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9화 (159/160)

-번외. 그놈-

골도(骨刀) 한 자루가 상자에 던져지면서 챙, 하는 소리가 났다.

주복이 손을 털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선물이다.”

주복이 조용히 읊조렸다.

그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곧이어 사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공자님, 저희는 경성으로 안 돌아갑니까? 노야께서 재촉하는 서신을 보내오셨어요. 그리고 여기 서북 군영에는 삼노야 등이 계신데, 공자님까지 이곳에 계시면 서북 군영은 주씨 가문이 다 해 먹는다는 소문이 돌지도 몰라요. 그러면 황후마마께 안 좋은 영향이…….”

사환이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주복이 피식 웃었다.

“어디서 그런 말을 배워 온 게냐? 감히 마마를 들먹이면서 나를 협박하려 들다니.”

사환이 머쓱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다 챙겼으니, 그만 가자.”

주복이 말했다. 사환은 흠칫 놀랐다가 곧 기뻐 어쩔 줄 몰라 했다.

“공자님, 드디어 돌아가실 마음이 생기셨습니까?”

사환이 소리쳤다. 주복이 뒷짐을 지고 사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럼. 왜 내가 돌아갈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야 당연히 공자님이 황후마마께 마음이 있어서…….

사환이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주복은 잠자코 걸음을 옮겼다.

내가 그 여인을 못 볼 게 뭐 있다고. 이번 생에 그 여인과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해서? 그 여인이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된 게 보기 싫어서?

예전이라면 그랬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 여인은 내게 목숨까지 내주는 사람인데, 내가 무얼 더 바랄 수 있겠어?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상서, 상남 지역을 유랑 중인 이 태의가 보내온 서신이었다.

‘무왕축은 사람을 살리는 주술이기도 하고, 사람을 죽이는 주술이기도 합니다. 남을 살리고, 자신을 죽이는 주술이지요.’

주복은 그 여인이 어떻게 마지막 숨을 남길 수 있었는지, 그 여인이 깨어날 수 있었던 비밀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주술을 쓴 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기간은 단 석 달이며, 석 달이 지나도록 주술의 저주를 깨지 못한다면 필시 죽게 됩니다.’

이 태의가 서신에 쓴 내용이었다.

그때 그 자식이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아무리 그 여인을 황후로 책봉한다고 해도, 그 여인은 이미 죽은 목숨이었을 거야.

주복이 걸음을 멈추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한 거 아니야?

그 자식이 아무리 그 여인에게 푹 빠져 있다지만, 황제가 깨어난다는 건 어떻게 장담하고, 깨어난다고 한들 제위를 그 자식에게 물려줄 거라는 장담은 어떻게 해?

그리고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않고 그대로 죽었을 수도 있잖아?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이 석 달 안에 해결될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느냐고.

고약한 여인 같으니라고.

주복이 고개를 홱 돌렸다.

“저 상자도 챙기거라.”

사환이 멈칫했다.

“마마께 드릴 선물이다. 이만큼 모았으니, 한 번 가져다드릴 때가 됐어.”

사환이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공자님, 괜찮으신 거 맞죠?”

사환보다 주복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었다. 그건 상자가 넘치도록 가득 담긴, 말할 수 없는 주복의 진심이었다.

“그래. 아주 괜찮다. 왜.”

주복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몸을 돌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어떤 진심은 굳이 말로 할 필요가 없어. 나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어줄 사람이 세상에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이 뭐가 중요해? 그런 사람이 같은 세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생은 충분히 의미 있어.

먼지를 휘날리며 말을 타고 길을 떠난 주복의 시야에 시끌벅적한 마을이 차츰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북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매섭기만 했던 바람이 한결 따스해졌다.

“보름만 더 가면, 경성에 당도할 수 있습니다.”

사환이 뒤에서 외쳤다. 행장을 단단하게 여민 주복이 고개를 들고 성문을 내다보았다.

“오늘은 여기서 하루 묵자. 재미난 물건이 있는지도 좀 보고.”

놀란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공자님, 뭘 더 사시려고요? 지나가는 곳마다 그렇게 물건을 사시면, 마차가 곧 터지겠습니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사환에게 뭐라 꾸중을 하려던 찰나, 주복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복의 시선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길가에 있는 찻집에 사람들이 여럿 앉아 있었다. 주복의 시선이 누군가에게 꽂혔다.

주복의 표정에서 서서히 놀라움이 드러났다.

그놈, 인가?

몹시 간소한 찻집이었다. 나무 막대기로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차양막이 불어오는 눈바람을 막았고, 커다란 솥이 바로 그 옆에 있었다. 솥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은 한겨울에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데웠다.

찻집에 앉은 사람은 꽤 많았다. 대부분은 길을 재촉하는 보따리 상인이거나 성안으로 들어가 일자리를 알아보려는 평민이었다. 짐꾸러미와 보따리, 수레와 말이 찻집 밖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사람들은 큰소리로 웃고 떠들고 있었다. 참으로 어지럽기도, 시끄럽기도 한 찻집이었다.

그런 사람들 사이로, 한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손에 쥔 종이 몇 장을 보고 있었다. 청색 장포를 입고, 나무 비녀 하나로 머리를 묶고 있는 사내였다. 그의 곁에서는 보따리 상인 서너 명이 침을 튀겨 가며 큰 소리로 떠들고 있었다.

“공자님?”

사환이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잠시 시선을 거두었다가, 다시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주복이 다시 시선을 돌렸을 때는, 보따리 상인들이 무언가를 보려는 듯 몸을 반쯤 일으킨 채로 손을 휘젓고 있던 통에 안에 앉은 사람이 시야에서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때, 앞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면서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이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길을 터주자, 관리 하나가 주복을 향해 질주해왔다.

“공자님.”

사환이 주복을 작게 불렀다.

“저들은 어쩌다 또 알게 된 거야?”

주복이 달려오는 관리를 바라보면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공자님, 지금 공자님의 신분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저희가 눈에 띄지 않게 다닌다 해도, 공자님께서 용곡성을 나온 순간부터 소식이 쫙 퍼졌습니다. 오는 내내 저희를 지켜보는 눈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저 사람들이 국구에게 아부 떨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요.

“다른 일에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참 좋겠네.”

주복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사환이 헤헤 웃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공자님, 웃는 얼굴에 침을 뱉으시면 곤란합니다.”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사환을 노려보았다.

“네놈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안다.”

사환이 헤헤 웃었다.

“주 대인.”

주복을 향해 달려오던 관리와 병사들이 말에서 내려와 주복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주복이 말에서 내려 공수의 예로 답례했다.

살갑게 그를 맞이하던 사람들은 겉치레 말들을 늘어놓으며 주복과 함께 성안으로 들어갔다.

말 위로 올라탄 주복이 저도 모르게 다시 찻집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찻집에 있던 사람들이 주복 일행을 구경하느라 죄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안쪽에 있던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저놈이 왜 여기 있지?

아냐, 내가 잘못 본 거겠지. 허풍 떨기 좋아하고, 깔끔한 걸 따지는 그놈이 저런 모습으로 저런 찻집에 앉아 있을 리가 없어.

새로운 황제가 등극한 뒤 조정에는 큰 변동이 있었다. 물론 진(秦)씨 가문도 당연히 그 안에 속해 있었지만,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가세가 기울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했다. 진 시강이 먼저 사직을 청했고, 황제는 그의 청을 윤허했다. 그리고 그의 고향인 천중(川中)에 있는 관직을 하사하여 온 가족이 함께 귀향했다고 들었다.

비록 조정에서의 벼슬길은 끝이 났지만, 고향으로 돌아간 진씨 가문은 여전히 명망 있는 귀족 집안인지라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주복이 시선을 거두었다. 큰길가에서 시끌벅적하게 주복을 에워싼 사람들이 말을 타고 그에게 길을 안내했다.

“저건 누구길래 추관 대인께서 직접 나와 마중하시는 거야?”

“나이도 젊고, 딱히 눈에 띄진 않던데.”

“어느 귀한 집 자식이겠지.”

길을 터주느라 물러났던 사람들이 다시 큰길 위에 몰려와서는 떠나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수군댔다. 찻집에서 구경하던 사람들도 각자 자리로 돌아가거나 갈 길을 재촉했다.

“잠시만요. 길 좀 비켜주시오.”

주인장이 큰 소리로 외치며 따뜻한 차가 담긴 그릇을 들고 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내의 얼굴을 가렸다.

“고맙소.”

김이 사라지자, 사내의 준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사내가 한 손으로 소매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릇을 들었다.

같은 탁자에 앉아 있던 보따리 상인은 사내의 가느다랗고 고운 손과 투박한 그릇을 들어 올리는 모습이 너무 대비된다고 생각했다. 사내의 세심한 동작을 본 상인은 모르게 숨소리가 작아졌다.

지극히 평범한 청색 장포를 두르고 대나무 가지로 만든 비녀를 한 사내였지만, 그의 일거수일투족에서는 점잖고 온화한 기품이 풍겼다.

상인은 어쩐지 사내가 그리 투박한 그릇에 담긴 차를 마시게 하는 것이 신경 쓰였다. 그런데 그 사내는 고개를 젖혀 가며 그릇에 든 차를 단숨에 비우고 다시 고개를 숙여 손에 쥔 종이들을 들여다보았다.

“젊은이, 그건 집에서 온 서신인가 보오?”

상인이 저도 모르게 질문을 던졌다. 자리에 앉을 때부터, 사내는 계속 손에 쥔 서신을 보면서 이따금 웃음 지었다.

“공부하러 외지에 나온 거요?”

상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그런데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상인의 등을 팔꿈치로 툭툭 쳤다. 상인이 화가 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를 찔렀던 사람이 턱짓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왜?

언짢은 표정의 상인이 입 모양으로 묻고는 그 사람이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뒤에 지팡이 두 개가 놓여 있었다.

아, 절름발이구나.

저, 저렇게 준수한 젊은이가 절름발이라니.

상인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났다.

절름발이라면 공부하러 외지에 나온 게 아니겠군. 어차피 과거 시험을 보지 못할 테니.

이때, 사내가 고개를 들고 웃으며 상인에게 대답했다.

“네.”

상인은 순간 대꾸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주인장, 한 그릇 더…….”

사내가 손에 쥔 그릇을 높이 들고 외쳤다. 사내가 말하던 도중, 상인이 갑자기 사내의 그릇을 낚아채고는 몸을 일으켰다.

“내가 가져다주겠소. 지금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주인장을 불러도 한참을 기다려야 할 거요. 내가 가서 받아오리다.”

사내는 기분 나쁜 기색 없이 빙긋 웃으며,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네, 고맙습니다.”

남에게 신임을 얻고 호의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기분이 좋아진 상인은 웃으며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주인장을 재촉해서 차를 한 그릇 가득 받아왔다.

“대충 끓인 거긴 해도,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에게는 이런 차가 제일이지. 몸도 녹일 수 있고 말이오.”

상인이 말했다.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번 감사를 표했다.

“혼자 나온 것이오? 부모님께서 걱정하지는 않으시고?”

상인이 이어서 물었다.

“예, 걱정하지 않으십니다.”

사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상인은 또 무슨 말을 물어보고 싶었지만, 사내가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이어서 읽는 바람에 물어보려던 말을 도로 삼켰다. 조금 전에 그를 팔꿈치로 쳤던 사람이 또 그를 치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자네, 말이 왜 이렇게 많은가? 괜히 몸도 안 좋은 사람 붙잡고 늘어지지 말게나. 저런 사람들은 자기가 호기심의 대상이 되는 걸 꺼리거든.”

하긴, 그렇겠지.

상인이 민망한 듯 미소 짓고는 더는 사내에게 말을 걸지 않고 조용히 차를 마시며 사내를 훑어보았다.

이런 사람이 혼자 외지에 나오는 걸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는다고? 사환을 데리고 다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보아하니 가난한 집안의 자식은 아닌 거 같은데, 부모님의 사랑을 못 받는 자식인가?

진호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종이 한 장을 넘기고 다음 장을 펼쳤다.

지금쯤이면, 부모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계시겠군. 보아하니 아버지의 기분도 꽤 괜찮으신 것 같네.

‘물론 폐하께서 인자하여 내려 주신 관직은 아니다.’

진 부인이 서신에서 말했다.

당연하겠지. 사실 그는 인자하지 않을 뿐 아니라, 줄곧 흉악무도한 자였으니까.

황제는 아버지의 사직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간악하게 웃으며 아버지를 경성에 묶어 두고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아버지의 숨통을 천천히 조이려고 했겠지.

‘황후마마께서 우리를 보내 주신 거야.’

‘황후마마’라는 단어에 진호의 시선이 멈칫했다. 그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다시 천천히 서신을 읽었다.

‘나도 나중에서야 알고, 황후마마를 뵈러 입궐했다. 마마께서는 황후의 침궁에 앉아 계셨어. 옷차림이며 장식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말이야.’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고.

진호의 눈앞에 정방을 처음 만났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도 지금 같은 겨울이었지. 눈이 내리던 주씨 가문의 마당 안, 나는 주복이 친 사고를 수습하려고 일부러 취한 척하며 그 여인과 술잔을 기울였어.

천지가 새하얗게 뒤덮였고, 소매가 넓은 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던 여인이 어깨 아래로 검은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돌리고 나를 쳐다보았지.

어떨 땐,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누군가와 단 한 번의 눈 맞춤을 위해, 단 한 번의 만남을 위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진호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진해졌다. 그는 다시 서신에 집중했다.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주신 분이 황후마마냐고 여쭤봤더니, 황후마마께서 그렇다고 하셨어.

그때 나는 많이 놀랐단다. 너도 알다시피, 우리 가문의 말로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거야. 어사대에 탄핵당하여 관직을 빼앗기고, 네 아버지가 하옥되어 죗값을 치르고, 네 어미는 체면을 지키고자 목을 매달고 자결했겠지. 그리고 너희는 아마 지금쯤 변방의 군영으로 보내졌을 테고.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됐다는 건, 이 모든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뜻이야. 이렇게 될 거라고 우리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니?

폐하께서 우리 가문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때 우리가 연평 군왕을 태자로 옹립하려 했었기 때문이야. 하지만 사실, 그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아.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신하로서 각자 자신이 택한 주군에게 충성을 바칠 권리가 있으니 비난할 바가 못 되지. 기껏해야 우리를 경성에서 내쫓고 억압하는 정도에 그쳤을 거야.

하지만 황후마마께서는, 사실 우리를 단순히 싫어하는 것에 그치지 않으셨을 게다.’

진호가 손에 쥔 서신을 잠시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차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코끝을 시큰하게 만들고 진호의 얼굴을 가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주복이 제 손에 거의 죽을 뻔했으니까요. 아니, 죽을 뻔한 게 아니라, 죽었었죠.

그 여인은 이미 죽은 주복을 살려내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았어요.

결국에는 두 사람 모두 무사히 살아남았지만, 그날, 저는 마음속에서 이미 그 둘을 죽인 것이나 다름없지요.

생사의 원한은 단순히 염증을 느끼거나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 감정처럼 단순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여인은 왜 그랬을까요?

혹시…….

추측하려던 찰나, 진호가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뇌리에 스친 생각을 떨쳐냈다.

그 여인의 말이 곧 그 여인의 생각이야. 내가 생각하는 건, 내 생각일 뿐이지. 그 여인과는 아무 상관 없는!

진호가 그릇을 내려놓고 서신을 바라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에게 물을 먹여 줬던 은혜에 보답한 거라고 해.’

물을 먹여 줘?

진호가 흠칫 놀랐다.

어머니께서 그 여인에게 물을 먹여 준 적이 있었나?

아, 혹시 그때인가? 진소가 건넨 서신에 적힌 ‘넌 누구지’라는 한 마디에 혼수상태에 빠졌던 그때.

보름 가까이 누워만 있던 병자라면 더럽거나 냄새가 난다고 싫어할 법도 한데, 평생을 귀하게 살아온 부인이 그 여인을 일으키고 물을 먹여 주었다.

당시 진 부인은 마치 자신의 아이에게 물을 한 모금이라도 더 먹이고자 어르고 달래는 어머니 같았다. 사실 진 부인 같은 귀부인들은 친자식일지라도 이렇게 가까이서 다정하게 챙겨 줄 일이 없었다. 아이를 살뜰히 챙겨 주는 유모가 따로 있으니까.

진호의 코끝이 찡해졌다.

그 여인은 그런 사소한 호의까지도 잊지 않고 보답하는 건가?

진호는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서신을 바라보던 시야가 흐릿해졌다.

서신 위에 눈물이 번진 흔적이 있었다. 서신을 쓰던 사람이 이 대목에서 잠시 붓을 멈추고 눈물을 흘린 듯했다.

‘이런 황후마마께서 계시거늘, 진씨 가문이 무슨 걱정을 하겠느냐. 그러니 네 아버지도 마음이 놓이신 게지. 우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서 마음 편히 살아보려 한단다.’

‘참, 작별을 고할 때, 황후마마께서 내게 웃긴 이야기를 하나 해 달라고 하시더구나.’

진호가 다음 장을 넘겼다.

‘이번에는, 드디어 웃어 주셨어.’

진호가 빙긋 웃었다.

박장대소였을지 언제나 보이는 그 희미한 미소였을지 궁금하네.

“젊은이.”

귓가에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진호의 생각이 끊겼다. 진호가 고개를 들고 옆에 앉은 상인을 쳐다보았다.

“차를 좀 더 가져다줄까?”

상인이 다정하게 물었다. 진호가 웃으며 고개를 젓고는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잘 접어서 품에 넣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성으로 들어가야죠.”

진호가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좁디좁은 공간에 사람까지 많다 보니, 상인은 진호가 넘어질까 봐 걱정되어 서둘러 몸을 일으키고 그를 부축했다.

진호가 힘겹게 일어나서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지팡이를 집어넣었다.

“어르신, 감사합니다.”

진호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괜찮소. 괜찮아.”

상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고개를 저었다.

“제가 불구인 게 가엾어서 도와주시는 거지요?”

진호가 미소 띤 얼굴로 상인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허를 찌르는 질문에 상인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곧이어 그는 민망한 듯 웃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 절름발인 게 가엾어서.

하지만 장애가 있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가여워하는 건지, 경멸하는 건지 구분하기 힘들겠지.

이 젊은이가 괜히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상인이 어색해하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던 그때, 사내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가엾이 여겨 주시는 것 또한 선량한 마음이지요. 소생, 어르신께 감사드립니다.”

상인이 멈칫하고는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유, 아니오, 아니외다. 사소한 것이오. 이런 사소한 것에 어찌 감사 인사를 받는단 말이오.”

상인이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 진호를 위해 길을 터줬다.

“잠시 비켜 주시오. 길 좀 비켜 주시오.”

사소한 수고보다 얻기 힘든 것은, 남을 믿고, 그 사소한 수고를 받아들여 주는 것이리라.

사실 사소한 수고를 받아들이고, 남을 믿는 것은 쉬운 일일 수도 있다. 남을 믿는 일이 꼭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 건 아니니까.

진호는 자신이 이렇게 다른 사람의 호의를 받아들이며 지내온 나날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진호가 웃으면서 지팡이를 짚고 상인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진호는 차양막 아래에서 상인을 향해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 자리를 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성안의 큰길 위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말을 탄 두 사람이 성 안쪽에서 성문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 전에 주복 일행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벌써 다 흩어진 터라, 사람들은 말을 탄 두 사람이 바로 조금 전에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성안으로 들어간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공자님, 잘못 보신 거 아닐까요?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진 공자님이 왜 이곳에 계시겠어요?”

사환이 소리쳤다. 주복은 사환의 말을 무시한 채, 성문을 나가 찻집 앞에 멈춰 섰다.

내가 잘못 봤을 리가 없어. 절대로 잘못 봤을 리가 없다고.

성안으로 들어가 관리들이 준비해 둔 연회석에 앉았던 주복은 계속해서 불안한 마음을 어쩌지 못했다. 동시에 성문 앞에서 잠시 스치듯 봤던 사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분명히 그놈이야! 그놈이라고!

그놈은 사람이 가득 찬 진흙탕 안에서도 가장 눈에 띌 놈이야.

“공자님, 뭘 좀 드시겠…….”

주인장이 찻집을 향해 달려온 주복을 보고는 서둘러 그를 친절하게 맞이했다. 그런데 주복은 주인장을 그대로 지나쳐서 차양막 아래로 들어갔다.

찻집에 앉아 웃고 떠들던 사람들의 소리가 순식간에 멈추고, 용맹해 보이는 사내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조금 전에 여기 앉아 있던 사람은 어디 있소? 젊은 사내이고, 천중 지역의 말씨를 가지고 있소만.”

주복이 한 탁자 앞에 멈춰 서서 물었다. 조금 전, 진호를 부축해줬던 상인이 아, 하는 소리를 내며 나섰다.

“그 다리가 불편한 공자를 찾는 것이오?”

그러게 그 젊은이는 절대로 혼자 외지에 나올 사람이 아니라니까. 곳곳에 이렇게 친구들이 있으니 혼자 다닐 수 있는 거겠지.

주복이 흠칫 놀라고는 되물었다.

“다리가 불편하다고요?”

“그렇소. 지팡이를 짚고 있던데? 방금 막…….”

절름발이라는 말에, 찻집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주복은 사람들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다리가 불편하다는 말만 계속 귓가에 맴돌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럴 리가 없잖아!

“공자님, 관아에 도움을 청해서 같이 찾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진 공자님께서 이 성에 들어오셨다면, 아직은 떠나지 않으셨을 겁니다. 이곳이 아무리 크다 해도, 일단 성문을 닫으면 좀 더 빨리 찾으실 수 있겠지요.”

사환이 큰 소리로 외치며 눈 깜빡할 사이에 말을 타고 달려가는 주복을 뒤쫓았다.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기면서 말을 멈춰 세웠다.

“찾을 필요 없다.”

주복이 한 방향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저렇게 가면, 얼마 못 가니까.”

사환이 의아한 표정으로 주복의 시선을 따라가자,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신을 대필해 주기도 하고, 서신을 쓰기 위한 종이와 붓을 대여해 주기도 하는 노점에 젊은이 하나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의 발치에는 화폭 두루마리 한 개와 장궁 한 개가 놓여 있었고, 지팡이 두 개가 그 옆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의 두 지팡이는 다른 그 무엇보다 훨씬 눈에 띄었다.

지팡이를 짚으면 빨리 걷지 못하니, 멀리 가지도 못하는구나.

사환의 시선이 다시 자리에 앉은 사내에게 향했다. 가부좌를 틀고 앉은 사내는 몸을 앞으로 살짝 굽히고 고개를 숙인 채 붓을 들고 종이 위에 글을 쓰고 있었다.

사환이 무언가에 집중한 사내의 준수한 옆모습을 보고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정말 진 공자님이시네.”

정말 저놈이로구나! 그런데 저놈이 여긴 왜 온 거야?

주복이 앞으로 몇 걸음 가다 말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저놈을 봐, 말아?

“공자님, 글씨가 참으로 예술입니다.”

노점의 주인인 중년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는 진호가 서신에 쓰는 내용을 감히 들여다볼 수는 없었지만, 흘깃 보기만 해도 정갈한 진호의 글씨가 명필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진호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과찬이십니다. 좋은 글씨라고 할 수는 없지요.”

중년의 사내가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진호가 고개를 들고 웃었다.

“겸손 떠는 게 아니라, 저보다 훨씬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 있거든요. 저는 그 사람과 비교한 겁니다.”

중년의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산 너머에 또 산이 있다고,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는 법이지요.”

중년 사내가 말했다. 진호는 말없이 웃고는 고개를 숙이고 서신을 이어 써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호는 서신을 곱게 접어서 봉투 안에 넣었다.

중년의 사내는 종이 위에 쓰인 ‘부친’ 두 글자를 보고 그가 아버지에게 서신을 썼음을 알아차렸다.

그럼 이번에는 어머니께 쓰려나?

“공자님, 참 다정하시구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내에게 각각 한 장씩 써 주는 거로군요.”

‘아내’라는 말에, 진호가 붓을 멈췄다.

“저는 아직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다.”

중년의 사내가 흠칫 놀랐다가 진호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중년의 사내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장가갈 생각도 없고요.”

진호가 이어서 말했다.

“장가는 가셔야지요. 그렇지 않으면, 혼자 얼마나 쓸쓸하고 고독하겠습니까.”

중년의 사내가 진심 담긴 말을 하고는 잠시 생각하다가 진호에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분명히 좋은 처자가 나타날 겁니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아닙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진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고독하고 쓸쓸한 것은 부인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중년의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진호를 바라보았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고?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바로, 마음이 끌리는 사람을 마주치는 것이지요. 어떤 이들은 삶이 다하는 날까지도 그런 사람과 마주치지 못합니다. 그런 사람을 마주칠 수 있다면, 그건 크나큰 행운이에요. 마음속에 그 사람이 있다면, 인연이 되지 못해도, 매일 아침을 같이 맞이할 수 없어도 상관없습니다. 마음속에 그 사람만 있다면, 이 세상 어딘가에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왜 고독하고 쓸쓸한 마음이 들겠습니까?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인연을 맺어 매일 아침을 함께한다고 해도, 결국 쓸쓸하고 외롭기 마련인걸요.”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손에 쥔 붓을 내려놓았다. 그는 서신을 잘 접어서 품에 넣고 중년의 사내에게 큰돈을 주어 값을 치렀다. 진호는 가장 먼저 두루마리를 등 뒤로 메고, 장궁을 한쪽 어깨에 짊어진 뒤, 두 지팡이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중년의 사내는 진호의 말을 듣고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넋을 놓았다.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라.

지기(知己)?

인생에서 가장 얻기 힘든 것이 바로 지기와 미인이라지 않던가. 마음이 끌리는 사람이 없다면, 주위에 아무리 많은 사람이 오간다고 해도, 마음은 언제나 고독하고 쓸쓸할 테지.

중년의 사내가 멍하니 넋을 놓는 사이, 주복도 넋을 놓은 채 진호를 바라보았다. 그는 진호가 몸을 일으키고, 능숙하게 지팡이를 짚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주복은 지팡이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와 진호가 지팡이를 짚으면서 걷는 모습이 어쩐지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했다.

저놈이 왜 다시…….

그때 네놈이 쐈던 화살 때문이냐?

그 화살 한 발로 내가 쓰러졌을 때, 네놈도 무너져 버렸던 거야?

이 빌어먹을 놈! 쓸모없는 자식! 화살을 쏘아서 나를 맞힌 사람은 넌데, 어째서 쏠 용기는 있고, 결과를 받아들일 용기는 없는 거야!

네놈이 이런다고 해서 내게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거 같아? 이런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다고!

나약한 자식. 내가 네놈을 제대로 잘못 봤구나. 내 눈이 삐었어!

주복이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다.

그때, 누군가가 말을 탄 채 길을 비키라고 큰 소리로 외치며 길 위를 질주했다.

오후 무렵인지라 성 안팎으로 지나다니는 사람이 많을 때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 때문에 주위가 시끌벅적해지자, 사람들은 서둘러 길 가장자리로 물러나며 길을 터주었다.

그런데 어느 집 아이인지 모를 어린아이가 큰길 중앙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어린아이는 멀뚱멀뚱 제자리에 서 있었다.

주복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반사적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누군가가 주복보다 한발 빨리 달려가, 어린아이를 껴안고 몸을 돌리면서 가까스로 말을 피했다.

주복이 달려오는 말의 고삐를 홱 낚아채고, 온몸의 힘을 다해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 타 있던 사람은 갑작스럽게 멈춰 버린 말 때문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주복은 바닥에 나뒹굴면서 악 소리를 지르는 사람을 무시한 채, 어린아이가 무사한지 앞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무언가를 본 그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호가 어린아이를 놓아 주고, 자세를 낮춘 채 어린아이를 달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겨드랑이 아래에 끼워져 있던 지팡이는 저 멀리 내팽개쳐져 있었다.

저, 저 자식이 진짜!

지나가던 행인들도 놀라서 넋을 잃었다. 가까스로 말을 피한 어린아이 때문이기도 하고, 분명히 절름발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순식간에 멀쩡해진 게 놀라워서였다.

“공자님, 정, 정말로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의 가족이 몰려와서 감격스러운 얼굴로 진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호는 그저 웃기만 하고는 멈춰 선 말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진호가 흠칫 놀랐다.

너는!

“공자님, 공자님 죄송합니다. 말이 갑자기 놀라는 바람에.”

말에서 굴러떨어진 사람이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뒤늦게 달려온 그의 시종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려 주복을 향해 연신 사죄했다. 주복을 에워싼 시종들 때문에 시야가 가려졌다.

주복은 그들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죽을 듯이 앞을 노려보았다. 사람의 형체가 주복의 시야를 가렸다가 사라지자, 진호가 다시 주복의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진호 또한 어린아이의 가족들에게 에워싸인 채, 미소 띤 얼굴로 주복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

지나가던 행인이 머뭇거리다가 바닥에 내팽개쳐진 지팡이를 진호에게 건넸다.

진호가 지팡이를 건네받고는 미소를 지으며 지팡이를 양쪽 겨드랑이 아래에 넣었다. 주위 사람들은 그런 진호의 모습을 보고 더욱 놀랐다.

지금 저건 뭐 하는 거래?

절름발이 행세를 하는 거야? 사지가 멀쩡해 보이는데 절름발이 행세는 왜 해?

사기를 치는 놈인가? 저 젊은이의 생김새와 행동을 보면, 사기로 돈을 벌어먹는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행인들의 표정을 읽은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이렇게 다니면 자유로워요. 아주 천천히 갈 수 있고, 이것저것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을 보듯이 눈을 크게 뜨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호는 더는 말하지 않고, 지팡이를 짚으면서 몸을 돌렸다.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지팡이를 짚고 두어 걸음 내디뎠다. 주위의 시선과 더불어 자신을 뚫을 기세로 쳐다보는 등 뒤의 시선이 느껴진 진호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반대편에 있던 주복이 시종일관 진호를 주시하고 있었다.

미안하다.

진호가 소리 없이 입술로 말하고는 빙긋 웃었다. 그는 허리와 고개를 숙이고, 주복을 향해 긴 작별 인사를 한 뒤, 다시 고개를 들고 성안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디뎠다.

“늙은 나무꾼이 장작을 패러 가누나. 푸른 소나무 가지를 묶고, 회화나무를 짊어졌다네. 망망한 들판 위, 늦가을의 붉은 산 너머, 위대한 비석은 황량한 무덤이 되고, 드높고 화려했던 과거의 것들은 모두 이끼와 함께 누워 있다네.”

진호의 노랫소리가 거리 위에 울려 퍼졌다. 그의 어깨에 있는 장궁이 지팡이에 부딪히는 소리가 박자감 있게 들려오면서 낭랑한 목소리가 다시 한번 사람의 이목을 끌었다.

절뚝거리면서 걷는 진호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사람들의 눈초리와 손가락질을 받으며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공자님.”

사환이 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깊게 심호흡을 하고는 웃음을 짓고 몸을 돌렸다.

“가자.”

“공자님, 진 공자님을 따라가지 않으시고요? 그럼 다시 관아로 돌아가시나요?”

사환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주복이 말 위로 몸을 날리고는 성 밖을 향해 달려갔다.

“아니, 떠날 것이다.”

경성 성문에 가까워질 때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에서 어린 초록빛이 싹트는 것이 보였다.

주복이 말을 멈춰 세웠다.

“공자님, 잠시 쉬다 가시려고요?”

사환이 재빨리 물었다. 이곳은 성 동쪽으로, 성문 앞에 당도하려면 조금 더 가야 했다. 주복은 말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응시했다.

거기에는 초시(草市:도성 밖에 열리던 시장)가 있었다. 다만 다른 초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노점상들이 목청을 높이며 파는 물건이 붓, 먹, 종이, 벼루 등이라는 사실이었다.

주복과 사환이 가까이 다가가자, 상인들이 분주하게 손님을 맞이했다.

“관인, 여기 무원산 글씨의 새로운 탁본이 있습니다.”

“관인, 질 좋은 먹과 붓을 팔고 있고, 물건을 사면 작은 의자도 하나 증정해 드립니다.”

주복은 상인들을 제치고 무덤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그는 무덤 가까이 가지 못하고, 울타리 앞에 멈춰 서야 했다.

새로 지어진 듯한 울타리 근처에 무덤을 지키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물론 무덤을 지키는 사람은 관부의 병사들이 아니라, 늙은 가노들이었다.

“잠시 길 좀…….”

사환이 앞을 막는 사람들에게 길을 터 달라고 부탁하려던 찰나, 주복이 그를 제지했다. 주복은 더는 앞으로 다가서지 않고, 무덤 앞에 앉아 있거나 서 있는 사람들의 어깨너머를 쳐다보았다.

“글씨가 더해졌네.”

주복이 작게 읊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관인, 저쪽 정문유(程文兪) 공자의 비석에 새겨진 글씨는 작년 연말에 새겨진 것입니다. 힘찬 예서체로 쓰여 있지요!”

옆에 있던 사람이 주복의 혼잣말을 듣고는 열정적으로 소리쳤다.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황후가 되고서도 이렇게 자유로이 성을 드나들어도 되는 거야?

주복이 입술을 삐쭉이고는 몸을 돌렸다. 주복에게 일장 연설을 놓으려던 옆 사람이 풀이 죽은 듯 입을 다물었다.

성문에 가까워지자, 말을 타고 달려온 젊은 사내들과 가노가 주복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행인들은 그들의 표정과 행동을 보고는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힘들진 않았어?”

“더 튼튼해졌네.”

젊은 사내들이 서로의 몸을 부딪치면서 반가움을 표현했다.

“어서 가자. 부모님께서 보름 내내 네 생각만 하셨다. 하루가 멀다고 사람을 시켜 재촉하시더라고.”

주복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서둘러 말에 올라타서 갈 길을 재촉했다. 큰길 위로 먼지가 휘날리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자, 행인들이 눈을 흘기며 손가락질을 하려고 했다.

무리를 이끌고 가던 사람이 손을 들고 눈썹을 치켜뜬 채 조용히 말했다.

“다들 점잖게 가자. 괜히 소란 피우지 말고. 남들의 구경거리가 되어 체면 떨구는 일은 하지 말자고.”

그의 뒤를 따르던 사내들이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한껏 신이 났던 가노들도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다물었다. 시끄럽던 일행이 갑자기 조용해지면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주복이 조금 의외라는 눈빛으로 앞장선 사내를 쳐다보았다.

“형님, 이건 형님답지 않은데요.”

주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주씨 가문의 사람들은 원래 집을 나설 때마다 온 경성 사람들이 나와서 그들을 쳐다봐 주길 내심 바랐다. 아무 일이 없더라도, 그들은 소란 따위를 피워서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 했다. 사람들이 욕하든 비웃든 상관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뿐이니까.

앞장선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이젠 옛날 같지 않잖아.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 주씨 가문은 이제 거들먹거리지 않아도 이미 온 경성 사람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또 기억하고 있다고 하셨다.”

황후를 배출한 집안이니, 황량한 산골짜기에 숨어 지낸다 해도 누군가는 주씨 가문의 사람들을 기억하리라.

주씨 저택 안에 들어서자, 부모 자식, 형제자매가 모두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였다. 시끌벅적한 연회를 열고 한창 회포를 풀던 그때, 사환이 누군가가 인사를 하러 왔다고 고했다.

“아버지, 저는 잠시 가족들을 보러 온 것뿐이니, 다른 사람은 만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하자 주 노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아니라, 네 고모부인 정씨 가문의 사람이다.”

고모부? 정씨 가문?

주복이 경악했다. 정씨 가문을 정겹게 부르는 말이 부친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주복이 놀라는 사이, 문밖에 있던 사람이 대청을 향해 걸어왔다. 질 좋은 옷감으로 만든 옷을 입고 있던 열일고여덟 살쯤 되어 보이는 젊은 사내가 회랑 아래에 멈춰 서서 큰절을 올렸다.

“소인 금가아가 육공자를 뵈옵니다.”

금가아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금가아구나.

주복이 웃었다.

“다시 돌아온 게냐? 너희 집 대노야께서 너 혼자 경성에 오는 걸 걱정하지는 않으셨고?”

금가아가 고개를 들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소인은 벌써 혼례를 올려서 아이의 아버지가 됐습니다. 대노야께서도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한다고 하셨고요. 그리고 소인이 능력이 없다 해도, 경성에 계신 사돈댁에서 든든하게 뒤를 지켜주고 계시잖습니까.”

금가아의 능청스러운 모습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이제는 사람 구실을 하나 보네. 경성에서 길을 잃고 엉엉 울던 예전의 그놈이 아니야.”

주복이 말했다. 금가아가 헤헤 웃으면서 큰절을 올렸다.

“소인이 아직 육공자님께 감사 인사도 못 드렸습니다. 그때 사람들을 데리고 소인을 찾아주셨잖아요.”

감사 인사? 그때는 나를 아주 원수 보듯이 봤으면서, 오육 년이 지난 뒤에야 감사 인사가 생각난 거야?

정말로 사람이 됐나 보네. 능구렁이같이 능청을 떠는 모습이라니. 꽤 대단해졌어.

주복이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주 노야는 금가아가 준비한 선물을 받고는 주복이 가져온 선물 중 몇 개를 골라 정 대노야에게 보내라고 말했다.

“아버지께서 언제부터 정씨 가문과 저렇게 사이가 좋아지셨대?”

주복이 옆에 있던 형제에게 나지막한 소리로 물었다.

예전에는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할 정도로 싫어하는 사이 아니었나? 그런데 지금은 나 같은 손아랫사람이 집에 돌아왔는데도 서로 선물을 주고받고 하네?

“아버지께서는 애초에 두 집안 사이가 안 좋았던 적이 없다고 하시던데?”

형제가 작게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황후마마를 낳아 키운 집안이니, 둘 다 평범한 집안은 아니잖아.”

그 여인 덕분이로구나.

두 집안이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다며 난리를 친 계기도 그 여인이었고, 가족보다도 더 친한 사이가 된 계기도 그 여인이라니.

“정말 세상일은 알다가도 모르겠구나.”

주복이 말했다.

연회가 끝나고, 밤이 찾아왔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친 주복이 자신의 방 안에 앉아서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공자님, 공자님, 알아보고 왔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사환을 쳐다보았다.

“진 공자께서 얼마 전에 다리를 정말 다치긴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줄곧 지팡이를 짚고 다니신다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다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냥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걸 좋아하신대요.”

좋아한다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옛날부터 그러고 다니는 걸 좋아했던 건가? 그렇게 지팡이가 좋으면, 뭐하러 누이한테 다리를 고쳐 달라고 한 거야? 차라리 쭉 절름발이로 살지.

이 생각이 주복의 뇌리를 스치던 찰나, 주복의 표정이 굳어졌다.

차라리 쭉 절름발이로 살지, 예전 그때처럼.

주복이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손으로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진 대인과 진 부인께서는 일가를 이끌고 천중 지역으로 돌아가셨고, 진 공자께서는 외지에서 배움의 길을 찾고 싶다며 천중으로 같이 가시지 않았대요.”

사환이 이어서 말했다.

그래서 그때 그놈을 마주친 거로구나.

배움의 길이라. 썩 제대로 배운 거 같긴 하던데? 지팡이를 짚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예전과는 달라 보였어.

자유롭고, 무언가에 얽매여 있지 않은 분위기는 겉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뼛속부터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것이었다.

“공자님, 내일 입궐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시녀 한 명이 잰걸음으로 들어와 말했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고개를 들고 피식 웃었다.

“그래. 넌 가서 내일 필요한 물건을 챙기거라.”

주복이 사환에게 말했다. 사환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듣기로는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화가 나셨다고 하던데요.”

화가 나?

주복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놈이 감히 그 여인한테 화가 났다고?

황궁 안.

등불이 바람에 일렁이고, 발걸음 소리가 황후궁의 정적을 깨트렸다.

“황제 폐하 납시오.”

내시가 말끝을 길게 늘어뜨리며 고했다.

내시의 말과 함께 황후궁 안의 궁녀들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전각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초봄의 쌀쌀한 바람과 함께 궁녀들의 앞을 지나갔다.

“폐하.”

소심이 궁녀들을 데리고 방백종을 맞이했다. 아직 조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방백종을 보고, 소심은 궁녀들에게 그의 옷을 갈아입히라고 명령했다.

“물러가거라.”

방백종이 말하자, 소심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경 공공이 손을 뻗어서 전각의 문을 닫고, 회랑 아래에 당직을 서는 금위군과 궁녀들을 훑어보았다.

“저러신 지 얼마나 됐느냐?”

경 공공이 묻자, 소심이 웃고는 조용히 대답했다.

“하루요.”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라. 이번엔 꽤 오래 가시는군.”

경 공공이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기억을 더듬었다.

“지난번에 폐하께서 황후마마께 화나셨을 때가 청원 역참에 있을 때였지?”

말도 없이 사라져서는, 혼자서 비바람을 뚫고 고십사를 죽이러 갔을 때, 낡은 사찰에 남아서 멀뚱히 정방을 기다려야만 했던 방백종은 몹시 화가 났었다. 하지만 그때는 차 한 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두 사람이 화해했다.

“이번엔 달라.”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사실 매번 다 황후마마께서 잘못하시는 거지, 폐하께서는 아무 잘못도 없으시다. 지난번은 황후마마께서 말도 없이 홀로 위험을 무릅쓰러 가셨고, 이번에는 이 태의가 폐하께 보내온 서신을 마마께서 가로채셨으니.”

경 공공이 고개를 들고 소심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되는 것이냐? 어떻게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이냐.”

소심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헤헤 웃었다.

“마마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꼭 그 일을 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으셨겠지요.”

쯧쯧쯧. 경 공공이 혀를 차면서 소심을 흘겨보았다.

불쌍한 우리 폐하. 이곳 황후궁에서는 천자의 위엄을 전혀 떨치지 못하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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