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실내에는 정적이 흘렀다. 늦가을의 저물어 가는 햇빛이 창가를 통해 스며든 방 안의 분위기는 더없이 포근했다.
이곳은 정교랑과 방백종의 신방이었다. 좀 더 큰 거처로 옮기려고 수리하던 곳이 있었는데, 그곳은 반쯤 수리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방백종이 내실 안으로 들어가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심과 반근이 평소 신경을 많이 쓴 덕분에 그 어디에서도 먼지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깔끔했다. 병자가 누워 있는 방에서 날 법한 악취는커녕, 산뜻하고 은은한 향이 풍겼다.
창가의 간이침상 위에는 방석이 놓여 있었다. 그곳은 주복이 죽치고 앉아 쉬던 곳이었다. 방백종이 돌연 간이침상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침상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갑작스레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이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여봐라.”
방백종이 소리쳤다.
문밖의 내시들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걸 당장 밖으로 가져가 태워 버리거라!”
방백종이 바닥에 엎어진 간이침상을 가리키면서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고개를 숙인 내시들이 빠르게 간이침상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내시들의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던 경 공공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안채로 들어가고자 걸음을 옮겼다.
“뭘 하려는 겐가?”
고 선생이 경 공공을 붙잡았다.
“전하께서…….”
잠시 주저하던 경 공공이 문가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소인이 가서 전하를 설득해 봐야겠습니다.”
“설득한다고? 지금 전하를 어린아이로 보는 게야? 전하께서는 생각과 주관이 있는 분이네. 누가 옆에서 일일이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고 선생이 고개를 저었다.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이번 일은…….”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주복 그자가 너무하긴 했잖나. 전하께서 태자비의 체면을 봐서 계속 넘어가 주신 거지. 원래대로라면 진작 그자를 내쫓았어야 했네. 그러니 괜히 가서 성가시게 굴지 말게나.”
경 공공을 말리던 고 선생이 또 다급하게 물었다.
“그리고 조금 전에 뭐라고 했지? 태자비께서 정사낭의 비석에 글씨를 하나 새기셨다고?”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그러게 내가 일찍이 말하지 않았나. 태자비께서 참 고명하시다고 말이야.”
경 공공의 이야기를 들은 고 선생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역시 여인네들이란. 태자비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긴 하지만, 그간 맺어온 원수가 너무 많아. 다들 태자비의 행실을 잘 알기에 그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예의주시하고 있을 텐데, 그렇게 갑자기 비석에 글씨를 새기시면 어떡하나? 남들이 일찌감치 눈치채는 바람에 계획한 일을 그르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분풀이나 하자고 성급하게 그런 일을 벌이다니 태자비께서 너무 경솔하셨어.”
“태자비께서는 단지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하신 것뿐일지도 모릅니다. 일부러 숨기거나 음지에서 행하지 않고, 무슨 일이든 남에게 들키기를 두려워하시지 않는 당당함을 가지신 것이지요.”
경 공공의 말에 고 선생이 경 공공을 쳐다보며 웃었다.
“그럴 수도 있고. 뭐가 어찌 됐든, 지금은 모든 게 뜻대로 이뤄졌잖나.”
“태자비께서는 바라던 바를 이루셨을지 모르겠으나, 우리 전하께서 어떻게 되셨는지를 보십시오.”
경 공공이 탄식했다.
“전하께서는 황태자가 되셨지. 자네가 이렇게 우거지상인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고 선생은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경 공공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자, 고 선생이 입술을 삐쭉였다.
“어떤 일은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아도 되네. 태자비가 걱정되어 그러는 게지? 이대로 가다간, 얼마 못 버티실 것 같아서?”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낮췄다.
“황제 폐하께서도 몇 달을 저리 버티고 계십니다.”
그러니 태자비께서도 당연히 버티실 수 있지요.
“그러게 말이오. 황제 폐하께서는 천수(天壽)를 다하실 때까지 평온하게 침상에 누워 계시다가 임종을 맞이하실 걸세. 그러니 태자비께서도 그러실 수 있지.”
고 선생이 경 공공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경 공공은 복잡한 표정이었다.
“태자비가 이렇게 큰 공을 세웠으니, 전하께서는 분명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으실 걸세.”
고 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덧붙였다.
“꼭 황후로 추봉하실 것이야.”
경 공공의 안색이 새하얘지더니, 고 선생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지금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요! 추봉이라니요!”
경 공공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는 경 공공의 멱살을 똑같이 쥐어 잡았다.
“추봉이 아니면? 그럼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산송장을 황후로 책봉하기라도 하겠다는 겐가? 아경, 제발 정신 좀 차리게!”
고 선생이 경 공공의 손을 내치고 옷매무시를 정돈했다.
“그게 바로 가장 좋은 결과이자,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것이야.”
방백종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본디 따뜻했던 정교랑의 손이었는데, 이제는 이불 안에 있어도, 방백종이 아무리 두 손을 꼭 쥐어도, 도통 따뜻해지지 않았다.
정교랑의 몸은 심장 박동도 없고, 맥도 잡히지 않고, 미약한 호흡만 남아 있었다.
“도대체 주복의 목숨과 무엇을 맞바꾼 거예요? 난 더 이상 단 하루도 그자의 얼굴을 못 보겠습니다. 당신을 보다가 다시 주복의 얼굴을 보면, 내가 여태 그자의 사지를 찢어버리지 않은 것에 감탄할 정도예요.”
방백종이 조용히 말했다. 그가 혼자 피식 웃고는 한숨을 쉬었다.
방백종이 한 손으로 정교랑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습관처럼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팔을 천천히 안마했다.
어쩌면, 그런 기이한 비술 덕에 몸이 부패하지 않은 건가? 살이 썩는 냄새가 나지도 않고, 피부의 색이 변하지도 않았어. 몸에 났던 자상도 평범한 사람처럼 서서히 아물고 있고.
정교랑의 팔을 주무르던 그의 손은 어깨를 지나며 정교랑의 목을 향해 차츰 위로 올라갔다. 방백종의 손끝이 정교랑의 가녀린 쇄골 위에 닿았다.
너무 야위었어.
방백종의 손은 천천히 정교랑의 목덜미로 향했고, 그는 정교랑의 목과 어깨가 이어지는 부분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정방, 육가아가 언제 죽었는지 알아요?”
“정방, 오늘까지 무슨 일들이 일어났는지 알아요?”
대답해주는 이 하나 없는 질문을 쏟아내던 방백종이 자신의 손끝을 정교랑의 코 아래에 놓았다. 정교랑의 얼굴을 감싼 손에서 미약한 호흡이 가까스로 느껴졌다.
이게 이 여인이 살아있다는 유일한 증거겠지.
이 미약한 호흡마저 없어진다면, 몸은 서서히 굳고, 얼음보다 더 차가워지겠지.
육가아처럼, 주위에 아무리 많은 얼음을 갖다 놓아도 몸이 썩어 가는 고약한 냄새가 날 거고, 육가아처럼, 관곽에 넣어져 깊디깊은 땅속에 묻힐 거야.
이 세상에 다시는 이 사람이 존재하지 않겠지.
방백종이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목을 끌어안은 채 허리를 숙였다.
“정방, 어서 일어나요. 당신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당신이 대답해 주지 않는다면, 난 너무 견디기 힘들 거 같아요. 지금도 너무 견디기 힘들다고요.”
방백종이 흐느끼는 소리가 방 안에 낮게 맴돌았다.
“어서 일어나요. 어서 깨어나라고요. 내가 어떻게 하면, 당신이 다시 깨어날 수 있을까요.”
이보다 더 긴 밤은 없었다.
반근과 소심은 서로 등을 맞댄 채로 밧줄에 묶여 있었다. 면포에 입을 틀어막힌 두 사람은 소리 없이 흐느꼈다. 소심과 반근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도, 창밖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사라지자 깊은 어둠이 내렸다가, 어둠이 차츰 걷히는 모습이 보였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공포와 절망감이 두 사람의 온몸을 덮쳤다.
새벽녘의 푸른빛이 하늘을 덮을 때쯤, 드디어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왔다.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인 상태의 몸종 두 명을 보고 있자니, 경 공공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는 마음에 한숨을 푹 쉬었다.
“태자비께서는 이미 가셨다.”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몸종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내지르고는 죽을 각오로 벽을 향해 머리를 박으려 했다.
다행히도 경 공공이 한발 빠르게 두 사람을 붙잡았다.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 것 같이 가녀린 두 몸종에게 어디서 그런 괴력이 나온 건지, 둘은 경 공공의 손을 벗어나 그대로 벽에 부딪힐 뻔했다. 죽고자 하는 결심이 얼마나 결연했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너희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 내 말은 태자비께서 이곳을 떠나 태자 전하와 함께 동궁으로 가셨다는 뜻이다.”
경 공공이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들고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경 공공을 쳐다보았다. 경 공공은 두 사람이 자신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은 건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경 공공이 몸을 낮추고, 자리에 주저앉은 두 사람에게 말했다.
“너희를 속이려는 게 아니니, 소리 지르지도 말고, 소란 피우지도 말거라. 정말로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를 모시고 동궁으로 가신 것이야. 거기에 계신다면, 태자비를 더 편하게 돌보실 것이다. 매일같이 이리저리 오가실 필요도 없을 테고.”
반근과 소심이 쿵쿵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찧었다.
“걱정하지 말거라. 궁에 태자비를 극진히 모실 사람들이 있으니.”
경 공공이 말하면서 두 사람의 입을 막아둔 면포를 빼 주었다.
“저희가 아씨를 모실 수 있어요. 저희가 아씨를 모시게 해 주세요.”
두 몸종은 목이 쉴 정도로 울부짖으며 쉴 새 없이 큰절을 올렸다.
“전하께서는 너희에게 태자비를 맡기지 않으실 것이다.”
경 공공이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반근과 소심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고개를 들어 경 공공을 올려다보았다.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래. 바로 이런 눈빛이야.”
경 공공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바로 이런 눈빛, 이런 표정이 참 보기 불편하단 말이지. 전하께서 더는 그런 표정들을 보고 싶지 않으신 게야.”
“공공, 공공, 앞으로는 말을 잘 들을게요. 더는 울지도 않고요.”
소심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고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부터는 전하께서 하라고 하시는 대로, 전하께서 시키시는 대로만 할게요. 제발요, 전하께 이렇게 빌게요. 아씨께서는 저희가 없으면 안 돼요.”
경 공공이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자비는 그 누구도 필요하지 않으나, 너희가 태자비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하셨다.”
소심이 고개를 저으며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태자비를 다시 뵙고 싶다면, 아예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너희가 한 가지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말이야.”
경 공공이 이어서 말했다.
“저희는 뭐든 할 수 있어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제발 시켜만 주세요. 저희더러 목숨을 내놓으라고 해도 좋아요.”
반근과 소심이 울며 애원했다. 경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이거 봐라, 이거 봐.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을 왜 해? 너희 눈에는, 전하께서 너희를 죽음으로 내몰 분으로 보이더냐? 툭하면 울고, 툭하면 죽겠다고 하니까 전하께서 너희를 곁에 남겨두지 않으려고 하시는 게야.”
반근과 소심이 눈물을 흘리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경 공공을 올려다보았다.
“죽을 필요도 없고, 여러 일을 할 것도 없다. 딱 한 가지 일만 잘 해내면 돼.”
경 공공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말아라.”
반근과 소심은 눈빛을 반짝이면서 경 공공의 분부를 기다렸다.
“걱정하지 말아라.”
경 공공이 또 말했다. 반근과 소심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자, 경 공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않는 게, 바로 너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이다.”
반근과 소심이 경악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은, 너희가 태자비를 다시 뵐 수 있을 그 날까지, 걱정하지 말고 잘 기다리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제 이곳을 떠나거라. 태자비의 친정으로 가도 되고, 태자비의 점포로 가도 된다. 무얼 하든 상관없으니,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말고 잠자코 기다리면 되느니라.”
경 공공이 말했다.
그래도 결국 우리를 내쫓겠다는 말이잖아!
반근과 소심이 큰절을 올리며 울음을 터트리자, 경 공공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며 호통쳤다.
“뚝 그치거라!”
날카로운 목소리가 뼈마디를 찌르는 듯한 느낌에, 소심과 반근은 몸을 흠칫 떨며 울음을 삼켰다.
“한마디만 더 했다가는, 한 번만 더 울었다가는, 다시는 너희 아씨를 보지 못하게 될 줄 알아라.”
경 공공이 눈썹을 치켜뜨고는 위협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 아씨만 사람을 죽일 줄 안다고 여기느냐?”
동궁은 황궁의 북쪽에 있었다.
황제의 손이 귀했던지라 황궁에는 수십 년간 태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대황자, 즉 회혜황이 죽을 때에도 태자에 책봉되지 않았고, 선문 태자는 바보인지라 스스로 일상생활을 영위할 할 수 없던 탓에 태후궁에서 지냈다. 따라서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동궁은 몹시 낡고 볼품없어 보였다.
방백종이 갑자기 동궁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공부(工部)에서는 하는 수 없이 사람이 들어와 살 수 있을 정도로만 동궁을 보수했다. 원래는 건물을 점검하고 수리할 수 있도록 며칠 말미를 달라고 하려 했지만, 한번 마음먹으면 절대로 번복하는 법이 없는 태자의 성미를 잘 아는지라, 공부에서는 최대한 빠르고 간략하게 동궁을 손보고 정리했다.
경 공공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 내시들과 궁녀들은 전각 안을 분주하게 청소하는 중이었다. 태자의 침궁 청소가 가장 먼저 끝났기에, 경 공공은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경 공공이 예를 올렸다. 내실 안에서 탁자에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던 방백종이 음, 하고 대꾸했다.
“다 처리했습니다. 주 공자는 가둬 두었고, 몸종 둘은 밖으로 내보냈습니다. 범 군감 댁이 아니라 신선거와 태평거로 간다고 하더군요.”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가 보거라.”
경 공공이 예를 표하고 곧바로 밖으로 물러났다.
실내가 다시 조용해지자, 방백종은 책을 내려놓고 미인탑(美人榻: 여인들이 잠시 휴식을 취할 때 사용하던 좁고 긴 평상)으로 시선을 돌렸다. 미인탑 위에는 두봉을 돌돌 말아 품에 안고 편히 누워 있는 정교랑이 있었다.
“이제야 좀 조용해졌네.”
방백종이 나지막이 읊조렸다.
9월의 경성은 한 해 중 가장 활기가 넘치는 때였다.
황제의 침궁 안에서는 궁녀 몇 명이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마마, 이건 여기에 두는 게 어떨까요?”
안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침상 앞에 앉은 황후는 궁녀에게서 수건을 받아 황제의 얼굴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래.”
“마마, 보시지도 않으셨잖아요.”
투덜대던 안비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을 이었다.
“신첩이 태후마마께도 하나 보내드렸는데, 태후마마께서 신첩이 보낸 국화꽃 화병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깨트리셨지 뭐예요.”
“조용히 요양 중이시니 굳이 찾아가지 말라고 이르지 않았느냐.”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마마, 마마께서 신첩에게 후궁을 관리하라고 하셨잖아요. 신첩이 어째 태후마마를 소홀히 하겠어요.”
안비가 헤헤 웃었다.
부귀영화를 남몰래 누릴 수야 없지. 지금은 내가 후궁의 실세를 쥐고 있는 거니까,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려야겠어.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안비가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편전으로 물러났다.
전각 안으로 들어온 방백종이 황후와 황제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조회는 끝났느냐? 여기서 폐하와 정사를 논하려고?”
황후가 묻자,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기다리거라. 본궁이 폐하께 약만 먹여 드리고 일어나마.”
황후가 말하면서 침상에 앉았다.
“소자가 하겠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먼저 식사부터 하고 오거라. 효심을 표할 기회가 지금만 있는 건 아니지 않느냐.”
황후가 따뜻한 미소를 보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네가 효심을 표하기 전에, 본궁도 아내의 본분을 다해야 하고.”
방백종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한 뒤, 옆으로 물러나며 내시들에게 식사를 들이라고 명했다.
“대신들한테 따뜻한 보양탕 한 그릇씩 대접하거라. 날도 추운데 꼭두새벽부터 줄곧 서 있었으니, 몸이나 좀 녹일 겸.”
방백종이 내시들에게 조용히 당부하는 말을 들은 황후가 옆에 있던 내시에게 말했다.
“태자의 성격이 괴팍하다고들 하는데, 태자만큼 선량한 사람은 또 없을 것이야.”
내시가 아첨의 웃음을 보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노신이 조회에 참석할 땐, 태자 전하께서 조당에 노신의 자리를 따로 마련해 주십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황제 폐하의 인자함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태자가 태조의 성격을 물려받았다고 말하면, 태종의 혈통인 황제와 황후가 듣기 거북할 게 뻔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는 태자를 참으로 예뻐하셨지. 예전에는 태자와 함께 정사를 논하시기도 했어. 친아들은 아니라고 하나, 태자는 폐하의 곁에서 자란 아이야. 보고 들은 게 많으니, 자연스레 폐하를 닮아가는 것이지.”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내시들이 웃으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가 궁녀에게서 탕약 그릇을 받자 내시들은 황제를 부축해 앉히고 학취호를 가져왔다.
“마마, 수왕비께서 아직 떠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선문 태자의 장례가 끝나고, 종친과 황족들은 모두 경성을 떠났지만, 수왕비는 병이 났다며 경성을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요양을 한 달씩이나 하다니요.”
내시가 말을 덧붙였다. 황후가 수저로 탕약을 천천히 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일 년을 요양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이제 선문 태자가 없으니 말이다.”
선문 태자가 없다는 게, 태자 전하나 수왕비와 무슨 상관이지?
내시가 속으로 의아해했다.
“선문 태자에게 일이 생겼던 그해에, 위 태자가 방에 있던 선물을 모두 깨부쉈던 일을 그새 잊은 게냐?”
내시들은 한참 기억을 더듬은 후에야 그 일을 생각해냈다. 워낙 사소한 일이라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위 태자는 과거의 일을 떠올리는 것을 괴로워한다. 그러니 당연히 과거의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하지도 않겠지.”
황후가 탕약을 한 숟갈 뜨고는 조심스럽게 후후 불어 식혔다.
“태자에게 과거의 일을 회상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때는 태자의 성격이 괴팍하다고 탓할 수만은 없을 게다.”
남이사 기분이 좋든 말든 태자는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다만 누가 자기의 기분을 상하게 하도록 내버려 두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내시들이 황후의 말을 알아듣고 웃음을 보였다.
“사실 태자께서는 정이 참 많으신 분입니다.”
내시 하나가 말했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황제를 쳐다보았다. 내시들이 서둘러 황제를 똑바로 부축하고는 황후가 황제에게 약을 먹이도록 도왔다.
황제는 아직 혼수상태인지라 탕약을 스스로 삼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가 자그마한 탕약 한 그릇을 비우는 데에는 차 한 잔을 마시는 시간을 족히 들여야 했다.
“마마, 고생이 많으십니다. 이런 일은 소인들한테 맡기시지요.”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는 황후를 보면서, 내시가 공손하게 말했다. 황후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손수건으로 황제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누가 하든 똑같다. 다만, 마음을 쓰고자 하는 정도가 다른 것이지.”
“이제 그 정도로 마음을 쓰는 사람은 마마뿐이십니다.”
내시가 감탄했다.
“꼭 그렇다고 할 수는 없지. 예전에 내가 폐하께 마음을 너무 많이 받았기 때문이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자. 중요한 정사를 지체할 수 없지.”
황후가 천자의 침궁에서 나왔다. 황후는 고개를 돌리고 전각 안으로 차례로 들어가는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비가 서둘러 황후를 맞이했다. 안비가 황후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마마, 폐하께서 다 들으실 수 있을까요?”
안비가 갑자기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황제가 조회에 참석할 수 없는 탓에, 태자는 조회를 진행하는 시간 외에는 줄곧 천자의 침궁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침전에서 상소문을 검토하면서 옆에 있는 황제에게 상소문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리 내어 읽어 주었다.
바깥에서는 태자의 효심에 감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런 태자를 은근히 조롱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태자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젠 대놓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명성을 추구한다, 간악하기 그지없다 등의 말까지 나왔다.
“때로는 무슨 일을 하는 게, 꼭 남에게 들려주거나 보여 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야.”
황후가 말했다.
“그럼 무엇을 위한 건데요?”
안비가 곧바로 물었다.
여인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이를 위해 화장을 하는 건 인지상정인걸요.
“그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지.”
황후가 대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안비가 속으로 외쳤다. 물론 바보는 아니기에 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바보 하니까 생각나는 일이 있네.
“마마, 태자비는 한번 보셨는지요?”
안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걸음을 옮기던 황후가 멈칫했다.
황궁의 변이 지나간 뒤로, 정교랑은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진안 군왕부가 태자부가 될 때까지, 정교랑은 계속 안채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탓에 태자비가 병들었다는 소문이 차츰 경성에 퍼지기 시작했다.
태자비에게 병이 있다고 하나, 태의가 한 번도 태자부에 방문하지 않기도 했거니와 태자비 본인이 갖고 있는 신의 낭자라는 신분 때문에 소문은 점점 더 왜곡되어 갔다.
하지만 황후는 태자비가 병이 난 게 아니라, 황궁의 변이 일어났던 밤에 다친 거라고 생각했다. 다만, 당시 황후는 태자비가 그렇게 심하게 다친 줄은 모르고 있었다. 뒤늦게 태자에게 태자비를 보러 가겠다고 말했지만, 태자는 황후의 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도대체 태자비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네.
오후가 되자, 정적이 흐르던 동궁이 시끌벅적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마당에 서 있던 내시와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
방백종이 뒷짐을 지고 빠르게 마당을 지나쳤다.
문 앞에 서 있던 시녀가 문을 열자, 실내에 있던 시녀들이 방백종과 함께 욕실로 들어가 그의 시중을 들었다. 태자 예복을 벗고 새하얀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방백종은 허리띠도 하지 않고, 나무 비녀로 머리를 묶지도 않은 채 편안한 모습으로 방에 들어갔다.
“오늘은 무얼 먹었느냐?”
방백종이 묻자, 두 시녀가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전하께 아뢰옵니다. 태자비께서 인삼죽을 한 그릇 드셨습니다.”
“식사하신 뒤에는 정원에서 일각 정도 산보를 하셨고요.”
“그 뒤로는 이 태의께서 우린 보양탕을 드시고 잠시 쉬고 계세요.”
“지금 막 태자비께 책 한 장을 읽어드렸고요.”
시녀 두 명이 서로 말을 이어가면서 번갈아 말했다.
이때, 시녀 하나가 개완(蓋椀: 뚜껑 있는 찻잔)을 두 손으로 받치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태자비께서 드실 배즙이 다 만들어졌습니다.”
시녀의 말에 방백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뻗었다. 시녀는 재빨리 방백종 가까이로 다가가 두 손으로 개완을 건넸다.
두 시녀가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정교랑을 일으켜 앉히고 허리 뒤로 베개를 받친 뒤,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
방백종은 침상 위에 앉아 개완에 담겨 있는 배즙을 정교랑에게 조심스레 떠먹여 주었다.
“찬 게 맛있어요, 아니면 따뜻한 게 맛있어요?”
방백종은 정교랑이 입을 닫을 수 있도록 턱을 살짝 받쳤다. 하지만 역시나 배즙은 정교랑의 입가로 흘러나왔다. 방백종이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과 턱을 닦아 주었다.
방백종은 배즙을 한 숟갈 떠서 정교랑에게 먹이고, 턱을 살짝 받쳐 삼키는 것을 도운 뒤, 다시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가를 닦아 주는 동작을 순식간에 해냈다. 그는 서툴거나 허둥대지 않는 모습으로 이 행동을 자연스럽게 몇 번이고 반복했다.
“나는 둘 다 먹어 봤는데, 찬 게 더 입맛에 맞더라고요. 그런데 당신은 어떤 걸 더 좋아할지 누가 알겠어요?”
방백종이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설핏 웃었다.
“당신은 별난 사람이잖아요.”
방백종이 수저를 들고 또 배즙 한 모금을 정교랑의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는 턱을 받치고 손수건으로 정교랑의 입가를 닦아 주면서 말을 이어 갔다.
“이 태의는 상남(湘南: 호남성 남부)에 도착했대요. 그런데 찾으려는 것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방백종이 작게 탄식했다.
“내가 묻지 않으면, 당신은 나와 이런 일들을 얘기하지 않잖아요. 이거 봐요. 당신이 말해 주지 않아서 이렇게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찾고 싶어도 어디서 뭘 찾아야 할지도 모르겠고, 누굴 붙잡고 묻고 싶어도 누구한테 물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방백종이 손끝으로 정교랑의 이마를 쿡쿡 찔렀다.
“당신은 정말 한다면 하는 사람이군요. 두 눈 딱 감고 모든 일을 내게 떠넘겨 버렸잖아요. 내가 괴롭히기 쉬운 사람이라 그러는 거죠?”
방 안에는 대화가 오가는 듯이 말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말하고 있는 사람은 시종일관 방백종 한 사람뿐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시녀 두 명이 고개를 살짝 들고 눈을 마주쳤다.
“전에 선문 태자와 함께 계실 때도 이러셨어.”
한 시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예전에 선문 태자와 함께 계실 때도 지금처럼 늘 혼잣말을 하셨지. 상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도 모르고, 대화한다는 것 자체도 전혀 모르는데.
선문 태자께서 떠나시자마자 이젠 태자비께서 저리되셨으니.
“전하께서 참 불쌍도 하시지.”
시녀가 조용히 읊조렸다.
원래는 별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다른 시녀들도 ‘불쌍’이라는 단어를 듣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리고 다시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시녀들은 왠지 모르게 짠한 마음이 들었다.
혼자서 저리 자문자답하는 게 좀 불쌍하긴 하지.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점 더 작아지자, 시녀들이 구슬발 사이로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침상 위에 앉아 있던 방백종은 어느새 몸을 옆으로 돌려 눕고 정교랑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갠 뒤 까무룩 잠이 들었다.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까치발을 들며 조심스럽게 문밖으로 물러났다.
문이 닫히자, 동궁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정자와 누각이 찬란하게 밝혀졌다. 그중 단연 돋보이는 것은 흐드러지게 핀 국화꽃이었다.
“저기 좀 봐요.”
방백종이 먼 곳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저건 누가 공물로 바친 건데, 황실에 딱 세 그루만 있어요. 폐하께 한 그루 남겨 드리고, 나머지는 황후마마께서 다 이쪽으로 보내 주셨어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네 명의 내시들이 짊어지고 있는 가마 위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황후마마께서 당신이 저걸 보고 그림을 그려 줬으면 하신대요.”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방백종이 국화꽃밭을 여유롭게 거닐었다. 내시들은 그의 뒤를 따라 조심스럽게 가마를 들고 걸었다.
“당신이 글씨를 잘 쓰는 건 알고 있었는데, 그림까지 그렇게 잘 그릴 줄은 몰랐어요. 주복 그 녀석이 딴 건 다 필요 없다며, 화폭 두루마리 한 개만 가지고 가겠다고 하더라고요.”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씩 웃었다.
“그런데, 안 줬어요. 그 녀석을 일부러 골려 주려고요.”
붉은 두봉을 걸친 정교랑의 표정은 한없이 온화했다. 늦가을의 밤바람이 불어오자, 두모가 펄럭이며 정교랑의 얼굴을 가렸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두모를 바로 씌워 주었다.
“요즘은 일이 너무 바빠서, 오늘에서야 당신과 이렇게 바람을 쐬네요. 당신은 별로 개의치 않는다고 하겠지만, 난 신경이 쓰여요.”
길가에 서서 방백종과 내시들을 바라보던 경 공공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경 공공의 옆에 서 있던 내시가 한숨을 쉬었다.
“대인, 이대로는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태자비는 정상인이 아닌데, 태자 전하께서 태자비를 정상인 대하듯이 대하시다니.
밤에는 같은 침상에서 잠을 청하고, 식사도 함께 하고, 심지어는 아침 수련을 할 때도 태자비를 모시고 나가셔. 태자 전하께서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실 때마다, 태자비의 가마를 옆에 두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많이 하시는 건지.
태자 전하 가까이서 시중을 드는 우리 같은 내시들은 그런 장면을 볼 때마다 오금이 저린단 말이지.
“최소한 태자부에 새로운 사람들을 좀 들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지근거리에서 전하의 시중을 들 수 있는 궁녀도 없을뿐더러, 이제 전하의 춘추도 적지 않으시니…….”
내시가 이어서 말하려던 찰나,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누가 네게 그런 말을 하라고 시켰느냐?”
내시가 멈칫했다.
“누가 시킨 건 아니고, 소인의 생각이옵니다. 대인, 저도 몇 년 동안 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지 않았습니까. 다른 뜻은 없습니다.”
내시의 대답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다. 죽으려면 혼자 죽어라. 괜히 남한테 불똥 튀게 하지 말고.”
경 공공의 말에 깜짝 놀란 내시는 그 말뜻을 뒤늦게 이해하고 두려움에 떨면서 자신의 따귀를 내리쳤다.
경 공공은 더는 내시를 쳐다보지 않고, 정교랑의 가마가 왔던 길로 되돌아오는 것을 보고는 서둘러 그들을 맞이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길을 비켰다. 그는 침전을 향해 가는 방백종 일행이 멀어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거렸다.
“어차피 시간문제일 텐데. 폐하께서도 자손이 몇 없었기 때문에 양자 입적을 하신 거잖아. 그러니 태자 전하도 당연히 자손 문제에 신경을 쓰셔야지. 지금은 그렇다 쳐도, 나중에 제위에 오른 뒤에는 어쩌시려고?”
9월 말, 어느새 밤바람이 서늘해지고 북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천자의 침궁 안에 있던 등불이 바람에 일렁였다.
편전에 있던 황후는 내의로 갈아입고 머리를 푼 채 등불 아래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바람 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 이불을 더 가져다드렸느냐? 태의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오랜 시간 병석에 누워 계신지라 한기가 들면 안 된다고 하였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가 대답했다.
“예, 이미 가져다드렸습니다.”
황후가 고개를 숙이고 이어서 책장을 넘겼다.
“마마.”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황후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궁녀가 문을 열자, 황제의 시중을 드는 내시가 당황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냐?”
누군가가 문을 살짝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한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방백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흐릿한 실내의 등불을 확인하던 방백종은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에 문가를 쳐다보았다.
“전하, 전하.”
경 공공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방백종이 물었다. 그러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젖혀진 이불을 다시 정교랑의 어깨까지 끌어다 덮어주었다.
문이 열리자, 경 공공이 잰걸음으로 방백종에게 다가갔다.
“전하, 황후마마께서 지금 잠시 입궐하실 수 있겠냐고 하문하셨습니다.”
방백종의 눈썹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입궐하라는 전갈이 아니라, 잠시 입궐할 수 있겠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황궁은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입궐을 명하신 게 아니라, 입궐할 수 있냐고 하문하신다는 것은, 궁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뜻인데.
황제 폐하?
뇌리에 불길한 생각이 스치자, 방백종은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전하.”
경 공공이 서두르는 방백종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며 작은 소리로 그를 불렀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냉큼 달려가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방백종은 양자로 들어온 태자였다. 게다가 선문 태자가 죽던 날, 방백종이 병사들을 이끌고 경성에 입성하고 궁문을 부순 일로, 세간에 떠도는 말들이 무척이나 많았다.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있었다는 소식이 밖으로 전해진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한 소문이 퍼질 것이 자명했다. 이는 황후가 방백종에게 은밀히 소식을 전한 연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천자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태자가 곁에 없었다면, 그 또한 각종 유언비어를 양산할 터였다. 물론 그런 소문은 근본이 없어서 별로 믿음이 가지 않는 유형의 것이었다.
방백종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마차를 준비해라.”
나 방백종은, 단 한 번도 세간의 말을 두려워한 적이 없다.
천자의 침궁 안에 켜져 있던 등불이 조금 전보다 더 어두워졌다.
문밖에는 당직을 서는 금위군들이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내시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천자의 침궁 주위는 더욱 스산해 보였다.
“태자가 왔다고?”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가 조금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침상 앞에 앉아 있던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침상에 누워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어두운 등불이 황제를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을 비추었다. 다소 복잡하면서도 위안이 되는 듯한 표정이었다.
문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곧 늦가을의 서늘한 바람과 함께 방백종이 전각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가 휘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폐하께서 어찌 되셨습니까?”
방백종이 예를 올릴 겨를도 없이 물었다. 황후가 잠시 방백종을 쳐다보고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술을 꾹 닫았다.
옆에 시립해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문밖으로 물러났다.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너는 어쩜 아직도 선문 태자 때와 똑같은 것이냐.”
황후의 말에 방백종이 멈칫했다.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변을 당한 게 아니라 회혜왕의 음해에 당한 것이라고 따져 물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아니면 육가아를 그만 놓아주고 경성을 떠나라고 한 말을 거절했을 때를 말씀하시는 건가?
전자는 그가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진상을 밝히려 했을 때였고, 후자는 의리를 지키고자 굳이 어려운 길을 가겠다고 선택했을 때였다.
어쨌든 황후는 내심 방백종이 입궐하지 않기를 바랐다.
“마마께서도 여전하십니다. 지금도 여전히 소자를 보호해 주려 하시지 않습니까.”
당초 육가아가 매화를 따다 벼랑에서 떨어졌을 때, 황후는 방백종을 지켜 주고자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와 그의 방패막이가 되어 주었다. 황후가 아니었더라면, 방백종은 그때 뭇사람의 비난을 한 몸에 받았을 것이다.
황후가 미소를 지었다.
“다만, 소자는 신하의 마음으로 본분을 지킬 뿐이니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방백종이 이어서 말하고는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이 아이가 입궐하지 않은 채로 폐하께서 붕어하신다 한들, 세간의 소문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야. 그런 유언비어야 늘 있는 것인데, 굳이 그런 것들을 일일이 신경 쓰며 살 필요는 없지.
황후가 방백종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다.”
방백종이 경악한 얼굴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붕어하신 게 아니라, 깨어나셨다고?
그건 정말 좋은 일인데, 황후마마께서는 왜…….
어두운 등불에 비친 황후의 복잡한 표정을 잠시 쳐다보던 방백종은 이내 숙연해졌다.
애초에 폐하께서 앓아누우신 이유가 뭐였지?
귀비가 안비를 음해하고, 회혜왕이 빗속에서 사죄한다는 명목으로 폐하를 협박하다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 그 뒤로 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나. 귀비는 미쳐 버렸고 고능준과 진소도 죽었으며 육가아도 죽었다. 태후마마는 연금되셨고, 후궁의 모든 권력은 황후마마의 손에 들어갔다. 게다가 과거의 진안 군왕이 지금 태자 자리에 앉았는데, 이 수많은 변화를, 폐하께서는 과연 감당하실 수 있을까?
더 중요한 것은, 폐하께서 아직 제위를 지키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황후마마든, 태자든, 그게 누구여도 폐하께서 결정을 내리시면 그에 따라야만 한다. 혼수상태에 빠진 황제에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겠지만, 지금 그 황제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면 모든 게 달라질 수밖에.
“폐하께서 조금 전에 눈을 뜨셨다.”
황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방백종을 향해 말했다.
“본궁이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지만.”
방백종이 말없이 황후를 쳐다보았다.
황후의 말뜻은 이러했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고 말한다면, 황제는 깨어나지 않은 셈이 된다는 것.
방백종이 천천히 전각 안을 둘러보았다. 천자의 침궁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이곳은 황후의 침궁이나 다름없었다.
이곳뿐만이 아니었다. 후궁 전체는 황후의 손아귀에 있었다. 궁문을 닫는 순간, 누가 죽고 사는 문제는 모두 황후 한 사람이 결정했다.
사실 지금 황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혼수상태인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맑은 정신으로 깨어난 황제는 더더욱 그러했다. 다시 깨어난 황제는 모든 이의 생살여탈권(生殺與奪權)을 쥔 막강한 권력의 황제니까.
깨어난 황제가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지금 득세하고 있는 황후와 태자를 가만두지 않는다면? 본디 자신의 것이었던 권력을 태자와 황후가 나눠 가진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세간에 떠도는 온갖 낭설의 충격을 받아내지 못한다면?
황제가 깨어난 후에 벌어질, 너무도 많은 불확실한 일들에 황후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중 단 한 가지라도 현실로 이어진다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우리는 감당할 수 없다.”
황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층층의 휘장 너머로 황제가 누워있는 침상이 보였다.
그러니 가장 좋은 건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하는 게야. 그래야만 본궁이 생각하는 만일의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촉광부영이라는 말을 듣는 게 뭐 어때서…….”
황후가 말을 이어가면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네가 연의왕이 되고자 하는 건 아니잖느냐?”
전각 안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흘렀다. 안 그래도 어둑했던 등불이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구석에 남아 있던 내시들은 자신들의 몸을 어둠 속에 숨기려고 안간힘을 썼다.
“소자, 폐하를 뵙고 싶습니다.”
방백종이 말했다. 황후가 말없이 방백종을 쳐다보자, 방백종도 황후를 바라보았다.
“생각을 끝낸 것이냐? 안 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방백종이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자, 황후가 옆으로 비켜섰다.
등불이 없는 휘장 안은 더욱 깜깜했다. 방백종이 침상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황제를 가려 황제의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등불을 가져오너라.”
방백종의 말에, 내시 한 명이 등불을 들고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더.”
두 개, 세 개의 등불이 휘장 안을 비추자, 드디어 침상 앞이 환해졌다. 방백종이 몸을 숙여 침상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를 쳐다보았다.
병색이 완연하여 안색이 누렇게 뜬 황제가 두 눈을 감고 있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폐하.”
방백종이 황제를 불렀다. 황제의 눈꺼풀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이윽고 그가 두 눈을 떴다.
“폐하!”
방백종이 침상에 바짝 다가가서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하지만 황제의 눈은 다시 감겼다.
“등불을 조금 치우거라.”
방백종이 다급하게 말했다. 두 내시가 서둘러 휘장 밖으로 물러나자, 침상 앞이 다소 어두워졌다.
황제가 천천히 눈을 뜨고,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방백종에게 시선을 두었다.
“폐하.”
방백종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신이 누구인지 알아보시겠습니까?”
눈을 뜬 황제의 눈빛은 흐리멍덩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쉰 소리를 냈다.
“폐하, 위낭입니다.”
방백종이 황제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폐하, 위낭이라고요.”
흐리멍덩했던 황제의 눈이 서서히 초점을 잡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그가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 것은 여전히 의미 없는 신음뿐이었다.
“폐하!”
놀란 방백종이 소리치면서 고개를 숙였다. 황제가 팔을 아주 천천히 움직이면서 자신을 향해 손을 뻗자, 그는 무의식적으로 황제의 손을 덥석 잡았다.
황제의 손은 실제 나이보다 훨씬 마르고 주름져 보였다. 뼈마디만 앙상하게 남아 힘없이 떨리는 주름진 손이 방백종의 손을 꼭 쥐었다.
“아!”
황제가 드디어 토해내듯 소리를 냈다. 방백종이 두 손으로 황제의 손을 감싸고, 그의 손을 뺨에 가져다 대며 울먹였다.
“여봐라.”
방백종이 고개를 홱 돌리고 소리쳤다.
“어서 태의를 불러라!”
휘장 밖에 서 있던 황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고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당장 태의를 부르고, 중서문하성의 장순, 엄소(嚴昭), 임택(林澤), 그리고 당직을 서는 한림들을 부르거라.”
방백종이 낭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울려 퍼짐과 동시에, 실내가 갑자기 환해지는 듯했다. 침상 앞에 내려져 있던 휘장을 모두 걷자, 그 앞에 서 있는 방백종의 그림자가 더욱 길게 늘어졌다.
황후가 나지막이 한숨을 토하고 서둘러 침상 앞으로 다가갔다.
“폐하.”
무릎을 꿇은 황후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먹였다.
장 노태야의 방 안에 등불이 밝혀졌다.
잰걸음으로 들어온 노복이 옷을 걸치고 있는 장 노태야를 향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노태야, 궁에서 온 사람입니다.”
이 꼭두새벽에 장씨 저택의 대문을 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궁에서 나온 사람들뿐이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시간이 꽤 오래 지나긴 했으니.”
장 노태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장 노태야와 노복이 깜짝 놀라서 문가를 쳐다보자, 머리를 풀어헤치고 허둥지둥 옷을 주워 입은 듯한 몸종이 서 있었다. 문 위에 달린 등불 때문인지, 몸종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노태야.”
몸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반근, 네 아씨의 일이 아니니 걱정 말거라.”
노복이 서둘러 말했다. 몸종은 그제야 문틀을 붙잡고 온몸에 힘이 빠진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지만 장 노태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그러나 폐하께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건, 네 아씨한테 좋은 일이 아닐 수도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몸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몸종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무릎걸음으로 장 노태야 앞으로 기어왔다.
“아니, 그게 아니라,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닙니다. 노태야, 폐하께서 깨어나셨답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다고?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진 장 노태야가 노복을 쳐다보았다.
“정말입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노복이 재차 말했다. 표정이 다시 평온해진 장 노태야가 몸종을 향해 말했다.
“그럼, 네 아씨는 한동안 무사하겠구나.”
장 노태야는 다시 시선을 거두고 밖을 내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자에게는 썩 좋은 일이 못 되겠지.”
첫마디는 아씨를 뜻하는 거고, 뒤에 말씀하신 ‘그자’는 누구를 뜻하시는 거지?
몸종이 눈물을 쓱쓱 훔치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장 노태야를 바라보았다.
동이 틀 무렵, 황궁을 지키는 금군 병사들은 조회에 참석하는 관리들이 평소보다 훨씬 일찍 궁문 앞에 당도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어젯밤엔 궁문이 조용히 열리면서 내시 몇 명이 드나들었고, 오늘은 새벽부터 조정 중신들이 입궐했으니,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께서는 어떠신가?”
한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붕어하신 게 아닐까 싶소만.”
다른 관리가 작게 대답했다.
“붕어하셨다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소. 벌써 북과 징을 울렸을 텐데.”
또 다른 관리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왜 꼭두새벽부터 그리 어수선했던 거요? 대신 일고여덟 명이 새벽부터 불려 갔다던데.”
“설마 황후마마나 태자 전하께서?”
“웃기는 소리. 그럴 리가 있겠나?”
“내가 보기에는 분명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것이오. 폐하의 병세가 급하게 위독해지신 거지. 밤에 알리기가 좀 그러니, 낮에 공포하려는 게 아닐까 싶군.”
한밤중에 이미 붕어하셨어도, 해가 밝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포하는 게 낫긴 하지.
대신들과 관리들이 수군거리며 갖가지 추측을 하고 있을 때, 아침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오며 궁문이 열렸다.
오늘은 대조회가 열리는 날인지라, 문무백관이 대전에 모였다. 질서 유지를 담당하는 어사대 관리들이 대전 안을 거닐고 있었지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를 막지는 못했다.
태자가 나타나야 할 시간이 지나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더욱 커졌다.
같은 시각, 장순 등의 조정 중신들은 천자의 침궁 안에 있었다. 그들은 피곤한 기색으로 방백종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정말로 이렇게 하셔야겠습니까?”
한 대신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방백종이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만을 기다렸소.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고.”
방백종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는 가마 한 대가 놓여 있었다. 가마 위에 힘없이 누워 있는 황제는 가늘게 눈을 뜨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폐하께 조당에 나가시기를 청하옵니다.”
방백종이 허리를 숙이고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께 조당에 나가시기를 청하옵니다.”
다른 중신들도 허리를 숙이고 방백종을 따라 외쳤다.
궁중 악단의 연주와 함께 가마에 실린 황제가 조당에 모습을 드러내자, 깜짝 놀라는 관리들도 있었고, 이제야 알겠다는 표정을 짓는 관리들도 있었다.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게 아닌가 보네.
관리들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황제가 대조회에 모습을 보인 이유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잠시 얼굴만 비추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다 태자가 예전처럼 조당 위로 올라가지 않고 대신들의 대열 앞쪽에 멈춰 서자, 관리들은 그제야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조차 태자가 황제에게 예의를 표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태자가 황제에게 상소문을 한 장 한 장 읽어 주는 것처럼 말이다. 의식이 혼미한 황제를 존중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태자가 허리를 숙이고 대신들과 함께 황제를 향해 예를 올리자, 궁중 악단의 연주 소리가 그쳤다. 황제의 건강을 축원하며 예를 올린 후, 대신들은 몸을 일으키라는 내시의 말을 기다렸다. 그때, 대신들의 귓가에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시오.”
입속으로 웅얼거리는 듯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든 약한 목소리였지만, 대신들은 정적이 흐르던 대전에 번개가 내리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누군가는 헉 소리를 내기도, 누군가는 결례를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모두의 이목은 조당의 가장 높은 곳, 가마 위에서 눈을 뜬 채 반쯤 누워 있는 황제에게 집중되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셨어! 폐하께서 깨어나셨어!
대전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어사대 관리들이 호통을 치며 정숙하라고 호통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던 사람들이 종국에는 일제히 무릎을 꿇고 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대전 안을 가득 메우자, 사람들은 온몸이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바로 천자의 권력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람을 매혹시키는 천자의 권력.
저 자리에 앉기만 하면, 세상 사람들이 절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 맛을 봤다면, 저 자리를 어찌 쉬이 포기할 수 있을까.
무릎을 꿇고 있던 대신들은 흥분을 가라앉힌 뒤 흐릿한 시선으로 앞을 내다보았다. 모든 대신이 무릎을 꿇고 있는 자리에서 혼자 우뚝 서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리는 태자의 모습과 높은 조당 중앙에 있는 황제의 모습이 선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황제가 천천히 손짓하자, 옆에 있던 내시가 서둘러 허리를 숙이고 다가갔다.
“말.”
황제가 한 글자를 내뱉었다.
대신들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황제를 바라보았다. 깨어나긴 했지만, 온몸이 뻣뻣하여 간신히 손을 까딱이고, 힘겹게 눈을 깜박이고, 토해내듯이 한 글자씩 내뱉는 황제의 모습을, 대신들은 숨을 죽이며 지켜보았다.
“폐하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고 하십니다.”
내시가 목청을 높이며 황제의 뜻을 전했다. 대신들이 다시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짐(朕)은…….”
“병(病)…….”
대신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황제가 뱉은 두 글자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비록 두 글자일 뿐이지만, 대신들은 황제가 무얼 말하려는 건지 잘 알 수 있었다.
술에 진탕 취한 사람은 자신이 취했다는 것을 모르고, 미치거나 바보가 된 사람들은 자신이 미치거나 바보가 됐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니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병자이긴 하나 정신이 또렷한 병자였다.
정신이 또렷하다면, 폐하께서는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다 알고 계시는 걸까? 하늘과 땅을 뒤엎는 일련의 일들을.
대신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복잡한 표정으로 태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직접 책봉하지 않은 태자.
정신이 맑은 황제는 저 태자를 어떻게 대할까?
어수선하던 조당 안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천자의 침궁 안, 황후는 표정 없는 얼굴로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마마, 걱정하지 마세요. 분명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전각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던 안비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일이 있든 없든, 어차피 한 번 죽는 목숨이다. 다만, 본궁은 이런 기분을 썩 좋아하지 않아.”
“무슨 기분이요?”
안비가 물었다.
“기다리는 기분.”
황후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내시 하나가 안으로 들어와 황후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폐하께서 옥새를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황제가 혼수상태라 태자가 정사를 돌보는 동안에도, 옥새는 여전히 황후의 손에 있었다.
이제 황제가 깨어났으니, 이 옥새는 진정한 주인에게 돌아가야 하겠구나.
황후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천천히 뜬 뒤, 옆에 있던 내시에게 손짓했다. 안으로 들어간 내시가 옥새를 두 손으로 받치며 나왔다.
옥새를 가지러 온 내시가 두 손으로 옥새를 건네받은 뒤, 예를 표하고 즉시 자리를 떠났다.
안비는 저도 모르게 내시를 두어 걸음 쫓아가다가, 결국 문틀을 붙잡고 멀어져가는 내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높이 들어 올려진 옥새가 대신들의 주시 하에 천천히 황제의 앞에 놓였다. 황제가 옥새를 바라보았다.
“짐은…….”
황제가 또 입을 열었다.
“병…….”
“폐하의 옥체는 필시 완쾌될 것입니다.”
황제가 힘겹게 두 글자를 내뱉자, 대신 하나가 큰소리로 외치며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조용하던 조당 곳곳에서 또 한 번 황제의 건강을 기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신들의 목소리가 차츰 줄어들자, 황제가 손을 올렸다.
내시가 재빨리 옥새를 황제의 손에 가져다주자, 황제가 옥새를 꼭 쥐었다.
드디어 천자가 자신의 권력을 되찾았군.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자신의 권력을 되찾은 천자가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일까?
모두의 시선이 황제의 손에 꽂혔다.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지난 것 같기도 하던 그때, 황제의 손이 다시 천천히 움직이면서 한 사람을 가리켰다. 대신들의 시선이 황제가 가리키는 곳을 향했다.
그곳에는 태자가 서 있었다. 황제의 손은 분명 태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라.”
황제가 말했다. 방백종이 황제를 쳐다보며 담담한 표정으로 예를 표하고, 황제의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오라.”
황제가 다시 말했다.
방백종이 멈칫하고는 황제의 앞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가 황제와 삼 보 정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예를 올렸다.
“오라.”
황제가 또 같은 말을 내뱉었다. 방백종은 두어 걸음 내디디고 옷을 턴 다음 황제의 앞에 꿇어앉았다.
“가지거라.”
황제가 손에 쥐고 있던 옥새를 방백종 앞으로 밀어 주었다.
가지거라!
대전 안에서 헙, 하며 숨을 들이마시는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이건 내선(內禪: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 자식에게 황위를 물려주는 일)이다! 내선이야! 내선!
방백종이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에서 놀람과 흥분, 그리고 믿기 힘든 감정이 드러났다.
황제는 방백종을 바라보며, 뻣뻣하게 굳은 손으로 옥새를 다시금 밀어 주었다.
“위.”
“낭.”
황제가 힘겹게, 그러나 또렷하게 말했다.
“잘.”
“가지고 있거라.”
방백종이 떨리는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황제 앞에 납작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신, 명 받들겠나이다.”
“태상황(太上皇) 폐하, 영명하십니다!”
장순이 큰소리로 외치면서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였다. 장순이 무릎을 꿇자, 대신들도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태자와 태상황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태상황 폐하, 영명하십니다!”
“태상황 폐하, 영명하십니다!”
대신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방백종의 높이 든 손에 옥새가 들려 있었다.
“황제 폐하, 만세!”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내선?”
소식은 바람처럼 빠르게 경성 전역으로 퍼졌다. 소식을 전달하는 전령병이 각지를 향해 질풍처럼 내달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로군. 폐하께서 내선을 하시다니.”
경성의 주점과 찻집 안에서는 사람들이 각자 이 일에 관해서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었다.
“태자가 정말 운이 좋았네. 이번 일로 명분을 바로 세웠으니 말이야.”
“태자가 폐하를 모시고 대조회에 참가할 배짱이 있는 줄 몰랐어. 난 또 어젯밤에 폐하께서…….”
만약 황제가 붕어했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말이지만, 황제가 깨어난 지금, 그런 말은 절대 입에 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실소를 터트렸다.
“배짱? 그자가 못 할 이유가 있겠나.”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두봉을 걸치고 있던 한 젊은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은 두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겨드랑이에 끼워져 있는 지팡이 두 개는 똑똑히 보였다.
하지만 젊은 사내는 그 말만 남긴 채 몸을 돌려 천천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금세 시선을 거두고 대화를 이어 갔다.
“그럼 등극 날짜는 정해졌나?”
“오래 걸리지는 않겠지. 새해가 오기 전에 즉위하실 거야.”
딱딱 울리는 지팡이 소리 때문에 등 뒤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대화 소리는 차츰 멀게 느껴졌다. 지팡이 소리가 문 앞에서 멈췄다.
“그럴 배짱이야 당연히 있겠지. 판세가 자기 쪽으로 기울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을 테니.”
젊은 사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고는, 고개를 돌려 찻집 안을 쳐다보았다.
“폐하께 다른 선택지가 있었을까? 폐하께선 바보가 아니시다. 필사적으로 싸우다 양쪽 다 망할 바에는, 차라리 평온한 여생을 보내는 게 낫다고 여기셨겠지.”
젊은 사내가 시선을 돌리고 큰길을 내다보자, 각자 갈 길을 재촉하는 행인들이 보였다.
“황제가 될 배짱이 있는 게 무슨 대수야. 황후 책봉을 감행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배짱이 아니겠어?”
병석에 앓아누워 허약한 황제를 모시고 대조회에 참여할 배짱은 있다지만, 숨만 간신히 붙어 있는 산송장을 황후로 책봉할 배짱이 있을까?
그럴 배짱이 있느냐고!
지팡이를 쥐고 있던 젊은 사내의 손에 힘이 들어가더니 푸른 핏줄이 툭 불거졌다.
네놈에게 그럴 배짱이 있느냔 말이다!
영화 4년 9월 27일, 건원제(乾元帝)가 퇴위하고 태자 위에게 선위했다.
하지만 태자가 곧바로 등극하는 것은 아니었다. 원칙을 따르자면, 태자는 제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며 울면서 극구 사양하고, 황제는 거듭 고집을 부린 후에야 정식으로 연호를 바꾸고 등극할 수 있었다.
물론 새 황제의 등극에 관한 준비는 이미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진안 군왕 옹립의 일등공신인 장순의 저택에는 사람들이 문턱이 닳도록 찾아왔다. 그 덕분에 장씨 가문 문지기와 하인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했다.
다행히도 대부분은 명첩이나 선물만 전달한 뒤에 자리를 떠났다. 장씨 가문의 사람들과 아주 가까운 친지들이나 지인들만 문턱을 넘고 들어와 차를 한 잔 대접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남자 손님은 장순의 장남이 맞이하고, 부녀자들은 장순의 부인이 맞이했다.
“강주 선생께서는 어디 가시고?”
새로 즉위하실 황제 폐하를 위해 뭘 준비하시려나?
“서원에 가셨습니다. 아직 수업해야 할 책이 남기도 했고, 글을 써야 한다고 하셔서요.”
장순의 장남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손님이 경악하며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같은 때에도 서원에 가서 수업을 한다고?
“백성을 살리는 일은 이미 행하였으나, 역대 성자들의 가르침을 독파하고 널리 알리는 일은 아직도 그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멀다 하셨습니다. 결코 이를 게을리하실 수 없다고 하셨지요.”
장순의 장자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게 조정의 일보다 우선이라는 건가? 진소의 재상 자리를 꿰차는 것보다 한림원의 책을 감수하고 편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왜 그렇게까지?
하지만 사람들은 곧 장순의 의중을 깨달았다. 재상이 되지 않더라도, 장순은 태후의 목숨을 구하고, 새 황제의 옹립에 공을 세운 사람이었다. 조정에서 그의 지위는 그 누구보다 탄탄할 수밖에 없었다.
대청 안은 더욱 시끌벅적해졌고, 후원에서는 여인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여기 남아서 밥 먹고 가요.”
부인 하나가 웃으면서 다른 부인들을 향해 말하고는 고개를 돌려 장순의 부인을 쳐다보았다.
“부인네 찬모를 청하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잖아요. 모처럼 부인 댁으로 온 김에, 요리 한번 맛보고 가도 되죠?”
다른 부인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심지어 어떤 이는 무슨 요리를 해 달라고 할지 고르기 시작했다.
장 부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 일을 어쩌면 좋죠. 이렇게 와 줬는데, 오늘 찬모를 보기는 힘들겠어요.”
모두가 놀란 눈으로 장 부인을 쳐다보았다.
“오늘은 찬모가 집에 없어서요. 일이 생겨서 잠시 집을 비웠어요.”
장 부인이 이어서 말했다.
아랫것이 일이 생겨 나갔다 해도, 안주인의 말 한마디면 냉큼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아랫것 주제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주인어른의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법이거늘.
“장씨 가문의 찬모는 정말 남다르네요.”
“당연히 남다르겠죠. 다들 잊었어요? 장씨 댁에 있는 반근 찬모가 본디 누구의 사람이었는지?”
장씨 저택을 나온 부인들이 조용히 말했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던 부인들은 반근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는지 그제야 기억해 냈다.
태자비!
아니, 생각해 보니 장씨 가문의 반근뿐만이 아니야. 경성의 유명한 가문 몇 집에서도 자기네 찬모가 태자비의 수제자라면서 동네방네 자랑하기도 했지.
그런데 다른 집안의 찬모들은 자기네 하인들을 직접 보내 태자비의 가르침을 얻은 거지만, 장씨 가문의 반근은 달라. 저 반근은 진정한 정씨 가문의 사람이고, 태자비가 강주에서 데려와 장씨 가문에 선물했던 몸종이니까.
게다가 태자비는 곧 황후가 될 텐데, 과거에 황후의 시중을 들었던 몸종이라면 남다르긴 하겠지. 장씨 가문에서도 그 몸종을 평범한 하인 대하듯 이래라저래라하며 부리지는 못할 테고.
“다만.”
부인 하나가 무언가 생각난 듯 목소리를 낮췄다.
“태자비께서 황후가 되실 수 있을까요?”
부부는 한 몸이나 다름없기에, 남편이 출세하면 부인도 자연스럽게 지위가 올라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태자가 등극한다면, 일반적으로는 태자비 또한 황후로 책봉되는 게 마땅했다. 그러나 지금의 태자비는 조금 달랐다.
“병이 꽤 위중하대요. 태상황 폐하 때처럼, 아예 혼수상태시라고 들었어요. 그 상태로 병석에 누워서 지낸 지 벌써 두 달이 다 되어 가고요.”
그럴 수가!
놀란 부인들이 서로를 쳐다보면서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럼 몹쓸 병에 걸렸다는 거잖아. 평범한 집안이라 해도 벌써 별채로 보내졌을 거야. 칠거지악을 범했으니 내쫓겼을 수도 있고.
“태상황 폐하께서도 깨어나셨잖아요.”
누군가가 말했다.
“하지만 태상황 폐하께선 말씀도 제대로 못 하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신대요. 깨어나나 안 깨어나나 다를 게 없죠. 그렇게 아픈 사람을 어떻게 황후로 책봉하겠어요?”
고개를 저으며 말하던 다른 부인이 멈칫했다.
“아, 추봉할 수는 있겠네요. 듣자니 태후마마께서는 벌써 비빈들을 물색하고 계시다던데요? 그리고 수왕비도 젊은 여인들을 여럿 데리고 와서 태후마마께 알현을 청했대요. 다른 건 몰라도, 황제의 자손 문제에서는 수왕비나 태후마마나 같은 마음일 거예요.”
정오 무렵은 태평거의 장사가 가장 잘되는 시간이었다. 문 앞에는 자리를 기다리는 손님들이 길게 줄지어 서 있었고, 마당에는 차양막과 탁자, 그리고 따뜻한 차와 간식이 놓여 있었다.
“아예 바깥에도 자리를 만드는 게 좋을 텐데. 여름에는 냉두부로 더위를 식힐 수 있고, 겨울에는 뜨끈한 낙득자재가 있으니 추위가 두렵지 않잖나.”
누군가가 차양막 아래에서 차를 마시면서 말했다.
일부 사람들은 문 앞에 서서 고개를 치켜들고 편액에 쓰인 글자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정 낭자께서 직접 새긴 글씨라네.”
“무원산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는 다른 필체인걸.”
“에이, 아직도 정 낭자라고 하면 어떡하나? 지금은 태자비이시고, 곧 황후가 되실 분인데.”
“태자비나 황후는 천 명, 만 명도 넘게 있지만, 정 낭자는 유일무이하다고.”
“태평, 태평. 정 낭자가 있으니 진정한 태평이로구나.”
사람들이 문 앞에서 담소를 나누던 사이, 다급하게 뛰어온 누군가가 긴 줄을 비집고 들어왔다.
“어허, 줄을 서야지!”
누군가가 큰소리로 외쳤다. 줄을 비집고 들어온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그 사람을 쳐다보았다.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옷과 장신구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여인이었다.
“반근 아가씨께서 오셨군요.”
문 앞에 서 있던 점원이 서둘러 여인을 향해 손짓했다.
밥 먹으러 온 사람이 아닌가 보네.
줄을 서 있던 사람들은 더는 여인을 향해 야유를 보내지 않고, 그저 여인이 층계를 올라가는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반근 아가씨.”
한 점원이 방 앞에 멈춰 서서 문을 두드렸다.
“반근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같은 반근이지만, 점원이 부른 문 너머의 반근과 그가 길을 안내해 준 반근은 다른 사람이었다.
문이 열리자, 몸종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몸종을 본 반근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로?”
몸종을 본 반근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반근 언니, 걱정하지 마. 아씨 소식이 있어서 온 건 아니야.”
몸종이 말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지.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반근이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나는 가만히 있을 자신이 없어서 경성에 남아 있지 못했어. 도저히 못 참고 황궁으로 달려가서 아씨를 찾을 것 같아서. 그래도 성 밖에 있는 태평거에 있으니 좀 나아.”
반근이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태자 전하께 제위를 물려주셨어. 태자 전하께서는 곧 즉위하실 거고.”
몸종의 말에 반근이 고개를 들고 몸종을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도 이제 아씨를 뵐 수 있는 거야?”
반근이 다급하게 물었다. 황제가 깨어나든, 태자가 즉위하든, 경성 사람들이 입이 아플 정도로 이야기하는 것들은 반근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반근의 마음을 가득 채운 생각은 오직 한가지뿐이었다.
몸종이 웃음을 짜내며 대답했다.
“응, 곧 그렇게 될 거야.”
반근이 몹시 기뻐하면서 몸을 돌리고 옆에 놓인 관음보살을 향해 정성스럽게 절을 올렸다. 그런 반근의 모습을 보면서, 웃고 있던 몸종의 얼굴에 씁쓸함이 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