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것밖에-
청원 역참 안. 밤바람이 불어오자 회랑 아래 걸려 있던 등롱들이 흔들거렸다.
“전하, 전하.”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 나왔다.
“이 소식들을 부인께도 알려 드리는 건 어떻겠습니까? 부인께서 어떤 생각을 하실지 여쭤보는 게 좋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선생이 기뻐하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경성에 남겨 둔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지만, 다들 요직에 배치해뒀습니다. 이번 일로 혼란한 틈을 타 몇 명 더 꽂아 넣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멀리 가더라도 태자 전하와 관련된 소식을 전하께서 더 빨리 아실 수 있을 테지요. 원래 이 일들은 부인께 말씀드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으로서는 부인께서 아시는 게 많을수록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떠들어대던 고 선생은 자신의 앞에 있어야 할 진안 군왕이 없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 선생이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흔들리는 등롱 때문에 제자리에 멈춰 서 있던 진안 군왕의 표정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전하?”
고 선생이 서둘러 자리로 돌아가 진안 군왕을 불렀다.
“뭐 하러 가는 겐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가서, 왕비를 뵈어야지요.”
고 선생이 당연한 걸 묻냐는 표정으로 말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왕비 전하께 경성의 반응과 우리 사람들의 배치에 대해서 말씀드려야 한다고요.”
진안 군왕이 고 선생을 빤히 바라보았다.
“천하에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 고 선생 하나뿐이던가?”
고 선생이 멈칫했다.
무슨 뜻이지?
옆에 서 있던 경 공공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향해 말했다.
“전하, 어서 가서 쉬시지요. 잠을 못 주무신 지 너무 오래되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엇?”
고 선생이 재빨리 진안 군왕을 따라가려고 하자, 경 공공이 그를 제지했다.
“하룻밤하고도 반나절 내내 이야기를 했는데, 아직도 할 이야기가 남았습니까? 나머지는 전하께 맡기시지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콧방귀를 뀌었다.
“두 분이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안 하실까 걱정되어 그러지.”
하늘빛이 점점 더 어두워질수록, 역참 안은 차츰 조용해져 갔다. 달빛이 밝아 별은 드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위층 회랑 아래 정교랑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가을의 밤바람은 서늘했다. 정교랑이 걸치고 있던 붉은색 두봉이 가을바람에 휘날리자, 달빛을 길 삼아 바람을 타고 떠나려는 신선처럼 보였다.
“뭘 보고 있어요?”
진안 군왕이 위층으로 올라가 물었다. 정교랑이 대답하기 전에, 진안 군왕이 또 물었다.
“식사는 좀 했고요? 잠은 좀 잤어요? 여기 잠자리가 불편하지는 않아요?”
그는 정교랑의 대답을 원하고 물은 것이 아니었다. 이는 관심의 표현이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고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하늘을 보고 있었어요.”
하늘?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갔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새까만 하늘 위에 별들이 보석처럼 콕콕 박혀 있었다.
“밥은 한 그릇 먹었고, 목욕한 뒤에는 잠시 눈을 좀 붙였어요. 이부자리는 다 내가 가져온 거라, 불편하지 않았고요.”
정교랑이 진지하게 진안 군왕의 질문에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품에 안고 말했다.
“나도요. 나도 한 그릇 먹었어요. 처소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사람들이 대화하는 틈을 타 몰래 졸기도 했죠.”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아 참, 소식이 그새 경성까지 닿아서, 경성 사람들이 난리도 아니래요. 이것도 당신이 준비해 뒀던 건가요?”
진안 군왕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진안 군왕이 놀란 기색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얼마 전부터 전해진 마적이 나타난다는 소문은 고씨 가문에서 만든 거예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고능준의 수법이라면, 그리 치밀할 법도 하지.
“그리고 그 뒤의 일은 진호가 처리했을 거예요. 죽은 건 우리가 아니지만, 어쨌든 죽은 사람이 있잖아요. 모든 건 계획에 따라 진행됐어요. 다만 누군가가 결정적인 시기에 활시위를 당겨 일이 계획대로 착착 진행되게끔 도왔어야 했죠. 그러니까 사실 따지고 보면, 다 고씨 가문이 계획을 잘 짜둔 덕을 본 셈이에요.”
계획을 짠 사람에게 있어서는, 이게 바로 제일 환장할 노릇이겠지.
진안 군왕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참을 웃던 진안 군왕이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조금 전에 누구라고 했어요?”
진안 군왕이 뭔가를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상한 이름을 하나 들은 거 같은데?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진호. 진 시강의 아들이자 진씨 가문 열셋째 공자요.”
아니, 아니. 진호가 누군지는 나도 당연히 알지.
“아니, 내 말은, 진호가 그랬다고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거기서 진호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지? 이 일이 그 사람이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
“어젯밤에 당신 혼자 간 게 아니었어요?”
진안 군왕이 재차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연히 마주쳤어요.”
우연히?
진안 군왕이 경악했다.
길가에서 술을 마시며 연극을 보거나, 타지로 가는 길에 역참이나 객잔에 머무를 때는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 일에도 우연히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가 있나?
그게 무슨 우연이야?
사전에 논의된 거였겠지? 하지만 사전에 논의한 거라면, 이 여인이 우연이라는 말을 쓰진 않았을 거야. 그렇다면 정말로 사전에 논의가 되지 않았던 일이라는 말인데.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지?
아니야. 사실 왜 그런 우연이 있었는지 굳이 설명해야 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긴 해.
진호라는 사람, 나도 잘 알고 있지. 그 이름을 아주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진안 군왕의 머릿속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뱃머리에 여유롭게 서서 정교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따뜻한 미소를 짓던 소년.
진안 군왕은 여러 사람을 부러워했다. 새해 인사를 올리러 입궐한 관리들과 부인들이 부럽기도 했다. 언제든 황궁을 떠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또 하늘을 나는 새들이 부럽기도 했다. 어디든 가고 싶은 곳으로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릴 때의 일이고,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더는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게 되었다. 아무리 남이 되고 싶다고 한들, 자신이 군왕이라는 사실은 어찌할 도리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군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마차를 타고 강가를 지나가던 그때, 진안 군왕은 뱃머리에 서 있던 소년이 뼈저리게 부러웠다. 언제든 정교랑과 함께 나들이를 갈 수 있고, 정교랑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고, 정교랑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그 소년이.
다리를 고친 후로 정교랑과 가장 많이 교류했던 사람 또한 진호였다.
어가에서 정교랑과 함께 꽃등 놀이를 구경하고, 과거에 급제했을 때는 정교랑이 직접 빚은 관인양을 마셨던 사람.
심지어 진안 군왕은, 중독으로 혼수상태가 된 채 정씨 저택에 실려 갔을 때도 진호라는 이름을 들었었다.
아씨께서 진 공자님과 같이 계세요.
연꽃을 보러 간다고 하셨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팔을 가볍게 치자, 진안 군왕은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진안 군왕의 눈앞에 밤하늘의 별보다 반짝이는 두 눈이 보였다.
“왜 그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 사람, 당신을 위해 온 거였죠?”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난간을 잡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물었다.
“아니요. 그 사람은 고 관인 때문에 왔던 거예요. 그래서 우연히 마주친 거고요.”
그 사람도 고 관인 때문에 온 거였고, 이 여인 또한 고 관인을 찾아간 거였으니,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여인과 고 관인은 형제를 죽인 원수지간이라지만, 그 사람은 고 관인에게 무슨 원수를 졌길래?
그리고, 진호라는 자는 고 관인과 한패가 아니었나? 공주부 진씨 가문은 늘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봉지로 내보내려고 혈안이었어.
그리고 지난번 일도, 내가 정교랑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고 할 줄 알고 진호를 시켜서 연꽃을 보러 가게 했고. 그 일은 분명히 진씨와 고씨 가문이 같이 꾸민 짓이었을 텐데.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바보.
진호는 자신을 위해 고 관인을 죽이러 간 게 아니라, 당신을 위해서 간 거예요.
진호가 그 계략에 동참한 이유는 나를 상대하기 위함이었지, 당신을 상대하기 위함이 아니었어요. 진호라면 절대 당신이나 정사낭을 해치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게 보면, 진호도 고씨 가문의 계략에 넘어간 거네요. 정사낭의 죽음이, 진호와 당신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버렸어요.
내가 진호였어도, 당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죽음으로 몬 놈들을 평생 원수로 삼고 살아갔을 거예요. 그놈을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고 매일 밤 이를 갈면서요.
하지만 정사낭의 죽음은, 진호뿐만 아니라 나도 관계가 없다고 할 수는 없어요. 만약 당신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걸 몰랐다면, 고씨 가문이 당신을 계략에 빠트리지는 않았겠죠.
진호는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고자 고 관인을 죽이러 쫓아왔다지만, 나는요?
당신이 돌화창으로 만들어 낸 안전한 사찰에 서서 당신을 기다렸어요. 당신이 홀로 수많은 적을 상대하며 살벌한 전투를 치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할 수 있었던 거라고는 당신을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죠.
생각을 멈춘 진안 군왕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등불 하나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어둡기만 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은 어느새 잠자리에 든 후였다. 바깥쪽으로 몸을 돌려 누운 정교랑은 고른 숨을 내쉬면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작은 소리로 정교랑을 불렀지만, 정교랑은 미동도 없이 자고 있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거야! 돕지 못하면 가만히 있기나 해야지, 괜히 피곤해서 자는 사람을 깨워서 성가시게 할 필요가 뭐 있다고.
진안 군왕은 조심스럽게 다시 자리에 눕고, 머리 뒤로 손을 받치며 어둑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세수와 양치를 하는 이른 아침이었다. 경 공공은 거뭇거뭇한 진안 군왕의 눈 밑을 보고는 조용히 내시들에게 명했다.
“가서 보양탕 한 그릇 끓여 오너라.”
어젯밤에는 또 얼마나 난리였길래.
경 공공이 고개를 저었다.
때마침 마당에 들어온 고 선생이 밖으로 걸어 나오는 진안 군왕과 마주쳤다.
“전하, 전하.”
고 선생이 다급하게 진안 군왕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어떻게 됐습니까? 어제 왕비께 말씀드리셨습니까? 왕비께서는 뭐라고…….”
고 선생이 왕비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정교랑이 후원에서 활을 들고 돌아왔다.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머쓱해진 고 선생은 문밖에 멈춰 섰다.
“왜요?”
정교랑이 물으면서 활을 반근에게 건넸다.
“내가…….”
일단 입은 열었는데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진안 군왕은 잠시 멈칫했다.
“내가, 머리 감겨 줄게요.”
반근과 소심이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좋아요.”
따뜻한 물을 떠낸 진안 군왕은 다소 난감한 눈치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긴 머리카락 위로 물을 끼얹으며 물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깨끗하게 씻기기만 하면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의 동작이 한결 여유로워졌다. 반근과 소심이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마주 보면서 쿡 하고 웃었다.
“아침 준비하자.”
반근이 조용히 말했다. 소심은 팔이 고장 난 듯 움직이는 진안 군왕을 흘깃 쳐다보았다.
“조금만 더 있다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이런 거밖에 없네요. 다른 사람은 당신을 도와서 사람도 죽이는데, 나는 당신 머리를 감겨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어요.”
진안 군왕이 은근슬쩍 입을 열었다.
“틀렸어요.”
정교랑이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첫째, 진호는 나를 도우려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도우려던 거였어요. 둘째, 당신은 나를 돕는다는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요. 나를 도우려면, 내가 하기 벅찬 일을 도와야죠.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거나 당신 생각에 날 돕는다고 여기는 일을 하는 건, 나를 돕는 게 아니에요.”
“위로 안 해 줘도 되거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머리를 감겼다.
“위로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위로해 줄 필요가 있나요?”
정교랑이 눈을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굳이 도움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나한테는 가장 큰 도움이에요.”
또 달콤한 말로 나를 달래려는군.
진안 군왕이 속으로 투덜댔지만,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어쩔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고 관인 쪽에서 사람을 보내오지 않았겠죠. 덕분에 내가 고 관인을 죽였는걸요.”
정교랑이 말했다.
“아.”
진안 군왕이 물바가지를 내려놓고 말했다.
“내가 미끼라는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손끝으로 정교랑의 코를 살짝 집었다.
“그럼 이 미끼가 굳이 머리를 감겨 줄 필요는 없겠네요.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렇게 가다가는 아침이 아니라 점심을 먹어야 할 판이에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여봐라.”
문밖에 서 있던 소심과 반근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의 머리를 감겨드려라.”
반근과 소심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시선을 거두고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아씨께서는 늘 전하를 기쁘게 하시네.
“아씨, 아씨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예요.”
반근이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아내라…….
정교랑이 목욕통 안으로 들어가서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담갔다.
“가장 좋은 아내인지 아닌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건 소용없어. 낭군만이 말할 수 있지.”
“전하.”
드디어 밖으로 나온 진안 군왕이 기분까지 좋아 보이자, 고 선생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정말로 기분이 좋으시네!
고 선생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전하, 어제 부인과 이야기는 나누셨는지요? 부인께서는 뭐라고 하십니까? 저희가 더 처리해야 할 게 있다고 하십니까?”
“무슨 이야기?”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밥상을 차린 시녀들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과 시녀들이 욕실 밖으로 나오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고 선생의 말을 제지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할 말이 있거든, 밥부터 먹은 뒤에 이야기하지.”
무슨 이야기냐고?
고 선생이 눈을 부릅뜨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이럴 줄 알았어. 결국 제대로 된 일 얘기를 하지 않을 줄 알았다고!”
고 선생이 옆에서 낄낄대는 경 공공을 향해 말했다.
“틀리셨습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그러고는 장난스러운 눈짓을 하며 덧붙였다.
“전하와 왕비께서는 제대로 된 일 얘기보다,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더 중요할 때입니다.”
고 선생이 뭐라고 대꾸하려던 찰나, 마당 밖에서 시위가 다급하게 걸어 들어왔다.
“태후마마의 교지입니다.”
시종이 무릎을 꿇고 큰소리로 외쳤다.
태후마마의 교지?
고 선생과 경 공공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진안 군왕과 정교랑도 밖으로 나왔다. 마당 밖에서 역승이 허리를 굽힌 채, 태후의 교지를 전달하러 온 내시들에게 길을 안내해 주는 모습이 보였다.
“신은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바닥에서 큰절을 올리며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따라 큰절을 올렸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두 사람을 쳐다보던 내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 이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마마께서는 전하가 걱정되어 이리하시는 겁니다. 고집부리지 말고 어서 돌아가시지요.”
“마마께서 신을 아끼신다는 걸 알기 때문에, 신은 더더욱 마마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지 않고 바닥에 엎드린 채 말했다. 내시가 다시 교지를 돌돌 말았다.
“그럼, 소인은 돌아가서 전하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뭐라? 원래 경성에서 영영 죽치고 있으려던 놈이 아니냐! 그런데 왜 갑자기 싫다는 게야?”
태후가 냉소를 지었다.
“나 참, 일곱 번이고 여덟 번이고 성지를 거부하며 고결한 척하는 대신들을 따라 하기라도 하려고?”
태후가 소매를 홱 털고 또 말했다.
“다시 교지를 전달하거라!”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역참은 여느 때와 달리 사람들로 붐비지 않았다. 역참 주위에는 금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서 있었고, 구름 한 점 없이 내리쬐는 가을 햇볕 아래에 선 역승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혔다.
“이게 벌써 몇 번째인가?”
역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으며 역참 밖을 내다보았다.
“세 번째입니다.”
역졸이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역졸의 말이 끝나자마자, 멀리서 어지러운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전갈을 가져온 내시들이 먼지를 휘날리며 역참 앞에 멈춰 섰다.
“이제 네 번째네요.”
역졸이 손가락 네 개를 펴면서 말했다.
“나라의 재상을 모셔오는 것도 서너 번이면 족할 텐데.”
역승이 중얼거렸다.
문밖에서 태후의 교지를 외치는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오자, 진안 군왕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내가 태후마마를 두려워해서 되겠습니까! 가면 가는 거지. 궁에서 날 때려죽이실 수 있나 어디 한번 봐야겠습니다! 태후마마께서도 체면을 버리셨는데, 난들 체면을 지킬 필요가 있느냔 말입니다!”
진안 군왕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정교랑이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안 돼요. 태후마마께서는 체면을 버리실 수 있어도, 당신은 그럴 수 없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는 군주고, 당신은 신하예요. 체면을 따지자면, 당신의 체면이 더 중요하죠. 그리고 미친 사람을 상대로 도박을 해선 안 돼요. 그럴 가치도 없으니까.”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태후마마의 교지입니다.”
문밖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창문을 뚫고 들어왔다.
“지금 당신이 명을 거절하는 데는, 그나마 납득할 수 있는 티끌만큼의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황궁으로 들어가 명을 받들지 않겠다고 하면, 그 티끌만큼의 이유조차 사라지게 돼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손을 다독였다.
“당신은 나올 필요 없어요. 몇 번이나 무릎을 꿇었으니 몸이 힘들 텐데, 나머지는 내가 할게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밖으로 나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신,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큰절을 올리면서 말했다.
내시들이 또 자리를 떠났지만,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지 않고 제자리에 무릎을 꿇은 채로 다음 교지를 기다렸다.
어디 몇 번이나 남았는지 한번 봐야겠다.
역참 문 앞에 서 있던 역승은 다리가 저려 왔다. 그가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아까 온 사람들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역승이 물었다.
“한 시진 되었습니다”
역졸이 대답했다.
앞선 몇 번은 다 반 시진에 한 번씩 오던데, 이제는 더 안 오려나?
역승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길의 끝을 내다보았다.
“제 발로 오지 않겠다면, 밧줄로 묶어서라도 데려올 수 있느니라!”
황궁 안, 태후가 격노하여 소리쳤다.
“이번에는 그놈에게 교지를 내리지 않고, 금군에게 교지를 내려야겠다.”
태후가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대전 밖에서 고능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시들이 고능준이 왔다는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고능준은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와 큰절을 올렸다.
본디 흰머리가 많지 않았던 고능준이지만,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하얗게 센 듯 부쩍 늙어 보였다. 더구나 내시의 부축을 받는 일 따위는 결코 없었던 그였다.
순간 태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서 일어나게나. 여긴 무슨 일로 온 게야? 집에서 몸 추스르며 요양하지 않고.”
고능준이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마마께서 연달아 여덟 번이나 교지를 전달하셨는데, 신이 어찌 마음 편히 앉아만 있겠습니까.”
고능준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고능준의 말에는 질책과 탄식이 섞여 있었다. 태후는 꾸중을 들은 어린 소녀처럼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애가는 도저히 이 울분을 삭이지를 못하겠네.”
이 울분을 삼켜내지 못하시겠다고요? 삼킬 수 없는 울분이라면, 제가 훨씬 클 겁니다.
고능준이 긴 한숨을 뱉고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모두가 기대를 걸었던 평왕이 죽고, 그나마 의지하던 황제는 혼수상태에 빠졌으며, 늙어 가는 태후와 천지 분간 못 하는 바보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젠 아들마저 죽었다. 아들을 죽인 살인자가 누구인지 빤히 아는데도 범인의 사지를 찢어버릴 수 없다.
이 울분을 삼키지 못하면 어쩔 건데? 토해낼 수 없으니 삼킬 수밖에. 울분 좀 삼켰다고 숨 막혀 죽을 일은 없을 터.
“마마, 이 일은 제가 잘못한 겁니다. 십사는 결국 제 손에 죽은 것이나 다름없지요.”
남에게는 관대하되, 스스로에게는 엄격하라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잖아?
태후가 놀란 눈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아들을 잃은 아픔을 겪은 사람이 어찌? 아니면, 충격이 너무 커서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무모했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너무 무모했어요. 제가 몇 번이고 말씀드렸다시피, 진안 군왕이든, 그 정씨 여인이든, 다 차후에 처리해도 될 사소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난다는 말에, 순간 마음이 급해져 그만…….”
내가 저들을 이리 급히 죽이려고 하지 않았더라면, 십사도 저들 손에 죽지 않았겠지요.
아니면, 저들이 조금 더 멀리 간 뒤에 처리해도 됐을 겁니다. 경성 인근에서 벌어진 일인지라 치밀한 준비 끝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하소연조차 못 하는 처지가 되지는 않았겠지요.
가엾은 우리 십사.
고능준은 소매로 눈물을 훔쳤고, 태후도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무모한 게 아니었어. 일이 이렇게 된 건, 우리가 너무 늦어서 그런 게야. 일찍이 그놈을 죽였어야 했는데, 호랑이 새끼를 키워서 결국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꼴이 되었어.”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당장 그놈을 잡아들여라!”
“마마!”
고능준이 분노 섞인 표정으로 목청을 높였다.
“호랑이라니요! 그놈은 호랑이가 아니라 원숭이 새끼에 불과합니다! 산에 호랑이가 없어져야만 왕이 될 수 있는 원숭이요! 호랑이가 산에 있는 한, 제아무리 재간을 부리고 날뛴다 해도, 원숭이는 절대 왕이 될 수 없습니다!”
고능준이 윗전 앞에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처음인지라, 태후는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마마.”
고능준이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 들끓는 화를 간신히 참아냈다. 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천천히 말했다.
“마마와 태자 전하야말로 호랑이지요. 두 분이 건재하신다면, 그놈은 뭣도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가만 손 놓고만 있을 작정인가? 십사의 죽음은 어찌하고? 그놈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청원 역참에 죽치고 있는 꼴을 보고만 있겠다는 겐가?”
태후가 울면서 말했다.
“당연히 그럴 수는 없지요. 그러나 때로는 움직이는 것보다 가만히 있는 게 더 좋은 법입니다. 저들은 지금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하고, 무슨 패를 쓰는지를 지켜보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절대 저들의 바람대로 움직여서는 안 되지요. 하루 이틀, 일주일, 보름 정도야 청원 역참에 머무를 구실이 있다지만, 저들이 한 달, 두 달이 지나도 버틸 수 있겠습니까? 그 구실은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동풍이 서풍을 누르는 날이 있다면, 서풍이 동풍을 누르는 날도 있는 것이지요. 급할 것 없습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마마,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자 전하의 국혼입니다. 그리고 태자 전하께서 후손을 보는 것이 급선무지요. 태자 전하께서 아들을 낳는다면, 조정 또한 안정을 되찾을 것입니다.”
고능준이 말을 이어 갔다.
민심이 안정을 찾으면 강산 또한 태평할 테고, 강산이 태평하면 고씨 가문의 입지 또한 탄탄해질 테지요.
그 빌어먹을 부부를 며칠만 더 살려두는 것뿐입니다.
“물론, 이대로 그들이 마음 놓고 살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요. 이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깊은 밤, 야시장과 술집이 즐비한 곳 외에는 경성 전체가 단잠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한 저택의 주위에서 시커먼 그림자 몇 개가 움직였다. 그들이 손에 쥔 것을 담벼락 너머로 힘껏 던지자, 무언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마당 안에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불이야! 불이야!”
불꽃이 튀는 동시에 저택 안에서 목청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는지, 그림자들이 멈칫했다. 한편 멀리 길가에서도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저쪽에 불이 났소!”
누군가의 목소리가 밤바람을 타고 이쪽으로 흘러들어왔다.
“젠장, 지금쯤이면 순찰 도는 병사들도 술 퍼마시면서 농땡이 피울 시간 아닌가? 왜 하필 지금 이쪽 순찰을 도는 거야?”
그림자 중 하나가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
“거 쓸데없는 소리는. 정말로 누구를 태워 죽일 작정이 아니라면, 이렇게 겁준 정도로 충분하니까. 어서 가자고.”
다른 사람이 조용히 대꾸했다. 그림자들이 저택 근처에서 사라졌다.
마당 안에서 불길이 솟구쳤다.
“여보.”
황급히 밖으로 나온 황씨는 겉옷을 걸친 채 회랑 아래 서 있었다. 황씨가 마당에서 시종들에게 조용히 지시를 내리는 범강림을 불렀다. 회랑의 흔들리는 등롱에 비친 황씨의 얼굴에는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시종들이 범강림을 향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서둘러 불을 끄러 뛰어갔다.
범강림이 회랑 아래로 걸어왔다.
“괜찮소. 다시 가서 눈 좀 붙이시오.”
황씨가 범강림의 소매를 붙잡았다.
“차라리 우리 다시 서북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황씨가 말했다.
누이가 떠났고, 고십사가 죽었다. 경성 인근에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까지 퍼진 것을 보니, 지금 경성에는 보이지 않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새벽에 갑자기 집에 불이 붙은 건, 절대로 날씨가 건조한 탓이 아니었다.
범강림이 애써 웃으면서 말했다.
“나중에.”
“나중에 언제요?”
황씨가 곧바로 물었다.
“우리가 떠나야 할 때.”
범강림이 에둘러 말했다.
황씨가 이어 물으려고 하던 찰나, 후원 쪽에서 화르르하는 소리가 들려오면서 시커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황씨가 놀라서 비명을 질렀다.
“저기엔 또 왜 불이 붙은 거예요?”
황씨가 다급하게 사람을 부르려고 하자, 범강림이 황씨를 제지했다.
“괜찮소. 기왕 누가 불을 질렀다면, 이참에 태워 버리지 뭐.”
뭐라고?
황씨가 경악했다.
이참에 태워 버리자고? 이참에?
황씨가 고개를 들고 후원을 내다보았다. 불이 난 곳은 후원의 고방이었다.
다행히도 고방에는 중요한 물건이 없었지만, 범강림이 소보아를 위해 만들던 대나무 집과 거죽들, 그리고 이런저런 잡동사니들이 있었다.
대나무 집.
황씨가 멈칫하다가 고개를 돌리고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일렁이는 불길에 비친 범강림의 표정은 어둡기만 했다.
문밖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호가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왔다. 수군거리고 있던 두 시녀는 깜짝 놀라며, 내의만 입은 채로 소매를 걷어붙인 진호를 쳐다보았다.
“공자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이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냐?”
진호가 물었다.
“공자님, 저쪽 거리에 불이 났대요.”
시녀가 대답했다.
“불길이 우리 집까지 번질 정도더냐?”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묻자, 시녀들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왜들 그러고 있어?”
진호의 물음에 시녀들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공자님, 그게, 정 낭자 댁에 불이 났습니다.”
진호가 흠칫 놀랐다가 목을 길게 빼고 밖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진씨 저택과 정씨 저택은 정반대인 동쪽과 서쪽 거리에 있어서, 아무리 목을 빼고 본다 한들 보일 리 없었다.
“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순찰을 돌던 병사들이 마침 그 근처를 지나간 덕에, 불길은 금세 잡혔대요. 다친 사람은 없고, 그냥 집이 조금 탔다고 들었어요.”
시녀의 말에 진호가 피식 웃었다.
“그야 당연하겠지.”
진호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기네 사람들이 아직 덜 죽었다고 생각하나 보군. 더 빨리 죽여 달라고 이리 애원을 하다니.”
지금 누굴 말씀하시는 거지?
시녀들이 의아해하던 사이, 진호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깊은 밤인데도, 진호의 방 안은 등불로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방바닥에는 온갖 무기들이 놓여 있었다.
진호가 바닥에 놓여 있던 단도 한 자루를 집어 들고 허공을 향해 휘둘렀다. 등불에 비친 단도에 서늘한 빛이 반짝였다.
“아니지.”
진호가 멈칫하고는 허리를 펴고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칼을 쓸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가 아니야.”
진호가 혼잣말을 하면서 다시 단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진호는 무기들을 한번 쭉 훑어보고 단창을 집어 들었다.
“지금 이 정도 거리라면 이걸 써야지.”
진호가 또 허공을 향해 무언가 찌르는 시늉을 했다.
눈앞에 빗속의 여인이 스치자, 진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화살을 쏘고, 장창과 호두창(虎頭槍)을 날려서 가장 앞선 놈을 찔러 죽였다.
빗속의 여인은 단창을 채찍 삼아 말에 박차를 가하고, 끝이 날카로운 장창으로 앞뒤, 좌우에 있는 사람들의 목을 베어 말에서 떨어트렸다. 그리고 대나무와 강철을 엮어 만든 채찍을 휘둘러 상대를 근거리로 끌어온 뒤 도끼로 머리와 심장을 쪼갰고, 양쪽으로 삼지창이 달린 탁천차(托天叉)와 눈썹 높이의 나무 봉인 제미곤(齊眉棍)을 각각 한 손에 들고 순식간에 빈틈을 찾아내 상대에게 치명타를 입혔다.
환한 방 안, 진호가 날렵하게 무기를 휘두르면서 현란하게 움직였다. 그의 손에 쥔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등불을 흔들리게 했다. 벽과 바닥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쉼 없이 움직였다.
같은 시간, 아직 잠들지 못한 사람은 여럿이었다.
황궁 안, 태후의 침궁에서 연이어 큰소리가 들려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슨 일이냐!”
태후가 휘장을 홱 젖히며 호통쳤다. 바닥에 무릎을 꿇은 궁녀가 서둘러 이마를 땅에 찧었다.
“잠을 자라는 게냐, 자지 말라는 게냐? 시중 하나도 제대로 들 줄 몰라? 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같으니라고!”
태후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밖에 서 있던 상궁과 내시들이 서둘러 후전에 있는 태자의 처소로 향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사람들이 몰려오자, 후전에 있던 내시들이 불안에 떨며 예를 올렸다.
“연유는 모르겠으나, 태자 전하께서 잠을 주무시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태후의 상궁과 내시들이 전각 안을 들여다보았다. 때마침 불어온 밤바람이 코를 찌르는 악취를 고스란히 문가로 전달했다.
태자가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니, 아무리 자주 옷을 갈아입혀 주어도 냄새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상궁과 내시들은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걸음을 멈췄다.
“태후마마께서는 정사를 돌보느라 고단하시네. 자네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겐가? 자네들이 전하를 잘 보필해야 태후마마께서 편히 주무시지!”
내시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태자의 내시들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며 사죄했다.
“계속 시끄럽게 해서 태후마마의 노여움을 샀다가는, 바로 목숨이 달아날 것이야.”
상궁이 경고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내시들은 태후의 사람들이 떠날 때까지 바닥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태자의 궁 안에서 또다시 괴이한 소리가 들려오자, 내시들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갔다. 태자는 침상에 밧줄로 손발이 묶인 채 천장을 보며 악을 쓰고 있었다.
“정말 성가셔 죽겠네. 도대체 뭘 하고 싶으신 겁니까? 왜 날이 가면 갈수록 잠을 거부하시느냔 말입니다!”
내시가 고개를 저으며 윽박질렀다.
“일단 입부터 막자고.”
다른 내시가 재빨리 방법을 생각해 냈지만, 다른 내시들이 곧바로 그를 제지했다.
“태의가 말했지 않은가. 태자가 너무 뚱뚱하다 보니 입을 막아버리면 숨을 제대로 못 쉬어서…….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했던 말 기억 안 나나?”
내시들이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럼 여인들을 다시 불러오게. 몸에 있는 화를 좀 내보내면, 조용해지시겠지.”
한 내시가 태자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내시가 곁방에서 자고 있던 여인을 불러왔다. 여인은 내키지 않는 듯 오만상을 찌푸렸다.
“전하께서 요 며칠 힘드십니다. 한 번 하면 끝나 버린다고요.”
내시들 앞인지라, 여인은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하품을 해대며 말했다.
“다 제가 움직여야 하는 거라지만, 전하께서 그걸 세우기라도 하셔야지요.”
내시들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거야 쉽지. 보약 한 그릇 더 들이켜시면 될 일 아닌가.”
여인이 눈을 흘겼다.
“공공들이 드시고 싶은 건 아니고요?”
여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전각 안에 있던 사람들이 시시덕거리며 떠드는 사이, 얼마 안 가 다른 내시가 보약을 들고 들어왔다.
밤이 더욱 깊어질 때쯤, 태후의 침전 밖에서 당직을 서고 있던 내시가 손을 비비며 귀를 기울였다. 조금 전까지 들려오던 태자의 괴성이 들리지 않자, 그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이래야 할지 모르겠군.”
달이 지고 해가 뜨면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범강림의 집에 불이 났다는 소식도 오후 경에는 청원 역참으로 전해졌다.
반근과 소심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진안 군왕도 미간을 찌푸렸다.
“안 되겠어요. 우리 경성으로 돌아갑시다. 복수를 하든 뭘 하든, 하려던 대로 해야겠어요. 고씨 가문은 이미 미쳤습니다. 당신도 말했잖아요. 미친 사람과 내기를 해서는 안 된다고요.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나면…….”
정사낭에게 일어났던 비극이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돼.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지금은 아직 돌아갈 수 없어요.”
“정방,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저들이 나를 죽이고 싶다고 해도, 저들 뜻대로 쉽게 죽이지는 못할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당신이 걱정되어서가 아니에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어요. 경성에 있는 사람들은 무사할 거예요. 큰 오라버니 내외가 소보아를 데리고 군감사로 거처를 옮겼거든요. 고씨 가문이 아무리 미쳐 날뛴다고 해도, 군감사에 불을 지르고 살인을 할 정도는 아니에요.”
“그래도, 영원히 숨어 살 수는 없잖아요. 그들 내외를 경성 밖 안전한 곳으로 먼저 보내 놨어야 하는 건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경성을 떠나는 게 쉬운 일이었다면, 진안 군왕도 지금에서야 경성을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범강림 내외는 비록 진안 군왕과 같은 종친 신분이 아니었지만, 정교랑의 가족이었다. 따라서 정교랑이 경성에 있는 한, 그들 역시 어딘가를 자유롭게 오가는 건 힘들었다.
진안 군왕이 낙담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멀리 가면 갈수록, 그들은 안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전하께서 말씀하신 폭죽이 도착했습니다.”
문밖에서 내시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활짝 웃고는 정교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자, 나랑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가요.”
“불꽃놀이요?”
정교랑이 물었다.
“모레가 태자의 국혼일이에요. 경성에서 직접 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멀지 않은 곳에서 불꽃놀이로 축하해 주려고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을 잡자,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을 잡아끌었다.
문이 열리자, 병사들 무리가 우르르 들어왔다.
“누굽니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어딜 아무렇게나 쳐들어…….”
하인들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자 가장 앞에 서 있던 장수가 허리춤에서 명패를 흔들었다.
“군감사에서 나왔다.”
하인들이 흠칫 놀랐다.
“분실된 무기를 찾아오라는 명을 받았다. 군감사 소속의 사람이라면, 빠짐없이 가택 수사에 응해야 한다. 이 일은 범 군감께서도 알고 계시는 일이다.”
장수의 말에, 하인들은 더는 막아서지 못하고 길을 비켰다.
“한 곳도 빠짐없이 꼼꼼히 조사해라. 우리 사람이라고 대충대충 하지 말고. 우리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가 범 군감의 결백을 확실히 증명할 수 있을 테니.”
장수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병졸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일사불란하게 마당 안으로 흩어졌다.
“이곳은 어떻게 된 것이냐?”
새카맣게 탄 후원의 담벼락과 다 허물어진 고방을 본 장수가 펄쩍 뛰면서 소리쳤다.
정말로 증거를 인멸하려 했던 건가? 흔적조차 남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