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24권
-작별-
진안 군왕이 궁금해하며 손을 내밀었다.
“그게 뭔데?”
반근이 진안 군왕에게 상자를 내밀었다. 진안 군왕이 상자를 열고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와당?”
진안 군왕이 상자 안에 놓인 와당을 이리저리 보면서 물었다.
분명 평범한 와당인데. 마감이 조잡해 보이기도 하고. 이런 걸 몸에 지니고 다닌다고?
“강주에 있는 사람들이 내게 선물해 준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아, 하고 대꾸한 다음,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정 대노야 가족이 준 건 절대로 아닐 거야.
아, 옛날에 그쪽을 지나간 적이 있던 거 같은데, 어지럽고 지저분했던 그 동네…….
남정.
이 여인이 한 손으로 일으킨 그 남정의 사람들이겠지? 아, 일으켰다고 하기엔 좀 그렇고. 아주 사소한 수고를 들인 곳이라고 해야겠네.
사소한 수고를 들였을 뿐인데 진심 어린 보답을 받는다면, 무척 소중한 경험이긴 하지.
진안 군왕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 여인은 정말 선량하고, 누구보다도 쉽게 감동하는 사람이야.
“정말 부럽네요. 나는 아무한테도 저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 본 적이 없는데.”
진안 군왕의 말에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이게, 귀한 선물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사람이 아닌가 봐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흘겨보았다.
해가 들어와 밝아진 방 안, 정교랑의 버들잎 같은 눈썹과 커다란 눈, 살짝 올라간 눈매, 고개를 들면서 얼굴 윤곽을 따라 옮겨가는 빛이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장난스러운 말투 때문인지 평소 단정하고 우아해 보이기만 하던 정교랑에게서 은근한 교태가 느껴졌다. 처음 보는 정교랑의 모습에 진안 군왕은 놀라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미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예전에는 그 사실이 크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얼마나 미인인지 새삼 실감했다.
넋이 나간듯한 진안 군왕의 모습에 반근은 얼굴을 붉히며 조용히 물러났다.
정교랑은 눈짓 한 번과 말 한마디를 던진 후, 다시 책을 읽으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정교랑의 옆자리로 다가가 정교랑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헤헤 웃었다.
“그러게요. 내가 틀렸어요. 당신이 내게 준 선물은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귀한 선물이에요.”
그 선물은 내 목숨이었으니까요.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이어서 책을 펼쳤다.
정교랑은 자신의 옆에서 몸을 비비적대던 진안 군왕이 천천히 자신의 팔을 잡는 듯한 느낌이 들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정방, 당신은 정말 예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예상치 못한 대답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윽고 그는 정교랑의 어깨에 머리를 묻고 하하 웃었다.
“당신은 몰라요. 당신은 정말 모를걸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은 더는 진안 군왕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책을 마저 읽었다.
그런 정교랑의 모습에 진안 군왕은 마음속의 무언가가 깨지고, 동시에 손발이 갑자기 자유로워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을 오후의 따스한 햇볕이 창가를 통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끌어안은 대로 품에 기댄 채 여유롭게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여유로웠으며, 격식 없고 자유로웠던 것처럼 느껴졌다.
“이 책들은 다 몸에 지니고 다니는 거예요?”
“하긴, 오래 가야 하니까, 다 챙기는 것도 좋겠죠.”
“그런데 마차에 탈 때는 최대한 책을 덜 보는 게 좋을 거 같은데. 눈 아프잖아요.”
“혹시 모레 출발하는 건 너무 이르진 않아요?”
“아니다. 이왕 갈 거라면 일찍 출발하는 게 더 좋으니까, 내일 떠나는 건 어때요?”
진안 군왕이 주절주절 말을 걸었지만, 정교랑은 가끔 음, 하고 대꾸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정방, 나도 꽤 잘생겼어요. 나 좀 봐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반근의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부인, 큰 도련님께서 보낸 사람이 물건을 가지고 왔어요.”
진안 군왕이 무의식적으로 손을 놓자,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가서 보고 올게요.”
정교랑이 범강림 부부를 보러 간 날, 주복도 그 집에 갔겠지? 그럼 범강림 부부와 주복은 우리가 떠난다는 걸 알고 있었겠군.
“그래도 큰처남과 주육한테 경성을 떠나 있으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싱긋 웃었다.
“괜찮아요. 그들은 경성에 남아 있는 게 더 좋을 테니까.”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괜찮다면 자신도 괜찮은 듯, 더는 말하지 않고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가자, 진안 군왕도 외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급하게 떠나는 길이다 보니, 진안 군왕도 정리하고 처리해야 할 것들이 많았다.
한참을 서재에 있던 진안 군왕이 다시 내실로 돌아왔을 무렵, 정교랑이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잠시 출타하셨어요.”
소심이 말했다.
지금 시간에?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밖을 쳐다보았다.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처남네 집에 간 것이냐?”
진안 군왕이 묻자, 소심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부인께서 알려주시지 않았어요.”
그럼 어딜 간 거지?
해가 지고 어둠이 내린 들판의 무덤 앞에 누군가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었다. 짙어진 하늘빛이 그녀의 윤곽을 흐릿하게 만들자 그녀는 주위의 풍경과 일체가 된 듯했다.
늦은 시간인지라, 지나가는 행인은 얼마 없었다. 간혹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들은 쇠와 돌이 부딪히는 맑은소리에 무덤 쪽을 흘깃 쳐다보기만 하고는, 서둘러 시선을 거두고 갈 길을 재촉했다.
사흘 뒤, 금군 병사와 의장대의 호위 속에 진안 군왕의 마차가 성문을 나섰다. 길 위에서 삼삼오오 모여 수군대던 행인들도 서서히 흩어지고,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도 차츰 멀어져 작은 점으로 변했다.
성문 위에 서 있던 주복은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못하고 행렬이 떠난 방향을 내다보았다.
다시 이틀이 지나고 동이 틀 무렵,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진안 군왕이 떠났던 성문을 지나쳤다. 가장 앞서 달리던 사람이 급하게 말을 멈췄다. 그 뒤를 따르던 사람들도 서둘러 말고삐를 당겼지만, 이미 그 사람보다 앞서 나간 후였다.
“먼저들 가.”
앞서 있던 사람이 말하고는 말 머리를 틀어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다.
나머지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가던 방향으로 말을 이끌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고개를 돌리자, 다른 쪽으로 간 사람이 무덤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곳에 공자님 댁 무덤이 있었나?”
누군가가 놀란 눈치로 물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의아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은 들은 적 없는데.”
무리 중 한 명이 아, 하면서 무언가 깨달은 듯이 말했다.
“알겠다. 저기는 무원산 무덤이네.”
사람들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저기는 정 낭자가 세운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이지. 노제 때 무원산 술을 뿌렸고, 저 비석 위에 새긴 글씨로 천하제일 행서라는 명성을 얻었어. 글씨와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 덕에, 무원산 무덤은 경성에서도 손에 꼽는 명소 중 하나가 되기도 했고.
“그나저나, 공자님께서 왜 갑자기 저 무덤에 가시는 거지?”
한 명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다른 사람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탄식했다.
“왜긴 왜야. 쏟은 감정이 많으니, 아쉬움도 배가 되는 게지.”
하인들이 보니, 여인에 대한 미련에 쓸쓸한 마음을 안고 무덤 앞을 서성이는 듯 보이던 공자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두모를 벗었다. 그는 자신 앞에 세워진 무덤의 비석을 바라보면서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고 떨리는 손으로 비석 위를 더듬거렸다. 그는 흥분한 건지, 감격한 건지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글자.”
사내가 중얼거리면서 비석을 바라보았다.
원래 텅 비었던 비석 위에 ‘정(程)’이라는 글자가 하나 새겨졌다.
“한 글자가, 나타났어.”
사내는 발바닥부터 머리끝까지 저릿한 기분이 들었다. 이어 사내가 읊조렸다.
한 글자가 나타났어!
한 글자가!
해가 뜰 무렵, 푸른 새벽빛이 이슬이 되어 땅에 내려앉았다. 경성의 큰길에는 평소보다 지나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범강림이 우의를 걸치고 어디론가 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큰길 위로 갑자기 어지러운 말굽 소리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다급하게 범강림의 옆을 지나갔다. 범강림은 재빨리 옆으로 몸을 피했지만, 그래도 말굽에 밟혀 튄 빗물이 범강림의 우의 한쪽을 적셨다.
범강림이 삿갓을 손으로 들추고 앞을 내다보자, 옆을 지나치던 사람 중 한 명이 말 위에서 그를 돌아보았다. 그 사람과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친 범강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말을 탄 사람들은 멈추지 않고 앞을 향해 그대로 달려갔다.
“저게 누구지?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날에, 꼭 온 가족을 데리고 어딜 가는 거 같네.”
“고 관인 같던데? 고씨 가문이 곧 경성을 뜨잖소. 이미 며칠 전에도 한 무리가 떠났어.”
“이번에 정말 떠나는 건가?”
“그럼 가짜로 떠나게? 진 상공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그 집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잖소. 마음 같아서는 관졸들을 보내 꽁꽁 묶어 성 밖으로 내치고 싶을걸?”
행인들이 말을 탄 사람들이 떠난 방향을 보면서 수군댔다.
범강림이 고개를 들고 멀어져가는 마차와 말을 쳐다보았다. 그때, 조금 전 범강림과 눈이 마주쳤던 사람이 또 고개를 돌렸다. 범강림은 서둘러 삿갓을 눌러쓰고 갈 길을 재촉했다.
“조금 전에 그 사람, 신비궁을 바쳤던 범강림 아닌가?”
고 관인이 시선을 거두고 옆에 있던 시종에게 물었다. 시종이 잠시 뒤를 쳐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 자식은 아직도 군감에 있는 거냐? 왜 아직도 저놈을 내치지 않았지? 무기를 만드는 곳인데, 괜히 저런 놈이 껴 있다가 또 무슨 일을 그르치려고.”
고 관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말했다.
“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범강림이 군감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망치를 두드리면서 무기를 만드는 것밖에 없습니다. 다른 일에는 일절 끼어들지도 못하고요. 대인께서도 계속 범강림을 예의주시하고 계십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서, 범강림이 없어도 무기를 차질없이 만들 수 있을 때쯤이면 그자를 내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어차피 별 볼일도 없는 놈인데, 정 낭자가 전수한 기술 하나 가지고 버티는 중이라고요.”
시종의 말에 고 관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물어보지 않았다.
앞쪽의 마차 행렬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성문을 지나갔다. 성문 옆에는 미리 설치된 차일막이 늘어서 있었고, 그 아래로 고능준을 배웅하려고 나온 관리들이 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고 관인이 뒤쪽으로 가서, 마차에서 내리려는 고능준을 부축했다. 차일막 아래 서 있던 사람들이 고능준을 에워싸고 작별인사를 전했다.
“이렇게 많이들 나와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오늘은 내 안사람과 자식놈을 배웅하려고 나왔소이다.”
고능준이 답례하면서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럼 고 대인은 가지 않는다는 소린가?
찰나의 정적이 지나간 후, 다들 재빨리 입을 모아 아첨했다.
“비 오는 날에 급하게 가라는 법이 있습니까? 이리 서두르실 필요는 없습니다, 대인.”
“그럼요, 그럼요.”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이십 년이 지났소이다. 아예 돌아가지 않는다면 모를까, 돌아가겠노라 말하고 나니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구려. 안타깝게도 경성에 계신 노모께서 몸이 편찮으신지라 며칠만 더 머무르다가, 곧바로 뒤따라가려고 하외다.”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던 고 관인이 고능준에게 다가가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 비도 오고 하니 여기까지만 배웅하시지요.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 관인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비가 더 거세질 듯합니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히 가거라.”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 위에 올라탔다.
누군가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고 관인, 조심히 가십시오. 참, 되도록 청원(淸遠) 지역으로는 지나가지 마시고요. 듣자니 근래 들어 그쪽에 산적과 마적이 활개를 친다고 합니다.”
“산적이 청원 지역에서 활개를 친다고요? 관부는 그런 것 하나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뭐 하는 겁니까?”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배웅 나온 사람들은 고 관인의 말에 대꾸하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을 보였다.
“아닙니다. 이젠 관리도 아닌데, 그런 걸 신경 써서 뭐 하겠습니까.”
고 관인이 콧방귀를 뀌고는 고능준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다들 좋은 마음으로 해주는 말이다. 어쨌든 외지로 가는 것이니, 조심해서 나쁠 거 없지.”
고능준이 말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맞장구쳤다.
“맞습니다. 무탈히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니,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요.”
고 관인이 다시 한번 사람들을 향해 예를 표하고 성문을 나갔다. 마차 행렬은 사람들의 배웅 속에 차츰 멀어졌다.
비가 점점 거세지자, 고능준도 사람들을 향해 예를 표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나저나, 정말로 산적이 그렇게 활개를 친다고?”
“듣기로는 그렇다던데.”
“그거 혹시, 세상이 어지러워진다는 신호 아니요?”
“쉿! 왜 허튼소리를 하고 그러시오!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 같은 때에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떡합니까? 누굴 비웃는 것도 아니고.”
고능준이 마차 휘장을 내리자,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차단되었다. 그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돌아가자.”
“고능준은 떠나지 않았다고?”
진소가 물었다.
“예, 가구도 모두 정리했고 처자식도 다 출발했는데, 고능준만 아직 혼자 경성에 남아 있다고 합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으나, 모친의 요양과 약 처방 때문에 며칠이 지난 후에야 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막료의 말에 진소가 냉소를 지었다.
“무슨 꿍꿍이기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 한 번 지켜보고 가려는 게지. 역시 이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줄 알았느니.”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그 집 노모가 언제 좋아지실 줄도 모르고, 모친께 효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버티는데 억지로 내쫓을 수는 없잖습니까.”
막료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괜찮네. 어차피 조당에는 들어오지 못하잖나. 고능준이 떠나겠다는 의지를 대외적으로 표명했으니, 뭘 하려고 해도 예전만큼 쉽게 하지는 못할 걸세.”
진소는 말하다 말고 또 냉소를 보였다.
“허구한 날 모친의 건강을 핑계로 저주를 해대다니, 그러다 천벌을 받는 게 두렵지도 않나.”
진소가 말을 끝내자,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빗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비가 더 거세졌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장 노태야가 말했다.
“가을비가 내리고 나면 더 쌀쌀해지겠지.”
“노태야, 옷을 더 걸치시지요.”
뒤에 있던 몸종이 두봉을 건네며 말했다. 장 노태야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몸종도 장 노태야 옆에 서서 비 오는 것을 구경했다.
“아씨께서는 비를 피하셨으려나 모르겠네요.”
몸종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장 노태야가 실소를 터트렸다.
“이것아, 너는 참 걱정도 팔자구나.”
몸종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발을 굴렀다.
“노태야, 아씨께서 급하게 가셨잖아요. 제가 배웅해 드릴 겨를도 없이 떠나셨다고요. 이번에 이렇게 가시면, 언제 또 뵐 수 있을지 모르는데.”
몸종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음을 터트렸다.
이번에는 어쩐 일인지, 장 노태야가 몸종을 놀리는 말을 하지 않았다. 몸종이 훌쩍이다가 손을 내리고 장 노태야를 슬쩍 쳐다보았다.
장 노태야는 내리는 비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만큼이나 어두웠다.
몸종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동시에 불안함이 마음속에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관로 위, 마차 행렬은 빗속에서 힘겹게 전진하고 있었다. 우비와 삿갓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말 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비에 옷이 흠뻑 젖어 있었다.
비 때문에 의장 깃발을 모두 거둬들여 그런지, 행렬은 다소 초라해 보였다.
“안 되겠어.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잖아. 아무래도 해가 질 때까지 안 그칠 것 같은데. 이러다가 앞쪽에 있는 역참에 도착하지도 못하겠어.”
반근이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소심도 머리를 빼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조금 전에 거기서 쉬다 갈걸, 괜히 다음 역참까지 간다고 했네. 앞뒤로 마을이나 역참 같은 게 하나도 안 보여.”
소심이 말하다가 멈칫하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에서는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이상하다.”
소심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반근을 쳐다보았다.
“부인께서는 비가 올 거라는 걸 모르셨나?”
반근도 멈칫했다.
비가 올지 안 올지는 하느님 다음으로 우리 아씨께서 가장 잘 아실 텐데, 이번엔 어째서…….
빗방울이 마차에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던 책을 빼앗자, 정교랑의 얼굴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 잠깐 스쳤다.
“어둡잖아요. 글씨도 잘 안 보일 텐데, 그만 봐요. 계속 책만 보면 무슨 재미가 있어요.”
진안 군왕이 말하자, 정교랑이 그를 쳐다보았다.
“바둑 둘까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세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하수와 바둑 두는 게 재미가 있으면 얼마나 재미있겠어요. 당신도 자꾸 이기기만 하면 재미없을 텐데.”
“그럼 뭘 하고 싶은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우리 얘기해요. 가는 길도 멀 텐데.”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말했다.
“얘기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말하는 건, 내가 잘 못 하는데.”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고 정교랑의 어깨를 손끝으로 쿡 찔렀다.
“당신이 말을 잘 못 한다고요? 그럼 황제의 말문을 막히게 하고, 논쟁 한 번으로 귀판관 풍림을 경성 밖으로 내쫓은 건 누구죠?”
진안 군왕의 손에 밀린 정교랑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들 자신이죠.”
정교랑이 진지하게 말했다.
“난 당신이 이렇게 말할 때가 제일 재밌어요.”
진안 군왕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그 사람들은 당신이 이렇게 말하는 걸 보고도 왜 그렇게 무서워서 벌벌 떠는 걸까요? 당신이 무슨 금강 야차니 뭐니 하면서.”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자신을 끌어안아도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내가 궁으로 보내라고 했던 폭죽은 보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보냈어요. 국혼을 치르는 날, 육가아에게 우리의 마음이 잘 전달됐으면 좋겠네요.”
진안 군왕은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도 태자를 보기는커녕 궁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던 날, 이씨 가문에서는 폭죽을 한가득 싣고 와서 그들을 배웅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폭죽에 불을 붙이기 직전, 고 선생과 다른 막료들이 그들을 제지했다.
경성을 떠나는 건 자랑스러운 일도 아니거니와, 태후가 마지못해 동의한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불꽃놀이를 한바탕 시끌벅적하게 했다가는 또 누구의 심기를 건드려 떠나지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면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정교랑은 태자의 국혼이 치러지는 날 밤, 하늘에 폭죽을 쏘아 올려 불꽃놀이로 축하할 수 있도록 이씨 가문에서 보내온 폭죽을 선물로 보내라고 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은 그중 몇 개를 골라 황후에게 보내도록 지시했다. 진안 군왕이 보낸 폭죽이라고 하면, 절대로 태자에게 선물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혼례를 치렀던 날보다 더 예쁠지도 모르겠어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이 주제를 이야기하는 게 껄끄러운가? 태자가 국혼을 치른다는 것은 곧 진단랑이 혼례를 치른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진안 군왕이 퍼뜩 깨닫고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정방, 송평 그쪽의 저택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저으면서 또 혼자 대답했다.
“분명 안 좋을 거예요. 아마 우리가 가서 한 번 싹 다 갈아엎어야 할걸요? 당신은 어떤 저택이 좋아요? 가는 길에 한번 그려볼까요?”
정교랑이 미소 지었다.
“괜찮아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정교랑의 손가락 하나를 잡고 조금씩 무언가를 그렸다.
“그럼 내가 그릴게요.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집을 어떻게 꾸밀지 생각해 뒀거든요.”
정교랑의 손가락은 가느다랗고 손톱은 매끄러웠다. 손톱에 물을 들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그런지, 정교랑의 손톱은 너무도 깨끗해서 진안 군왕이 손가락을 만지작거릴 때마다 은은한 광채가 빛에 반사되었다.
정교랑의 손가락을 매만지던 진안 군왕은 어쩐지 마음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쪽은 경성이나 강주와는 전혀 다른 곳이라, 익숙하지 않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게 되어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귓가에 바짝 다가가더니 입술이 거의 귓불에 닿을 듯한 거리에서 조용히 읊조렸다.
“그럼 나는 익숙해졌어요?”
진안 군왕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면서, 이제는 손가락이 아닌 정교랑의 손을 붙잡았다. 정교랑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틀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자, 정교랑의 귓불이 진안 군왕의 입가에서 멀어졌다.
“오늘은 비가 오고 있어서, 마차가 쉬지 않고 계속 달리기는 힘들 거예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보는 정교랑의 맑은 두 눈과 빨간 입술을 바라보다가 정교랑의 허리를 지그시 누르면서 자기 쪽으로 당겼다.
“계속 못 달릴 이유가 뭐 있겠어요. 계속 가라고 하면 멈추지 않고 갈 텐데.”
진안 군왕이 나지막이 읊조리고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이때, 갑자기 누군가가 마차를 쿵쿵 두드렸다. 진안 군왕이 깜짝 놀라서 펄쩍 뛰어오르자 머리가 마차 천장에 부딪히면서 쿵 소리를 냈다.
밖에 있던 경 공공이 화들짝 놀라 다급하게 진안 군왕을 불렀다.
“전하?”
“뭐냐!”
마차 안에서 언짢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가 곧 질 텐데, 앞쪽에 있는 역참까지 가기에는 무리일 듯합니다. 길을 살피러 갔던 금군 병사가 돌아왔는데, 조금만 더 가면 낡은 사찰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서 하룻밤 묵은 뒤에 내일 다시 길을 재촉하는 건 어떠실지요?”
경 공공이 서둘러 큰 소리로 마차 안을 향해 외쳤다. 마차 문이 열리고,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얼마나 먼 곳에 있는데? 누가 가서 본 것이냐?”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의 표정이 이상하다고 느끼면서도, 일단은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리 멀지 않습니다. 두어 리 정도만 더 가면 되고, 우리 쪽 사람이 다녀온 것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드디어 쉬어 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듣자, 앞쪽에서 마차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이 속도를 높였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마차 안에까지 전해져 왔다.
하지만 마차 안은 적막하기만 했다.
“앞쪽에서 쉬어갈 곳을 찾았대요. 먼 길을 떠날 땐 늘 이렇잖아요. 일단 발길 닿는 데까지 가 보는 거요.”
진안 군왕이 민망한 듯 눈을 다른 데 두고 말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죠.”
아, 당연한 소리를 또. 이 여인이 먼 길을 안 가본 것도 아니잖아. 당초 우리가 처음 만났던 장소도 황량한 산골짜기였는데.
진안 군왕의 귀가 새빨개졌다.
“왜 그렇게 가구를 많이 챙기나 했어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그럼요.”
정교랑이 또 대답했다.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깥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오더니 마차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내밀자마자, 누군가가 앞을 가로막으며 그를 뒤로 밀었다.
“전하, 큰일 났습니다. 전방에 매복이 있습니다!”
매복!
진안 군왕의 얼굴에 어두운 냉소가 드리워졌다.
“이럴 줄 알았다. 가는 길이 순조로웠다면, 분명 귀신의 농간이라고 생각했을 게야.”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자신의 앞을 막아선 호위를 비키게 했다. 앞을 내다보았지만, 해가 지고 어두워진 하늘에 비는 억수같이 쏟아지는 데다가, 앞쪽으로는 금군 병사들이 빽빽하게 서 있는 탓에 적수가 몇이나 되는지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길 위에서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하라고 날 그리 깔끔하게 경성 밖으로 내보내 줬겠지. 이런 예기치 못한 사고라면 어렸을 때부터 셀 수 없을 정도로 당했어. 내 앞길에 이런 함정이 없는 게 더 이상하지.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앞쪽에 있던 금군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신비궁입니다!”
누군가가 외치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진안 군왕의 눈빛 또한 한층 더 어두워졌다.
태후가 동의한 거라면, 군용 무기를 쓰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 하지만 신비궁은 평범한 활과 달라서, 죽은 자의 몸에 박힌 화살의 흔적을 보면 신비궁을 썼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챌 수 있을 텐데.
세상 사람들이 알아보든 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거로군.
“어서 진을 쳐라!”
신비궁의 위력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금군 병사들은 재빨리 말에서 방패를 떼어 진을 쳤다. 마차들은 힘겹게 말 머리를 돌려 한곳으로 모였고, 방패를 든 금군 병사들은 마차 주위를 겹겹으로 에워쌌다.
빗속에서 신비궁이 장전되고 쏘아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가장 앞쪽에 있던 병사들은 신비궁의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하나둘씩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방패가 없어진 자리를 재빨리 메꾸기 위해 병사들은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지만, 적군들로서는 그 틈으로 금군 병사들의 진열을 파악하기에 충분했다.
“반격할 기회조차 없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더 이상 버티기 힘들 겁니다!”
경 공공이 소리쳤다.
“이제야 막 경성에서 나왔을 뿐인데! 저놈들은 뭘 믿고 저렇게 겁 없이 날뛰는 거야!”
경 공공이 새빨개진 눈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마차 안에 있던 반근과 소심은 서로를 꼭 부둥켜안았다. 지금 상황이 두려운 두 사람이었지만, 혼비백산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아씨께서 계시니까 아무 일도 없을 거야.”
소심이 말했다.
“아씨와 함께라면, 무슨 일이어도 다 괜찮아.”
반근이 맞장구쳤다.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손을 잡았다.
“언니, 옛날에 늑대 떼를 마주쳤을 때도 이랬어?”
반근이 조용히 물었다. 소심이 반근을 쳐다보다가 미소 지었다.
“응. 너도 이제 아씨와 함께 역경을 헤쳐나가게 됐네.”
“전하,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고 선생이 외쳤다. 마차에서 잠깐 내린 사이, 그는 온몸이 빗물로 젖어 버렸다.
“저들이 신비궁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죽기로 돌파하면 빠져나갈 틈을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죽음을 각오한 결사대를 이렇게 많이 데리고 온 건, 보이기 위한 겉치레 때문이 아니야.
경성에서 나올 때는 의장 행렬이 길지 않았지만, 경성을 떠나오면서 곳곳에 있던 전하의 사람들이 행렬에 합류하게 되어, 지금은 전하의 사람들이 금군 병사들보다도 더 많아졌어.
진안 군왕은 여전히 마차의 문을 잡은 채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고 선생이 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누군가가 마차 안에서 나왔다.
“정방.”
진안 군왕이 재빨리 고개를 돌리고 손을 뻗어 정교랑을 제지했다.
“비 맞으니까 어서 들어가요.”
정교랑이 괜찮다는 듯이 그의 팔을 손으로 살짝 밀었다.
“괜찮아요.”
정교랑이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정방!”
진안 군왕이 다급하게 정교랑을 불렀다. 깜짝 놀란 고 선생도 발을 구르고 소리쳤다.
“왕비 전하, 어서 들어가십시오!”
괜히 나와서 뭘 하겠다고.
“조귀.”
정교랑이 조 집사를 불렀다. 다른 마차에 타 있던 조귀가 쏜살같이 마차에서 뛰어내려 정교랑 쪽으로 다가왔다.
“자네들이 나서게.”
정교랑이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멈칫하며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누구지?
모든 사람의 이목이 조귀에게 집중되었다.
덩치와 살집이 있는 중년 사내는 평범한 집사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가 정교랑의 재산을 관리하는 총 관리인쯤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산가지를 늘어놓으며 장부 관리를 하는 것 외에, 저 사내가 또 다른 걸 할 줄 아나?
주위의 시선을 느낀 조귀는 감격에 차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래, 바로 이 느낌이지.
강주에서 돈이나 뿌려대며 아첨을 받는 것보다는, 이런 시선이 몇백, 몇천 배는 더 좋아!
한 번 사는 인생, 득의양양하게 살다 가야지!
“예.”
조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지금의 그는 몇 년 전 정교랑에게 붙여진 주씨 가문의 풋내기 집사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칭찬이나 인정을 받았다고 해도, 우쭐한 눈빛을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한 집사가 되어 있었다.
“여봐라, 마차를 밀어라.”
조귀의 말 한마디에, 정교랑의 호위들이 어느 마차를 향해 달려갔다. 그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마차 안에 있던 물건들을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닥에 내려놓고, 무언가 담겨있는 마차를 끌고 왔다.
“비키시오. 비키라고.”
조귀가 소리쳤다. 방패를 들고 진을 치고 있던 금군 병사들이 놀란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고는 무의식적으로 자리를 비켰다.
“지금 뭐 하는 건가?”
경 공공이 소리치며 조귀에게 다가가 그를 제지했다.
“지금 마차 한 대를 방패 삼아 저 포위를 뚫고 나가려고? 저들 손에 있는 건 신비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게! 이래 봤자 우리의 대열을 망칠 뿐이야.”
경 공공의 말을 들은 조귀는 입을 벌리며 히죽 웃었다.
“신비궁? 공공, 신비궁이 뭐 대단한 거라고요. 명심하십시오. 신비궁의 조상님이 여기 있잖습니까.”
신비궁의 조상님?
경 공공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방패들이 길을 터주자, 마차는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갔다. 주위에서는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과 함께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마차를 위해 길을 터주느라 양쪽으로 갈라진 대열 때문에 중앙은 몹시 위태로워 보였다.
더 많은 시선이 조귀의 일행과 마차에 꽂혔다.
겉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마차였지만, 어딘가 다른 마차들과 다르게도 보였다.
점점 더 앞으로 나아간 마차는 신비궁의 화살을 맞을 정도의 거리까지 나아갔다. 두 호위가 재빨리 마차 양쪽의 문을 열고 그 문을 방패 삼아 앞으로 더 나아갔다. 쉼 없이 날아오는 화살들이 마차의 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서 더 크게 들려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그 소리는 빗소리가 아니었다. 화살들이 무언가에 맞아 튕겨 나가는 소리였다.
저 마차는 평범한 동판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야!
주위 사람들의 눈이 더욱 커졌다. 거센 빗줄기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마차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마차의 열린 문 사이로 이상하게 생긴 쇠뇌가 일렬로 놓인 것이 보였다.
“쇠뇌인가?”
마차를 따라온 경 공공이 놀란 기색으로 중얼거렸다.
아냐, 쇠뇌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거대한 원통이 하늘을 향해 조준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활시위도 없었고, 화살도 장전되어 있지 않았다.
저건 또 무슨 괴상한 물건이래?
앞으로 나아가던 마차가 자리를 잡고 멈췄다.
마차와 방패 뒤로 몸을 숨기고 있어도, 반대편에 새까맣게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나 신비궁을 들고 있던 이들은 전부 검은 옷을 입고 있었고, 주변 환경이 어두웠기에 사람의 형체를 알아보기는 힘들었다.
적군 쪽에서도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는지, 더욱 매섭게 화살을 쏘아댔다.
그때 횃불 하나가 갑자기 켜지자, 어두컴컴한 곳에서 환한 불빛을 본 탓에 사람들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라이!”
경 공공이 욕을 내뱉었다.
횃불은 왜 밝히는 거야! 적군이 우리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할까 봐서 저러는 거야?
경 공공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땅이 울릴 정도의 굉음과 함께 마차에서 솟아난 불길이 반대편으로 쏘아져 나갔다. 귀가 웅웅 울렸다.
경 공공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반대편에서 불길이 화르르 타오르더니, 사방에서 참혹한 비명이 들려왔다. 빗속임에도 불구하고, 불덩이가 된 사람들이 발버둥을 치며 바닥을 구르는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세상에나.”
경 공공이 경악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엄청난 굉음이 지나가고, 상황은 완전히 역전되었다. 신비궁으로 쏘아대던 화살들이 사라지자, 금군 병사들은 말을 타고 돌격하여 적군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하지만 칼과 방패가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은 금세 사라졌다.
알 수 없는 불길이 가져온 공포가 금군 병사들의 공격보다 두려웠는지, 반대편에 빽빽하게 서 있던 적군들은 굉음이 들린 순간부터 사방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전하, 마적들이었습니다. 의장대 깃발이 보이지 않아서 군왕의 행렬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길을 지나던 거상인 줄 알고 재물을 도적질하려고 했답니다.”
수하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보고했지만, 진안 군왕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
“거 쓸데없는 소리! 언제부터 마적들이 신비궁을 가지고 있다더냐? 아무것도 물을 필요 없다. 전부 죽여 버려라.”
경 공공이 성가시다는 듯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수하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다시 앞쪽으로 달려갔다.
경 공공이 마차로 다가갔다.
“한 번 쓰고 망가진 건가?”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나무 통으로 만든 거라서 튼튼하지는 않네. 망가지는 게 정상이지.”
경 공공의 혼잣말을 들은 정교랑이 말했다.
대나무!
경 공공과 고 선생은 마차 앞으로 다가가서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마차에 실려 있던 쇠뇌 같은 물건은 이미 부서졌고, 빗물에 씻겨 바닥으로 흘러내린 화약 냄새는 더욱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조 집사와 시위들이 부서진 나무토막과 대나무 통을 마차에서 떼어냈다. 정교랑의 말대로 마차에 실린 것은 거대한 대나무 통이었다.
“거죽(巨竹)이오.”
고 선생이 목소리를 낮추고 경 공공에게 말했다.
“마차는 태워 버리게.”
정교랑이 말했다. 조 집사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시종들과 함께 여기저기 흩어진 대나무 통을 모아서 다른 마차에 실었다.
경 공공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시종들을 따라갔다.
조 집사와 정교랑의 호위들이 끌고 온 마차는 총 세 대였다. 짐을 참 많이도 챙겼다며 은근히 비웃던 진안 군왕부 사람들은, 이제 반대로 이렇게 엄청난 무기를 너무 적게 챙긴 게 아닌가 하고 아쉬워했다.
경 공공이 조심스럽게 다가와 조귀와 시종들이 짐을 싣고 있는 마차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무기들과 물을 담을 수 있는 병 같은 것들이 실려 있었다.
그런 거죽은 없는데…….
조 집사가 술동이 한 개를 가져와 이미 망가진 마차 위로 힘껏 던졌다. 술동이가 깨지고 술 냄새가 진동하자, 조 집사는 시종의 손에서 횃불을 건네받고는 그 위로 내던졌다.
마차 행렬이 다시 갈 길을 재촉했다.
말 위에 올라탄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자, 비가 내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곳곳에서 활활 타고 있는 불길이 보였다. 어둑한 하늘 아래로 타오르는 불길은 더없이 선명했다.
이렇게 끝난 건가?
목숨 걸고 싸우지도 않고,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매복을 물리쳤다고?
경 공공은 허탈해서 웃음이 나오기도 했지만, 또 속으로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진안 군왕이 타고 있는 마차로 향했다.
조상님이라…….
밤이 되자, 빗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좀 전에 그건 뭐였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당신도 가지고 있는 거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이 마차 안에 풀어 둔 향낭을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놀란 눈으로 향낭을 바라보았다.
“좀 더 크게 만든 거예요. 원리는 같아요.”
정교랑이 웃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쩐지, 당신이 웬 짐을 그렇게 많이 챙겼나 싶었어요. 역시 다 쓸데가 있었군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럼요.”
휘장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횃불의 빛이 정교랑의 미소를 비추자, 진안 군왕은 또 한 번 정교랑의 다채로운 표정을 보게 되었다.
“말해 봐요. 나한테 숨긴 게 또 뭐가 있는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품에 확 끌어안고는 장난스럽게 협박하듯 말했다. 진안 군왕의 손끝이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겨드랑이와 허리를 스쳤다.
정교랑이 몸을 비틀어 진안 군왕의 손을 꾹 눌렀다.
“장난치지 마요.”
정교랑이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말했다. 진안 군왕은 엄청난 비밀을 알아낸 듯이 하, 하고 감탄했다.
“간지럼도 타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정교랑의 옆구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정교랑이 재빨리 그의 손을 막아냈다.
“장난치지 말라니까요.”
정교랑이 조금 전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의 손은 정교랑의 손보다 더 빨라서, 정교랑은 말하던 도중에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방백종.”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을 꼭 잡고 눈썹을 꿈틀댔다.
“나를 이길 수 있을 거 같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이름을 부르자, 그의 마음속은 펄펄 끓는 물처럼 끓어 올랐다.
진안 군왕이 팔로 정교랑의 허리를 감고는 정교랑을 바닥에 눕혔다.
“정방, 내가 정말 못 이길 거 같아요?”
진안 군왕도 눈썹을 꿈틀대면서 웃었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웃고 떠드는 소리에 경 공공이 입술을 삐쭉였다. 고 선생이 앞쪽에서 고개를 돌렸다.
“아직 젊잖습니까. 위험한 고비를 한 차례 넘겼으니, 잠시 여유를 가질 만도 하지요.”
경 공공이 헛기침을 하며 말하자, 고 선생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저 사찰을 끼고 몇 바퀴 도는 건 어떻겠나?”
고 선생이 눈을 장난스레 찡긋거리며 말했다.
바닥에 눕혀진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면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일어나요. 안 그러면 내가…….”
정교랑이 말하면서 다리를 들려고 하자, 진안 군왕의 긴 다리가 정교랑의 종아리를 지그시 눌렀다. 동시에, 진안 군왕은 자신의 가슴팍을 밀어내는 정교랑의 손목을 잡고 두 손을 몸 옆으로 고정했다.
“또 나를 침상 아래로 걷어차려고요? 그런데 아쉽게도 여기에는 침상이 없네요. 아니면 나를 마차 밖으로 차 버리든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발로 찬다는 얘기가 나오자 진안 군왕은 또다시 지난번 일이 떠올랐다.
시작도 제대로 못 하고 끝나버렸던 그때…….
진안 군왕이 멈칫하면서 정교랑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일렁이는 불빛 때문인지, 정교랑의 얼굴은 빛나는 별처럼 아름다워 보였다. 동시에 정교랑이 숨을 쉴 때마다 진안 군왕의 가슴팍에 느껴지는 말랑한 두 개의 봉우리가 그를 자극했다.
조금 전 조 집사가 망가진 마차에 횃불을 던졌던 것처럼,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 심어졌던 불씨가 화르르 불타올랐다.
“정방.”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떨려왔다. 그가 몸을 더욱 숙이고 말했다.
“한 번만 만져 보게 해 줘요.”
진안 군왕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의 한쪽 손목을 풀고, 한 손을 정교랑의 저고리 사이로 쑥 집어넣어 그 속에 있던 말랑한 것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마차 문을 두드리면서 크게 헛기침했다.
진안 군왕은 누군가가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느낌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냐!”
진안 군왕이 잠시 멈칫한 사이, 정교랑은 벌써 그를 밀쳐내고 자리에 앉았다.
“전하, 도착했습니다. 내려서 쉬시지요.”
경 공공이 민망한 듯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 일행이 낡은 사찰을 등불로 환하게 밝히고, 다들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제 할 일을 했다. 조금 전 다친 병사들은 벽 쪽에 기대게 해서 치료를 했고, 다른 쪽에서는 식사를 준비했다.
조 집사 등은 한 마차에서 정교랑의 가구들을 내리고 있었다. 병풍, 깔개, 탁자, 의자 등이 내려지고, 금세 작은 거처가 마련되었다.
“부인께서 참으로 준비성이 철저하십니다.”
경 공공이 과장된 칭찬을 하며 진안 군왕을 향해 아첨을 떨었다. 입꼬리가 바닥까지 내려온 진안 군왕은 말없이 그를 흘겨보고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고 선생이 웃음을 참으면서 경 공공을 팔로 툭툭 쳤다.
“남의 좋은 일을 망쳤나 보군. 아주 자네를 산 채로 잡아먹을 눈빛이야.”
고 선생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경 공공은 콧방귀를 뀌며 턱을 치켜들고 고 선생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진안 군왕의 옷을 갈아입혀 주기 위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오자, 진안 군왕은 경 공공을 향해 손을 휘휘 젓고는 그의 손에 쥐여 있던 허리끈을 빼앗았다.
“어서 옷 갈아입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경 공공이 눈치껏 물러나자,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곁을 지나쳐 뒤쪽으로 걸어갔다.
“먼저 갈아입어요.”
정교랑이 잠시 멈칫하고는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향해 빙긋 웃었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웃었어! 웃었어! 날 보고 웃었어!
진안 군왕은 눈앞에 불꽃이 팡팡 터지는 듯 황홀해졌다.
나 때문에 화나지 않았나 봐! 화나지 않았어! 화나지 않았다고!
“다녀와요. 다녀와요.”
진안 군왕이 서둘러 대꾸했다.
정교랑이 다시 몸을 돌리고는 다 허물어진 불상 뒤쪽으로 걸어갔다. 반근과 소심이 고개를 숙인 채 정교랑의 뒤를 따라갔다.
“주위는 다 살펴봤나? 깨끗하게 정리했고?”
진안 군왕이 팔을 양옆으로 벌리며 묻자,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깨끗합니다. 삼중으로 사람을 배치해뒀고요.”
조금 전의 그 어마어마한 불길을 본 이상, 적어도 얼마간은 전하를 해치려는 사람이 없겠지.
미소 짓던 진안 군왕이 또 고개를 돌려서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허리띠! 멍하니 서서 뭐 해? 놀라서 바보라도 됐어? 눈치는 어디에 두고 온 거야?”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예, 예. 어차피 눈치는 없는 놈이니 욕하려면 실컷 욕하시지요. 비 오는 날 길을 재촉하는 것도 모자라서, 역참 하나 제대로 못 찾아 이 낡아빠진 사찰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하시다니, 화가 잔뜩 나실 만도 합니다.
경 공공이 고개를 숙이고 진안 군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의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의자 위에 축 늘어진 진안 군왕은 손에 든 책을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었다. 그는 이따금 책 뒤로 얼굴을 숨기고 바보같이 헤벌쭉 웃다가, 어느 순간 시녀들이 음식을 차려온 것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벌써 밥이 다 됐느냐?”
진안 군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시간이 그렇게나 오래 지났다고?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측간을 이리 오래 쓰지는 않을 텐데?
“전하?”
두 시녀가 안으로 들어오자, 두 사람을 본 진안 군왕의 안색이 급변했다.
“너희 아씨는?”
진안 군왕이 호통쳤다. 반근이 울먹이는 표정을 감추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아씨께서 말씀드렸잖아요. 잠시 나갔다 오신다고요.”
소심이 애써 침착한 척 말했다.
진안 군왕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난 잠시 나갔다 올게요.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게, 정말 나갔다 오겠다는 말이었어?
비가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경 공공은 서둘러 우산을 펼치며 진안 군왕을 씌워 주려고 따라갔지만, 진안 군왕의 걸음걸이가 워낙 빠르다 보니 뜀박질을 해서야 겨우 따라갈 수 있었다.
진안 군왕이 밖으로 나오자,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들이 일제히 멈췄다.
진안 군왕은 누군가를 찾는 듯 재빠르게 눈을 돌리다가, 조 집사 등 열댓 명이 한쪽에 모여 있는 걸 찾아냈다.
하나, 둘, 셋, 넷…….
사람 수를 세던 진안 군왕은 어쩐지 눈이 어지러워졌다.
그 여인을 호위하는 사람들은 항상 저 열다섯 명이었어. 경성에서 강주까지, 강주에서 다시 경성까지, 정씨 저택에서 군왕부까지.
열하나, 열둘, 열셋, 열넷, 열다섯, 조 집사까지 열여섯!
“전하.”
조 집사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진안 군왕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도 깊은 심호흡을 하면서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 집사를 지나쳐서 덮개를 씌워둔 마차 앞으로 걸어갔다.
그 여인은 마차 세 대를 가지고 왔어. 거죽으로 만든 포화가 실려 있던 마차는 조금 전에 망가졌고, 다른 한 대에는 이런저런 가구들이 실려 있었고, 또 다른 한 대에는…….
왜 그렇게 가구를 많이 챙기나 했어요. 다 쓸 데가 있어서 그런 거였군요.
그럼요.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서 덮개를 홱 걷었다. 덮개가 밧줄로 고정되어 있던 터라, 진안 군왕이 다시 한번 힘을 주고 나서야 덮개가 들춰졌다.
“전하!”
조 집사와 경 공공이 소리쳤다. 두 사람은 재빨리 마차에 다가가 진안 군왕을 도와 밧줄을 풀고 덮개를 걷어냈다.
소식을 들은 고 선생도 서둘러 이쪽으로 달려왔다.
진안 군왕이 마차 문을 세게 열자, 안에 둔 물건들이 횃불에 환하게 비쳤다. 그 안에는 조금 전에 봤던 망가진 대나무 통들과 뭐가 담겨 있는지 모를 병들이 놓여 있었다.
“없어졌습니다!”
경 공공이 소리치면서 손가락으로 마차 안을 가리켰다.
조금 전 경 공공이 봤을 때는 마차 안에 무기들이 잔뜩 실려 있었다. 무슨 무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긴 것, 짧은 것, 쇠로 만든 것, 구리로 만든 것 등등 온갖 무기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도 없어, 단 하나도!
진안 군왕이 다시 눈을 감고 긴 한숨을 뱉었다.
“어디로 갔느냐?”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쏟아지는 빗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로 갔냐고!”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소리를 질렀다.
조 집사는 송자동자라는 별명을 가진 진안 군왕이 낯설지 않았다.
주씨 가문에 몸담고 있을 때, 그는 여느 경성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밤이면 술을 마시거나 마작을 하며 이런저런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송자동자에 대해서도 떠들곤 했다. 늑대 떼를 물리치며 마주쳤을 땐, 무례하지만 귀한 집 아드님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강주까지 쫓아와서 경왕을 치료해 달라고 했을 때는 그런 진안 군왕이 가엾은 한편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들었다.
그 후로는 진안 군왕과 일절 교류가 없었으나, 정교랑이 군왕에게 시집가게 되면서 조 집사도 자연스럽게 군왕부의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지금까지, 조 집사의 마음속에는 진안 군왕을 향한 일말의 경외감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횃불 아래에 비친 젊은 사내의 모습은 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는 준수한 외모에 냉랭한 눈빛을 쏘아대며 포효했다. 사내가 몸을 홱 돌리자 당장 이 자리에서 사람을 죽일 수도 있을 듯한 살벌한 기운이 엄습했다.
조 집사는 저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는 다리가 후들거리는 바람에 하마터면 바닥에 무릎을 꿇을 뻔했다.
그래, 이 사람은 군왕이었지.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는 황족이고 종친이야.
게다가 양자 입적에 가장 유력한 후보였고, 태자가 될 수도 있었으며, 나아가서는 제위에 올라 황제가 될 수도 있었던 사람이지.
“전하.”
조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어서 말씀을 올리게.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이 야밤에, 왕비가 그 많은 무기를 들고 어딜 갔는지!”
경 공공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아씨께서는 잠깐 처리할 일이 있다고만 하셨습니다.”
조 집사가 대답했다.
“무슨 일? 아이고, 답답해 죽겠네.”
경 공공이 조 집사의 팔을 덥석 잡았다.
조 집사는 또 한 번 깜짝 놀랐다. 허약해 보이기만 하던 태감이었는데, 팔을 잡는 힘이 어찌나 센지, 잡힌 부분이 저릿했다.
“저희 아씨의 성격이 어떤지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아씨께서 일이 있다면 있는 겁니다. 저희 같은 아랫것이 물어볼 수는 없습니다.”
조 집사는 더는 거만하게 굴지 않고 순순히 대답했다.
정말 모르나 보네.
“그럼 왜 따라가지 않고!”
경 공공이 소리를 질렀다.
“아씨께서 따라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조 집사도 목청을 높였다.
난들 안 따라가고 싶었겠느냐고요! 좀 전에 아씨의 기세만 봐도, 분명히 엄청난 일을 하러 가신다는 걸 알겠는데!
말 위에 실을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무기를 싣던 정교랑의 모습을 본 조 집사는 모골이 송연했었다. 정교랑의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칼산을 넘고 불바다로 뛰어드는 죽음을 각오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놈! 그런데도 안 따라갔어? 따라오지 말라 했다고 정말로 안 따라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호위 한 번 속 편하게 하네. 빌어먹을!”
빌어먹을?
조 집사가 콧방귀를 뀌면서 눈을 옆으로 흘겼다.
꼭 자기는 따라갈 수 있을 것처럼 말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