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6화 (156/160)

-깨어나다-

신선거.

장부를 보며 산가지를 놓고 셈하던 소심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노태야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몸종이 슬픔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태평거에서 간신히 쥐어 짜내던 미소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긴.”

소심이 중얼거리면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런 황후를 용납할 수는 없겠지. 황후로 추봉하는 정도만 간신히 받아들일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황실의 체면과 위상도 지킬 수 있고, 새로운 사람을 들이는 것도 지체되지 않을 테니.”

“소심 언니, 내가 노야께 한번 빌어 보려고. 우리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씨께서 황후가 되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제발 아씨를 우리에게 돌려달라고 할래. 그럼 우리가 아씨를 모시고 멀리멀리 숨어서 살면 되잖아. 그렇게 빌어 볼래.”

몸종이 눈물을 떨궜다.

“원하면 뭐 어때. 그리고 아씨가 황후로 추봉되셔도 괜찮아. 그들에게 인정이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다면, 추봉된 황후쯤이야 우리가 모시도록 눈감아주겠지.”

소심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나도 같이 갈래. 나도 노야께 가서 빌어야겠어.”

몸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심을 따라 서둘러 문을 나섰다.

“집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노야께서는 아예 다른 곳으로 피신하셨어. 지금쯤 아마 서원에 계실 거야. 얼른 가자.”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서원을 향해 질주했다. 그러나 서원 어디에서도 장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빌게. 제발 노야께 말씀 좀 전해 줘. 반근이라고. 반근이 노야를 뵙고 싶어 한다고.”

몸종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두 손을 비비며 빌었다. 어린 문지기가 한숨을 쉬었다.

“반근 누나, 나도 누나가 누군지 알아. 내가 말씀드리고 싶지 않아서 이러는 게 아니야. 노야는 정말 출타하셨어.”

정말 서원에 안 계신다고?

“그럼 어디로 가셨는데?”

소심이 다급하게 물었지만, 문지기는 고개를 저었다.

“노야의 성정이 어떠한지는 반근 누나도 잘 알잖아.”

어린 문지기가 두 반근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숨었네, 숨었어.

집까지 찾아와 아첨을 떠는 손님들도, 우리도 피하시려는 거겠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장강주 선생께서는 우리가 찾아오리라는 걸 진작 알고 계셨던 거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소심이 천천히 눈을 감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씨께서는 절대로 남에게 부탁하신 적이 없어. 아무리 큰일을 맞닥뜨릴지라도.”

중얼거리던 소심이 무덤덤한 정교랑의 얼굴을 떠올렸다.

필요 없어. 아직은 내가, 막다른 골목에 몰리지 않았잖아.

난 희망을, 남에게 거는 게, 내키지 않아. 그뿐이야.

아씨, 그럼 지금은요?

혼수상태에 빠져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상태로 막다른 길에 들어섰을 때, 아씨께서는 어디에 희망을 거실 건가요?

향불을 올리러 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보수사가 산 아래에서부터 입구를 굳게 막아놓았다. 마당 안은 정적이 흘렀으며, 오가는 승려들의 표정은 엄숙하기만 했다.

사찰 안에 맑은 종소리가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어린 내시가 조심스럽게 방백종의 앞으로 다가갔다. 방백종이 내시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고 방석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황께서 옥체 강건하시기를 바랍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부처님께서도 전하의 진심을 보셨을 것입니다.”

장순이 말했다.

두 사람은 예복을 입고 있지 않았다. 방백종은 흰색 장포 위에 청색 겉옷을 걸치고 있었고, 장순은 낡은 유삼(儒衫)을 입고 있었다.

법당을 나간 방백종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장순은 방백종과 몇 걸음 거리를 두면서 그를 따라갔고, 주변에 있던 내시들이 양옆으로 흩어지면서 장순에게 길을 터주었다.

“조정의 일들 때문에 너무 정신이 없다 보니, 잠시 나와서 조용히 걷고 싶었습니다.”

방백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천자의 즉위식에는 한 치의 오차도 용납되지 않는다. 지금 조정이 밤낮으로 바쁘게 움직이는 것 또한 천자의 즉위식 때문이었다.

“며칠 전에 명단을 받기는 했는데, 무려 일만일천삼백 명이나 참가한다고 쓰여 있더군요. 너무 많은 것 같지 않습니까?”

이어지는 방백종의 말에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정화(貞和) 초기의 방식일 겁니다. 다만 건흥(建興) 때는 육천팔백 명으로 줄였지요.”

“좀 더 줄이고 싶습니다. 폐하의 병세가 아직 위중하시기도 하고, 선문 태자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안 되기도 했으니, 지나치게 성대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삼천삼백 명 정도면 족할 것 같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두 사람의 뒤에 서 있던 경 공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갑작스럽게 보수사까지 와서 은밀히 장순을 불러온 이유가, 설마 즉위식 의장대의 규모를 정하시기 위해서였나?

사람이 얼마나 필요할지, 마차는 어떻게 준비할지, 궁중 영인들과 악대가 무슨 곡을 부르고 분야별로 어떤 인사를 초청할지와 같은 사소한 일은 천자와 조정 중신이 신경 쓸 문제가 아닐 텐데?

도대체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지?

“황태후와 황후의 행렬은 예에 따라…….”

앞쪽에서 장순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려오자, 경 공공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며 무언가를 퍼뜩 깨달았다.

이 얘기를 하시려고 만난 거로군.

경 공공이 몇 걸음 다가가서 고개를 숙이고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황후에게 책봉 조서를 내리실 때는 황휘장(皇麾仗: 황제의 휘장)과 중적거(重翟車)가 있어야 하며, 자신전(紫宸殿)에서 신하들의 하례를 받아야 합니다.”

장순이 이어서 말했다. 방백종이 걸음을 멈추고 장순의 말을 끊었다.

“강주 선생께서 오늘 나를 사사로이 만난 것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전하께서 신을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장순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내가 폐하의 건강을 기원하며 향을 올리고 싶다고 했더니, 강주 선생께서 보수사에서 만나자고 하셨지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려서 장순을 쳐다보았다.

“선생께선 늘 말씀을 아끼셨습니다. 입을 연다 한들, 절대로 쓸데없는 말씀을 하지 않으셨지요.”

장순이 웃으며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정 낭자가 강주 선생 부친의 목숨을 구해 준 적 있다지요?”

방백종이 불쑥 물었다.

“우연히 알게 된 인연입니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은혜를 입었지요.”

장순이 대답했다.

“물 한 방울의 은혜를 넘치는 샘물로 갚는 것을 몸소 실천하다니, 선생께서는 참으로 덕행이 뛰어나십니다. 선생의 보은에 덕을 보게 된 사람이 비단 정 낭자뿐만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요. 무원산 형제도 있고, 나도 있으니까요.”

방백종이 장순을 쳐다보았다.

“은인이 하고자 하는 일이 있다면, 그 일이 성사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바로 보은일 겁니다.”

방백종이 말을 끝내자, 장순이 웃으면서 서둘러 예를 표했다.

“별말씀을요. 당치도 않습니다. 신은 무엇을 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본심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방백종은 설핏 웃기만 하고 아무런 말 없이 걸음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았다.

두 사람은 어느새 관음전 뒤편의 석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바람이 불어오자, 석탑에 달린 구리 방울이 맑은 소리를 냈다.

“누구에게나 본심이 있지요, 나 역시 마찬가지고요. 다들 믿지 않겠지만.”

방백종이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장순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방백종이 석탑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이 탑은 처음 세워질 때부터 서북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장순이 멈칫했다가,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경성에서 오래 지낸 장순이 보수사의 석탑에 관한 유래를 모를 리 없었다.

“그 당시에 누군가가 연유를 물었더니, 이 탑을 만든 장인은 백 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바로 세워질 거라고 대답했죠.”

잠시 머뭇거리던 방백종이 이어서 말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장순을 쳐다보았다.

“내년이면 딱 백 년이 되니, 참으로 거의 바로 세워졌겠지요.”

방백종이 눈빛을 반짝이며 목청을 높였다. 장순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먼 게 아니라면, 보일 겁니다. 아니, 설령 눈이 먼 사람이라 해도, 다른 사람의 말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방백종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잠시 방백종을 빤히 바라보던 장순은 이윽고 미소를 보이며 예를 표했다.

영화 4년 10월 초열흘, 건원제가 퇴위했다. 제위를 이어받은 태자 위는 연호를 천성(天聖)으로 정했다.

10월 열하루, 천성제가 등극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였다. 근정전에 있던 방백종이 내시가 두 손으로 받치고 있는 책봉 조서를 바라보았다.

“황상, 정말 이리해야겠소?”

옆에 앉아 있던 태후가 입을 열고 물었다. 방백종의 시선은 여전히 책봉 조서에 머물러 있었다.

“황후 책봉은 조금 늦어져도 상관없소.”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 태후의 말이 끝나자마자, 방백종이 고개를 돌려서 태후를 쳐다보았다.

즉위식을 마친 후, 방백종에게서는 차츰 천자의 위엄이 생기고 있었다. 태후가 방백종의 시선을 살짝 피했다.

“황상, 다른 뜻은 없소. 지금 정 낭자가 병이 나서 저리 누워 있는데, 황후 책봉식을 강행하다가 몸에 무리가 가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오. 이렇게 하는 게 꼭 좋은 일인가 싶기도 하고, 그 몸으로 어떻게 책봉을 받겠소?”

태후의 말에 방백종이 웃음을 지었다.

“짐이 황후를 들고 책봉을 받게 하겠습니다.”

방백종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고개를 숙이고 옥새를 들어 책봉 조서 위에 찍었다.

오늘부로 성 정, 명 방에게 책봉 조서인 금책과 인장을 하사하고, 황후의 존귀를 누리게 하겠노라. 황후는 짐과 한 몸으로 종묘를 받들고, 나라의 국모로서 백성들과 함께할지어다.

두 무리의 내시들이 대열을 맞추고 미소 띤 얼굴로 성지, 금책, 황후 인장, 예복, 봉관을 받들며 궁문을 나갔다. 그들은 어가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황후 책봉을 만천하에 알렸다.

신선거 위층에서는 소심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을 쏟고 있었다.

걱정하지 말자. 걱정할 것 없어.

그때, 문이 열리고 어린 환관 한 명이 웃으며 안으로 들어와 소심을 향해 예를 표했다.

“소심 아가씨, 동궁으로 돌아가시지요.”

그 말을 들은 소심은 고개를 돌리고 냅다 뛰기 시작했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때문에 길이 잘 보이지 않아서, 소심은 뛰어가는 내내 어린 환관과 소식을 듣고 달려온 오 관리인, 이대작 등과 연신 부딪혔다. 소심은 걱정 어린 눈빛으로 조심하라고 외치는 사람들을 제치고 계단을 구르다시피 내려갔다.

아씨, 아씨!

동궁의 대문이 활짝 열리고, 내시와 시녀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서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조서를 전달하러 온 내시들은 그들이 터준 길의 중앙을 걸으며 태자의 침전으로 향했다.

태자의 침전 안, 문이 열리고 안채의 구슬발이 걷혔다.

방 안의 시녀들이 꿇어앉아 금책, 봉인, 예복, 봉관을 차례로 건네받고, 성은에 감사하다는 큰절을 올리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내실로 들어갔다.

침상 앞의 휘장이 걷히자, 비단이불을 덮고 있는 말끔한 용모의 여인이 보였다. 여인은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단정하게 누워 있었다.

“마마, 경하드리옵니다.”

금책, 봉인, 예복, 봉관을 든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합창했다.

세 번의 큰절 이후 몸을 일으킨 시녀들은 품에 안고 있던 것들을 정교랑의 옆에 내려놓고, 내일 거행될 황후 책봉식에서 입을 예복과 봉관을 침상 옆의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정교랑의 측근에서 시중을 드는 시녀 두 명을 제외한 다른 시녀들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오늘도 산책을 모시고 나가야 하나?”

한 시녀가 창가를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 폐하께서 마마의 일상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고 하셨어.”

다른 시녀가 대꾸했다.

“오늘은 경사스러운 날이잖아.”

앞선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에이, 이 정도 경사에는 끄떡도 없지. 당초 마마께서는 폐하와 혼사를 치른 이튿날 아침에도 활쏘기 연습을 하러 가셨잖아.”

다른 시녀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두 사람이 몸을 일으켰다.

“가서 가마를 준비해.”

한 시녀가 말하고는 정교랑을 부축하기 위해 침상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른 시녀가 가마를 준비하라고 말하려 문가를 향해 걸어가던 찰나, 갑작스럽게 안쪽에서 비명 소리와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시녀가 서둘러 고개를 돌리자, 침상을 향해 갔던 시녀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뒷걸음질 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시녀는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내내 악 소리를 질러댔다.

“왜 그래?”

문가로 향하던 시녀가 재빨리 다가와서 침상 위를 쳐다보고는, 똑같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도 없어요? 빨리 좀 와 봐요!”

아직 자리를 뜨지 않고 마당 안에 줄지어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은 비명을 듣자마자 안색이 창백해졌다.

설마?

태자비가 어떤 상태인지는 다들 알고 있었다.

두 달 넘게 병석에 누워만 있다가 결국 숨을 거두는 건가?

왜 하필 황후 책봉식이 코앞인 지금에 그렇게 된 거지?

복을 누릴 팔자가 못 되는 사람이라는 게 더 확실해지는구나.

황후의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겠군.

다급하게 내실로 뛰어 들어왔던 사람들은 구슬발 너머의 광경을 보고 흠칫 놀라며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여인은 천천히 몸을 옆으로 돌려 일어나고 있었다.

여인의 동작은 무척이나 뻣뻣했다. 아주 더디게 조금씩 조금씩 몸을 일으킨 여인은 백옥보다 창백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항상 감겨 있던 두 눈이 서서히 떠지자, 여인의 눈이 보였다. 여인의 눈동자는 흰자위로 가득했으며, 동공은 점처럼 작아져 있었다.

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은 시녀들보다 더 크게 비명을 질렀다.

어떤 사람들은 겁에 질린 모습으로 휘청거리면서 밖으로 뛰쳐나갔고, 문가에 남아있는 사람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거나 다리가 풀려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내실을 가득 메웠다.

정신없는 혼란 속에서 침상 위의 여인이 눈동자를 움직였다. 흰자위가 차츰 작아지고, 동공에 서서히 초점이 잡혔다. 하지만 여인의 얼굴은 움직여지지 않는 몸만큼이나 생기가 없었다.

“난…… 누구지?”

여인이 멍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황궁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덕경전 앞.

천자의 즉위식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슬슬 발걸음을 돌릴 때, 누군가가 덕경전 앞으로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 발걸음 소리는 황궁의 적막을 깨트리고, 만인을 수용할 수 있는 넓디넓은 광장에 울려 퍼졌다.

선덕문 앞에 서 있던 금위군들이 깜짝 놀라 광장을 향해 뛰어오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뛰어오는 사람은 키가 훤칠한 사내였는데, 놀랍게도 황제의 조복을 입고 있었다. 다리가 어찌나 긴지, 그는 넓은 보폭으로 광장을 금세 가로질러 뛰어갔다.

예복을 펄럭이며 성큼성큼 뛰어가는 사내의 뒤로, 한 무리의 내시들이 그를 따라 작은 보폭으로 종종거리며 뛰어가고 있었다. 무리의 끝자락에는 황제의 가마를 들고 있는 내시들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뒤따르는 것이 보였다.

누가 황제의 조복을 훔친 건가?

금위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굉장히 터무니없는 생각이지만, 감히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다. 황궁은 예의와 법도가 엄격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천자의 몸가짐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사내와 내시들이 덕경전 앞을 스쳐 지나갈 때, 뛰어가는 사람을 가까이서 보게 된 금위군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늘의 일이 기거주에 기록되어서는 절대로 아니 된다.”

숨을 몰아쉬던 내시가 본분을 잊지 않고 옆에 있던 어린 내시에게 당부했다.

“어서 가서 아까 같이 있었던 시강에게 알리거라.”

조금 전, 황제는 대신들과 함께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전해 온 소식을 귓속말로 듣고는 벌떡 일어나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낮은 탁자를 폴짝 뛰어넘으며 문가로 달려나갔다.

어린 내시는 당시 자리에 있었던 대신들이 주먹 하나가 전부 들어갈 정도의 크기로 입을 떡 벌리고 있던 것을 보았다.

대신들의 입은 안 그래도 몹시 큰 편인데, 폐하께서 그리 추태를 보이시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으니, 그들은 분명 이 일을 안팎으로 소문낼 거야.

폐하께서 즉위하시자마자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셔서는 안 돼!

어린 내시가 즉시 몸을 돌리고 왔던 길로 뛰어갔다.

“폐하, 폐하.”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쫓아온 경 공공이 방백종을 따라 뛰는 내시들을 제치고 그의 뒤에 따라붙었다.

“가마를 타십시오. 가마요.”

하지만 방백종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큰 보폭으로 뛰어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시점에 불어오는 서늘한 북풍이 방백종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식혔다.

방백종은 가슴에서부터 느껴지던 통증이 차츰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거운 것을 들지도, 무거운 검을 쓰지도 말라고 했던 정교랑의 충고가 떠올랐다.

근정전에서 궁문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지?

오늘따라 왜 이렇게 멀게 느껴지는 거야. 어째서 아직도 동궁에 도착하지 못한 거냐고.

동궁이 이렇게 먼 줄은 오늘에서야 처음 알았네.

방백종이 서둘러 거처를 동궁으로 옮긴 이유는 단 하나, 가까워서였다. 정사가 바쁜 시기에도 최대한 빨리 정교랑의 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안 되겠어. 동궁도 멀어. 아예 거처를 궁 안으로 옮겨야겠다.

황궁의 법도에 맞지는 않지만, 법도 따위가 무슨 대수라고. 그 여인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그 여인의 곁으로 더 빨리 갈 수만 있다면 아무렴 상관없지.

그때, 누군가가 방백종의 팔을 붙잡았다.

“폐하, 더는 뛰시면 안 됩니다!”

경 공공이 결례를 무릅쓰고 방백종의 팔을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방백종은 곧바로 경 공공의 손을 뿌리쳤다. 경 공공은 답답했지만, 감히 황제의 앞을 강제로 막을 수는 없었다.

혹여나 황제의 다친 몸이 덧나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웠던 경 공공은 하는 수 없이 방백종을 보호하며 그의 뒤를 따라 뛰었다.

방백종의 시야 저 멀리 동궁이 어렴풋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황후마마께서 어찌 되셨다고?”

방백종의 앞을 넘어선 경 공공이 문가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물었다.

내시가 대답하기 전에, 방백종은 문턱을 넘어섰다. 그가 하도 빠르게 문을 넘는 바람에, 방백종을 향해 예를 표하던 내시들은 순간 매서운 바람이 불어온 줄 알았다.

황후마마께서 어찌 되셨다고?

황후마마께서, 깨어나신 것 같습니다.

깨어난 거면 깨어난 거고, 깨어나지 않은 거면 깨어나지 않은 거지, 깨어난 것 같다는 말은 도대체 뭐야!

방백종은 침전을 향해 가는 길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예를 표하는 것을 미처 보지도 못한 채 침궁 앞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문 앞에서 다급하게 멈춰 섰다.

또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방백종은 종종 그런 꿈을 꾸곤 했다. 자신이 침궁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열면, 팔걸이의자에 기대어 있는 여인이 평온하게 책장을 넘기다가, 자신을 향해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짓는 꿈. 그러나 바로 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모든 게 하얀 연기처럼 사라지는 장면이었다.

그는 같은 꿈을 꿀 때마다 매번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러고는 미약한 숨을 내뱉으며 옆에 누워 있는 정교랑을 동이 틀 때까지 품에 안고 있었다.

그는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 사라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인이 숨 쉬지 않고 차갑게 굳어버린 시체가 되어, 깊은 땅속에 묻히고 차차 썩어 가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그는 무척이나 두려웠다.

그는 몇 번이고 되뇌며 기도했다. 이 여인이 자신을 영영 신경 쓰지 않아도 좋고, 자신을 미끼로 이용해도 좋고, 설령 자신을 떠난다고 해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게 해 달라고.

“폐하.”

마당 안에 서 있던 내시와 시녀들이 방백종을 향해 예를 올리자, 잠시 넋이 나갔던 방백종이 정신을 차렸다.

꿈이어도 괜찮아. 그래도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니까.

방백종이 더는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을 옮기자, 궁녀들이 차례로 문을 열고 구슬발을 걷었다. 침상 앞의 휘장은 묶여 있었고, 침상 위에는 옆으로 돌려 누운 한 여인이 있었다.

아름답게 치장하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린 여인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로 문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여인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그런 여인에게서 미약하게나마 생기가 느껴졌다.

그러나 방백종은 입술만 움찔거릴 뿐, 무언가가 목을 꽉 막은 것처럼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정방.”

방백종이 입을 열고 갈라진 목소리로 여인을 불렀다.

여인이 방백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 순간, 멍하던 여인의 눈빛이 차츰 반짝이기 시작했다.

“정방.”

여인이 말했다.

여인의 목소리는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 같기도, 물어보는 것 같기도, 혹은 그의 말을 단순히 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정방!”

방백종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여인이 그를 쳐다보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린 동작이었지만, 얼핏 보면 느긋하고 여유로운 몸짓인 것 같기도 했다.

“정방.”

여인이 또 말했다.

실내에 울려 퍼지는 단조롭고 반복되는 말에, 바깥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오랜 시간 큰 병을 앓다가 깨어난 기쁨도, 다시 만난 부부가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도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 중 한 명은 침상에 앉아서, 다른 한 명은 문가에 멀찍이 서서 허공에서 서로의 시선을 마주치기만 했다. 그들은 처음 보는 낯선 사람처럼 서로를 대하는 것 같았다.

정말 이상하네.

시녀 하나가 갑자기 엇, 하는 소리를 냈다.

“마마께서 조금 전보다 훨씬 좋아지셨어요.”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조금 전? 조금 전엔 어떠셨는데?”

경 공공이 물었다.

“조금 전에는, 몸도 못 일으켰고 동작도 지금보다 훨씬 더디셨어요.”

다른 시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소심은 마차가 멈춰 서기도 전에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소심 언니.”

소심이 고개를 돌리자, 다른 마차 한 대가 급하게 멈춰 섰다. 마차 안에 타 있던 반근이 재빨리 뛰어내리고는 소심을 향해 손짓했다.

“아이고, 드디어 오셨군요!”

소심과 반근이 동궁 문을 넘어서자, 한 내시가 다급하게 달려오더니 두 사람을 맞이했다.

“어서 가서 마마를 뵈시지요.”

불안한 마음이 든 반근은 순간 다리가 풀려서 자리에 주저앉을 뻔했다.

“아씨께서 어떻게 되셨어요?”

소심이 소리쳐 물으며 반근의 손을 꼭 잡았다.

방백종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침상 위의 여인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어서인지, 여인의 동작이 너무나 느렸기 때문인지, 방백종은 아주 더디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

문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있던 시녀들은,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던 사람은 정방이 아니라 방백종이 아닐까 생각했다.

“정방.”

방백종이 여인을 불렀다. 여인은 여전히 방백종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전처럼 방백종의 말을 반복하지 않았다.

“이제 괜찮아요? 태의를 불러올까요?”

방백종이 물었다. 여인이 채 대답하기 전에, 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씨, 아씨!”

들려오던 목소리가 문 앞에서 막혔다.

“안으로 들이거라.”

방백종이 말했다.

가장 먼저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반근이었다. 반근은 침상 위에 앉아 있는 여인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여인을 향해 돌진했다.

“아씨, 아씨!”

반근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아씨.”

잰걸음으로 옆에 다가온 소심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실내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하지만 여인은 여전히 침상 위에 단정하게 앉아 고개만 돌린 채로 자신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웃는 반근과 소심을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움직이셨어요!”

밖에 서 있던 시녀가 갑자기 소리쳤다.

무슨 말을 그렇게!

경 공공이 시녀를 흘겨보았다.

깨어났으니 당연히 움직이시는 게지.

소리친 시녀가 황공한 표정으로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속으로 투덜댔다.

저희는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하시는 마마의 시중을 들었잖아요.

쳇, 잠시 적응이 안 돼서 그런 것뿐인데.

여인이 침상 가장자리로 자리를 옮겨서 걸터앉았다.

계속 병석에 누워있었던지라, 여인의 발에는 신발이 아닌 하얀 버선만 신겨져 있었다. 여인의 조그마한 발이 침상 아래로 내려왔다.

반근과 소심이 서둘러 눈물을 닦고 얼른 정방의 신발을 찾아 신겨 주었다.

“당장 태의를 부르거라.”

방백종이 말했다. 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알겠다고 대답하며 몸을 돌리려던 찰나, 여인이 입을 열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시녀들이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여인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동자를 굴리는 데 한참이 걸리고, 부러진 나뭇가지처럼 움직이던 여인이 자기 힘으로 바닥을 디디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옷소매를 아래로 내려뜨렸다. 그러고는 두 손을 다소곳하게 몸 앞으로 모았다.

여인이 동작을 멈추자, 아래로 쫙 펴진 넓은 소매에서는 미세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정방, 깨어난 거예요?”

방백종이 정방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물었다.

깨어난 거냐고? 당연히 깨어나신 거 아닌가?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올려다보았다. 정방이 방백종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네, 깨어났어요.”

그러고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을 덧붙였다.

“방백종.”

방백종!

방백종!

방백종은 누군가가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세게 내리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정방이 발을 떼고 첫걸음을 내디뎠다. 정방의 첫 걸음은 아주 더디고 위태로워 보여서, 반근과 소심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방을 부축했다.

하지만 두 번째 걸음을 내디딜 때부터, 정방은 균형을 잡고 안정적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반근과 소심을 살짝 옆으로 밀쳐냈다.

“깨어났으면 됐어요.”

방백종이 자리에 멈춰선 정방을 보고는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말을 이었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의 갈라진 목소리로 다 말하기도 전에, 정방은 그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두 걸음.

세 걸음.

정방이 한 걸음씩 자신을 향해 걸어오자, 온몸이 굳어 버린 방백종은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이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번에는 정방이 두 팔을 벌리고 방백종을 덮쳐왔다.

방백종은 반사적으로 두 팔을 뻗었고, 정방은 그의 품에 안겨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방백종.”

정방이 말했다.

침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멈칫하고는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그들은 정신없이 나가느라 다른 사람의 발을 밟기도 하고, 장식품 선반을 건드리기도, 문틀에 몸이 부딪히기도 했다. 온갖 소리를 내며 우르르 몰려나갔다.

“잠깐 놓아 줘요. 물어볼 게 있다니까요. 이래도 소용…….”

방백종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경 공공은 재빨리 몸을 돌리고 문을 닫아서 말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차단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밖으로 몰려나온 사람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물러가거라.”

경 공공이 손짓했다.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또 우르르 문밖까지 몰려나갔다.

“그리고, 태의를 불러오너라.”

경 공공이 말하고는, 조금 전의 광경을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깨어나시긴 했나 보네. 이렇게 벌건 대낮부터 저러고 계시니 원.”

경 공공이 작게 중얼거렸다.

부드러운 몸이 자신을 꽉 껴안자, 두꺼운 옷 너머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품에 안고 있어도, 이불로 꽁꽁 싸매도 늘 얼음처럼 차갑기만 했던 예전의 몸과는 달랐다.

방백종의 몸이 살짝 떨려왔다.

그가 정방의 허리를 붙잡고 정방을 앞으로 살짝 밀어냈다.

“또 이렇게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요. 물어볼 게 있으니까, 똑바로 대답해 줘요.”

방백종이 쉰 목소리로 말했다.

그에게 밀쳐진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게 웃던 정방이 입을 열었다.

“방백종.”

정방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를 향해 또 손을 내밀었다.

“이래도 소용없어요! 매번 이런 식으로 나를 달래고 넘어가려 하지 마요.”

방백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환한 미소와 애틋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면서 두 손을 내밀고 있는 정방을 바라보았다.

“방백종.”

정방이 다시 한번 방백종을 불렀다. 달처럼 휘어진 정방의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방백종이 정방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방!

정방!

정방!

정방의 허리 위에 있던 방백종의 큰 손이 정방을 확 끌어당겼다. 그는 정방을 더욱 세게, 다시는 놓치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정방!

정방!

정방!

드디어 돌아왔군요.

드디어 돌아왔어요.

방 안이 조용해지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창가 가까이 선 두 사람의 몸에 노을빛이 드리워졌다.

“정방.”

방백종이 이름을 부르자, 정방이 대답했다.

정방은 새하얀 연기가 되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체온이 느껴지는 따뜻한 몸으로 자신의 품에 꼭 안겨 있었다.

“물어볼 게 있어요.”

방백종이 말했다.

정방이 그를 놓아주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갑자기 품 안이 허전해진 방백종은 뭔가가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정방에 허리에 올려두었던 손에 힘을 주었다. 그 덕분에 방백종의 품에서 벗어나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서 있으려던 정방이 다시 그의 품으로 들어왔다.

“육가아에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거, 당신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던 거죠?”

방백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가 정방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일찍이라면, 얼마나 일찍이요?”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정방이 진지하게 물었다.

일찍이라면, 얼마나 일찍이냐고?

아냐. 육가아가 다치게 된 건 평왕 때문이고, 육가아가 입궐하게 된 건 태후 때문이고, 육가아가 죽은 건 고능준 때문이었어.

방백종이 심호흡을 하고는 손에서 힘을 살짝 뺐다.

“혹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는 거예요?”

방백종이 묻자, 정방이 웃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알고 있었다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겠죠.”

정방은 방백종을 두 손으로 꼭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말이 뭔지 알아요. 하지만 육가아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거라는 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에요. 나도 할 수 있고, 당신도 할 수 있죠. 육가아 같은 사람이 남의 손에 도구처럼 쥐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시간문제예요.”

방백종은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정방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하지만 경성에 무슨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요. 청원 역참에서 당신이 불꽃놀이를 보여 준 그날, 천상을 보았거든요.”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는 것을 보고, 일식과 월식을 예측했던 것처럼, 정방은 하늘을 읽고 길흉화복을 예측할 수 있다.

“육가아가 죽을 거라는 천상이었어요?”

방백종이 물었다. 정방이 품에 안긴 채로 고개를 젓자,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방백종의 턱을 간지럽혔다.

“천상은 무언가를 예고할 뿐이에요. 그게 누구인지, 누가 어떻게 될지는 알려 주지 않아요. 오성이 모인다는 건 천자에 관한 일이 생긴다는 뜻인데,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어떤 일을 겪게 될지는 사람의 힘으로 알 수 없죠.”

정방이 작게 탄식했다.

“우리는 예전에 이 이치를 잊고, 천도를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天道遠, 人道邇, 非所及也) 걸 망각했죠.”

그때의 세상에서도 정씨 가문은 천상을 읽고, 왕조의 종말을 예감했죠. 그래서 우리가 인정한 황제를 자발적으로 택했어요.

“우리가 성문 밖에 발이 묶여 있을 때, 경성 안에 다른 누군가가 있지는 않았나요?”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 자세를 바로 하고 방백종을 쳐다보며 물었다.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秦)씨 가문에서 연평 군왕을 데리고 먼저 경성으로 들어와 있더군요.”

“연평 군왕이요?”

살짝 놀란 듯한 정방이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복건(福建)의 연평 군왕이라…….”

“연평 군왕이 왜요?”

방백종이 물었다.

“천상을 보는 사람이 나 하나뿐만은 아니에요. 다른 고수도, 두우 별자리가 나타나는 땅에서 새로운 천자가 나오리라 생각했겠죠.”

그때 정씨 가문이 양씨를 새로운 군주로 모시겠다고 결정했던 것처럼요.

사실 제성(帝星)이 나타나는 지역에 양씨 가문만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결국 정씨 가문은 천도(天道)를 이겼으나 인도(人道)에 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연평 군왕과 마찬가지로 오월 지역에서 태어난 진안 군왕은 사실 기회를 선점했다고 보기 힘들었다. 정방은 진안 군왕이 유리한 조건을 선점할 수 있도록 경성으로 달려간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육가아가 걱정되어서, 혹여나 그를 살릴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급히 달려간 것뿐이었다. 하지만,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내가 궁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었어요.”

정방이 조용히 말하고는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미안해요. 내가 육가아를 살리지 못했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다시 품에 안았다.

“아니에요. 당신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어요.”

방백종이 정방을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정방, 당신이 미안해할 게 아니라, 내가 미안해요. 내가.”

“정방, 미안해요.”

“정방, 내가 당신에게 묻지 말아야 할 것을 물었어요.”

정방이 웃었다.

“묻지 말아야 할 건 또 뭐예요. 알고 싶은 게 있거나,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면, 나한테 꼭 물어봐 줘요.”

나한테 묻지 않고 혼자 생각하지 마요. 혼자 추측하지도 말고, 자문자답하지도 말고요.

양산, 당신은 내게 말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았지. 그러니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싫어하고, 무서워하는지를.

정방이 방백종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방백종, 내게 물어봐 줘서 고마워요. 내게 묻는 걸 겁내지 않아서 정말 고마워요.

“또 묻고 싶은 게 있나요?”

정방이 물었다.

“없어요. 없어.”

방백종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정방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주 오라버니를 살릴 수 있었던 건, 아직 오라버니에게 숨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태자 전하는 이미 생기와 혼이 없을 때여서, 난…….”

말하지 마요. 해명하지도 말고요. 알겠어요. 이젠 다 알겠어요.

방백종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정방의 말을 끊고 싶었지만, 정방을 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말하고 있는 정방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달콤하고 은은한 연지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때문에 방백종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나는, 나는 단지 그만 말하게 하고 싶었을 뿐인데. 이러려던 게 아니라.

엉큼한 생각이 방백종의 뇌리를 스쳤다.

이러려던 게 아니라?

“폐하!”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방백종은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정방이 재빨리 손을 뻗어 그를 붙잡았다. 귀까지 새빨개진 방백종은 곧장 문밖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일이냐!”

문이 벌컥 열리면서 격노한 방백종의 호통이 들려오자, 경 공공은 깜짝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폐하.”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을 듯한 얼굴의 방백종을 보자, 경 공공은 말을 더듬었다.

“태, 태의를 불러왔습니다.”

혼수상태로 몇 달을 보내셨으니, 태의를 불러 마마의 봉체를 살피셔야지요.

방백종이 요동치는 민망함을 가라앉히면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약상자를 들고 있던 태의는 방백종의 기세에 놀라 종아리에 경련이 일었다. 경 공공의 따가운 눈초리를 느낀 태의가 하는 수 없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이며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됐어요. 난 괜찮으니까.”

정방이 문가로 다가와서 말했다.

“그래도 한 번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당신의 말도, 썩 미더운 건 아니던데.”

방백종이 정방을 쳐다보며 말했다.

거짓말쟁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방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방백종, 이리 와요.”

정방이 몸을 돌리고 욕실을 향해 걸어갔다.

“내가 보여 줄게요.”

정방의 말을 들은 방백종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정방을 따라갔다.

경 공공과 태의는 넋을 놓은 채 문가에 그대로 서 있었다.

폐하의 존함을 저리 함부로 부르시다니!

경악한 태의의 놀란 가슴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의 목덜미를 확 붙잡았다.

“무얼 보았습니까?”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태의는 두려움에 몸을 살짝 떨었다.

“아, 아, 아니요.”

“무얼 들었습니까?”

경 공공이 위협적인 모습으로 또 물었다. 태의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 아무것도요.”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 못했습니다.

“그만 물러가십시오.”

경 공공은 그제야 태의를 놓아주었다. 태의는 재빨리 약상자를 고쳐 들고 바람처럼 빠르게 사라졌다.

뭘 보여 주시겠다는 거지?

경 공공이 속으로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목을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욕실로 들어간 후였다.

보여 준다고? 굳이 욕실에서 뭘 보여주겠다는 거지?

그나저나, 조금 전에 문을 부수듯이 열어젖힌 폐하의 모습이 영 낯설지만은 않은데.

맞아. 지난번에도 그런 표정과 화난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어. 청원 역참으로 가던 길이었지. 꼭 마차 안에서 무언가를 하시다가 끊긴 것 같은.

경 공공이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었다. 그는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을 생각했다고 여기며 서둘러 문을 닫았다.

그리도 급하십니까.

마마께서 이제야 깨어나셨는데, 살살 좀 하시지.

하지만 방백종은 욕실 안에 가만히 서 있었다.

정방은 스스로 치마저고리를 벗고, 치마를 풀고, 몸을 둘러싼 겹겹의 옷들을 하나하나 벗으며 새하얀 내의 한 장만 남겨두었다. 정방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하얀 내의를 어깨 아래로 내렸다.

내의를 내리자, 가슴을 겨우 가리는 붉은 배두렁이(肚兜: 고대 중국 여인들이 입는 등과 어깨가 완전히 노출되어 있고, 목에 끈을 묶어 가슴과 배만 가리는 붉은 천)와 새하얀 어깨, 그리고 정방의 가녀린 쇄골이 드러났다. 실내는 어둑했지만, 붉은빛의 배두렁이는 단연 돋보였다.

방백종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개졌다.

방백종이 정방의 몸을 처음 보는 것은 아니었다. 정방이 혼수상태에 빠진 뒤, 방백종은 손수 정방의 몸을 씻기면서 옷을 갈아입혔고, 정방의 몸에 자상이 생겼던 곳에 직접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아주었다. 어떻게 보면, 볼 꼴 못 볼 꼴을 모두 지켜본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눈앞에 있는 여인의 몸은 자신이 돌봤던 그 몸이 아닌 듯했다.

정방의 몸은 마치 거대한 불덩이 같았다. 방백종은 갑자기 눈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에, 황급히 시선을 피하고 허둥대면서 정교랑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상의를 여며 주었다.

“추, 추워요. 장난치지 마요.”

방백종이 말했다.

“방백종, 잘 좀 봐요.”

정방이 옷을 여미는 방백종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얹고, 상의를 더 아래로 끌어내려 아예 바닥으로 떨구었다. 그리고는 두 팔을 벌리고 방백종의 앞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광채가 느껴질 정도로 매끈한 어깨와 새하얀 피부가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에 빛나고, 붉은 천 아래로 솟은 봉긋한 가슴이 정방의 몸짓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다. 잘록한 허리와 일자로 쭉 펴진 쇄골을 보던 방백종은 갑자기 극심한 갈증을 느꼈다. 호흡이 가빠오던 방백종은 결국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봐요. 상처가 다 나았어요.”

한 바퀴를 다 돈 정방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아, 맞다. 상처!

방백종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서 정방의 몸을 자세히 살폈다. 곳곳에 생겼던 자상이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며칠 전에 약을 바꿀 때까지만 해도, 울퉁불퉁한 흉터가 남아있었는데.

하긴, 이렇게 아무는 게 오히려 정상이겠지. 주복을 봐. 그렇게 심했던 상처도 반나절 사이에 거의 아물었으니까. 아주 놀라 까무러칠 정도로 빠른 속도였어.

그를 치료할 수도 있었으니까, 정방은 당연히 자기 자신의 상처도 치료할 수 있겠지.

정방은 방백종의 표정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살린 거예요.”

흠칫 놀란 방백종이 정방을 바라보았다.

“내가 쓴 건, 무왕축(巫王祝)이라는 주술이에요. 난 왕이 아니라 왕축을 쓰면 안 됐는데, 다른 방도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무왕축을 썼어요. 결국 왕축의 저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죠.”

방백종이 정방을 쳐다보았다. 죽어갔다는 말을 들은 방백종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정말로 죽을 수도 있었구나. 정말로 죽음의 문턱 앞까지 갔던 거였어.

“그런데 방백종, 당신이 나를 책봉했어요. 당신이 나를 황후로 책봉해 줘서, 내가 왕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깨어난 거예요.”

정방이 웃음기 서린 얼굴로 방백종을 바라보면서 손을 내밀었다.

“방백종.”

그렇게 된 거였구나. 그렇게 된 거였어.

그는 목구멍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쏟아져 나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방이 내민 손을 아랑곳하지 않고, 갈라진 목소리로 탓하듯이 말했다.

“왜 그런 걸 미리 알려 주지 않았어요. 일찍이 말했으면 좋았잖아요.”

그깟 황후가 무슨 대수라고. 황후로 책봉하는 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이렇게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됐을 텐데.

당신을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하지도 않았을 텐데!

“나도 무왕축을 쓰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정방이 말하고는,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다시 손을 내밀었다.

“방백종.”

방백종이 정방의 시선을 피하려 고개를 돌렸다.

“몰랐다고요? 당신이 몰랐던 게 있기는 해요? 거짓말쟁이. 듣기 좋은 말로 사람을 달랠 줄만 알지. 이제 난 절대 당신 안 믿어요.”

그가 미리 알고 있었더라면, 오래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절대로 오래 기다리지 않고,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사람을 모조리 쓸어 버렸으리라. 깨끗하게 쓸어 버리고, 그녀를 황후로 책봉했을 것이다. 그게 얼마나 어렵고, 얼마나 추악한 수단을 필요로 하는 일이든 무슨 상관이랴.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녀는 말해 주지 않은 것이다.

사람의 도리를 따르게 하기 위해서.

그가 그녀를 위해 사람의 도리를 내던지고 그 자리를 쟁취할까 봐, 그가 올바른 명분 없이 황위에 올라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을까 봐, 그가 역사서에 추한 이름으로 기록될까 봐, 그녀는 말하지 않았다. 절대로 말해 줄 수 없었다. 그러느니 차라리 기다리는 편이 나았다.

그녀는 그를 믿고 있었다. 언제나 그를 믿었다.

“방백종.”

정방이 또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방백종은 그제야 정방을 쳐다보면서 정방이 내민 손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또.”

정방이 초승달처럼 눈이 휘어지게 웃으며 방백종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얹은 뒤, 심장이 뛰는 가슴 위로 그의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여기도 만져 봐요.”

얇은 천 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정방의 가슴께는 더 이상 딱딱하고 차갑지 않았다. 정방의 가슴에서는 쿵쾅대는 심장 박동과 따스한 사람의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

방백종이 퍼뜩 고개를 들어 정방을 바라보았다. 그가 다시 고개를 숙여 걸리적거리는 붉은 천을 황급히 걷어내고는 아예 두 손으로 정방의 가슴을 매만졌다.

방백종은 한 손을 정방의 가슴에 올려둔 채,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옷을 풀어헤치고 자신의 가슴팍에 손을 올렸다.

정말이야. 정말로 나와 똑같은 온기가 느껴져!

“이게 돌아왔어요.”

남에게 빼앗기고, 구속되고, 도려내진 심장이 다시 내게 돌아왔어요.

“방백종, 당신이 날 도와 찾아준 거예요.”

정방이 말했다.

방백종은 정방이 무슨 말을 하는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마냥 기쁘기만 했다. 정방의 표정이, 지금 그녀가 얼마나 기쁜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데 방백종의 손이 워낙 크다 보니, 정방의 심장 위에 놓았던 손안에는 다른 것도 들어와 있었다. 그것은 정방이 숨을 쉴 때마다, 그의 손안에서 위아래로 부드럽게 움직였다.

방백종이 저도 모르게 손바닥을 천천히 움직였다. 눈처럼 하얀 피부는 두부처럼 매끄러웠다. 한 손으로는 다 잡히지 않는 정방의 풍만한 가슴을 만지던 방백종이 갑자기 다른 손으로 자신의 옷을 급하게 벗어 던졌다.

“정방.”

방백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정방을 불렀다. 그의 목소리는 몸속에서 용솟음치는 무언가를 막으려는 듯 떨렸고, 동시에 다급하기도 했다.

“당신도 봐요, 나를.”

정방이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정방이 그의 손을 몸에서 떼어내려고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내가 당신의 몸을 봐서 뭐해요. 당신 몸에 상처가 났던 것도 아닌데. 별로 걱정되지도 않아요.”

정방이 태연하게 말하던 그때, 방백종이 정방에게 바짝 다가갔다. 머리 위에서 뜨거운 숨이 느껴졌다. 방백종이 고개를 숙이고 정방의 귓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그래도 한번 봐요. 나도 당신의 몸을 봤으니까, 당신도 내 몸을 보는 거죠. 그래야 공평하지 않겠어요?”

정방이 피식 웃고는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그 순간, 갑자기 정방의 몸이 허공에 붕 떠오르며 뒤에서 정방을 들어 올린 방백종의 품에 폭 안겼다. 무언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침전에 울려 퍼지고, 곧이어 방백종의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천천히 가요. 나 혼자서도 걸어갈 수 있어요.”

정방이 말했다. 방백종은 정방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무언가 웅얼거리듯 읊조렸다.

이리저리 부딪히면서 겨우 침상까지 간 두 남녀는 그 위로 쓰러지듯이 함께 엎어졌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 아무렇게나 휘장을 치고 창가를 통해 스며드는 노을을 가렸다.

거친 숨소리가 휘장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밤에 해요.”

정방이 담담하게 말했다.

“밤에 할 건, 밤에 또 하는 거고.”

방백종이 평소와는 다른 거친 말투로 성급하게 대꾸했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그런데 흔들리던 휘장이 갑자기 젖혀지더니, 방백종이 나체로 침상에서 내려와 민망한 표정으로 탁자를 향해 달려갔다.

그가 다급하게 서랍을 뒤적거렸다.

“어디 뒀지?”

그가 중얼거리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방 안으로 새어 들어오는 노을빛이 그의 건장하고 탄탄한 몸을 훤하게 비췄다. 볼이 벌겋게 상기되고,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의 모습은 묘한 매력이 있었다.

“뭘 찾아요?”

정방이 휘장을 걷으며 옆으로 돌아눕고 방백종을 향해 물었다. 정방의 몸 위로 반쯤 덮여 있는 비단 이불이 팔로 머리를 받치고 있는 정방의 굴곡진 몸매를 드러냈다.

“그거…….”

방백종이 말을 하다 말고 아예 서랍을 통째로 뽑아 안에 들어 있던 것을 바닥으로 쏟아 버렸다.

그가 혼례를 치렀던 당시에는 몸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았다 보니, 사람들은 그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따로 그에게 남녀 간의 일을 알려 주지 않았다.

나중에 몸이 나아진 방백종은 남몰래 은밀히 춘화 서적을 몇 권 구해 서랍 속에 숨겼다. 그러나 그 후로 춘화를 볼 상황이 오지 않았기도 했고, 혹여라도 남에게 들킬까 봐 걱정되었던 방백종은 그 춘화 서적들을 자기도 모르는 곳에 꼭꼭 숨겨 두었었다.

이를 어쩐다. 나는 아직, 할 줄 모르는데!

귓가를 간지럽히는 웃음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자, 그는 더욱 긴장되어 온몸에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내가 알아요.”

정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그걸 어디에 뒀는지 알고 있다고요?”

방백종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침상 위에 옆으로 돌려 누운 정방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를 향해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했다.

“이리 와요.”

비단 이불을 덮고 있던 손을 올리자, 이불이 아래로 스르륵 떨어지면서 정방의 나체가 훤히 드러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방백종이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어디 있어요?”

정방이 손을 뻗어 가까이 다가온 방백종의 허리를 껴안고 자기 쪽으로 힘을 주어 당겼다. 방백종이 구르듯이 침상 위로 엎어지자, 푸른 휘장이 내려지면서 위아래로 몸이 밀착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렸다.

정방이 나지막이 무슨 말을 하자, 방백종이 깜짝 놀라며 큰소리로 물었다.

“당신이 할 줄 안다고요? 당신이 왜 할 줄 알죠?”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방백종의 모습에 정방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할 줄 모르는 일은, 시를 쓰는 것밖에 없어요.”

하, 하지만, 이건, 이건…….

“누가 가르쳐 준 거예요? 아니, 이런 걸 누가 당신에게 가르쳐 주죠? 당, 당신, 읍…….”

중얼거리던 방백종의 입이 무언가에 막힌 듯, 말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방 안에 울리는 숨소리는 점점 더 빠르고 거칠어졌다. 흔들리는 푸른 휘장이 창가로 스며드는 노을빛을 더욱 흐드러지게 만들었다.

어둠이 내린 후에도 천자의 침궁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마당 밖에 서 있던 경 공공이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그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반근과 소심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 가서 쉬거라. 오늘 우리가 폐하와 마마를 보긴 글렀구나.”

경 공공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반근과 소심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침전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예전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으시더니, 이제는 상황도 가리지 않으시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으신 건가. 길시를 놓치면 안 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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