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이 걷던 루덱이 문득 맞은편의 누군가를 발견하곤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맞은편에서 오던 이도 루덱을 발견하곤 멈칫했다. 복도 중간에서 어정쩡하게 만난 둘은 잠시 어색하게 침묵하며 서로를 보았다. 그러다가 결국 어색함을 이기지 못한 루덱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이누라고 했던가요? 후사의 호위 기…… 아니, 전사인.”
“맞습니다. 당신은 루덱이라고 했죠. 왕녀를 지키는.”
의미 없는 대화는 채 3분을 넘기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는 서로의 이름만 다시 상기하곤 입을 다문 두 사람은 결국 어정쩡하게 시선을 돌렸다.
“그럼 이만.”
“안녕히.”
인사말과 함께 비켜섰으나,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다. 덕분에 서로의 앞길을 막게 된 두 사내는 다시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몇 번이나 똑같이 움직여 서로의 앞길을 막던 두 사람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숨을 내쉬며 멈춰 섰다.
이게 무슨 바보 같은 꼴인가. 루덱은 멍청한 제 모습에 실소를 흘렸다. 하지만 정말이지, 어색할 수밖에 없는 관계인 건 사실이다. 제 주인은 저들에게 적대를 받았지만 저들의 주인과 연애를 시작했고, 그런데 저들은 제 주인을 내쫓으려고 하고, 어찌 보면 도와주려는 것 같기도 하다가…….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꼬리를 자르며 루덱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언제나 후사의 곁을 지키는 줄 알았는데요.”
“언제나 지킵니다. 지금은 그저…….”
아이누는 말끝을 흐리며 잠시 고민했다. 사실 그가 에델의 곁에서 물러날 시간은 아직 한참 멀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나와 있는 이유라고 한다면…….
“따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그러는 당신은 왕녀의 곁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닙니까?”
트리폴에선 카놀라에게 따로 호위를 배정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카놀라는 여태 자신이 데려온 이들을 자신의 호위로 세워 둔 상태였다. 일단 궁 안에서 대부분의 생활을 하니 기본적인 궁궐 호위들이 있었고, 애초 궁 안에서 카놀라의 목숨을 노릴 만한 사람이 없기도 해서 큰 문제가 없었다. 어쨌든 대외적으로 혼약서를 들고 온 처지니 아무리 싫어도 대놓고 죽이려 든다든가 하는 정신 나간 짓을 할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그녀를 지키는 게 루덱의 일이라 따로 명이 없는 한 그는 늘 카놀라의 주위를 맴돌았다. 따로 명이 없는 한.
“저도 따로 시키신 일이 있어서요.”
“이쪽은 후사와 디라즈께서 계신 곳으로 가는 방향입니다.”
“그러는 이쪽은 우리 왕녀님이 계신 방향이죠.”
두 사람은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루덱은 이 순간, 아이누와 자신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강렬한 예감을 했다. 아이누의 저 지친 표정이 그것을 증명했다.
“후사께선 업무가 바쁘신 모양입니다.”
루덱이 넌지시 운을 띄웠다. 아이누는 살짝 미간을 좁히며 침묵했다. 루덱의 말을 듣자, 자연스럽게 조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업무를 하러 오신 거 아닙니까?’
아이누는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물은 것뿐이었다. 혹시 어디 아픈 건지, 두통이라도 생겼는지. 얼굴이 조금 상기된 걸 보면 열이 오른 모양인데 감기에 걸린 건 아닌지. 주군의 건강을 걱정하는 수하의 순수하고 충직한 마음이었다. 그리고 그런 아이누에게, 에델은 아주 냉담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너 같으면 할 수 있겠어?’
업무를 할 게 아니라면 왜 이렇게 급하게 돌아오셨습니까?
아이누는 혀끝까지 치민 말 가까스로 되삼켰다. 대신 그는 눈을 굴리며 후사의 눈치를 보았다. 왕녀에게 일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온 에델은 책상 앞에서 하염없이 시간만 죽이고 있었다. 가득 쌓인 문서의 높이는 아침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내일 저 문서 더미에 시달릴 후사를 생각하니 벌써 걱정스러웠지만, 당사자는 그것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이누 혹시……’
팔짱을 끼고 한참이나 책상을 노려보던 에델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누를 불러 놓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곁에서 보는 동안, 아이누는 설마설마하던 자신의 가정을 확신하게 되었다.
‘후사께선 원하는 걸 행할 수 있는 자리에 계십니다.’
아이누의 말에 에델이 비로소 시선을 들었다.
‘다섯 전사는 후사의 뜻을 따릅니다. 후사께서 왕녀를 귀하게 여기신다면, 저희는 충실히 그 뜻을 이행할 것입니다. 누군가 반기를 든다면 제가 직접 다리를 부러뜨리겠습니다.’
에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 어려 있던 걱정이 조금이나마 가셨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사는 동안 에델이 트리폴인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알고 있는 아이누는 그가 조금 안쓰러워졌다. 그의 주인은 누구보다 강하고 뛰어나지만,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평가한다. 그래서 트리폴인들의 기대에 조금의 어긋남도 없으려 수없이 노력하고 있다. 카놀라를 대할 때도 그 부분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아이누는 에델의 긴장감이나 걱정을 덜어 주고자,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우선 그 왕녀가 무척…… 사교적이어서 누구나 후사의 마음을 이해할 겁니다. 심지어 울란은 그녀에게 칭찬까지 들었고 말입니다.’
‘칭찬?’
‘네. 일전에 그녀가 훈련장에 온 적 있잖습니까? 그때 울란을 보고 한 첫 마디가 ‘근육이 빵빵하다’는 칭찬이었습니다. 울란 녀석, 나중에 그 말을 곱씹으면서 은근히 자랑하더군요. 얼마나 꼴불견인지 후사께서 보셔야……’
무심코 주절거리던 아이누는 문득 후사의 표정이 심상찮다는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에델의 시선은 평소처럼 무심했지만, 늘 그의 뒤를 지키는 아이누는 알 수 있었다.
눈을 껌뻑거리던 아이누는 속으로 사죄했다. 당사자인 울란에겐 들리지 않는 사과였다. 울란이 이 사실을 알면 이번에야말로 아이누의 입을 꿰매 버리겠다고 날뛸 것이다. 하지만 어쩌나. 제 입이 이렇게 가벼운걸.
‘근데 후사께선 첫 연애시잖습니까? 아무래도 조언 같은 게 필요하시지 않을까요? 전사들을 모아 올까요?’
아이누는 자신에게 불똥이 튀기 전에 재빨리 말을 돌렸다. 다행히 에델은 아이누의 말에 동의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평온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대들도 모두 경험이 없잖아.’
‘…….’
‘한 명도.’
‘…….’
‘틀린가?’
아니요. 너무 정확하신 나머지 가슴이 아플 정도입니다.
다시 생각하니 가슴이 아파서, 아이누는 루덱의 존재도 잊고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눈에 힘을 주고 침묵하는 그의 귓가로 루덱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었습니까?”
“아닙니다. 후사께선…… 디라즈와 단둘이 면담 중이십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습니다.”
후사와 가까운 이 중 연애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곤 디라즈 밖에 없다는 슬픈 현실에 아이누는 다시 한번 가슴이 찡해 왔다. 그 와중에 에델은 카놀라를 자기 대신 지키라며 대뜸 보내 버렸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지켜야 하는 건지, 날은 저물어 가는데 언제까지 지켜야 하는 건지도 모르는 상태로 아이누는 여기까지 온 것이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아이누의 모습에 루덱이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루덱은 본능적으로 아이누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근데 왕녀님께는 무슨 볼일입니까?”
면담하느라 자리를 비운 도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안 되니 일단 대뜸 가라고 하십디다, 라고는 차마 말할 수가 없었다. 아이누는 애써 덤덤한 목소리를 꾸몄다.
“……앞으로 우리 후사 잘 부탁드린다고 말씀드리러 갑니다. 그러는 그쪽은요?”
“……저도 뭐, 비슷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아주 안타까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러곤 동시에 생각했다.
얼른 퇴근이나 하고 싶다.
*
때때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보곤 한다.
별은 죽어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니 별똥별은, 하늘로 올라갔던 사람이 다시 땅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새 생명을 예견하는 것이라 길조로 여겨졌다. 좋은 것이라니 그런가 보다, 그렇게 여겼다. 숱한 구전 설화 중 하나겠거니 싶었다.
그녀를 만난 건 별똥별을 본 다음 날이었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웅크린 작은 몸과 흐트러진 백금발을 보았을 때, 그는 정말로 그녀가 하늘에서 떨어진 별인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고 유치한 생각이지만 그때는 아주 진지했다.
별 같은 사람이었다. 작고 반짝거리는 별. 그래서 언젠가 다시 하늘로 돌아갈 것만 같아 두려웠다. 그녀가 사라지는 상상만 해도 거대한 곰과 맞섰을 때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공포가 심장을 옥죄었다.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 감정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이런 속내를 이야기하면, 그녀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마 그의 걱정을 그저 농담으로 여긴 탓이리라. 그럴 때면 그는 진지하게 그것이 진담이라고 피력했다.
‘당신에게 두려운 게 있다니, 누구라도 믿지 않을 거예요. 난 당신에게 두려움을 주러 온 게 아닌걸요?’
그녀는 아주 다정하게 그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얼굴에 닿은 손끝이 따뜻한 온기를 전해 주었다.
‘하지만 조금 기쁘네요. 내가 당신의 유일한 두려움이라니.’
무엇으로라도 당신을 기쁘게 했다면 나도 기뻐.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그녀는 활짝 웃었다. 그 미소는 뇌리에 깊숙이 박혀서 아직도 종종 떠올랐다.
아직도 기뻐? 당신이 여전히 나의 유일한 두려움이라는 게?
그는 때때로 묻고 싶었지만 이제 대답을 해 줄 그녀는 없었다.
“디라즈.”
밤하늘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라그포드는 느리게 고개를 내렸다. 정면에 마련된 제단에서는 준비가 모두 끝난 것 같았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고 대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이 곧 시작될 예정이었다. 곳곳에 횃불을 밝힌 덕분에 밤인데도 무언가를 식별하는 데엔 조금의 어려움이 없었다.
평소엔 디라즈가 제사장과 함께 의식에 참여하지만, 오늘의 의식은 그도 한 명의 그라사로서 온전히 기도에만 집중할 수 있다. 제사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트리폴인 모두가 제가 짊어진 모든 의무를 벗고 오직 그라사로서 서는 날. 그리고 이 모든 그라사들의 기도를 최고신에게 전달할 이는 수석 신녀였다. 광장 중앙에 선 수석 신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비디움 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전사의 말에 디라즈가 시선을 돌렸다. 흐반을 대동한 비디움이 자리를 찾아가는 게 보였다. 모든 트리폴인들이 의식에 참여할 수는 없으니, 먼 곳에서는 대표를 보내온다. 비디움은 아마 해돋이 협곡의 대표로 참석했을 것이다. 작년까지는 다른 이가 왔는데 올해엔 직접 온 걸 보니 이방인 왕녀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때마침 카놀라가 반색하며 비디움에게 다가가는 게 보였다. 냉담하게 굳어 있던 비디움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저 이방인 왕녀는 그녀와 다르다. 그녀는 저렇게 키가 크지도, 시끄럽지도, 요란하지도 않았다. 덕분에 카놀라를 보며 그녀를 떠올릴 일은 도리어 없었다. 다만 최근 들어 문득문득 생각하는 건 있다.
그녀가 저 왕녀처럼 살갑고 사교성이 좋았다면, 상황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물론 그라그포드는 그 대답을 알고 있다.
아니.
“후사는?”
“곧 도착하신다고 합니다.”
연애한다고 했나.
그라그포드는 며칠 전 자신을 찾아왔던 제 아들을 떠올렸다. 진지한 얼굴로, 연애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고 묻던 그. 그라그포드는 드물게 벙찐 표정을 지었으나, 에델은 한없이 진지한 태도로 그라그포드의 답을 기다렸다. 그제야 그는 에델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 그는 에델의 심정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에델을 이방인과 이어 주려 했던 건 맞지만 사랑에 빠지길 기대하진 않았다. 사랑에 빠지는 건 너무 위험했다. 이미 그것을 체험해 본 그라그포드는 적당한 거리감이 서로의 안정적인 심신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에델은 이미 물러서긴 그른 것 같았다. 일단 앞으로 나아갔다면, 뒤로 물러서는 건 불가능하다. 트리폴의 그라사란 물러섬을 배우지 않으니까.
저 요란하고 시끄러운 왕녀가 이곳에 온 뒤 내내 에델을 쫓아다녔으니, 에델이 결국 마음을 연 것도 어찌 보면 불가항력처럼 보였다. 왕녀의 친화력은 그라그포드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에델이라고 뭐 도리가 있었겠나. 그라그포드는 제 아들의 연애를 쉬이 받아들였다.
대신 그는 한 가지를 당부했다. 절대 사고는 치지 마라.
“디라즈! 비디움 님이 오셨는데 인사하셨어요?”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디움과 희희낙락하던 카놀라가 금세 그의 곁에 다가온 것이다. 횃불에 비친 탓인지 카놀라의 금발이 유독 반짝였다.
에델은 카놀라가 봄 햇살 같다고 했다. 트리폴의 추운 겨울을 녹여 줄 봄 햇살. 그라그포드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면전에 대고 비웃었으나, 속으론 그녀를 생각했다.
별 같던 그녀. 정말 별로 돌아가 버린 그녀.
그렇다면 이 봄 햇살 같다는 왕녀는, 봄 햇살처럼 이곳을 녹여 줄 수 있을까?
“축제 때는 자신의 의무를 벗고 모두가 그라사로 선다면서요! 그럼 디라즈도 의무에서 벗어나신 거잖아요.”
“그게 인사와 무슨 상관인가.”
“어머, 책무를 벗어나면 디라즈가 동생이시고 비디움 님이 누나잖아요! 동생이 누나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야죠! 흐미르! 흐미르는 흐반에게 인사했어?”
카놀라의 조잘거림을 귓등으로 흘려듣던 그라그포드가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라그포드가 비디움에게 인사를 건네기 전까진 열이고 백이고 혼자 말을 늘어놓을 여자라는 걸 그는 알았다. 카놀라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소릴 한다는 건, 비디움도 어느 정도는 카놀라가 하는 말에 동의한다는 소릴 테고.
동생이 누나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나? 하여간 저놈의 누나는 어릴 적부터 참 한결같은 웬수다.
“전 흐반과 친하지 않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는 흐미르의 모습에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흐반은 내가 그린 흐미르의 그림들을 전부 달라고 했는데?”
“……그 자식 지금 어디 있다고요?”
흐미르는 당장에 흐반을 찾아 나섰다. 그런 그를 보며 키득거리던 카놀라가 디라즈를 돌아보았다. 처음 이곳에 와서 제 이름을 말할 때 보여 주었던 그 당당한 눈빛이었다.
카놀라는 언제나 저런 모습이었다. 자신을 꺼리고 경계하는 사람들 틈에서 한결같이 웃는다. 그 웃음으로 상대방을 기어코 제 편으로 만든다. 그녀와는 다르지만, 다르므로 그라그포드는 카놀라야말로 진짜 후사비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앞장서라.”
그라그포드의 말에 카놀라가 가볍게 통통 튀듯 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멀지 않았기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이미 진즉 먼저 도착한 흐미르는 한쪽에서 흐반과 뭐라고 실랑이를 벌이는 중이었다. 흐반은 실랑이를 벌이는 중에도 비디움 쪽을 힐끗거리고 있었는데, 언제든지 달려올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극성스러운 녀석이었다.
“이게 누구야. 멍청한 동생이잖아?”
가까이 다가간 것만으로도 비디움은 누군지 알아챈 듯 비웃음을 지었다. 적나라한 그녀의 말에 되레 놀란 카놀라가 슬그머니 그라그포드의 눈치를 보았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아무렇지 않다는 표정으로 비디움을 보고 있었다.
솔직히, 저 ‘동생’이란 단어 뒤에 ‘새끼’가 붙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나마 광장이라고 욕설은 자제한 거겠지. 제 누이의 더러운 성질이야 유명하니 이 정도의 말버릇은 크게 논란이 될 일도 없었다.
“오랜만이군, 무식한 누이.”
가감 없는 그라그포드의 대응에 카놀라의 표정은 더욱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지금 이 상황을 ‘친근함’으로 해석해야 할지 ‘신경전’으로 해석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뭐가 되었든 그녀가 끼어들 수 없다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말이다.
“네 녀석 만나러 온 거 아니야.”
“이방인을 만나러 왔겠지.”
“너 우리 새아가가 조금이라도 고생해 봐. 가만 안 둘 거야. 나 아직 네 녀석 수염을 몽땅 뽑아 버릴 정도의 능력은 있어.”
저건 빈말이 아니다. 이미 비디움에겐 전적이 있었다. 그라그포드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새아가라니. 아직 신전의 승인은 나지 않았는데.”
“빌어먹을 승인 타령은 집어치워. 넌 그 꼴을 당하고도……!”
비디움이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여차하면 당장이라도 휘두를 기세였다. 아무리 모두가 의무를 내려놓았다 해도, 비디움이 그라그포드의 누나라고 해도 폭력을 행사하면 처벌을 받을 것이다. 내내 이곳에 신경을 두고 있던 흐반이 끼어들려는 듯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가까이에 있던 카놀라가 냉큼 비디움의 손을 잡으며 속닥거렸다.
“시고모님, 화내지 마세요. 웃기만도 바쁜 인생이잖아요. 게다가 인상 쓰시다 주름이라도 지면 어떡해요. 저 여기 올 때 주름 개선 화장품은 안 가져왔단 말이에요.”
“……주름 개선 화장품? 그런 것도 있니?”
“그럼요! 제가 급한 일만 끝내면, 본국에서 왕창 뜯어낼 거예요. 사실 나중에 깜짝 선물로 드리려고 했는데…….”
“어머나, 말만으로도 고맙구나.”
비디움의 얼굴은 금세 온화해졌다. 저게 주름 개선 화장품이라는 것 덕분인지, 아니면 카놀라의 애교 섞인 말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보던 그라그포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본래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남매도 아니었으니 이 이상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 갈 필요도 없었다. 마침 에델이 도착했는지, 그가 대동하는 다섯 전사의 얼굴이 보였다. 사람들 틈에서도 불쑥 튀어나와 있는 다섯 전사의 얼굴을 보니 에델도 저 근방에 있을 것이다. 보이진 않지만.
올 사람들은 거의 다 왔으니 이제 얼른 의식을 시작해야 할 텐데, 제단 쪽에선 아직도 잠잠했다.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신녀가 언제부터인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카놀라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비디움과 시시덕거리느라 바쁜 카놀라는 신녀의 시선을 모르고 있었다. 신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정작 다가오지는 않았다. 되레 그녀의 곁에 있던 제사장이 카놀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보였다.
제자리로 돌아가려던 그라그포드는 잠시 고민했다. 제사장이 와서 무슨 소릴 하려나 걱정되는 마음이 약간 든 까닭이었다. 카놀라라면 제사장의 말조차 웃으며 받아칠 것 같지만, 비디움이 옆에 있으니 또 다를 수 있다. 게다가 비디움은 신전이라면 치를 떠는 누이다. 오랜만에 참석해서 제사장과 크게 다퉜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불리한 건 누이였다.
결국, 그라그포드는 다시 카놀라와 비디움에게 다가갔다. 그와 비슷하게 제사장도 그들에게 다가와 있었다.
“곧 의식을 시작할 예정이니 나가십시오.”
가타부타 설명도 없는 말이라, 카놀라는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을 소요했다. 브리도의 시선이 정확히 카놀라를 향해 있었으므로 나가라는 말 또한 카놀라에게 하는 게 분명했다.
“나가라고요?”
“당신은 이방인이지 그라사가 아닙니다. 중요한 의식에 불순물이 섞여 있으면 신이 노하실 겁니다.”
“불순물이라니. 그녀는 후사비가 될 사람이야.”
비디움의 음성에 노한 기색이 어렸다. 그러나 제사장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비디움을 향해 말했다.
“여기서 언성을 높일 처지는 아닐 텐데. 정상이 아닌 그라사를 받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고맙게 여기시오. 비디움. 디라즈의 간곡한 말씀이 아니었으면 해돋이 협곡 자체가 유지되지 않았을 테니.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많은 그라사들의 등에 업혀 살아가는 게 부끄럽지도 않소?”
높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그 내용 때문인지 무척 신랄하게 들렸다. 비디움은 울컥한 얼굴로 뭔가 말을 하려 했으나, 얼른 다가온 흐반의 만류로 겨우 화를 억눌렀다. 흐반은 제사장을 차갑게 노려보다가 비디움을 데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놀라가 이내 입술을 앙다물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나 꽉 막히고 예의 없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건가?”
“아, 디라즈. 그러잖아도 묻고 싶었습니다. 이 이방인은 언제 내보내실 겁니까? 덕분에 아직 의식을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보내다니요?”
“오, 후사도 왔으니 이제 이방인만 없어지면 되겠습니다.”
혼란스러운 대화가 오갔다. 인파를 뚫고 도착한 에델은 오자마자 들은 소리에 와락 인상부터 썼고, 그라그포드는 못마땅하다는 눈으로 제사장을 보는 중이었다. 주변의 몇몇 그라사들은 이방인 때문에 의식을 시작할 수 없다는 제사장의 말을 듣고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고맙게도 몇 사람은 카놀라를 두둔해 주려는 듯 ‘정혼녀’라는 입장을 들먹였으나 그마저도 제사장이 ‘승인하지 않았다’라고 잘라 냈다. 틀린 말도 아니니 말씨름을 이어 가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오가는 대화를 들으며 상황을 파악한 에델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술을 뗐다. 그는 카놀라가 나갈 이유가 없다는 걸 말하려 했으나, 손을 번쩍 들고 크게 말하는 카놀라 때문에 그 뜻을 이룰 수는 없었다.
“중요한 의식이니 얼른 비켜 드려야겠네요.”
너무나 시원스럽게 수긍하는 그녀의 모습에 에델과 그라그포드가 동시에 그녀를 보았다. 당연히 있겠다고 떼를 쓸 줄 알았는데?
순순히 물러나겠다는 카놀라의 말에 날카롭게 날이 서 있던 브리도의 표정이 약간 누그러졌다. 그런 그녀를 향해, 카놀라가 생글생글 웃어 보였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뭡니까?”
“나가라는 건, 이 많은 사람 무리에 끼어 있지 말라는 거죠?”
카놀라가 옆쪽으로 고갯짓을 했다. 제단을 조금 멀리 두고 모여 있는 그라사들을 가리키며 묻는 그녀에게, 브리도가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물론입니다.”
그 대답에 카놀라의 미소가 더욱 환해졌다. 그녀는 손을 힘차게 뻗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좋아요. 그럼 전 저기 갈게요.”
카놀라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브리도의 얼굴이 형편없게 일그러졌다. 그녀는 어이없다는 눈으로 카놀라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놀라는 뭐가 문제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여긴 광장이에요. 나간다는 말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근데 방금 무리에 끼어 있지 말라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전 저기로 갈 거예요.”
그녀가 가리킨 곳은 광장 바로 옆에 있는 종탑이었다. 아니, 종을 걸어 두긴 했지만 탑이라기보단 망루에 가까웠다. 기껏해야 세 명 정도 올라가면 가득 찰 것 같은 좁은 공간이었는데 오늘은 의식을 보기 위해 다들 내려와 있는 터라 비어 있었다. 광장 옆이라고는 해도 위치가 멀지도 않고 높지도 않아서 의식을 구경하는 데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을 장소였다. 물론 의식에 참여했다고 보기에도 힘든 위치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화를 듣던 비디움은 흐반에게 설명을 듣고선 아낌없는 비웃음을 터뜨렸다. 그라그포드도 말은 안 하지만 애써 웃음을 참고 있는 눈치였다. 다만 에델은 여전히 카놀라가 자리를 비켜야 한다는 게 못마땅한 듯 표정을 굳히고 있었다.
“굳이 의식을 보겠다는 겁니까?”
날카로운 목소리가 브리도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당연히 궁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카놀라는 일그러진 브리도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러다가 팔짱을 끼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고개를 조금 치켜들면서 자연스럽게 내리깔린 눈에 냉소적인 감정이 얼핏 깃들었다.
“나는 당신들이 내게 요구한 대로 시험을 치를 거고, 반드시 통과해서 정당하게 내 결혼의 승인을 받아 낼 거예요. 장담할게요. 그러니 이 의식은 내가 당연히 알아야 할 행사예요.”
브리도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카놀라는 진심으로 시험을 통과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 눈치였다. 그것이 결국 무지에서 오는 용기라는 걸 알았지만, 저렇게까지 확신을 두고 말하니 진짜 이뤄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브리도는 사나운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자만이 사람의 눈을 가리는 법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저 이방인을 저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역시 디라즈가 개입한 걸까? 아무래도 티보치나에게 이 일에서 물러나라고 해야겠다. 직접 나서지 않고선 이 괘씸함이 풀리지 않을 것 같다.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 브리도의 귓가로 카놀라의 해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그렇다면 제사장님은 발밑을 조심하셔야겠어요. 안 보이신지 한참 된 거 같은데!”
카놀라는 손뼉을 치며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탄식했다. 그러고는 브리도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먼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전 이만 가 볼게요. 더는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요.”
발랄하게 손을 흔들어 준 그녀가 냉큼 망루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언제든지 개입하기 위해 긴장을 하고 있던 루덱도 냉큼 카놀라의 뒤를 따랐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도 얼른 따라붙었다. 뒤를 힐끗 돌아본 안젤리나가 나지막하게 속닥였다.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러게. 위험한 사람이야.”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카놀라의 옆에서 오스카도 한마디를 얹었다.
“그리고 저기도 위험한 장소입니다.”
오스카가 가리키는 곳은 망루였다. 비교적 낮긴 해도 족히 2층 높이는 넘어설 것 같았다. 올라가는 길도 사다리밖에 없는 데다 나무로 만들어진 뼈대는 툭 건드려도 넘어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놀라는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듯 허리에 손을 올리곤 외쳤다.
“내가 아무리 몸치래도 그렇지. 사다리 하나 못 올라갈 것 같아?”
호기롭게 외치는 것치곤 본인도 꽤 걱정하고 있는 눈치다. 슬쩍 망루를 잡고 힘줘서 밀어 보는 게, 단단하게 세워졌는지 확인하려는 모양새였다. 다행히도 망루는 꿈쩍하지 않았다. 망루의 단단함을 확인한 카놀라가 자신을 만류하는 루덱을 뿌리치곤 호기롭게 사다리를 잡고 오르기 시작했다. 차가운 사다리의 촉감이 손안에서 느껴졌다. 이곳에 오고 난 뒤로는 내내 바지를 입고 있던 덕분에 차림에 대한 걱정도 없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기에 사람을 이렇게 차별하는 건가? 이렇게 된 이상 반드시 의식을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 앞이라 내내 웃고는 있었지만 혼자가 되니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씨근덕대며 단숨에 위까지 도달한 카놀라가 허리를 펴고 광장을 내려다보았다.
제사장과 카놀라 때문에 약간 소란스러웠던 곳은 어느새 정리가 된 모양이었다. 망루에 올라서 보니, 제단과 그라사들 사이에 거리가 제법 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횃불을 동그랗게 세워서 만든 공간은 필요 이상으로 넓었다. 광장의 반절은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제단 옆에는 아마 신에게 바치는 것으로 추정되는 짐승이 놓여 있었고, 그 몸통에는 두 개의 긴 검이 꽂혀 있었다.
공터 중앙에 우두커니 서 있던 티보치나가 천천히 제단에 다가갔다. 그녀가 제단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알 수 없는 기도문을 읊는 동안, 그라사들은 숨죽여 함께 기도했다. 순식간에 적막해진 광장의 풍경에 카놀라도 덩달아 숨을 멈추었다.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카놀라가 뚫어져라 티보치나를 보았다. 기도를 마친 그녀가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그러곤 짐승에 꽂혀 있던 검 두 자루를 양손으로 잡아 쑥 빼 들었다.
긴 검을 쥔 손이 펑퍼짐한 소매에 가려졌다. 겹겹의 흰색 제의가 움직임에 맞춰 나풀거렸다. 내내 친근하고 다정한 모습만 보아 온 티보치나가 이곳의 수석 신녀라는 게 처음으로 온전하게 다가왔다.
검을 늘어뜨린 채 사뿐사뿐 공터 중앙으로 돌아온 티보치나가 하늘을 우두커니 응시했다. 그라사들은 모두 자신들의 기도를 위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오직 그녀만이 눈을 들어 새까만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티보치나의 시선이 카놀라 쪽으로 살짝 움직이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건 아주 찰나였다. 카놀라가 미처 반응할 새도 없이, 티보치나의 두 팔이 들리고 그녀의 몸이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늘어져 있던 제의가 마치 흰 꽃처럼 둥글게 펼쳐졌다. 카놀라는 숨을 들이켜며 눈을 크게 떴다.
그것은 너무나도 아름다운 검무였다.
반짝이는 날이 찬 공기를 가르고, 부드러운 걸음이 넓은 공터를 거닐었다. 검은 머리카락 너머로 보이는 희고 차가운 안색엔 신을 부르는 경건함이 깃들었다. 마치 검과 하나가 된 듯한 움직임이었다. 카놀라는 넋을 잃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느리게 시작한 움직임은 때로 빨라졌다가, 때론 느려졌다. 적막한 광장에는 오직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만이 음악처럼 울려 퍼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검무가 점차 느려지고, 펄럭이던 제의가 점차 내려앉았다. 티보치나의 몸이 다시 공터 중앙으로 돌아왔다. 검을 늘어뜨린 그녀가 다시 하늘을 응시했다. 검무를 추느라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뒤로 쏟아졌다. 멍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티보치나가 검의 긴 끝을 공터 바닥에 닿게 찔렀다. 그러곤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검 끝이 바닥을 긋는 소리에, 기도하고 있던 그라사들이 고개를 들었다.
다시 제단으로 돌아간 티보치나가 두 개의 검을 교차하듯 제단 위로 올렸다. 무릎을 꿇고 그 위에 이마를 댄 그녀가 기도문을 읊고는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뒤를 돈 티보치나가 정확히 카놀라가 있는 곳에 시선을 주었다.
내내 티보치나를 바라보고 있던 카놀라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넋을 놓고 있던 게 민망해져서, 카놀라는 더욱 힘껏 두 팔을 올리곤 마구 흔들어 주었다. 마음 같아선 박수도 치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는 건 쉽게 알 수 있었다.
티보치나는 아까처럼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그러나 카놀라는 찰나에 스친 미소를 본 뒤였다. 카놀라는 빨갛게 변한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검무는 끝났지만, 아직도 심장이 쿵쾅거렸다.
틀어막은 입 안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이건 정말 평생 소장해야 할 장면이었어!
이런 걸 못 보게 하려고 했다니, 제사장은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이 틀림없었다.
카놀라는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반발심과 경계심을 느꼈다. 정작 제사장이 자신을 적대할 땐 조금쯤 웃으며 넘긴 점도 있었는데, 도저히 이건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오늘 보지 않았다면 그녀는 티보치나가 이렇게나 멋지고 아름다운 검무를 춘다는 걸 영영 몰랐을 테니까!
카놀라의 시선이 티보치나를 홀린 듯 따라다녔다. 여기서 앙코르를 외치면 미친 여자처럼 보일 거라는 아는 한 줄기의 이성이 그녀를 겨우 붙들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광장에서는 그라사들이 줄지어 제단 앞에 섰다. 한 명 한 명이 앞으로 나와서 아까 티보치나가 했던 것처럼 무릎을 꿇고 이마를 댔다. 의식을 마친 그라사는 본래 자리로 가지 않고 각자 광장을 빠져나갔다. 단체로 합창을 한다든가, 누군가 설교하는 건 전혀 없는 깔끔하고 빠른 마무리였다. 손꼽히는 행사라기에 더 길고 웅장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의식인데 그래도 뭔가 더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의외라는 눈으로 광장을 구경하던 카놀라는 곧 얼마 전 가 보았던 신전을 떠올리곤 금방 수긍했다. 신전이 아니라 보육원에 가까웠던 그 풍경을 생각하면, 행사를 이렇게 간략하고 짧게 끝내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티보치나의 말대로라면 이런 불필요한 곳에 자원을 쏟느니 애들 방이나 하나 더 만들어 주려 할 테니까.
티보치나에게 얼른 자신의 이 흥분된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기도하는 그라사를 지켜보며 서 있었다. 아무래도 광장에 모인 모든 그라사가 의식을 끝내지 않으면 티보치나와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하염없이 의식을 바라보던 카놀라가 일단 내려가고자 사다리 쪽을 기웃거렸다.
올라올 땐 짜증에 휩싸여 있어서 몰랐는데, 직선으로 뻗은 사다리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생각보다 높게 느껴졌다. 그녀가 나무 바닥에 발을 내디딜 때마다 어쩐지 망루 전체가 흔들리는 듯했다.
게다가 사다리는 한 발자국만 내려가도 그대로 우지끈 부러질 것 같았다. 우뚝 멈춰 서서 자신이 서 있는 곳과 사다리의 위치를 확인한 카놀라가 천천히 몸을 낮추었다. 양손으로 바닥을 짚은 그녀가 몸을 바짝 낮추고는 조심스럽게 사다리까지 기어갔다.
바닥에 엎드린 상태로 눈만 내밀어 사다리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긴장감으로 인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있던 카놀라가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세상에, 오스카! 안젤리나! 루덱!”
새된 비명에 아래에서 세 사람이 머리통을 불쑥 들이밀고 망루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십니까, 왕녀님?”
“다치셨습니까?”
앞다투어 말문을 연 세 사람이 카놀라를 걱정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카놀라가 소스라치게 놀란 음성으로 외쳤다.
“이 사다리 흔들려!”
카놀라는 무척 심각했다. 그런데 그녀를 올려다보는 세 쌍의 눈들은 도리어 기운 빠진 꼴로 변했다.
“……알고 올라가신 거 아니셨습니까?”
“당연히 몰랐지! 내가 확인한 건 망루의 튼튼함이지 사다리의 튼튼함이 아니었어!”
세 사람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모호한 표정으로 얼어붙은 세 사람 중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루덱이 사다리를 잡고 힘을 주었다. 얼마나 흔들리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손등에 힘줄이 돋을 만큼 힘을 주던 루덱이 한숨을 쉬며 손을 놓았다.
“그치? 흔들리지? 나 어떡해?”
여전히 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있던 카놀라가 한 손으로 사다리를 잡고 흔들어 보았다. 역시 흔들렸다! 세상에, 어떻게 이걸 밟고 올라왔지? 과거의 나 대체 왜 이 중요한 사실을 몰랐던 거야!
카놀라가 소리 없는 경악을 하고 있는데, 루덱이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했다.
“얼른 내려오십시오.”
“사다리가 흔들린다니까?”
“안 쓰러집니다.”
“부러지면 어떡해?”
“안 부러집니다.”
루덱은 단호했다. 단호하다 못해 서릿발처럼 매섭기까지 했다. 매몰찬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불퉁한 목소리로 그를 질책했다.
“지금 내가 고립되어 있다고 막말하는 거야, 루덱? 내려가면 가만 안 둘 거야!”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에 올바른 현실을 일깨워 줬을 뿐이다. 열을 내면서도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카놀라의 모습에 루덱은 고개를 내저었다. 옆에서 마찬가지로 사다리를 확인한 오스카가 얄밉게 말을 얹었다.
“그러게 제가 진즉 위험한 장소라고 했잖습니까.”
“알았으면 날 말렸어야지!”
“말리는 것도 통하는 사람에게나 하는 거죠.”
말을 한들 들었겠나? 오스카는 미련 없이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약간 흔들리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당장 쓰러질 것처럼 요동치는 건 아니다. 예민하지 않으면 사실 알아채지도 못할 정도였다. 발을 내디딜 때 조금 삐걱거릴 수는 있겠지만 그거야 후다닥 내려오면 된다. 카놀라가 위에서 의식에 집중한 사이 세 사람은 사다리가 고정된 부분을 확인하고 다녔으니까 안전한 건 확실했다. 하지만 카놀라에겐 전혀 먹히지 않는 소리였다.
“어쩜 그렇게 다들 매정해? 나 떨어지면 책임질 거야?”
결국, 알아서 내려가야 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매몰찬 태도 아닌가. 명색이 시중인이라는 사람들이! 카놀라가 징징거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의 중얼거림에 안젤리나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달래고자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다른 이가 사다리 아래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끝도 없는 징징거림을 이어 가려던 카놀라가 입을 다물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덤덤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에델이었다. 놀라서 눈만 깜빡거리고 있는 카놀라의 모습에 에델이 재차 말을 했다.
“보기엔 허술해 보이지만 매일 정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는 카놀라가 굳은 까닭이 그의 말을 믿지 못해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물론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믿을 거다. 에델에 한해서는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그러니 지금 이렇게 놀란 까닭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일단 그녀는, 자신의 이런 멍청한 꼴을 그에게 보였다는 사실에 아주 큰 충격을 받았다. 자처해서 올라온 주제에 못 내려가겠다고 징징대는 모습을 들키다니!
“의식은요?”
“하고 왔습니다.”
티보치나의 검무는 끝났지만 그라사들 하나하나 이어 가고 있는 기도는 끝나지 않았다. 에델은 후사이니 저들 모두의 의식이 끝날 때까진 함께 제단 옆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니, 꼭 그게 아니더라도 어쨌든 후사니까 일이 많은 거 아닌가?
“격려나 설교나 훈화는? 하다못해 안부 인사는? 원래 이런 큰 행사 땐 유력 인사들 간의 친분 확인 정도는 하지 않아요?”
아무리 이곳 사람들이 순진하대도 설마 정치 자체를 하지 않을까. 군주가 있고 귀족이 있는데. 카놀라의 물음에 에델은 잠시 침묵했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힐끗 보았으나, 금방 시선을 거두었다.
착각일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아련하게 ‘후사’를 찾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필요 없습니다.”
가까이에서 일렁이는 횃대 때문에, 에델의 얼굴에 반절 정도 그늘이 드리웠다. 불에 비친 덕분인지 녹색 눈동자에 주홍빛이 감돌았다. 그 눈동자가 카놀라를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머릿속이 조금씩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뭐지? 분명 평소처럼 에델에게 반한 것뿐인데 뭔가 평소랑 다른 기분이다. 이런 꼴을 들켜서 그런가?
움쩍달싹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세 시중인들이 뭐라고 말을 해 왔다. 그러나 카놀라의 귓가로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에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이다.
“떨어지시면 제가 받아 드리겠습니다.”
“너무 고마운데, 에델, 어……. 하하하! 양심적으로 고백하자면 나 무거워요!”
카놀라가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와 같은 쾌활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꾸며 냈다는 걸 세 명의 시중인들은 단박에 알아챘다. 시중인들이 매의 눈초리로 카놀라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나 카놀라는 그들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평소와는 다른 조명 때문인 것 같다. 제 기분을 그렇게 이해한 카놀라가 막 말을 이으려는 찰나, 에델이 덤덤한 어조로 말을 건넸다.
“받을 수 있습니다.”
어색한 미소는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다치는 일은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테니까요.”
입발림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다. 조금의 사심도 없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나 미쳤나 봐.
카놀라는 불에라도 데인 듯 파드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아래에서 카놀라를 올려다보던 사람들은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진 카놀라 때문에 놀라 그녀를 불렀으나, 카놀라는 대답 대신 빛의 속도로 기어 뒤로 바짝 붙었다. 등을 기대고 무릎을 세워 앉은 카놀라가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왕녀님! 왕녀님, 왜 그러십니까?”
“저희가 올라갈까요?”
“왕녀님?”
진짜 미쳤나 봐. 왜 이러지?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 떠다녔지만,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러다간 정말로 저들이 죄다 망루로 올라올 기세였으니까. 그렇지 않아도 불안한 망루인데 늘어난 인원 때문에 무너지기라도 하면 어쩔 건가. 물론 에델은 이곳이 안전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주의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빠르게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수습한 카놀라가 다시 사다리 쪽으로 기어갔다. 눈을 빼꼼 내미니, 막 올라오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루덱이 보였다. 루덱은 다시 등장한 카놀라의 모습에 반갑다는 듯 크게 웃었다. 그러나 곧 자신에게 눈을 부라리는 그녀의 모습에 움찔 놀라 사다리에서 떨어졌다.
덕분에 잠시 비켜서 있던 에델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카놀라는 심호흡을 하며 제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기도했다.
“당신은 곧 대사냥에 갈 거고, 난 겨울 산맥을 가야 하니까 우리 둘 다 다치면 안 돼요. 근데 나를 받아 주다가 다치면 어떡해요? 나도 당신이 다치지 않게 할 거예요. 사다리는…… 내가 잘 내려가 볼게요. 대신 흔들리지 않게 잡아 주기만 할래요?”
에델은 카놀라의 이상한 증상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사다리의 양쪽을 잡아 주는 그의 모습에, 카놀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는 더 지체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당장이라도 뒤로 넘어갈 것 같던 사다리는 절대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설레게 했던 검무는 잊은 지 오래였다. 대신 그녀는 이해할 수 없는 제 반응을 이해해 보려 애쓰느라 바빴다. 그러니까 이렇게나 멍청하고 무기력한 기분은 정말이지 난생처음이었다.
진짜로 미쳤나?
*
‘그렇게 진지해질 필요 뭐가 있어?’
웃으며 물으면, 상대방은 조금 상처받은 기색을 보였다. 그러곤 애써 웃으며 말을 이었다.
‘왕녀님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혀 드릴 거예요. 상상만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러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반사적으로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녀가 듣기엔 정말이지 허황한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웨딩드레스? 당신은 나와 결혼까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그렇게 물으면 상대방은 이번에야말로 상처받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그녀는 손을 들어 그의 볼을 살살 쓸어내렸다. 따뜻한 손길만큼이나, 그를 바라보는 파란 눈동자도 다정했다.
‘혼약은 내 소관이 아니야.’
‘제가 청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름다운 성을 선물로 드릴게요.’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을 주겠노라 늘어놓았다. 아름다운 성, 보석, 드레스, 진귀한 음식……. 퍽 듣기 좋은 말들이었다.
맹목적으로 자신을 사랑해 오는 상대방을 보고 있노라면, 때론 우월감이 든다. 그녀는 제 손끝 하나에 목숨이라도 내놓을 듯한 사내의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즐거웠다. 그는 생김도 아름다운 사내라 곁에 두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즐거웠다. 아름다운 것을 마음껏 감상하는 건 행복한 일이니까. 그 아름다운 것이 저밖에 없다는 듯 매달려 온다면 더욱.
몇 번째 남자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평균치를 따져 보았을 때, 그와의 연애는 제법 길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쁘지 않았다. 한 자리를 달라고 칭얼대지도 않았고, 함께 떠나자며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애타게 주변을 맴돌았다. 처음엔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종종 그녀와의 미래를 이야기했다. 그녀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너무 먼 미래였다. 그의 머릿속에서 그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성의 가장 큰 방을 차지한 아내였다. 그는 상상 속 아내에게 끊임없이 보석을 바치고, 사랑을 속삭이며, 절절하게 무릎 꿇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 꼴을 보는 게 무척이나 지루해졌다. 그녀는 슬슬 그의 진지한 태도가 부담스러워졌고, 사랑을 갈구하는 눈빛이 귀찮아졌다.
‘당신은 어째서 지금 이 순간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아?’
‘전 더 먼 미래까지 함께하고 싶으니까요.’
‘아.’
그녀는 감흥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아무렇게나 시선을 돌렸다. 커다란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하던 그녀가 툭 말을 뱉었다.
‘나 저 나무 위에 올라가 보고 싶어.’
‘네?’
‘올라가고 싶다고.’
그녀는 천진난만한 목소리로 재차 강조했다. 그는 곤혹스러운 눈으로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성인 남성이 올라도 견딜 만큼 튼튼해 보였다. 그리고 높았다.
‘행여 떨어지기라도 하면…….’
‘다치겠지.’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은 그대에게 가겠지.’
‘……네?’
그는 아주 당황한 눈치였다. 하지만 부정하지는 못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그와 함께 있다가 다친다면 그건 모두 그의 책임이다. 새삼스럽게 그것을 체감하니 부담감이 밀려왔다. 그의 표정이 경직되는 것을 본 그녀가 천연덕스럽게 턱을 괴었다.
‘괜찮아? 내가 나무 위에서 떨어지면 당신은 지금 가진 모든 걸 잃을 텐데. 왕족 시해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지.’
왕족 시해죄라는 말에 그의 표정은 이제 더없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그제야 이 상황이 조금 재미있어졌다. 그래서 아낌없이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말해 줘. 내가 저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날 도와줄 거야?’
‘하지만……’
‘떨어지면 당신이 받아 주면 되잖아.’
떨어지는 사람을 낭만적으로 받아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는다. 그건 동화에서나 나올 장면이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 그런 문제가 아니어도 곤란합니다. 위험하니까요!’
‘아, 그래. 위험하구나.’
참 좋은 대답이네. 위험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녀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아, 나무에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위험하지. 떨어지는 사람도, 받아 주는 사람도. 그의 상상 속 아내가 언제나 성안에만 있는 까닭도 그러하겠지. 위험해서.
그녀는 지극한 과보호에 몸 둘 바를 모를 만큼 고마워졌다. 그래서 절로 냉소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볼게. 내가 저 나무 위에 올라가게 되면, 당신과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할 거야. 그럼 도와줄래?’
그는 난처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의 그녀는 이렇게 이상한 고집을 부린 적이 없다. 징징대긴 해도 무리한 부탁을 들어 달라고 요구한 적은 없다. 오늘의 그녀는 이상했다.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나도 모르겠어.’
그녀가 고개를 내저으며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이 다시 커다란 나무로 향했다.
‘그냥 지루해서 그래. 우리가 지금 서로에게 가진 감정은 일시적일 뿐이야. 그게 미래를 만들어 주진 않아. 게다가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과 별개로, 당신은 지금의 나조차 책임지기 버거운 사람인걸?’
‘바, 바라신다면 전망이 좋은 장소를 알아보겠습니다.’
그런 건 의미가 없어.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애써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대신 아무렇지도 않게 빙긋 웃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귀하게 대해 주니 참 기쁘네.’
그때 그는 꽤 기뻐했던 것 같다. 아마 자신이 정답을 이야기했다고 생각한 것 같다. 사실 정답이랄 것도 없었다. 무엇이든 트집 잡기 마련이니까.
그냥 그때의 그녀는,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와의 관계가 지루하고 재미없어져서, 무엇이든 트집을 잡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책임지지도 못할 미래를 말하는 태도를 트집 잡았다.
그 대화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그에게 이별을 통보했다. 새로운 사랑에 빠지는 일은 어렵지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녀의 삶에서 연애란 그런 것이었다. 그 순간의 감정에만 충실한 것. 그래서 자유로웠고, 상대방의 진지한 태도엔 조금 난감해졌다. 어차피 그것의 기한은 한정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더욱 현재의 감정에 집착했다. 언젠가 사라질 테니 놓치지 않고 누리길 바랐다.
트리폴에 온 뒤로도 다르지 않았다. 그녀는 늘 ‘지금’의 감정에 충실했다. 특히 제 정혼자를 대할 때 있어선 더욱 그러했다. 그것이 옳다는 생각에는 추호의 의심도 해 본 적이 없다.
“듣고 계십니까?”
카놀라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에델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카놀라는 괜히 헛기침하며 곧장 눈을 피했다.
“어,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 하느라 못 들었어요. 한 번만 더 설명해 줄래요?”
“이건 대사냥에 참가하는 사람들에게 지급되는 기본 물품입니다. 이건 그동안의 탐색을 바탕으로 만든 지도이니 잃어버리시면 안 됩니다.”
카놀라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지도를 받아 들었다. 눈에 잘 익지 않았지만, 축제 동안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뭐라도 알아볼 수 있겠지.
“그리고 이건…….”
집중해야겠다고 다짐한 지 채 3분도 안 지나서 다시 딴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카놀라는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며 정신을 일깨웠다. 일단 설명부터 듣자. 지금 듣지 않으면 나중에 분명 후회할 테니까.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으나 좀처럼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서 있자, 결국 에델이 설명을 멈추고 다시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피곤하시다면 이만 들어가십시오. 설명은 내일 해 드리겠습니다.”
망루에서 내려온 뒤로 카놀라는 내내 이상했다. 그녀는 망루에서 내려오자마자 어색한 인사를 하고 곧장 제 숙소로 줄행랑을 쳤다. 다음 날이 되어서도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에델은 그 이유를 궁금해했지만 카놀라는 차마 제 상태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알지 못하겠는데 무슨 설명을 할 수 있겠나. 자신도 지금의 상태에 적응이 안 되었다. 뭐지?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이지?
“아니, 괜찮아요. 피곤한 건 아니에요.”
“대사냥을 함께하는 게 부담스러우십니까?”
“설마요! 그렇지 않아요! 그냥…….”
카놀라는 난처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갑자기 에델이 싫어졌나? 그럴 리가! 그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에델의 얼굴을 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티보치나의 방문마저 외면하곤 곧장 에델을 만나러 왔겠는가. 그런데 정작 이렇게 마주하니까 평소처럼 발랄하게 굴 수가 없다. 자꾸 어젯밤에 봤던 에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의 그 눈빛, 그 목소리. 모든 것이 그녀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단지 그 순간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에델의 눈동자는 어제와 같았다. 그녀는 드디어 바라던 것을 얻었다는 걸 깨달았다. 에델은 그녀에게 정말로 마음을 열었다. 단지 마음을 열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가감 없이 보여 주고 있다. 더도 덜도 말고 딱 가진 만큼 말이다. 연애하자는 제안이 어쨌든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이젠 정작 자신이 문제다. 뭐지? 왜 저이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서 이 순간을 즐겁게 여기지 못하지? 왜 이렇게 멍청이처럼 변했지?
“혹시 어제 제가 했던 말에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응? 무슨 말이요?”
“당신이 이곳에 있는 동안 다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
전에도 한번 비슷한 문제로 대화를 했었다. 딱딱한 태도와 좁혀지지 않는 거리에 대해서. 그는 종종 ‘이곳에 있는 동안’이라는 전제를 덧붙여 왔다. 카놀라는 그제야 어제도 그가 그런 소릴 했었다는 걸 상기했다. 까맣게 잊고 있긴 했지만 말이다.
카놀라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녀보다 먼저 에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돌려보내야 할 사람이라서 지키려는 게 아닙니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에델은 그녀가 이 말에 마음이 상했다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확신했다.
습관처럼 말을 내뱉고도 혼자 얼마나 후회를 했던가. 특히 망루에서 내려온 카놀라가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을 때 그는 정말이지 땅속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밤새 잠을 못 이루고 자신의 행동을 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그라그포드는 상대방에게 마음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이야말로 후회와 오해를 남기지 않는 방법이라고 조언했었다.
에델은 그의 조언을 충실하게 이행하기로 했다. 오해의 소지가 있던 말은 하루라도 빨리 바로잡아야 했다.
“돌려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지키는 겁니다.”
이젠 오해를 하지 않겠지. 에델은 조금 시원해진 기분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벌게진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뗐으나, 곧장 다물었다. 그러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뭐라 반응할 사이도 없이 다시 혼자 남겨진 에델은 당혹스러운 마음을 애써 감추며 우선 책상 위에 늘어놓았던 물품을 정리했다. 그러곤 진지하게 고민했다. 앞으로도 그라그포드에게 조언을 계속 구하는 게 옳을지에 대해서.
그라그포드가 연애를 했던 건 맞지만, 굳이 따져 보면 그 결과까지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다. 역시 조언의 대상이 잘못된 걸까? 어쩌면 그라그포드도 너무 연애한 지 오래되어서 잘못된 조언을 해 준 것일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난처한 감정이 들었다. 너무 아버지의 말에 충실하게 따른 게 또 다른 실수로 이어졌으면 어쩌지? 이제라도 다른 사람을 찾아가 다시 조언을 구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영혼 없이 물품을 정리한 에델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에겐 아직 비디움이 남아 있었다! 비디움이라면 그라그포드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현명한 조언을 해 줄 것이다. 진작 비디움을 찾아갔어야 했는데!
에델은 곧장 그녀를 떠올리지 못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며 혀를 찼다.
“후사.”
비디움은 아직 협곡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밤 의식에 참여한 직후 돌아가기엔 길이 너무 위험했을 테니 적어도 바로 돌아간다고 해 봤자 오늘 오후 정도겠지. 에델은 바쁘게 시선을 돌렸다. 당장 심부름꾼을 보내서 비디움을 잡아야 했다.
“후사!”
“음?”
그렇지 않아도 부르려던 참인데.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울란의 모습에 에델이 반색을 하며 다가갔다. 그러나 그는 곧 울란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울란의 뒤로 반갑지 않은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신녀?”
“중한 일을 하고 계셨던 모양입니다.”
티보치나는 울란을 지나쳐 성큼성큼 에델에게 다가왔다. 에델은 반갑지 않다는 눈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어쨌든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인데 용건도 듣지 않고 내쫓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운 대로 울란에게 비디움을 찾으라고 지시한 에델이 티보치나에게 앉으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티보치나는 그가 눈짓한 의자를 한번 쓱 보고선, 무심하게 그대로 섰다. 이렇게 마주한 게 내키지 않는 건 매한가지라는 듯했다.
“어제 의식 전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무슨 소리지?”
“제사장님이 무척 화나셨던데요.”
그녀가 노할 게 뭐가 있나? 화가 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후사비가 될 사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그렇게 내쫓아 버리다니. 카놀라가 생글생글 웃으며 제사장에게 한 방 먹이지 않았으면 에델이 맞섰을 것이다. 물론 그 이후에 그라그포드의 타박도 잔뜩 받았을 테고. ……어쩌면 곤란한 모함을 당했을 수도 있고.
다시 생각하니 떨떠름한 마음이 강해졌다. 까랑까랑한 제사장의 얼굴을 떠올리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에델의 귓가로 티보치나의 말이 이어졌다.
“왕녀님께 직접 여쭤보고 싶었지만, 지금은 좀…… 정신이 없으신 것 같아서요.”
제사장의 상태를 본 티보치나는 당장에 카놀라를 찾아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아야 상황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듣지 않아도 예상되는 장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확하게 알아야 했다. 그러나 카놀라는 티보치나와의 만남을 뒤로하고 이른 아침부터 후사를 만나러 와 있었다.
그대로 돌아갈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티보치나는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후사를 만난 카놀라가 채 몇 시간을 버티지 못하고 뛰쳐나온 것이다.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티보치나가 반색을 하며 그녀를 잡으려 했으나 카놀라는 넋이 나간 얼굴로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그 뒤를 시중인들이 허겁지겁 따라가고 있었는데, 시중인들의 부름에도 멈추지 않는 걸 보니 상태가 좀 이상하긴 한 것 같았다.
아까 뛰쳐나간 카놀라의 모습이 떠오르자, 에델은 제사장을 향한 분노도 잊고 다시금 시무룩해졌다. 무뚝뚝한 표정으로 제 감정을 숨긴 에델이 덤덤하게 물었다.
“제사장께선 뭐라고 하시던가?”
“중요한 의식인데 혹 신께서 노하진 않으셨을지 걱정이라셨습니다.”
“신께서 노하셨다면 그건 제사장 때문이겠지.”
그러니 거울이나 보고 화내라 해. 아무렇게나 튀어나오려는 말을 겨우 참은 에델이 티보치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른 나가라는 의미로 노려보았지만, 티보치나는 꿋꿋하게 서서 에델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 주십시오. 전 제사장님을 보필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에델은 당장 비디움을 찾아가서 조언을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가 이대로 신녀의 요구를 무시하면, 다시 카놀라를 찾아가겠지. 다정하게 희희낙락하며 대화를 나눌 모습은 생각만 해도 짜증이 났다. 때문에 에델은 조급한 마음을 꾹 억누르며 친절을 베풀었다.
“의식을 시작해야 하니 이방인은 나가라 했지. 그래서 그녀는 그리하겠다며 망루로 올라가 의식을 참관했고.”
길지 않은 설명이었으나 티보치나가 상황을 이해하기엔 충분했다. 제사장이 말한 ‘나가라’는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다만 카놀라가 호락호락하지 않은 사람이니 그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겠지.
티보치나는 그제야 카놀라가 망루에 있었던 이유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그저 의식을 시야가 좋은 곳에서 보고자 올라간 줄로만 알았다. 망루라면 전체적으로 관망하기에 아주 좋은 자리였을 테니까.
“따라서 화를 내야 할 사람은 제사장이 아니라 나다. 신을 노하게 한 사람 또한 제사장일 테고.”
딱 잘라 말한 에델이 이제 정말로 나가라는 듯 티보치나를 노려보았다. 그는 정말로 급했다. 빨리 자신의 잘못을 알아내야 카놀라가 혹시나 가졌을지 모를 오해나 상처를 바로잡아 줄 수 있을 게 아닌가. 비디움이 협곡으로 돌아가면 당분간 에델은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이다. 대사냥 전에 협곡을 들를 시간이 따로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결국 오늘, 지금 당장 비디움을 만나야 했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델은 티보치나의 인사말을 듣기 무섭게 외투를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가 워낙 바빠 보였기에 티보치나는 쫓겨나듯 방을 나와야 했다. 복도에 우두커니 서서 잠시 정면을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떨어뜨렸다. 어젯밤의 기억이 뇌리에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어두운 밤에 이루어진 의식이라, 횃불이 없는 곳은 잘 보이지 않았다. 망루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두운 망루라 처음엔 그 위에 선 사람이 카놀라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검무를 마치고 난 뒤에야 티보치나는 카놀라의 존재를 확신했다. 손을 힘차게 흔들어 주던 카놀라의 얼굴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자신의 검무를 보고 어떠한 감정을 가졌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티보치나는 기뻤다. 검무는 스스로 생각해도 자신이 가진 재주 중에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훌륭하다. 자신의 훌륭한 재주를 카놀라에게 보여 주게 된 것이 뿌듯해서, 얼른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탄성을 지르며 눈을 반짝일 카놀라를 생각하면 심장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이곳이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야. ……그리고 이곳이 바뀌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해.’
검무를 추기 직전 티보치나가 떠올린 건, 카놀라와의 대화였다. 그때의 그 확신 어린 음성을 떠올리며 티보치나는 검을 쥐었다. 어쩌면, 아주 어쩌면 말이다. 그녀를 트리폴로 인도한 존재는 신일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리도 확고한 자신감을 가질 수는 없다.
‘나였으면 좋겠어. ……여기 온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난 이곳이 좋아.’
정말로 그런 거라면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곁에 있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지 않을까? 공기를 가르는 검날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티보치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쥔 검은 신을 베는 검이다. 최고신이 오기 전, 다른 하급신들을 쫓기 위한 정화 의식이었다. 검이 가르는 자리는 신이 제단에 다다를 수 있도록 만든 길이었다. 이것은 모든 신 중에서도 가장 높은 신을 부르는 의식이었다. 그러므로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고 강렬한 염원을 품고 검무를 춰야 했다.
차가운 바람이 볼을 식혔지만, 등줄기로는 더운 열기가 치밀었다. 티보치나의 검은 유영하듯 허공을 베어 나갔고, 그 칼날에 제 기도를 담았다. 대사냥의 성공. 전사들의 무사 귀환. 그리고 어쩌면 신이 보냈을지도 모를 이방인.
‘아무래도 나여야 할 것 같아.’
그녀가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고.
무사히만 돌아온다면 그것을 신의 뜻이라 믿고 그녀를 돌보겠노라고.
그녀가 이 나라의 희망이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겠노라고.
겨울 정원의 하와르 1
지은이|미나토
펴낸이|정 필
펴낸곳|(주)뿔미디어
출판등록|2002년 9월 11일 (제1081-1-132호)
주소|경기도 부천시 소향로 17, 303(두성프라자)
전화|032)651-6513 / 팩스 032)651-6094
E-mail|[email protected]
블로그|http://blog.naver.com/dahyangs
비북스|http://b-books.co.kr
ISBN 979-11-6565-347-7(05810)
※이 책은 (주)뿔미디어를 통해 독점 계약되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무단 복제를 엄금합니다.
겨울 정원의 하와르 2
♥목차♥
6. 축제 마지막 날
7. 두 번째 시험
8. 산 넘어 산
6. 축제 마지막 날
카놀라가 정신을 차린 건 축제를 사흘이나 낭비하고 난 뒤였다.
이제나저제나 축제 데이트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카놀라는 자신의 멍청함으로 날려 버린 사흘을 두곤 땅을 쳤다. 그러나 그녀에게 주어진 축제 날은 이제 하루뿐이었고, 당장 내일은 대사냥을 떠나는 날이었다.
축제의 마지막을 즐겨야 할지 내일의 대사냥을 대비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그것을 고민하느라 오전 시간을 또 낭비해 버린 카놀라는 일단 방을 나섰다. 자신의 멍청한 꼴이 나아진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에델의 한마디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도망치는 짓은 안 할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녀가 자신을 추스르는 데에 너무 오래 걸렸다는 걸 깨닫는 건 금방이었다.
“후사께선 마지막 점검을 하러 나가셨습니다.”
“하지만 축제 날이잖아! 의무를 내려놓고 쉬는 기간!”
“하지만 저희는 내일 대사냥을 갑니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제 앞에 선 시중인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팔짱을 끼고 하하 호호 웃으며 축제 거리를 거니는 데이트는? 맛있는 걸 먹고 신기한 구경을 하는 데이트는? 아니, 다 필요 없다. 그냥 같이 있고 싶은데 그것도 안 되는 건가?
“그래서 지금 어디 있는데?”
이렇게 된 이상 함께하는 데에 의의를 두겠다. 그렇게 다짐하며 카놀라는 의지를 불태웠다. 사뭇 위협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의지에 시중인은 잠시 주저했으나, 결국 그녀의 재촉을 못 이기고 에델의 위치를 일러 주었다. 다행히도 그가 말하는 곳은 카놀라가 알고 있는 장소였다.
“아…… 아직 안 오셨습니다. 사육장 쪽 일이 덜 끝났다고 기별이 오긴 했습니다만.”
한달음에 도착한 대련장에는 우락부락한 그라사들만 가득했다. 다들 대사냥을 준비하느라 바쁜 눈치였지만, 그래도 축제 기간이라 아주 경직된 모습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곳곳에선 행사로 보이는 시합이 작게 열리고 있었다.
후사의 다섯 전사 역시 저마다 취향에 맞는 일을 하며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카놀라는 다섯 전사에게서 에델의 일정에 대해 짧게나마 들을 수 있었다. 그들마저 없었다면 일면식도 없는 그라사들에게 묻고 다녀야 했을 테니, 어떤 의미로는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마움은 아주 잠깐이었다.
카놀라는 불퉁하게 전사들을 훑어보았다. 정작 저들의 주군은 축제를 즐기기는커녕 일하느라 바쁜데 수하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거야?
“이곳에 오시긴 할 겁니다.”
뚱한 표정으로 서 있는 카놀라에게, 롬이 선심 쓰듯 말을 했다.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그의 손은 바쁘게 바닥을 내려치고 있었다. 그 옆에 쭈그려 앉은 투갈도 마찬가지로 손을 놀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동물들에게로 향해 있었다. 온통 정면에 정신이 팔린 두 사람을 의아하게 보던 카놀라가 그들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멀리 보이는 것은 동물이었다. 갈색 털을 가진 그것은 얼핏 보기에 꼭 족제비처럼 생겼는데, 그보단 덩치가 작고 길쭉했다. 동물의 목줄을 쥐고 있던 울란이 긴장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갑작스럽게 쥐고 있던 목줄을 확 놔 버렸다.
자유를 얻은 동물이 재빠르게 앞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동물을 부르는 듯한 롬과 투갈의 손짓도 덩달아 다급해졌다.
“여기, 여기!”
“이리 와, 롬!”
“투갈! 투갈!”
두 사람의 외침이 너무나 치열해서, 카놀라는 잠시 자신의 불만도 잊고 둘의 작태를 우두커니 구경했다. 전후 사정은 모르겠으나 둘의 외침을 들어 보니, 저 동물의 이름은 두 개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두 개는 ‘롬’과 ‘투갈’인 것 같고. 그러니까 지금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이름을 저 동물에게 붙이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유치함에 저절로 한숨이 나왔으나 어쩐지 결과가 궁금하긴 했다. 카놀라는 슬그머니 그들의 근처로 다가갔다. 이미 한 무리의 전사들은 누가 이길지 내기를 하는 중이었다. 카놀라는 제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잠시 고민했다. 조금만 걸어 볼까?
“아냐, 여기! 여기!”
“제길, 롬!”
거의 중간에 가까운 일직선으로 달리던 동물이 순간 방향을 틀었다. 롬 쪽이었다. 투갈이 다급하게 외쳤으나 동물은 주저 없이 속도를 높였다. 제법 거리가 멀었다고 생각했는데, 순식간에 동물은 전사들이 있는 지점에 다다랐다. 동물은 마지막에 다다라 폴짝 뛰어오르듯 몸을 던졌다.
“빌어먹을!”
“젠장! 좋았, ……어?”
롬과 투갈의 시선이 한곳에 꽂혔다. 내기에 참여한 전사들의 시선 역시 같은 곳에 멈췄다. 그리고 카놀라 역시, 그들이 바라보고 있는 제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롬을 쌩하게 지나친 동물은 그녀의 발등 뒤로 뛰어든 상태였다. 아주 사뿐히.
“……저건 뭔데?”
“어쨌든 내 쪽으로 왔으니 내가 이겼어.”
“무슨 소리야? 이건 무효야!”
“저놈 이름은 이제부터 투갈이야.”
“웃기지 마. 왕녀가 서 있는 위치가 달랐으면 결과도 달랐을 거야!”
얼떨떨하게 서 있던 롬과 투갈이 본격적으로 으르렁거리며 다투기 시작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동물은 카놀라의 발등을 지근지근 밟으며 코를 박고 킁킁댔다.
덕분에 옴짝달싹도 못 하게 된 카놀라가 도움을 청하는 눈길로 제 시중인들을 돌아보았다. 이 어처구니없는 사태에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동물을 치우고자 다가섰다. 그러나 동물은 가까이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이를 드러내며 경계를 했다. 그 와중에도 발등을 지근지근 누르는 힘은 가시지 않고 있었다.
“작지만 사나운 녀석입니다. 물러서십시오.”
뒤늦게 다가온 울란이 얼른 동물의 몸뚱이를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허공에 들린 동물이 낑낑거리며 다리와 꼬리를 버둥대는 게 보였다. 눈높이까지 들린 덕분에 카놀라는 동물의 생김새를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뻣뻣해 보이는 갈색 털에 동그랗고 까만 눈알이 코앞에 드러났다. 동물은 까만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는데 움직일 때마다 콧잔등 쪽에서부터 양옆으로 뻗은 길고 흰 수염이 함께 흔들렸다.
신기하다는 눈으로 동물을 빤히 보던 카놀라가 고개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동시에 동물이 입을 쩍 벌리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울음소리를 냈다. 깜짝 놀란 카놀라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얘 뭐야?”
“젭이라는 동물입니다. 사냥 때 데려가는 녀석이죠. 이 녀석은 내일 첫 사냥을 나갈 겁니다. 성체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혈기만 왕성하군요.”
제법 친절한 어투로 설명해 준 울란이 한 손으로 젭을 안아 들고는 다른 손으로 젭의 머리를 꾹꾹 누르듯 쓰다듬었다. 울란의 손이 워낙 크고 투박해서, 젭의 얼굴이 한 줌에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근데 왜 내게 뛰어든 건데?”
카놀라의 물음에 울란도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젭은 후각이 무척 발달한 동물이라 사냥 때 큰 활약을 한다. 바로 직전 맡았던 냄새를 헷갈렸을 리가 없었다.
“글쎄요. 그건 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분명 투갈과 롬의 냄새를 기억하게 했는데.”
젭을 비롯한 사냥개나 매 등의 짐승들은 사육장에서 관리하기에, 원래대로라면 이곳에 있을 녀석이 아니다. 다만 이 녀석은 성년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처음 사냥에 데려가는 녀석이라 전사들이 좀 더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에 젭의 이름을 둘러싸고 롬과 투갈의 언쟁에 불이 붙었고, 결국 이런 우스운 내기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내기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롬과 투갈 중 젭에게 선택받은 사람이 젭의 이름을 원하는 대로 짓는 것. 그리고 서로의 이름을 젭에게 붙이겠다며 이를 간 두 사람은 경기장을 이탈한 젭의 행태 때문에 다시 열띤 토론을 하는 중이었다.
울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젭을 내려다보았다. 카놀라 역시 이상하다는 눈으로 젭을 보았다. 그런 두 사람 사이에 구경만 하던 라다크가 끼어들었다.
“그야, 지금 신고 계신 신발을 둥지로 생각한 탓이겠죠.”
라다크의 말대로 지금 카놀라의 신발은 무척이나 복슬복슬했다. 겨울 산맥을 오를 때 신을 신발을 미리 신고 있는 까닭이었다. 새 신발이니 길들여야 한다는 의도도 있었지만, 일단 땅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이 워낙 강해서 신발 정도는 평소에 신고 다녀도 좋겠다 싶어서 신었다. 그리고 무척 편하고 따뜻한 착용감에 만족하고 있던 찰나였다. 착용감이 뛰어났기에, 외관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카놀라는 제 신발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라다크의 말을 듣고 보니, 작은 동물의 보금자리로 아주 손색없어 보였다. 절대 인정할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사실 내게 동물이 따르는 엄청난 능력이 있었던 걸 수도 있어. 그치, 오스카? 나도 모르게 동물을 끌어들였던 적 없어? 안젤리나, 빨리 기억해 내 봐.”
안젤리나와 오스카를 돌아보는 카놀라의 눈빛은 없는 사례라도 만들어서 읊으라고 말하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리 편을 들어 주고 싶어도, 안젤리나나 오스카의 기억 속에 그런 사례는 없었다. 슬쩍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피우는 두 사람의 모습에 카놀라가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귓가로 심드렁한 라다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등이 펑퍼짐한 게 몸을 누이기에 아주 안락해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혼잣말처럼 들리지만 저 말 속에 담긴 의도는 아주 불순하다. 단박에 그것을 알아챈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녀는 키가 크니 발도 큰 편이다. 다른 영애들의 작고 앙증맞은 발이 아니라는 건 저 자신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굳이 남에게 지적받고 싶진 않았다.
“어휴, ‘외모는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속은 꼬인’ 전사 씨. 부러우면 부럽다고 해요. 자기한테는 달려오지도 않을 것 같으니까 시샘하는 거 뻔히 보이거든요?”
“그 이상한 호칭 아직도 안 버리셨습니까?”
저 길고 이상한 호칭을 아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기도 힘들 것이다. 라다크는 떨떠름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그새 빙글빙글 웃으며 라다크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검지와 엄지를 모으며 호들갑스럽게 말을 이었다.
“어머머! 우리의 심리적 거리감이 좁혀질 만한 계기는 요만큼도 없었던 거 같은데?”
“다른 녀석들에겐 반말을 사용하고 계시잖습니까.”
“그야 다른 사람들하곤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유대감이 있거든요. 하다못해 이런 작은 동물마저 그러네요.”
고개를 내젓는 그녀의 표정에 사뭇 안타까운 감정이 묻어났다. 젭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무척 따뜻했다. 덕분에 라다크를 흘겨보는 새침한 시선과는 완벽히 비교되었다.
“둥지 취급은 부럽지 않습니다.”
“둥지도 못될 누구 씨는 부럽지 않아요.”
“둥지가 아니어도 이 녀석은 제게 올 겁니다.”
“진짜로? 내 눈에는 그쪽이랑 젭의 심리적 거리감도 어마어마해 보이는데요?”
새롭게 벌어진 언쟁에 롬과 투갈은 싸우던 것도 멈추고 다가와 구경을 했다. 롬과 투갈의 시합에 내기를 걸었던 전사들도 이쪽을 힐끔거리며 구경하는 중이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새로운 내깃거리가 생기기 직전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경하던 롬이 능글맞게 웃으며 카놀라를 거들었다.
“라다크가 동물을 영 못 다루긴 합니다.”
“롬.”
나지막한 부름에도 롬은 투갈과 낄낄 웃기 바빴다. 라다크는 자고로 왕녀와 함께 있을 때 놀려먹기 좋다. 왕녀와의 첫 만남에서 그것을 깨달은 롬은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참에 확인해 보죠! 젭이 누구에게 갈지!”
롬의 제안에 투갈은 기다렸다는 듯 구경하고 있는 전사들 사이를 휘젓고 다녔다. 얼핏 들어 보니 돈을 걸라며 목청을 높이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롬과 투갈을 번갈아 보던 라다크가 고개를 내저었다. 헛웃음을 터뜨린 그는 냉소적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내가 왜 이런 유치한…….”
“무서우면 관두고.”
그의 냉소적인 중얼거림은 카놀라의 심드렁한 중얼거림에 막혔다.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라다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절대 그는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냥 이 유치한 시합에 자신까지 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하지만 저렇게까지 시합을 하고 싶다니 계속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 싫다고 했는데 ‘저렇게까지’ 바란다니 뭐, 본때를 보여 줘야지.
“제가 이기면 제게 친분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라다크의 말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생각지도 않은 그의 조건이 불만스러웠는지,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이며 라다크를 노려보았다. 얼핏 그녀의 눈에 섭섭함이 스쳤다. 라다크 역시 그것을 알아챘지만, 그는 가볍게 그녀의 서운함을 외면했다.
솔직히 카놀라와의 관계가 정리된다면 이런 유치한 시합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후사가 저 왕녀와 연애를 시작했고, 생각보다 더 그녀를 아끼고 있는 데다, 그 때문에 신녀와 말도 안 되는 신경전을 벌였다고는 해도. 생전 본 적 없는 후사의 새로운 면모에 아이누며 울란이며 물러터진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누구 하나는 끝까지 경계심을 늦추지 않아야 한다. 후사는 자신이 가진 반절의 이방인 핏줄 때문에 누구보다 고생해 왔으니까. 겨우 그 고생에서 벗어났는데 이방인 후사비로 다시 고초를 겪을 필요는 없다.
라다크의 굳건한 시선을 확인한 카놀라가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천천히 떼었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태평한 목소리로 자신의 조건을 말했다.
“좋아요. 그럼 내가 이기면, 얘 이름은 라디라고 붙여요. 라다크의 이름을 따서.”
라다크는 카놀라가 내건 조건을 곧장 이해하지 못해서 잠깐 멈칫했다. 지금 뭐라고?
“……잠깐, 그건……!”
“으하하!”
라다크의 당혹스러운 반박은 롬의 우렁찬 웃음소리에 묻혔다. 투갈도 냉큼 울란의 등을 떠밀어 멀찍이 보냈다. 행여 시합이 무산될까 봐, 롬은 얼른 사회자 역할을 자처하며 다른 전사들에게 두 사람의 조건을 공표했다.
라다크의 표정이 처참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허리에 손을 척 올렸다.
“좋아, 어서 시작하지!”
아까 롬이 섰던 자리로 가서 당당하게 자신의 발을 내미는 카놀라의 모습을 보며, 라다크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저 멀리에서 코를 벌름거리며 이쪽을 맹렬히 보고 있는 젭의 이름이 ‘라디’로 확정될 것 같다는 그런 강렬하고 치욕적인 예감.
*
내일 이끌고 갈 동물들의 준비 상태를 보느라 지체하고 있던 에델은, 대련장에 카놀라가 와 있다는 소식에 날듯이 이동했다. 요 며칠 동안 그가 무슨 말만 하면 도망가 버리는 그녀 때문에 내내 뒤통수만 봐야 했기 때문이다. 행여 그가 도착하기 전에 도망가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그의 걸음을 더욱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한달음에 달려온 대련장에서, 에델은 아주 당혹스러운 얼굴로 멈춰 서야 했다.
근 며칠 동안 이상한 모습을 보여서 사람을 걱정시켰던 카놀라는 예전의 모습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녀는 아주 의기양양하게 웃는 중이었고, 그 옆에는 라다크가 영혼이 나간 얼굴로 서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옆에 한 무리의 전사들은 신이 나서 카놀라에게 뭐라고 말을 거는 중이었고 다른 한 무리는 잔뜩 인상을 쓴 채 라다크를 노려보았다.
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며 상황을 추측하던 에델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시선을 고정했다.
카놀라의 복슬복슬한 신발 위에 갈색 젭이 몸을 말고 올라가 있었다.
“후사! 오셨습니까?”
“어머, 에델!”
자신을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드는 카놀라는 그가 알던 평소의 그녀였다. 조금은 긴장한 상태로 서 있던 에델이 비로소 안도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에델! 이것 좀 봐요! 얘가 누군지 알아요?”
“……젭이군요.”
“아뇨, 얘는 라디예요. 라다크의 이름을 따서 라디.”
라다크가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손으로 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롬과 투갈은 깔깔대며 웃었고, 울란도 치미는 웃음을 참지 못해 피식거렸다. 내기에서 이긴 다른 전사들 역시 젭의 이름을 부르며 호들갑을 떨었다. 정작 ‘라디’라고 불린 젭은 주변의 소란스러움에는 관심이 없는 듯 신발 위에 코를 박고 있었지만 말이다.
제 발등에서 도통 떨어질 생각을 안 하는 라디 때문에 카놀라는 옴짝달싹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대신 그녀는 손짓을 섞어 가며 자신이 라다크와의 내기에서 얼마나 완벽한 승리를 거머쥐었는지 설명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신나 보이는지, 에델은 차마 그녀의 조잘거림을 중단시킬 수 없어서 고분고분 들어 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이 발등으로 뛰어오르는 젭의 위용 넘치는 모습에 도달했을 때, 내내 반짝이는 카놀라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던 에델이 시선을 내렸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젭이 발등에 자리를 잡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난 상태란 소리였다.
“울란.”
당장 치워. 아주 함축적으로 내려진 명령에 울란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롬이 울상을 지으며 외쳤다.
“앗, 안됩니다. 지금 ‘라디’가 이 위에서 얼마나 오래 버틸지 내기했단 말입니다!”
롬의 말에 몇몇 전사들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정작 발을 내준 카놀라는 마치 남의 일이라는 양 흥얼거리며 라다크를 놀리느라 바빴다. 라다크는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는 얼굴로 서 있었지만, 카놀라는 아주 집요하게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에델은 다시 한번 젭을 내려다보았다. 저렇게 눌려 있으면 발이 저릴 것이다. 아무리 작은 동물이래도 무게감이 안 느껴지진 않을 것이고, 자세를 바꾸지도 못하는 중이니까. 그러니까 역시 당장 치워 버려야 했다.
“내일 사냥 준비는 모두 끝났나 보군. 다들 곰 한 마리씩은 잡아 올 자신이 있는 거지?”
에델이 자비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전사들에게 물었다. 그 물음에 투갈이 탄식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윽, 모두가 후사 같을 수는 없습니다.”
“호랑이도 좋고.”
“얼른 치우겠습니다.”
울란이 재빨리 젭을 안아 들었다. 안정적인 자세로 자릴 잡고 있던 젭이 격렬하게 버둥거렸으나, 에델은 무심하게 눈짓했다. 울란은 어색하게 웃으며 애꿎은 젭의 머리만 꾹꾹 눌러 쓰다듬었다. 앙칼지게 울던 젭이 입을 다물었다.
가벼워진 제 발등을 시원섭섭한 눈으로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울란을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어머, 안타깝지만 이번 내기는 무효로 돌아가겠네.”
롬이 투덜거리며 돈주머니를 열었다. 그러곤 얼마의 지폐를 꺼내 오스카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니까 지금, 카놀라도 돈을 걸었던 것이다. 조금은 어처구니없는 심정이 된 에델이 말을 잃고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안타깝다는 듯 젭을 보다가 곧 미련을 버리곤 에델에게로 관심을 돌렸다.
“여기 점검하러 온 거 아니었어요? 얼른 일해요. 나 에델 방해하러 온 거 아니에요.”
씩씩하게 말한 카놀라가 구석에 마련된 낮은 의자로 쪼르르 달려가 앉았다. 바르게 앉은 그녀는 솟은 두 무릎 위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말똥말똥 에델을 보았다. 정말로 일하는 걸 옆에서 구경만 하겠다는 듯 조잘대던 입도 다문 상태였다.
그녀는 지금 에델을 감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여태 버린 날들에 대한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이 남자를 두고 자신이 줄행랑을 쳤는지, 과거의 자신이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그래서 정작 무덤덤한 에델의 표정에 얼핏 엿보인 난처함을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에델 입장에서는 카놀라의 존재 자체만으로 이미 일에 집중하기는 글렀다. 그러나 카놀라는 전혀 모르는 듯했고, 사실을 말해 주면 일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아예 이 대련장을 나가겠다고 할 것 같았다. 물론 카놀라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었지만 말이다.
다만 에델 입장에선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게 사실을 전하지 않을 이유가 충분했다. 때문에 에델은 속내를 말하는 대신 자신의 의욕을 고취하고 업무 속도를 극대화하기 위한 ‘다음 일정’에 대해 언급했다.
“이곳만 확인하면 일은 마무리됩니다. 전에 못다 한 설명도 하고, 약속했던 것도 지킬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빙긋빙긋 웃으며 에델을 감상하던 카놀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말똥말똥한 눈에 의아한 감정이 내비쳤다.
“설명이야 대사냥에 관한 설명일 테고…… 약속은 뭐예요?”
우리가 무슨 약속을 했나?
카놀라는 정말로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어서 미간을 찌푸렸다. 에델과의 약속을 자신이 까먹을 리가 없다. 없는 약속도 만들어 내고 싶은 심정인데! 아니면 최근에 술을 거나하게 마셨던 적이 있나? 이곳에 온 뒤로는 술을 마신 기억이 없는데.
전혀 감을 못 잡는 그녀의 모습에, 에델이 친절한 어조로 그녀의 기억을 상기시켜 주었다.
“허리끈 말입니다.”
턱을 괴고 이리저리 고개를 갸웃거리던 카놀라의 움직임이 우뚝 멈추었다. 그녀는 주변 시선도 잊고 입을 떡 벌린 채 에델을 보았다. 에델은 도리어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의아하게 말을 이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니 오늘은 축제 의상을 입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허리끈은 제가 묶어 드리기로 했는데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아…….”
이건 정말 너무 갑작스럽게 훅 치고 들어온 거잖아!
벌어진 입술 사이로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로 넋을 놓고 에델을 보던 카놀라가 겨우 입술을 벙긋거렸다. 당장 대답을 했다간 요동치는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헛숨을 뱉고서야, 카놀라는 잔뜩 들뜬 목소리로 열렬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당―연―히― 입―어―야―죠!”
카놀라는 양손으로 제 뺨을 감쌌다. 세상에 이 남자가 이렇게나 적극적인 사람이었구나! 그동안 저 적극적인 태도를 어떻게 숨긴 거지? 그녀는 얼른 하늘을 확인했다.
아직 해가 중천이긴 하지만 뭐 그런 게 중요한가? 우린 연애를 하고 있고, 이제 스킨십 정도는 할 수 있는 관계잖아? 물론 연애를 하기로 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날짜가 무슨 상관이람? 나오기 전에 방은 치웠던가? 온갖 생각으로 머릿속이 폭발할 지경이었다.
에델은 자신의 체격을 숨기려는 듯 늘 두꺼운 옷을 몇 겹씩 입고 살아서, 내심 그 속살이 궁금하긴 했었다.
카놀라는 바짝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진정시켰다. 당연히 그녀의 노력은 조금도 통하지 않았다. 음흉한 웃음소리를 참는 것만으로도 힘겨웠다.
놀라기는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놀란 정도가 아니라, 그들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 경악 어린 표정으로 에델을 보고 있었다.
누가 뭘 해? 언제나 타의 모범이 되기 위해 앞장서던 후사가 뭐? 대낮부터 허리끈? 웬 허리끈? 혼돈에 휩싸인 전사들 사이에서, 라다크는 흔들리는 정신력을 애써 부여잡았다. 우리 후사는 절대 변하지 않았어! 이상하지 않아!
“마지막 날인데 당연하죠! 그러잖아도 나 그것 때문에 온 거였어요! 진짜로!”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불신 어린 눈빛을 당당하게 외면하며, 카놀라가 호기롭게 외쳤다.
허리끈을 묶다 보면 뭐 푸르고 싶은 욕구도 들고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무심코 덧붙일 뻔한 말을 가까스로 참아 낸 그녀가 얼른 일하라는 듯 손짓했다.
어쩐지 유별나게 호들갑스러운 주변 반응에 주춤거리던 에델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본연의 업무를 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에도 전사들은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에델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훑어보던 에델이 문득 한 사람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젭을 안고 있는 상태에서 굳어 버린 울란이었다. 울란은 자신에게 고정된 에델의 눈을 마주하곤 흠칫 몸을 떨었다. 이상한 오한이 순간적으로 등줄기를 스쳤다.
“아, 울란.”
젭은 작고 날씬한 동물이다. 그러니 그것을 안고 있는 울란의 덩치는 젭과 비교되어 더욱 크게 보였다. 에델은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울란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심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좋겠네. 근육 빵빵해서.”
울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에델을 보고 있으려니, 에델은 무심하게 그를 지나쳐 본격적인 점검을 시작했다. 그리고 이 꼴을 지켜보던 라다크는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후사가 이상해!
수렁처럼 빠져드는 혼돈의 도가니 속에서 카놀라는 흐뭇한 시선으로 에델을 보았다.
울란의 근육이 부러웠구나. 이따 옷을 벗기고 나면 당신의 알찬 근육이야말로 최고라고 잔뜩 칭찬해 줘야지!
*
“나 변태 아니야.”
싸늘한 중얼거림에 숨죽여 웃던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마다 헛기침을 하며 애써 목소리의 웃음기를 뺀 두 사람이 겨우 숨을 고르고 대꾸했다.
“누가 뭐랬습니까?”
“그럼 그 불순한 표정들은 뭔데?”
“저희는 그저…… 크흠. 아까 얼빠진 왕녀님이 자꾸 생각나서…….”
허리끈을 묶어 준다는 말 한마디에 혼자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써 내렸던 카놀라다. 그간의 전적을 살펴보면 욕구가 충만할 때도 되긴 했지.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카놀라의 상태를 이해했다. 자유연애에 길들어 있던 카놀라가 이 정도까지 참아 냈으면 대단한 거지. 고개까지 주억거렸다. 저 손 빠른 주인이 굴러들어온 기회를 절대 놓칠 리가 없다면서.
그리고 방에 도착해서, 당연하다는 듯 자리를 비켜 주려는 두 사람에게 에델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옷 갈아입는 걸 돕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 말에 잔뜩 들떠 있던 카놀라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청해지는 걸, 두 시중인들은 똑똑히 보고 말았다.
“생각을 해 봐! 내가 이상한 거야? 나만 변태야?”
치미는 억울함을 참지 못한 카놀라가 오스카와 안젤리나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씨근덕거리는 얼굴에는 은은한 홍조가 감도는 게, 혼자 설레발쳤던 것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키득거리던 안젤리나가 짐짓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변태 아니시라면서요.”
“아니야!”
카놀라는 울컥하는 마음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안젤리나는 오스카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쑥덕거리며 웃음을 참기 바빴다. 그런 두 사람을 째려보고 있는데, 앞서 걷고 있던 에델이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먼 카놀라와의 거리에 놀랐는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매서운 눈으로 제 시중인들을 노려보던 카놀라가 뜨끔하며 얼른 표정을 수습했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보던 에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을 이었다.
“혹시 끈이 답답하십니까? 너무 조였다면…….”
“아뇨, 전혀요! 이쯤이야 뭐, 아무렇지도 않아요.”
카놀라가 크게 손을 휘저으며 얼른 대답했다. 그 움직임을 따라 허리춤의 리본이 살짝 흔들렸다. 에델은 본인이 했던 말처럼 매듭을 아주 잘 묶었다. 아주 앙증맞고 귀엽게.
어색하게 웃으며 연신 괜찮다고 되뇌는 그녀의 모습에 에델의 얼굴이 찜찜하게 변했다. 그러나 당사자가 괜찮다는데 뭐라 할 말이 있겠나. 그가 다시 몸을 돌리는 걸 확인한 카놀라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제 허리춤을 내려다보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조금, 아주 조금 답답하지만 차마 느슨하게 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처음 묶어 준 리본이라 풀고 싶지 않은데다, 에델이 자신의 허리둘레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굳이 그 로망(?)을 제 손으로 깨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키득거리는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흘겨보던 카놀라가 남몰래 다짐했다. 나중에 에델 안 볼 때 살짝 헐겁게 만들어야지.
그렇게 궁리하는 카놀라에게 두 시중인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다시 놀려먹기 시작했다. 셋이 다시 아웅다웅하는 사이, 좁혀졌던 에델과의 거리는 다시 벌어지고 있었다. 멀리 떨어지는 카놀라 일행을 확인한 아이누가 슬그머니 몸을 드러내 에델에게 다가갔다.
“후사. 제가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만.”
에델이 힐끗 아이누를 확인했다. 아이누는 다시 한번 카놀라와의 거리를 확인하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허리끈을 묶어 준다는 말은 역시 오해할 만한 발언이셨습니다.”
이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아이누는 한참이나 고민했다. 평소의 그가 일단 말부터 내뱉는 사람이라는 걸 고려하면 방금의 고민은 아주 심각하고 진지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빨리 에델의 태도를 정정해 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도대체 그라그포드나 비디움에게 무슨 조언을 받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러다간 온 트리폴인들에게 이상한 이미지만 남길 것이다. 정작 에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말이다.
“오해?”
“네.”
에델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미간을 찌푸리고 생각에 잠겨 있던 에델이 곧 영문을 모르겠다는 어투로 되물었다.
“묶는 걸 묶는다고 하지 않으면 뭐라고 해야 하나?”
“아니오. 묶는다는 말 말고 그 앞에 단어 말입니다. 허리끈이라는 게……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에델이 더욱 표정을 찡그렸다. 그는 아이누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무엇인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굉장히 개인적이고 사적인 단어잖습니까. 아마 왕녀님께서도 오해하셨을 겁니다. 그러니 저렇게 당황하시는 것이고요.”
아이누는 필사적으로 설명을 해 보려 노력했다. 다행히도 그의 노력이 빛을 발했는지, 에델은 뒤늦게야 그가 하려는 말을 이해하곤 조금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가 묶은 리본은 의복의 가장 바깥에 두르는 것이라서 그렇게 내밀한 것으로 여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상대방이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민망하고 난처한 감정이 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며 제 발언을 돌이켜 보던 에델이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었겠군.”
카놀라가 오해를 한 거라면 저렇게 멀리 떨어져서 오는 행동도 이해할 수 있다. 어쩐지 리본을 묶어 줘도 그리 기쁜 내색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서 이상하다 싶더라니. 에델은 자신의 경솔한 발언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에델은 완전히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곤 뒤따라오는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제 시중인들과 속닥거리며 오느라 한참이나 늦은 걸음을 보였다. 우두커니 서서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리던 에델은 며칠 전 만났던 비디움을 떠올렸다.
에델과 카놀라의 연애 소식에 비디움은 그 어느 때보다 기뻐했다. 그러면서 당장에 몇 가지를 강조했는데, 그중 하나가 ‘사소한 대화를 놓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일상에서 나누었던 사소한 약속이나 대화 내용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챙겨 주는 게 좋다는 조언이었다. 상대방에 대한 세심한 관심을 대변하는 행동이니 마음을 표현하기에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특히 지나가는 듯 했던 말 한마디를 허투루 여기지 않으면 감동할 것이라고 했다.
그렇구나, 사소한 대화.
그 조언을 듣고선 에델이 제일 먼저 떠올린 건 축제 의상이었다. 가장 최근에 했던 약속은 리본을 묶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 그 약속을 지켜야겠다.
며칠 동안 카놀라와 긴 대화를 못 했던 에델은 대련장에서 그녀를 보곤 행여 타이밍을 놓칠까 봐 얼른 그것을 언급했을 뿐이다. 다행히 카놀라는 무척이나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고, 에델은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이 잘 전달되었다고 생각했다.
“응? 안 가고 뭐 해요? 나 기다렸어요?”
코앞에서 들리는 카놀라의 목소리에 에델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말똥말똥 쳐다보는 카놀라를 마주하니 더욱 죄책감이 들었다. 첫 연애라 서투른 티를 너무 많이 내는 것이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그런데도 저렇게 한결같은 눈으로 자신을 봐 주는 카놀라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혹 오해했다면 미안합니다. 당신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건 또 웬 청천벽력 같은 소리지?
뇌리에 떠오른 문장을 그래도 읊으려던 카놀라는 소리를 내기 직전에 겨우 이성을 되찾았다. 카놀라는 입술을 살짝 벌린 상태로 침묵했다. 에델은 한없이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부질없이 입술을 벙긋거리던 카놀라가 가까스로 침착한 목소리를 냈다.
“절대?”
“네. 그러니 제 표현이 미숙해도 놀라지 마십시오.”
에델은 카놀라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엷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진심이 전해졌겠지? 그는 사뭇 긴장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어딘가 진심이 없는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마치 인형처럼 굳어 있던 그녀가 문득 특유의 쾌활한 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에델. 난 매일 당신 얼굴만 봐도 놀라고 있는 걸요? ‘세상에, 이 치명적인 남자가 내 정혼자라니!’라고 하면서요.”
진지한 대답이긴 한데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구분되지 않았다.
할 말을 잃고 침묵하던 에델이 어색하게 입매를 내렸다. 뭔가, 좋은 의미겠지? 좋은 의미 맞지? 에델이 조금 혼란스러운 눈으로 아이누를 힐끗 보니, 조금 떨어져 있던 아이누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것을 보고도 찜찜한 마음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에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그러니까 내 마음에 대한 걱정은 말아요. ‘절대’라는 단어가 없어도 내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
사실 있는 게 문제다.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어서, 카놀라는 빙글빙글 말을 돌렸다. 그리고 에델은 참 순수하게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했다.
“감사합니다. 이만 가죠. 너무 늦으면 곤란할 겁니다.”
그들은 지금 축제를 즐길 겸, 내일 대사냥을 위한 마지막 준비를 할 겸 시내로 나가는 중이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옷을 갈아입는 것으로도 이미 시간을 잡아먹었기에, 예정하고 있는 일정을 오후 내로 끝내려면 조금 걸음을 빨리해야 했다. 카놀라야 천천히 와도 상관없다. 에델만 미리 가서 상점 주인을 붙잡아 두고 가게 문을 못 닫게 하면 되니까. 에델이 이렇게 바쁘게 앞서 걷는 까닭도 먼저 도착해 가게 주인을 잡아 두기 위함이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던 에델이 문득 멈칫했다. 며칠째 카놀라의 감정을 신경 쓰느라 다른 걸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다고 느껴지자 이제야 비로소 새로운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에델은 덤덤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옷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그는 좀 편해진 마음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 에델의 뒤통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가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아이누를 보았다. 아이누는 막 에델의 뒤를 따라가려는 찰나였다. 그런 그의 소매를 덥석 잡아 세운 카놀라가 느릿느릿 입술을 뗐다.
“저기, 이건 진짜 그냥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데…… 혼전 순결이 법 조항으로 명시되어 있어? 쾌락주의자는 감옥 가? 신에게 벌을 받는 거야?”
카놀라의 표정은 아주 심각했다. 멀어지는 에델과 자신을 잡은 카놀라를 번갈아 보던 아이누가 잠깐 주저하다가 대답했다.
“따로 명시된 건 없지만…… 귀한 혈족일수록 핏줄에 대한 의무감과 책임감을 크게 가지기 때문에 대체로 잘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후사께선 단연 모범이 되시는 분이죠. 누구보다 절제력이 뛰어나신 분이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절제력…… 그렇구나. 우리 에델이 뭐든 뛰어나. 그치?”
동의를 구하듯 제 시중인들을 돌아본 카놀라가 입매를 끌어 올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저 없는 웃음소리가 일정하게 나왔다.
“하하하. 참 이상하다. 갑자기 무슨 산골짜기 수도원에 갇혀서 고문당하는 기분이네. 하하. 이상하지? 난 이렇게나 자유롭게 사랑을 하고 있는데 고문이라니. 하하하.”
카놀라는 아이누의 소매를 놔 주었다. 에델이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기에 아이누는 카놀라와 대화를 마무리하고 얼른 걸음을 옮겼다. 빠르게 멀어지는 아이누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는 고저 없이 내뱉던 웃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웃음이 멈추기 무섭게 안젤리나가 탄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이고, 우리 왕녀님 이제 큰일 나셨네.”
“괜찮아. 원래 과정이 힘들면 성취감이 뛰어난 법이니까.”
저렇게 사람 속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말을 마구 내뱉으면서 정작 손끝 하나 안 대겠다고 선포해? 카놀라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에델의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마치 맹수가 먹잇감을 노려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오스카가 혀를 차며 물었다.
“성취감까지 느끼셔야 합니까?”
“시끄러워. 오스카.”
카놀라는 어쩐지 아까보다 더 무거워진 걸음에 잔뜩 힘을 주었다. 씩씩하게 두 팔을 휘두르며 에델에게 다가간 카놀라가 결의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에델! 내게 손 안 대는 건 당신 선택이니까 나에겐 해당 사항 없는 거죠? 아니, 뭐. 그렇다고 내가 뭘 어째 보겠다는 건 아니지만요.”
대뜸 손부터 잡고, 손등에 뽀뽀도 했다. 호시탐탐 스킨십을 시도했었는데 그것까지 제지를 당한 적은 없으니 에델의 ‘절대’는 스스로에게만 해당하는 것이겠지. 그가 카놀라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한, 카놀라를 제지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카놀라의 예상대로 에델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저것이야말로 위험천만한 허락이다. 두 시중인들은 측은한 마음에 넌지시 경고라도 해 주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귀신같이 그들을 노려보는 카놀라 때문에 그 마음을 고이 접어야 했다.
하긴, 에델도 카놀라에게 마음을 열었으니 괜찮겠지. 게다가 카놀라가 아무리 욕망에 눈이 멀어도 강제로 뭔가 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행동하게 유도할지언정 말이다.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나. 두 시중인들은 빠르게 스스로 합리화를 하곤 신경 끊었다.
그러는 사이 카놀라는 에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한결 풀린 얼굴로 미소 지었다.
“좋아요!”
그녀는 누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에델의 팔짱을 껴 버렸다. 사실 두 사람의 키를 고려하면, 팔짱을 끼는 게 그리 편한 자세는 아니었지만 카놀라에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에델의 팔을 끌어안다시피 당기며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에델은 거의 끌려가듯 그녀와 걸음을 맞추었다.
뒤에서 이 꼴을 구경하던 두 시중인들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자신들의 신상을 위해 절대 끼어들지 않을 작정이지만, 뒤에서 보고 있으니 육식동물에게 물린 초식 동물을 보는 듯해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이 나라의 신이 저 꼴을 보곤 말리지 않았다고 벌을 주진 않겠지?
*
“필요한 재료들은 짐꾼에게 보냈습니다.”
“수고했다, 티보치나.”
짐꾼에게 전달한 내역 목록을 훑어보며 브리도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냥은 다른 사냥 때보다 더 많은 동물을 잡아야 하는 대대적인 일정이다. 그렇다 보니 단순히 산맥을 헤집고 다니는 것으로는 필요한 양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동물들을 유인하거나 내쫓을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대신전에서 키우는 각종 식물이 바로 이러한 역할을 했다.
목록의 가장 위에 적혀 있는 리키누스는 태우거나 즙을 내서 뿌리면 동물들을 끌어들이는 냄새가 난다. 사냥에서 가장 많이, 그리고 빈번히 사용되는 식물이었다. 반대로 그 아래에 있는 아코니투는 말려서 지니면 동물들의 접근을 막을 수 있다. 사냥해야 하는 상황에선 오히려 지니고 다녀선 안 되지만 평소 야영지에 머무르는 일꾼이나 부상자들에겐 필수적인 식물이다. 그 아래에 있는 벌터부르는 해독을, 또 그 아래에 있는 파닉스는 지혈을 위해 챙겨야 한다.
내용은 끝도 없이 이어졌지만 브리도는 하나하나 신중하게 확인했다. 식물 보급은 전사들의 무기 보급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래, 빠진 것 없이 잘 챙겼구나.”
마침내 마지막 이름까지 확인한 브리도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목록을 말아 품에 넣고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티보치나. 이방인에게 낸 시험 말이다.”
“네.”
“그녀에게 홀로 올라가라는 말을 확실하게 했느냐?”
조용히 브리도의 뒤를 따라가던 티보치나가 멈칫했다. 조금 당황한 눈으로 브리도의 뒷모습을 보던 티보치나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그렇구나.”
두 사람은 아코니투를 말리고 있는 방에 도착했다. 자신의 향낭을 꺼낸 브리도가 약간의 아코니투를 담으며 말을 이었다.
“너답지 않게 허술했던 점은 실망스럽지만, 너도 시험을 내는 게 처음이니 이해하마. 게다가 군주가 그리 작당할 줄 몰랐으니 네 탓을 할 수만도 없지.”
제사장의 목소리엔 숨길 수 없는 짜증이 묻어났다. 향낭의 입구를 조이는 손길은 아주 거칠었다. 조심스럽게 그녀의 옆얼굴을 살피던 티보치나가 넌지시 물었다.
“무슨 뜻이십니까?”
“이번 대사냥의 경로를 보지 못했나 보구나.”
대사냥 참가자 명단이 확정되면, 그들에게 경로가 기록된 지도가 배급된다. 티보치나에게도 여분의 지도가 전달되었다. 하지만 따로 지도의 경로를 하나하나 살펴보진 않았다. 볼 정신이 없었다고 하는 게 더 옳을 것이다. 당장 내일 대사냥을 출발하니, 얼른 보급품 확인을 끝내야 잠깐이라도 카놀라를 보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족히 일주일은 넘게 돌아오지 않을 테니 개인적으로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보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요즘 부쩍 기승을 부리는 검은 늑대 떼를 처리해 나가면서 순록 서식지를 목표로 전진할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그래, 겨울 산맥 북서쪽을 중심으로 돌아볼 예정이다.”
브리도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긍정했다. 마른 아코니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던 제사장이 문득 무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겨울 산맥 꼭대기로 가는 방향 말이다.”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돌돌 말린 형태로 딱딱하게 굳어 있던 아코니투가 그 힘을 못 이기고 부스러졌다. 그것을 더욱 짓이겨 자근자근 부서뜨린 브리도가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군주는 대사냥을 핑계로, 그 이방인을 근방까지 호위해 줄 작정인 게야.”
티보치나의 머릿속에 겨울 산맥의 지도가 떠올랐다. 겨울 산맥의 가장 높은 봉우리. 드래곤의 영역이기에 허락받지 못한 침입자는 저주를 받는 곳. 그곳의 위치가 바로 북서쪽이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평소 사냥은 주로 남쪽에서 진행해 왔고, 상대적으로 북쪽의 생태가 더 풍족한 편이었다.
어차피 전사들의 이동 경로는 드래곤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선에서 짜였을 것이다.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다면 꽤 많은 자원을 노려 볼 법하니 대사냥을 위로 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대사냥 참가자 명단에 카놀라의 이름이 없었다면 말이다.
“매년 목숨을 걸고 사냥에 나서는 전사들을 이런 식으로 이용하다니, 이 얼마나 교활한 작당이란 말이냐.”
티보치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전사들이 산맥의 중턱까지만이라도 함께해 준다면 카놀라의 수고는 크게 덜어질 것이다. 어쩌면 정말 올라갈 만한 가능성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정말로 그녀는 신이 보낸 사람인 건가?
“……저희가 제지할 명분은 없습니다.”
티보치나가 카놀라에게 혼자 올라가라거나, 어떤 식으로 올라가라는 제한을 걸지 않은 이상 시험의 방식은 카놀라의 마음대로다. 아마 군주가 개입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이러한 연유일 것이다. 다들 겨울 산맥 꼭대기라는 장소에만 온 시선을 집중하느라, ‘누구와’라든가 ‘어떻게’ 따위에 대해선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을 테니까. 뒤늦게 눈치챈 제사장이 저토록 분해하는 까닭도 그러해서겠지.
하지만 티보치나는 분하지 않았다. 티보치나는 온몸을 감싸는 놀라운 안도감에 당황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은 카놀라가 정말로 이 말도 안 되는 시험을 통과해 주길 바라고 있음을.
“말하지 않았느냐.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게 도움을 청하라고. 물론 너는 쉽게 도움을 청할 성격이 아니지만.”
냉소적인 제사장의 중얼거림에 티보치나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제사장이 개입하려 한다. 티보치나는 대사냥을 따라갈 수 없으니 제사장이 개입한다면 막을 수 없었다.
“제가 다음 시험 문제를 더 심사숙고하겠습니다.”
재빨리 말을 건넸지만, 그것이 브리도의 분노를 달래 주지는 못했다. 입술을 뒤틀며 침묵하던 제사장이 티보치나를 어르듯 조용하게 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구나. ‘다음 시험’이란 있어선 안 될 일이야.”
“제사장님.”
티보치나가 다급한 어조로 브리도를 불렀다. 그러나 브리도는 단호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잘랐다.
“이번 일로 네 자격을 의심하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차기 제사장으로서 너만 한 아이는 없다는 걸 안다.”
티보치나가 걱정하는 건 제 자격 같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제사장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방을 나서는 제사장의 뒷모습을 망연하게 보던 티보치나가 마른침을 삼켰다.
돌아서는 브리도의 옆얼굴이 위험해 보였다고 한다면 제 착각일까?
아랫입술을 꾹 깨문 그녀가 힐끗 옆을 보았다. 슬그머니 손을 뻗어 가까이에 놓여 있는 마른 아코니투를 한 줌 쥐어 주머니에 챙긴 그녀가 얼른 제사장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
“아, 오셨습니까. 후사.”
“어머나, 돔돔!”
에델이 카놀라를 이끌고 간 곳은 아주 익숙한 장소였다. 먼저 가게에 들어서는 후사를 향해 인사를 하던 돔돔이 뒤따라오는 카놀라를 발견하곤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침 그가 선물한 옷을 입고 있었던 카놀라는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며 그에게 다가갔다.
“입으셨군요.”
“오늘까지는 축제니까! 근데, 축제엔 쉬는 거 아니었어?”
명색이 축제 기간이다 보니, 몇몇 술집이나 식당들이 열긴 하지만 다들 장사를 한다고 하기보단 열어 두고 노는 분위기였다. 그중에서도 옷가게는 아예 닫혀 있는 가게 중 하나다. 이미 오는 동안 유심히 주변 가게들을 살펴본 카놀라는 의외로 소비할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에 조금 실망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래도 에델이 알아서 안내하는 것이겠거니 하고 별생각 없이 따라왔는데 옷가게라니?
“그렇긴 합니다만…….”
돔돔이 슬쩍 에델의 눈치를 보았다. 당연히 축제 기간엔 가게 문을 닫는다. 가게 문을 닫기 위해서 축제 전에 모든 일을 마무리해 두고, 축제 기간은 절대 의뢰를 받지 않는다. 그것이 설사 디라즈의 의뢰라고 해도 말이다! 돔돔은 쉴 땐 확실하게 쉬어야 한다는 주의였다. 얼마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제가 추가 주문을 했습니다. 몇 가지 수선할 게 있어서요.”
에델이 대신 설명을 해 주는 동안, 돔돔이 준비한 것을 슬그머니 내놓았다. 그것은 낯익은 옷이었다. 카놀라가 처음에 의뢰했던 방한복. 분명 지난번에 받아 갔던 옷인데 어째서 여기서 나오는 거지? 카놀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제 방한복을 보았다.
“옷을 또 주문했어요?”
겨울 산맥 꼭대기만 다녀오면 옷장 깊숙한 곳에 처박아 놓고 다신 안 보려고 했었는데? 카놀라의 물음에 에델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당신이 의뢰했던 옷입니다. 추가적인 수선을 의뢰했습니다.”
“이걸 언제 가져갔어요?”
“당신의 시중인들을 통해 받았습니다만…… 보고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도리어 에델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생각해 보면 에델이 말도 없이 그녀의 옷을 막 가져갈 사람은 아니다. 카놀라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안젤리나를 돌아보았다. 뒤에서 이 상황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안젤리나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듣지 못하신 게 아니라 듣고 흘리신 게죠. 그때 왕녀님께선 넋이 나가…….”
친절하게 설명하는 안젤리나의 입을 황급히 틀어막으며, 카놀라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아! 기억났어요! 하하하! 근데 웬 수선?”
“옷에 가죽을 덧댔습니다. 방한복에 갑옷까지 입고는…… 산을 오르지 못하실 것 같아서요.”
갑옷을 왜 입어요? 그렇게 되물으려던 카놀라는 저 옷이 겨울 산맥 꼭대기에 올라가기 위한 것임을 상기했다. 추위만 걱정하느라 잠깐 잊고 있었는데, 그곳은 각종 야생 동물이 즐비한 곳이다. 당연히 최소한의 무장은 하고 올라가야 했다.
“어머, 고마워요. 난 생각도 못 하고 있었네!”
“한 번도 올라가 보지 못하셨으니, 준비가 막연한 건 당연합니다.”
“후사께서 직접 가죽을 골라 수선할 부분을 지정해 주셨습니다.”
돔돔이 슬그머니 끼어들어 설명을 덧붙였다. 그 말에 카놀라가 놀란 눈으로 에델을 돌아보았다. 에델은 덤덤하게 옷의 내부를 살피고 있었다. 굳은살이 가득한 그의 손이 안감을 하나하나 누르고 당겨 보며 강도를 확인했고, 무게를 가늠했다. 카놀라는 그런 에델의 옆모습을 한참이나 가만히 응시했다.
다시 기분이 이상해지려고 한다. 요 며칠 그의 앞에서 줄행랑을 치게 했던 그 기분이었다. 카놀라는 움찔거리는 다리에 잔뜩 힘을 주었다. 이게 어딜 봐서 도망갈 타이밍이람? 제 안위를 걱정해 주는 정혼자의 모습에 기뻐할 타이밍이지!
“에델을 위해서라도 꼭 시험을 통과해야겠네요!”
이상할 정도로 떨리는 심장을 숨기고자 카놀라는 쾌활한 목소리를 애써 꾸몄다. 그 목소리에 에델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돌아보았다. 올곧은 녹색 눈동자였다.
“안전하게요.”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턱 막혀 왔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 느꼈던 그 짙푸른 녹음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차가운 눈보라에 꼭꼭 숨겨져 있던 무성한 푸른 숲을 발견한 듯한 그런.
홀린 듯 그의 눈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문득 입술을 뗐다.
“그거 알아요? 당신 눈동자 되게 예뻐요.”
녹색 눈동자에 조금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그러한 동요가 그를 더 생기 있게 만들어 주었다. 언제나 무덤덤하고 뭐든 잘 해내는 천재 후사지만, 이렇게 동요할 때는 그녀만의 정혼자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카놀라를 기쁘게 했다.
그가 자신 때문에 동요를 한다.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고, 자신과의 미래를 꿈꾼다. 한평생 미래를 꿈꾸는 게 부질없다고 느껴 왔던 카놀라는 그를 통해 처음으로 미래를 꿈꾸게 되었다. 이 사람에게 느끼는 지금 당장의 감정만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과의 미래를 그리게 되었다. 그것에 욕심을 내게 되었다.
그래서 이젠 마냥 현재를 즐기지 못하게 되었어도 말이다.
“칭찬 감사합니다.”
어색하고 무뚝뚝하지만 제법 예의 바른 감사 인사에 카놀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 도망가고 싶다. 어디 구석진 곳에 도망가서 혼자 이 감정을 주체 못 하고 날뛰고 싶다. 이 귀엽고 예쁘고 멋지고, 혼자 다 하는 남자와의 미래를 상상하며 기뻐하고 싶다.
카놀라는 과거의 제 연인들이 느끼던 감정이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생각했다. 그들도 이런 상상을 하느라 그렇게 기쁘고 설레어했던 걸까?
“어쩌면요, 난 군주의 비에 어울리지 않을지도 몰라요. 트리폴이 바라는 그런 모습은 틀림없이 아닐 거예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에델의 몸이 경직되었다. 그녀의 말은 그녀가 처음 온 날부터 내내 들려오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사자가 직접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에델은 카놀라의 의도를 알 수 없어서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런 그를 향해, 카놀라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지만 상관없어요. 그러니까.”
이 기분을 무슨 말로 표현해야 할까? 카놀라는 열심히 생각했지만, 무엇으로도 정확한 설명을 하기 어려웠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것으로 모든 설명을 대신했다. 그냥 이 감정이 전달되었으면 좋겠다. 에델 역시 카놀라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의 감정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놀라가 한숨과 함께 말을 뱉었다.
“당신도 상관없었으면 좋겠어요.”
*
축제 데이트는 생각보다 로맨틱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로맨틱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축제의 마지막 날이라서 다들 마무리하는 분위기였던 데다, 다음 날 바로 대사냥을 떠나는 탓에 그것에 대한 준비로 분주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서라도 이곳의 축제는 전혀 흥겹지도, 떠들썩하지도 않았다. 차라리 아까 대련장에서 전사들이 노는 방식이 더 시끄러웠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축제란 자고로 멋진 쇼와 맛있는 음식과 흥겨운 음악과 술인데…….”
무심코 속마음을 입 밖에 낸 카놀라가 지레 놀라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도 에델은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는 카놀라가 호신용으로 들고 다닐 단검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아마도 따로 제작을 맡겼던 것인지, 평소 돌아다니며 보아 온 것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대장장이의 말을 얼핏 귀동냥해 보니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하고 손잡이를 기존 것보다 더 부드러운 가죽으로 감싼 듯했다.
문외한인 카놀라의 눈에는 아주 훌륭한 단검처럼 보였다. 그러나 에델은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대장장이와 한참이나 쑥덕거렸다. 주로 에델이 뭐라고 지적하고 대장장이가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이는 식이었다.
그래도 첫 데이트인데, 모처럼 축제 의상도 입었는데…….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카놀라는 차마 티 낼 수가 없었다. 에델이 확인하고 있는 저 모든 것들이 그녀의 물품이기 때문이었다.
생각해 보면 에델은 축제 첫날부터 카놀라에게 준비 용품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때 자신이 도망가지 않았으면 진즉 끝났을 일이다. 결국은 자기의 죄라는 결론이 나자, 카놀라는 속으로나마 ‘과거의 나’를 매우 꾸짖었다.
“한번 잡아 보십시오.”
비로소 모든 점검이 끝났는지, 에델이 카놀라에게 단검을 건네었다. 한창 ‘과거의 나’를 꾸짖는 데에 열중하고 있던 카놀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검을 받아 들었다. 맨손으로 쥐기엔 거칠었지만 비교적 모난 곳 없이 쥐기 편했다. 이 거친 감촉도 장갑을 끼면 크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쪽을 이렇게 잡으십시오. 손가락은 이렇게 쥐셔야 합니다. 날을 조심하시고요. 지금의 이 자세만 기억하십시오. 반대로 쥐시면 다치니 꼭 이렇게 잡으셔야 합니다.”
카놀라의 어설픈 손놀림이 불안했던지, 에델은 아예 제 손으로 하나하나 자세를 잡아 주었다. 카놀라는 그 닿는 온기가 좋아서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기도 했다. 검 쥐는 법을 배우면서 로맨틱함을 느껴야 한다니, 너무 열악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지한 에델의 얼굴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서운함이 풀렸다.
얼추 흉내를 낼 수 있게 되자, 에델은 이번엔 또 다른 물품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이쯤 되니 대장장이에게 조금 미안해지는 기분이다. 두 배는 족히 커 보이는 덩치로 숙제 검사를 맡는 듯 서 있다니. 측은하게 대장장이를 보던 카놀라가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안전을 거의 완벽하게 지키려고 노력하는 에델에겐 무척 고마웠지만, 사실 지루했다. 카놀라야 죄다 알지 못하는 내용이라 에델이 점검하고 난 후 착용하거나 사용해 보는 게 전부였는데, 그마저도 에델의 점검이 한참 오래 걸렸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물품을 검사하는 에델의 옆모습을 감상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좋긴 하지만, 그 앞에 산만한 덩치의 대장장이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슬금슬금 거리를 넓힌 카놀라가 본격적으로 주변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대장간이 작았기에 돌아보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흉흉한 무기들을 휘휘 둘러보던 카놀라가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트리폴인들이 지나다니는 게 보였다.
대사냥을 떠나지 않는 사람들은 다들 의무로부터 자유로운 마지막 날을 즐기고 있었다. 여유롭게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면서 말이다.
카놀라는 본격적으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깐 낙서라도 해 볼까 싶어 안젤리나를 돌아보았지만, 안젤리나와 오스카는 문가 쪽 손님용 의자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꾸벅꾸벅 조는 중이었다. 둘 중 한 사람은 종이와 펜을 챙겨 왔을 테지만 그것을 위해 깨우기엔 너무 곤히 조는 모습이었다. 카놀라는 둘을 깨우는 대신 턱을 괴고 가만히 창밖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워낙 다들 덩치가 크다 보니, 숫자가 적어도 거리가 꽉 찬 것처럼 보였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근육질에 훤칠한 키를 가지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샤를만과는 인종이 다른 모양이다.
샤를만인들도 주변국들에 비교하면 키가 큰 편이지만, 체격이 호리호리하고 피부색도 좀 더 노란빛이 감도니까. 그런 의미에서 트리폴인들의 흰 피부는 참 볼 때마다 신기하고 부러웠다. 에델이나 티보치나의 미모를 빛내 주는 데엔 그 흰 피부도 한몫 톡톡히 하고 있었다.
에데사 북쪽 평원이 트리폴인들의 출신지라고 했지. 그럼 에데사인과 같은 인종인가? 아니, 에델의 어머니가 에데사인이었는데 에델의 체격이 저렇게 작은 걸 보면 다른 것 같다. 근데 디라즈는 대체 어떻게 에데사인과 연애를 했지? 역사적으로 보자면 에데사와는 친해질 수 없는 관계일 텐데? 게다가 거리도 만만치 않은데?
궁금증이 꼬리를 물어 갔다. 답을 구하려는 의문은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진짜 궁금하기도 했다.
턱을 괸 상태로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대던 카놀라가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덩치 큰 그라사들 사이로 낯익은 얼굴을 발견한 탓이었다. 후드를 두르고 있지만, 얼핏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 덕분에 금방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군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리는 그 모습에 카놀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넋을 놓고 있던 그 며칠 동안 만나자고 몇 번의 연락을 남겼던 이를 떠올렸다.
세상에! 사랑에 눈이 멀어 친구도 잊고 지내다니!
“저기, 에델. 혹시 오래 걸려요?”
“아, 죄송합니다. 조금 다듬어야 할 부분이 보여서…….”
“그럼 나 잠깐 나갔다 와도 돼요? 절친한 친구를 못 본 지 너무 오래됐는데 마침 밖에 지나가는 것 같아서. 내일은 못 보니까 지금 얼른 얼굴만 보고 올게요.”
카놀라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에델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십시오.”
어차피 지금 그가 쥐고 있는 아이젠의 점검을 제대로 끝내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에델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카놀라가 환해진 얼굴로 얼른 몸을 돌렸다.
그렇게나 좋을까?
뭐든 카놀라가 좋으면 자신도 좋다고 생각하며 에델은 아이젠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절친한 친구라니, 벌써 트리폴에서 절친한 사이가 생겼나 보다. 하긴 카놀라라면 누구와도 금방 절친해지겠지. 그 얼음장 같은 신녀마저 그렇게…….
아이젠을 뒤집던 에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맞은편에 서서 긴장감 어린 표정으로 서 있던 대장장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번엔 또 뭐가 문제지? 그는 에델의 손이 멈춘 지점을 열심히 들여다보았지만, 제 눈에는 아무런 문제점도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후사는 아이젠을 내려놓았다. 대장장이가 기겁하며 후사의 얼굴을 살폈다. 차갑게 굳은 표정은 척 봐도 뭔가 엄청난 결함을 발견한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후사?”
“……아, 씨.”
네? 아, 씨요?
대장장이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문제점을 말씀해 주시면 지금 당장 시정하겠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말을 뱉기도 전에 후사는 뒤를 휙 돌아보았다. 대장장이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당연하게도 두 사람이 돌아본 문가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왕녀의 두 시중인뿐이었다.
*
후사와 함께 있다면 따로 만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오랜만의 데이트라고 했으니 일찍 헤어질 것 같지도 않고. 역시 숙소로 가서 기다려야 하나? 하지만 이렇게 이방인 왕녀를 만나러 왔다는 게 제사장에게 알려지는 건 곤란하다. 왕궁에서 카놀라를 만나면 제사장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대장간까지 기세 좋게 찾아온 티보치나는 정작 도착해서 갈피를 못 잡고 서성거렸다. 제사장과 그런 대화를 하고 온 와중에 이렇게 이방인 왕녀를 만났다는 게 알려지면, 제사장은 더는 티보치나를 신뢰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티보치나는 수석 신녀지만 그 자리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자리다. 당장 브리도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나. 평신녀였던 브리도는 이방인을 시험에 떨어뜨려서 제사장이 되었다. 그런 그녀가 새삼 수석 신녀라고 해서 특별히 신뢰할 리는 없다.
하지만 카놀라가 아무것도 모르고 이대로 대사냥에 떠난다면? 가서 무슨 일이라도 당한다면?
그런 상상을 하면 차라리 제사장에게 알려지는 한이 있어도 카놀라를 만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티보치나는 결국 왕궁의 숙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은 티보치나가 막 뒤로 도는 찰나,
“짠! 요정 등장!”
눈앞에 불쑥 튀어나온 금발 머리카락에 순간 비명이 나올 뻔했다. 티보치나는 숨을 되삼키며 눈을 크게 떴다. 두 팔을 위로 활짝 뻗은 채로 활기차게 등장한 이는 티보치나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이였다.
“어머, 나 안 보고 싶었어?”
놀라서 굳어 있는 티보치나의 표정을 잘못 이해했는지, 카놀라가 미소를 어색하게 일그러뜨렸다. 힘차게 뻗었던 팔을 슬그머니 내린 그녀가 헛기침하며 얌전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음 상하게 해서 미안해. 요 며칠 내가 너무 답도 없고 무심했지? 제정신이 아니라서 그랬어. 내가 절대 사랑에 눈이 멀어서…… 아니, 눈이 멀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를 버리려던 건 아니야. 절대로.”
“후사와 데이트를 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응? 어, 그렇긴 한데 티보치나를 보고 나왔지! 에델에겐 잠깐 양해를 구했어. 내일부터는 우리 아예 못 보잖아.”
빠르게 놀란 표정을 수습한 티보치나는 힐끗 대장간을 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카놀라는 데이트 도중에, 티보치나를 발견하자마자 그를 두고 이렇게 뛰어나온 것이다. 굳게 문이 닫힌 대장간 너머로 후사가 짓고 있을 표정이 상상되었다. 그것을 상상하니 조금 고소하고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혹시 기분 상한 부분이 ‘요정 등장!’에서는 아니지? 맞아? 역시 요정은 좀 염치없었나?”
대답이 없는 티보치나의 모습에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홀로 남겨졌을 후사를 속으로 실컷 비웃고 있던 티보치나가 재빠르게 정신을 수습했다.
“아뇨.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왕녀님을 뵙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눈앞에 나타나셔서 놀랐을 뿐이에요.”
“그래? 우리 마음이 통했네!”
평소와 같은 다정한 티보치나의 목소리에 비로소 안심한 카놀라가 활짝 웃었다. 티보치나는 그런 카놀라를 이끌고 조금 한적한 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곤 품에서 무언가를 바리바리 꺼내기 시작했다.
“받으세요.”
“이게 다 뭐야?”
끝도 없이 나올 것 같은 주머니를 얼결에 받아 들며, 카놀라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수가 많긴 하지만 전혀 무겁지 않았다. 가장 위의 주머니에 적힌 벌터부르라는 글자가 뭘 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나쁜 건 아니겠지.
“소량으로 챙겼으니 들고 다니시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꼭 소지하고 계세요. 이건 해독제고 이건…….”
“잠깐, 잠깐.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무슨 일 있어?”
급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카놀라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티보치나는 그 물음에 대답을 하는 대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곧 자신이 들고 온 보따리를 통째로 카놀라에게 안겨 주었다.
“내일 떠나시잖아요. 가서 사용하기 유용한 약초를 모아 왔습니다. 보급품이 있지만…… 수량이 정해져 있으니까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그냥 지니고 계세요.”
그러면서 아예 약초의 이름과 설명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아까 본 벌터부르라는 이름 옆에 해독제라고 쓰여 있는 게 보였다. 지혈제나 해열제도 있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글자에 카놀라가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동안에도, 티보치나는 뭔가를 또 주섬주섬 꺼내는 중이었다.
“그리고 이건 그전부터 하나 챙겨 드리고 싶어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에요.”
티보치나가 카놀라의 손을 당겨 펼쳤다. 손안에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크기의 금속 상자였다.
“향갑입니다. 지금은 닫혀 있지만, 이쪽을 열면 냄새가 강하게 퍼질 거예요. 안에는 아코니투, 그러니까 짐승을 쫓는 냄새가 나는 식물이 들어 있어요. 전사들과 있을 때는 열 필요가 없지만, 혹시라도…… 필요할 수 있으니 꼭 품에서 떼어 놓으시면 안 돼요.”
티보치나는 두 손으로 향갑을 단단히 쥐여 주며 카놀라의 손을 꼭 잡았다. 힘이 들어간 티보치나의 손가락 끝이 살짝 떨리는 게 카놀라에게도 느껴졌다. 제 손을 잡은 티보치나의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심각한 표정으로 시선을 들었다.
“무슨 일 있는 거지? 응?”
“제가 함께 가지 못하니 불안해서요.”
티보치나가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잠깐 보였던 그녀의 불안감은 카놀라의 뇌리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티보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곤 한층 더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을 이었다.
“제가 전에 알려 드린다고 했던 기출문제들은, 후사의 어머니께서 받으셨던 시험이에요.”
카놀라의 손을 꼭 잡은 채로, 티보치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그저 기우일 것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첫 번째 시험은 후원에 꽃을 피우는 일이었어요.”
“전에 나를 데려갔던 그 후원?”
카놀라가 트리폴에 온 지 며칠 안 되었을 때의 일이다. 티보치나가 자신의 정체를 처음 밝히고, 혼약의 성사를 결정하기 위해 시험하겠노라 선언했던 장소. 카놀라는 그때의 티보치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이 후원을 만드신 분은 결국 땅의 차가움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땅이 그분의 따뜻함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지요.’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그 말은 에델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카놀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땅의 차가움을 이기지 못했다는 건, 결국 그녀가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걸 의미했다. 그녀의 생각을 짐작한다는 듯 티보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요. 그 후원을 만드신 분은 후사의 어머니셨어요. 그리고 그 땅에선 몇 개월 동안 단 하나의 싹도 나지 않았죠. 싹을 틔우는 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으니 충분히 기다려야 한다고, 지금의 디라즈께선 그렇게 주장하셨죠. 그래서 몇 개월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알게 된 거예요.”
티보치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혀로 입술을 축인 그녀가 느릿느릿 말을 했다.
“테드라고의 핏줄이 잉태되었다는 것을.”
그때의 티보치나는 아마 일곱 살이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이렇게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당시 그 일이 아주 큰 사회적 파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귀한 핏줄일수록 후손을 보는 일에 신중을 기한다. 하물며 군주의 후손이라 함은 신의 허락을 받은 가장 고귀하고 강인한 혈통에게서 이어져야 한다. 군주의 첫 경험 자체가 군주비를 들이고 난 이후인 데다, 합방조차 가장 좋은 날을 가늠해서 할 만큼 엄격하게 관리되었다. 그런데 시험 중인, 그것도 이방인인 여성이 군주의 핏줄을 잉태하다니? 그것도 테드라고의 후손을?
“디라즈께선 신이 테드라고의 후손을 허락하셨다고 주장하셨어요. 그러니 시험은 무의미한 것이라고요. 그런데 그때, 당시엔 그저 평신녀였던 지금의 제사장님이 나서신 거예요. 원칙을 지켜야 하니, 남은 시험이라도 빠르게 보아야 한다고요. 첫 시험을 냈던 수석 신녀는 이방인에게 과하게 관대한 시간을 주었고, 그로 인해 참사가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수석 신녀가 물러나고 대신 다른 사람이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셨죠.”
디라즈의 무지막지한 주장에 거의 다 넘어갈 뻔했다.
그만큼 이방인의 임신은 무척 충격적이었다. 첫 번째 시험을 주관했던 수석 신녀는 물론이고 제사장마저 임신한 이방인을 두고 혼란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 와중에 디라즈가 몰아치니 더욱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때의 디라즈는 지금보다 더 고집스럽고 거칠었기에 주장을 펼치는 데에서도 거침이 없었다. 혼란이 잦아들기 전에 모든 절차를 마치겠다. 디라즈는 아마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건 브리도의 등장으로 인해 모두 무산되었다. 그전까진 평신녀로서 수석 신녀의 보조나 하던 브리도는 그때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단상 위로 올랐다. 그러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불운했던 이방인의 역사를 읊었다. 신이 허락하지 않은 불경한 잉태가 얼마나 더 큰 불행과 절망을 가져올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당혹스럽지만 여전히 이방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사람들은 브리도의 말에 공감하고, 나아가 그녀의 선동에 휩쓸렸다.
“그래서 선택된 다른 사람이……?”
“네. 제사장님이세요.”
브리도야말로 엄격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방인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테드라고의 후손을 잉태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방인을 대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브리도는 이방인을 앞에 두고도 조금의 거리낌이 없었다. 브리도가 시험을 주관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두 번째 시험은 강에 가라앉아 있는 조상의 검을 가져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에델을 임신하신 상태라고…….”
“가혹한 시험을 견뎌 내고 테드라고의 핏줄을 품어야 비로소 강인한 육체라고 단정했으니까요.”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임신에 대해 잘 모르는 카놀라조차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는 안다. 샤를만에서도 아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는 여성들이 부지기수다. 좋은 가문의 여성들이야 훌륭한 실력을 갖춘 산파나 치료사들을 상시 대기해 두니 그나마 낫지만, 평민들의 경우는 사망률이 꽤 높은 편이었다. 하물며 외국인이 이런 추운 나라에 와서 아이를 가졌는데 오죽했을까.
따뜻한 궁 안에서 몸조리를 해도 모자랄 판에 강? 그냥 밖에 나와도 찬 바람이 몰아치는데 강바람이면 또 얼마나 차가웠을까!
“중요한 건 성공하셨다는 거예요. 그분은, 조금 오래 걸렸지만 확실하게 성공하셨어요. 다만 너무 오랜 시간 강바람을 쐬며 지내느라 병이 나셨죠. 그간의 피로나 기후의 문제일 수도 있겠죠. 따뜻한 나라에서 온 분이셨으니까. 그리고 제사장님은 그분의 침대 앞에서 세 번째 시험을 진행하셨어요.”
이쯤 되니 제사장은 인간이 아니라 무슨 악마처럼 보였다. 신을 모신다는 사람이 그래도 되는 거야? 이방인이 그 정도로 배척받아야 할 대상이었어?
“무슨 시험이었는데?”
“올곧은 마음을 평가하는 시험이요.”
티보치나가 피로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때쯤, 그녀의 배는 눈에 띄게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산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작고 가느다란 몸을 가진 여성이 부푼 배로 있으니 트리폴인들도 하나둘 경계심을 풀기 시작했던 것 같다.
특히 검을 건지고 난 뒤로는 그녀를 배척하는 시선이 조금 사그라졌다. 그렇게까지 노력하는 게 보는 사람들에게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킨 것 같았다. 물론, 제사장에게는 해당하지 않았지만.
“병을 낫게 하는 약을 드렸어요. 그걸 먹으면 앓고 있는 병을 깨끗하게 나을 수 있을 것이고,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올 준비를 마칠 수 있다고 하셨죠.”
“그게 끝이 아니지?”
카놀라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티보치나를 보았다. 그 제사장이 약을 줬다고? 독약이 아니라? 게다가 그게 어떻게 올곧은 마음을 평가하는 시험이란 말인가? 그냥 약을 먹고 병을 낫는 것뿐인데.
카놀라의 물음에 티보치나는 입술에 힘을 주었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쉰 그녀가 덤덤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깨끗한 몸이란…… 부정하게 잉태한 생명을 지운다는 의미이기도 해요.”
카놀라는 말문이 막혀서 눈을 크게 뜨고 한동안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높아진 언성으로 되물었다.
“에델의 어머님한테 낙태약을 줬다고? 그게 올곧은 마음을 평가하는 거야? 아이를 지우는 게?”
“자격을 얻기 전에 가진 후손은, 신의 허락을 받지 않은 것이니까요.”
“세상에……!”
“짐작하시겠지만 그분은 거절하셨고, 시험은 실패했죠. 약해진 몸으로 조산을 하게 되니 결국 버티지 못하셨고, 제사장님은 그녀의 죽음이 두 번째 시험조차 실패했다는 의미라고 공표했어요. 결국, 그분은 단 하나의 시험도 통과하지 못하신 거예요.”
언젠가 에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신전의 시험을 받다가 돌아가셨다. 자신도 죽을 뻔했다. 그러니 신이 이방인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정식 군주비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디라즈의 명예에는 흠집이 가지 않았다.
간략한 문장으로 설명되던 것들이 갑자기 무척이나 무겁게 다가왔다. 에델의 다섯 전사는 종종 그녀의 존재가 에델의 발목을 잡을까 봐 걱정했다. 이방인에게 이어받은 반쪽 피만으로도 고초를 겪었다고 했다. 귀로만 듣고 머리로만 이해했던 내용이었다.
그런데 태어나는 것조차 반기지 않아서 낙태를 권유했을 줄은 몰랐다. 카놀라는 입술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그대의 혼약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트리폴, 그 자체다.’
그때 디라즈는 대체 어떤 심경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제사장님은 그 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르셨어요. 그분은…….”
티보치나는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수많은 말 대신 나오는 건 한숨이었다. 제사장은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카놀라를 내쫓으려 할 것이다. 어떠한 가혹함도 개의치 않고. 그 성정은 이미 과거의 일을 통해 증명되었다. 게다가 제사장인 지금은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다.
디라즈도 제사장에게서 제 비를 지키지 못했는데, 과연 후사가 카놀라를 지킬 수 있을까?
“제가 제사장님 대신 가려 했지만 결국 허가가 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부디 조심하세요. 특히…….”
제사장을 조심하세요. 차마 내뱉지 못하는 말이었지만 카놀라는 다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카놀라의 눈동자가 차갑게 이글거리고 있었다.
“알았어. 내가 본때를 보여 줄게.”
그 단호한 음성에 티보치나가 멈칫했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티보치나가 차분하게 정정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응. 그래도 본때를 보여 줄게.”
티보치나의 차분한 정정은 소용없었다.
카놀라의 성격이라면 면전에 대고 선전 포고를 할지 모른다. 그거야말로 브리도를 자극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었다. 상상만으로도 식은땀이 나서, 티보치나는 카놀라의 양손을 꽉 잡으며 신신당부를 했다.
“절대 정면으로 맞서지 마세요. 왕녀님이 안전하게 성공하시는 것만으로도 제사장님께 본때가 될 거예요.”
카놀라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으나, 티보치나는 심각한 눈으로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카놀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주억거렸다. 떠밀어서 받아 낸 대답이라 여전히 불안했지만 어쨌든 답을 했으니 지켜 주겠지. 티보치나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안하며 자신이 잡은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디라즈께서 겨울 산맥 중반까지 대동해 주려 하시는 걸 제사장님이 눈치채셨어요. 틀림없이 어떤 식으로든…….”
“응? 디라즈께서 뭘 해 주셔?”
차분하게 말을 이어 가던 티보치나가 눈을 들었다. 카놀라가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조용하게 속삭여서 듣지 못했나?
“디라즈께서 겨울 산맥 중반까지 대동해 주시는 것이요. 왕녀님이 이번 대사냥에 합류하는 게 그것 때문이잖아요.”
카놀라는 슬며시 입을 벌렸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가만히 침묵했다. 그렇게 눈만 깜빡이던 카놀라가 삐걱거리는 고개를 끄덕여 어색하게 대답했다.
“아. 어……. 응. 그런가 봐.”
어색하기 짝이 없는 카놀라의 대답에 티보치나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당장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 따져 묻기엔 시간이 없었다. 티보치나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당부를 이어 갔다.
“전사들이 밤낮으로 교대 사냥을 나가니 야영지는 분주하고 틈틈이 허술해질 거예요. 절대 안전한 곳을 떠나시면 안 돼요. 겨울 산맥에 오르기 전까지 준비 단단히 하시고요.”
조용히 말을 듣던 카놀라는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조금 늦은 타이밍에 대답했다.
“……응.”
다행히 티보치나는 카놀라의 부자연스러운 어투를 알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런 그녀에게 한껏 입매를 끌어 올리며, 카놀라는 혼돈으로 가득 찬 머릿속을 정리하기 위해 노력했다.
뭐야, 대사냥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겨울 산맥에 올라가는 거였어? 이렇게 갑작스럽게 겨울 산맥을 오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마음의 준비도 안 됐는데? 아니, 물론 장비는 대략 준비를 마쳤지만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뭐랄까. 올라가야지 각오하고 가는 거랑 이렇게 갑자기 가게 되는 건 다르잖아?
온갖 물음표로 가득 차오르던 카놀라의 뇌리에 퍼뜩, 가장 중요한 사실이 떠올랐다. 대사냥의 참가 명단. 거기에 이방인 이름이라곤 그녀의 것 하나뿐이었다.
“그럼 루덱은……?”
무심코 속내를 입 밖에 낸 카놀라가 뒤늦게 티보치나를 인식하곤 입을 다물었다. 주의 사항을 끝없이 늘어놓던 티보치나는 조금 얼이 빠진 듯한 카놀라의 모습에 한숨을 내쉬며 입을 다물었다. 카놀라의 심경을 전혀 모르는 티보치나는 자신이 괜한 소릴 해서 심란하게 만들었다는 생각에 미안함을 느끼는 중이었다.
사실 후사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이야기해 줄 생각이 없었다. 좋은 이야기도 아닌데다, 티보치나는 제사장의 아래에 있는 사람이니 결국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꼴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티보치나는 카놀라가 안전하게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적어도 자신이 함께 갈 수 있는 일정이었다면 이렇게까지 걱정되진 않았을 것이다. 후사에 대한 신뢰감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후사의 곁은 사지가 될 것이다. 제 입으로 내뱉은 말이 현실로 돌아온 것 같아 자책감마저 들었다.
아니, 처음부터 자신의 잘못이다. 애초에 이런 시험을 내는 게 아니었다. 최소한 왕궁을 떠나지 않는 범위에서 시험을 냈으면, 적어도 도시를 떠나지 않는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시험을 냈더라면 이렇게까지 상황이 나빠지진 않았을 텐데. 겨울 산맥 꼭대기에 올라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한 게 바로 저 자신이다. 자신이 카놀라를 저 차가운 산맥으로 떠밀었다. 카놀라라면 당연히 시험에 응할 것이라고 짐작했어야 했는데.
아랫입술을 꼭 깨물고 서 있던 티보치나가 고개를 수그렸다. 검은 머리칼이 후드 바깥으로 흘러내려 늘어뜨려졌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런 말뿐이었다.
“제발 무사하세요.”
나지막한 목소리는 혼잣말에 가까웠다. 하지만 카놀라에게 닿기엔 조금도 무리가 없었다. 그 작은 목소리엔 그녀가 느끼고 있는 자책감과 미안함이 가득 묻어났다.
카놀라는 갑작스럽게 밀려온 혼란을 잠시 접어 두기로 했다. 자신을 위해 이렇게 다급하게 달려와 준 친구다. 온갖 약초 꾸러미를 들고 온 걸 보면, 애초에 카놀라를 만나러 시내에 나왔을 것이다. 그녀는 신전에 소속되어 있으면서도 제사장의 위험성을 알려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아마도 티보치나는 카놀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실행하려 했으리라. 제 혼란을 정리하는 것보단 티보치나를 달래 주는 게 먼저였다.
“꼭 무사히 돌아올게.”
카놀라는 티보치나에게 잡힌 손을 코앞으로 들어 올렸다. 덩달아 티보치나의 손이 딸려 올라왔다. 티보치나 역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티보치나의 두 손을 덮으며, 카놀라가 씩 웃었다.
“다녀오면, 다음 시험은 쉬운 거 내 주기다?”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복잡한 감정이 일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티보치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눌린 듯한 목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네.”
*
에델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자신은 카놀라의 장비 하나하나를 손수 확인하고 일일이 보강하는 중인데 정작 당사자가 친구를 만난다며 쏙 하니 나가 버린 것은 뭐,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얼굴만 보고 오겠다던 사람이 여태 오질 않는다. 급기야 수석 신녀와 골목으로 은밀하게 들어가서 속닥거리는 중이었다!
그나마 시야에 들어오는 곳에 서 있으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진즉 카놀라를 찾아 데려왔을 것이다. 에델에겐 ‘카놀라가 아이젠을 착용해 봐야 한다’는 훌륭한 핑곗거리도 존재했다.
어쨌든 에델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카놀라의 손을 덥석 잡고 내내 놓지 않는 저치의 행태에 잠깐 울컥하긴 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카놀라는 에델의 이 눈물겨운 인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상대방에게 웃으며 뭐라고 대화하기 바빴다.
처음 신녀가 카놀라에게 접근했을 때부터 경계해야 했다.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카놀라는 저 신녀를 무척 친밀하게 여기고 있었다. 자신이 대장간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건 까맣게 잊을 정도로.
그래서 결국 에델은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그라그포드는 마음이 상했을 땐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솔직하게 서운한 점을 이야기하는 게 좋다고 했다. 그것이 내 오해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그의 조언을 따랐다가 카놀라가 도망가 버리는 사태를 경험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그 조언을 따라야지. 사실 카놀라가 이 불퉁해진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아주 조금은 섞여 있기도 하고.
그러나 에델은 카놀라에게 티를 내려던 자신의 결심을 이루지 못했다. 긴 대화를 마치고 돌아온 카놀라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어쩐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돌아와서는, 대뜸 대장장이에게 자리를 비켜 달라고 말했다.
대장장이가 대장간에서 자릴 비키면 대체 어딜 가야 한단 말인가. 카놀라의 갑작스러운 요청에 대장장이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에델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얼른 자리를 비키라는 듯 고갯짓하는 에델의 모습에 결국 체념을 하고 가게를 나가야 했다. 그러는 동안 제 시중인들도 밖으로 내보낸 카놀라가 성큼성큼 걸어 에델 앞에 섰다.
양손을 허리에 올린 그녀의 모습은 사뭇 기세등등해서, 에델은 조금 전까지 서운하던 것도 잊고 당혹감에 빠졌다.
혹시 창가에서 계속 감시한 게 들켰나? 아니면 신녀가 뭐라고 이간질을 한 건가?
“나 내일 겨울 산맥 올라가야 하는 거예요?”
“네?”
“산맥 중간 자락에 나 떨구려고 데려가는 거예요?”
“갑자기 무슨……?”
“게다가 루덱도 없이 나 혼자? 어쩜 나한테는 상의 한마디 없이 일을 추진할 수 있어요?”
뭐라고 물을 틈도 없이 말을 쏟아 내는 카놀라 때문에 에델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침묵해야 했다. 그러다가 겨우 대꾸할 틈을 찾고선 침착하게 말을 건넸다.
“죄송하지만 정확하게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번에 내가 대사냥 따라가게 된 게, 산맥 중간까지 데려다주려는 거라면서요! 대뜸 이렇게 사람을 중간까지 올려다 놓으면! 일단 고맙긴 한데! 그래도 귀띔은 해 줘야죠! 나 아직 산맥 지도도 다 못 외웠는데!”
당황스럽긴 하지만 일단 중간까지 데려다준다니 고맙긴 하다. 고맙긴 한데 역시 울컥하는 마음도 들었다. 아니, 티보치나가 아니었으면 중간에 혼자 버려질 때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을 뻔했잖아?
“아…….”
얼떨떨한 표정으로 카놀라의 말을 되새겨 보던 에델이 침음을 삼켰다. 미간을 찌푸리고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이내 살짝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명단에 포함되었으니 당연히 디라즈와 이야기를 끝내신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름대로 당황스러운 마음을 가득 담아 씨근덕거리려던 카놀라는 한껏 부풀렸던 폐에서 공기가 푸시식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저렇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니 더 따져 묻질 못하겠다. 말문이 턱 막힌 카놀라는 굳은 표정만 겨우 유지하며 에델을 보았다. 그 역시 카놀라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사실에 당황했는지, 미간을 좁힌 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제껏 준비한 물품들은 모두 겨울 산맥을 염두에 둔 것들이었습니다. 제가 드린 지도를 보시면 중간 지점에 제가 따로 표시해 둔 곳이 겨울 산맥 꼭대기로 갈라지는 지점이고요.”
“하지만 난 내일 루덱과 함께 가지 않는데요?”
“그는 명단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요. 보급품은 정확히 명단을 기준으로 그 양이 책정되었습니다. 그에겐 겨울 산맥 꼭대기를 오르는 것 또한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에 카놀라는 입을 떡 벌렸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대책 없이 시간을 보내 온 것 같다.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대사냥은 그렇다 쳐도 겨울 산맥을 올라갈 땐 당연히 혼자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스카나 안젤리나는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함께하지 못하겠지만, 적어도 루덱은 붙여 줘도 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초행길에 대뜸 혈혈단신으로 산에 오르라고 하는 건가? 그것도 아무나 못 오른다는 곳을 가는데!
“진짜 나 혼자 올라가야 하는 거였어요?”
“본래 그 길은 허락받지 않은 자가 올라선 안 되는 길입니다.”
너무나 단호한 에델의 대답에 카놀라가 할 말을 잃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을 잃은 듯 절망감에 휩싸인 카놀라의 표정에 에델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