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8화 (158/160)

-번외. 진(陳)씨 가문-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잠에서 깼다.

아니, 지금은 진소 부인이 아니라 진아리(陳阿李)라고 불린다. 죄가 있는 사람의 부인은 속칭으로 불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남편의 성이 진씨고, 친정의 성이 이(李)씨이니, 그녀는 진아리라고 불리는 것이다.

화로에 있던 숯은 진작 타서 재로 변해 있었다. 텅 빈 침상 옆자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진아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단랑.”

진아리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조정이 진소의 죄를 묻고자 삼족의 가산을 몰수하고 벌을 내릴 때, 진씨 가문 여인 중 몇 명은 집안의 변고를 견디지 못하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단랑은 줄곧 침착한 모습으로 자신을 잘 따랐지만, 그래도 그녀는 불안하기만 했다. 혹여라도 단랑이…….

진아리가 고개를 들고 벽을 올려다보았다. 거친 회백색 벽에 장궁이 걸려 있었다.

“어머니.”

문밖에서 맑고 발랄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니, 곧 문이 열리고 바깥의 차가운 공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낡은 솜옷을 입은 진단랑이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한 모습으로 말했다.

“눈이 와요!”

눈을 치우는 소리가 저택 안에서 단잠을 자고 있던 다른 사람들을 깨웠다. 잠에서 깬 사람들은 밖으로 나와서 진아리와 진단랑이 눈을 치우는 모습을 구경했다.

밤새 두껍게 쌓인 눈 때문에 모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셋째 형수님, 제가 하겠습니다.”

한 사내가 나서서 모녀를 도우려던 찰나, 옆에 서 있던 그의 아내가 그를 흘겨보면서 말렸다.

“어제 짊어지고 온 장작도 다 안 팼잖아요. 어서 가서 장작이나 패요.”

사내가 민망한 듯 나지막이 대꾸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잖소.”

여인이 눈을 부라리며 다 들으라는 듯이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평생 장작이나 패야 되는 처지가 된 게, 누가 지은 죄 때문인데요!”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더는 대꾸하지 못했다.

커다란 저택 안, 여러 방의 문이 열리면서 사람들이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다들 모녀가 눈을 치우는 모습을 흘끔 보기만 할 뿐, 두 사람을 도우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진아리 모녀는 사람들의 냉랭한 태도를 보지 못한 듯이,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쓸기만 했다. 문 앞, 마당 안, 담벼락 구석까지 빠짐없이 치웠다.

“단랑, 힘들면 잠시 쉬거라.”

진아리가 말했다.

진단랑은 고개를 저으면서 나무 아래로 눈을 힘껏 밀어 쌓았다. 눈더미를 잠시 바라보던 진단랑은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홱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단랑? 손으로 눈 만지지 마라. 그러다 동상 걸려.”

진아리가 소리쳤다.

“괜찮아요.”

진단랑이 대답했다. 그러고는 눈을 동그랗게 굴리기 시작했다.

“십구 누이.”

문밖에서 누군가가 진단랑을 불렀다.

진아리가 고개를 돌렸다. 젊은 사내 하나가 삽을 든 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십육낭이구나.”

진아리가 미소 띤 얼굴로 진십육낭을 맞이했다. 진십육낭이 진아리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 손에 든 삽을 고쳐 들었다.

“백모님, 누이와 함께 잠시 쉬시지요. 여기 있는 눈은 제가 마저 치우겠습니다.”

진아리는 굳이 사양하지 않고 그의 말대로 옆으로 가서 잠시 쉬었다.

“너희 집에 쌓인 눈은 다 치웠니? 어머니 병세는 좀 어떻고?”

진십육낭은 진아리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했다. 동시에 능숙하게 삽을 다루면서 마당 곳곳에 남은 눈을 깨끗하게 치웠다.

“십육 오라버니, 눈덩이 하나만 뭉쳐 줘요.”

진단랑이 옆에서 소리쳤다.

“괜히 네 오라비 귀찮게 하지 말아라.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진아리가 얼른 진단랑을 나무랐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진단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는 웃으면서 진단랑에게 눈사람을 만들어 주었다. 그러고는 진단랑과 함께 무 꼬리와 나뭇가지 등을 주워와 눈사람을 장식했다.

“진짜 예쁘다!”

진단랑이 손뼉을 치면서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자, 다 만들었으니, 그만 들어가 봐.”

추워서 새빨개진 진단랑의 두 손과 볼을 보자 마음이 아팠는지 진십육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진단랑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누군가가 마당 앞을 지나가면서 진단랑과 진십육낭이 만든 눈사람을 보고는 입술을 삐쭉였다.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런 신세가 됐는데, 어쩜 저렇게 즐거워할 수가 있담. 정말 뻔뻔하고 양심도 없지.”

문 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진십육낭이 미간을 팍 찌푸리면서 따지려고 몸을 돌렸다. 하지만 진단랑이 재빨리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라버니, 이거 동상 연고예요. 경성의 이춘당에서 만든 거고요.”

진단랑이 진십육낭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 주면서 말했다.

이춘당의 동상 연고는 서북 군영에만 납품하는 약이었다. 군인이 아닌 사람이 이춘당의 동상 연고를 사려면 엄청난 값을 내야 하기에, 경성에서도 쉬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진십육낭이 조금 놀란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알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누가 선물해 준 거예요.”

진단랑은 설명을 덧붙이면서도, 누가 선물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진십육낭은 무언가 눈치챈 듯 더는 묻지 않고 동상 연고를 다시 진단랑에게 돌려주었다.

“오라버니는 추위 안 타니까, 남겨 뒀다가 너 써.”

“그럼, 사촌 언니들은 평소 손 씻을 때 동상 걸리기 쉬우니까, 언니들한테 줘요.”

진단랑이 말했다.

진십육낭이 더는 거절하지 않고 웃으면서 진아리를 향해 예를 표했다.

“백모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진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십육 오라버니, 돌아가면 조부님께 말해 줘요. 밥 먹고 나서 활쏘기 연습하러 조부님께 갈 거라고요.”

진단랑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십육낭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챙겨 들고 자리를 떠났다.

날씨가 춥다 보니, 둔보(屯堡: 파병된 군대가 강제 이주된 민간인과 함께 자급자족하는 군사적 취락) 밖으로 나오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몇몇 사내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언짢은 기색으로 걸어 나왔다.

“이 빌어먹을 날씨에도 밭에 나가야 한다니, 이게 무슨 고생이람.”

사내들은 진십육낭을 보자, 그를 흘겨보면서 핀잔을 줬다.

“십육, 뭐하러 그 모녀를 챙겨 주고 있어?”

“그래. 그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이 지경이 된 건데.”

다른 사내가 맞장구치면서 발을 굴렀다.

진십육낭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친족이라는 게 뭔가요. 영광이 있다면 함께 누리고, 손해를 본다면 함께 봐야지요. 다들 함께 영광을 누릴 때는 불평 한마디 없더니, 손해를 보게 되니 어찌 이리 원망하십니까.”

사내들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한 사람이 지은 죄 때문에 가문 전체가 이렇게 되었는데, 불평 한마디도 못 하나? 그리고 진씨 가문의 영광을 그자 혼자서 일궈 낸 것도 아니잖아. 결국엔 그자 손으로 짓밟아 버렸지만.”

“맞아. 죄인의 처지가 되어 우리 가문 자제들의 앞길이 전부 막혔어. 그런데도 우리가 ‘아이고 감사합니다’ 하면서 넙죽 큰절을 올려야 하나?”

“다른 건 제쳐 두고, 십육낭, 너만 봐도 그렇잖아. 네 혼사도 신부 쪽에서 물렀어. 글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리는 네 두 손으로 이렇게 곡괭이 들고 밭이나 일구는 게 억울하지도 않아? 여태 공부한 게 다 무용지물이 됐는데?”

사내들이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한마디씩 얹었다.

진십육낭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꼭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건 아니니, 무용지물이라고 할 수는 없지요.”

진십육낭이 고개를 들고 단호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리고 백부님께서 잘못하신 게 있다면, 그건 백부님의 잘못일 뿐입니다. 무고한 백모님과 단랑에게 화풀이하고 그들을 원망하는 게 과연 응당한 일일까요?”

사내들이 성가시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아휴, 됐다. 우리가 너만큼 아량이 넓지 못해서 그런가 보다.”

진십육낭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멈춰 서서 중얼거렸다.

“더구나 백모님과 단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 수도 없었습니다.”

진소가 저지른 죄는 역모의 대죄였다. 삼족이 연루되는 중죄이므로, 집안 사내들은 영남 지역이나 서북 군영으로 보내져 병졸이 되거나 노역에 종사해야 했다.

고능준의 집안이 그러했다. 조정에서는 태후의 체면을 봐서 고능준의 삼족을 벌하지는 않고, 고능준의 일족만 벌하기로 했다. 하지만 가문의 실세였던 고능준의 일족을 벌한다는 건, 고씨 가문이 다시는 재기할 수 없도록 맥을 끊어 놓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에 반해 진씨 가문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둔보의 농토를 가꾸라는 명령을 받았을 뿐이었다. 게다가 가문 전체를 구주(衢州)로 보내 한곳에 모여 살게 하여, 죄를 지은 여느 집안들처럼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사실상 진씨 가문은 과거의 호화로운 대저택, 비옥한 농토, 저잣거리의 점포, 그리고 비단옷과 화려한 장신구를 잃었을 뿐이지, 둔보의 농토를 가꾸며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지낼 수 있었다. 최전방에 보내져 죽음만을 기다리는 경우와는 천지 차이였다.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건가?

사내들이 멈칫하며 진십육낭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 모녀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거라고?

진십육낭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자리를 떠났다.

진십육낭의 가족들이 사는 거처 앞은 눈이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마당 안에서는 진 노태야가 권법을 수련 중이었다.

“네 아비는 대나무 구하러 산에 갔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십육낭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삽을 내려놓았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밥부터 먹고 가거라.”

진 사부인이 밖으로 나오면서 말했다. 진 사부인의 딸들도 진십육낭의 밥을 차려 주려고 밖으로 나왔다.

“어머니, 이건 단랑이 준 동상 연고예요.”

진십육낭이 진 사부인에게 연고를 건네며 말했다. 그는 자리에 앉는 대신 접시에 올려진 전병 하나를 집어 들고는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랑 교대하고 올게요.”

진 사부인이 몇 걸음 쫓아가면서 그를 부르려고 했지만, 진십육낭은 벌써 문밖을 나간 후였다.

“어디서 난 연고래?”

진 사부인이 손 위에 놓인 동상 연고를 쳐다보면서 중얼거렸다.

“이춘당 거예요. 어머니, 이제 손에 동상 걸릴 걱정은 없겠어요.”

진 사부인에게 가까이 다가온 딸 하나가 기쁜 기색으로 말했다.

과거 손가락에 물 한 방울 묻힌 적 없는 귀한 규수로 자라던 딸들이 지금은 부엌에서 칼질을 하고, 탕을 끓이고, 뜯어진 옷을 꿰매느라 십여 년간 깨끗하게 관리해 오던 손이 불과 달포 만에 몹시도 거칠어졌다. 날이 추워지자 손은 더욱 빨갛게 부르트거나 갈라지곤 했다.

이춘당 세 글자에 흠칫 놀란 진 사부인이 동상 연고를 딸들에게 건넨 뒤, 진 노태야에게 다가갔다.

“아버님, 이게 무슨 뜻일까요?”

진 사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이춘당이 강주 정씨 가문의 가업이라고들 하지만, 일찍이 황후마마의 소유였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쉽게 구할 수 없는 동상 연고를 날이 추워지는 이때 때맞춰 보냈다는 건, 필시 황후마마의 뜻일 거라고 진 사부인은 생각했다.

“좋은 뜻이지. 그분은 단랑 모녀를 늘 그렇게 대했지 않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럼 셋째 형님댁은 이제 안심해도 되겠네요.”

진 사부인이 말했다. 수련을 마친 진 노태야가 허리를 곧추세우자, 진 사부인이 손수건을 건넸다.

“셋째가 죽을 마음을 먹었던 것도, 어쩌면 자신의 뒤를 봐줄 사람이 있다는 생각에서였겠지.”

진 노태야가 말하자, 진 사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탄식했다.

“조부님!”

문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리자, 진단랑이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헤헤 웃고 있었다.

“단랑, 어서 오렴. 오늘 네 언니가 양고기 탕을 끓였어. 한 그릇 먹고 몸 좀 녹이거라.”

진 사부인이 활짝 웃으면서 진단랑을 향해 손짓했다.

진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진소의 처자식을 싫어하고 냉대했지만, 진 사부인 내외는 진소가 원망스럽긴 해도 그의 처자식에게는 따뜻하게 대했다.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숙모님, 말씀은 감사하지만 이미 밥을 먹고 왔어요. 저는 조부님을 뵈러 온 거예요.”

진단랑이 손에 쥔 장궁을 흔들면서 말했다.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겉옷을 챙겨 문가로 다가갔다.

“단랑, 참 기특하구나. 하루도 빠짐없이 활쏘기 연습을 하고 말이야.”

진 노태야가 칭찬하자, 진단랑이 우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당연하죠. 저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요.”

“옆 마을에 노장이 한 명 살고 있대서, 사람을 시켜 네게 활쏘기를 가르쳐 주십사 부탁해 두었다.”

“우와! 정말요? 감사합니다, 조부님.”

진 노태야와 진단랑의 모습이 서서히 멀어지자,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 사부인의 딸이 입을 열었다.

“진단랑은 하나도 변한 게 없네요.”

진 사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딸들이 일제히 문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그러게 말이다. 나도 단랑이 저렇게 잘 지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곧 태자비가 될 아이였는데, 그리 엄청난 변고가 생기다니.

갑자기 닥친 큰일에 집안의 다른 몇몇 여인들은 목을 매달고 자결하기도 했어. 그런데 정작 이 일의 가장 직접적인 당사자인 진단랑은 모든 걸 받아들인 듯 담담한 모습이야. 끼니도 거르지 않고, 예전처럼 쾌활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말이야.

“속상한 것을 꼭 남에게 보여줘야 속상한 게 아니잖아.”

진 사부인이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도 억지로 웃는 건 티가 나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단랑의 모습을 보면, 정말로 괜찮아 보여요.”

딸들이 대꾸했다.

“정말로 괜찮을 리가 있나. 일생이 망가져 버렸는데.”

진 사부인이 슬픈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길이 끊긴 건, 비단 단랑뿐만이 아니야. 진씨 가문의 자제들이라면 모두, 심지어 내 아들딸들의 앞길도 영영 막혀 버렸지. 황후마마께서 좋은 뜻으로 우리를 챙겨 주신다고 해도, 인생이라는 게 꼭 배불리 먹고 자는 것만이 다는 아니잖아.

어디 자식들뿐인가. 후손은 또 어떻고.

진씨 가문의 후손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진 사부인은 더욱 슬퍼졌다.

아들딸의 혼삿길이 다 막혔으니, 이제 진씨 가문에 후손은 없겠지.

슬픔에 잠긴 진 사부인이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던 찰나, 문밖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했다.

“여기가 진 사노야 댁입니까?”

깜짝 놀란 진 사부인이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서 있던 두 사내와 두 여인이 진 사부인을 향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저희는 태주(泰州) 유(劉)씨 가문에서 온 사람입니다.”

태주 유씨?

진 사부인이 놀란 모습으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태주 유씨가 어느 집안이지? 왜 우리를 찾아온 거야?

“다름이 아니라, 댁의 진십육 공자에게 혼담을 넣으러 왔습니다.”

사내가 웃으면서 말했다.

혼담이라니!

진 사부인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다.

길 가는 행인조차 우리 진씨 가문을 피해 가려고들 하는데, 먼저 우리 집에 찾아와 혼담을 넣는다고?

게다가 옷차림과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결코 보통 집안의 사람들 같진 않은데.

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태주 유씨?”

산에서 불려온 진 사노야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태주 유씨라면 무장 집안이오. 지금 태주로의 수비를 담당하는 유년춘(劉年春)이 바로 그 가문의 사람이지.”

진 사노야의 말에 진 사부인이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그럼 꽤 괜찮은 가문이네요.”

태주 유씨 가문은 나름대로 좋은 가문이었다. 진소가 생전에 있을 때였다면 진소의 자녀에게 혼담을 넣을 정도는 아니지만, 진 사노야의 자녀들에게는 혼담을 넣을 수 있는 위치였다.

하지만 지금 처지에서 태주 유씨 가문은 진 사노야 가족이 꿈에도 넘볼 수 없는 가문이었다.

“유씨 가문의 유규라는 사람의 딸이래요. 유규는 이번에 서북로의 도감(都監)이 된 사람이고요.”

진 사부인이 손에 쥔 명첩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진 사노야가 깜짝 놀라 물었다.

“혹시, 그 사람 딸이 장님이라고 하오?”

진 사부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벙어리라거나, 바보? 아니면, 품행에 무슨 문제가 있다든지?”

진 사노야가 연달아 묻자, 진 사부인이 실소를 터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다 아니에요. 올해 열일곱이고, 문무에 재능이 출중하대요. 그 사람들이 그 낭자의 초상화도 가져왔어요.”

진 사부인이 옆에 놓인 두루마리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초상화라고 다 믿을 건 못 되지.”

진 사노야가 말했다. 진 사부인이 그를 쳐다보면서 무언가 생각난 듯 대꾸했다.

“보아하니, 경성 범(范) 대가의 화풍이 느껴지던데요.”

진 사노야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범 대가!

범 대가라면, 미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로 유명한 화공인데.

정말 범 대가라면 아무나 모실 수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누구와 짜고 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 진십육과 혼담을 넣으려고 범 대가까지 초청해 초상화를 그렸다고?

물론 예전이라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지금은…….

“유씨 가문에서 온 사람들 말로는, 유 노야가 경성에서 우연히 십육낭과 마주쳤대요. 그때 십육낭이 마음에 들어서 혼담을 넣고 싶었는데, 그때는 유 노야가 신분이 낮았던지라 감히 우리 가문에 혼담을 넣을 수가 없었다더라고요. 그렇게 계속 우리 십육낭한테 미련이 있던 차에, 십육낭이 퇴혼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서둘러 혼담을 넣으러 온 거라던데요?”

정, 정말 그렇게 된 거라고? 그런데 어째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느낌이지?

진 사노야가 경악했다.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오.”

진 사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친께 여쭤보고 오리다.”

눈이 내린 겨울의 마을에는 지나다니는 행인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화살이 날아가자 나뭇가지 위에서 쉬고 있던 새들이 지저귀며 어디론가 날아갔다.

진단랑이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진 노태야를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는 진 사노야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진단랑이 장난스럽게 혀를 날름거리고는 다시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조준하며 화살을 쏘았다.

진 노태야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사낭, 정말 이상한 일이긴 하구나.”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수염을 쓰다듬었다. 진 사노야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당장 가서 혼담을 거절하고 오겠습니다. 우리 대답을 들으려고 아랫마을에 묵으면서 기다리고 있다더라고요.”

“그래, 그럼 당장 가서 만나 봐야지. 하지만 이 혼담을 거절할 게 아니라, 수락해야 한다.”

진 노태야의 말에 진 사노야는 크게 놀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낭.”

진 노태야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 사노야를 불렀다. 진 노태야는 진지한 얼굴로 표정을 가다듬었지만, 눈가에 스치는 감격을 숨기지는 못했다.

“앞으로 우리 진씨 가문의 앞날은 십육낭에게 달렸구나.”

이 혼사로 십육낭의 앞길이 트인다는 뜻인가?

하지만 역모의 대죄를 저지른 자의 후손이기에, 관리 가문과 사돈을 맺는다고 해도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는 없을 텐데?

“사낭, 유규가 누구인지 아느냐?”

진 노태야가 말했다.

“태주 유…….”

진 노태야가 진 사노야의 말을 끊었다.

“당초 네 형이 생전에 있었을 때 말이다. 네 형이 고능준과 서북 군정을 놓고 다투게 된 계기인 서북 탈영병 사건을 기억하느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진 사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건 때문에 여러 사람이 죽었던 것이 생각난 그는 곧 표정이 어두워졌다.

“예, 그 탈영병들이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였지요.”

진 사노야가 말했다.

“유규라는 자는 바로 황후마마의 의형제를 붙잡아 이 사건을 조정에 올렸던 사람이야.”

진 노태야가 말했다.

그 사람이, 유규라고?

진 사노야는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크게 놀랐다.

“그리고 그 유규라는 자는 바로, 무원산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목숨을 걸고 무원산 형제들의 억울함을 풀어 준 증인이었지.”

진 노태야가 이어서 말했다.

그럴 수가!

진 사노야가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럼 유규라는 사람이 황, 황후마마와…….”

진 사노야는 말을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지만, 머릿속으로는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되었다.

황후마마께서 의형제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했는지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고 있어. 그 의형제들과 관계가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히…….

설마 이 일도…….

더는 말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진 노태야를 보자, 확신이 든 진 사노야는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된 거로구나.

유씨 가문과 혼인을 맺는다는 것은, 단순히 처가의 도움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황후마마의 든든한 지지까지 받는다는 뜻이지. 십육낭에게는 재기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의 아들딸에게는 분명히 새로운 기회가 있을 거야.

황후마마께서 우리 진씨 가문에게 재기의 기회를 주신 거로구나!

역모죄를 저지른 셋째 형님네는 다시 재기하기 힘들겠지만, 진씨 가문에는 아직 우리 집안이 있다. 어쩌면 우리가 진씨 가문의 영광을 되찾을 수도 있겠어.

죄를 저지른 집안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배부르게 먹고 따뜻하게 잘 수 있게 해 주신 황후마마의 배려에 감사했는데, 진정한 배려는 바로 여기에 있었어!

진 사노야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왜, 왜 이렇게까지…….”

진 사노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황후는 진씨 가문의 은인이기도 하고, 진 노태야의 목숨을 구한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다. 조정에서도 항상 고의든 고의가 아니든, 진씨 가문을 도와 고능준과 대적했다. 그런데 진씨 가문은 그 은혜에 보답하기는커녕, 사사건건 훼방을 놓았다.

탈영병 때도 그렇고, 양자 입적에 동의하지 않았을 때도 그렇고. 진씨 가문은 언제나 황후와 같은 편에 서지 않았다. 심지어 황후와 대립각을 세우는 입장이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나중에도 너의 셋째 형수 일가를 잘 챙기면 되느니라.”

진 노태야가 더는 말하지 않고 웃음 띤 얼굴로 단랑을 불렀다.

단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돌렸다.

“할아버지.”

단랑이 장궁을 높이 들면서 외쳤다. 차디찬 바람에 피부가 튼 진단랑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저도 이제 과녁 중앙을 맞출 수 있어요!”

진 사노야가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진단랑을 쳐다보다가 이내 감개무량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십육낭의 혼사는 금세 결정되었다. 중매인을 보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묻고, 길일을 택해 신부 집안에 알린 다음 육례(六禮) 절차를 순조롭고 마쳤다. 두 번째 큰 눈이 내릴 무렵 신부가 가마를 타고 진씨 가문에 들어왔다.

친영 행렬이 둔보에 나타나자, 둔보 인근의 마을이 시끌벅적해졌다.

“어서 구경하러 가세! 진씨 가문에 신부가 들어왔다네.”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진씨 가문의 신부라면, 볼 게 뭐 있겠어. 어디서 몇 푼 쥐여 주고 사 온 가난한 신부겠지.”

“무슨 소리요. 돈이 엄청 많은 신부가 시집왔어. 혼수 행렬이 얼마나 긴지, 이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니까!”

둔보를 한 바퀴 돌고도 남는다고?

그럼 혼수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거야?

“십만 관은 족히 넘는다던데?”

다른 사람이 외쳤다.

십만 관!

에구머니나! 미친 거 아니야?

세상에. 혼수를 십만 관이나 해 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지부 대인 댁에도 혼담을 넣을 수 있을 텐데, 누가 제 딸을 죄지은 관리 집안으로 시집보내?

사람들이 우르르 둔보 쪽으로 몰려갔다.

북과 징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붉은색 깃발이 바람에 나부꼈다. 혼례를 알리는 폭죽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하늘에는 오색찬란한 불꽃놀이가 한창이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거 없이 입을 떡 벌린 채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고개를 치켜들고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어머니, 저거 봐요. 정 언니, 아니, 경성에서 봤던 불꽃놀이랑 똑같은 거예요!”

진 사노야의 집 앞, 진단랑이 신이 나서 외쳤다.

그때 누군가가 진단랑과 진아리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면서 지나갔다.

“어이, 좀 비켜 봐요. 이따 새 신부가 들어오면 셋째 형님은 어디 가서 좀 숨어 있고요.”

두 사람을 밀친 아낙이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진아리는 별다른 대꾸 없이 어색하게 웃고는 진단랑의 손을 잡고 자리를 피했다.

신부의 가마가 마당 안에 들어오고, 모두가 진 사노야의 거처로 들어가 마당 가득 놓인 혼수를 구경했다.

“단랑, 우리는 그만 돌아가자.”

진아리가 단랑의 손을 잡고 말하자, 진단랑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던 찰나, 누군가가 진아리를 불렀다.

“셋째 형님, 어서 이리 와 봐요. 어서요.”

자신을 급하게 부르는 진 사부인을 본 진아리는 의아한 눈빛으로 엉거주춤 서 있었다. 진 사부인은 다짜고짜 진아리의 소매를 붙잡고 사람들을 비집으며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이 놀란 기색으로 진아리 모녀를 쳐다보았다.

진아리를 끌고 들어온 진 사부인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진아리 모녀를 혼수 앞으로 데리고 갔다.

“형님, 이것 좀 보세요. 이것 좀 보시라고요.”

진 사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혼수?

진아리가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혼수를 쳐다보았다. 붉은 상자에 오색 비단 끈과 비단으로 만든 공이 묶여 있었다. 진아리가 믿기지 않는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틀어막았다.

이, 이것들은…….

단랑을 위해 준비해 뒀던 혼수를 내일 다 정씨 저택으로 보내려고요.

내가 꼭 정 낭자의 체면이 제대로 설 수 있게 시집보낼 거예요.

붉은 상자들 위에는 진씨 가문의 표식이 뜯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진아리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어 시야가 흐릿해졌다.

뭐하러 이렇게 마음을 써 가면서 돌려주는 거예요!

뭐하러!

바보 같은 정 낭자!

“셋째 형님, 형님이 우리 진씨 가문을 살려 주신 거예요.”

진아리의 귓가에 울먹이는 진 사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갚고, 단 한 번의 배려도 마른 나무에 꽃이 피도록 되돌려주다니.

진아리는 경성을 떠난 뒤로 꾹꾹 눌러 담았던 설움을 토해내듯 입을 틀어막고 눈물을 쏟았다.

마을에서 들려오는 시끌벅적한 소리에 산 아래에 있는 도관에서 경서를 읊고 있던 사람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이렇게 시끄러워?”

어린 도동이 문가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고 대답했다.

“십팔랑 아씨, 오늘은 아씨 집에 혼례가 있는 날이잖아요. 모르셨어요?”

도동의 대답을 듣자, 눈빛에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던 여도사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집? 난 집 같은 거 없어.”

도동이 입술을 삐쭉였다.

진씨 가문은 삼족이 벌을 받게 되었기 때문에, 진씨 가문과 연을 맺은 집안의 사람들까지 그 화를 당하게 됐다. 그래서 진씨 가문의 여식인 진십팔랑과 혼례를 올렸던 그녀의 남편은 화를 피하고자 소식을 들은 즉시 진십팔랑과 이혼했다. 하지만 진씨 가문에서도 진십팔랑을 다시 받아주지는 않았다. 진씨 가문은 그녀의 혼수를 모두 도관에 보내 도관에서 여생을 보내도록 했다.

얼마나 불길한 사람이길래 가족에게도 버림을 받은 걸까?

도동이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진십팔랑이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다.

“집이 어딨어? 나라도 없고, 하느님도 없는데, 누가 집이 있어! 이 세상 누구도 집 같은 건 없어!”

진십팔랑이 점점 더 흥분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하느님도 없다고! 하느님은 눈이 없어!”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도동이 밖으로 한걸음 물러나 잽싸게 문을 걸어 잠갔다. 도동이 문을 잠그자마자, 안에서 큰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누가 들어도 방 안의 사람은 광기에 휩싸인 사람 같았다.

“천도가 이리도 불공평할 수가 있습니까! 하느님, 참으로 불공평하십니다!”

“전 이렇게 포기 못 해요! 도저히 마음이 안 내킨다고요!”

세상에 뜻대로 안 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원하는 대로 일이 술술 풀린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지.

도동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소매 안에 손을 넣고 방 안의 정신 나간 사람을 더는 신경 쓰지 않았다. 도동은 고개를 들고 저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불꽃놀이를 구경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어제의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진 사노야의 대청 안에 친척들이 모두 모였다.

진소가 죽은 뒤, 친척들은 진 노태야 일가를 피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오늘처럼 다 같이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좋은 혼인을 맺을 줄은 몰랐네.”

“외가가 서북로의 도감이라잖아. 대대로 무장만 하는 집안이라서 앞길이 창창해.”

“그 일이 생긴 뒤로는 우리 집안을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귀한 집에서 혼담을 넣을 줄이야. 유씨 가문은 앞길이 막히는 게 두렵지도 않나?”

“듣기로는 유씨 가문의 노야가 십육낭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서 계속 벼르고 있었대. 이 인연으로 삼생의 운을 다 끌어다 쓴 거 아니야? 이제 진씨 가문 사람들도 어깨 펴고 살 수 있겠네.”

“참나.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고 하는 소리야? 연극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내가 한 말이 아니라, 유씨 가문 노야가 친필로 쓴 서신에 쓰인 내용이라니까?”

친척들은 대청 안에서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며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신혼부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신부 쪽에서 진씨 가문을 무시해 얼굴을 보이지 않는 건 아닌지 추측하던 그때, 진 사부인이 두 사람을 데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진 사부인이 데리고 온 사람들은 다름 아닌 진아리와 진단랑이었다.

“셋째 형님, 여기에 앉으세요.”

진 사부인은 사람들의 언짢은 눈초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길을 터주었다.

진아리가 진 사부인의 소매를 붙잡았다.

“이러지 마요. 그분의 선의도 알고 동서의 좋은 뜻도 알지만, 난 죄지은 몸이에요. 천자께서 벌을 내렸고 나라의 국법이 지엄한데, 이리 잘해 줬다가는 또 무슨 유언비어가 돌지 몰라요. 그건 그분께나 우리 진씨 가문에게나 좋을 게 없어요.”

진 사부인이 진아리의 손을 다독였다.

“형님, 형님이 이 자리에 안 나온다고 해서, 남들이 모를 거 같아요? 이 혼사가 왜 이렇게 떠들썩하고 성대하게 치러졌는지는 다들 거울 보듯 훤히 알고 있을 거예요.”

진 사부인은 진아리에게 바짝 다가가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형님이 그분의 성격을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분이 언제 유언비어 같은 걸 무서워한 적 있나요?”

하긴, 그 여인의 행실을 보면 꼭 어린아이 같을 때가 있단 말이지. 뭐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남의 시선이라고는 일절 신경 쓰지 않아.

그 여인이 이렇게까지 해 줬다면,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받아들이는 게 그 여인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보답이겠지.

진아리가 살짝 미소짓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십육낭더러 들어오라고 해요.”

진 사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마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여태 저 모녀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십육낭이야 항상 두 모녀에게 잘해줬다지만, 신부는?

저 두 사람이 무려 진소의 처자식이라는 건 알고 있을까?

사람들의 시선이 천천히 대청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신랑 신부에게 향했다.

신부의 나이는 올해 열여덟이고, 큰 키에 호리호리한 체형이었다. 붉은 혼례복을 입고 있었지만, 걸음걸이에서 무장 가문 특유의 호방함이 느껴졌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신부는 위축되거나 어색해하는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긴, 위축될 게 뭐 있겠어? 십만 관의 혼수가 든든한 뒷배처럼 버티고 있는데. 아마 이 집에서 안하무인으로 군다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걸?

항렬에 따라 차례로 문안 인사를 올리던 신부는 금세 진아리의 앞까지 왔다.

실내가 다시 조용해지고, 사람들은 신부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지는 않을지 궁금해했다.

“백모님을 뵙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예상과 달리, 신부는 웃으면서 진아리를 향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진아리가 서둘러 신부를 부축하여 일으키고, 진단랑이 건네는 버선을 받아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이 마땅치 않네. 이건 내가 직접 만든 건데,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진아리가 따뜻한 눈빛으로 신부를 바라보며 웃었다. 유씨 가문의 낭자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버선을 받으며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백모님의 솜씨가 대단하세요.”

신부는 버선을 진지한 얼굴로 꼼꼼히 살펴보고는 진심 가득한 미소와 칭찬으로 화답했다. 그러고는 진아리의 옆에 선 딸들을 바라보았다.

“형님들을 뵙겠습니다.”

신부가 예를 표하자, 진아리의 딸들이 서둘러 답례했다.

“이쪽은 동생이구나.”

유씨 낭자가 진단랑을 바라보며 손을 내밀었다. 진단랑이 신부의 손을 잡고 가볍게 답례하며 ‘새언니’라고 불렀다.

유씨 낭자가 진단랑에게 첫 만남 선물을 건넸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그려져 있는 자그마한 등롱이었다. 다른 이들은 십만 관의 혼수를 들고 시집온 사람답지 않게 소소한 선물을 줬다고 생각했지만, 진단랑은 눈빛을 반짝이며 기뻐했다.

“새언니, 내가 제일 좋아하는 게 바로 등롱이에요!”

유씨 낭자는 눈웃음을 지으면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옆에서 그 모습을 본 진아리는 속으로 무언가 집히는 게 있는 듯했다.

문안 인사를 마친 뒤 연회가 시작되었다.

연회 음식은 풍성했다. 맛있는 요리가 끝도 없이 펼쳐지자, 배에 기름칠을 못 한 지 몇 달이 넘은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면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참으로 잘 됐구나. 십만 관 혼수 덕에 앞으로 살림이 많이 나아지겠어.”

“에이, 그 혼수는 우리 집 것도 아니잖아.”

“넷째 집안에 희망이 생겼으니까, 우리도 점점 나아지겠지.”

“유씨 가문 장인어른이 십육낭에게 서북 일자리를 알아봐 줬대.”

“무관직인가?”

“무관이면 뭐 어때서. 나중에 문관으로 바꾸면 되지.”

안팎으로 시끌벅적하게 떠드는 소리에 집안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졌다.

한편 진단랑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유 낭자의 신방을 구경하고 있었다.

“여기는 지낼 만해요?”

진단랑이 물었다.

유씨 가문의 딸이라면, 이렇게 높이가 낮고 황토로 지어진 누추한 집은 처음이겠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서북에서 지내곤 했어. 아주 외진 둔보에서도 살아 봤고, 땅을 파서 나무판자만 대충 씌워 만든 집에서도 지내 봤지. 넌 그런 곳에서 살아 본 적 있니?”

유 낭자가 웃으면서 물었다.

그런 집이 있다고? 난생처음 듣는 집인데?

진단랑이 고개를 저었다.

“동생은 여기서 지낼 만해?”

유 낭자가 진단랑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유 낭자는 자신이야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서북 곳곳을 돌며 힘든 생활을 했다지만, 자신 앞에 서 있는 앳된 어린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줄곧 화려한 비단옷과 귀한 음식들만 먹고 자라다가 갑자기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귀한 집 아가씨라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바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하늘과 땅이 뒤엎어지듯 황량한 벌판으로 내몰려 가난한 사람이 되는 거겠지. 몸도 힘들겠지만, 마음이 더 힘들 거야.

진단랑이 웃었다. 진단랑은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지낼 만해요. 어떻게 되든 다 적응할 수 있어요. 나는 여전히 나니까요.”

무슨 뜻이지?

유 낭자가 의아한 눈빛으로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정 언니에게 이렇게만 전해 주시면 돼요.”

진단랑이 눈웃음을 지었다. 유 낭자는 흠칫 놀랐다가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그, 그런 게 아니야. 내,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진단랑은 말없이 유 낭자를 바라보면서 웃었다.

“새언니는 내가 말한 정 언니가 누구인지 아는 모양이네요?”

유 낭자가 정말 몰랐다면 정 언니가 누구인지 반문해야 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부인할 게 아니라.

유 낭자가 잠시 할 말을 잃고 진단랑을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역시 학자 집안의 사람은 다르다니까. 나보다 어리긴 해도, 눈치가 나보다 백배는 더 빠르네. 난 못 당하겠으니까, 이 얘긴 그만할래.”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 화제를 넘기고 다시는 언급하지 않았다. 유 낭자가 더는 말하지 않겠다고 하자, 진단랑도 더는 묻지 않았다.

“새언니도 활쏘기를 할 줄 알겠네요?”

진단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물었다. 유 낭자가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아버지는 화살을 연달아 열 발을 쏘아 내실 수 있는 분이셔. 나도 그런 아버지에 뒤지지 않지.”

진단랑이 기뻐하면서 손뼉을 쳤다.

“그거 참 잘됐네요! 앞으로 새언니가 나한테 활쏘기를 가르쳐 준다면, 굳이 할아버지를 귀찮게 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유 낭자가 웃으면서 진단랑을 바라보았다. 유 낭자의 귓가에 궁녀 소심의 말이 어렴풋이 들려오는 듯했다.

“낭자가 그 사람들을 잘 돌봐 주길 바라요. 단랑이 기뻐할 수 있게.”

유 낭자가 진씨 가문에 시집을 간다는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놀라워하는 한편 유 낭자를 측은하게 여겼다. 역모의 대죄를 지은 집안에 시집가는 것도 모자라 머나먼 구주까지 가는 것이니, 얼핏 보면 유 낭자가 죄를 짓고 유배 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놈들이 알긴 뭘 안다고! 황후마마께서 언제 사람을 잘못 보신 적이 있느냐. 진씨 가문이 원래부터 보통 집안이 아니긴 하지만, 설령 보통 집안이라고 해도 마마의 손을 거치면 돌멩이도 금덩이가 되는 법이야. 다른 사람은 차치하고, 사근 숙부를 봐라. 원래는 별 볼 일 없는 탈영병이었는데, 지금은 얼마나 잘 지내고 있느냐? 그저 말을 키우는 사람일 뿐인데, 네 아비는 얼굴 한번 보려면 큰절까지 올려야 해.”

유규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유규, 말 좀 가려서 하게. 탈영병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서사근이 유규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는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유 낭자에게 말했다.

“얘야, 너무 섭섭히 여기지는 마라. 네 아버지가 마땅한 신랑감이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너를 그 집안에 시집 보내려는 게 아니다. 황후마마께서 절대로 사람을 잘못 보실 리가 없어. 네 부군이 될 사람과 함께 지내다 보면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야.”

기억을 떠올리던 유 낭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어젯밤에 처음으로 자신의 낭군을 보게 된 유 낭자는, 자기보다 몇 살 많은 낭군이 준수한 외모에 예의 바르고 부드러운 사내라고 생각했다. 유 낭자는 십육낭이 교양 있고 사리에 밝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

하긴, 진씨 가문이 역모의 대죄를 짓긴 했지만, 그런 집안에서 자라난 자식들이라면 결코 평범하지는 않겠지. 지금 같은 처지가 아니었다면, 내가 어디 가서 이렇게 빼어난 신랑감을 구할 수 있었겠어.

그리고 지금 같은 상황에 내가 진씨 가문으로 시집왔으니, 이 집 사람들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 줄지는 눈 감고도 상상할 수 있지. 혼수를 바리바리 챙겨오기도 했고, 살림살이 걱정할 필요도 없으니, 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혼사가 아니면 뭐겠어.

“좋아.”

유 낭자가 진단랑의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십육낭이 혼사를 치른 뒤, 진씨 가문은 마치 액막이라도 한 듯 운이 트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진씨 가문에 찾아온 변화는 바로 혼담을 넣으러 오는 사람들이었다.

혼기가 찬 진씨 가문 낭자들에게 혼담을 넣으러 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나더니, 심지어는 진아리의 자녀들에게도 혼담이 들어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혼담을 넣으러 온 사람들이 더는 예전의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관리 집안이거나 거상, 부호의 집안이라는 사실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끊임없이 혼담을 넣으러 오니, 진씨 가문 사람들은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이게 다 십육낭의 복 덕분이야.”

사람들은 진 사노야 집안의 사람들을 더욱 살뜰하게 챙겼다.

사실 일상생활에 큰 변화가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혼담을 넣은 곳 중에 괜찮은 집안이 몇 군데 있더라고요.”

진아리와 진 사부인이 같이 앉아서 자녀의 혼사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너무 먼 곳으로 시집가지 않았으면 해. 대낭과 이낭이 집에 없기도 하고, 형제들도 없이 이런 으리으리한 집안에 시집 보내는 건 너무 마음이 안 놓여.”

진 사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가까운 데로 하죠. 십육낭은 사돈댁에서 챙겨 주고 있으니까, 십육낭을 서북으로 보내죠. 대낭과 이낭은 병영 일을 관두고 이리 돌아와 십육낭 대신 농사를 지으라고 하고요.”

진 사부인이 진아리에게 말했듯, 사람들은 진십육낭의 혼사에 관해 말을 아꼈지만, 이 일의 내막을 거울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처지에 아들들의 앞길을 챙기기보다는, 집안 자녀들이 혼사를 치를 수 있다는 희망에 기뻐했다.

진아리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곧바로 한숨을 쉬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나마 마음이 놓인다만, 진단랑은…….

역모의 대죄를 지은 대신의 딸인 데다가, 태자비가 될 뻔했던 신분인지라 진단랑은 과부나 다름없게 됐다. 아니, 과부보다도 못한 신세였다. 과부라면 적어도 개가는 뜻대로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아리가 방 안에 앉아서 마당을 내다보았다. 곧 열세 살이 되는 진단랑이 마침 마당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단랑.”

진아리가 저도 모르게 단랑을 불렀다. 고개를 돌린 진단랑은 진아리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걸 보고는 웃음을 지었다.

“어머니, 시킬 일이라도 있으세요? 방은 다 청소해 놨어요. 책도 한 권 읽었고, 글씨 연습도 좀 하다가 지금은 활쏘기 연습하러 나가려고요”

단랑이 한 손에는 장궁을, 다른 한 손에는 화살통을 들고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진아리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잠시 진단랑을 바라보던 진아리가 입을 열었다.

“아니야. 오늘도 네 새언니와 같이 가는 거니?”

“새언니는 십육 오라버니랑 같이 출타했어요. 새언니가 얼추 다 가르쳐 주어서, 이젠 저 혼자 연습할 일만 남았어요.”

진단랑이 대답하자, 진아리가 몸을 일으켰다.

“네 숙모네 가려던 참인데, 잠깐 같이 걸을까?”

두 모녀가 나란히 대문을 나섰다.

연말이 다가오는지라 주위에서는 이따금 폭죽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지나다니는 이들의 얼굴에는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우중충하기만 했던 둔보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잘 지낼 수 있어요. 어머니, 그때 우리가 목숨을 끊지 않아서 참 다행이에요.”

단랑이 불쑥 입을 열었다. 진아리는 마음이 먹먹해져 진단랑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단랑, 속상한데 굳이 꾹 참고 있을 것 없어.”

진아리가 울먹였다.

이 아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아직 한 번도 울지 않았어. 차라리 울면 모를까, 울지도 않으니 마음이 더 쓰이네.

“어머니, 속상하긴 해도, 참아야 하는 그런 속상함은 아니에요.”

참아야 하는 그런 속상함이 아니라고?

진아리가 단랑을 바라보았다. 진소가 죽은 뒤로, 모녀가 이 일을 입에 올린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아버지께서 잘못하셨고, 그 잘못을 인정하셨어요. 저는 아버지의 딸이니까 아버지를 대신해 죗값을 치르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지금 이 속상함은 내가 원해서 속상한 거니까, 참아야 하는 속상함이 아니에요.”

진단랑이 앳된 목소리로 진지하게 말했다. 진아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미소를 지었다.

“착한 우리 딸.”

진단랑이 또 웃으면서 말했다.

“어머니가 무슨 걱정을 하시는지 다 알아요.”

진단랑이 고개를 돌리고 티끌 없이 맑은 눈빛으로 진아리를 쳐다보았다.

“저는 괜찮아요, 어머니. 이건 아버지께서 저지르신 잘못이고, 우리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죗값을 치르고 있는 거잖아요. 저도, 어머니도 잘못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남들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고, 남을 보기에 창피하다고 느낄 필요도 없어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우리를 어떻게 보든, 그건 그들의 일이이에요. 우리 스스로 양심에 떳떳하게 살면 그만이에요.”

진아리가 놀란 기색으로 생각했다.

그래도 된다고?

하긴, 맞는 말이긴 하지. 그 여인도 그랬었잖아?

“활쏘기 연습을 하더니 꼭 그분을 닮아가네.”

진아리가 웃으면서 말했다. 진아리는 그분이 누구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진단랑은 다 안다는 듯 잠자코 웃었다.

“단랑, 그분이 너를 이렇게나 잘 챙겨 주시는데, 너,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진아리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진소가 저지른 죄는 황실에서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중죄였다. 하지만 황후는 두 사람을 내치긴커녕, 예전보다 더욱 잘 챙겨 주었다. 진아리는 이토록 부친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진단랑이 이 일을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했다.

아버지가 무고하다고 여기지는 않을까? 그 여인이 위선적으로 호의를 베풀고, 불쌍히 여겨 동정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아버지의 죽음이 억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까?

“나를 좋아하니까 그런 거죠.”

진단랑이 별일 아니라는 듯이 편히 대답하자 진아리가 멈칫했다.

“나도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도 나를 좋아하고, 내가 그분에게 잘 대해 줬으니까, 그분도 나를 잘 대해 주는 게 뭐 이상한가요? 당연한 일이잖아요.”

진단랑이 어깨에 둘러멘 장궁을 으쓱하면서 대답했다.

그렇구나.

진아리가 잠시 생각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렇지. 그게 다지.

진아리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나는 그분을 좋아하니까, 그분 같은 사람이 될래요.”

이어지는 진단랑의 말에, 진아리는 웃음이 어색하게 굳으며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 낭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사람은 비단 진단랑뿐만이 아니야. 저 산 아래 도관에 갇혀 있는 정신 나간 아이도 정 낭자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했었어.

“단랑, 정 낭자 같은 사람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야. 정 낭자는 우연히 아주 고명한 스승님을 만나서 신기한 기술들과 신의의 비술을 얻은 거야. 그건 평범한 사람이 해낼 수 있는 게 아니기도 하고, 비할 바가 못…….”

진단랑이 웃으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진지하게 말하던 진아리의 말을 끊었다. 진단랑이 진아리의 팔에 팔짱을 끼면서 말했다.

“어머니, 잘못 생각하셨어요. 저는 정 낭자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진단랑이 ‘사람’이라는 두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은 거지, 그런 명성이나 기술을 얻고 싶은 게 아니에요. 정 언니처럼 무서울 것도 없이 담담하고 자유로운 사람이 될래요. 남을 비웃고 조롱하는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속에 세상을 품은 사람이 될래요.”

진단랑이 이어서 말했다.

진아리가 발걸음을 멈추고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진단랑은 그런 진아리를 보고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렸다.

“네 숙모네 다 왔구나.”

진아리가 진단랑을 바라보면서 따뜻하게 웃고는 진단랑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이제 가서 활쏘기 연습하려무나.”

진단랑이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는 민망한 듯 웃었다. 그리고는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고 몸을 돌려 성큼성큼 자리를 떴다.

진아리는 씩씩한 딸의 뒷모습을 보면서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미소를 지었다. 걱정으로 어둡기만 하던 진아리의 눈빛은 차츰 구름이 걷히는 듯 평온해졌다.

이래서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고, 저마다 하는 선택 또한 다르다는 거겠지.

활시위가 떨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화살이 과녁의 중앙을 맞히고, 화살 끝에 달린 깃털이 미세하게 떨렸다.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이마에 맺힌 땀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진단랑이 활을 내리던 사이, 길가의 풀숲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단랑은 재빨리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꺼내 들어 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뜻밖에도, 진단랑의 귓가에는 개가 내는 깨갱 소리가 아니라, 사람의 비명이 들려왔다.

진단랑이 깜짝 놀라서 길가로 달려갔다. 나무 밑, 작은 언덕 아래에서 한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단랑과 비슷한 나이대의 열두세 살쯤 된 소년이었다. 비단옷을 두르고, 겨울용 방한모를 쓴 소년은 백옥같이 뽀얀 피부와 봉황을 닮은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엉거주춤하게 바지를 붙잡고 있는 소년을 보아하니, 나무 아래에서…….

허공에서 두 시선이 마주치고, 동시에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단랑이 몸을 홱 돌리고 달아났다.

“여봐라! 저기 호색한……이 아니라 호색녀가 있다!”

언덕 아래의 소년이 당황한 목소리로 힘껏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진단랑은 귀가 웅웅 울릴 정도였다.

“마을 어귀에 사는 커다란 누렁이인 줄 알았어요. 늘 거기 숨어 있다가 내가 활쏘기 연습하는 틈을 타서 나를 물려고 튀어나온단 말이에요.”

달아난 줄 알았던 진단랑은 넓은 공터에 서서, 소년의 외침을 듣고 허둥지둥 달려오는 가노들을 향해 얼굴을 붉히며 설명했다.

“그리고 화살촉도 안 달려 있는 화살이라, 사람이 다칠 염려는 없어요.”

진단랑이 소리쳤다.

“헛소리, 다 헛소리야! 호색녀! 네가 나를 몰래 훔쳐봤잖아!”

가노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민 소년이 자신의 두봉을 꽁꽁 싸매면서 외쳤다.

진단랑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개졌다.

“아니거든요?”

진단랑은 억울하긴 했지만, 그래도 자세를 낮추고 먼저 사과했다.

“공자님께 실례했습니다.”

가노는 진단랑을 잠시 훑어보았다. 낡은 솜옷을 입고, 새하얀 치마를 입은 진단랑은 누가 봐도 가난한 집 아이 같았지만, 영리한 눈빛과 행동거지는 영락없는 귀한 집 자제였다.

“당장 저걸 잡아서 관아로 보내 버려!”

소년이 소리를 빽 질렀다.

사과를 먼저 하긴 했지만, 진단랑은 이 상황이 어처구니없기만 했다. 예전에 어떤 호색한이 여인을 몰래 훔쳐봤다는 이유로 관아에 보내져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여인이 호색녀라는 죄목으로 벌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가노들도 이 상황이 우스웠는지, 웃음을 참지 못하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예, 예, 관아로 보내야지요.”

가노들이 일부러 목청을 높이면서 진단랑을 향해 어서 가라고 눈짓하자, 가노들의 의중을 알아차린 진단랑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새빨개진 얼굴로 도망갔다.

“어, 어? 도망간다!”

소년이 외쳤다. 가노들이 진단랑의 뒤를 몇 걸음 따라가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멈춰 섰다.

“쫓아가야지! 왜 안 쫓는 거야!”

소년이 답답한 듯 소리를 질렀다.

“공자님, 일단 길을 재촉하시는 게 중요합니다.”

가노들이 되돌아와서 말했다. 소년이 뭐라고 더 대꾸하려던 찰나, 한쪽에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이십구낭!”

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잽싸게 사내를 향해 달려가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십칠 형님! 십칠 형님! 어서 이리 좀 와 보세요! 어떤 호색녀가 나를 몰래 훔쳐봤다니까요!”

마차에 앉은 젊은 사내가 언덕 아래에서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그 역시 비단옷을 입고 있는, 새하얀 피부에 호리호리하고 곱상하게 생긴 사내였다.

소년의 외침을 들은 사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손에 쥔 부채를 촤락 하고 펼쳤다. 부채 위에는 커다랗게 ‘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지극히 정상이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원래 어딜 가나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마련이거든. 이십구, 넌 이제야 바깥세상을 구경하게 됐으니 아직 적응이 덜 돼서 그래.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차차 익숙해질 거야.”

사내가 부채를 다시 접고 몸을 기울이면서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댔다.

“생긴 건 어떻디?”

소년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곰곰이 생각했다.

조금 전에 본 애가 어떻게 생겼더라.

“다른 건 모르겠는데, 눈이 참 예쁘긴 했어요.”

소년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내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면서 씩 웃었다.

“그럼 예쁘다는 거네. 사람은 자고로 눈이 예뻐야 전체가 예뻐 보이는 법이야. 생각해 봐. 이십구 네 눈도 태생부터 예뻤잖아.”

소년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으로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런데 진짜 사나운 애였어요. 손에 활을 들고 있다가, 화살로 나를 쐈다니까요?”

소년이 조금 전에 주운 화살촉이 없는 화살을 손에 쥐면서 말했다.

한껏 여유롭게 능구렁이 같은 미소를 짓고 있던 사내가 갑자기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활을 쏠 줄 안다고?”

사내가 목청을 높이고 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여유가 넘치던 풍류 공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어딘가 잔뜩 겁에 질린 모습의 사내만 남았다.

사내가 소년을 마차 위로 끌어 올렸다.

“어서 가자, 어서!”

소년이 의아한 얼굴로 사내를 쳐다보았다.

“십칠 형님, 아직 그 호색녀를 못 잡았어요! 어서 가서 잡아야 해요!”

“뭐라고? 제 발로 그 여인을 찾아가겠다고? 어휴, 안 돼, 안 돼. 그런 여인은 아무리 예뻐도 근처에 얼씬도 하면 안 돼. 이십구, 너는 모르겠지만, 왕년에 이 십칠 형님이 그런 여인을 떨쳐내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내 몸이 상하는 일까지 하고서야, 그 여인이 날 놔줬어. 그때 내가 그 여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왕십칠이 두려움에 떨며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이야기를 늘어놓던 때, 옆에 있던 가노가 마른기침을 했다.

“십칠공자님, 노야와 부인께서 당부하신 말씀을 잊으신 건 아니지요?”

그 여인과의 일은 다시는 입에 올리면 안 될 금기가 되었다. 그 일을 다시 입에 올렸다가는, 또 무슨 끔찍할 화를 당하게 될지 몰랐다.

왕십칠이 몸을 살짝 떨고는 정신을 차렸다.

“어, 어서 가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가노들이 제자리로 돌아가 마차를 호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소년이 마차 휘장을 걷고는 언덕 위를 내다보며, 화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면서 씩씩댔다.

“날 엿본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울화가 치밀어 오른 소년이 소리쳤다.

“여기가 어디냐! 그 호색녀가 어디로 도망쳤냐고! 어디 사람이더냐!”

가노들이 고개를 돌려보고는 대답했다.

“도련님, 여기는 구주의 국유지입니다. 저쪽도 마을도 모두 둔보와 둔전(屯田)뿐이니, 아마 둔전의 농사를 짓는 사람일 겁니다.”

둔전의 농사를 짓는 사람이라면, 훨씬 찾기 쉽겠네.

죄를 지었던 집안의 사람이거나, 이주민이겠지. 관부에 명단이 있을 테니, 금방 찾아낼 수 있겠어.

소년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다시 언덕 위를 내다보았다.

네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는지 보자! 감히 이 몸을 몰래 훔쳐봐? 내가 절대로 가만두지 않을 거야!

구주부 성 밖, 진십육낭 부부가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아버님, 살펴 가세요.”

유규가 어색한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나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오신 줄 몰랐다면 몰라도, 왔다 가시는 걸 알면서 배웅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십육낭이 말하면서 다시 한번 예를 표했다.

“괜히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말아라.”

유규가 큼큼 헛기침을 했다.

딸을 시집보내면서 사돈댁 코앞까지 따라오는 아비가 어디 있누.

“사근 숙부가 고향에 간다기에 바래다주러 왔다가, 온 김에 이 아이도 데려다준 것뿐이야.”

유규가 한마디 덧붙였다. 옆에 있던 서사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자, 유규가 그를 흘겨보았다.

“맞잖아?”

서사근이 웃으면서 유규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쉬움이 가득 묻어나는 눈빛으로 유규를 바라보는 유 낭자를 바라보았다.

“너무 속상해하지 마라. 새해가 밝고, 봄이 될 때쯤이면 네 낭군과 함께 서북으로 갈 수 있을 테니까.”

서사근의 말에 유 낭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 우리 아버지 잘 감시해 주세요. 술 좀 그만 마시도록요. 걸핏하면 상관한테 맞서며 소란 피우지도 마시고요.”

딸에게 한 소리 듣자, 유규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이놈의 계집애가 뭘 안다고.”

유규가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서사근이 웃으면서 유규의 팔을 붙잡고 유 낭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도록 하마. 날이 추우니 너희도 어서 들어가 보아라.”

서사근의 시선이 진십육낭에게로 옮겨갔다.

조금 전부터 계속 서사근을 몰래 쳐다보고 있던 진십육낭의 시선이 서사근의 시선과 마주쳤다. 당황한 진십육낭은 재빨리 시선을 내리깔고 예를 표했다.

“어서 가자. 아직 갈 길이 멀어. 새해 전에는 집에 도착해야지.”

말에 올라탄 유규가 서사근을 재촉했다.

두 사람이 말을 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자, 유 낭자는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눈물을 훔쳤다.

“색시, 너무 속상해하지 마요. 새해만 지나면 뵐 수 있을 테니까.”

진십육낭이 위로의 말을 건네자, 유 낭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울음을 그쳤다.

“이제 우리도 돌아가요. 날씨가 꽤 춥네요.”

진십육낭이 말하면서 유 낭자의 손을 잡았다.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요.”

성 밖에 오가는 행인이 있어서 그런지, 유 낭자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홱 빼고 마차에 올라탔다. 진십육낭도 멋쩍어하며 마차에 올라 유규와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흘끔 고개를 돌렸다.

얼핏 보기엔 평범해 보이지만 숨길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저 사람이, 바로 그분의 의형제로구나. 서북로 목사(牧司)의 제거(提擧: 관직명)에 봉해졌다는 그 국구(國舅: 황후나 귀비의 형제)시고.

“전에 황후마마를 뵌 적 있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진십육낭의 몸이 살짝 굳었다.

“듣기로는 당초 황후마마께서 경성에서 가장 먼저 알게 된 사람들이 바로 진씨 가문이라던데요?”

유 낭자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맞아요. 마마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의 은인이셨죠.”

진십육낭이 대답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래요.

진십육낭이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뱉었다. 햇빛이 나뭇잎 사이를 비추면서 얼굴에 얼룩덜룩 그늘이 진 여인의 모습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세 명이어서가 아니라, 이 공자가 대단한 거예요.

차정사에 있는 비석에 관한 얘기 잘 들었어요.

여인이 웃음 띤 얼굴로 말하던 모습.

본 적 있을 뿐만 아니라, 혼담을 넣으려 했었지요. 그 여인의 원칙 때문에 혼담을 넣을 엄두도 못 내서,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데요.

물론 어디 가서 감히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은 없지만.

“당신, 그리고 당신 집안의 사람들, 다 좋은 사람들이에요.”

유 낭자가 말했다. 진십육낭이 고개를 돌리고 유 낭자를 쳐다보았다. 이제 막 혼례를 올린 자신의 신부가 웃음꽃이 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땐 황후마마께서 아직 바보의 병이 완치되지 않아 챙겨 주는 가족도 없을 때인데, 그래도 당신 집안의 사람들은 황후마마를 잘 대해 줬잖아요.”

유 낭자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무리 생명의 은인이라 해도, 신분과 지위의 차는 엄연한 것이었다.

“마마께서 좋은 분이시니 그랬지요. 그리고 우리는 항상 마마께 신세만 지고 살았는걸요.”

진십육낭이 대답하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가 유 낭자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유 낭자는 순식간에 얼굴이 홍당무가 되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마차 안이잖아요.”

진십육낭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그는 유 낭자의 손을 놓아주지 않고, 오히려 더욱 세게 잡았다.

유규는 한참을 달리다가 꽤 멀리 왔다고 생각할 때쯤 고개를 돌렸다. 당나귀가 끄는 마차가 저 멀리 보일 듯 말 듯 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왜 말이 끄는 마차를 사지 않고 당나귀를 쓰는 거야? 저 삐쩍 곯은 당나귀로 퍽이나 잘 다니겠다.”

유규가 씩씩대며 말하자, 서사근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괜한 데 신경을 쓰고 그러네. 지금 같은 시기에 진씨 가문이 값비싼 말과 마차를 끌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 수는 없잖나. 저들을 지켜보는 눈들이 얼마나 많은데.”

유규가 눈을 부릅뜨며 말대꾸를 하려고 했지만, 서사근은 계속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 마마께서 자네에게 물어보신 거지. 생각해 보라고. 남들이 만든 유언비어를 무서워하지 않는 자네 같은 자가 세상에 몇이나 있겠나?”

그건 맞는 말이지.

“나 유규는 두려울 게 없으니까!”

유규가 곧바로 득의양양한 얼굴로 소리쳤다.

“당초 네놈들은 태평거의 주인장이고, 돈도 많았고, 그리고 네놈들의 누이는 진 상공과도 교류하는 사람이었어. 하지만 네놈들이 아무리 권력이 있고, 돈이 많은들 무슨 소용이야? 내 눈에는, 네놈들도 한낱 탈영병으로밖에 안 보였는데. 탈영병은 당연히 감옥에 잡아 처넣어야지!”

서사근이 유규의 말을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거, 몇 번을 말하나? 탈영병이 아니라, 모함에 빠진 거였다니까.”

유규가 눈을 부라리면서 대꾸했다.

“모함이든 뭐든, 어쨌든 네놈들은 도망쳤잖아!”

두 사람이 눈싸움을 하듯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서사근이 먼저 웃음을 터트렸다.

“꼭 어제 일 같은데, 벌써 사오 년이나 지났네.”

모든 게 여전한데, 눈 깜빡하는 사이에 사람만 달라졌어.

“사근.”

서사근의 말 한마디에 김이 빠지고 풀이 죽은 듯한 유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너희들, 나를 원망하나?”

서사근이 고개를 돌리고 조금 놀란 눈치로 유규에게 되물었다.

“무슨 원망?”

“그때 내가 네놈들을 붙잡지 않았더라면.”

유규가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말을 탄 무원산 형제들이 호탕하게 웃으며 황량한 겨울 벌판 위를 가로질러 달려오는 듯했다.

위주(渭州) 개석보 수비군 소속 갑대(甲隊) 감용 범강림, 서무수, 범석두, 서봉추, 기병 서사근, 서납월, 교용 범삼축은 명을 받들라!

못난 놈들아! 탈영할 배짱도 있고, 형제를 방패로 삼을 배짱도 있다면, 이리 나와서 나와 한판 붙자!

감용이란 무엇이더냐? 용맹하고 싸움에 능하여 장수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자 아니더냐! 너희가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보아라.

유규가 고개를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는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목이 멨다.

만약 그때 내가 아니었다면, 무원산 일곱 형제는 경성에서 부족한 것 없이, 원하는 걸 하고 살며, 관직을 얻어서 가정을 꾸리고, 자기들을 쏙 빼닮은 자식들이 자라나는 걸 지켜봤겠지.

만약 내가 그놈들을 잡지 않았더라면, 지금처럼 경성 밖 황무지에 쓸쓸히 묻혀 있진 않았을 텐데.

유규는 같은 꿈을 무수히 많이 꾸곤 했다. 서무수 등 다섯 형제들의 시체를 수레에 싣고, 맨발로 끌고 또 끌면서 하염없이 걷는 꿈이었다.

그러다 꿈에서 깨어날 때면, 그는 해가 뜰 때까지 멍하니 휘장만 바라보곤 했다.

그럴 때마다 유규는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고 후회스러웠다. 정말 가슴이 사무칠 정도로 후회했다.

“그래. 내가 탈영병을 싫어하긴 하지.”

유규가 자조적인 웃음을 보이고는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그때 네놈들을 잡았던 건, 탈영병이 증오스러워서가 아니라 분풀이를 하기 위해서였어. 내가 서북에서 쫓겨난 게 화가 났고, 최전방에서 적장의 목을 벨 수 없는 게 한스러웠거든. 나는 오매불망 전장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네놈들은 그 귀한 기회를 버리고 도망쳤다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이를 악물고 일을 크게 만들었지.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아무 소용 없는 일이더군. 네놈들이 정말 탈영병이었다면, 내가 무슨 난리를 치든 상관하지 않았겠지. 내가 그 난리를 친 게 신경 쓰였다면, 그건 탈영병이 아니라 진정한 호걸들인 거고.”

그래서 무원산 형제들은 공성전의 마지막까지 버텼던 거겠지. 도망칠 기회가 분명히 있었는데도,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어 보려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거니까.

탈영병이라는 말에 상처를 받는 사람들은 결국 내가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뿐이야.

나는 그놈들에게 상처를 줬지만, 나와 그놈들이 바라는 건 결국 똑같은 거였어.

서사근이 웃었다.

“그렇게까지 말해 놓고, 무슨 만약 타령이야? 자네가 아니었어도 어차피 우리는 서북으로 떠날 예정이었어.”

서사근이 자랑스러운 미소를 보이면서 유규를 쳐다보았다.

“그때는 누이가 벌써 우리를 위해 준비를 마쳤던 때였어. 그런데 우연찮은 계기로 자네를 맞닥뜨린 거지. 자네가 그때 우리를 잡았든, 잡지 않았든, 어쨌거나 우리는 서북으로 갔을 거야. 그러니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됐을지는 자네와 무관한 일이라고.”

말하던 서사근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만약 그때 형제들이 죽기 직전까지 성문을 막지 않았더라면, 만약 그때 그 빌어먹을 장수 놈이 먼저 도망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서사근이 고개를 들었다.

아니, 이 세상에 만약 따위는 없어.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늘 전장에서 죽기를 바라는 이들이었으니, 죽음에 후회도, 미련도 없을 것이야.

“자네 안사람이 딸내미 때문에 집에서 허구한 날 울고불고한다더니, 내가 보기엔 자네가 자네 안사람보다 더 찡얼대는 거 같은데?”

서사근이 우스갯소리를 하고는 자신의 말을 향해 채찍질했다.

“웬 말이 그리 많아?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통쾌하게 살다가 통쾌하게 가야지. 이미 저지른 일이라면, 저지른 대로 살면 그만이야. ‘만약’이니 ‘하지만’이니 거 참 말 많네.”

서사근이 소리치면서 먼저 달려가자, 유규는 입을 벌려 씩 웃고는 말에 박차를 가하며 서사근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이 열심히 달려오긴 했지만, 용곡성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벌써 정월 초열흘이 됐을 때였다. 거리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분위기가 물씬 풍겼고, 정월 대보름에 시작될 꽃등 놀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집 앞에 알록달록한 꽃등이 달리기 시작했다.

용곡성이 이토록 평온하게 새해를 맞이한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용곡성뿐만 아니라, 주위의 작은 둔보나 전방과 가까운 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든 건, 각 성의 성문 앞에 설치된 벽력포(霹靂砲) 덕분이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듯한 굉음을 내는 벽력포는 하늘과 땅을 뒤흔들고, 눈앞을 피바다로 물들게 했다.

연말에 한 번 벽력포를 쓴 적이 있는데, 난생처음 겪는 포화의 위력에 서쪽 오랑캐들은 무서워 벌벌 떨었다. 겨울 중에서도 특히 연말에 자주 쳐들어와 말썽을 피우곤 하던 오랑캐들이 올해는 깜깜무소식이었다.

“우리 집으로 가자. 네놈 집에 있는 아궁이와 솥은 차게 식었을 테니.”

성문 앞에 도착한 유규가 서사근을 향해 손짓했다.

“아무리 그래도 이 몸은 제거 대인일세. 큼지막한 저택에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하인이 있는데, 고작 집을 한 달 비웠다고, 뭐? 아궁이와 솥이 식어?”

서사근이 웃으며 대꾸하고는 유규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말을 달려 자리를 떴다.

“그래도, 여인이 없는 집이니 적적할 텐데.”

유규가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집 앞에 도착한 서사근이 대문을 넘어서기도 전에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서사근이 활짝 웃으며 문턱을 넘어섰다.

“형님이 오셨느냐?”

서사근을 마중 나온 문지기와 하인들이 웃으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연말부터 와 계셨습니다. 대노야와 대부인 모두 오셨어요.”

형수님도 오셨다고?

“형수님께서는 회임을 하여 거동이 불편하실 텐데, 이렇게 먼 길을 오셨다고?”

깜짝 놀란 서사근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걱정하지 마. 황후마마께 여쭤보고 나서 출발한 거니까.”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누이가 괜찮다고 했으니까, 괜찮은 거겠지.

서사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사근이 마당 안으로 들어올 때, 범강림은 소보아를 따라서 무공을 수련하고 있었다. 소보아는 아직 어렸지만 동작이 꽤 그럴싸해 보였다.

서사근이 조금 낯설었는지, 소보아가 쑥스러움을 타며 머뭇거렸다.

“네가 여길 떠날 때만 해도 엄청 작았는데, 이제는 넷째 숙부를 알아보지도 못하는구나.”

서사근이 웃으면서 말했다. 소보아가 부끄러워하면서 살짝 웃고는 마당 밖으로 나오는 황씨의 몸 뒤로 쪼르르 달려가 숨었다.

황씨의 옆에 있던 여종이 재빨리 소보아를 붙잡았다. 여종은 소보아가 어느 정도 배가 불러온 황씨와 부딪힐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이번에 같이 지내다 보면 친해질 거예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형님, 이제 경성에서 지내지 않으시려고요?”

서사근이 황씨의 의중을 알아듣고 물었다.

“벽력포와 신비궁의 공급과 정비가 안정되었으니, 서북 군감의 제거 자리로 왔다.”

범강림이 대답했다.

“그럼 경성 쪽에는…….”

서사근이 곧바로 물었다.

“이무가 있잖아. 이무만으로도 충분해. 나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인걸.”

범강림이 대답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며 자연스럽게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게 아니라…….”

서사근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말은, 누이 혼자 경성에 남아 있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범강림이 웃음을 터트렸다.

“주 노야 가족이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조귀는 무관이 되면서 경성을 떠나게 됐지만, 그 대신 강주에 있던 금가아 가족이 경성으로 올라왔지. 정 대노야가 금가아에게 경성의 가업을 맡겼거든. 반근도 금위군한테 시집가서 경성에 살고 있고. 찬찬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꽤 많이 남아 있으니까, 누이가 경성에서 혼자 쓸쓸하다고 느끼진 않을 거다.”

서사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다행이고요.”

“그나저나, 너도 이제 나이가 적지 않은데, 장가갈 생각을 좀 해 봐야지 않겠어?”

서사근은 범강림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아우야,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안다.”

범강림이 자리에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형제들이 차가운 땅 아래에 쓸쓸히 묻혀 있으니, 넌 지금 숨 쉬며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대로 지내서는 안 돼.”

서사근이 웃으면서 범강림을 향해 예를 표했다.

“예, 형님. 그래서 형님께서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형님과 형수님께서 제가 장가갈 준비를 도와주시겠군요.”

범강림이 멈칫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었다.

“아 참, 주 노야 가족이 경성으로 돌아갔다면, 주 공자도 경성에 한번 들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서사근이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지. 주 공자는 황후 책봉식이 끝난 뒤에 곧바로 경성을 떠났어. 내가 보기엔, 주 공자는 별로 경성에 가고 싶지 않은 거 같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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