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4화 (144/160)

-단장취의-

“빌어먹을! 그놈은 입으로 뱉으면 다 말인 줄 알아?”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허공에 주먹을 휘두르던 고 관인이 씩씩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황제의 조서란 말이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려고 들어? 폐하께서 조서를 쓸 수 있다면, 그놈들이 조당에서 짹짹거리면서 말싸움이나 할 수 있을 줄 알아?”

막료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 관인에게 말했다.

“관인, 기거주(起居注: 황제의 언행을 기록한 문서)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합니다. 진 시강은 폐하의 기거주를 들고나온 겁니다.”

“기거주 따위가 무슨 조서라고! 그건 황상의 일상 언행을 기록한 것에 불과하오. 시답잖은 한담도 있고, 농담도 있고, 홧김에 한 말도 있는데, 어찌 그걸 조서라고 하는 것인가!”

황궁 안에서는 태후가 휘장을 찢듯이 열어젖히며 소리쳤다.

“농담이라 하셨습니까?”

진 시강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책자 몇 개를 손에 쥐고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하시는 말씀은 모두 조서와 같은 효력이 있습니다. 천자께서는 조당에서나 침궁에서나 늘 예의와 법도를 중시하고, 허언이나 우스갯소리, 농담을 입에 담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그러니 기거주에 기록된 내용은 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시답잖은 한담 따위일 수 없고요. 그런데도 마마께서 폐하의 언행을 그리 말씀하시면, 폐하의 위상이 어찌 되겠습니까?”

진 시강이 태후를 향해 책자 하나를 펼쳐 들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태자를 책봉한 후 고능준을 고향으로 돌려보내겠노라 하셨습니다. 마마께서 믿지 못하시겠다면, 신이 직접 폐하의 기거록을 읽어 드리지요. 마마와 여기 계신 대신들께서 직접 들어 보신다면, 폐하께서 조정의 인사를 논할 때 농담을 하셨는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웃기지도 않는 소리!

조정 대신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황제가 어느 대신에 대해 언급한 게 담겨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좋은 말이라면 몰라도, 나쁜 말이라면 한순간에 명성이 바닥을 치게 될 터였다.

황제는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태자는 바보인 데다, 태후는 무지한 여인네처럼 황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지금, 진 시강의 손에 들린 기거주는 그 무엇보다 무게감이 있었다.

진 시강이 앞장을 서자, 몇몇 대신들도 앞으로 나오며 그의 말에 힘을 실었다. 기거주에 기록된 것이 시답잖은 말이 아니라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대신 대부분은 어느 한편에 서는 대신에 침묵을 택했다.

“애가는 동의하지 못하겠소.”

태후가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바른 자세로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 있던 진소가 공수의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폐하의 성지를 거역하신다면, 중서문하성 또한 지금부터 태후마마의 교지를 모두 거역할 수밖에 없습니다.”

진소가 담담하게 말했다.

태후는 열이 받아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태후는 진소를 향해 삿대질을 했지만, 입술만 달싹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지, 지, 지금 네놈이 애가를 업신여기는 게야?

진소가 무표정한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마마께서도 하셨던 일입니다. 누구는 못 하는 줄 아십니까.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 진(秦)씨 가문은 고씨 가문과 같은 편 아니었나?”

서재 안에 있던 고 선생이 여전히 놀라움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정 낭자가 전하의 목숨을 구하지 못하도록 막았던 사람이, 바로 진씨 가문의 열셋째잖아!

“이상할 것도 없지요. 이제 조정에는 외척이 둘이잖습니까. 태자의 자리가 굳건해진 지금, 공주부 진씨 가문이 곳곳에 깊숙이 뿌리내린 고씨 가문을 원하겠습니까, 아니면 명성에 얽매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진 상공 댁을 원하겠습니까?”

서재 안에 있던 사람들이 경 공공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조당에 영원한 동맹이란 있을 수 없는 법이지. 다들 제 이익을 따져가면서 시기에 맞춰 선택할 뿐이니.”

고 선생이 말했다.

“그럼 고능준은 이번 기회에 분명히 쫓겨나겠군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고 선생이 웃음을 터트렸다.

“졸고 있으면 누군가가 와서 베개를 가져다준다는 속담이 생각나는군. 그자가 경성을 떠난다면, 우리도 훨씬 수월하게 경성을 벗어날 수 있겠어.”

말하던 도중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 선생이 어색하게 웃었다. 서재 안의 사람들이 고 선생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고능준이 그리 오래 경성을 떠나 있지는 않겠지만, 우리가 떠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겠지요.”

“그럼, 떠날 준비를 잘 부탁하네.”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모두가 일제히 일어서서 그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떠나자, 다른 이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떠났다. 마지막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재를 나온 사람들은 고 선생과 경 공공이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하께서 갑자기 경성을 떠나시겠다는 건, 왕비의 생각이 틀림없습니다.”

경 공공의 말을 들은 고 선생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서더니,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 뭔가 들은 거라도?”

고 선생의 반응에 깜짝 놀란 경 공공이 걸음을 멈췄다.

“뭘 그리 깜짝깜짝 놀라십니까? 추측일 뿐입니다.”

고 선생이 머쓱한 듯 아, 하고 대꾸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왜 이렇게 갑자기 경성을 떠나겠다고 하시겠습니까?”

경 공공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 중얼거렸다.

“전하께서 태자를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우리 둘 다 다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지금 같은 시기에 경성을 떠날 생각을 하시다니요? 왕비가 진 상공 댁에 가서 그 난리를 피우는 것을 봤으니, 진 상공 댁의 어린 낭자를 볼 때마다 왕비가 속상해할까 봐 떠나시려는 거겠지요. 차라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더 속 편할 테니, 떠나겠노라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가?”

고 선생이 웃었다. 경 공공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습니다. 어쩌면 왕비가 먼저 이 얘기를 꺼냈을 수도 있고요. 그나저나 참 공교롭게 되었습니다.”

경 공공이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고 선생이 또 걸음을 멈춰 섰다.

“그런 거라면, 역시 왕비께서 운이 참 좋으시군.”

경 공공이 말했다.

“진 시강은 운도 참 좋아.”

고씨 가문의 서재 안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폐하의 기거주에서 찾아낸 말을 조서라고 할 수 있다니 말이야.”

고능준이 탁자를 치면서 웃었다. 고 관인 등은 차마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단장취의(斷章取義: 문장에서 필요한 부분만을 인용하거나 자기 뜻대로 해석해 쓰는 것). 대인, 이것은 필시 단장취의일 것입니다.”

한 막료가 말했다.

“맞습니다. 당시 조당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진 시강이 기거주에서 찾아낸 그 구절을 읽었어야 했습니다.”

다른 막료가 맞장구쳤다.

“이런 게 바로 아버지께서 조당에 계시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그놈들 뜻대로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고 관인이 몸을 일으키며 분개했다. 하지만 고능준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손에 쥐었다.

“무슨 일을 하고자 할 땐, 순리에 따라야 하느니라.”

서재 안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아버지, 그럼 정말로 경성을 떠나시려는 겁니까?”

고 관인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당연히 가야지. 내가 가지 않으면, 진소가 어떻게 활개를 치겠느냐?”

서재 안의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내 일찍이 말했다시피, 경성을 떠나는 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야. 가지 않으면 나야 좋지만, 간다고 해서 꼭 나쁠 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떠난다고 해서,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것도 아니잖느냐.”

고능준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내쫓기는 것이 너무도 분합니다! 빌어먹을 진씨 놈들, 감히 우리 등 뒤에 칼을 꽂다니!”

고 관인이 벌겋게 상기된 눈으로 외쳤다.

“남을 찌른다는 건, 남에게 찔릴 각오도 되어 있다는 뜻이다. 저들에게도 한 번쯤은 분풀이할 기회를 줘야지.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어넘는다고 하지 않느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태자의 혼사고, 태후의 자리를 굳건히 하는 것이야. 그리고 태자의 혈통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급선무다.”

고능준이 말을 끝내자마자, 문밖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들어왔다.

“대인, 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태자 전하께서 행방(行房: 성생활)을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서재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능준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재빨리 물었다.

“정말인가?”

“예, 아주 확실합니다.”

서재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무릎을 꿇고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고능준이 고개를 젖히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잘됐구나, 참으로 잘됐어! 역시 우리 고씨 가문은 운이 나쁘지 않다니까.”

고능준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표정으로 막료들에게 당부했다.

“태자궁에 배치할 사람들은, 신중에 신중을 기울여서 골라야 하네.”

막료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보아하니, 내년이면 태자의 아들에게 제위를 물려줄 수 있겠군.”

고능준이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듯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가세, 가자고. 지금 당장 떠나야겠네. 지금 떠나면, 내년에 돌아와 태자의 즉위식에 참석할 수 있겠어.”

고능준이 소매를 홱 털고 목청을 높였다.

“여봐라, 마차를 준비하거라. 궁으로 가겠다.”

“마마, 마마.”

안비가 황급하게 외쳤다.

“태자궁에서 시침한 사람이 있답니다. 이번에는 진짜로 붉은 꽃까지 보았대요!”

황후가 손에 쥔 탕약 그릇을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황제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안비를 돌아보자, 안비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기가 한 말이 사실이라는 눈빛을 보냈다.

“직접 본 게냐?”

황후가 물었다. 안비가 민망한 듯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그런 걸 제가 어떻게 볼 수 있겠어요. 그런데 정말 진짜예요! 태후께서 이런 일을 숨기실 리 없잖아요. 마음 같아서는 만천하에 그 붉은 꽃을 자랑하고 싶으실걸요?”

황후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천벌 받는다.”

같은 시간 태후궁, 내시가 상자 한 개를 보물단지 대하듯 두 손으로 받치고 와서, 그 안에 있는 물건을 보여주려고 뚜껑을 열었다.

“자, 한 번 보시게나.”

눈가에 웃음기가 가시질 않는 태후가 손가락으로 상자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고능준은 슬쩍 보는 척만 하고는 웃었다.

“볼 필요도 없습니다. 본디 할 줄 아는 게 정상이죠. 태의도 말했잖습니까? 태자 전하께서는 심지가 온전치 못한 것 외에 다 정상이라고요.”

태후가 두 손을 합장하고 불경을 읊었다.

“이렇게 되면, 저 또한 마음 편히 떠날 수 있겠습니다.”

고능준이 이어서 말했다.

태자가 행방을 할 수 있다는 기쁨에 취해 있던 태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셨다. 피를 토할 정도로 부아가 치밀었던 일이 떠오른 태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지자, 고능준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마마, 너무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고능준이 자신이 떠나는 게 왜 나쁜 일이 아닌지를 한참 동안 침착하고 진지하게 설명했다.

“그럼 이번에는 꼭 가야만 하는 겐가?”

고능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꼭 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중에 태자가 제위에 오른 뒤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가는 게 훨씬 낫지요. 지금은 조정 대신들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때인데, 괜히 이 시국에 제가 휘말리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고능준의 대답에 태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태자가 행방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태후에게는 크나큰 위안이 된 듯했다.

“조정의 일은, 마마께서 진소 등에게 모든 권한을 쥐여주심이 마땅합니다.”

태후가 놀라서 눈썹을 치켜세웠다.

“마마, 지금 마마께서 신경 쓰셔야 할 곳은 내궁입니다. 그리고 내궁의 권력을 휘어잡는 것이 마마께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셔야 할 일입니다.”

고능준이 태후를 재차 안심시키면서 말했다. 태후가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야 그렇긴 하지. 곧 있으면 진소의 딸이 애가의 손에 들어올 거야. 본인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는 진소 그자도 잘 알고 있겠지.”

“마마,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대단해지십니다. 예전처럼 툭하면 울음을 터트리시지도 않고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가 웃으면서 눈물을 훔쳤다.

“울긴 왜 우나. 울어도 소용이 없는데. 어쨌든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이 또한 지나갈 것입니다.”

태후가 긴 한숨을 쉬었다.

“마마, 부디 봉체를 보존하시옵소서. 황태손 또한 마마의 손으로 키우셔야지요.”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자, 태후가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는 사이, 문밖에서 상소문을 품에 안은 내시 하나가 황급히 들어왔다.

“마마, 중서문하성에서 전해 온 것입니다.”

내시가 무릎을 꿇고 상소문을 바쳤다. 태후가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댔다.

“그놈들의 눈에는 애가가 옥새나 다름없는 게지?”

태후가 옥새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애가는 동의할 수만 있고, 반대할 수가 없어. 그런데도 막상 애가가 뭔가를 하려고 하면, 그놈들은 허구한 날 반대만 한다 이거야. 황상도 이리 억울했을까?”

폐하께서 원하시는 게 뭐냐에 따라 다르지요.

하지만 폐하께서 생각하시는 선을 넘었다면, 제아무리 중서문하성의 재상이라도 폐하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겁니다.

고능준이 말없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내시가 옥새를 가져오자, 상소문을 펼치던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진안 군왕을 경성 밖으로 보내라는군!”

태후가 상소문을 홱 내던졌다.

“고얀 놈들. 저치들은 할 일이 그렇게 없어서 주야장천 저런 거나 쓰나? 황실 일에 이래라저래라 아주 끝도 없이 간섭하려 드는군.”

태후는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고능준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냉큼 도로 내가거라.”

태후가 내시에게 옥새를 다시 가져가라고 했다. 이때, 갑자기 고능준이 손을 들고 내시를 제지했다.

“잠깐.”

고능준이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을 경성 밖으로 내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겠습니다.”

태후가 흠칫 놀랐다.

“왜 또 나쁘지 않다는 게야?”

“진안 군왕이 경성을 떠나면 안 된다고 했던 이유는 태자 전하의 몸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태자 전하께서 행방이 가능하다는 게 확실해졌으니, 진안 군왕을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지요.”

고능준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이 상소문은 진소가 쓴 것이니, 우리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좋은 기회라고?

태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고능준은 더는 말하지 않고, 미소 띤 얼굴로 태후를 향해 손을 뻗으며 옥새를 찍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태후가 내시에게서 옥새를 받아오며 말했다.

“사실 내보내는 게 더 좋긴 하지. 애가도 더는 그 애를 보고 싶지 않았으니.”

옥새 인장이 상소문 위에 진하게 찍혔다.

이제 그만, 썩 꺼지거라.

물건들이 쏟아지는 소리와 탁자가 쿵 하고 바닥에 쓰러지는 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군왕부로 돌아온 시종의 보고를 들은 고 선생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의 옷에 걸린 탁자가 쓰러지는 소리였다. 탁자 위에 놓여 있던 찻잔과 책들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그러나 고 선생은 쓰러진 탁자를 아랑곳하지 않고 시종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군왕 전하가 경성을 떠나는 것을 윤허하셨다고?”

고 선생이 다시 한번 물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옥새까지 찍었다고 들었습니다. 내일이면 중서문하성에서 명을 하달할 테고요.”

시종은 고 선생의 행동에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하긴, 놀랄 만도 하지. 너무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이라, 미처 대비할 겨를도 없었어.

“진 상공이 올린 주청이라고 합니다.”

시종이 한 마디 덧붙였다.

왕비가 진 상공의 저택을 찾아가 사람을 때렸다는 이유로? 결국, 왕비 때문에 전하께 불똥이 튀었군.

고 선생이 시종 앞에서 체면을 신경 쓸 겨를도 없는 듯,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중얼거렸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고 선생이 안채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속으로 외쳤다.

참으로 공교롭구나! 너무도 공교로워!

고씨 저택 앞은 짐을 싣고 오가는 마차로 시끌벅적했다.

“왜들 저러지? 이사라도 하나 보네?”

지나가던 행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이사긴 이사지요. 소문도 못 들으셨습니까? 고 대인이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대요.”

노점 점포의 점원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자 행인이 몹시 놀랐다.

“고 대인이 사직을 청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리 대단한 가문의 어르신이 왜 사직을 하겠소?”

“고 대인은 진 상공에게 내쫓긴 겁니다. 고 대인은 외척이니까요.”

점원이 그에게로 바짝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조정의 중대한 비밀을 몰래 알려주는 것처럼 우쭐한 눈빛으로 말했다.

“에헤, 모르는 소리. 진 상공도 외척이잖나?”

행인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대꾸했다.

아, 그렇네.

갑자기 말문이 막힌 점원이 혀를 내둘렀다.

“그, 그래도 같은 산에 호랑이가 두 마리나 있을 수는 없는 법이잖습니까. 이제 진 상공이 외척이 되었으니, 고씨 가문을 내쫓는 거겠죠.”

“다 똑같은 외척인데, 무슨 배짱으로 누가 누굴 내쫓겠나?”

행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대꾸했다.

“진 상공은 좋, 좋은 외척이니까, 할 수 있지요.”

점원이 입술을 삐쭉이며 억지를 부리자, 행인이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좋은 외척, 나쁜 외척이 어디 있소? 왕망이 한나라를 빼앗을 때도, 양견이 북주(北周)를 빼앗을 때도, 나라를 빼앗기 전에는 다들 그들을 청렴결백하고 좋은 관리라고 입을 모아 칭찬했었소.”

행인이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점원이 놀라 두 눈을 크게 뜨고 떠나가는 행인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저, 저, 저 사람이 지금.

“진 상공이 반역을 일으킬 자라고 욕하는 거잖아?”

점원이 행인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중얼거렸다. 그의 온몸에는 소름이 돋아 있었다.

반역? 이런 말을 내가 입에 올려도 되는 건가?

점원은 여전히 분주한 고씨 저택의 문 앞을 슬쩍 내다보고는, 서둘러 어깨를 움츠리고 노점으로 돌아갔다.

진 상공 저택 앞도 시끌벅적하긴 마찬가지였다. 고씨 저택과 다른 게 있다면, 진 상공의 저택 앞은 그를 만나기 위해서 줄을 서는 관리들로 가득했다는 점이었다. 태자의 국혼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문 앞에는 예전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늘 그랬듯 진소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진소를 찾아온 관리들 또한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개의치 않는 듯했다. 행랑에 앉아 잠시 잡담을 나누다가 자리를 뜨면, 또 다른 무리가 들어와 그 자리를 채웠다. 그렇게 진씨 저택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관리들의 마차들로 붐볐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대인께서…….”

서재 안, 수하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말했다. 진소가 손을 들어 그가 더 말하려는 것을 끊었다.

“말할 필요 없다. 바깥에서 무슨 말이 도는지는 본관도 이미 잘 알고 있어.”

수하가 알겠다고 하자, 옆에 있던 막료가 그에게 물러가라고 손짓했다. 수하가 서둘러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대인, 고 대인은 정말로 짐을 정리하고 고향으로 내려가려는 모양입니다.”

막료의 말에 진소가 입꼬리를 올렸다.

“나도 알고 있네. 그자가 왜 이렇게 깔끔하게 떠나려는 건지도 잘 알아. 고능준이 잠시 예봉을 피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이참에 해야 할 것들을 하면 되네.”

막료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그자가 없는 틈을 타서,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그자의 사람들을 내치면 됩니다. 내년에 고 대인이 경성으로 돌아와도 생각만큼 쉽게 재기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그런데 진안 군왕 쪽에서 시간을 끌며 아직도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수왕비가 경성으로 온다니, 모친과 형제들의 얼굴을 한번 보고 떠나고 싶다나요.”

“신경 쓸 필요 없네. 태후마마께서 이미 청을 거절하셨으니.”

진소가 말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사환이 누군가를 막으려는 듯이 작게 불렀다. 하지만 진소 부인은 이미 문 앞에 서 있었다.

안에 있던 막료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다들 물러가게.”

진소의 말에 막료들이 고개를 숙인 채 예를 표하고 물러갔다.

진소가 진소 부인을 보며 물었다.

“부인, 여기는 어쩐 일이오?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단랑과 태자의 국혼이 결정된 후로, 진소 부인은 진소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웬만하면 진소를 마주치지 않으려 늘 그를 피하던 진소 부인이건만, 오늘은 어쩐 일인지 먼저 진소를 찾아왔다.

“교랑을 내쫓는다고요?”

진소 부인이 자리에 앉지 않고 여전히 문가에 서서 물었다. 진소가 몸을 일으켰다.

“그 일은…….”

진소 부인이 진소의 말을 끊었다.

“내게 무슨 도리니 이치니 말할 필요 없어요. 내가 아는 도리란 딱 한 가지예요. 양심에 거리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귀신이 와서 문을 두드려도 무섭지 않다는 거죠.”

진소 부인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몸을 홱 돌리고 방을 나갔다.

“칠랑.”

진소가 재빨리 진소 부인의 팔을 붙잡으며 그녀를 붙잡아 세웠다.

“이건 정 낭자에게도 좋은 일이오. 경성에 남아 있어 좋을 게 뭐가 있다고? 정 낭자가 경성에서 계속 이렇게 분란을 만든다면, 언젠가는 그 기고만장함이 낭자 스스로를 해치게 될 거요.”

진소 부인이 몸을 돌렸다.

“아니요. 당신이 틀렸어요. 정 낭자가 말썽을 피우는 게 아니에요. 늘 다른 사람들이 정 낭자에게 시비를 거는 거죠.”

진소 부인이 진소의 손에서 팔을 힘껏 빼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자신의 거처로 돌아온 진소 부인이 얼굴을 두 손에 묻은 채 흐느꼈다.

“어머니, 어머니.”

진단랑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서둘러 소매로 눈물을 닦고 웃음을 짜내며 진단랑을 맞이했다.

“어머니.”

진단랑이 해맑게 웃으면서 활을 손에 쥐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어떻게 그걸 들었니? 발 조심해. 아주 무거운 활이니까.”

깜짝 놀란 진소 부인이 활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진단랑은 활을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은 다음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 이건 우선 어머니한테 맡겨 둘래요. 궁에서 온 사람들이 어찌나 성가시게 굴던지. 다들 저더러 활을 가지고 놀지 말라는 소리밖에 안 하더라고요.”

진단랑이 투덜대자, 진소 부인이 애써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나중에 이걸 가지고 놀고 싶을 때, 어미한테 오렴.”

진단랑이 기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며칠 가지고 놀지도 못하겠지.

진소 부인의 눈시울이 붉어지면서 다시금 눈가가 촉촉해졌다.

“이건 정 언니가 저한테 선물해 준 거예요.”

진소 부인의 표정을 보지 못한 진단랑은 웃으며 바닥에 놓인 활을 매만졌다.

“조부님께서 그러시는데, 정 언니의 궁술이 엄청나대요! 저더러 천천히 잘 배우라고 하셨어요.”

진단랑이 고개를 들고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니, 열심히 연마하면, 저도 정 언니만큼 훌륭한 궁술을 익힐 수 있겠죠?”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럼.”

진단랑이 헤헤 웃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활의 이곳저곳을 만졌다. 진소 부인은 손을 뻗어 진단랑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울음을 참자 미소가 일그러졌다.

진안 군왕부 역시 떠날 준비로 한창이었다. 진안 군왕이 방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봤던 다른 여인들은 어딜 간다 하면 다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데, 당신은 정리할 게 별로 없나 봐요?”

반근과 소심도 그리 분주해 보이지 않자, 진안 군왕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정교랑에게 물었다.

“어차피 죽으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니 별로 챙길 게 없네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반문했다.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나야 뭐. 빈손으로 여기에 왔으니, 당연히 여기에 있는 물건들도 내 것이 아니지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정교랑을 향해 장난스럽게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우린 역시 잘 맞네요.”

바깥에서 얼마 없는 짐을 정리하고 있던 반근과 소심이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는 눈을 마주치며 웃었다.

안에 있던 정교랑도 웃으면서 진안 군왕의 새빨개진 귀를 쳐다보았다.

“아씨, 이건 몸에 지니고 가시겠어요? 아니면 마차에 실어 둘까요?”

반근이 상자 하나를 들고 와서 물었다. 정교랑이 상자를 힐끔 보고는 대답했다.

“몸에 지니고 다녀.”

-<교랑의경> 2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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