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로운-
“직접 보았다고 했느냐?”
진호가 회랑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시종을 쳐다보면서 천천히 물었다. 사환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합니다. 부축도 받지 않고, 주 공자 스스로 말을 타고 가셨다고요. 게다가 말을 무척이나 빨리 몰았다고 합니다. 공자님, 이제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환이 아첨의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걱정하지 말라고?”
진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사환에게 물었다.
“무엇을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냐?”
“주, 주 공자께서…….”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트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향해 묻는 진호가, 사환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서웠다.
“내가 그 자식을 죽이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말인 게냐?”
진호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틀렸다. 틀렸어. 나는 이미 주복을 죽인 것이다.”
예?
사환이 흠칫 놀랐다.
“난 이미 그놈을 죽인 것이다. 그러니 그놈이 살았든 죽었든, 다 똑같아.”
진호가 몸을 일으키고는 방을 향해 걸음을 돌렸다.
공자님께서 충격이 정말 크셨나 보네. 이젠 헛소리까지 하시고.
사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방 안으로 들어간 진호가 벽 앞에 멈춰 섰다. 벽에는 장궁 한 개가 걸려 있었다. 사환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진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주육이 진호에게 선물했던 장궁이었다.
격의 없이 장난을 치던 두 사람이, 이젠 서로의 생사를 위협하는 존재가 되다니.
사환이 넋을 놓고 회상하는 사이, 진호가 손을 뻗어 한 손에는 장궁을, 다른 한 손에는 화살을 쥐었다.
공자님께서도 감상에 젖으신 거겠지.
사환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진호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화살로 자신의 다리를 푹 찔렀다.
날카로운 비명이 진씨 저택의 하늘을 갈랐다.
조용하기만 했던 군왕부에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상처 부위를 봉합해야 합니다.”
“어서 시녀를 들여와라, 어서.”
이 태의와 경 공공이 다급하게 외쳤다. 진안 군왕은 시종일관 정교랑을 품에 안고 있었다.
“시녀를 불러올 필요 없다. 내가 직접 하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조심스럽게 침상 위로 눕혔다. 그는 정교랑의 몸을 감싸고 있던 두봉을 벗기고, 살갗과 핏덩어리로 뭉쳐진 옷깃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고 선생 등은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고, 주복도 머뭇거리다가 이내 문가로 물러났다.
“전하, 소인들이 하겠습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아니다. 내가 직접 하겠다.”
진안 군왕의 시선은 정교랑에게서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봐야겠다.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겠어. 이 여인에게 얼마나 많은 상처가 났고, 얼마나 많은 자상이 생겼는지.”
휘장 밖에 서 있던 주복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문틀을 향해 주먹을 두어 번 내리쳤다.
고약한 여인 같으니라고. 이렇게 못될 수가 있어?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냐고!
“전하, 피치 못할 상황이니, 신이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약을 들고 온 이 태의가 휘장 밖에서 예를 표하고는 조심스럽게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휘장이 잠시 걷힌 사이, 주복은 반쯤 벗겨진 옷가지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더는 옷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갈기갈기 찢어진, 붉은 천 쪼가리에 불과했다.
휘장이 도로 내려지고, 주복의 시야가 차단되었다. 주복이 다시 문틀에 머리를 기댔다.
정오가 되었을 무렵,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은 정교랑에게 깨끗한 새 옷이 입혀졌다. 주복이 서둘러 안쪽으로 달려갔다.
침상 위에 누운 여인의 얼굴은 귀신처럼 창백했다. 아무리 보아도 곤히 잠든 사람 모습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누가 보아도 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침상 옆에 걸터앉은 진안 군왕은 이따금 정교랑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한시라도 정교랑의 숨소리를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처럼.
이 태의가 무릎을 꿇은 채 정교랑의 맥을 짚었다.
“아직도 맥이 잡히지 않습니다.”
이 태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도대체 뭘 해야 저 여인이 깨어날 수 있습니까?”
주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 태의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그러려면, 왕비 전하께서 어쩌다 이렇게 되셨는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주 공자, 정말 하나도 기억나지 않으십니까?”
주복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다 저 때문입니다.”
주복이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화살에 맞지 않았다면, 만약 나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면, 저 여인은 저런 모습이 되었을까?
주 공자에게는 물어보나 마나겠군. 당시 주 공자에게 의식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왕비께서 자해하면서까지 자신을 치료하게 놔두지는 않았을 거야.
이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게다가 이런 치료법은…….
“그 시종들 둘은 어디에 있느냐?”
경 공공이 옆에 있던 어린 내시를 추궁했다.
“아직도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느냐? 어서 그놈들부터 깨워라!”
“물을 필요 없소. 아무 소용도 없을 테니까. 무당이 주술을 행할 때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하지 않아. 혹 그 광경을 목격하는 자가 있다면, 주술을 견디지 못하고 미치거나 바보가 되는 경우가 허다하지. 그들이 깨어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요.”
주술?
그 단어는 이 태의가 조금 전 황궁에서도 언급한 말이었지만, 지금 다시 들어도 실내에 알 수 없는 정적을 흐르게 하기에 충분했다.
“가서 탕약을 끓여오겠네.”
이 태의가 말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은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잠자코 듣기만 하며 정교랑의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바닥에 앉아있던 주복은 시간이 흐르는 줄도 모른 채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누군가가 주복의 어깨를 흔들자, 주복이 화들짝 놀라면서 허리를 곧추세우고 바른 자세로 고쳐 앉았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면서 실내로 빛이 들어왔다.
“주 공자님, 여기 상처에 약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어린 내시가 주복을 향해 공손하게 말했다. 주복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옷을 벗었다. 내시가 약을 손에 들고는 다시 주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나!”
주복의 가슴에 난 상처를 본 내시가 소리를 질렀다.
“상처가 이렇게나 빨리 아물다니!”
내시의 목소리를 들은 경 공공과 고 선생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의 가슴팍을 본 두 사람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두 사람의 표정에는 놀라움과 두려움이 동시에 담겨 있었다.
주복도 고개를 숙이고, 상처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문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불과 반나절 만에, 어젯밤의 상처는 족히 일주일은 넘게 걸려야 회복할 수 있는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이게 바로 주술의 위력인가?
정말 기묘하군. 놀랍기도 하고, 정말 엄청나.
주위의 시선을 느낀 주복이 저도 모르게 자신의 앞섶을 여몄다.
“거기 두거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주복이 천천히 말했다. 어린 내시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 선생 등이 시선을 거두고 아무렇지 않은 듯 대화를 이어갔다.
문밖에서 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궁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서둘러 밖으로 나간 고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고 선생이 휘장 밖에서 조용히 진안 군왕을 불렀다.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찰나의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했다. 진안 군왕이 휘장을 걷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양자 입적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혹시 전하께서 잠시 시간을 내주실 수 있으실지요?”
고 선생이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주복이 몸을 일으키자, 진안 군왕이 짧게 대꾸하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지.”
고 선생이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천만다행이군. 전하께서는 아직 심지를 잃지 않으시고,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계셔.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따라 걸음을 옮기자, 경 공공도 그 둘의 뒤를 따라나섰다.
주복이 휘장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문밖에서 작게 들려오는 말소리에 그는 걸음을 멈췄다.
“전하,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묻자, 진안 군왕이 멈춰 섰다.
“무슨 생각?”
고 선생이 고개를 돌리고 방 안에 내려진 휘장을 쳐다보았다.
“오늘까지 일어난 일들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많은 일이 참, 공교롭다고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고 선생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오늘까지 일어난 일들.
고 선생은 원래 지금 같은 때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황후가 궁에서 보내온 사람들은 왕비의 상태를 물으러 온 것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본론은 양자 입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 조회에서 양자 입적을 논하지 않았던 황후의 뜻은, 대신들이 진안 군왕의 양자 입적을 청하는 상소문을 작성하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이는 죽은 태자의 추봉이 정해지는 동시에 양자 입적을 통해 진안 군왕의 태자 책봉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것이 가장 좋은 그림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오늘 아침 조회에서 모든 게 결정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했지만, 진안 군왕의 온 신경이 정교랑에게 쏠려 있는 바람에 이 일은 일단 미뤄 둘 수밖에 없었다.
군왕부에 돌아온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곁을 한시도 떠나지 않았다. 막료가 오든, 대신들이 사람을 보내오든, 진안 군왕은 사람을 일절 만나려 하지 않았다.
황궁의 변이 끝난 첫날이 저물어 가고 있었다. 더는 지체하지 말고, 즉시 준비를 시작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다른 이라면 감히 진안 군왕에게 이런 말을 꺼낼 수 없었을 것이다. 고 선생만이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오늘까지의 무슨 일?”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되물었다. 고 선생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하룻밤 사이에 군왕이 황자가 되고, 태자가 되며, 천하를 다스릴 다음 천자가 되는 일 말입니다.”
이게 바로 오늘까지 일어난, 바로 코앞으로 닥친 일이다.
단 한 걸음으로 구오지존(九五至尊: 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아무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안 군왕이 이런 생각을 품고 있었고, 불손한 마음으로 모든 일을 추진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많지만, 진안 군왕의 최측근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가 단 한 번도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 해서, 그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 또한 아무 생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지금처럼 자격이 충분하고 기회가 왔을 때라면 더더욱.
평왕이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었을 때만 해도, 태자의 자리는 한없이 멀었고, 그 자리를 넘본다는 것 자체가 대역무도한 죄로 여겨졌다. 그런데 지금은 그 자리가 마냥 멀게만 느껴지지 않았다. 양자 입적한 종친이 황자가 되는 상황이 눈앞에 보이기 직전이었다.
종친에게 자격이 있다면, 종친인 진안 군왕도 당연히 양자 입적이 가능했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그 누구보다 가능성이 높은 사람이었다.
고 선생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이 생각들은 봄비를 맞은 죽순처럼 미친 듯이 자라났다. 고 선생을 비롯한 진안 군왕의 측근들은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들 자신도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죽을 각오를 하고 필사적으로 진안 군왕을 보필하는 것은, 어쩌면 바로 이 생각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이는 누구나 어렴풋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도 실행에 옮길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럴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 생각이 실현된 거지?
아니, 아니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게 아니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수많은 일이 하나로 모여 이 일을 이루어낸 것일지도.
만약 경성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군왕부에 갇혀 꼼짝달싹하지 못했을 것이고, 병사들을 이끌고 궁으로 쳐들어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약 태후의 교지를 받고 곧바로 경성에 되돌아왔다면, 오늘의 태양은 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어젯밤에 궁에서 목을 매달아 죽은 사람은 고능준이나 진소가 아니라, 바로 진안 군왕이었으리라.
만약 교지를 거역하고 곧바로 청원 역참을 떠났다 해도, 오늘 같은 상황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자에게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경성으로 방향을 틀었더라도, 절대 밤사이에 경성에 도착하지는 못했을 테니까. 대낮에 병사들을 이끌고 입성한다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성문에서 기다렸다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성 밖으로는 위수군이 대기 중이었으며, 궁 앞에는 대신들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모든 일이 잘 짜둔 바둑판처럼 착착 들어맞았다.
모든 일이 너무도 공교롭다 보니,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어쩌면, 이 일뿐만 아니라, 이전의 일들도…….
이를테면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일만 해도 그렇다. 왕비께서 백성들 앞에서 번개를 몰아오는 시연을 하시긴 했지만, 빗속에 서 있던 사람들은 한둘이 아니었는데 왜 하필 평왕 한 사람에게만 벼락이 내리쳤을까?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볼까. 전하께서 왕비께 청혼하셨을 때, 왕비께서는 흔쾌히 청혼을 승낙하셨다. 그런데 왜 하필 군왕 전하의 청혼만 받아들이셨을까? 군왕 전하 이전에도 많은 집에서 혼담을 넣으러 갔었다는데 말이다.
왕비께서 일식과 월식을 예측하시는 것도 그렇다. 바로 그 천재지변 때문에 고능준은 경성에서 쫓겨났는데, 고능준을 경성에서 내쫓은 것은 다름 아닌 진소였다. 그런데 그 진소가 오늘의 자리에 올라간 건 왕비께서 진 노태야의 병을 치료해서 진소의 근심을 덜어 준 덕분이다. 그 덕에 진소는 근심 없이 정사에 전념할 수 있었고, 조당에서 고능준과 대적할 수 있는 자리까지 올라갔다.
왕비께서 신비롭고 어마어마한 무기를 만들 줄 아신다는 건 또 어떤가. 왕비께서는 범강림이 신비궁을 바치게 하고 이무가 돌포탄을 만들게 영감을 주셨다. 그러한 무기들 덕분에 우리는 돌화창으로 매복을 물리치고, 돌포탄으로 궁문을 부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왕비께서 죽어가는 사람을 주술로 살릴 수 있다는 것. 하지만 왕비께서는 황제 폐하의 병을 고치지 않으셨고, 태자 전하의 병도 고치지 않으셨다. 그리고 그날 밤 왕비께서는 먼저 입궐하셨는데, 태자 전하께서는 왜 결국 돌아가신 걸까?
얼핏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이는 일들이지만, 그 조각조각의 일들이 모여 오늘의 일이 성사됐다. 예전의 일들을 곰곰이 되새겨 본다면, 가령 그 조각들 중 하나라도 빠지는 게 있었더라면, 오늘의 그림은 결코 완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의 일 말입니다. 전하께서는 부인께서 이 일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셨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진지하게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고 선생을 쳐다보면서 무덤덤하게 말했다.
“왕비는 어떤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네. 주육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심혈을 쏟았겠지.”
진안 군왕이 고 선생의 의중을 교묘하게 피해서 대답했다. 고 선생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전하께서 부디 왕비의 심혈을 소중히 여겨주시기 바랍니다. 자포자기하셔서 왕비께서 흘리신 피땀을 헛되이 만들지 않도록요.”
고 선생도 진안 군왕의 말을 교묘하게 비껴갔다.
“양자 입적을 더는 미룰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속히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종친들이 각지에서 속속들이 도착하고 있으니까요. 전하께서 빠르게 결단하지 않으신다면, 태자 전하의 장례 또한 안심하고 치르지 못할 것이 우려됩니다.
전하께서도 왕비와 태자 전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으시리라 사료되옵니다.”
고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흐르고 공기가 멈춰버린 듯했다.
진안 군왕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그 숨 막히는 정적을 깨트렸다.
“고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게 대체 뭐요? 의중을 이리저리 숨기고 우물쭈물 말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오. 왕비께서는 저 지경이 되셨는데.”
옆에 있던 경 공공이 고 선생의 멱살을 쥐어 잡고는 눈썹을 치켜세우고 낮게 읊조렸다.
“왕비께서 저 지경이 되셨으니, 전하께서는 더는 숨으시면 안 된다는 뜻일세. 왕비께서 전하를 위해 이렇게 많은 일을 해내셨고 심혈을 쏟아내셨으니, 왕비의 그 노력들을 절대 헛되이 해선 안 된다는 말이야.”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고 고 선생을 노려보았다.
“그 말인즉, 왕비께서 오늘의 일을 전부터 쭉 계획하셨다는 뜻이오?”
전하께서 오늘 황자가 되실 수 있는 이유가, 그리고 장차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되실 수 있는 이유가, 모두 왕비의 계획과 노력이었다니?
그런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돼!
그렇게 된다면, 그건 정말…….
“미쳤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것이오!”
경 공공이 낮은 목소리로 호통쳤다.
“말도 안 되는 생각? 자네도 지금까지 일어난 일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게.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을 가만히 잘 생각해 보면, 내가 지금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겠지.”
고 선생이 경 공공에게 뒤지지 않는 기세로 대답했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이 있는 거처를 쳐다보았다.
“주술, 주술. 항상 듣기만 해 봤지, 본 적은 없었어. 그런데 세상에 정말로 저런 신비한 주술이 있었다니. 저 여인은, 정말로 신선의 제자였나 보군.”
고 선생이 천천히 말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하늘이 점지한 천자라는 뜻이 된다. 그렇기에 신선이 전하를 도운 것이고, 오늘의 일은 모두 하늘이 이미 정해 놓았던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아니, 아니야. 주술을 행하는 무당을 신선이라고 할 수는 없어.
주술은 아주 은밀한 술수이며, 그런 술수는 음지에서만 행해질 수 있고, 이는 절대로 세상 사람들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것이야.
그래서 저 여인이 죽을병에 걸린 병자를 살릴 때, 다른 사람을 자리에 남겨 두지 않았던 것이로군. 그래서 목숨값을 일만 관씩이나 받았던 것이고, 그래서…….
고 선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호흡도 점점 더 가빠져 왔다.
누군가의 손이 고 선생의 어깨를 세게 내리치고 나서야 고 선생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허튼 생각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소리요? 이 태의가 이미 말했잖습니까. 주술이라고 해도 그리 신기할 건 아니라고. 주술은 의술의 선조 격이오. 어린아이의 소변을 약으로 쓰는 것 또한 주술의 일종이라고 하였소이다.”
경 공공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고 선생이 냉소를 지었다.
“설령 내가 한 생각이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 해도, 적어도 나는 생각이라도 했네. 그런데 자네는 생각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겠다는 건가? 왜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게야?”
“내가 무슨 엄두를 못 낸다는 겁니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데!”
경 공공이 눈을 부릅떴다.
“생각해야 할 일이야 많지. 생각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가 관건이고.”
고 선생이 긴 한숨을 내뱉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 일이 나쁜 일도 아니지 않나. 왕비 전하께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전하를 위하시는데, 이는 당연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지.”
일찍이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갑자기 경성을 떠나시겠다고 했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했는데, 이미 촘촘히 짜둔 바둑판이 있었던 거로군.
바로 오늘처럼, 하룻밤 사이에 대국이 결정되는 것만큼 꿈 같은 일은 없을 것이다. 하늘을 뒤엎는 격변이라는 옛말은, 바로 이럴 때 쓰이는 말이겠지.
“나는 왕비께 온몸을 엎드리고 탄복할 뿐일세. 불경한 생각을 한 적은 없어.”
고 선생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는, 정교랑의 거처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의 거처를 바라보았다.
좋은 일이라고? 누구에게 좋은 일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지.
남에게는 달콤한 사탕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치명적인 독약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다. 오늘의 일은, 정말로 생각할 엄두조차 나지 않으며, 감히 생각하기도 싫구나.
하지만 오늘의 일은 여러 가지 의문 속에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지금 원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도 원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고, 내일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모레는 원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한 번 원하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원할 테고, 점점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되리라.
창가에서 손을 거둔 주복이 시선을 내리깔고 몸을 돌렸다. 반쯤 열린 휘장 사이로 정교랑이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이 보였다.
얇은 내의 위로 갈색의 약물이 배어 나와 있었다.
다들 나에게 물었다. 저 여인이 도대체 나를 어떻게 치료한 거냐고.
난 정말로 모르겠지만, 저 여인의 몰골을 봐서는 나를 어떻게 치료한 건지 대충 짐작할 수 있어.
머리카락을 자르고, 칼날에 손을 비비고, 온몸을 칼로 난도질한 모습.
주술…….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하다. 주술을 할 때는 꼭 제물로 바쳐지는 게 있어야 하고, 원하는 게 있다면 꼭 그에 걸맞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래서 저 여인은 자기 자신을 제물로 바쳐서 나의 목숨과 맞바꾼 건가?
주복이 주먹을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에서 까드득 소리가 났다.
젠장! 빌어먹을!
누가 내 목숨을 네 목숨과 맞바꾸래! 누가 그러고 싶다고 했냐고!
“아씨, 아씨.”
문밖에서 반근과 소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청원 역참에 남겨져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경성 안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리며 재빨리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다시 몸을 돌려 두 시녀를 쳐다보았다.
반근과 소심은 휘청거리며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문밖에서 사내들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복은 창가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조 집사 등이 마당에 무릎을 꿇은 채 흐느끼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마주 앉아 담소를 나누다가도, 돌아서면 영영 못 볼 사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인생이 이토록 무상하다니.
하늘색이 짙어질 무렵,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진안 군왕이 안으로 들어왔다. 침상 옆에 앉아 있던 주복은 무의식적으로 진안 군왕에게 경계의 눈빛을 보냈고, 반근과 소심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표했다.
“해야 할 일을 끝내고 왔다. 이제 가서 조금 쉬게나.”
진안 군왕의 말에 주복은 고개를 저었다.
“깨어날 때까지 곁을 지키겠습니다.”
반근과 소심이 주복을 흘깃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일의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터라, 주복이 어떤 심정으로 자리를 지키겠다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정교랑과 진안 군왕은 부부이기에, 어떻게 보면 주복은 외간 사내에 불과했다. 반근과 소심은 주복이 남편과 함께 부대끼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교랑의 곁을 지키는 것이 적절한지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진안 군왕이 주복을 쳐다보자, 주복 또한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진안 군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실내에 적막이 감돌던 찰나, 진안 군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알겠네.”
진안 군왕이 주복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영화 4년 8월 초열흘, 태자의 시호를 선문(宣文)으로 정하고, 태자의 장례를 치를 날짜를 정했다. 하지만 대사면을 진행하겠다는 조서까지 내려지진 않았다. 태자가 음모에 휘말려 갑작스레 비명횡사한 일에 조정이 분노하고 있음을 표출한 셈이었다.
8월 열하루, 진안 군왕을 황자로 입적하여 황태자로 책봉한다는 조서가 내렸다. 천자와 태후가 모두 병상에 앓아누워 정사를 돌보지 못하는 상황인데, 군주의 자리는 단 하루도 비워 둘 수 없기에 진안 군왕을 양자로 입적하여 황태자로 책봉한다는 내용이었다. 또 태자가 된 방백종이 대리로 나라를 돌본다는 조서도 내렸다.
경성으로 들어오는 마차가 차츰 많아지면서, 역참과 식당에도 사람이 붐볐다. 역참의 역승들은 각지에서 온 종친과 군왕, 국공들을 분주하게 마중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소. 본디 태자의 국혼을 위해 상경한 것인데, 그런 경사가 하루아침에 장례가 되다니.”
“그러게나 말일세. 그나저나 오월(吳越) 지역 종친들이 우리보다 훨씬 많이 왔다던데, 혹시 연평 군왕을 보았는가?”
“일찍 왔다가 일찍 떠났다고 들었소. 듣기로는 병에 걸려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라서, 어제 이미 경성을 떠나 오월로 돌아갔다더군.”
회랑에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던 두 종친 중 한 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뭐, 경사스러운 일도 하나 있긴 하니, 비단 장례만 치르러 온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 이번 한 걸음으로, 태자의 장례에 참가할 뿐 아니라 황태자 책봉까지 함께 보고 갈 수 있지 않겠소. 가히 일거양득이라 할 수 있지. 괜히 두 번씩 오갈 필요가 없으니 말이오. 그리고 혹시 모르지…….”
말하던 사람이 좌우를 살피고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덧붙였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는 것까지 보고 갈 수 있을지도.”
옆에 있던 종친이 화들짝 놀라면서 황급히 그의 어깨를 치고는 좌우를 살폈다.
“어찌 그런 말을 감히 입에 올리나.”
“안 될 건 또 뭐 있소? 일을 벌인 사람은 따로 있는데, 입에 올리는 게 무슨 대수라고.”
앞서 말하던 종친이 나지막이 웃으면서 말했다.
황궁의 변이 일어난 이후로 며칠이 지났고, 경성의 야간 통행 금지령도 해제되었다. 하지만 선문 태자의 죽음과 고능준, 진소의 역모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막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의 횃불과 돌포탄, 위수군과 금위군의 혈투, 거리를 누비던 관병들까지, 이야기에 신비로움을 더할 만한 요소는 차고 넘쳤다. 이는 흡사 과거 태조와 태종 사이의 촉광부영(燭光斧影) 고사만큼 비밀스럽고 기묘했다.
“말하고 보니, 그렇게 된다면 제위는 결국 태조의 혈통으로 돌아가는 거로군.”
한 종친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회랑으로 나온 다른 종친이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서둘러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 낮추시오. 듣자니 혈통만 태조를 계승하는 게 아니라더군. 결단력 있고 과감하게 밀고 나가는 성격이 꼭 왕년의 태조를 보는 것 같다고 했소.”
다가온 종친이 작게 말하고는 턱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었다.
“연평 군왕이 어떻게 떠난 줄 알고 있소? 병졸들에게 꽉 붙잡혀 거의 끌려가다시피 경성을 떠났소. 군왕의 체면이라고는 하나도 지켜지지 않고 말이야.”
연평 군왕이 스스로 자리를 피하고자 자진해서 경성을 떠난 줄 알았는데, 진안 군왕이, 아니, 태자 위(瑋)가 그의 체면을 지켜주지 않았던 것이었다니!
앞서 대화하고 있던 두 종친이 놀란 기색을 보였다.
“게다가 정사를 직접 다스리기 시작했는데, 그 태도가 몹시 강경하다고 들었소. 어제는 조회에서 어떤 대신에게 한바탕 훈계를 늘어놓고는 관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그의 얼굴로 상소문을 냅다 던졌다고 하지 뭐요.”
이어지는 종친의 말에, 두 사람은 더욱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그럴 수가. 폐하를 따른 시간이 그렇게나 긴데, 성격은 왜 그 모양인 것이오? 폐하의 관용과 인자함은 하나도 배우지 못했답니까?”
두 사람이 믿기지 않는 듯한 얼굴로 묻자, 그 사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다들 몸조심하시구려. 괜히 원숭이들 앞에서 본보기로 죽임을 당하는 닭 꼴이 되고 싶지 않으면.”
세 사람이 조용히 말하는 사이, 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수왕비가 도착했습니다.”
수왕비! 태자의 생모!
“설마 수왕비도 역참에 온 것이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가. 수왕비께서는 당연히 태자의 관저로 가시겠지.”
“수왕비가 동궁(東宮)에 들어간다고? 이보게들, 황후마마께서 수렴청정은 하지 않으신다고 하나, 아직 옥새를 손에 쥐고 계시오. 수왕비가 동궁에 들어간다는 건, 황후마마의 따귀를 후려치는 꼴 아니오?”
“아직 제위에 오르기도 전인데, 누가 친아비냐고 다투던 복의(濮議) 논쟁부터 시작되는 건 아니겠지?”
작게 수군대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대청 안이 왁자지껄해졌다.
“정말로 태조의 성품을 물려받은 거라면 보통 강경한 성격이 아닐 테니,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
위층 회랑에 있던 다른 한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때 밖에서 또 한 번 소란이 일고, 누군가가 대청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니, 아니오. 수왕비께서 쫓겨나셨다는군!”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이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대문 앞에서 문전박대를 당하셨다고.”
“문턱을 넘어서지도 못했대.”
“황태자를 알현하고 싶으면 궁에 청을 올려야 마땅하며, 사사로이 보고 싶다고 해서 언제든 볼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했다더군. 군왕부는 더욱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나?”
“수왕비께서는 하는 수 없이 울면서 발걸음을 돌리셨고.”
대청 안에 더 많은 소식이 퍼지자, 회랑에서 대화하던 두 사람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제일 먼저 죽임을 당하는 닭이 수왕비일 줄이야.”
한 사람이 중얼거렸다.
대청에서 이 일에 관한 열띤 논쟁이 시작되었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오! 낳아 준 생모를 문전박대하다니! 아무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명예를 추구하려 한다 해도, 최소한의 인륜까지 무시하는 것은!”
“그러게 말이오. 정말 너무했소.”
회랑에 서 있던 종친 중 한 명이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았소? 역시 무슨 일에든 두 가지 해석이 있는 법이구려. 누가 무슨 행동을 하든, 욕을 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기 마련이지. 태자가 수왕비를 만나도 불효이고, 만나지 않아도 불효라니. 사람 사는 것이 이렇게 고단해서야 원.”
“지금으로 봐서는, 태자의 성품이 강경한 편이 훨씬 낫겠군. 성품이 온화한 종친이 양자로 입적되어 황태자가 되고, 지금같이 사건 사고가 많은 시기에 제위에 오른다면, 필시 대신들에게 손발이 꽁꽁 묶여서는 세상 사람들이 욕을 하느라 튀긴 침에 빠져 죽을 거요.”
“참, 태자는 아직 동궁으로 거처를 옮기지 않고 군왕부에 머물러 있나?”
앞서 말하던 사람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밖을 내다보면서 물었다.
“그렇다고 하더군. 태자비의 몸이 좋지 않아 당장 거처를 옮기기엔 어려움이 있나 보오.”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잠깐, 태자비는 신의 아니었소? 그런데 어떻게 몸이 안 좋을 수가 있지? 의원은 제 병을 못 고친다는 말이 사실인가?”
밖을 내다보던 사람이 시선을 거두고 웃었다.
“그야 모를 일이지만, 태자가 매일 황궁과 군왕부를 오가고 있다고 하오. 정사는 모두 천자의 침궁에서 처리하고, 왕부에서는 외부인을 일절 만나지 않고 정사를 논하지 않는다고 들었소. 명부(命婦: 천자에게 봉작을 받은 부녀자)들도 아직 태자를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하고.”
앞서 말하던 사람이 웃으면서 다시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정말 이상하긴 하네. 그럼 선문 태자의 장례와 태자 책봉식에서 태자비를 볼 수 없다는 소리군.”
조금 아쉽게 되었네.
“밖이 왜 저렇게 소란스럽지?”
탕약을 손에 쥐고 밖을 내다보던 반근이 물었다.
“별일 아닐 거야. 우리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소심이 대꾸했다.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건 아씨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드리는 것뿐이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아무 상관도 없어.
“태자비께서는 오늘 어떠셔?”
소심이 물었고, 반근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반근의 반응에 소심은 한숨을 내쉬고 더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이 몸을 돌리고 대청 안으로 들어서자, 자리에 앉아 있는 주복이 보였다. 두 사람은 이제 그런 주복의 모습이 익숙했다.
주복은 팔걸이의자에 몸을 기대고 잠시 졸고 있는 듯했지만, 인기척을 느끼자마자 곧바로 눈을 번쩍 뜨고 눈앞의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반근과 소심이라는 것을 알아본 그는 그제야 경계를 풀고 다시 눈을 감았다.
“주 공자님, 잠시 가서 쉬시는 건 어떠세요? 저희가 여기서 지키고 있을게요.”
소심이 가까이 다가가서 물었지만, 주복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반근이 소심을 향해 고개를 젓자, 소심은 어쩔 수 없이 침상으로 다가가 정교랑을 부축해 약을 먹이고 깨끗한 수건으로 손과 얼굴을 닦아 주었다.
“아씨의 상처가 되게 빨리 낫는 거 같네.”
“그러게. 내일은 또 약을 바꿀 때지?”
두 사람이 목소리를 낮추고 대화했다.
“예전에, 아씨께서 갑자기 혼절하셨던 때가 생각나. 그때도 지금처럼 혼수상태로 쭉 주무시기만 했잖아.”
반근이 말했다. 소심이 대답하기 전에, 누군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달라.”
소심과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주복을 쳐다보았다.
“달라.”
주복이 또 말했다.
그때는 의식을 잃어 혼절한 거고, 이번에는 외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거야.
그때는 자기 자신 때문이었지만, 이번엔 나 때문이고.
주복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도 저희가 얼마나 놀랐는데요. 의원도 태의도 속수무책이었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나중에 군왕 전하께서 딱 한 마디로 아씨를 깨우셨지만요.”
말하던 소심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올랐다. 반근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침상 위의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시지만, 며칠 전만큼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몰골은 아니시네.
다만…….
반근이 찬찬히 정교랑의 위아래를 훑어보았다.
이번은 정말 달라. 그때는 잠드신 거였지만, 이번에는 아씨께서 그냥 잠드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호흡에 따라 가슴께가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고, 사지는 뻣뻣하게 굳어 있어. 심장 박동도 느껴지지 않고, 맥도 잡히지 않아.
누구에게 아씨의 시중을 들라고 하면, 상태를 듣기만 해도 놀라 자빠질 정도야.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지난번에 군왕께서 아씨를 깨우셨으니까, 이번에도 분명히 깨어나실 수 있을 거야. 태자 전하께서 계속 아씨의 곁을 지켜 주시고, 종종 말도 건네시곤 하잖아.”
소심이 서둘러 반근을 위로하자, 반근은 눈물을 훔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조금이라도 늦게 대답하면 소심이 말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반근은 재빨리 대답했다.
반근이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창가를 내다보았다.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다.
“오늘 밤에는 태자 전하께서 늦게 들어오시려나?”
곧 선문 태자의 장례가 있기도 하고, 황제가 병상에 앓아누운 동안 상소문이 어마어마하게 많이 쌓인 탓에, 태자는 해가 뜨기도 전에 입궐해서 해가 지고 나서야 왕부로 돌아왔다. 태자가 돌아오는 시간은 날이 가면 갈수록 더욱 늦어졌지만, 아무리 늦은 시간이어도 태자는 기어코 왕부로 돌아와 밤을 보냈다.
그나저나…….
소심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육공자님, 며칠 동안 여기서 밤을 지새우셨는데, 돌아가서 조금이라도 눈 좀 붙이세요. 계속 여기에만 계시면 다들 편하게 쉬지 못해요.”
주복은 다시 잠들었는지, 소심의 말을 듣고도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육공자님, 정말 너무하시잖아요! 태자 전하와 태자비께서는 부부이신데, 외간 사내가 어떻게 이리 신방에 죽치고 있을 수가 있어요!”
소심이 급한 마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부인 게 뭐?”
주복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 말 못 들어 봤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사이이기도, 제일 먼 사이이기도 한 게 바로 부부라고.”
주복의 말에, 소심이 눈을 부릅뜨며 쏘아붙였다.
“육공자님, 도대체 왜 그렇게 태자 전하를 의심하시는 건데요?”
태자 전하를 의심한다고?
깜짝 놀란 반근이 고개를 들고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어째서지? 태자 전하께서 우리 아씨를 얼마나 아껴 주시는데. 육공자님은 왜 자꾸 전하를 의심하시는 걸까?
주복은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궜다.
실내에 어색한 정적이 흐르자,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다.
“경 공공.”
소심이 서둘러 문가로 다가가 예를 표했다.
“괜찮아, 나올 필요 없다. 전하께서 오늘 조금 늦으신다는 소식을 태자비께 알리려고 온 것이니.”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하자, 소심과 반근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 공공은 방 안으로 들어가서 침상에 누운 정교랑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오늘은 정교랑의 상태가 어떠한지 다정하게 물었다. 소심과 반근이 경 공공의 물음에 일일이 대답했다.
경 공공이 주복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육공자님, 다친 곳은 좀 어떠신지요?”
“다들 예상했던 대로, 상처는 모두 아물었네.”
주복이 눈을 뜨고 경 공공을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말에 가시가 있는 듯한 느낌에 경 공공이 어색하게 웃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경 공공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또 물었다.
“참, 육공자님, 종 장군께서 경성으로 사람을 보내왔는데, 한번 뵙는 건 어떠실지요?”
경 공공이 말을 끝내자, 주복은 경 공공을 꿰뚫을 기세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내가 왜 그 사람을 봐야 하는지 모르겠군. 예전에 내가 종 장군의 수하였다고는 하나, 난 지금 위수군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
경 공공이 웃었다.
“과거의 연이 더욱 가까운 법이지요.”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직접 물어보게. 나는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으니.”
주복이 경 공공의 말을 끊었다. 소심과 반근은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 공공이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전하께서 논공행상을 하고자 하십니다. 이번에 위수군이 역적을 물리친 데에 혹시 종 장군의 공로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당초 육공자님과 종 장군 사이에 무슨 약조가 있었던 것인지요? 태자비께서 혹시…….”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번 일은 내가 사전에 준비한 게 아니고, 태자비가 누구를 만나 미리 논의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고 한다면, 내 말을 믿어 주긴 할 건가? 나는 내가 한 일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남이 뭘 했고, 또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네. 그건 나와 무관한 일이야. 그러니 내게 와서 묻지 말게. 나는 모른다는 말밖에 할 수 없으니.”
경 공공이 멈칫했다가 이내 미소지었다.
“예, 예. 소인은 당연히 육공자님의 말을 믿지요.”
경 공공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경 공공이 나가자,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반근과 소심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멍하니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다시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아서 눈을 감았다. 그는 또 금세 잠든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사실은 온몸이 잔뜩 긴장한 채로 앉아 있어서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경 공공이 밖으로 나오자, 고 선생이 서둘러 그를 마중했다.
“어떻나? 뭐라고 하던가?”
고 선생이 조용히 묻자, 경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범강림, 그리고 이무와 똑같은 말을 합니다.”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태자비께서 제게 따로 당부하신 말씀은 없었습니다. 경성을 떠날 때 필요한 호신용 물품을 하나 만들어 달라고 시키신 것밖에는요. 그런데 먼 길을 가게 되면, 호신용 무기 하나쯤은 가지고 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 누이가 워낙에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기도 하고요.
폭죽이요? 그 폭죽은 제가 스승님께 가르침을 얻어 만든 것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제게 그 효과를 검증해 보라고 하셨고, 때마침 경성을 떠나시게 되어 같이 가져가신 겁니다. 그걸로 딱히 뭘 하시겠다는 말씀은 없으셨고요.
특별히 황후마마께 바친 거냐고요? 저야 모르죠. 전 정말로 모릅니다. 스승님께서 제게 따로 준비하라는 말씀도 없으셨고, 어디에 쓸 거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어요. 다들 아시잖습니까. 제 스승님께선 과묵하시다는 걸요. 제가 폭죽이나 돌포탄을 만들어 낸 것도, 스승님께서 말씀으로 알려 주신 게 아니라, 제가 스승님의 불꽃놀이를 보고 스스로 터득한 겁니다.
스승님께선 평소 말씀이 없으셨지만, 자주 하시던 말씀은 있습니다.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고요. 혹시 공연한 생각은 하시는 건 아닌지…….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진다고?
이런 일은,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한 치의 오차도 없게끔 신경 써서 준비해야만 가능한 일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라, 슬쩍 보기만 해도 착착 들어맞게 준비했을 수가 있나?
“이게 뭐라고 다들 쉬쉬하는 건지. 무려 천자를 보호하고, 군주를 보필한 공인데 말일세. 남들에게 말하기 민망한 수법이라 해도, 그냥 우리끼리 알고 있자는 거잖나? 만천하에 이 일을 고하는 것도 아닌데 왜들 그리 연기를 하는 건지.”
고 선생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말했다. 잠시 생각하던 경 공공이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들의 말이 진실일 수도 있겠습니다. 전하를 위해 그 모든 걸 준비하신 건 아닐 수도 있어요. 범강림의 말처럼, 먼 길을 떠날 때는 당연히 호신용 무기가 필요한 법이고, 이무의 말처럼, 그저 개량된 돌포탄을 시험해 보기 위해 챙기셨던 걸 수도 있지요. 주 공자도 말했잖습니까. 고씨와 진씨가 태자를 음해하려는 줄은 전혀 몰랐다고요. 위수군 또한 단지 경성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 병사들을 이끌고 몰려왔던 거라면…….”
고 선생이 경 공공의 말을 끊었다.
“일부러 준비한 게 아니라고? 설마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다 인지상정이고, 흔히 일어날 법한 일이라는 겐가? 인지상정으로 먼 길을 떠나니까 호신용 무기를 챙겼고, 그저 제자의 결과물이 만족스러운지를 확인하느라 조금 챙겼고, 이왕 만든 김에 황후마마께도 챙겨 드렸다고? 그러면 하필 그날 조정에 필시 큰 파란이 일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다는 것도 인지상정에 불과한 것이겠군! 바보인 경왕이 태자가 되었으니 말이지!
일이 그렇게 시기적절하게, 어느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딱딱 들어맞을 수가 있단 말인가? 자네는 다른 의도 일절 없이 인지상정으로만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믿자는 게야?”
고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다그쳤다.
하긴, 이건 보통사람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게 아니긴 하지. 나도 도무지 믿기지 않아.
경 공공은 민망한 듯 손을 비비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 선생이 정교랑이 있는 거처를 쳐다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주술을 행하는 사람들이 죄다 저렇긴 하지.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 없는 것들이기에, 별것도 아닌 것을 신묘해 보이게 포장하곤 해. 무슨 말을 묻기만 하면 꼭 도리에 맞는 말이 무엇이고, 도리에 맞지 않는 말은 무엇이니 하면서, 천기를 누설하지 못하겠다고만 하고 말이야.”
고 선생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지. 어차피 대세는 기울어졌으니, 이미 지나간 건 더 이상 논하지 않기로 하세. 다만, 나중에도 저렇게 혼자서만 알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는 않으셨으면 좋겠군. 그날 밤에 청원 역참에서 갑자기 경성으로 돌아오셨던 것처럼 말이야. 우리가 왜 돌아가는 거냐고 재차 여쭈었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잖나.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도 사람을 더 데려왔을 거고, 그럼 성문 앞에서 그리 시간을 지체하지도 않았을 걸세.”
“어쩌면 태자비께서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셨을 수도 있잖습니까.”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그를 흘겨보았다.
몰랐으면 왜 그렇게 급하게 경성으로 돌아왔겠냐고!
고 선생의 눈빛을 읽었는지, 경 공공은 손을 들고 미안하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 좋은데, 이러지 않으면 더 좋겠다는 거지. 어차피 이제 한 식구가 되었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이 생기겠다 싶으면 미리미리 알려 주시는 게 서로 좋지 않겠나.”
고 선생이 이어서 말했다.
앞으로는…….
경 공공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이 있는 거처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앞으로는 없을지도요.”
경 공공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말로 주술에 갇혀 버린 거라면, 그 주술이 풀리지 않는 한 영원히 그 속에 갇혀 버릴 테니까.
앞으로가 없다?
고 선생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도 경 공공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어두컴컴한 밤, 천자의 침궁에는 여전히 등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단정한 자세로 탁자 앞에 앉은 방백종이 마지막 상소문을 덮고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아바마마.”
방백종이 침상에 누워있는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말했다.
“소자가 상소문을 다 읽었습니다. 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들으셨지요? 아바마마께서는 소자의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그의 말에 대답해 줄 사람은 당연히 없었다.
“아바마마 생각에 적절하지 못한 게 있으시다면, 부디 소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방백종이 몸을 돌리고 황제를 향해 예를 올렸다. 줄곧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내시가 허리를 숙여 방백종을 부축하면서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전하, 오늘은 궁에서 쉬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젓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이 서둘러 그를 에워싸고 두봉과 두모를 씌워 주면서 천자의 침궁을 떠났다. 황궁의 곳곳에서는 일렁이는 등롱들이 길을 밝히고 있었다.
방백종이 갑자기 어딘가에서 걸음을 멈췄다.
내시들이 방백종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돌렸다. 그곳에는 등불을 대낮처럼 환히 밝힌 전각이 있었다.
내시들이 불안한 마음으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그곳은 선문 태자의 영구를 잠시 안치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전하, 오늘은 피곤하실 텐데 다음…….”
내시들이 조용히 말했지만, 방백종은 이미 그쪽을 향해 발걸음을 돌린 터였다. 내시들은 하는 수 없이 방백종을 따라 편전으로 향했다.
상복을 입은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자리를 비켜 주자, 방백종은 관곽 앞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관을 둘러싼 얼음 대야 때문인지, 전각 안은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로 춥고 스산했다.
방백종이 자리에 앉아 관곽을 바라보았다.
“육가아, 곧 너를 보내야 하는구나.”
방백종은 목이 메어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시는 볼 수 없어. 더는 이 세상에 없겠지.
방백종이 고개를 떨궜다.
“형님.”
갑자기 방백종의 귓가에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구해 줘요.”
방백종이 퍼뜩 고개를 들고 눈앞을 쳐다보았다. 관곽 안에서 어린아이의 작은 손이 나오더니 그를 향해 손짓했다.
“형님, 형님, 나 좀 구해 줘요.”
육가아? 육가아!
방백종이 크게 기뻐하면서 서둘러 손을 뻗으려 했지만, 누군가가 그의 손을 막았다.
“정방?”
옆에 선 여인을 본 방백종이 놀랍기도, 기쁘기도 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어서, 어서 육가아를 구해 줘요.”
하지만 눈앞의 여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구할 수 없어요. 그냥 죽게 해줘요. 안 그럼 어떻게 고능준을 단죄할 수 있겠어요?”
여인을 바라보던 방백종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눈앞의 여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잊었군요. 당신이 경성을 떠나지 않았다면, 고능준이 왜 당신을 죽이러 쫓아왔겠어요? 육가아가 죽지 않았다면, 고능준이 왜 죽었겠어요? 방백종, 잊은 거예요? 당신들은 전부 미끼예요.”
미끼…….
전부 미끼라고?
“형님, 형님! 나 좀 살려 줘요!”
방백종이 벌떡 일어나 침상에 앉았다. 그가 숨을 헉헉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은 어두컴컴했고, 푸른 휘장이 시야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누가 자신을 쳐다본다는 느낌에 방백종이 고개를 휙 돌리고 옆을 쳐다보았다. 창가 옆의 의자에 앉아 있던 주복이 자세를 고쳐앉고 방백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실의 휘장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소심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였다.
꿈이구나.
방백종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았다.
“지금 시간이 어떻게 되느냐?”
방백종이 물었다.
“묘초(卯初: 오전 5시경) 일각입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니, 조금 더 눈을 붙이세요.”
소심이 대답했다. 방백종이 고개를 돌리고 침상 안으로 시선을 옮기자, 평온하게 잠든 것 같은 정교랑이 보였다.
침상에 걸터앉은 방백종의 그림자가 정교랑의 위로 드리워졌다. 부쩍 야윈 정교랑의 몸은 오늘따라 더 작고 왜소해 보였다.
방백종이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안고 몸을 옆으로 돌려 주었다. 그러고는 이불을 끌어다가 정교랑의 어깨까지 올려 덮어 주고 침상 아래로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세수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태자가 내시들에게 둘러싸여 왕부를 떠나자, 소심과 반근이 안으로 들어왔다.
주복은 창가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는 방에 누가 있든 없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너무 황당하잖아. 전하께선 공자님이 저러는 걸 용인해 주시다니.”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입술을 삐죽였다.
“전하께서는 아씨를 포용해 주시잖아. 아씨께서 소중하게 여기시거나 좋아하시는 건, 전하께서도 늘 아끼고 포용해 주셔.”
소심이 나지막이 말했다.
반근이 잠시 입을 꾹 닫았다가 고개를 숙이고 중얼거렸다.
“아씨께서 어서 깨어나셨으면 좋겠다.”
동이 틀 무렵, 성문이 평소보다 일찍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탄 채 성 밖으로 질주했다. 조용한 경성 거리 위로 갑작스럽게 울려 퍼지는 말굽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전하,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아직은 너무 위험합니다.”
방백종을 바짝 따라가던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괜찮다. 위험할 때는 이미 지났어. 곧 태자의 장례가 치러질 것이고, 조정의 일도 잠시 중단됐으니, 혼자 잠시 나갔다가 와도 무방할 것이야.”
바람이 날리자 두모를 눌러쓴 방백종의 얼굴이 보이다 안 보이다 했다. 경 공공은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방백종이 돌연 말고삐를 당기며 말을 세우고 한 방향을 내다보았다.
“아, 전하. 저쪽은 태자비께서 무원산 형제들과 정사낭을 위해 세운 무덤입니다.”
경 공공이 조용히 말했다.
정사낭.
방백종이 작게 탄식했다.
“그러고 보니, 아직 그를 보러 가지 않았구나. 따지고 보면 정사낭은 나 때문에 죽은 것인데.”
“전하,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요!”
경 공공이 고개를 저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방백종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무덤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무덤 앞으로 울타리가 쳐져 있고, 주위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방백종이 말에서 내려 무덤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께서는 아직 무원산 비석의 글씨를 보신 적이 없으시지요? 가히 천하제일 행서라고 불릴 만합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
방백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원산 형제들의 비석을 차례로 둘러보던 그의 시선이 한곳에 멈췄다.
저건, 뭐지?
방백종이 다급하게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이게 뭐지?
“이게 무엇이냐?”
방백종이 물었다. 갑작스러운 방백종의 행동에 깜짝 놀란 경 공공이 그의 곁으로 황급히 다가갔다.
“이건, 정(程) 자입니다. 엇, 그런데 왜 한 글자만 새겨져 있지요? 이것도 태자비께서 새기신 것인가? 아직 글자를 못다 새기신 같은데요?”
경 공공의 말이 끝나자, 방백종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화들짝 놀란 경 공공이 몸을 살짝 떨고는 경악한 표정으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방백종은 고개를 젖히면서 큰 소리로 웃었다. 그 바람에 두모가 벗겨지면서 환하게 웃는 방백종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는 새길 수 있겠구나.”
방백종이 웃으면서 말했다.
“이제, 다 새길 수 있겠어!”
이제, 다 새길 수 있겠어!
이제! 다 새길 수 있단 말이다!
날이 밝아오고, 성 밖을 오가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면서 몇몇 행인들은 무덤 앞에 있는 방백종 일행을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쳐다보곤 했다.
“전하.”
경 공공이 주위를 살피고는, 무덤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방백종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그만 돌아가시지요.”
돌연 큰 웃음을 터트리고 난 후, 방백종은 바닥에 멍하니 주저앉아 ‘정’이라는 글자가 쓰여 있는 비석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왜 저러시는 거지?
근래 들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기도 했고, 너무 갑작스럽게 모든 일이 일어나기는 했어. 고씨와 진씨가 태자를 음해했고, 선문 태자께서 돌아가시자 전하께서는 곧바로 황자로 입적되어 황태자로 책봉되셨지.
그런데 이 와중에 태자비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온갖 일들이 정신없이 들이닥쳤어. 세간에 떠도는 갖가지 낭설들은 무시한다 해도, 전하께서는 너무도 고단한 나날들을 보내고 계셔.
가장 힘드신 일은 아마도 태자비께서 계속 깨어나지 못하시는 거겠지? 그것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께서는 요새 통 사람들과 대화도 하지 않으시고, 오늘은 급기야 이렇게 이상한 행동까지…….
안 그래도 집에서 혼수상태인 태자비를 지켜보느라 마음이 좋지 않으신데, 바람을 좀 쐬러 나왔다가 하필 태자비께서 새겨 둔 비석을 보게 되어 더욱 슬프신가?
“이 글씨들 좀 보게.”
방백종이 자신의 앞에 놓인 비석들을 손으로 가리켰다.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히 보았습니다. 태자비 전하께서 글씨를 참 잘 쓰시지요.”
방백종이 웃음을 터트렸다.
“무원산 글씨들을 기억하느냐?”
“당연하지요. 그 몇 글자는 무려 천하제일 행서라고 불리는걸요.”
경 공공이 대답했다.
“아니, 내 말은, 이 글씨들이 어떻게 쓰인 건지 알고 있느냔 말이다.”
방백종이 손을 뻗어서 비석 위를 천천히 더듬었다.
“서무수.”
방백종이 글씨를 읊자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때 태자비께서 얼마나 배짱이 크셨는지,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그때 전하께서 나서서 폐하 앞에서 태자비를 감싸 주셨던 것이 참으로 다행입니다. 전하가 아니셨다면, 태자비께서 격노하신 폐하를 몇 번이나 더 도발하셨을지, 감히 상상하기조차 무섭습니다. 그리고 전하가 아니셨다면, 태자비께서는 그렇게 빨리 무원산 형제들의 공로를 인정받고, 그렇게 빨리 원하는 것을 얻지는 못하셨겠지요.”
옛일을 회상하는지, 방백종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께서 참 오랜만에 저런 미소를 보이시는군.
“억울함을 해소했다고 해서 끝이 난 게 아니었지.”
방백종의 말에 경 공공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억울함이 해소된 게 무슨 대수라고요. 태자비가 형제들의 억울함을 푸는 걸 막았던 사람들도 다 끝이 좋지 않았지요. 고능준에게 보란 듯이, 서북 군정을 손에 쥐고 있던 강문원을 기어이 쓰러트리셨으니까요. 태자비께서는 강문원을 해치우고 나서야 이 비석에 이름들을 새기셨…….”
경 공공이 말하다가 갑자기 멈칫했다.
그래, 생각났어.
무원산 무덤의 비석은 본디 무명비였지. 무원산 형제들이 명예를 되찾고 강문원이 지방으로 좌천된 후에야 비석에 글씨가 새겨졌어.
형제들이 명예를 되찾고 강문원이 지방으로 좌천된 후, 그러니까 억울한 게 있다면 그 억울함을 풀고 나서, 복수할 게 있다면 복수를 끝내고 나서야…….
비석들을 차례로 훑어보던 경 공공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정사낭의 비석.
경 공공은 당초 정사낭을 안장할 때, 묘비에 아무런 글자도 새기지 않았던 것을 떠올렸다. 그런데 지금 다시 보니, 그 비석에 새겨진 ‘정’이라는 한 글자가 날카로운 바늘처럼 그의 눈을 찌르고 있었다.
언제 새겨진 거지?
정사낭의 장례를 치렀을 때, 온 경성의 사람들이 태자비께서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친오라비인 정사낭의 이름을 드높일지 궁금해했지만, 태자비께서는 정사낭을 위한 술을 빚지도, 그를 위해 불꽃놀이를 하지도 않으셨다.
태자비께서는 그 무엇도 하지 않으셨어. 정사낭이라는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나 싶을 정도로.
그러나, 잊을 리가 있나. 절대로 잊을 리가 없지. 비석에 글씨를 새기지 않은 게 아니라, 아직 때가 안 되었을 뿐이다.
술이나 불꽃놀이 따위로 어찌 친오라비의 죽음을 기릴 수 있으랴.
피로 맺어진 원수라면, 피로 갚아야 하는 법.
고십사가 죽고, 이젠 고능준까지 죽었으니.
경 공공은 갑자기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쫙 돋으며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리가 후들거린 경 공공은 결국 털썩하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니 이제는, 다 새길 수 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방백종이 무덤 앞을 천천히 떠났다.
“전하!”
경 공공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방백종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날려 말 위에 올라탔다.
“가자.”
방백종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오자, 활짝 열린 창틀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소심이 서둘러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닫았다.
그때 누군가가 휘장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께서 사람을 보내왔는데, 오늘 밤에는 왕부로 돌아오지 않으신대. 내일 선문 태자의 장례가 치러질 예정이라, 오늘은 선문 태자의 빈소를 지키시겠대.”
반근의 말에 소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주복이 침상 옆에 서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공자님도 오늘은 일찍 쉬세요. 오늘 밤에는 저랑 반근이 여기에 있을게요.”
소심이 주복에게 다가가 말하자, 주복은 허리를 곧추세우고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됐다. 내가 여기 있겠다.”
반근과 소심은 이젠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지내실 작정인 거지?
설마 아씨께서 평생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공자님도 평생 이렇게 아씨의 곁을 지키시려는 건가?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자, 반근은 화들짝 놀라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쳤다.
“왜 그래?”
소심이 깜짝 놀라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냐, 아냐. 모기가 있어서.”
반근이 웃으면서 대꾸하고는 정교랑의 몸을 옆으로 돌려 주었다.
늦가을에 모기가 어디 있어.
소심이 반근의 마음을 눈치챈 듯 작게 탄식하고는, 별다른 말 없이 반근을 도와 정교랑의 자세를 바꿔 주었다.
정교랑의 몸은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혹여 욕창이 생기지는 않을까 싶은 마음에 이 태의는 수시로 정교랑의 자세를 바꿔 주고 안마해 줘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소심과 반근이 침상에 걸터앉아 정교랑의 손과 발을 조심스럽게 주물렀다.
지금까지 아씨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말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다들 그 주제를 회피하려는 것 같아.
아씨가 깨어나실 거라는 말을 해 주는 사람도 없어. 어쩌면 아씨는 정말 이대로 평생 깨어나지 않으실지도 몰라.
아씨께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어떡하지? 아씨야 육공자님께서 평생 지켜 주신다지만, 태자 전하는?
반근이 정교랑의 귀밑머리를 조심스럽게 귀 뒤로 넘기고는 숨을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곁눈질로 탁자 위에 놓인 태자비 책봉 조서를 바라보았다.
반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정교랑의 다른 손을 잡고 안마하기 시작했다.
안 울어. 다시는 울지 않을 거야. 괜찮아. 내가 쭉 아씨의 곁을 지킬 테니까.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강주의 정씨 저택이 시끌벅적해졌다.
“어떻게 된 것이냐? 대낭, 도대체 무슨 일이야?”
떨리지만 힘 있는 노파의 목소리가 마당 안에 울려 퍼졌다.
정 대노야가 서둘러 마당으로 걸어 나오자, 지팡이를 짚고 정 이노야의 부축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고 있는 정 노부인이 보였다.
“대낭, 교교가 곧 황후가 된다고 하던데, 우리는 왜 아직도 경성으로 가지 않는 것이냐? 교교의 혼사도 놓쳤는데, 교교의 황후 책봉식까지 놓치면 되겠느냐.”
정 노부인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하자,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머니. 준비하고 있습니다.”
“형님, 누굴 속이려는 겁니까? 안 갈 준비를 하는 건 아니고요?”
정 이노야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정 노부인을 부축했다.
“어머니, 이번 일은 사소한 일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 정씨 가문을 호시탐탐 노리는 눈이 얼마나 많은데요. 아직 폐하께서 건재하시니 그런 말씀은 삼가셔야 합니다.”
정 대노야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정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나도 알다마다. 얼마나 큰일인지 굳이 일러 주지 않아도 알아.”
정 노부인이 정 대노야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옛날에 점쟁이가 말하기로는, 교교가 아주 귀한 명을 타고났다고 했어. 그래서 내가 일찍이…….”
정 노부인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건지 모를 옛날 일을 중얼거렸다. 노모의 말을 들은 정 대노야는 속으로 탄식하면서도, 겉으로는 정 노부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세요. 마차도 다 준비해 뒀습니다. 경성에서 저희가 지낼 거처도 미리 마련해 두라 일렀고요. 때가 되면 출발할 겁니다.”
정 대노야가 진지하게 말했다. 정 노부인은 그제야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잘 준비했을 줄 알았다.”
정 노부인이 정 이노야를 흘겨보면서 꾸중했다.
“그러게 내가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렇게 큰일인데 가족인 우리가 어찌 안 갈 수 있겠어.”
정 이노야는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대꾸하지 않았다. 마당으로 나온 정 대부인이 정 노부인을 부축했다.
“어머니, 새 옷을 지을 옷감을 좀 골라 왔는데, 한번 보시겠어요?”
“그래, 그래.”
정 노부인이 정 대부인의 부축을 받으며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정 노부인이 자리를 뜨자마자, 정 대노야는 얼굴을 굳히고 정 이노야를 노려보았다.
“집에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갔다가는, 네놈의 다리를 분질러 버릴 줄 알아라.”
정 대노야가 눈썹을 치켜뜨고 조용히 호통쳤다. 정 이노야가 발을 굴렀다.
“형님! 역시 경성으로 가지 않으려던 속셈이었군요!”
“잘 맞혔다.”
정 대노야가 콧방귀를 뀌고는 하인들을 불렀다.
“여봐라, 정 이노야를 모시고 방으로 가거라.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괜히 밖으로 나돌지 못하게 하고.”
화가 난 정 이노야가 펄쩍 뛰면서 노부인을 부르려던 찰나, 그에게 달려든 시종들이 재빨리 그의 입을 막고 그를 밖으로 끌고 나갔다.
이 하찮은 것들이 감히 그 더러운 손으로 내 입을 막아?
정 이노야는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나는 장차 황후가 될 여인의 아비야! 나는 황제의 장인이 될 국구(國舅)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 이 빌어먹을 놈들!
정 이노야가 시종들의 손에 끌려나가는 동안, 정 대노야는 어두운 표정으로 마당에 서 있었다.
“노야, 우리는 정말 안 가는 거예요?”
정 대부인이 밖으로 나와서 목소리를 낮추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이 우릴 부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강주를 떠날 순 없소.”
“정해질 건 다 정해진 것 같은데, 아직도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요?”
정 대부인이 물었다.
경성에서 고씨와 진씨 두 사람이 선문 태자를 음해했다는 소식이 벌써 강주까지 전해진 뒤였다. 당시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란 정 대노야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경성은 역시 갈 곳이 못 돼. 경성은 역시 갈 곳이 못 돼.”
정 대노야가 같은 말을 되뇌었다.
왜 갈 곳이 못 된다는 거지?
정 대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보았다.
정 대부인뿐만 아니라, 곧 국구가 될 사람인 정 이노야도 의아한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이 말귀를 알아듣든 말든, 정 대노야는 절대 강주를 떠나지 않겠다는 생각을 확고히 했다.
경성이 뭐 어떻다고 노야께서 저리 두려움에 떨고 계신 거지?
영화 4년 8월 16일, 선문 태자의 안장 의식과 장례가 치러졌다. 송장(送葬) 행렬은 이미 한참 전에 끝났지만, 방백종은 여전히 능묘 앞에 서 있었다.
다시는 없어.
이 세상에 다시는 육가아라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아. 예전의 그 영리하고 총명했던 육가아든, 바보가 된 육가아든, 이제는 아무도 없어.
방백종은 천천히 몸을 돌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이젠 없어. 이제는 정말 나 혼자야.
태자부에서는 반근이 회랑 아래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태자 전하께서 오늘은 돌아오시겠지?”
반근의 말에 소심이 반근을 슬쩍 쳐다보았다.
“오늘 그 질문을 몇 번째 하고 있는지 알아? 선문 태자의 장례가 끝나기는 했지만, 그 후에 해야 할 일도 태산처럼 많을걸?”
“그럼 태자 전하께서 많이 고단하시겠네.”
반근이 말했다.
“그렇지, 태자가 되자마자 나랏일을 돌보고 계시니까. 그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소심이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안채를 쳐다보았다. 주복이 제자리에 서서 손과 발을 털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정말 육공자님한테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어쩜 남의 신방을 제 방처럼 드나들며 저리도 편하게 계시는 건지.
“육공자님, 오늘 밤에는 여기 계시지 마세요. 태자 전하께서 몹시 고단하실 테니, 푹 쉬시게 두세요.”
소심이 주복에게 다가가서 말했지만, 주복은 소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팔다리를 풀었다.
“육공자님, 그만 좀 하세요. 아씨께서 이리되셨는데 전하와 아씨가 더 멀어지게 하시려는 거예요?”
“멀리하는 건 그 사람 문제지, 남 탓을 하면 쓰나?”
주복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소심이 뭐라고 더 말하려던 찰나, 문밖에서 내시 한 명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육공자님.”
방 안으로 들어온 내시는 군왕부 시절부터 왕부의 사무를 총괄했던 이 총관이었다. 경 공공이 태자와 함께 궁을 드나드느라, 집안일은 모두 이 총관이 관장하고 있었다.
“문밖에 온 도사는 공자님께서 부르신 겁니까?”
이 총관이 물었다.
“왔나?”
주복이 재빨리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이 총관이 얼른 말했다.
“왔긴 했는데, 도로 내쫓았습니다.”
주복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누가 내쫓으라고 했나!”
“육공자님, 전하께서 말씀하시길, 태자비의 상태가 밖으로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어인 연유로 도사를 부르셨습니까?”
이 총관이 주복의 기세에 눌리지 않고 대꾸했다. 주복이 냉소를 지었다.
“내 누이는 병이 난 거야. 밖으로 알려져서 안 될 게 뭐 있다고!”
주복이 목청을 높이면서 이 총관을 거칠게 밀쳤다.
“비켜!”
“병이 난 거라고요? 육공자님, 만약 정말로 병이 난 거라면, 공자님께서는 왜 의원이 아닌 도사를 부르셨습니까? 만에 하나 이 소식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하면, 태자 전하의 체면이…….”
이 총관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주복이 그의 말을 끊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깟 체면이 내 누이의 목숨보다 중요하단 말이냐!”
주복은 이 총관에게 발길질까지 했다.
“비키라니까!”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육공자님.”
반근과 소심이 깜짝 놀라서 주복을 말리다가,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을 보고는 멈칫했다.
“태자 전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문가를 쳐다보았다. 언제 왔는지 모를 방백종이 냉랭한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었다.
“전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방백종을 향해 예를 표했다. 주복이 곧바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방백종이 그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그만 떠나게나.”
주복이 우뚝 멈춰 섰다.
“뭐라고요?”
“자네, 그만 이곳을 떠나라고.”
방백종이 말했다. 반근과 소심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졌지만, 주복은 냉소를 지으며 반문했다.
“제가 왜 떠나야 합니까?”
방백종이 주복을 빤히 바라보면서 천천히 말했다.
“왜냐면, 내가 자네를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제가 보고 싶지 않은 겁니까, 우리를 보고 싶지 않은 겁니까? 지금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다 압니다.”
주복이 소리쳤다. 방백종이 설핏 웃으면서 주복의 앞으로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안다고 하였는가? 주복, 그럼 한번 말해 보게.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주복이 방백종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누이는 그런 게 아닙니다!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게 아니라고요. 누이는 댁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입니다!”
방백종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자네는 몰라. 그건 자네의 생각일 뿐이야.”
방백종이 웃음기를 거두고 손짓했다.
소리 없이 문가에 서 있던 경 공공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주복의 어깨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주복은 재빨리 어깨를 옆으로 틀어 경 공공의 손을 피하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경 공공이 그보다 한발 빨랐다. 주복의 주먹이 나가기도 전에, 경 공공이 양손으로 그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방 안에 소심과 반근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더는 소란 피우지 말고 썩 꺼지거라.”
방백종이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시 네다섯 명이 주복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복이 큰 소리로 고함을 쳤지만, 그에게 달려든 여섯 명의 내시들은 그를 힘으로 누르면서 밖으로 끌고 나갔다.
“떠나라고 하면 떠나겠지만, 대신 누이를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고개를 돌리고 주복을 쳐다보는 방백종의 표정에는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방백종을 노려보던 주복이 버둥거리며 내시들의 손을 내쳤다. 그러나 그는 방백종을 향해 달려들거나 도망치는 게 아니라, 제자리에서 무릎을 털썩 꿇었다.
“태자 전하.”
주복이 떨리는 목소리로 빌었다.
“부디 누이를 데려갈 수 있도록 간청하옵니다.”
반근과 소심이 멍하니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을 알게 된 지는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가 이런 식으로 남에게 무릎을 꿇고 애걸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방백종이 주복을 내려다보았다.
“누이가 예전에 전하의 목숨을 구했던 것을 봐서라도…….”
주복이 고개를 들고 방백종을 쳐다보면서 힘겹게 한마디씩 내뱉었다.
“하루를 부부로 살아도 그 은정(恩情)은 더없이 깊고 두텁다지 않습니까. 부부의 연을 봐서라도, 제 누이를 데려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전하께서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달라고는 빌지 않겠습니다.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든 전하를 탓하지도 않겠습니다. 다만, 제발 우리를 놓아주십시오.”
주복이 이를 악물었다.
“제발 누이를 데려가게 해 주십시오. 놓아만 주신다면, 다시는 전하께서 볼 수도, 찾을 수도 없는 곳으로 멀리 떠나 조용히 살겠습니다.”
방백종이 주복을 바라보면서 짧게 대꾸했다.
“안 돼.”
방백종이 주복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예전에 나도 똑같은 짓을 했었소! 저 여인을 믿지 않았던 것 말이오! 하지만 난 그때 내가 했던 짓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소! 그러니 내가 했던 멍청한 짓을 되풀이하지 말란 말이오. 반드시 후회할 테니!”
주복이 갈라진 목소리로 외쳤지만, 이내 그의 목소리는 무언가에 꽉 막힌 듯한 신음으로 바뀌었다. 내시들이 발버둥 치는 주복을 꽉 붙잡고 그의 입에 천을 쑤셔 넣으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곧 휘장이 내려지고,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방백종이 고개를 들자, 탁자 옆에 서서 서로의 손을 꼭 맞잡고 있던 소심과 반근이 침상이 놓여 있는 쪽으로 향하는 문을 재빨리 온몸으로 막았다. 두 사람은 공포에 질린 모습으로 방백종을 쳐다보았다.
“꺼져라.”
방백종이 말했다. 소심과 반근이 미친 듯이 고개를 저으며 두 손으로 문틀을 죽을 듯이 붙잡았다.
“꺼져!”
방백종이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문밖에 서 있던 내시들이 우르르 들어오더니 반근과 소심의 입을 막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안 돼, 안 돼.
안 돼!
반근과 소심이 안간힘을 쓰면서 몸부림쳤다. 두 사람은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지만, 내시들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나갈 수밖에 없었다.
문이 점점 더 멀어지고 휘장이 내려지자, 안채에 서 있던 방백종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안 돼, 안 돼,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