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적-
“몹시도 악랄한 마적들이로구나. 아주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어!”
이 일에 대해 미리 귀띔을 들은 관졸들은 허리에 손을 올리고 의분에 차서 소리쳤다.
“아니다, 아니야!”
청원 현령이 갑자기 다급하게 외쳤다.
멀리서 말굽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열댓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매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었다.
“뭐 하는 자들이오!”
질서를 유지하던 관졸이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 들어 허공에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오던 열댓 명의 사람은 여전히 속도를 줄이지 않고 달려왔다.
무리 중 가장 선두를 달리던 사람이 길을 막는 관졸을 향해 채찍을 세게 휘둘렀다. 관졸이 악 소리를 지르며 옆으로 나자빠졌다.
“청원현!”
가장 앞서 있던 사람이 화가 잔뜩 난 얼굴로 불안에 떨고 있는 청원 현령을 가리켰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누가 여길 오라고 했어!”
누가 나더러 여길 오라고 했냐고? 당신들이 오라고 했잖아!
청원 현령이 막연한 표정으로 말 위에 올라타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멀리서 북과 징이 울리는 소리와 관졸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관부에서 살인을 저지른 마적을 소탕하고자 하오니, 관계없는 자들은 자리를 피하시오.”
북과 징이 울리는 소리가 차츰 멀어지고, 푸르른 새벽빛이 걷히며 환한 아침이 찾아왔다.
말 위에 타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이런 빌어먹을 청원현!”
말에 타 있던 사람 중 한 명이 채찍을 매섭게 내리쳤다.
“당초 우리가 네놈에게 뭐라고 했느냐! 부르지 않는 한 움직이지 말라고 했잖아! 그런데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냐고! 우리 관인께서는 원수에게 죽임을 당하신 거지,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게 아니란 말이다!”
채찍을 맞은 청원 현령이 뒤로 고꾸라졌다. 주위에 있던 관졸들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뜰 뿐, 아무도 앞으로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대인, 대인.”
청원 현령이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말 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외치며 자신의 뒤를 가리켰다.
“오늘 새벽에 대인 쪽 사람이 와서 제게 소식을 알렸습니다. 바로 여기 있…….”
청원 현령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야에 들어오는 이들은 자신의 가노와 시종, 그리고 관아에서 데려온 관졸들뿐이었다.
오늘 새벽에 고씨 가문의 문양이 찍힌 서신을 들고 자신의 집에 찾아와 소식을 알렸던 남자는,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듯 언제 자신의 곁에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큰일 났구나. 내가 계략에 빠져들었어!
떼죽음을 당하는 사람 중에는 고 관인과 그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거였어!
청원 현령이 땅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큰일 났구나.”
청원 현령이 한 방향을 가리키며 관졸들에게 지시했다.
“어, 어서 쫓아라.”
어서 경조부로 소식을 전하러 간 사람을 쫓아라!
어서 쫓아라! 빨리! 못 가게 막아야 한다!
말 한 필이 큰길 위를 질주하며 사방으로 흙탕물을 튀겼다.
이때 쉭 소리가 들려왔다. 말 위에 있던 사람은 목에 화살이 꽂힌 채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말 아래로 떨어졌다. 깜짝 놀란 말이 울부짖으면서 방향을 틀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길가 큰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세 사람이 재빨리 다가왔다. 그중 한 명이 말에서 떨어진 관졸의 옷을 벗겨 자신의 몸에 걸치고, 그의 품에서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어둑한 빛에 서신을 비춰보자, 그 위에는 청원현의 붉은 관인이 찍혀 있었다. 관졸의 옷으로 갈아입은 사내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재빨리 말 위로 몸을 날려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관졸의 시체를 길가로 끌고 가서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던지고 잽싸게 흙을 덮은 뒤 말을 타고 앞서간 사람을 따라갔다.
동쪽 하늘이 밝아질 무렵, 경성의 거대한 성문이 삐그덕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일찌감치 나와 성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이 앞뒤를 다투며 안으로 들어가려고 서로를 재촉했다.
“밀치지 마시오!”
수문장과 위병들이 호통을 치면서 수상쩍어 보이는 사람들을 골라내 검문했다. 주복은 병사들을 데리고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성문 앞에는 따뜻한 탕을 파는 점포가 있었지만, 이제 막 야간 장사를 마친 터라 자리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주복이 노점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저기, 나리.”
“주 대인?”
노점의 주인장과 병사들이 의아한 얼굴로 주복을 불렀다.
“다른 건 필요 없으니, 탕 한 그릇만 주시오.”
주복이 주인장에게 말하고는 병사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알아서들 먹어라. 다 먹은 뒤에는 집으로 가거나, 다른 곳으로 새지 말고 즉시 군영으로 복귀하고.”
병사들이 헤헤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한 뒤, 각자 먹고 싶은 것을 찾아 흩어졌다.
손님이 벌써 자리에 앉은 이상, 주인장으로서는 차마 내쫓을 수 없었다. 게다가 성을 순찰하는 관병을 상대로 괜히 소란을 피웠다가는 골치만 아파진다는 생각에 주인장은 군말 없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행여 잘못 건드리면, 무슨 구실이든 갖다 붙여 노점을 뒤엎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주인장이 점원에게 따뜻한 탕 한 그릇과 소금에 절인 생선 요리 한 접시를 내오라고 시켰다.
“이건 삼치입니다. 진 상공 댁의 참새 요리 비법으로 만든 것이니, 한번 맛보시지요.”
주인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진 상공 댁의 참새 요리라…….
주복이 접시 위에 놓인 생선을 보다가 피식 웃었다.
과로신선, 낙득자재, 참새, 삼치.
경성의 새로운 먹거리들을 참 많이도 만들어 냈네.
주복이 젓가락을 들고 생선 살코기를 조금 떼어내 한 입 먹고는 무의식적으로 성문 쪽을 내다보았다.
소 떼와 양 떼가 안으로 들어오던 참이라, 성문 앞은 다소 소란스러웠다.
“급보입니다. 급보!”
누군가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성문을 향해 달려왔다. 급보라는 말과 말을 탄 사람의 관졸 복장을 본 위병들은 재빨리 길을 터주었다.
“청원현에서 온 급보요!”
관졸이 가축들로 인해 왁자지껄한 성문을 지나며 큰소리로 외쳤다.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관졸을 쳐다보았다.
“마적 떼가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소!”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길가를 따라 질주하는 관졸을 바라보았다. 행인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마적?”
노점 주인이 몸을 일으키고 관졸이 떠난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가 혀를 차면서 중얼거렸다.
“근래에 마적이 판을 친다고 들었는데, 역시 일이 났나 보구먼.”
주인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주복은 말을 타고 떠나갔다.
“나리, 아직 계산 안 하셨는데요.”
주인장이 서둘러 주복의 뒤를 몇 걸음 따라가며 외쳤지만, 주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멀어진 후였다. 주인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오늘은 재수가 없다고 투덜댔다.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울려 퍼진 관졸의 외침은 금세 경성 곳곳으로 흩어졌다.
“급보요! 청원현에서 온 급보! 마적이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소!”
유흥가에서 걸어 나온 사내들이 깜짝 놀라 몸을 살짝 떨었다. 밤새 질펀하게 논 터라, 사내들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바닥에 주저앉을 뻔했다.
마적이라니!
멜대를 메고 음식을 팔러 다니는 장수들이 서둘러 길을 피하다가, 관졸이 외친 소리 때문에 놀라서 멜대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정말로 마적이 있나 보네!
관졸이 곳곳을 누비며 외치자, 조용했던 경성의 아침이 순식간에 시끌벅적해졌다.
“무슨 일이냐? 새벽 댓바람부터 관아 앞이 소란스럽다니.”
야간 당직을 끝낸 관리가 미간을 찌푸리며 마차의 휘장을 들어 올리고는 밖을 내다보았다.
“대인, 청원현에서 온 급보입니다. 청원현에 마적이 나타나 재물을 약탈하고 살인을 저질렀답니다.”
마차 앞에 있던 시종이 서둘러 관리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적? 산적과 마적이 있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별일도 아닌 거 가지고 호들갑은. 청원현은 마적 따위에 저리 겁을 먹었단 말이냐?”
관리가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대인, 책임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마적이 대단한 인물을 죽여서, 괜히 꾸물거렸다가는 자기들도 벌을 받을지 모른다는 걱정을 했을 수도 있고요. 어찌 됐든, 사건이 발생한 곳이 청원현이니까요.”
시종이 말했다.
하급 관리들은 이래서 안 돼. 무슨 일이 났다 하면 사건을 은폐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려고만 하니, 쯧.
관리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젓다가 멈칫했다.
청원현, 그리고 대단한 인물?
날짜를 꼽아 보자면, 지금 이 시기에 청원현을 지나갈 만한 대단한 인물은…….
“큰일 났다!”
순식간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관리가 소리쳤다.
관졸이 급보를 외치며 문 앞을 지나가자, 세 막료는 오금이 저려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었고, 얼마나 대단한 수완인가. 머리털 하나만 건드려도 온몸을 움직일 수 있다더니, 손만 갖다 대도 줄줄이 풀릴 일이었군.
청원현에서 온 관졸이 급보를 외치는 광경을 일찌감치 상상한 그들이었지만, 상상 속 자신들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상상 속에서 그들은 기쁨의 환호를 하며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다.
모든 게 다 바라던 대로 이뤄졌군. 우리의 바람이 아니라, 상대의 바람대로 말이야.
“대단하구나. 대단해!”
막료들의 등 뒤에서 갑자기 고능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가에 서 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고개를 돌려보자, 언제 나왔는지 모를 고능준이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대단하구나. 대단해! 참으로 대단한 진안 군왕이로다!
자기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듣는 아비보다 더 비통한 사람이 있으랴?
게다가 아들의 죽음을 밝힐 진상을 제 손으로 덮어 버린 아비의 절망감은, 대체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갑자기 고능준은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이 태의에게서 몰래 훔쳐 온 향 때문에 자기 사람들을 몇 명씩이나 잃었지만, 찍소리 한 번 내지 못하고 울분을 삼켜야만 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남을 죽이려다가 도리어 죽임을 당했다. 누군가에게 맞아 어금니가 깨져도 그 어금니를 목구멍으로 삼킬 수밖에 없는 꼴이 된 것이다.
대단하구나! 진안 군왕, 참으로 대단해!
아니지, 아니야.
진안 군왕은 절대 이 정도까진 못 할 거야. 이렇게 깔끔하고 철두철미한 수법을 쓰는 자는, 오직 그 여인밖에 없지!
정! 씨!
갑자기 고능준은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이어 그가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마당에 날카로운 비명들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토해진 붉은 색의 선혈을 보며, 막료들의 표정 또한 복잡해졌다.
또 피를 토하셨군.
지난번에 피를 토하셨을 때가 불과 얼마 전인데. 그럼, 또 세 번째로 피를 토하실 날도 올까?
막료들의 모골이 송연해졌다.
대체, 일이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정오가 될 무렵, 집으로 황급히 돌아온 황씨가 안아 달라며 떼를 쓰는 소보아를 뒤로하고 대청 쪽으로 뛰어갔다.
“여보, 여보.”
치마를 살짝 들고 뛰어가던 황씨가 문턱을 채 넘어서기도 전에 소리쳤다. 문 앞에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황씨를 향해 예를 올렸다.
“노야께선 지금…….”
시녀들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대청 안으로 들어선 황씨가 소리쳤다.
“여보, 큰일 났어요. 지금…….”
대청 안에 있던 범강림과 젊은 사내가 황씨를 쳐다보았다. 손에 든 술잔을 보아하니, 두 사람은 술을 마시고 있던 참인 듯했다.
황씨가 멈칫하고는 민망해하며 서둘러 예를 표했다.
“주 공자님.”
주복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하고는 손에 쥔 술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먼저 가 보겠소.”
주복이 말했다. 범강림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복을 배웅하자, 주복은 황씨를 지나쳐 밖으로 나갔다.
“여보, 방금 거리에서 들었는데, 청원현에 마적 떼가 나타나 사람들을 죽였대요. 어찌나 시끌벅적하던지, 오성병마사의 병사들까지 나섰더라니까요? 날짜를 셈해 보니, 시누이도 그쯤 갔을 텐데, 사람을 시켜서 한번 알아보는 게 어때요?”
황씨가 범강림에게 다가가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범강림이 밖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주 공자가 이미 가서 물어봤소. 성문에서 급보를 전하는 사람을 마주치게 되어, 경조부로 가 알아봤다더군.”
“정말로 마적이 난리를 친 거래요?”
황씨가 서둘러 물었다. 범강림이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렇소. 그리고 정말 많은 사람을 죽였어.”
범강림의 대답을 들은 황씨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혹여 정교랑에게 정말 무슨 일이 생겼다면, 주복이 여기까지 찾아와 범강림과 술을 마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황씨는 주복이 정교랑을 얼마나 끔찍이 여기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주복이 있을 때를 피해 이 일을 물어보았다. 주복이 이 소식을 듣게 된다면, 눈이 뒤집혀 칼을 들고 쫓아갈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죽임을 당한 사람들은, 우리도 알고 있는 자들이오. 누구인지 한번 맞혀 보겠소?”
범강림이 술잔에 술을 채운 뒤, 황씨를 향해 물었다.
황씨가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우리가 아는 사람이라고요?”
우린 경성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아. 그나마 알고 있는 사람들도 다 좋은 사람들이고. 그런데 그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황씨가 긴장한 기색으로 범강림에게 물었다.
“누군데요?”
범강림이 여유롭게 술잔을 들어 올리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고 관인.”
놀란 황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라고요?”
황씨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고능준의 셋째 아들이자 고씨 집안의 열넷째, 정사낭과 기루에서 화괴 다툼을 했던 그 고십사 말이오.”
범강림의 입가에 번진 미소가 점점 더 짙어졌다. 확실한 설명을 들은 황씨는 더욱 놀란 표정으로 재차 물었다.
“정말이에요? 설마, 그럴 리가 있어요?”
마적 따위가 어떻게 고씨 가문의 자제인 고 관인을 죽일 수 있지? 아니다. 고십사가 어쩌다 마적의 손에 죽임을 당한 거야?
값비싼 수레를 끌고 장사를 하러 다니는 거상도 아니고, 호위도 없이 혼자 다니는 서생도 아니고, 무려 고 관인인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를 가진 그 고씨 가문의 고 관인이?
“그럴 리가 없기는. 당초 아우들이 죽었을 때, 그 빌어먹을 놈들은 공로와 명예까지 빼앗아 갔소. 그때 당신은 아우들의 억울함이 풀리고, 명예를 회복할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이나 했소? 걸음마도 안 뗀 소보아가 관직을 얻을 거라는 예상은? 무원산 형제들의 미담이 경성뿐만 아니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갈 거라는 예상은? 그렇게 많은 서생이 우리 형제의 이름을 수없이 외쳐대며 글씨 연습을 할 날이 올 줄 알았냔 말이오.”
범강림의 말에 황씨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절대로 예상하지 못했죠. 그럴 날이 올 거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요. 우리처럼 미천한 사람들은 죽으면 죽는 거고, 죽고 나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게 당연지사니까요.
그런데 지금은 형제들의 미담을 모르는 사람이 없고, 문인들의 글귀에 쓰이고, 비석에도 새겨졌어요. 자신의 이름을 청사에 길이 남기겠다는 포부도, 그런 걸 말하는 거겠죠.
“그러니, 이 세상에 그럴 리 없는 일은 없소.”
그 여인이 있는 한.
범강림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젖히고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공주부 진(秦)씨 저택.
진 부인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서재로 향했다. 하지만 서재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문 앞에 여종이나 사환들이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 부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서재의 문을 벌컥 열었다.
서재 안에 홀로 앉아 있던 진 시강의 몸이 살짝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진 부인의 모습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인, 무슨 일이오?”
“십삼은 어디로 뭘 하러 간 거예요?”
진 부인의 얼굴에서는 평소 같은 웃음기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말했잖소. 오표(吳彪)의 생일을 맞아 나 대신 축하를 하러 갔다고.”
진 시강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진 부인이 그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난 십삼한테 미안해요. 내가 십삼을 불구로 낳아서요. 십삼을 그렇게 낳은 건, 일생일대의 가장 큰 잘못이에요.”
진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진 시강이 몸을 일으켜 진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게 어떻게 당신의 잘못이라는 것이오? 잘못을 따져야 한다면, 당연히 나의 잘못이거늘.”
진 시강이 다정하게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하자, 진 부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그의 손을 피했다.
“만에 하나 십삼이 죽게 된다면, 진칠낭, 당신은 평생 속죄해도 그 죄를 못 씻을 거예요.”
진 부인이 눈을 부릅뜨고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진 시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괜한 생각 마시오. 멀쩡히 살아 있는 애를 두고 왜 죽느니 사느니 하는 말을 하는지, 원.”
진 시강이 다시 진 부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바보인 줄 알아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손을 홱 내치며 눈물을 흘렸다.
“이 세상에서 고십사가 죽기를 가장 간절히 바라는 사람이 누구겠어요? 바로 십삼이에요! 십삼은 정교랑을 좋아하는 만큼, 고십사를 증오한다고요! 자기 목숨을 고십사의 목숨과 맞바꾸라고 해도, 십삼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큼 그렇게 하겠다고 할 아이예요.”
진 부인이 진 시강의 옷깃을 잡았다.
“십삼은 이미 미쳤어요. 그런데 당신까지 같이 미치면 어떡해요? 그리고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어요? 당신이 어떻게 십삼한테 그리 위험한 일을 시킬 수 있냐고요! 빨리 내 아들 십삼을 돌려놔요. 빨리 돌아오라고 하란 말이에요!”
진 시강이 진 부인을 품에 와락 끌어안고 토닥이려고 할 때,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진 시강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진 부인도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그 자리에 얼어버렸다.
이곳은 진씨 저택 안이었다. 이런 주제를 이야기하는 중에 이렇게 인기척도 없이 누군가가 들이닥친다는 것은…….
“아이쿠.”
문가에서 들려오는 낭랑한 목소리가 실내의 정적을 깨트렸다. 젊은 사내가 몸을 돌리면서 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자고로 예에 어긋난 것은 보지 말아야 하는데, 소자가 결례를 보였습니다.”
진 시강이 목구멍을 꽉 막는 듯한 숨을 드디어 토해냈다. 진 부인이 진 시강을 밀쳐내고 한달음에 진호에게 달려가 그를 품에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 못난 녀석아. 그 여인을 위해서라면, 이 어미도 필요 없다는 게냐? 이 불효막심한 것.”
진호가 헤헤 웃으면서 진 부인을 토닥였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아들의 마음을 쿡 찌르는 말씀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소자에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소자에게 여인이란 오직 어머니뿐입니다.”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제게 무슨 여인이 있다고요. 저한테는 이제 아무도 없습니다.
진 부인은 그 한 마디가 더욱 비수가 되어 가슴을 후벼 파는 듯했다. 진 부인이 목놓아 울면서 진호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이 바보 아들아. 이 바보 같은 녀석아!
“고십사가 죽었다고?”
같은 시각, 소식을 들은 진소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고십사가 마적에게 살해됐다니? 그럴 리가 있나?”
진소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마적의 소행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청원현에서 보내온 사람의 말로는 마적의 소행이라는데, 고씨 가문에서는 절대로 마적에게 당한 게 아니라고,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고 합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고십사가 정말로 죽었다는 사실이지요.”
수하가 대답했다. 진소가 여전히 떨떠름한 얼굴로 다시 물었다.
“정말로 고십사가 죽었다고? 게다가 마적의 손에? 그것도 귀향길에서?”
진소가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있나. 너무 공교롭…….”
공교롭다는 단어가 나오자, 진소는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친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마적! 청원현!”
지금 청원현을 지나는 사람은 고씨 가문뿐만이 아니야!
진안 군왕도 있잖아.
아니지, 아니지. 진안 군왕뿐만 아니라, 진안 군왕과 함께 송평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어.
진소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설명되는군.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어. 며칠 전부터 경성에 소문이 자자하던 청원현 마적 이야기도 고씨 가문에서 지어낸 이야기일 테고.
이래서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란 없다는 것이야. 모든 게 우연의 일치처럼 보이긴 하나, 다 어느 한순간을 위해 미리 짜 둔 계획인 게지!
“언제 일어난 일이냐?”
진소가 물었다.
“어젯밤입니다.”
수하가 대답했다.
어젯밤이라면, 비바람이 있던 평범한 밤이었는데, 그리 큰일이 벌어졌었다니. 그 당시 상황이 얼마나 살벌했을지.
진소가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하지만 결국 죽게 된 건 다른 사람이군.
진소가 병풍 앞에 멈춰 서서 그 위에 그려진 동그라미들을 빤히 바라보았다.
고능준이 깔끔하게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했던 건, 가는 길에 진안 군왕을 해치우기 위함이었다지만, 그 여인과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겠다고 했던 건 무엇 때문이지?
그 생각이 스치자, 진소는 눈앞이 번쩍 뜨였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을 찾아와 소란을 피운 탓에, 진소는 결국 굳은 결심을 하고 진안 군왕과 정교랑에게 경성 밖으로 떠날 기회를 주었다.
정교랑이 경성을 떠나는 일에 동의했으니, 고능준으로서는 진안 군왕을 해치울 기회가 생긴 셈이었다. 고능준에게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짐과 동시에 정교랑에게도 상대를 해치울 기회가 주어졌다.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이니까.
“고능준이 계획을 세우고, 나도 계획을 세웠지만, 이 모든 건 결국 그 여인의 계획 안에 들었던 것이로구나.”
진소가 병풍을 바라보면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붓에 먹물을 찍고 병풍 위에 진한 동그라미 하나를 천천히 그려 넣었다.
“부인께서 일찍이 계획하셨던 거로군요.”
마차 안, 고 선생이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이번에 진소가 군왕 전하를 탄핵하여 경성 밖으로 내쫓은 것 또한, 부인께서 진소와 미리 상의하신 일이었습니까?”
고 선생이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요. 나는 정말로 경성을 떠나고 싶었을 뿐인데, 공교롭게도 진 상공과 생각이 같았던 거죠.”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어 성공할 수 있었던 일이로군.”
진안 군왕이 끼어들어 말하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고 선생을 흘깃 쳐다보았다. 고 선생은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을 못 본 척하고 계속해서 정교랑에게 물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라…….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요. 부인께서는 진 상공이 원했던 것과 고씨 가문이 원했던 것을 모두 알고 계셨기에, 이번 일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그, 무슨 창 같은 걸 준비하여 매복에 대비하셨던 거고요.”
고 선생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부인께서는 고 관인이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아신 겁니까?”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이게 제일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야. 당시 매복 현장에서 고 관인은 보이지 않았거든.
“화약 안에 향료를 하나 섞어 넣었어요. 도망친 사람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 보고할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넝쿨을 더듬다 보면 참외를 따기도 하는 법이니 단서를 줘야죠.”
고 선생이 아, 하고 감탄했다.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그래서 부인께서 저희더러 그자들을 쫓을 필요가 없다고 하신 거였습니다! 호랑이를 산으로 돌려보내 그 소굴을 찾아내신 겁니다.”
정교랑이 잠자코 있자, 진안 군왕이 마른기침했다.
“전하, 경 공공이 특별히 두 분을 위해 심신 안정에 좋은 차를 달였습니다. 한번 드셔 보시지요.”
고 선생이 얼른 작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알고 있네. 그런데 조금 잠이 오는군.”
졸리다고까지 말했으면, 제발 말귀를 좀 알아들었으면 하네만.
고 선생은 애써 진안 군왕의 시선을 회피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는 머릿속으로 재빠르게 이번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 그자들이 제 주인을 찾아가지 않았다면요?”
고 선생의 물음에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항상 운이 따르던 편이라, 이번에도 운이 좋겠거니 싶었죠.”
운?
조금 전까지 철저한 계획하에 움직였다고 생각한 정교랑이 갑자기 운 이야기를 꺼내자, 심각하기 그지없던 일이 한순간에 한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운을 얕보면 안 돼요.”
정교랑이 고 선생의 표정을 읽은 듯 손끝을 살짝 비볐다. 정교랑의 손 안에 든 대전(大錢: 동전의 일종) 세 개가 어지러이 섞였다.
“운을 얻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그자들이 돌아가지 않았다면, 부인도 무탈히 돌아와 다음 기회를 기다렸겠지. 그들 또한 다음 기회를 노리며 또 나를 해치려 들었을 테니까. 그러니 굳이 그런 걸 생각해서 뭐하나? 기회가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지, 다음번을 노리면 되는 일이 아닌가.”
진안 군왕이 괜한 걸 묻는다는 듯이 고 선생에게 눈을 흘겼다.
하긴, 그건 그렇지.
고 선생이 머쓱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이번 일의 마무리는 확실히 하셨는지요? 혹 다른 사람이 발견하게 된다면…….”
계속해서 말을 잇던 고 선생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내쫓을 기세인 진안 군왕을 보고는 말하는 속도를 높였다.
“아, 저도 알고는 있습니다. 증거가 있든 없든, 고씨 가문에서는 분명 우리가 한 일이라고 확신하겠지요. 그러니까 제 말씀은, 그들이 세상 밖으로 가지고 나올 수 있는 명백한 증거를 남겨 둬서는 절대…….”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마무리는 내가 하지 않았어요.”
정교랑의 말이 끝나자마자, 마차가 멈췄다.
“전하, 역참에 도착하였습니다.”
문밖의 시종이 말했다.
고 선생이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와 밖에서 마차 휘장을 걷어 올렸다. 역참의 역승과 역졸들이 멀리서부터 진안 군왕 일행을 마중 나와 있었다.
“전하께서 무사히 도착하셔서 참으로 다행입니다. 신 등이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청원현에서 마적이 소란을 피웠다는 말에 어찌나 놀랐던지요.”
마적?
고 선생이 멈칫하다가 큰 깨달음을 얻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돌아보았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난 운이 따르는 편이라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말했다.
청원 역참은 경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관로 근처에 위치했기에 경성의 호화로운 객잔만큼은 아니어도 큼직하게 지어진 데다가 기둥에 정밀한 조각이 새겨져 있어 꽤나 근사하게 보였다.
게다가 역승이 미리 후원 건물을 통째로 비워 둔 덕에, 진안 군왕 일행은 편히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 때문에 길을 재촉하려던 사람들이 겁을 먹고 역참에 조금 더 오래 머물고 있었다. 그들은 진안 군왕을 구경하려고 마당 안에 빽빽하게 서 있었다.
“마적? 그야 당연히 알지.”
주위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은 진안 군왕의 시위가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우리도 오는 길에 마주쳤소.”
시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며 더욱 큰 소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로만 듣던 것과는 달리 직접 마적을 봤다는 사람이 나타나자, 마적에 관한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몇몇 사람들은 신분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위들에게 다가가 큰 소리로 묻기도 했다.
마당 안이 왁자지껄해지자, 경 공공이 고개를 돌렸다.
“다친 병사들을 돌볼 수 있도록, 뛰어난 의원을 데려오게.”
경 공공이 목청을 높여 외치고는 고개를 돌려 작은 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무슨 활로 쏘았는지 알아보지 못하는 의원으로다가.”
불러온 의원이 병사들이 신비궁에 맞아 다쳤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라도 한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마적을 마주쳤다는 말을 믿지 않을 것이야.
수하가 경 공공의 의중을 파악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게 바로 돌덩이를 들어 제 발등을 찍는다는 상황이로군.”
고 선생이 웃으며 마당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며칠 더 묵다 가야겠네. 주위가 흉흉하기도 하고, 우리도 크게 놀랐으니, 잠시 머물러서 요양 좀 하다 가지.”
진안 군왕이 고 선생에게 말했다.
며칠 요양 좀 하다가 가겠다고? 하루 이틀도 요양이고, 보름이나 한 달을 쉬어도 요양인데. 경성에서 지방으로 좌천된 관리들이 종종 이런 변명을 하면서 외직으로 가는 길에 시간을 끌기도 하지.
하지만 전하께서 길을 재촉하지 않으시겠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살인을 자행하는 마적을 마주쳤으니, 당장 경성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문제가 될 건 없어.
게다가 우리가 이렇게 벌건 대낮에 평민 백성들이 섞여 있는 역참에 머무른다면, 아무리 화가 나서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고능준이라고 해도 미처 손을 쓸 수 없을 것이야.
저만 남을 괴롭힐 줄 아는 줄 아나.
고 선생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마적에게 습격을 당했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까지 퍼져서, 경성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이번 일로 고씨 가문의 십사 관인이 죽었다. 고 관인이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것만으로도 경성이 떠들썩해졌는데, 비단 고십사뿐 아니라 진안 군왕까지 마적의 습격을 당했다고 하니, 온 경성이 발칵 뒤집힐 수밖에.
다행히도 진안 군왕 일행 중에는 마적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이 없고, 부상병만 몇 나왔다고 했다. 진안 군왕은 금군 병사들을 많이 데리고 갔으니, 아무리 겁 없는 마적이라고 해도 금군 병사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할 터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고십사는 시종들만 데리고 길을 떠났으니, 마적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게 이해가 가기도 했다.
마적이 황실 외척의 아들을 죽이고, 황실 종친을 습격했다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마적이 눈에 뵈는 게 없을 정도로 흉포한 놈들이라고 생각했다.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더 와전되어 갔다.
마적은 난적(亂賊)이 되고, 난적은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 마적이 나타났다는 소문은 청원 지역에 침투한 서쪽 오랑캐가 마적을 가장하여 종친을 습격하고, 곧 경성까지 치고 들어올 거라는 소문으로 번졌다.
대로에 있던 사람들은 곧 불안에 휩싸여 왁자지껄하게 떠들었고, 어떤 이들은 짐을 싸서 경성을 떠날 준비를 했다. 관부와 금군 병사들은 하는 수 없이 북과 징을 울려 괴소문을 잠재웠다.
“청원 현령은 끝장났군.”
북을 치면서 마적이 경성에 쳐들어오지 않는다고 외치는 관부 관졸들이 지나가자, 노점에 앉아 있던 한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다 그자가 자처한 일이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면, 가장 먼저 처단해야 할 사람은 바로 청원 지역 관리를 소홀히 한 현령 아니겠나.”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지글지글 맛있게 구워진 고기가 상에 올라오자,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술잔을 기울이며 고기를 집어 먹었다.
“자네 생각에는 어떤가? 정말로 마적이 나타난 걸까?”
가만히 고기가 익는 소리를 듣던 사내가 먼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반대편에 앉아 젓가락질을 하던 사내가 멈칫했다.
“정말 마적이 나타났는지 아닌지는, 우리가 얘기한다고 될 일이 아니야. 관부가 알아서 결론을 내리겠지.”
사내가 말하다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덧붙였다.
“오직 관부에서만 결론지을 수 있는 일이니.”
하지만 관부에서도 이 일을 쉽사리 결론짓지는 못하리라. 마적이 살인을 저질렀다고 하기에는 고씨 가문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고, 그렇다고 다른 결론을 내리기엔…….
사내가 젓가락질을 멈추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니까? 정말로 마적이 나타났어. 내가 뜀박질이 빨라 다행이지, 재빨리 숨지 못했으면 나도 십사 관인처럼 시체로 돌아왔을 거야.”
“그래, 그래. 나도 며칠 전부터 마적이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듣긴 했어. 그래도 여기는 천자께서 계신 경성이라 망정이지, 마적들이 그렇게 사람까지 죽여 가면서 겁 없이 활개 치고 다닐 줄 누가 알았겠나?”
길가에 서 있던 두 사람이 침을 튀기면서 열띤 대화를 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은근슬쩍 옆으로 다가와 이야기를 엿듣다가 하나둘씩 자기 일인 양 맞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이 모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들어내는군.”
사내가 시선을 거두고 고기 한 점을 집고는 고개를 저었다.
“어렵네, 어려워.”
새까만 밤하늘이 드리워진 황궁 안, 태후궁은 등불로 실내를 환히 밝히고 있었다.
태후가 씩씩대며 상소문을 집어 던졌다. 진안 군왕이 청원에 남아 며칠 더 요양하겠다는 내용의 상소문이었다.
“거기에 남아서 요양을 하겠다고? 정말 요양하겠다는 거야, 또 누굴 죽이겠다는 거야?”
태후가 격노하며 소리쳤다. 내시가 불안해하며 태후에게 말했다.
“마마, 중서문하성에서 비준한 일입니다. 게다가 군왕 전하를 경성으로 모셔 오라고 사람을 보내기도 했고요.”
황족 종친에게 큰일이 났으니, 조정 관리들이 위문차 진안 군왕을 만나러 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태후가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내시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마마, 군왕 전하께서는 중서문하성의 청을 거절하셨습니다.”
내시는 조금만 더 늦게 말했다가는 태후가 또 노발대발할까 봐 두려웠다. 역시나 내시의 말을 들은 태후는 더욱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약아빠진 놈! 억울한 척까지 하겠다 이거지? 고십사를 죽인 사람은 바로 그놈이다. 당장 가서 그놈을 경성으로 압송해라!”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내시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태후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증거도 없이 단순한 추측만으로 이를 사실로 만들 수 없다.
“마마, 증거가 없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증거? 그놈이 살인을 저지를 때는 증거가 필요 없다가, 애가가 그놈을 죽이겠다니까 증거를 운운하는 것이냐!”
태후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소리쳤다. 홧김에 뱉은 말이지만, 생각할수록 자신의 말이 꽤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놈이 놀라서 더는 길을 재촉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럼 아예 경성으로 데려오면 될 거 아니냐. 애가가 직접 진안 군왕의 놀란 가슴을 다독여 줘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태후는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흥분을 주체하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그 정도로 놀랐다면, 필시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을 할 것이고, 그 행동은 애가도 놀랄 만한……. 아니지, 그놈이 눈이 뒤집혀 태자를 놀라게 했고, 태자를 해치려 했다고 하면 된다. 그렇다면 한낱 종친 나부랭이인 그놈은 죽은 목숨이 될 테지.”
당장 궁에서 그놈을 때려죽인다고 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야.
뭐라고 하려거든, 그러라지. 어차피 그놈을 때려죽인 뒤일 텐데, 애가를 욕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어.
그래, 이 일은 그렇게 되어야 해.
태후가 손으로 밖을 가리키면서 내시를 향해 말했다.
“서둘러라. 애가가 말한 대로 처리해라. 당장 움직여!”
애들 장난도 아니고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내시는 경악했지만, 차마 속에 있는 말을 태후에게 하지는 못했다. 권력을 오래 쥐고 있을수록, 태후의 성격은 점점 괴팍해져 갔다.
“마마, 말로는 쉬워 보이나, 실제로 처리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아니면 고 대인께 한번 여쭤보심이 어떠신지요?”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고 대인 세 글자를 듣자, 태후가 눈물을 왈칵 쏟았다.
“지금 고 대인이 얼마나 속상해 하겠느냐. 그 와중에 아들을 보낼 준비까지 하고 있으니, 필시 속이 말이 아닐 게다. 머리가 하얗게 센 아비가 새파랗게 어린 아들을 보내는 심정이 얼마나 비통한지는 애가도 잘 알고 있느니라. 무려 고십사가 죽었어. 아이고, 불쌍한 십사야, 아직 혼사도 치르지 못하고 후손도 보지 못했는데.”
고 관인은 혼사를 치르진 않았지만, 그가 낳은 아이는 벌써 여럿이 있었다.
내시는 속으로 태후의 말을 정정하면서도, 이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하고 태후를 따라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십사는 애가를 위해서 직접 나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십사가 놈들의 손에 죽었고, 증거 없이는 범인을 잡지 못한다고 하니, 애가가 십사를 대신해서 진상을 밝히고 원수를 죽여야겠다!”
돌연 울음을 그친 태후가 고개를 들고 매서운 눈초리로 이를 부득 갈았다.
“고 대인은 할 수 없지만, 애가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어차피 체면은 바닥까지 내려놓았어. 군주가 신하에게 죽으라고 한다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법이니라. 애가가 기필코 그놈을 죽이겠다는데, 누가 내 앞을 막을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