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7화 (157/160)

-마지막-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만천하를 비췄다. 선덕문 앞에는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의장용 쇠뇌, 의장대, 꽃과 의장용 차양이 가장 앞에서 첫 번째 행렬을 이끌었다. 의장 행렬이 시작되자, 문무백관과 명부들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행렬이 다가오는 곳을 바라보았다.

첫 번째 행렬 뒤로, 청의외장(靑衣外杖)에 지휘봉인 차복(車輻)과 고지번(告止幡), 전교번(傳敎幡), 신번(信幡) 등의 깃발이 따랐고, 의도(儀刀), 극(戟), 궁시(弓矢) 부대가 엄숙한 표정으로 행렬의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라가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던 궁중 악대의 연주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절고(節鼓), 징, 깃털이 달린 북이 힘차게 박자를 맞췄고, 그 위로 퉁소, 가(笳), 피리 소리가 맑고 흥겨운 곡조를 만들어냈다.

이어서 백 명의 사람들이 황휘장(黃麾仗)을 들고 행렬을 따르고 있었고, 백 개의 황휘장 뒤로는 단극(短戟: 짧은 창) 한 줄, 오색깃발 한 줄, 과(戈: 창) 한 줄, 오색깃발 한 줄, 의굉창(儀鍠氅: 나무 도끼에 새털을 단 의장) 한 줄, 오색깃발 한 줄이 알록달록하게 줄지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말굽 소리가 들려오면서, 군위(軍衛), 위위(威衛), 무위(武衛), 효위(驍衛) 병사들 스무 명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진호가 고개를 들고 의장 대열을 쳐다보았다. 그는 체격과 용모를 까다롭게 선별하여 고르는 스무 명의 의장 대열 속에서 주복의 모습을 한눈에 찾아냈다.

주복은 내내 엄숙한 표정으로 다른 곳에 눈길을 두지 않고 계속 앞만 내다보며 어마(御馬)를 타고 점잖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의장 대열이 지나가자, 그 뒤에 있던 황후의 마차가 사람들의 시야에 서서히 들어왔다.

그 주위로 청마(靑馬) 여섯 필과 스물네 명의 가사(駕士: 황제의 탈것을 지휘하는 사람)들이 황후의 마차를 호위하고 있었다. 그들의 앞뒤 양옆으로 뭉텅이로 된 치미선(雉尾扇: 꿩의 깃으로 부채 모양으로 만든 의장) 두 묶음, 커다란 우산 의장대 네 개, 그리고 거대한 치미선과 금화개(錦花蓋), 금곡개(錦曲蓋), 금육주(錦六株)가 여덟 개씩 행렬을 감싸고 있었다.

햇살이 비치자, 황후의 마차는 휘황찬란한 금빛으로 번쩍였다.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양쪽에서 일제히 무릎을 꿇고 황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진호가 몸을 돌리고 지팡이를 짚은 채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바닥에 부딪히는 지팡이 소리는 궁중 악대의 화려한 연주 소리에 묻혔다.

진호는 아주 오래전, 정방이 마차를 타고 주복과 자신의 앞을 지나가던 광경을 떠올렸다.

거들먹거리기는.

진호의 옆에 있던 소년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냉철한 거겠지.

진호가 씩 웃으면서 대꾸했다.

오히려 내가 떨리는군.

진호의 눈길이 마차를 쫓았다.

그래, 대체 어떤 여인이지?

빠르게 성문으로 들어간 마차는 인파 속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진호가 발걸음을 멈추자, 궁중 악대의 연주는 서서히 귓가에서 멀어졌다.

“공자님.”

진호의 뒤를 따라오던 사환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진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옆으로 손을 뻗었다.

“공자님.”

사환은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두 손으로 물건을 꼭 쥔 채 진호에게 건네주지 않았다. 하지만 진호는 여전히 물건을 달라는 듯 손을 뻗고 있었다.

사환이 울상을 지으면서 그에게 낡은 장궁과 화폭이 담겨 있는 두루마리를 건넸다.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건네받은 두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여러 장면이 눈앞에 한꺼번에 떠오르면서, 진호는 잠시 회상에 잠겼다.

진십삼, 이거 내가 제일 아끼는 활이다.

소년이 큰 소리로 외치면서 진호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웃으면서 공손하게 두 손을 높이 들며 포권의 예를 표했다.

이 관인양은 관인들께서 선대에 오르신 것을 축하드리기 위해 빚은 술인지라 관인들의 흥취를 살짝 돋울 뿐, 신선대에 오르시는 발걸음을 어지럽힐 정도는 아닙니다.

축하드립니다, 진 공자님.

진 부인이 진호를 재촉하며 서재로 향했다.

다른 사람들 건 내일 봐도 되지만, 정 낭자가 무슨 선물을 했을지 너무 궁금해서 말이지.

공자님, 안으로 드시지요.

하나, 둘, 세 개의 등불이 차례로 켜지고, 대청 안이 차츰 밝아졌다. 만개한 꽃, 반쯤 핀 꽃, 봉오리가 생겨 막 피어나려는 모란까지!

진호가 고개를 젖히고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장궁과 두루마리를 양쪽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게는 미인이 그려 준 그림 한 폭이 있네.”

“향기로운 포도주로 축하해 주었지.”

“어떤 미인이 있었다네. 한 번만 봐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지.”

내시가 책봉식의 진행을 외치자, 거대한 대전 앞에 빽빽하게 서 있던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황제가 대전 안에서 한 걸음씩 밖으로 걸어 나와, 마차에서 내리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궁중 악대가 연주하던 곡조가 바뀌고, 방백종이 입을 열었다.

“금책을 전하라.”

내시가 금책을 높이 들고, 커다란 우선(羽扇) 앞으로 다가가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정방이 천천히 걸음을 내딛자, 옆에 있던 시녀가 금책을 받들었다. 우선이 양옆으로 치워지면서, 방백종이 손을 내미는 모습이 보였다. 정방이 그가 내민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살짝 올렸다.

“황후마마께서 대전에 오르십니다.”

내시가 목청을 높여 고하자, 방백종은 정방을 바라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먼저 몸을 돌리고 앞서서 걷자, 정방도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뒤를 따라갔다.

웅장한 대전 앞, 두 사람의 뒤로 문무백관과 명부들이 네 번의 큰절을 올렸다.

대량(大梁) 소명(昭明) 원년, 강주, 겨울밤.

새카만 어두움이 드리운 황야 위로 두 사람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곧 낮은 신음이 들려오고, 두어 걸음 정도 뒤처져 있던 사람이 무언가에 발이 걸린 듯 바닥으로 엎어졌다.

앞선 사람이 재빨리 되돌아와 쓰러진 사람을 부축했다.

“괜찮소?”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그냥 넘어진 거예요.”

여인이 말하고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어떻소?”

사내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칙 소리가 들리고, 작은 불씨가 남녀의 얼굴을 비쳤다.

언뜻 보기에는 남루한 차림의 평민 같았지만, 흐릿한 불빛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에서는 숨길 수 없는 귀태가 느껴졌다. 두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여인의 품속을 쳐다보았다.

여인이 꽁꽁 싸매 둔 이불을 살짝 걷어내자, 그 안에는 발그레한 얼굴로 곤히 잠든 아기가 드러났다. 갑작스럽게 비친 불빛 때문인지, 차가운 바람이 잠을 방해했는지, 아기는 고개를 움직이며 올망졸망한 주먹을 귀에 비볐다.

여인이 얼른 이불을 다시 꽁꽁 싸맸다.

“괜찮아요. 도련님께서는 무사하세요.”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여인의 품에서 아기를 건네받았다.

“내가 안으리다. 서두르세나.”

사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던 찰나, 그의 안색이 급변했다. 여인의 등 뒤로 횃불이 비치는 것이 보였다.

“큰일 났군. 벌써 쫓아왔어.”

여인의 표정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인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희미한 불씨를 흔들어 껐다.

“이렇게 빨리 따라온 걸 보면, 필시 누군가가 길을 짚어 준 것이야.”

사내가 조용히 말했다.

“그럼 어떡하죠? 도망치기엔 이미 늦은 걸까요?”

여인이 울먹였다.

“잡히지 않는 한, 계속 도망치면 될 거요.”

사내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하고는 아이를 등에 업었다.

“우리 정씨 가문의 혈맥이 이대로 끊기지는 않을 것이오.”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달려갔다.

말굽 소리와 개가 짖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들은 갑옷 차림에 군마를 타고 있었다. 서늘한 빛을 내뿜는 병기를 쥔 사람들은 허허벌판 위에서 더없이 눈에 띄었다.

가장 앞에서 달리던 장수가 말고삐를 잡고 멈춰 섰다.

“어느 방향인가?”

장수가 호통치듯 묻자, 서생 차림의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그가 나침반을 손에 쥐고 나침반과 하늘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손끝으로 셈을 했다.

“저쪽입니다.”

서생이 조금 전 두 사람이 도망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때 장수가 말 안장에서 무언가를 떼어냈다. 횃불의 불빛이 물건의 정체를 밝혔다. 바로 대나무 통에 쇠로 된 손잡이가 달려 있었다.

“폐하께서는 정씨 일족을 발견하면 생포할 필요 없이 즉살하라 명하셨다. 목숨 하나에 절도사 자리가 하나씩 달렸다. 오늘 밤 우리가 이 돌화창으로 절도사 자리를 몇 개나 얻어낼지 한번 해 보자꾸나!”

장수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그의 뒤에 있던 병사들이 환호하면서 자신들의 돌화창을 꺼내어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장수가 힘찬 기합과 함께 다시 달리기 시작하자, 병사들도 그의 뒤를 따라 말굽 소리를 내며 달려갔다.

같은 시간, 대량 경성, 사천(司天) 천문대.

거대한 문이 열리자, 커다란 몸집의 금군 병사들이 두봉을 걸친 사내를 호위하며 천문대 안으로 들어섰다. 두봉을 걸친 사내는 층계를 따라 위로 올라가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벽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옆에 서 있던 시위들이 벽의 한쪽을 힘껏 밀자, 벽이 천천히 회전하면서 지하로 향하는 층계를 드러냈다. 숨겨진 층계를 한 걸음씩 내려가자, 넓디넓은 지하실이 눈앞에 펼쳐졌다.

사내를 따라 들어온 시위들이 들고 있던 횃불로 지하실 안을 낮보다 더 환하게 비췄다.

지하실의 벽면에는 쇠사슬에 네 손발이 묶인 채 허공에 매달려 있는 상처투성이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쇠사슬에 어깨와 다리가 뚫린 채, 손발이 꽉 묶여 있는 남자는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을 정도의 높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그의 흉측한 몰골이 횃불에 비치자, 시위들은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이 느껴졌다.

“손수 만든 곳에서 지내는 게, 감옥에서 지내는 것보다 훨씬 편하시지요?”

발걸음 소리가 멈추고,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

지금 이 순간 ‘아버님’이라는 단어는 잔인하고 소름 끼치게 들렸다. 서서히 고개를 든 중년 남자의 창백하고 야윈 얼굴에 미소가 설핏 번졌다.

“폐하께서 오셨군요.”

남자가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멈춰 선 사내가 두모와 두봉을 벗었다. 건장한 체격의 사내는 붉은색 비단옷을 입고 있었고, 횃불 아래 비친 그의 모습은 타오르는 듯 눈부셨다.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용모는 준수했으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고, 눈빛은 맹수처럼 날카로웠다.

“아버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대량이 누구의 손에 멸합니까?”

사내의 말에 중년의 남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아사(阿四).”

시위들이 눈썹을 치켜뜨면서 중년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태상시(太常寺)의 정준(程隼). 역시 눈에 뵈는 게 없구나. 저런 몰골이 되었는데도 폐하의 아명을 입에 담다니.

양산이 서늘한 눈빛으로 남자를 노려보았다.

“아버님, 한평생 계산을 하며 살아오셨는데, 아버님의 마지막이 어떨지 계산해 보신 적은 없습니까?”

정준이 웃었다.

“폐하, 우리 아방이 어떠셨습니까?”

그는 양산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양산은 ‘아방’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아방.”

양산이 읊조리듯이 말했다.

“좋은 여인이지요. 아름답고, 총명하고, 지극한 미인이니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사람입니다.”

정준이 미소 짓는 양산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버님.”

양산이 정준을 쳐다보면서 뒷짐을 지었다.

“짐은 이미 아방을 효소(孝昭) 황후로 추봉했습니다. 아방은 짐에게 최고의 황후이지요. 아버님께서 짐과 대량을 위해 이렇게 천하에 유일무이한 황후를 길러내 주시다니,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정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폐하께서는 우리 정씨 가문이, 단지 폐하를 위해서 그렇게 훌륭한 황후를 키워냈다고 생각하십니까?”

정준이 말하면서 몸을 움직였다. 쇠사슬이 철그렁철그렁 흔들리는 듣기 거북한 소리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시위들이 재빨리 양산의 앞을 막아섰다.

“폐하, 조심하십시오.”

시위들이 경계를 담은 눈빛으로 정준을 쳐다보았다.

정준은 이미 폐인이나 다름없었지만, 정씨 일족이 기묘한 술수를 쓴다는 것을 알고 있던 시위들은 그가 폐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양산이 시위들에게 비키라는 손짓을 하고는 정준을 바라보았다.

“우리 아방은 태생이 총명하고 영리했으며, 무엇이든 한 번만 보면 외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 아방은 우리 일족이 모든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아이이며, 우리 일족의 모든 능력을 익힌 사람이지요.”

정준이 큰 소리로 웃으면서 기쁨과 자랑스러움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우리 가문이 그런 아방을 키워낸 것이, 단지 네 살이 되던 해에 폐하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하십니까?”

양산이 정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버님, 대량이 누구의 손에 멸합니까? 정씨 가문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비술은 어디에 숨겨져 있고요?”

정준은 양산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우리 아방은 참 착한 아이지요.”

정준의 창백한 얼굴에 슬픔이 서렸다.

“우리 아방은 참으로 가엾은 아이예요.”

‘가엾은 아이’라는 말을 들은 양산의 눈빛이 순간 암담해졌다가 금세 냉랭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우리 정씨 가문은 결코 고난과 역경을 두려워한 적 없습니다.”

정준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눈빛을 반짝이면서 소리쳤다.

“우리 아방은 필시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으며, 비통함이나 슬픔도 없을 겁니다. 우리 아방은 절대로 정씨 가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겁니다!”

점점 더 흥분하는 정준을 보자, 양산이 고개를 돌리고 탄식했다.

“폐하, 물어 봤자입니다. 이미 미친 사람입니다.”

시위가 조용히 말했다.

정준은 시위의 말을 증명하듯, 아방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갑자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늘의 도움을 잃고 신령의 노여움을 사, 죽어가는 시체들이 들판에 가득 버려져 있구나. 전장에 나가면 살아 돌아오지 못하네. 끝없이 펼쳐진 평원의 길이 아득히도 멀구나. 장검을 차고 활을 든 채로 머리와 몸이 잘리더라도 후회는 없으리. 진실로 용감하고 무예 또한 뛰어나니, 끝내 굳세고 강하여 가히 범할 수 없다네(天時墜兮威靈怒, 嚴殺盡兮棄原野. 出不入兮往不反, 平原忽兮路超遠. 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誠旣勇兮又以武, 終剛强兮不可凌. <구가 국상(九歌 國殤)>).”

발음하기 까다로운 초나라 말에 기괴한 곡조였다. 게다가 정준이 쇠사슬에 뚫린 몸을 이리저리 흔들면서 기이한 자세를 보이자, 안 그래도 음산한 지하실이 더욱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횃불로 환히 밝혔음에도, 시위들은 시야가 점점 더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양산이 정준을 슬쩍 보고는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양산이 층계를 올라서 밖으로 나오자, 벽은 다시 회전하여 닫혔고, 정준의 기괴한 곡조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대량의 후궁에는 등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의장 행렬이 멀리서 다가오는 모습이 보이자, 천자의 침궁 밖에서 황제를 기다리던 황후가 자세를 낮추고 양산을 맞이했다.

“황후께서 이렇게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시오?”

양산이 눈앞의 여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물었다.

“폐하, 지난번에 신첩이 만들어 드린 양갱이 맛있다고 하셔서, 신첩이 특별히 밤참으로 만들었습니다.”

황후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맛있던 것은 그때이기에 맛있었던 것이오. 이번에는 짐이 양갱의 맛을 느낄 수 없을 것 같소이다.”

양산이 말하고는 황후를 지나쳐서 침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황후는 민망한 표정으로 제자리에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가, 결국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자리를 떠났다.

“다들 저렇게 마음에도 없는 아첨을 부리기 바빠서야 원.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해대니 더욱 싫증이 나지.”

침궁 안에서 양산이 겉옷을 벗으며 중얼거렸다.

아방은 달랐어.

“당신을 위해 특별히 만들었는데도, 맛이 없을 것 같아요?”

양산의 눈앞에 팔걸이의자에 비스듬하게 앉아 교태를 부리는 한 여인의 모습이 그려졌다.

양산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그가 시선을 바닥에 떨구고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이 휘장을 들어 올리자, 양산은 안쪽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침궁 안의 장식과 가구들은 간소했다. 내시들이 모두 물러나자, 따뜻하게 불이 지펴진 겨울밤의 침전 안은 더없이 쓸쓸하게 느껴졌다.

양산이 침상 앞에 서서 옆에 놓인 탁자를 바라보았다. 탁자 위에는 검은 비단이 씌워져 있었다.

“아방, 그래도 네가 있어 다행이야.”

양산이 검은 비단을 걷어냈다. 그 아래로 작은 수정함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일렁이는 등불에 비치는 수정함은 영롱하고 오색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수정함의 중앙에 놓여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의 심장이었다. 그 심장은 금방 사람의 몸에서 도려낸 것처럼 새빨간 빛깔을 띠고 있었다.

양산이 손을 뻗어서 수정함을 매만졌다.

“아방, 여기서 종일 혼자 있느라 지겨웠지?”

양산이 의자에 앉으면서 말했다.

“무서울 거 없어. 이젠 내가 곁에 있을 거니까.”

양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너도 내 곁에서 함께 하고.”

“내가 너와 영원히 함께할 테니, 너도 영원히 내 곁을 지켜 줘.”

“이러니까 얼마나 좋아.”

수정함을 바라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던 양산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두 손으로 수정함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더니 무언가를 확인했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양산이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쳤다.

내시들이 서둘러 침전에 등불을 밝혔다. 수정함 주위로 몇 개의 등불이 몰려들었다.

허약하고 야위어 보이는 사내가 수정함을 자세히 들여다보고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어떠하냐?”

양산이 물었다.

“폐하, 정말로 부패하고 있습니다.”

사내가 대답했다.

양산이 발길질을 하자, 사내는 단번에 뒤로 고꾸라졌다. 하지만 그는 감히 양산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빌어먹을 놈!”

양산이 이를 부득 갈면서 사내를 욕했다.

“부패하다니! 어떻게 부패할 수 있느냐! 썩지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아방의 심장이 썩어! 어떻게! 아방은 짐과 함께 평생을 보내야 하느니라!”

침전 안의 내시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두려움에 떨었다.

“혹시 수정함이 망가진 게 아닐지요.”

내시 하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른 내시를 향해 말했다.

“어서 새것을 가져오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내가 이마를 땅에 찧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저 수정함은 절대로 망가질 리가 없습니다.”

양산이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럼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건지!”

준수했던 양산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우리 아방의 심장이 도대체 왜 썩고 있냐고!”

사내가 이를 악물고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폐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마마의 심장은 이미 폐(廢)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폐했다고?

사람이 죽었으니, 심장도 폐하는 게 당연지사지.

술수를 쓰는 술사(術士)들은 꼭 말을 저리 괴상하게 한다니까.

고개를 숙인 내시들이 속으로 생각했다.

“아방의 심장이 폐하다니? 남궁(南宮), 잊지 마라. 짐은 정씨 가문의 사위니라.”

정씨 가문의 재능을 따라갈 수는 없지만, 곁에서 보고 들은 게 있는 만큼 양산은 일개 술사의 거짓말에 놀아날 사람이 아니었다.

사내가 서둘러 큰절을 올렸다.

“폐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사내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의 말씀은, 이것은 이제 마마의 심장이 아니기에 폐했다는 뜻이옵니다.”

양산이 실소를 터트렸다.

“이게 아방의 심장이 아니라고? 이건 짐이 두 손으로 직접 아방의 몸에서 떼어낸 것이다. 짐이 아방의 심장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말하는 게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요?

이치대로라면 절대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왜 지금 저 심장이 썩고 있냔 말입니다!

어떻게 사람의 심장이 갑자기 바뀔 수가 있지?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수정함의 심장은 점점 더 빨리 부패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대화하던 사이, 새빨갛던 심장은 금세 짙은 갈색으로 변했다.

양산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재빨리 수정함을 품에 안았다.

“아방, 아방!”

너무 흥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양산의 걸음이 휘청이더니 곧 가슴을 부여잡고 바닥에 쓰러졌다.

“폐하, 폐하!”

내시들이 소리치면서 우르르 몰려갔다. 편전 안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태의, 태의를 불러라!”

이미 고개가 꺾인 채 바닥에 쓰러진 양산은 흡사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으려는 사람처럼 한 손으로 왼쪽 가슴을 꽉 쥐고 있었다. 그의 다른 한 손은 수정함을 꼭 쥔 채로 천천히 굳어갔다.

수정함에 들어 있던 심장은 결국 말라비틀어져 새까맣게 썩은 고깃덩이가 되었다.

아방! 아방!

돌아와!

돌아와!

하늘과 땅의 경계가 사라지고, 동이 트기 직전의 암흑이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덮었다. 어둠 속에 넓게 펼쳐진 늪에서 벌레와 새가 지저귀던 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오더니, 붉은 점처럼 보이는 횃불과 사냥개가 거칠게 숨을 내뿜는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사냥개가 고개를 숙이고 바닥의 냄새를 킁킁 맡으면서 앞으로 달려나갔다. 사냥개가 한 곳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들고 경계하는 모습으로 한 방향을 내다보았다. 그 뒤로 말굽 소리와 횃불이 점점 가까워졌다.

냄새를 맡던 사냥개들이 맹렬하게 짖으며 한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 사냥개가 달리면서 만들어낸 바람에 무성하게 자란 띠풀들이 흔들거렸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온 토끼가 바람을 가르는 화살처럼 빠르게 뛰어갔다.

사냥개들이 급하게 멈춰서고는, 고개를 틀어 토끼가 튀어나온 방향을 향해 짖으며 달려갔다. 진흙이 뒤섞인 늪의 물이 사방으로 튀면서 주변에 난 풀들 위로 쏟아졌다.

“저쪽이다!”

사냥개들을 뒤따라온 사람들이 사냥개가 달려가는 방향을 향해 외치며 말을 재촉했다.

“그쪽이 아닙니다!”

나침반을 들고 있던 서생이 다급하게 외치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카만 하늘을 올려다보는 서생의 얼굴에 횃불이 드리워졌다. 그가 머뭇거리면서 손끝으로 무언가를 계산했다.

“저쪽이 아닐 텐데.”

서생이 중얼거렸다.

“그럼 어디로 가야 하오?”

장수가 소리쳤다. 서생은 미간을 찌푸린 채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됐네. 일단 저쪽으로 가 보지. 어차피 크지 않은 곳이니, 마땅히 도망갈 곳도 없을 걸세.”

서생이 대답하지 않자, 장수가 외쳤다.

그것도 맞는 말이지.

서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수와 병사들은 재빨리 사냥개가 달려간 방향을 쫓아갔다.

그러나 한바탕 추격이 끝난 뒤, 멀리서 사냥개 무리가 토끼 한 마리를 입에 문 채로 돌아왔다. 장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말머리를 돌리려던 찰나, 갑자기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이런, 경성에 무슨 일이 났구나.”

장수가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장수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가자. 지금 당장 강주부로 돌아간다.”

장수의 호령과 함께, 사냥개와 사람들은 허둥대며 왔던 길을 따라 달려갔다. 황량한 들판 위로 횃불과 말굽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갔다.

늪 주위가 다시 조용해지자, 벌레와 새가 다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서서히 동이 트면서 어둠이 걷히자, 하늘이 차츰 쪽빛으로 물들었다.

그때, 늪의 어딘가에서 띠풀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한 사내가 풀숲을 헤치며 걸어 나왔다. 그의 옷은 물에 흠뻑 젖어 있었고, 온몸에는 진흙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차디찬 겨울의 바람이 불어오자, 온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딱딱 부딪혔다. 하지만 그는 몸을 따뜻하게 할 겨를도 없이 냅다 겉옷을 벗어 품에서 이불 보자기를 꺼냈다.

늪에 숨어 있던 여인이 몸을 바들바들 떨며 진흙탕 속에서 기어 나왔다. 진이 다 빠졌는지, 여인은 풀숲으로 올라오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도련님은 어찌 되셨습니까?”

입술이 새파랗게 질린 여인이 물었다. 사내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다행히도 아기는 여전히 발그레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편히 잠들었는지, 아기는 입에서 조그마한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사내가 저도 모르게 웃음 지었다.

“어서 가세. 어서.”

사내가 표정을 가다듬고는, 재빨리 아기를 다시 품에 넣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을 부축하면서 어딘가로 뛰어갔다.

하늘이 점차 밝아지더니, 동쪽에서 붉은 해가 떠올랐다.

또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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