라며!”
“냄새가 퍼지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니까요. 불을 지피자마자 짐승이 튀어나오진 않을 거예요.”
피아는 침착하게 말을 했다. 날쌘 그라사들이 이 임무를 맡는 이유도 최대한 빨리 복귀하기 위해서다. 짐승들을 유인하려는 불이지만 그것에 그라사의 목숨을 걸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야영지는 사냥터와 조금 떨어진 곳에 세우고, 상대적으로 야생 동물들이 많지는 않다. 그러니 냄새가 나도 짐승들이 모닥불에 몰려들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결국 이 일의 대책이라곤, 냄새가 퍼지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럴 만한 여유는 있을 것이다. 가는 길이 좀 길고 험한 듯하지만, 침착하게 서두르면 되겠지.
―라고 분명 피아는 제 입으로 그렇게 말했다. 호언장담하며 앞서 걸었다. 분명 그랬는데.
“……불을 지피자마자 튀어나오진 않을 거라며?”
“그, 그러게요……. 이럴 리가 없는데……?”
까만 풀숲이 흔들리며, 하나둘 빛나는 안광이 드러났다. 목구멍에서부터 올라오는 으르렁거림이 낮게 깔렸다. 불길은 순식간에 꾸러미를 불태우고 더욱 하늘 위로 치솟았다. 장작들이 화염에 휩싸이는 게 보였다. 그러니까 저 장작들에는 이제야 불길이 옮겨붙은 참이었다. 그만큼 찰나였다. 그들이 불을 붙인 것은.
“……게다가 덫은 어디 있는데?”
“그, 글쎄요?”
카놀라와 피아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 조심스러운 뒷걸음질에 으르렁거림이 더욱 거칠어졌다. 두 사람은 야영지 쪽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귀신같이 그 앞을 가로막는 짐승의 모습에 우뚝 멈춰야 했다.
빛이 닿는 곳까지 나온 짐승은 형형한 안광으로 카놀라와 피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카만 털 때문에 그 눈빛이 더욱 오싹하게 보였다. 그 모습을 확인한 피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검은 늑대가 왜 여기에……?”
“저게 뭔지는 중요하지 않아, 피아.”
카놀라가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피아의 팔을 꽉 잡았다. 난생처음 마주한 짐승의 안광에 손이 덜덜 떨렸다. 마른침을 삼킨 카놀라가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중요한 건…… 우린 지금 망했다는 거야.”
8. 산 넘어 산
화롯불 위에 자리 잡은 주전자에서 뜨거운 김이 솟아났다.
천으로 손잡이를 말아 쥐고 잔으로 기울이니, 속에 있던 마른 찻잎이 물살을 따라 빙글빙글 돌았다. 흰 김과 함께 떫은 향기가 퍼져 나갔다. 주전자를 내려놓은 브리도가 따뜻한 찻잔을 집어 들었다. 막 그것을 입가에 가져가려는 찰나, 막사의 문이 열리고 누군가 고개를 내밀었다.
“저, 제사장님.”
브리도는 잠시 멈추었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뜨거운 찻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 온몸을 훈훈하게 덥혀 주었다.
자신에겐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헴슨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더운 공기가 열린 문 바깥으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대신 차가운 밤공기가 내부를 휘저었다. 브리도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불은 아까 올라왔는데 여태 잠잠합니다.”
헴슨이 불안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그러나 브리도는 헴슨을 돌아보는 대신, 붉게 빛나는 화롯불 속 숯을 응시했다. 도통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이는 브리도의 모습에 헴슨이 답답하다는 듯 발을 굴렀다.
바깥은 이제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라도 밤중 산길은 헷갈리기 쉽다. 게다가 마중 불까지 지핀 상황이라면 주변에 짐승들도 많을 테니 더욱 위험했다.
“지금이라도 그라사들이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침묵을 견디지 못한 헴슨이 재차 말을 건넸다. 그제야 제사장의 시선이 미미하게 움직였다.
“어째서?”
그것은 예상치 못한 되물음이었다. 당황한 티가 가득 묻어나는 얼굴로, 헴슨은 더듬더듬 답했다.
“그야 카놀라 님은 후사의 정혼녀…….”
“그녀는 이방인이다. 후사의 정혼녀가 아니라.”
헴슨의 말을 차갑게 잘라먹은 브리도가 다시 차로 관심을 돌렸다. 한가롭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헴슨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 몇 번 입을 벙긋거리던 헴슨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피아도 그분과 함께 있습니다!”
피아는 사육사지 사냥꾼이 아니다. 아무리 모든 트리폴인들이 전사라고 해도, 저마다 특화된 분야가 있기 마련이었다. 피아도 기본적인 싸움법은 익혔지만, 사냥에 뛰어들 정도로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당연히 다수의 짐승과 맞닥뜨리는 일은 그에게 아주 위험했다.
헴슨의 말에 브리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내 들고 있던 잔을 한쪽에 내려 둔 그녀가 두 손을 무릎 위로 모았다.
“트리폴인이 이방인과 얽혔을 때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 잊고 있는 이가 너무 많아. 나도 무척 안타깝지만, 피아는 모두를 다시 일깨워 줄 게다.”
브리도는 짐짓 탄식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피아의 개입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거나 의도한 게 아니다. 그녀는 죄 없는 그라사들까지 이방인과 얽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제 발로 따라나서는 피아를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제 선택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알아챘을 땐 이미 늦은 뒤리라.
대신 그녀는 따로 시간을 내서 그에게 애도를 표하기로 했다. 그의 희생은 절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방인과 가까이 지내서 좋을 게 없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알릴 기회다. 다들 잊고 있던 경각심을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혹 이방인이 감언으로 너를 홀렸느냐?”
“그게 아니라…….”
헴슨은 말을 맺지 못했다. 갑자기 막사로 뛰어 들어온 다른 그라사 때문이었다.
“제사장님! 제사장님! 사냥 팀이 돌아왔습니다!”
내내 여유롭던 브리도의 표정에 약간의 당혹감이 어렸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벌써?”
마중 불은 보통 사냥 팀이 돌아오기 한두 시간 전에 피운다. 평소처럼 마중 불을 피우게 했으니 본래라면 사냥 팀도 한참 더 늦게 돌아와야 했다.
브리도는 재빨리 막사를 나섰다. 야영지 입구가 시끌시끌하더니, 곧 그라사들이 우르르 들어섰다. 자신의 말을 사육사들에게 맡긴 그라그포드가 성큼성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백한 안색으로 선 제사장을 확인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야영지가 뒤숭숭하군.”
“일찍 오셨네요.”
브리도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를 반겼다. 뒤따라 나온 헴슨이 전전긍긍한 표정으로 그라그포드를 보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라그포드에게 지금의 사태를 고하고 싶어서 입술을 달싹였다. 옆에 제사장이 굳건히 서 있지 않았다면 당장 미주알고주알 늘어놓았을 것이다. 뻔히 짐작되는 상황이었다. 브리도는 헴슨을 힐끗 노려보았다. 막 뭔가 말을 뱉으려던 헴슨이 제사장의 눈길에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헴슨은 아무 말도 못 했지만, 다행히도 그라그포드는 눈치가 빨랐다. 묘한 시선으로 헴슨을 보던 그라그포드가 브리도를 돌아보았다.
“무슨 짓을 했습니까?”
“아무것도요.”
브리도는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러나 그녀의 천연덕스러움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늦게 나타난 에델이 서늘하게 굳은 표정으로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다급하게 뛰어왔는지 가볍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제 정혼녀는 어디 있습니까?”
에델은 야영지에 도착하자마자 카놀라의 막사를 찾아갔었다. 그러나 그곳엔 차가운 공기만 감돌고 있었다. 하마터면 다른 곳에서 놀고 있나 보다, 하고 지나칠 뻔했다. 그런 에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밀어 넣어진 가방이었다. 열린 채 아무렇게나 헤집어져 있는 가방. 누가 봐도 다급하게 무언가를 챙겨 든 모양새였다. 에델은 지체할 필요도 없이 제사장을 찾았다. 카놀라에게 뭔가 해코지를 할 사람이라면 제사장뿐이었다.
사뭇 사나운 기세로 묻는 에델을, 브리도는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그녀는 냉소적인 미소를 지으며 대답 대신 엉뚱한 지적을 늘어놓았다.
“정혼녀가 아니라 아무것도 승인되지 않은 이방인입니다. 혹 다른 이들이 오해할 수 있으니 올바른 단어를 사용…….”
“그녀는 제 연인입니다.”
브리도의 입가에 희미하게 떠올라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어디 있습니까.”
그의 목소리엔 카놀라의 부재가 제사장의 짓이라는 확신이 어려 있었다. 어차피 숨겨 봐야 누구든 후사에게 이야기할 일이다. 당장 이 옆에 서 있는 헴슨만 해도 대신 대답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해 보이지 않나.
브리도는 주변의 그라사들을 훑어보다 짧게 혀를 찼다. 그녀의 뇌리에 유창하게 말을 늘어놓던 카놀라가 떠올랐다. 보나 마나 그 듣기 좋은 말들로 그라사들을 구슬렸을 것이다. 멍청한 사내들이야 해사하게 웃으며 달콤한 말을 늘어놓으니 덜컥 넘어갔을 테고.
“두 번째 시험을 치르고 있습니다.”
시험을 언제 어떻게 치를지에 대해서 일일이 알려 줘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니 저들이 항의할 명분 또한 없다. 브리도는 화제를 돌리고자 입술을 뗐다. 그러나 내내 잠자코 있던 헴슨이 불쑥 끼어들어 목소리를 냈다.
“제, 제사장님! 시험은 불을 피우는 것까지 아니었습니까?”
쓸데없는 소리. 브리도가 짜증스럽게 헴슨을 돌아보았다. 헴슨이 찔끔한 표정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미 에델은 설명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브리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브리도는 치미는 한숨을 애써 억누르며 차갑게 말했다.
“두 번째 시험으로 마중 불을 피우라 일렀습니다. 이리 일찍 돌아오실 줄 알았으면 더 빨리 피울 것을 그랬네요.”
“불이 올라왔는데 돌아오는 기척이 없습니다!”
이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브리도는 헴슨을 나무라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에델이 몸을 휙 돌리는 바람에 그쪽으로 시선을 뺏기게 되었다. 에델은 더 들어 볼 것도 없다는 듯 제 말을 찾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멀어지는 후사를 보던 브리도가 언성을 높여 그를 불렀다.
“후사!”
에델은 브리도의 부름이 들리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무기를 점검했다. 무장을 해제하고 있던 다섯 전사도 급하게 제 말을 챙기고 있었다. 제사장의 옆에서 눈치를 보던 헴슨이 슬금슬금 게걸음으로 이동했다. 후다닥 어딘가로 달려간 그는 곧 제 몸만 한 철장을 들고 뒤뚱뒤뚱 뛰어왔다. 에델이 출발하기 바로 직전에 돌아온 헴슨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이 젭이 카놀라 님의 신발에 집착했습니다. 분명 쓸모가 있을 겁니다!”
에델의 시선이 젭에게로 향했다. 롬과 투갈이 젭을 알아보곤 에델에게 뭐라고 속닥거렸다. 에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자, 아이누가 헴슨에게서 철장을 받아 들었다.
순식간에 진행되는 이들의 준비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던 브리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녀는 그라그포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팔짱을 끼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표정은 무척이나 기묘했다. 그는 제 아들을 물끄러미 응시하기만 할 뿐, 달리 제지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보다 못한 브리도가 사나운 목소리로 그를 다그쳤다.
“이방인 한 사람 때문에 중요한 대사냥까지 망칠 작정이십니까!”
“제사장이야말로 묵은 원한에 사로잡혀 눈이 멀었군요.”
그라그포드의 덤덤한 대꾸에 브리도가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는 사이 헴슨에게 마중 불의 위치를 확인한 에델이 말에 올랐다. 다섯 전사 역시 당연하다는 듯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에델은 최소한의 이성으로 그라그포드의 허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 아들과 시선이 마주친 그라그포드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델의 말이 지면을 박찼다.
순식간에 야영지를 빠져나가는 에델과 다섯 전사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그라그포드가 옆을 돌아보았다. 희게 질린 얼굴을 한 브리도가 그라그포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라그포드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비극적인 개인사는 애석하지만, 그 감정을 해소하고자 트리폴의 앞날을 망치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라그포드의 말이 이어질수록 브리도의 안색은 더욱 파리해져 갔다. 어금니를 꾹 깨물고 치미는 분노를 겨우 억누른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이게 어떻게 내 개인의 문제입니까? 주변국에서 트리폴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디라즈께서도 아시잖습니까! 저들은 우릴 그저 야만인으로 생각합니다! 나라로 여기지도 않……!”
“그렇다면 나라임을 알려야죠.”
브리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벙긋거렸다.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라그포드가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트리폴의 그라사는 자랑스럽고 용맹한 전사입니다. 우린 숨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라그포드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그의 다섯 전사가 대기 중이었다. 그들은 브리도와 그라그포드의 분위기를 눈치채곤 요령껏 다른 그라사들을 해산시킨 상태였다. 적어도 이들은 브리도가 아닌 그라그포드의 명령을 우선으로 생각할 그라사들이었다.
“사냥개와 젭을 풀어라.”
“디라즈!”
브리도가 얼굴을 붉히며 큰 소리로 그라그포드를 불렀다. 덕분에 멀리 떨어져 있던 그라사들까지 이쪽을 힐끔거렸다. 그러다가 다섯 전사의 사나운 시선을 받고는 모른 척 제 할 일에 매진했다.
디라즈와 제사장의 불화를 온 동네에 소문낼 필요는 없다. 대사냥 첫날부터 삐걱거려 봤자, 이후의 일정을 망치게 될 뿐이다. 그라그포드는 혀를 차며 브리도를 서늘하게 노려보았다.
“신전의 뜻대로 내 아들은 누구보다 완벽한 그라사가 되었다. 녀석은 바라는 사람을 얻을 자격이 충분해.”
“이방인은 이 나라를 좀먹을 겁니다.”
조금도 물러섬이 없는 브리도의 반박에 그라그포드가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거대한 그림자가 브리도의 머리 위로 드리워졌다.
“브리도.”
나지막한 부름이 브리도의 귓가에 닿았다. 마치 옛날의 어느 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브리도가 파르르 떨리는 시선으로 그라그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라그포드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네 불행으로 전부를 단정 짓지 마.”
*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연신 들이켠 차가운 공기 탓에 폐가 얼어 버릴 것 같았지만, 헐떡거리는 숨을 멈출 수 없었다. 목구멍이 쓰리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피아의 격려가 아니어도 카놀라는 그 어느 때보다 힘을 내는 중이었다. 사람이 극한의 상황에 부닥치면 초인적인 힘이 나온다고 했던가? 평소라면 진즉 힘들다고 나가떨어졌을 그녀인데,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어떡해서든 기운을 내고 있었다. 내리막길이라 속도를 주체할 수 없는 것도 한몫했지만 말이다.
“앗!”
카놀라를 부축해서 뛰던 피아가 짧게 소리를 질렀다. 제 코앞만 보고 정신없이 달리던 카놀라가 시선을 들었다. 뻥 뚫린 허공을 발견하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악!”
“헉, 괜찮으십니까?”
바닥에 미끄러지듯 엎어진 카놀라가 앓는 소리를 냈다. 눈에 처박은 얼굴이 시리고 아팠다. 두껍고 푹신푹신한 것들로 온몸을 감쌌으니 다른 곳은 까지지 않았을 테지만, 얼굴은 조금 긁힌 것 같았다. 볼에서 느껴지던 작은 쓰라림은 이내 그보다 더 큰 냉기에 밀려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마스크도 하는 건데. 뒤늦은 후회를 하며, 카놀라가 끙끙댔다. 피아의 도움을 받아 겨우 상체를 일으킨 카놀라가 두 손으로 바닥을 짚은 상태에서 정면을 보았다. 다시 봐도 뻥 뚫린 허공이었다.
고민하던 그녀가 몸을 일으켜 길의 끄트머리 쪽으로 다가갔다. 뒤에서 피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지만, 카놀라는 꿋꿋이 길의 끝에 다다랐다. 그러곤 다시 몸을 낮추어 두 손으로 바닥을 짚고선 고개를 허공으로 살짝 내밀었다.
“잘은 모르겠는데 엄청 높아.”
“여기서 봐도 높아 보입니다.”
굳이 절벽의 높이를 눈으로 확인한 카놀라가 진저리를 치며 뒷걸음질 쳤다.
“길이 막혔어. 어떡하지?”
카놀라가 발을 동동 구르며 피아를 보았다. 피아는 카놀라가 떨어뜨린 횃불을 들어 자신들이 달려온 길을 비추었다. 풀숲은 고요했다. 두 사람이 침묵하니 온 산맥이 적막해졌다. 간간이 뜨거운 숨과 함께 내뱉어진 하얀 김만 허공에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래도 따돌리는 건 성공한 것 같습니다.”
“아니면 자기들끼리 싸우느라 우릴 놔준 걸 수도 있고.”
“네. 어쨌든 정말 천운입니다. 신이 도우셨어요.”
처음 마중 불 앞에서 검은 늑대들을 마주했을 때, 피아는 이곳이 제 무덤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피아의 허리춤엔 검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저 늑대들을 모두 죽일 수 없었다. 게다가 카놀라까지 있지 않나. 카놀라는 짐이 될지언정,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다.
‘시선을 피하지 마시고 천천히 뒷걸음질 치세요.’
다행히 카놀라는 소란스럽게 비명을 지르거나 충격에 빠져 넋을 놓진 않았다. 그녀는 잔뜩 겁을 먹어 벌벌 떨고 있었지만 피아가 시키는 대로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피아는 한 손으로 검을 빼 쥐었다. 어슬렁대던 늑대 중 한 마리가 도약하려는 듯 몸을 낮추는 게 보였다. 벌어진 입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도, 도망가야 하지 않을까?’
‘늦었어요. 차라리…….’
피아의 눈에 활활 타오르는 마중 불이 보였다. 짐승은 불을 무서워한다. 저 불길이라면 방패 삼아 얼마간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버티면서 기회를 보는 게 나아요.’
‘버텨? 어떻게?’
그렇게 묻는 순간 늑대가 사납게 달려들었다. 피아가 이를 악물곤 몸을 틀며 검을 휘둘렀다. 검은 부질없이 허공을 베었고, 늑대가 곧장 방향을 틀어 피아에게 달려들려 했다. 그러나 허공에 휘둘러진 횃불에 놀라, 늑대는 뒤로 펄쩍 뛰어 물러났다. 빠르게 숨을 몰아쉬던 피아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동물들은 불을, 무서워한댔어.’
그렇게 말하는 카놀라의 목소리야말로 잔뜩 겁을 집어먹어서 부들부들 떨리는 상태였다. 용케 저런 와중에도 횃불을 휘둘렀다. 피아는 조금 안도했다.
‘맞아요. 그러니까 우린 이 마중 불과 멀어지는 순간 바로 잡아먹힐 거예요.’
늑대들과 두 사람 사이엔 마중 불이 있다. 늑대들은 불의 열기 때문인지 쉽게 접근해 오진 않았다. 다행히 무리 전체가 나타나지 않아서 그나마 이렇게 소강상태를 유지했지, 조금만 더 늑대 수가 많았으면 이조차 불가능했을 것이다. 조심히 멀어지려는 시도가 실패했으니 그냥 마중 불에 의지해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버티면 전사들이 와 줄까?
‘저 녀석들은 지금 굶주리지 않았어요. 급하게 사냥하려 들진 않을 거예요.’
대치가 길어지면 불리하다. 언제까지고 이 불길이 유지되진 않을 테니까. 지금이야 불을 붙인 직후라 이렇게 불길이 거세다지만 잦아들기 시작하면 더는 여기에 기댈 수 없었다. 게다가 저 늑대들보단 카놀라 쪽이 좀 더 빠르게 지칠 테고.
피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쩌지? 이렇게 버틴다고 전사들이 와 주진 않을 것 같았다. 이건 이방인의 두 번째 시험이니까. 자신이 어쩌다 여기에 개입하게 됐을까?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따라나섰지?
‘있잖아.’
횃불을 구명줄처럼 잡고 있던 카놀라가 낮은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곧 다른 짐승들도 오겠지?’
‘네. 그럴 거예요.’
생각만으로도 더 골치가 아팠다. 무슨 짐승이 꾀어들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발이 묶이다니. 도대체 덫은 왜 작동하지 않는 거지? 설마 덫 설치를 까먹었나?
‘적의 적은 나의 친구잖아. 뭐든 나타나면, 저 늑대들과 싸움이 붙지 않을까?’
‘그럴 리가…….’
피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풀숲이 다시 흔들리며, 또 다른 안광이 등장한 탓이었다. 피아와 대치 중이던 늑대가 이를 드러내며 풀숲을 경계했다. 몇몇 늑대들이 하울링을 했다. 카놀라와 피아를 대할 때와는 전혀 달라진 분위기였다.
풀숲을 헤치며 등장한 짐승은 얼핏 늑대와 비슷한 외형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회갈색 털이나 좀 더 날씬한 체격 덕분에 같은 종이 아니라는 걸 알아볼 수 있었다.
새롭게 등장한 짐승을 확인한 피아가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상에. 카놀라 님은 천재세요.’
현재로서는 전혀 기쁘지 않은 칭찬이었다. 카놀라가 불안한 시선으로 새로 등장한 짐승을 보았다. 피아가 ‘코요테’라고 일러 주었으나, 카놀라는 짐승의 정체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쟤 혼자서 다 이기진 못할 거 같은데?’
‘저 녀석은 혼자가 아니에요.’
무리 생활을 하거든요. 그 말을 증명하듯, 몇 마리의 코요테가 더 모습을 드러냈다. 코요테들은 늑대들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늑대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른거리는 불길에 비쳐 보이는 짐승들의 윤곽이 꼭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만약 제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 아니었다면 멋지다며 팔자 좋은 감상평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카놀라가 마른침을 삼키며 힐끗 피아를 보았다. 피아는 눈을 부릅뜨곤 두 짐승 무리를 주시하고 있었다.
모습을 드러낸 코요테들은 생각보다 숫자가 많았다. 덩치는 검은 늑대들이 컸지만, 코요테들 수가 더 많아 호락호락하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이미 카놀라와 피아를 먹이로 인식한 녀석들은 먹이를 노리는 경쟁자를 없애는 쪽에 더 관심을 두고 있었다.
먼저 달려든 건 코요테 쪽이었다. 마중 불 너머로 늑대와 코요테들이 으르렁거리며 뒤엉키기 시작했다. 피아는 숨을 죽이며 카놀라와 함께 천천히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자릴 벗어나려는 찰나, 둘이 도망가려는 것을 눈치챈 늑대 한 마리가 빠르게 도약했다. 피아가 다급하게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나 늑대는 측면에서 뛰어든 코요테에게 목덜미를 물리며 옆으로 나뒹굴었다.
그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피아의 팔을 잡고 확 잡아당겼다.
‘뛰자!’
이후로는 숨넘어갈 듯한 도주의 시간이었다. 두 사람은 길을 따질 겨를도 없이 냅다 달리기 시작했고, 뒤에선 짐승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늦게 따라붙은 짐승들이 달려들어서 아슬아슬한 상황이 몇 번 발생했지만, 기어코 떨쳐 냈다. 그 결과 이러한 절벽 끝에 다다른 터였다.
“이동해야 해요. 하룻밤만 버티면 전사들이 저희를 찾아낼 거예요.”
피아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야외에서 횃불 하나로 버티는 건 무리다. 밤이 깊어갈수록 추워질 테니, 동물이 아니라도 얼어 죽을지 모른다. 최소한 찬 바람을 막을 수 있을 만한 곳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저기, 저거 동굴 아냐?”
카놀라의 말에 피아가 화색 어린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풀숲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던 구석에 시커먼 입구가 보였다.
“맞아요!”
“어머, 다행이…… 피아?”
“네?”
“너 피 나잖아?”
당혹스러운 카놀라의 말을 듣고서야, 피아는 제 몸에서 피가 나는 것을 깨달았다. 피아가 멍청한 표정으로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쫓기면서 몇 번 달려드는 늑대를 검으로 쳐 냈었는데, 그 과정에서 발톱에 긁힌 모양이었다. 워낙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팔이 아픈 줄도 몰랐다. 이렇게 피가 많이 나올 정도면 꽤 깊이 긁혔을 텐데.
옷 바깥으로 번진 피를 우두커니 내려다보던 피아가 문득 기겁했다. 막 다가서려는 카놀라에게 손을 휘저으며 멀어진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짐승들이 피 냄새를 맡고 올 거예요! 저랑 같이 있으시면 안 돼요!”
“어?”
그는 들고 있던 횃불을 카놀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러곤 급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동굴에 숨어 계세요. 짐승들은 제 피 냄새를 쫓아올 테니 괜찮으실 거예요.”
그는 당장이라도 카놀라를 떠날 기세였다. 입을 벙긋거리던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동굴 입구는 모닥불을 피워서 막으시면 돼요. 불이 꺼지지만 않으면 짐승들이 쉽게 들어가지 못할 테니까요. 전 얼른 여길 벗어나서…….”
“말도 안 되는 소리 마! 다친 몸으로 밤새 산맥을 헤매겠다는 거야?”
카놀라가 화난 목소리로 피아의 말을 잘랐다. 그러나 피아는 도리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다가 곧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아깐 도망치는 데에만 정신이 팔려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아픔도 느껴졌다. 게다가 계속 움직인 탓인지 쉽게 피가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옷을 적시고 있지만 이러다간 바닥에 핏자국이라도 남길지 모를 일이었다.
“전 이미 다쳤지만 카놀라 님은 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저놈들의 미끼가 되어서…….”
“누구도 미끼가 될 필요는 없어!”
카놀라가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멍청아! 다친 건 치료하면 되잖아! 하룻밤만 버티면 전사들이 올 거라며!”
답답하기는 피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늑대도 코요테도 후각이 아주 뛰어난 녀석들이라 금방 피 냄새를 맡고 쫓아올 것이다. 꼭 그 둘이 아니라도 다른 무언가가 나타날 수 있다. 뭔가 나타나지 않은 지금 얼른 이동해야 다른 방향으로 유인할 수 있다.
“한 사람이라도 온전하게 살아남아야죠!”
“둘 다 조금만 다치고 살아남으면 되잖아! 왜 꼭 한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남아야 해?”
“그건…….”
피아는 말문이 막혔다. 왜냐고 묻는다면 달리 할 말이 없었다. 야영지였다면 치료할 수 있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다. 있는 거라고는 검과 횃불뿐인데 이렇게 피 냄새를 풍기며 있을 순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사람이 다치면 그는 다른 그라사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이탈해야 한다.
트리폴인이라면 누구나 당연하다는 듯 그렇게 배운다. 당연한 걸 당연하게 행동하려는데 왜냐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하지만 피가…….”
“피는, 아! 맞아, 맞아! 이게 있었어!”
카놀라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반색을 했다. 그녀는 피아에게 횃불을 쥐여 주곤 갑자기 제 겉옷의 안쪽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연달아서 주머니를 꺼내기 시작했다. 대체 어떻게 품고 왔나 싶을 정도로 양이 제법 많았다. 손으로 들고 있기도 버거워서 아예 바닥에 주머니를 펼쳐 놓은 카놀라가 그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피아에게 손짓했다.
“이 중에 지혈제가 있을지도 몰라! 설명서를 못 챙겨서 난 못 알아보니까 와서 봐 봐.”
“……이건 대체 언제 챙기신 겁니까?”
“아까 장갑이랑 모자 챙기러 막사 갔을 때. 내가 눈치는 좀 빠른 편이거든. 분명 도움이 될 줄 알았어!”
의기양양한 그녀의 모습에 피아는 팽팽하던 긴장감이 툭 끊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상황은 여전히 똑같은데, 더는 다급하지가 않았다.
피아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놀라의 맞은편에 쭈그리고 앉았다. 주머니에는 내용물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건성으로 훑어보니 죄다 약초들이었다. 그것도 신전에서 보급품으로 제공하는 약초들. 물끄러미 주머니를 응시하던 피아가 미심쩍은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설마 야영지의 보급품을 몰래 빼돌리신 거…….”
“아냐! 이거 티보치나가 나만 쓰라고 챙겨 준 거거든?”
“……그럼 더 쓰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제발 답답한 소리 좀 하지 말고 얼른 골라봐. 지혈제가 뭐야?”
카놀라의 재촉에 못 이긴 피아가 찬찬히 주머니를 살펴보다가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겁니다. 파닉스.”
“다행이다. 챙겨 왔구나.”
카놀라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머지 주머니들을 다시 주섬주섬 외투 안으로 욱여넣었다. 꼼꼼하게 자리를 마련해 차곡차곡 쌓을수록 외투가 빵빵해져 갔다. 그런 그녀를 미묘한 눈으로 바라보던 피아가 제 손에 들린 주머니를 내려다보았다.
파닉스. 행여나 못 알아볼까 걱정되었는지, 글자도 큼지막했다. 혼자만 쓰라고 받은 것이라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주머니 안에는 많아야 두 번 정도 사용할 만한 양의 파닉스가 들어 있었다. 피아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피가 멈춰도 냄새가 사라지진 않아요.”
“시끄러워. 지혈이나 하고 있어 봐. 내가 엄청난 걸 꺼낼 거니까.”
그 외투 속에 또 뭐가 있는 겁니까? 피아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그녀는 아예 벌떡 일어나서 본격적으로 주머니를 뒤지고 있었다. 외투에서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는지, 이번엔 낑낑거리며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었다. 그러다가 비로소 뭔가를 찾아내곤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짠!”
쭈그리고 앉아 있던 피아가 슬며시 횃불을 들었다. 카놀라가 들고 있는 건 작은 금속 상자였다.
“여기서 동물을 쫓아 버리는 냄새가 난댔어! 네 피 냄새를 맡고 와도, 이 냄새를 맡고 다시 가 버릴 거야!”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렇게 생각하며, 피아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저도 모르게 픽 웃어 버렸다. 무심결에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되게 바보 같은데 멋지네요.”
그 솔직한 감상평에 카놀라가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가 뭐라고 불만을 터뜨리기 전에, 피아가 먼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도 이런 말을 해 줄 사람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횃불 때문에 피아의 얼굴 반절이 그늘졌다. 그것은 씁쓸한 시선을 감춰 주었지만, 기운 없이 늘어진 입매까지 숨기진 못했다. 카놀라는 그런 피아를 놀란 얼굴로 보았다.
다치면 모두를 위해 미끼가 되는 게 당연한 곳. 만약 피아의 아버지가 그런 상황에 부닥쳤었다면? 아까 야영지에서 잠깐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찾고 싶다고 했던 사람이 아버지야?”
피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굳게 다문 입술은 그 침묵이 긍정임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말을 잇지 못하던 카놀라가 이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분명 찾을 수 있을 거야! 피아는 동물을 잘 다루잖아!”
그러니까 그건 사육사라면 누구나 다 하는 거라니까요. 투덜거리듯 중얼거린 피아가 아예 바닥에 털썩 앉아 버렸다. 편하게 다리를 풀고 앉은 그가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혔다. 새카만 하늘에 별이 쏟아져 내릴 듯 반짝이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켠 그가 한 손으로 지혈을 하며 덤덤하게 대답했다.
“이미 찾았어요.”
카놀라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피아는 여전히 지혈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그냥 약초로 상처 부위를 뒤덮으면 끝이었다.
“아버지의 시체를 발견한 건 어머니가 키운 사냥개였어요.”
아버지를 찾고자 진로를 바꿨지만 사실 조금만 더 깊게 생각했으면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사육사가 된 햇병아리보다는, 오랫동안 사육장에서 일한 그의 어머니가 실질적으로 더 도움이 될 것이라는 걸.
그런데도 당시의 피아는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홀로 산맥을 뒤지고 다닐 수도 없고, 수색대에 합류할 수도 없다. 게다가 이렇게 개별적으로 실종된 그라사들의 경우엔 따로 수색 팀을 꾸리기 어려워서, 사냥 팀이 수색을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피아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곤 아버지를 추적해 줄 짐승을 길러 내보내는 일이었다.
“괜찮아요. 그분은 모두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이탈하셨으니까요. 전 아버지의 희생이 자랑스러워요.”
그렇지 않아도 상황이 좋지 않은데 너무 우울한 이야기로 분위기를 흐렸다. 피아는 쓸데없이 말이 많았던 자신을 자책하며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을 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피아를 노려보던 카놀라가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넌 안 돼.”
피아가 의아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시선을 내린 상태로 고집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이곳에서 겨우 한 달 산 내가 트리폴인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그래도 안 돼. 싫어. 당연한 희생은 없어. 그러니까 다신 미끼가 되겠다는 소리 하지 마. 그런 생각도 하지 마. 네 아버지의 희생은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대단한 거야.”
카놀라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었다. 마음이 복잡한데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정말 잘할 수 있을까? 애써 외면하고 있던 생각이 마음 한 편에서 고개를 들었다. 에델에 대한 사랑만으로 눌러앉기에 이곳은 너무 아프고 힘든 곳이다. 후사비라는 자리에 앉을 사람은 더 훌륭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안 할게요. 드래곤이랑 인사도 못 해 봤는데 억울하잖아요.”
피아가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진짜 소개해 주실 거죠?”
그 말을 들으며, 카놀라는 복잡하게 얽힌 제 생각을 싹둑 잘라 버렸다. 그러곤 짐짓 새치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르겠다. 기왕 온 거, 그리고 앉기로 한 거 잘하면 되지!
“당연하지. 미리 마음껏 자랑해도 돼.”
자랑했다가 소개 못 받으면 책임져 줄 것도 아니면서.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키득거리던 피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우선 불을 지펴야겠어요. 제가 장작거리를 좀 챙길게요.”
“저 동굴 입구에 뭐가 있는 거 같은데? 나뭇가지 아니야?”
피아에게서 횃불을 받아 든 카놀라가 아까 발견한 동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풍경이 점차 분명해졌다.
풀숲을 헤치며 입구 쪽으로 다가간 카놀라가 멈칫했다. 거침없던 걸음이 얼어붙은 듯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천천히 손을 내려 횃불로 바닥을 비추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 나뭇가지들인 줄 알았던 무더기가 가까이에서 보니 조금 다르게 보였다.
그것은 흰 뼈였다.
“카놀라 님?”
카놀라가 숨을 멈추었다. 등 뒤에서 피아가 의아한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카놀라는 움직이지 않는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겨우 반보 정도 뒷걸음질을 치고서야, 그녀는 제 앞으로 시선을 들 수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숨이 흘러나왔다. 떨리는 시선으로 새카만 동굴 입구를 바라보던 카놀라가 횃불을 조금 들었다. 심장 소리가 고막을 터뜨릴 듯 크게 울렸다.
“카……!”
피아가 황급히 입을 다물며 헛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카놀라는 이를 악물었다. 눈가가 시려 왔다. 횃불에 비치는 짐승의 안광에 옴짝달싹도 할 수가 없었다. 손의 떨림이 전달되어서, 불꽃이 허공에 흔들렸다.
흰 김을 뿜으며 느릿느릿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 나온 짐승이 목울대로 울음을 터뜨렸다. 짐승의 아가리에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였다.
공포에 질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카놀라는 떨리는 숨만 겨우 죽이며 눈앞의 짐승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횃불 때문인지 유독 붉은 털이 짐승을 더욱 위협적으로 보이게 했다. 허공에 몇 번 코를 킁킁대던 곰이 앞발을 들고 뒷발로 일어섰다. 그러나 당장이라도 앞발을 휘두를 것 같았던 곰은 다시 천천히 네 발 자세로 돌아왔다. 곰은 계속 허공에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멀어져야 한다.
뇌리를 스치는 생각에 카놀라는 필사적으로 다리에 힘을 주었다. 곰은 목구멍 깊은 곳에서 낮게 그르렁거릴 뿐 다가오진 않았다. 이따금 고개를 휘젓기도 하는 게 아무래도 티보치나가 준 향갑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것 같았다.
카놀라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비명이 튀어나올 것 같았지만 그랬다간 저 곰이 당장 달려들지도 모른다.
곰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피아도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카놀라는 어떻게든 곰과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노력했다. 향갑으로 조금이나마 시간을 벌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것이다. 카놀라가 최대한 숨을 죽이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 발을 뒤로 디뎠다.
순간 그녀의 발등 위로 무언가 달려들었다.
“꺄악!”
갑작스러운 습격에 반사적으로 비명을 터뜨린 카놀라가 뒤늦게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곰은 이미 입을 쩍 벌리며 앞발을 치켜들고 있었다. 쩍 벌어진 아가리에서 위협적인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횃불을 떨어뜨린 카놀라가 두 팔로 머리를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질끈 감은 눈꺼풀 아래로 그렁그렁 맺혀 있던 눈물이 툭 떨어졌다.
“카놀라 님!”
곰이 흉포하게 울부짖었다. 당장에 머리 위로 곰의 앞발이 떨어질 것만 같던 순간,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안아 당겼다. 카놀라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으나, 허리를 감싸고 단단하게 지지한 팔 덕분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크와앙!
곰의 울음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파르르 떨던 카놀라가 눈을 내밀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새카만 털가죽 외투였다.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창백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누군가의 옆모습이 코앞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