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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애초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법도를 고치는 게 아니었어. 폐하께서 거처를 황후궁으로 옮기시다니. 이곳은 황후마마의 천하이니, 당연히 폐하의 침궁만큼 기세를 펼칠 수 없는 거겠지.
“여봐라.”
생각할수록 속이 답답해진 경 공공이 내시 한 명을 불렀다.
“어서 폐하의 밤참을 대령하거라.”
“마마 것도요.”
소심이 재빨리 말했다.
그건 폐하를 위해 특별히 만든 밤참이라고!
경 공공이 총채를 손에 쥐고 속으로 외쳤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하고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정말!
침전 안, 정방이 자신의 반대편에 앉은 방백종을 바라보았다.
“이 태의가 아는 것은 일부에 불과해요. 그 사람이 들은 건 전체적인 게 아니라, 남들이 자극적인 것만 골라서 말해 준 내용이라, 당신이 보면 괜히 속상해할까 봐 못 보게 한 거예요. 나는 당신이 속상해하는 걸 원치 않아요.”
정방이 말하자, 방백종이 곧바로 소리쳤다.
“거짓말! 내가 당신 말을 믿을 거 같아요?”
“나를 안 믿고, 이 태의를 믿겠다는 건가요?”
정방이 웃으면서 말했다. 방백종이 무표정한 얼굴로 정방을 바라보았다.
“그때 정말 죽으려고 했던 거 아니었어요?”
“원래 무슨 일을 할 때는,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야 해요.”
정방이 웃으면서 방백종의 말을 받아쳤다.
“아방!”
방백종이 목청을 높이고 정방의 말을 끊었다.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다시 웃음을 지었다. 정방이 손을 뻗어 방백종의 소매를 잡으려고 하자, 방백종은 몸을 홱 돌리고 정방의 손을 피했다.
“당신이 있으면, 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정방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정방이 빠르게 손을 뻗었기에, 방백종의 소매를 붙잡을 수 있었다.
“또 달콤한 말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내가 있다는 건, 당신이 떠난 다음에 수습해 줄 사람이 있다는 거잖아요.”
‘떠난 다음’이라는 말을 할 때, 방백종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다니. 이 여인을 황후에 책봉해 주는 것만으로 무사해지는 게 아니라, 석 달이라는 시간의 제한이 있었어. 그 시간이 지났다면, 이 여인이 황제로 책봉됐다 해도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고. 이 거짓말쟁이!
그때 만약 며칠만 더 늦었더라면, 이 여인은 영영 내 눈앞에서 사라졌을 거야. 그 미약하던 숨결조차 없어진 채로.
늘 근면 성실하게 국정을 돌보던 방백종은 평소와 달리 정사를 뒤로하고 대신들을 물러가게 했다. 그는 종일 혼자서 근정전 안을 서성이다가, 결국 황후궁으로 가는 걸음을 뗀 것이었다.
“당신이 나를 위해서 뒷일을 수습해 줄 테니까, 근심 걱정이 없었던 건 맞아요.”
정방이 웃으면서 방백종의 소매를 자기 쪽으로 끌었다.
“사람이라면 언젠가 죽게 되잖아요. 다만, 근심 걱정 없이 죽을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인 거고요.”
“또 이상한 소리.”
방백종이 대꾸하고는 자신의 소매를 정방의 손에서 빼냈다.
“당신은 왜 항상 죽는 것만 생각하고, 살 생각은 하지 않아요? 내가 당신에게 화가 난 건 바로 이런 거예요. 왜 당신은 항상 자기 생각은 하지 않고, 남 생각만 하냐고요.”
방백종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상체만 일으키고 정방을 바라보았다.
“아방, 제발 자기 자신을 더 아끼고 소중히 대하면 안 돼요?”
부드러운 등불 아래,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방은 아예 두 팔을 뻗어서 방백종을 껴안았다.
“당신이 있으니까, 앞으로는 나 자신을 더 챙길게요.”
정방이 말했다.
“듣기 좋은 말만 하지 말고요.”
방백종이 정방을 밀어내려고 했지만, 정방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고 그의 품에 안긴 채 웃었다.
“앞으로는 나한테만 잘해 줄게요. 내가 제일 중요해요. 나는 방백종의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요. 이미 두 번이나 죽어 봤으니까, 앞으로는 잘 살고 싶어요. 방백종이랑 오래오래.”
방백종은 정방을 밀어내려고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지만, 차마 밀어내지는 못했다.
“거짓말쟁이. 맨날 나한테 거짓말만 하고.”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속이고 싶은 사람은 당신뿐이거든요.”
등불에 비쳐 반짝이는 정방의 커다란 두 눈 때문에 방백종은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방백종.”
정방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방백종을 부르면서 그의 옷깃에 손을 올렸다.
“내가 옷 갈아입혀 줄게요.”
침전 안에서 들릴 듯 말 듯한 거친 숨소리가 들려오자, 전각 문 앞에 바짝 기대고 서 있던 경 공공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숨을 쉬었다.
“그만 가 보거라.”
경 공공이 밤참을 들고 온 내시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럼 잠시 뒤에 다시 가져올까요?”
앞에 서 있던 내시가 물었다. 경 공공이 입술을 삐쭉이면서 찬합을 쳐다보았다.
“됐다. 이걸 드실 겨를이나 있으실까.”
내시들이 줄지어 물러나자, 황후의 침궁 앞이 조용해졌다.
경 공공은 편전을 향해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면서 손을 꼽으며 무언가를 계산했다.
“하루 종일 화가 나셨다고는 했는데, 얼굴을 보면 그게 싹 풀리시는 건가? 도리어 지난번보다 못하네. 이제는 차 한 잔을 비울 시간도 필요 없으신가 봐. 정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심해지셔.”
경 공공이 혼잣말을 했다.
어둑한 실내,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고 공기에서 은은한 봄내음이 느껴졌다.
“물 마실래요?”
방백종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방이 나른한 목소리로 응, 하고 대꾸했다.
휘장이 걷히고, 기다란 그림자가 침상 아래로 늘어져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주전자에서 물을 한 잔 따르고는 얼른 침상으로 돌아갔다.
방백종은 정방을 반쯤 품에 안아서 물을 반 잔 정도 먹이고는 남은 물을 단숨에 들이켜고, 물잔을 침상 아래로 아무렇게나 던졌다.
“자지 마요.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요.”
방백종이 품에 안은 정방을 살짝 흔들면서 말했다.
정방이 웃음을 터트리고는 방백종을 꼭 끌어안았다. 정방이 아직도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방백종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었다.
“그럼 이어서 말해 봐요.”
정방이 말했다.
“나 만지지 말고, 저기 가서 돌아누워 자요.”
방백종이 말했다. 정방이 풉 하고 웃으면서 방백종의 허리춤에 올린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안 돼요. 나는 누구 안고 자는 거 좋아한단 말이에요.”
정방이 잠시 멈췄다가 이어서 말했다.
“예전에는 안을 사람이 없었지만, 지금은 있잖아요.”
정방의 말을 들은 방백종은 정방을 밀어내려던 손으로 저도 모르게 정방을 꼭 껴안았다. 곧이어 그가 정신을 차리고 소리쳤다.
“또 주제에서 벗어났잖아요!”
방백종이 품에 안긴 사람을 흔들었다.
“어서 말해요. 앞으로 또 그렇게 할 거예요? 마음대로 서신을 가로채다니요. 당신이 정말로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왜 그런 짓을 했겠어요?”
“앞으론 안 그럴게요.”
방백종의 품에 안겨있던 정방이 그의 가슴팍에 코끝을 살짝 비비면서 고개를 저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코끝이 방백종의 가슴을 간지럽히자, 방백종은 순식간에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런데 정작 불을 붙인 정방은 방백종의 품에서 벗어나, 침상 위를 데굴데굴 굴러 이불을 몸에 칭칭 감쌌다.
“어서 자요. 오늘 일을 하나도 못 했다면서요. 내일 조회에 일찍 나가지 않았다간, 괜히 나만 욕먹겠어요.”
정방이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이 거짓말쟁이!
방백종이 이불을 감싸고 누운 정방의 위로 올라탔다.
“일부러 이러는 거 맞죠!”
방백종이 이를 악물고 정방의 작은 귓불을 살짝 깨물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쓸모없는 사람인 양 말하는데, 내일 못 일어나는 사람이 누구일지 어디 두고 보죠.”
휘장에 비친 햇빛에 눈을 뜬 방백종이 한 손으로 목을 받치고 옆에 누운 정방을 바라보았다.
정방은 평온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비단 이불이 아래로 흘러내린 탓에 가녀린 쇄골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아직 날씨가 추운지라, 방백종은 이불을 끌어다 정방의 목 끝까지 덮어주었다. 그의 손이 정방의 목을 스칠 때, 방백종은 몸이 살짝 굳었다.
과거 마음속 깊이 묻어 두었던 기억이 휘몰아치면서, 방백종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방.”
방백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방을 불렀다. 그러나 곤히 잠든 정방이 방백종의 말에 대꾸할 리가 없었다.
말할 필요 없잖아. 다 지나간 일인데.
방백종이 손을 거두려고 하던 찰나, 다른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어난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게 되나? 아무도 모르면 다야?
아니지. 하늘과 땅이 알고, 나도 아는 일인데, 어떻게 아무도 모른다고 할 수가 있겠어.
“아방.”
방백종이 손에 힘을 실어서 정방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가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한테 말할 게 있어요.”
정방이 몸을 뒤척이면서 나른하게 말했다.
“알았어요. 못 일어난 사람은 나예요.”
방백종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다정하게 정방의 어깨를 쓰다듬었다.
“그 얘기가 아니에요.”
방백종이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방, 당신은 혼수상태일 때도 바깥세상의 일들을 느낄 수 있어요?”
정방이 고개를 살짝 돌리고는 잠에 취한 모습으로 슬며시 눈을 떴다.
“뭐라고요?”
“그때 내가 당신에게 물을 먹이고, 약도 먹이고, 당신을 데리고 정원을 거닐며 꽃구경도 하고, 아침마다 활쏘기 연습도 했는데, 설마 다 알고 있어요?”
방백종이 웃으면서 정방에게 다가갔다. 정방은 골똘한 모습으로 방백종을 빤히 바라보다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저었다.
“혼수상태인데 어떻게 알겠어요.”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지었다.
“당신이 내게 말해 줬으니까, 이젠 알게 됐네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그것도 거짓말이죠? 당신이라면, 분명히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알고 있을 거예요.”
방백종이 자세를 고쳐앉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잘 대해 줬던 것도 다 알고 있을 거고, 내가 당신의…….”
내가 당신의 목에 두 손을 올려서, 당신의 미약한 숨결을 없앨 생각을 했었어요. 아주 조금만 힘을 줘도, 모든 게 다 없어질 테니까요. 지금 이 모든 게 말이에요.
나는 그때, 모든 것을 내 손으로 없애고 싶었어요.
그게 바로 나예요. 추악하고 흉한 모습을 숨길 곳조차 없는 못난 사람이요.
그때, 정방이 팔을 뻗어서 방백종의 손을 잡았다.
“방백종, 나는 남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지도, 신경 쓰고 싶지도 않아요. 내가 보는 건, 남이 어떻게 행동했냐는 것뿐이에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았다. 베개 위에 누운 정방의 몸 아래로 푸른 비단이 깔려 있었다. 정방이 담담한 모습으로 옅은 미소를 보였다.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당신은 사낭 오라버니와 당신이 같은 시간에 해를 입었을 때, 내가 누굴 먼저 구할지 생각해 본 적 있어요?”
방백종이 정방의 손을 꼭 잡았다.
누가 누굴 속이고, 누가 누구에게 등을 돌렸든, 방백종은 끝내 정방을 놓지 못했고, 정방에게 아무것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정방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게 안심이 되고 즐거웠다.
다쳐도 상관없고, 늦어도 상관없고, 아무렴 상관없었다.
세상살이가 이토록 고단하고 무정하니,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딱 한 명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휘장 밖으로 방백종이 떠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침전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정방은 안쪽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미 당신이 머리로만 생각했던 일을 저질렀던 사람을 만나 봤어요. 그리고 지금은 생각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당신을 만났네요. 이게 바로 하늘이 내게 준 보상과 은혜겠죠.
정방은 눈을 감고 미소를 지으며 이불에 얼굴을 비비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근래에 정방은 부쩍 잠이 늘었다. 정방은 아마 지금처럼 마음 편히 잠을 청할 수 있던 적이 없었기에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태후가 방백종의 손에서 약 그릇을 건네받은 뒤, 궁녀에게 차를 내어 오라고 손짓했다.
“폐하, 고생하셨습니다.”
침상 위에 있던 태상황이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너, 혼자, 알아서, 하거라.”
태상황이 힘겹게 말을 뱉었다. 방백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아직 아바마마의 가르침을 얻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태상황의 허약한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오냐.”
깨어나긴 했지만, 말 한마디조차 간신히 할 수 있었던 태상황의 상태는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그는 약을 먹은 뒤 곧바로 잠이 들었다.
태후와 방백종이 밖으로 물러났다.
“황상, 태의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소.”
태후의 말에 방백종이 슬픔에 잠겼다.
“황상은 충분히 잘하고 있으시오.”
태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제 슬슬 준비해야 할 게 하나 있소.”
태후가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황궁과 조당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듯하고, 곧 봄이 될 테니 후궁에 사람을 들일 때가 됐지.”
방백종이 조금 놀란 기색으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상황께서 만에 하나…….”
태후가 안쪽을 힐끔 쳐다보며 말끝을 흐렸다.
“삼년상을 치르게 될 때가 되어서야 비빈의 일을 준비할 수는 없잖소. 황상도 어린 나이가 아니기도 하고, 궁에도 사람을 더 뽑아야 할 때가 됐소. 아이들을 볼 때가 되기도 했고.”
태후가 말을 마치자, 방백종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마, 후궁에 사람을 들일 생각을 한 적은 없습니다.”
태후가 흠칫 놀랐다.
“황상, 그럴 수는 없소이다.”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에 떠도는 소문이 태후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황후한테는 이 늙은이가 가서 얘기하리다. 이런 자질구레한 후궁의 일은 황상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방백종이 웃었다.
“아닙니다. 후궁의 일은 집안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마마, 소자가 천자의 자리에 오른 것은, 소자를 위한 게 아니오라, 선문 태자를 위한 일이었습니다.”
태후가 또 한 번 놀랐다.
방백종이 제위에 오른 것은, 그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 다른 이라면 이 말을 믿지 않겠지만, 태후는 방백종의 말을 믿었다.
그런데 비빈과 그 일이 무슨 상관이지?
“소자는 선문 태자를 대신해 천하를 지키고 있는 것이니, 향락을 즐기고 싶지 않습니다. 저희는 부부 두 식구로 충분하니, 선문 태자의 집에 괜한 사람을 더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뜻이었구나.
태후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던 찰나, 문밖에서 내시가 급보를 알린다며 안으로 들어왔다.
“폐하, 폐하, 마마께서, 마마께서…….”
내시의 말 한마디에, 방백종과 태후가 일순간 혼비백산했다.
“마마께서 몰래 태의를 부르셨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서는 구토까지 하셨고요. 소심이 이 사실을 밖에 알리지 못하도록 했답니다.”
내시가 이어서 말했다.
이 여인이 진짜!
내가 그럴 줄 알았어, 이번에도 달콤한 말로 나를 어르고 달랜 거였어!
방백종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서 따라가 보거라.”
태후가 옆에 있던 내시를 재촉했다.
“지난번의 일만 해도 얼마나 놀랐는데, 그런 일이 또 일어나게 둘 수는 없다.”
태후궁의 내시가 서둘러 방백종의 뒤를 쫓아갔다.
태후는 불안한 마음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서성였다. 다행히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태후가 보냈던 내시가 돌아왔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내시가 활짝 웃으면서 태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경하?
태후가 멈칫했다.
“어머나! 알겠어요!”
옆에 있던 안비가 손뼉을 치면서 소리쳤다.
“황후마마께서 회임하신 거예요!”
구토를 하고, 태의를 불렀다면…….
태후는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무시하고 내시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사실이더냐?”
내시가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예, 마마. 태의가 조금 전에 진맥한 후, 태맥이 잡힌다고 확인해 주었습니다.”
태후는 공중에 붕 떠 있던 심장이 드디어 내려앉는 듯하면서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천지신명께 감사드립니다! 부처님의 보우에 감사드립니다!”
태후가 합장하고 중얼거렸다.
“마마, 그게 아니라, 도조의 보우에 감사드려야죠.”
안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태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여태 여기 서서 뭐 하는 게야? 어서 축하 인사를 전하러 가야지.”
안비가 헤헤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은전을 두둑이 챙겨 가거라. 후궁의 일을 오래 관장해 왔으니, 입에 기름칠은 충분히 했을 테지? 두둑이 챙겨서 성의를 보이거라.”
안비가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마마, 억울하옵니다. 신첩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신첩이 얼마나 가난한데요.”
후궁에 사람이 많지 않아, 태비(太妃)들은 축하의 말을 전한 뒤, 곧바로 물러났다. 사람들이 모두 물러간 황후의 침궁 안에는 정방과 방백종 둘만이 남아 있었다.
방백종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서성거렸다.
“아이는 괜찮은 거 맞죠?”
방백종이 재차 물었다.
어젯밤이 그렇게 격했는데, 정, 정말 괜찮은 걸까?
방백종은 어젯밤이 마냥 후회스럽기만 했다.
“지금 열 몇 번째 물어보고 있거든요. 정말 괜찮다니까요. 내가 그걸 모를까.”
정방이 말했다. 하지만 방백종은 콧방귀를 뀌었다.
“나는 당신 못 믿거든요.”
방백종이 또 서두르며 태의를 부르라고 명했다.
“정확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 소상히 물어봐야겠다.”
“폐하께서 너무 조심스러우시네요.”
소심이 입을 가리고 쿡 하고 웃었다. 방백종은 소심의 말을 무시하고 아예 직접 태의를 보러 가겠다고 문을 나섰다.
침전에 남은 정방이 넋이 나간 모습으로 밖을 내다보면서 배 위에 손을 올렸다.
내가, 회임을 하다니.
깊은 밤, 방백종이 또 한 번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서둘러 옆을 더듬었지만, 옆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조금 전 악몽에서 깼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정방이 옆에 없다는 걸 알아챈 방백종은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창가에 서 있는 정방을 찾아냈다.
“왜 그래요? 어디 불편해요?”
방백종은 발을 헛디딘 통에 휘청거리면서 침상 위에서 내려왔다. 정방이 고개를 돌리고 방백종을 향해 웃었다.
“아니요.”
봄밤의 달빛 아래, 잠이 덜 깬 방백종은 정방의 미소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 누굴 속이려고 그래요.”
방백종이 정방의 손을 잡고 미간을 찌푸렸다.
“말해 봐요. 대체 무슨 일인데 그래요? 종일 마음이 딴 데 가 있네.”
정방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거짓말을 했어요.”
방백종이 흠칫 놀랐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줄 모르는 건, 시를 쓰는 것밖에 없다고 했었죠.”
정방이 말하면서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사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는지는, 배운 적이 없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다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고 또 웃던 중 코끝이 찡해졌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 그 많은 비술을 알아야 했다는 건 어떤 걸까.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란 그토록 힘든 것이어서, 어쩌면 살아가는 것조차 사치라고 생각했겠지. 그러니 자식을 낳는 건 더더욱 생각도 안 해 봤을 테고.
방백종이 정방을 품 안으로 끌어안았다.
“아방,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할 줄 아니까.”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아이를 키울 줄 안다고요?”
방백종이 빙긋 웃었다.
“나는 아이들을 좋아해요. 회혜왕, 선문 태자, 그리고 공주들이 어떻게 자랐는지 옆에서 보았고, 그들을 직접 돌보기도 했어요. 그런데 그 아이들은 남의 아이라 그런지, 내 손길을 별로 반기지는 않더라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먼 발치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제는 우리의 아이가 생길 테니, 내가 그 아이를 직접 돌보고, 아이를 돌보는 방법을 당신에게 알려 줄게요.”
방백종을 바라보던 정방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정방이 방백종을 꼭 껴안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교랑의경>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