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녀석, 사냥 한 번 빠졌다고 아주 해이해진 모양이군.”
멀리서 보이는 아이누의 모습에 롬과 투갈이 킬킬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화했다. 가까운 곳에서 활을 쏘고 있던 울란도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별다른 명이 없으면 다섯 전사는 언제나 후사와 함께 행동한다. 다만 이번 사냥에선 에델의 명령을 받은 아이누가 궁에 남아야 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화제의 주인공을 지켜보라는 명령 때문이었다. 아이누는 에델의 그림자이니 누구보다 은밀하게 그녀를 주시할 수 있는 전사였다.
“아이누, 뭘 하다 이제 온 거야? 덕분에 숫자가 안 맞아서 게임을 할 수가 없었다고!”
“맞아, 내기는 둘보단 셋이 낫단 말이야!”
롬과 투갈이 투덜거리면서 아이누를 맞이했다. 아이누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울란은 무심한 표정으로 활을 다시 잡았다. 가까이 다가온 아이누가 모두에게 들릴 만큼 큰 목소리로 말을 했다.
“후사께서 방금 잠자리에 드셨다.”
당겼던 활시위를 제자리로 돌린 울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누를 응시했다.
“방금? 이방인과의 대화가 그렇게 늦게 끝났나?”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에델은 그라그포드와 함께 이방인 검사를 만나러 갔다. 바로 침소에 들지 못하고 끌려가는 모습이 좀 걱정스러웠지만, 그라그포드는 본래 누구와도 길게 만나는 성격이 아니니 금방 끝나겠거니 예상했다. 다섯 전사가 선뜻 에델의 곁에서 물러난 연유는, 에델이 금방 침소에 가서 휴식을 취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에델은 한참 전부터 침소에 들었어야 했다.
울란의 물음에 아이누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금방이었지.”
에델의 체력은 다른 그라사들과 다르다.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다섯 전사는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에델에게 충분한 휴식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내일부터는 다시 본래의 일정을 따라 생활할 테니 오늘은 충분히 자 두어야 하는데 이제야 잠자리에 들었다면, 평소보다 반절은 덜 쉬게 되는 셈이었다.
“후사께서 그분의 정혼녀를 보러 가셨었다.”
그의 말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어서,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롬과 투갈은 튀어나올 듯한 눈알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울란은 아예 활을 내려놓고 아이누에게 다가왔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른 전사들의 대화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얼굴로 무기를 손질하고 있던 전사 라다크조차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네 명의 전사들이 보내는 부담스러운 시선에 아이누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후사께서 누굴 보러 가?”
“곧장 침소로 가지 않으셨다고?”
“잘못 본 거 아니야?”
“후사께서는 쉬셔야 한다고! 이번 사냥이 예정보다 길어졌다는 거 알고 있잖아! 넌 뭘 한 거야?”
연달아 비난이 쇄도했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전사들의 모습에 아이누가 억울하다는 듯 대꾸했다.
“난 그분의 등을 지키는 전사다. 앞을 막아서는 건 허락되지 않았어.”
“하지만 말은 할 수 있잖아? 네놈 주둥이는 장식이냐?”
아이누의 항변은 처참하게 무시당했다. 잔뜩 인상을 찌푸린 아이누가 떨떠름하게 말했다.
“말을 안 했겠나?”
“그래서 네 말은, 후사께서 휴식을 미뤄 가면서까지 정혼녀를 만나고 오셨단 말인가?”
울란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상황을 정리했다.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자신을 보는 전사들을 향해, 아이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를 손질하던 자세 그대로 굳어서 아이누의 이야기를 듣던 라다크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아이누는 조금 전의 상황을 천천히 돌이켜 보았다. 몇 번이나 다시 생각해 보아도 대답할 만한 내용은 한 가지뿐이었다.
“……책을 골라 드리러.”
“뭘 해?”
“책 말이다. 책. 후사께서 정혼녀와 함께 도서관에 가셔서 책을 골라 주고 오셨다.”
투갈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이누를 보았다. 아이누의 표정은 무척이나 진지했기에, 전사들은 그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애초에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다. 그는 본 것을 전해 주고 있다. 아마 후사가 이만큼 쉬지 못하셨으니 내일 몸을 완전히 회복하시지 못해도 당황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휴식이 늦어진 연유에 대해선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정혼녀라면 외국에서 온 그 이방인 왕녀 아닌가. 디라즈의 앞에서 겁먹지도 않고 말대꾸를 한 게 그라사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퍼져 나갔지만, 그 외엔 딱히 주목할 만한 게 없는 여성.
후사는 그녀와의 정혼이 깨질 것이라고 단언했고, 실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참이었다. 신전에서 두 사람의 정혼을 깨기 위해 티보치나를 보냈다지 않나. 티보치나는 누구보다도 신의 의지를 충실히 섬기는 수석 신녀이니 이번에도 그렇게 할 것이다.
“후사께서 그 여자를 마음에 들어 하시는 건가?”
라다크의 물음에 아이누는 딱히 대답하지 못했다.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모르겠다. 하지만 왕녀가 후사께 반한 건 확실해.”
“그 여자의 감정은 관심 없다. 후사께서 마음에 들어 하셨는지가 중요해.”
라다크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투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동의했다.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울란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방인이다. 다른 이도 아닌 후사께서 이방인을 받아들이실 리가 없어.”
“어쩌면 제사장이 후사께 따로 전갈했을지도 모르지. 아이누, 너 본 거 없냐?”
“신전이? 이제 와서 마음을 바꾼 건 아니겠지? 일부러 후사에게 트집을 잡기 위해 이방인을 이용하는 거 아니야?”
롬과 투갈이 머리를 맞대고 쑥덕거렸다. 온갖 추측이 난무하는 동안, 아이누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잠시 말을 멈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발견한 라다크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아이누를 불렀다.
“그래서, 이 말을 우리에게 전하는 이유는 뭐냐?”
자신이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 그저 죄가 있다면 에델의 그림자인 게 죄다. 그 덕분에 온갖 광경을 다 보게 된 것이니까. 카놀라에게 순순히 끌려가던 에델의 모습을 떠올리던 아이누가 한숨을 내쉬었다. 피곤한 와중에도 꾸역꾸역 책을 골라 주고, 사서를 불러 따로 언질까지 하고서야 그는 침소로 향했다. 그라그포드에게서 ‘왕녀는 신전 쪽에서 상대할 거다’라는 말을 들은 직후임에도 그런 행동을 했다.
의중을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에델이 카놀라를 대하는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건 확실했다.
“후사께서 왕녀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너희도 알아 둬야 할 것 같아서.”
“어째서?”
라다크의 목소리엔 거북함이 가득했다. 다른 이들도 말은 안 하지만 복잡한 심경을 내비치고 있었다. 에델의 입으로 이렇다 할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이런 내용을 전달받은 게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것이다. 사실 아이누도 이렇게까지 죄다 언급할 생각은 없었다. 그조차도 매우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전사들에게 오늘의 일을 말해 준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이누는 체념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녀가 지금 여기로 오고 있거든.”
*
전사들의 훈련장은 사실상 병영과도 같았다.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이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자리 잡은 시설들이 그렇게 보였다.
어느 나라든 군사 시설은 함부로 볼 수 없다. 아무리 정혼녀라고는 해도 이방인이라, 카놀라는 입구에서 잠시 주저했다. 그러잖아도 이방인을 싫어한다는데 전력 노출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티보치나는 거리낌 없이 앞장섰다. 그녀가 그렇게 당당하게 앞장서니, 결국 카놀라도 냉큼 티보치나의 뒤를 따라 훈련장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라사들은 카놀라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외모 자체에서 느껴지는 이국적인 느낌도 있었지만, 황금색 머리카락이 특히 눈에 띄는 까닭이었다. 카놀라를 발견한 그라사들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리거나 외면했다. 이따금 위협적인 기세로 다가오려는 이가 있었으나, 앞서 걷는 티보치나를 발견하면 바로 멈춰 서서 노려보기만 했다.
그냥 서 있기만 해도 위협적일 전사들이 경계까지 하니 조금 무서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놀라는 꿋꿋하고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티보치나는 수석 신녀고, 저들이 다가오지 못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티보치나와 친한 자신도 겁먹을 필요가 없었다. 게다가 일단은 후사의 정혼녀가 아닌가. 대뜸 와서 시비를 걸면 맞받아칠 최소한의 명분은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먼저 시비를 걸 의향은 전혀 없었기에, 카놀라는 최대한 티보치나에게 바짝 붙어서 걸었다. 마음 같아선 팔짱을 끼고 친분을 과시했으면 싶었지만, 제아무리 카놀라라고 해도 거기까진 할 수 없었다. 그런 행동은 도리어 그라사들을 자극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마침 저기 다 모여 있군요.”
앞서 걷던 티보치나가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훈련장의 가장 안쪽에 따로 마련된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우락부락한 덩치를 가진 전사들 다섯이 모여 쑥덕거리는 게 보였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들 역시 카놀라를 발견한 듯 이쪽을 살피고 있었다. 얼굴이 구분될 정도로 가까워지자 전사들의 표정도 보였다. 당연하겠지만, 저들의 표정은 무척이나 안 좋았다.
“다들 계셨군요.”
티보치나는 평온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티보치나의 소맷자락을 잡았다. 험상궂은 표정으로 카놀라를 응시하던 전사 하나가 티보치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훈련장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입니다. 신녀님이야 그렇다 쳐도…….”
전사의 시선이 카놀라에게 잠깐 닿았다. 그가 한층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방인은 절대로 안 되죠.”
“이방인은 안 되지만, 후사의 정혼녀라면 괜찮겠지요.”
티보치나는 태연하게 웃었다. 전사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티보치나는 한술 더 떠 카놀라를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얼결에 몇 걸음 앞으로 나선 카놀라가 기겁한 눈으로 제 앞의 전사를 보았다. 몇 걸음 더 가까워졌을 뿐인데, 덩치가 수십 배는 더 커 보였다.
뭐야, 사람이 아니라 곰이야? 무심코 튀어 나가려던 말을 가까스로 참은 그녀가 눈을 깜빡였다. 바로 옆에선 티보치나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섯 전사 모두 아직 인사를 드리지 않으신 것 같더군요. 궁금해하시기에 모시고 왔습니다. 인사드리세요. 후사의 정혼녀이십니다.”
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놀라에게로 향했다. 얼어붙은 표정으로 전사들을 바라보던 카놀라가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렸다. 뭐랄까, 적의를 느끼기도 전에 일단 저 덩치들에서 뿜어지는 위압감이 부담스러웠다. 에델의 체격이 작다 보니 전사들의 덩치가 더 과하게 커 보이기도 했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아서, 카놀라는 눈을 깜빡이며 전사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보았다. 처음엔 다들 험상궂은 것처럼 보였는데 이렇게 하나하나 살피니 저마다 시선이 조금 다른 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놀랐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일단 이성을 되찾자 드디어 그들의 덩치가 아닌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왕녀님?”
티보치나의 부름에 카놀라가 무심코 입술을 뗐다.
“터지진 않는 거죠?”
“네?”
“아니 저…… 옷.”
카놀라가 손가락으로 슬쩍 앞을 가리켰다.
“단추가 떨어질 것 같아서.”
“…….”
“근육 빵빵하네요.”
“…….”
“……칭찬인데.”
아무래도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 같다.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에 선 전사의 표정은 아주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고, 그 뒤에 선 전사들의 표정 역시 애매하게 찌푸려진 상태였다.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그대로 읊어 버린 카놀라도 경직된 표정으로 침묵했다. 그러다가 이내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말을 쏟아 냈다.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요. 절대로 희롱하려는 의도는 아녔어요. 샤를만에선 외모나 체격을 칭찬하는 게 일상이거든요. 혹시 이곳에서는 그런 말들이 무례한 거라면 조심할게요. 아, 물론 내가 당신에게 관심 있어서 이런 소릴 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난 일편단심 에델이니까.”
카놀라는 슬며시 반보 물러나 티보치나의 소매를 꽉 잡았다. 그러곤 눈을 데구루루 굴려 어느 먼 곳으로 시선을 두었다.
“참고로 나 평화주의자예요.”
얼굴에 꽂히는 시선이 아주 따가웠다. 카놀라는 꿋꿋하게 그 시선들을 외면하며 허공을 보았다. 사뭇 뻔뻔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전사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위협적으로 타올랐던 기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푸스스 쪼그라드는 게 느껴졌다.
“이들은 후사의 전사들입니다. 절대로 왕녀님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아요.”
티보치나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카놀라가 슬며시 눈을 굴려 제 앞의 전사들을 다시 살폈다. 그들은 아주 이상한 것을 마주한 사람들처럼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그녀를 못마땅해하는 건 여전해 보였지만.
카놀라의 표정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티보치나가 입가의 미소를 조금 옅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렇게 두려워하실 줄 알았다면 무턱대고 모셔 오진 않았을 겁니다. 제 실수네요.”
티보치나의 말에 전사들의 표정이 변했다. 가늘어진 전사들의 눈에는 약간의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비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야 누가 봐도 난 저들에게 한주먹거리인걸?”
티보치나와 전사들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네?”
조심스럽긴 해도 제법 말똥말똥한 평소의 눈으로 돌아온 카놀라가 티보치나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제 앞의 전사들이 듣고 있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않는지, 아주 또박또박 설명했다.
“그렇잖아? 난 싸움은 전혀 못 한단 말이야. 그렇지 않아도 날 싫어한다는 사람들인데 덩치도 크고 저렇게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보니 놀라는 게 당연하지. 내가 조금만 더 소심했으면 기절했을지도 몰라! 하지만 자처해서 보여 달라고 한 거니까 티보치나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야. 이 정도로 기절할 만큼 내 심장이 약하지도 않고.”
카놀라는 티보치나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기까지 했다. 태연자약한 그녀의 모습에 티보치나는 할 말을 잃고 침묵했다. 그리고 카놀라를 상대하던 전사의 얼굴은 더욱 사납게 변했다. 그는 자신들이 놀림을 받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조금 상기된 얼굴로 거칠게 말을 했다.
“그래서, 구경은 다 하셨습니까?”
이번에야말로 목소리에서부터 적의가 느껴졌다. 뒤에 서 있는 다른 전사들의 시선에서도 곱지 않은 감정이 느껴졌다. 카놀라는 티보치나의 등을 두드리느라 잠깐 놓았던 소맷자락을 다시 움켜쥐었다. 그런 와중에도 입에선 볼멘소리가 튀어나왔다.
“구경하러 온 거 아닌데. ……요.”
전사가 뭔가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카놀라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아까 티보치나가 말했잖아요. 인사하라고.”
전사의 표정에 황당하다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는 곧 불쾌함을 숨기지 않으며 눈살을 찌푸렸다.
“인사를 받자고 여기까지 행차하셨습니까?”
“네.”
너무 당당한 대답에 도리어 말문이 막힌 건 전사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 왕녀는, 에델의 정혼녀라는 이유만으로 자신들에게 인사를 받겠다는 소리였다. 뒤쪽에 서 있던 전사 몇 명이 냉소를 지으며 쑥덕거렸다. 그들은 카놀라더러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낮추지도 않았다. 주어가 없는 그들의 대화는 죄다 누군가의 험담이었다. 물론 그 누군가는 카놀라일 것이다.
면전에서 제 욕을 하고 있음에도 카놀라는 그들을 힐끗 보곤 외면해 버렸다. 전사는 그녀가 겁을 먹어서 그런 것으로 판단했다. 무서우니 지적도 못 하는 것일 테지. 그런 주제에 인사를 받으러 왔다니, 기가 찰 소리였다.
전사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놀라는 한결 침착해진 얼굴로 또랑또랑하게 말을 했다.
“인사를 해야 통성명도 하고, 오가면서 알은척도 하죠. 당신들은 에델의 가장 가까운 곳에 서는 전사들이라면서요? 당연히 나와도 자주 볼 텐데, 미리 통성명해야죠.”
“우리가 왜 당신과…… 근데, 누구 마음대로 후사의 이름을 부르는 겁니까?”
생각해 보니 아까도 한 번 후사의 이름을 내뱉었던 것 같다. 전사의 지적에 뒤쪽에 있던 다른 이들도 말을 멈추었다. 어딘가 서늘하게 느껴지는 전사들의 시선에 카놀라가 찔끔한 듯 입술을 다물었다.
‘절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요.’
역시 이름에 뭔가 있는 게 틀림없다. 하지만 법으로 정해진 건 없다고 했으니, 그냥 암묵적으로 지켜지는 약속 같은 게 있을 테지. 제 이름에 관해 이야기하며 씁쓸한 표정을 짓던 에델을 떠올린 카놀라가 마음을 다졌다.
중요한 건 법으로 정해진 게 없다는 것이다. 에델이 직접 그렇게 말했으니 틀리진 않을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불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기죽을 필요는 없다. 카놀라가 뻔뻔스럽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누구 마음이긴요, 에델 마음이지.”
티보치나의 소맷자락을 놓은 그녀가 허리에 두 손을 척 올리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아무렴 본인 허락도 없이 이러려고. 아무리 내가 생각 없이 말하는 사람이래도, 그 정도 예의는 지킬 줄 알아요. 그치, 티보치나?”
갑자기 자신에게로 화살이 돌아오자 티보치나가 놀라며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전사가 빈정거리듯 끼어들었다.
“예의를 지킬 줄 알아서 신녀님께는 하대하시는 겁니까? 저분이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러고 보니 전사들은 티보치나를 윗사람처럼 대했지. 카놀라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카놀라는 티보치나에게 반말한다. 하지만 티보치나보다 아랫사람인 듯한 전사들에겐 존댓말을 사용한다.
어쩐지 이상한 족보를 만들어 낸 것 같다. 하지만 그걸 이제 와서 하나하나 풀어내기엔 우스웠다. 대신 카놀라는 자신의 인맥에 더욱 당당해지기로 했다.
“신전에서 날 내쫓으려고 보낸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이곳에서 날 챙겨 주는 유일하다시피 한 친구이기도 하고.”
그래, 친구니까 반말한 것이다. 물론 티보치나는 자신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지만…… 나중에 말을 놓으라고 넌지시 권유해야지.
“도대체…….”
“울란. 그쯤 해 둬.”
뭔가 말을 더 하려는 전사를 옆으로 밀어 내며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날카로운 얼굴선을 가진 전사였다. 이목구비가 뚜렷해서 인상이 무척 강해 보이는 그는, 방금 밀려난 전사에 비해선 체격이 조금 작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카놀라의 눈에도 범상찮은 실력을 갖춘 사람처럼 보였다.
눈을 가늘게 뜨고 카놀라를 응시하던 그가 차가운 어조로 말문을 열었다.
“전 라다크입니다. 이쪽은 울란이고, 저쪽은 롬, 그 옆에는 투갈, 그리고 저기는 아이누.”
그는 제 옆과 뒤의 전사들을 하나하나 지목하며 말을 했다. 갑작스러운 설명에 카놀라가 재빨리 그의 손가락을 따라가며 얼굴을 확인했다.
곰인 줄 알았던 전사는 울란이고, 저기 쌍둥이로 보이는 두 명의 전사가 롬과 투갈이라고 했지. 그 옆에 선 아주 평범하게 생긴 사람이 바로 아이누고.
“아, 그렇구나. 난…….”
“당신 이름은 궁금하지 않습니다. 알 필요도 없고, 부를 일도 없을 테니까. 알아들었으면 이만 가십시오.”
카놀라는 빙긋 웃는 낯 그대로 잠시 굳어 있었다. 칼같이 그녀의 말을 자른 라다크는 냉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 말이 끝났다는 듯, 그는 아예 등을 돌리려 했다. 황당하다는 눈으로 그의 뒤통수를 노려보던 카놀라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싫은데요?”
“뭐라고요?”
라다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 제 불만스러움을 온몸으로 표출하는 중이었다.
“나 지금 계속 존댓말 쓰고 있는 거 안 보여요?”
“그게 뭐 어쨌단 말입니까?”
“우리의 심리적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단 말이에요? 세상에! 난 당신들 주군의 정혼녀인데, 엄밀히 따지자면 서열로도 위잖아요! 그런데도 존댓말을 쓸 정도로 당신들을 낯설게 느끼고 있다고요!”
그녀를 무시하려 했으나, 지적하는 내용은 무시하기엔 조금 어려웠다. 이게 다 아이누가 쓸데없는 정보를 준 탓이다. 차라리 후사의 태도를 아예 몰랐다면 성격대로 했을 텐데. 후사가 정혼녀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는 걸 전해 들은 탓에 그의 다섯 전사도 저 왕녀를 완벽히 무시할 수가 없었다. 라다크는 왕녀를 등지려던 몸을 다시 원래대로 돌렸다.
“윗사람 대접이라도 해 달라는 겁니까?”
후사를 생각해 대꾸는 해 주고 있지만,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감정까진 숨길 수가 없었다. 짜증이 가득한 라다크의 물음에 카놀라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공에 대고 몇 번이나 헛웃음을 터뜨렸다. 팔짱을 낀 카놀라가 보란 듯 고개를 내저으며 외치듯 대꾸했다.
“어휴, 외모는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속은 왜 그렇게 꼬였어요?”
“…….”
평소에도 라다크의 냉담함과 비아냥에 많은 상처를 받고 있었던 롬과 아이누는 반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라다크의 면전에 대고 저런 소릴 내뱉다니! 그들은 상황도 잊고 기뻐하려는 안면 근육에 잔뜩 힘을 주었다. 볼이 푸들푸들 떨렸지만 웃음을 터뜨리는 것보단 나았다. 이 자리에서 웃었다간 나중에 라다크에게 온갖 욕설을 듣고 보복을 당할 테니까.
……하지만 저 이방인 왕녀가 하는 말은 두고두고 다시 듣고 싶을 만큼 통쾌했다.
“당연히 내가 반말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친분을 쌓아야죠! 그리고 친분을 쌓기 위해선, 서로를 알아 가는 시간이 필요하고요. 일단 이름을 알았으니까, 본격적인 대화는 앉아서 하죠!”
카놀라는 태연하게 전사들의 뒤를 가리켰다. 주변인들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니, 평소 그들이 둘러앉는 나무 의자가 보였다.
“나 앉고 싶은데.”
의자를 확인한 라다크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벌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카놀라는 티보치나를 돌아보며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티보치나도 앉고 싶지?”
당신 우리가 무섭다며? 이게 어디가 무서워하는 사람의 태도야?
목구멍까지 치민 말을 꾹꾹 억누른 라다크가 카놀라를 따라 티보치나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티보치나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죠.”
라다크의 등 뒤에서 누군가 ‘풉’ 하는 소릴 내뱉었다. 전사들을 향해 씩 웃어 준 카놀라가 위풍당당하게 티보치나의 소매를 잡고 의자로 향했다. 우두커니 서 있던 라다크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동료 중 한 사람에게 특히나 집요한 눈길을 보낸 라다크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왕녀만 가 봐라. 롬 저 녀석을 이번에야말로 가만두지 않을 테다.
*
“와, 진짜요?”
카놀라가 손뼉을 치며 눈을 반짝였다. 두 눈에서는 그녀가 느낀 놀라움과 감탄이 한가득 묻어났다. 그 솔직하고 적나라한 반응에 신이 난 상대방이 과장되게 팔을 치켜들었다.
“보시면 아주 깜짝 놀라실 겁니다. 후사께선 보기와 다르게 힘이 대단하시거든요. 글쎄 작년 대사냥 때는……!”
“이봐, 롬…….”
보다 못한 라다크가 으르렁거리듯 롬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롬은 전사들이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깨닫곤 입을 다물었다.
카놀라가 워낙 맞장구를 잘 쳐 줘서 저도 모르게 수다스러워졌다. 하지만 그건 롬의 잘못이 아니었다. 지금은 롬이 말을 하고 있지만 바로 직전까지 수다를 떨던 사람은 아이누였다. 울란도 꾸준히 말을 얹었고, 투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자신에게만 뭐라고 한단 말인가?
롬이 억울하다는 듯 라다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롬의 울컥한 마음을 풀어 준 건 그보다 빨리 입을 연 카놀라였다.
“말 끊지 말아요, ‘외모는 세상에서 제일 뒤끝 없을 것처럼 생겼는데 속은 꼬인’ 전사 씨. 에델이 엄청나게 힘센 게 거짓말도 아니잖아요.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왜 말을 막으려고 해요?”
롬을 째려보던 라다크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카놀라는 아주 태연하게 라다크를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이상한 호칭은 뭡니까?”
“이름 부르지 말라면서요? 그냥 전사라고 부르자니, 여기에 앉아 있는 전사만 다섯인데 누굴 부르는 줄 알겠어요? 그러니까 어울리는 호칭으로 불러야죠.”
‘거리감이 느껴지신다면서 이름은 잘도 부르시는군요.’라고 한마디 했던 게 화근이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 말을 수용하기에 찜찜하긴 했지만 설마하니 이런 이상한 호칭으로 부르려고 벼르고 있을 줄이야.
라다크는 어이없는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롬이 대번에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전 정말이지 놀랐습니다. 라다크가 저렇게 한마디도 못 하는 건 처음 봤거든요!”
롬을 따라 킬킬거리던 투갈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라다크는 다섯 전사 중에서도 제일 성격이 까칠하고 우악스러운 녀석이다. 가끔은 인정머리 없게 느껴질 정도라 같이 일하는 동료임에도 알게 모르게 맺힌 것들이 있었는데, 오늘 카놀라 덕분에 그 한을 죄다 푸는 중이었다.
투갈의 말에 카놀라가 그럴 줄 알았다는 눈으로 라다크를 힐끗 보았다. 그 시선만큼이나 새침한 목소리가 라다크에게 들려왔다.
“어머, 그래요? 그럼 오늘 실컷 보세요.”
도대체 언제 돌아가려고? 단박에 드는 의문에 시선을 들었지만, 카놀라는 다시 롬과 수다를 떠는 데에 집중하고 있었다. 라다크는 자신을 거들어 줄 만한 동료를 찾아 고개를 돌렸다. 슬프게도 저 이방인을 내쫓아야겠다는 의욕은 누구에게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믿고 있던 울란마저 아닌 척 앉아서 롬의 말을 거들고 있었다.
사실 저들이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는 라다크도 대충 짐작이 되었다. 트리폴에서 후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후사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트리폴인이라면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누굴 붙들고 후사에 대한 자랑거리를 이야기하는 건 우습고 새삼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저 이방인은 후사를 완벽하게 모르고 있던 사람이다. 무슨 말을 해도 처음 듣는 것일 테니, 후사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는 처지에서도 보람을 느낄 만한 대상이었다.
카놀라는 전사들에게 친해지자고 말했지만, 정작 대화 내용은 죄다 후사 이야기뿐이었다. 후사에 대해서라면 온종일 자랑할 수 있는 다섯 전사는 당연히 하나둘 입을 열기 시작했고, 카놀라는 시답잖은 내용 하나하나에 반응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녀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꾸며 냈다는 느낌을 주었다면 분위기는 이렇게까지 풀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히도 카놀라는 사소하게 알게 되는 내용 하나하나를 기쁘고 즐겁게 들었다. 그녀는 후사를 향한 자신의 애정을 전혀 숨기지 않았다.
‘왕녀가 후사께 반한 건 확실해.’
그래, 아이누의 말대로 그건 확실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라다크에겐 카놀라의 감정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카놀라의 존재가 미심쩍었고, 걱정스러웠다. 못마땅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던 라다크가 다시 한번 불쑥 끼어들었다.
“저희 훈련해야 합니다.”
롬과 대화하느라 라다크의 말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카놀라는 하던 말을 멈추고 라다크를 돌아보았다. 말똥말똥한 눈을 보니 이제 두려움은 한 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찰싹 붙어 있던 신녀가 잠깐 자릴 비웠는데 조금의 걱정도 없어 보였다.
“오늘은 쉬는 날이라는 거 알아요. 티보치나가 말해 줬거든요. 설마 티보치나가 내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예요?”
보통의 방법으로는 도통 일어나지 않을 기세였다. 라다크는 머리를 굴렸다. 처음 여기에 눌러앉은 핑계가 뭐였더라? 친분을 쌓아야 한다는 둥의 말이었지. 존댓말 사용으로 온갖 요란을 떨었다. 그렇다면 존댓말을 그만두게 만들어서 그 명분을 없애야지.
“이제 알 만큼 알았으니 말 편하게 하십시오.”
이를 악문 라다크가 사뭇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리고 카놀라는 아주 상큼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고마운 말이지만 사양할게요. 난 아직 누구 이름도 못 부르는 아주 멀고 먼 사이인걸요? 심리적 거리감이 아득하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말을 편히 하겠어요. 그죠, 롬 씨?”
도대체 이 자리의 누구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느낀다는 건가. 아무리 봐도 카놀라에게서 거리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일부러 더 존댓말을 하는 게 틀림없다.
라다크가 찌푸려지는 미간에 힘을 주고 있으려니, 롬이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뒤이어 다른 이의 웃음소리도 들렸다. 롬이야 이미 진즉부터 대놓고 라다크를 비웃는 중이었다지만, 이번엔 다른 이들도 웃음을 참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라다크, 너 진짜 제대로 걸렸다! 아하하!”
투갈이 제 무릎을 치며 박장대소를 했다. 똑같은 얼굴을 한 두 놈이 저렇게 나란히 웃음을 터뜨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짜증도 두 배로 났다. 형제는 함께 챙겨야 마땅하니 꼭 롬과 함께 투갈이 준 치욕도 잊지 않고 갚아 주겠다.
남몰래 다짐하던 라다크가 카놀라를 힐끗 보았다. 처음의 경직된 모습은 다 거짓이었던 양, 카놀라는 누구보다 활기차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저 멀리에서 구경만 하던 그라사들이 궁금해서 슬금슬금 다가올 정도로 말이다.
“거리감이 있긴 하셨습니까?”
이쯤 되니 카놀라가 처음에 겁먹은 모습을 보였던 것조차 다 연극처럼 느껴졌다. 혼잣말하듯 묻는 라다크를, 카놀라가 슬쩍 외면했다.
“무슨 소린질 모르겠네, 정말.”
새침하게 딴청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에 결국 라다크는 벌떡 일어섰다. 그러곤 아주 성의 없는 목소리로 ‘몸이 뻐근하다’라고 중얼거리며 몸을 돌렸다. 그 빤히 보이는 핑계에 카놀라는 웃음을 지었지만, 이내 모른 척 롬과의 대화에 집중했다.
티보치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신전의 심부름꾼을 만나고 있었다. 라다크가 다가가자, 심부름꾼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무는 게 보였다. 라다크의 표정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험상궂게 변한 그의 표정에 심부름꾼이 질겁을 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가 티보치나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부리나케 훈련장을 떠났다. 그런 그를 태연하게 보내 준 티보치나가 라다크를 돌아보았다.
“신전에서 계획을 바꿨습니까?”
티보치나가 의아하다는 듯 눈을 치켜떴다. 그 모습이 가증스럽게 보여서, 라다크는 더욱 거친 어조로 물었다.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어도 말을 못 놓겠다는 저 이방인께서 신녀님을 아주 친근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목적이 그거였습니까?”
티보치나의 시선이 잠깐 카놀라에게 닿았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뭐라고 말을 하는 중이었다. 뜻 모를 적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하긴 했지만, 저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무섭게 만들어서 미안하기는커녕, 이젠 카놀라를 다른 이들에게도 내보여 보고 싶어졌다.
모든 사람에게 저런 식으로 대할까? 저리 쉽게 ‘이방인에게 보이는 적의’를 흘려보낼 수 있을까?
거기까지 생각하던 티보치나가 자연스럽게 눈길을 돌렸다. 제 앞에 선 전사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무척 철옹성 같았다. 카놀라의 유쾌함에 휩쓸리지도 않았고, 경계심을 늦추지도 않았다. 그의 모든 신경이 후사에게로 향해 있다는 증거였다.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친하게 지내시는지. 신녀님은 ‘평가’를 하셔야 하는데 혹시라도 주관적인 감정이 섞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전 충분히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중입니다.”
티보치나의 말은 그 무엇으로도 증명할 수 없었지만, 믿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라다크는 이를 악물었다.
“저 이방인을 빌미로 후사께 허튼 누명이라도 씌우면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
“후사께 누명을? 제가 왜요? 신전은 트리폴의 번영을 기원하는 곳이고, 테드라고는 트리폴을 이끄는 군주의 혈족입니다. 신전과 테드라고가 싸울 이유는 없잖아요? 그렇죠, 아이누?”
티보치나의 시선이 라다크의 어깨 너머로 향했다. 막 라다크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던 아이누가 멈칫했다. 그러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이누가 라다크를 힐끗 보았다. 불만이 많아 보이던 라다크는 결국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평온한 눈으로 그들을 번갈아 보던 티보치나가 빙긋 웃었다. 마침 그녀를 부르는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보치나는 기꺼이 카놀라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카놀라의 옆자리에 친근하게 앉는 티보치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이누가 라다크의 팔을 툭 쳤다.
“신녀를 자극해서 좋을 건 없다, 라다크.”
“나도 알아.”
짤막한 목소리는 아주 무뚝뚝했다. 한숨을 내쉬며 라다크를 보던 아이누가 그를 달래려는 듯 말을 했다.
“설사 신녀가 다른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저 왕녀는 전혀 모를 거다. 그러니 너무 사납게 대하지 마.”
“넌 후사께서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다다르셨는지 잊었나?”
“그걸 잊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
아이누의 단호한 말에 라다크가 멈칫했다. 라다크가 카놀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덩치 큰 전사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저 모습만 보면 실없고 가볍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라다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다섯 전사는 후사의 최측근들이었다. 후사의 고난을 일부나마 함께해 온 그의 손발. 아이누의 말대로, 후사가 겪은 고생을 잊었을 리가 없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는 안다. 하지만…….”
아이누는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난 후사의 선택을 무조건 따를 거다. 그것이 신전의 뜻과 어긋난다고 해도. 넌 그렇지 않나?”
“난 후사의 검이다. 검은 그저 주인이 뜻하는 방향을 충실히 겨눌 뿐이지.”
라다크가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여전히 거칠었지만, 내내 감정적이던 그의 목소리는 제법 진정된 상태였다.
“넌 후사께서 저 이방인을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라다크의 물음에 아이누는 시선을 내렸다. 후사와 왕녀의 만남은 기껏해야 세 번 정도. 겨우 세 번의 만남으로 감정을 판단하기엔 이른 감이 있다. 하지만 아이누가 보아 온 후사의 모습을 고려하면 그가 왕녀에게 보이는 태도가 다르다는 건 확실했다. 그것이 왕녀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아니면 그녀가 이방인이라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모르겠다.”
아이누가 거칠게 자신의 뒤통수를 긁적였다. 한숨만 푹푹 내쉬며 그렇게 서 있던 두 전사가 문득 시선을 한 곳으로 고정했다. 아까 라다크에게 쫓겨나다시피 떠났던 신전의 심부름꾼이 몇 명의 신전 관계자들과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떠들썩하던 수다도 잦아들었다. 전사들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영문을 모르는 카놀라만 어리둥절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심부름꾼이 티보치나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이만 가셔야 합니다.”
그 말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딜 가?”
미간을 좁히고 심부름꾼을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조용히 숨을 골랐다. 그러곤 차분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신전에 일이 좀 생겨서, 제가 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재미있게 대화를 하고 계셔서 말씀드릴 기회를 놓쳤네요. 우선 왕녀님의 시중인들에게 이곳으로 와 달라는 기별을 넣었습니다. 그들이 올 때까진 곁을 지키겠습니다.”
티보치나는 카놀라를 전담하게 된 뒤로는 전반적인 신전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놓을 수 없는 업무가 몇 가지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문제로 신전에서 심부름꾼을 보낸 것이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기에, 티보치나는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입술을 뗐다. 하지만 그녀보다 먼저 누군가 조급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신녀님…….”
재촉하듯 티보치나를 부른 이는 심부름꾼이었다. 티보치나가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힐긋 보았다. 그 시선에 차가운 감정이 서렸다.
“왕녀님을 이곳에 모시고 온 건 저입니다. 그러니 혼자 두고 갈 순 없습니다.”
다른 전사들도 많으니 혼자는 아닐 테지만, 심부름꾼은 차마 더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카놀라는 심부름꾼과 그 뒤의 관계자들을 슬쩍 보곤, 이내 전사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전사들은 언제 웃고 떠들었냐는 듯 무뚝뚝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아까 카놀라가 처음 이곳에 도착했을 때의 그 분위기였다.
다행히 티보치나가 평소처럼 말을 걸어 주었기에 카놀라는 제 시중인들을 기다리는 그 짧은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신전의 심부름꾼이 간간이 헛기침하며 자신의 존재를 피력했지만, 티보치나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으므로 카놀라 역시 마음 놓고 수다를 떨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전사들은 조용히 앉아서 자리만 지켰다. 그들은 카놀라가 가끔 말을 걸면 그것에 대한 대답만 짤막하게 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다.
마음 같아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어도 대답해 주지 않을 테지. 카놀라는 전사들과 신전 관계자들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에델이 골라 준 책 중에 신전과 전사들의 관계에 관해 언급된 책이 있을까? 방으로 돌아가면 책을 좀 뒤져 봐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려니, 타이밍 좋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녀님!”
멀리서부터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부름에 카놀라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목을 쭉 내밀고 보니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손나발을 만들어 번갈아 가며 카놀라를 부르고 있었다. 우락부락한 전사들이 무섭지도 않은지, 두 사람은 아주 요란하게 훈련장을 휘젓는 중이었다.
카놀라는 슬며시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어쩐지 알은척하기가 부끄러워졌다.
전사들 틈에 앉아만 있어도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카놀라를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냥 이대로 다섯 전사의 등 뒤에 숨어서 외면해 버릴까? 고민하는 찰나, 오스카가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깊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외치는 게 들렸다.
“카~아노~올라~아~왕~녀~님!”
“오스카, 안젤리나!”
카놀라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스카의 뒤를 이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이름을 외치려던 안젤리나가 카놀라를 발견하곤 멈칫했다. 그러다가 뭔가를 말하려는 듯 다시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카놀라가 기겁을 하며 후다닥 그들의 앞으로 뛰어갔다.
“훈련장에서 소란을 피우면 어떡해!”
“죄 덩치들이 커서 도통 왕녀님이 보이셔야 말이죠.”
안젤리나의 말에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되잖아!”
“척 봐도 저희는 한주먹거리인데 무서워서 어찌 말을 건답니까?”
그 주인에 그 시중인이었다. 제 주인과 똑같은 소릴 하는 오스카의 모습에 전사들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주변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놀라는 호들갑을 떨며 오스카에게 속닥거렸다.
“오스카! 대놓고 그런 말을 하면 큰일 나! 그리고 루덱도 같이 왔으니 한주먹은 아니지! 지금 우리 루덱 무시해? 왜 기를 죽여?”
“어이구, 왕녀님. 덩치 차이를 보십시오.”
전사들은 침묵했다. 저들은 지금 자신들의 대화가 안 들릴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지적할 부분이 너무 많아서 도리어 말문이 막혔다. 신전 관계자들도 당혹스러워하긴 매한가지였다. 다만 티보치나만 익숙하다는 듯 웃으며 다가갔다.
“잘 찾아오셨네요. 이제 안심하고 갈 수 있겠습니다.”
“바로 가는 거야?”
“네. 충분히 지체되었으니 전 얼른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카놀라가 아쉽다는 듯 탄식했다. 그러나 바짝 다가온 심부름꾼과 관계자들 때문에 더 이상의 대화는 이어 갈 수 없었다. 차분하게 작별 인사까지 마친 티보치나가 심부름꾼에게 떠밀려 먼저 훈련장을 떠나자, 전사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카놀라에게로 향했다. 멀어지는 티보치나의 뒤에 대고 열심히 손을 흔들던 카놀라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나도 돌아가야겠네. 여기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인데 말이야.”
그것이야말로 라다크가 그토록 기다려 왔던 말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카놀라가 살짝 쀼루퉁한 표정으로 라다크를 보았으나,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전사들과 인사를 했다. 몇 시간 동안 수다를 떨었던 게 그럭저럭 효과를 본 건지, 전사들은 처음 만났을 때보단 덜 적대적인 태도로 카놀라를 배웅했다.
카놀라는 안젤리나, 오스카와 평소처럼 시답잖은 말씨름을 하며 훈련장을 나섰다. 그런 카놀라를 물끄러미 보던 루덱이 힐끔 뒤를 돌아보았다. 전사들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후사의 다섯 전사뿐만 아니라, 훈련장에 있는 다른 전사들 역시 알게 모르게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루덱은 그들의 시선에서 가시지 않은 경계심을 쉬이 발견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훈련장을 나가는 동안엔 카놀라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묻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루덱은 제 입을 꾹꾹 닫았다. 그리고 숙소에 가까워져서야 그는 겨우 궁금하던 것을 물어볼 수 있었다.
“저들과 친해지신 겁니까?”
대뜸 튀어나온 그 질문에 카놀라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앞세워 보낸 카놀라가 뒷짐을 지고 태평하게 걸음 속도를 늦추었다. 그러다가 루덱과 어깨를 나란히 맞추고서야, 그녀가 넌지시 대답했다.
“아니.”
단호한 그 대답에 루덱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에게, 카놀라가 친절하게 다시 한번 강조해 주었다.
“전혀 친해지지 않았어.”
“그럼 몇 시간 동안 무슨 대화를 그렇게 하신 겁니까?”
루덱의 물음에 카놀라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동자에 약간의 짜증이 스몄다. 그렇게 한참 입을 다물고 걷기만 하던 그녀는 멀리 제 방의 문이 보일 즈음 말문을 열었다.
“……엄청 대단한 남자에 대해서. 이방인에게 장가보내기엔 너~어무 아까운, 이 동네 후사의 대단한 활약상.”
루덱의 표정이 애매하게 굳었다. 그러니까 지금 카놀라의 말은, 그녀의 정혼자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왔다는 의미였다. 그것도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내인지에 대해서. 다만 카놀라의 반응을 보니 전사들은 단순히 제 주군을 자랑하려는 의도로만 말을 했던 게 아닌 모양이다. 그들에게 어떠한 의도가 있었다면, 눈치 빠른 카놀라는 금방 알아챘겠지.
그러니까 정리해보자면, 자기들 주군이 너무 대단해서 카놀라에겐 넘겨줄 수 없다고 어필했다는 게 아닌가.
그렇게 결론을 내린 루덱이 와락 인상을 구겼다.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장 그들에게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 지네 주군만 아깝나? 이쪽도 아깝긴 매한가지였다. 카놀라가 생각 없이 말하고 가볍게 행동하긴 하지만, 그래도 잘 뜯어보면 얼마나 매력 넘치는 주인인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과한 경계심입니다.”
불쾌함이 가득 묻어나는 루덱의 중얼거림에 카놀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연유가 궁금하긴 하네. 저들은 나뿐만 아니라 티보치나도 경계하는 눈치였거든.”
“그 신녀라면…… 저들과 같은 입장이잖습니까.”
“나랑 친해서 그런가?”
하품이 나올 정도로 태평한 중얼거림에 루덱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나 이곳은 위험하다. 모든 게 위험했다. 애초에 이 혼약 자체가 문제였다. 루덱은 진지한 음성으로 아까 못다 한 설득을 이어 나갔다. 1왕자에게 속았으니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정면에 시선을 둔 채 루덱의 말을 귓등으로 듣던 카놀라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저었다.
“자꾸 정신 나간 소리 할 거야?”
“여태껏 왕녀님께서 이렇게까지 적대적인 사람들과 함께하셨던 적이 있으십니까? 이런 자들과 있을 까닭이 없으십니다.”
카놀라는 샤를만에서 모두가 사랑할 수밖에 없던 막내 왕녀였다. 왕좌와 가장 먼 곳에 있음에도 이렇게 쫓겨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 인기란 다른 게 아니었다. 카놀라라는 사람과 대화를 해 본 이라면 그게 누구든 가질 수밖에 없는 호감이라는 게 존재했다.
샤를만에서 카놀라는 그 누구보다 많은 호의에 휩싸여 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런 낯선 곳에서, 적대적인 사람들 틈에서 계속 견뎌야 할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지금이야 아직 이곳의 모든 게 신기할 때이니 그럭저럭 웃어넘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계속되면 제아무리 뻔뻔스러운 카놀라라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저런 노골적인 적의가 더 쉬워. 훨씬 상대하기 편하지. 루덱도 잘 알잖아.”
카놀라는 루덱의 간절한 조언을 사뿐히 무시했다. 오히려 찡긋 윙크까지 하며 사람의 속을 긁었다. 결국, 루덱은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던 문제를 입 밖에 내었다.
“왕녀님. 아까 미처 말씀드리지 못했는데, 1왕자께선 약속된 지참금의 반절밖에 보내지 않으셨답니다.”
물자가 절반에도 미치질 않는다고 했다. 그 물자란 결국 지참금을 말하는 것일 테다. 약속된 지참금의 양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이니만큼 지참금 문제는 무척 예민한 부분이었다. 받는 사람의 입장도 그렇지만, 그것을 들고 오는 처지에서도 그러했다.
애초 겨울 산맥을 넘을 때 꾸역꾸역 황금 마차를 끌고 왔던 연유가 뭐였던가. 뭐라도 더 들고 오기 위해서다. 지참금은 카놀라가 이곳에서 얼마나 훌륭히 자리 잡을 수 있을지를 가늠할 척도이기도 했다.
루덱의 심각한 어조에, 드디어 카놀라도 걸음을 멈추고 진지하게 루덱을 돌아보았다. 잔뜩 좁아진 미간은 카놀라가 얼마나 심각하게 루덱의 말을 받아들이는지를 보여 주었다.
“그래? 언니에게 감사하다는 편지라도 써야겠네. 황금 마차라도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잖아?”
아니,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 검지로 입술을 꾹꾹 누르며 ‘나 언니랑 별로 안 친한데.’라는 속 편한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는 카놀라의 모습에, 결국 루덱은 울컥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런 말씀 할 때가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왕녀님을 반기지 않는 사람들인데, 이런 문제까지 겹치면……!”
“그럼, 오빠한테 나머지 반절도 보내 달라고 청해 볼까?”
“왕녀님!”
더 놀려 먹었다간 정말로 루덱이 목덜미를 잡으며 쓰러질지도 모른다. 새빨개진 얼굴로 버럭 소릴 지르는 루덱의 모습에 카놀라는 혀를 찼다. 하여간 루덱은 너무 진지해서 탈이라니까. 고개를 내저으며, 카놀라가 심드렁하게 중얼거렸다.
“오빠가 지참금을 반만 보낸 건, 이곳에서 요구한 지참금이 그만큼 과했다는 의미야. 더 보내 달라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걸?”
“그럼 더 위험한 거 아닙니까?”
“위험? 뭐가?”
카놀라는 진짜 모르겠다는 눈으로 루덱을 보았다. 그 눈빛에 루덱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선심 쓴다는 듯 말을 이었다.
“루덱, 지참금을 반절만 보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방금 왕녀님께서 말씀하셨잖습니까. 트리폴에서 과한 요구를…….”
“굳이 반절만 보낸 이유 말이야. 과한 지참금은 혼약을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돌려서 내비친 걸 텐데, 오빠가 그걸 못 알아들었겠어? 그런데도 굳이 보냈네?”
카놀라는 어깨를 으쓱했다.
“반반인 거야.”
“뭐가 말입니까?”
어리둥절한 루덱의 물음을 들으며, 카놀라는 멈췄던 걸음을 다시 떼었다. 열린 방문 너머로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주저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각자 자신의 무릎과 허리를 두드리고 있는 모양새를 보니, 곧 비라도 오려는가 보다.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관절통이 알려 주는 일기 예보는 아주 정확하니까.
카놀라는 설핏 웃었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이 참 많이도 늙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카놀라에게 배정되었을 때부터 늙어서 온 이들이었으니, 저들의 노쇠함을 깨닫는 것 자체가 새삼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내가 이곳에서 죽었으면 하는 마음 반, 잘 눌러앉았으면 하는 마음 반.”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무감각한 어투였다. 루덱이 굳은 표정으로 카놀라의 옆모습을 보았다. 카놀라는 여전히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오빠답지 않게 꽤 자비로웠네.”
쾌활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그녀가 루덱을 힐끗 보며 씩 웃었다.
“설사 샤를만으로 돌아간다 한들, 전처럼 살 수 없어. 한번 파혼한 몸이니 가치는 더 떨어질 테고, 그때는 정말로 내 의사와 상관없이 더 먼 곳으로 시집가겠지.”
그때야말로 첫째 오빠는 가차 없이 그녀를 내칠 것이다. 그녀의 취향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샤를만의 이득이 될 만한 상대를 찾아 나서겠지. 이런 산골짜기 소국이 아니라 정략적으로 관계를 맺어 둬야 할 제대로 된 거래 상대.
“루덱, 난 여기에 무조건 눌러앉아야 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루덱을 두고, 카놀라는 흥얼거리며 걸음에 속도를 내었다. 나풀나풀 걷는 걸음은 마치 리듬을 타듯 가볍고 경쾌했다. 그러나 방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 그녀는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 멈춰 선 카놀라의 모습에 루덱이 의아한 표정으로 다가갔다.
“아씨…….”
카놀라가 잔뜩 구겨진 얼굴로 루덱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진지하고 심각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덩달아 심각해진 얼굴을 한 루덱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놀라가 두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감쌌다. 그러고는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자책이 가득한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예전 기출문제 못 들었어!”
3. 해돋이 협곡
시중인이 필요하지?
누군가 그렇게 물었을 때,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던 것 같다. 다른 형제들은 다 있는 시중인이니 나도 필요하겠지. 그 정도의 생각이었다. 카놀라는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적극적으로 경쟁에 뛰어들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에게 유능한 수하나 시중인이 필요 없음을 의미했다.
어릴 적 그녀를 돌봐 주던 유모는 무척 나이가 많아서 긴 시간을 함께할 수 없었다. 필연적으로 빈자리가 생겼다. 반드시 채워야 할 자리였지만, 카놀라의 궁은 평생을 바치기엔 너무나도 전망이 없는 직장이었다. 누구보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카놀라는 난처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녀가 나설 필요는 없었다. 본궁에선 알아서 새로운 시중인들을 보내 주었다.
‘오스카입니다.’
‘안젤리나라고 불러 주십시오.’
쭈글쭈글한 피부는 손으로 눌러 펴도 절대 펴지지 않을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쓰러지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가느다란 팔다리는 노인들의 노쇠함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카놀라는 자신의 앞에 선 두 노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흠잡을 곳 없이 훈련된 시중인의 자세였다. 어쩌면 귀한 누군가를 모셨던 이들일지도 모른다. 아무리 카놀라가 왕위 다툼에 끼어들지도 못하는 왕족이래도 명색이 왕의 핏줄인데 아무나 보냈을 리가 없다. 아마 본궁에서 오랫동안 일한 자들일 것이다.
이젠 젊은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은퇴를 앞두고 있었을 노인들.
카놀라는 눈앞의 이들에게 조금 미안해졌다.
‘이름 되게 잘 어울린다.’
카놀라의 말에 두 노인은 조금 놀란 듯 시선을 들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왕녀의 주근깨 박힌 얼굴이 보였다. 소문대로 아무 근심 걱정도 엿보이지 않는 천진난만한 얼굴이었다.
왕녀는 직접 제 궁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곤 두 팔을 활짝 벌려 환영해 주었다. 험난한 왕궁 생활과는 도통 맞지 않을 게 분명한, 아주 발랄한 목소리가 궁에 울려 퍼졌다.
‘두 사람의 남은 생을 내게 바친다면, 심심하지 않은 노후를 선물해 줄게. 어쩌면 생각보다 꽤 재미있을지도 몰라.’
평생을 엄격하게 살아야 했던 두 사람은 열린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재미있는 노후라니,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라고.
*
책상에 한쪽 볼을 대고 엎어진 카놀라가 코앞에서 펜대를 끼적였다. 영혼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눈동자가 펜대의 움직임을 따라 이리저리 움직였다. 카놀라는 지금 자신이 뭘 끼적이고 있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 영혼 없는 끼적거림을 이어 가던 그녀가 억지로 몸을 일으키곤, 저만치 밀어 놨던 책을 손끝으로 잡아끌어 제 앞으로 옮겼다. 싫다는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책을 펼친 카놀라는 깨알같이 들어찬 글자들을 확인하자마자 탄식했다.
“여기까지 와서 내 손으로 책을 펼칠 줄 누가 알았겠어.”
틀림없이 그림이 많거나 그림만 있는 거로 골라 달랬는데, 대체 이 책은 뭐람? 어디서부터 끼어서 온 거지?
카놀라가 진저리를 치며 남은 장수를 눈으로 헤아렸다. 보기만 해도 까마득한 게 하품부터 나왔다. 얼추 머릿속으로 남은 양을 가늠한 카놀라가 단호하게 책을 덮었다. 그러곤 다시 저만치로 밀어 두며 책상에 고개를 처박았다.
“한 권도 제대로 못 읽으셨잖습니까.”
“심지어 반절도 못 읽으셨죠.”
나란히 앉아 뜨개질하고 있던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했다. 태평한 그들의 말에 카놀라가 뚱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글자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천천히 읽은 거거든.”
“그마저도 덮은 지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냥 포기하고 나가시죠?”
카놀라가 책을 반절도 못 읽고 덮는 동안,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폭신폭신한 털실을 두 뭉치나 사용했다. 그들은 심지어 털실을 보지도 않고 손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시중인들의 노련한 손재주를 힐끗 본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점점 더 형태를 갖춰 가는 저것은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사용할 숄이었다. 주인은 이렇게나 괴로움에 몸서리를 치고 있는데 시중인이란 자들은 자기들이 덮을 숄이나 만들면서 사람을 약 올리다니! 게다가 공부는 관두고 나가 놀라는 소리까지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직업의식도 없는 거야? 공부해야 할 주인에게 나가 놀라고 권유하다니!”
“하지만 공부는 안 하시고 그림만 그리는 중이시잖습니까.”
오스카의 태평한 목소리에 카놀라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곤 쥐고 있던 펜을 허공에 휘두르며 오스카에게 삿대질해 댔다.
“그림 아니거든? 내 첫 그림은 무조건 에델이야! 이건…… 이건 그냥 낙서야!”
낙서라기엔 무척 제대로 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을 멈춘 오스카가 고개를 쭉 빼서 책상 위의 종이를 보았다.
“평소에 그리시던 그림 맞는걸요, 뭐.”
언제는 제대로 된 화구를 갖추고 그리셨나요? 얄밉게 덧붙이는 말에 카놀라가 볼을 부풀렸다. 그야 그 말이 맞긴 하지만,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게 아니니까 다르다. 저건 그냥 그녀의 손이 의지와 상관없이 멋대로 낙서를 한 거였다.
“오래 참으셨죠, 뭐. 샤를만에선 심심하면 저잣거리로 나가셨잖습니까. 이곳 풍경은 샤를만과 완전히 다르니 그리실 것도 넘쳐 나지 않겠습니까?”
오스카에 이어 안젤리나까지 고개를 쭉 빼고 책상 위를 보았다. 떨떠름한 눈으로 제가 그린 낙서를 확인한 카놀라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이래서 습관이 무섭다. 궁에서도 공부하기 싫어서 글자를 쓰는 대신 그림을 그렸는데. 희한하게도 수업 시간이면 그림이 아주 잘 그려졌다. 그녀가 스스로 역작이라고 꼽는 그림들은 죄다 수업 시간에 탄생한 것들이었다. 당연하게도 화구 따위로는 그리지 않은 것들이었다.
“……그건 그래. 사람들의 분위기가 완전히 다르니까. 도시 풍경도 궁금하고, 도시 밖의 소규모 마을 풍경도 궁금하고, 사냥 풍경도 궁금하고…….”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 가며 주절주절 말하던 카놀라가 이내 기운 빠진 얼굴로 책상에 엎어졌다.
“하지만 나 시험 보잖아. 티보치나가 며칠째 아무 소식이 없는 걸 보면, 틀림없이 시험 문제 내는 거야.”
“생각하시는 시험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야 모르지! 기출문제도 못 들었는데 무슨 시험인지 어떻게 알아.”
신전으로 돌아간 티보치나에게선 며칠 동안 연락이 없었다. 카놀라는 그제야 자신이 티보치나에게 먼저 연락을 할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몰랐고, 신전으로 보낼 심부름꾼조차 없었다. 신전에 관해 물어도, 다들 바쁘게 걸음을 옮기며 카놀라를 외면했다.
그 누구도 제대로 된 협조를 해 주지 않을 것이다. 카놀라는 이곳에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까마득하게 멀었다는 걸 새삼 체감했다.
그나저나 티보치나는 왜 연락이 없을까? 설마 기출문제 알려 주기로 한 걸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아니면 알려 주기 전에 다른 신전 관계자에게 들켜서 징계를 받았다던가?
어떻게 상상해도 좋은 결말로 이어지진 않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카놀라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언제부터 시험 전에 공부하셨다고…….”
“하긴 했어! 직전에 해서 문제였지.”
그래도 아슬아슬하게 기준치는 넘겼단 말이야. 변명하듯 뒤따라오는 중얼거림에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기꺼이 웃었다. 아주 큰 소리로. 그 웃음소리가 얄미워서 두 사람을 매섭게 흘겨보는데, 문밖에서 루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정오입니다.”
그 말에 카놀라가 얼른 창밖을 확인했다.
“어, 에델 보러 가야 해!”
후사는 매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련한다. 그것은 자신을 지켜 주는 이가 얼마나 강한지를 보고 싶어 하는 나라의 많은 이들을 위한 대외적인 행사였다. 또한, 그들에게 군주의 후계자가 얼마나 강한 전사인지를 증명함으로써 그들의 신뢰와 지지를 얻기 위한 후사의 노력이기도 했다. 에델은 쉬고 난 다음 날부터 매일 공개 대련을 했다.
카놀라가 그 대련에 대해 알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그저 주변인들과 친분을 쌓아야 당사자를 꾀어내기도 좋다는 이유로 다섯 전사를 찾아 나섰다가 대련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에델은 오전 내내 군주와 함께 정무를 보았고, 정오엔 모두의 앞에서 대련한다. 이후 비공개 훈련을 한 뒤 오후 정무를 보러 궁으로 들어간다. 그는 오롯한 식사 시간마저 없을 정도로 바빴다. 그의 식사는 고기 위주의 식단으로, 언제나 정무를 보는 책상 위에서 이뤄진다고 했다. 저녁엔 귀족 계급인 라딘들과 함께 식사하는 겸 업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리고 저녁 이후엔 개인 서재에 틀어박혀 공부하고, 정확히 달이 중천에 뜨는 시간에 침소로 향한다.
카놀라는 그가 잠깐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신과 함께 도서관에 가 주었던 게 얼마나 큰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아마 사냥에 다녀온 직후에 종일 잠을 자는 그 시간은, 에델이 보낼 수 있는 가장 완벽하고 자유로운 휴식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되니 더는 멋대로 그의 손을 끌어당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매일 열리는 공개 대련에 참석했다. 첫날엔 모두의 눈초리를 한 몸에 받았고, 누군가는 들으라는 듯 그녀의 흉을 보았다. 유치하게 느껴지는 그 눈초리들에도 카놀라는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누구보다 목청 높여 에델을 응원했다. 덕분에 트리폴인들은 ‘이방인은 시끄럽고 낯짝이 두껍다’라는 편견을 가지게 되었지만, 카놀라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대련장에 도착한 카놀라는 뻔뻔스러운 얼굴로 에델을 응원할 작정이었다. 눈앞의 이 남자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디라즈께서 직접…….”
몇몇 트리폴인들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저 웅성거림만 보아도, 그라그포드가 이곳에 등장한 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카놀라도 마음 같아선 그들의 틈바구니에서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그라그포드와 그녀의 거리가 세 걸음만 멀었어도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의 바람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그라그포드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면서도 도통 먼저 입을 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카놀라가 애써 웃으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
“대련을 보러 오신 거죠? 재미있게 보십시오. 전 이만…….”
“시끄럽고 낯짝 두꺼운 이방인이 대련장에 출몰하고 있으니, 제발 관리해 달라고 간청을 해 대기에.”
카놀라의 웃는 낯이 경직되었다. 눈을 깜빡이며 잠시 먼 산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라그포드를 마주 보았다.
“제가 며칠 와 봤는데 그런 사람은 전혀 없던걸요? 게다가 시끄러운 소리라니.”
낯짝 두꺼운 건 확실하게 확인되었다.
“정혼자의 승리를 염원하는 정혼녀의 애타는 기도면 모를까.”
……시끄러운 것도 확인된 것 같다.
그라그포드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를 모시는 전사들이 재빨리 뒤로 따라붙었다.
카놀라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어쨌든 무사히 잘 넘어간 것 같다. 그녀는 늘 가던 자신의 자리 쪽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대련장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서 구경하기 때문에, 얼른 자리를 잡지 않으면 키가 큰 트리폴인들 사이에 껴서 곤욕을 치르게 될 터였다. 바쁘게 눈을 굴리는 그녀의 뒤에서 의아한 물음이 들려왔다.
“안 오고 뭐 하나?”
그대로 멀어진 줄 알았던 그라그포드가 카놀라를 빤히 보고 있었다. 카놀라가 경직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라그포드와 정반대 방향으로 가기 위해 내디딘 두 번째 걸음이 어정쩡하게 허공에서 멈추었다.
“네?”
“내가 시끄럽고 낯짝 두꺼운 이방인을 관리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 않았나? 그대가 내 옆에 오지 않으면 여기까지 온 까닭이 사라진다.”
카놀라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는 것을 확인한 그라그포드가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엔 미리 준비해 둔 것 같은 의자가 놓여 있었다. 높은 지대에 자리 잡고 있어서 대련장이 가장 잘 보이는 위치였다. 저기라면 다른 이들처럼 서서 고개를 이리저리 들이밀지 않고서도 편히 볼 수 있겠지. 그만큼, 모두의 주목을 한 번에 받을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카놀라는 한숨을 삼키며 그라그포드의 뒤를 어기적어기적 따라갔다. 언제나 카놀라의 몸통 박치기에 밀려서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던 구경꾼들이 기뻐하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니 더욱 불만스러운 감정이 치밀었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 내고 에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됐을 때의 그 희열을 느낄 수 없다니! 의자에 앉으면 보기야 편하겠지만 서서 보는 것보단 멀어진다. 에델의 얼굴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저 의자 자리의 아주 크고 치명적인 단점이었다.
“오스카, 안젤리나. 몰래 빠져나가기만 해.”
슬금슬금 걸음을 늦추던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헛기침하며 얼른 카놀라의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카놀라와는 달리 그녀의 시중인들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따라서 모두의 시선을 받을 의자 자리는 그들에게도 무척 부담스러운 곳이었다. 둘의 마음을 귀신같이 눈치챈 카놀라가 아니었으면 있는 듯 없는 듯 인파 속에 있다가 대련이 끝나면 다시 곁에 달라붙었을 것이다.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아깝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그런 두 사람을 흘겨보던 카놀라가 문득 둘보다 더 멀리 서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곤 와락 인상을 찡그렸다.
“루덱, 설마 너까지 날 배신하려고 한 거야?”
말뚝처럼 멈춰 서서 도통 따라올 생각을 안 하던 루덱이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요. 다만 군주께서 왕녀님을 해치진 않으실 테니 애써 저까지 함께할 이유가…….”
“주인의 고난은 곧 시중인의 고난! 셋 다 도망가기만 해. 절대 잊지 않고 복수할 거야!”
제 주인은 은근히 치졸한 면이 있었다. 게다가 치졸할 뿐만 아니라 끈덕지기도 하다. 그것을 뻔히 아는 세 사람은 더는 이 불편한 자리에서 빠져나갈 궁리를 할 수 없었다. 세 사람의 얼굴에 체념이 떠오른 것을 확인하고서야 카놀라는 한결 나아진 얼굴로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그라그포드는 이미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의자 자체는 평균적으로 사용되는 크기였는데, 그라그포드의 체격이 워낙 거대해서 그가 앉으니 어린애들 의자에 억지로 앉은 듯 보였다.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는 모습인데도 누구 하나 웃지 않는 이유라면 역시 그라그포드의 저 무시무시한 위압감 때문일 것이다. 특히 거칠고 무성한 수염은 그의 인상을 한층 더 험상궂게 해 주었다. 흰 머리칼이 아니었다면 에델의 아버지라는 것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체형을 보나 외모를 보나 그라그포드와 에델은 인종부터가 다르게 느껴졌으니까.
그럼 역시 에델은 어머니 쪽을 더 닮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카놀라가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에델의 어머니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여태 못 보았다면, 역시 일찍 돌아가셨다는 의미겠지.
“오늘의 대련 상대는 베르그르의 후손 무소입니다!”
대련 상대를 소개하는 걸 보니 곧 시작할 기세였다. 카놀라가 얼른 그라그포드의 옆자리에 달려가 앉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끔따끔하게 와 닿았지만, 카놀라는 에델이 나올 예정인 입구만 뚫어져라 응시했다. 확실히 가깝진 않아도 대련장이 한눈에 들어와서 보기엔 참 좋았다.
대련 상대인 무소는 상체 근육이 유독 두드러진 그라사였다. 특히 팔뚝은 어지간한 여성의 다리보다 두꺼워 보였다. 저 사람 사실은 평소에 사족보행을 하는 거 아닐까?
“후사께서 입장하십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에델이 입장했다. 성큼성큼 중앙으로 걸어 들어온 에델이 평소처럼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하려다 멈칫했다. 그리고 에델이 등장하고부터 내내 그에게만 시선을 두었던 카놀라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에델이 눈길을 준 곳이, 요 며칠 자신이 서 있었던 장소임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원래 후사는 대련하기 전 구경꾼들에게 가벼운 인사를 한다. 구경꾼들 틈바구니에 껴 있었던 카놀라도 당연히 그의 인사를 받았었다. 다만 그때마다 에델의 표정이 워낙 덤덤했던 터라 자신을 보긴 한 건지 늘 의문이었다. 응원할 때마다 목청을 높인 것도 그가 행여 자신의 존재를 모를까 걱정이 되었던 까닭이었다.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을 보니, 에델은 카놀라의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게다가 그녀가 어디에 서 있었는지도 알고 있었고!
에델은 금방 정신을 차리고 구경꾼들에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군주가 앉은 의자 쪽을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의 옆에 다소곳하게 앉아 있던 카놀라는 에델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 팔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사뭇 경박스럽기까지 한 그녀의 몸짓에 그라그포드마저 무심코 옆을 돌아볼 정도였다. 그러든가 말든가 격렬하게 손 인사를 한 카놀라가 아주 기쁘다는 듯 웃었다.
실은 정말로 기뻤다. 에델이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한 기분이었으니까.
“팔이 빠지겠군.”
“제 팔은 생각보다 튼튼하답니다. 걱정해 주신 점은 너무 감사드려요!”
들뜬 감정이 가득 담긴 그녀의 대꾸에 그라그포드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에델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던 카놀라는 그의 표정 변화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알았다 한들 딱히 신경 쓰지도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평소라면 곧장 대련을 시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디라즈가 직접 참관을 하러 온 날이니, 따로 인사를 해야 마땅했다. 에델이 의자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충분히 다가온 그가 그라그포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테드라고의 긍지를 지키겠습니다.”
그라그포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그는 이렇다 할 격려의 말조차 내뱉지 않았다. 에델 역시 답을 기대하진 않았는지, 바로 돌아서려는 기색을 보였다. 아마 생각지도 못했던 목소리가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그대로 떠났을 것이다.
“제가 무운을 빌어 드려도 될까요?”
발랄하게 끼어든 목소리의 주인공은 카놀라였다. 이쯤 되니 그녀가 나서는 게 놀랍기는커녕, 조금은 당연하게 느껴졌다. 에델이 카놀라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가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는 무심한 표정으로 카놀라와 에델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그리고 카놀라는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한 표정과 눈빛으로 에델과 그라그포드를 보았다.
결국 그라그포드가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그 고갯짓을 보기 무섭게 몸을 일으킨 카놀라가 단숨에 에델에게 달려갔다. 대련장은 낮은 울타리로 둘려 있었지만 그건 그저 공간을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 마음만 먹으면 뛰어 넘어갈 수 있었다. 물론 진짜로 뛰어넘었다간 당장 끌려 나가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평소보다 훨씬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에델은 울타리 앞에 바짝 와 있었기 때문에,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나 다름없었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카놀라의 눈을 본 에델은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뺄 뻔했다. 착각일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라고 외치는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리는 느낌이었다. 카놀라의 표정을 보니 속으로는 그런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게 확실했다.
그런데도 에델이 자리를 지킨 이유는, 달려오는 카놀라가 너무 해맑게 웃고 있는 탓이었다. 울타리 바로 앞까지 단숨에 뛰어온 카놀라가 숨을 골랐다. 그러곤 대뜸 손을 내밀었다.
“샤를만에서는 레이디의 기도가 기사의 무운을 불러낸다고 해요. 난 당신의 정혼녀니까, 내 기도는 당신에게 완벽한 승리를 선물할 거예요.”
속닥거리는 목소리엔 확신이 가득했다.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건 몇 번이나 겪어 본 행동이라 에델은 무심코 자신의 손을 그 위에 올렸다.
거친 손을 단단히 잡은 카놀라가 스스럼없이 고개를 숙였다. 내내 덤덤하던 에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따뜻한 입술이 도장을 찍듯 손등을 꾹 눌렀다.
“당신의 검에 무한한 찬사를.”
나지막한 속삭임과 함께, 카놀라는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멈칫하던 손안의 온기가 스르륵 빠져나갔다. 에델은 천천히 등을 보였고, 카놀라는 한참이나 우두커니 서서 그의 등을 응시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의자로 향했다. 돌아온 그녀의 표정엔 아쉬움이 역력했지만, 시합이 시작되자 죄다 잊은 듯 열성적으로 목청을 높여 댔다.
옆에 앉은 그라그포드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끄럽고 낯짝 두꺼운 이방인의 꼴이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던 그라그포드가 팔걸이를 지지대 삼아 몸을 비스듬하게 기울였다. 관자놀이를 꾹 누른 상태로 전방을 응시하니, 거대한 도끼를 든 무소가 보였다. 에델은 자신의 검을 들고 그와 대치한 상태였다. 앉은 자리에선 거리가 제법 있고, 옆모습이기도 해서 표정을 다 알아보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무소를 응시하는 에델의 눈동자가 진지하고 어둡게 가라앉았음은 알 수 있었다.
“근데 이거 너무 불공평한 거 아니에요?”
옆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음성에 그라그포드가 시선을 돌렸다. 카놀라는 아주 심각한 얼굴로 정면을 노려보다시피 하고 있었다. 잘못 들었나? 그라그포드가 막 다시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카놀라가 진지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적어도 체급 정도는 맞춰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누가 봐도 저 그라사의 덩치가 두 배는 더 크잖아요! 사람은 맞죠?”
시끄러운 이방인이라는 표현에는 혼잣말도 포함되어 있던 모양이지. 그라그포드는 관심을 끄기로 했다. 그러나 그의 결정이 무색하게도, 카놀라는 투덜거리듯 말을 이었다.
“물론 제가 건넨 행운의 키스가 모든 위험을 막아 주겠지만요. 군주께서는 잘 모르시겠지만, 은근히 그런 게 중요하답니다. 트리폴엔 그런 풍습이 없나요? 행운의 키스라든가, 행운의 입맞춤이라든가, 정 어려우면 행운의 뽀뽀라도?”
카놀라는 그라그포드의 대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듣고 싶은 특정한 대답이 있는 것 같았다. 혼자 조잘조잘 말을 늘어놓던 카놀라가 힐끔 옆을 보았다. 카놀라에게 고정되어 있던 그라그포드의 눈길은 다시 대련장으로 돌아간 상태였다.
역시 대꾸해 주지 않으려나?
카놀라는 미간을 좁히며 에델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제멋대로 손등에 키스한 그녀는 뒤늦게 이런 행동이 이곳에선 무례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 참이었다. 워낙 종잡을 수 없고 뭐든 적대적인 동네라,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밉다며 수군거리는데 트리폴의 정서와 맞지 않는 짓을 했다가 쫓겨날 빌미가 되면 어쩌나.
때문에 카놀라는 그라그포드의 입으로 ‘그런 풍습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싶었다. 입을 꾹 다물고 있는 저 굳건한 옆얼굴을 보니 그녀의 바람을 들어줄 것 같진 않지만 말이다.
무소가 도끼를 높이 치켜들었다. 햇빛을 받은 도끼날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도끼는 당장이라도 에델의 머리통을 쪼개 버릴 듯 매섭게 내리꽂혔다.
에델이 날렵하게 피했고, 도끼는 흙바닥을 깊이 팠다. 얕게 날리는 흙먼지를 보며 카놀라의 표정이 점차 굳었다.
오늘따라 대련이 좀 험악한 분위기였다.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건 불확실한 미신이 아니다.”
입을 틀어막은 손에 잔뜩 힘을 주고 있던 카놀라가 눈을 굴려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는 느긋한 눈길로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라그포드의 표정을 바라보던 카놀라가 정면을 보았다.
허공을 가르는 도끼를 가볍게 피하며 물러서던 에델이 순간 몸을 낮게 숙이고 파고드는 게 보였다. 카놀라는 그의 모든 행동을 다 따라갈 수 없었다. 그저 눈 한 번 깜빡하고 나니, 에델이 무소의 다리를 걷어차 넘어뜨린 상태였다.
휘몰아치던 도끼질이 무색하게도, 무소는 순식간에 뒤로 넘어갔다. 육중한 몸뚱이가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무소는 어떻게든 손을 움직여 도끼를 휘두르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무소의 가슴팍을 무릎으로 찍어 누른 에델이 도끼를 쥔 쪽의 손목을 발로 짓밟았다.
에델의 검이 무소의 목덜미에 바짝 겨눠졌다.
멍청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카놀라의 귓가로, 그라그포드의 무심한 중얼거림이 들렸다.
“오직 실력이지.”
불확실한 미신이 아니라 실력. 에델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로 그라그포드의 말을 곱씹던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대답은 이상했다.
그러니까 방금 그 대답은, 그라그포드가 내뱉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카놀라는 번뜩 떠오른 의문을 입 밖에 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곧 입을 다물어야 했다. 어째서인지 에델이 튕기듯 옆으로 구른 까닭이었다.
그대로 끝날 것 같던 대련은, 무식하리만치 강하게 에델을 밀치고 일어난 무소로 인해 조금 더 길어졌다. 얼핏 보이는 무소의 손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마 제 목에 겨눠진 검날을 빈손으로 움켜쥐곤, 발에 눌린 다른 손과 몸에 잔뜩 힘을 줘서 에델을 떨쳐 낸 모양이었다. 체격 차이가 너무 커 에델은 결국 물러서는 것으로 타협을 했고.
구경꾼들이 흥분한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그들은 누구에게로 향한 것인지 모를 응원의 목소리를 높였다. 카놀라도 기겁한 얼굴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곤 두 손으로 손나발을 만들어 고래고래 응원해 댔다.
“시끄러운 이방인으로 지내다 갈 작정인가?”
듣다 못한 그라그포드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폐부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막 내지르려던 카놀라가 그 자세 그대로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가득 들이켰던 숨을 조용히 내뱉은 그녀가 침착한 어조로 말을 했다.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정혼자를 응원하는 정혼녀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게다가 어디 갈 생각은 조금도 없고요.”
카놀라는 그라그포드가 은근슬쩍 ‘갈 작정’이라고 말한 것을 용케 부정했다. 정혼에 대한 마음만큼은 진심인 것이다.
그라그포드는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어지간한 이방인들은 트리폴인들의 적의를 쉽게 이겨 내지 못한다. 주변 분위기야 요 며칠 사이에 충분히 눈치챘을 텐데 어떻게 저리도 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게다가 눌러앉으려는 마음이 있긴 하다면 이렇게 만인의 눈초리를 살 행동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라그포드의 눈에는 카놀라의 말과 행동이 정반대로 보였다.
“애써서 눈에 띌 필요가 있나?”
그의 물음에 카놀라가 당연하다는 듯 말을 했다.
“모두가 알아야죠. 후사의 정혼녀가 이방인이라는 거. 다들 받아들이기 싫어해도 이게 현실인걸요? 제가 가져온 혼약서는 엄연히 정식 문서랍니다.”
막 에델의 몸이 뒤로 기울어졌다. 카놀라가 짧은 비명을 지르며 다시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라그포드는 에델의 대련에는 관심을 아예 끊어 버린 듯 카놀라에게 다시 물었다.
“혼약은 완벽하게 성사되지 않았다. 그대가 데려온 전사가 말을 전하지 않았나?”
다행히 에델은 금방 몸을 일으켰다. 체구가 작은 덕분에 상대방보다 곱절은 더 날쌔게 움직이고 있었다. 에델이 다시 우세해지는 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비로소 시선을 돌려 그라그포드를 보았다.
“지참금 말씀이시죠? 약속된 지참금보다 적지만, 그게 제게 문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반절의 지참금이라도 필요하셔서 절 이대로 두시는 거잖아요? 그 금액이 쓸모없다고 말씀하진 마세요. 안 믿을 거니까.”
약속된 양의 절반을 들고 온 주제에 무척이나 당당했다. 이쯤 되니 따로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카놀라를 훑어보던 그라그포드가 선심 쓰듯 말을 했다.
“들었겠지만, 이 혼약은 신전의 최종 승인이 필요하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 중이랍니다.”
카놀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번에야말로 고꾸라진 무소는 반격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무식하게 휘둘러 대던 도끼는 저만치에 던져져 있었고, 에델은 쓰러진 무소의 가슴팍을 밟고 선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라그포드가 감흥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승리했군.”
그러나 예상했던 환호성이 옆에서 터져 나오지 않았다. 그라그포드는 힐끗 옆을 보았다. 당연히 누구보다 에델의 승리를 기뻐해야 할 카놀라였다. 그녀는 그라그포드와 대화하는 중에도 틈틈이 몸을 일으켜 자신의 존재감을 피력했다. 그라그포드가 그 태도를 문제 삼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정작 지금은 조용하기만 했다.
카놀라는 울려 퍼지는 함성은 들리지 않는다는 듯, 그라그포드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말씀해 주세요, 이 결혼에 필요한 건 신전의 승인뿐인가요? 다른 걸림돌은 없나요?”
무언가 자꾸 겉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 느낌은 단순히 이방인에게 보이는 적의라는 설명만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그라그포드라면 무언가를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카놀라의 물음에 그라그포드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차며 도리어 되물었다.
“그리도 이 혼약을 성사시키고 싶은가? 어째서?”
“전 에델에게 반했으니까요.”
‘에델’이라는 이름을 내뱉는 카놀라의 목소리엔 조금의 주저함도 없었다. 그 대답을 들은 그라그포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내내 심드렁하던 그의 분위기가 조금 사납게 변했다.
“후사가 그리 부르라 허락했나?”
“네.”
덥수룩한 수염에 가려져 있는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어졌다. 날카로운 눈으로 카놀라를 바라보던 그라그포드가 대련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후사의 승리로 끝났음이 공표되고 난 뒤, 에델은 구경꾼들을 향해 가벼운 인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에게 인사를 끝낸 에델이 마지막으로 그라그포드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선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에델을 가만히 보던 그라그포드가 나지막한 음성으로 말을 했다.
“내일 정오에 안내인이 갈 거다.”
에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구경꾼들도 흥분감을 감추지 못하며 하나둘 자리를 떠나고 있었다. 웅성거리며 움직이는 구경꾼들 덕분에 대련장 주변이 소란스럽게 변했다. 그라그포드 역시 자리를 뜨려는 듯 몸을 일으켰다.
그라그포드의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카놀라는 한 타이밍 늦게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녀에게 무언가 불쑥 내밀어졌다.
무심코 받아 든 그것은 종이였다. 종이엔 아마도 어느 장소로 추정되는 곳이 적혀 있었다. 안내인이란 이곳으로 가는 걸 도와줄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을까? 가서 누군가를 만나라는 소리인가? 카놀라가 멀어지려는 그라그포드에게 다급히 말을 건넸다.
“여기에 누가 있는지 여쭈어도 될까요?”
그 물음에 그라그포드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내 누이.”
카놀라가 그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머릿속으로 차근차근 정리했다. 그라그포드의 누이. 그렇다면 시아버지의 여형제. 그러니까 시고모?
갑자기 시고모를 만나러 가라는 건가? 카놀라의 표정에 당혹감이 묻어났다. 그라그포드는 더 이상의 설명 없이 무심하게 몸을 돌렸다.
그는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 있는 카놀라를 두고 그대로 가는가 싶더니, 문득 멈춰 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기하고 있는 전사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라그포드를 보았다. 그러든가 말든가, 그라그포드는 카놀라를 돌아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대의 혼약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트리폴, 그 자체다.”
이번에야말로 그라그포드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도 카놀라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져 있던 시중인들이 후다닥 다가와서 그녀를 불렀지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꾸조차 하질 않았다.
그라그포드가 가 버린 방향을 하염없이 보던 카놀라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뭔가 많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도통 연관성이 없게 던져져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깜빡하고 못 물어본 것도 있었다.
‘전투에서 승패를 결정하는 건 불확실한 미신이 아니다.’
그 말.
‘오직 실력이지.’
그 대답. 어째서 그렇게 대답한 것이냐고 물었어야 했는데.
“왕녀님?”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의문 어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설명하는 대신 굳어 있던 다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터벅터벅 걸으면서도 뒤죽박죽된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앞을 제대로 보지도 않고 있었다. 옆에서 안젤리나가 넘어지겠다며 경고했지만, 팔짱을 낀 채 골똘히 생각에 잠긴 카놀라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후사의 혼인을 ‘승인’해 줄 권한이 있을 정도로 강인한 신전. 군주마저 신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은 이 트리폴을 돌보는 존재이기도 하니까, 트리폴인들은 당연히 신을 믿겠지.
티보치나도 에델도, 신의 분노라는 둥 가호라는 둥의 표현을 사용했었다. 그 믿음은 생활 전반에 걸쳐서 자리 잡고 있을 테고, 전사들로선 전투의 승패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니 승패를 결정하는 건 당연히 신의 뜻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게다가 자신의 입으로 ‘트리폴’을 ‘걸림돌’이라고 말하다니. 아무리 카놀라의 입장에서 한 말이래도…….
“……이상하잖아.”
누구보다 트리폴을 소중히 여기고, 신전의 뜻에 순응할 군주가 내뱉기엔 대답들이 너무 이상하잖아.
*
허리를 펴자 뻐근함이 일시에 몰려왔다.
“모두 찾았습니다. 다행히도 둘은 정상입니다.”
몸을 일으킨 티보치나가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군데군데 부서진 잔해들과 말라붙은 핏자국이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며칠 새 집은 폐가나 다름없이 변했다.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지 겨우 5일 만에, 처음부터 빈집이었던 것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남은 짐승들을 처리하던 그라사 몇 명이 발견했습니다. 동굴에 숨어 있었답니다.”
그녀를 며칠째 이곳에 붙들어 놓았던 문제가 드디어 해결되었다. 티보치나는 보고를 들으며 걸음을 옮겼다. 마차는 멀리에 있지 않았다. 담요를 뒤집어쓴 아이 둘이 벌벌 떨면서 주변을 살피는 게 보였다. 아이들은 마차 앞에 엉거주춤 서 있었는데, 아직도 공포심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연신 경계를 하는 중이었다.
“검은 늑대들은 다 처리했으니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단다.”
티보치나의 말에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티보치나를 보던 아이들이 이내 울먹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신녀님.”
아이들의 눈물은 안도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긴장이 풀리고서야 비로소 슬픔이 밀려온 것이었다. 티보치나의 표정이 씁쓸하게 변했다.
산맥 안에서는 거대한 도시를 이루기가 쉽지 않았다. 어느 정도의 규모가 되고 나면, 결국 남은 이들은 도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인근 지역에 터를 잡아야 했다.
운 좋게 넓은 마을 단위로 형성되면 차라리 다행이지만 이렇게 두세 가구씩 떨어져 살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리고 깊은 산맥에 덩그러니 자리한 집 두어 채는 종종 야생동물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다. 마을과 가까운 집들은 괜찮은데 이곳은 외진 곳에 자릴 잡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이 집엔 그라사가 없었니?”
“아, 아버지는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저희는 아직 성인식을 치르지 못해서…….”
티보치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아이들의 어머니가 홀로 늑대를 상대했다면 오히려 피해가 적었다고 할 수 있다. 한 사람의 목숨을 내놓고 아이 넷을 지켜 냈다는 의미니까. 게다가 둘은 정상이다. 그라사 하나의 목숨으로 그라사 둘을 살린 셈이니 최악은 아니었다.
“그, 그런데 저희 형이랑 누나는 어디 있나요?”
치미는 울음을 꾹꾹 억누른 아이가 눈물을 훔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티보치나는 대답 대신 제 옆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신전 관계자가 아이들을 마차에 태웠다. 아이가 재차 자신의 형제에 관해 물었지만, 관계자는 아이를 어르며 태우는 데에 집중할 뿐이었다. 뒤이어 아이들의 상태를 돌봐 줄 신녀 둘이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출발하는 것을 확인한 티보치나가 몸을 돌렸다. 난장판이 된 집을 빙 둘러 뒷마당에 가니, 피 냄새가 물씬 풍겨 왔다. 서 있는 신전 관계자들 사이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남매가 보였다. 아까 마차를 타고 간 아이가 찾던 형과 누나였다.
티보치나의 등장에 관계자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티보치나는 인사를 받는 대신, 남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남매는 피투성이였다.
“여자애가 다리를 물어뜯겼고, 남자애는 여자애를 구하려다 크게 다쳤습니다.”
티보치나에게 가까이 다가온 관계자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설명을 했다. 굳이 그의 설명이 아니라도 너덜너덜한 다리와 팔은 눈에 확 띄었다. 방금 다친 상처도 아니었다. 어설프게 맨 천은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물들어 있었다. 족히 하루는 지난 상처이니, 상태에 따라선 잘라 내야 할 수도 있다.
“둘 다 회복할 수 없을 듯합니다.”
“시, 신녀님! 피그린이 우릴 지켜 주었습니다! 그러니 제발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다급하게 입을 연 이는 여자애였다. 그녀는 제 형제를 두 팔로 끌어안고 있었는데, 척 봐도 남자애의 상태가 상당히 안 좋아 보였다. 단지 팔만 잃은 것이 아닌 모양이다.
티보치나가 천천히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피그린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은 티보치나가 그의 옷을 들추었다. 여자애가 반사적으로 그 손길을 막으려 했으나, 다른 관계자들이 그녀를 잡는 바람에 뜻을 이룰 순 없었다.
두꺼운 가죽 외투에 가려져 있던 상체는 피투성이였다. 상처가 많았지만, 특히 옆구리를 깊이 긁힌 것 같았다. 말라붙은 상의 사이로 벌어진 살이 보였다. 티보치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여자애의 목소리도 더욱 절박하게 울려 퍼졌다.
“제발, 신녀님! 쓸모없는 건 저입니다! 피그린은 훌륭한 그라사가 될 겁니다! 그러니……!”
“이 애는 회복할 수 없을 겁니다.”
나지막하게 말을 내뱉은 티보치나가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말에 관계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남자애와 여자애를 떼어 놓았다. 울부짖으며 끌려가는 여자애를 힘없이 돌아본 피그린이 티보치나를 올려다보았다.
“제 누나는…… 세트는 살려 주십시오. 누나는 많이 다치지 않았어요.”
가냘픈 목소리를 따라 흘러나온 하얀 입김이 허공을 맴돌았다가 사라졌다. 티보치나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확인한 피그린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덤덤히 제 처분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티보치나의 표정에 짙은 슬픔이 서렸다.
“대지의 신이 영혼을 인도하시리, 있어야 할 곳에서 안식을 얻으라.”
짧은 기도를 마친 티보치나가 뒤로 물러섰다.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관계자들이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허공에 치켜든 검이 피그린의 고통을 단숨에 끊어 냈다. 입술을 꾹 다물고 그 광경을 끝까지 바라본 티보치나는 천천히 번져 가는 피 웅덩이에 시선을 고정했다. 피에선 옅은 김이 올라왔다. 입 안이 썼다.
피그린의 누나, 세트는 집 앞마당 쪽에 잡혀 있었다. 흘러내린 눈물로 인해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관계자들에게 양팔이 잡혀 늘어지듯 서 있는 세트를 물끄러미 보던 티보치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세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티보치나의 얼굴을 확인한 세트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녀는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사실 세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의 보호자는 이제 없다. 게다가 심각한 상처까지 입은 상황이다. 트리폴인이라면 누구라도 다음 절차를 알고 있었다. 나라에서 어떠한 역할도 맡지 못하게 된 이가 맞게 되는 최후.
“상처는 어떻던가요?”
“일단 보이는 부분만으로 판단하자면, 잘라 내야 할지도 모릅니다. 다행히 다른 부분에는 큰 부상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어머니를 잃고 난 뒤 앞장서서 남은 아이들을 지켜 낸 이는 피그린인 모양이다. 아마 세트와 피그린 둘 중 하나만이라도 덜 다치는 쪽을 선택하려 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세트보다는 팔을 다친 피그린이 늑대들에 대응하기엔 더 쉬웠겠지.
티보치나는 제 생각을 정정했다. 두 사람의 목숨으로 아이 셋을 지켜 냈다. 그중 정상은 둘이니, 전혀 안도할 일이 아니었다. 그라사 둘의 목숨으로 그라사 둘을 살려 낸 셈이다.
티보치나는 울고 있는 세트의 앞으로 다가갔다. 세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네 동생들은 신전으로 보내졌다. 고아원에서 훌륭한 그라사로 성장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피, 피그린은요?”
“그 애는 이미 훌륭한 그라사였다. 신께서는 두 그라사의 희생을 잊지 않으실 거야. 그 희생을 생각해서라도, 넌 강인해져야 한다.”
세트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가늘게 떨리는 어깨는 그녀가 여전히 울음을 삼키고 있다는 걸 알게 해 주었다. 티보치나는 씁쓸한 눈으로 그 모습을 보다가, 세트를 잡은 관계자들에게 눈짓했다. 관계자들이 세트를 부축해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향하는 곳엔 또 다른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세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마부석 쪽으로 다가갔다. 언제든 출발할 준비를 마친 마부가 티보치나를 발견하곤 물음을 던졌다.
“신전으로 갈까요?”
“아니.”
티보치나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세트는 거의 걷지 못하고 있었다. 적어도 한쪽 다리는 이제 평생 쓰지 못할 수도 있다.
“해돋이 협곡으로.”
*
“해돋이 협곡이 도대체 뭐 하는 곳이지?”
카놀라는 몇 번이나 종이를 들여다보았지만, ‘해돋이 협곡’이라는 글자 외엔 그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종이를 노려보았다.
“혹시 우리를 눈엣가시로 여긴 나머지 처리해 버리려는 속셈 아닐까요?”
루덱이 넌지시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정오에 딱 맞춰서 온 안내인은 그들을 마차로 인도했다. 트리폴에 도착한 이후로는 처음 타는 마차였다.
마차를 타고 나가야 할 정도로 먼 곳이라니, 대번에 의심부터 들었지만, 군주가 보낸 안내인을 내칠 수도 없었다. 고민하던 루덱은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불평을 귓등으로 들으며 함께 마차 안으로 몸을 욱여넣었다. 세 사람에 비해 제법 덩치가 큰 루덱은 마차 안에서 상당히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허리와 무릎을 두드리며 연신 타박을 해 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처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이런 식은 아닐 거 같은데…….”
오히려 군주는 뭐랄까, 남들이 내비치는 적의와는 좀 다른 감정을 가진 것 같았다. 아리송한 눈으로 종이를 보던 카놀라가 힐끗 마차 밖을 내다보았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은 죄다 수풀과 나무뿐이었다.
“오스카, 안젤리나. 혹시 다른 시중인들한테 이곳 군주의 누이에 관한 이야기는 못 들었어?”
검지로 아래턱을 문지르던 카놀라가 넌지시 덧붙였다.
“누이가 엄청나게 괴팍한 성격이라더라, 뭐 그런 거 있잖아.”
“어휴, 누가 그런 소릴 저희에게 하겠습니까? 왕녀님만큼이나 저희도 왕따당하고 있잖습니까.”
“……나 왕따 아니거든? 티보치나랑도 친하고 후사의 다섯 전사랑도 인사하고 지내거든? 게다가 내 남편은 곧 군주가 될 사람이라고!”
가만히 그 말을 듣던 루덱이 슬쩍 끼어들어 그녀의 말을 정정했다.
“아직 남편은 아니죠.”
“곧 될 거야! 거의 다 됐어!”
이상한 데에서 울컥한 카놀라 덕분에 그들의 대화는 이상한 곳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네 사람이 마차 안에서 투덕거리는 동안, 마차는 목적지를 향해 착실히 달렸다. 마침내 네 사람의 대화가 서로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번져 갈 즈음, 마차의 속도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목적지에 거의 다 왔다는 걸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창가에 앉아 있던 오스카였다. 그는 듬성듬성한 자신의 머리카락을 공격하는 안젤리나의 말에 반박하다 말고 창밖에 시선을 빼앗겼다.
“어이구, 여기에 이런 장소도 있었네요!”
그 말에 다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내내 이어질 것 같던 수풀과 나무 대신, 탁 트인 하늘이 보였다.
“왕녀님! 그러시면 위험하다니까요!”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기겁하는 소릴 뒤로한 채, 카놀라가 마차 바깥으로 고개를 쭉 내밀었다. 찬 바람이 얼굴을 거세게 때렸다. 시야를 가리며 휘날리는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넘긴 카놀라가 마차 앞쪽을 빼꼼 내다보았다. 카놀라의 푸른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우와.”
가장 먼저 보인 건 돌로 만들어진 듯한 거대한 성벽이었다. 푸른 하늘을 등지고 선 성벽은 마치 땅의 끝에 다다른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카놀라는 주변을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마차 안에서 그녀의 몸을 잡아당기는 안젤리나 때문에 포기해야 했다.
“아무래도 말 그대로 협곡인 모양입니다.”
카놀라의 반대편 창문을 내다보고 있던 루덱이 툭 말을 내뱉었다. 카놀라의 시선이 그를 따라 바깥으로 향했다. 휙휙 지나가는 나무 사이로, 깎아지른 절벽이 보였다.
“……정말로 우릴 처리하려고 유인한 건 아니겠지?”
이 까마득한 절벽으로 마차째 밀어 버린다거나? 무심코 상상해 버린 광경에 소름이 돋았다. 카놀라가 몸서리를 치며 제 몸에 돋은 소름을 문질러 댔다. 설마 정말 그러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카놀라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안전띠를 맸다. 몇 번이나 함께 마차를 타면서도 띠를 매는 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오스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 온 것 같은데 웬 안전띠랍니까?”
“오스카. 마차에선 전 좌석 안전띠를 매야 하는 거 몰라?”
그러니까 그 전 좌석 안전띠라는 말 자체와 대척점에서 살아왔던 카놀라가 아닌가. 오스카는 숱한 과거의 행적을 지적해 주기 위해 입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마차가 멈추었다.
“다 왔습니다.”
바깥에서 안내인이 문을 열고 발판을 내렸다.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루덱이 먼저 발을 내디뎠다. 주변을 쓱 둘러본 그가 괜찮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카놀라가 방금 맨 안전띠를 다시 푸는 동안, 오스카와 안젤리나도 마차에서 내렸다. 뒤이어 내린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 봤던 성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크네.”
눈앞에서 보니 규모가 더욱 거대했다. 카놀라가 멀뚱멀뚱한 눈으로 성벽을 올려다보는 사이, 안내인은 마중 나온 사람에게 뭐라고 말을 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인 후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안내인은 바깥에서 대기하려는 모양이다. 감탄하느라 잠시 긴장을 풀고 있던 카놀라가 다시 경계 어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마차째 절벽으로 밀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지만, 저 안에 들어가면 뭐가 기다릴지 알 수 없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지?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이곳은 해돋이 협곡입니다.”
짤막한 설명은 무척이나 성의가 없었다. 카놀라는 불만스럽게 마중객을 흘겨보았으나, 그는 바쁘게 앞장서서 걷는 중이었다. 성문 앞을 지키는 이는 없었다. 몸수색도 하지 않았다. 무기를 압수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지 의심스럽게 생각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성문을 지나 안뜰로 들어서자, 카놀라의 양옆에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바짝 붙어 걸었다. 그것은 카놀라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자신들의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함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왕녀님, 이곳은 너무 적막합…… 으헙!”
속닥거리던 안젤리나가 이상한 소릴 내며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반응에 루덱이 반사적으로 검을 빼 들어 안젤리나가 본 곳을 겨냥했다. 오스카는 얼른 카놀라를 뒤쪽으로 당겼다.
이들의 요란한 반응에 앞서 걷던 남자가 비로소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잔뜩 얼어붙은 안젤리나의 시선을 확인하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뱉었다.
“저자에겐 공격할 능력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공격할 능력이 없다고?”
“보기와 다르게 겁이 많고 소심한 자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루덱과 오스카 등등에게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인물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덩치를 가진 그는 갈색의 거친 털가죽 외투를 입고 있었다. 덕분에 얼핏 보면 꼭 커다란 산짐승처럼 보였다. 손에는 길고 큰 장대 빗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는 건 그의 얼굴이었다.
카놀라는 상황도 잊고 멍청하게 눈앞의 상대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녹다 만 밀랍 인형과도 같았다.
“후사의 정혼녀시다.”
마중객의 무심한 설명에, 우뚝 서 있던 남자의 시선이 카놀라에게로 향했다. 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는데, 그러한 행동 때문인지 무척 어수룩하게 보였다.
“아, 안녕하십, 십니까. 야, 야스아입니다.”
“……반가워. 난 카놀라야.”
카놀라가 홀린 듯 대꾸했다. 그녀의 대답에 야스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아니. 일그러지긴 했지만, 그는 애써 웃으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떨리는 입매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어, 어서오, 십, 십시오.”
그의 어색한 미소를 보며, 카놀라는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지나쳐 루덱의 옆에 다다른 그녀가 검을 쥔 루덱의 손을 잡아 힘주어 아래로 내렸다. 루덱이 놀란 눈으로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얼어붙어 있던 카놀라의 표정이 비교적 침착하게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루덱을 힐끗 보곤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의를 시켰다.
“초면에 검부터 빼 드는 건 너무 무례하잖아. 그대의 무례함은 곧 나의 무례함이기도 해.”
그 말에 루덱이 즉각 야스아에게 사과를 하곤 검을 갈무리했다. 카놀라는 야스아에게 빙긋 웃어 주곤 마중객을 돌아보았다. 마중객은 무덤덤한 눈으로 카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지체했네. 다시 안내하도록 해.”
마중객이 선뜻 몸을 돌렸다. 카놀라와 시중인들 역시 그를 따라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안뜰을 가로질러 들어가자 몇 개의 건물들이 보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큰 건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길에 그들은 몇 명의 사람들을 더 만날 수 있었다. 누군가는 팔이 없었고, 누군가는 절뚝거렸다. 또 누군가는 과하게 굽은 등을 가지고 있었다. 마중객은 때때로 걸음을 멈추고 그들에게 카놀라의 정체를 일러 주었다. 그때마다 카놀라는 빙긋 웃으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곳입니다.”
건물에 들어선 마중객이 곧장 오른쪽 복도로 향했다. 그는 세 번째 문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나지막한 보고에 안쪽에서 뭐라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중객이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단출한 방의 풍경이 보였다. 꼭 필요한 가구 외엔 이렇다 할 만한 게 없었다. 장식품이나 그림 같은 것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중객은 카놀라에게 들어가라는 듯 문 옆으로 비켜섰다.
방으로 들어서자, 안쪽에 있는 커다란 창문이 먼저 보였다. 창문에는 커튼조차 달려 있지 않아서, 눈부신 햇살이 고스란히 비치고 있었다.
방의 주인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그 햇살을 받으며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앉은 흔들의자가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카놀라는 인사를 하는 것도 잊고 그녀를 멀거니 응시했다. 두 눈을 감고 햇볕을 쬐는 그녀의 모습이 무척 평화롭게 보여서, 차마 먼저 그것을 깰 수가 없었다. 하지만 카놀라가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방의 주인 역시 영영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았다.
“안녕하십니까.”
가지런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혀로 입술을 축인 카놀라가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인사말을 뱉었다.
“저는 샤를만의 왕녀, 카놀라 F. 인카나 샤를만입니다.”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며, 그녀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 눈동자는 미동 없이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실 천장을 보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흰 막이 덮여 있는 눈동자는 그 어디에도 초점을 두고 있지 않았다.
“샤를만의 왕녀?”
나지막한 목소리는 가냘프게 느껴졌다. 카놀라는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인기척을 숨기지 않았기에, 상대방 또한 카놀라의 위치를 인지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카놀라에게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실은 고개를 돌리는 행위가 그녀에겐 딱히 의미가 있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눈앞의 여성은, 맹인이었으니까.
“군주…… 디라즈의 누이신가요?”
카놀라의 물음에 그녀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흔들의자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이곳은 어찌 알고 왔습니까? 무엇을 바라든 나에겐 들어줄 힘이 없습니다.”
“뭔가를 의도하고 온 건 아닙니다. 디라즈께서 절 이곳으로 보내셨어요.”
“디라즈께서?”
그녀는 이상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잠시간 침묵하던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흔들의자의 팔걸이를 양손으로 꽉 잡은 그녀가 완전히 일어나서 카놀라를 마주했다.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우뚝 선 그녀는 상당히 큰 키와 체격의 소유자였다. 게다가 얼핏 드러난 옷 태로 보아 근육질인 것 같았다. 거기에 하나로 땋아 내린 흰 머리칼까지 더해지니, 그라그포드의 누이라는 걸 확인받을 필요조차 없게 느껴졌다.
“당신은 암살자인가요?”
“네? 전혀 아니에요! 전 몸 쓰는 일은 하나도 못 해요. 얼마나 연약한데요!”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그녀의 시중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정말이지 양심이라곤 조금도 없는 주인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사람이라고 저렇게 막 거짓말해도 되는 건가?
등 뒤에서 불신의 눈빛들이 쏟아지는 걸 느꼈는지, 카놀라도 그들을 힐끗 보았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시 정면을 보았다. 정말이지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날 감시하라던가요?”
목소리에는 혼란이 가득했다. 암살자도 모자라서 감시라니?
카놀라는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불신 가득한 말들에 당혹감을 느꼈다. 샤를만 왕궁에서야 오빠가 여동생에게 암살자를 보내고 감시자를 보내도 하등 이상하지 않다. 제 오빠와 언니가 허구한 날 주고받는 것들이었으니까. 하지만 트리폴에서 샤를만과 같은 왕위 다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가 읽었던 책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더더욱.
이곳은 왕족의 피가 큰 힘을 가지지 못하는 나라라고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전사이자 차기 군주로서 보여 줄 수 있는 압도적인 강인함이었다. 눈앞의 맹인 여성에게 마법 같은 아주 강한 힘이 있지 않고서는, 그라그포드와 후계 다툼을 할 구도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을 텐데.
“그럴 리가요! 전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하고 왔어요!”
펄쩍 뛰며 극구 부인하는 카놀라의 말에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처리할 생각이셨으면 살려 두지도 않으셨겠죠. 외국인에게 맡기지도 않으셨을 테고.”
그녀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그것은 카놀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정계 다툼에 끼어들게 된 거라면, 카놀라도 처지가 난처했다.
“그런데 샤를만의 왕녀라고 했던가요? 트리폴에 샤를만의 왕녀가 올 일이라면…… 트리폴이 침략당했습니까?”
어쩌면 성격일지도 모른다. 저렇게 비관적인 상상만 하는 걸 보면. 카놀라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못 들으셨어요? 전 후사의 정혼녀예요.”
“네?”
“후사의 정혼녀. 그러니까…… 제가 뭐라고 불러 드려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임의대로 부를게요. 그러니까 시고모님의 조카며느리요. 물론, 아직 정식 절차가 끝난 건 아니지만 거의 다 됐어요. 조금 찝찝하시다면 ‘예비’ 조카며느리라고 부르셔도 돼요. 하지만 전 그냥 시고모님이라고 부를게요.”
혹시나 또 이상한 방향으로 생각이 튈까 싶어, 카놀라가 재빨리 와다다 말을 쏟아 냈다. 천연덕스럽게 ‘시고모’라는 호칭까지 멋대로 결정해 버린 그녀가 여성의 안색을 살폈다.
여성은 여전히 놀란 표정이었다. 입을 살짝 벌리고 굳어 있던 그녀가 가까스로 연약한 목소리를 내었다.
“디라즈께서 후사의 짝으로 이방인을 받아들이셨단 말입니까?”
“그럼요! 음……. 결과적으로 보자면 혼약서에 서명하신 건 디라즈이니, 절 받아들이신 셈이겠죠? 정작 승인은 다른 곳에서 받으라고 하시는 게 문제긴 하지만요.”
뒷말엔 어쩔 수 없는 불만이 묻어났다. 카놀라의 말에 여성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여전히 그녀의 시선은 불확실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카놀라는 어쩐지 저 눈빛의 끝에 그라그포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사나운 목소리는 명백히 누군가를 향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그 자식이 이방인을 받아들였다고?”
아니, 잠깐만. 너무 급격한 인성 변화 아닌가요?
말문이 막힌 카놀라를 대신해 여성을 진정시킨 건, 여기까지 안내를 해 주었던 마중객이었다. 그는 이런 상황에 익숙한지, 놀라지도 않고 여성을 달랬다.
“손님 앞입니다, 비디움 님.”
그러나 침착하게 상황을 일깨워 주는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여성, 비디움의 목소리는 한층 더 높아졌다.
“흐반, 방금 못 들었어? 그 새끼가 이방인을 후사와 맺어 줬다잖아. 지가 양심이 있으면 그런 짓은 못 하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사이에 신전이 모두 불타 없어졌어? 몇 년 새에 종교라도 갈아치웠대? 아니잖아? 후사가 그간 얼마나 고생했는데 지금 애 놀리는 것도 아니고……! 아니, 그럼. 지금 이 왕녀를 데려온 건 누구야? 설마 후사가 왔어?”
‘후사’라는 단어를 내뱉는 목소리엔 약간의 흥분과 반가움이 묻어났다. 그러나 흐반은 순간적으로나마 밝아진 그녀의 기분을 무참하게 가라앉혔다.
“흐미르가 왔습니다.”
“흐미르?”
“네.”
덤덤하게 대답한 그가 문득 카놀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카놀라는 쉽게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본래 눈치가 빠른 편이었지만, 트리폴 내부 사정을 알지 못하는 그녀로서는 지금의 대화를 눈치껏 이해하는 데에 한계를 느끼는 중이었다. 애초 책으로 겨우 문화를 이해하는 중이니, 단숨에 지금의 상황을 꿰뚫어 보는 게 이상할 것이다.
좀처럼 끼어들지 못하고 눈을 굴리는 카놀라에게, 흐반이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바깥의 마차에서 대기하고 있는 안내자는 흐미르라는 이름을 가진 제 동생입니다. 참고로 디라즈께선 비디움 님의 동생이시고요. 그러니 저런…….”
“그라그포드 이 나쁜 새끼! 예나 지금이나 무뚝뚝하고 뻗댈 줄만 아는 놈! 지도 못 한 일을 후사에게 떠넘기다니! 아비 자격도 없는 자식! 게다가 뻔뻔스럽게 흐미르를 보내? 흐반이 내쫓지 못할 거란 걸 뻔히 알고 보낸 거겠지! 영악한 놈 같으니!”
“……험한 표현을 하셔도 이해해 주십시오. 옛날부터 워낙 허물없이 자란 사이시라.”
다른 건 몰라도 흐반이 비디움을 아주 오랫동안 모셨다는 건 확실하게 짐작할 수 있었다. 카놀라는 얼떨떨한 눈으로 비디움과 흐반을 번갈아 보았다. 그 와중에 비디움은 이 자리에 있지 않은 누군가를 향해 거침없는 독설을 뱉었다.
“겨울 산맥 정상에서 얼어 죽어 버려!”
카놀라가 살포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그건 좀…… 심한 말이라고 생각되었지만 차마 지적할 수 없었다. 길길이 날뛰는 비디움을 가만히 보던 흐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카놀라를 향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비디움 님이 저런 소릴 했다는 건 무조건 비밀입니다.”
애초에 이야기한들 누구도 믿지 않을 것 같다.
처음에 이 방에 들어설 때만 해도 어딘가 병약한 중년 여성의 이미지를 상상했던 카놀라는 자신의 편견 어린 시선을 새삼 반성했다. 트리폴인들은 모두가 그라사라고 했지. 눈이 안 보인다 한들 군주의 핏줄인데 병약함과 어울릴 리가 없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맹인이라는 점이 비디움에게 큰 단점이라고 느껴지지도 않을 정도였다.
어쨌든 언제까지고 저렇게 화내는 모습을 구경할 수는 없었다. 카놀라는 헛기침을 하며 비디움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물론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긴 한데, 일단 저도 상황을 좀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저도 같이 욕하고 싶은데. 아니면 화라도 내거나요.”
하염없이 그라그포드의 욕을 늘어놓을 것 같던 비디움이 멈칫했다. 말을 하면서도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는 기대가 없었던 터라, 카놀라도 덩달아 멈칫하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같이 욕하고 싶다는 말은 좀 과했나?
“안 되면 말고요.”
소심하게 덧붙인 그 말에 비디움이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급격하게 피곤해진 얼굴로 입술을 꾹 다물고 있던 그녀가, 이내 한숨을 내쉬며 다시 흔들의자에 앉았다.
“아무 데나 앉으십시오. 보시다시피 난 눈이 보이지 않아서, 이렇다 할 대접을 할 수 없습니다.”
의자에 등을 기댄 비디움이 이마를 짚으며 빠르게 말했다. 피로감이 역력한 그녀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 나라의 군주를 ‘새끼’, ‘자식’ 따위의 호칭으로 부르던 사람과 동일 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다시 봐도 너무 급격한 변화였다.
비디움이 진정되었음을 확인한 흐반이 어디선가 무릎 담요를 꺼내 왔다. 능숙하게 그것을 펼쳐서 비디움의 무릎에 덮어 준 그가 구석에 놓여 있던 의자 하나를 끌고 와 흔들의자 옆에 두었다. 그러곤 다과를 준비해 오겠다며 방을 나섰다. 흐반이 나가고 나니, 방 안에는 어색한 침묵만 감돌았다.
고민하던 카놀라가 쭈뼛쭈뼛 의자로 다가가 살포시 엉덩이를 댔다. 비디움은 입술을 꾹 다물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그녀의 안색을 가만히 살피던 카놀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시고모님도 제가 이방인이라서 싫으신 건가요?”
흰 막에 싸여 있는, 초점 없는 눈동자가 소리 난 곳을 찾으려는 듯 움직였다. 미묘하게 따로 움직이는 두 개의 눈동자는 약간 기괴해 보였다. 끝내 자신에게 닿지 못하는 비디움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가 기운 빠진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너무 당연한 걸 여쭤봤죠?”
“왕녀가 이방인인 게 무슨 상관입니까?”
대답은 생각보다 빠르게 튀어나왔다. 미간을 찌푸리며 도리어 되물은 비디움이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햇볕이 느껴지는 쪽으로 얼굴을 돌린 그녀가 눈을 감으며 말했다.
“중요한 건, 그라그포드가 이방인을 들였다는 거죠.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갑자기…… 흐반, 넌 뭐 들은 거 없어?”
마침 흐반은 쟁반을 들고 막 방문을 들어서는 참이었다. 쟁반을 탁자에 내려놓은 그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최근 들은 소식이라곤 펠디에 전염병이 돌아서 다 죽을 뻔했다는 내용뿐입니다.”
차는 다른 곳에서 미리 우려 온 모양이었다. 바로 잔을 채운 흐반이 찻잔을 넓은 창틀에 올려 두었다. 평소에 늘 잔을 두는 위치였는지, 비디움은 스스럼없이 그것을 잡았다. 카놀라도 제게 건네진 잔을 쥐곤 가만히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후사가 치료제를 찾았다며?”
“치료는 했지만, 상당수의 그라사들이 한동안 사냥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디라즈께선 그들의 몫까지 더해 작년의 두 배를 사냥하셔야 했을 겁니다.”
“그럼 꽤 바빴을 텐데 굳이 후사의 짝을 외부에서…….”
“지참금 때문일 거예요.”
갑작스럽게 끼어든 카놀라의 목소리에 흐반이 말을 멈추었다. 비디움도 창밖으로 향했던 고개를 카놀라 쪽으로 미미하게 돌렸다. 두 사람이 자신에게 집중했음을 확인한 카놀라가 넌지시 말을 이었다.
“디라즈께서 절 받아들이신 건, 제가 가져올 지참금 때문이었을 거예요. 아마도 이곳의 사정이 좀, 어려운 것 같으니까. 기대하셨던 만큼의 양을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적잖은 양이니까 분명 도움이 되겠죠.”
나름대로 가장 그럴듯한 추측이라고 생각했지만, 비디움은 단숨에 그녀의 말을 부정했다.
“트리폴은 지참금을 들고 오면 다 받아 줄 정도로 개방적인 곳이 아닙니다.”
“하지만…….”
“특히 디라즈라면 더욱 그래야 하고.”
비디움은 이상할 정도로 그라그포드의 행동을 단정 짓고 있었다. 가족이긴 하지만 자주 교류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이가 좋아 보이지도 않으니 서로의 고민을 다 아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카놀라는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내렸다. 그라그포드는 대체 왜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걸까? 비디움이 그라그포드에 대해 이토록 비판적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 혹시 이렇게나 무시무시한 나라이니 알아서 포기하고 돌아가라는 무언의 압박인 건가?
“왜 그렇게까지 단언하시는 건가요?”
궁금증이 가득한 카놀라의 물음에 비디움은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나마 진정되었던 어투에 다시 격한 감정이 묻어났다.
“그야, 그 자식은 내 올케도 지키지 못한 멍청한 동생 새끼니까.”
‘그대의 혼약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트리폴, 그 자체다.’
뇌리에 불현듯 그라그포드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을 가만히 곱씹어 보던 카놀라가 이내 눈을 크게 떴다. 나지막한 물음에 그녀가 느끼고 있는 당혹감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후사의 어머님이, 이방인이셨어요?”
“정혼녀라더니 그것도 몰랐습니까?”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되물은 비디움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등받이에 깊이 기댔다.
“내 올케는 에데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난 왕녀가 이방인인 건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깨달은 건,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누구의 곁에 서든 작았고, 누구와 겨루든 약했다. 타고난 신체 발육의 격차는 어릴 적부터 드러났다. 제 또래들을 따라잡기 위해 그는 남들보다 족히 두 배는 더 노력해야 했다. 아니, 그것만으로도 부족해서 잠을 잘 시간까지 쪼개야 했다.
자라는 동안은 약해도 되었다. 배우는 동안은 몰라도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성인식 이후 뒤집혀야 한다. 그는 마지막에 이르러선 그 누구보다도 강한 전사가 돼 있어야 했다. 그것만이 그가 살아남을 방법이었다.
억울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원망만 하며 주저앉아 있기엔, 그에겐 주어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승리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타고나는 것이 달라도 그 끝마저 정해지진 않는다.
그의 아버지는 늘 강조했다.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오직 실력뿐이라고. 압도적인 능력을 보여 준다면 저 잔혹한 신전마저 네 자격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방인의 자식이 후사라니.’
꼬리표처럼 따라붙던 말들을 모두 잠재운 게 언제였더라? 정식으로 후사가 된 이후에도 그는 종종 다른 전사들의 도전을 받았다. 특히나 그가 매일 치러야 하는, 의식과도 같은 대련이야말로 전사들이 그에게 도전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따라서 그는 족히 일 년 동안 죽을힘을 다해 상대방을 쓰러뜨렸다. 그 과정이 난폭할수록 구경꾼들에게 더 강한 인상을 심어 줄 수 있었다.
대련 중엔 비명조차 지르지 않는 그의 독한 모습에 결국 먼저 두 손을 든 쪽은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그가 반쪽짜리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떼어 내고 트리폴의 후사로 완전히 자리를 잡았던 날, 꼬박꼬박 대련에 참관하던 디라즈가 처음으로 공개적인 치하를 했다.
그 후 디라즈는 더는 그의 대련에 참관하지 않았다. 그것은 보지 않아도 믿는다는 신뢰의 증거였다. 모두가 그것을 이해했고, 신전은 후사의 자격을 운운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전사들과 대련했지만, 상대방에게 과거와 같은 적의는 받지 않았다.
비로소 그는 이 나라의 구성원이자 군주의 후계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무척 기묘했다. 자신을 피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익숙해져 있었던 그가, 자신을 신뢰하는 눈빛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그것은 신뢰라기보단 경외였다. 모두가 그를 무슨 ‘천재’처럼 생각했다. 역시 테드라고의 핏줄이라고 찬양했다.
모든 일족은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인한 일족인 테드라고는, 지상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체의 피를 잇는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믿음과 긍지가 이제껏 테드라고 출신 군주를 만들어 냈다.
반쪽짜리라고는 하나 그 역시 테드라고의 핏줄을 이었고, 흰 머리칼이 피의 근원을 증명했다. 사람들은 그라그포드가 그러했듯 그의 자식 역시 뭐든 해낼 수 있으리라고 믿기 시작했다.
제 반쪽을 겨우 지워 낸 그에게, 이방인 왕녀의 등장은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요 며칠 사이 그는 다른 업무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로 깊은 고민과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라의 열악함이 이방인에게 길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그라그포드의 생각을 모두 다 알 수는 없었다.
그가 생 대부분을 어떻게 보냈는지는 누구보다 그 아비가 잘 알고 있다. 이제 와서 이방인을 후사의 짝으로 들이면 겨우 잠재웠던 논란의 불씨를 다시 키우는 꼴이다. 게다가 어제의 풍경은…….
생각에 잠겨 있던 에델이 무심코 아랫입술을 씹었다. 언제나처럼 무심하게 앉아 있던 아버지. 그리고 그 곁에서 요란한 소리로 응원하던 왕녀.
기별도 없이 대련장을 찾은 디라즈의 모습에 모두가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대련장에 나타난 건 몇 년 만의 일이니까.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대련 내내 카놀라를 곁에 앉혀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덕분에 그 광경은 대련을 구경한 사람들의 입을 통해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이방인 때문에 소동이 일어났던 게 불과 이십여 년 전이다. 대부분의 트리폴인들은 그것을 잊지 않고 있을 테고, 지금이 그때와 같은 상황이라는 걸 금방 인지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잠시나마 잊고 있었던 후사의 핏줄에 대해서.
“후사, 맡겨 주시면 저희가 금방 다녀올 텐데요.”
무심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던 에델이 힐끗 옆을 보았다. 울란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대련을 끝내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길을 나서는 모습이 꽤 걱정스럽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예전엔 이런 걱정들을 무척 불쾌하게 받아들였었다. 겉으로 보이는 체격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그가 자신을 나약한 애 취급 한다고 느낀 까닭이었다. 하지만 이젠 울란의 저런 눈빛이 제 주군을 위하는 순수한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에델은 그에게 대꾸해 주기 위해 입술을 뗐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롬이 촐싹대는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눈치 없긴. 직접 만나러 가고 싶으신 거잖아!”
에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는 살짝 벌어졌던 입술을 닫으며 롬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롬은 다 안다는 듯 방정맞게 웃었다. 울란이 의아한 눈으로 롬을 돌아보았다.
“누굴?”
에델은 롬의 입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반사적으로 롬의 말에 반박할 몇 가지의 대답을 머릿속에 준비했다. 다만 표정만큼은 평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서, 롬은 에델의 철저한 대비를 알아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실실 웃으며 울란을 보던 롬이 우렁찬 목소리로 자신이 생각하는 답을 외쳤다.
“비디움 님 말이야! 맞죠, 후사?”
“아, 그렇군! 비디움 님을 뵌 지 아주 오래됐지.”
울란이 탄성을 내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롬은 눈을 반짝이며 에델을 돌아보았다. 주군의 마음을 잘 알아채는 수하로 칭찬이라도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재촉하듯 맞느냐고 되묻는 그의 모습에, 에델은 애써 치미는 한숨을 되삼켰다. 잠시나마 곤두섰던 신경을 잠재우며 그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롬이 울란에게 우쭐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을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에델은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숲이 잦아들고, 어울리지 않는 평원이 펼쳐졌다. 해돋이 협곡이라는 다소 감상적인 이름이 붙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깊은 산속에서는 볼 수 없는 해돋이를 이곳에서는 아주 또렷하게 볼 수 있으므로.
넓게 펼쳐진 평원과 하늘이 맞닿은 지점엔 거대한 성벽이 세워져 있었다. 성벽 뒤로는 깎아지른 절벽이 자리하고 있는데 좁고 깊은 협곡의 시작점이자, 에데사인들이 트리폴을 침략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유일한 길목이었다.
에데사의 침략은 이제 먼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트리폴은 역사를 잊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협곡에 성을 짓고 적의 침략을 경계했다. 적이 이 협곡에 들어서는 순간, 저 성에서 사는 트리폴인들은 제 목숨을 내놓고 그들을 막아설 것이다. 그러기 위해 존재하는 성이었다.
정상이 아닌 몸을 가지고서도, 그렇게라도 그라사로서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만들어 둔 감옥과도 같았다.
“고모님을 마지막으로 뵌 게 몇 개월 전이었지?”
“봄 사냥 전이었으니, 꽤 오래되었습니다. 올해는 사냥 일정만으로도 정신이 없었으니까요. 게다가 탐사 문제도 있었고요.”
전사들이 단지 사냥만 하는 건 아니다. 산맥을 헤치고 다니며 새로운 지역을 가장 처음 탐사하는 것 또한 중요한 임무였다. 그러다가 운 좋게 약초 군생지라도 발견하게 된다면, 근방 야생동물들을 처리하고 일꾼들이 오갈 수 있는 길목을 만든다. 동물들의 서식지도 파악해야 하고, 벌목장도 틈틈이 기록해 두어야 한다. 전사들이 지도의 초안을 만들고 안전을 확보해야만 일꾼들이 업무를 분담해서 진행할 수 있으니만큼, 에델을 비롯한 많은 그라사들은 집에서 자는 시간보다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덕분에 비디움을 찾아가는 일도 점점 요원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해돋이 협곡은 수도와 거리가 있어서, 가려면 따로 시간을 내야 한다. 오늘도 카놀라를 데리러 가는 게 아니었다면 이렇게 나서지 않았을 것이다.
“흐미르가 모셨나 봅니다.”
투갈이 멀리 보이는 사람을 확인하곤 넌지시 말했다. 성벽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마차에 낯익은 사내가 앉아 있었다. 디라즈의 가까운 곳에서 시중을 드는 흐미르였다. 흐미르 역시 에델을 알아봤는지, 마부석에서 내려섰다. 투갈의 옆에서 말을 몰던 롬이 의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군주께선 왜 그 왕녀를 여기로 보내신 걸까요? 게다가 흐미르까지 붙여서.”
혼잣말 같은 그의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울란이었다.
“흐미르가 오지 않았으면 이방인은 저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했을 거야.”
“저곳에는 흐반이 있으니까.”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라다크도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에 롬이 볼을 긁적였다.
“그렇다면 역시 비디움 님께 보내신 건데?”
하지만 어째서?
여전히 의문이 가득했지만,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성벽 앞까지 도달했다. 성문을 지키고 있던 문지기들이 에델을 확인하곤 곧바로 문을 열었기에, 말을 멈출 필요는 없었다. 흐미르의 묵례를 받으며 에델이 성문 안으로 말을 몰아 들어갔다. 몇몇이 에델을 맞이하기 위해 대기 중이었다. 그들에게 말을 맡긴 에델은 곧장 비디움의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 카놀라가 있는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예상대로, 이미 건물 입구에서부터 카놀라의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비디움의 방은 입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방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루덱이 에델을 발견하곤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는 카놀라에게 보고하려는 듯 몸을 움직였으나, 손을 들어 만류하는 에델의 모습에 곧 걸음을 멈추었다.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는 금방 뒤따라온 웃음소리에 묻혔다. 크지 않은 방 안에는 꽤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카놀라가 데리고 다니는 두 명의 시중인과 흐반, 그리고 비디움과 카놀라까지.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이는 역시나 카놀라였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빛 덕분에 카놀라의 황금색 머리카락은 반짝반짝 빛이 났고, 웃음소리는 온 방 안을 울렸다. 얼핏 보이는 옆모습에서 한껏 올라간 입매와 가늘게 접힌 눈매가 엿보였다.
문고리를 잡고 잠시 우두커니 서 있던 에델이 멈췄던 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고모님.”
에델이 부른 건 비디움이었지만, 먼저 돌아본 이는 카놀라였다. 놀란 듯 동그랬던 눈동자가 이내 기쁨으로 물들어 갔다. 에델은 다음 장면을 아주 쉽게 예상할 수 있었다.
그녀는 곧 화사하게 웃으며, 아주 반갑다는 듯 그의 이름을 내뱉을 것이다.
“에델.”
바로 이렇게.
카놀라에게 살짝 묵례해 인사를 한 에델이 비디움에게 다가갔다. 몇 개월 새에 부쩍 주름이 늘어난 비디움이 에델의 인기척을 느끼곤 미미하게 웃었다.
“후사, 이게 얼마 만이지?”
“늦게 찾아뵈어 죄송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가 와 주니 언제나 잘 지냈던 기분이다.”
그 대답에 에델이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비디움 옆에 앉아 있어서 에델의 얼굴을 바로 볼 수 있었던 카놀라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언제나 무뚝뚝하게 굳어 있던 모습만 봐 왔으니 당연했다.
온화한 눈으로 비디움을 응시하던 에델이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갑작스럽게 자신을 보는 그의 시선에 카놀라가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이젠 저 얼굴에 익숙해진 줄 알았는데, 사실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소랑 다른 표정을 발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다시 반해 버리다니. 카놀라는 열이 오르는 뺨을 손으로 감쌌다. 이 남자의 외모는 늪이야.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바깥까지 웃음소리가 들리던데요.”
비디움을 만나서일까? 에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웠다. 카놀라는 얼른 제 심장을 부여잡았다. 평소보다 많이 날뛰다 못해 여차하면 몸 밖으로 튀어 나갈 기세였다. 자신의 날뛰는 심장을 다스리느라 바쁜 카놀라를 대신해 대답한 이는 비디움이었다.
“이것 좀 보렴, 후사. 글쎄 새아가가 내 초상화를 그려 줬지 뭐니!”
에델은 잠시 고민했다. 뭐부터 지적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순서를 정하던 그는 우선 자신의 앞에 들이밀어진 종이를 먼저 지적하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고모님, 제 눈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아, 그거라면 이렇게 봐야 해요!”
이성을 되찾은 카놀라가 얼른 나서서 에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러곤 그의 손가락을 종이 표면에 가져다 댔다. 그냥 하얗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만져 보니 표면에 선이 그어져 있었다. 뾰족한 물건으로 자국을 낸 것 같았다.
에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카놀라가 이끄는 대로 표면을 쓸어내리던 그가 앉아 있는 카놀라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챈 카놀라가 문득 뭔가를 떠올리곤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원래 에델을 제일 먼저 그리고 싶었지만, 이해해 줘요. 언제 또 올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대신 이다음엔 꼭 에델을 그려 줄게요!”
카놀라의 말에 비디움이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후사가 보기에도 내가 이 초상화처럼 예쁘게 생겼니?”
에델은 흰 종이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종이에 여러 가지 선이 그어져 있다는 건 만져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 선들이 연결되어 어떤 형상을 그리고 있는지는 상상할 수 없었다. 혀로 메마른 입술을 축인 그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네.”
비디움이 정말로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그 웃음에 카놀라가 뿌듯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곤 ‘제 말이 맞죠?’라며 의기양양하게 말을 건넸다. 에델은 비디움에게 속닥거리느라 바쁜 카놀라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조금 더 낮아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름답습니다.”
카놀라는 비디움에게 집중하느라 에델의 시선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나 에델은 아쉬운 기색 없이 뒤로 물러섰다. 잠시나마 풀어져 있던 그의 얼굴이 평소의 덤덤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고모님, 저희는 이만 가 봐야 합니다. 모처럼 왔는데 오래 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 후사의 바쁜 일정이야 모르는 이가 없겠지. 한데 새아가도 가야 하니? 흐반, 벌써 시간이 그리 늦었나?”
저만치 물러나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던 흐반이 힐끗 창밖을 보았다. 하늘 색이 변할 정도로 오래되진 않았지만, 해의 위치로 보건대 노을이 멀진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수도까지의 거리가 아주 먼 것은 아니어서 벌써 출발할 필요는 없었다.
모처럼 비디움이 즐거워 보이니 조금 더 머무르시라고 권유하고 싶은 마음도 얼핏 들었다. 하지만 흐반은 자신의 소소하고 개인적인 욕심을 금방 접었다.
“해가 지려면 멀었지만, 아까 신전 마차가 이곳으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받았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흐반의 말에 비디움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녀는 조금 전까지 아쉬워하던 게 무색할 정도로 단호하게 카놀라를 떼어 냈다.
“어서 돌아가도록 해. 새아가, 신전은 마주쳐서 좋을 게 없는 집단이야.”
갑작스럽게 바뀐 비디움의 태도에 카놀라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을 밀어 내는 손길을 따라 얼떨결에 몸을 일으킨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이미 비디움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신전을 껄끄러워하는 마음이야 백번 이해했다. 하지만 이렇게 마주치는 것조차 만류할 정도로 진저리 치는 모습은 약간 과해 보였다.
어정쩡하게 서 있던 카놀라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티보치나는 저의 친구인걸요?”
티보치나는 신전의 수석 신녀다. 하지만 누구보다 카놀라에게 친절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가 없었다면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적응을 하기도 무척 요원했으리라. 후사의 다섯 전사와 만나게 해 준 사람도 티보치나다. 카놀라에겐 더없이 고마운 존재였다. 물론 그녀가 결국 카놀라를 내쫓기 위해 함께하는 것이라고 해도, 당장 도움을 주었다는 걸 잊고 싶지는 않았다. 애초에 티보치나가 아니었다면 이 지경에 이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러나 카놀라의 말에 비디움은 도리어 한숨을 내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신전은 이방인을 배척하는 데에 누구보다 앞장서는 이들이야. 새아가는 너무 착하고 순한 아이라 내가 참 걱정이다.”
카놀라의 옆에 서 있던 에델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이야말로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도대체 사람을 어떻게 구워삶아야 저렇게 엄청난 착각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예전부터 느꼈는데 정말 용한 재주를 가진 왕녀였다. 비디움이 기본적으로 이방인에게 관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하고서라도 지금의 친근감은 도통 몇 시간 만에 쌓은 것으로 보이질 않았다. 혹시 아무도 모르게 이 성을 오가며 비디움을 만나 왔던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에델의 쓸데없는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비디움이 갑자기 화살을 돌려 에델에게 말을 걸었다.
“후사, 새아가를 잘 챙기렴. 제사장이 가만둘 리 없어.”
저 ‘새아가’라는 호칭은 또 어쩌다 튀어나오게 된 걸까? 대답 대신 엉뚱한 궁금증이 먼저 솟아났다. 에델이 잠깐 다른 곳에 집중한 사이, 카놀라가 비디움의 손을 살짝 잡으며 대신 대답했다.
“적어도 티보치나는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가 더 주의할게요! 시고모님께 걱정을 끼치고 싶진 않으니까요.”
쾌활한 카놀라의 말에 비디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신전에 관해 이야기하느라 차갑게 굳어 있던 얼굴에 온기가 감돌았다.
“어쩜, 말을 이리 예쁘게 하니?”
“시고모님이 예쁘게 들어 주셔서 그런 거죠!”
“혹 그라그포드가 네게 나쁜 말을 하면, 꼭 내게 이르렴.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놈 수염은 내가 다 뽑아 버릴 능력이 있으니까.”
그거야말로 가장 대단한 능력 아닌가? 군주의 수염을 뽑아 버리겠다니. 그런 생각을 하며, 카놀라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나누고 떨어지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흐반이 카놀라에게 슬그머니 다가왔다. 비디움은 에델과 작별 인사를 하느라 이쪽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흐반이 재빨리 카놀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새삼스럽게 말씀드리자면, 오늘 들으신 이야기들은…….”
“무조건 비밀.”
카놀라가 검지를 세워 제 입술 앞에 댔다. 파란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빛났다. 말을 잘라먹었음에도 크게 화가 나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저 표정 때문인지 모르겠다. 명랑해 보이는 저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에게 악의가 티끌만큼도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악의가 없는, 해맑기만 한 상대방에게 화가 날 턱이 없었다. 표정뿐만 아니라 목소리에서조차 그 깨끗한 심경이 들여다보이는 듯하다.
흐반은 카놀라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사이 에델과 비디움은 아쉬움의 인사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카놀라는 제 시중인들을 챙겨 먼저 방을 나갔고, 에델도 다섯 전사와 함께 그녀를 따라 나갔다. 적막감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배웅하러 다녀오겠습니다. 비디움 님.”
의자에 기대 눈을 감은 비디움이 느릿느릿 고개를 끄덕였다. 흐반은 가장 늦게 방을 나섰다.
카놀라와 시중인들은 건물 밖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그녀는 정문을 나가는 와중에도 때때로 후사의 다섯 전사에게 말을 걸었는데, 전사들은 귀찮아하면서도 용케 그녀의 말에 대꾸해 주었다. 그것은 아주 신기한 광경이었다. 다섯 전사는 후사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이들이다. 그러니 후사의 앞날에 방해가 될 게 분명한 이방인 왕녀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도 자명했다.
전사들과 대화하는 카놀라를 물끄러미 보던 흐반이 이내 생각을 떨쳤다. 그러곤 그와 마찬가지로 전사들을 보고 있는 에델에게 다가갔다.
“후사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건…….”
에델은 ‘비디움 님을 뵈러 왔다’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흐반이 덤덤하게 말을 뱉었다.
“정혼녀를 챙기러 오셨습니까?”
“……그녀가 이곳에 있는 동안은 지켜 주는 게 나의 일이니까.”
그 대답에 흐반의 표정이 조금 이상하게 변했다. 에델의 옆모습을 힐끗 본 그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물론, 반려자도 지키지 못하고서는 트리폴의 전사라 할 수 없죠.”
그의 중얼거림은 어딘가 냉소적이었다. 그러나 에델은 딱히 그것에 대해 트집을 잡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침묵했다.
앞뜰에서는 마차와 말의 준비가 지체되고 있었다. 에델은 마구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은 모두 정상이 아닌 자들이다. 몸의 어딘가가 불편한 자들이니 재촉한다고 해도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비디움 님의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저렇게 들뜨신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입니다.”
흐반이 문득 말을 걸었다. 마구간 쪽을 바라보던 에델이 그를 돌아보았다. 흐반은 자신의 뭉툭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족히 두 마디는 사라진 손가락이었다.
“다행이군. 네가 군주께 찾아가 행패를 부릴 생각은 없어 보여서.”
“비디움 님의 기분이 좋아지셨으니까요. 좋아하실 걸 알고 보내신 거겠지만.”
그리도 좋아하던 이방인 올케를 잃고 난 뒤로, 비디움은 그라그포드를 맹비난했다. 그러곤 이 성 바깥으로 절대 나가지 않았다. 그라그포드도 딱히 살갑게 제 누이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던지라, 두 사람은 이렇게 평생 왕래도 없이 각자의 생을 마감할 것처럼 보였다.
그라그포드야 뭐 어떻게 살다 죽든 흐반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비디움은 맹인이라 기본적으로 트리폴에서의 대우가 좋질 않았다. 에델이 아니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고, 그렇다고 애써서 만나러 갈 사람도 없어서 내내 외로운 생활을 해 오던 차였다.
카놀라의 존재는 비디움에게 새로운 기쁨이 되어 줄 것이다. 그것은 다행이었지만, 카놀라가 이곳에서 버텨 내지 못한다면 비디움에게도 큰 상처가 되겠지. 그러니 카놀라는 반드시 이곳에 무사히 정착해야 했다. 비디움의 행복을 위해, 흐반은 얼마든지 카놀라를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쩌면 그라그포드가 의도한 게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카놀라에게 완벽한 제 편을 만들어 주는 것. 그렇다면 그는 이번에야말로 이방인을 정원에 들이려는 심산일까? 그렇게 생각하던 흐반은 생각을 더 이어 나가지 못했다. 마차와 말이 준비된 까닭이었다.
“고모님을 부탁하지.”
에델의 말에 흐반이 반사적으로 제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비디움 님을 지키는 건 제 일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에델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카놀라는 마차에 오르지도 않고 이런저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언제 이 많은 사람과 안면을 익혔나 궁금할 정도였다. 그녀는 에델이 다가온 것도 모르고 덩치 큰 누군가와 인사말을 주고받는 중이었다. 안뜰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야스아였다. 활짝 웃는 카놀라의 모습에 야스아가 얼굴을 붉히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게 보였다.
시시덕거리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던 에델이 슬쩍 미간을 좁혔다. 그는 성큼성큼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야스아가 에델을 발견하곤 어수룩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갯짓으로 그의 인사를 받은 에델이 카놀라를 마차로 인도하려는 듯 손을 들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카놀라가 와락 팔짱을 꼈다. 그러곤 일행과 떨어진 한쪽 구석으로 그를 끌고 갔다. 그녀는 대화 소리가 들리지 않겠다 싶은 곳에 도착해서야 끌어안다시피 했던 팔짱을 풀었다. 내내 밝기만 하던 카놀라의 표정이 조금 진지해져 있었다.
“당신의 어머니에 대해서 들었어요. 내가 안다는 걸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얼핏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 곧장 말해 줄 줄은 몰랐다. 에델이 의외라는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는 양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며 눈을 굴렸다.
그녀는 조금 불편해 보였다. 아무래도 비디움이 말해 준 내용이 꽤 충격적이었던 모양이다. 에델은 그녀의 충격을 충분히 이해했다. 어쩌면 이제 그녀의 일이 될지도 모를 사례가 아닌가.
“비디움 님은 디라즈께서 그분을 지키지 못했다고 하셨어요.”
자세한 설명을 듣지 않아도 어떻게 말했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에델은 선뜻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말을 긍정했다. 카놀라의 표정에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그랬죠. 반려자를 지키지 못한 자는 트리폴 전사가 될 수 없다고. 그건 역시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었어요?”
“아닙니다. 제 반려자를 지키지도 못하는 전사가 나라를 지킨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리고 디라즈께선 그 부분에 있어서 전혀 문제가 없으십니다.”
“하지만 군주비는.”
“그 자리는 공석입니다.”
카놀라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때때로 그녀는 이렇게 얼빠진 표정을 짓는다. 그것은 꽤 귀여웠다. 특히 이 표정과 함께 맹한 되물음이 튀어나올 때는.
“네?”
딱히 숨길 일은 아니다. 누구에게 물어도 그와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때문에 에델은 덤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트리폴에 군주비는 없습니다. 빈자리입니다.”
카놀라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다물었다. 커다랗게 뜨여진 눈만 그녀가 느끼고 있는 놀라움을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에델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비디움이 이것에 대해선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모양이다. 아니, 해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디움은 에델의 어머니를 정당한 군주비로 인정하고 있는 사람이니까.
“제 어머니는, 신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셨습니다. 당연히 승인도 받지 못했으니, 그분은 군주비가 아닙니다. 따라서 디라즈가 제 비를 지키지 못했다는 오욕을 뒤집어쓴 일도 없습니다.”
카놀라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던 에델이 힐끗,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어쩐지 조금 젖은 듯해 보였다. 이미 오래된 일이고, 이젠 에델조차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다. 그래서 덤덤하게 이야기했는데 카놀라는 금방이라도 울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에델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언가를 참는 듯 이를 악물고 있던 카놀라가 조금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정식 비가 되지도 못하고 돌아가셨단 말인가요?”
“네.”
“군주의 아이까지 낳았는데, 단지 신전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서 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요?”
목소리가 떨린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치켜뜬 두 눈에 떠오른 건 분노였다. 무엇이 그녀를 분노하게 만든 걸까? 에델은 더욱 기분이 이상해졌다. 역시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되어서일까? 그렇다면 에델은 걱정하지 말라고 해 주고 싶었다. 제 어미와 같은 절차를 밟게 하느니, 차라리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신전에서도 차라리 그 편을 기꺼워할 테니 어려울 것도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것을 이야기하면, 카놀라가 더 화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에델은 제 생각을 조용히 속으로 되삼켰다. 대신 그녀의 물음에 대한 답을 해 주었다.
“그분은 신전이 요구하는 ‘강인한 육체’를 지니지 못하셨었으니까요.”
에델의 대답을 듣고, 카놀라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언젠가 티보치나가 했던 말이었다.
‘군주의 후계란 이 나라에서 가장 강인한 전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의 반려자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머리, 올곧은 마음을 가진 자여야 하지요. 신전에서는 이방인은 그 조건을 갖출 수 없다고 믿습니다.’
카놀라는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는 듯 입술을 떼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대화는 불쑥 끼어든 울란에 의해 중단되었다.
“신전의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카놀라와 에델이 동시에 성문을 돌아보았다. 천천히 열리는 성문 너머로 한 무리의 일행이 보였다.
에델의 시선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무리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몰고 있던 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말에서 훌쩍 내려섰다. 그러곤 사뿐사뿐 다가와 두 사람의 앞에 섰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티보치나.”
카놀라에게 빙긋 웃으며 말을 건넨 티보치나가 미소를 조금 흐리며 에델을 힐끗 보았다.
“게다가 후사까지.”
카놀라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태도에 카놀라가 괜히 에델의 눈치를 보았다. 에델은 냉담한 시선으로 티보치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티보치나는 에델의 시선을 가뿐히 무시하며 카놀라를 향해 재차 말을 했다.
“비디움 님께 인사드리고 가는 길이신가 봐요.”
그녀는 카놀라의 대답을 기대했겠지만, 정작 대꾸는 다른 곳에서 나왔다.
“성에 맡길 아이인가? 피해가 심했던 모양이군.”
에델의 말에 티보치나가 슬쩍, 제 뒤를 보았다. 절뚝거리는 세트를 신전 관계자가 부축하고 있었다. 피투성이 차림에 잔뜩 지친 얼굴은 세트가 겪었을 일련의 사건들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티보치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늘 그렇듯이요.”
“몇의 목숨을 거두었지?”
티보치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카놀라를 힐끗 보았다. 카놀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한, 이해할 필요도 없었다.
이해시키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곧장 돌아가시면, 후사의 집무실에 보고서가 도착해 있을 겁니다.”
티보치나의 목소리는 무척 냉랭했다. 대꾸한 직후, 티보치나는 아예 카놀라 쪽으로 몸을 돌려 그녀에게 다가갔다.
“왕녀님. 전 곧 업무가 끝납니다. 전에 약속드리곤 미처 해 드리지 못한 이야기도 있고, 따로 드릴 말도 있으니 시간을 내 주셨으면 하는데요.”
“아, 기출문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