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정원의 하와르 1
♥목차♥
0. 겨울을 만나
1. 반했지만, 반하지 않은
2. 결단코 눌러앉으리라
3. 해돋이 협곡
4. 시험 준비는 의욕적으로
5. 연애부터 시작할까요?
0. 겨울을 만나
마차의 덜그럭거리는 움직임을 따라, 몸이 좌우로 흔들렸다.
등받이에 기대고 앉아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입을 벌렸다. ‘하’ 하고 내뱉는 숨결이 뿌옇게 퍼져 갔다.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추운 거였구나. 카놀라는 몸을 둘둘 말고 있던 담요를 꼭 부여잡고 더욱 몸을 웅크렸다. 품위 없고 볼썽사나운 꼴이었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야 낫지. 카놀라는 목을 수그려 담요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공처럼 동그랗게 몸을 만 그녀의 맞은편엔 마찬가지로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앉은 노인이 있었다. 눈을 끔뻑이며 창밖을 응시하던 그는 청승맞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날벼락이랍니까?”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카놀라가 담요 바깥으로 두 눈을 빼꼼 내밀었다.
“날벼락은 아니고 눈 벼락이야, 오스카.”
나름대로 위로를 하려는 의도였지만 그것이 도리어 오스카의 감수성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오스카는 구슬픈 어조로 한탄하기 시작했다.
“다들 양심도 없으시지! 혼약서 오는 곳이 없다, 없다 해도 어떻게 이런 곳으로 보낼 생각을 하신답니까?”
“도대체 왜 없다고 단정하는 건데?”
떨떠름하게 되묻는 카놀라의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지, 오스카는 혼잣말하듯 주절주절 원망을 늘어놓았다.
“우리 왕녀님은 천지가 개벽해도 옥좌에 앉으실 일이 없는 분이라는 걸 세상 모두가 다 아는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입니까! 이리 매정하신 분들이 또 있으실까요?”
“저기, 안젤리나. 지금 저거 내 욕 맞지?”
카놀라가 떨떠름하게 옆에 앉을 이를 돌아보았다. 카놀라의 옆에 앉아 마찬가지로 담요를 뒤집어쓰고 있던 노인이 오스카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오스카는 자신의 무릎을 주먹으로 두드리며 우는소리를 냈다.
“아이고. 마디마디 안 아픈 구석이 없는데, 시린 바람을 어떻게 버틸까!”
“……애초에 내 걱정도 아니었던 거야?”
서러움이 가득 담긴 오스카의 말에 카놀라는 떫은 표정을 지었다. 이런 험한 여행길을 감당하기엔 오스카가 너무 노쇠하다는 거야 인정하지만, 명색이 시종장이었는데 주인을 먼저 걱정해 주는 게 맞지 않나? 자신의 서운함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결론에 다다르자, 카놀라는 볼을 부풀리며 오스카를 노려보았다. 물론 카놀라보다 족히 두 배는 넘게 살아온 오스카야, 카놀라의 눈초리 정도에는 표정 하나 안 바뀔 연륜의 소유자였다.
그런 오스카를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던 안젤리나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이를 먹더니 귀가 어두워져서 그럽니다. 하여간 저놈의 영감탱이는 왜 따라온다고 난동을 부려선, 원.”
그 말에 망연한 표정으로 바깥을 내다보고 있던 오스카가 고개를 홱 돌려 안젤리나를 노려보았다. 딴에는 눈에 잔뜩 힘을 주며 위협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것마저 측은할 정도로 힘겨워 보였다. 카놀라는 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민을 가득 담아 오스카를 응시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두르고 있는 담요라도 벗어 오스카에게 넘겨주고 싶었다. 물론, 실행에 옮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카놀라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스카는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안젤리나에게 호통을 쳤다.
“이 마귀 할망구가 누구보고 영감탱이래? 저야말로 조금 전까지 무릎 시리다고 골골거린 주제에!”
근엄한 목소리치곤 아주 속된 단어들이었다. 그러나 안젤리나는 속된 단어들에 면역이 되었는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으며 비아냥거렸다.
“얼씨구, 저를 욕하는 건 귀신같이 알아요.”
“애초에 할망구가 마차를 제대로 준비했으면 이렇게 벌벌 떨고 있을 일도 없었을 것을!”
모든 원망을 다 자신에게로 돌리는 오스카의 모습에 안젤리나가 기가 막힌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무슨 힘이 있어서 마차를 맘대로 골라? 그렇게 불만이면 직접 골라 오지 그러셨어!”
“아이고, 세상 사람들! 저 마귀 할망구가 우리 왕녀님을 이토록 추위에 떨게 했답니다!”
“저 노망난 영감탱이가 진짜!”
카놀라는 바깥으로 내놓았던 얼굴을 다시 담요 속에 파묻었다. 덕분에 웅얼거린 말들이 담요 속에서 뭉개지듯 흘러나왔다.
“그래, 그래. 활기찬 모습들을 보니 내 마음이 다 따뜻해지네.”
시끄럽게 말싸움을 벌이는 두 노인을 방치하기로 결정한 카놀라는 힘껏 몸을 웅크렸다. 조금이라도 더 몸을 웅크려야 빠져나가는 온기를 막을 수 있었다.
그래도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게 어딘가. 길이 험해서 말을 타야 하거나 걸어야 했다면 그녀는 정말 이성을 잃고 당장 되돌아가자고 소리쳤을 것이다. 한 발자국도 더 못 가겠다며 그대로 드러누웠을 수도 있다. 아니, 눈밭이니 드러눕는 건 더 곤란할 수도.
두 노인의 시끄러운 목소리를 배경음 삼아, 카놀라는 추위로 얼어붙어 가는 자신의 머리를 애써 굴려 보았다. 그러니까 애초에 자신은 어쩌다가 이런 꼴이 되었을까? 딱 한 달 전만 해도 그녀는 아주 따뜻한 자신의 나라에서, 아주 안락한 자신의 성에 머무르며, 아주 평화롭게 그림이나 그리며, 아주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완성된 일상이라 더는 원하는 것도 없었다.
물론 언젠가 혼인을 해야 할 테니 완벽한 일상이 붕괴할 것이라고 예상은 했다. 다만 그 혼인에 자신의 의사가 이토록 반영되지 않으리라는 걸 알지 못했을 뿐이다. 그녀가 아무리 박애주의자에 가까운 연애관을 가지고 있다지만 굳이 흉흉한 소문이 넘쳐흐르는 나라의 사내를 만나야 하는 건가. 사내라면 주변에 그토록 넘쳐 났는데 굳이? 국경 하나만 넘어도 되었을 것을 산맥씩이나 넘어서?
“그나저나 왕녀님, 그 정신병자랑은 잘 헤어지고 오신 겝니까?”
“정신병자라니, 안젤리나. 헤세온이라는 멀쩡한 이름이 있잖아.”
“이름이 멀쩡하다고 사람도 멀쩡하란 법은 없습니다. 저 오스카만 봐도 알 수 있잖습니까. 이름만 오스카면 뭘 합니까? 쭈그렁 영감탱이인데.”
“그러는 저는 뭐 다른가? 마귀 할망구 주제에 안젤리나라니!”
“내 이름은 왕년에 선풍적인 유행이었어!”
잠잠해졌나 싶은 언쟁에 다시 불이 붙었다. 카놀라의 눈에는 오스카나 안젤리나나 매한가지였지만, 그녀는 제 생각을 혼자만의 것으로 간직하기로 했다. 대신 안젤리나가 언급한 헤세온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본 게 이 마차를 타기 직전이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불길을 뿜을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정작 그가 노려봐야 할 대상은 카놀라의 형제들이었는데 말이다.
그는 카놀라가 자신을 피해 멀리 떠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정말이지 너무 과한 자의식이었다. 카놀라가 헤세온과의 관계를 끝내고 싶어 했던 건 맞지만, 그걸 염두에 뒀다면 떠날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헤세온이었다. 애초 그녀의 나라로 유학 온 사람은 헤세온이다. 그러니 헤어지고 나서 떠날 사람이라면 당연히 헤세온이 되어야 한다. 그러잖아도 내쫓을 궁리를 하던 중이었는데 설마하니 자신이 먼저 이렇게 쫓겨나게 될 줄이야.
사실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난 뒤엔, 차라리 헤세온이 난동이라도 부려서 이 결혼을 뒤엎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가졌었다. 헤어지자고 하면 너 죽고 나 죽겠다며 위협을 해 대기에 난동 정도는 쉽게 부려 줄 줄 알았지.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였다. 막상 날짜가 닥쳐오도록 헤세온은 그녀를 노려보고 으름장이나 놓을 뿐, 이렇다 할 행동은 하나도 보여 주지 않았다.
“물론 나라도 우리 오빠한테 덤비고 싶진 않겠지만…….”
그렇게 꼬리를 말 거면 허세라도 부리질 말든가. 아니면 순순히 이별을 받아들이기라도 하든가. 하여간 마지막까지 같잖은 자존심만 앞선 사내였다. 그렇게나 형편없는 사내인 줄 알았으면 만나지도 않았을 텐데! 마지막 연애 상대가 그런 한심한 놈이라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카놀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완전히 담요 속에 파묻었다.
세상에, 내가 결혼이라니! 벌써 수십 번도 되뇌었던 말이 나올 듯 말듯 혀끝을 맴돌았다.
“왕녀님, 왕녀님!”
갑자기 찬 바람이 확 끼쳐 왔다. 누군가 창문을 열고 다급하게 카놀라를 불렀다. 추위로 인해 벌게진 얼굴을 한 기사 루덱이 난처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고 있었다.
“문제가 생겼습니다.”
눈만 빼꼼 내밀고 루덱을 보던 카놀라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렴, 무슨 문제든 터져야 할 시점이었지.
창문을 연 것만으로도 이렇게 추운데 문을 열면 얼마나 추울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러나 확인을 안 할 수도 없어서, 그녀는 마지못해 마차에서 내렸다. 웅크리고 있던 몸을 펴니 추위가 순식간에 온몸을 강타했다. 카놀라는 반사적으로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날씨가 정말 미쳤나 봐! 왕녀의 입에서 나왔다기엔 무척 고상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외침이었다.
“뭐야, 왜 저래?”
“부서졌습니다. 길이 험해 견디질 못한 것 같습니다.”
일이 안 풀리려니 별것이 다 말썽이다. 아니, 저것은 애초부터 말썽을 부릴 줄 알고 있었다. 눈 쌓인 산맥을 넘어가는데 황금 마차가 웬 말인가?
카놀라는 자신의 얄미운 언니를 떠올렸다. 냉담한 눈으로 서 있는 오빠의 옆에서, 제 언니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선물이랍시고 황금 마차를 떠안겼다. 떠나기 바로 직전에야, 저 애물단지 같은 것을 깜짝 선물인 양 공개한 것이다. 언제나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사에 임해 왔던 카놀라일지라도 이번만큼은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지금 약 올리는 거지, 선물을 주는 건가?
“……산뜻한 마음으로 그냥 버릴까?”
“아이고, 안 됩니다! 뭣도 없이 가는 마당에 저거라도 내밀어야 면이 서죠!”
언제 마차에서 내렸는지, 뒤따라온 오스카가 펄쩍 뛰며 카놀라를 말렸다. 마찬가지로 마차에서 내린 안젤리나가 황금 마차의 부서진 바퀴로 다가갔다. 손으로 부서진 곳을 콕콕 찔러 보던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카놀라에게 다가왔다.
“세상에, 왕녀님!”
“왜? 왜? 뭐 발견했어? 누가 날 음해하려고 일부러 부순 건가?”
소설 같은 걸 보면, 일부러 마차에 수작을 부려 두는 경우들이 있다. 그렇게 길 한가운데에서 오도 가도 못하게 만들어 두고 기습을 하는 경우가 있지 않나. 카놀라도 명색이 샤를만의 왕녀이니 그런 음해를 받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카놀라의 진지한 물음에 루덱도 화들짝 놀라 덩달아 안젤리나를 심각하게 응시했다. 오스카도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고 안젤리나의 말을 기다렸다. 세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안젤리나가 사뭇 긴장감 넘치는 얼굴로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저 황금 마차 진짠가 봅니다!”
“……응?”
“엄청 물러요! 저러니 당연히 부서지죠!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용합니다!”
카놀라와 루덱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안젤리나를 보았다. 잔뜩 흥분한 안젤리나의 말에 대꾸한 이는 오스카였다. 그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호들갑스럽게 되물었다.
“진짜? 도금 아니었어?”
“그렇다니까? 영감탱이가 가서 봐 봐.”
황금 마차를 둘러싸고 서서 수군거리는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가 빙긋 웃으며 루덱을 돌아보았다.
“그냥 버리고 가자.”
순간적으로 뭘 버리자는 건지 되물을 뻔한 루덱이 겨우 혀를 깨물며 말을 삼켰다. 아무렴 오스카와 안젤리나를 버리자고 했겠나. 저리 보여도 세 사람은 무척이나 각별한 사이다. 자신이 순간적으로 대화의 흐름을 놓친 탓에 이상하게 이해한 것이겠지.
루덱은 생글생글 웃는 카놀라를 따라서 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짜 황금이잖습니까. 짊어지고서라도 가져가야죠.”
카놀라는 김샌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래도 황금 애물단지는 저 셋이 짊어지고 올 모양이다. 추워 죽겠으니 자신은 얼른 타고 온 마차로 돌아가야겠다.
둘러맨 담요를 꽉 움켜쥔 카놀라가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일행보다 앞서서 길을 살피러 간 병사가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지에서부터 구르듯 내려오는 그의 모습이 너무나 다급해 보여서, 카놀라는 한참이나 그가 오는 방향을 유심히 응시했다.
“저기, 루덱?”
시선을 떼지 않은 상태로 조심스럽게 루덱을 불렀지만, 그는 두 노인과 황금 마차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하느라 바빴다. 카놀라는 목을 가다듬고 더 큰 목소리로 루덱을 불렀다.
“루―덱!”
“네? 네, 부르셨습니까?”
“내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저기 저거 사람들인 것 같은데?”
병사가 달려온 고지 쪽에서, 하나둘 그림자가 솟아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병사는 카놀라에게 거의 도달한 상태였다. 사람 그림자를 발견한 루덱이 돌변한 표정으로 병사에게 다가갔다. 숨을 헐떡이던 병사가 루덱에게 뭐라고 보고를 하는 동안에도, 카놀라는 멀리 보이는 그림자들을 망연하게 응시했다.
누군가 자신을 음해하려는 게 아니냐고 제 입으로 말했지만, 그건 정말 진지함이라곤 하나도 없는 농지거리였다. 왕위 계승권과는 한참 먼 자신이 그런 위험천만한 상황에 빠질 이유가 대체 뭐가 있나. 카놀라는 방정맞았던 제 입을 때려 주었으나 이미 정체불명의 세력들이 등장한 후였다.
혹시 산적 떼일까? 겨울 산맥에 산적이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그거야 알려지지 않았던 것일 수도 있다.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않는 산맥이지만 인간의 적응력이란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는 법이 아니던가. 이 추운 날씨를 뚫고 살아남을 방도를 강구하자면 못 할 것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산적질을 하면 먹고살 수는 있으려나?
“아니면 나같이 부유한 일행 하나 얻어걸리면 그걸로 먹고사는 건가……?”
이상한 상상에 빠져 있느라, 카놀라는 루덱의 보고를 순간적으로 놓치고 말았다. 뒤늦게 자신에게 뭐라고 말하는 루덱을 발견한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루덱은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추워서 헛것이 보이는 건가? 아니면 루덱이 드디어 이 진퇴양난의 상황에 스트레스를 받아 미쳐 버린 걸까?
“그래도 양심은 있었네요!”
소란을 듣고 다가온 안젤리나가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카놀라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안젤리나를 돌아보았다. 오스카도 팔짱을 끼고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뭐가?
“응?”
“아, 가장 앞에 있는 저 사람인 모양입니다.”
안젤리나가 손으로 누군가를 가리켰다. 카놀라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응시했다. 그림자로 보이던 사람들은 이제 얼굴이 구별될 정도로 가까워진 상태였다. 그들은 수가 제법 많았지만 카놀라의 시선은 가장 선두의 사내에게 고정되었다. 카놀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털북숭이 말을 몰고 있는 그는 새카만 털가죽을 두르고 있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눈에 띄었지만,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건 바람에 흩날리는 흰색 머리칼과 그보다 투명해 보이는 흰 피부였다.
“왕녀님, 얼른 도도한 얼굴로 맞이하실 준비를…….”
“안젤리나.”
경계심 어린 눈초리로 정면을 응시하던 안젤리나가 그 부름에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카놀라의 멍한 표정을 확인한 안젤리나는 어쩐지 불길한 기분이 들어서, 나지막하게 카놀라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카놀라는 그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고 정면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눈을 깜빡이며 그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카놀라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안젤리나를 돌아보았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저렇게 청순하고 예쁘게 생긴 남자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잖아!
1. 반했지만, 반하지 않은
카놀라는 추위를 무릅쓰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옆에 앉아 있던 안젤리나가 기겁하며 뭐라고 외쳤지만, 카놀라의 귀엔 전혀 들리지 않았다. 두 손으로 창문틀을 단단히 움켜쥔 카놀라가 고개를 바깥으로 쭉 뺐다. 누군가를 찾는 듯, 그녀의 고개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안젤리나는 물론이고 오스카까지 놀라서 카놀라를 뒤로 잡아당겼지만, 그녀는 꿋꿋하게 버티며 고개를 내밀기 위해 노력했다.
“위험합니다.”
“엄마, 깜짝이야!”
옆에서 불쑥 들리는 목소리에 카놀라가 고개를 퍼뜩 치켜들었다. 덕분에 위쪽 창틀에 정수리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하게 부딪친 탓에, 카놀라는 눈물까지 찔끔 흘리며 엉거주춤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두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창밖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아야…… 어우, 나 피 나는 거 같아…….”
부딪친 곳이 의도치 않게 매우 아팠다. 덕분에 대답하는 대신 무심코 속마음을 중얼거리게 되었다. 카놀라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창밖에선 잠깐 침묵했다. 그러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마차를 멈추라고 하겠습니다.”
그 말에 카놀라의 머리를 살피고 있던 안젤리나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대신 대꾸했다.
“아이고, 아닙니다. 우리 왕녀님이 원래 엄살이 좀 심하십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밖에서 무언가 더 이야기하려고 했으나, 오스카마저 안젤리나의 말을 거들면서 창문을 닫아 버렸다. 머리를 감싸고 있던 카놀라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안젤리나를 째려본 카놀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씨, 안젤리나!”
“그렇게 여기저기 박고 다니시면 머리 나빠지십니다.”
퉁명스럽게 말하는 와중에도, 안젤리나는 카놀라의 머리를 헤집으며 행여 다친 곳이 있는지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카놀라의 머리는 아주 멀쩡했다. 이럴 줄 알았지. 안젤리나가 혀를 차며 자리에 바르게 앉았다. 불퉁한 표정으로 그런 안젤리나를 흘겨보던 카놀라가 칭얼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내가 뭐 일부러 박았나? 그리고 엄살이 뭐야! 진짜 아프단 말이야!”
“그러게 누가 그런 위험한 행동을 하시랍니까?”
“내가 뭐! 오늘 처음 본 남편이랑 대화 좀 해 보겠다는데!”
달리는 마차에서 뛰어내린 것도 아니고, 그냥 창문 열고 대화나 좀 해 보겠다는데 왜 이리 방해를 하느냔 말이다. 진심으로 억울하다는 듯 울상을 짓는 카놀라의 모습에 안젤리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어쩜 저렇게 한결같이 해맑은 왕녀님이실까. 아무리 첫눈에 반했기로서니,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대뜸 매달리듯 굴 까닭이 없질 않나.
물론 저 갑갑한 마음을 대충 이해는 했다. 방금 사랑에 빠진 카놀라는 정작 그와 제대로 된 대화조차 할 틈을 가지지 못했던 것이다.
“저 사람은 나에 대해 궁금하지도 않나? 어쩜 저렇게 말이 없지? 물론 그것도 잘 어울리지만.”
카놀라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닫힌 창문을 흘겨보았다. 바깥의 사내는 정말 필요한 말만 했다. 친해지기 위한 그 어떤 사적이고 쓸데없는 대화는 한마디도 걸질 않는다. 저 사람도 분명 카놀라에 대해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잔뜩 불퉁해진 카놀라의 모습에 오스카가 고개를 내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나타난 저 ‘예비 남편 일행’은 왕녀를 마중 나왔으며, 트리폴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그들은 상황을 다 짐작했다는 듯 튼튼하게 생긴 마차도 내어 주었다. 마차 내부는 온통 털가죽으로 마감되어 있어서 그들이 타고 온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뜻하고 안락했다. 게다가 부서진 황금 마차를 실을 만한 큰 수레도 끌고 왔다. 물론 약간의 분해 과정이 필요했지만 말이다.
그 모든 작업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호시탐탐 말을 걸 기회를 노리고 있던 카놀라는 추우니 마차로 들어가시라는 말 한마디에 다소곳하게 마차에 탔다. 카놀라는 마차에서 기다리다가 다시 내릴 작정이었겠지만, 그녀가 타기 무섭게 마차는 움직이기 시작했고 가차 없이 출발했다. 카놀라가 뒤늦게 창문을 열려 했으나 마차 내부의 훈훈한 공기를 잃고 싶지 않았던 오스카와 안젤리나의 필사적인 저항으로 포기를 해야 했다.
정확히 하자면 포기를 한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그녀는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노곤해진 몸으로 졸기를 기다렸던 것이었다.
“왕녀님, 바로 며칠 전에 정신병자랑 어떻게 헤어지셨는지 잊으셨습니까?”
안젤리나의 물음에 카놀라가 눈매를 치켜세웠다.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때도 왕녀님이 그 정신병자의 분위기가 심상찮다면서 첫눈에 반하신 거잖습니까!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습니까? 생긴 것만 멀쩡한 정신병자였죠?”
“그거랑 다르지! 저 사람은 나랑 결혼할 사람인데! 사랑에 빠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
카놀라는 무척 당당했다. 하기야, 그녀는 늘 당당했다. 언제나 당당하게 사랑에 빠지고 당당하게 이별했지.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숱하게 보아 온 사내의 눈물만 모아도 강을 이룰 것이다. 안젤리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사랑하는 건 좋은데, 저 왕녀님은 너무 쉽게 하는 게 문제였다. 사랑할 땐 실컷 해서 본인은 아쉬움이 없을 때까지 쏟아붓고선, 정작 상대방이 울고불고 매달릴 땐 미련 없이 돌아선다. 혼자 하고 혼자 끝내는 사랑이야 연애할 땐 그렇다 쳐도 여기서는 곤란했다. 연애할 적의 습관을 고스란히 가져왔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안젤리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지금 카놀라는 누군지도 모르는 상대와 정략결혼을 한 참이다. 생전 가 본 적도 없는 나라에서 무슨 텃세를 받을 줄도 모르고 평생 살아야 한다. 당연히 매사 신중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까, 그 사랑을 왜 왕녀님 혼자 하시냐는 겝니다.”
“누가 혼자 한대?”
“그럼, 제가 모르는 사이에 저 바깥의 예비 남편께 사랑 고백이라도 받으셨습니까?”
안젤리나의 물음에 카놀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잔뜩 힘이 들어간 상태로 삐죽대는 게 불만이 아주 많은 모양이었다. 절대 져 주지 않는 안젤리나를 째려보던 카놀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오스카가 본능적으로 눈을 번쩍 떴다. 카놀라가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말을 걸었다.
“오스카. 내가 못생겼어? 아니지? 첫눈에 반할 정도는 되지?”
“네? 갑자기 그걸 왜…… 아니 뭐, 우리 왕녀님이야 세상에서 제일 예쁘시죠. 아무렴요. 저희야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예뻐 보이시죠. ……저희 눈에는.”
뒷말은 거의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으나 카놀라에겐 똑똑히 들렸다. 카놀라가 발끈한 얼굴로 반박했다.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 말에 오스카가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돌렸다. 딴청을 하며 대답을 회피하려 했으나, 그의 얼굴을 뚫어 버릴 듯 노려보는 시선은 사뭇 집요하기까지 했다. 오스카가 마지못해 말문을 열었다.
“왕녀님도 인정하시잖습니까. 솔직히 외모만 놓고 보면 셋째 왕자님이 최고셨죠. 어떻게 한배에서 나왔는데 좋은 건 그리도 혼자 다 가져가셔서…….”
카놀라가 황당하다는 듯 입을 벙긋거렸다. 차마 부정할 수가 없어서 더 짜증 났다. 입술만 질근질근 깨물던 카놀라가 불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 저번보다 주근깨 심해졌어?”
“네. 엄청 많이요. 그러게 저희가 양산 좀 쓰시라고 그렇게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카놀라가 양손을 펼쳐 자신의 볼을 감싸고 꾹 눌렀다. 포동포동한 볼살이 앞으로 쭉 밀렸다. 삐죽거리던 입술은 오리 주둥이처럼 툭 튀어나왔다.
몇 번 그렇게 자신의 볼을 주물럭거리던 카놀라가 이윽고 손을 휙 내렸다. 주근깨도 주근깨인데, 손안에 느껴지는 볼살의 느낌으로 미루어 보아 저번 주보다 살이 더 찐 것 같다. 물어보면 긍정의 대답이 돌아올 것 같아서, 카놀라는 새치름한 어조로 말을 돌렸다.
“아, 몰라! 그게 뭐가 중요해?”
“왕녀님이 물어보셨잖습니까.”
그러게 뭐 하러 그런 질문을 하고 그러나. 오스카가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저었다. 매번 똑같은 대답을 이미 사는 내내 들어 와 놓고선 또 듣고 싶을까? 오스카가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 넌지시 위로의 말을 얹으려는데, 창밖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제라도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순간 마차 안이 정적에 휩싸였다.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멈칫하는 사이, 카놀라가 이때다 싶어 얼른 다시 창문을 열었다. 찬 바람이 확 들어와 순간 눈이 시렸다.
아니, 지금 눈이 시린 건 찬 바람 때문이 아닐 수도 있다. 카놀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 이렇게 청순하고 예쁜 남자가 창문 바로 앞에 있어서 눈이 부신 게 틀림없다!
“우리 얘기 좀 해요!”
갑작스러운 카놀라의 말에 그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들어와서 우리 얘기 좀 해요! 난 지금 당신 얼굴밖에 모른다고요.”
옆에서 듣던 안젤리나는 그 얼굴밖에 모르는 남자를 대체 왜 사랑하게 되신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대신 말없이 온몸에 담요를 칭칭 둘러맸다. 이쯤 되니 조금 부끄러워진 까닭이었다. 제 주인은 현재의 감정에 충실해야 나중에 후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다 보니 종종 주변인들이 더 부끄러운 상황을 아무렇지 않게 연출해 댔다. 이번이라고 크게 다르진 않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카놀라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던 그는 이내 난처한 듯 느리게 말문을 열었다.
“아…… 죄송합니다. 트리폴을 방문한 이방인은 반드시 군주께 먼저 인사를 드려야 합니다. 저나 다른 전사들이 인사를 드리지 못한 이유는 그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듣고서야 카놀라는 합류한 사람 중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인사를 받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제 예비 남편의 미모에 정신이 홀려서 죄다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신은 샤를만 왕녀고, 어지간해선 죄다 그녀보단 낮은 계급일 텐데 말이다. 샤를만이었다면 당장 경을 쳤을 일이었다.
물론 카놀라에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본래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 성격이거니와, 무엇보다 지금 그녀의 관심은 눈앞의 사내뿐이었으므로.
“하지만 내가 가장 먼저 본 트리폴 사람은 당신인걸요? 날 마중 나왔잖아요.”
“샤를만의 마차로는 겨울 산맥을 넘지 못합니다. 아마 추위도 이겨 내지 못했을 겁니다. 게다가 이곳은 위험합니다. 야생동물의 습격이라도 받으면 더욱 곤란하니, 지리를 잘 아는 우리가 마중 나오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카놀라가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의 생김새나 마차의 모양새가 샤를만과 달라서 궁금하던 차였는데 다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다. 옆에서 그 말을 함께 들은 안젤리나는 ‘역시 마차를 잘못 고른 게 아니라 애초 모든 마차가 문제였던 거’라며 오스카와 말씨름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든가 말든가 카놀라는 다시 말을 걸기 위해 창문에 기댔다. 그러나 그녀가 말을 꺼내기 전, 사내와 함께 온 일행이 다가와 끼어들었다.
“후사, 앞장서셔야 합니다.”
남자는 그녀의 예비 남편처럼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좀 더 거칠고 흉터가 많았다. 게다가 말을 타고 있는 걸 고려해도 덩치며 키가 아주 커서 예비 남편보단 족히 머리통 하나는 더 있어 보였다. 남자야말로 카놀라가 책에서 익히 보았던 ‘트리폴인’에 가까워 보였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새롭게 등장한 인물을 신기하다는 눈으로 보던 카놀라가 얼른 질문을 던졌다.
“이름이 후사예요?”
그 물음에 사내의 표정이 조금 딱딱해졌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그는 이내 단정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닙니다. 그건 호칭입니다.”
“호칭?”
“이제 정말 가 봐야 합니다.”
사내는 정말 급하다는 듯 재차 말을 했다. 묻고 싶은 것도 많고 궁금한 것도 많았지만 아무래도 지금 다 물어보긴 그른 것 같다. 카놀라는 미련을 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부부가 될 사이이니 앞으로 차근차근 물어볼 기회가 많을 테지. 그렇다곤 해도 이건 꼭 물어보고 싶어서, 카놀라가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한 가지만 더요! 왜 당신이 직접 마중 나온 거예요? 듣기론 내 남편이 될 사람은 트리폴 군주의 외아들이라고 했는데……. 겨울 산맥이 위험하다면 외아들인 당신이 아니라 기사들을 보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카놀라가 샤를만을 떠나기 전, 그녀에게 내려진 통보는 트리폴 군주의 외아들과 그녀의 혼약이 성사되었다는 것뿐이었다. 그 어떤 정보도 없이, 흔한 초상화 하나 보여 주지 않고 대뜸 그렇게만 전달받았다. 외아들이니 오죽 애지중지 키워졌겠나. 막연하게 생각하기론 자신과는 성격이 안 맞을 수도 있겠다며 걱정을 했더랬다.
그런데 막상 와 보니 그가 직접 수하들을 이끌고 마중을 나왔다. 이상하질 않나. 애지중지 키우는 외아들이었다면 이런 위험한 마중길에 내보내진 않았을 것 같았다. 아니면 사실 외아들이 아니었다던가? 그도 아니면 위험하다던 말이 과장이었다던가? 설마 이 남자가 예비 남편이 아닌 건 아니겠지?
카놀라의 물음에 내내 앞을 응시하던 사내가 힐끗 그녀를 돌아보았다. 카놀라는 비로소 사내의 얼굴을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녹색 눈동자는 꼭 짙푸른 녹음을 연상케 했다. 카놀라가 저도 모르게 슬며시 심장 부근을 부여잡았다. 역시 착각이 아니었어, 난 사랑에 빠졌어! 소리 없는 외침을 되삼키는 사이, 그는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옮기며 차분하게 말했다.
“자신의 반려자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트리폴 전사가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는…… 아직 정식 부부가 되려면 멀었지만, 당신을 지키는 건 저의 일입니다.”
또박또박 말을 마친 그는 타고 있던 짐승을 몰아 저만치 앞서가 버렸다. 고개를 쭉 내밀어 그의 뒤통수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카놀라가 천천히 마차 안으로 돌아왔다.
침착하고 조용하게 창문을 닫고서야, 카놀라는 참았던 숨을 확 내뱉었다. 숨을 참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열이 오른 까닭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녀의 얼굴엔 빨간 홍조가 감돌고 있었다.
옆에 앉은 안젤리나의 어깨를 손으로 퍽퍽 때리며 카놀라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봤어? 봤지? 거봐. 혼자 사랑하는 거 아니라니까?”
지금 엄청나게 왜곡된 시선으로 말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 같은데?
앓는 소리를 내며 맞은 곳을 문지르던 안젤리나는 착각 속에 빠진 제 왕녀님을 그냥 두기로 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옆에서 귀에 못 박히도록 말해 봤자 들리지도 않을 것이다. 오스카도 안젤리나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슬쩍 카놀라를 외면했다.
마차 의자를 주먹으로 퍽퍽 내려치며 혼자 아우성을 치던 카놀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근데…….”
눈을 깜빡이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미묘하게 미간을 찌푸렸다.
“정식 부부가 되려면 멀었다는 게 무슨 소리지?”
*
갑작스럽게 성사된 혼약이라고는 하나 한 달이라는 여유 시간도 있었는데, 트리폴에 대한 책이라도 좀 많이 읽고 올 걸 그랬다.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카놀라는 치미는 한숨을 애써 되삼키며, 나중에 안젤리나와 오스카에게 관련 서적을 구해 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와서 책을 읽는다고 얼마나 도움이 될진 모르겠지만, 그런 노력이라도 하지 않고서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았다.
“왕녀님의 악명이 여기까지 퍼졌나 봅니다.”
창가를 힐끗거리던 오스카가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에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기까지 퍼질 악명이라는 게 대체 뭔데?”
“……왕녀님의 엄청난 남성 편력?”
오스카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 카놀라는 그를 향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다정하게 대꾸했다.
“어휴, 오스카도 참! 밖에서 그런 소리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오스카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는 것을 확인한 카놀라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오스카마저 기겁할 정도로 따가운 시선은 역시나 착각이 아니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축하 행사를 기대했던 건 아니다. 그래도 이런 시선들은 좀 너무하지 않나? 길 양옆으로 늘어선 이들은 그녀를 환대하기는커녕,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나마 그런 시선은 고맙기라도 했다. 개중에는 노골적인 적대감과 경계심을 담은 시선들도 심심찮게 찾을 수 있었다. 그 눈초리는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사나워서, 낯짝 두꺼운 카놀라마저 찔끔할 정도였다.
정말로 악명이 퍼졌나? 카놀라는 샤를만에 떠돌던 자신의 소문을 떠올려 봤다.
조금…… 거북한 것들도 없잖아 있었지.
“왕녀님, 도착했습니다.”
마차 밖에서 따라오던 루덱이 딱딱한 목소리로 보고를 했다. 그 역시 주변의 분위기를 인지하고선 신경이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먼저 내리고, 카놀라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차가운 적막이 주변을 맴돌았다. 눈치 없고 뻔뻔하기론 샤를만 왕궁 내에서도 손꼽히던 오스카와 안젤리나마저 그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쪽입니다.”
도시에 들어온 뒤론 내내 사나운 시선만 받아서, 무뚝뚝하다고 생각했던 예비 남편의 말이 저토록 다정한 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주변을 힐끔거리며 눈을 굴리던 카놀라가 냉큼 그를 따라 걸었다. 아마도 본궁인 듯한데, 어찌나 천장이 높고 복도가 넓은지 몰랐다. 아마도 덩치가 큰 트리폴인들에 맞춰진 건축물 같았다.
다행히도 카놀라 역시 작은 키는 아니었다. 샤를만에서도 큰 키에 해당했으니 여기선 평균 정도는 될 것이다. 걸으면서 자신의 눈높이에 흡족해하던 그녀는 문득 자신의 앞에 보이는 하얀색 뒤통수가 조금 낮은 위치에 있음을 깨달았다. 짐승을 타고 있을 땐 몰랐는데 내려서 보니 그녀의 예비 남편은 다른 트리폴인들에 비해 상당히 작은 키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카놀라는 지금 굽이 높지 않은 신발을 신고 있으니, 어찌 보면 그녀보다도 작은 키를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디라즈, 이방인들이 도착했습니다.”
하얀 뒤통수를 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카놀라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뒤통수만 보고 따라왔더니 어느새 그녀는 알현실에 도착한 상태였다. 군주를 만나기 전에 간단한 주의 사항 정도는 알려 줄 줄 알았던 그녀는 몹시 당황하고 말았다. 심지어 그녀가 데려온 기사들은 무장을 해제하지도 않은 상태였다.
내내 카놀라의 앞에 서 있던 그녀의 예비 남편은 군주의 앞에 다다라서야 옆으로 비켜섰다. 덩그러니 앞에 서게 된 카놀라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그녀는 우선 인사를 하려 했으나, 그보다 먼저 입을 여는 트리폴의 군주 때문에 자신의 행동을 멈춰야 했다.
“인원은 이게 전부인가?”
군주는 턱을 괸 상태에서 제 아들을 돌아보았다.
“네.”
“허락한 인원보다 적군.”
그야, 누구도 트리폴에 오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첨언을 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카놀라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겨우 참았다. 군주는 무심한 눈길로 카놀라가 이끌고 온 이들을 훑어보았다. 그러곤 알겠다는 듯 손으로 휘휘 저었다. 이만 나가라는 듯한 그 손짓에 이번에는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리폴인들은 별로 놀란 기색도 없이 카놀라의 수행원들을 내보내려 했다.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눈이 마주친 그들은 서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곤, 재빨리 카놀라를 말리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카놀라는 두 사람에게 잡히기 전에 먼저 군주를 향해 한 보 나섰다. 그러곤 치마를 잡곤 가볍게 무릎을 굽혔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샤를만의 넷째 왕녀, 카놀라 F. 인카나 샤를만입니다.”
간발의 차로 카놀라를 말리지 못한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죽상을 쓰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렸다. 기사들 역시 놀라서 왕녀를 보았다. 루덱은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온몸에 긴장감을 주었다.
수행원들의 걱정을 한 몸에 받으며, 카놀라는 몸을 곧게 세웠다. 카놀라에겐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던 군주가 비로소 그녀를 응시했다. 왕의 예복이라기보단 전투복에 가까워 보이는 차림을 한 그는 겉으로 보기에도 우락부락한 몸을 가지고 있었다. 군주임을 모르고 봐도 어지간한 사람이면 저 앞에서 위축되고도 남을 위협적인 체격이었다. 흰 머리칼과 무성한 수염 역시 그의 험상궂은 인상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었다.
그런 이가 자신을 빤히 보고 있으니 찔끔 놀랄 법도 할 텐데, 카놀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샤를만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과는 통성명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입니다. 일국의 왕녀로서 고국을 욕보이고 싶진 않아, 이렇게나마 예의를 차리는 점을 이해해 주십시오.”
카놀라가 말을 끝내자, 알현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카놀라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보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더욱 꿋꿋하게 군주와 시선을 마주쳤다. 군주는 눈을 가늘게 떴다. 덥수룩하고 긴 수염에 가려져 있던 그의 입술이 느리게 달싹였다.
“테드라고의 후손 그라그포드다.”
굵고 거친 목소리는 무척이나 무뚝뚝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워서, 카놀라는 빙긋 웃으며 다시 한번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했다. 그러곤 눈웃음을 지으며 해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감사합니다. ‘예비’이긴 하지만 곧 며느리가 될 사람으로서, 제가 ‘아버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안젤리나는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오스카는 자신의 무릎을 짚으며 허리를 약간 수그렸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쓰러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루덱은 트리폴 전사들의 분위기를 살피느라 눈도 제대로 깜빡이지 못했다. 그리고 트리폴의 전사들은, 무척이나 기묘한 표정으로 얼이 빠져 있었다.
제 수행원들의 노고를 조금도 알지 못하는 카놀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천진하게 웃으며 그라그포드를 응시했다. 그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카놀라를 보다가,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대는 아직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사자의 의사는 조금도 반영하지 않은 혼약을 성사해 놓고 저건 또 무슨 무례한 소리람?
기껏 추운 바람을 헤치고 여기까지 와서 듣는 말치곤 상당히 신경에 거슬리는 소리였다. 카놀라는 제 품에 있는 혼약서를 그라그포드의 눈앞에 펼쳐 주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했다. 이미 왕궁에 도착했는데 이제 와서 간을 보겠다는 거야, 뭐야?
빙긋 웃고 있는 얼굴을 유지한 상태에서, 카놀라는 옆에 비켜서 있던 자신의 예비 남편을 힐끗 보았다. 그는 조금 놀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를 보자, 울컥 치밀던 억울함이 푸스스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제대로 된 데이트 한 번 못 해 본 예비 남편을 두고 귀국하면 두고두고 후회할 게 뻔했다.
카놀라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입가의 미소를 조금 더 환하게 만들었다.
“아하, 그 말씀인즉 저를 샤를만의 왕녀이자 트리폴궁의 귀빈으로서 대우해 주신다는 거군요? 잘 이해했습니다. 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긋나긋하게 말을 한 카놀라가 한 보 물러서서 인사를 했다. 그러곤 트리폴의 전사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안내를 기다리는 그녀의 모습에 전사가 제 주군을 돌아보았다. 그라그포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짓했고, 그것을 확인하고서야 전사가 앞장섰다.
“후사, 남아라.”
카놀라를 따라 나오려던 그녀의 예비 남편이 걸음을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따끔따끔한 뒤통수를 애써 무시하며, 카놀라는 씩씩하게 알현실을 나갔다. 그리고 씩씩하게 자신의 방까지 안내를 받았다.
“담당 시중인을 불러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카놀라는 웃으며 전사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아직도 알현실에서의 얼떨떨함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다가,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히자, 안젤리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카놀라를 돌아보며 손뼉을 쳤다.
“역시, 우리 왕녀님이십니다! 당당하게 맞서시는 모습에 이 늙은이는 감동하고 말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 어찌나 시원하게 받아치시는지, 침침하던 눈이 번쩍 뜨였지 뭡니까.”
오스카도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죽이 맞아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말을 하는 두 사람을, 카놀라는 웃는 낯으로 응시했다. 그러다가 천천히 양손을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감쌌다.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녀의 손안에서 뭉개지듯 울렸다.
“난 망했어…….”
“왕녀님?”
“이제 제대로 미움받겠지? 아씨 이놈의 성질 진짜…….”
그녀는 아예 제자리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로 고개를 푹 파묻어 버렸다. 덕분에 혼자 웅얼거리는 말이 도통 무슨 소리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만 이따금 머리를 쥐어뜯는 모양새로 보아, 자책에 가까운 내용일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 꼴을 보던 루덱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그녀를 달랬다.
“하지만 왕녀님께서 틀린 말을 하진 않으셨잖습니까.”
카놀라를 맞이하는 트리폴 군주의 태도는 아주 무례했다. 아무리 그가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은 이라고 해도, 타국의 왕녀를 이토록 홀대할 권한은 없다. 하물며 카놀라는 그의 아들과 혼인이 예정된 입장이었다. 각국의 관계를 생각해서 성대한 환영을 해 줘도 모자라는 게 아닌가? 그나마 카놀라가 직접 나서서 제 위치를 ‘귀빈’으로 선언하지 않았으면, 아예 불청객 취급을 받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럼요, 왕녀님께선 당연히 해야 하실 말씀을 하신 겁니다.”
안젤리나가 쭈그리고 있는 카놀라의 등을 토닥이며 인자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그 말에 카놀라가 무릎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심각하고 진지했다.
“덕분에 만난 지 하루 만에 헤어지게 생겼어!”
아직 제대로 된 데이트도 못 해 봤는데 대뜸 자신의 아버지에게 말대꾸하는 모습부터 보았으니, 인상이 좋게 남진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사자인 저 그라그포드는 또 어떻겠나. 제 아들에게 남으라고 했으니, 분명 그녀의 이야기를 할 것이다. 차라리 예비 남편의 얼굴이라도 안 본 상태였으면 미련 없이 돌아섰을 텐데!
안젤리나는 일정한 속도로 카놀라의 등을 두드렸다. 그러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닥거렸다.
“당당한 왕녀님의 모습에 오히려 반했을 겁니다.”
확신에 찬 안젤리나의 말에 카놀라가 조금 누그러진 눈으로 그녀를 힐끔 보았다.
“그랬을까?”
안젤리나는 아예 카놀라의 오른편에 함께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힘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요!”
“……나 좀 멋있었어?”
“장난 아니셨습니다.”
오스카까지 카놀라의 왼편에 앉아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평소엔 늘 실없는 농담이나 해 대는 노인들이지만, 이렇게 진지하게 말을 할 때면 묘한 신뢰감을 준다. 저게 바로 연륜인가 보다.
양옆에 앉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카놀라가 괜히 헛기침했다. 새침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가 치마 주름을 탁탁 털며 태연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했다.
“뭐. 흠. 그래. 좋아. 사실 그게 내 매력이니까.”
카놀라는 자신의 이 부질없는 걱정과 후회를 미련 없이 털어 버리기로 했다. 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나? 설사 다시 돌아간다 해도, 아마 똑같은 상황에 부닥치면 자신은 또 그렇게 행동할 게 분명했다.
기운을 되찾고 나니 드디어 방 안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카놀라는 가구의 서랍을 열어 보거나 커튼을 들춰 보며 꼼꼼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나같이 심미성보다는 효율성을 중요시한 듯한 가구들이었다. 어쩜 이렇게 한결같이 투박하지? 무채색으로 가득한 방 안을 보고 있자니 절로 불만스러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설마 나 앞으로 계속 이 방에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겠지?”
“생각보단 좁군요.”
방의 구조 자체는 아주 단조로웠다. 너무 단조롭고 꼭 필요한 가구 외엔 그 흔한 장식품 하나 보이질 않았다. 카놀라를 호위해야 하는 루덱의 입장에서야 신경 써야 하는 게 적어지는 셈이니 좋기는 했다. 다만 방의 단조로움이 꼭 왕녀가 지금 이곳에서 받는 대우를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듯해 썩 유쾌하지 않았다.
“시중인들의 방도 안 딸려 있잖아?”
벽을 한참이나 더듬거리던 오스카가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안젤리나와 그는 카놀라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시중인들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 험한 곳까지 쫓아왔는데, 정작 방에는 직속 시종이 머무를 곳이 전혀 없었다. 오스카의 말에 카놀라의 표정이 불안하게 변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트집을 잡아야 할지 모르겠다. 트집을 잡으려면 잡을 게 무궁무진한데, 잡는다고 해도 이게 개선될지 의문이기도 했다.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방을 둘러보던 카놀라가 막 입을 열려는데,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마침 문가에 서 있던 오스카가 큰 소리로 질문했다.
“샤를만 왕녀님을 뵈러 왔습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차분한 여성의 것이었다. 카놀라는 아까 전사가 나가며 담당 시중인을 불러온다고 했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물어볼 것도 많으니 얼른 만나 봐야지.
카놀라의 허락이 떨어지자, 오스카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활짝 열린 문밖을 확인한 카놀라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앞으로 왕녀님이 이곳 생활에 잘 적응하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 티보치나라고 합니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인사를 먼저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에 감격하기에는 카놀라는 이미 다른 데에 정신이 홀려 있었다.
“이 동네는 다 왜 이래? 내 눈이 이상한 거 아니지? 원래 트리폴인들은 이렇게 극단적이야?”
한참이나 눈을 깜빡이며 티보치나를 보던 카놀라가 더듬더듬 말을 했다. 티보치나가 의아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카놀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뭐야, 이 동네는? 왜 다들 우락부락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예쁜 건데?
“어, 그러니까…… 티보치나? 라고 부르면 되……나?”
게다가 시중인이라고 하기엔 뭔가, 더 높은 신분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딱히 시중인 유니폼을 입은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저 옷이 시중인의 유니폼이라면 할 말이 없겠지만……. 어딘가 모르게 불신이 생겼다. 저 얼굴 때문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드는 것 같긴 하지만.
긴가민가한 목소리로 묻는 카놀라에게, 티보치나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웃으니까 세상이 환해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카놀라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지 않고선 당장 비명을 지를지도 몰랐다.
그녀의 예비 남편이 청순하게 예뻤다고 한다면, 티보치나는 무표정일 때 무척 냉담하고 차가워 보이는 미인이었다. 새까맣고 긴 생머리를 차분하게 늘어뜨린 그녀는 보랏빛이 감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가 하얘서 그 색이 더욱 짙게 느껴졌다. 특히 보랏빛 눈동자는 신비롭고 몽환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어릴 적에 선물받았던 인형 중에 저렇게 생긴 인형이 있었던 것 같다. 틀림없다.
저런 얼굴로 미소라니, 분명 얼굴만으로 사람을 여럿 죽였을 거야!
“괜찮으십니까?”
“물론, 물론 괜찮지!”
괜찮다는 사람치고는 안색이 몹시 상기되어 있었다. 카놀라의 얼굴을 살피던 티보치나가 차분하게 말을 했다.
“열이 나시는 것 같습니다. 겨울 산맥을 넘어오시면서 감기에 걸리셨을 수도 있으니 약을 챙겨 오겠습니다.”
약보단 당신이 눈앞에서 사라지면 알아서 내려갈 열인데. 차마 그렇게 이야기할 수 없어서, 카놀라는 그냥 어설프게 웃었다. 그 와중에도 티보치나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일자로 자른 앞머리가 찰랑거리는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움직임마저 완벽해서 절로 탄성이 나왔다. 남편도 모자라 시중인마저 이런 엄청난 사람이라니, 아무래도 자신은 이제야 고생 끝 행복 시작인 모양이다.
“괜찮습니다. 약은 저희가 이미 챙겨 왔습니다.”
말문을 잃고 서 있는 카놀라를 대신해 대답을 한 사람은 오스카였다. 그 대답에 티보치나의 미소가 약간 엷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더 권유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아직 어디도 둘러보지 않으셨죠? 궁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그 제안에 카놀라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려 했다. 그러나 불쑥 끼어든 목소리 때문에 그녀는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안내는 내가 직접 하겠다.”
티보치나가 소리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티보치나의 얼굴에 홀려 있던 카놀라도 퍼뜩 정신을 차리곤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양옆에 전사들을 대동하고 나타난 이는 카놀라의 예비 남편이었다.
그의 등장에 티보치나가 선뜻 뒤로 물러섰다.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비 남편이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하나로도 벅찬 인물이 둘이나 나타나서 더욱 혼란에 빠져 있던 카놀라가 그 시선을 느끼곤 반사적으로 먼 허공을 응시했다.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죠!”
씩씩한 외침과 달리 시선은 뭣도 없는 먼 산을 응시하고 있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 카놀라를 외면했다. 루덱도 차마 카놀라의 꼴을 볼 수 없어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카놀라는 꿋꿋이 초점 없는 시선을 유지했다. 수행원들의 부끄러움이고 뭐고, 일단 자신이 살고 봐야 하지 않겠나.
티보치나는 그런 카놀라를 신기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은 오래갈 수 없었다.
“물러가도록.”
예비 남편의 말에, 잠시나마 호기심 어린 빛으로 반짝였던 티보치나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티보치나가 카놀라에게 인사를 한 뒤, 선뜻 몸을 돌렸다.
티보치나가 몸을 돌리고서야 카놀라도 제대로 시선을 내렸다. 시중인이라더니 내내 붙어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카놀라는 티보치나의 뒷모습을 슬그머니 훔쳐보았다. 살랑거리는 머리끝부터 호리호리한 체격까지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어 보였다. 저런 미인을 매일 볼 수 있다니! 감격스러운 마음에 알현실에서 느꼈던 화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가시죠.”
“좋아요!”
미인 한 사람이 사라지니 좀 숨통이 트이는 것 같다. 카놀라는 이제야 자신 있게 제 남편에게로 눈을 돌렸다. 내내 카놀라를 응시하고 있던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제 표정을 수습하곤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카놀라는 냉큼 그의 뒤를 따라갔다. 안젤리나와 오스카가 불안한 눈으로 슬그머니 뒤에 따라붙었다.
“근데, 내가 뭐라고 불러야 해요? 난 여전히 당신의 얼굴밖에 모르는데.”
카놀라의 물음에 그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에서 입을 열었다.
“후사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후사는 호칭이라면서요.”
“그렇습니다.”
카놀라는 무엇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못마땅한 눈으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제 예비 남편을 힐끔 보았다.
“후사가 무슨 의미인데요?”
“군주의 후계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일종의 ‘왕세자’라고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인 소리였다. 그는 군주의 외아들이니 군주의 유일한 후계자이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경외하는 마음을 담아 대우해야 마땅할 테지. 그러나 카놀라는 설명을 듣고도 여전히 그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뚱하게 정면을 보던 카놀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싫어요. 차라리 이름을 부를래요. 난 당신의 곁에 설 사람이잖아요.”
누구보다 특별한 관계로 묶일 텐데, 어째서 남들과 같은 호칭을 사용하겠어? 카놀라는 차마 내뱉지 못한 불만을 조용히 되삼켰다. 그녀는 그가 부릴 수하나 그의 지배를 받을 백성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유일하게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할 반려자가 될 것이다. 당연히 그녀에겐 특별한 것이 허락되어야 했다.
그녀의 예비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덕분에 짧게 이어졌던 그들의 대화는 갑자기 단절되었다. 연신 속으로 불평을 늘어놓던 카놀라는 그제야 퍼뜩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곳은 트리폴이다. 어쩌면 그녀가 모르는 문화나 법이 있을 수도 있다. 심지어 군주인 그라그포드도 그를 후사라고 불렀으니, 어쩌면 정말로 그렇게 불러야만 한다는 법이 있을 수도……?
“혹시 법으로 뭐가 정해져 있어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저…….”
느리게 입술을 뗀 그가 말끝을 흐렸다. 그러다가 곧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말을 이었다.
“절 이름으로 부르는 사람이 없어서요.”
카놀라는 한참이나 그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과대망상일까? 왜인지 대답을 하는 그의 목소리가 냉담하게 느껴졌다. 아니, 씁쓸한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되었든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건 확실했다. 아무래도 괜한 화제를 꺼내서 분위기를 망친 듯하다. 카놀라는 성급하게 접근했음을 자책하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후사라고 부를게요.”
“아닙니다. 이름으로 부르셔도 됩니다. ……에델이라고 부르십시오.”
원하던 대답을 들었음에도 카놀라는 썩 기쁘지 않았다. 이름을 말해 주기 전에 있었던 잠깐의 주저함이 마음에 걸리는 탓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고 늘어지면 오히려 더 멀어질 것 같다는 본능적인 느낌이 들었다.
본인이 허락했으니 이름을 부르는 게 문제가 되진 않겠지. 쉽게 결론 내린 카놀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에델! 그럼 정식으로 인사해요.”
카놀라가 우뚝 멈춰 섰다. 덕분에 에델도 얼결에 걸음을 멈추었다. 의아하게 자신을 보는 에델을 향해, 카놀라가 손을 내밀었다.
“난 샤를만의 넷째 왕녀, 카놀라 F. 인카나 샤를만. 스토크의 딸이자 잉그뤼의 주인, 그리고 이젠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갈 당신의 정혼녀예요.”
에델은 자신의 앞으로 내밀어진 카놀라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전 테드라고의 후손, 에델입니다.”
카놀라는 미소를 더욱 환하게 만들었다. 사내의 손은 이제껏 잡아 본 다른 누구의 것보다 무척 단단하고, 거칠었다. 하지만 아주 따뜻했다. 그래서 계속 잡고 있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했다. 상대방도 같은 생각이면 참 좋을 것이다. ……아니면 말고.
위아래로 손을 움직여 악수한 에델이 놓으려는 듯 손에 힘을 뺐다. 그 찰나에 카놀라는 재빨리 왼손으로 바꿔서 그의 손을 잡아챘다. 마치 매가 먹이를 낚아채듯 날렵하고 빠른 손놀림이었다. 몸으로 하는 모든 일에서 최악의 성적을 보여 주는 그녀였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건 앞으로의 스킨십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칠 문제였다! 왼손으로 에델의 오른손을 단단히 잡은 카놀라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럼 이제 주변을 안내해 주시겠어요?”
전사들과 함께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안젤리나와 오스카는 동시에 침음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얌전하게 걷는다 했지. 그나마 팔짱을 끼지 않은 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여간 평소엔 운동과 담을 쌓고 살아왔으면서 스킨십할 때는 저렇게 손이 빠르다. 대체 누구한테 저런 걸 배워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아참,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확인해 줄래요?”
여전히 왼손에 힘을 준 상태에서, 카놀라가 오른손으로 품속의 서신을 꺼냈다. 에델의 앞에 그것을 촤르륵 펼쳐 든 그녀가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거 가짜 아니죠?”
카놀라가 펼쳐 든 것은 혼약서였다. 트리폴 군주의 외아들과, 샤를만 왕가의 넷째 왕녀의 결혼을 합의로 진행한다는 내용의 혼약서. 찬찬히 그것의 내용을 읽어 본 에델이 카놀라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아주 심각한 눈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델은 다시 한번 혼약서의 내용을 확인했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 내려가며, 마침내 마지막에 적힌 서명과 인장에까지 시선이 다다르고서야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가 맞습니다. 정식 혼약서입니다.”
“그쵸? 어휴, 다들 날 너무 안 좋아해서 내가 엉뚱한 걸 들고 왔나 했어요. 여기 사람들 얼굴만 보면 내가 무슨 선전 포고라도 하러 온 기분이 든다니까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카놀라가 혼약서를 다시 품에 넣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펼쳐진 혼약서를 한 손으로 말아서 넣기란 쉽지 않았다. 곧 죽어도 제 손을 놓지 않고 낑낑거리는 카놀라의 모습에 할 말을 잃고 서 있던 에델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 손을 놓고 편하게 정리하십시오. 이후에 다시 제 손을 잡으시면 되니까요.”
“아, 정말요? 놔 줘도 도망가지 않을 거죠?”
“어째서 도망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음…… 부담스러워서?”
그걸 알면 이런 행동을 안 하면 될 게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에델은 굳이 그것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짐작했다는 듯, 카놀라가 먼저 그에 대한 말을 한 까닭이었다.
“물론 그걸 알면 하지 말아야겠지만, 당신은 내게 먼저 손 내밀 거 같지 않아서요. 먼저 반한 사람이 애써야죠. 아, 그렇다고 억지로 하고 싶진 않으니까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들면 미리 말해 줘요. 당신이 불쾌해할 행동은 하고 싶지 않아요.”
카놀라의 눈동자는 올곧게 에델을 응시했다. 내내 가볍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진지하고 무거운 기색이 엿보였다. 예상치 못한 그녀의 진지함에 에델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주저했다. 갑자기 손을 잡혔을 때도 당황하지 않았던 그는 이번에야말로 카놀라의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그는 이내 침착함을 되찾았다.
카놀라의 첫인상, 혹은 예상치 못한 지금의 일면. 무엇이든 결국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도, 앞으로도.
“우린 이미 정혼했습니다.”
“우린 여전히 오늘 처음 만났잖아요. 그리고 난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고.”
카놀라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기어코 혼약서를 한 손으로 둘둘 말아 낸 그녀가 그것을 품에 챙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녀는 에델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당신은 나에게 반하지 않았고.”
에델은 무심코 카놀라의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깨달았다.
“근데 난 당신이 나에게 반했으면 좋겠고.”
봄처럼 화사하게 웃고 있는 이 여성의 눈동자가 사실은 아주 시린 겨울 호수의 빛깔을 가지고 있음을.
“그러니 애쓸 거예요.”
*
“말은 그렇게 했는데…….”
카놀라는 책상 위에 두 팔을 뻗고 앞으로 미끄러지듯 엎어졌다. 차가운 나무 책상에 볼을 대고 가만히 있으려니 점점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거리며 한참이나 멍하게 있던 그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어쩜 이렇게 날 내팽개쳐 두고 자릴 비울 수가 있어? 게다가 고백까지 했는데 태도가 조금도 바뀌질 않았잖아!”
‘첫눈에 반했다’는 그녀의 고백에 에델은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기껏해야 눈을 조금 크게 떴을 뿐, 더 이상의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얼굴을 붉히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래도 그렇지, ‘그렇군요.’라는 대답은 대체 뭔데? ‘그렇군요?’도, ‘그렇군요!’도 아닌 ‘그렇군요.’라니!
생각하면 할수록 부아가 치밀어서, 카놀라는 책상에 이마를 대고 애꿎은 발만 동동거렸다. 문제는 그런 무심한 대답마저 너무 잘 어울려서 할 말이 없었다는 거였다. 아무리 먼저 반했어도 거기선 한마디 했어야지!
카놀라는 그의 얼굴을 보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던 제 꼴을 회상하며 후회했다. 하지만 백날 후회해 봤자, 그 앞에 서면 또 똑같은 꼴이 되겠지. 그것이 너무 뻔해서 더욱 한탄스러웠다. 그 남자는 얼굴이 죄인 사람이었다.
“그래도 그 정도면 아주 친절하죠. 요 며칠 밖에 나갈 때마다 아주 오금이 저립니다. 누가 보면 저희가 돈이라도 크게 떼먹은 줄 알 거예요.”
안젤리나의 말에 책상에 고개를 박고 있던 카놀라가 슬쩍 눈을 들었다. 그것이라면 카놀라 역시 할 말이 아주 많았다.
“혼약서가 가짜도 아닌데 왜 날 저렇게 싫어하는 거야?”
혹시나 문서를 잘못 가져왔나 싶어 에델에게 직접 확인까지 받지 않았나. 그 이후에도 다시 한번 꼼꼼하게 문서를 읽어 보았다. 틀림없는 혼약서였다. 그녀는 선전 포고 하러 온 게 아니라 결혼을 하러 온 것이었다.
“그 후계자님이 인기가 많으신 모양이죠. 뻔하지 않습니까.”
오스카의 말에 카놀라는 반박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에델 얼굴 정도면 추종자가 한두 명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군주의 외아들이라는 신분까지 더해졌으니, 한 무리의 추종자들이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카놀라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책상에 얼굴을 박았다. 만인의 연인이 누군가와 결혼을 한다고 하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그나마 가능성이 큰 원인을 알아내고 나니 더욱 절망스러웠다. 정말 그런 이유로 모두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면, 이건 뭐 그녀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결혼을 안 할 수도 없고!
“일단 이곳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책이라도 빌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주거니 받거니 말을 했다. 사실 카놀라는 에델에게서 성에 대한 안내를 받을 때 도서관의 위치를 유심히 기억해 둔 참이었다. 그와 헤어진 직후엔 곧장 그곳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녀는 도서관 문 앞에서 가차 없이 쫓겨났다.
구구절절 퇴짜 이유는 많았지만 카놀라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에델의 도움을 받으려 했더니만, 그는 그새 외출을 한 상태였다. 그라그포드와 함께 사냥을 나갔다고 했다. 험한 산맥을 넘어 정혼자가 도착했는데 곧장 사냥을 나간다는 것도 이해가 되질 않았지만, 곧 돌아오겠거니 체념했던 게 그저께다. 무슨 사냥을 하러 간 건지, 에델이 성을 비운 지가 벌써 3일째였다.
카놀라는 3일째 하릴없이 방에 머무르는 중이었다.
“도서관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다니. 원래 이렇게 다들 불친절한 걸까? 대체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예민한 거야? 내가 이상한 사람이야? 이런다고 뭐 결혼이 엎어져?”
안젤리나와 오스카를 붙들고 징징거리던 카놀라는 금세 지쳐서 다시 책상에 널브러졌다. 궁의 구조야 대충 안내를 받았다고 해도 딱히 그녀가 갈 만한 곳은 많이 없었다. 정작 방문하려던 도서관에선 문전박대를 당했다. 시중인들은 아예 그녀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는 듯, 꼭 해 줘야 할 일만 후다닥 하고 가 버렸다.
아니, 누구라도 좀 상대를 해 줘야 뭔가 다른 것을 알아 가든 말든 할 게 아닌가.
저 바깥의 모든 사람은 카놀라가 얌전히 방에만 있어 주길 바라는 것 같았다. 처음에야 뜻대로 해 주면 태도가 좀 바뀔까 싶어서 노력했지만, 역시 3일 내내 방에만 틀어박혀 있게 하는 건 너무한 처사였다.
책상에 볼을 문대며 입술을 삐죽이던 그녀가 결국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일어섰다.
다 필요 없어, 삐뚤어질 거야.
“좋아, 안젤리나. 오스카. 난 이제부터……!”
똑똑.
기세 좋게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던 카놀라가 고개를 휙 돌렸다. 식사 시간도 아니고, 목욕 시간도 아니니 시중인은 아닐 것이다. 카놀라의 안색이 환하게 변했다. 에델이 사냥에서 돌아온 걸까? 반색하며 문을 열려던 카놀라는 당장 튀어 나가려던 자신의 몸을 애써 붙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존심이 있지, 주인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 수는 없었다. 나름대로 마음이 상했다는 걸 표현하려고 손으로 양 볼을 꾹꾹 누르며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내 방 밖으로 나오질 않으셨다 들었습니다. 어디 아프신 건 아닌가 싶어서 뵈러 왔어요.”
차분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에델이 아니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것도 잠시, 카놀라는 그녀의 목소리가 귀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놀라는 다른 의미로 신이 나서 냉큼 문 앞에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그녀가 천천히 문을 열었다. 까만 머리칼에 보랏빛 눈동자. 3일 동안 대체 뭘 먹었는지, 그 미모가 더욱 빛나는 티보치나가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빙긋 웃으며 묻는 그 물음에 카놀라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겨우 이성의 끈을 붙들고 제 고개의 움직임을 막은 카놀라가 애써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더니, 왜 한 번도 안 온 거야?”
시종들에게 티보치나에 관해 물어도 누구 하나 제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먼저 연락할 수단이 없는 카놀라로서는 그저 상대방이 와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3일째 되는 오늘에 이르러선 아예 마음을 비우고 있던 참이었다.
카놀라의 말에 티보치나가 미안하다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후사께서 탐탁잖아 하시는 것 같아 자중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오는 게 맞는 선택이었던 것 같네요. 이렇게 환영해 주시는 걸 보니.”
도저히 더는 차갑게 대할 수 없었다. 카놀라는 결국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이런 미인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건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에델을 마주해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연출되겠지.
“다시 보니 기쁘고 안심돼. 난 이곳에 대해 하나도 모르니까. 그런데, 당신은 내 시중인……이 아닌 거지?”
시중을 들러 왔다기에 티보치나인 줄 알았는데, 정작 다른 사람들이 들어왔다. 카놀라는 그들의 이름도 듣지 못했다. 그저 이자는 식사 시중, 이자는 목욕 시중…… 뭐 이런 설명을 건성으로 듣는 게 전부였다. 그들의 사무적인 시중을 받으며 카놀라가 더욱 고독함을 느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시중은 들지 않지만, 왕녀님이 적응하시도록 돕는 게 저의 일입니다. 뭐든 궁금하시면 제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그것 또한 제가 봐 드릴 수 있고요.”
“시중인이 아니면, 이 궁에서 일하고 있는 귀족이야? 나를 담당한?”
카놀라는 외국인이니 적응을 위해 누군가를 선생으로 붙여 두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게 사실이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카놀라는 누구에게든 이 빌어먹을 나라에 대해서 듣고, 이해라는 것을 해 보고 싶었다.
“저는 신전 소속입니다. 아마 생각하시는 귀족에는 ‘라딘’이 해당할 것 같습니다. 라딘은 디라즈를 모시는 혈족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 디라즈는 군주를 칭하는 말이고요. 또한, 디라즈와 라딘을 수호하는 그라사, 즉 전사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모든 트리폴인은 그라사이지만, 전투를 삶의 길로 택한 자들이 대표적인 그라사에 해당합니다. 그리고 신을 섬기는 자들은 계급에서 해방되기 때문에 따로 구분을 두지 않지요.”
빙긋 웃는 낯으로 티보치나의 말을 듣던 카놀라가 고개만 돌려 안젤리나를 돌아보았다. 미소를 짓고 있는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카놀라가 안젤리나에게 속닥거렸다.
“……나 지금 공부를 해야 할 시점인 거지?”
“제가 듣기엔 그렇습니다. 분명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뭔 소릴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요.”
공부는 진짜 싫은데.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입은 웃고 있는데 눈썹만 찌푸리니 표정이 참으로 기묘했지만, 정작 카놀라는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 것 같았다. 티보치나가 재미있다는 눈으로 카놀라의 얼굴을 구경했다. 하지만 공부에 대한 엄청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있던 카놀라는 그녀의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책 한두 권으로 안 끝날 거 같지?”
“어림도 없어 보입니다.”
오스카도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거들었다. 카놀라는 한숨을 되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본적인 계급층부터 익숙지 않으니, 다른 것들은 얼마나 낯설지 상상할 수 없었다. 어릴 적부터 수업 농땡이 치는 걸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았던 그녀는 어떻게든 지금의 사태를 극복할 다른 방법을 떠올려 보았으나, 마땅한 돌파구가 보이지 않았다.
“계속 듣고 보다 보면 익숙해지실 겁니다. 허락하신다면 앞으로 매일 이 시간에 방문해 왕녀님의 적응을 돕겠습니다.”
티보치나의 다정한 말에 카놀라가 감격한 듯 양 뺨을 감쌌다.
“그렇게 해 주면 당연히 좋을 거야. 매일 만날 수 있다니! 하지만 공부는 내일부터 하고 오늘은 그냥 나랑 돌아다녀 주면 안 될까? 3일 동안 방에 틀어박혀 있었더니 온몸에 곰팡이가 피는 기분이거든!”
활기차게 시작한 말은 이상한 내용으로 끝났다. 티보치나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이 들은 내용을 천천히 돌이키는 동안, 안젤리나와 오스카는 카놀라에게서 멀리 떨어졌다. 저 부끄러운 사람은 누군지 모릅니다. 우리와 관계없어요. 온몸으로 외면하는 두 사람을 흘겨본 카놀라가 이내 반짝이는 눈으로 티보치나의 대답을 기다렸다.
웃는 듯 마는 듯 모호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지요. 가 보시고 싶은 곳 있으세요?”
“어디든!”
드디어 이 지긋지긋하고 좁은 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카놀라는 잔뜩 들떴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웃으며 응시하던 티보치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고민했다.
그러다 이내 카놀라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시죠.”
*
퍼드덕거리는 날갯짓에 몇 개의 깃털이 날렸다. 날카로운 발톱이 팔 보호구를 파고들며 단단히 움켜쥐었다. 에델은 자신의 팔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은 매의 발목에서 돌돌 말린 쪽지를 꺼냈다. 쪽지를 펼쳐 읽는 그의 곁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그는 에델의 족히 두 배는 될 것 같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두른 털가죽 외투는 상당히 컸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덩치를 다 가리지 못했다. 그의 보고에 에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반으로 쭉 찢었다. 그러곤 반절을 매의 발목에 달린 작은 통에 다시 넣었다. 통이 잘 닫혔음을 확인한 그가 팔을 힘껏 위로 올렸다. 매가 퍼드덕 날아올랐다.
하늘로 높이 솟는 매의 날갯짓을 응시하던 에델이 제 옆을 돌아보았다.
“수고했다, 울란.”
성큼성큼 몸을 돌리는 에델의 뒤를 울란이 따라붙었다. 두 사람은 얼마 걷지 않아 큼지막하게 지어진 임시 막사에 도착하게 되었다. 막사 앞을 지키고 있던 전사 두 사람이 에델에게 인사를 했다.
“디라즈는 안에 계시나?”
“네. 제사 준비를 막 끝내셨습니다.”
에델이 홀로 막사에 들어갔다. 흰색 털가죽을 두르고 있는 그라그포드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어뜨린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단검이 쥐어져 있었고, 그 앞의 투박한 나무 상자 위에는 그들이 사냥한 사슴이 놓여 있었다. 절명한 사슴의 목에선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피는 바닥에 놓인 잔 안으로 흘러내렸다.
“디라즈, 제단이 준비되었습니다.”
“잔을 가져가라. 바로 시작하겠다.”
방금 잡아서인지, 사슴의 피는 아직 뜨거웠다. 공기가 차가운 탓에 잔에선 김이 올라왔다. 에델이 막사 바깥에 도열한 전사들을 지나쳐 제단 앞까지 다다르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제사장이 손을 내밀었다. 가죽 아래 뼈마디가 드러날 정도로 가느다란 손가락이 피가 든 잔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향하는 절벽 끝엔 간소하게 만들어진 제단이 있었다. 뒤이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고깃덩어리를 든 그라그포드가 제단으로 향했다. 그는 고깃덩어리를 제단 위에 두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검을 뽑아 바닥에 눕히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동시에 도열하고 있던 전사들도 자신의 무기를 바닥에 내려 두며 무릎을 꿇었다.
에델 역시 무릎을 꿇었다. 얼어붙은 대지의 차가운 냉기가 무릎을 타고 올라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제사장의 목소리가 찬 바람을 타고 귓가에 닿았다.
“대지와 생명의 신이시여, 그 따뜻한 품으로 키우신 양식을 저희에게 허락해 주심에 감사를 올립니다. 여기 질 좋은 고기와 뜨거운 피를 바치나이다. 트리폴의 모든 일족이 추운 겨울을 굳건히 이겨 낼 수 있도록 굽어살피소서.”
제사장은 고기 위에 피를 흩뿌렸다. 피 냄새는 절벽 아래, 추위를 이겨 내고 있는 나무 사이사이로 퍼져 나갔다. 신에 대한 몇 마디의 찬사를 이어 간 제사장이 마무리하자, 그라그포드가 먼저 몸을 일으켰다. 조금 뒤 일어나라는 허락이 떨어지고서야 에델과 전사들은 몸을 일으켰다. 짧은 사이에 바지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제단에 이마를 대고 뭐라고 혼자 읊조리는 제사장을 물끄러미 보던 에델이 몸을 돌렸다. 그라그포드는 네 개의 수레를 채운 사냥감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첫 번째 수레가 적구나.”
“하스디는 이번 성년식에서 상당히 많은 그라사를 배출했습니다. 올겨울부터는 자체적인 사냥만으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에델의 설명에 그라그포드가 침음을 삼켰다. 그러곤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첫 겨울은 실수가 잦다. 전년도의 양으로 배분해라.”
사냥감을 단단하게 고정했던 끈을 모두 풀고 수레마다 다시 양을 배분하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덕분에 그들은 제사가 끝나고도 예정보다 한참이나 늦게 출발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각 수레의 목적지를 하나하나 확인한 에델이 비로소 자신의 말에 올랐다.
“드디어 집으로 돌아가는군요. 이번 사냥은 유독 길었던 것 같습니다.”
에델의 옆으로 말을 몰아 다가온 이는 날렵한 체구의 롬이었다. 혀를 내두르며 투덜거리는 그의 옆에 있던, 그와 똑같이 생겼지만 조금 더 인상이 부드러운 투갈이 말을 받았다.
“작년의 두 배를 잡아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지. 목표치를 채울 수 있어서 오히려 다행이잖아? 신이 펠디를 완전히 버리신 건 아니었던 모양이야.”
“그러게, 거기에 전염병이 돌았을 때만 해도 다 죽는 줄 알았는데.”
주거니 받거니 하는 롬과 투갈 사이로 누군가 말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게 다 후사께서 치료제를 찾아내신 덕분이지.”
그냥 말 머리만 들이밀었는데도 롬과 투갈은 저만치 거리를 벌려야 했다. 두 사람의 사이를 매정하게 찢어 놓은 울란이 칭찬을 바라는 듯 에델을 돌아보았다. 무심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델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관심을 끊었다.
중요한 건 이번 겨울을 이겨 낼 수 있을 정도의 사냥을 해냈다는 것이다. 오늘 사냥한 동물들을 네 개의 마을로 보내 주고 나면, 얼추 그들이 챙겨야 할 마을들은 마무리된다. 물론 제일 중요한 수도의 식량 창고를 채울 마지막 대사냥이 남았지만, 그건 지금처럼 소수의 전사로 최대한 빠르게 많이 잡아야 하는 작업은 아니었다.
“후사께서는 얼른 가고 싶으시겠습니다.”
대사냥이 있기까지 남은 휴일을 가늠해 보던 에델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음흉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는 롬의 모습에 에델이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으려니, 그가 킬킬거리며 말을 이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고백받으셨다면서요? 아이누에게 다 들었습니다.”
에델이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누는 생긴 건 참 과묵하고 진중해 보이는데 입만 열면 아주 깃털처럼 사방을 날아다닌다. 잇새로 짧게 혀를 찬 그가 정면의 먼 곳에 시선을 두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어이쿠, 후사. 그분 앞에서 그런 소릴 하신 건 아니죠?”
“신전에서 티보치나를 보냈더군.”
티보치나의 이름이 나오자 롬이 입을 다물었다. 모호한 표정으로 볼을 긁적이던 그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나름대로 제일 유능한 사람을 보낸 거겠죠.”
“그래, 그 유능함으로 누구보다 빨리 이곳을 떠나게 만들겠지.”
나지막한 에델의 말에 롬이 지레 놀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제사장은 그라그포드와 저만치 뒤에서 오고 있었다. 울란도 괜히 헛기침을 크게 하며 말을 이리저리 몰았다. 덩치 큰 전사들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에델의 주변은 한산했는데, 울란의 행동 덕분에 다른 전사들은 더욱 멀리 떨어져야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있긴 했지만 에델의 말을 들을 수 있었던 투갈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정작 에델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그는 흔들림 없이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 겹겹이 쌓인 산맥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하늘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황금색 머리칼이 꼭 이글거리는 태양의 빛과 닮아 있었던 것 같다.
신기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햇살 같은 머리칼을 휘날리며, 그토록 봄볕을 닮은 미소를 지으면서, 어떻게 그리도 시린 겨울의 눈빛을 할 수 있는지. 봄과 겨울이 함께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
‘이젠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갈 당신의 정혼녀예요.’
너무 자신만만해서, 에델은 순간 그녀가 정말로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당신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 당당함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걸 뻔히 아는데도.
‘당신이 나에게 반했으면 좋겠고.’
에델은 아까 전서응을 통해 받았던 쪽지를 떠올렸다. 티보치나가 카놀라를 찾아갔다는, 아주 짧은 내용의 쪽지였다. 쪽지를 보낸 아이누는 나서서 두 사람을 떼어 놓을지 말지를 물어보고 있었다. 그리고 에델은, 그냥 두는 쪽을 택했다.
떼어 놓는 건 모두 부질없는 행동이었다. 그녀가 신기하고 흥미로운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신전은 이미 결정을 내렸다. 그라그포드는 그것을 거역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에델 역시.
‘그러니 애쓸 거예요.’
해는 산 뒤편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하늘에 남은 잔상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시선을 내리곤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이 혼약은 어차피 깨질 것이다.”
*
“그러니까, 결혼할 상대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고 왔다는 건가요?”
티보치나의 목소리에 약간의 황당함이 묻어났다. 그녀의 시선을 느낀 카놀라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셈이지. 하하하!”
웃으면서 대답하기엔 내용이 별로 즐겁지 않다. 자연히 티보치나의 목소리도 한층 낮아졌다.
“강압적이고 일방적이었군요.”
“왕족의 결혼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
“하지만 힘드실 거예요. 스스로 선택한 삶이 아니니까요. 등 떠밀려 걷는 삶은, 결국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기 마련이지요.”
뒷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그런 티보치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원망하기엔, 누려 온 게 너무 많은걸?”
웃으며 대꾸한 그녀가 폴짝폴짝 뛰어서 티보치나를 앞질렀다. 가볍게 발을 굴리며 뛰어다니던 카놀라는 한참 앞으로 나아가서야 멈췄다. 그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아 주변을 둘러본 그녀가 혀를 내두르며 티보치나를 돌아보았다.
“그나저나 여긴 참 어딜 가나 삭막하네. 왕궁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야.”
왕궁 내에 건물 자체가 그리 많지도 않았지만, 하나같이 생긴 것도 똑같았다. 이미 에델에게 한 번 안내를 받았음에도 모든 문이 그게 그거처럼 보였다. 티보치나와 함께 있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진즉 길을 잃고 엉뚱한 곳을 헤맸을 것이다. 휴대용 지도라도 받아서 들고 다녀야 하나 싶었지만, 왕궁 내부 지도를 쉽게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카놀라는 한 손으로 눈가에 그늘을 만들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벽화라도 그려 두었으면 훨씬 보기에 나았을 텐데.
“트리폴의 건물들은 실용성을 최우선으로 두고 지어졌습니다. 왕녀님의 눈엔 다소 초라하게 보이실 수 있겠죠.”
알현실이나 가장 큰 연회장 정도에는 벽에 조각이 새겨져 있긴 했다. 하지만 왕궁 대부분은 밋밋한 돌벽이었다. 보통 왕족의 초상화나 일상화를 걸어 두는데 그조차도 거의 보이질 않았다.
아, 엄청나게 큰 그림이 있긴 했다. 사냥인지 전투인지 알 수 없는 내용의 그림이었다. 그 속에서 싸우고 있는 수많은 사람 중 누군가는 왕족일지도 모른다. 초상화를 그런 식으로 조금…… 특이하게 그린 것일 수도 있겠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던 카놀라가 이내 도리질을 치며 대꾸했다.
“아니, 초라하진 않아. 이곳 나름의 멋이라고 생각해. 비록 사람 대부분은 별로 멋지지 않지만.”
나지막하게 이어지는 뒷말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녀는 금세 불퉁한 표정을 지으며 어딘가를 흘겨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마도 원망스러운 누군가들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내내 방에 틀어박혀 있어야 했으니 오죽 억하심정이 쌓였겠나. 영문도 모른 채 유령 취급을 당하는 카놀라는 그저 억울함과 답답함만 쌓였을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렇게 자신의 기분을 얼굴에 죄다 드러내기도 쉽지 않을 텐데. 티보치나는 무의식적으로 짧은 웃음소리를 냈다.
“3일 만에 서운함이 가득 쌓이셨군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누군가와 열심히 눈싸움하던 카놀라가 고개를 휙 돌려 티보치나를 보았다.
“들어 봐. 티보치나라도 나처럼 변할 수밖에 없을걸? 글쎄 어제는…….”
어딘가에 따로 일기를 써 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녀의 불만은 일목요연하게 흘러나왔다. 기다렸다는 듯 조잘거리는 카놀라의 모습에 티보치나는 그저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상대방이 이렇게나 잘 받아 주니 별수 있나. 더욱 힘을 내서 자신의 서운함을 한탄하는 수밖에. 카놀라는 본격적으로 손가락을 접어 가며 불만 사항을 나열했다.
자신이 어디로 걷고 있는 줄도 모르고 한참이나 불만을 토로하던 카놀라는 문득 공기가 아주 많이 차가워졌음을 깨달았다. 어느새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여긴?”
“후원입니다.”
카놀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선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검지로 턱을 문지르는 그녀의 표정이 사뭇 심각했다.
“무덤 아니고?”
진지하게 되묻는 그 음성에 티보치나가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후원이에요. 지금은 누구도 돌보지 않는 곳이지만.”
이곳에 도착한 이래로 꽃이 가득 핀 정원을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나무들로는 제법 꾸며져 있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이 서 있는 이곳은 아예 이렇다 할 것이 없는, 그냥 맨땅이었다. 잘 모르는 카놀라의 눈에도 땅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맨땅에 다가간 카놀라가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곤 검지로 땅을 쿡쿡 찔러 보았다. 손끝에는 흙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이 후원이야말로, 척박하고 추운 이 나라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곳이죠.”
땅을 찔러 보는 데에 여념이 없던 카놀라가 의아한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티보치나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이 후원을 만드신 분은 결국 땅의 차가움을 이기지 못하셨습니다. 어쩌면 이 땅이 그분의 따뜻함을 거부한 것일 수도 있지요.”
티보치나는 부드럽게 웃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엔 어딘가 한기가 감돌았다. 카놀라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켜 티보치나에게로 몇 걸음 다가갔다.
“왕녀님, 당신은 이 나라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은 따뜻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에요. 이곳이 아니라, 충분히 사랑받을 수 있는 다른 곳으로 가셔야 해요.”
카놀라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감정이 스쳤다.
“티보치나?”
“트리폴인들은 이방인을 싫어합니다. 폐쇄적이고 의심이 많지요. 왕녀님께 모두가 적대적인 이유는, 왕녀님이 외지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무례를 빌미로 정혼을 무르셔도 조금의 흠이 되지 않습니다.”
눈을 깜빡이며 한참이나 말을 잃고 있던 카놀라가 볼을 긁적였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벙긋거리던 그녀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심각한 표정으로 무언가를 고민하던 그녀가 이내 시선을 들어 티보치나를 보았다.
“어…… 우선 조언은 고마운데 틀린 부분을 먼저 정정해 줄게.”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은 카놀라가 한층 발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난 따뜻하지 않아. 아름다운 건 부정하지 않지만!”
티보치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응시했다. 그런 그녀를 두고, 카놀라는 다시 후원으로 관심을 돌렸다. 차갑고 딱딱한 땅. 아무것도 없는 맨땅의 군데군데에, 성마른 나뭇가지들과 바짝 마른 잎사귀들이 보였다. 쭈그리고 앉아 마른 잎사귀를 만지작거리던 카놀라가 무릎 위에 턱을 기댔다.
“나는 그저, 따뜻하려고 노력하는 거야.”
입술을 무릎에 짓누르며 손장난을 치던 카놀라는 좀 더 쾌활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무례하다고 기함할 정도는 아녔어. 섭섭하긴 하지만 당신 말대로 원래 이방인을 싫어하는 분위기라면 착한 내가 이해해야지, 암.”
카놀라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반쯤 돌렸다. 흔들림 없이 단정한 자세로 다가온 티보치나가 카놀라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지런한 앞머리 때문인지, 눈가가 살짝 그늘져 보였다.
“왕녀님, 저는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기왕이면 이 모습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아. 그러니까 난 평생 이렇게 살걸? 걱정해 준 건 고마워!”
고개를 한껏 뒤로 젖혀 티보치나를 본 카놀라가 생글거리며 말을 했다. 발랄하다 못해 장난스럽기까지 해서, 티보치나는 카놀라가 정말 자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할 말을 잃고 카놀라를 보던 티보치나가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생각해 보면 대뜸 떠나라는 말에 그러마 하는 게 도리어 이상하다. 밑도 끝도 없는 이 말에 순순히 수긍하고 떠나길 바란 것은 그저 티보치나의 욕심이었다.
“트리폴의 척박한 환경과, 냉담한 사람들의 대우는 왕녀님을 힘들게 만들 겁니다. 왕녀님은 모르세요. 이 나라가 환영하지 않는 사람에게 얼마나 잔인하게 구는지.”
카놀라가 마음에 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래서 티보치나는 통하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대뜸 떠나라는 권유부터 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단칼에 거절당했다지만, 그래도 티보치나는 되도록 잡음 없는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녀답지 않게 지지부진한 미련을 보이며 다시금 겁을 주었다.
이어진 카놀라의 대답에 그 노력마저 무색하게 변해 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티보치나. 난 이미 에델에게 첫눈에 반했는걸?”
“……네?”
“그리고 이미 그에게 ‘내게 반하게 만들겠다’라며 호언장담했다고.”
말똥말똥한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며 말을 한 카놀라가 문득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결연한 표정엔 티끌의 숨김도 없는 감정이 묻어났다.
“자고로 진정한 사랑이란 시련을 겪을수록 단단해지는 법이지!”
티보치나는 다시 한번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벙긋거리던 티보치나는 결국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껏 웃음을 지어 준 카놀라가 벌떡 일어났다. 허공에서 손을 탁탁 털어 낸 그녀가 몸을 빙글 돌려 걸음을 옮겼다. 알 수 없는 노랫가락을 흥얼거리며 폴짝거리는 뒷모습엔 걱정이라곤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폴짝폴짝 리듬을 타며 걸음을 옮기던 카놀라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티보치나는 서 있던 자리에서 한 걸음도 떼지 않은 상태였다. 우두커니 선 그녀는 사뭇 진지한 표정이었다. 카놀라가 의아한 시선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두 손을 맞잡은 상태에서, 티보치나는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그러곤 시선을 살짝 내리깔곤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군주의 후계란 이 나라에서 가장 강인한 전사의 자리입니다. 그러니 그의 반려자 또한 그러해야 합니다.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머리, 올곧은 마음을 가진 자여야 하지요. 신전에서는 이방인은 그 조건을 갖출 수 없다고 믿습니다. 조건에 맞지 않는 자가 그 자리에 앉으면 신들이 분노하여 그간 베푸신 자애를 모두 거두어 가실 테고요.”
차가운 바람이 두 사람의 사이로 불었다. 검은 머리칼이 허공에 날리다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보여 주십시오. 당신이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잠깐의 찬 기운 탓인지, 티보치나의 표정이 무덤덤하게 변했다.
“저는 만물의 신을 받들어 트리폴의 번영을 기원하는 수석 신녀 티보치나. 혼약의 최종 승인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당신의 자격을 확인하고자 파견되었습니다.”
2. 결단코 눌러앉으리라
루덱은 그라그포드가 사냥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알현을 신청했다.
그동안 그들이 받은 대접을 미루어 보아, 열댓 번은 거절당할 각오로 했기에 그의 표정은 무척 결연했다. 그러나 긴장한 게 무색할 정도로 그의 알현 신청은 한 번에 받아들여졌다. 알현실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응시하며, 루덱은 마른침을 삼켰다.
루덱은 기사 중에서도 체격이 제법 좋은 편이었다. 그러나 이곳의 전사들에 비교하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다. 실력이야 싸워 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외형만 보아선 혼자선 절대 감당하지 못할 거구들이었다. 그런 거구들 사이에서도 그라그포드는 단연 눈에 띈다. 그러니 루덱이 이렇게 긴장을 하는 것도 어찌 보면 아주 당연했다.
그라그포드는 처음 카놀라의 인사를 받을 때와 비슷한 꼴로 앉아 있었다. 무심한 표정을 한 그가 루덱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고민하던 루덱이 슬쩍 고개를 숙이며 인사말을 뱉었다.
“알현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
“용건은?”
루덱의 말을 뚝 자르는 그라그포드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덱은 조금 상기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으나, 이내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왕녀님을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태도는 아주 불합리합니다. 군주께서 이 사실을 알고도 묵인하시는 것인지, 시중인들의 독단적인 행동인지 궁금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왔습니다.”
“……불합리하다라.”
그라그포드는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물끄러미 루덱을 응시하던 그가 검지로 턱 끝을 문질렀다. 그러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툭 말을 뱉었다.
“후사.”
“네.”
그라그포드의 오른편에 서 있던 에델이 그의 부름에 응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제야 루덱은 이 자리에 에델이 함께 있음을 깨달았다.
“문제가 있느냐?”
“아니요.”
그 대답에 루덱이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반사적으로 에델을 노려보았다. 에델은 루덱을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에델을 보던 루덱이 얼른 그라그포드를 돌아보았다. 그는 지루하다는 듯 숨을 뱉으며 턱을 괴었다.
“우린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우를 하고 있다.”
“하지만…….”
“넌 물자들을 이곳까지 가져온 총책임자라고 했지. 그렇다면 너의 주인에게 전해라. 물자는 확인했으며, 약속된 양의 절반도 미치지 않는다. 따라서 혼약은 우리의 뜻대로 결정할 것이다. 이만 물러가라.”
루덱은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으나, 주변에 서 있던 전사들이 앞을 가로막는 바람에 더는 이어 갈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무거운 걸음을 돌려 억지로 알현실을 나서야 했다. 뒤를 힐끔 돌아보며 느릿느릿 알현실을 나가는 루덱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그라그포드에게 말했다.
“차라리 왕녀에게 언질을 주는 것은…….”
“뭐라고 말이냐? 오라비란 놈이 지참금을 적게 보냈다고?”
느릿느릿하게 되물은 그라그포드가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의자에 기대어 있는 그를 가만히 보던 에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녀가 가져온 것으로도 수도의 절반은 겨울을 편히 지낼 수 있습니다.”
“너의 곁을 내주기엔 턱없이 적은 양이다.”
“두 배를 가져왔다 한들, 어차피 신전에선 허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잘 아는구나.”
그라그포드가 천천히 눈을 떴다. 눈만 굴려 에델을 힐끗 본 그가 아예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려 에델을 외면했다.
“왕녀는 신전 쪽에서 알아서 상대할 거다.”
에델은 이방인을 들였다며 노발대발하던 제사장을 떠올렸다. 사냥을 끝내고 돌아오는 내내, 제사장은 그라그포드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주된 내용은 신들의 분노에 대한 것이었다. 역대 이방인들의 역사를 하나하나 되짚어 가며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건들이었는지를 설명했다.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던 그라그포드는 겨우 한마디 정도 대꾸했었다. 과한 지참금을 요구해 우회적으로 거절했는데 저쪽에서 멋대로 일을 진행했다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제사장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라그포드가 혼약을 청하는 서신을 무시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진행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
디라즈는 어째서 신전의 눈을 피하면서까지 샤를만에게 답을 하셨습니까? 혀끝까지 치민 물음을, 에델은 어렵지 않게 되삼켰다. 그라그포드의 눈길을 사로잡았을 것이 무엇일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트리폴의 사정은 나날이 악화하고 있다. 외부와의 교역이 거의 없이 자체적으로 생활하기에 이곳은 너무 척박한 땅이었다. 아무리 군주가 모든 구성원을 보살피려 노력해도, 그들이 가진 물자로는 한계가 있다. 신전의 주장처럼 신에게 기도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게 좋아질 거라는 믿음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적어도 그라그포드는 그러할 것이다. 모두를 먹여 살려야 하는 그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에델뿐이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에델은 시선을 내렸다. 신전은 이방인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 달라질 건 없다. 왕녀에게 무언가를 언질 준들 뭐가 달라지겠나. 티보치나는 결국 카놀라가 포기하고 떠나도록 만들 것이다.
“아닙니다.”
“대사냥까지 체력을 비축해 두어라.”
에델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알현실을 나왔다. 사냥할 때보다 더한 피로감이 두 어깨에 내려앉았다. 방에 돌아가서 하루 정도 푹 자 두어야 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던 에델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누군가 덕분에 멈춰 서야 했다.
“그대는…….”
“여쭙고 싶은 게 있어 무례를 무릅쓰고 기다렸습니다. 시간을 내 주시겠습니까?”
그는 쫓겨나듯 알현실을 나가야 했던 루덱이었다. 그가 에델에게 다가오려는 듯 걸음을 내디뎠다. 동시에, 있는 줄도 몰랐던 누군가가 갑자기 튀어나와 둘 사이를 막았다. 평소에도 특별한 명이 없으면 에델의 등을 지키는 전사 아이누였다.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그는 말없이 자신의 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휘두르겠다는 무언의 경고였다.
루덱은 싸울 의사가 없음을 보여 주려는 듯 멈춰 섰다. 무기를 잡지도 않았다. 아이누의 뒤에서 루덱을 물끄러미 보던 에델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했다.
“아이누, 물러나라.”
아이누가 루덱을 힐끗 보곤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타났을 때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눈앞에서 움직임을 봤음에도 전혀 알아챌 수가 없어서, 루덱은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귀신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얼떨떨하게 주변을 살피던 루덱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이 복도를 벗어나기 전까지만 답을 해 주겠다.”
덤덤하게 말을 한 에델이 멈추었던 걸음을 옮겼다. 그 곁에 붙어 선 루덱이 재빨리 말을 건넸다.
“1왕자님께서 물자를 보내신 게, 모두 거래였던 겁니까?”
“주인에게 듣지 못한 내용을 어째서 알려 주어야 하는가?”
“제 주인은 왕녀님이십니다. 왕녀님께서 난처하실 내용이라면 제가 꼭 알아야 합니다.”
단호한 목소리에 에델이 멈칫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잠시 고민하던 그가 이내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먼저 혼약을 청한 쪽은 너희다. 먼저 지참금을 제시한 쪽도 너희지. 우린 그것에 대한 답을 했고, 돌아온 것은…… 왕녀군. 나야말로 궁금하다. 왕녀는 쫓겨난 건가?”
에델의 물음에 루덱이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을 질근질근 깨물던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했는데, 그랬던 모양입니다.”
“쫓겨날 정도는 아닌 것 같던데.”
에델이 혼잣말을 하듯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굳이 돈까지 쥐여 주고 내쫓을 만큼 나쁜 여자로 보이진 않았다. 겨우 한두 번 본 것으로 평가를 하기엔 부족함이 많겠지만, 어쩐지 자신의 판단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루덱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모두가 좋아해서 문제였겠지요. 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복도의 끝에 다다른 상황이었다. 애초에 루덱이 묻고자 한 것은 이것뿐이었기에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심각한 얼굴로 멀어지는 루덱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에델은 자신의 방으로 곧장 가려던 걸음을 멈추었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가면 침소로 향할 수 있다. 그리고 왼쪽 복도로 꺾으면 손님들이 머무르는 건물로 이어진다. 루덱은 진즉 이 왼쪽 복도로 가 버린 참이었다. 갈림길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에델이 계단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나 그는 계단을 오르는 대신, 다시 생각에 잠겼다.
‘모두가 좋아해서 문제였겠지요.’
“아이누.”
그늘에 숨어 있던 아이누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한쪽 무릎을 꿇고 대기하는 아이누를 힐끗 내려다본 에델이 입을 열었다.
“티보치나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냈다고 했지.”
“네.”
“그녀는 어떻게 반응했지?”
아이누가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조금 수그리곤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는 사이니까 살살 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에델은 다시 걸음을 내디뎠다. 일자로 다물어져 있던 그의 입매가 스르르 올라갔다.
*
“당장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미쳤어?”
“이 혼약서는 무의미합니다! 우린 1왕자님께 속았습니다!”
“오스카, 루덱이 자꾸 정신 나간 소릴 해. 좀 말려 봐.”
“하지만 왕녀님!”
“안젤리나, 보고만 있을 거야? 나 모처럼 마음잡고 공부 중이었단 말이야. 공부는 원래 하고 싶을 때 해야 하는 거 몰라?”
목소리는 복도까지 떠들썩하게 울렸다. 저렇게나 다들 목청이 좋으니, 몰래 무언가를 작당하는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것이다. 들려오는 실랑이를 가만히 듣고 있던 에델이 잠시 멈추었던 발을 내디뎠다.
정기적인 사냥이 끝나고 나면 꼭 하루는 내리 잠을 잤다. 다른 덩치 큰 전사들에 비해 에델은 체력 소모가 상당히 심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단련해도 선천적으로 가지는 체격 조건은 따라갈 수 없었으므로, 그는 사냥 때면 자신을 극한으로 몰고 갔다가 모든 게 끝나면 탈진하다시피 했다.
그러니 오늘도 침실로 가야 마땅했다. 하지만 에델은 침소 앞까지 갔다가 결국 걸음을 돌렸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묵직한 피로감이 어깨를 짓누르는데도 그는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로 긴 복도를 지났다. 보다 못한 아이누가 몸을 드러내고 그를 만류했으나, 그는 무심하게 아이누를 외면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걸어서 도착한 곳은 카놀라의 방이었다. 이미 복도에서부터 들리는 목소리 덕분에, 시중인에게 그녀의 행방을 물어보는 수고도 덜 수 있었다.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손을 들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기 위해 문에 손을 대려는 찰나,
벌컥!
“안 해, 안 해! 오랜만에 공부 좀 하겠다는데 도와주진 못할망정……!”
문을 벌컥 열고 선 카놀라의 고개는 한껏 뒤로 돌아가 있었다. 쌍심지를 켜고 뒤에 서 있는 제 사람들을 노려보며 땍땍거리듯 소리친 카놀라가 방 밖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녀는 누군가와 가볍게 부딪치곤 엉거주춤 멈춰 서야 했다.
“아이고, 왕녀님!”
문이 열리기 무섭게 하얗게 질린 얼굴로 굳어 있던 안젤리나가 황급히 카놀라에게 다가왔다. 걸음이 꼬여서 휘청거리던 카놀라가 놀란 얼굴로 제 앞을 보았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엉거주춤 뒷걸음질 친 에델이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문득 에델은 저 빨갛게 변한 얼굴이 꼭 딸기 같다는 생각을 했다. 갑자기 딸기가 떠오른 이유는, 순전히 저 또렷한 주근깨 때문이었다.
에델이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는 동안, 카놀라는 하얗게 변한 정신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다. 왜 이 사람이 여기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둘째 문제였다. 조금 전까지 무척 험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는데 그걸 들었을까? 카놀라는 자신의 목청이 얼마나 우렁찬지 알고 있다. 그녀를 닮은 제 수하들도 한 목청 하는 사람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복도까지 대화가 울려 퍼졌을 것이다.
어차피 시중인들 누구 하나 신경 쓰지 않는 방이라 대화를 나누는 데에도 큰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게 실책이었다. ‘미쳤어?’ 제 입으로 내뱉었던 말이 뇌리에서 울려 퍼졌다. 아랫입술을 슬며시 깨물며, 카놀라는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렇게 교양 없는 여자와 혼인할 수 없다고 정색하면 어떡하지?
“……망했어.”
“무엇이 말입니까?”
“네? 뭐가요? 뭘 무엇이요? 설마 제가 방금 무슨 말 했어요? 어머, 세상에. 진짜 미―이안해요. 정신이 없어서 헛소릴 했나 봐요. 하하하!”
제 주인의 눈물겨운 노력을 뒤에서 물끄러미 응시하던 안젤리나와 오스카는 차마 더 고개를 들지 못하고 푹 숙였다. 루덱도 멋쩍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그들을 가만히 살피던 에델이 카놀라에게로 다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제 입술을 손으로 찰싹찰싹 때리는 중이었다.
“그게 효과가 있습니까?”
“머리로 안 되면 몸으로라도 가르쳐야죠.”
사뭇 진지하기까지 한 대답에 에델은 어금니를 꾹 다물며 턱에 힘을 주었다. 그러는 동안 제 입술을 때리며 충분히 반성한 카놀라가 조금 진정된 표정으로 에델을 마주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사냥에서 돌아오면 언제나 하루는 잠을 잔다고 해서 오늘은 못 볼 줄 알았는데.”
그건 아이누도 묻고 싶은 것이었다. 아이누는 숨어 있는 상태에서 온 감각을 집중해 에델을 보았다.
“……생활은 어떠십니까?”
듣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질문이었지만, 따지자면 아주 이상한 질문이기도 했다. 아이누는 에델의 뒤통수를 아주 따갑게 응시했다. 에델의 등을 지키는 게 일이라 얼굴을 못 보는 것이 이토록 아쉬운 적은 또 처음이었다.
“생활이요? 실은 처음엔 정말 별로였는데 이제야 좀 괜찮아졌어요. 티보치나가 도와줬거든요.”
“티보치나는…… 당신을 평가하기 위해 나온 사람이라는 걸 들으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내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줄 사람이기도 하잖아요?”
사실 신전은 대대로 군주의 혼인에 직접적인 관여를 해 왔다. 군주비가 될 사람은 무조건 신전의 가르침을 선행해 왔고, 신전은 군주비가 제대로 적응할 수 있도록 생활 전반을 지도했다. 카놀라 역시 이방인이라고 해도 일단 혼약이 절반 정도는 성사된 입장이니, 그녀가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신전의 역할이긴 했다. 제사장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쳤겠지만 말이다.
“덕분에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게 됐다고요! 에델이 날 버리고 그렇게나 긴 사냥을 간 이유도 알게 됐어요.”
카놀라는 자신만만하게 양손으로 허리를 짚었다.
“무슨 책을 고르셨습니까?”
카놀라의 자신만만함은 채 3분은 넘기지 못했다. 에델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크게 헛기침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에델이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으나, 카놀라는 한참이나 허공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그러다가 마지못해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빠르게 대꾸했다.
“처, 첫 책이니까 가벼운 거로요.”
에델은 그 의미를 알아듣지 못해서 여전히 의문 어린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카놀라가 애써 어깨를 으쓱하며 표정을 관리했다. 새침한 표정과는 달리 목소리는 아까보다 더 자신감 없었다.
“……그림 좀 있는 거.”
“정확하게는, 그림만 있는 거죠.”
오스카가 뒤에서 넌지시 말을 덧붙였다. 카놀라가 얼른 눈에 불을 켜고 오스카를 돌아봤으나, 이미 그의 말은 에델에게까지 전해진 상태였다. 카놀라가 잔뜩 인상을 구겼다.
딱히 글자를 읽기 싫어서라기보다는, 그림이 더 이해하기 좋으니까 고른 것이었다. 이미지로 보면 얼마나 뇌리에 쉽게 남는데! 이게 얼마나 효율적인 공부법인지 수십 번을 설명해 줬건만, 누구도 이해하질 못한다.
카놀라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오스카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에델이 빤히 응시했다.
“읽을 만하신 책을 골라 드리겠습니다.”
“네?”
“신경 써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사죄로는 부족하지만, 받아 주신다면 이런 식으로라도 사과하고 싶습니다.”
에델의 말에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진정되었던 그녀의 얼굴은 다시 딸기로 변했다. 참 알아보기 쉬운 안색이다. 새삼스럽게 깨달으며 에델이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고 눈만 깜빡거리던 카놀라가 이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도서관에서 데이트하자는 거죠?”
아니, 그게 아니다.
모두가 속으로 그렇게 외쳤지만, 누구도 카놀라의 말을 정정해 주지 못했다. 누군가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카놀라가 에델의 손을 잡고 끌었기 때문이다. 오스카와 안젤리나는 더는 숙일 수도 없는 고개를 더욱 수그리며 카놀라를 외면했다.
“좋아요, 오늘은 에델의 취향에 맞는 데이트를 해요!”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까.
아이누는 자신이 개입해야 하는가 싶어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그가 모습을 드러내려는 찰나, 에델이 아이누 쪽을 힐끗 보곤 미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을 확인한 아이누가 멈칫한 사이, 에델은 카놀라에게 잡혀 끌려가다시피 걸었다. 카놀라의 시중인들은 저마다 한숨을 내쉬며 총총 따라나섰다. 그들은 단둘이 데이트할 거라는 카놀라의 으름장에 맞서 뭐라고 항변하는 중이었다.
본분을 잊고 우두커니 서서 그 꼴을 응시하고 있는 아이누의 곁으로 누군가 슬그머니 다가왔다.
“나쁜 뜻이 있으신 건 아닙니다. 정말로 그저 반하신 것뿐입니다.”
아이누는 그제야 자신이 몸을 숨기지도 않고 멍청하게 서 있었음을 깨달았다. 카놀라도 카놀라지만, 그녀를 대하는 에델의 태도가 아이누에겐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애초에 에델이 누군가의 손에 ‘끌려가다시피’ 걷는 꼴을 본다는 것부터가 충격이었다. 에델이 마음만 먹으면 팔 하나만 움직여 카놀라를 뿌리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상황을 깨닫고 나면 금방 정리하실 겁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때까지만 무사히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차피 이 정혼은 깨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루덱의 말에 아이누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자신을 무시하는 아이누의 모습에 루덱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아이누는 그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재빠른 움직임에 적응하지 못한 루덱이 두리번거렸다.
루덱을 두고 아이누는 얼른 에델의 뒤에 따라붙었다. 끌려가는 꼴로 걷던 에델은 어느새 카놀라와 나란히 걸음을 맞추고 있었다. 카놀라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조잘거리고 있었고, 에델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호응했다. 아이누는 에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불신이 가득한 루덱의 음성이 뇌리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어차피 이 정혼은 깨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아이누는 지금 이 순간 루덱의 말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들어가지도 못하게 하기에, 사실 좀 긴장했던 게 사실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무시무시한 책들이 있기에 아무나 못 들어간다고 엄포를 놓는단 말인가. 조금은 기대도 했다. 그리고 막상 들어간 도서관은 생각보다 작았다. 하지만 카놀라는 여전히 믿었다. 뭔가 엄청난 게 숨어 있을 거야! 손님이니까 그걸 드러내지 못하고 이런 협소한 공간만 보여 주는 거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언젠가 이 도서관의 비밀을 풀겠노라 다짐까지 했다.
“정말로 이게 다예요?”
“그렇습니다.”
몇 번이나 물어도 에델은 같은 대답을 했다. 거짓이라곤 한 톨도 묻어나지 않는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카놀라는 김샌 표정을 지으며 도서관을 둘러보았다. 커다란 문에 비해 내부는 넓지 않았다. 티보치나의 도움으로 들어왔을 때는 입구 쪽 책장만 얼쩡거리다가 나갔기 때문에 이렇게나 좁은 줄은 정말 몰랐다. 당연히 안쪽에 더 많은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리고 그 은밀한 공간에서 에델과 둘만의 다정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야, 나한테는 온갖 무게 다 잡더니.”
며칠 전 가차 없이 자신을 내쫓았던 사서는 어디에 있는지 보이질 않았다. 입술을 삐죽이며 빈 책상을 노려보고 있는데, 에델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이곳에 정착한 역사가 길지 않아서 책이 적습니다.”
그 말에 카놀라가 의아한 눈으로 에델을 보았다. 자신을 멀뚱멀뚱 보는 그녀의 눈은 한없이 맑고 순수했다.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게 틀림없는 그녀의 눈빛에 에델이 멈칫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시는군요.”
“어……. 사실 우리나라엔 트리폴에 대해 아는 사람도 별로 없고, 책도…….”
“질책하는 건 아닙니다. 모르시는 게 당연하니까요. 알 필요도 없는 지식입니다.”
빠르게 대꾸한 에델이 아예 고개를 돌렸다. 당초 이곳에 온 목적은 카놀라에게 책을 추천해 주기 위해서였다. 카놀라는 데이트라고 했지만……. 애초에 데이트라는 것을 생전 해 본 적이 없으니 딱히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예 책장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버리는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에델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궁금해요.”
책등을 가볍게 훑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그러니까 알려 줘요. 난 이제 이곳에 살 거니까, 이곳에 대해 알고 싶어요. 그게 뭐든.”
카놀라는 에델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당신에 대해서도.”
잠깐 멈추었던 손가락이 다시 천천히 움직였다. 여러 권의 책등을 한참이나 지나쳐서 구석에 도달한 손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덤덤하게 책을 고른 에델이 가까운 책상으로 다가가 그 위에 펼쳤다. 활짝 펼쳐진 책장엔 양쪽으로 이어진 지도가 그려져 있었다. 제 눈앞에 펼쳐진 지도를 가만히 살펴보던 카놀라가 확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신성제국 에데사?”
아무리 공부를 안 했다곤 해도, 주변 국가의 위치도 모를 정도로 멍청하진 않다. 그런데도 확신하지 못한 까닭은, 지도에 그려진 지형이 그녀가 아는 것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지도의 왼편으로 치우쳐 그려진 겨울 산맥은 대륙을 반으로 가를 정도로 길고 거대했다. 산맥을 기준으로 왼쪽엔 그녀의 고국과 발트칸이 보였고, 오른쪽엔 거대한 신성제국 에데사가 자리 잡고 있었다. 트리폴은 산맥 북쪽에 자리 잡고 있으므로, 지도상으로는 오른쪽 위에 표시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오른편에 상당히 크게 자리 잡은 면적엔 에데사의 이름만 적혀 있었다.
“트리폴인들의 고향은 에데사의 북쪽 평원입니다. 우린 그곳의 유목 부족이었죠. 처음엔 국가라고 부르지도 못할 정도로 분산된 소수의 씨족 사회였습니다.”
에델의 검지가 ‘에데사’라는 글자가 적힌 지점의 윗부분을 꾹 눌렀다. 손가락 아래엔 평원의 가늘고 긴 강줄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을 문지르듯 누른 에델이 그대로 손가락을 움직여 이번엔 거대한 산맥을 가리켰다.
“그리고 이곳이 그란토니아 산맥, 흔히 말하는 겨울 산맥의 북쪽입니다. 트리폴은 바로 이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지도엔 표시되지 않았지만, 산맥의 중간 자락이죠.”
지도로 보면 평원과 산맥은 겨우 한 뼘 정도 될 법한 거리다. 하지만 실제론 아주 멀 것이다. 평원에서 산맥에 이르는 길을 찬찬히 눈으로 따라가던 카놀라가 미간을 확 찌푸렸다.
“평원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이 산맥까지 이동하게 된 거예요?”
“쫓겨났으니까요.”
에델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의 차가운 시선이 지도 위의 글자에 머물렀다.
“에데사의 정복 전쟁으로 인해 여기까지 밀려났습니다. 그들은 산맥까지 쫓아왔으나 결국 추격을 포기했고, 우린 이대로 이곳에 자릴 잡게 된 겁니다. 트리폴의 시작이죠.”
그 과정에서 그들이 가진 많은 것들이 소실되었다. 책이 적은 것도, 지속적인 추격으로 몇 번이나 불타 버린 까닭이었다. 산맥에 자리 잡기 전까지 트리폴인들이 받은 습격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완전히 전멸한 부족도 있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트리폴인들은 모두가 전사가 되어야 했다.
“이곳에 정착한 뒤 가장 큰 부족의 부족장이 다른 부족민들을 흡수해 하나의 나라로 통합했습니다. 산맥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했거든요. 강인한 군주는 다른 모든 구성원을 먹여 살리기 위해 정기적인 사냥을 이끌었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제가 다녀온 사냥 또한 그런 맥락입니다. 우린 겨울을 버틸 수 있을 정도의 사냥을 하고, 신은 우리에게 그만큼의 양식을 허락합니다.”
지도를 배회하던 에델의 시선이 무심하게 옮겨졌다. 책장을 향해 돌아가며, 에델이 덤덤하게 말을 마쳤다.
“이후는 지루한 역사입니다. 살아남기 위해 버틴 나날의 반복이니까요.”
“이방인을 거부하는 건 이 때문인가요?”
“전쟁은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이후에도 이방인이 얽힌 역사는 늘 불행하게 끝났습니다. 신전에서는 그것을 두고 겨울 산맥의 가호라고 일컫습니다. 신이 외부인들의 위험성을 알려 주는 증거라면서요. 모두가 그 의견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카놀라는 에델이 두고 간 책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트리폴에 대한 정보는 거의 알지 못했지만, 겨울 산맥에 대해서라면 들은 게 몇 가지 있었다. 허황하지만 누구도 확인할 수 없는 그런 소설 같은 소문들이었다. 가령 산맥을 수호하는 거대한 드래곤이 있다든가, 허락된 사람만이 산을 오를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말들.
“고립일지도 모르잖아요.”
막 새로운 책을 빼려던 에델이 멈칫했다. 그는 책등을 잡은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카놀라는 지도를 손끝으로 만지며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해 쌓은 거대한 믿음이, 오히려 모두를 가두고 굶겨 죽이는 거라면요?”
“당신의 말은 가정입니다.”
한 치의 주저도 없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단호하다 못해 서늘하기까지 한 그의 대답에 놀란 카놀라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에델은 여태까지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의 녹색 눈동자는 무척 차갑고 딱딱하게 변한 상태였다.
“그에 비해 우리가 지켜 온 믿음은, 이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게 한 힘이죠.”
그 말은 사뭇 위협적이기까지 했다. 어째서일까? 그는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저건 이방인에 대한 거부감이나 경계심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잔뜩 날이 선 에델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카놀라가 천천히 입매를 끌어 올렸다. 특유의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나머지는 내가 더 자세히 공부할게요.”
살얼음판 같던 분위기가 일시에 풀어졌다. 생글생글 웃는 카놀라를 묘한 표정으로 보던 에델이 다시 책장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런 그의 뒤통수를 향해, 카놀라가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근데 당신에 대해선 왜 이야기해 주지 않아요?”
“해 드릴 만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해 주기 싫은 건 아니고요?”
쾌활하게 되묻는 목소리와 달리, 내용은 아주 날카로웠다. 에델은 책등에서 아예 손을 떼고 카놀라를 향해 돌아섰다. 카놀라는 책상에 걸터앉은 상태에서 두 팔을 뒤로 짚어 몸을 젖혔다. 에델이 살짝 미간을 좁혔다.
착각일까? 어쩐지 카놀라의 분위기가 여태까지와 조금 달라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하고 있는데 말이다.
“섭섭하지만 이해할게요. 내가 너무 급했다면, 잠깐 멈춰서 기다리죠, 뭐. 당신과 나의 속도가 다른 것뿐이니까.”
어깨를 으쓱해 보인 카놀라가 상체만 살짝 앞으로 굽혔다. 화려한 금발이 어깨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반짝이는 파란색 눈동자가 에델을 똑바로 응시했다.
“대신 내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어요. 궁금한 거 있어요?”
“없습니다. ……아니.”
빠르게 대꾸하고 돌아서려던 에델이 멈칫했다.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그가 이내 올곧은 시선으로 카놀라를 바라보았다.
“있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궁금한 게 생겼다는 것이 그리도 좋은지, 카놀라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한 손으로 제 뺨을 감싼 그녀는 ‘느리지만, 발전적인 관계’라며 혼자 꺅꺅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제 기쁨을 표현하던 카놀라가 기대감이 가득한 시선으로 에델의 질문을 기다렸다. 덤덤하게 카놀라의 주책맞은 도취가 끝나길 기다렸던 에델이 평온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쫓겨났습니까?”
파란 눈동자가 조금 크게 뜨여졌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에델을 보던 카놀라는 이내, 눈을 가늘게 접었다. 그녀의 입가에 아까보다 더 화사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쩌죠? 나 방금 더 반한 거 같아.”
카놀라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직설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다. 덕분에 절로 당혹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에델은 카놀라와 같은 사람은 난생처음 만나 보았다. 그녀가 보이는 감정도, 태도도 모두 처음 겪는 것이었다. 그래서 신기했지만, 동시에 경계심이 피어올랐다. 비스듬하게 그녀의 시선을 피한 에델이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말하길 원치 않으신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혀요. 난 당신이 나에 대해 다 알았으면 좋겠는걸요? 그러니까 이제 와 무른다고 해도 소용없어요.”
활기찬 목소리에는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에델은 슬쩍 시선을 들어 다시 카놀라를 응시했다. 그가 자신을 봐 주길 기다리고 있었는지, 카놀라는 에델과 눈이 마주치자 한껏 밝은 미소를 지었다. 다만, 그 해맑은 얼굴로 하는 소리가 썩 어울리는 내용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쫓겨난 이유는 아주 간단해요. 내가 제일 만만했으니까.”
정말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형제들의 첫 번째 먹잇감으로는 손색이 없거든요.”
샤를만 왕좌를 둔 형제들의 싸움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첫 번째 희생양은 카놀라였다. 끌어내리기엔 가장 쉬운 상대였을 것이다. 가장 눈에 거슬리기도 했을 테고. 더 늦기 전에 치워 버리자고 의견을 모으기엔 더없이 좋은 표적이었겠지.
가차 없는 첫째 오라비의 얼굴을 떠올리던 카놀라가 빙글빙글 웃음을 터뜨렸다. 속았다며 노발대발하던 루덱에겐 미안하지만, 카놀라는 절대 샤를만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난 왕좌와 가장 먼 왕족이니까 이곳이 아니었어도 어디든 가야 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쫓겨났다는 표현 말고, 도망쳤다고 할래요. 난 살기 위해서 이곳으로 도망쳤어요.”
쫓겨나는 건 타의에 의한 것이지만, 도망치는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다. 그러니 역시 전자보단 후자가 마음에 들었다.
검지로 턱을 꾹꾹 누르던 카놀라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해 보니 떠나기 직전엔 언니의 심기도 거슬렀던 것 같다. 이번 결혼이 아니었으면 언니가 나서서 그녀를 처리하려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루덱은 모르겠지만, 아마 제 오라비 딴에는 생각해 준답시고 이곳에 보냈을 것이다. 카놀라의 취향을 그가 모를 리가 없으니까. 비록 카놀라에겐 알려 주지 않았지만 에델의 이름과 얼굴 정도는 먼저 조사해 두었겠지. 오라비의 성격상 정보도 없이 정략결혼을 결정했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는 에델의 초상화를 보고선 확신했으리라. 카놀라가 이곳에 결단코 눌러앉으리라는 것을.
“그러고 보니 이곳도 살기 위해 도망쳐 온 사람들의 나라니까, 나랑 공통점이 있는 셈이네요?”
시원스럽게 결론을 내린 카놀라가 에델을 말똥말똥 쳐다봤다. 에델은 내내 침묵하고 있었다. 지적할 게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의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받아 줄 의향이 있었기에, 카놀라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다음 질문을 기다렸다. 그러나 에델은 더 이상의 질문 없이 책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카놀라의 얼굴에 얼핏 실망이 스쳤으나, 그녀는 금세 기운찬 표정으로 돌아왔다. 관심을 돌려 제 옆에 펼쳐진 책을 집어 든 그녀가 책장을 팔랑팔랑 넘겼다. 커다란 지도 이후엔 빽빽한 글자의 향연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삽화가 있었지만 역시 글자가 훨씬 더 많았다. 카놀라의 미소는 책의 마지막 장을 확인하며 완전히 사라졌다.
떨떠름한 눈으로 책표지를 빤히 내려다보던 카놀라가 헛기침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책 추천은 이게 끝이에요? 이건…… 생각보다 글자가 많네요.”
“몇 권 더 있습니다.”
에델의 한쪽 팔엔 몇 권의 책이 들려 있었다. 멀리서 봐도 두께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카놀라가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을 했다.
“기왕이면 그림책으로요! 그림 많은 거!”
막 한 권의 책을 더 빼려던 에델이 멈칫하며 카놀라를 돌아보았다. 눈을 깜빡이며 어색하게 입매를 끌어 올린 카놀라가 조금 새침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그림만 있는 거?”
묘한 눈으로 카놀라를 응시하던 에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책장을 돌아보았다. 방금 꺼내려던 책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은 그가 허리를 굽혀 다른 책을 살폈다. 들고 있던 것 중에서도 몇 권의 책을 다시 꽂아 둔 그가 책장을 오가며 새로운 책을 꺼내 들었다. 그러는 동안 카놀라는 발을 앞뒤로 구르며 도서관 내부를 구경했다.
에델의 말을 듣고 다시 보니, 단조롭고 밋밋하게 꾸며진 데에도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티보치나는 실용성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 실용성이란 아마도 적에게 대응할 때의 실용성을 가리키는 것이겠지. 조각하고 벽화를 그리는 데에 정성을 쏟느니 벽을 두껍고 튼튼하게 만드는 데에 좀 더 힘을 쓴다든가 하는 그런 종류의 것 말이다.
그래도 벽화 하나 정도는 그려 둬도 좋았을 텐데.
“당신의 오빠가…….”
“네?”
휑한 천장을 응시하던 카놀라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돌렸다. 책을 한 아름 안고 선 에델이 카놀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카놀라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보고 있으려니, 뭔가 말을 하려던 에델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을 하며, 에델은 자신이 골라 온 책을 책상에 올려 두었다. 꽤 높게 쌓인 책 더미를 확인한 카놀라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목만 읽어도 졸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에델이 애써 골라 준 책들이니 어느 하나도 뺄 수 없었다.
이 정도 읽으면 다시는 도서관 안 와도 될 정도의 정보는 얻을 수 있겠지. 이제 도서관 근처로는 얼씬도 안 하겠다며 남몰래 다짐하던 카놀라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아, 그리고. 이건 내 개인적인 취미 생활 문제인데요.”
인제 그만 가 보겠다고 말하려던 에델이 의아한 눈으로 카놀라를 보았다. 그녀는 에델을 아주 부담스러울 정도로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안 바쁘면 모델 좀 해 줄래요?”
“모델이요?”
“네! 트리폴에서의 첫 그림은 꼭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그림이라니. 조금은 뜬금없게 느껴졌다. 트리폴에서는 발전하지 않은 문화라서 더욱 이상하게 들리는 단어였다. 또한, 카놀라와 어울리지도 않았다.
보기엔 뭔가 훨씬 활동적인 취미를 즐길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하던 에델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으며 잡념을 떨쳤다. 카놀라의 취미가 무엇이든 그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몹시 피곤했다.
“전 이만 자야 합니다.”
“그럼 자는 모습 그려도 돼요?”
냉큼 되물은 카놀라는 에델의 표정을 보곤 지레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카놀라가 데구루루 눈을 굴려 애먼 허공을 응시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역시 안 되겠죠? 알고는 있는데 혹시나 해서 물어봤어요. 지금 아니면 또 한참 못 물어볼 거 같아서. 실은 손이 근질근질한데, 당신을 그리고 싶어서 참고 있었거든요.”
두 손을 맞잡고 꼼지락거리는 카놀라의 모습에도 에델의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전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잠을 못 잡니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
“제가 아니라도 그릴 만한 대상은 충분히 많을 겁니다.”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끊는 그의 모습에, 카놀라가 눈을 깜빡였다.
아, 이건 좀 상처일지도.
무심코 떠오른 생각을 느리게 지우며, 카놀라는 습관적으로 웃음 지었다.
“그래요, 그럼.”
속도를 맞추겠다고 했으면서 멋대로 앞서 나가다니, 이런 멍청이. 자책의 말이 뇌리에서 맴돌았다. 그런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에델이 고개를 살짝 움직여 인사를 했다.
“사서에겐 따로 말해 둘 테니, 원하는 만큼 책을 읽다 가십시오.”
아니, 그녀는 지금 당장 도서관을 나갈 작정이었다. 물론 에델이 가고 난 뒤에.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확고하고도 흔들림 없는 심경을 전달하는 대신, 카놀라는 해맑게 웃으며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
“그렇습니까.”
차분한 대답에 아쉬운 감정이 섞여 있다고 느껴지는 건 루덱의 착각일까? 눈앞의 대상은 카놀라를 만나지 못하는 것에 아쉬움을 느낄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카놀라를 환영하지 않는 쪽에 더 가까운 사람이 아니던가?
“왔다 가셨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티보치나는 덤덤하게 사양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분명 어딘가 모르게 저조한 기분을 내포하고 있었다. 루덱은 알쏭달쏭한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았다.
그녀가 신전 사람이고, 혼약의 성사 여부를 판가름하는 결정권도 쥐고 있다는 건 이미 들었다. 카놀라에게 떠나라는 권유를 했다는 것도 들었다. 다른 트리폴인들의 태도를 보면 카놀라를 환영하지 않는 건 확실하고, 티보치나 역시 그들과 의견이 일치할 것이다.
혹시 카놀라가 에델과 데이트한다는 부분이 못마땅하게 느껴진 건 아닐까?
그거라면 가능성이 있었다. 어차피 카놀라를 받아들이지 않을 작정이라면,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것도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루덱은 다른 핑계를 댔어야 했나 하는 뒤늦은 후회를 했다.
“내일 다시 오도록…….”
“엇, 잠시만요. 저기 오십니다!”
티보치나가 루덱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멀리에서도 눈에 확 띄는 황금색 머리칼이 보였다. 품에 책을 한가득 안고 있는 그녀는 무척이나 불퉁한 표정으로 걷고 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는 그녀가 지금 얼마나 시무룩한지를 보여 주었다.
그녀의 양옆에선 약간의 책을 나눠 든 오스카와 안젤리나가 뭐라고 말하는 중이었다. 그 내용까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표정들을 보아 열심히 카놀라를 달래고 있는 것 같았다.
“왕녀님.”
들고 있는 책 더미에 고개를 처박고 걸어오던 카놀라가 시선을 들었다. 문 앞에 서 있는 티보치나를 발견한 카놀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보치나의 입가에 좀 더 뚜렷한 미소가 떠올랐다.
“반가워서 놀라시는 건가요?”
티보치나는 나름 반가움을 담아 물었는데, 돌아온 것은 어쩐지 억울해 보이는 눈빛이었다. 카놀라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티보치나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침묵하던 카놀라가 볼멘소리를 냈다.
“벌써 시험 보는 거야? 공부할 시간은 줘야지!”
평소 이해력이 뛰어나기로 소문난 티보치나였음에도 카놀라의 말을 알아듣기 위해 약간의 시간을 소요했다. 시험? 무슨 시험?
“시험이라니…… 아.”
아무래도 전에 ‘자격을 보여 달라’고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인 것 같았다. 설마 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도 시험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나? 카놀라의 손에 들린 책을 얼떨떨한 눈으로 보던 티보치나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해하셨군요. 생각하시는 방식의 시험은 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자격을 확인한다며?”
“지식만으로는 그 자격을 판단할 수 없죠. 하지만 빌려 오신 책은 다 읽으시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환해진 얼굴로 당장 책을 내던질 기세였던 카놀라가 멈칫했다. 떨떠름하게 제 품에 들린 책을 내려다보던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티보치나의 뒤에서 눈치만 보던 루덱이 얼른 다가와 카놀라에게서 책을 받아 갔다. 자유로워진 두 팔을 허공에 털던 카놀라가 새침한 눈으로 티보치나를 보았다.
“이제 안 올 줄 알았어. 나한테 선전 포고 했잖아.”
선전 포고라고 하기엔 무척 정중한 요청이었다고 생각했는데. 제 생각을 말하는 대신, 티보치나는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적응을 돕기로 한 약속이 먼저였다고 하신 건 왕녀님이셨죠.”
아는 사이라며 친분을 강조한 것도 모자라 신전의 평가를 통과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요청까지 받았다. 정체를 밝히자마자 단숨에 돌아서진 않아도 조금은 껄끄럽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했던 티보치나는, 자신의 우려가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여실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당혹스러운 게 사실이었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딱 카놀라다운 반응이라 금방 이해되었다.
실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도움은 그걸로 끝난 줄 알았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카놀라가 티보치나를 빤히 보았다. 티보치나 역시 그런 카놀라를 빤히 응시했다. 처음 맞닥뜨렸을 때보다야 훨씬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카놀라의 눈동자엔 미심쩍은 감정이 남아 있었다.
“제 도움은 이제 필요 없으신가요?”
“그럴 리가! 난 내게 내밀어지는 손을 거절하는 성격이 아니거든. 누구보다 빠르게 잡을 수 있어. ……하지만 티보치나는 나를 쫓아내야 하는 상황 아니야?”
펄쩍 뛰며 정색을 한 카놀라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미인을 좋아해도 천지 분간 못 한 채 쫓아다닐 정도는 아니다. 티보치나에게 도와 달라고 떼를 쓰긴 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가 가진 대외적인 위치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왕가의 혼인을 신전에서 허가해 줘야 한다는 건, 왕권보다 신권이 더 강하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티보치나가 했던 말들로 미루어 볼 때, 신전에서는 에델과 카놀라와의 혼인을 순순히 허락해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티보치나가 좋은 것과 별개로, 그녀가 카놀라에게 해 줄 수 있는 건 한정적일 터다. 그것을 깨닫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카놀라는 티보치나가 이제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찾아온 게 더 놀라울 정도였다.
“맞습니다.”
“그럼 이렇게 대놓고 도와주면 안 되는 거잖아. 몰래 도와주는 거면 모를까. 뭐, 몰래 도와준다고 한다면 굳이 거절하진 않을게.”
새침하게 말을 한 카놀라가 눈을 데구루루 굴려 딴청을 피웠다. 방금 말을 내뱉은 시점에서 이미 ‘몰래’라는 전제는 붙을 수 없다는 건 왜 생각하지 않는 걸까? 시답잖은 의문을 떠올리던 티보치나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함께 있어야 트집거리를 찾지요.”
너무나 평온하고 잔잔한 음성이라 하마터면 그냥 넘어갈 뻔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카놀라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티보치나를 보았다. 그러다가 이내 양손으로 제 뺨을 감싸며 탄성을 내뱉었다.
“어쩜,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너무 다정하게 말하니까 화도 안 나잖아!”
저렇게 침착한 어조로,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말하는데 화조차 나질 않는다. 이게 다 저 얼굴 때문이었다. 무슨 말을 해도 다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외모라니, 이런 게 가능한 거였구나! 하지만 이건 정말 불공평하다. 당하는 사람 입장도 좀 생각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카놀라는 누구에게 내뱉는지도 모를 불평을 끊임없이 늘어놓았다. 물론 티보치나에게 하는 말은 아니었다. 입술을 삐죽이며 혼잣말을 하듯 탄식하는 그녀의 모습에 티보치나가 슬쩍 웃음 지었다.
“사실 그보단 재미있어서요.”
“응?”
카놀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티보치나를 보았다.
“왕녀님이요.”
강조하듯 명확한 발음이 귓가에 닿았다. 카놀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티보치나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미간을 살짝 좁히곤 나지막하게 되물었다.
“혹시 칭찬이야?”
“싫으세요?”
“전혀.”
대답과는 달리 카놀라의 표정은 여전히 모호했다. 카놀라라면 당연히 ‘그게 내 매력이지!’라고 대꾸할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의외로 잠잠했다. 티보치나는 혹시 그녀가 기분이 상한 건가 싶어 슬쩍 상대방의 표정을 살폈다. 언제나 가감 없이 제 감정을 표출하던 카놀라였으니 기분이 나쁘면 그것조차 티가 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딱히 그런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별로 기쁘진 않으신 것 같습니다.”
티보치나의 목소리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그 말에 딴생각하고 있던 카놀라가 퍼뜩 시선을 들었다. 티보치나의 표정이 진지해졌음을 확인한 카놀라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티보치나도 이렇게나 금방 아는 걸 왜 그 사람은 모를까 싶어서.”
“후사 말씀이세요?”
“응. 에델.”
‘에델’이라고 내뱉는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묻어났다. 카놀라는 다시 시선을 내렸다. 아마도 에델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런 카놀라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티보치나는 굳은 표정을 애써 숨기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저런, 계속 모르셨으면 좋겠습니다.”
“자꾸 다정하게 악담하지 말아 줄래?”
시무룩했던 표정은 금방 불퉁하게 변했다. 팔짱을 낀 카놀라가 눈에 힘을 주고 티보치나를 보았다. 물론, 그녀의 위협적인 눈빛은 채 3분을 넘기지 못했다. 티보치나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하면 화 따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는 까닭이었다. 티보치나는 그런 카놀라를 빤히 바라보며 말을 건넸다.
“하지만 후사께서 이 재미를 아시게 되면 왕녀님과 함께 있으려 하실 테고, 왕녀님은 제게 시간을 내 주지 않으실 거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당연히 그건 다른 문제지! 미인에게는 없는 시간도 내 줄 수 있어!”
신전에 돌아가면 거울이라도 좀 들여다봐야겠다. 도대체 자신의 외모가 어떻기에 카놀라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할까? 티보치나는 아랫입술을 슬쩍 깨물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잠시나마 가라앉았던 감정은 카놀라의 외침에 금방 나아졌다. 덕분에 티보치나는 다시 평소의 차분한 음성으로 돌아와 말을 건넬 수 있었다.
“그럼 지금 내 주세요. 후사께서 골라 주신 책들은 나중에 보시고요.”
“……사실은 내 공부를 방해해서 시험을 망치게 할 계획인 거지?”
카놀라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티보치나를 흘겨보았다. 경계심 가득한 그 눈초리에 티보치나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입을 가리고 한참이나 웃던 그녀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예전 기출문제 알려 드릴게요.”
당장에라도 거짓말하지 말라는 말이 튀어나올 줄 알았는데, 카놀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진위를 가리려는 듯 티보치나의 눈을 뚫어져라 응시하던 카놀라가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그러곤 두 팔을 당겨 안듯 굽히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인생은 인맥이야!”
티보치나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무릎 사이로 고개를 파묻었다. 머리 위로 카놀라의 당혹스러운 목소리가 들렸지만, 도저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난 건 웃다 지쳐서 숨을 헐떡인 후였다. 웃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공포심마저 들었다. 티보치나가 얼얼한 입가를 매만지며 겨우 숨을 골랐다. 그런 티보치나를 이상하다는 눈으로 보던 카놀라가 문득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예전 기출문제가 있다는 건, 테드라고의 정원에 들어가려 했던 이방인이 또 있었다는 거야?”
티보치나의 입가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경직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손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티보치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것을 눈치채지 못한 카놀라가 재차 물었다.
“설마, 에델에게 다른 정혼녀가 있었던 건 아니지?”
생각해 보면 없을 이유도 없다. 카놀라도 그리 많은 연애를 했는데 에델이라고 뭐 없을까. 물론 이방인과 연애를 하진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사실 그를 제대로 알기엔 부족한 시간이었으니, 카놀라가 모르는 과거가 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정말로 이방인 정혼녀가 있었다면 신경에 거슬리기야 하겠지만, 문제 삼지는 않을 것이다. 그냥 짜증 내고 신경질을 부리겠지.
카놀라의 물음에 티보치나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카놀라를 보던 티보치나가 이내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건 이전 일입니다.”
에델의 정혼녀가 아니라는 말에 카놀라는 반사적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의문이 가신 건 아니었다. 이전의 일이라고 해도 어쨌든 이방인을 궁에 들이려고 했던 적이 있다는 거잖아?
“누구였는데?”
“왕녀님. 제가 예전 기출문제를 알려 드리려는 까닭은, 왕녀님이 어서 빨리 포기하고 돌아가시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을 늘어놓는 티보치나의 모습에 카놀라가 미간을 찌푸렸다.
“또 그 이야기야?”
“전 왕녀님이 상처받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난 쉽게 상처받지 않…….”
“아직 트리폴인들과 제대로 마주하지 않으신 까닭이죠. 왕녀님은 이곳에 오신 뒤 내내 궁에만 계셨으니까요. 그들이 보이는 적의를 대하고 나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티보치나의 목소리는 아주 단호했다. 그리고 사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카놀라는 이곳에 온 뒤 외출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녀에게 배정된 시중인들은 제 할 일만 하고 가 버린다. 시중을 드는 이들이니 대놓고 이렇다 할 감정을 드러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저 최대한 마주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게 그들이 내비치는 의사 표현의 전부였다. 그러나 바깥의 트리폴인들은 다를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당신은 아니잖아.”
카놀라가 티보치나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당신은 내게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잖아.”
어째서일까, 티보치나는 잠시나마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놀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카놀라를 싫어하지 않는다. 티보치나가 말하는 건 바깥 사람들의 적의였다. 하지만 카놀라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있었다. 티보치나는 카놀라가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깥의 누군가는 티보치나와 같은 감정일 수도 있다는 것.
“모두가…….”
카놀라의 말은 맞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긍정할 수는 없다. 티보치나는 그나마 가장 부정에 가까운 대답을 찾아냈다.
“모두가 적의를 가지고 있으니, 저까지 가질 필요가 없었을 뿐입니다.”
카놀라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티보치나는 카놀라를 다 파악했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반성했다. 그러곤 카놀라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마침내 생각을 끝낸 카놀라가 티보치나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새파란 눈동자가 티보치나를 오롯이 담아냈다.
“그럼 보여 줘. 사람들이 내게 가진 적의.”
어째서일까. 그 순간 떠오른 건 제사장의 모습이었다. 후사가 정혼녀를 맞이하러 전사들을 이끌고 나간 사이, 제사장은 티보치나를 불렀다. 그러곤 신전을 대표하는 자라는 의미의 징표를 건네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너의 역할이 뭔지 알겠지, 티보치나?’
주름진 제사장의 손이 소매 밑으로 살짝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제사를 주관하느라 수십 번도 더 짐승의 피를 묻혔을 제사장의 손은 까맸다. 그리고 아주 가느다랬다. 뼈마디가 하나하나 보일 정도로 앙상한 그녀의 손은, 꼭 노파의 것과도 같았다.
제사장은 티보치나가 자신의 의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것을 믿는다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이건 모두 신이 내리시는 시험이다. 네가 다음 제사장에 어울리는 아이임을 증명해 보일 기회야. 신의 부름이 네 지척에 닿았으니, 절대로 그분의 기대를 저버리면 안 된다.’
제사장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처음엔 미미했으나 이젠 눈에 보일 정도로 그 떨림이 커졌다. 티보치나는 신에게 육신을 바친 제사장이 어떻게 죽어 가는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제사장은 제 목을 죄어 오는 죽음마저 기쁘게 맞이하는 중이었다. 죽음이야말로 신에게 평생 봉사한 그녀가, 신의 곁으로 갈 수 있는 마지막 관문이니까.
제사장. 신전에 귀의한 이가 오를 수 있는 가장 명예롭고 고귀한 자리. 최고신을 모실 수 있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자리.
‘네가 이방인의 저주를 풀고 돌아오는 날이, 새로운 제사장의 탄생을 알리는 날이 될 게다.’
티보치나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기쁘거나 흥분되지 않았다. 그저 평소와 같이 고개를 숙여 신의 뜻을 받들었을 뿐.
“티보치나.”
나지막한 부름에 티보치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카놀라가 진지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적의를 보여 달라고 했나. 어려울 게 없는 부탁이었다. 어쩌면 카놀라를 단념시키기에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아주 쉽고 빠르지 않나. 자신을 향한 이해할 수 없는 적의 앞에서, 카놀라가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티보치나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후사의 다섯 전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카놀라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그런 그녀의 귓가로, 티보치나의 냉담한 말이 이어졌다.
“그들만큼 왕녀님을 경계할 그라사들은 없을 테니까요.”
*
디라즈는 가장 신뢰하는 다섯 전사를 곁에 둔다.
그들은 후사일 때부터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한 자들로, 어떤 일이 있어도 군주를 배신하지 않으며 언제나 가까이에서 그를 지키는 그라사들이다. 그들의 충성심은 오랜 시간 다져져 아주 견고하다. 목숨을 내놓는 건 물론이고, 군주의 명을 따르기 위해 신의 뜻을 거스른 역사도 존재한다.
에델 역시 다섯 명의 그라사를 가까이에 두었다. 그들은 에델의 손과 발, 그리고 그림자가 되어 움직였다. 에델이 어릴 때부터 함께한 실력 좋은 전사들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런 그들이 쉬는 몇 안 되는 날이다. 사냥하러 다녀온 직후엔 언제나 잠을 자는 에델 덕분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딱히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다. 따라서 다섯 전사는 훈련장에서 몸을 풀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에델의 등을 지키는 아이누만 뒤늦게 합류했는데, 그는 에델이 침소에 들고 난 뒤에도 주변 점검을 마친 뒤 물러나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꽤 늦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