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권 - 153화 (153/160)

교랑의경 25권

-결과-

문밖에서 들려오는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마당 안에 서 있던 하인들은 위수군이 생각했던 것만큼 어수선하거나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었다. 몸이 떨리는 것을 숨기지는 못했지만, 차분한 모습으로 깨끗한 옷을 입고 서 있었다. 부수다시피 대문을 열고 들어온 위수군은 그런 하인들의 모습에 도리어 흠칫 놀랐다.

“역시 진 상공 댁의 사람들답군. 다른 집의 사람들보다 기개가 있어.”

위수군 중 한 명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멀쩡한 상공 자리를 내팽개치고 군주를 시해하는 역적이 되다니. 이래서 스스로 죄악을 저지른 사람들의 말로는 죽음뿐이라는 거군.

위수군의 장수가 손에 쥔 성지를 펼쳤다.

“역모를 꾀한 진소는 이미 사형에 처했고, 그의 재산을 몰수…….”

후원에 걸어뒀던 알록달록한 장식들은 모두 치워졌고, 대청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예복을 갖춰 입은 진소 부인이 대청 안에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여종들이 다급하게 후원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부인, 부인.”

울먹이던 여종들이 몸을 휘청이며 뛰어 들어오더니, 진소 부인의 앞까지 가지 못하고 회랑 아래에서 털썩 꿇어앉았다.

여종들의 모습을 본 진소 부인은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소 부인이 몸을 일으키고는 미리 묶어 둔 하얀 비단 끈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부인.”

여종들이 울면서 진소 부인의 다리를 부둥켜안았다.

“뭣들 하는 것이냐. 내 마지막 체면을 지키겠다는데, 그것도 하지 못하게 막으려는 셈이냐? 위수군도 잘 알 것이다. 우리 같은 지위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집안의 여인들은 모두 목을 매달아 자결한다는 것을. 혹 윤허하지 말라는 명이 있었다면, 진작 이곳으로 쳐들어왔을 것이야. 너희는 내가 군영의 관기로 몰락하는 꼴을 보고 싶은 게냐!”

진소 부인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을 쳤다.

대역무도한 죄를 저지른 집안의 여인들이 마지막 체면을 지킬 수 있도록 자결할 기회를 주는 것 자체가 이미 큰 은혜였다.

사람의 인생은 한 번뿐이고, 그 한 번의 생을 위해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간다. 살아서는 부귀영화를 누리기 위해, 죽어서는 존엄을 지키기 위해.

존엄을 지키며 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정말 크나큰 행운이지.

“어머니!”

그때 진단랑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통통거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진단랑이 대청 안으로 달려 들어오더니 의자 위에 서 있는 진소 부인을 붙잡고 엉엉 울었다.

“어머니, 단랑을 버리고 가시려는 거예요? 어머니, 단랑을 버리지 마세요.”

진소 부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여종들은 바닥에 엎드린 채 통곡했다.

“너희, 너희가 단랑의 마지막 길을 보내 주거라.”

진소 부인이 흐느끼면서 말하자, 여종들이 더 크게 울며 대답했다.

“소인들은 그리할 수 없습니다.”

진소 부인이 자신의 허리띠를 풀었다.

“단랑, 두려워하지 말거라. 이 어미가 너와 함께할 테니.”

진소 부인이 자신의 허리띠를 진단랑의 목에 칭칭 감으며 말했다. 어린 진단랑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 저는 두렵지 않아요.”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면 모를까. 진단랑의 말을 들은 진소 부인은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느낌과 함께 손에 힘이 풀려 더는 허리끈을 붙잡고 서 있지 못했다.

“하느님, 제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진소 부인은 결국 두 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모두가 부둥켜안고 울던 사이,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밖으로 나오시오. 움직이지도 말고, 어떤 물건도 챙겨서는 아니되오.”

위수군의 호통이 들려왔다. 진소 부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더는 기다릴 수 없다.

진소 부인은 이를 악물고 진단랑의 목에 감겨있던 허리끈을 꽉 졸랐다.

후원 안으로 들이닥친 병사들이 그 광경을 보고는 재빨리 달려가 진소 부인의 손에서 허리끈을 빼앗았다.

진단랑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켁켁 기침을 해댔다.

“제발 부탁입니다.”

진소 부인이 의자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렸다.

“제발 우리 아이가 정결하게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진소 부인이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애원했다.

“제발 우리 아이가 정결하게 떠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부디 관기가 되지 않게 해 주세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하루아침에 진흙탕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모든 게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멈출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하지만 위수군은 이런 광경이 익숙했는지, 비통하거나 슬픈 기색 하나 없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내쫓았다.

“어서 가시오.”

여종들은 위수군에게 밀쳐지면서 후원 밖으로 쫓겨났고, 진소 부인은 하는 수 없이 진단랑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켰다.

죽을 마음만 있으면, 죽을 방법은 수천 가지야.

마음을 단단히 먹은 진소 부인은 더 이상 울거나 애원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남은 티끌만 한 마지막 체면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내 활 가져갈래요.”

진소 부인과 진단랑이 앞마당까지 나왔을 때였다. 진단랑이 갑자기 진소 부인의 손을 풀더니 다시 후원을 향해 뛰어갔다. 병사들이 재빨리 진단랑을 포위하고 칼과 창을 꺼내 들었다.

“단랑.”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진단랑을 향해 뛰어가서는, 진단랑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몸을 떨었다.

지금 같은 때 마음대로 뛰어다녔다가는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할 수도 있어.

곧이어 진소 부인은 힘없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다 죽는데,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다 똑같은 거지 뭐.

어쩌면, 나도 죽기는 싫은가 보다.

“단랑, 이제는 그렇게 뛰어다니면 안 돼. 이곳은 더 이상 우리 집이 아니야. 지금부터 이곳에 우리 소유의 물건은 아무것도 없단다.”

진소 부인이 단랑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했다.

“어머니, 저는 활을 가져가야 해요. 어머니도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정 언니가 저한테 선물로 준 활을 꼭 잘 간직해야 한다고요.”

진단랑이 손을 뒤로 뻗으면서 소리쳤다.

“저는 제 활을 가져갈 거예요.”

갑자기 마당에 서 있던 장수 하나가 진단랑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낭자, 뭘 가져가겠다고 했소?”

진소 부인이 경계의 눈빛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소 부인이 진단랑을 품에 꼭 안고 대답했다.

“내 활이요. 정 언니가 내게 선물로 준 활이에요.”

진단랑이 버둥거리면서 소리쳤다. 장수가 아, 하더니 대꾸했다.

“그럼 가져오시오.”

진소 부인은 흠칫 놀랐고, 진단랑은 크게 기뻐하면서 후원을 향해 달려갔다.

“낭자, 잃어버리지 말고 잘 챙기시오. 나중에 누가 와서 달라고 할 때, 없다고 하면 곤란해지잖소.”

장수가 뛰어가는 진단랑의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진단랑이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죠!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예요.”

대화를 듣던 진소 부인은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 대문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더는 가까이 오지 마시오.”

관병들이 호통치면서 한 여인을 향해 무기를 겨누었다. 진십팔랑이 걸음을 멈췄다.

“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진십팔랑이 관병들을 향해 물었다. 그러나 진십팔랑의 질문에 대꾸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 생겼냐니까요!”

진십팔랑이 소리를 지르며 대문을 향해 돌진했다.

“내 아버지께 무슨 일이 생겼냐고요!”

관병들이 망설임 없이 진십팔랑에게 칼과 창을 들이밀자, 진십팔랑의 옆을 지키던 여종들이 비명을 지르며 진십팔랑을 죽을 듯이 끌어당겼다.

다행히도 진십팔랑과 칼끝 사이에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의 거리가 남아 있었다.

“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거죠?”

진십팔랑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외쳐댔다.

“진씨와 고씨, 두 역적이 태자 전하를 시해했소.”

한 관병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태자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태자 전하께서?

진십팔랑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손을 떨었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가 없다고.

진십팔랑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는 없어. 어찌 그럴 수가.

평왕 전하께서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다고 태자 전하까지.

난 내가 가진 걸, 앞으로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테고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테니까.

진십팔랑이 고개를 퍼뜩 들더니 삿대질을 하기 시작했다.

“저들이 태자 전하를 음해한 거예요! 그 여인이 태자 전하를 음해한 거라고요! 다 그 여인의 짓입니다. 다 그 여인의 짓이라고!”

진십팔랑이 악을 쓰면서 소리쳤지만, 옆에 있던 건장한 여종이 재빨리 진십팔랑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서 큰 아씨를 모시고 돌아가자.”

건장한 여인이 소리쳤다.

주위에 있던 여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진십팔랑을 에워싸고 뒤로 물러났다.

여종들에 의해 양팔이 붙들린 진십팔랑은 진씨 저택의 대문이 점점 더 멀어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다. 진십팔랑은 발악을 하면서 힘껏 몸부림쳤지만, 여종들에게 붙잡혀 꼼짝달싹 못 한 채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아버지, 어머니, 우리 집!

다 그 여인의 짓입니다. 다 그 여인의 짓이에요!

분명히 그 여인이 태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해치고, 모반을 한 겁니다!

다 그 여인의 짓이라고요! 그 여인!

“반역을 꾀한 진소와 고능준이 죽었사오니, 그들을 삭탈관직하고 가산을 몰수하십시오. 또 집안의 하인들을 먼 지방으로 유배시키고, 식솔들은 먼 지역으로 유배를 보내 군영의 잡역과 관기가 되게 하시옵소서.”

한 내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신들이 쓴 내용을 읽었다.

황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럼 고씨, 진씨 가문의 일족은?”

황후가 물었다. 자리에 있던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진씨 가문의 일족이라면 얘기가 쉽지만, 고씨 가문의 일족은 곧 태후의 일족이나 다름없었다. 대외적으로 태후는 죄가 없기에, 고씨 일족을 모조리 벌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렇게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는데도 그 일족을 멀쩡히 살려 두다니, 황실이 참으로 큰 관용을 베푸는군요.”

한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들이 열띤 논쟁을 벌일 때, 진안 군왕은 연평 군왕처럼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입을 열자, 대신들의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

진안 군왕은 황실이 관용을 베푼다고 말했지만, 그의 시선은 대신들을 향해 있었다. 죄를 논하고 벌을 결정하는 것은 황실이 아니라 대신들이었다. 진안 군왕의 말은, 대신들이 황실을 대신해 관용을 베푸는 게 아니냐는 뜻이었다.

황실이 이렇게 큰 고난을 겪었는데, 대신들은 남의 일인 양 편히 관용을 베풀어?

“듣기에, 어린애 장난 같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말을 이으며 대신들을 차례로 훑어보았다. 진안 군왕의 얼굴에 냉소가 번지자, 대신들은 섬뜩할 정도로 냉랭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회피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역무도하게도 모반을 꾀하여 태자 전하를 시해하는 대죄까지 저질렀는데, 그리 가벼이 벌해서는 안 되지요. 백성의 의심을 사지 않도록 삼족을 조사하고 심문하여 벌해야 마땅하옵니다.”

눈치가 빠른 대신 한 명이 서둘러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죄를 정한 뒤에, 황후마마께서 사면을 내리시도록 하지요. 그러면 죄를 벌하면서도, 태후마마의 존엄을 지켜드릴 수 있을 듯한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보기에 어떻냐고요?

이미 다 말씀하셨잖습니까. 혹 저희가 동의하지 않는다고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밖에 쫙 깔린 위수군과 눈 깜빡할 사이에 자결을 당한 고능준을 생각해 보면…….

이 지경이 된 이상, 진안 군왕은 절대 여기서 물러나지 않을 거야.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대신 하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자, 다른 대신들도 하나둘씩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진안 군왕이 냉소를 거두고 엄숙한 표정으로 황후를 향해 말했다.

“다들 그리하자고 하니, 신도 이견이 없습니다. 날이 밝았으니 다른 대신들도 조당에 모였을 겁니다. 부디 황후마마께서 속히 교지를 내려 이 일을 천하에 알리고, 죄지은 자들을 일벌백계하여 민심을 어루만져 주십시오.”

황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키고 손을 들었다.

“경들은 먼저 가 있으시오. 본궁도 옷을 갈아입고 뒤따라갈 테니.”

대신들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그때, 한 내시가 다급하게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황후에게 예를 표할 겨를도 없이 진안 군왕에게 곧장 달려가 작게 귓속말했다. 귓속말을 들은 진안 군왕의 표정이 급변했다.

“신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전각 안에 정적이 흘렀다. 대신들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고, 또 몇몇은 황후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이 침궁 안의 장식품이 된 것 같은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황후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고씨와 진씨 두 역적이 궁에서 모반을 꾀할 정도라면, 분명히 아직 그 잔당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날이 밝았으니 진안 군왕은 속히 잔당들을 조사하라.”

황후가 단정한 자세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공손하게 예를 표하며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과 위수군에게 둘러싸인 채 다급하게 어디론가 가는 진안 군왕을 보며, 조당으로 걸음을 옮기려던 대신들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태조의 피가 어디 가진 않는군. 다만, 조정에 있어서 저 모습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일지는…….”

한 대신이 조용히 읊조렸다.

진안 군왕은 대신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거의 나는 듯 걸음을 옮겼다. 아침 햇살이 구중궁궐의 전각을 넘어 진안 군왕의 몸으로 쏟아졌지만, 진안 군왕은 햇살의 포근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점점 더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전하, 바로 이곳입니다.”

한 시위가 말하면서 앞쪽의 편전을 가리켰다.

진안 군왕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살리지 못한 건가? 내시의 말이 왜 앞뒤가 안 맞는 거 같지?

주복을 살려내지 못했다면, 그 여인은 어떡해? 그 여인은 어떡하냔 말이야!

편전 앞에는 시위들이 잔뜩 서 있었다. 편전을 둘러싼 시위들 사이로 누군가가 뛰쳐나왔다.

“전하.”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이 태의의 안색을 본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안쪽을 향해 걸어갔다.

“전하, 전하, 일단 제 말을 먼저 들어보십시오. 조급해하지 마시고.”

이 태의가 손을 뻗어서 진안 군왕을 붙잡았다.

조급해?

내가 조급해하지 않을 수가 있어?

육가아를 잃은 것도 비통하고 슬픈 일이지만, 그래도 육가아는 계속 병을 앓고 있었으니까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는 있었어. 하지만 그 여인은?

그 오라비인 정사낭도 멀쩡하게 살아 있었는데, 갑자기 어느 날 밤에 느닷없이 죽임을 당했지. 정 낭자는 왜 그렇게 참혹한 일을 겪어야 하지?

그리고 우리 둘은, 왜 항상 누가 더 비참한지를 겨뤄야 해?

“정방.”

진안 군왕이 편전의 문을 밀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그는 곧 눈앞의 광경에 입이 떡 벌어져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진안 군왕의 시야에 들어오는 건 오직 새빨간 피뿐이었다. 바닥과 벽은 온통 선홍색 피로 물들어 있었고, 그 붉은빛은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진안 군왕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진안 군왕이 그리도 걱정하던 여인은 피바다 속에 누워 있었다. 여인의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고, 피인지 살인지 구분도 되지 않는 몸을 보고 있자니, 여인은 꼭 칼산에서 뒹굴다 나온 사람 같았다.

진안 군왕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는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정방?

정방!

포효하듯 외치는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고막을 찢을 기세로 울려 퍼졌다. 도무지 사람이 낸 소리라고 믿을 수 없는 비명이었다.

이 태의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문틀에 기대어 천천히 주저앉았다.

전하,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전하, 부디, 슬픔을 거두소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왜 이렇게 된 거야?

치료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누군가에게 처참하게 살해당한 모습을 하고 있는 거야?

“저희는 모릅니다. 저희는 모릅니다.”

구석에 꿇어앉아 있는 두 시종은 바닥에 바짝 엎드린 채로 이마를 땅에 찧으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같은 말만 계속 되뇌었다.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 들어온 경 공공과 고 선생도 피범벅이 된 편전을 보고 깜짝 놀랐다. 꿇어앉아 있는 두 시종의 모습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시종은 그들과 함께 성 밖에서부터 사람을 죽이며 따라온 자들이었다. 피를 보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눈앞에서 수십 명을 죽인다 해도 눈 하나 깜짝이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왜 저렇게 큰 충격을 받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지?

설마 궁에 아직 고능준의 사람들이 남아 있었나? 그들이 빈틈을 노려 군왕비를 죽인 건가?

“병사들을 몇 명 더 붙여 놨어야 했는데.”

경 공공이 말했다.

“지금 이런 시기에 혼자 돌아다니는 것도 안 될 일이지.”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누군가가 진안 군왕비를 죽인 게 아닙니다.”

경 공공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리며 옆에 누워 있는 주복을 가리켰다.

주복의 옷은 전부 찢겨 있었고, 온몸에는 피가 묻어있었다.

경 공공이 잰걸음으로 주복에게 다가갔다.

“전하, 주 공자는 무사하십니다. 여길 보십시오. 여기 있던 상처가 다 아물었습니다!”

경 공공이 주복의 옷깃을 펼치고 그의 가슴팍을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다.

선명한 칼자국 몇 개가 가슴에 남아 있었지만, 치명상이었던 화살 자국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물어 있었다.

“궁에 도착할 때쯤에는 이미 몸이 차가워져 있었는데. 전하, 한번 만져 보십시오. 주 공자의 몸이 따뜻합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키면서도, 주복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주복이 어떻게 되든,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주복의 몸이 차갑든, 뜨겁든, 그게 나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거야.

진안 군왕이 비틀거리면서 정교랑에게 다가갔다. 경 공공은 더는 말하지 않고, 시선을 거두었다.

경 공공은 사람을 죽여 본 적 있는 사람인지라, 바닥에 누워 있는 여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피바다 속에 누워 있는 정교랑은 이미 생기를 잃은 듯 보였다. 진안 군왕이 손을 내밀었지만, 그는 손이 떨려 차마 정교랑을 만질 수 없었다.

“상처투성이입니다.”

이 태의가 기어오면서 울먹였다.

“온몸이 다 상처예요.”

상처투성이다. 온몸이 다 상처야.

바닥에 누워 있는 정교랑은 헝겊으로 만든 인형처럼 툭 건드리기만 해도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방백종, 나도 당신과 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요.

당신에게도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존재하듯, 나 또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서, 당신을 믿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내 목숨을 내놓는 게 아니에요.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 일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짓말!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에 하는 일이라면서요! 확신이 있다면서요!

난 당신을 믿었어요. 당신을 믿으니까 보내준 거였는데, 지금 이게 뭐예요. 대체 뭘 한 거냐고요!

진안 군왕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교랑의 몸을 살짝 스치기만 했는데도, 진안 군왕의 손바닥에는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었다.

당신이 지금 뭘 했는지 보라고요.

당신은 나를 속였어요! 나를 속였다고요!

난 그렇게도 당신을 믿었는데, 당신은 어떻게 그런 나를 속일 수가 있죠?

사실, 일말의 확신도 없었던 거잖아요.

거짓말쟁이.

진안 군왕은 피바다에 머리를 묻은 채 소리 없이 흐느꼈다.

해가 뜨자, 병사들은 무리를 지어 거리를 돌아다녔다. 경성의 큰길가에는 평소처럼 시끌벅적한 분위기 대신, 늦은 가을의 스산함이 느껴졌다.

진 시강이 병사들 옆을 지나쳤다. 그는 거리를 돌아다니는 병사들이 낯설지 않았다.

그 병사들은 전부 부윤의 병사들이었다. 황궁과 경성의 성문은 위수군이 지키고 있었고, 경성 안은 관군들이 돌아다니며 순찰 중이었다.

물론 조정이 부윤을 믿고 의지한다는 뜻은 아닐 거야. 예상이 맞는다면 어젯밤 황궁 안으로 들어간 부윤은 지금껏 밖으로 나오지 못했겠지. 아마도 지금은 새로운 사람이 그 자리와 직책을 대신하고 있음이 분명해.

이 모든 건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진 시강이 감옥 안으로 들어갔다. 감옥 안은 사람으로 넘쳐났고, 울부짖는 소리와 고통스러운 신음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어제 성문에서 혼전을 치른 후, 죽은 병사들의 시신은 모두 수습되었고 다치거나 사로잡힌 이들은 가까이 있는 관아의 옥방에 갇혔다. 그들은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리거나, 전방의 병졸로 보내질 터였다.

“십삼!”

시종들이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앞으로 가던 진 시강이 소리쳤다.

옥방 안에 앉아 있거나 누워 있는 사람들은 열댓 명 정도였다. 진 시강은 그중 바닥에 앉아 있던 진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십삼,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몸은 괜찮고?”

진 시강은 옥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 진호의 어깨를 붙잡았다. 진 시강이 그를 붙잡고 연신 괜찮냐고 물으며 이리저리 살피는 사이에도, 진호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칼자국이나 외상은 없군. 그런데 옷의 상태를 보아하니, 말에서 떨어지거나 넘어지면서 뼈마디를 다쳤을 수도 있겠어.

시종의 말로는 성문이 아닌 거리에서 흩어진 거라던데. 위수군이 우위를 점하자, 관병들도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고.

그들은 위수군이 경성까지 들어오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고, 위수군은 활이 아니라 쇠뇌로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다고 들었다. 허구한 날 횃불이나 들고 느긋하게 순성하는 관병들이 그런 장면을 본 적이나 있었겠어. 혼비백산한 탓에 대열이 무너지면서 뿔뿔이 흩어졌겠지.

진호의 몸에 치명상이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의 상처를 많이 입은 듯하군.

결국 이리 실패할 줄이야. 내 계산은 다른 사람의 계산을 이기지 못했구나.

“십삼, 별일 아니다. 집으로 가자꾸나.”

진 시강이 진호의 어깨를 다독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지만, 진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십삼, 왜 그러는 것이야?”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진호가 고개를 들고 천천히 말했다.

“전 모르겠습니다.”

왜 실패했는지 모르겠다고? 결정적인 순간에, 위수군이 왜 진안 군왕의 편에 섰는지 모르겠다는 건가?

하긴, 나도 모르겠구나.

아니지. 사실 모를 것도 없어. 우리가 그놈을 너무 얕본 게지.

그놈이 알고 있는 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았을 줄이야. 어쩌면 경성에 남아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얻었을 때부터, 이 모든 게 시작된 걸지도.

하지만 진 시강은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그저 말없이 진호의 어깨를 다독였다.

“전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진호가 또 말했다.

진 시강이 뒤늦게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수하 하나가 진 시강에게 다가가 조용히 귓속말을 했다.

주복?

그래서 이러는군.

“진호.”

진 시강이 진호의 어깨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게 했다.

“네가 정말로 모른다면, 이 아비는 참으로 실망이구나. 정말로 몰라서 그러는 것이냐?”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과는 함께 일을 도모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네 성은 진씨고, 주복의 성은 주씨라는 것을 정녕 모르겠다는 것이냐?

조정에서 벌어지는 당파 싸움엔 생사존망이 걸렸다. 그런데 네가 지금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냐?

고개를 든 진호가 벽에 몸을 기대고 웃었다.

“아버지,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도리어 모르겠다는 겁니다. 왜 그 자식이 저를 쏘지 않았는지 모르겠고, 소자는 왜 그 자식을 쐈는지 모르겠습니다. 소자는 그들을 위해 그리한 겁니다. 소자는 정말로 그들을 돕고 싶었다고요. 그런데 왜 결과가 이렇게 된 거죠?”

진 시강은 진호의 말에 속상하기도, 화가 나기도 했다.

“그건 주복 그놈이 몰라서 그랬던 것이야.”

진 시강이 조용히 말했다. 그는 옥방에서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 않아 옆에 있던 수하들을 향해 손짓했다.

“공자를 모셔라.”

진호가 수하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섰다.

“그 자식이 모른다고요?”

진호의 눈앞에 주복이 쓰러지던 모습이 그려졌다.

“소자가 쏜 건 편전(片箭: 아기살, 작고 짧은 화살. 날쌔고 촉이 날카로워 갑옷이나 투구도 잘 뚫는 화살)입니다. 편전은 갑옷을 뚫기 위해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려고 만들어진 화살이죠.”

진호가 가슴에 손을 올리면서 말을 이어 갔다.

“편전이 몸에 박히면, 박힌 곳부터 시작해서 편전의 촉 끝까지 살갗이 찢어지고 뼈가 으스러집니다.”

사람을 죽이려고 만든 화살이니까요.

그 자식이 모른다고요? 그런데 왜 제 화살을 피하지 않았을까요?

단 한 번도 일부러 져 준 적이 없었던 놈인데, 왜 하필 그 한 번이 어제였을까요.

왜 하필 이번에 일부러 져 준 거냐고요!

그 자식은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도, 제가 뭘 하려는 건지도 몰랐겠지만, 화살로 저를 쏘면 안 된다는 것만은 알았던 겁니다.

그 자식은 오직 그것밖에 몰랐을 거예요. 오직 그것밖에요.

주복! 참으로 독하구나!

주복!

귓가에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소리가 아닌가? 이건 너무 듣기 싫은 소리잖아. 울먹이는 건지 흐느끼는 건지도 모를 그런 울음소리.

울게 뭐 있다고.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누가 우는 거야.

고작 화살 한 방 맞은 거 가지고 호들갑은. 죽으면 죽는 거지, 그게 뭐 대수라고.

주복은 힘껏 눈을 떴다가, 눈이 부셔 곧바로 다시 눈을 감았다.

어떻게 된 거지? 해가 뜬 건가?

벌써 시간이 그리 오래 지났나?

주복이 다시 눈을 뜨고 주위에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이상하다. 저건 고 선생과 경 공공이잖아. 그럼 우린 아직 성문 밖에 있는 건가?

주복이 몸을 일으켰다.

“어떻게 된 겁니까? 지원군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겁니까?”

주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주 공자!”

경 공공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아니, 어떻게 일어난 겁니까?”

고 선생도 외쳤다.

뭐야. 일어나지 않으면, 계속 누워 있으라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안 군왕의 사람들과 친하지 않은 주복은 두 사람이 마냥 이상해 보이기만 했다.

주복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과 온몸에 피가 흥건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상처가 그렇게 깊었었나?

주복이 서둘러 자신의 가슴팍을 매만졌다. 옷이 풀어 헤쳐진 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생겼는지 모를 자상이 몇 개 있었고, 손이 그 위를 스칠 때마다 따갑고 아팠다.

이 정도 상처가 무슨 대수라고. 서북에 있을 땐 이런 상처를 달고 살았어.

주복이 자신의 상처를 살펴보고 고개를 들려던 찰나, 누군가가 주복을 눕힐 기세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다 나으신 겁니까? 다 나았다고요? 정말 아무렇지도 않습니까?”

이 태의가 소리치면서 두 손으로 주복의 온몸을 만져댔다.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이 태의를 발로 걷어찼다.

“뭐 하시는 겁니까!”

주복이 소리쳤다.

주복이 다시 자리에 제대로 앉자, 옆에서 자신을 뚫어지라 쳐다보던 경 공공과 고 선생의 표정은 더욱 가관으로 변해 갔다.

“정, 정말로 다 나은 겁니까? 사람을 발로 차낼 정도의 힘도 있고?”

경 공공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 공공은 주복의 상태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었다. 주복이 화살을 맞고 쓰러졌을 때 그를 성문 밖으로 끌어냈던 사람이 바로 경 공공이기 때문이었다. 그때, 경 공공은 늘 그래 왔듯 일단 생사부터 확인하고자 주복의 가슴과 등을 만져 보았다.

경 공공은 그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내일 아침을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경 공공이 고개를 홱 돌리고는 피바다에 누워있는 기이한 여인을 쳐다보았다. 경 공공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주복은 온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다.

편전 안에 사내의 포효가 울려 퍼졌다.

“주 공자, 주 공자.”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재빨리 주복의 양옆을 붙들고 그를 막아섰다.

“저리로 가시면 안 됩니다.”

저리로 간다고 해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니지만, 정교랑의 옆에는 진안 군왕이 있는지라, 혹여나 흥분한 주복이 진안 군왕을 해칠까 봐 겁이 난 것이었다.

“왜 저렇게 됐습니까? 왜 저렇게 된 거냐고요!”

주복이 발버둥 치면서 소리쳤다.

“그건 저희가 주 공자께 여쭤봐야 할 말입니다. 왕비께선 공자의 몸을 대체 어떻게 치료하신 겁니까? 대체 무슨 치료를 했기에 공자는 멀쩡하게 살아나고, 왕비께서 돌아가신 거냐고요!”

고 선생이 목청을 높이자, 주복이 멈칫했다.

죽었다고?

주복이 두 팔을 힘껏 뿌리치자,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양옆으로 밀려났다. 주복은 엎어지듯 정교랑의 앞으로 다가가더니 정교랑을 덥석 끌어안았다.

“허튼소리 하지 마! 정교랑은 절대로 죽을 사람이 아니다. 절대로 죽을 사람이 아니라고!”

이 빌어먹을 놈들이 감히 정교랑이 죽었다고 말해? 감히 정교랑이 죽었다고 말하다니!

정교랑은 죽지 않아. 정교랑은 절대로 안 죽어.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주복이 손으로 정교랑의 얼굴을 이리저리 마구 만지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안 죽었잖아! 그러게 내가 뭐랬어? 이 여인은 절대로 죽지 않는다니까. 아직 살아 있다고.”

주복이 정교랑의 어깨를 흔들었다.

“교랑, 교랑.”

정교랑의 몸은 주복이 흔드는 대로 힘없이 흔들렸다. 몸 위에 놓여 있던 손이 아래로 떨어지려 하자, 진안 군왕은 머릿속이 쾅 하고 터지는 듯했다.

“꺼져!”

진안 군왕이 주복을 밀쳐내자, 고 선생과 경 공공이 동시에 주복을 덮치고는 그를 양옆에서 붙잡아 바닥으로 짓눌렀다.

“아직 안 죽었습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고요.”

바닥에 머리가 눌려 있던 주복이 힘겹게 소리쳤다. 조심스럽게 정교랑을 품에 안은 진안 군왕이 흠칫 놀랐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고?

진안 군왕이 떨리는 손으로 정교랑의 숨을 확인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진안 군왕보다 한발 빨리 손을 뻗었다.

아주 얕고 희미한 숨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정말로 숨이 있습니다!”

이 태의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도리어 진안 군왕은 숨이 멎을 듯했다.

“그런데 왜 죽었다고 한 겁니까!”

경 공공이 소리쳤다.

우리 군왕 전하께서 놀라 돌아가시게 하려는 작정이야 뭐야?

“하오나…….”

이 태의가 재빨리 정교랑의 왼쪽 가슴을 향해 손을 뻗고, 다른 한 손으로 정교랑의 맥을 짚었다.

잠시 뒤, 이 태의는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오나 군왕비께서는 심장이 뛰지도 않고, 맥이 잡히지도 않습니다.”

해가 중천에 뜰 무렵, 근정전에서 열리는 조회도 막바지에 다다랐다.

어젯밤 고씨와 진씨 두 사람이 태자를 시해한 사건과 그들의 죄를 장순이 직접 낭독하자, 대신들은 무릎을 꿇고 태자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대부분 아침이 되어서야 궁에 들어왔지만, 어젯밤의 시끌벅적한 소리를 듣고 궁에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쯤은 이미 눈치챘던 터였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입궐할 때, 돌포탄에 부서진 궁문과 한바탕 청소를 했음에도 여전히 바닥에 남아 있는 혈흔을 보았기에 장순의 말을 들으면서도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모반을 꾀한 자는 율법으로 엄히 다스려야 하오. 그러나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태자의 상을 치르는 것이오.”

휘장 너머에 있던 황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대신들이 일제히 알겠다며 예를 올렸다.

고능준과 진소의 죄를 정했고, 태자의 상을 치르자는 이야기도 했으니, 이제 가장 중요하면서도 대신들이 가장 관심을 보이는 주제만이 남아 있었다.

태자 책봉.

조당 안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휘장 너머에 있는 황후가 돌연 침묵을 지키자, 대신들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내시 하나가 휘장 뒤에서 황후에게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황후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신들은 내시가 말하는 내용을 듣지 못했으면서도, 황후의 반응을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룻밤 사이에 놀랄 일이 그렇게나 많이 일어났는데, 또 뭐 때문에 저리 놀라신 거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태자는 평생 기구한 삶을 살다 떠났으니, 하루빨리 태자의 영을 기리고 안식을 얻도록 해 주시오.”

황후가 말했다.

오늘은 양자 입적을 논하지 않겠다는 말씀이신가? 그리 중요한 일을, 왜 한번에 깔끔하게 결정하지 않고?

대신들은 속으로 의아해하면서도, 황급히 자리를 뜨려는 황후의 모습을 보고는 하는 수 없이 알겠다며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신들은 황후가 무엇 때문에 급하게 조회를 끝냈는지 알 수 있었다. 진안 군왕이 출궁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지금 시기에, 진안 군왕이 출궁했다고? 참으로 놀라운 일이군. 한번에 태자 책봉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나?

밤이 길수록 꾸는 꿈도 많아지는 법인데.

“진안 군왕비는 어떠하더냐?”

근정전을 채 나서기도 전에, 황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시에게 물었다.

“군왕비께서 다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전하께서 군왕비를 데리고 군왕부로 돌아가셨고요.”

다쳤다고?

하긴, 정 낭자는 궁에 오래 머물러 있었지. 눈치 빠른 고능준이 정 낭자가 내게 쪽지를 건네준 일을 몰랐을 리가 없어. 불꽃놀이 덕분에 몸을 지킬 수 있었던 우리 쪽에 비해, 맨몸으로 입궐한 정 낭자가 처한 상황은 훨씬 위험했겠지.

밤이라 그런지 걸음걸이는 흔들림 없어 보였다만, 다치지 않았다고 확신하긴 힘들어.

“사람을 보내 알아보아라. 태의들은 모두 그리로 갔느냐?”

황후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다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소인이 사람을 보내 알아봤더니, 전하께서는 다른 태의들을 부르지 않으셨답니다. 이 태의만 함께 따라갔고요.”

태의 한 명만 데리고 갔다고?

“한 명으로 되겠는가?”

황후가 놀란 기색으로 물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소식을 들은 태의들이 모두 급히 입궐하긴 했으나, 진안 군왕이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막았답니다.

“아니면, 왕비께서는 심하게 다치신 게 아니라, 조금 놀라 쓰러지신 게 아닐는지요?”

내시가 추측하면서 말했다.

그 여인이 놀란다고?

황후가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을 놀라게 할 수 있는 게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긴 할까?

“소식이 있으면 즉시 본궁에게 알리거라.”

황후가 탄식을 뱉고는 말을 덧붙였다.

“제일 좋은 건, 아무런 소식도 없는 것이다.”

조회가 아직 파하기 전, 관병들도 아직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관부의 관리들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갖가지 변명을 대면서 문밖에 서서 궁문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때, 마차 한 대가 황궁 쪽에서 거리를 향해 급하게 달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마차로 향했다.

“저건 누구지?”

“호위를 저렇게 많이 데리고 다니다니.”

“연평 군왕인가?”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하던 사이, 길가에 서 있던 병사 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눈앞을 지나가는 마차를 쳐다보았다.

저, 저 말에 탄 사람은!

병사가 몸을 홱 돌리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조금 전에 집으로 돌아온 진 시강과 진호의 모습 때문인지, 집으로 들이닥친 관병들 때문인지, 진 시강의 저택에는 긴장감이 흘렀다.

“진 대인, 역적 잔당을 조사하기 위해서 경성의 경계가 한층 삼엄해졌습니다. 부디 대인께서는 한동안 저택에 머물러 주시고, 잦은 출타는 삼가 주십시오.”

말은 공손했지만, 일개 장수가 진 시강에게 이런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결례였다. 잦은 출타를 삼가 달라고 말했지만, 이는 사실 집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뜻이었다.

진씨 가문 하인들이 두려움에 벌벌 떨기 시작했다.

고씨와 진소 가문은 이미 관병들이 들이닥쳐 사람을 끌고 나가고 재산을 몰수했다던데, 혹시 다음은 우리 차례가 아닐까?

그렇다기엔 좀 이상한걸. 우리 공주부 진씨 가문은 태자 시해에 동참하지도 않았고, 황후마마를 지켜 드리며 공까지 세웠는데?

진 시강이 여유롭게 웃었다.

“감히 우리 공주부 진씨 가문을 친다? 진안 군왕이 태자 전하 같은 바보가 아닌 이상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거요. 우리 가문은 역적이 아니오. 역적 집안이라면 가산을 몰수해야 마땅하나, 황실을 도운 집안의 가산을 몰수하기엔 명분이 부족하지. 그래도 우리 집안을 치겠다면 진안 군왕은 통쾌해할지 몰라도, 대신들이 그를 막을 거요. 명분도 없이 공신을 벌하다니, 그건 사람들에게 반란을 일으키라고 부추기는 꼴밖에 안 되지.”

진 시강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우리 공주부 진씨 가문이 연평 군왕을 태자로 세우려 했다고는 하나, 잊어서는 안 될 게 하나 있소이다. 진안 군왕을 태자로 세우는 걸 반대하던 사람들은, 비단 우리 진씨 가문뿐이 아니었소. 그러니 우리 진씨 가문을 처리한다는 건, 분명히 다른 사람들도 처리하겠다는 뜻이야. 사람을 품는 그릇이 그리 작은 자를 태자로 모신다면, 조정 대신들 또한 그에게 충의를 보이기는 힘들겠지.”

진 부인은 넋이 나간 채, 진 시강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두렵소?”

진 시강이 웃으면서 물었다. 진 부인이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저었다.

“두려울 게 뭐 있다고요. 다만 내가 걱정하는 건…….”

“걱정할 것 없소. 그가 공신인 우리 진씨 가문을 내친다면, 우리 또한 그런 군주를 따르지 않으면 될 일이오. 사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한가롭게 시골에서 농사나 짓는 늙은이로 살다 가는 거지 뭐.”

진 시강이 말했다.

“그게 아니라. 난 십삼이 걱정된다고요.”

십삼의 이야기가 나오자, 진 시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노야, 노야.”

문밖에서 사환이 뛰어 들어왔다.

“노야, 주 공자께서 무사하다고 하십니다.”

무사하다고?

진 시강이 놀란 눈으로 시종을 쳐다보았고, 진 부인은 아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십삼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진 부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아닙니다. 조금 전에 직접 본 사람이 있었는데, 주육 공자께서 말을 타고 황궁에서 나와 마차 한 대를 호위하며 거리를 지나갔다고 합니다.”

사환이 곧바로 대답했다.

죽지 않았구나!

진 시강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서, 어서 십삼에게 이 사실을 알리거라.”

진 부인이 소리쳤다.

주 공자가 죽지 않았다면, 내 아들의 목숨도 무사할 것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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