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6화 (146/160)

-야살(夜殺)-

경 공공은 더는 조 집사를 상대하지 않고 그를 발로 차서 바닥에 넘어트렸다.

“전하, 소인이 사람을 데리고 쫓아가겠습니다.”

경 공공이 몸을 돌려서 진안 군왕에게 말했다.

“쫓아가?”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어디로 쫓아가겠다는 것이냐?”

사방은 이미 어두컴컴하고, 심지어 비까지 내리고 있는데.

“안 됩니다. 저희 아씨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던 조 집사가 조금 전에 발로 차인 곳을 어루만지면서 오만상을 찌푸렸다.

저 빌어먹을 태감 놈은 왜 이렇게 힘이 센 거야?

“자네는, 자네 아씨가 무사히 돌아올 거라고 굳게 믿는 겐가?”

잠자코 대화를 듣고만 있던 고 선생이 입을 열었다. 조 집사가 쓴웃음을 지었다.

예, 그렇습니다. 아씨께서 방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말을 듣고, 더는 따라가겠다고 애원하지 못했습니다.

제 마음속에 아씨는, 신과 다름없는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저희 아씨께서 무사하게 돌아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만약, 아씨께서 죽, 죽는다면, 죽을 운명이었으니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러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옆에 서 있던 반근과 소심이 참았던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신경 쓰지 말라고?

진안 군왕이 한숨을 토하고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경 공공이 이미 우산을 바닥에 내팽개친 지 오래인지라 진안 군왕의 얼굴에 빗물이 우수수 떨어졌다.

신경 쓰지 말라고?

신경 쓰지 말라고?

죽으면 죽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정방, 정말 그렇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단 말이에요?

큰길 위, 빗소리가 모든 것을 뒤덮고, 멀리서 횃불이 보이는 듯하다가 이내 사라졌다.

울창한 대나무숲을 지나가자, 멀리 밝혀져 있는 등불이 보일 듯 말 듯 했다. 불빛을 따라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니 작은 오두막 한 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관부에서 대나무숲을 지키기 위해 설치한 초소였다. 초소 안에서 따귀를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온몸이 진흙투성이가 된 사내 세 명은 얼굴의 상처를 매만질 새도 없이 바닥에 머리를 쿵쿵 찧었다.

“대인, 대인, 저희는 정말로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쾅 소리가 들리고, 벼락이 쳐서 불이 났습니다!”

“형제들이 반 이상은 죽어 나갔습니다.”

세 사람은 아직도 조금 전의 공포가 가시지 않은 듯 떨리는 눈으로 말했다.

한 사내가 그들의 얼굴을 냅다 발로 차버렸다.

“닥쳐라!”

사내가 고개를 돌리고 바닥에 앉아 있던 사람을 향해 소리친 다음 말했다.

“관인, 혹시 돌포탄이 아닐까요? 하지만 경성의 군감에서는 무기에 대한 감시가 몹시 삼엄합니다. 돌포탄은커녕 발석거를 옮기는 것조차 힘들 겁니다.”

횃불 아래 비친 고 관인의 안색이 붉으락푸르락했다.

“그건 군감의 돌포탄이다. 잊지 마라. 군감의 돌포탄이 어디서 온 건지! 그걸 만든 조상이 바로 정씨 년이야!”

초소 안에 정적이 흘렀다.

“그걸 잠시 잊었습니다. 아무런 낌새도 느끼지 못해서 몰랐는데, 또 그새 살인 병기를 하나 만들어 내다니.”

한 사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럼 이제 어떡하지?

“그 여인의 손에 또 뭐가 있을지 누가 알아! 일단 철저히 조사한 뒤에 다시 손을 써야겠다. 경성에서 송평까지는 아직 길이 많이 남았어.”

고 관인이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초소 안의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관인, 이곳에 오래 머무르시면 안 됩니다. 나머지 일은 저희에게 맡기시고 일단 돌아가시지요.”

사내가 말하고는 아직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세 사람을 죽 훑어보았다.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내가 알겠다는 듯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고 관인이 오두막을 나오자, 시종들이 서둘러 그에게 우의를 걸쳐주었다. 그의 등 뒤에서 둔탁한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이내 조용해졌다.

“태워라.”

고 관인이 말했다. 그가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인, 조심하십시오!”

옆에 있던 시종이 그를 확 밀치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고꾸라졌다.

고 관인이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보니, 화살 한 개가 시종의 목을 관통하고 오두막에 꽂혀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화살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자, 시종이 재빨리 소리쳤다.

“횃불을 꺼라!”

횃불이 꺼지고, 오두막 주위는 새카만 어둠 속에 잠겼다.

“이런 젠장! 어떤 새끼가 나를 죽이려는 거야?”

고 관인이 시종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게, 그런 꼴인가? 내 뒤에 서 있는 참새를 보지 못하고 매미를 잡아먹으려던 사마귀 꼴?

“사람을 불러라!”

시종이 소리쳤다.

날카로운 휘파람 소리가 비 내리는 하늘을 갈랐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들과 함께, 곳곳에서 쉭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공자님, 더는 버티지 못할 듯합니다. 놈들이 앞쪽의 포위를 뚫고 나갔습니다.”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오더니 소리쳤다.

비탈 아래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섰다.

“말을 타고 쫓아라. 고십사에게는 이제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공자님, 저희도 사람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시종이 말고삐를 잡고 외쳤다. 빗물 때문에 눈을 뜨고 있기도 힘든 상황인지라, 말을 하기 위해서는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아직 내가 있지 않느냐.”

공자님이라고 불리는 공자가 말 위로 몸을 날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일고여덟 명의 시종들이 그의 뒤를 재빨리 쫓아갔다.

앞쪽에서 질주하는 말굽 소리가 들려오고, 간간이 휘파람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설마 지원군이 있는 건가? 공자님, 섣불리 나서시는 건 안 됩니다. 돌아가시지요!”

시종이 소리쳤다. 하지만 공자는 그의 말을 무시하고 말에 박차를 가하며 활을 들어 올렸다.

“몇 명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내가 아직 살아있으면 충분하다.”

앞쪽과 점점 더 가까워지자, 사람과 말 몇이 흐릿하게 시야로 들어왔다.

스무 명이 넘잖아!

앞쪽에 있던 사람들도 공자 일행을 발견했는지, 누군가가 먼저 말고삐를 틀고 공자가 달려오는 방향으로 화살을 쏘았다.

“관인, 고작 일곱입니다.”

시종이 말했다. 고 관인이 헛웃음을 보이면서 고개를 돌렸다.

“일곱 명? 모조리 죽여 버려라. 누구인지 얼굴이나 한번 봐야겠구나.”

앞쪽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제히 말 머리를 돌리자, 공자 일행의 시종은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공자님, 말에서 내리십시오!”

시종이 잠시 멈칫하는 사이, 그의 옆에 있던 공자는 벌써 앞으로 질주하여 시종과 거리를 벌렸다.

“죽여라!”

“포위해라, 생포한다!”

욕하는 소리, 고함치는 소리, 기합 소리가 그를 향해 정면으로 덮쳐왔다.

말 위에 있던 공자는 몸을 옆으로 틀어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하고, 활시위를 놓아 반대편에 있던 사람 하나를 쓰러트렸다.

양쪽의 거리가 금세 가까워졌다. 말 위에 탄 사람들이 하나둘씩 장창과 칼을 꺼내 들었다.

“공자님, 안 됩니다. 쪽수가 너무 많습니다! 어서 가셔야 합니다. 큰일이라도 나면 안 된다고요!”

시종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여기서 무슨 일이 생긴다면, 끝장나는 건 비단 나 하나가 아닐 거야!

거센 바람이 불어오자, 공자의 두모가 위로 걷혔다. 새카만 어둠 속에서 그의 두 눈이 반짝였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 내가 아직 여기 있다고!

이렇게나 가까운데, 이렇게나 좋은 기회가 왔는데, 절대 놓칠 수 없어!

공자의 시야에 고 관인이 들어왔다. 하지만 금세 다른 사람들이 공자의 시야를 가로막고, 고 관인은 사람들 뒤로 종적을 감췄다.

에라이!

공자가 칼을 다시 칼집에 넣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때, 공자가 활시위를 놓기도 전에 반대편에서 사람들이 우수수 쓰러지기 시작했다. 멈칫하던 공자가 재빨리 활시위를 놓았다.

“뒤쪽에도 사람이 있습니다!”

경황없는 목소리가 산길에 울려 퍼졌다.

또 있다고?

고 관인이 고개를 돌렸다.

뒤쪽에서 들려오는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말과 함께 환한 불빛이 보였다.

사람들은 눈이 부셔 얼른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눈을 게슴츠레 뜨는 사이, 불빛 아래에 있던 이가 연달아 세 발을 쏘았다.

펑, 펑, 펑.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놀란 말들이 울부짖으며 말을 타고 있던 사람들을 떨어트리고는 그들을 밟고 지나갔다.

불씨가 꺼지자, 말을 타고 오던 사람이 활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 들어 휘두르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무기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신음이 어둠 속에서 울려 퍼졌다.

“공자님.”

공자가 잠시 멈칫한 사이, 시종들이 재빨리 공자를 따라잡아 호위했다.

“누굽니까?”

시종들은 흡사 늑대 한 마리가 양 떼에 달려든 듯한 광경에 깜짝 놀랐다. 자신들도 사람을 죽이러 왔다지만, 둔탁한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은 탓에 시종들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공자가 활을 내던지고, 칼을 뽑아 들며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또 한 번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불길이 화르르 타올랐다.

공자와 시종들은 그제야 불길 속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불길이 타오르던 그 순간, 불길 너머로 긴 머리를 풀어헤친 채 짧디짧은 대나무 통을 들고 있는 한 여인이 보였다.

“정 낭자!”

공격을 당하던 고 관인의 사람들과 공자 일행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그 외침이 끝나기가 무섭게, 정교랑의 앞에 서 있던 한 사람이 뒤로 쓰러졌다. 정교랑은 손에 쥐고 있던 대나무 통을 버리고 다른 손으로 단도를 꺼내 힘껏 내리쳤다.

불길이 꺼지고, 다시 사방이 어둠으로 뒤덮였다. 사람들의 귓가에 들리는 것은 오직 참혹한 신음뿐이었다.

정 낭자가 왔어. 정 낭자가 왔다고! 역시 정 낭자가 올 줄 알았어!

진호는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에 대고 포효했다. 그때, 말을 탄 사람 세 명이 진호를 향해 달려왔다.

“잘 왔다, 이놈들아.”

진호가 칼을 들고 세 사람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진호가 세 사람과 채 가까워지기도 전에, 뒤에서 또 한 번 날카로운 소리가 들려왔다.

빗소리와 바람 소리, 그리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혼잡하게 섞여 있었지만, 고 관인은 그 날카로운 소리를 놓치지 않고 들었다. 고 관인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려던 찰나, 유성처럼 반짝이는 무언가가 순식간에 날아왔다.

여인의 입에서 발사된 것이었다. 순간 반짝이는 불빛이 정교랑의 얼굴을 환하게 비췄다.

저 여인…….

얼굴과 몸이 온통 피로 물들었어. 바람에 휘날리는 장발이 꼭 사람을 잡아먹는 나찰 (羅刹: 야차와 함께 비사문천毘沙門天의 권속이라 하며 또는 지옥에 있는 귀신) 같단 말이야.

저 여인…….

내가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덕승루에서 고민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고 관인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차가운 무언가가 목을 관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고 관인은 재빨리 목을 붙잡고자 손을 들었지만, 손이 목에 채 닿기도 전에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내가 일찍이 죽였어야 했는데.

빗소리, 바람 소리, 비명 소리.

진호가 날렵하게 칼을 휘두르자, 고 관인을 지나쳐 달려오던 두 시종이 악 소리를 지르며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이 모든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났다.

진호의 시선은 시종일관 반대편을 향해 있었다. 바닥에 널브러진 시신들 위로 불길이 타오르자, 말에 타 있던 정교랑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였다.

자신이 쏘아낸 것이 틀림없이 고 관인의 목을 관통하리라 생각했는지, 정교랑은 제자리에서 말을 탄 채 한 바퀴 쭉 돌아보기만 하고 이쪽으로 달려오지는 않았다.

지금 가려는 거야!

진호가 재빨리 말에 박차를 가했다. 정교랑이 갑자기 진호를 향해 손짓하며 주위를 가리켰다.

비바람을 맞으며 달려가던 진호는 온몸이 빗물에 젖어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의 손짓을 보자, 불바다에 빠진 듯 온몸이 뜨거워졌다.

진호가 말을 멈추고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손짓을 했다. 정교랑은 진호의 손짓을 본 뒤, 곧바로 말고삐를 틀어서 왔던 방향으로 질주했다.

진호는 몇 걸음 더 쫓아갔지만, 이내 제자리에 멈춰 섰다. 큰길 위에 보이던 말이 새카맣게 드리워진 밤하늘 속으로 사라졌다.

말굽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질 때쯤, 눈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진호는 조금 전의 상황이 꼭 환각인 것처럼 느껴졌다.

얼굴을 못 본 지 정말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이야. 멀리서 잠깐 본 거긴 하지만 아무렴 어때. 그 여인을 봤다는 게 중요하지.

내게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또 한 번 그 여인과 함께 힘을 합쳐 누군가를 무찔렀으니까.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이곳에서 마주쳤어. 그 여인은 내가 이곳에 나타난 게 놀랍지도 않아 보였고, 단지 말없이 나를 향해 손짓을 한 번 하고, 내게 마무리를 맡겼지.

내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 묻지도 않고, 어떻게 해야 할지 설명하지도 않았어.

예전 그때처럼.

정 낭자가 날 믿는 거야. 정 낭자는 날 믿는다고!

진호가 고개를 젖히자, 빗물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가 하늘을 향해 힘껏 포효했다.

마지막 비명이 들려오고, 더 이상 바닥에서 움찔거리는 사람은 없었다. 큰길 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해졌다.

쉼 없이 내리는 빗방울이 와당에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사찰 안을 가득 메웠다.

낡은 사찰 주위로 횃불들이 환하게 밝혀져 있어 비가 오는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아 보였다. 사찰 안팎으로 시위와 금군 병사들이 바짝 경계하며 서 있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자, 사찰 입구를 밝히고 있던 횃불 두 개가 격하게 일렁이며 바닥에 늘어진 그림자를 더욱 길게 만들었다.

“전하, 안으로 들어가서 기다리시지요.”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빗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진안 군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뒷짐을 지고 먼 곳을 내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경 공공이 우산 한 개를 가지고 와 진안 군왕의 옆에 서서 우산을 펼쳤다. 하지만 그가 우산을 다 펼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그를 홱 밀쳤다.

“걸리적거린다.”

진안 군왕이 호통쳤다. 경 공공이 무슨 말을 하려던 찰나, 고 선생이 그를 향해 다가가 고개를 저었다.

빗속에서 어렴풋하게 말굽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자, 진안 군왕은 온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경 공공은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벌써 몇 번째 잘못 들으시는 건지. 마음이 평온하질 못하니 자꾸 환청을 듣는 게지.

이런 생각이 경 공공의 뇌리에 스칠 때, 옆에 서 있던 고 선생이 갑자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셨습니다!”

고 선생이 소리쳤다.

모두의 이목이 캄캄한 빗속으로 향했다. 말 한 필이 쏜살같이 달려왔지만, 말을 탄 이를 알아본 사람들은 다들 실망한 표정으로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말을 타고 달려온 사람은 주변을 수색하러 갔던 시종이었다. 사방으로 정탐을 나간 시종들은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날 때마다 자리로 돌아와 보고를 올렸다.

“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그러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는 대답만 몇 번이고 되풀이하던 시종이 이번에는 큰 소리로 다른 말을 외쳤다.

사람들이 아직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그 시위의 뒤로 또 다른 말 한 필이 질주해 왔다.

“아씨!”

반근과 소심이 소리치며 달려나갔다. 숨 막히는 적막으로 채워졌던 사찰 안이 순식간에 들끓기 시작했다.

정교랑을 향해 달려나간 이들은 모두 정교랑의 사람들이었다. 진안 군왕의 사람들은 제자리에 서서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 위에 탄 여인을 제대로 알아본 사람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 위에 앉은 정교랑은 온몸이 젖어 있었다. 암청색의 옷이 비에 젖어 색이 더욱 짙어진 듯했으나, 횃불에 비친 정교랑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옷 색이 짙어진 것은 빗물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피가 온몸에 뒤덮여 있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정교랑의 몸이나 말 안장 어디에도 무기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기를 엄청 많이 챙겨갔다고 하지 않았나?

“아씨, 아씨.”

반근과 소심이 목놓아 울었다. 정교랑은 말에서 가뿐히 뛰어내렸다.

“울지 마라. 어서 아씨의 목욕 시중을 들고, 옷도 갈아입혀 드려야지.”

조 집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둘러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던 반근과 소심은 입구에서 잠시 멈칫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내리는 비가 사찰의 열기를 차갑게 식혔다. 사찰 안팎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왕비 전하, 어딜 가셨던 겁니까?”

고 선생이 갑자기 큰 소리로 물으면서 정적을 깨트렸다. 경 공공도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왕비 전하, 어떻게 혼자 나가실 생각을 하신 겁니까? 너무 위험하잖습니까! 다들 초조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어서, 어서 들어와서 말씀을 좀 해 보시지요.”

경 공공이 정교랑과 진안 군왕을 향해 안쪽으로 가자는 손짓을 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상황을 무마해 보려던 경 공공만 민망해졌다.

그런데 그때, 반대편에 서 있던 정교랑이 돌연 웃음을 터트리더니 이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걸음걸이가 차츰 빨라지더니, 이윽고 뜀박질로 달려오기 시작했다.

창백한 얼굴에 온몸이 피로 물든 정교랑은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를 풍겼다.

대낮보다 환하게 밝혀진 횃불이 있고, 무기를 든 시위들이 사방을 호위하고 있었지만, 진안 군왕 쪽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살짝 몸을 떨었다.

설마 저대로 돌진해 오겠다는 건가?

군왕 전하의 몸으로는 저 여인의 살벌한 박치기를 감당해낼 수 없을 텐데.

경 공공은 바짝 긴장한 모습으로 정교랑을 막아낼 태세를 취했다. 하지만 그가 손을 내밀려던 찰나, 정교랑은 그를 지나쳐 진안 군왕을 향해 훌쩍 뛰어올라 그의 목을 팔로 감싸며 그에게 매달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정교랑의 행동에 다들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안 군왕도 갑작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진안 군왕은 뒤로 한 걸음 밀려나면서 자연스럽게 손으로 정교랑의 허리를 받쳤다.

“고십사가 죽었어요.”

정교랑이 말하면서 활짝 웃었다.

뭐라고?

주위 사람들이 경악했다. 누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정교랑은 사람들이 더욱 놀랄만한 행동을 했다.

정교랑은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꼭 끌어안은 채 그의 얼굴에 진한 입맞춤을 했다. 다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벼락에 맞은 사람처럼 넋이 나간 얼굴이었다. 그러나 정교랑은 자신이 한 행동이 아무렇지 않은 듯 팔을 풀고 유유히 안쪽으로 걸어갔다.

정교랑의 웃음소리가 사찰에 울려 퍼졌다.

“어서 아씨를 모셔라.”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조 집사가 외쳤다.

반근과 소심은 우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서 있다가, 조 집사의 말 덕분에 정신을 차리고 안쪽으로 뛰어갔다. 사찰 안팎으로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지금의 조용함은 조금 전의 숙연함과는 사뭇 달랐다. 사람들은 애써 시선을 피하거나 어색하게 고개를 돌려 헛기침을 하곤 했다.

진안 군왕은 조금 전 정교랑이 안겼던 그 자세 그대로 멈춰서 서 있었다. 하지만 정교랑이 오기 전까지 내뿜던 살기는 온데간데없어진 듯했다.

“전, 전…….”

경 공공이 말을 더듬으면서 입을 열자, 진안 군왕은 몸을 홱 돌리고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횃불에 비친 그의 귀는 이미 새빨개져 있었다.

부인께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마음 졸이며 그리 오래도록 기다리셨는데, 오자마자 남들 앞에서 전하를 놀리기나 하시고, 정말이지…….

정말 너무하네!

경 공공이 속으로 생각하며 동정과 분함이 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두컴컴한 밤길, 누군가가 화절자로 불을 켜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비췄다. 불씨를 피운 사내는 주위를 한 번 훑어보고는 재빠르게 불씨를 껐다.

사방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공자님, 다 처리했습니다.”

시종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그의 뒤에서 쇠로 된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건 조금 전에 주운 무기들입니다.”

“이렇게나 많다고?”

다른 시종이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칼, 장창, 검, 칼, 활과 입으로 불어 발사하는 표창,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대나무 통입니다. 여기 있는 열다섯 명 모두 정 낭자의 치명타 한 번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시종이 조용히 말했다. 사람들이 냉기를 들이마셨다.

무기 하나만 들고 싸운 건 아니라지만, 여인이 혼자 말을 타고 와서 순식간에 열다섯 명의 사내들을 죽였다는 사실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신선이 사람을 죽이는 법도 가르쳤나?

“그런데 정 낭자는 왜 굳이 고씨 가문의 사람들을 쫓아와 죽인 거죠? 설마 고씨 가문에서 매복을 해 뒀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요?”

시종이 진호에게 물었다.

영혼을 앗아가는 붓은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고, 비석 위에 한 글자가 새겨졌다. 이미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기회. 고씨 가문은 진안 군왕과 정 낭자를 한 방에 보내 버릴 기회라고 생각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는 정 낭자가 그들을 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던가.

정 낭자가 떠나고 싶지 않다고 할 때는, 그 누구도 정 낭자를 내쫓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저들은 정 낭자를 내쫓으며, 순순히 떠나는 낭자를 보고 내쫓긴다고 믿다니.

순진하군. 낭자는 쫓겨나는 게 아니라, 떠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떠나는 것뿐이야.

이 멍청한 놈들아. 아직도 정 낭자가 그리 만만해 보이더냐.

일찍이 말했잖아. 정 낭자는 아주 속이 좁은 여인이라고. 아주 아주 속 좁은 여인.

진호의 얼굴에 떠올랐던 미소가 점차 굳어졌다.

다만, 정 낭자는 좋은, 정말 좋은 여인이야.

진호가 삿갓을 쓰고 말 위로 몸을 날렸다.

“가자. 고 대인을 찾아가 자식을 잃은 슬픔을 위로해 드리는 걸 놓쳐서는 안 되지.”

두 시녀가 찬합을 들고 물러났다.

“하나도 드시지 않은 것이냐?”

고 선생이 조용히 묻자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들어가서 말씀을 올리는 건 괜찮지?”

고 선생이 다급한 듯 중얼거렸다. 경 공공이 손을 들고 고 선생을 제지했다.

“거 참 눈치도 없으십니다. 안에서 어떻게 싸우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괜히 가서 싸움 부추기지 마십시오.”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부부간의 사소한 일과 고십사를 죽인 일을 어찌 비하겠나!”

고 선생은 더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말했다.

고십사를 죽였어! 아니, 어떻게 고십사를 죽인 거지?

머릿속에 오만 가지 생각이 뒤죽박죽 섞였다. 이해가 갈 것 같다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하.”

참다 못 한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불렀다.

“썩 꺼지래도.”

칸막이 병풍 너머로 호통이 들려왔다. 고 선생이 민망한 듯 입을 다물자, 경 공공은 고소하다는 듯 낄낄 웃었다.

“그러게 내 뭐라고 했습니까. 전하의 마음속에서는 부부간의 사소한 일이 세상 그 어떤 일보다 더 중요하다니까요.”

칸막이 안, 의자에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욕을 마친 뒤, 깨끗하고 향기로운 내의로 갈아입은 정교랑은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늘어뜨린 채 베개에 기대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지금 정교랑은 조금 전 피비린내를 풍기며 달려오던 여인과는 딴사람처럼 보였다.

“정방, 정말로 나한테 할 이야기가 없어요?”

진안 군왕이 목소리를 낮게 깔고 물었다. 두 사람은 안쪽으로 들어온 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정교랑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정방!”

진안 군왕이 손으로 정교랑의 어깨를 확 붙잡자, 정교랑의 고개가 힘없이 옆으로 떨구어졌다.

안색이 살짝 발그레한 정교랑은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정교랑의 숨을 쉴 때마다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잠들었나? 이 상황에서 잠이 온다고?

진안 군왕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정교랑의 어깨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정교랑을 깨우려 했지만, 결국에는 손을 떼고 입술 끝까지 차올랐던 말도 삼켰다.

무기를 잔뜩 실어 떠났다가, 온몸을 피로 적신 채 빈손으로 돌아왔다. 위험천만한 싸움을 치르고 왔으니, 지쳐 잠드는 게 당연하겠지.

이곳으로 돌아왔으니 긴장을 풀고 마음 편히 잠든 거야.

진안 군왕은 입술을 꾹 다문 채 허공을 향해 소매를 홱 휘둘렀다. 탁자 위에 켜져 있던 촛불들이 일제히 꺼졌다.

아직도 밖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고 선생은 안쪽의 촛불이 꺼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잔다고? 이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잠이 온다고?”

“못 잘 건 또 뭡니까? 왕비께서 말씀하신 게 사실이라면, 오늘 밤 잠들지 못할 사람들은 우리가 아닐 겁니다.”

경 공공이 나지막이 말했다.

같은 시간, 경성에는 먹구름이 차츰 걷히고 비가 그쳤다.

주위가 조용해지던 무렵, 황씨가 갑자기 잠에서 깼다. 황씨는 등 뒤가 허전한 느낌에 몸을 뒤척였다. 당연히 옆에 누워있어야 할 사람이 없자,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평소 방 안에 야간 당직을 하는 몸종을 두지 않는 황씨였다. 황씨는 침상에서 내려오와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비가 그치고 밤하늘이 맑게 개어, 황씨는 등불도 켜지 않은 채 밖으로 나와 회랑 아래에 섰다. 찬바람이 불어오자, 황씨는 몸을 살짝 떨었다.

마당 안은 무척 고요했다. 그러나 귀를 기울이자, 어디선가 팍, 팍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후원에 있는 고방에 등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의 커다란 그림자가 창가에 비쳤다. 그 그림자는 물건을 높이 들었다가 세게 내리치는 동작을 반복했다.

대나무 대가 반으로 쩍 갈라지면서 바닥에 떨어졌다.

내의 차림의 범강림은 또 다른 대나무 대를 집어 들려다가 문밖에서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손을 멈췄다. 미간을 찌푸리고 문가를 쳐다보자, 문 앞에 서 있는 황씨가 보였다.

“당신, 지금 뭐 하는 거예요?”

황씨가 놀란 눈으로 사방에 널브러진 대나무 대를 보면서 물었다.

“날이 점점 더 추워지니까, 조금 더 서둘러 만들어야 소보아가 가지고 놀 수 있을 거요.”

범강림이 다시 도끼를 들어 올렸다. 팍 소리가 들리고, 대나무 대가 두 쪽으로 갈라지며 바닥에 떨어졌다.

며칠 전, 범강림은 소보아를 데리고 한 막료의 집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었다. 그 집에 대나무로 지어진 작은 집을 본 소보아가 똑같은 것을 갖고 싶다고 난리를 치는 통에, 범강림이 거죽을 사서 소보아에게 같은 모양을 만들어 주려던 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 야밤에 잠도 안 자고 만들 필요까진 없잖아요. 더구나 하인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씨가 실소를 터트리면서 말했다. 범강림이 머쓱하게 웃고는 도끼를 내려놓았다.

“잠이 안 와서 잠깐 밖으로 나왔는데, 어쩌다 보니 이곳에 있었소. 시간이 많아서 그냥…….”

황씨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또 잠을 못 잤구나. 시누이가 경성을 떠난 뒤로, 저이가 벌써 며칠째 밤잠을 설치는 건지.

“너무 걱정하지 마요.”

황씨가 안으로 들어가 옆에 걸려 있던 옷을 범강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사람도 많이 데리고 갔잖아요. 한 지역을 지나갈 때마다 관부 사람들이 나와 영접하고 배웅할 거예요. 송평까지 갈 길이 멀긴 해도 가난하고 이름 없는 집안의 사람들이 떠나는 것도 아니니까요.”

황씨가 주절주절 떠들어댔지만, 범강림은 부인의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떠난 지가 오늘로 며칠째지?”

범강림이 불쑥 물었다.

“이제야 이틀 됐어요. 내일이면 사흘째고요. 누이를 그렇게 신경 쓰면서 떠난 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몰라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범강림은 깊은 심호흡을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가서 좀 더 눈 붙이세.”

범강림이 말했다.

“곧 해가 뜰 시간이거든요?”

황씨가 탓하듯 대꾸했다. 두 사람이 고방을 떠나자, 저택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성 밖의 금군 군영에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대열을 갖추고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은 성을 순찰하고 돌아온 순성갑기와 마주쳤다.

“주 대인, 또 당직이십니까?”

순성갑기 대열을 이끌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주복을 불렀다.

“다른 이를 대신해 야간 당직으로 바꿨소.”

주복이 대답했다. 그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으로 주복을 배웅했다.

“일부러 괴롭히는 거네.”

병사 중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그러게 말일세. 주 대인은 진안 군왕비의 사촌 오라비잖나. 진안 군왕이 경성 밖으로 쫓겨나기도 했고, 군왕비는 고씨 가문과 악연이 있기도 하니, 주 대인이 경성에 편하게 계시기는 글렀지.”

다른 사람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고씨 가문도 경성 밖으로 쫓겨나지 않았나?”

옆에 있던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자, 주위에서 야유가 들려왔다.

“고씨 가문이 경성에서 쫓겨났다고는 하나, 경성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가 무엇인지 잊어선 안 되지.”

병사들의 수군거림은 밤바람을 타고 경성 곳곳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그 수군거림이 주복의 귓가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굳이 듣지 않아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를 빤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경성에 남아 이곳 위수영(衛戍營)에 소속되기로 한 그날부터,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서 뭐라 떠들고 다니는지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주복이 앞쪽을 내다보자 거대한 성문이 보였다.

“비가 그치다니, 참 재수도 없네. 비를 피해 어디 들어가서 잠깐 쉬다 보면 금방 날이 밝을 텐데.”

병사 하나가 작은 소리로 투덜댔다.

“이런 시간일수록 긴장을 늦춰선 안 된다.”

주복이 말했다.

“이런 시간은 무슨 시간입니까?”

병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횃불에 비친 주복의 표정은 어두웠다.

새벽이 지나 동이 틀 무렵은, 가장 졸리고 깨어 있기 버거운 시간이었다.

“태자의 국혼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의 수비를 더욱 철저히 해야 한다. 경계를 게을리 해선 안 돼.”

주복이 말했다.

태자의 국혼?

아, 그 바보 태자? 태자비가 될 사람이 진 상공 댁 딸이라던데, 걱정할 게 뭐 있다고.

병사들은 주복의 말에 알겠다고 대꾸한 후, 다시 정신을 차리고 순찰했다.

주복이 고개를 들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온 뒤의 하늘은 푸른 빛을 띠며 조용하고 평온했다. 그는 다시 앞쪽을 내다보며 병사들을 앞질러서 가장 선두로 달려갔다.

네 개의 성문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차츰 날이 밝기 시작했다. 밤을 꼬박 새운 병사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역력했다.

“이따 성문이 열리면, 가서 뜨끈한 탕이나 한 사발 먹어야겠어.”

“좋지. 서쪽 거리에 있는 그 집으로 가자고. 거기가 제일 잘해.”

말을 탄 병사들이 웃고 떠들면서 북문을 향해 갔다. 성문 가까이서 기다리다가, 성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갈 요량이었다.

가장 선두에 있는 주복은 병사들의 잡담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런데 주복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를 뒤따라오던 병사들은 하마터면 그와 부딪힐 뻔했다.

“주 대인?”

병사들이 놀라 소리쳤다. 주복이 앞을 내다보며 말했다.

“누가 온다.”

병사들이 주복의 시선을 따라 앞을 내다보자, 멀리서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말 한 필이 보였다.

“성문이 열리길 기다릴 거라면, 너무 이른 듯한데.”

병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매일 아침 성문이 열리기 전이면, 각지에서 길을 재촉해 온 사람들이 성문 앞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시간은 너무 일렀다.

병사들이 다가오는 사람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을 탄 사람은 일상복 차림으로, 급보를 전하는 역졸이나 전령병이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병사들은 안심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병사들은 조금 전 화제를 이어 계속해서 잡담을 나누며 여유롭게 말을 몰았다.

그러나 주복은 성문을 향해 달려오는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말을 탄 사람이 점점 더 가까워지자, 주복은 성문을 향해 문을 열라는 지시를 내렸다. 성문 위에 있던 수문장이 아래를 잠시 내려다보고는 성문을 열었다.

“들어갔네?”

병사들이 웃고 떠들던 것을 멈추고는 놀란 눈으로 성 안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전령병도 아니고, 급보도 아닌데, 어떻게 바로 성문을 지난 거지?

“도대체 누구길래?”

사찰 안의 모닥불이 꺼지자, 푸른 하늘색에 비친 사찰이 어둑하게 느껴졌다.

몸을 옆으로 돌리던 정교랑의 팔이 누군가에게 부딪혔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정교랑의 팔을 옆으로 밀어냈다.

정교랑이 눈을 뜨자, 옆에 앉아 있던 사람의 그림자가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는 게 보였다.

“정방, 어떻게 잠이 와요?”

정교랑이 눈을 뜬 것을 본 진안 군왕이 즉시 소리쳤다. 정교랑은 다시 눈을 감고 손바닥으로 진안 군왕의 다리를 다독였다.

“아직 이르니까 좀 자요.”

정교랑의 목소리에서 잠기운이 묻어났다.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정교랑의 어깨를 잡았다.

“곧 해가 뜰 시간이에요. 그리고 당신은 밤새 잤으니까, 충분히 잔 거 아니에요?”

베개를 베고 누워 있던 정교랑이 눈을 뜨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아직 더 자고 싶어요.”

정교랑이 피곤한 목소리로 말하자, 진안 군왕은 순간적으로 가엽다는 생각이 들면서 손에 힘이 빠졌다.

그리 무모한 일을 벌였으니, 당연히 힘들겠지. 생각해 보면 밤새 잔 것도 아니야. 몇 시진 못 잤으니 아직 더 자고 싶을 만도 해.

방 안이 조용해졌다. 어스름한 푸른 빛 속에 망설이는 진안 군왕의 표정이 보이자, 정교랑은 실눈을 뜨고 웃음을 터트렸다.

또 나를 놀린 거야?

진안 군왕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아까 내게 입맞춤을 했던 것처럼, 지금도 나를 놀리는 거야! 다른 게 있다면, 아까는 사람들 앞이었고, 지금은 단둘이 있다는 것뿐.

진안 군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정교랑의 어깨를 세게 쥐어 잡아당겼다.

“정방! 내가 정말 당신한테는 화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진안 군왕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고함쳤다.

벽에 기대 꾸벅꾸벅 졸고 있던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목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잠에서 깼다.

“깨어나셨소! 어서, 어서 일어나게나. 지금은 여쭤볼 수 있겠지?”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옆에 있던 경 공공을 부축해 몸을 일으키게 했다. 경 공공이 눈을 감은 채 고 선생을 붙잡았다.

“괜한 짓 하지 마십시오. 부부 사이의 대화는 이제야 시작이니.”

고 선생이 고개를 저으면서 불만을 표했다.

“대화를 하려면 어젯밤에 했어야지, 왜 지금까지 끌었겠나? 딱 봐도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인 상황이 아니란 말일세. 차라리 공적인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낫지.”

고 선생이 투덜댔다.

진안 군왕의 손에 붙들려 앉게 된 정교랑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나중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화내지 않을 거잖아요.”

정교랑의 웃음은 예전처럼 담담했지만, 진안 군왕은 화가 난 탓인지, 오늘따라 정교랑의 웃음 서린 눈이 자신을 놀리는 것처럼 보였다.

진안 군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 정교랑의 어깨를 놓았다.

“화는 안 나지만, 속상해요. 당신이 나를 믿어 주지 않는 게 속상하고,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게 속상하다고요.”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교랑이 자세를 고쳐앉고 진안 군왕을 향해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이 정방이 실례했습니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었어요.”

정교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나를 신경 쓴다는 걸 알기에 당신한테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번 일은 눈 깜빡할 사이에 적기를 놓칠 수도 있어서, 충분히 설명해 줄 시간이 없기도 했고요.”

정교랑이 또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방백종, 부디 용서해 줘요.”

“당신에게 당신만의 도리가 있다는 것도 알고, 나 또한 그 도리를 잘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방, 만에 하나, 당신이 실패하게 될 경우를 생각해 본 적 있어요?”

진안 군왕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실패했다고 해도,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었을 거예요.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면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요. 내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눈을 반짝이면서 대답했다. 정교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화를 버럭 내며 소리쳤다.

“조용히 해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방백종.”

정교랑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안 군왕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휙 나가 버리자, 정교랑은 옆에 있던 두봉을 걸치고 그를 쫓아갔다.

바깥에 서 있던 고 선생과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을 붙잡으려 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들을 본 척도 하지 않고 지나갔다.

“왕비 전하.”

고 선생과 경 공공이 밖으로 나오는 정교랑을 보고는 서둘러 예를 표했다.

“전하께서 어젯밤 왕비의 걱정을 너무 많이 하셔서 저러시는 겝니다. 그러니 왕비께서 전하와 잘 화해하…….”

경 공공이 은근히 타박하듯 말했지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그를 옆으로 밀쳤다.

“왕비 전하, 고 관인이 여기에 있을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리고 그자를 어떻게 죽였습니까? 정말로 죽은 걸 확인하셨습니까? 혹시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은 없는지요? 아니면 남겨 둔…….”

고 선생이 숨도 안 쉬고 묻자, 경 공공이 눈을 부릅뜨면서 그를 향해 소리쳤다.

“거 사람 참. 지금 그런 걸 물을 때입니까!”

정교랑은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이 일이라고!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거늘, 구체적인 상황이 어떤지도 모른다면, 어떻게 대처하려고 그러나!”

고 선생도 목청을 높였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정교랑은 두 사람을 지나쳐 밖으로 나왔다.

“왕비 전하.”

고 선생이 뒤늦게 정교랑을 불렀지만, 경 공공에게 붙잡힌 탓에 어쩔 수 없이 제자리에 서서 말을 덧붙일 수밖에 없었다.

“되도록 빨리 해결해 주십시오.”

빨리 전하를 잘 어르고 달랜 뒤에, 제대로 된 얘기 좀 해 봅시다.

경 공공이 고 선생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그를 흘겨보았다.

“지금 그 말 무슨 뜻입니까? 지금 전하께서 무작정 떼쓰고 있다고 여기는 거요?”

정교랑은 경 공공과 고 선생의 말싸움을 뒤로 한 채 밖으로 걸어 나왔지만, 진안 군왕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밖에 서 있던 시종들이 정교랑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음식을 하고 있던 반근과 소심도 몸을 일으키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조 집사는 말없이 정교랑을 향해 손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정교랑이 벽을 지나 사찰 뒤쪽으로 방향을 틀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진안 군왕이 보였다. 정교랑은 재빨리 그의 뒤를 따라갔다.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그걸 쓰면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요. 내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온몸에 불이 붙어서 내가 누구인지도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순식간에 폭발이 일어나서, 온몸에 불이 붙는다고. 온몸에 불이…….

진안 군왕은 떨려오는 몸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 뒤로 바짝 따라온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을 붙잡았다.

“방백종, 너무 괴로워하지 말아요.”

정교랑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괴로워하지 않을 이유를 단 하나라도 말해 줄 수 있어요?”

고개를 돌린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가 속상해하지 않을 이유는요?”

진안 군왕이 또 물었다. 그는 정교랑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사실 내가 괴로워하지 않거나, 속상해하지 않을 이유가 있기는 해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신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당신으로 인해서 괴로워하거나 속상해하지 않겠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속상해하지 않는 이유가, 그런 이유이길 바라요?”

진안 군왕이 말하다 말고 고개를 떨구었다.

“사실 이번 일의 이유는 딱 하나뿐이에요.”

고개를 든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죠.”

당신이 나를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죠.

진안 군왕이 뱉은 말은 흡사 어린아이의 투정처럼 들리는 우스운 말이었다. 하지만 정교랑은 웃지 않고 자신 앞에 어두운 표정으로 서 있는 사내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오 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 그는 과거 소년 시절의 풋풋함 대신 성숙한 사내의 진중함을 가지게 되었다.

“벌써 오 년이네요.”

정교랑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오 년?

아, 우리가 알게 된 지 벌써 오 년이 지났구나.

진안 군왕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을 느꼈다.

그때 산골짜기에서의 우연한 만남이 지금 같은 인연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 번의 만남 후에 영영 재회의 기약도 없이 지낼까,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한 번 만난 인연으로 서로에게 영원을 약속할까.

내가 원하는 건, 이 여인과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이다. 조금 전까지 담소를 나누다가도 돌아서면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죽는다면 그저 죽을 운명이었으니 피할 수 없는 것뿐이라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이 여인의 마음속에, 나는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사람이구나. 내가 이 여인 때문에 기뻐하든, 죽을 만큼 괴로워하든, 나의 그런 감정들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을 정도로 가벼운 사람이라는 뜻이겠지.

진안 군왕이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고 걸음을 옮겼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소매를 붙잡았다.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추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부른 뒤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새벽녘의 푸른 빛을 두른 사찰 밖,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이 여인은 거짓말을 할 줄 몰라.

입을 다문 정교랑을 바라보던 진안 군왕의 눈가에 슬픔이 비쳤다.

“됐어요.”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고 자신의 소매를 붙잡고 있는 정교랑의 손을 다독였다.

“내가 너무 놀라서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됐나 봐요. 실언을 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새벽빛을 등지고 서 있는 진안 군왕의 준수한 용모가 보였다. 하지만 그 용모와 대조되는, 살짝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거뭇한 이빨은 다소 보기 흉했다.

정교랑이 찬찬히 위에서부터 아래로 진안 군왕을 훑어보았다. 최근 몇 번에 걸쳐 계속 몸이 상해서 그런지, 원체 키가 큰 진안 군왕의 모습은 보다 더 핼쑥해 보였다.

조금만 더 살집이 있거나, 더 건장하다면 참 좋을 텐데.

정교랑이 다시 시선을 떨구자, 진안 군왕이 또 웃었다.

“나도 알아요. 그리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이런 일들은 사소한 거라고요. 이렇게 내 감정만 앞세우며 당신이 나처럼 되기를 바라서는 안 되는데.”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토닥였다.

“어쨌든, 괜찮아요. 당신이 무사히 돌아왔으니까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가지고 괜히 고민하며 괴로워하지 않을게요. 이제 우리 슬슬 돌아가 볼까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이야기해 봐야죠.”

진안 군왕이 손을 거두고 정교랑을 지나쳐서 사찰 쪽으로 걸어갔다.

진안 군왕이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갔을 때, 정교랑이 뒤에서 그를 와락 껴안았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내가 그때 했던 생각은, 만일 내가 죽는다 해도 당신이 있으니까…….”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죽어도, 당신이 나 대신 마무리를 해줄 테니까…….

내가 죽어도, 당신은 스스로를 잘 지켜낼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죽어도, 당신이 나 대신 복수해 줄 테니까…….”

정교랑은 손에 힘을 주며 진안 군왕을 더욱 꽉 끌어안았다. 등 뒤에 있던 정교랑이 자신에게 더 가까이 밀착한 것이 느껴졌다.

“당신이 있어서, 나는 죽기를 각오할 수 있었어요.”

진안 군왕은 누군가에게 가슴팍을 세게 걷어차인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동시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히 슬픈 말들인데,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붉어지는 거지? 이런 것도 사랑을 속삭이는 말의 일종인가? 그런 말을, 이런 식으로도 할 수 있는 건가?

이 여인, 생각보다 사람을 너무 잘 달래잖아. 이렇게는 넘어가서는 안 돼. 이런 두어 마디 말로 얼렁뚱땅 넘어가서는 안 된다고!

진안 군왕이 심호흡을 하고 몸을 돌리려 했지만, 정교랑은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뒤돌아서지 못하게 했다.

“다들 ‘살아야 한다, 잘 살아 있는 게 제일 중요한 거다’라고 말하는 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꼭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누군가에게는,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들이 있고, 그 일을 해내지 못한다면 숨이 붙어 있다고 해도 잘 살아 있는 게 아니잖아요.

방백종, 나도 당신과 잘 살아가고 싶어요.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들이 있어요.

당신에게도 당신이 해야만 하는 일들이 존재하듯, 나 또한 그래요. 내가 당신을 신경 쓰지 않아서, 당신을 믿지 않아서 아무렇게나 내 목숨을 내놓는 게 아니에요. 꼭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고, 그 일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려서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혹 당신이 죽는 날이 온다면,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아무런 걱정도 염려도 없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다 갔으면 해요. 내 걱정은 하지 않고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당신의 처지가 나보다 훨씬 더 처참하니, 나는 당신이 홀로 고통과 복수심을 떠안고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정교랑이 눈을 감자,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의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들었다. 가을 아침, 눈물에 젖은 진안 군왕의 가슴이 더없이 따스하게 느껴졌다.

“사실 나는 이런 식으로 한 번 죽었던 적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당신보다 더 비참하죠.”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이 풉 하며 웃음을 터트리고는 정교랑의 얼굴을 손으로 받치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정방, 우리 지금 사랑을 속삭이고 있는 게 맞나요?”

진안 군왕이 눈빛을 반짝이며 물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쩜 누가 누굴 더 좋아하느니 마느니 이야기할 때조차 누가 더 비참한지를 겨루는 거 같죠?”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이마에 또 입을 맞췄다.

“자, 이제 돌아가요. 그 일의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이야기해 봐야 하니까.”

그러나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놓아주지 않았다.

“급할 거 없어요. 이미 누가 해 줬거든요.”

누가?

진안 군왕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도, 더는 묻지 않고 빙긋 웃으면서 정교랑을 꽉 끌어안았다.

“그럼, 조금만 더 이렇게 안고 있을게요.”

걷지도 않고 이야기도 나누지 않으면서 부둥켜안은 채 제자리에 선 두 사람을 보며, 경 공공과 고 선생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젠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을 셈이시로군.”

경 공공이 작게 투덜거렸다.

“곧 해가 뜰 텐데.”

고 선생이 하늘을 가리키면서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흠, 화창한 대낮인데 체통을 지키셔야지요.”

경 공공이 맞장구쳤다. 고 선생은 마음이 급해져 벽을 잡고 투덜댔다.

“아니 내 말은, 곧 해가 뜰 텐데 이제 제발 일 이야기 좀 하면 안 되겠냐는 거지! 이대로 해가 뜨면, 그때는 우리가 손써 봤자 소용없을 거라고! 도대체 뭣들 하시는 거야? 답답해 죽겠네!”

같은 시각, 진안 군왕 일행이 머무른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인 청원 지역의 현령(縣令)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아직 등불이 켜지지 않은 방 안은 어두컴컴했다. 현령이 탁자에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자, 침상에 누워 있던 미인이 휘장을 살짝 걷고 나른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노야?”

어둠 속에서 한 사내가 오만상을 찌푸리고며 다리를 문지르고 있었다.

“노야, 차를 드시려고요? 소첩이 우려 드릴게요.”

미인이 침상에서 내려와 현령에게 가까이 다가오자, 현령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미인을 침상으로 밀쳤다.

“됐다, 가. 다시 가서 자라.”

현령이 성가시다는 듯이 말했다. 미인이 침상 위로 쓰러졌다.

“노야, 왜 그러세요? 요 며칠은 계속 딴생각만 하시는 거 같고.”

미인이 억울한 듯 투덜대다가 콧방귀를 뀌었다.

“혹시 또 부인께서 뭐라고 하신 거예요?”

현령이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머릿속에 든 거라고는 그런 생각밖에 없지?”

현령이 손끝으로 미인의 이마를 툭툭 밀었다.

“네 노야가 무슨 큰일을 할 건지는 알고 있느냐?”

“저야 모르죠.”

미인이 대답했다.

“모르면 가서 잠이나 자라. 괜히 방해하지 말고. 더 방해했다가는 확 팔아 버릴 테다.”

현령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미인은 분한 표정으로 씩씩대다가 소매를 홱 털고 침상 안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현령이 탁자에 손을 올리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던 중, 차를 마시고 싶냐는 미인의 말이 생각나자 어쩐지 목이 말라오기 시작했다. 그가 주전자를 들어서 차를 따르고, 차를 입에 한 모금 머금었다.

그때, 문밖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차를 마시던 현령은 사레가 들려 격하게 기침을 해댔다.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새벽부터 왜 소리를 지르고 이래요? 노야께서 깜짝 놀라 돌아가실 뻔했잖아요!”

미인이 재빨리 현령의 등을 토닥이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현령은 미인의 손길을 거부하며 그녀를 옆으로 밀쳤다. 그러고는 기침이 멈추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밖에는 미간을 찌푸린 채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냐?”

현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큰일 났습니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현령은 일순간 심장이 멈춘 듯했다. 그가 기침을 멈추려고 가슴을 손으로 꾹 눌렀다.

“성공했느냐?”

그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새벽에 소식을 전해 온 사람이 있어서, 소인이 먼저 가 보았는데…….”

조금 전에 목격한 광경이 머릿속에 떠오른 남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말, 너무도 참혹했습니다.”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노야, 곧 해가 뜰 테니, 서두르시지요.”

현령이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밖을 내다보았다.

가? 말아? 해? 말아?

이건, 목이 날아갈 대죄를 짓는 일인데…….

그렇지만, 십 년이라는 세월을 공부에 매달린 끝에 어렵게 얻어낸 문관 자리야. 이젠 높은 관직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는데.

“노야, 시간이 없습니다. 노야께서 안 가셔도 어차피 저쪽에서 사람을 보내올 겁니다. 그럴 바에야 그분들께 잘 보이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현령의 고민을 눈치챈 듯 말했다.

“썩 내키지 않는 소문이 도는 것은 불가피하겠지만, 그보다 실질적인 권력을 손에 거머쥘 기회이지 않습니까. 소문이나 유명세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지만, 권력은 노야의 생사를 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 십여 년을 공부만 해서 얻어낸 문관이야. 이젠 더 높은 관직으로 올라갈 일만 남았어. 이 기회를 절대 놓쳐서는 안 돼!

현령이 무언가를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다리를 탁 쳤다.

“가자.”

그는 관복도 챙겨 입지 않은 채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서 가서 사람을 불러오너라. 북과 징을 울리고, 병사들을 모아 마적을 소탕해라!”

남자가 재빨리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성, 고능준의 저택.

잠을 자던 고능준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터라, 어둑한 휘장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휘장을 바라보며 잠시 넋을 놓던 고능준이 손으로 가슴을 눌렀다.

악몽을 꾼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

흉조인가?

뇌리에 이 생각이 스치자,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몸을 일으켰다.

난 징조 같은 걸 믿지 않는 사람이야. 아무래도 긴장이 되니 악몽을 꾼 거겠지.

그 일이 성공한다면 곧바로 다음 단계에 착수할 수 있도록, 혹 실패한다면 말끔하게 꼬리를 자를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었다만, 아직 소식이 전해지기 전이니 마음이 불안한 건 어쩔 수 없군.

고능준이 휘장을 걷자, 푸른 새벽빛이 침상 안으로 들어왔다.

곧 해가 뜰 테니, 이제 곧 소식이 들려오겠지.

“여봐라.”

고능준이 입을 열었다.

문밖에 서 있던 시녀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와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꿇어앉았다. 한 명은 고능준에게 신발을 신겨 주었고, 다른 한 명은 고능준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고능준이 찻잔을 받아 차로 입가심을 한 뒤, 자신의 앞에 무릎을 꿇어앉아 있던 시녀에게 차를 뱉었다. 고능준은 타구에 냄새가 나는 것을 싫어해 타구를 따로 쓰지 않고, 시녀를 타구로 쓰고 있었다.

몸을 깨끗하게 씻은 고능준이 회랑 아래로 나왔다.

어제 큰비가 내렸던 터라, 마당 바닥이 깨끗하지 않았다. 그래서 고능준은 마당 대신에 회랑 아래서 한바탕 권법을 연마했다.

새들이 지저귀고, 마당에 있던 시종들도 분주하게 움직이며 청소를 시작했다.

공수도를 끝낸 고능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이때,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왁자지껄한 소리가 마당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다급하게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온 사람은 고능준을 보자마자 회랑 아래로 다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고능준의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의 손에 쥐여 있던 얇은 대오리는 살짝씩 흔들리고 있었다.

“왜? 일이 잘 안 풀렸느냐?”

고능준이 물었다. 무릎을 꿇은 사람이 바닥에서 큰절을 올리며 울음을 터트렸다.

“대인, 관인께서, 가셨습니다.”

마당 안에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자, 시종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관인께서, 가셨다고? 어딜 갔다는 거야?

고능준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인, 대인.”

울고 있던 사람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면서 말했다.

“십사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선가 처량한 새 울음소리가 들려오다가 돌연 잦아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롱 안에서 지저귀던 새가 목에 대오리가 꽂힌 채 날개를 파들거리고 있었다.

마당 안에 정적이 흐르고,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고능준이 고개를 돌리고 무릎을 꿇은 사내를 바라보며 한 글자씩 천천히 말을 뱉었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고능준은 놀란 기색 없이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을 받은 사내는 간담이 서늘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 십사 관인께서 살해당하셨습니다.”

사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다시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울먹였다.

고능준이 천천히 회랑 아래로 내려왔다.

“십사 관인? 어느 십사 관인 말이더냐. 경성에 관리가 그렇게 많은데, 어느 십사를 말하는지를 제대로 고해야 할 것 아니냐?”

어느새 무릎을 꿇은 사내의 바로 앞까지 온 고능준이 그를 내려다보며 허리를 살짝 숙였다. 서서히 밝아지는 하늘빛이 사내의 머리 위로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사내는 차마 고개를 들 엄두조차 내지 못하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능준이 거대한 산처럼 온몸을 억누르는 듯한 느낌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대인!”

사내의 뒤를 따라 들어온 막료들도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중 한 막료가 침통하고 황망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부디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사내의 뒤를 따라 무릎을 꿇은 사람들을 본 고능준이 웃음을 터트렸다.

“슬픔을 거두라고? 내가 거둘 슬픔이 무엇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설마 우리 십사가 죽었다고 말하는 게냐? 나 고능준의 아들이 죽을 리가 있느냔 말이다!”

고능준이 무릎을 꿇은 사내를 향해 돌연 발길질을 했다.

“나 고능준의 아들이, 어떻게 죽겠느냐고!”

얼굴이 파랗게 질린 고능준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내를 향해 삿대질을 하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다.

흐느끼는 소리가 대청 안에서부터 새어 나왔다. 하늘에 드리워진 먹구름이 고씨 저택 안에 내려앉은 듯했다.

“대인, 부인들께서는 모두 무사하시다고 합니다. 사직하신 송 대인 댁을 지나가다가, 그쪽에서 하루 묵고 가라고 청하여 그곳에 머무르셨다고 합니다.”

한 막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의자에 앉아 무릎에 손을 올린 채 눈물을 흘리던 고능준이 대꾸했다.

“그렇다면 십사는 왜 따라간 것인가? 움직이지 말고 거기 가만히 있으라고 했을 텐데?”

분을 이기지 못한 고능준이 탁자를 뒤엎자, 대청 안에 서 있던 막료들이 뒷걸음질 쳤다.

“그 많던 놈들은? 십사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던 놈들 말이다. 그놈들은 대체 어떻게 호위를 한 것이냐? 십사가 죽는 꼴을 멀뚱히 서서 보고만 있었다고 하더냐!”

고능준이 소리쳤다.

“대인, 십사 관인께서는 매복 지점으로 가지 않으셨습니다. 대인께서 분부하신 대로만 움직였습니다. 예전에 알던 지인을 잠시 보고 온다고 하신 뒤, 매복 지역이 아니라 다른 길가로 가 잠자코 기다리셨습니다.”

한 막료가 재빨리 대답했다.

“그래, 그래. 내 그럴 줄 알았지. 우리 십사가 가끔은 황당한 일을 벌일 때도 있지만, 일을 할 땐 내 말을 참 잘 들었거든.”

고능준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십사야, 나의 십사야.

“대인, 대인, 십사 관인께서는 떼죽음을 당하신 겁니다.”

막료가 말했다.

“소인이 도착했을 때는,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두 한곳에 죽어 있었습니다. 그때 소인이 본 바로는, 한 명이 모두를 죽인 게 아니라 여러 사람에게 쫓겨 죽은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각자 입은 치명상이 전부 달랐고, 관인께서는 표창에 목이 뚫려 돌아가셨습니다. 상대가 몇 명인지 알 수 없어서, 소인 또한 그 자리에 오래 남아 있지 못하고 서둘러 소식을 전하러 돌아왔습니다.”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 바닥에 꿇어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뚫려서…….

자기 아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듣는 아비보다 더 비통한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고능준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누구의 소행인지 조사하고 있습니다.”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조사할 필요 없다. 조사할 게 뭐 있느냐? 딱 봐도 빤히 보이는 것을.”

내가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그 또한 나를 죽이고 싶어 했겠지.

이번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그 기회는 나의 것이기도 했고, 상대의 것이기도 했어.

고능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큰일이다!”

비통했던 고능준의 표정이 급변했다.

청원 현령이 갑자기 재채기를 했다.

서서히 밝아지는 아침 햇살이 간밤의 스산함을 덮었지만, 눈앞의 광경을 본 현령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체들은 모두 길가로 치워졌고, 한 사람이 시체 위로 하얀 천이나 덮개를 하나씩 덮어 주었다.

단순한 마적의 습격이라면 관부가 이렇게까지 나서서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자신이 마주할 사람이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던 현령은 성의를 보이기 위해 일부러 직접 사람을 대동하여 수습에 나섰다.

지금 그의 눈앞에 놓인 시신 위에는 아직 덮개가 덮이지 않았다. 난도질당한 시체의 옷에는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고, 굵은 목 위로 보이는 험하게 일그러진 표정은 죽기 직전의 고통을 고스란히 말해 주고 있었다.

“고, 고…….”

현령이 턱을 떨면서 간신히 한 글자를 내뱉었다.

“노야?”

옆에 있던 시종이 의아한 얼굴로 현령을 불렀다.

노야께서 왜 갑자기 놀라시지? 너무 많은 시신을 한꺼번에 봐서 겁먹으셨나?

음, 그럴 수도 있지. 여기에 오신 이후로 노야께서는 계속 시선을 피하고 계셨어. 보고 싶긴 한데,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시겠지. 봐야겠다고 굳게 마음먹고 슬쩍 보셨겠지만, 워낙 처참한 광경이라 충분히 놀라실 만도 해.

현령이 말을 잇지 못한 채 자신 앞에 놓인 시신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었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이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발바닥을 핥아 주겠다며 줄을 섰을까? 저들이 지금처럼 하찮은 눈빛으로 이 사람을 내려다보는 일은 결코 없었을 텐데. 절대로.

게다가, 저들은 이게 누구 시신인지도 알아보지도 못해. 하긴, 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분을 잡일이나 하는 관졸들이 알아볼 리가 있나? 이분을 생전에 한 번이라도 볼 수 있었다면, 향불을 피우며 조상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기도 바빴을 테지.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곳에 있는 분이라.

그렇지, 나도 이분을 한 번 뵙고자 몇 번이나 거금을 건넸어.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잠시 결원이 생겼던 현령 자리를 꿰차게 되었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시신이 되어 버린 거지?

아닌데, 이게 아닌데? 전에 이야기했던 건 이런 상황이 아니었는데?

* * *

작가의 말:

남송 시대의 사경인(謝景仁)이라는 관리는 청결을 따지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매번 침이나 가래를 뱉을 때 타구를 쓰지 않고 자신의 시중을 드는 하인의 옷에 뱉는 대신 그 하인에게 하루 치 휴가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하인들은 휴가를 얻기 위해 사경인의 타구를 앞다투어 자처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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