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놀라가 얼떨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확실히 그건 조금이라도 빨리 듣는 편이 좋긴 할 것 같다. 아마 그 기출문제란 에델의 어머니가 받았던 것일 테니까. 끝내 통과하지 못했다는 그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지 궁금하긴 했다. 그것을 알면 제게 낼 문제도 짐작할 수 있을 테니, 역시 들어 두는 편이 낫겠지.
하지만 모처럼 에델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지는 건 아쉬운 일이다. 특히 오늘은 어쩐지 티보치나와 시시덕거리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비디움이 당부한 내용도 있는 데다, 에델의 어머니에 대해 듣고 난 이후라서 더 그랬다.
카놀라는 거절의 말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에델이 차가운 어조로 끼어들었다.
“지금 해.”
제 손을 당기는 힘에 놀란 카놀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델을 돌아보았다. 에델은 티보치나를 노려보고 있었지만, 동시에 카놀라의 팔목을 잡고 있었다. 그 행동이 꼭 티보치나에게 가지 말라는 의미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내가 듣는 앞에서 하지 못할 이야기인가?”
“후사의 귀한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을 따름이지요.”
“내 정혼녀에게 내는 시간이니 그대가 신경 쓸 문제는 아니군.”
티보치나의 눈길이 카놀라의 잡힌 팔목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카놀라는 어정쩡하게 서서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냉랭하던 티보치나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궁금하시다면, 숨길 이야기도 아니죠.”
그녀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곤 카놀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차분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자격을 시험하겠습니다. 그 내용을 말씀드리려 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조금 커서, 다른 이들에게도 똑똑히 들렸다. 카놀라의 시중인들은 물론이고 후사의 다섯 전사까지 이쪽을 주목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당사자인 카놀라는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굴렸다.
이렇게 갑자기? 아무런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아직 기출문제도 듣지 못했는데?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핑글핑글 돌았다.
“물론, 포기하셔도 됩니다. 전 왕녀님이 좋거든요. 부당하고 일방적인 조건들을 애써 맞추느라 다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포기하신다면 신전에선 왕녀님을 그 어느 손님보다 더 귀하게 모실 겁니다. 뜻대로 구경하시고, 마음껏 어울리실 수 있도록 제가 곁에서 안내해 드릴게요.”
마지막에 이르러선 사뭇 다정하기까지 한 어투였다. 티보치나는 정말로 신전의 뜻을 받들기 위해 자신을 막는 걸까? 카놀라는 문득 궁금해졌다. 어떻게든 자신을 만류하려고 하는 그녀의 마음은 진심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이 ‘이방인을 배척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녀가 뱉은 말에 신전 관계자들은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티보치나의 말이 전혀 상의하지 않은, 독단적인 판단이라는 의미였다.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잖아.”
카놀라는 잡히지 않은 다른 손으로 볼을 긁적였다.
“그래도 걱정해 준 건 고마워. 역시 티보치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환하게 웃어 주었는데, 도리어 티보치나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더불어 손목을 잡은 힘이 더욱 강해졌다. 카놀라는 아프다는 뜻을 전달하기 위해 잡힌 손을 슬쩍 움직였다. 그러나 에델은 도리어 그 손목을 놓칠세라 더욱 단단히 움켜쥐었다.
처음으로 먼저 접촉을 해 온 것이니 기쁘긴 한데, 기왕이면 좀 더 로맨틱한 상황에서 해 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카놀라가 티보치나에게 말했다.
“그냥 알려 줘.”
티보치나의 표정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담담하게 말했다.
“강인한 육체를 증명할 시험입니다.”
‘강인한 육체’라는 말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카놀라는 반사적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아, 그냥 기출문제 듣고 나서 결정할 걸 그랬나? 뒤늦은 후회가 살짝 들려는 찰나, 티보치나의 말이 이어졌다.
“겨울 산맥 꼭대기에서 황금 가죽을 가져오세요.”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카놀라가 천천히 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에델은 물론이고, 다섯 전사와 신전 관계자들도 경직된 표정이었다. 카놀라의 시중인들만 영문을 알지 못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카놀라는 어색하게 웃으며 티보치나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진지한 티보치나의 눈동자를 보니, 이게 정말 장난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카놀라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이번엔 진짜로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놈의 입이 또 사고를 쳤구나. 기출문제부터 들을걸!
4. 시험 준비는 의욕적으로
‘이런 거 안 써도 나 싸울 생각 없어.’
연락도 없이 갑작스럽게 집무실에 쳐들어온 그의 여동생은 다짜고짜 작은 유리병 하나를 내려놓았다. 책상 한가운데에 떡하니 놓인 유리병을 가만히 보던 라우렐이 보고 있던 서류를 한쪽으로 밀어 냈다.
여동생은 두 손을 허리에 올리곤 짐짓 화가 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열 살이나 어린 애가 표정을 굳혀 봐야, 그의 눈에는 조금도 무서워 보이지 않았다.
‘이게 뭐지?’
‘그걸 나에게 물으면 어떡해? 보나 마나 독이겠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다. 라우렐은 병을 집어 들고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불투명한 유리병 속에선 액체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뚜껑을 열고 손으로 바람을 일으켜 향을 맡았다. 그가 아는 종류의 독이다. 딱 치사량만큼 들어 있었다. 특유의 향이 있긴 하지만 향신료가 강하게 첨가된 요리에 넣으면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병째 들고 온 걸 보니, 이 독을 사용하기 전에 그의 여동생이 먼저 이것을 찾아낸 모양이다.
라우렐이 진지하게 독을 관찰하고 있으려니, 그의 여동생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뭐야, 오빠 아니야? 그럼 언니인가 보네. 사실 오빠의 수법이라고 하기엔 너무 허술하다 싶긴 했어. 오빠라면 그리 마음 약한 세작을 심지 않았을 테니까.’
여동생은 멋쩍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애초 그가 범인이 맞다 해도, 이렇게 바로 앞에 대고 따져 묻는 대응은 좀 아니지 않나? 게다가 세작이라는 자가 마음이 약해서 제 죄를 고백했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진창이라 지적할 엄두도 나질 않았다. 라우렐은 뚜껑을 닫은 유리병을 제자리에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물었다.
‘복수해 줄까?’
‘됐거든? 괜히 나까지 끌어들이지 말아 줄래? 내 핑계 대지 않아도 둘은 어차피 맨날 싸우잖아.’
여동생은 긴장감 없는 얼굴로 의자를 끌어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독살당할 뻔한 사람이라기엔 무척이나 태평하고 한가로운 얼굴이었다. 신기함을 넘어,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물론 이 집안에 제대로 된 정신머리를 가진 사람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살짝 흘러내린 안경을 추스르며, 라우렐이 건조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어차피 싸우니 겸사로 네 복수를 해 줄 수도 있겠지.’
‘됐어. 온 김에 오빠에게도 말해 둘게. 난 왕좌 쳐다도 안 봐. 지금이 딱 좋으니까 이대로만 살게 둬.’
여동생은 양손으로 얼굴을 받치며 장난치듯 말했다. 겉으로는 조금도 진지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렐은 그녀가 지금 진심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사실 그녀에겐 달리 방법이 없기도 했다.
여동생은 날 때부터 왕좌와 가장 먼 아이였다. 저런 독살 시도마저 아깝고 쓸데없게 느껴질 정도로, 애초 죽여 없애야 할 경쟁자가 아니다. 그녀 자신도 그러한 처지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태껏 그 좁은 궁에서, 죽을 날을 앞둔 시중인들과 부대끼며 놀러 다니는 것일 테지.
라우렐은 만날 때마다 자신을 죽일 듯 노려보는 또 다른 여동생을 떠올렸다. 그 애는 머릿속에 온통 싸움질밖에 없는 어리석은 누이였다. 근래에 도통 성과를 내지 못해 분통을 터뜨리더니만, 아쉬운 대로 누구 하나 없애서 위안을 얻고 싶었던 걸까?
‘그 말을 어찌 믿고?’
‘하여간 참 귀염성 없는 오빠야. 나 그냥 계속 잘 놀고먹게 해 줘. 응? 둘이 싸우면 되지 왜 불쌍한 동생까지 끌어들이고 그래? 대신 때 되면 적당한 곳으로 곱게 시집갈 테니까.’
여동생은 본격적으로 징징대기 시작했다. 라우렐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평생 누구도 그의 앞에서 이리 투정을 부려 댄 적이 없었다. 제 여동생은 어떤 의미로는 아주 대단한 아이였다. 그녀는 상대방이 어디까지 받아 줄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귀신같은 능력이 있었다. 또한, 상대방이 원하는 말을 손쉽게 내뱉는다.
‘고분고분 정략결혼 할 왕녀 하나 정도는 필요하잖아? 언니는 진즉 글렀지만, 난 이렇게나 말 잘 듣는 여동생인걸!’
두 팔을 허공에 활짝 펼치며 말하는 본새가 사뭇 뻔뻔스러웠다. 라우렐은 ‘이 여동생은 어디에 데려다 놔도 굶어 죽지 않겠다’라는 생각을 불현듯 했다. 누군가 심어 둔 세작이 독을 사용하기는커녕 도리어 병째 내놓고 고해 성사 할 정도로, 사람의 마음을 쉽게 얻는 여동생이라면.
그래서 훗날 그녀를 정말 외딴 나라로 보내야 했던 때도, 그는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여동생이라면 도착해서 만나는 사람마다 족족 제 편으로 만들 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이 너무나 뻔해서 라우렐은 미련 없이 여동생을 배웅했다. 그러곤 잊었다.
그런 그가 이제 와 떠난 여동생과의 일화를 불현듯 떠올린 까닭이라면 눈앞의 이 사내 때문이었다.
“제가 트리폴에 대해 좀 찾아봤습니다.”
그는 무척이나 기세등등한 꼴로 라우렐 앞에 섰다. 그의 옆구리엔 그 말을 증명하듯 두꺼운 책 몇 권이 끼어 있었다. 모두 왕궁의 대도서관에 있는 책들이었다.
“우리 학회에서 지급한 출입증이 그런 걸 찾아보기 위함은 아닐 텐데요.”
“무, 물론 그렇습니다만…… 사안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그곳이 얼마나 야만스럽고 낙후된 나라인지 아신다면 분명 경악하실 겁니다!”
머저리 같은 새끼. 그렇게 생각하며, 라우렐은 시선을 내렸다. 읽던 것을 마저 읽고 싶었지만, 사내는 눈치 없이 목소리를 높여 떠들었다.
“거긴 사냥을 하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다고 합니다. 기후도 이곳과는 비교도 안 되게 추운 데다, 짐승을 숭배한다더군요!”
몇 번 서신을 주고받았던 트리폴의 군주는 적어도 눈앞의 남자보다 훨씬 신사적이었다. 게다가 그 군주가 보내온 외아들의 초상화 역시, 눈앞의 남자에 비교하면 훨씬 여동생의 취향에 가까웠고.
“제가 일전에는 미처 나설 타이밍을 놓쳤지만, 이렇게 알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타이밍을 놓친 게 아니라, 눈치를 보느라 나설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나 아쉬웠으면 사귈 때 여동생의 마음을 잘 잡아 두지 그랬나. 비아냥거림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
눈앞의 남자는 어리석은 것에 비해 가진 게 제법 많다. 여동생이 이 사내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혼약까지 이어 줄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사람이 어리석은 것을 감수해 줄 정도로 가치 있는 배경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여동생은 사람 보는 눈이 의외로 정확한 편이었다. 여태 그녀가 보인 화려한 남성 편력을 참작해도, 그녀는 이 사내에게 아주 빠르게 질렸다. 그리고 마침내 매정하게 헤어짐을 고했다.
문제는 사내의 대처였다. 일이 닥쳤을 때는 눈치만 보더니 이제 와서 사람을 귀찮게 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게 아니라, 라우렐이 나서 주길 기대하면서 뻔히 보이는 부추김을 하려 드는 것이다.
“무엇보다, 군주가 되기 위해선 겨울 산맥 꼭대기에 올라가야 한답니다. 제가 경악한 부분은 바로 여깁니다. 왕녀님께 이런 무식한 짓을 시키면 어떡합니까? 겨울 산맥 꼭대기라니요! 안 그래도 거긴 이방인을 멸시한다는데, 햇살처럼 빛나던 왕녀님이 생명의 위협이라도 받으면…….”
“베르긴 공자.”
“그곳에서 얼마나, 네?”
라우렐은 안경을 벗으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상대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게 하기도 모호한 위치의 상대방이다. 아직 사내에겐 얻어 낼 게 남아 있었다. 때문에 라우렐의 어투는 냉담하지만 예의 발랐다.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 한들, 공자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입니다. 공자와 내 동생과의 관계는 모두 정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 그건……. 감히 왕녀님을 연모하는 사내로서, 탄식을 금할 길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왕자께서 말씀하셨다시피 저희는 마음을 나눴던 사이로서…….”
“공자는 카놀라가 떠날 때 별말씀이 없으셨습니다.”
라우렐의 지적에 사내는 어물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그야……!”
“혹시 모르죠. 공자께서 난동이라도 부리셨으면, 저도 그 노고를 생각해 혼약을 재고했을지요.”
사내가 놀란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라우렐은 조금 거친 손길로 안경을 옆으로 치우며 말을 이었다.
“이별을 고한 제 여동생에게 보복성 언사를 늘어놓으셨다고 하기에 그만한 패기는 보여 주실 줄 알았습니다만.”
“보, 보복성 언사라니요. 오해이십니다.”
사내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 과정에서 끼고 있던 책을 떨어뜨릴 뻔했지만, 그는 흘러내리는 책을 용케 붙들어 다시 옆구리에 끼었다. 책이라도 떨어뜨렸으면 손상된 서적을 빌미 삼는 건데. 안타까운 마음에 절로 혀를 차게 되었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던 라우렐이 귀찮음을 꾹꾹 누르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정 안타까우시면 직접 겨울 산맥을 넘어가 확인해 보십시오. 말리지 않겠습니다. 말씀대로 여동생이 냉대를 받고 있다면, 오라비로서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충분히 그보다 더 사랑받을 수 있는 혼처가 많을 텐데.”
이 얼마나 관대한 처사인가. 라우렐은 자신의 관대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는 시집간 제 여동생을 제법 아끼고 있다. 이 냉혹한 궁에서 그나마 아무 뜻 없이 대할 수 있었던 아이라서 그럴 것이다. 혹은, 이 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아무 뜻 없이 대해 준 아이라서 그럴지도 모르고.
라우렐의 말에 상대방은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난처함이 가득한 그의 표정에 라우렐이 희미한 냉소를 지었다. 겨울 산맥의 소문 따위에 지레 겁을 먹고 근처도 못 갈 사내다. 그런 주제에 누굴 앞세워 보겠다고.
“말씀 끝나셨으면 이만 나가 주겠습니까? 공자는 제 업무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무심하게 축객령을 내린 라우렐이 벗었던 안경을 집었다. 한 손으로 안경을 걸치며, 그는 문득 의문을 가졌다. 카놀라가 그곳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을 일이 있을까? 정말 겨울 산맥 꼭대기라도 올라가게 된다면…….
거기까지 생각하던 라우렐은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제 생각을 떨쳤다. 겨울 산맥 꼭대기라니. 그야말로 우스운 상상이었다.
*
“솔직히 말해 줘요. 겨울 산맥 꼭대기에 뭐 살죠? 곰? 늑대? 호랑이?”
카놀라는 마차 창문에 거의 매달리다시피 한 상태였다. 그녀는 창문 옆에서 말을 몰고 있는 에델을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다.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아예 창문을 넘어 그에게 매달릴 기세였다. 정면만 응시하며 말을 몰던 에델이 그녀의 눈빛을 이기지 못하고 나지막하게 대답을 했다.
“그런 동물들은 꼭대기에 도착하기도 전에 만날 겁니다.”
“호랑이까지?”
“운이 나쁘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물은 둘째 치고, 우선 추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겁니다. 길목도 평탄하지 않고, 눈 때문에 위험합니다.”
설명이 이어질수록 카놀라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져 갔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선 울상이 되었다. 창틀을 잡은 손등 위에 얼굴을 뭉개듯 올린 카놀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엉망진창으로 휘날렸다.
에델은 창문에 걸쳐진 카놀라의 머리통을 힐끗 보았다. 축 늘어진 꼴이 그녀의 막막한 기분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었다.
어처구니없기는 에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겨울 산맥 꼭대기라니. 그곳은 그도 가 보지 못한 곳이다. 겨울 산맥 꼭대기는 트리폴의 후사가 군주에게 자리를 이어받을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라가는 장소였다.
후사는 군주의 의자에 휘감는 황금 가죽을 얻기 위해서 꼭대기로 올라가야 한다. 정확히는 꼭대기에 사는 산양의 가죽이지만, 어쨌든 그 색이 황금색에 가까워 황금 가죽이라고 불린다.
티보치나가 낸 시험은 트리폴 전사,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사가 겨우 해내는 것이었다. 그런 것을 카놀라에게 하라고 들이민 의도는 아주 명확했다.
“이번 시험의 답은 하나입니다.”
에델의 말에 카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아무렇게나 치워 낸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다.
“뭔데요?”
카놀라의 목소리에선 희망이 느껴졌다. 에델은 카놀라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포기하는 것.”
반짝이던 눈빛이 급격하게 시들해졌다. 실망감이 가득한 카놀라의 눈빛이 따갑게 와 닿는 것을, 에델은 꿋꿋하게 외면하며 말을 이었다.
“겨울 산맥의 꼭대기는 저도 가 보지 못했습니다. 그곳을 다녀온 사람은 트리폴 내에서도 단 한 명, 디라즈뿐이죠. 하물며 당신은 야생의 무엇 하나도 익숙지 않을 테니, 시도 자체가 무의미한 일입니다.”
티보치나는 짧은 시일이나마 카놀라의 곁에 가장 많이 붙어 있었던 트리폴인이었다. 카놀라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왕녀라는 걸 모두 알아챘을 것이다. 애초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시험을 낸 것이다. 카놀라가 이런 얼토당토않은 시험에 응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러나 에델의 설명에 카놀라는 도리어 반발심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는 발끈한 목소리로 에델에게 반박했다.
“왜 시도하기도 전에 포기할 생각부터 해요?”
“불가능하다는 걸 아는데 시도할 이유가 없습니다.”
“내가 포기하면 신전에선 옳다구나 하고 혼약을 승인하지 않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당초 이루어질 리가 없다고 생각한 혼약이다. 에델은 긍정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목소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정면의 어느 먼 지점을 응시하고 있던 에델이 힐끗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성난 기색이었다. 어쩌면 서운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그 실망감으로 인해 자신에 대한 마음조차 식는다면 차라리 쉬울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모든 걸 무르기에 늦지 않은 시점이었다.
“승인을 받을 수 있으리라 믿습니까?”
먼저 질문한 건 카놀라인데, 에델은 엉뚱한 질문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카놀라에겐 그 회피가 꼭 긍정을 뜻하는 것으로 들렸다.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리며 지적하려는 찰나 에델이 먼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내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셨다면, 당연히 ‘어떤 식으로든’ 이 혼약이 깨지리라는 것을 아실 텐데요.”
카놀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굴에 불만이 가득했다. 고집스럽게 입을 내밀고 있던 그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아는 건 신전의 시험을 통과하면 혼약이 성사된다는 거예요.”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에델이 단호한 목소리로 곧장 대꾸했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신전의 승인을 받기 위해 시험을 치르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에델은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얼굴은커녕, 어머니에게 안겨 본 적도 없다. 이미 비디움에게 그 사연을 들은 카놀라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에델의 어머니, 스타티스는 임신한 몸으로 시험을 치르다가 쓰러졌고 결국 사망했다. 그 과정에서 예정일보다 이르게 태어난 에델 역시 생사를 오갔다고 했다. 에델이 살아난 것 자체가 기적이었는데 후사까지 되었으니, 그간의 고생이야 구구절절 늘어놓지 않아도 훤하지 않느냐던 비디움의 말이 아직도 생생했다.
“테드라고의 정원에는 이방인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저도 죽을 뻔했습니다.”
사실 에델에게 어머니의 죽음은 와닿지 않는, 조금 비현실적인 사건이었다. 어머니를 직접 보거나 만난 적도 없는 데다 나라에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했으니, 존재 자체가 꼭 상상 속의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 탓이다. 아마 다른 이들과 눈에 띄게 다른 그의 체격이나 외모가 아니었으면, 그녀의 존재를 의심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문에 그녀의 죽음을 언급하는 에델의 목소리는 무척 덤덤했다.
“테드라고의 후손이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위기를 겪었다는 것이야말로 신의 경고라고, 모두 입을 모아 이야기했죠.”
어머니와 함께 죽었어야 하는 건가? 그런 생각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가 가진 피의 반절은 테드라고의 것이다. 트리폴에서 가장 강하다는 혈족. 지상의 그 어느 것보다 강한 생명체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알려진 테드라고의 피. 그것을 타고났는데 죽을 수 있을 리가 없지 않나. 사람들은 그 피가 에델을 살렸다고 했다.
에델은 그들의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죽었고, 자신은 살았다. 그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주고 있다. 그러니 에델은 그 어느 트리폴인보다 더 완벽한 트리폴인으로 거듭나야 했다.
누구보다 뛰어난 전사가 되지 않으면 언제고 신은 그를 버릴 것이다.
에델은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젠 모두 떨쳐 버린 감정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다시 입 밖으로 꺼내니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그 기분을 떨쳐 버리기 위해 고삐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었다. 굳은살 때문에 고삐의 거친 감촉이 무디게 느껴졌다.
“반대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 목소리에 에델이 무심코 시선을 들었다. 카놀라의 새파란 눈동자가 그를 진지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신께서 당신이 가진 반절의 피를 허락한 것이라고요. 그것도 아니면, 당신이 그 허락을 받아 낸 것이라고.”
흔들리는 마차 덕분에 카놀라의 머리카락은 엉망진창으로 휘날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조금도 웃기지 않았다. 시끄러운 바퀴 소리나 말발굽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단단하고 올곧은 까닭이었다.
“트리폴에서 사는 동안 신을 부정할 수도, 제외할 수도 없으리라는 건 알아요. 하지만 결국 그 뜻을 해석하는 건 인간의 몫이잖아요. 신의 관대함을 믿어 보면 안 돼요?”
카놀라는 답답했다.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신의 뜻을 핑계 삼아 가혹한 시험을 치르게 한 신전이다. 누구도 그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게 그녀의 눈에는 이상해 보였다.
동시에 이해되기도 했다. 신전은 군주의 혼인에 관여하는 집단이 아닌가. 이 나라의 사람들은 신전의 말이 옳지 않다는 전제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신전을 부정한다는 건 이 나라의 근간을 통째로 뒤집는 것이다. 개인이, 그것도 외부에서 온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함부로 해서도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다. 그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정면으로 이겨 먹는 것.
“내가 시험에 통과할게요. 그럼 믿을 수 있겠죠?”
“불가능한 일…….”
“다녀온 사람이 있다면서요.”
카놀라는 씩 웃었다. 에델은 드물게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덤덤하거나 웃는 모습도 멋지지만, 이런 표정도 색다른 매력이 있다. 이쯤 되니 에델의 얼굴을 보면 마냥 멋있고 예쁘기보단, 조금 귀엽다거나 우습다는 생각들도 들었다.
새로운 모습들을 알아 간다는 건 아주 좋은 징조였다. 이건 상대방이 그녀에게 마음을 열어야 가능한 일이니까.
“디라즈를 쫓아다니면, 뭐 하나라도 알려 주시겠죠. 확실하진 않지만, 날 싫어하시진 않는 것 같거든요. 이래 봬도 난 남들 미움 사는 게 더 어려운 사람이라.”
에델에게 장난스러운 윙크를 한 카놀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차 밖으로 내내 얼굴을 내밀고 있었더니 얼굴은 이미 차게 식어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달린 지 제법 오래된 것 같은데, 여기가 어딘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저 멀리 보이는 풍경으로 보아 수도에 금방 도착할 것 같았다. 수도 안으로 진입하게 되면 이렇게 마냥 얼굴을 내밀고 있기 어려웠다. 아무리 카놀라라도 아직 그녀를 환대하지 않는 도시에서 흉한 꼴을 아무렇지 않게 보일 만큼 철면피는 아니니까.
“왜 그렇게까지 하십니까?”
“네?”
슬슬 고개를 넣을 타이밍을 보고 있던 카놀라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카놀라를 응시하던 에델이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목숨이 위험할 시험에 응하겠다는 말을 믿을 수 없습니다. 차라리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다고 하십시오.”
그의 목소리는 사뭇 차갑기까지 했다. 멀뚱멀뚱 에델의 옆모습을 보던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진짜 이상한 사람 같잖아.”
혼잣말하듯 중얼거린 그녀가 볼을 부풀리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발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그럼……. 난 이 나라의 차기 군주비 자리를 노리고 있어요. 그럼 됐죠? 아, 그리고 내 눈앞에 엄청 잘생긴 후사의 사랑도 탐나요. 실은 이쪽이 더 끌리네요.”
너무 쾌활해서 꼭 장난치는 것 같았다. 에델이 드물게 얼굴을 찡그리며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기 전에 카놀라가 먼저 재빨리 말을 건넸다.
“사랑 때문에 목숨을 걸어 보겠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린다면, 그냥 이해하지 말아요.”
전방을 확인한 카놀라가 이제 마차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몸을 뒤로 뺐다.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대충 그러모아 쥔 그녀가 고개를 안쪽으로 넣었다. 내내 휘날리느라 사방팔방으로 솟구친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손으로 정돈한 카놀라가 창문을 닫기 전 해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도 날 이해하길 포기했으니까!”
*
이방인 왕녀가 트리폴에 온 지도 한 달이 넘었다.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화를 내며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던 트리폴인들은 슬슬 그녀가 얼마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닌지 깨달아 갔다. 후사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보란 듯이 표출하던 그녀는 최근 디라즈의 주변을 졸졸 쫓아다니는 중이었다. 그 집요함에 디라즈마저 두 손을 들고 나서부턴 더욱 기운차게 궁내를 휘저었다. 그 광경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꼴이라서, 사람들은 그녀가 그렇게까지 분주한 연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신전이 그녀의 자격을 시험하기 위해 겨울 산맥 꼭대기로 인도했다.
그 소문이 퍼지자, 트리폴인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겨울 산맥 꼭대기에 오를 수 있는 이는 오직 선택받은 후사 한 사람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라, 사람들은 신전이 이방인에게 산꼭대기로 가라고 했다는 내용 자체에서부터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만약에라도 성공한다면 그녀의 능력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성공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왕녀가 성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겨울 산맥 꼭대기까지 가는 길은 디라즈를 제외하면 누구도 알지 못하고, 또한 안다고 해도 선뜻 엄두를 낼 수 없는 길이었다. 겨울 산맥 곳곳에서 사는 흉포한 야생 동물들을 상대할 무력이 있어도 꼭대기까지 이어질 숨 막히는 추위까지 감당할 이가 몇이나 될까. 하물며 왕궁에서 곱게 자랐을 왕녀다. 쉬운 산행조차 힘겨워할 게 뻔한 사람에게 꼭대기를 다녀오란 말은 절대로 시험을 통과시키지 않겠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런 현실적인 부분들을 떠올리기도 전에, 트리폴인들은 왕녀의 실패를 당연하다는 듯 확신했다. 전사들이 겨울 산맥 꼭대기를 쉽게 오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드래곤의 둥지가 있다는 전설 때문이었다. 드래곤의 영역에 허락받지 않은 이가 함부로 들어가면 저주를 받는다. 지상에서 가장 강인하다고 칭해지는 드래곤의 분노를 사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돔돔은 더욱 어이가 없었다. 눈앞의 이방인은 왕녀가 겨울 산맥을 오르는 것이 가능할 것이라는 걸 너무나 당연시하고 있다. 정말 미친 게 분명했다.
“귀하가 디라즈의 옷을 전담한다고 들었습니다.”
서 있는 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노쇠한 영감은, 무척이나 정중한 어조로 돔돔에게 말했다. 이 영감이 왕녀의 곁을 졸졸 따라다닌다는 이방인 시중인이라는 거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기운찬 시중인을 데려와도 모자랄 판에 드러누워 있어야 할 것 같은 노인들을 끼고 왔다는 왕녀가 참 희한하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돔돔과 관련이 없는 가십거리에 불과했다. 몇 시간 정도 주절거리다가 흥미를 끊어 버릴 만큼 가치 없는 내용 말이다.
이 영감이 오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왕녀님께는 귀하의 실력이 꼭 필요합니다.”
“나, 나는 디라즈의 옷을 만드는 사람이지 이방인의 옷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오!”
돔돔이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고는 호통쳤다. 그러나 영감은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이 그의 말을 받았다.
“그 부분에 대해선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샤를만에서도 왕의 장인에겐 함부로 일감을 맡길 수 없습니다.”
트리폴에는 그런 풍습 따위 없다. 돔돔은 재봉사일 뿐이다. 그는 디라즈뿐만 아니라 다른 많은 전사의 의복을 만들고 있다. 게다가 디라즈의 옷 또한 그가 홀로 다 만드는 게 아니었다. 가죽을 관리하는 이도 따로 있고, 그것을 재단하는 사람도 따로 있다. 그들 역시 그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일 뿐, 특별히 선발된 건 아니다.
그래서 돔돔은 조금 당황했다. 영감의 말은 돔돔을 재봉사 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디라즈의 옷을 만드는 게 스스로가 특출한 덕분이라고 생각했던 적은 없다. 그저 재봉사이기 때문에 옷을 만들고 있을 뿐이고, 그 옷의 주인 중 한 사람이 디라즈일 뿐이다. 디라즈는 분명 대단하고 모두를 이끌어 줄 단 한 명의 전사지만 동시에 다른 전사와 다를 바 없는 트리폴인이었다. 그러니 그의 옷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이 특수하다는 것을 참작해 주십시오. 왕녀님께는 강한 추위를 견딜 수 있는 옷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디라즈께선 작업 여부의 판단을 귀하에게 위임하셨습니다.”
옷 한 벌 더 만드는 게 얼마나 대단한 일이라고 디라즈의 승인까지 받아 오나. 돔돔의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왕녀가 이방인만 아니었어도, 돔돔은 별생각 없이 다른 전사들의 옷과 함께 그녀의 옷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 하지만 옷은 혼자 만드는 게 아니오. 원단이며 재단이며……!”
“공방은 다녀왔습니다. 아직 원단을 모두 고른 건 아니지만, 인원이 선별되는 대로 자문해 작업할 예정입니다. 공방의 쿠에트라는 이름을 가진 장인이 특히나 귀하를 강력하게 추천하더군요.”
쿠에트는 평소 돔돔과 앙숙처럼 으르렁대는 가죽 공방의 수석 장인이었다. 물론 손발이 맞기는 해서 좋든 싫든 함께 작업을 해 왔다. 그렇다고는 해도 타인에게 굳이 돔돔을 추천할 정도는 아니었다. 쿠에트와 성격이 잘 맞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따로 있다.
때문에 돔돔은 쿠에트가 자신에게 엿을 먹이려는 심산이 아닐까 의심했다. 이방인의 옷을 만드는 일이니 역시 엿 먹이려는 의도에 가까울 것이다. 영감이 말을 잇지 않았으면 그렇게 믿었을 터였다.
“트리폴에서 가장 훌륭한 품질의 옷을 만드는 장인이라면서 말입니다.”
쿠에트가 그런 소릴 했을 리가 없다. 돔돔은 단박에 부정하려 했지만, 영감이 워낙 진지하게 말을 하는 탓에 그럴 수가 없었다. 돔돔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 일단 생각을 좀 해 봐야겠소.”
“물론입니다. 다만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길지 않으므로, 이틀 내 확답을 듣고 싶습니다.”
“그러시오. 그런데…… 정말 쿠에트가 이 일을 맡았소?”
미심쩍은 듯 묻는 돔돔에게, 영감은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 여자가 얼마나 까다로운 인간인데……. 어떻게 꾀어낸 거요? 협박이라도 했소?”
쿠에트라면 웬만한 협박엔 넘어가지 않을 인간이었다. 어찌나 성격이 더럽고 불같은지, 어지간한 사내들은 쿠에트의 성질머리에 넌더리를 내며 먼저 꼬리를 말았다. 다들 어째서 신이 쿠에트 같은 인간에게 가죽을 다룰 실력을 주었는지 의문을 표하곤 한다. 그 실력이 아니었으면 진즉 감옥에 가든 추방을 당하든 했을 인간이니까. 그런 쿠에트가 이방인을 위해 가죽을 제공하겠다고 했다고? 쿠에트에게 아무도 모르던 약점 같은 게 있었던 걸까?
돔돔은 이번에야말로 쿠에트의 약점을 알아낼 수 있는 건가 싶어 눈을 번뜩였다. 그런 돔돔을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던 영감이 평온한 어조로 말을 했다.
“그냥 맡아 달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게 끝이요?”
“네.”
“뇌물을 주지도 않고, 협박하지도 않고, 고문을 하지도 않았단 말이오?”
“그런 짓을 했다간 이렇게 편히 다닐 수 없었을 겁니다.”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차라리 협박이나 고문을 했다고 하는 편이 더 설득력 있게 들릴 정도다. 그 쿠에트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이번 일을 맡는다고 했다고?
“말도 안 돼!”
“믿기 힘드시다면 본인에게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그럼 저는, 이틀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영감은 몸을 일으켰다. 나가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돔돔은 멍청한 얼굴로 앉아 있을 뿐, 이렇다 할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영감은 서운한 기색 없이 차림을 정비했다. 얼이 빠진 돔돔을 그대로 두고 가게를 나가려던 영감이 문득 멈칫했다. 그러곤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돔돔은 그 자세 그대로 굳어 있었다.
“이 말이 귀하의 결정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공방은 저희 왕녀님께서 직접 다녀오셨습니다.”
돔돔이 시선을 들어 영감의 얼굴을 보았다. 내내 사무적인 표정을 짓고 있던 영감의 얼굴에 처음으로 미소가 떠올랐다.
“장인은 한 시간 만에 승낙했고요.”
*
“어머, 흐미르!”
“……또 오셨군요.”
흐미르가 누구에게 건네는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크게 감정 기복을 느끼지 않는 그는, 지금 누군가의 얼굴만 보고도 급격한 피로를 느끼는 중이었다. 그가 디라즈의 곁에서 일하게 된 이래로 이렇게까지 피로함을 느낀 적이 있던가. 아무리 과중한 업무가 닥쳐도 언제나 인내와 끈기로 극복해 나갔다.
하지만 저 여자는…… 인내나 끈기 따위는 가뿐히 웃어넘기는 여자였다.
“후사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급기야 흐미르는 그녀를 후사에게 떠넘기려고 시도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슬프게도 상대방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흐미르의 노력을 뭉개 버렸다.
“응, 알고 있어. 하지만 난 흐미르를 만나러 왔는걸?”
“전 바쁩니다.”
“그럼 대신 디라즈를 뵙게 해 줄래?”
“……그분은 더 바쁘십니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별생각 없이 그녀를 디라즈에게 데려갔었다. 두어 번 그런 상황이 반복되고 나서, 디라즈는 흐미르를 조용히 불렀다. 그러곤 앞으로 그녀를 네놈이 상대하라며 ‘아주 약간’ 언성을 높였다. 혹시 디라즈에게 무례한 짓이라도 한 건가 싶었지만 그녀를 내쫓지 않는 것으로 보아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흐미르는 영문도 모르고 디라즈 대신 그녀를 상대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확히 삼 일째 되는 날, 흐미르는 그가 왜 그녀를 들이지 말라고 했는지 깨달았다.
“그렇다면 난 오늘도 흐미르를 그려야겠네! 난 신경 쓰지 말고 할 일 해.”
“……그건, 하.”
그녀는 업무를 방해하지 않겠다는 듯 조용히 있었다. 그 때문에 첫날엔 그녀가 있는 줄도 모르게 제 일을 했다. 둘째 날이 되어서야 흐미르는 그녀가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조금 궁금해졌다. 셋째 날, 그녀는 흐미르에게 선물이랍시고 한 아름의 종이를 안겨 주었다.
그것은 온갖 자세로, 온갖 표정으로 앉아 있는 흐미르의 그림이었다. 때론 배경까지, 때론 얼굴만, 어느 것은 신체 일부분만 그려진 것도 있었다. 펜 하나로 그린 것이라 언뜻 보기엔 낙서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은 그림이었다. 어느 것은 무척이나 세밀하게 느껴질 정도로 공을 들인 그림.
누군가 자신을 그렇게까지 관찰하고 그린다는 게, 흐미르는 아주 부담스러웠다. 이곳의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트리폴인들은 주목을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자들이다. 각자 자신이 맡은 소임을 묵묵히 해 나갈 뿐, 그 이상의 독보적인 성과를 내거나 찬사를 받는 일은 없었다.
눈앞의 카놀라가 유독 눈에 띄는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는 스스로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걸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튀는 행동이나 말투를 숨기지 않는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되어도, 오히려 환하게 웃으며 되레 인사를 건네는 여자였다. 그러니 이런 짓도 스스럼없이 하는 거겠지.
게다가 더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걱정 마. 진짜 조용히 있을게. 오늘은 배경을 살려서 그릴 예정이니까, 거리도 제법 떨어져 있을 거야. 흐미르는 몸의 균형이 잘 잡혀 있는 데다 이상적인 비율이라서, 전신을 그리는 쪽이 더 멋지거든!”
카놀라의 말이 이어질수록 흐미르의 고개는 더욱 수그러졌다. 몸의 균형이니 비율이니, 그는 진심으로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알게 뭔가. 자신의 비율이 좋다는 게 시중드는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나! 듣기만 해도 낯부끄러운 소리를 카놀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했다.
“시중인의 훌륭한 자태 또한 주인의 자랑이잖아? 디라즈께선 보는 눈이 좋으신 거 같아. 아니, 나를 며느릿감으로 고르신 시점에서 이미 그건 증명됐구나!”
저런 소리 말이다. 차라리 조롱이라고 믿고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게다가 자기 자랑마저 어찌 저렇게 안색 하나 안 바뀌고 늘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안 궁금합니다.”
“혼잣말이었으니까 신경 쓰지 마!”
혼잣말이면 안 들리게 해야 할 것 아닌가!
저도 모르게 울컥할 뻔한 속내를 겨우 다스린 흐미르가 얼른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오늘마저 저 왕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어서는 안 된다.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부터는 도통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일을 끝내지 못하면 큰일이었다.
흐미르는 카놀라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업무로 관심을 돌렸다. 카놀라는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펜을 긋는 소리나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먼 거리였다.
그는 일부러 그녀가 앉은 곳을 등졌다. 얼굴을 보이지 않겠다는 의도였지만 카놀라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흐미르는 귓가에 들리지도 않는 펜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먼저 백기를 든 쪽은 흐미르였다. 채 반절도 끝내지 못한 업무를 덮어 두고, 그는 카놀라에게로 몸을 돌렸다. 눈대중으로 봐도 종이는 이미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왕녀의 그림이 늘어날수록 부끄러워지는 건 자신이니, 이 이상의 작업은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행여 저렇게 무한 증식하는 그림이 하나라도 흐반의 손에 들어갔다간, 흐미르는 형의 비웃음과 조롱을 한평생 듣고 살아야 할 것이다.
빠른 걸음으로 카놀라에게 다가간 그가 결연한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차라리 원하는 걸 말씀하십시오.”
막 머리카락을 그리고 있던 펜촉이 우뚝 멈췄다. 제 앞으로 다가온 흐미르를 의아한 눈으로 보던 카놀라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원하는 거? 그림 그리는 거?”
“그런 거 말고 진짜 원하는 거 말입니다. 신녀가 시험을 선포했다 들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이러시는 거 아닙니까?”
왕녀의 시중인들이 수도 전역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흐미르에게까지 닿았다. 왕녀는 겨울 산맥에 올라가기 위해 준비하는 중이었다. 그러니 지금의 방문 또한 그와 연관된 의도가 있을 것이다.
지금이야 흐미르 옆에 붙어 있다지만, 처음의 방문을 생각해 보면 왕녀의 목적은 디라즈에게 있었다. 디라즈가 겨울 산맥 꼭대기를 올라가 봤다는 걸 들은 까닭이겠지.
확신 어린 흐미르의 말에 카놀라는 멀뚱멀뚱하게 그를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흐미르가 대신 산에 올라가 줄 수 없잖아?”
흐미르는 무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의 말이 딱히 틀린 건 아니니까. 그는 헛기침하며 애써 다시 침착함을 되찾았다.
“궁금한 게 있으실 텐데요. 겨울 산맥에 대한 정보라든가.”
“아니? 딱히?”
대답은 단칼에 나왔다. 흐미르는 말을 잃고 잠시 침묵했다. 카놀라는 그리다 만 머리카락을 마저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펜을 움직였다. 점점 형태를 찾아가는 그녀의 그림이 흐미르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의 뒤통수가 그려지고 있다는 걸 확인한 흐미르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저는 궁금한 게 있습니다!”
움직이던 펜이 또 멈추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제 그림과 흐미르를 번갈아 보던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쳇.”
불만스러워하면서도 곱게 종이를 덮는 걸 보니, 대답해 줄 의향은 있는 것 같았다. 일단 그림 그리는 걸 멈추게 하긴 했는데, 딱히 질문을 생각해 놓지 않았던 흐미르는 다시 다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궁금한 것, 궁금한 것, 궁금한……!
“왜 하필 그림입니까?”
흐미르의 시선이 덮인 종이와 펜에 꽂혔다. 그의 시선을 따라서 고개를 돌린 카놀라가 미간을 좁혔다. 그림?
“그게 무슨 질문이야?”
“전혀 안 어울리잖습니까.”
아.
카놀라는 그가 하려는 질문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가 하는 질문은 이미 본국에서도 몇 번이나 들었다. 이곳에서는 흐미르가 처음 묻지만, 아마 다른 이들도 내심 의아하게 여기고 있을 것이다.
카놀라는 입술을 내밀며 불퉁한 표정을 지었다.
“취미 생활에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가 어디 있어? 내가 즐거우면 하는 거지.”
그것도 맞는 말이다. 생각 없이 대꾸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맞는 말만 하는 바람에 흐미르는 자꾸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이대로 침묵하면 카놀라는 다시 펜을 쥘 것이다. 흐미르는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다가 겨우 질문을 쥐어 짜냈다.
“그림은 배우셨습니까?”
일단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해 막 내뱉긴 했지만, 뱉고 나니 좀 궁금해졌다. 카놀라의 그림은 그가 아는 그림과 약간 달랐다. 화구를 이용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채색을 하지 않아서일까? 밑그림도 없이 곧장 그리는 것이라 선은 지저분하고, 완성작이라는 느낌을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분명 무얼 그린 것인지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트리폴에서는 예술 문화가 발달하지 않아서 그림 자체가 낯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그림은 책에서도 본 적이 없다. 외국에선 이런 게 유행인가?
흐미르의 물음에 카놀라는 종이를 힐끔 보았다.
“배운 적 없어. 이건…… 그냥 그리는 거지. 화구는 쓸 줄도 몰라. 언제나 펜 하나로 그렸거든.”
“원하면 정식으로 배울 수 있으셨을 것 같은데요?”
흐미르의 말대로다. 카놀라는 왕녀였고, 그녀가 가진 영향력과 별개로 배우길 바라면 정식 교사가 배정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놀라는 한 번도 본궁에 그와 관련된 요청을 한 적이 없었다. 가장 많이 한 요청이라면 아무래도, 펜과 종이를 살 돈이나 더 달라는 내용이었지.
“그랬겠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어. 펜으로 족하지, 뭐. 우리나라에선 뭐든 너무 거창해지면 피곤해.”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억지로 시작한 질문이었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궁금증이 생겼다. 트리폴인들은 극소수를 제외하곤 거의 다 트리폴 내에서 평생을 보낸다. 흐미르 역시 한 번도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트리폴의 풍경이나 문화가 그에겐 전부였다.
카놀라의 모국인 ‘샤를만’ 역시 흐미르에겐 지도에서나 보던 글자였다. 카놀라는 트리폴에선 본 적이 없는 행동과 성격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녀의 나라 또한 이곳과 완전히 다를 게 분명하다.
카놀라는 흐미르가 진심으로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는 걸 깨달았다. 빙긋 웃으며 흐미르를 보던 카놀라가 아예 종이와 펜을 정돈해서 한쪽으로 치웠다. 오늘은 그림 그리기를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제 앞에 놓인 빈 의자를 가리켰다. 흐미르가 엉거주춤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쾌활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그러니까 샤를만에서는 모두가 특별하고 빛나는 것을 좋아해. 아주 강하거나, 아주 똑똑하거나, 아주 아름답거나, 뭐 그런 것들 말이야. 그건 이곳에서 후사를 대하는 것과는…… 의미가 조금 달라. 특히 왕족은 말이지, 누가 백성들에게 더 강렬한 인상을 주느냐에 따라 지지도가 확확 바뀐다고.”
카놀라가 검지를 오른쪽 왼쪽으로 휙휙 움직이며 씩 웃었다. 그녀의 말에 흐미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어조로 말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왕녀님은 그곳에서 상당히 유리하셨을 것 같습니다만.”
카놀라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을 빼고 말하자면, 흐미르는 그녀가 사람들의 시선을 손쉽게 사로잡는 여성이라고 확신했다. 샤를만이 정말 특별하고 빛나는 것을 좋아한다면 카놀라는 얼마든지 그 기준에 속할 여성이었다. 의미가 어떻든 그녀가 특별하고 빛나는 사람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니까.
흐미르의 말에 카놀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해맑고 티 없는 모습만 보이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눈을 가늘게 접으며 잠시 고민하던 카놀라가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곤 가벼운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우리 첫째 오빠는 엄청 똑똑해. 완벽주의자라고 해야 하나? 귀여운 둘째 오빠의 싹수를 알아보고 일찌감치 암살해 버렸을 정도로 칼 같은 성격이기도 하고.”
흐미르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카놀라는 변함없이 밝게 말을 이었다.
“둘째 언니는 엄청 강해. 완벽한 전쟁 영웅이지. 직접 출전한 전투에선 한 번도 패한 적이 없거든. 게다가 종전 협정을 하면서 화친을 명분으로 셋째 언니를 적국에 팔아넘길 정도로 가차 없기도 하고.”
전혀 가벼운 내용이 아니었다. 그런데 저렇게 발랄하게 이야기하니 전혀 심각하게 들리지 않았다. 흐미르는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셋째 오빠는 엄청 교활하지. 잘생긴 얼굴과 뛰어난 금전 감각으로 나라에서 힘깨나 쓴다는 여자들을 엄청 꾀어내고 다니거든. 동복형제이긴 하지만 정말 나쁜 남자라니까? 더 웃긴 건, 그 와중에 일편단심으로 짝사랑까지 하는 중이라는 거야! 웃기지?”
전혀 웃기지 않다. 흐미르는 지금 이 말이 웃으라고 한 소리인가 고민했다. 자신이 너무 진지해서 웃지 않는 건가? 카놀라는 저렇게 환하게 웃고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가 웃긴지 알 수 없었다.
그런 흐미르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가 소리 내어 웃으며 몸을 등받이에 기댔다. 숨을 크게 들이켰다가 내쉬며, 그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도 함께 뱉었다. 말로 내뱉으니 형제들의 얼굴이 오랜만에 하나하나 뇌리에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아바마마는 세 명의 아들과 네 명의 딸을 두셨지만, 그중 한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은 성인식이 될 때까지 버티지 못했어. 내가 자란 곳은 그런 곳이야. 형제들이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고,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끝내 없애 버리는 곳.”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내저은 카놀라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승마에 취미를 두었다면, 언니는 나를 낙마로 위장해 죽이려 했을 거야. 공부를 열심히 했으면 첫째 오빠가 내 선생들을 관리하려 했겠지. 춤? 행여 그것에 재미를 붙였으면, 사교계에서 인맥을 넓히려 한다며 셋째 오빠가 날 견제했을걸! 또 뭐가 있지? 음…….”
“이제 됐습니다.”
듣다 못한 흐미르가 나서서 그녀의 말을 잘랐다. 흐미르의 표정은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저 해맑고 속 편해 보이기만 하던 사람이 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카놀라는 그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어쨌든. 이 낙서 같은 그림을 보고 위협을 느낄 사람은 없어. 얼마든지 즐겨도 되는, 안전한 취미 생활이지. 게다가 아주 재미있다고!”
일부러 평소보다 더 쾌활한 어조로 말했지만, 흐미르의 심각한 표정은 도통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카놀라는 낮게 혀를 차며 난처하다는 듯 웃었다. 제 나라에 대해 궁금해하는 게 기뻐서 모처럼 진지하게 대답해 주었는데, 솔직함이 좀 과했던 모양이다. 손끝으로 제 미간을 꾹꾹 누르며 고민하던 카놀라가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흐미르는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일 안 해?”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흐미르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그의 눈이 순간 옆에 정리된 종이로 향했다. 그 반응에 카놀라가 슬그머니 종이쪽으로 손을 뻗었다. 흐미르가 처음과 같은 다급한 목소리로 꾸역꾸역 질문했다.
“아직도 궁금한 게 없으십니까?”
카놀라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헛기침하며 겨우 제 표정을 정리한 카놀라가 심드렁한 어조로 마지못해서 한다는 듯 물었다.
“해돋이 협곡 말이야. 장애가 있는 트리폴인들은 모두 그곳으로 보내는 거지?”
“맞습니다.”
“이 나라에선 다들 자기가 맡은 소임이 있다고 하던데, 그럼 그 사람들은 뭘 하기 위한 사람들이야?”
카놀라의 물음에 흐미르가 대답을 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정작 대답은 다른 곳에서 나왔다.
“적이 나타났을 때 목숨을 던져 방패가 되는 역할.”
걸걸하고 무뚝뚝한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흐미르가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디라즈!”
이렇게 가까이 왔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이상할 정도로 거대한 그림자가 카놀라의 머리 위에 드리웠다.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라그포드를 올려다보았다. 그늘이 져서 그런지, 그라그포드의 얼굴이 유독 험상궂게 보였다.
“그런 것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군.”
그의 중얼거림에 잠시 놀란 채로 굳어 있던 카놀라가 정신을 차렸다.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
“하도 시끄러워서.”
심드렁한 대꾸에 흐미르가 즉각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디라즈.”
“상대하랬더니 노닥거리고 있었군.”
딱히 질책하는 어조는 아니었지만, 흐미르는 잔뜩 긴장해서 얼어붙은 상태였다. 안쓰럽다는 눈으로 흐미르를 보던 카놀라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둘 사이에 끼었다.
“디라즈께선 너무 바쁘시다 해서 흐미르가 며칠째 고생하고 있다니까요? 그래도 오늘은 무척이나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었답니다!”
그 고생을 시키는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다. 애초에 카놀라가 매일 출석 도장을 찍지 않았으면 고생할 이유도 없지 않나.
그라그포드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흐미르의 노고를 읊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대련장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느꼈지만 참 낯짝이 두꺼운 왕녀였다. 어떤 의미에서는 에델의 짝으로도 제법 잘 맞게 생겼다. 이방인의 몸으로 후사비가, 나아가 군주비가 되려면 보통의 뻔뻔함으로는 힘들 테니까.
“물어봐야 할 내용은 해돋이 협곡이 아니라 겨울 산맥에 대한 것 아닌가?”
“하지만 그건 흐미르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니까요. 그 다음으로 궁금한 걸 질문했지요.”
“해돋이 협곡이 궁금한 이유는 뭐지?”
또박또박 대답하던 카놀라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언제나 생각을 하기 전에 말부터 뱉었던 사람이라, 고민하는 꼴이 좀 신기했다. 무슨 이유이기에 답지 않게 고민까지 하는 걸까?
별 뜻 없이 질문했던 그라그포드는 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꼭 들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그가 다시 재촉하려는 찰나, 카놀라가 드디어 생각을 끝내고 말을 했다.
“언제 침략할지 모르는 적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기엔, 그들을 돌보는 데에 들어갈 노력이 너무 클 것 같아서요.”
흐미르가 반사적으로 그라그포드의 안색을 살폈다. 그라그포드는 무표정한 얼굴로 카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음기 없는 그의 모습은 아주 무서워서,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위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카놀라는 오히려 그 얼굴을 보고 더 확신에 찬 목소리를 내었다.
“디라즈께선 모든 구성원의 삶을 책임지기 위해 끊임없이 사냥하고 산맥을 탐사하시죠. 그것만으로 버티기엔, 그곳의 규모가 너무 커 보였어요. 그들이 자체적으로 사냥을 나가는 것도 아니라면, 그들의 생활은 온전히 디라즈의 손에 달린 것이잖아요.”
그라그포드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흐미르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디라즈와 왕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가 끼어들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동안에도 카놀라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이제까지 폐쇄적인 전통문화가 트리폴을 단단하고 견고하게 만들어 주었겠지만, 나라가 커질수록 그것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거예요.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샤를만과의 화친을 시도하신 거죠?”
군주가 일 년 내내 사냥을 하고 산맥을 탐사해서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린다고? 인원이 적었던 과거에야 그것이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트리폴은 하나의 나라로 자리를 잡았고, 앞으로도 점점 그 규모가 커질 것이다. 언제까지고 산맥의 사냥이나 천연자원에만 의지해서 나라의 경제를 이끌 수는 없다. 부족도 아닌 나라를 이끄는데 말이다.
게다가 장애가 있는 사람들을 언제까지고 저리 한곳에 모아 두기만 할 수도 없겠지. 저들이 먹고 입는 모든 물자를 디라즈 혼자 감당해야 한다면, 결국 한계에 부딪힐 테고.
아마 해돋이 협곡은 이 나라가 직면한 문제의 일면에 불과할 것이다. 애초에 이건 단순히 경제에 국한될 문제가 아니었다.
“디라즈께서는 결국 제가 필요하신 거죠?”
카놀라는 확신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에델의 어머니가 이방인이라는 걸 듣는 순간 확신했다. 그라그포드는 이미 오래전부터 외부와의 교류를 염두에 두고, 시도했음을. 군주인 그는 누구보다 이 체제의 한계를 피부로 느낄 것이다. 이렇게 추운 산맥의 한가운데에서 언제까지고 자기들끼리 버텨 낼 수는 없다는 걸 알았으니 혼약서에 서명을 했을 테지. 이방인이 이 나라에 아주 조금의 영향이라도 주려면 적어도 후사비 정도의 위치는 가져야 한다는 걸 알고선.
“제가 필요하시잖아요. 그러니까 도와주시면 안 돼요?”
쉬이 입을 열지 않는 그라그포드에게, 카놀라는 본격적으로 징징대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진 뭔가 똑똑하고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듯했던 그녀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징징대기 시작하자, 흐미르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건 그라그포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제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징징대는 사람은 생전 본 적이 없었다.
“반드시 성공할게요. 그러니까 좀 도와주세요. 네? 게다가 전 에델에게 증명해 주기로 했단 말이에요!”
갑작스러운 징징거림에 굳어 있던 그라그포드가 겨우 입술을 떼었다.
“무엇을?”
그 물음에 카놀라가 눈을 반짝이며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델이 가진 이방인의 피를 신이 진즉 받아들였다는 것이요.”
흐미르의 눈은 이제 더 커질 곳이 없을 정도로 화등잔만 해졌다. 카놀라는 그런 그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그러곤 허리에 양손을 척 올렸다.
“제가 성공하면 에델도 자신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길 거예요. 겸사겸사 제게 반하면 더 좋고요!”
어떻게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저건 이방인이기 때문일까? 모든 이방인은 다 카놀라처럼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나?
흐미르는 머릿속을 꽉 채우는 의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신이 이방인을 받아들인다고? 겨울 산맥은 트리폴을 이방인으로부터 지켜 준 곳이다. 트리폴은 그 보호 속에서, 그 뜻에 순응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곳에 온 지 겨우 한 달밖에 안 된 이방인이 그것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다고 믿는 건가?
가장 큰 문제는 왕녀의 저 장난스럽고 가벼운 말이 꼭 진짜인 것처럼 들린다는 사실이었다.
그라그포드는 의기양양하게 웃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징징거림 때문에 잠시나마 당혹감에 차 있던 그의 얼굴은 다시 평소처럼 무표정하게 돌아와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카놀라를 보던 그가 문득 물음을 던졌다.
“후사의 대련은 이제 안 보는 건가?”
그 물음에 카놀라의 표정이 처음으로 평정심을 잃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창밖의 해를 확인했다. 이미 정오를 한참 지난 상태였다.
어제도 못 가고, 그제도 못 갔다. 디라즈와 흐미르에게 부대끼다 보면 시간을 가늠하지 못하고 정오를 놓치기 일쑤였다. 울상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카놀라가 체념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에델은 강하니까 제 응원이 없어도 다 이기고 올 거예요. 그래도 요 며칠 제가 안 나가는 덕분에 민원은 사라지지 않으셨어요?”
시끄럽고 뻔뻔한 이방인이 없으니 얼마나 쾌적하게 대련을 관람하겠나. 그녀가 섰을 자리에 대신 서서 에델을 코앞에서 봤을 불특정 다수를 떠올리니 절로 부아가 치밀었다. 이제 몸싸움에 슬슬 요령이 생기던 중이었는데!
입술을 삐죽거리던 카놀라가 힐끔 시선을 들었다.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그라그포드는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야 할지.”
신녀가 낸 시험이 온 도시 내로 퍼졌다.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이방인이기에 산맥을 오르라는 시험을 받았는지 궁금해했다. 왕녀가 후사의 대련을 참관한다는 사실이야 진즉 퍼졌던 터라, 사람들은 대련장에서 그녀를 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정작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는 시점에서 카놀라가 발길을 끊어 버린 것이다.
덕분에 그라그포드는 전과는 다른 민원을 받고 있었다. 아니, 민원이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은 이방인 왕녀가 줄행랑이라도 쳤는지, 아니면 올라가기 싫어서 앓아누웠는지 궁금해했다. 그라그포드와 매일 만나는 라딘들은 왕녀가 디라즈를 쫓아다닌다는 소리를 듣고선, 그에 대해 알고 싶어 했다. 차마 그라그포드 앞에서 대놓고 뭔가를 묻는 이는 없었지만, 다들 무슨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의 앞에서 낑낑댔다.
어떤 의미로는 전보다 더 귀찮아진 셈이다.
“제가 민원도 해결해 드렸으니까, 못 이기는 척 이제 도와주세요. 네? 아니면 아직도 제 뇌물이 부족했던 거예요? 집무실에서 일하는 모습 말고 다른 모습을 그려 드릴까요? 승마하는 모습이라든가 대련을…….”
“됐다.”
거절은 단칼에 나왔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고 단호한 그의 거절에 흐미르는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역시 디라즈께서도 그림의 모델이 되셨었구나!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물론 전 이런 연약한 몸으로 겨울 산맥을 올라야 하니 무척 준비할 게 많고 바쁘지만, 예비 시아버님을 위해서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답니다.”
미안하기는커녕, 고마운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라그포드는 처음 제 얼굴 그림을 받아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제 수염이 그렇게나…… 지저분한 줄은 몰랐던 것이다.
“흐미르가 나을 거다.”
“아니요, 전 충분합니다. 진심입니다.”
이번만큼은 흐미르도 물러설 수 없다. 서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거절하는 두 사내의 모습에 카놀라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렇게나 부끄러움이 많아서야 원. 뭘 그리 어렵게 다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둘 다 그려 주면 되는데!
카놀라는 기꺼이 두 사람의 그림을 그려 주겠다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새로운 전사의 등장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그는 디라즈의 다섯 전사 중 한 사람인 게르였다.
“디라즈, 신녀가 방문했습니다. 검은 늑대 무리 문제로…….”
디라즈와 흐미르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이 순간 서로의 마음이 통했음을 확인했다. 그라그포드는 즉각 근엄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당장 들여보내.”
*
언제나 먼저 다가와 주던 티보치나가 오늘은 유독 잠잠했다.
티보치나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던 카놀라는 눈을 데구루루 굴려 그녀의 옆얼굴을 살폈다. 해돋이 협곡에서 보고 난 이후론 처음이니, 꽤 오랜만의 만남이다. 에델과의 만남에서 느꼈던 심상찮은 분위기를 상기한 카놀라가 심각하게 미간을 좁혔다. 혹시 그날 마음이 상했나? 아니, 당연히 마음은 상했겠지. 에델이 워낙 사나운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는 바람에 이렇다 할 대화는 하지도 못하고 돌아서지 않았나.
신전이 이방인을 내쫓는 일에 앞장서는 곳이라고는 해도, 여전히 카놀라는 티보치나와 친하게 지내고 싶었다. 때문에 티보치나의 마음을 풀어 줄 궁리를 하느라 평소처럼 요란하고 쾌활하게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것이 결과적으론 두 사람 사이에 더욱 적막을 만들고 있었다. 카놀라에겐 그 적막이 꼭 티보치나가 내비치는 불편함처럼 느껴졌다. 카놀라는 종이를 끌어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며 난처하게 시선을 내렸다.
어쩌지? 일단 안부 인사를 먼저 내뱉어야겠지? 너무 태연자약하게 안부를 물으면 오히려 황당하게 여기는 거 아니야? 뻔뻔하게 인사말을 건네는 거야 카놀라가 제일 잘하는 일이지만, 그것이 상대방에게 더 상처를 준다면 하고 싶지 않다.
“이젠 제가 싫으세요?”
“응, 나도 잘 지냈…… 어? 뭐라고?”
무슨 대답을 하는 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던 카놀라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일정한 속도로 차분하게 걷던 티보치나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카놀라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평소처럼 덤덤한 표정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마주 보니 또 그렇지만은 않았다. 덩달아 걸음을 멈춘 카놀라가 눈을 깜빡이며 티보치나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저랑 말도 하기 싫으세요?”
“아니, 그건 내가 묻고 싶었던 건데…… 근데 티보치나, 지금 내 눈치 보는 거야?”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으니, 티보치나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명백한 긍정의 표현이었다. 카놀라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았다.
“……이제 절 싫어하시는 것 같아서요.”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람? 카놀라는 대번에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가!”
“하지만 반가워하지 않으셨잖아요.”
곧장 이어진 대꾸에는 약간의 서운함이 묻어났다. 그러니까 지금 서운함을 느끼는 부분이 해돋이 협곡에서의 일이 아니라, 방금 반갑게 인사를 건네지 않은 것이란 소리다. 카놀라는 한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뭐야, 이 귀여움은? 차분하고 다정한 미녀가 이런 모습을 보이니 심장을 두들겨 맞은 기분이 들었다. 온 세상의 귀여움을 자기 혼자 독차지한 게 틀림없어!
“그야, 티보치나가 상처받아서 이제 날 불편해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으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굴면 더 상처받을 거 아니야? 대체 왜 내가 싫어한다는 생각을 했어? 난 지금 엄청 반갑단 말이야!”
와다다 쏟아 내는 말들은 평소와 똑같다 못해, 살짝 들떠 있기까지 했다. 조금 전까지 한마디도 안 하고 있던 건 다 연극이었던 양, 카놀라는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그 격렬한 반응에 티보치나는 서운함도 잊고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가까스로 말문을 열었다.
“해돋이 협곡을 다녀오셨잖아요.”
“그랬지.”
“그곳이 어떤 곳인지도 아셨을 테니, 이제 제게 정이 떨어지셨겠죠.”
티보치나의 단정적인 말에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
“장애의 정도를 판단하고 그들을 처분하는 게 제 일이라는 걸 들으셨잖아요. 그날도 직접 보셨고. 게다가 후사의 어머니 사연도 들으셨을 테니 신전이 얼마나 가혹한 집단인지도 아셨겠죠. 왕녀님이 절 꺼리실 이유는 충분하네요.”
그러고 보니 해돋이 협곡에서 에델과 티보치나가 무슨 대화를 나눴었지. 카놀라가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무슨 대화였더라. 피해가 심각하다거나, 목숨이 어쩌고 했던 것 같은데 귀 기울이지 않은 까닭에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 협곡으로 가게 되는 사람들을 선별하는 게 티보치나라는 소리인 것 같았다. 일전에 며칠간 자리를 비워야 한다고 했던 것도 그와 관련된 일이었고.
게다가 스타티스에 대해서도 뭔가 더 있는 모양이다. 단순히 신전이 그녀를 어떻게든 막고 싶어 했다는 정도만 들었는데, 티보치나의 말은 뭔가 내막이 있는 것처럼 들렸다. 카놀라는 손으로 제 볼을 긁적였다. 무안하겠지만 일단 잘못 알고 있는 건 빨리 정정해 주어야 더 큰 오해로 번지지 않는 법이다.
“……어, 그러니까 그건. 음…… 후사의 어머니에 대해 몇 가지를 듣긴 했는데…… 아마 티보치나가 상상하는 만큼은 아닌 것 같은데? 게다가 티보치나의 일에 대해선 아예 몰랐고.”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스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사람은 티보치나였다. 그녀는 섣부르게 단정한 저의 어리석음에 혀를 깨물며 자책했다. 비디움이나 에델이 이러한 내용을 죄다 알려 주곤 신전을 멀리하라고 신신당부했을 줄 알았는데. 특히 비디움은 스타티스 때 신전의 결정을 가장 크게 반대한 인물 중 하나라 당연히 그에 대한 언질을 줬을 줄 알았다. 에델 역시 카놀라가 지금 저렇게 경계를 하는 거로 보아 뭔가 귀띔했을 거라고 예상했고.
애매하게 표정을 굳힌 티보치나의 옆얼굴을 빤히 본 카놀라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티보치나를 싫어할 일은 없어.”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티보치나가 약간 풀죽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 기출문제도 알려 드리지 않고 갑작스럽게, 말도 안 되는 시험 문제를 내 드렸어요.”
“어, 그건 좀 당혹스러웠지. 하지만 알려 달라고 한 건 나였고, 문제를 내는 건 네 일이니까? 서운해하거나 싫어할 이유는 아냐.”
티보치나는 여전히 시선을 들지 않았다. 그것이 귀여워서 카놀라는 실실 웃음을 지었다. 어쩜, 이렇게나 귀여운데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내가 티보치나를 싫어할 거로 생각했어?”
“……군주와 가까워지셨으니까요.”
왕가와 신전은 미묘한 관계이다. 그러니 그들과 가까워지면 자연히 신전과는 미묘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 특히 카놀라는 에델에게 반했다고 했으니, 더욱 열심히 왕가에 다가가려 했을 것이다. 그들이 카놀라를 밀어낼 수는 없었을 테니, 결국 카놀라를 신전과 멀리 떨어뜨리려 했을 테고.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티보치나가 지금의 결론에 이른 것도 당연했다.
“음, 티리폴인들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나를 이방인으로 보잖아? 나도 그래. 왕가의 사람이든, 신전 사람이든 내겐 모두 트리폴인들이야. 내가 친해지고 싶고, 앞으로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
내내 시선을 돌리고 있던 티보치나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카놀라는 한껏 환하게 웃었다. 티보치나가 보아 온 바로 그 발랄한 얼굴이었다.
“그중에서도 티보치나는 너무 예뻐서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내 첫 번째 친구지! 게다가 날 얼마나 생각해 주는데! 시험을 포기하면 귀하게 대접해 준대서, 나 살짝 흔들렸지 뭐야?”
마치 비밀 이야기를 하듯 속닥거린 카놀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에 티보치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어쩐지 온몸의 긴장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왕녀님은 정말…….”
티보치나는 말을 맺지 못했다. 그녀는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리며 카놀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 복잡한 심경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입 밖에 내는 대신, 평소의 고요하고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처음보다 훨씬 기분이 나아 보였다.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 카놀라가 신난 얼굴로 어깨를 으쓱대었다.
“아, 오늘은 오랜만에 티보치나를 따라다녀야겠다! 디라즈께서 날 너에게 맡기셨으니까, 책임져야 해!”
“오늘만이 아니라, 언제나 책임질 수 있습니다.”
이제야 평소 보아 온 티보치나로 돌아왔다. 카놀라는 키득거리며 빙그르 몸을 돌렸다. 티보치나 역시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내디뎠다. 나란히 속도를 맞추며 카놀라가 아주 태연한 목소리로 능청을 떨었다.
“그렇게 하기엔 내가 지금 치러야 할 시험이 있어서. 누가 냈는지 몹시 어렵고 골치 아프더라고.”
골치 아프다는 사람이 내기엔 너무나 밝은 목소리였다. 티보치나는 반사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군주며 후사며, 카놀라에게 겨울 산맥에 관해서 설명해 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던 걸까? 도대체 그 사람들은 요 며칠 동안 카놀라 옆에 있으면서 안 말리고 뭘 한 건지 모르겠다.
“그 시험, 정말 응할 생각이세요?”
“당연하지. 이걸 내게 낸 사람은 티보치나잖아.”
“성공할 수 없어서 낸 시험이에요. 산맥은 왕녀님이 오르시기엔 너무 위험해요.”
올라가라고 말한 게 본인이면서 말릴 건 뭔가.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티보치나를 흘겨보았다.
“하지만 이젠 못 물러. 온 도시에 소문이 다 났거든. 동네방네 난리도 아냐. 나 완전 인기쟁이라니까?”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카놀라 대신 온 도시를 휘저으며 필요한 사람들을 영입하고 물건을 주문 제작하는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보고 들은 것들을 카놀라에게 전달해 주었는데, 두 사람의 말만 들으면 카놀라는 지금 도시에서 단연 으뜸가는 인기인이었다. 그 인기라는 게 꼭 좋은 의미의 것만은 아니지만 말이다. 다만 카놀라의 입장에선 유령 취급당하는 것보다야 이렇게라도 존재감을 표출하는 게 나았다.
투덜거림인지 자랑인지 모를 카놀라의 말에 티보치나가 입매에 꾹 힘을 주었다.
“그건 좀 싫네요.”
“응?”
“저만 알고 있던 보석을 빼앗기는 기분이라서요.”
조금은 퉁명스럽기까지 한 중얼거림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티보치나를 보았다.
“걱정하지 마. 난 여전히 티보치나가 도와주지 않으면 적응하기 힘드니까!”
그거야말로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듣기 좋으니 웃음이 났다. 티보치나는 자신의 불만스러움을 채 오 분도 제대로 품지 못하고 지웠다. 카놀라의 앞에선 웃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인 것만 같다. 그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말이다.
카놀라는 리듬을 타듯 가벼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통통 튀는 걸음이 티보치나보다 약간 앞서가며, 자연히 티보치나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게 되었다. 찰랑거리는 금발이나 유쾌한 웃음소리, 스스럼없는 행동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티보치나의 입가에 맺혀 있던 미소가 조금씩 옅어졌다. 절대 갈 수 없을 곳을 지목했는데, 카놀라는 기어코 올라가려 한다. 무슨 대비를 하든 위험할 소지는 남아 있을 텐데, 카놀라는 그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다. 그러니 티보치나는 카놀라를 꼭 말리고 싶었다.
“그런데 티보치나. 우리 어디 가는 거야?”
힘차게 앞서 걷던 카놀라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멀뚱멀뚱 자신을 보는 카놀라에게, 티보치나는 반사적으로 웃음을 지어 주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녀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걸 생각하면 반드시 말리고 싶은데, 또 마음 한구석에선 전혀 다른 바람이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제 일터를 보여 드릴까요?”
계속 이곳에 남아 주었으면 하는, 곁에 있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바람.
*
“신전으로.”
그라그포드의 말에 심부름꾼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물러났다. 자신을 지나쳐 나가는 심부름꾼을 힐끗 본 에델이 성큼성큼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대련을 끝내고 곧장 이곳으로 온 것인지, 이마에는 아직 식지 않은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졌느냐?”
“이겼습니다.”
“그럼 어쩐 일이냐?”
무심한 물음에 에델은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보지도 않고 질문을 던지던 그라그포드는 침묵이 길어지자 그제야 시선을 들었다.
“방금 그게 무엇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사냥에 참가할 인원 명단. 그것이 궁금했느냐?”
평소보다 명단이 좀 이르게 나오긴 했지만, 슬슬 명단을 추려야 했다. 곧 있으면 대사냥의 성공을 기원하는 축제가 열릴 예정이기 때문이다. 축제 후엔 바로 사냥을 떠나야 하니 축제 전에 사냥 준비를 끝내야 했다.
물론 에델은 이러한 일정을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축제 준비를 마쳤다고 바로 어제 보고한 게 그였던 것이다. 그라그포드가 신전으로 무언가를 보냈다면 당연히 대사냥에 관련되었으리라는 것도 짐작할 터였다.
“궁금한 게 무엇…….”
말을 잇던 그라그포드는 문득 에델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에델이 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곤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것은 책상 한 귀퉁이에 놓여 있던 종이였다. 책과 서류 뭉치 등에 눌려 있었지만, 일부분이 옆으로 삐져나와서 종이 안에 무엇이 ‘그려져’ 있는지 훤히 보였다. 그라그포드는 종이를 쓱 빼서 뒤로 덮어 버렸다. 에델의 시선이 비로소 그것에서 떨어져 나갔다.
“숙소로 돌아갔습니까?”
“네가 묻는 이가 그 이방인 왕녀를 말하는 게냐?”
에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것으로도 답은 충분했다. 그라그포드는 쥐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라그포드가 에델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왕녀를 보러 온 게냐?”
“며칠째 이곳에 있었다 들었습니다.”
“그래. 네 대련에도 가질 않고 내내 이곳에 있었지. 내가 상대해 주질 않으니 흐미르에게 붙어 있더구나.”
에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묻지도 않은 것들을 주절주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림을 수십 장씩 그려 대다 꽤 친밀해졌는지, 오늘은 시끄럽게 노닥거리더군.”
“지금도 그와 있습니까?”
그라그포드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에델은 감정 표현에 인색한 편이었다. 평소에 겉으로 제 기분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고, 표정도 큰 변화가 없다. 지금 역시 에델은 아주 무덤덤하게 서 있었고, 목소리도 지극히 차분했다. 에델의 눈동자를 뚫어져라 보고 있지 않았으면 그의 상태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그라그포드는 조금 새삼스러운 시선으로 에델을 응시했다.
“아까 내보냈다. 어디로 갔는지는 흐미르가 알 수도 있겠군.”
“흐미르가 왜 그걸…… 알겠습니다.”
그라그포드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에델은 다른 곳에 정신이 팔린 탓인지, 그라그포드의 이 묘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이대로 에델을 보냈다간 나중에 흐미르에게 두고두고 원망을 들을 것이다. 그 꼴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그라그포드는 더는 제 아들을 놀리지 않기로 했다.
“농담이다.”
어디 있는지 모를 흐미르를 무섭게 노려보던 에델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리고 있던 에델이 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네?”
“네 꼴이 우스워 농담했다.”
그렇게 진지한 얼굴로 농담이라는 단어가 가당키는 한가!
에델은 허탈한 숨을 뱉으며 그라그포드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가 지적한 ‘제 꼴’을 인식하곤 퍼뜩 시선을 내렸다.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하는 에델의 모습에 그라그포드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당황해 하는 에델의 얼굴에서 그가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모습을 발견한 덕분이었다. 에델은 평생 모를 테지만, 그의 얼굴은 제 어머니를 아주 꼭 빼닮았다.
“마음에 든 모양이구나.”
“그녀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제가 그녀를 보호해야 합니다.”
“보호란 위험이 닥쳤을 때나 필요할 일이지. 내 눈에는 그 어디에도 그녀를 위협할 만한 것이 없던데.”
그라그포드의 눈에는 닥쳐올 위험도 제 행운으로 바꿔 버릴 여자였다. 왕녀의 오라비가 서신으로 ‘어디에도 없을 특별한 아이’라고 했던 표현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어느 나라에서도 이런 왕녀는 찾아보지 못할 것이다.
그라그포드는 아까 보았던 신녀의 얼굴을 떠올렸다. 만날 때마다 얼음장 같은 모습만 보여 주던 수석 신녀의 얼굴은 카놀라를 발견하자 눈 녹듯 녹아 버렸다. 그녀는 주변의 경악 어린 시선 따위는 가뿐히 무시하며 카놀라에게 다정한 시선을 보내었다. 제사장이 그 모습을 봤다면 기함했을 것이다.
“신전에서 무리한 시험을 냈습니다. 위험을 생각하지 않은 시험입니다.”
“그렇다면 큰일이로군. 그녀는 아까 수석 신녀와 함께 나갔는데.”
긴장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한 그라그포드가 태평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그의 말을 들은 에델의 표정은 눈에 띄게 구겨진 상태였다.
“수석 신녀요?”
“왕녀 말로는 무척 친밀하다기에. 뭐, 별일이야 있겠느냐?”
심드렁한 그라그포드와 달리, 에델은 무척이나 심각해진 상태였다. 몇 번 입술을 벙긋거리던 그가 애써 차분하게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시험을 낸 사람이 수석 신녀입니다. 그녀는 왕녀가 실패하길 누구보다 고대할 사람입니다. 당연히 시험 준비를 방해하고…….”
“그럼 너는 왕녀가 시험에 임하길 바라느냐?”
에델의 말을 자르며, 그라그포드가 무심하게 되물었다.
“방해를 받아 시험을 치르지 않는 게, 산꼭대기에 오르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에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일 년에도 몇 번씩 사냥을 나가는 그가 산맥의 위험성을 모를 리가 없으니까. 시험의 의도가 뭐든, 왕녀를 포기하게 만들려는 신녀의 판단이 차라리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델은 시선을 내렸다. 산맥을 오르지 않는 것이, 혹시 모를 위험에 노출되지 않는 완벽한 방법인 것은 분명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라그포드는 낮게 혀를 찼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확언하던 왕녀의 말이 떠올랐다.
‘제가 성공하면 에델도 자신을 좀 더 소중하게 여길 거예요.’
생각보다 더 정확한 시선이라 놀랐다. 마냥 철없이 반했다고 떠드는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의외로 정확하게 에델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은 도박을 하는 기분으로 그녀를 받아들였던 그라그포드는, 처음으로 그녀가 제법 마음에 든다는 생각을 했다.
“너는 후사다. 나의 유일한 아들이고, 차기 군주가 될 전사다. 그러니 군주 앞에서도 바라는 것을 이야기할 자격이 있다.”
그라그포드의 말에도 에델은 선뜻 입술을 떼지 않았다. 그라그포드의 미간이 자연스럽게 좁혀졌다. 어지간히도 답답한 녀석이었다. 외모만 제 어미를 꼭 빼닮았을 뿐, 속은 전혀 다르다.
“무엇을 바라든, 네가 책임질 수 있는 일이면 된다.”
에델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여태껏 군주에게 무언가를 부탁한 적이 없다. 자신의 능력으로 올라서야 했으니까. 그게 아니고선 모두가 인정하지 않을 테니까. 누구보다 이 자리에, 제 아비에 기댈 수 없는 사람이 에델이었다. 그래서 그는 이런 말들이 낯설고 어색했다.
‘내가 포기하면 신전에선 옳다구나 하고 혼약을 승인하지 않을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없다면 이만 물러가라. 축제와 대사냥을 앞뒀으니 할 일도 많을 텐데.”
냉담하게 대화를 마무리한 그라그포드가 펜을 쥐었다. 문서의 첫머리를 읽으려는 그의 귓가로, 아주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십시오.”
“음?”
그라그포드가 힐끗 눈을 들었다. 메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에델이 그라그포드를 마주 보고 또박또박 말했다.
“겨울 산맥 꼭대기로 올라가는 길을 알려 주십시오.”
*
신녀의 일터라면 당연히 신전일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따라왔는데, 정작 눈앞에 펼쳐진 장소는 신을 모신다기보단…….
“무이! 로진! 싸우면 안 된다고 했지?”
“하지만 수석 신녀님! 로진이 제 옷을 마음대로 입었단 말이에요!”
“넌 계속 안 입고 옷장에 넣어 놨잖아!”
“아끼는 옷이라서 그랬거든? 아직 한 번도 안 입었는데 왜 네가 먼저 입냐고!”
“그러게 누가 안 입고 그렇게 모셔 두래?”
귀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들에 카놀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도 한 목소리 한다고 자부했지만, 여기서는 감히 나설 수도 없을 것 같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우르르 몰려든 아이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티보치나에게 말을 걸어 댔다. 싸우고 고자질하고 자랑하기까지. 온갖 말들에 일일이 대답해 주며 정리를 하느라 티보치나는 카놀라를 돌아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목청 높여 싸우던 로진과 무이가 본격적으로 머리채를 잡을 기세를 보였다. 그 모습에 티보치나가 얼른 둘 사이에 끼어들어 뭐라고 달래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던 카놀라가 웃음을 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허리춤에나 올 것 같은,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애들이 아주 많았다. 곳곳에 꽉꽉 들어찬 장난감이나 각종 용품을 보면, 그보다 어린 애들도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누구세요? 새로운 신녀님이에요?”
두리번거리는 카놀라에게 웬 남자아이 하나가 말을 걸었다. 또랑또랑한 눈동자엔 순수한 호기심만 가득했다. 카놀라가 활짝 웃으며 대답해 주려는데, 옆에서 여자애가 불쑥 끼어들었다.
“멍청아, 딱 보면 모르냐? 이방인이잖아.”
“이씨, 멍청이 아니거든?”
이러다가 여기서도 싸움이 날 것 같다. 티보치나가 저쪽에서 발목이 잡혀 있는 상태이니 여긴 카놀라가 자력으로 정리를 해야 했다. 카놀라는 얼른 손뼉을 치며 두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아옹다옹하던 아이들이 동시에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했음을 확인한 카놀라가 친절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난 신녀가 아니고, 예비 후사비야.”
“후사비요?”
여자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카놀라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남자애를 때릴 듯 주먹을 추어올렸던 여자애는 그 손을 얌전히 내려 팔짱을 꼈다. 그러곤 카놀라 쪽으로 돌아서서 고개를 치켜들었다.
“거짓말! 후사는 아무도 안 만나고 계시거든요?”
“그렇지 않아, 난 후사의 정혼녀…….”
“후사비는 십 년 뒤에 제가 될 거란 말이에요!”
여자애는 도전적인 눈으로 카놀라를 노려보았다. 아까 남자애를 상대할 때보다 전투력이 배는 올라간 것처럼 보였다. 순식간에 여자애의 표적이 된 카놀라는 당혹감을 감추기 위해 잠시 침묵했다. 빠르게 이성을 수습한 그녀는 웃는 얼굴로 재차 말문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 후사께선 나의…….”
“거짓말쟁이! 후사비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아니지만 곧…….”
“거봐! 아니라잖아! 이 사람은 그냥 이방인이야!”
카놀라는 숨을 크게 들이켰다. 많이 쳐줘 봐야 열 살이다. 족히 십 년은 더 산 자신이 관대하고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어야지. 그렇게 되뇌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카놀라는 두 아이에게 인자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여자애와 뭐라고 말씨름을 하고 있던 남자애가 카놀라의 웃음을 보곤 쑥스럽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여자애는 도리어 심술궂은 눈초리로 카놀라를 흘겨보았다.
“혹시 아줌마가 후사를 쫓아다닌다는 그 이방인이에요?”
카놀라의 노력은 무참히 뭉개졌다. 한껏 끌어 올린 입매가 일그러지듯 내려앉았다. 카놀라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변한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자애는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흥! 후사께선 예쁘고 멋진 사람이랑 만나실 거거든요?”
“응, 그러니까 넌 아니야. 누가 봐도 내가 너보다 예쁘고 멋지거든. 그렇지?”
갑작스럽게 질문을 받은 남자애가 화들짝 놀라며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에…….”
여자애가 눈을 치켜떴다. 그에 비교해 카놀라의 얼굴엔 여유로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콧방귀를 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넌 네 또래에게로 눈을 돌려 줄래? 너 임자 있는 사람 건들면 벌 받는단다. 신께 혼나. 게다가 내 남자를 건들면, 나에게도 혼나겠지. 나 화나면 엄청 무서워. 궁금하니?”
웃는 얼굴과는 달리, 음성은 사뭇 차갑고 단호했다. 자신을 똑바로 응시하는 그녀의 시선에 여자애는 자신도 모르게 주춤거렸다. 조금 기가 죽었는지, 불만스러운 표정에도 별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카놀라는 여자애의 반응에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다른 사람을 꾀어내고 싶다면, 비결 정도는 알려 줄게. 이래 봬도 내가 꾀어서 안 넘어온 남자는 없거든.”
“그렇게나 많은 남자를 만나셨나요?”
“그럼! 내가 샤를만에서 얼마나……!”
의기양양하게 말을 잇던 카놀라가 문득 입을 다물었다. 카놀라의 앞에 있던 두 아이는 카놀라의 뒤를 보곤 화색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동시에 카놀라의 뒤쪽으로 달려들었다.
“수석 신녀님!”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티보치나가 카놀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부자연스럽게 고개를 돌린 카놀라가 티보치나를 발견하곤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티보치나가 보기에도 아주 어색하고 딱딱한 웃음이었다. 아이들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은 티보치나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했다.
“아이들이 왕녀님께 실례를 저지른 건 아니지요?”
미안함과 걱정이 가득한 그녀의 말에 카놀라의 얼굴은 도리어 환해졌다. 카놀라는 아이들이 뭐라 할까 싶어 재빨리 손을 내저으며 빠르게 대답했다.
“그런 거 없…….”
“그런데, 방금 하려던 말씀은 무엇인가요? 샤를만에서 얼마나?”
환해졌던 얼굴에 한줄기 그늘이 졌다. 손을 내젓는 자세 그대로 굳어 있던 카놀라가 움직이지 않는 턱에 겨우 힘을 주었다.
“얼……마나 잘 지냈는지 알려 주려고 했지. 그보다 바쁜 일이 다 해결됐으면 이곳을 설명해 줄래? 난 당연히 신전에 오는 줄 알았거든!”
과장되게 몸을 돌리며 주변을 둘러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티보치나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억눌렀다. 그녀는 두 애를 달래 보낸 뒤 허리를 폈다. 완벽하게 말을 돌렸다고 생각해서인지, 카놀라는 평소와 같은 발랄한 모습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어차피 카놀라의 과거 연애사는 들어도 기쁠 일이 전혀 없을 터다. 때문에 티보치나는 기꺼이 그녀의 뜻대로 화제를 돌렸다.
“신전이 맞아요.”
“응?”
“여긴 신전이에요.”
카놀라는 다시 한번 자신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있는 유아용품과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아이들, 숙소나 다를 바 없는 건물까지. 아무리 봐도 그녀가 상상한 신전과는 거리가 멀었다.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카놀라를 웃으며 바라보던 티보치나가 그녀를 방으로 안내했다. 아마도 여러 가지 사무를 보는 방인 듯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어울리지 않는 물건들이 보였다. 인형이라든가, 동화책이라든가, 어린이용 목검 같은.
“워낙 애들 물건이 많아서, 치워도 좀처럼 깨끗해지지 않네요. 앉으세요.”
티보치나는 능숙하게 차를 준비했다. 빠르게 차를 준비한 티보치나가 잔을 탁자에 내려놓으며 카놀라의 맞은편에 앉았다.
“여긴 수도에서 두 번째로 큰 신전이에요. 그리고 보셨다시피, 많은 아이를 보살피고 있는 곳이기도 하고요.”
“저 애들을 모두 신전에서 보살핀다고?”
카놀라가 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쯤 되니 신전이라고 하기보단 보육원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저 애들은 모두 부모가 없는 아이들이거든요. 신전이 아니면, 달리 책임질 수 있는 곳이 없어요.”
“신전이라면 뭐랄까……. 거대한 제단이라든가, 신상이라든가, 수행자라든가 그런 게 가득한 곳 아니야?”
샤를만에도 종교 시설이 있지만, 그건 신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렇다고는 해도 다 같은 종교 시설이니 그 목적은 비슷할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모든 국민이 신에게 의지하는 나라 아닌가. 당연히 거대하고 위엄 있는 신전으로 그들의 권위를 내세우리라 예상했다. 보통 그 위엄은 거대한 건물, 혹은 신상 등으로 표현되기 마련이고. 그런데 이곳은 도대체 뭔가? 입구에서부터 이 방에 이르는 동안, 제단이나 신상은 그림자도 못 봤다.
카놀라의 물음에 티보치나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제단을 둘 공간이라면 방 하나면 충분해요. 기도는 어디서든 할 수 있고요. 큰 제사는 어차피 광장에서 진행되니까, 제단이 신전의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건 도리어 낭비예요. 이미 아이들의 방도 모자라는걸요?”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녀가 평온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야생 동물은 때로 먹을 것을 찾아 서식지보다 더 아래로 내려오는 경우가 있어요. 이런 도시라면 막아 내기 쉽지만, 외딴곳에 사는 이들은 습격을 피하기 어렵죠.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는 전사들도 있어요. 그럼 남겨진 아이들은 신전에서 거두는 거예요. 자라서 한 사람의 그라사가 될 수 있을 아이들은 신전으로, 평생 장애를 안고 살 아이들은 협곡으로 보내죠. 저 바깥의 아이들은 성히 살아남은 아이들이에요. 저 애들이 일정한 나이가 되면, 신녀가 될 아이들을 선별해 대신전으로 보낼 거예요.”
대신전은 트리폴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전이었다. 그곳의 제단은 그나마 카놀라의 기대에 부합할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이곳보다는 제단이 크니까. 아무래도 제사장이 머무는 곳이라 더 종교적인 분위기가 나는 곳이었다. 게다가 신녀로 키워지는 아이들이 살아서 분위기도 훨씬 차분하다. 이곳의 시끌벅적함에 익숙해져 있던 아이들이 대신전에서 적응하느라 고역을 겪는 일도 심심찮게 있다.
“부모를 잃었다는 건, 혈육의 끈을 지우고 오직 신을 위해 봉사할 사명을 타고났다는 증거거든요.”
카놀라는 두 손으로 잔의 표면을 매만졌다. 울퉁불퉁한 표면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느껴졌다. 시선을 내려 잔 속을 가만히 응시하던 카놀라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을 섬기는 게 단순히…… 기도하고 제사를 지내는 게 아니었구나.”
“이 나라를 위한 봉사 또한 신의 뜻이니까요.”
“장애가 있는 아이들까지 신전에서 맡기엔 여력이 부족하니까. 그래서 협곡으로 보내는 거고.”
혼잣말 같은 카놀라의 대꾸에 티보치나가 미소를 지었다.
“그냥 제 일을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내가 잘 모르고 티보치나를 미워할까 봐?”
“그런 것도 있지만, 실은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 왕녀님이 후사비가 되시면 얼마나 무거운 짐들을 떠안으셔야 하는지에 대해.”
티보치나는 들고 있던 잔을 달칵, 내려놓았다. 받침대의 움푹 팬 곳과 잔 아래가 살짝 어긋나면서 듣기 싫은 소음이 났다.
“이 나라는 이토록 열악한 곳이에요. 역대 군주와 군주비는 언제나 고생할 수밖에 없었죠. 모두가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그가 자신들의 생활을 책임져 줄 것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신께서 그들에게 지운 의무 이상은 하지 않아요. 그 믿음이 얼마나 무거운지 왕녀님은 상상하실 수 없을 거예요.”
강한 군주에 대한 믿음. 그것은 외국에서 왕에게 충성한다는 것과는 의미가 달랐다. 군주는 다른 모든 이들의 보호자이자, 가장 선두에서 모두를 책임질 전사다. 제사장이 전한 신의 뜻을 섬기고 다른 모든 구성원 대신 신의 뜻을 행하는 자. 희생을 당연한 의무로 짊어진 전사.
그러니 그의 곁에 설 반려자는 얼마나 강인해야 하나.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머리, 올곧은 마음이 없인 견뎌 낼 수 없는 자리다.
“때때로 그들의 시선은 아귀 같아요.”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던 속내가 불쑥 튀어나왔다. 말을 내뱉은 직후 티보치나가 경솔했던 발언을 자책했으나, 카놀라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찻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티보치나는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제 진심을 알아주고, 이쯤에서 결심을 철회하길 바랐다. 햇살처럼 밝은 미소를 간직할 수 있도록 여기서 모든 걸 그쳐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티보치나가 시선을 내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입이 바싹 말라 왔다. 금세 미지근해진 차를 단숨에 넘겼지만,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있지, 티보치나.”
잔을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눈을 들었다. 카놀라가 언제부터인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여야 할 것 같아.”
티보치나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그녀는 입술을 떼었지만 아무 말도 내뱉을 수 없었다. 말문이 막힌 그녀를 향해, 카놀라가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후사비가 되어야 할 것 같아.”
“왕녀님.”
“에델이 가야 할 길이 그런 길이라면, 내가 곁에서 돕고 싶어.”
티보치나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희게 질려 핏기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후사와의 관계는 그저, 서류로 오간 정략혼이잖아요. 왕녀님께선 이런 의무를 질 필요가 없으세요.”
“오, 이건 정략결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난 에델에게 첫눈에 반했으니까!”
명쾌하게 답한 카놀라가 문득 미간을 좁혔다. 곤란하다는 듯 눈을 굴리던 그녀가 조금 낮아진 목소리로 빠르게 덧붙였다.
“물론…… 순서가 살짝 잘못되긴 했지만.”
카놀라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눈살을 찌푸리며 잠시 고민하던 그녀가 씩 웃으며 티보치나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아. 뭘 걱정하는지도 알겠어. 이곳이 바뀌어야 한다는 거잖아. 아니, 정정할게. 이곳이 바뀌어야 해결될 문제야. 언제까지고 이대로 살 수 없어.”
이젠 한계에 도달했다. 티보치나 역시 저렇게나 지친 눈을 하고 있지 않나. 이미 고여서 썩고 있는 물이다. 새로운 물꼬를 트지 않으면 결국 악취 속에서 메말라 가겠지.
“그리고 이곳이 바뀌려면 새로운 사람이 필요해. 이곳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 아니라 온전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새로운 시각으로 모두를 볼 수 있는 사람.”
“그게 왕녀님이라고 생각하세요?”
카놀라는 잔을 완전히 비웠다. 전혀 다른 문화 속에서 자란, 색다른 발상을 해낼 수 있는 이방인 후사비. 그게 꼭 그녀일 필요는 없다. 아마 군주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필요한 건 이방인이라는 출신이지, 카놀라라는 사람은 아니다. 카놀라가 승인을 받지 못해도 군주는 또 다른 이방인을 들이려 노력하겠지. 다른 이방인 여성을 에델의 곁에 세울 것이다.
카놀라의 입가가 조금 삐뚜름해졌다.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확 치밀었다.
“내가 아닌 누구라도 상관없겠지. 외부의 자극이 필요한 거니까. 하지만 나였으면 좋겠어. 에델 옆에 다른 여자가 서는 꼴은 상상만으로도 불쾌하거든. 게다가 여기 온 지 그리 오래되진 않았지만, 난 이곳이 좋아. 이곳 사람들은 순수하잖아.”
“네?”
티보치나는 이상한 소릴 들었다는 듯 표정을 찌푸렸다. 그 얼굴이 웃겨서, 카놀라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순수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그래.”
싫어하는 방법조차 순수해서 속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좋으면 도통 감추질 못하고, 조금만 정곡에 찔려도 죄다 표를 내기 일쑤다. 샤를만 왕궁에서 가면을 너덧 겹 쓰고 다니는 사람들만 상대했던 카놀라에겐 신선한 자극이었다.
그래서 좋았다. 이곳은 머리를 싸매고 상대방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순수한 마음을 내비치면 결국 그에 대한 답이 돌아오는 곳이다. 누군가를 이용하려는 마음보단 우직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끝난다. 아마 외부와의 교류가 많지 않아서 이런 습성들을 지킬 수 있었던 거겠지.
그러나 카놀라의 말에 전혀 동의하지 못하는 티보치나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는 카놀라의 말에 반박하려는 듯 심각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방에 불쑥 뛰어 들어온 로진 때문이었다.
“수석 신녀님! 제사장님이 오셨어요!”
티보치나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얼굴엔 당혹감이 가득했다. 카놀라도 얼떨결에 따라서 몸을 일으켰다. 티보치나는 카놀라에게 잠시 기다리라고 말을 한 뒤, 옷매무새를 점검했다. 차림을 바르게 한 티보치나가 막 방을 나서려는 찰나, 방문 앞에 있던 로진이 누군가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익숙하다는 듯 방에 들어오려던 제사장이 카놀라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멈춰 섰다.
“오셨습니까.”
티보치나가 조심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나 제사장은 대꾸도 하지 않고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카놀라 역시 아닌 척 제사장을 힐끗 보았다. 인사를 먼저 건네자니, 제사장의 저 경계심 가득한 얼굴과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입술을 꾹 다물고 카놀라를 노려보던 제사장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생각지도 못한 얼굴이군.”
그 목소리는 마치 까끌까끌한 자갈에서 구른 듯 거칠었다. 카놀라는 그 목소리가 생각보다 젊다는 것에 놀라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전 샤를만의 왕녀 카놀라예요.”
“제사장 브리도입니다.”
냉담한 어조에선 제사장이 느끼고 있는 적대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예전에 후사의 다섯 전사를 처음 만났을 때 받았던 적의보다 더 검고 깊은 감정이 느껴졌다.
눈앞의 이 사람이야말로, 이 나라에서 카놀라를 가장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제사장이 내비치는 적대감은 여태까지 카놀라가 받았던 그 어느 것보다 강했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신가요?”
티보치나가 넌지시 말을 건네고서야 제사장은 카놀라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제사장은 종이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종이는 잔뜩 구겨져 있었는데, 쥐기 전에 이미 한 차례 구겼던 흔적이었다.
“방금 군주께 대사냥 참가자 명단을 받았다. 너에게도 소식이 닿았으리라 생각했는데, 보아하니 아직 모르는 모양이구나.”
제사장이 티보치나에게 종이를 건네며 말을 덧붙였다.
“군주께서 지난 일의 교훈을 잊으신 모양이야.”
티보치나는 종이 속 명단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거기서 누군가의 이름을 확인한 티보치나가 표정을 굳혔다. 그 모습을 본 카놀라는 슬금슬금 티보치나의 옆으로 다가갔다. 바짝 다가서서 뒤꿈치를 들고 슬그머니 종이 내용을 엿보기 위해서였다.
막 발에 힘을 주려던 그녀는 얼굴이 따끔따끔한 것을 깨달았다. 제사장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다시 카놀라에게 꽂혀 있었다. 카놀라는 반사적으로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티보치나에게서 한 걸음 떨어졌다. 그러곤 섣부르게 판단했던 자기 생각을 후회했다.
트리폴인들이 다 순수하다고 했던 말은 무척 경솔한 발언이었다. 저 사람은 전혀 순수하지 않다.
“실수가 있으셨을 겁니다.”
티보치나가 침착하게 말을 하며 종이를 접었다. 명단 엿보는 걸 실패한 카놀라가 티보치나의 팔을 손가락으로 콕콕 찔렀다.
“뭔데? 무슨 일인데?”
카놀라는 제사장에게 들리지 않도록 속닥속닥 질문했다. 그러나 그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대답은 제사장의 입에서 나왔다.
“이방인을 대사냥에 참가시켰더군요.”
티보치나가 잔뜩 인상을 찌푸렸다. 입술을 깨물며 침묵하는 티보치나의 옆얼굴을 가만히 보던 카놀라가 제사장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방인?
카놀라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티보치나와 제사장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해맑게 되물었다.
“저요?”
“네. 당신.”
제사장을 멀뚱멀뚱 보던 카놀라는 웃는 낯 그대로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겨울 산맥을 올라갈 수 있게 도와 달라고 징징거렸지 대사냥을 가게 해 달라고 징징댄 적은 없는데?
“군주와 뭘 작당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얕은 수작에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차갑게 말을 맺은 제사장이 몸을 돌렸다. 티보치나는 난처한 얼굴로 기다려 달라고 말한 뒤, 다급하게 제사장을 쫓아 나갔다. 그리고 방에 홀로 남은 카놀라는 여전히 얼떨떨한 표정으로 휑한 방문을 응시했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한참을 그렇게 굳어 있던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썼다.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람?
5. 연애부터 시작할까요?
에델은 관자놀이를 검지로 꾹 눌렀다.
언제나 정확한 일과를 지켜 왔던 그는 어젯밤 평소보다 아주 늦게 잠들었다. 업무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하면서 개인적인 일까지 처리하려면 잠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다. 대사냥을 앞두고 갑자기 무리하면 곤란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그나마 며칠 뒤 열릴 축제 때 쉴 수 있다는 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공식 행사는 광장에서 열릴 신전의 제사뿐이니, 그것만 참석하고 쉬면 어느 정도 몸 상태를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그때까진 바쁘다. 그는 가능하면 최대한 빨리 맡은 업무를 끝내고 자투리 시간에 개인적인 일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바람에 그쳐야 할 것 같다. 눈앞의 상대는 쉽게 돌아갈 기세가 아니었다.
“명단에 문제가 있다면 디라즈께 항의해.”
“제 몇 마디로 군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
목소리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저 음성에선 뾰족한 고드름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게 보였으리라. 우습지도 않은 상상을 하며 에델은 냉소적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할 수 있다?”
사실 할 수 있다. 대사냥에 관련된 권한은 전적으로 디라즈에게 있고, 디라즈에게 어떠한 의견을 건의할 때 가장 받아들여질 만한 사람이 후사니까.
“완성된 명단에 직접 손을 댈 수 있는 사람은 후사니까요.”
에델이 앞을 힐끗 보았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티보치나가 보였다. 앉아 있는 에델의 앞에 서 있는 그녀는, 그렇지 않아도 키가 커서 더욱 높게 보였다. 시선 또한 에델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무척 거만해 보였다.
그래, 원래 이런 여자였다. 그동안 카놀라와 붙어 다니면서 무슨 모습을 꾸며 대었는지 모르겠지만, 티보치나는 본래 이렇게 얼음장같이 차가운 여성이었다.
그리고 에델 또한 그녀 못지않게 단단한, 석상 같은 사내였다. 위에서 무엇이 짓누르든 절대 부서지지 않는 바위.
“내가 왜 그렇게 해야 하지?”
“후사께선 그분이 다치셔도 상관없다는 말씀이신가요?”
티보치나는 마치 에델을 힐난하는 듯했다. 본인은 카놀라에게 산맥을 올라가라고 말한 주제에 말이다. 에델이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티보치나를 응시했다.
“그대는 그녀를 쫓아내려는 줄 알았는데.”
“쫓아내는 게 아니라, 후사비로서의 자격을 판단하려는 거죠. 그분이 위험해지는 것까지 방관할 수는 없습니다.”
에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의자에 몸을 기댄 그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무슨 자격으로?”
다분히 불만스러운 어조라, 티보치나도 덩달아 미간을 좁혔다. 입술을 꾹 다물고 에델을 노려보던 티보치나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분을 걱정하는 데에 자격이 필요합니까?”
카놀라가 워낙 남의 호의를 잘 사는 여성이라 이곳저곳에서 그녀를 걱정해 댄다고 해도 이해할 수는 있다. 당장 디라즈나 흐미르를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재주를 가졌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세상 모두가 카놀라를 걱정한대도 티보치나는 안 된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에델은 티보치나의 태도가 무척 거슬리고 못마땅했다. 때문에 에델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한 어조로 말을 했다.
“필요하지. 내 정혼녀니까.”
“정혼녀를 사지로 데려가려는 분께서 하실 소리는 아닙니다.”
“대사냥에는 나도 참가하니, 그녀는 결국 내 곁에 있을 거다.”
티보치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달싹이는 입술 사이로 냉담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 사지나 다름없잖습니까.”
순간 두 사람 사이에 살얼음판 같은 침묵이 흘렀다. 누구 하나가 발끝만 움직여도 파사삭 깨질 듯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침묵이었다.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 중 먼저 침묵을 깨뜨린 이는 티보치나였다.
“그분을 놓아드리는 게, 그분을 지키는 일입니다.”
후사비가 되기 위해 치러야 할 시험의 위험성, 후사비가 되는 순간 벗지 못할 부담감, 나아가 군주비가 되었을 때 짊어져야 할 그 모든 책임. 그것들이 얼마나 끔찍한 몰골로 카놀라의 발목을 잡을지 쉬이 상상할 수 있었다. 때문에 티보치나는 그녀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제 바람을 기어코 억누를 수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트리폴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다.
티보치나가 턱에 힘을 주며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후사비가 된 카놀라를 보고 싶지 않다.
“그녀의 의지에 의해서만 결정될 일이다.”
“그 의지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습니다.”
에델은 입 안의 여린 살을 씹었다. 볼 안쪽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의 정신을 그나마 일깨워 주었다. 짜증과 불쾌감으로 가득 차던 머릿속에 이성이 돌아왔다. 그는 어서 신녀와의 대화를 끝내고 일을 마쳐야 한다. 어서 일을 마쳐야 그의 개인적인 일도 할 수 있다. 이렇게 소모적이고 불필요한 감정 낭비를 할 시간이 없다.
머릿속으로 오늘 치 일정을 나열한 에델이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그렇다면 난 그녀가 남는 쪽에 영향을 주겠어.”
“기어코 산꼭대기로 보내시겠다는 겁니까?”
신전은 그저 트집을 잡으려는 것이다. 그렇게 되뇌었지만, 이 짜증은 가시지 않았다. 제사장이 신녀의 시험 내용을 듣고 무척이나 기뻐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제사장은 왕녀의 실패를 당연하다는 듯 예견했다. 얼토당토않으면서도 그럴듯한 시험을 만들어 낸 신녀를 무척 칭찬했다고 했다. 그러니 신전에서는 왕녀가 산꼭대기로 가든 가지 않든 상관없을 것이다. 가지 않으면 그대로 끝나는 거고, 설사 올라간다 해도 성공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결국, 지금 신녀가 보이는 저 태도는 신전을 대변한 것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왕녀가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 또한 신녀 개인이 가진 견해다. 제사장과는 전혀 상의되지 않은.
에델은 결국 서류에서 시선을 떼었다. 고개를 든 그가 티보치나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왜 나를 비난하지? 그녀를 위험으로 떠민 건 그대야.”
“그건……!”
“게다가 난 신녀가 이렇게 날 찾아와 ‘이례적으로’ 항의하는 지금의 상황이 불쾌해.”
녹색 눈동자에 냉담한 빛이 감돌았다.
“꼭 내 앞에서, 그녀와 그대의 친분을 과시하는 것처럼 보이거든.”
에델을 내려다보던 티보치나가 입술을 비틀었다.
“그러는 후사께서는 제 앞에서, 그분과의 정략적 관계를 과시하고 계신 듯합니다.”
“서로의 불쾌감을 알았으니 대화를 이어 갈 필요는 없겠군.”
딱 잘라 말한 에델이 나가라는 듯 고갯짓했다. 티보치나는 선뜻 몸을 돌렸다. 꼿꼿하게 돌아서서 나가는 티보치나의 뒷모습을 가만히 응시하던 에델이 느리게 시선을 내렸다. 서류를 보았지만,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눈가를 꾹꾹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엉망진창이다. 무엇도 비집고 들어오지 않았던 그의 일상이 지금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데 정작 그 일상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토록 제 눈앞을 알짱거릴 땐 언제고 지금은 멀리서 소문만 무성하게 들려온다. 들어 보면 가끔 그보다도 바쁜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그림은 또 얼마나 열심히 그려 주고 다니는 건지, 온 트리폴인들의 얼굴을 그려 댈 기세다. 정작 제일 처음 그려 주겠다던 자신에겐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만 남기고 말이다.
“아이누.”
“네.”
방 한구석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누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팔꿈치로 책상을 지지한 상태에서 손에 이마를 기대고 있던 에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도 디라즈께 갔다던가?”
“아니요.”
당연히 디라즈와 흐미르에게 갔으리라 생각했던 에델이 미간을 좁혔다.
설마 신전에 간 건 아니겠지?
“외출하셨습니다. 일전에 의뢰한 옷이 나온 모양입니다.”
그녀가 돔돔에게 옷을 의뢰했다는 소리는 들었다. 처음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용케 장인들을 설득하고 다녔다며 조금 놀라기도 했다. 그게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벌써 옷 나올 시간이 됐나?
에델은 서류를 정리해 한쪽으로 미뤄 두고 몸을 일으켰다. 카놀라가 가죽 공방을 다녀간 후, 그도 공방에 들렀었다. 그때 미리 가죽의 상태와 종류를 골라 따로 빼 두라고 말했으니 아마 그것으로 옷을 만들었을 테지.
에델은 외투를 걸치며 생각했다. 딱히 장인들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그가 고른 가죽을 제대로 사용했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다. 그것은 카놀라의 옷이고, 그렇다는 건 카놀라의 안전과도 직결되었다는 의미니까. 그러니 그녀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자신이 옷을 확인하는 일이야 당연하다. 자신에겐 그녀가 이곳에 있는 동안 그녀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라 에델은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외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후사?”
“왜?”
외투의 허리끈을 당겨 묶느라, 에델은 아이누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그런 그의 귓가로 아이누의 의아한 질문이 들려왔다.
“업무가 벌써 끝나셨습니까?”
아이누의 시선이 책상으로 향했다. 에델도 제 허리끈을 쥔 상태로 자신의 책상을 돌아보았다.
서류가 꽤 많이 쌓여 있었다. 누가 봐도 그의 업무는 시작도 안 한 상태였다. 가만히 서류 더미를 응시하던 에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저건 내일 할 것을 미리 하고 있던 거다.”
“네?”
“그러니까 내일 해도 돼.”
“아, 예.”
못다 묶은 허리끈에 집중하는 에델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누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다섯 전사에게 자신이 본 광경을 말할 생각을 하니 벌써 입이 근질근질했다.
*
입는 순간 확실히 무게감이 달랐다. 움직임도 상당히 둔해져서, 카놀라는 만세를 하기 위해 몇 번이나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팔을 마구 휘젓고, 제자리에서 콩콩 뛰어 보고, 쭈그려 앉아 다리를 쭉쭉 펴 보던 카놀라가 휙 뒤를 돌아보았다.
“어때?”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진지한 눈으로 카놀라의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가 동시에 뚝 멈추었다. 진지한 표정을 한 오스카가 한껏 목소리를 깔고 카놀라를 불렀다.
“왕녀님.”
오스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힘껏 숨을 들이켰다가, 우렁찬 목소리를 내질렀다.
“세~에~상에! 온 눈밭을 굴러다니시겠습니다!”
그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안젤리나도 손뼉을 치며 오스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발 한번 미끄러지면 그대로 산 아래까지 구르시겠어요!”
“어휴, 이 모습을 전신 거울로라도 보셔야 하는데!”
“기왕에 이렇게 된 것, 구르는 연습이라도 미리 해 두셔야 하지 않을까요?”
두 사람은 걱정스러운 눈빛과는 달리 입으론 연신 깔깔거리고 있었다. 흉내 내기도 힘든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을 놀려먹느라 바쁜 둘의 모습에 카놀라가 볼을 부풀렸다. 온몸으로 불만을 표출하며 눈에 힘을 주는 카놀라의 모습에 오스카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이쿠, 왕녀님! 그러고 계시니 딱 눈사람입니다!”
“에이, 이 영감아! 아무리 그래도 왕녀님께 눈사람이 뭐야!”
안젤리나가 요란하게 외치며 오스카의 등을 후려쳤다. 그러곤 카놀라를 휙 돌아보았다.
“근데 사실 좀 눈사람 같긴 합니다.”
더 나쁘다.
카놀라는 불퉁한 얼굴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움직였을 뿐인데 몸에선 열이 난다. 이 옷을 입고 생활했다간 정오가 되기도 전에 땀으로 샤워를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보온성만큼은 확실하게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말대로 좀 과하게 뚱뚱해 보였다. 허리를 조이는 옷이 일상이었던 샤를만에서 누군가 이 꼴을 봤다면 오스카나 안젤리나처럼 박장대소했겠지. 하지만 사실 그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이 옷은 예뻐 보이기 위해 입는 게 아니라, 추위를 이기기 위해 입을 거니까.
카놀라가 신경 쓰는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나 진짜 산 아래까지 구를 거 같아?”
열심히 올라갔는데 발 한번 잘못 디뎌서 산 아래까지 굴러가면 얼마나 억울하겠나. 상상만으로도 기운이 빠졌다. 전혀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봉착한 카놀라가 심각하게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한쪽에 서 있던 돔돔을 휙 돌아보았다.
“그대가 말해 봐. 나 정말 한번 구르면 산 아래까지 갈까? 그 정도야?”
카놀라의 얼굴은 아주 진지했다. 자신이 진지하게 대답해 줘야 한다는 사실에 혼란을 느끼며, 돔돔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미끄러져도 나무나 돌에 걸려서 멈출 수 있으실 겁니다.”
“그래? 어휴, 다행이다.”
카놀라는 눈에 띄게 안도했다. 그러곤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마구 타박해 댔다. 물론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지 않았다. 열띤 공방전을 벌이는 세 사람을 얼떨떨한 눈으로 보던 돔돔이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오스카의 저 이중적인 태도는 뭘까. 돔돔과 만날 땐 그토록 격식을 차리던 사람이 왕녀와 함께 오자 세상에서 제일 유치하고 어린애 같은 영감으로 돌변했다.
돔돔은 자신에게 찾아왔던 영감과 눈앞의 영감이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만 한참을 소모해야 했다. 그 옆에 있는 안젤리나 역시, 풍문에는 무척 깐깐한 노인네라고 했었다. 깐깐? 저기서 오스카와 함께 깔깔대고 있는 저 사람이 깐깐?
하지만 저 이상한 조합의 정점은 당연히 왕녀였다. 이방인 왕녀는 소문보다 더 이상한 사람이었다. 달리 떠오르는 표현도 없다. 그냥 이상하다. 그게 가장 적절한 말이었다.
“이제 그만 갈아입어야겠어. 이거 너무 더워. 아무튼, 딱 내게 필요한 옷인 건 확실해. 돔돔이라고 했지? 역시 디라즈의 옷을 만드는 장인이라 다르구나!”
자신을 향해 해맑게 웃는 왕녀의 모습에 돔돔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변명 같은 대답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왔다.
“전 그냥 재봉사 중 하나일 뿐입니다.”
“하지만 재봉사 중에서도 디라즈의 옷을 만드는 재봉사잖아? 디라즈께선 몇 년째 그대에게만 옷을 맡기셨다고 들었어.”
“그건 제 손이 빨라서…….”
“아냐. 그건 그대의 솜씨가 좋아서지. 디라즈는 모두를 이끄는 군주잖아. 군주의 옷은 아무에게나 맡길 순 없어. 그대의 솜씨는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무척 뛰어난걸?”
돔돔이 슬쩍 시선을 들었다. 카놀라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꼭 진심인 것 같았다. 진심으로 돔돔의 솜씨가 다른 누구보다 뛰어나고, 그래서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바느질 솜씨가 특별해서 뭐 대단할 게 있느냐 싶었지만, 저렇게 진심으로 칭찬하고 있는 대상을 앞에 두니 그 말도 쉽게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내내 보니까, 단순히 옷을 튼튼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 잘 어울리게 만드는 것 같아. 디라즈께선 좀 어둡고 무채색 계열의 옷들이 잘 어울리시더라고. 그대가 만든 옷들은 색도 잘 어울리고, 선도 깔끔해. 가죽의 종류에는 한계가 있을 텐데 그 안에서 조화롭게 만들기는 쉽지 않을 거야. 다양한 종류의 천이나 가죽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옷도 만들겠지. 염색으로라도 좀 다양하게 만들 수 없나? 아니면 장식이라든가…….”
턱을 문지르며 혼잣말처럼 말을 늘어놓던 카놀라는,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는 돔돔의 시선을 깨닫곤 퍼뜩 정신 차렸다. 그녀는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무튼, 덕분에 겨울 산맥을 올라가기 수월할 거야. 고마워.”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옷을 갈아입으러 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눈만 껌뻑이며 카놀라를 보던 돔돔이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곤 큰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저기……!”
돔돔이 작업대 옆쪽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가 펼쳐 든 것은 또 다른 옷이었다.
“이건 저, 가죽이 좀 남아서 말입니다. 곧 축제인데 딱히 옷이 없으실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가죽이 남았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쿠에트가 가져온 가죽은 보기 드물게 질이 좋았고, 양도 많아서 의뢰받은 옷을 만들고도 남을 정도였다. 남은 부분을 다른 가죽들과 함께 모아서 취급하기엔 너무 아까울 정도였고, 워낙 질이 좋다 보니 돔돔도 개인적으로 다른 것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가 들었다. 의뢰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작업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옷을 만든 건 무척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만들긴 했지만, 실은 줄 생각이 없었다. 이 옷은 의뢰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마음에 드는 옷을 만들었다는 만족감이면 충분했다. 이 때문에 만들어 둔 옷을 작업대 옆에 치워 두고 처음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돌연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돔돔은 옷을 건네면서도 평소와 다른 자신의 행동에 당황했다. 저 이방인 왕녀는 마법이라도 부리는 걸까?
“세상에나! 내게 주는 거야?”
“예, 뭐. 만드는 김에 좀…….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손이 빠릅니다.”
어차피 저 옷은 이곳에 둬 봤자 쓸 데도 없다. 질 좋은 옷을 만들어 먼지 쌓이게 두느니, 그냥 누군가 입는 게 나을지도. 돔돔은 애써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대강 둘러댔다. 옷을 받아 든 카놀라는 정말로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한참이나 옷을 보았다. 그러다가 옷을 펼쳐 제 몸에 댔다.
낯선 복식이라 그렇게 대본다고 해도 상상이 되지 않을 텐데. 조금은 멍청한 생각을 하며 서 있는 돔돔의 귓가로 카놀라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고마워! 이거 지금 입어 봐도 되는 거지?”
“물론입니다. 입어 봐야 고칠 부분을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돔돔의 말에 카놀라가 나는 듯한 걸음으로 후다닥 탈의실에 들어갔다.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돔돔은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제대로 인식했다.
정식 재봉사로 일하고부터는 누군가에게 옷을 선물하는 일은 없었다. 애초 의뢰받지 않은 옷을 만드는 일도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드문 사건이 오늘 둘 다 일어났다. 어쩐지 찜찜하기도 하고 간질간질하기도 한 이상한 기분이다.
등받이가 없는 간이 의자에 걸터앉은 돔돔이 정신을 수습하는 사이, 옷을 다 갈아입은 카놀라가 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저기, 입긴 했는데 이게 맞는지 모르겠어.”
카놀라가 슬그머니 바깥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정확한 옷의 형태를 모를 테니, 결국 돔돔이 봐주어야 했다. 다행히 머리가 들어가야 할 곳과 팔다리가 들어가야 할 곳은 잘 구분해서 입은 덕분에 손봐 주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행히 옷의 치수는 맞았기에 옷맵시를 잡아 주니 썩 잘 어울렸다.
“이렇게 입으시는 겁니다.”
“매듭이 은근히 어렵네.”
카놀라가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 말에 안젤리나가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또 한 눈썰미 하잖습니까. 잘 봐 뒀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손이 떨려서 리본은 잘 잡겠어?”
“아니, 이 영감탱이가?”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불꽃 튀는 말씨름이 시작되었다. 카놀라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별 신경도 안 쓰고 제가 입은 옷만 내려다보는 중이었다.
샤를만에서 입던 화려한 비단 드레스는 아니지만, 두꺼운 천이 겹겹으로 풍성한 치마는 확실히 연회 때 입던 옷을 떠올리게 했다. 몸통은 가죽으로 덧대져 있는데도 갑갑하지 않아서 신기했다. 가볍기도 해서, 이 정도 가죽옷이라면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게 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놀라는 제자리에서 몇 번이나 빙글빙글 돌았다. 트리폴에 와서 처음 받는 선물이다. 순수한 호의에 의한 선물. 그것이 카놀라를 무척이나 들뜨게 했다.
“너무 예쁜 옷이라 그냥 받기 미안한데……. 나도 답례로 선물 하나 해 줄까?”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카놀라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눈을 반짝였다. 그녀의 물음에 돔돔이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 문가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그 선물이라는 게 그림입니까?”
생각지도 않은 사람의 목소리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본 카놀라가 그 어느 때보다 밝은 얼굴로 웃었다.
“에델?”
환하게 웃으며 자신을 돌아보는 카놀라의 모습에 에델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는 사이 아옹다옹하느라 정신없던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그에게 엉거주춤 길을 터 주었다.
잠시 멈춰 섰던 에델이 곧 덤덤한 표정으로 두 노인을 지나쳤다. 그는 돔돔의 인사를 받으며 카놀라에게 곧장 다가갔다.
“……이 옷을 입고 겨울 산맥에 올라가실 겁니까?”
“설마요! 이건 돔돔이 준 선물이에요! 잘 어울려요? 여태껏 내가 가져온 옷 위주로 입어서, 사실 트리폴 복장이 내겐 좀 어색하거든요. 그래도 필요했는데 돔돔이 이렇게 짠 하고 만들어 줬지 뭐예요?”
카놀라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에델은 찬찬히 그녀의 옷을 살펴보았다. 한쪽엔 본래 의뢰했던 방한복이 놓여 있었다. 눈으로 보아도 그가 골랐던 가죽들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마 저 옷을 만들고도 가죽이 남았던 모양이다. 지금 입은 축제 복장도 같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했다. 방한복보다 가죽의 사용량은 훨씬 적었겠지만 말이다.
에델이 돔돔을 힐끗 돌아보았다. 카놀라가 축제 복장을 의뢰하진 않았을 테니 이건 돔돔이 개인적으로 판단해서 만들었을 테지. 만드는 것이야 그의 마음이라고 해도, 이렇게 선물을 하는 건 돔돔답지 않았다.
“게다가 이 리본 봐요. 정말 귀엽지 않아요? 난 이렇게 묶는 건 처음 봤어요.”
카놀라가 허리춤을 가리키며 자랑하듯 말했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확인한 에델이 차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돔돔이 묶어 줬나 보군요.”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야 이 매듭법은 트리폴 전통 의상을 입을 때 사용하는 것이니까.
에델은 대답 대신 리본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신이 난 카놀라가 돔돔에 대해 뭐라고 더 칭찬을 이어 가는 소리가 들렸다. 후사 앞에서 줄줄 이어지는 칭찬에 쑥스러움을 느꼈는지, 돔돔은 연신 헛기침을 하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에델은 칭찬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카놀라의 말이 모두 끝나고서야,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더 잘 합니다.”
“응?”
카놀라가 멀뚱멀뚱한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그녀는 곧 그의 시선이 내내 리본에 머물러 있었음을 깨달았다. 멍한 눈으로 에델을 바라보던 카놀라가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입매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럼 다음엔 에델이 묶어 줄래요? 내겐 너무 어려운 매듭이었거든요.”
“……그러죠.”
거울이 필요하다. 분명 지금 자신을 코피를 흘리고 있을 게 분명하다. 카놀라는 아랫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하지만 한껏 치솟는 광대를 막을 길이 없었다.
드디어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구나! 그렇게나 무뚝뚝하고 철벽처럼 굴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마음을 열다니! 감격스러움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거리로 뛰쳐나가 온 세상에 소리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세상 사람들! 에델이 내 허리끈을 묶어 주겠대요!
“옷만 찾으면 일정은 끝나십니까?”
감격에 젖어 있던 카놀라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뇨, 신발이랑 몇 가지 더 찾아야 해요.”
의뢰한 시점이 비슷해서인지, 다들 비슷한 날에 물건이 완성되었다는 연락을 해 왔다. 덕분에 오늘은 온종일 도시를 돌아다니며 물건을 받으러 다녀야 했다. 물론 오스카나 안젤리나를 보내 받아 오는 방법도 있지만, 카놀라는 제 물건을 만든 장인들을 한 명 한 명 만나 보고 싶었다.
그녀의 말에 잠시 고민하는 기색을 보이던 에델이 선뜻 제안했다.
“제가 동행해도 되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람? 휘둥그레진 눈으로 에델을 보던 카놀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좋죠! 근데 에델…… 지금 일할 시간 아니에요?”
에델의 일과에 대해선 진즉 숙지해 둔 카놀라다. 지금이 한창 책상에 앉아 업무를 할 시간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몇 번 근처를 알짱거리다가, 책상에 산처럼 쌓여 있는 종이 더미를 보고 질겁해서 돌아 나온 적도 있다. 멀리서 보아도 많은 종이 더미를 보며, 카놀라는 에델의 업무시간은 절대 방해하면 안 되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그런데 이 시간에 밖에 나와 있다니?
카놀라의 의아한 물음에 에델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살짝 미간을 좁히곤 무언가 우물거렸다. 그러다가 무뚝뚝하게 말을 했다.
“……내일 해도 됩니다.”
뭔가 이상한데. 미간을 찌푸리며 에델의 표정을 관찰하던 카놀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게 뭐 볼일 있어요? 디라즈께서 심부름시킨 거 맞죠?”
디라즈는 제 아들에게 과중한 업무를 맡기는 경향이 있으니 이번에도 틀림없이 그런 경우일 테지. 공사 구분이 확실한 에델이 처리해야 할 업무를 두고 그냥 나왔을 리가 없다. 그간의 모습들을 통해 에델이 얼마나 맡은 일에 충실한 남자인지를 파악한 카놀라는 오늘의 외출이 그의 의지가 아니라는 추측에 확신을 더했다.
심부름이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되지, 왜 바쁜 아들을 부려 먹는담? 물론 덕분에 카놀라는 무척 좋았다. 얼굴을 본 것도 모자라 허리끈을 매 주겠다는 약속까지 받아 내질 않았나! 그야말로 눈부신 성과이지만 그것과 별개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고 있는 에델의 건강이 걱정되는 것도 사실이다.
카놀라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디라즈를 향해 눈을 흘겼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에델이 조금은 당혹스러운 어조로 변명했다.
“드릴 게 있는 건 맞지만 그것 때문에 나온 건 아닙니다. 업무는 하나도 손대지 못하고.”
“응?”
“손대지 않고 나오는 길입니다. 내일 해도 되니까요. 지금은 찾으시는 물품의 상태를 봐 드릴까 싶어 나온 겁니다.”
당혹스럽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무뚝뚝해졌다.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카놀라가 방금 들었던 말을 천천히 곱씹으며 일단 감사 인사를 건넸다.
“어머, 그렇구나. 고마워요. 근데 나 때문에 괜히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리 아닙니다. 그 정도는 내일 한꺼번에 처리해도 충분합니다.”
본인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데 더 만류하는 것도 실례가 될 테지. 얼떨떨한 마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카놀라는 더 토를 달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녀는 아주 기쁘게 웃으며 지금의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지금 같이 쇼핑 데이트하러 가자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다.
어쩐지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광경을 본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카놀라의 늙은 두 시중인들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품의 상태를 봐 주러 왔다는 에델의 설명은 카놀라의 머릿속에서 진즉 사라졌을 것이다. 두 시중인들은 카놀라를 말릴 기운도 없어서, 말없이 카놀라에게 갈아입을 옷을 안겨 주었다. 카놀라는 시중인들이 건네는 옷을 주섬주섬 끌어안고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데이트 신청 받아 줄게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고요.
*
“쿠에트의 안목은 정말 대단한 것 같지 않아요? 어쩜 이렇게 딱 맞는 가죽을 골라 줬을까요?”
그건 쿠에트의 안목이 아니라 자신의 안목이다.
“게다가 다들 이렇게 선물까지 덤으로 주다니! 여기 사람들은 정말 정이 넘치는 것 같아요! 처음에 보여 줬던 경계심은 다 부끄러움 때문이었나 봐요!”
아니, 정이 많아서가 아니라 카놀라에게 다들 예외적인 행동을 하는 것이다.
하나하나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에델은 훌륭하게 참아 냈다. 연신 조잘대는 카놀라의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기 때문이다. 장인들의 호의적인 모습에 에델조차 놀랐으니, 카놀라야 오죽 더할까 싶긴 하다. 의뢰한 물건들을 잘 만들어 준 것만으로도 다행인데 선물까지 얹어 주다니. 에델은 물품들을 확인하러 나온 자신의 행동이 너무 극성스러운 선택이었나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내심 카놀라가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카놀라의 안전을 지키는 게 제 일이라고 했으나, 카놀라는 그의 보호가 전혀 필요 없는 사람이었다.
그것이 처음엔 서운했지만 이제 와선 오히려 자랑스럽게 보였다. 카놀라는 그냥 이방인이 아니라, 그의 정혼녀인 이방인이다. 후사비를 지나 군주비에 오를 여성이니 그녀의 강인함은 곧 에델의 자랑이기도 했다. 트리폴의 누구를 데려와도 카놀라만큼 잘 해내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싶은 모습들이 너무 많아요. 당분간 나와서 지낼까 봐.”
“그건 안 됩니다.”
에델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곧장 말했다. 어찌나 빠른 대답이었는지, 제 기분에 취해 있던 카놀라도 순간 놀라서 에델을 돌아볼 정도였다.
“네?”
“위험합니다.”
아주 단호한 어조였다. 놀란 눈으로 에델을 보던 카놀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없이 진지한 얼굴을 한 에델은 카놀라가 왜 웃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알겠어요, 농담이에요! 아직도 나 못마땅해하는 사람 많다는 거 알아요. 시험을 통과하고서도 모두를 설득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도 알고요. 난 에델 옆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으니까, 알아서 몸 사릴 거예요.”
카놀라가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곤 가벼운 걸음으로 조금 앞서 걸었다. 장난스러움이 가득한 그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던 에델이 넌지시 물었다.
“몸을 사린다면서 겨울 산맥에 올라갈 작정을 하십니까?”
“그건 해야 하는 일이니까. 에델도 날 말리려는 거예요?”
반쯤 고개를 돌려 에델을 본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이미 티보치나에게 듣고 또 들은 말이라, 아무리 에델이라도 같은 소릴 하면 듣기 싫을 것 같았다. 카놀라의 마음을 알았는지 에델은 다행히도 티보치나와는 다른 반응을 보여 주었다.
“말리지 않는다고 하면, 서운해하실 겁니까?”
“아뇨. 기뻐하겠죠. 드디어 이 남자가 트리폴에서의 내 위치를 고민해 주는구나, 하고.”
에델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놀라는 다시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그녀의 입에서 묘한 흥얼거림이 섞인 푸념이 줄줄 이어졌다.
“내 위치가 얼마나 이상한지 알아요? 신전에서 저리 반대를 하는 바람에, 요만한 꼬마도 내가 정혼녀라는 걸 안 믿는다고요. 글쎄 걔는 후사 옆에 아무도 없는 줄 알더라니까요? 내가 이렇게 버젓이 눈을 뜨고 있는데!”
다시 생각하니 조금 울컥했다. 카놀라는 우뚝 멈춰 서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내가 시험 통과하기만 해 봐. 대문짝만하게 써서 곳곳에 걸어 둘 거예요. 내가 후사의 정혼녀라고!”
세 살 먹은 어린애도 절대 모를 수 없도록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녀야지! 투지에 불타올라 이글거리는 눈으로 먼 산을 노려보는 카놀라의 귓가로 에델의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무리라고 생각되면 언제든 포기하십시오.”
이글이글 타오르던 불꽃이 순식간에 푸시식 꺼져 버렸다. 티보치나와 조금 다르지만, 결과가 다르지 않은 에델의 말에 카놀라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카놀라의 눈빛에도 에델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말리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 있는 자리는 아닙니다.”
무뚝뚝한 그의 음성엔 분명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카놀라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든가, 어차피 안 될 일이라는 식이었던 과거에 비교하면 분명 크나큰 발전이다. 하지만 결론은 바뀌지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 서 에델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카놀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당신은 분명 나에게 마음을 열었는데,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어요. 왜일까?”
카놀라는 에델이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처음보다 더 마음의 문을 열었다. 업무 시간에 이렇게 나와서 곁을 지켜 주는 게 증거였다. 카놀라가 노력한 만큼, 에델은 느리게나마 그녀에게 마음을 열고 좀 더 따뜻하게 변해 갔다.
그런데도 보이지 않는 벽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카놀라의 안전을 지켜 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건 꼭, 카놀라가 본국으로 돌아가는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서로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오고 간 문서가, 당신의 태도를 이렇게 딱딱하게 만드는 건가요?”
어차피 정략결혼이니까. 목숨을 걸고 의무를 짊어질 필요가 없으니까.
카놀라는 티보치나가 안타깝다는 듯 건네던 말들이 떠올렸다. 자신은 이방인이다. 이들과는 달리, 정 힘들면 모든 걸 놓고 도망칠 구석이 있다는 의미다. 정략결혼은 결국 서로의 이익 관계를 명시한 문서로 결정되는 것이니까. 그것이 이들에게 카놀라를 온전히 붙잡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에델을 보며 카놀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백날 아니라고 한들, 정략적으로 시작한 관계를 이제 와 무를 수는 없다. 하지만 시작이 정략적이었다고, 끝조차 정략적이라는 법은 없다. 서로의 감정이 정략적이지 않으면 될 일 아닌가.
“그럼 이건 어때요? 어차피 당장 결혼은 못 하니까.”
두 번째 데이트 정도면 할 법한 이야기지. 카놀라는 그렇게 생각하며 씩 웃었다.
“우리 연애부터 시작할까요?”
*
“그래, 후사가 싫다 했단 말이지.”
처음 명단을 확인하고 노발대발했던 브리도는 이제 아주 침착해진 상태였다. 그것이 꼭 폭풍전야를 방불케 하는 것 같았다.
티보치나는 힐끗 시선을 들었다. 브리도는 동그란 펜던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제사장에게 대대로 내려져 오는 징표였다. 역대 제사장들은 저것을 목걸이나 팔찌 등으로 만들어서 지녔다고 했다. 하지만 브리도는 언제나 메달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뺏길까 봐 걱정되기라도 하는 것처럼.
“알겠다. 부자가 작정하고 일을 저질렀으니 너라고 별수 있겠느냐.”
브리도가 말끝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런 제사장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시선을 내렸다. 조용히 심호흡했지만 불안감은 가시지 않았다. 마른침을 삼킨 그녀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번 대사냥은 제가 가겠습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브리도가 힐끗 티보치나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티보치나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방인이 동행한다니 제가 따라가서 곁에서 지켜보겠습니다.”
대사냥을 따라가는 건 제사장의 일이었지만, 수석 신녀가 따라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차피 사냥 동안 의식을 주관하기 위한 동행이다. 수석 신녀는 사실상 제사장의 후계자이기 때문에 의식을 주관할 자격이 충분했다. 명단을 짜는 건 그라그포드지만, 제사장 대신 수석 신녀가 가겠다고 하면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어쩌면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디라즈는 제사장을 무척 껄끄러워하니까.
“아니, 그럴 것 없다.”
브리도의 목소리는 냉담했다. 티보치나는 다시 한번 제안하려 했으나, 브리도가 먼저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나저나 축제가 코앞인데 의식 준비는 모두 끝났느냐? 검은 잘 벼려 두었고?”
대사냥 직전에 축제를 여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사냥이 성공하길 기원하고, 전사들의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한 것이다. 당연히 신에게 대사냥의 성공을 비는 의식도 광장에서 진행되었다. 몇 안 되는 큰 행사 중 하나라 티보치나는 눈치가 보여서라도 카놀라에게 실없이 놀러 갈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카놀라도 군주를 따라다니느라 바빴다고 들었다.
그래도 카놀라가 주문한 물품을 찾으러 갈 땐 동행하고 싶었었다. 명단 문제로 제사장이 발칵 뒤집히지 않았다면 예정대로 일을 마무리하고 진즉 카놀라와 시내로 나들이를 갔을 것이다. 명단 때문에 티보치나는 달갑지 않은 후사의 얼굴이나 보고 와야 했다.
생각할수록 짜증이 치밀어서, 티보치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기껏 궁까지 가서 보고 온 게 후사의 얼굴이라니.
“오늘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대꾸한 티보치나가 숨을 크게 들이켰다. 그런 티보치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브리도가 조금 낮아진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아주 끈질긴 이방인이라 들었다.”
브리도는 펜던트의 표면을 엄지로 힘 있게 문질렀다. 울퉁불퉁한 문양이 살갗을 긁었다.
“곤욕스러우면 언제든 말해라. 기꺼이 도움을 주마.”
사뭇 다정하고 인자한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어째서인지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티보치나는 차마 시선을 들지 못하고 가만히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브리도가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연유는 따로 있지 않다. 브리도가 바로 디라즈의 비를 기어코 시험에서 떨어뜨린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족히 20년 전의 일이니 티보치나는 기억도 못 할 때의 사건이다. 확실한 건 그때는 지금보다 더 이방인을 배척했었고, 그래서 이방인을 쫓아낸 브리도가 칭송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브리도는 그 일로 인해 제사장의 자리에 올랐다. 수석 신녀가 아니었음에도.
브리도가 냈다는 시험 문제는 티보치나도 알고 있었다. 어떤 것은 의아할 정도로 단순했고 어떤 것은 가혹할 정도로 힘들었다. 카놀라를 제사장에게 맡긴다면? 그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다.
“……네.”
그러니 카놀라의 시험을 주관하는 건 언제나 자신이어야 했다.
*
‘연애부터 시작할까요?’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한 고백이었다. 아무리 되새겨 보아도 이보다 멋진 고백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완벽한 고백에 그런 대답이 나오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어서, 카놀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다년간의 경험으로 연애 기술만큼은 완벽하다고 자부했는데, 외국이라서 하나도 안 먹히는 건가?
아니, 아무리 문화가 다른 외국이라고 해도 그렇지. 연애하자는 말에 어떻게 ‘그러죠.’라는 무덤덤한 대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하다못해 ‘그러죠!’도 아니고 말이다!
‘첫눈에 반했다.’라는 고백에 ‘그렇군요.’라고 대답했던 것에 이어 두 번째로 부아가 치밀었다. 카놀라는 앉은 상태로 발을 동동 굴렀다. 그 모습에 오스카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애초 연애를 하시는 게 어딥니까.”
그야, 그러자고 했으니까. 너무 심하게 무덤덤한 반응이라 고백을 받아 줬다는 걸 한참 뒤에 깨닫긴 했지만 말이다.
“……내가 꼭 싫다는 사람 억지로 밀어붙인 거 같잖아.”
혼자 이리저리 난동을 부리던 카놀라가 결국 기운 빠진 얼굴로 책상에 볼을 비볐다. 책상 아래로 팔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리고 엎어진 그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옆얼굴이 눌리며 볼살이 잔뜩 밀렸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볼에 닿는 차가운 느낌 덕에 머리도 식는 것 같아서, 더욱 힘주어 얼굴을 눌렀다. 이상하게 눌린 카놀라의 얼굴을 보며 한숨을 내쉬던 오스카가 툭 말을 했다.
“처음부터 그러시지 않으셨습니까?”
“결혼한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랬지! 제대로 된 결혼이 이렇게 어려울 줄 누가 알았나?”
결혼이라는 게 뭔가. 한평생, 늙어 죽을 때까지 부대끼고 사는 것 아닌가. 평생을 함께할 사이니까 당연히 서로 아끼고 사랑해 줘야지!
카놀라는 엎어진 상태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처음부터 사랑에 빠진 자신의 행동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결혼할 사람인데 당연히 사랑해야지. 게다가 에델은 아무리 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걸?
그렇게 생각하던 카놀라가 문득 고개를 번쩍 들었다. 책상에 꾹꾹 눌리느라 한쪽 볼이 벌게진 상태로, 카놀라가 오스카를 휙 돌아보았다.
“게다가 연애하기로 했는데 그렇게 당장 돌아갈 건 또 뭐야? 업무는 내일 해도 된다더니!”
무심한 대답이라곤 해도 어쨌든 연애하자고 받아 준 주제에, 그는 곧장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했다. 그 순간만큼은 카놀라도 어이없다는 심정을 숨기지 못하고 그를 봤던 것 같다. 그 역시 카놀라의 감정을 알았을 텐데,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칼같이 물러나 버렸다. 내내 여유롭게 시내를 돌아다녔으면서 갑자기 급한 일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린 것이다.
“그래도 물건 다 찾을 때까진 함께 있어 주셨잖습니까.”
오스카의 옆에서 뜨개질하던 안젤리나가 넌지시 말을 얹었다. 그러나 그녀의 말이 도화선이 된 듯, 카놀라는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게 중요해? 사귀기로 했으니 제대로 된 첫 데이트를 해야 하잖아!”
“이미 하루가 다 갔는데요.”
오스카가 가차 없이 지적했다. 카놀라가 그런 그를 흘겨보는데, 듣다 못한 루덱이 나서서 카놀라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고백을 받자마자 가 버린 건 너무 예의가 없는 일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말에 카놀라의 시선이 루덱에게로 옮겨 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아까보다 더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뭐? 감히 내 앞에서 우리 에델 욕하는 거야?”
기껏 편들어 줬더니 욕한다고 되레 타박이다. 뭐 어쩌라는 건가. 배신감 어린 눈으로 카놀라를 보던 루덱이 결국 건성으로 사과하며 먼 산을 돌아보았다.
얼른 퇴근이나 하고 싶다.
그런 태평한 생각이나 하는 동안에도 카놀라는 여전히 에델의 심경을 유추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고 있었다. 급기야 그녀는 루덱에게 염탐을 해 오라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당연히 루덱은 반발했으나, 그렇게 해서라도 카놀라의 입을 막고 싶었던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압박까지 이길 수는 없었다.
염탐은커녕 문전 박대나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 회의적인 생각을 하며, 루덱은 털레털레 걸음을 옮겼다. 에델이 있는 곳이 가까워질수록 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리고 의욕 없어졌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