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2화 (152/160)

-확정-

“왕비 전하.”

편전 안, 정교랑의 행동을 본 두 시종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걸 뽑으시면 안 됩니다!”

두 시종이 주복을 부축하며 정교랑을 따라왔다. 앞에서 걸음을 옮기던 정교랑은 길을 가다가 멈추고, 또 길을 가다가 멈췄다. 두 시종이 속으로 충격이 너무 큰 탓에 미친 건 아닐까 생각하던 찰나,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생문(生門)은 이쪽에 있다.”

정교랑이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생문? 생문이 무슨 문이지?

그 뒤로 두 시종은 정교랑을 따라 무엇에 쓰였는지 모를 편전 안으로 들어갔다.

두 시종이 편전 안의 불을 밝히고, 주복을 바닥에 눕혔다. 주복의 가슴팍에 반쯤 박힌 화살 끝이 보였다.

“다행히도 거리가 어느 정도 있어서, 몸통을 관통하지는 못했습니다.”

한 시종이 말했다.

몸통을 관통했다면, 지금까지 버티지도 못했겠지.

정교랑은 시종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짜고짜 화살 끝을 잡았다. 누가 봐도 화살을 뽑으려는 동작에, 두 시종은 놀라 혼비백산했다.

“왕비 전하, 그러시면 안 됩니다.”

“그걸 뽑아 버리신다면, 분명 숨이 끊어질 겁니다.”

두 시종이 다급하게 말하면서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저분이 정말로 그 신의 낭자인가?

정교랑이 손에서 화살을 놓았다.

“칼은 있느냐?”

정교랑이 물었다. 두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허리춤에 있던 칼을 뽑아서 정교랑에게 건넸다.

“왕비 전하, 우선 옷을 찢은 다음 말씀하시면 그때 저희가 뽑겠습니다.”

한 시종이 주복의 옆에 꿇어앉으며 말했다. 시종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칼을 건네받은 정교랑은 곧바로 손목을 돌려서 주복의 가슴팍에 칼을 내리꽂았다.

푸슉 소리와 함께, 피가 사방으로 뿜어져 나갔다.

편전 안에 사내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비켜!”

정교랑이 호통쳤다. 정교랑은 재빠르게 발걸음을 움직이면서 주복의 가슴을 총 세 번 찔렀다. 마지막 한 번을 찌르는 동시에, 정교랑은 주복의 몸에 박힌 화살을 단번에 뽑아냈다.

또 한 번 비명이 울려 퍼졌다.

가까이 있던 두 시종의 얼굴과 몸으로 주복의 피가 잔뜩 튀었다. 두 사람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이게 사람 목숨을 살리는 거야, 죽이는 거야?

몸에서 피가 용솟음치듯 뿜어져 나오자, 가만히 누워 있던 주복이 경련을 일으켰다.

“왕비 전하!”

두 시종이 소리쳤다.

하지만 정교랑은 두 시종의 말과 비명이 들리지 않는 듯, 또다시 손에 쥔 칼을 휘둘러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싹둑 잘라냈다. 머리카락이 사방에 흩어졌다. 정교랑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머리를 흔들며 손에 든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비처럼 쏟아지는 머리카락이 온 바닥에 흩뿌려졌다.

미친 건가?

두 시종은 넋이 나갔다.

왜 머리카락을 다 잘라내는 거지?

“왕비 전하.”

뒤늦게 정신을 차린 두 시종이 정교랑을 말리려고 몸을 일으켰다.

“한쪽에 가서 서 있어.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정교랑이 소리쳤다.

두 횃불 아래, 정교랑은 어지러운 듯하면서도, 어떤 기괴한 박자가 있는 것 같기도 한 걸음을 옮기며 칼을 휘둘렀다. 정교랑의 모습은 흡사 귀신이 칼춤을 추는 듯한 모습이었다.

두 시종은 낡은 사찰에서 머물렀던 그날 밤, 정교랑이 홀로 고십사를 죽이러 갔던 때가 떠올랐다. 정교랑은 그 많은 시종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무기를 잔뜩 챙겨서 떠났었다.

그때 시종들이 감히 정교랑을 쫓아갈 수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였다. 정교랑이 ‘절대로 따라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정교랑을 따라가지 않은 시종들이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두 사람은 정교랑이 외친 그 한마디에 온몸이 얼어붙은 듯, 자리에서 꼼짝달싹하지 못했다.

주복의 몸에서는 아직도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고, 정교랑의 머리카락은 사방에 흩날리고 있었다.

두 시종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한쪽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래. 미쳤을 수도 있지. 어차피 주 공자는 이미 죽은 거 같은데.

정교랑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두 시종은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의 생각은 틀렸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원래 바닥까지 오던 정교랑의 긴 머리카락은 어깨까지 짧아졌고, 칼을 쥐고 있던 두 손은 칼날로 옮겨갔다. 정교랑이 주복의 앞에 무릎을 꿇고 허리를 숙인 채, 두 손으로 칼날을 비비기 시작했다.

손을 비벼?

손을 비비다니!

깜짝 놀란 두 시종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정교랑의 손에서 철철 흐르는 피가 주복의 몸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

두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각자의 두 손을 깍지 끼고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있을 것처럼.

세상에나! 진짜 미쳤나 봐!

아, 아파서 어쩌려고!

저건 칼이야. 칼날이라고! 살과 피로 이루어진 손을 어떻게 칼날에!

두 사람은 한순간이라도 놓칠세라 정교랑의 두 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홍색 피가 시야를 가득 메우던 때였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두 시종은 주복의 몸에서 피가 덜 나오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정교랑이 칼을 다시 높이 들었다.

드디어 끝난 건가?

살갗이 모두 찢어져서 거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두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시종의 눈에, 갑자기 칼날이 번뜩이는 모습이 보였다.

“전하!”

두 시종이 화들짝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안 됩니다!”

옷깃이 찢어지고, 붉은 피가 정교랑의 어깨에서 흘러내렸다. 여인은 아무런 표정 없는 얼굴과 깊은 두 눈동자로 시종들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모습은 너무도 침착하여, 칼에 찢긴 어깨가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세상에, 세상에! 이게 지금 뭘 하는 거야!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움직이지 마라.”

정교랑이 단호하게 말했다. 두 시종은 엉거주춤하게 선 자세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한 번, 또 한 번 자신의 몸을 칼로 찔렀다. 여기저기서 흘러내리는 피를 보고 있자니, 두 시종은 정신이 아득해졌다.

시종들의 귓가에 나지막한 읊조림이 들려왔다. 일정한 음률이 있지만 듣기에는 몹시 기이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놀란 가슴을 위로해 주는 듯했다.

“상림(桑林)에 왔으니, 부디 신령들께서 들어주십시오.”

“저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두 손을 갈아…….”

“이 육신으로 기도를 바치오니…….”

황제의 침궁 안.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돌포탄의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내시들은 우왕좌왕했지만, 황후와 대신들이 도착할 때쯤에는 겨우 등불을 밝히고 자리를 마련해 놓았다.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천자를 바라보고 있자니, 황후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흘러나왔다.

“폐하, 신첩은 폐하를 다시는 볼 수 없을 줄 알았습니다.”

황후가 침상 옆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오늘의 일은 무척 위험했다.

정교랑이 내시를 통해 건넨 쪽지를 보았을 때부터, 정교랑이 보냈던 폭죽 상자를 떠올리기까지. 본디 별생각 없이 받아 둔 상자였지만, 가져온 사람이 정 낭자가 보냈다는 말을 몇 번이나 강조하기에 받아 둔 폭죽 상자였다.

내시와 궁녀들, 그리고 황후는 ‘불꽃놀이’라는 쪽지를 보면서 각종 추측을 했었다.

혹시 불꽃놀이를 할 폭죽을 담은 상자 안에 정말로 불꽃놀이가 들어 있는 게 아니라, 목숨을 구할 수 있는 어떤 신기한 물건이 담겨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상자 안에 든 것을 모두 바닥으로 쏟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목숨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 비단 향낭이나 신비로운 보따리 같은 건 없고, 두 상자를 모두 뜯어 봐도 그 안에는 폭죽만 잔뜩 담겨 있었다.

“마마, 이 폭죽은 이씨 가문의 것이라고 합니다. 이씨 가문의 이무는 정 낭자의 제자지요. 이무는 정 낭자가 노제를 지낼 때 쏘아 올린 불꽃놀이를 보고 영감을 얻어 돌포탄을 만든 덕에 관직을 얻었습니다. 그 돌포탄이라는 것은 신비궁보다 어마어마한 무기이니, 어쩌면 이 폭죽 또한 목숨을 구할 위력을 가진 무기일 수도 있습니다.”

한 내시가 고민 끝에 말했다.

폭죽이 목숨을 구할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가진 무기라고?

황당한 추측이었지만, 당시 황후는 그 폭죽을 쓰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한번 해보자는 생각으로 폭죽을 품에 안고 뛰쳐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황후는 정말로 폭죽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황후가 바닥에 엎드려서 통곡했다.

정말 고단하구나. 살아남아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이토록 고단한 일이라니.

황후의 울음소리는 태자의 침전에서 들려왔던 것보다 훨씬 절절했다. 대신들도 따라서 무릎을 꿇고 흐느껴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막 들려오던 찰나, 황후가 갑자기 악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던 대신들 또한 황후처럼 놀라 기겁을 했다.

황제가 누워 있던 침상이 움직인 것이다.

설마 폐하께서…….

침궁 안에 정적이 흐르고, 모두의 이목이 황제에게 집중됐다.

이때, 머리 하나가 침상 아래서 삐져나왔다.

“마마.”

안비가 민망한 듯 헤헤 웃었다.

“신, 신첩은 여기서 폐하를 지키고 있었어요. 깜빡 잠이 들었다가, 마마와 대신들께서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 깼지 뭐예요.”

사람들이 귀신이라도 본 듯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자신을 쳐다보자, 안비는 재빨리 침상 아래에서 기어 나와 허리를 숙이고 치마를 들며 뒤로 물러났다.

“다, 다들 하시던 거 마저 하세요. 신, 신첩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비가 휘장 뒤로 물러났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온몸에 힘이 빠져 방석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대신들이 채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안비가 또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다 무사한 거죠?”

황후가 한숨을 뱉으며 안비를 흘겨보았다.

“물러가거라!”

황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치자, 안비는 화들짝 놀라 휘장 뒤로 몸을 숨겼다.

어휴, 다행이다. 이제 무사한가 보네.

갑작스러운 소동 때문에 황후는 만감이 교차하고 비통하던 감정이 많이 사그라들었다. 황후가 눈물을 훔치고 황제의 침상에 걸터앉아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경들이 생각하기에, 오늘의 일은 어찌하면 좋을 거 같소?”

고능준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피 냄새 때문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주위에서 더는 시끌벅적한 소리와 논쟁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고, 전각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몸을 일으켜 앉은 고능준은 자신이 편전 안에 혼자 누워 있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왠지 모르게 이곳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태후궁의 전각이었다.

고능준은 밧줄에 몸이 묶여 있지도 않았고, 그를 살벌하게 노려보는 위병들도 없었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고능준은 옷매무시를 정리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관모를 집어 머리에 썼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고능준이 큰소리로 외쳤지만, 그의 부름에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장순을 불러오거라!”

내가 그놈과 설전을 벌여야겠으니.

“황후를 만나야겠다!”

황후에게 천륜과 강상의 도를 따져야겠으니!

잰걸음으로 문가에 다가간 고능준이 문을 열려 했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 내가 아무 데나 돌아다닐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두지는 않았겠지.

고능준은 문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았다. 횃불로 환하게 밝혀진 회랑 아래에 병사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그곳에 서 있는 병사들은 고능준이 익히 아는 금위군이 아니라 위수군이었다. 간간이 내시와 궁녀들이 회랑 아래를 오갔지만, 모두 상복을 입고 얼굴을 손에 묻은 채 울고 있었다.

“불쌍한 태자 전하, 간신들의 손에 살해되시다니.”

“이건 명백한 모반이야. 고씨 가문에서 모반을 꾀하다니!”

내시와 궁녀들의 말이 문틈 사이로 고능준에게 전해졌다.

고능준이 문을 팍 치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모반이라니! 나 고능준이 모반을 꾀하고자 했다면, 지금껏 기다리고 있었겠느냐?

태자가 어떻게 죽었냐고? 태자는 병에 걸려서 죽은 거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모반이라 한다면, 병사들을 이끌고 궁문을 폭파해 버린 그놈이 모반을 꾀한 거지!

하지만 고능준은 굳이 아랫것들과 그런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들과 논쟁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문틈 사이로 회랑 아래를 내려다보던 고능준이 멈칫했다.

진소는 여전히 내의 차림으로 머리를 풀어헤친 채 그곳에 누워 있었다. 그의 시신 위에는 하얀 천조차 덮어져 있지 않았다. 주위의 사람들은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듯했다. 바닥에 놓인 건 사람의 시신이 아니라, 고깃덩어리라도 된다는 듯이.

태자를 음해한 역적의 죽음에 무슨 존엄이 있으랴. 비단 진소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또한 존엄을 잃게 될 터였다.

그래서 내가 죽으면 안 된다고 했던 것이야. 죽어 버리면, 모든 게 다 남의 뜻대로 흘러가니까.

시선을 거둔 고능준의 얼굴에서 냉소가 떠올랐다.

죄를 얻는 게 뭐 어때서? 감옥에 갇히는 게 뭐 어때서?

내일의 해가 뜨면, 세상 사람들은 오늘 밤 황궁에서 벌어진 기이한 변고를 알게 될 것이다.

태자가 병을 앓았다는 것도 사실이고, 진안 군왕이 태후의 교지도 없이 병사들을 이끌고 궁에 쳐들어왔다는 것 또한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에게 이 모든 사실을 똑똑히 보라고 해야지.

고능준이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바닥에 털썩 앉은 고능준은 창가를 통해 밖을 내다보았다. 짙은 어둠이 차츰 걷히고, 동쪽 하늘이 서서히 밝아오기 시작했다.

이때, 굳게 닫혔던 문이 갑자기 열렸다.

고능준이 고개를 들자, 낯선 내시 네 명이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으면서 불길한 예감이 고능준의 온몸을 엄습했다.

“무슨 놈들이냐! 지금 무얼 하려는 게야!”

고능준이 호통쳤다.

“소인들이 고 대인을 배웅하러 왔습니다.”

앞장선 내시가 말했다. 고능준이 격노하면서 펄쩍 뛰었다.

“네놈들이 감히!”

고능준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옥대를 빼내려고 했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선황이 그에게 하사했던 옥대가 없어진 것이다.

나머지 세 명의 내시들이 고능준에게 다가가더니 하얀색 비단으로 고능준의 목을 휘감았다.

고능준이 악을 쓰면서 발버둥을 쳤다.

고능준은 건장한 체구에 평소 집에서도 무공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호락호락한 상대는 결코 아니었지만, 겉으로 왜소해 보이기만 하던 내시들은 동작에 힘이 있고 민첩했다. 그들은 괴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고능준을 제압했다.

이놈들은 절대 궁에 있던 내시가 아니야!

“진안 군왕! 네놈이 감히!”

고능준이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치며 목을 휘감은 비단 끈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이러고도 네놈들이 무사할 것 같으냐!”

대의명분도 없이 이러는 게 두렵지도 않느냐!

황궁에 난입하여 대신을 죽이다니. 태자 또한 네놈들 손에 죽었다는 소리가 나올까 두렵지도 않느냐?

촉영부성(燭影斧聲: 촛불 그림자와 도끼 소리. 송태조 조광윤의 암살과 관련된 단어로 구중궁궐에서 벌어지는 후계 구도를 둘러싼 권력 다툼을 의미)의 오명을 꼬리표처럼 달고 평생 의심 속에 살아갈 수 있겠느냐!

대신들이 네놈을 믿지 못하고 무서워할 것이 두렵지 않느냐?

백성들이 뭐라 떠들어댈지 두렵지 않느냔 말이다!

고능준이 발악하며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앞장서 있던 내시는 가만히 서서 경멸의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개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안 돼, 안 돼!

입안에 머금고 있던 숨이 점점 줄어들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는 차츰 고능준을 엄습했다.

안 돼, 이렇게 끝낼 순 없어! 안 돼! 너무 분하다고!

나는 틀리지 않았어.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다고. 그런데 왜 이렇게 된 거지?

어쩌다 이런 말로를 맞이하게 된 거야?

하늘이시여, 불공평하십니다! 참으로 불공평하십니다!

저는 이대로 죽을 수 없습니다! 인정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렇게 될 리가 없는데!

일생을 치밀한 계산 속에 살아온 나 고능준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는데!

내 손에 죽은 사람은 수도 없이 많고, 내 발밑에 깔린 관리들만 해도 수십은 되는데, 이런 내가 어떻게 이렇게 죽을 수가 있어? 내가 어떻게 이 망할 고자 놈들 손에 목이 졸려 죽을 수가 있냐고!

정 낭자,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 됐어요.

네, 고 대인. 우리는 이러면 안 됐죠. 당신이 이러면 안 됐어요.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짧았던 그 대화가 갑자기 고능준의 머릿속을 스쳤다.

이러면 안 됐다고? 애초에 내가 그 여인에게 대적하지 말았어야 했나? 그랬다면 우물 속의 물이 강물을 범하지 않듯, 아무 일 없이 지낼 수 있었으려나?

혹은, 내가 조금 더 빨리 무언가를 결정했더라면, 그 여인이 우리 고씨 가문의 사람이 될 수 있었으려나?

그렇게 따지면, 오늘까지의 모든 일은, 당초 서북에서 다섯 병사들의 알량한 공로를 인정해 주지 않아 벌어진 일인가? 내가 그때 강문원을 두둔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으려나? 어쩌면 다른 결말을 맞이했을 수도 있으려나?

웃기는 소리!

고능준이 헛웃음을 터트리려던 찰나, 두 다리가 힘없이 뻗어지고, 부릅뜬 두 눈에서 초점이 없어졌다.

내시들이 바닥에 축 처진 고능준의 몸에 발길질을 두어 번 했다. 고능준이 더는 움직이지 않자, 앞장섰던 내시가 손으로 코와 입을 막고 고능준의 다리 사이로 새어 나오는 오줌을 흘깃 쳐다보았다.

“잘 처리하거라.”

내시가 담담하게 말하고는 먼저 대전을 나섰다.

바깥쪽에서는 내시와 궁녀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태자의 장례를 준비했다. 위수군은 무기를 든 채 엄숙하게 서 있었다. 다들 곁눈질 한번 하지 않고, 안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욕지거리를 듣지 못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태자의 침전 앞, 내시가 누군가에게 다가가 공손한 태도로 예를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경 공공, 다 처리했습니다.”

경 공공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태자의 침상 옆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여인이 온몸을 사시나무 떨듯 떨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허리를 숙이고 귓속말을 전했다.

“고 대인이 자결했습니다.”

진안 군왕의 표정에는 조금의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경 공공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뭐라고 했느냐?”

진안 군왕이 자신 앞에 앉은 여인을 노려보며 물었다.

“전하, 소인은 태자 전하의 시첩이에요. 소인은 태자 전하와 시침을 했었습니다.”

여인이 이마를 땅에 찧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서, 태자 전하와 함께 순장을 시켜달라고?”

진안 군왕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 냉소가 어찌나 섬뜩하던지, 여인은 차마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여인이 흐느끼면서 말했다.

“소, 소인은 태자 전하의 시중을 들러 가기 싫은 게 아니오라, 다만, 다만…….”

여인이 자신의 배를 누르면서 말을 덧붙였다.

“다만, 소인이 회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침전 안의 사람들이 경악했다.

태자에게 후손이 있다면, 좋은 일 아닌가?

하지만 지금 태자 자리를 이어받기에는 시기가 영…….

진안 군왕의 양자 입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는데, 갑자기 태자의 혈통이 튀어나오면, 일이 어떻게 되는 거지?

진안 군왕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너였구나.”

진안 군왕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여인을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숙이고 있던 여인의 목을 짓밟았다.

“바로 너였어.”

진안 군왕이 여인을 내려다보면서 발에 서서히 힘을 실었다.

여인이 두 손으로 진안 군왕의 발을 붙잡았다. 여인은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릅떴으나, 비명 한번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여인의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너였어!”

진안 군왕이 버럭 소리를 내지름과 동시에, 까드득 소리가 들리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여인의 두 손이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여인은 눈을 부릅뜬 채로 입가에 피를 흘리며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침전 안에 정적이 흐르고, 등골을 서늘하게 하는 냉기가 침전 안을 가득 메웠다. 등불을 환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침전 안은 얼음 동굴이 된 듯 냉기가 돌았다. 누군가가 두려움을 못 이기고 이를 달달 떠는 소리를 내자, 침전 안은 더욱 스산해졌다.

천자의 침궁 안에서는 황후와 대신들의 논의가 한창이었다.

“진소는 이미 자결하였으나, 고능준의 죄는 필히 엄히 다스리셔야 하옵니다. 그리 간악한 역적은 율법에 따라…….”

한 대신이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말하지 않았소. 율법으로만 다스리면 안 되고, 역사의 전례를 따라야…….”

다른 대신이 고개를 저으며 다른 의사를 내비쳤다.

“이 일에 관련된 자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신중히 결정하셔야 하옵니다.”

또 다른 대신이 주의를 주었다.

고씨 가문은 삼 대째 조정을 지켰다. 굳이 그의 선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더라도, 고능준 한 세대만 해도 온갖 가문과 혼례를 맺은 통에 나무뿌리가 휘감기듯 여기저기 줄기가 뒤얽혀 있었다. 심지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대신 중에서도 고씨 가문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다.

지금의 태후는 폐위된 것이나 다름없어서 모든 권력은 황후가 장악하게 되었다. 궁 안의 국면은 어느 정도 수습이 됐다지만, 궁 밖의 국면은 아직 미지수였다. 연평 군왕이 소리 소문 없이 상경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만 하는군.

한 내시가 침궁 안으로 들어와 통보했다.

“마마, 진안 군왕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황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어서 들라 하라.”

내시가 황후의 말을 전하자, 상복으로 갈아입은 진안 군왕이 침궁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왔다. 원칙대로라면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앞쪽이 아니었지만, 진안 군왕은 침궁을 가로질러서 곧장 황제가 있는 침상으로 향했다.

진안 군왕은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절절한 목소리로 폐하, 하고 불렀다.

“됐다. 폐하께서도 보셨을 게다.”

황후가 말하면서 옆에 있던 내시에게 진안 군왕을 일으키라는 눈빛을 보냈다.

“자,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어서 결정을 내려야지. 대신들에게 알려야 하기도 하고.”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고 황후의 뒤편에 앉았다.

“예. 마마와 대신들께서는 논의하던 것을 계속해서 하시지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지금 앉은 그 자리는 신경 쓰지 않으려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자리인걸?

대신들이 시선을 내리깔고 이어서 말하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참, 말씀드린다는 걸 깜빡했습니다. 방금 전 고능준이 태후궁에서 목을 매달고 자결하였습니다.”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고능준이 죽었다고?

고능준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니!

고능준이 죽었다면, 조금 전까지의 논의는 무의미해지지.

고능준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연루될지 고려할 필요가 없어지자, 대신들은 큰 짐을 내려놓은 듯했다.

하긴, 그자가 죽는 것보다 더 간단하고 좋은 결과는 없지. 그가 죽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테니까.

“역적이 모두 죽었으니, 오늘 밤에 일어난 일을 철저히 조사하여 역적과 모의한 사람들은 엄벌로 다스리고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포상을 내리시오.”

황후가 대신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상벌에 대해서는 율법을 따르면 될 것이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경들이 각자 맡은 직책에 따라 처리하시구려.”

대신들이 일제히 알겠다고 예를 올렸다.

해가 뜨자, 황궁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어둠이 걷혔다. 어젯밤 돌포탄으로 부순 궁문의 잔해와 시체, 혈흔, 그리고 비통함과 공포가 하나둘씩 세상에 드러나고 있었다.

사실 경성의 아침은 일찍이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큰길을 따라 달려온 위수군의 말굽 소리, 그 뒤로는 성문 앞의 대치, 그리고 황궁 앞에서 울려 퍼진 두 번의 포화 소리가 온 경성을 뒤흔들었다.

당시 토굴에 숨어 있던 이무의 부인은 비명을 지르면서 아이들을 품에 꼭 껴안았고, 경성 사람들은 지진이 났다고 외치면서 온 집안의 불을 밝히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거리를 가득 메운 위수군에 의해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지진이 아니니,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함부로 나오지 마시오.”

사람들은 깜짝 놀랐지만, 횃불에 비쳐 번쩍이는 갑옷과 무기를 보고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경성 백성들은 다른 지역의 백성들에 비해 눈치가 빨라서, 황궁에 무슨 일이 났다는 것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교랑의경> 2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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