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9화 (149/160)

-야변(夜變)-

“나리, 어젯밤에 갑자기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하인 한 명이 겁먹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하자, 장수가 그의 말을 끊고 호통쳤다.

“불이 나? 그런 우연이 있단 말이냐? 하필 어젯밤에 불이 났다고?”

장수가 눈을 부릅뜨고 하인을 향해 윽박질렀다.

“바른대로 고하거라! 네놈들이 일부러 불을 지른 게 아니더냐!”

하인들은 억울하다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엄히 조사하라! 하필 어젯밤에 불이 났다는 것이 참으로 수상쩍구나!”

장수가 병졸들을 향해 소리치자, 하인이 놀란 눈으로 장수를 쳐다보았다.

“나리, 나리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하인이 감격스러워하면서 눈치도 없이 말을 덧붙였다.

“저희도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분명 며칠 전에 큰비가 내려서 건조한 날씨도 아니었거든요. 그런데 왜 갑자기 불이 났을까요?”

하인은 장수를 향해 연신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부디 나리께서 잘 좀 조사해 주십시오. 방 두 개가 불에 타버렸고, 귀중한 물건들을 두었던 고방도 다 타 버렸습니다.”

“조사하기는 개뿔!”

따귀를 후려치는 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한 사내가 장수의 얼굴을 매섭게 내리쳤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따귀를 맞은 장수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썩 꺼지거라!”

장수는 아픈 뺨을 매만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서둘러 밖으로 물러났다. 대청 안에 서 있던 사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말이냐?”

“예. 화약이나 탄약을 만든 흔적 따위는 일절 없었습니다.”

누군가가 대답했다.

“대인, 군감에서도 분실된 물품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였습니다. 정 낭자가 직접 만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범강림이나 이무 모두, 다 정 낭자의 가르침으로 그 무기들을 만들어 낸 거잖습니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나도 안다. 범강림과 이무가 정 낭자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잘 알고 있어. 내가 알고 싶은 건, 지금 정 낭자의 손에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이며, 그게 얼마나 더 있는지다.

보아하니 경성에서는 조사할 만한 게 없는 것 같군. 너희들은 청원 역참을 더욱 예의주시하거라.”

사내의 말에 다들 알겠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대인, 그럼 고 관인의 일은 일단 조사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한 사람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당분간만이다. 지금은 내일모레 거행될 태자의 국혼이 무엇보다 중요해.”

사내가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고 대인이 경성에 오래도록 머무를 구실이 만들어진 셈이군요. 고 노부인께서 앓아누우신 데다가, 이젠 본인까지 병들었으니, 더더욱 경성을 떠나기가 힘들겠습니다.”

진(陳)씨 저택 안에서 한 막료가 말했다. 그러나 진소는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정신이 딴 데 가 있는 듯했다.

진소는 내일모레 있을 국혼 준비를 마치고, 오후에 궁에서 돌아온 뒤로 계속 이와 같은 모습이었다.

내일모레 있을 태자의 국혼이 무엇 때문에 성사되었는지,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는 차치하더라도, 어쨌거나 딸자식이 출가하게 되었으니 대인께서도 마음이 심란하시겠지.

“대인, 시간이 늦었으니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막료들이 말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가는 막료들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진소는 몸을 일으켜 후원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국혼을 위한 화려한 장식들이 하나둘씩 걸리기 시작했다. 경사스러운 장식품 때문에 어스름한 초저녁의 마당이 한층 더 알록달록해 보였다.

진소가 나오자, 하인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길을 비켰다. 진소는 안팎으로 등불이 환하게 밝혀진 후원의 문 앞까지 다가갔다가, 돌연 걸음을 멈췄다.

진단랑의 혼사를 결정한 뒤로, 진소 부인은 진소가 후원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머니, 어머니, 이렇게 입는 건 어때요? 예뻐요?”

진단랑의 맑은 목소리가 후원에서 들려왔다.

진소가 정신을 퍼뜩 차리고 안쪽을 들여다보자, 대청 안에서 붉은 혼례복을 입은 진단랑이 몸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그런데 제가 입으니까, 정 언니가 입었을 때처럼 예쁘진 않은 거 같아요.”

“어머, 아씨, 농담하시는 거죠? 아씨께서 입으신 건 태자비의 옷과 장신구들이에요. 정 낭자가 입은 건 군왕비의…….”

대청 안에서 여종들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진소가 돌아서서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어머니, 왜 우시는 거예요?”

“이 어미는 기뻐서 그러지.”

등 뒤로 들려오는 대화를 더는 들을 수 없었던 진소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황궁 안. 태후궁의 침전은 등불이 환하게 밝혀지고 시끌벅적했다.

“육가아, 육가아. 이리 와서 앉아 보렴, 어서.”

태후가 말했다. 하지만 태자는 태후의 말이 전혀 들리지 않는 듯, 해맑게 웃는 얼굴로 괴성을 내지르며 기둥을 붙잡고 있었다.

“마마, 그만 부르시지요. 전하께서는 알아듣지 못하십니다.”

태후의 측근 내시가 말하고는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손을 들었다.

“어서 가서 태자 전하를 앉혀 드리거라. 밤새 뛰어다니셨으니 조금 쉬셔야지.”

내시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태자에게 우르르 몰려가 그를 힘으로 눌러 자리에 앉혔다. 전각 안에 태자의 짜증 섞인 괴성이 울려 퍼졌다.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태자의 국혼이니 어찌 됐든 태자가 직접 나서긴 해야 할 텐데, 지금 저 꼴 좀 봐라. 저래서야 태자를 어찌 붙잡고 있겠느냐?”

태후의 말에 내시가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전하께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저렇게 난리를 피우신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태자의 괴성에 심란해진 태후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탕약을 먹이지 않았더냐? 그 탕약이나 좀 가져다 먹이거라.”

태후의 물음에 내시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태의가 그 탕약은 너무 많이 쓰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태후가 언짢은 기색으로 내시를 노려보았다.

“딱 요 며칠만 쓰자는 거지. 국혼을 치르는데 체통은 지켜야 할 것 아니냐.”

태후의 말에 내시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럼, 오늘 밤에도 시침을 명할까요?”

내시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내시 서너 명이 붙었는데도 태자 하나를 제대로 붙잡고 있지 못하자, 태후가 태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넘치는 힘을 뒀다 어디에 쓰려고?”

내시가 태후의 뜻을 이해하고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만 가 보거라. 하루 종일 저렇게 난리를 피웠는데, 일찍 재워야지.”

태후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 태자를 질질 끌며 밖으로 나갔다.

어두운 밤이었다. 태자의 궁에서 여인의 짤막한 신음이 들려오더니, 곧 다시 조용해졌다.

바깥에 서 있던 내시가 하품을 했다.

“오늘은 그래도 좀 길었네.”

맞은편에 서 있던 내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얼굴이 발그레해진 여인이 옷을 반쯤 걸치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우(于) 낭자, 보아하니 장차 황태손의 생모가 될 사람은 바로 낭자겠습니다.”

내시들이 예를 표하면서 웃었다. 여인이 득의양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황태손의 모친은 황후마마신걸요.”

“우 낭자도 피곤할 텐데, 그냥 여기서 쉬는 건 어떻겠습니까? 귀찮게 왔다 갔다 할 필요도 없고요.”

내시들이 말했다.

여인의 눈가에 경멸의 눈빛이 스쳤다.

저런 바보랑 같이 자고 싶은 사람이 어딨어? 저리 더러운 냄새까지 풍기는데.

“아니에요. 소인이 어찌 감히 태자 전하와 한 침상을 쓸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나풀거리는 걸음걸이로 자리를 떠났다.

내시들이 막 잠을 자러 들어가려던 그때, 안쪽에서 태자의 괴성이 다시 들려왔다.

“아이고, 왜 또 저러시는지.”

한 내시가 말했다.

“그냥 탕약을 먹여 버리자고.”

다른 내시가 말했다.

내시들이 탕약을 먹이자, 태자는 금세 조용해졌다. 내시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지러운 침상 위를 바라보던 내시가 침상을 정리하려고 손을 뻗자, 다른 내시가 그를 제지했다.

“치우다가 괜히 잠에서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더러워도 그냥 내버려 두게. 누가 이런 걸 신경이나 쓰겠어? 내일 아침에 한꺼번에 정리하면 되는걸.”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거뒀다. 내시들은 방을 나가기 전, 숙면에 도움이 된다는 향을 피운 다음 휘장을 내리고 밖으로 나갔다.

야간 당직을 서는 내시를 제외한 나머지 내시들이 모두 태자궁을 빠져나왔다.

한 내시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말했다.

“내일은 날씨가 좋겠군.”

가을밤이 점점 더 어두워지자, 역참이 고요해졌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요 며칠은 날씨가 좋네요. 사천대가 쓸모 있을 때도 있다니 놀랍군요. 적어도 국혼을 치를 때만큼은 비가 내리지 않겠어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는 다 각자의 재능이 있으니까요.”

“당신 같은 천재의 눈에는, 다른 사람들이 다 평범해 보일 줄 알았는데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 또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 불과해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별빛에 비친 정교랑의 미소가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참, 잠깐만 기다려요.”

진안 군왕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아래층으로 내려가려 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딜 가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당직을 서던 내시들에게 뭐라고 귓속말을 했다. 내시들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어디론가 사라졌다.

“부인, 바람이 차요.”

반근이 두봉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서 반근이 들고 나온 두봉을 어깨에 걸쳤다. 정교랑이 다시 몸을 돌릴 때쯤, 진안 군왕이 마당 안에 서서 정교랑을 향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잘 봐요.”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어린 내시 두 명이 폭죽 두 개에 불을 붙였다.

하늘에서 펑펑 소리를 내며 불꽃이 터지더니, 오색빛깔의 구름 두 점이 역참의 하늘을 밝혔다. 앞쪽 마당에서 사람들이 환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 선생이 창가에서 시선을 거두고 입술을 삐죽였다.

“허구한 날 저런 것에만 신경 쓰시지.”

고 선생이 나지막이 투덜거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경성에서 전해 온 소식들을 읽었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때요? 예뻐요? 우리가 혼례를 올리던 날에 비하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향해 묻자, 정교랑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순간, 정교랑의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니 곧 온몸에 힘이 빠진 듯 난간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반근이 재빨리 다가가 정교랑을 부축했다.

“부인, 왜 그러세요?”

마당에 서 있던 진안 군왕도 이상한 낌새를 감지했는지, 의아하다는 얼굴로 위층으로 올라왔다.

불꽃이 사라지던 그 순간, 정교랑의 경악한 표정이 불빛에 비쳤다.

“오성취두우(五星聚斗牛: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다섯 개의 별이 북두성과 견우성 자리에 모이는 천상).”

정교랑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오성취두우라니.”

“정방?”

진안 군왕이 위층에 올라와서 정교랑을 부르자마자, 정교랑은 몸을 홱 돌려 진안 군왕을 향해 돌진했다. 진안 군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자신을 잡은 진안 군왕의 팔을 덥석 붙잡고 말했다.

“방백종, 지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 해요.”

지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진안 군왕이 놀란 표정으로 정교랑의 진지한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꽈당 하는 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트렸다.

휘장을 걷고 침상 위로 시선을 옮기던 내시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옆에 있던 의자를 쓰러트렸다. 내시는 엉덩이가 아픈 줄도 모른 채, 몸을 덜덜 떨며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침상 위에 누운 태자는 두 눈을 찢어질 듯 크게 뜬 채, 입과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내시가 소리를 내질렀다.

“밖에 아무도 없느냐! 어서 사람을 불러오너라! 어서!”

“무슨 일이 생겼느냐?”

황후가 몸을 벌떡 일으키고 침상 옆에 무릎을 꿇어앉은 내시를 바라보았다. 등불에 비친 내시의 표정이 어두웠다.

“태의들이 모두 그리로 갔습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태자더냐, 태후더냐?”

황후의 물음에 내시가 고개를 저었다.

“태후의 침전은 경계가 삼엄하여, 저희 쪽 사람이 발을 들일 수 없습니다.”

내시가 불안한 눈빛으로 말했다.

황후가 침상에서 내려와 칠흑같이 어두운 밖을 내다보았다.

밤바람이 황궁 안에 휘몰아쳤다.

태후의 침궁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수십 개의 초가 켜져 있어 실내는 대낮보다 더 밝았지만, 촛불이 가을밤의 스산함까지 없앨 수는 없었다. 사람들의 안색은 도리어 점점 창백해졌다.

“태의, 태자의 상태는 어떠하던가?”

머리도 묶지 못하고 달려온 태후가 다급하게 물었다.

안쪽에는 일고여덟 명의 태의가 진땀을 빼고 있었다. 그중 한 태의가 이마의 땀을 닦으며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마마,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신 등의 힘으로는 태자 전하의 병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태의의 말을 들은 태후는 갑자기 머리가 핑 돌고 눈앞이 캄캄해지며 귀가 웅웅 울렸다. 곧 태후의 몸이 휘청이더니, 뒤에 있던 궁녀들의 품으로 쓰러졌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냐! 하루에 세 번씩 태자의 상태를 살피면서도 태자는 멀쩡하며 건강하다고 했잖아! 어째서 갑자기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게야!”

태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치자, 태의들이 일제히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다들 입이 있어도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고개를 숙였다.

“이들이 태자 전하께 무엇을 먹였는지부터 물어봐야 합니다.”

한 태의가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서 있던 내시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마마, 소인들이 어찌 태자 전하께 아무 음식이나 올리겠습니까. 전하께서 드시고 마신 음식은 모두 태의의 허락을 받은 것들이옵니다.”

내시들이 머리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책임을 전가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괘씸한 놈들. 참으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들이로구나!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가, 궁녀들을 밀쳐내고 몸을 휘청이며 침상으로 다가갔다. 창백한 얼굴의 태자가 침상 위에 누워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과 코에서 흘러나온 피는 모두 닦아냈지만, 베개와 이불에는 아직 혈흔이 그대로 묻어 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태자의 육중한 몸은 끊임없이 경련을 일으켰다. 금방이라도 숨이 멎을 듯한 모습이었다.

가망이 없어. 끝났구나.

태후의 얼굴이 점점 더 굳어졌다. 태후는 발밑이 허공에 붕 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이가 지긋한 태후는 태자의 상태만 흘깃 보았는데도 그가 곧 죽을 거라는 직감이 왔다. 태후가 힘없이 침상 옆으로 주저앉았다.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면 좋아?

태후가 얼굴을 두 손에 묻고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마마, 마마, 어서 고 대인을 부르시지요.”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고 대인을 궁으로 들인다면, 태자 전하의 상태를 더는 숨길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내시가 겁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이 새벽에 굳게 잠겨 있던 황궁의 문을 열어 고능준을 불러들인다는 것은, 아무리 신속하게, 그리고 은밀히 이루어진다 해도 그 의미가 뻔한 일이었다.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태자가 이 지경이 되었는데 어떻게 숨길 수 있다는 게냐!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일이니, 다른 사람보다는 고 대인에게 먼저 알려야겠다.”

태후가 호통쳤다.

조정 대신들은 하나같이 태후를 늙은 할망구로 여기고 무시했다. 지금 태후가 기댈 곳은 친정 사람뿐이었다.

“어서, 어서 고 대인을 모셔 오게.”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황궁의 문이 열리고, 내시 몇 명이 말을 타고 황궁을 빠져나왔다. 말굽 소리가 고요한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자, 어둠 속에서 무수히 많은 시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자의 침궁 안.

황궁 문이 열렸다는 소식을 가장 먼저 알게 된 황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의자에 앉았다.

“고 대인 댁의 방향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태후마마께서 교지를 내리셨습니다. 태후마마의 전갈이 없는 한 아무도 황궁으로 들어오거나 나가지 못하며, 명을 어길 시에는 그 자리에서 즉살하라는 교지입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의 생사는?”

황후가 묻자, 내시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 문밖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안비마마.”

내시와 궁녀들이 고개를 숙이고 뛰어 들어오는 사람을 조용히 제지했다.

황후가 가볍게 고개를 젓자, 내시와 궁녀들이 길을 비켰다.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못한 안비가 두 손에 보따리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안비가 겁에 질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 무슨 일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신첩이 마마를 지켜드리려고 달려왔어요.”

황후는 안비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여봐라, 본궁의 황후 조복과 인장을 가져오너라.”

내시와 궁녀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같은 시각, 마당에 서 있는 내시들을 본 고능준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대인, 어서 궁으로 드시지요.”

내시들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새카만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자다 일어난 고능준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밤바람에 흩날렸다.

하늘이시여, 어찌 이렇게 무정할 수가 있습니까!

고능준은 깊은 심호흡을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소식을 듣고 잠시 흐릿해졌던 고능준의 눈빛이 다시 반짝이기 시작했다.

“당장 진 상공에게 알리거라.”

고능준의 말에 내시들이 흠칫 놀라면서 되물었다.

“진 상공이요?”

지금 이 일을 진 상공에게 알리겠다고?

“하지만 태후마마께서…….”

내시들이 불안해하며 말끝을 흐리자, 고능준이 단호하게 말했다.

“마마께서는 지금 너무 놀라 경황이 없으신 것이다. 그렇다고 측근에서 마마를 보필하는 자네들까지 덩달아 행동하면 어쩌자는 게야?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 보정 대신을 부르지 않으면, 나중에 사람들이 마마를 어찌 생각하겠어?”

멈칫하던 내시들이 고능준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럼 진 상공께는 뭐라고 하면 좋겠습니까?”

내시가 복잡한 표정으로 조용히 물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면, 진 상공은 절대로 새벽에 입궁할 사람이 아닌데.

“사실대로 말해야지. 보정 대신에게 숨길 게 뭐 있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던 고능준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더구나, 진 상공이 남도 아니고.”

공주부 진(秦)씨 가문의 서재 안.

등불이 밝혀졌다. 진 시강과 진호가 내의 차림으로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소식을 들어 보니, 지금 고능준이 입궁했다고 한다. 그리고 내시들이 진 상공 댁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진 시강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태후께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아니면, 태자한테?”

진호가 물었다.

“태자 쪽이다.”

진 시강이 대답했다. 진호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십삼, 황궁의 문은 경비가 삼엄해서 태후의 전갈이 없는 한 들어갈 수 없다. 지금 섣불리 행동해서는 안 돼.”

진 시강이 다급하게 말했다.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지금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 저희가 해야 할 일은, 황궁 바깥의 일입니다.”

진 시강이 흠칫 놀랐다.

“벌써 사람이 도착했느냐?”

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 경성 밖까지 도착했다고 합니다. 이 와중에 천만다행이지요.”

진 시강이 천천히 긴 한숨을 뱉어냈다.

“가 보거라. 이쪽의 일은 내가 처리할 테니.”

진호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금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진 상공의 저택 안.

내시들이 조용히 마당에 서 있었다. 태자의 위험을 알리자, 마당 안에 정적이 흘렀다.

설마 충격이 너무 커서 혼절하는 건 아니겠지?

“진 대인, 서두르셔야 합니다.”

참다못한 내시들이 말했다. 내시들의 재촉을 듣자, 진소의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자네들이 나온 지 얼마나 됐지?”

진소가 갑자기 물었다.

“곧 반 시진이 되어갑니다.”

내시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무언가 알아차린 듯, 진소의 눈빛이 냉랭해졌다. 뒤늦게 대답을 잘못했다는 것을 감지한 내시는 불안에 떨기 시작했다.

큰일 났군. 우리의 속셈을 알아챘어!

눈치챈 모양이야. 태후가 직접 전갈을 보낸 게 아니라, 고 대인이 물귀신처럼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것을!

이를 어쩌지?

내시가 불안에 떨던 사이, 진소가 걸음을 옮겼다.

“가세.”

내시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멈칫했다.

고 대인이 자신을 끌어들였다는 사실을 알고도 가겠다는 건가?

“노야.”

마당에서 진소 부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소가 걸음을 멈췄다.

근래에 저 말을 통 듣지 못했는데, 이렇게 걱정 섞인 목소리로 부르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로구나.

진소가 고개를 돌리자, 진소 부인이 잰걸음으로 다가왔다.

“가시면 안 돼요. 조상님들의 일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진소 부인이 진소의 팔을 붙잡고 눈물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제위가 바뀌고, 강산이 바뀔 때마다, 조정에는 보이지 않는 암투가 벌어졌다. 그 일에 휘말렸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조정 대신들의 수는 수없이 많았다.

“오늘의 일은, 나 때문이기도 하오.”

진소가 부인의 손을 다정하게 다독이며 쓴웃음을 지었다.

“군자가 되어서, 어찌 위험을 두려워하겠소?”

말을 끝낸 진소가 곧바로 몸을 돌렸다.

“노야.”

진소 부인이 다시 진소의 소매를 붙잡았다. 진소가 고개를 돌렸다.

“이번 생은, 내가 당신과 단랑에게 무척이나 큰 빚을 지었소.”

진소가 부인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하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진소 부인은 내시들과 함께 멀어져가는 진소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말굽 소리가 야밤의 정적을 깨트리자, 길가의 나무 위에 있던 새들이 놀라 다른 곳으로 날아갔다.

“왜 갑자기 경성으로 돌아가시는 거지?”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흔들리는 마차 때문에 고 선생의 목소리가 떨렸다.

“경성은 호랑이 굴이나 다름없어. 낮에는 절대로 돌아가면 안 된다고 해놓고, 이 새벽에 왜 갑자기 돌아가야 한다고 하시는 걸까? 게다가 이 몇 명만 데리고?”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이 새벽에 경성으로 돌아가면서 그 많은 금군 병사들을 죄다 데리고 가는 게 적절하다고 생각하십니까?”

경 공공이 반문했다.

그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역모죄로 붙잡혀 현장에서 즉살을 당한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고 선생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분명히 경성에 무슨 일이 생긴 게야.”

고 선생이 문득 멈칫하고는, 가장 앞에서 말을 타고 질주하는 여인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말을 타고 달리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마차와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어떻게 아신 거지?”

황궁 문 앞에서 마차를 세운 진소가 마차에서 내렸다. 밤이 드리운 황궁은 몹시 어둑해 보였고, 그 속에서 점처럼 빛나는 등불들은 괴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진소가 황궁 문 앞을 곁눈질로 훑어보았다. 평소보다 훨씬 많은 수의 금위군 병사들이 문을 지키고 있었고, 다들 서늘한 빛을 내뿜는 무기를 꺼내 들고 있었다.

진소는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내시가 안내해 주는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로 호랑이 입 같은 커다란 궁문이 천천히 닫혔다.

진소가 태후의 침궁 안에 들어서자, 미리 도착해 있던 고능준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진소가 물었다.

“태자 전하의 병세가 위태롭소이다.”

고능준이 말했다.

* * *

작가의 말:

진안 군왕의 봉호는 복주(福州) 진안입니다. 복주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땅에 있으므로 진안 군왕은 두우 자리인 셈입니다. 그래서 정교랑이 본 천상, 즉 다섯 개의 별이 두우 자리에 모인 것은 제성(帝星)이 완전히 자리 잡았음을 뜻합니다.

지난번에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는 천상에서, 자미원(紫微垣) 별자리는 황제궁을, 북극성은 왕후의 침궁을, 구진육성(勾陳六星)은 왕비궁을 뜻했습니다. 따라서 태백성이 나타났을 때, 객성이 구진 자리에 나타났기 때문에 귀비는 안비가 하늘이 점지한 천자를 잉태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이 급해졌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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