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리다-
진소는 고능준이 뭐라 더 말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태자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태자를 보자, 진소는 코끝이 시려왔다.
영리하고 활발했던 과거의 그 어린아이가, 결국 이런 날을 맞이했구나.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분이 왜 갑자기 위태로워지신 게요?”
진소가 고능준을 향해 말하다가, 옆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던 태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고능준이 실소를 터트렸다.
“진 대인, 그런 눈빛으로 날 볼 필요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태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외다.”
진소의 눈빛이 암담해졌다.
태의 하나가 앞으로 다가오더니 무릎을 꿇고 말했다.
“환절기인지라 일교차가 심하고 기온을 종잡을 수 없습니다. 게다가 날씨가 건조하기까지 하여, 살이 찐 전하께서 몸이 몹시 허약해지셨지요. 기와 혈의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주무시기 직전에도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드셨고요. 그런데 그 탕약 때문인지, 뭉쳐 있던 혈기가 더욱 막혀 버려 입과 코를 통해 피를 쏟고 맥이 어지러워지셨습니다.”
태의가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태자 전하의 몸은 자네들이 매일같이 살피지 않았던가? 이리 심각한 병증을 어찌 몰랐을 수 있단 말인가? 날씨가 건조한 것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고, 태자 전하께서 살이 찌고 몸이 허약한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거늘!”
진소가 호통쳤다.
“대인, 말씀드린 것처럼 이 병은 정말 심각한 병입니다. 저희가 최상급 약재로 탕약을 달여 올리고 있으나, 때로는 좋은 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병이 있기 마련입니다. 대인, 이건 태자 전하의 본래 몸 상태 때문이지, 소인들이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어찌 됐든, 태자가 이렇게 된 건 예상치 못한 사고라는 뜻인 게지?
이런 빌어먹을. 그 예상치 못한 일은, 왜 항상 손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거야?
침궁 안에 정적이 흘렀다.
“살릴 수 있겠는가?”
진소의 물음에 태의들이 고개를 푹 숙였다.
“신 등이 무능하여 더는 방법이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죽을병에 걸리셨습니다.”
죽을병이라고?
진소가 흠칫 놀랐다.
“당장 정 낭자를 입궁시키거라. 진안 군왕비를 불러라!”
진소가 소리쳤다.
“진소, 정녕 미친 게요? 그 여인을 궁으로 들여서 뭘 어쩌려고?”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눈을 부릅떴다.
“그 여인만이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습니다. 마마, 어서 교지를 내리시지요.”
진소가 단호하게 말했다.
“애가가 어제 종일 그들에게 교지를 보냈소. 그런데 대역무도한 그들은 애가의 명을 거절했어! 그 여인이 태자를 살릴 수 있다고? 정녕 사람의 목숨을 살릴 수 있다면, 황상부터 진작 깨어났겠지, 오늘 같은 일이 생겼겠느냔 말이오!”
태후가 말하면서 통곡했다.
“마마, 그래도 한 번 시도는 해 봐야지요. 태자 전하를 이대로 둘 수는…….”
진소가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침상 위를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 누워있는 소년은 마치 뭍으로 떠밀려온 물고기 같았다.
이대로 태자가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참으로 가엾은 아이로구나. 차라리 그때 매화를 꺾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더라면, 지금 같은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교지를 내리거라.”
고능준의 말에 태후가 흠칫 놀랐다.
“태자 전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 여인이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도는 해 봐야지요.”
고능준이 태후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마마, 진안 군왕비를 궁으로 들이시지요.”
고능준이 진안 군왕비 다섯 글자에 힘을 실어 말했다.
치료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치료할 수 없다면,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태자 전하와 함께 순장해 버리면 그만이야.
태후가 내시를 향해 손짓하자, 내시가 서둘러 교지를 작성하러 갔다.
“소식을 전하고 그 여인이 입궁하기까지 적어도 하루는 걸릴 텐데, 그때까지 태자가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구려.”
태후가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진소가 태의를 바라보았다. 태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태의 중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 등은 감히 약을 더 쓸 수 없습니다. 지금 약을 더 썼다가는 전하의 몸이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그렇다면, 태자 스스로의 힘으로 그때까지 버텨야 한다는 말인데.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태후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궁문을 열고, 보정 대신들과 한림들을 궁 안으로 들이거라.”
진소가 말했다. 하지만 고능준이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안 됩니다.”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게요!”
고능준이 침착하게 진소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일이 바로 태자 전하의 국혼입니다.”
순간 진소가 경악했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국혼을 강행하겠다는 거요?”
딸을 바보에게 시집 보내라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곧 숨을 거둘 사람에게까지 시집을 보내라는 말인가!
“진 대인.”
고능준이 진소의 팔을 붙잡고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근래에 태자궁에서 시침한 여인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중에 혹시 누가 회임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진소가 격노하며 고능준의 옷깃을 붙잡고 소리쳤다.
“고능준! 도대체 태자 전하에게 무슨 약을 쓴 것이오!”
날씨가 건조해? 기와 혈이 몸에서 빠져나가질 못 한다고? 피를 토하고 맥이 어지러워져? 최상급의 약재?
허튼소리!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이 지경이 됐다면 필경 연유가 있겠지!
고능준이 진소의 어깨를 잡았다.
“무슨 약이냐고요? 전하께서 태자이신 한, 언젠가는 필히 써야 할 약이었습니다. 이제 와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뭘 합니까? 태자 전하의 병세를 숨기고, 예정대로 국혼을 강행해야 합니다. 태자비가 입궁하고, 태자의 첩이 회임을 하게 된다면, 태자가 죽더라도 황태손은 태어날 테고, 태자비도 예정대로 황후가 될 것입니다!”
고능준도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만약 회임을 하지 않았다면 어쩔 것이오?”
눈썹을 치켜세운 진소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다.
“회임을 하지 않았다면, 종친 중에서 하나 데려오면 그만이지요. 그렇게 태자비는 황후가 될 것이고, 장차 태후가 될 겁니다! 지금껏 해 온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기껏 판을 다 깔아 놓고 남 좋은 일만 시키려는 겁니까? 우리는 더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진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는 결국 고능준의 옷깃을 스르르 놓아 버렸다.
졸고 있던 안비가 고개를 꾸벅거리다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눈앞이 갑자기 환해지는 느낌에 안비는 악 소리를 지르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칼, 칼!”
안비가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시끄럽다. 귀신이라도 본 게냐.”
황후가 침상 위에서 안비를 쳐다보았다. 안비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자신의 목을 매만지더니, 눈을 비비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등불로 환하게 밝힌 전각 안에는 내시와 궁녀들이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칼을 든 금위군 병사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휴, 다행이다. 아직 죽지는 않았네.”
안비가 중얼거리고는 황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아직 다른 소식은 없는지요?”
황후가 손에 쥔 책을 내려놓았다.
“괜히 호들갑을 떤 게야. 태자가 고뿔에 걸렸다더군.”
안비가 눈을 부릅떴다.
고뿔?
“고뿔 한번 걸렸다고 이렇게 크게 난리를 칠 일이에요? 누군 놀라 기절할 뻔했는데.”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그래. 별일 아니니 그만 돌아가거라.”
안비가 민망해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서둘러 보따리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려던 안비가 멈칫하면서 몸을 돌렸다.
“마마, 설마 그 소식을 믿으세요?”
“그 소식을 믿는 자가 있겠느냐?”
황후가 반문했다. 안비는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듯이 황후 앞으로 돌아와 무릎을 꿇고 황후의 소매를 붙잡았다.
“마마, 그럼 어쩌면 좋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저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
황후가 몸을 고쳐앉고 탁자 위에 놓인 황후 인장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자, 경성 곳곳에 등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대한 성벽 너머는 어둑하기만 했다. 지금은 사람들이 졸리기 시작할 시간이자, 하늘과 땅이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다그닥거리는 말굽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손에 횃불을 들고 성벽을 돌던 금군이 느릿느릿 걸어오는 소리였다.
“주 대인, 이렇게 매일 밤을 새우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하실 겁니다.”
병사 한 명이 가장 선두에서 말을 타고 가던 주복을 향해 말했다.
“당직을 정 미룰 수 없으시다면, 휴가라도 이틀 정도 쓰심이 어떻겠습니까?”
“힘들지 않다. 이게 뭐가 힘들다고. 서북에서는 몇 날 며칠을 뜬눈으로 지내는 게 당연한 일이었어.”
주복은 종승포의 총애를 받는 장수였다. 그런 주복이 서북으로 떠나는 대신 경성의 성문을 지키겠다고 하자, 종승포는 격노하여 주복을 흠씬 두드려 패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주복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패기 없고 변변치 못한 놈이라고 욕했던 종승포였지만, 그는 떠나기 전에 주복을 금군 병영으로 배치했다. 하는 일은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과 별반 차이가 없었지만, 금군 병영 소속이라는 신분은 훨씬 위상이 높았다.
병사들은 그런 주복이 의아할 뿐이었다. 주복이 죽는 것을 두려워하여 경성에 남은 거라면, 중 장군이 이토록 그를 총애할 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죽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면, 주복은 왜 굳이 경성에 남기를 고집한 걸까?
주복은 말수가 적은 편이었지만, 짤막한 대화를 할 때마다 서북 이야기를 꺼내는 것으로 보아 주복도 서북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사들이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그때, 앞서 있던 주복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말했다.
“잠시 쉬었다 가지.”
또 북쪽 성문이네.
주복은 매일 밤 순찰을 돌 때마다 북쪽 성문 앞에서 잠시 쉬었다 갔다. 병사들은 그런 주복이 익숙한 듯 말에서 내려와 휴식을 취했다. 그런데 병사들이 말에서 내리자마자,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이 멈칫하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들의 옆에 있던 주복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마차와 말 한 필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야밤에 길을 재촉하는 사람이 있다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앞을 내다보자, 새카만 두봉과 커다란 두모를 쓴 사람이 말 위에서 멈칫하는 게 보였다. 말 위에 타 있던 사람이 주복을 알아본 듯 말고삐를 당기며 외쳤다.
“주육.”
사내가 두모를 벗자, 횃불 아래로 진호의 얼굴이 드러났다.
“아니, 네가…….”
주복도 진호만큼 놀란 눈치였다. 진호가 주복을 향해 빙긋 웃다가 곧 미간을 찌푸렸다.
“순찰 중인가?”
진호가 묻자, 주복은 그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뒤에 있던 마차로 시선을 돌렸다.
“아, 친척을 한 분 모셔 왔어.”
진호가 짤막하게 말하고는 성문을 향해 문을 열라고 소리쳤다.
성문 위에서 수문 병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아래를 내려다보자, 진호가 붉은 인장이 찍힌 서신을 펼쳐 흔들었다.
성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면서 열렸다.
“경성의 성문은 참 쉽게도 열린단 말이야. 여기 있으며 보니까, 이 성문은 낮보다 밤이 더 시끌벅적한 것 같아.”
주복이 비아냥대며 말했다. 진호가 웃으며 주복에게 물었다.
“지금 내게 먼저 말을 거는 건가?”
주복이 표정을 굳혔다.
“친척을 데려왔다고? 이렇게 야심한 밤에 데려온 것을 보니, 무척이나 친한가 보군.”
주복은 여전히 진호를 쳐다보지 않고 마차를 바라보며 말했다.
마차는 단출하다 못해 볼품없어 보이기까지 했다. 별다른 호위도 없이 마부 한 명만 마차 앞에 타고 있었다. 밤바람이 불어왔지만 아래로 무겁게 드리워진 마차 휘장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호가 웃었다.
“주 대인, 한 번 검문해 보시겠습니까?”
주복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진호가 손을 들었다. 진호의 뜻을 눈치챈 마부가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렸다. 주복은 거침없이 말을 타고 마차 앞으로 다가갔다.
마차 안에 한 여인이 예닐곱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춰진 휘장에 놀랐는지, 주복이 횃불로 마차 안을 비추자 여인은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마차에서 내리라고 할까?”
진호가 물었다. 주복이 냉소를 짓고는 마차에서 시선을 거두고 진호를 쳐다보았다.
“내가 너를 모를까.”
언제나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에야 행동하는 진호라는 사실을 잘 아는 주복은, 진호가 이미 모든 대비를 끝냈기에 마차 안을 들여다보라는 말을 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진호가 웃었다.
“나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군.”
주복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진호는 말에 박차를 가했다.
“오밤중이니, 시간 끌지 않고 들어가겠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지. 그럼 이만.”
주복이 길을 비키자, 진호와 마차는 그의 옆을 지나쳐서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을 지키는 위병들은 마차를 검문하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그들을 안으로 들여보낸 뒤 성문을 닫았다.
성문을 지나던 진호의 얼굴에서는 웃음기가 가시지 않았다.
이런 우연이 있나. 여기서 주육을 마주칠 줄이야.
주육이 금군 병영에서 눈칫밥을 먹느라 밤마다 성벽 순찰을 돈다는 말이 진짜였나 보군. 저놈 성질머리로 그런 괴롭힘을 참고 있다니.
참고 있다고?
순간 진호의 웃음이 굳어졌다. 곧이어 그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마차가 급히 정차했다.
“공자님?”
마부가 조용히 물었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성문을 바라보았다. 굳게 닫힌 성문이 성 밖의 풍경을 차단했다. 마차에 달린 등불과 성문의 횃불에 비친 진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우연이라고? 이 세상에 단순한 우연 따위는 없지.
성문 밖에 있던 병사들은 말을 탈 준비를 했다. 그때, 병사 한 명이 손으로 어딘가를 가리키면서 엇, 하는 소리를 냈다.
“신기하네. 이 시간에 누가 또 오나 봅니다.”
주복이 눈을 가늘게 뜨고 앞을 내다보자, 말굽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한두 명이 아닌가 본데요?”
병사가 중얼거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횃불에 비친 사람들은 금세 성문 앞까지 달려왔다. 말을 탄 사람은 총 일곱 명이었고, 가장 앞선 사람은 뒤쪽 무리와 거리가 꽤 벌어져 있었다. 두봉이 바람에 흩날리고, 두모 아래로 말을 탄 사람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보였다.
“어라, 여인이잖아?”
귓가에 병사들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저도 모르게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왔구나!
말과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주복은 말을 이끌고 앞으로 다가갔다.
“성문 열어요.”
정교랑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뒤따라오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옆에 멈춰 섰다. 두모 아래로 굳어지는 주복의 표정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이 여인, 경성에도 자신의 사람을 남겨 두었군.
“성문을 열어라.”
주복이 말했다.
고 선생이 서둘러 앞으로 나아가던 찰나, 주복이 고개를 치켜들고 성문 위에 있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한발 늦긴 했지만, 고 선생도 이름 하나를 뱉어냈다.
성문 위에서 동시에 이름이 불린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자기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재빨리 성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부(付) 낭중(郞中).”
성문에서 뛰어 내려온 두 사람이 위병들에게 문을 열라고 지시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뒤에서 두 사람 중 한 명의 이름을 불렀다.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몸을 살짝 떨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 성안으로 들어갔던 진호가 다시 성문 앞으로 되돌아왔다. 진호의 뒤로 그가 불러온 순성갑기 병사들이 보였다.
“진 대인, 진안 군왕께서 경성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감문관(監門官) 부 낭중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진호가 천천히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횃불에 비친 진호의 얼굴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진안 군왕이 경성으로 돌아왔다고? 태후마마의 교지가 있었던 것이오? 아니면, 중서문하성에서 군왕을 모셔 오라고 했소?”
진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진 대인, 바로 엊그제 태후마마의 교지가 있었습니다.”
부 낭중과 함께 성문 아래로 내려온 사내가 말했다.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태후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지만, 진안 군왕이 태후마마의 명을 거역했네. 그때는 명을 거역해 놓고, 지금에서야 다시 경성으로 돌아온다니, 저의가 뭐지?”
진호가 두 사내를 가리키며 호통쳤다.
“저 둘을 체포하라!”
진호의 뒤에 서 있던 순성갑기 병사들이 재빨리 두 사내를 체포했다. 성문 안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을 들은 주복 등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성문을 열어라!”
주복이 말을 끌고 앞으로 나아가서 소리쳤다.
“주복, 이 사람아. 지금 성문을 여는 건 적절치 못해. 조금만 더 기다려 보게나.”
익숙한 목소리가 성문 안쪽에서 새어 나왔다. 진호의 말을 들은 주복은 온몸이 굳어 버렸다.
“큰일이다. 진호에게 발각되었어.”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말했다.
“진호가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정교랑이 물었다.
“조금 전에 마차 한 대를 끌고 성안으로 들어갔어. 어딘가 수상해 보이기도 했고.”
주복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성문 위를 올려보았다. 두모가 바람에 날려 벗겨지자, 정교랑의 얼굴 위로 일렁이는 횃불이 비쳤다.
“어떡하죠? 누군가가 일부러 성문을 막는다면, 들어가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고 선생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쳐들어갈까?”
주복이 정교랑에게 물었다. 주복의 말을 들은 고 선생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왕비 전하, 경성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저희에게 지금 무엇을 숨기고 계시는 겁니까? 말할 수 없는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저희는 부인을 믿습니다. 부인께서 쳐들어가겠다고 하신다면, 저희도 응당 쳐들어가겠으나, 최소한 저희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알려 주셔야지요. 통행 허가도 없이 이대로 새벽에 쳐들어갔다가는, 종친 신분인 진안 군왕 전하께 역모의 대죄가 씌워질 것이 뻔합니다!”
고 선생이 다급하게 말했다.
“내 생각엔, 경성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서요.”
정교랑이 말했다.
“부인의 생각에, 무슨 일이 난 것 같아서라고요? 왕비 전하! 지금 무슨 농담을 하시는 겝니까!”
“내 누이는 농담을 하지 않습니다!”
주복이 소리쳤다.
“주 대인이 여기서 기다리고 있던 것 또한, 우리가 오리라 추측해서입니까?”
고 대인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추측치고는 꽤 정확하십니다.”
성문 앞의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정교랑은 고 선생의 말에 더는 대꾸하지 않고 말을 탄 채 뒤쪽으로 한걸음 물러섰다. 정교랑이 성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성벽 위에 한 사람이 나타나고, 횃불 두 개가 위에서 정교랑의 얼굴을 비췄다. 진호가 두봉을 휘날리며 정교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렇게나 빨리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면서 다시 정교랑을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정말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데.
“진안 군왕비, 성벽을 넘어서라도 성안으로 들어오려 하신다면, 신 등은 무례함을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성벽 위에 있던 위병들이 정교랑 일행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진호, 네놈이 감히!”
주복이 재빨리 정교랑의 앞을 막아서고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성문을 향해 삿대질을 했다. 진호가 쓴웃음을 보이고 천천히 말했다.
“감히 그렇게 하신다면, 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성문 안팎으로 정적이 흘렀다. 매섭게 불어오는 밤바람에 횃불은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성문을 열어라! 성문을 열어라!”
성문 안쪽에서 다급한 말굽 소리와 외침이 들려왔다.
“태후마마께서 급히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지금 시간에 태후마마께서 급하게 교지를?
진호가 경악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두 내시가 말을 타고 성문을 향해 다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무슨 교지란 말입니까?”
진호가 물었다.
내시들은 성문 앞에 선 진호와 한쪽 옆에서 병사들의 손에 붙잡혀 있는 두 감문관을 보고는 놀란 기색으로 다시 진호를 쳐다보았다.
“공공, 저 두 사람이 이 시간에 멋대로 성문을 열려 하기에, 신이 부윤 대인의 명을 받아 체포했습니다.”
진호가 문서 한 장을 꺼내어 내시들을 향해 펼쳤다.
일을 할 땐 철두철미하게 해야지. 원칙을 어긴단 말은 남들이나 듣는 소리지.
그러나 두 내시는 진호를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 소리쳤다.
“어서, 어서 성문을 열어라!”
“공공들께서는 이 야심한 시각에 대체 무슨 교지를 전달하시는 건지요?”
진호가 자리를 비키지 않고 재차 물었다. 격노한 두 내시가 진호를 향해 호통쳤다.
“진 관인, 그건 진 관인이 함부로 물을 질문이 아닐 텐데요?”
성문 밖에서는 성문 안쪽의 소란이 자세히 들리지 않았다.
말을 탄 채 조용히 뒤로 물러난 정교랑은, 말고삐를 세게 움켜쥐고 성문을 노려보았다.
“안 돼. 너무 위험해.”
정교랑이 뭘 하려는지 단번에 눈치챈 주복이 재빨리 정교랑을 말렸다.
“정 낭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냔 말입니다!”
고 선생이 정교랑을 향해 큰 소리로 외치며 말을 끌고 달려왔다. 고 선생은 부인이나 왕비가 아니라, 정 낭자라고 외쳤다.
주복과 정교랑이 동시에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정교랑과 주복, 그리고 고 선생은 어느새 진안 군왕 등과 일정한 거리가 벌어졌다. 그리고 진안 군왕은 어둠 속에 서서 잠자코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청원 역참에서 떠난 뒤로부터, 진안 군왕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복이 정교랑과 무슨 대화를 하든, 고 선생이 정교랑을 뭐라고 다그치든, 진안 군왕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가만히 있기만 했다.
성문 안쪽에서 정 낭자라는 세 글자를 들은 내시들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내시 한 명이 크게 기뻐하면서 성문 앞으로 바짝 다가와서 소리쳤다.
“밖에 계신 분이 진안 군왕비십니까?”
“그렇네.”
정교랑이 곧바로 대답했다.
“성문을 열어라! 진안 군왕비를 궁으로 들이라는 태후마마의 교지이니라!”
내시가 손에 쥔 교지를 높이 펼쳐 들었다. 내시가 정말로 교지를 펼쳐 들자, 위병들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성문을 열었다.
“잠깐.”
진호가 말했다.
“진호, 감히 태후마마의 명을 막는 것인가!”
참다못한 내시가 고함을 질렀다.
“당치 않습니다. 하온데, 태후마마의 교지에는 진안 군왕비만 궁으로 들이라고 적혀 있는지요?”
진호의 물음에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내시들을 따라 고개를 끄덕이고는 병사들을 향해 손짓했다.
병사들이 성문 앞에 일렬로 서서 활시위를 당겼다.
“지금 뭐 하는 짓들인가!”
내시가 미간을 찌푸렸다.
“밖에는 진안 군왕비만 있는 게 아니라, 진안 군왕 또한 함께 있습니다. 신이 생각하기에, 태후마마께서는 지금 같은 시기에 진안 군왕까지 궁에 난입하는 것을 그리 반기지 않을 듯싶은데요?”
진호가 두 내시를 쳐다보며 ‘지금 같은 시기’와 ‘난입’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두 내시가 흠칫 놀랐다.
새벽에 황궁 문이 열리고, 고능준과 진소를 갑자기 궁에 들였다는 것만으로도, 황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눈치챈 사람들이 있을 거야. 그런데 지금 종친까지 황궁에 난입한다면, 이 일은 걷잡을 수 없어.
두 내시가 더는 반박하지 않고, 침묵으로 진호의 말에 동의했다.
“성문이 열렸습니다!”
고 선생이 소리쳤다.
뒤에 있던 마차와 사람들이 서둘러 성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성문 안쪽에서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더니, 대열을 맞추고 공격 태세를 갖췄다. 병사들이 진안 군왕을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모습이 횃불에 비쳤다.
두 내시가 병사들의 뒤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성문 앞에 있는 여인이 정말로 정교랑임을 알아보고는 감격에 찬 표정으로 교지를 높이 들며 말했다.
“진안 군왕비, 태후마마께서 입궁하라는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내시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이 말을 이끌고 앞으로 달려가려 했다.
“교랑!”
주복이 외치면서 정교랑의 앞을 막았다.
“지금 같은 때에, 안으로 들어가면 어떡해!”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괜찮아요.”
주복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고 선생이 말을 몰며 앞으로 더 나아가려고 하자, 진호가 손짓했다.
“쏴라.”
명령과 동시에 매섭게 날아간 화살들이 고 선생의 앞쪽에 박히며 바닥에 선을 그려냈다. 놀란 말들이 앞발을 높이 들었다.
“진호!”
주복이 소리쳤다. 진호는 병사들 뒤에 서 있었기 때문에, 주복은 그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군왕 전하, 태후마마께서 내리신 교지가 어떤 내용인지 알아들으셨겠지요? 교지에는 진안 군왕비에 대해서만 쓰여 있지, 그 외의 다른 사람은 언급이 없었습니다.”
진호가 말했다.
“그래, 본왕은 잘 알아들었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이는 오늘 밤, 진안 군왕이 내뱉은 첫마디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두모를 푹 눌러 쓰고 있었기에,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말을 앞으로 몰았다. 정교랑은 활을 든 병사들과 그 뒤에 서 있던 진호를 지나쳐 두 내시를 따라 성안으로 들어갔다.
어둠 속으로 멀어져가는 정교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주복이 말고삐를 세게 쥐었다.
깊은 밤, 장 노태야의 방 안에 등불이 켜졌다. 장 노태야가 내의 차림으로 밖에 나오자, 문 앞에서 당직을 서던 시녀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노태야?”
놀란 시녀가 장 노태야를 불렀다. 장 노태야가 밖을 내다보았다.
“곧 해가 뜰 시간이냐?”
“아니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시녀의 대답에 장 노태야가 음, 하고 대꾸했다.
“말굽 소리가 끊이질 않네. 밖이 시끄럽구나.”
장 노태야가 말했다. 그러자 시녀가 놀란 기색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시끄러운가?
장씨 저택이 저잣거리 한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지금은 노점과 야시장도 다 파했을 시간인데, 아직도 시끄럽다고?
장 노태야가 창가에 서서 어두운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노태야, 소인이 사람을 시켜 대문 앞으로 지나다니는 마차와 사람들이 다른 길로 돌아서 가게 할게요.”
시녀가 말했다.
장 노태야가 괜한 횡포를 부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장순 정도의 신분이라면 그 정도 횡포는 부릴 수 있었다.
장 노태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괜찮아. 괜찮아.”
“마마, 마마.”
태의들의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궁녀들의 품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옆에 있던 진소가 태후보다 한발 빨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러는가?”
진소가 물었다. 태의가 침상 위를 가리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곧 숨이 끊어질 듯합니다.”
진소가 태의를 밀쳐내고는 침상 옆으로 다가갔다. 태자는 더 이상 숨을 헐떡이지 않았다. 대신 코와 입으로 피를 쏟기 시작했다.
진소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느꼈다.
“전하, 전하.”
진소가 애타게 태자를 불렀다. 진소의 뒤에 서 있던 태후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고능준은 이런 결과를 진작 예상했다는 듯 담담하게 서 있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슬퍼하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침착하게 차후의 일을 계획해야 해.
“마마, 마마, 진안 군왕비가 당도했습니다.”
문밖에서 내시들의 외침이 들려오자, 방 안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진안 군왕비가 벌써 도착했다고?
“그럴 리가 있느냐!”
태후가 소리쳤다.
시간이 고작해야 얼마나 지났다고? 여기서 청원 역참까지만 해도 족히 반나절은 걸릴 텐데. 게다가 거기까지 오가려면 아무리 빨라도 꼬박 하루는 걸려.
그런데 반 시진도 안 돼서 그 여인이 도착했다고? 신선이 구름을 타고 온 것처럼?
아니야. 신선이라고 해도 이렇게 빨리 올 수는 없어.
“정 낭자를 어디서 본 것이냐?”
태후가 물었다.
“성문 밖에서 마주쳤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성문 밖!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거참 잘 됐습니다. 진안 군왕비가 일찍이 준비했나 봅니다.”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있나.
그런데 어떻게 준비한 거지? 태자 전하께 일이 생긴 건 바로 오늘 밤의 일이다. 궁문이 열렸으니 경성에 있는 사람 중 몇 명은 이 사실을 알게 됐을 수도 있겠지만, 이 소식이 경성 밖까지 닿았을 리는 없는데.
반나절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 청원 역참에서 이리 달려왔다고?
“염라대왕!”
태후가 갑자기 불안해하면서 소리쳤다.
“그 여인은 염라대왕과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닌가! 그러니 알게 된 게지!”
진소와 고능준이 멈칫했다.
“그 여인을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 당장 내쫓거라!”
태후가 정신없이 소리치면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그 여인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온 것이 틀림없다. 그 여인은 우리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온 것이야!”
“마마, 이곳은 황궁입니다. 이곳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있는 곳이니, 염라대왕이 온다고 해도 별수 없는 곳이라고요.”
고능준이 목청을 높이며 태후에게 말했다. 그러고는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조용히 말했다.
“오늘 들어오면, 다시는 나가지 못할 겁니다.”
진소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일단은 태자 전하를 살리는 게 급선무입니다. 어서 정 낭자를 안으로 들이게.”
진소가 내시를 향해 손짓했다.
정교랑은 태후의 침궁 밖에 조용히 서 있었다. 침전의 사방에는 각종 무기를 손에 든 위병들이 즐비해 있었다. 침궁 앞은 몹시 적막했으나, 어둠 속에는 침궁 쪽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숨어 있었다.
침궁 안에서 정교랑을 안으로 들이라는 내시들의 말이 들리자, 정교랑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멀리 있던 새카만 그림자 하나가 쏜살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침궁 안으로 들어간 정교랑의 눈에 가장 먼저 진소가 들어왔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치자, 정교랑이 먼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왕비, 이쪽으로 오시지요.”
고능준이 옆에서 말했다.
“왕비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태자 전하께서 갑작스럽게 병이 도지셨습니다.”
정교랑은 고능준의 말을 무시한 채 안으로 들어갔다. 태의들이 길을 비키면서 휘장을 걷어 올려 태자를 보여 주었다.
정교랑이 침상 위를 쓱 쳐다보고는 걸음을 멈췄다.
“뜨거운 물, 불에 데운 금침, 그리고…….”
정교랑이 필요한 도구들을 술술 말하자, 태의들이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여인이 정말로 치료를 하려는 건가? 하지만 태자 전하께서는 조금 전에 이미…….
진소가 크게 기뻐하며 내시들을 재촉했다.
“어서, 어서 왕비 전하께서 말씀하신 것들을 전부 가져오너라.”
진소에 반해 고능준은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로 치료할 수 있다고? 정말로 태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 이 여인을 믿어도 될까?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믿지 못할 건 또 뭐 있겠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이 여인은 죽은 목숨일 테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미덥고 못 미덥고가 무슨 대수라고.
“어서 가져오너라.”
고능준이 손짓했다. 태자의 침전 안에 있던 내시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입궁했다고?”
소식을 들은 황후가 놀라서 반문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빨리 도착했다더냐?”
“그건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멀리서 정 낭자가 왔다는 것을 확인하기만 했을 뿐,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습니다. 태후의 침궁 주위로 경계가 삼엄합니다.”
어린 내시가 말했다.
“마마, 정 낭자가 왔다면, 진안 군왕도 같이 오지 않았을까요?”
안비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물었다. 황후가 전각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정 낭자가 왔다면, 일이 잘 풀리겠군. 고능준과 태후가 뭐라 변명을 늘어놓든 정 낭자가 증인이 되어줄 수 있어. 한데, 가장 결정적인 한 수를 어떻게 둬야 할까?”
황후가 중얼거렸다. 안비가 귀를 쫑긋 세우고 물었다.
“마마, 뭘 하시려고요?”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뭘 하려는지는, 움직이기 시작한 다음에 말해야 하는 것이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늘, 하려는 일을 어찌 먼저 입 밖으로 뱉을 수 있겠느냐.”
안비는 혀를 내두르면서 더는 묻지 않았다. 황후가 구석에 놓인 모래시계를 쳐다보았다.
곧 밤이 지나고, 해가 뜰 텐데. 이대로 해가 뜬다면, 조정 대신들은 조회를 열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번 일을 반전시킬 여지가 없어져.
전각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때, 갑자기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냐!”
“소등(小鄧)입니다.”
소등!
소등은 황후가 태후의 궁에 심어 놓은 내시였다.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자이기도 했다.
황후는 심장이 점점 더 빨리 뛰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어렴풋하게 떠올랐던 생각이 점점 더 선명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마.”
문밖에서 어린 내시가 구르다시피 안으로 뛰어 들어오더니, 손을 앞으로 뻗으며 황후를 향해 돌진했다.
황후의 옆에 서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깜짝 놀라며 소등의 앞을 막고 그를 붙잡았다. 소등은 붙잡히는 와중에도 손을 앞으로 내밀면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는 작은 종이 한 장이 쥐여 있었다.
“마마, 마마.”
어린 내시가 흥분한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이면서 말을 더듬었다.
“정 낭자, 소인이 정 낭자를 봤습니다. 정 낭자가 태자의 병을 고치겠다며 이것저것 갖다 달라고 해서, 태후의 궁이 잠시 어지러워졌습니다. 다행히도 소인은 뜨겁게 달군 솥을 정 낭자께 가져다드렸고, 용기를 내어 정 낭자를 몇 번 더 쳐다보았습니다. 정 낭자는 손을 뻗어 소인이 들고 있던 솥을 받아가면서, 소인의 손에 이것을 쥐여 주었습니다.”
황후가 몹시 기뻐하면서 소등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고 재빨리 펼쳐보았다.
“불꽃놀이?”
황후가 종이 위에 쓰인 글씨를 읽었다.
불꽃놀이? 무슨 뜻이지?
이게 무슨 뜻이야?
전각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교랑의 일거수일투족을 예의주시했다.
정교랑은 물에 적신 수건으로 태자의 얼굴과 몸을 깨끗이 닦아내고, 향을 한 대 피웠다. 그러더니 태자의 침상 옆에서 눈을 감은 채 뭐라고 계속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정 낭자가 사람의 병을 고칠 때는 주위에 사람을 남겨두지 않는다고 했는데. 게다가 치료 중이라기에는 뭔가 너무 이상해 보이는걸?
“욕(欲), 색(色), 무(無)의 세계를 초월하여 옥청성경(玉淸聖境)에 달하고, 진정한 육신이 몸에서 빠져나와 천지신명이 되어 옥청성경에서 만신의 칭송을 받으며 살아갈지어다.”
침상 가까이 서서 정교랑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던 태의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태의가 저도 모르게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다른 태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건 도가에서 초도(超度)용으로 쓰이는 설구고발죄묘경(說救苦拔罪妙經)의 구절인 것 같소만.”
두 태의가 서로를 마주 보며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가서 깨끗한 옷을 가져와요.”
정교랑의 말에 진소와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옷을 가져오라고요?”
고능준이 물었다.
“전하의 육신은 이제 깨끗해졌으니, 수의를 입히고 입관해도 됩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진소와 고능준이 크게 놀라하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지금 그게 무슨 뜻입니까?”
진소가 물었다.
육신이 깨끗해져? 입관해도 된다니?
“지금 치료하고 있던 게 아니었단 말입니까?”
진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재차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아니지요. 내가 이 방에 들어왔을 때,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훙서하셨습니다.”
정교랑의 시선이 태의들에게로 향했다.
“몰랐던 건 아닐 텐데요?”
태의들도 놀라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우리는 당연히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낭자는 죽을병을 고치는 신의가 아닙니까? 한참을 앉아서 하고 있던 것이 고작 초도 법사를 읊는 거였습니까?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게 무슨!
“전하께서는 이미 마음도, 지각도, 넋도, 영혼도 없어지셨는데, 어찌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죽을병을 치료하는 것은, 일단 그 대상이 사람이어야만 가능한 일이지요.”
정교랑이 침상 위의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태자를 깨끗하게 닦아내서인지, 태자의 얼굴은 발그레 홍조를 띠고 있었고, 표정 또한 편안해 보였다. 태자의 얼굴에는 과거 육가아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이곳에서의 죄를 모두 사하였으니, 모든 것들로부터 해탈하소서. 어두운 긴 밤에 모든 걸 묻어 두고 편히 떠나소서.
정교랑이 속으로 읊으며 고개를 숙였다.
전각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능준은 뒤통수를 세게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큰일 났군!”
고능준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소리쳤다.
내가 틀렸어! 내가 또 틀렸어!
믿지 못할 건 또 뭐 있겠나.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태자 전하를 살릴 수 있든, 없든, 어차피 이 여인은 죽은 목숨일 테니까. 어차피 죽을 사람인데, 미덥고 못 미덥고가 무슨 대수라고.
아니야, 아니야! 이 여인을 믿고 말고는 중요한 게 아니었어!
이 여인은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만들고 있었던 거야! 이 소식을 밖으로 내보낼 기회를!
“여봐라! 조금 전에 태후궁을 드나든 자들을 전부 잡아들여라!”
고능준이 몸을 돌리고 소리쳤다. 그리고 정교랑을 가리키면서 눈을 부릅떴다.
“태자 전하를 음해한 저 여인도 잡아들여라!”
아니지, 아니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황후!
“여봐라! 황후를 잡아들여라!”
밤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황궁의 적막을 깨트렸다.
“누구냐!”
앞쪽 궁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위병들이 횃불을 밝히며 소리쳤다.
화려한 조복을 입은 여인이 열댓 명의 내시와 궁녀들에게 둘러싸인 채 그들의 시야로 들어왔다. 여인은 작은 상자 하나를 품에 안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었다.
저건, 황후마마잖아!
병을 앓은 탓에 오랜 시간 자신의 궁 밖으로 나오지 않은 황후였지만, 병사들은 조복과 봉관을 보고 단번에 황후임을 알아보았다.
“황후마마의 행차시다. 궁문을 열어라!”
한 내시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하지만 당직을 서던 위병들은 머뭇거렸다.
“태후마마의 허락이 없는 한, 그 누구도 궁 밖으로 내보내지 말라는 명이 있었습니다.”
위병 중 우두머리가 대답했다.
그때 뒤쪽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횃불을 든 병사들이 달려왔다.
“게 섰거라! 황후를 잡아라!”
살벌한 외침이 들려오자, 내시와 궁녀들이 비장한 표정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마마! 소인들이 마마를 지키겠사옵니다!”
흩어져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일제히 황후를 에워싸고 궁문을 향해 돌진했다.
“황후마마,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이러시면 화살을 쏘겠습니다!”
맨 앞에 서 있던 당직 위병이 소리쳤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뒤쪽에 있던 금위군 병사들이 활시위를 겨누고 황후를 조준했다. 하지만 내시와 궁녀들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 없이 결연하게 걸음을 옮겼다.
“네놈들이 감히 황후마마를 해하려는 것이냐! 황후마마를 해하는 것은 역모의 대죄이니라!”
내시와 궁녀들이 목청을 높이고 소리쳤다. 활시위를 당기던 금위군 중 일부가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맞아. 저분은 황후마마신데.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라! 저분이 황후마마라고는 하나, 황실에는 태후마마도 계신다!”
금위군 중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일그러진 눈빛으로 황후를 쏘아보았다.
궁문을 엄히 단속하라는 태후의 명을 받자마자, 병사들은 궁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어느 쪽에 줄을 서느냐가 관건이야.
태후마마께서 연로하셨다고는 하나, 고씨 가문의 뿌리는 황실 깊은 곳까지 자리하고 있어. 그리고 보정 대신으로 진소를 세웠으니, 황후는 태후마마에 비할 바가 안 되지.
무엇보다도 궁 안에서 일어난 일은, 궁 안에서 사라져야만 해.
당초 선황께서도 야밤에 태감들의 습격을 받아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셨지만, 결국 주동자를 찾아내지 못한 채 흐지부지되어 버렸어. 그러니 이 소식이 궁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설령 이 자리에서 황후를 죽인다 하더라도 사건을 은폐할 이유를 만들면 그만이야.
부딪쳐 보자!
“화살을 쏴라!”
금위군 우두머리가 목청을 높이며 솔선수범하여 화살을 한 발 쏘았다. 최전방에 있던 내시 하나가 악 소리를 지르며 쓰러졌다.
곧이어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인간 방패가 되어 황후와 한 몸으로 움직이며 돌진하던 내시와 궁녀들은 하나둘씩 쓰러져 갔다. 하지만 그들은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처럼 의연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마마, 충분히 가까워졌습니다.”
내시 하나가 소리쳤다.
궁문과의 거리가 몇 걸음에 불과할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황후의 근처에는 겨우 일고여덟 명의 궁녀와 내시들밖에 남지 않았다.
황후가 품에 꼭 안고 있던 상자를 내시에게 건넸다. 내시는 치지직 소리와 함께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을 재빨리 상자 안에 넣었다.
“마마를 호위하라!”
상자를 들고 있던 내시가 소리치면서 손에 든 상자를 궁문 앞을 막아선 위병과 금위군 병사들을 향해 힘껏 던졌다.
펑 소리가 나고, 산산조각이 나면서 상자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피슝 피슝 소리와 폭발음이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면서, 무수히 많은 불꽃이 사방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궁문 앞과 하늘에 현란한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궁문 앞은 일순간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방으로 튄 불꽃은 불똥이 되어 방패와 활을 들고 있던 금위군 병사들에게로 떨어져 옷에 불을 붙였다. 몸에 불이 붙은 병사들이 바닥에 뒹굴며 비명을 지르자, 금세 흐트러졌다.
황후를 보호하던 내시와 궁녀들은, 바닥에서 사방으로 쏘아져 나가는 불꽃과 옷자락에 붙은 불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이를 악물고 궁문을 향해 달려갔다. 그들이 온 힘을 쥐어짜 궁문에 몸을 부딪치자, 드디어 궁문이 열렸다.
“마마를 보호하라! 마마를 보호하라!”
옷에 불이 붙은 채로 자신을 지켜 주는 내시와 궁녀들을 데리고, 황후는 궁 밖으로 달려나갔다. 다급하게 뛰어나오는 황후의 손에는 인장이 들려져 있었다.
궁 밖으로 뛰어나온 궁녀와 내시들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러댔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했습니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했습니다!”
내시와 궁녀들의 목소리가 돌포탄이 터지는 소리보다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궁문 앞, 구층탑을 넘어서는 높이에서 화려한 불꽃놀이가 펼쳐지면서 경성의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창가에 서 있던 시녀가 깜짝 놀라 헉 소리를 냈다.
“노태야, 저기 좀 보세요. 저게 뭐죠?”
장 노태야는 멀리서 피어오르는 불꽃놀이를 보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구나. 천만다행이야.”
장 노태야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남은 내시와 궁녀들, 그리고 황후는 고막을 때리는 폭발음을 등에 지고 미친 듯이 앞을 향해 내달렸다. 그때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궁문을 향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마마.”
황후를 보호하던 내시들이 처절하게 소리쳤다.
죽을 각오로 황후를 에워싸고 밖으로 달려 나온 그들이었지만, 그들 역시 목숨을 부지할 수만 있다면 그 누구보다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목숨을 거는 것 또한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이 위기에서 벗어날 줄 알았는데, 저 앞에 또 호랑이와 늑대가 기다리고 있었을 줄이야.
맞은편에서 황후를 발견한 병사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는 무기를 꺼내 들고 황후를 향해 달려들었다.
“황후를 잡아라!”
“화살을 쏘아라!”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뒤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화살을 쏘아라!”
마주 오던 병사들 또한 소리쳤다.
내시와 궁녀들이 비명을 지르면서 빈틈없이 황후를 에워쌌다.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오자, 황후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앞쪽에서 쏘아낸 화살은 내시와 궁녀들을 지나쳐서 뒤쪽으로 향했다. 곧이어 뒤쪽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고개를 퍼뜩 든 황후의 얼굴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스쳤다. 황후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후를 향해 달려오던 병사들이 황후를 그냥 지나쳐 가더니 궁문 앞을 막아섰다.
진안이 궁문에 우리 사람을 남겨 두었다더니, 이들이었나?
황후가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이, 어가에서 또 한 무리가 달려왔다.
“황후마마.”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가 앞을 내다보자, 장순이 보였다. 장순을 비롯해 수많은 대신이 잰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드디어, 드디어 살았구나.
다리에 힘이 풀린 황후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을 지키던 열댓 명의 내시와 궁녀들은 어느새 네 명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 역시 만신창이가 된 채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바닥에 주저앉아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경, 경들이 어떻게…….”
필사의 각오로 궁을 빠져나온 황후였지만, 긴장이 풀리면서 입술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마마, 불꽃놀이를 보고,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왔습니다.”
장순이 황후에게 말했다. 황후와 바닥에 주저앉은 내시와 궁녀들은 흠칫 놀랐다.
불꽃놀이? 불꽃놀이는 궁문을 나오기 직전에 터졌는데?
그 불꽃을 보고 달려왔다고? 날개를 달고 날아와도 이렇게 빨리 오지는 못할 텐데?
물론 이렇게 말해야 앞뒤가 들어맞겠지. 그렇지 않으면 분명히 누군가가 이들을 의심할 거야. 왜 이 시간에 궁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느냐고.
역시 장강주야. 조당에서는 거침없이 욕을 내뱉더니, 궁문 앞에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네.
“마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다른 대신들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후에게 물었다. 황후가 깊이 심호흡하고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고능준과 진소가 태자를 음해하고, 궁문을 폐쇄했소. 태후마마께서 아직 그 두 사람에게 붙잡혀 있으니, 어서 서두르시오.”
황후가 울음을 터트렸다.
“태후마마를 지켜야 하오!”
문이 닫히는 쾅 소리에 화들짝 놀란 황씨가 잠에서 깼다. 잠결에 옆을 만져보자, 역시나 범강림은 옆에 없었다.
“여보.”
황씨가 서둘러 범강림을 부르면서 침상에서 내려왔다. 문을 열자, 범강림이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우리가 거처를 군감사로 옮겼는데도, 또 누가 와서 난리를 피우는 건가?
황씨가 범강림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서 새카만 밤하늘 위로 폭죽의 불꽃이 팡팡 터졌다.
“세상에나, 누가 이렇게 늦은 시간에 불꽃놀이를 한대요?”
드디어 왔구나.
범강림은 불안한 표정으로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는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같은 시각, 이무도 이씨 저택 마당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무가 고개를 돌리자, 불안에 떨고 있는 아내가 보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땅굴로 피신해 있으라고 하지 않았소. 어서 가시오.”
이무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예요? 대인도 같이 가요.”
아내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아마 괜찮을 거요.”
이무가 조용히 말하고는 웃었다.
“만일을 대비하는 것이오. 우리 이씨 가문의 폭죽이 워낙 대단하잖소. 저들이 나를 조사하러 온다 해도, 예상치 못한 사고라고 하면 될 일이오.”
이무가 아내의 어깨를 다정하게 다독였다.
“어서 가시오. 난 경성이 혼란스러워지는 게 걱정될 뿐이오.”
아내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를 떠났다.
이무는 다시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과 나눈 대화가 귓가에 울렸다.
“스승님, 제가 처음으로 스승님의 불꽃놀이를 봤을 때 했던 생각이 있습니다. 폭죽의 방향이 위로 향하지 않고 직사를 한다면, 돌포탄과 비슷한 위력을 가지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쪽 집안에서 만든 두더지 폭죽처럼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 그렇지. 두더지 폭죽도 땅에서 빙빙 돌면서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폭죽이었어.
정교랑의 말 한마디에, 이무가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물었다.
“그럼, 정말로 그런 게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당연히 있죠. 폭죽에 유황석회를 추가하면 돼요. 다만, 폭죽의 이름은 두더지가 아니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이무가 호기심과 흥분이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짓고 무언가를 던지는 손짓을 하며 말했다.
“진천뢰(震天雷).”
정교랑이 또 웃으면서 물었다.
“진천뢰의 위력을 직접 보고 싶지 않나요?”
이무가 하늘에서 차츰 사라져 가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높이는 충분한 것 같은데, 직사할 때 어떤 모습인지 보지 못한 게 정말로 아쉽네.”
이무가 중얼거렸다.
궁문 위를 수놓은 불꽃은 궁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였다. 팡팡 터지는 불꽃이 사색이 된 고능준의 얼굴을 비추었다.
“마마, 마마.”
금위군 병사들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황후는?”
고능준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인, 황후마마께서 폭죽으로 궁문을 뚫, 뚫고 나가셨습니다. 그 때문에 어가에 있는 전전사(殿前司) 시위들이 움직였고, 조정 대신들도 몰려왔습니다. 소인들은 궁문을 닫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고요.”
금위군 병사가 말했다.
폭죽?
“폭죽 따위로 어찌 궁문을 뚫는단 말이냐!”
격노한 고능준이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소인들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아무튼 엄청난 위력을 가진 폭죽이었습니다. 땅바닥 여기저기로 어지러이 흩어지며, 불도 붙고 폭발도 있었습니다.”
금위군 병사의 얼굴을 보아하니, 아직도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했다.
폭죽이라…….
고능준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매복 때도 폭발이 있는 무기를 썼다고 했어. 그 여인은 이미 모든 것을 예상하고 준비해 놓았던 것이 분명해.
고능준의 눈가에 불안이 스쳤다.
그렇게 일찍이 모든 것을 준비했다는 거야? 전전사 시위들을 동원하고, 조정 대신들까지 움직일 정도로?
조정 대신들은 죄다 여우같이 교활한 놈들뿐이라 황실에 무슨 일이 났다고 하면 다들 숨기 바쁠 텐데, 어쩌다가 다들 이렇게 궁문 앞까지 몰려온 거지?
고능준이 고개를 홱 돌리고 안쪽을 바라보았다.
“궁문이 닫혔으니, 그놈들이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할 게다. 천 명 가까이 되는 황성사의 금위군 병력이 문을 지키고 있으니, 금군 병사들이라 해도 궁 안으로 쳐들어오지는 못할 것이야. 금군 병사를 움직이는 게 그리 쉬운 일도 아닐 테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신경 쓸 것 없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고능준이 이를 부득 갈고 손으로 정교랑을 가리켰다.
“태자를 음해한 저 여인을 잡아라!”
줄곧 침묵을 지키던 진소가 천천히 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황후와 대신들은 분명히 진 대인과 내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고 말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는 것보다는, 명이 내리기도 전에 급작스레 경성으로 돌아온 진안 군왕비가 태자 전하를 음해했다는 말이 더 신빙성 있겠지요.”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급작스럽게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저 여인이 불순한 저의를 품었다는 의심을 받기엔 충분해. 그러니 저 여인이 아직 궁에 있는 틈을 타 당장 저 여인을 죽여버려야지. 그리고 모든 죄를 저 여인에게 전부 뒤집어씌워야 해.
“뭣들 하느냐, 죽여라.”
고능준이 전각 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문가에 서 있던 금위군 병사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안쪽으로 들이닥쳤다.
금위군 병사들이 안으로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내시와 궁녀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그러더니 곧 안쪽에서 병사들이 바깥으로 내던져졌다.
깜짝 놀란 고능준이 시위들의 호위를 받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유유히 걸어 나오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고 대인, 당신의 아들 고십사가 죽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갑옷을 입은 금위군 병사들이 고능준을 엄호하며 정교랑을 향해 도끼를 쥐어 들었다. 병사들은 정교랑의 기세에 압도된 건지, 고능준의 대답을 기다리는 건지,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저 여인의 짓이었어.
고능준의 얼굴은 잿빛이 되었다.
“그건 정 낭자가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걸 알려 주려는 게 아니에요. 고십사를 죽인 건 나고, 나 혼자서 죽인 거라는 걸 알려 주려는 거죠.”
정교랑은 손가락 하나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나 혼자서, 고십사와 나머지 열일곱 명을 죽였어요. 한 놈당 하나씩, 총 열여덟 개의 무기로요. 고십사는 내 표창에 맞아 죽었죠. 표창이 목을 관통했거든요.”
정교랑이 말하자, 고능준은 눈앞에 아들이 죽는 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듯했다. 고능준의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정 낭자, 이러면 안 됩니다. 우리는 이러면 안 됐어요.”
고능준이 말했다.
“네, 고 대인. 우리는 이러면 안 됐죠. 당신이 이러면 안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두 사람은 같은 말을 하는 듯했지만, 두 사람이 내포한 의미는 확연하게 달랐다.
“죽여라.”
고능준이 손짓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금위군 병사들이 정교랑을 향해 일제히 달려들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병사들을 피하기는커녕, 고능준을 향해 돌진했다.
“고 대인, 나 혼자서 고십사를 포함한 열여덟 명을 죽였다고 분명히 말했어요. 날 죽이는 게, 생각만큼 그리 쉽지는 않을 겁니다.”
정교랑이 목청을 높여 소리쳤다.
정교랑은 맨손으로 금위 병사들의 도끼를 막아냈다. 그러고는 칠 척 장신의 사내 둘이서 힘을 실어 내리찍는 도끼를 한 손에 하나씩 붙잡고 고능준을 향해 돌진했다.
고능준의 안색이 급변했다.
저 여인은 지금 허풍을 떠는 게 아니야. 저 여인의 흉악무도함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증거가 있어.
고능준이 무의식적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금위군 병사들도 그를 따라 뒤로 밀려났다. 문가 앞에 작은 빈틈이 생기자, 정교랑은 몸을 홱 돌리며 포위망을 뚫고 밖으로 도망쳤다.
도망쳐?
저 뻔뻔스러운 년이!
고능준이 격노했다.
“화살과 쇠뇌를 써서 죽여라.”
태후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삼 대대 금위군 병사들이 활과 쇠뇌를 겨누었다. 다만 깊은 밤인지라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정교랑을 정확히 조준하지 못한 채로 화살을 쏠 수밖에 없었다.
정교랑은 나는 듯이 몸을 날려 눈 깜짝할 사이에 구중궁궐 사이로 자취를 감췄다.
“궁 안에 있는 한, 독 안에 든 쥐다. 쫓아라!”
“비빈들과 공주들의 처소도 샅샅이 뒤지거라!”
죽여야 해. 죽여야 한다고. 저년을 죽여야만, 모든 걸 되돌릴 수 있어.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고능준이 몸을 떨며 주먹을 세게 쥐었다. 늘 평온하던 고능준의 표정은 보기 흉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일찍이 저년을 죽였어야 오늘 같은 화를 보지 않는 건데!
밤하늘에 불꽃이 터질 때, 진호는 성문 위에 서서 여전히 자리를 뜨지 않은 진안 군왕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하, 청원 역참으로 가서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내일 마마께 청을 올리고 정정당당하게 경성으로 들어오시지요.”
진호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진호.”
주복이 말을 탄 채 제자리에서 한 바퀴 말을 돌렸다. 그러고는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진호가 고개를 숙이고 주복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언제든 성문을 열 수 있도록 네가 밤마다 성을 지키게 할 만한 일이지.”
주복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왜 그 여인을 홀로 경성으로 들여보낸 건데!”
“정 낭자는 무사할 테니까.”
진호는 담담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에게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다른 이도 같이 궁에 들어갔다가는, 무사하지 못할 수가 있거든.”
이를 악물고 또 무슨 말을 하려 고개를 들던 주복의 표정이 굳어졌다.
“관인, 보십시오!”
성문 위에 있던 위병이 밤하늘을 가리키며 외쳤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위병이 가리키는 쪽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화려한 불꽃이 밤하늘 위에 수놓아지고 있었다.
“전하!”
고 선생도 깜짝 놀라서 하늘을 가리켰다. 진안 군왕이 두모를 살짝 올리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참 예쁜 불꽃이네.”
횃불에 비친 진안 군왕의 창백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육가아, 잘 봐라. 저건 특별히 너를 위해서 준비한 불꽃놀이다.”
불꽃놀이를 보고 미소를 짓는 사람은 또 있었다. 진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내가 말했지? 걱정할 필요 없다고. 정 낭자는 무사해. 꼭 너만 정 낭자를 안 믿더라.”
진호가 성문 아래의 주복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불꽃이 하늘을 밝혔으니, 궁 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이 곧 온 경성에 퍼지겠군. 일찍이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던 조정 대신들에게 드디어 입궁할 구실이 생겼겠어.
그러니, 더는 궁에 무슨 일이 생겼다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간사한 자들이 무슨 짓을 꾸몄는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고, 정 낭자는 무사하겠지.
그러게 왜 정 낭자를 안 믿느냔 말이야.
부아가 치밀어 오른 주복이 고개를 들고 소리쳤다.
“진호, 당장 문 열어! 교랑이 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잊지 않았다면, 당장 이 문 열라고!”
주복이 활을 들고 진호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그러자 성문 위에 서 있던 위병들이 재빨리 진호를 보호하며 주복을 향해 활시위를 겨눴다.
“주복.”
진호가 웃음기를 거뒀다.
“나는 절대로 성문을 열 수 없어. 이건 정 낭자의 목숨을 위한 일이거든. 저들을 경성 안으로 들이는 순간, 정 낭자는 역모의 대죄를 일으킨 죄인이 되겠지.”
진호가 뒤에서 활을 꺼내더니 주복을 향해 화살을 조준했다.
“주복, 남들이 하는 거짓말에 현혹되지 마.”
“진호! 다리가 나으니까, 이제는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활시위를 놓았다. 화살 하나가 매서운 기세로 성문을 향해 날아갔다.
“공자님!”
진호 옆에 있던 수하가 재빨리 진호를 밀어냈다. 성벽을 넘은 화살이 바닥에 쓸리면서 작은 불씨를 만들었다.
주복이 화살을 쏘자, 성문 위에 있던 위병들도 일제히 활시위를 놓았다.
“물러나시오!”
위병들이 소리쳤다.
일순간 바닥에 먼지가 일면서 진안 군왕 일행의 앞으로 화살들이 가지런히 박혔다. 바닥에 꽂힌 채 흔들리는 화살들은 흡사 밤에 피는 꽃처럼 보였다.
주복과 진안 군왕 등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복, 네가 이러는 게 다 정 낭자를 위한 마음이라는 거, 나도 알아. 난 아니까 굳이 따지지 않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른단 말이지.”
진호는 주복에게 말하는 듯했지만, 그의 시선은 진안 군왕에게 향해 있었다.
“괜히 오해할라. 진안 군왕 전하께서 반역을 일으켜 경성을 치려는 속셈인 줄 알면 어떡하려고.”
주복이 뭐라 대꾸하려던 찰나, 줄곧 조용했던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오해라고 생각하게 둬서는 안 되지.”
진안 군왕이 허리춤의 향낭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그가 경 공공을 향해 다른 손을 뻗자,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동작과 거의 동시에 심지에 불을 붙였다.
치직 소리가 들려오고, 진안 군왕의 손에서 폭죽 하나가 하늘로 쏘아지며 아름다운 꽃구름을 만들어냈다.
“육가아.”
진안 군왕이 하늘에 핀 꽃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이건, 이 형이 특별히 너를 위해 준비한 거야. 이걸 이렇게 빨리 쓰게 될 줄은 몰랐네.”
차라리, 평생 쓰지 않기를 바랐는데.
진안 군왕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자, 커다란 두모가 그의 얼굴을 가렸다.
“시작하게.”
갑작스럽게 쏘아 올린 폭죽의 불꽃이 성문의 하늘 위로 펼쳐졌다. 성문 안팎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조금 전 황궁 방향에서 보이던 오색찬란하고 화려한 불꽃놀이에 비하면, 지금의 불꽃놀이는 초라해 보일 정도로 소박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느 불꽃놀이가 더 예쁜지 비교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진호의 표정이 급변했다.
“화살을 쏴라!”
진호가 소리쳤다.
성문의 위병들이 망설였다. 그중 한 명이 진호에게 다가와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진 관인, 저분은 진안 군왕이십니다.”
“반역을 도모하는 놈이다. 네놈 눈에는 진안 군왕이 성문을 부수고 쳐들어오려는 게 보이지 않느냐!”
성문을 부숴? 어떻게 부순다는 거지?
위병의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던 찰나였다. 성안에서 질주하는 말굽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성벽 위에서도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이쪽을 향해 모여드는 소리였다.
“늑대 새끼는 거둬 키우는 게 아니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았군. 저 늑대 새끼가 일찍이 황성 방위군에도 사람을 심어뒀었다니!”
진호가 냉소를 보였다. 그가 두려운 기색도 없이 호통쳤다.
“어서 전전사 송 대인께 알리거라. 경성의 수비가 얼마나 삼엄한지 저 역당들에게 똑똑히 알려줘야겠다. 네놈들이 성문을 부순다 한들, 성안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들이지 못할 것이다!”
시종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성문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성문의 위병들도 더는 주저하지 않고 아래를 향해 화살을 쏘았다. 하지만 그들이 잠시 주저하는 사이에, 성문 앞까지 바짝 다가온 진안 군왕 일행은 쏟아지는 화살들을 모두 피했다.
진안 군왕 일행은 성문에 바짝 붙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전하께서…….”
주복이 먼저 정적을 깨트렸다. 고 선생과 경 공공이 그를 쳐다보았다.
“전하께서 이 성문을 부술 수 있으시다면, 제가 황궁까지 가는 길을 호송해 드리겠습니다.”
주복이 말했다.
호송해 주겠다고?
고 선생 등이 놀란 눈으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성문 앞으로 몸을 바짝 붙이던 순간, 진안 군왕 일행은 재빨리 손에 든 횃불을 껐다. 시야가 어둑해지긴 했지만, 경 공공과 고 선생은 주복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의 경악한 표정을 똑똑히 보였다.
저 병사들은 아무것도 모르나 보군. 아마 알고 싶지도 않을 거야. 재수 옴 붙었다며 속으로 얼마나 욕하고 있을지 안 봐도 뻔해. 저놈들은 성문이 부서지자마자, 전하를 호송하기는커녕 가장 먼저 도망칠 놈들이야. 아니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이 상황을 역적을 체포했다는 공으로 바꾸려 들지도 몰라.
고 선생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주복은 갑옷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고, 사람들은 주복의 손에 들린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피슝 소리가 들리고, 하늘에서 또 한 번의 불꽃놀이가 펼쳐졌다.
“또 불꽃놀이가 보입니다!”
성문 위에 있던 사람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소리쳤다.
“오늘 도대체 무슨 날이야?”
정월 대보름도 아니고, 중추절 꽃등 놀이도 아닌데, 왜 이리 불꽃놀이가 끊이질 않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