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 자리했던 기쁨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울지 마요, 울지 마. 차라리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게 낫겠어요. 차라리 정색하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게 낫지, 이렇게 상심하고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아요.
대체 얼마나 슬프기에, 도통 감정을 드러낼 줄 모르던 이가 이토록 눈물을 쏟는 건지.
“정방.”
진안 군왕은 잠긴 목소리로 그녀를 부르며 꽉 끌어안고, 손으로 등을 가만히 토닥여 주었다.
“슬퍼하지 마요.”
정방, 슬퍼하지 마요.
진안 군왕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 몰랐다. 잠결에 손을 뻗어 보던 그는 베개 주변이 비어 있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어젯밤 일이 꿈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퍼뜩 일어나 앉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숙였다. 가슴께의 내의가 쭈글쭈글 구겨진 모습이 보였다. 아직 젖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꿈이 아니었어!
진안 군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전하.”
밖에 있던 경 공공이 인기척을 느끼고 안으로 들어왔다. 경 공공은 휘장을 들어 올린 채 침상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얼른 앞으로 시선을 옮겼다.
쭈글쭈글한 내의는 입고 있다고 하기 뭐한 상태였다. 입고 있다기보다는 걸치고 있다고 하는 게 옳았다. 진안 군왕은 가슴을 반쯤 드러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손을 들고 입을 가리며 하품을 했다.
“부인은?”
피곤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부인은?
경 공공은 입을 삐죽이며, 진안 군왕의 퀭한 눈가를 쳐다보았다.
“부인은 활쏘기를 하러 가셨습니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돌아갔구나. 많이 좋아졌다는 뜻이야.
진안 군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일어나 욕실로 들어갔다.
“나도 단련해야겠다. 이 태의한테 가서 물어봐라. 내가 말을 타고 활을 쏴도 되는지.”
“그건 급하지 않습니다.”
경 공공이 얼른 뒤를 따르며 투덜대듯 말했다.
“절제가 중요하지요. 전하의 건강은 이제 막 좋아지신 참이니, 젊음만 믿으시면 안 됩니다.”
“뭘 절제해? 뭘 그리 중얼거리는 게야?”
미간을 찌푸리며 묻던 진안 군왕은 경 공공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어제 경성에 무슨 움직임이 있었느냐?”
태자비 인선이 확정되면서 경성과 조당은 다시 한번 후끈 달아오른 터였다. 경 공공은 욕실로 따라 들어가면서, 진지한 얼굴로 대답을 올렸다.
정교랑이 돌아왔을 무렵, 진안 군왕은 벌써 마당을 한 바퀴 돈 상태였다. 새벽 햇살이 비추는 여인은 여전히 머리를 높이 올려 묶고 치마에 덧저고리를 입은 상태였다. 땀이 송골송골 맺힌 얼굴은 훨씬 생기 있어 보였고, 표정 역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덤덤해 보였다. 진안 군왕을 쓱 훑어보고도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이었다.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어젯밤 자신의 품을 파고들며 흐느껴 울던 모습은 환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밥상부터 차려. 난 씻고 올게.”
정교랑이 반근에게 말했다.
달라졌어.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어젠 이런 말 안 했잖아.
“밥상을 차려라.”
진안 군왕의 명에 마당에 있던 시녀들이 네, 하고 대답했다. 진안 군왕의 착각인지 시녀들의 동작이 전보다 경쾌해 보였다.
식사 준비를 마치고 정교랑이 막 자리에 앉자마자, 소심이 급히 들어왔다.
“부인, 조 집사가 그러는데, 정평이 안 보인대요.”
안 보인다고?
진안 군왕은 흠칫 놀란 표정이었다.
조 집사와 정평은 어젯밤 군왕부에서 묵었는데,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안 보여?
소심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도망친 거지?”
정교랑이 물었다.
네, 사실 조 집사는 ‘그 망할 놈이 또 도망쳤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잖아요.
“조 집사가 벌써 찾으러 갔어요.”
소심이 즉답을 피하고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대답하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찾는 게 그리 쉽진 않을 텐데.”
정교랑이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반근과 소심이 얼른 따라나서려는데,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었다.
“내가 가서 찾아볼게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쌀떡 한 접시를 들고 일어섰다.
“엊저녁에도 끼니를 걸렀잖아요. 이거라도 좀 먹고 가요. 왕부 사람들을 전부 보내 찾도록 할게요.”
진안 군왕이 쌀떡 하나를 집어 건네며 말했다. 대청에 있던 시녀들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정교랑은 입을 벌려 쌀떡을 받고는, 소매를 들어 입을 가리고 먹으며 대답했다.
“다른 사람은 안 돼요. 그 사람이 숨으려 들면, 찾을 수 있는 이는 얼마 없어요.”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과 소심이 얼른 따라 들어가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진안 군왕도 접시를 들고 따라 들어갔다.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군요.”
정교랑은 입에 든 쌀떡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 반근이 겉옷을 입혀 주도록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진안 군왕이 쌀떡을 또 하나 건넸다.
소심은 꿇어앉아 옷자락을 정돈하고, 반근은 몸을 살짝 구부린 채 허리띠를 묶어 주었다.
“차도 한 모금 마셔요.”
옷을 갈아입고 서둘러 문을 나서는 정교랑을 보며, 진안 군왕이 시녀의 손에서 차를 낚아채 건네며 말했다. 정교랑이 차를 받아 단숨에 비우고, 진안 군왕에게 찻잔을 돌려주었다.
진안 군왕은 찻잔을 받으며 다른 한 손으로 쌀떡을 또 하나 건넸고, 정교랑은 쌀떡을 먹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에 서서 이 광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경 공공은 어안이 벙벙하여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다.
서문 밖, 조 집사가 말을 타고 허둥지둥 쫓아왔다. 조 집사는 너울을 쓰고 얼굴을 가린 채 다리를 한쪽으로 모아 옆으로 말을 탄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일찍 도망쳤으니 성문을 열기 전이었을 겁니다. 도망친 걸 알아채자마자 동서남북 성문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전부 못 봤답니다. 아직 성안에 숨어 있을 겁니다.”
조 집사가 말했다.
“아닐세. 이미 성을 나갔어.”
정교랑이 말했다. 그러고는 성 밖을 바라보더니,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말을 몰아 달려갔다. 조 집사 등이 부랴부랴 쫓아갔다.
여인이 이끄는 무리가 달려가는 모습은 행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보이십니까? 저쪽입니다.”
얼마 달리기도 전에, 조 집사가 앞쪽 큰길을 털레털레 걷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자 걷고 있던 사람이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냅다 달아나기 시작했다.
물론 두 다리가 네 다리보다 빠를 순 없는 노릇이었기에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지만.
“이 망할 자식이, 도망치긴 어딜 도망쳐!”
조 집사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려 정평의 멱살을 잡으며 소리쳤다.
“도망칠 거면 오는 길에 도망칠 것이지, 이제 와서 도망을 쳐? 여기가 어딘지 몰라? 네가 이러면 우리 아씨의 체면이 뭐가 돼!”
“도망친 거 아닙니다. 도망친 거 아니라고. 경성에 오면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소.”
정평이 몸을 웅크리며 소리쳤다.
“이런 망할 놈을 봤나, 마음대로 하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조 집사가 눈을 부라리며 호통을 쳤다.
두 사람이 실랑이를 하는 동안 정교랑은 말에서 내려 길가에 서 있었다. 조 집사는 정평을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정교랑 앞으로 끌고 왔다.
“왕비 전하.”
정평은 조 집사한테 붙잡혔던 옷을 정리하며, 태연한 얼굴로 예를 표했다.
“떠나시려고요?”
정교랑이 물었다. 아쉬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정평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눈을 반짝였다.
“내가 이 길로 가는 건 어찌 알았습니까?”
정평은 정교랑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돌연 질문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 아씨는 어떻게 왕부를 나서자마자 곧장 이리로 오신 거지? 다른 길로 가던 나까지 불러들여 돌아오게 하시고.
조 집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우리 아씨는 당연히 아시지.”
정교랑이 손을 뻗으며 정평 앞에 보여 주었다. 곁에 있던 이들도 호기심을 못 참고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의 손에 든 건 점을 치는 동전 세 개였다.
이거 덕분이라고?
조 집사는 멈칫했지만, 정평은 웃으며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는 역시 나와 같은 부류군요.”
그 말에 여인의 두 눈에는 또다시 눈물이 어렸다. 정평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다행히 이번엔 정교랑이 이성을 잃고 대성통곡하는 대신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땅 위로 떨어진 눈물 두 방울은 금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럼 내게 왜 떠나려 하냐고 물을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정평이 또 웃으며 말했다.
왜?
조 집사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정평도 이상하니 아씨도 이상해지시고, 두 사람이 만나면 더 이상해질 수밖에. 못 알아듣는 말은 한마디도 없는데, 합치면 도통 무슨 말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정교랑이 흥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대인도 보셨죠? 그럼 혹시…….”
정평이 손을 들며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낭자.”
정평은 엄숙한 표정으로 정교랑 손에 들린 동전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묻기 전엔 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알 텐데요?”
점괘와 관상을 보고 길흉을 예측하는 일은, 당사자가 아닐 경우 묻지도 않고 말해 주지도 않는 게 원칙이었다.
“더구나 돈도 안 줬고요.”
정평이 가슴 앞으로 팔짱을 끼며 말했다. 정교랑은 눈물이 그렁한 채 웃음을 지었다.
“네.”
예를 표하고 난 정교랑은 다시 고개를 들어 정평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떠나시는 거죠? 경성에 오신 게, 그 사람 때문 아니셨나요?”
내년엔 지금의 황제인 중종이 붕어하고, 새 황제가 즉위한다. 정평 또한 새 황제의 점괘를 봐 주면서 차차 명성을 얻기 시작할 터였다.
역사 속에서 정평이 점을 봐 주었던 평왕은 지금 이미 죽었어. 그런데도 정평은 경성으로 왔고, 또…….
왜 떠나는 거지? 경성에 남아야 하지 않나? 점괘를 보고 명성을 얻어야…….
“그 사람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내가 왜 그 사람 때문에 옵니까? 난 충분히 가졌고 부족한 게 없는데, 왜 그 사람을 찾아오죠?”
정교랑이 정평을 바라보았다.
“나의 재물을 더해 주는 자는 내 정신을 손상시키고, 내 명성을 더해 주는 자는 내 몸을 죽이죠(益我貨者損我神, 生我名者殺我身).”
정교랑의 말에 정평이 눈을 반짝이며 손뼉을 쳤다.
“훌륭합니다, 훌륭해요. 훌륭하군요.”
정평은 훌륭하다는 말을 연거푸 세 번이나 말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낭자는 역시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군요.”
정교랑은 웃음을 짓고,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눈물을 훔쳤다.
이건 선조 대인께서 신분을 밝힌 평왕에게 하신 말씀이야. 그러고는 평왕이 내리는 벼슬을 거절하셨지. 오늘 이런 자리에서 내 입을 통해 말하게 될 줄은 몰랐네.
“더구나 낭자도 있잖습니까. 나까지 꼭 있을 필요는 없지요”
정평이 정교랑을 보고 씩 웃으며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자, 정교랑이 멈칫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정평이 예를 표했다. 정교랑은 얼른 몸을 틀어 예를 피한 후, 황급히 답례를 올린 다음 앞으로 다가섰다.
“어디로 가시려고요? 강주로 돌아가세요?”
정교랑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네, 강주로 돌아가야지요. 아, 참. 듣자니 태평관이 낭자 거라던데, 좀 빌려 써도 되겠습니까?”
정평의 물음에 정교랑이 얼른 그러라고 대답했다. 정평이 웃으며 다시 예를 올렸다. 물론 정교랑은 이번에도 몸을 틀며 예를 받지 않고 피했다.
정평은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서서, 이제야 비로소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경외감이 줄어든 대신 아쉬움이 늘어난 표정이었다. 가족과 헤어지기 싫어 매달리는 어린아이 같다고 해야 할까.
정평이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노자 연구에 진전이 좀 있는데, 낭자도 한번 들어 보겠습니까?”
정교랑은 정평을 보고는 다시금 소매를 들어 얼굴을 가리며 흐르는 눈물을 숨겼다. 정교랑은 눈물이 떨어지기 전에 얼른 허리를 깊이 숙이며 예를 표했다.
“가르침을 주세요, 대인.”
정교랑이 목멘 목소리로 대답했다.
초가을 새벽의 도로 위에는 성을 드나드는 사람이 차츰 많아졌다. 말을 타고 가는 사람, 가마를 타고 가는 사람, 짐을 지고 가는 사람, 수레를 밀고 가는 사람, 능라 비단을 휘감은 사람, 무명천과 삼베 옷을 입은 사람 등등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전부 이곳을 지나며 저도 모르게 길 가장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길옆 들판에는 커다란 가래나무 한 그루만이 덩그러니 있었다. 아직 단풍이 들기 전이라 나뭇잎은 짙푸른 색이었다.
그만한 크기의 가래나무는 보기 드문 것이 아니었으나, 행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그 나무 아래에 앉은 두 사람이었다.
젊은 사내는 손으로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차분하고 당당한 태도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고, 어린 낭자는 단정하게 앉아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지요(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 노자, <도덕경>). 만물에는 선조가 있고, 동류에는 조상이 있는 법입니다. 천지와 만물이 먼저고, 인간은 그 다음이니…….”
저게 지금 뭐 하는 거지?
누군가가 호기심을 못 참고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무 아래에 시립해 있던 시종들은 제지하지 않았고, 말하는 이와 듣는 이도 딱히 불쾌한 기색을 보이지 않으며 무아지경에 빠진 듯 각자 하던 일에 집중했다.
“천지는 태화(太和)에서 나고, 태화는 허명(虚冥)에서 나니, 유(有)는 무(無)에서 나지요. 천지는 일음일양(一陰一陽), 즉 한 번이 음이면 다음은 양이 되는 원리로 돌아갑니다. 사명(伺命)이 내게 왔다면, 어찌 대(大)를 바라고…….”
맑고 경쾌한 목소리가 나무 아래에서 들판으로 퍼져 나가는 동안 주변을 에워싼 사람은 점점 많아져, 멀리서 보기에도 가히 장관을 이루었다.
진안 군왕비가 성문 밖 나무 아래에서 도를 논했다는 소식에도 경성 사람들은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백성들과 조정 대신들의 관심은 다가올 태자의 국혼에 쏠려 있었다.
7월 말, 흠천감에서 태자 국혼 날짜를 택일하여 천하에 공표한 날, 노신 둘이 궁문 앞에서 땅에 이마를 찧으며 황제를 부르짖었다.
죽음으로 간언을 올리는 사간(死諫)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태후와 탄핵을 당한 진소 모두 전에 없이 강경한 태도로 맞섰다. 태후는 심지어 두 노신의 집으로 내시 둘을 보내 머리를 찧으며 피를 흘리는 노신을 당장 데려가라며 윽박을 질렀다. 그 바람에 두 노신은 머리를 찧어 죽기도 전에 분통이 터져 죽을 뻔했다.
조정과 민간을 막론하고 소란이 일었다.
“난 이해가 안 되는군. 그자들이 왜 분통이 터진단 말이오?”
다리 위에 흩어져 앉아 있던 사람 중 멜대를 끌어안고 있는 일꾼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뭐가 분통이 터지냐고?”
반쯤 남은 튀김 간식을 높이 든 일꾼 하나가 혀를 차며 웅얼거리는 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발 늦은 게 분통이 터지지. 딸내미를 태자한테 시집보내지 못했잖소. 진 상공만 수지맞게 됐는데 그 속이 편하겠냐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그 말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품팔이할 일꾼을 찾으러 나온 사내가 튀어나온 배를 불쑥 내밀며 대꾸했다.
“거 허튼소리 말게나. 딸내미를 바보한테 시집보내는 게 뭐 좋은 일이라고 서로 하고 싶어 안달이 나나?”
“이보십시오. 그 바보가 누구인지를 봐야지요.”
일꾼이 즉각 반박했다.
“상대는 태자란 말이외다. 장차 황제로 등극할 분이라고. 시집가는 건 먹고사는 일을 의탁하기 위함인데, 태자한테 시집가면 평생 부귀영화를 지겹도록 누릴 것 아닙니까.”
가난뱅이 일꾼이 자신의 말에 반박하니 뚱뚱한 재력가는 언짢은 듯 눈을 부라리며 비웃었다.
“하여간 가난뱅이는 먹고 마시는 것밖에 모른다니까.”
“사람한테 먹고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소? 그러는 댁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면 뭐하러 일꾼을 구해 짐을 부리러 나왔소이까? 그냥 강물에 던져 버리고 말지.”
일꾼 역시 눈을 부라리며 받아쳤다. 그러자 뚱뚱한 재력가가 발을 탁 굴렀다.
“이 망할 가난뱅이 놈 같으니라고!”
뚱뚱한 재력가가 일꾼의 팔을 홱 붙잡았다.
“어디 뜨거운 맛 좀 봐라.”
“어허, 뭐 하는 거요! 뭐 하는 거야! 돈 있으면 다야? 여기 사람을 치네!”
“좋게 좋게 말로 해요. 말로 하라고!”
가난한 일꾼이지만 무시를 당하는 꼴을 보니 참을 수 없는지 다른 일꾼들도 우르르 몰려들었다. 다리 위에 순식간에 왁자지껄 소동이 벌어지자, 다른 곳에 있던 이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
“왜 싸우는 거지?”
초막 아래에서 밥을 먹던 손님이 호기심을 못 참고 입을 열었다. 그러자 초막 밖에서 목을 길게 빼고 무슨 일인가 살피던 주인이 아궁이 쪽으로 가서 커다란 솥에 물을 넣으며 대꾸했다.
“태자의 국혼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주인이 세 손님을 시선으로 쭉 훑으며 말했다.
서른 남짓한 나이로 보이는 세 사람은 새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낡지도 않은 옷을 입고 있었다. 옷감 역시 상등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등의 것도 아니었다. 흔히 먹는 평범한 보양탕과 고기볶음을 주문해 먹고 있는데, 앉은 자세만큼은 주안상이 차려진 연회 자리에 있는 듯 단정했다.
경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말단 관리들이었다.
무서워할 건 없지만, 그렇다고 무시해서는 안 되지.
주인이 국자를 내려놓고 다가와 계속해서 떠들려는데, 또 몇 사람이 들어와 앉았다.
“세상이 점점 말세로구먼. 그 당당하던 진 상공이 이리 금수만도 못한 짓을 행하다니, 정녕 사마소(司馬昭)의 마음을 품은 게야.”
그중 한 사람이 분노하며 말하자, 홈칫 놀라던 주인이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정의 일에 대해 저리 대놓고 왈가왈부하는 사람은 학자들과 문인들뿐이지.
“자묵(子墨) 형, 말을 삼가시게.”
유생 하나가 말했다.
“삼갈 게 뭐 있나!”
그러자 또 다른 유생이 더욱 분노하며 탁자를 내리쳤다.
“높은 자리에 있는 관리가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예의도 염치도 내던진 게 아닌가. 왕망도 모자라 이제는 양견(楊堅: 수문제)까지 나왔는데, 태후는 천하의 입을 막는 데만 급급한 상황이야. 이대로 가면 이 나라는 더 이상 나라가 아닐 걸세.”
왕망과 양견까지 운운하며 욕을 해대니, 초막 주인은 놀라 주문을 받으러 갈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래도 말을 그렇게 하면 쓰나. 진 상공인들 본인의 행동이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 몰랐겠나? 어쨌거나 진씨 가문에서 태자비가 나오는 게 고씨 가문에서 나오는 것보다야 낫지.”
성격이 온화한 유생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낫다고? 낫긴 뭐가 낫나? 사마씨 황제가 있는 한, 신하가 권력을 농단하는 일을 어찌 막느냔 말일세.”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유생이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그러니 장강주 선생의 말씀처럼 종친을 양자로 입적해야…….”
다른 유생이 막 입을 열려는데, 성격이 온화한 유생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말을 끊고는 손을 흔들며 주인을 불렀다. 주인은 그제야 다가갔다.
이쪽에서 음식을 주문하느라 잠시 이야기가 중단된 동안, 저쪽에 있던 세 사내는 일어나 돈을 지불하고 초막을 나갔다.
“정말 황당한 노릇이군. 황당한 노릇이야.”
초막을 나오자 그중 한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입을 열었다.
“그러게 말일세. 나랏일이라고는 하나, 따지고 보면 가정사이기도 해. 왜 다들 남의 가정사에 저리 근심이 많은지, 원.”
다른 사내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세 사내가 눈을 마주치고는 피식 웃었다.
“오늘 저녁 유(劉) 대인 댁 연회에 자네도 가나?”
한 사내가 묻자 다른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필 어머니께서 건강이 안 좋으셔서 말일세. 요 며칠은 출타하기가 힘들 것 같군.”
쭉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던 세 사내는 갈림길에서 예를 표하고 헤어졌다. 모친이 병중이라는 사내는 동쪽으로, 나머지 두 사내는 서쪽으로 길을 따라 걸어갔다.
몇 걸음 채 떼기도 전에, 두 사내 중 한 사내가 고개를 홱 돌아보며 침을 뱉는 시늉을 했다.
“어머니가 편찮으셔? 집안 어른을 저주하다니, 천벌이 무섭지도 않나. 송 대인 댁에서 초청장을 받은 걸 우리가 모를 줄 알고?”
다른 사내가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할 것도 없지. 다들 침묵하며 말을 아끼고 있어도, 속으론 각자 계산이 서지 않았나.”
태후가 두 노신을 대한 태도를 보면, 결과는 이미 자명하다고 할 수밖에.
“복의(濮議)에 관한 일도 온 조정이 반대했지만 어쨌나? 결국 폐하의 뜻대로 되지 않았느냔 말일세.”
나랏일이든 집안일이든 세간에서 뭐라 떠들든 간에 그뿐이었다. 사사로운 이익을 꾀했다며 진소를 욕하기엔, 궁문 앞에서 머리를 찧으며 사간한 두 노신인들 사사로운 이익을 꾀하지 않았다고 하기 힘들었다.
겉으로는 이렇다 하게 말하지 않아도, 물밑에서는 다들 편을 가르고 있었다. 진소의 옛사람 중에는 더는 그 뜻을 따를 수 없다며 떠난 이도 많았지만, 그만큼 새로 채워진 사람도 많았다. 진 상공이라는 새로운 외척이 생기면서, 이전의 외척인 고씨 가문이 계속해서 권세를 유지할 수 있을지 또한 거취를 결정해야 하는 이들이 고민하는 지점이었다.
“장강주는 뭐라 하더냐?”
진 시강이 물었다. 하지만 진호는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이었다.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한번 묻자, 진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이제는 말하지 않겠다고 한답니다. 전에는 결정이 나지 않았으니 말했지만, 지금은 이미 결정이 났으니, 말할 필요가 없다면서요. 세상 사람들이 알아서 평가할 거랍니다.”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처세를 하려면 무릇 장강주처럼 해야 해. 시원시원하고 자유롭지 않느냐.”
“장강주가 사직을 하고 떠났다면, 그것이야말로 적한테만 좋은 일이었겠죠.”
진호는 상소문 하나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진 상공이 사람을 시켜 상소문을 보내 왔습니다.”
“그럼 우리 가문이 진 상공 가문과 손을 잡는 것이냐?”
진 시강이 물었다.
“아버지,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죠. 우리는 고씨 가문을 내쫓으려는 겁니다.”
진호는 웃으며 거기까지 말하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당에는 어느새 가을빛이 완연하였다.
벌써 가을이 왔네. 눈 깜짝할 사이에 여름이 갔어.
연꽃은 이미 다 졌겠지. 연꽃 구경을 가고 싶은 마음은 평생 다시는 안 들 것 같네.
정녕 눈 깜짝할 사이에.
“아버지, 사람에게 가장 큰 벌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진호가 불쑥 질문을 던지자, 진 시강이 진호를 힐끔 쳐다보았다.
“구해도 얻지 못하는 것?”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며 부친에게 예를 표했다.
“예리하십니다, 아버지.”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십삼, 사내대장부라면 훌훌 털어버릴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어린애처럼 굴지 마라.”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지었다.
“네, 제 얘기를 한 것도 아닌데요.”
정 낭자가 결국 다른 사람과 혼인하고, 너와 원수가 된 일을 말한 게 아니더냐? 네가 아니면 누군데?
진호는 잠자코 창밖을 바라보았다. 웃음을 짓고 있던 표정에 서늘한 기운이 스쳤다.
그런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어찌 나 하나일 리가.
세간에서 오가는 이야기와 무관하게, 태자의 국혼은 절차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혼인 날짜가 보름 앞으로 다가와서, 궁이 아주 바쁩니다. 그래도 물건이 부족하진 않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경 공공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시 이었다.
“당초 회혜왕 때 준비해 둔 게 있으니까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야 아무렴 어떻겠느냐. 육가아가 혼례만 잘 올리면 됐지.”
“진씨 가문의 십구랑 낭자는 왕비와 잘 지내셨지요. 왕비 전하와 잘 맞는 걸 보면 좋은 낭자일 겁니다. 심성도 곱고요. 전하를 잘 대해 주실 테지요.”
왕비랑 잘 맞으면 심성이 고운 건가? 왕비가 심성이 고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경 공공이 은밀히 미소를 지었다.
왕비 얘기가 나오자 진안 군왕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왕비가 출타하면서 어딜 간다고 했지?”
“모르겠습니다.”
경 공공이 불만스러운 투로 대답했다.
정평인지 뭔지 하는 자를 쫓아간 일이 있은 후로, 왕비는 바깥출입을 시작했다. 정씨 저택에 다녀온 지 며칠도 안 되어 오늘 또 출타를 한 터였다.
전하 곁을 더 오래 지켜야 한다는 걸 모르나? 더군다나 지금처럼 출타하기 껄끄러운 시기에.
소심이 문지기를 보고 분을 못 참으며 콧방귀를 뀌고는 홱 돌아섰다.
“부인, 진 상공께서 안 만나시겠답니다.”
마차 앞으로 온 소심이 휘장을 사이에 두고 나지막이 고했다.
“난 진 상공을 뵈러 온 게 아니잖아.”
정교랑이 휘장을 들어 올렸다.
“난 부인을 만나려는 거야.”
소심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 집이나 안주인이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진 상공이 혼사 준비로 바쁘답니다. 황궁에서 나온 사람들이 단랑 아씨께 법도를 가르치고 있기도 해서, 만나기 불편하대요.”
소심이 말했다. 정교랑이 진씨 저택의 대문을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여종과 몸종에 둘러싸여 밖으로 나왔다.
“궁엔 내가 직접 다녀올게. 또 무슨 법도가 더 있는지 내가 직접 확인해야겠어.”
여종들에게 당부의 말을 전하던 진십팔랑은 대문 앞에 세워진 정교랑의 마차를 보고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진십팔랑은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왕비를 뵈옵니다.”
진십팔랑이 예를 표하자, 뒤에 있던 여종들과 몸종들도 따라서 예를 올렸다. 정교랑이 마차에서 내려 가볍게 답례했다
“낭자가 단랑을 태후께 천거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십팔랑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적임자를 천거하는 일에 혈육이라고 피할 필요는…….”
진십팔랑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이 손을 들어 따귀를 후려쳤다. 철썩, 하는 소리에 모두가 깜짝 놀랐다.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자, 어찌나 세게 후려쳤는지 진십팔랑은 다리까지 휘청였다.
“아니…….”
진십팔랑은 화끈거리는 통증과 함께 어지럼증을 느끼며 소리쳤다. 하지만 진십팔랑이 제대로 입을 열기도 전에, 또다시 따귀가 날아왔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정교랑의 말소리도 들렸다.
“아파요? 안 아파요?”
정교랑이 물으며 손을 휘둘렀다.
또다시 철썩.
“아파요? 안 아파요?”
정교랑이 또 손을 휘둘렀다.
철썩.
좌우로 각각 두 대씩 뺨을 맞은 진십팔랑은 바닥으로 쓰러졌다. 입가에선 피가 흘러나왔다.
실로 눈 깜작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씨 저택 대문 앞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울려 퍼지면서, 여종들과 몸종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손을 거두고 단정히 서 있는 여인에게 감히 다가가는 사람은 물론 없었다. 다들 우왕좌왕하며 진십팔랑을 부축할 뿐이었다.
정교랑은 거의 까무러치기 직전인 진십팔랑을 보며 다시 물었다.
“아파요? 안 아파요?”
진씨 가문의 여종들과 몸종들, 대문 앞에 있던 사환들은 전부 어안이 벙벙해졌다.
진안 군왕비가 다시 바보가 됐나?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리질 않나, 때리고 나서 아프냐고 묻기까지 해?
아픈지 안 아픈지 궁금하면 자기 따귀를 후려칠 일이지! 그럼 아픈지 안 아픈지 알 거 아냐!
“맞으니까, 아파요? 안 아파요?”
정교랑은 여종들의 부축을 받으며 일어난 진십팔랑을 보며 다시 물었다. 대답을 듣기 전엔 물러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뺨은 얼얼하다 못해 화끈거리고, 입에선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해서 숨쉬기도 힘들고, 귀는 웅웅 울렸다.
입술이 터지고 얼굴이 부어오르며 순간 어지럼증을 느끼던 진십팔랑은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다들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찌할 바를 몰라 전전긍긍할 뿐, 감히 정교랑 앞으로 다가서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진안 군왕비라는 신분 때문이라기보다, 진 노태야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기 때문이리라.
맞으니까, 아프냐고?
진십팔랑은 고개를 들고, 고압적인 태도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인을 보며 씩 웃었다. 그러고는 손을 들어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왕비 전하, 무슨 일인지, 들어가서 말씀하시지요.”
하인 하나가 걸어와 예를 표하고 말했다.
진씨 저택은 번화가에 위치한 데다, 근래 들어 화제의 중심에 있다 보니 암암리에 엿보는 눈이 많았다. 이 상황이 지속되다 보면, 구경하려는 이들이 몰려들 게 뻔했다.
진 상공의 신분과 지위가 두려우니 가까이 와서 구경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벌써 멀찌감치 서서 이쪽을 보며 수군거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냐, 됐어.”
진십팔랑이 말했다. 입을 열면서 통증이 엄습하자, 진십팔랑은 도리어 정신이 또렷해졌다. 그녀는 자신을 부축하는 여종들과 몸종들을 물리치고, 똑바로 서서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남 보기 부끄러울 것도 없는걸.”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아파요? 안 아파요?”
진십팔랑은 다시금 웃음을 보이며 손을 들어 입을 가렸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지 알아요. 대답해 주죠. 아파요.”
무슨 대화가 이래?
주위를 에워싼 여종들과 몸종들, 사환들은 영문을 몰라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동생이잖아요. 얼마나 아픈지, 당신이 나서서 알려 줄 필요는 없다고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보며 소리쳤다. 정교랑이 진십팔랑을 바라보았다.
“알려 주러 온 거 아니에요. 아는지 모르는지 물어보러 온 거죠. 안다니 다행이네요. 난 또 아픈 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말을 마친 정교랑은 그대로 뒤돌아 걸어갔다.
“정교랑!”
진십팔랑이 분노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당신도 아프죠?”
정교랑이 몸을 돌려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당신이 원하는 게 실현되지 않았잖아요.”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입과 혀를 다쳐 발음이 분명하진 않았지만.
“하늘의 계산이 인간의 계획만 못 할 줄은 몰랐죠? 천명이 그 재주와 지혜를 빼앗아 갔을지는 몰라도, 그 사람이 가진 걸 당신들은 여전히 가질 수 없잖아요!.”
“십팔랑 아씨!”
옆에 있던 하인이 화들짝 놀라 얼른 진십팔랑의 말을 끊었다.
“내가 못할 말이라도 했어?”
진십팔랑이 소리쳤다. 하인한테 치는 호통이었지만, 진십팔랑의 시선은 정교랑을 향하고 있었다.
“입으로 내뱉지 않는다고 만천하를 속일 수 있을 것 같아?”
진십팔랑이 말했다. 그러자 정교랑이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아니요. 난 아프지 않아요. 말했잖아요, 난 겸손하지 않다고. 잊었어요?”
겸손하지 않다고?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내 글씨도, 별로예요.
아니, 아니에요. 정 낭자, 겸손하시네요.
난, 겸손하지 않아요.
전에 나눈 대화가 귓가를 스쳤다. 귀가 웅웅 울리는 통에 소리는 현실감 없이 아득하게 들렸다.
잊지 않았어. 잊을 수가 없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고,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
“잊었군요. 진소, 글씨 연습을 왜 하는지 잊은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하자, 진십팔랑이 멈칫했다.
글씨 연습?
“잊었군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다 잊었네요. 내가 안 좋다고 하면, 안 좋은 거라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안 된다고 말했잖아요.”
정교랑은 진십팔랑을 향해 웃음을 보이더니,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천천히 흔들었다.
“그래서 난 안 아파요. 난 내가 가진 걸, 앞으로도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테고요.”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내가 방금 말한 건 태자인데, 지금 저 말도 태자를 가리키는 건가?
태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면 어찌…….
진십팔랑의 안색이 싹 변했다. 뺨이 벌겋게 부어오른 터라 겉으로 티가 나진 않았지만.
“그 말 무슨 뜻이죠?”
진십팔랑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생각하는 그 뜻이에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인 후 돌아섰다.
“정 낭자.”
어디선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옆쪽을 쳐다보았다. 진소 부인이 두 여종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 앞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색이 초췌해진 진소 부인에게서 예전의 우아한 기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정교랑을 본 진소 부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진소 부인은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정 낭자.”
정교랑이 진소 부인을 보며 허리를 굽혀 예를 올렸다.
“왕비 전하, 저희 노야께서 안으로 들어와 말씀 나누시랍니다.”
하인 하나가 진소 부인 옆에서 걸어와 말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부인을 뵈러 온 거예요.”
정교랑이 진소 부인을 쳐다보며 말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 뵈었으니 괜찮아요.”
진소 부인이 정교랑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들어가서 단랑을 보고 가요.”
“아니에요.”
정교랑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한 후,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의 마차는 진씨 저택 앞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진소 부인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옮기며 따라가려 했지만, 옆에 있던 여종이 꽉 붙잡으며 말렸다.
“부인, 나가시면 안 됩니다. 이런 때에 정 낭자를 만나는 건, 정 낭자한테 안 좋아요. 이젠 군왕비가 되지 않았습니까. 군왕부에서 그런 소동을 벌인 지도 얼마 안 됐고요. 노야의 말씀을 들으셔야죠.”
하는 수 없이 걸음을 멈춘 진소 부인은, 떠나가는 마차를 보며 흐느껴 울었다.
“아프냐, 안 아프냐?”
서재에 있던 진소는 시종일관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하인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진소가 천천히 물었다.
“그 말만 했다고?”
하인이 고개를 숙인 채 그렇다고 대답하자, 진소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손을 휘휘 저었다. 하인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서재는 다시 고요해졌다. 잠시 후, 갑자기 철썩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프냐, 안 아프냐?”
진소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후려치며 말했다. 곧이어 또다시 철썩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마주할 일이 아니다. 네가 살아갈 나날이 아니야. 아픔은 네 몫이 아니지. 네가 아픔을 알기나 해?
네 몸을 때리니, 아픔이 느껴지더냐?
안에서 철썩, 철썩, 하는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밖에 서 있던 사환들의 머리는 더욱 수그러졌다.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책을 내려놓은 진안 군왕은 안으로 들어오는 정교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왔네요.”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씻으러 들어갔다. 정교랑이 씻고 나오자, 저녁상이 차려져 있었다.
“단랑은 만났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릇과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때가 때이기도 하고 신분도 그러하니 진 상공 쪽에서 피했겠지.
“이번엔 우리 둘 다 똑같네요. 나도 궁에 들어가 태자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했어요. 게다가 태후가 나더러 경성을 떠나 봉지로 가래요.”
때려죽인 자들을 관료들의 집으로 돌려보내고 초주검이 된 내시를 궁으로 들여보내 태후를 놀라게 한 일로, 진안 군왕을 탄핵하는 상소는 산더미처럼 쌓였다.
조정에서는 진안 군왕을 봉지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서남부 촉중(蜀中) 근방의 송평(松平)현이었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찾아봐도 지도에서 찾을 수 없는 곳이에요. 지금 몸도 이 모양인데, 그 먼 곳까지 어떻게 가겠어요. 그래서 거절했죠.”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씩 웃었다.
“어디 나가고 싶으면 지금 최대한 나가 둬요. 아마 내일쯤엔 금족령이 내릴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안 나가도 돼요.”
“부인 바쁜 거 끝났으면, 이제 집에서 내 곁에 있어 줄래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냉담한 눈빛으로 힐끔 쳐다보았다.
하나도 재미 없잖아. 부인이 날 놀릴 때 재미있던 것과는 비교가 안 돼.
진안 군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밥을 마구 퍼먹었다.
씻고 나자 안에 있던 몸종들이 정리를 마치고 물러갔다. 진안 군왕은 머리를 풀며, 내실 창가 앞에 앉아 등불 아래에서 책을 보고 있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위아래가 하나로 붙어 있는 녹색 치마 차림에 머리는 이미 풀어 뒤로 넘긴 상태였다. 부드러운 등불에 비친 자태는 평안하고 고요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다가가 옆에 앉았다.
“왜 이렇게 책 읽는 걸 좋아해요?”
“책 보는 건 혼자 해도 되니까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혼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책을 낚아챘다.
“지금은 둘이잖아요.”
진안 군왕이 눈썹을 꿈틀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바둑 둬요.”
정교랑도 진안 군왕을 보고 웃었다.
“좋아요. 재미없다고 불평하지 마요.”
밤이라 그런지 등불 아래에 비친 정교랑의 눈빛은 더욱 반짝였다. 낮에는 보이지 않는 고아함이 더해지기도 했다.
“당신이랑 함께 있는데, 어떻게 재미없을 수가 있어요.”
그런 말을 내뱉고 나자 얼굴이 확 달아올라 귀까지 뜨거워졌다.
밥 먹을 때 했던 말보다 더 적나라하잖아.
“내가 바둑 가져올게요.”
진안 군왕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곧 정교랑이 말한, 재미없다는 뜻이 무슨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또 한 번 승부가 결정 난 바둑판을 보며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손으로 바둑판을 쓸며 맞은편에 앉은 이에게 소리쳤다.
“정방!”
괴로움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고 입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래요, 또 이겼네요.”
정교랑이 손에 들고 있던 바둑알을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잠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손을 잡았다.
“잠깐만 더 보고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푹 숙이고 바둑판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어떻게든 활로를 찾아보려 했다. 손에 잡힌 손은 부드러웠다. 바둑돌을 쥔 터라 손등이 활처럼 굽어 있다 보니, 손아귀에 가득 들어왔다.
몸에 있는 살갗처럼 매끄럽네…….
진안 군왕의 시선이 둔해졌다. 바둑판을 바라보자 눈앞이 아득해지며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녀는 손을 잡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이미 익숙해졌는지 피하려는 뜻도 전혀 없었다.
어쩌지? 이제 어째야 하지? 뭘 해야 해?
진안 군왕은 머리에 땀이 흥건하다는 생각밖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 봤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손에 시선을 둔 채, 웃으며 물었다.
다 만졌냐는 뜻인가?
정교랑의 눈길에 진안 군왕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 손을 풀었다.
“졌어요, 내가 졌어.”
진안 군왕이 손으로 바둑판 위의 바둑돌을 마구 어질렀다.
“안 할래요. 잠이나 자죠.”
침실은 고요한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안 군왕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칠흑 같은 휘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몸을 뒤척였다. 옆에 있는 베개로 무심코 손을 뻗던 그는 부드러운 머릿결이 손에 닿자 얼른 손을 거두었다.
얼마 안 가 같은 동작이 계속됐다.
옆에 있는 이는 시종일관 얼굴을 바깥쪽으로 향한 채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깊고 고른 숨소리가 귓가에 점점 또렷하게 들렸다.
잠들었구나. 출타하느라 고단했겠지. 마음도 편치 않을 테고.
진안 군왕은 멋쩍은 듯 손을 거두었다.
조금만 더 추워졌으면. 더 추워져서 내 품으로 파고들면, 따뜻하게 해 주어야지.
진안 군왕은 정교랑 쪽으로 바짝 기대고는, 코에 맴도는 청량한 향을 느끼며 스르르 눈을 감았다.
“왕비 전하!”
경 공공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른 아침의 고요를 깨뜨렸다.
진안 군왕은 손에 들고 있던 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곧장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제 진 상공 댁에 가서 진씨 가문 사람을 때리셨습니까?”
사람을 때려? 단랑을 못 만나게 해서?
진안 군왕이 놀라 쳐다보았지만, 정교랑의 표정은 담담했다.
“그렇네.”
“아, 아니, 어찌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때렸다면 때릴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끼어들었다.
감싸고돌기는. 이 판국에도 감싸고도냐고.
“소문이 파다합니다. 부인께서 한마디 말도 없이 다짜고짜 사람을 때렸다고요.”
경 공공이 말했다.
“아닐세.”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자, 경 공공과 진안 군왕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모아졌다.
“한마디 말하고 나서 때렸는데.”
경 공공은 멈칫했고, 진안 군왕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부인!”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지 발까지 구를 기세로 소리쳤다.
“부인께서 무슨 짓을 저지르신 건지 아십니까? 어찌 진 상공 댁으로 달려가 그 집 사람을 때린단 말씀입니까.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진씨 가문에서 태자비가 간택된 때입니다. 이런 짓을 저지르시면, 남들이 그 저의가 뭐라고 생각하겠습니까!”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경 공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잘됐네. 아무런 저의도 없다고 생각할까 봐 걱정했는데.”
“몰라줄까 봐 걱정하셨답니다!”
경 공공이 분노로 소리치며 대청 안으로 들어왔다. 어찌나 급하게 걸었는지 탁자 위에 있던 차의 열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어엇, 내 차가…….”
고 선생이 다급히 소리치며 손을 뻗어 차를 쥐었다.
오후에 차 한 잔을 마시는 건 고 선생의 오랜 습관이었다. 고급 차병(茶餠, 찻잎을 벽돌 모양이나 원반형으로 뭉쳐 굳힌 것)을 약한 불에 구운 다음 빻아서 가루를 내고 소금을 넣은 후, 물이 파도처럼 여린 무늬가 일어나듯 물결치는 삼비(三沸)로 끓여내 그 정수를 찻잔에 따르면, 뜨거운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 뜨거운 차향은 고 선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간, 차 드실 시간도 없으실 겁니다. 사방에서 지켜보는 눈이 많은데, 또 일을 벌이시다니요.”
경 공공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옷소매를 털고 자리에 앉았다. 고 선생은 차를 단숨에 비운 후,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이런 일을 벌일 거라고 생각했어야 했는데 말입니다. 당초 정사낭을 위해 기루에서 어마어마한 돈을 내놓은 분 아닙니까. 이제 진단랑이 태자에게 시집가게 됐으니, 분을 참을 수 없었겠죠. 달려가 사람을 팼다 해도 이상할 건 없습니다.”
말을 마친 경 공공도 차를 단숨에 비웠다.
“그런데도 전하께서는 싸고돌기만 하십니다. 자기는 기분이 언짢다며 사람을 패 죽이고 남의 집 대문 앞에 던져둔 마당에, 부인도 기분이 안 좋으면 사람을 팰 수도 있지 뭐가 대수냐면서요.
대수로울 건 없죠. 하지만 그런다고 도움이 됩니까? 분이 풀렸답니까? 태자비가 시집을 안 가게 됐답니까? 저의가 뭐냐며 왈가왈부하는 소리만 늘고, 괜히 꼬투리만 잡히죠.”
거기까지 들은 고 선생이 찻잔을 내리며 물었다.
“저의라니 무슨?”
경 공공이 눈을 부릅떴다.
“저의가 뭐냐고요? 뭐겠습니까? 역심일 수밖에요.”
“역심이라…….”
고 선생은 그 말을 다시 한번 천천히 되뇌며 찻잔을 쥔 채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그 여인을 경성에 두면 안 돼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얼굴이 퉁퉁 부은지라 발음이 부정확했다.
진소가 진십팔랑을 힐끔 쳐다보았다.
참 독하게도 때렸군. 아니, 독하다고 할 순 없지.
작정하고 때렸다면, 따귀 한 대만으로도 앓아눕는 지경이 됐을 테니까. 무려 사람의 목을 비틀 수 있는 손이야.
“아버지!”
진십팔랑이 돌연 목청을 놓이며, 짜증스러운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서 푹 쉬며 몸조리하거라. 국혼에 관한 일은 애초에 우리가 걱정할 것도 없어. 궁에서 다 알아서 할 터이니.”
진소가 피곤한 목소리로 하자, 진십팔랑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제가 그 여인한테 맞아서, 그 여인을 내쫓으려 한다고 여기세요?”
진소는 대꾸하지 않고 잠자코 있었다.
“그 여인은 단랑을 위해 절 때린 거예요. 그 여인이 단랑한테 얼마나 각별한지는 저도 잘 알아요. 이번 단랑의 일은 제가 그런 게 맞아요. 단랑한테도 엄청난 상처겠죠. 어머니도 절 때리셨고 이젠 본 척도 안 하세요. 조부님은 아예 우리 일가를 버리고 떠나셨죠. 아버지께선 제 행동에 동의하셨지만, 속으로는 아버지 역시 절 원망하신다는 거 알아요.”
“널 원망하지 않는다.”
진소가 말했다.
원망하려거든 나 자신을 원망해야겠지.
“제가 그 여인을 경성에서 내쫓으려 하는 건, 그 여인이 한 말 때문이에요.”
“홧김에 한 말이니,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야.”
“아버지, 제가 진안 군왕은 양자로 들일 수 없다고 한 말은 홧김에 한 말이지만, 그 여인의 대답은 홧김에 한 말이 아니었어요.”
진십팔랑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가지지 못한 사람은 앞으로도 가지지 못할 거라고 했어요. 그게 무슨 뜻이겠어요? 태자가 지금은 태자 자리에 있어도, 장차 황제가 될 순 없다는 뜻이잖아요.”
“십팔랑, 그건 네가 해석한 뜻 아니냐.”
진소가 팔을 휘휘 내저었다.
“다 홧김에 한 말이다. 앞으로 그런 말은 홧김으로라도 하지 마라.”
웃음을 터트리던 진십팔랑은 상처가 난 입 안에서 극심한 통증이 몰려오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네, 전 그렇게 이해했어요. 하지만 제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때, 그 여인 또한 제가 생각한 그 뜻이라고 대답했다고요.”
진십팔랑은 다시금 고개를 들고 진소를 쳐다보았다.
“아버지, 그 여인이 어떤 사람인지, 아버지도 잘 아시죠?”
진소가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찻잔을 손에 쥐었다.
“그런 사람이, 홧김에 말했겠어요?”
진십팔랑이 물었다.
그럴 리 없지.
과묵하고 쉽게 입을 열지 않지만, 일단 입을 열었다 하면…….
“저 자신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 아니에요. 그 여인이 떠나고 안 떠나고는 저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예전의 그 여인이었다면 그런 말을 내뱉었다 해도, 상관없겠죠. 하지만 지금 그 여인은, 진안 군왕비예요. 그 여인 뒤에는 군왕이 있어요. 종친이 있다고요.
아버지, 몇 년 동안 그 여인이 저지른 놀랄 만한 일이 한두 가지였어요? 이번에도, 어디 한번 두고 볼 생각이세요?”
진소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침묵에 빠졌다.
한번 두고 보자? 그 여인을 상대로?
진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옆쪽에 세워 둔 병풍을 바라보았다.
진 노태야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떠났다. 진소는 진 노태야의 방을 그대로 보존해 두면서도, 그 병풍만큼은 자신의 서재로 옮겨 왔다.
병풍에 있는 동그라미가 눈에 띄었다.
그 여인을 상대로,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했던 이가 저리 많았나?
겁을 먹나 안 먹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반항을 하나 못하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패배를 인정하나 안 하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고.
시골 도관의 관주든 언제나 침착하고 신중한 경성 관리 유 교리든, 백성을 속여 재물을 긁어모으는 노승이든 역참에 불을 지르려던 말단 관리든, 처음에 한 생각은 똑같았을 것이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한번 두고 보자.
그 여인이 손을 뻗게 만든 그들은, 여지없이 그 손에 불귀의 넋이 되었다. 그런 여인을 상대로, 어디 한번 두고 봤다가는…….
진소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봐라.”
“썩 내쫓아라! 당장 교지를 내리란 말이다.”
태후가 어서 인장을 찍으라며 내시를 재촉했다.
“예가 어디라고 달려와 태자의 혼사에 대해 묻는단 말이냐. 대체 꿍꿍이가 뭐야? 국혼 땐 축하 예물이랍시고 시신을 무더기로 보내려고?”
내시는 인장을 찍지 못한 채 고능준의 눈치를 살폈다.
“마마, 괜한 생각이시옵니다.”
고능준이 입을 열었다.
태자의 혼사가 결정되면서 결국 진소 가문의 여식을 태자비로 들이기로 했다. 이제 진소는 황실에 묶인 몸이 되었으니, 더는 올곧고 강직한 신하임을 앞세워 태후에게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태후도 기분이 많이 좋아졌고, 건강까지 회복되면서 기력도 좋아진 터였다.
“괜한 생각은 무슨! 분명히 말하지만, 자네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애가도 똑똑히 알아!”
태후가 탁자를 내리치며 말했다.
“잘 아신다면, 더더욱 군왕을 보낼 수 없지 않습니까.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군왕은 이제 경성에서 명성이 바닥을 치게 되었습니다. 마마의 손아귀에 있는 한 그 어떤 파란도 일으킬 수 없지요. 하지만 그자를 내보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애가는 단 하루도 그 녀석을 보고 싶지 않아.”
태후가 씩씩거렸다.
“고정하십시오, 마마. 말씀드렸다시피 태자의 일이 더 중합니다. 일단 태자가 혼례를 마치고 나면, 군왕을 손보도록 하지요.”
웃음을 짓던 고능준은 태자 얘기가 나오자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고능준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태후가 내시를 향해 손을 휘휘 내젓자, 내시가 얼른 밖으로 나갔다. 내시는 얼마 안 가 젊은 처자 하나와 태의를 데리고 들어왔다.
“어젯밤은 어땠느냐?”
태후의 물음에 젊은 처자가 고개를 숙였다.
“안, 안 됐습니다.”
“안 되다니? 태자가 무슨…….”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으려니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하, 할 수 있으시옵니다. 그, 그런데 들어가고 난 후엔, 아, 안 되셔서요.”
젊은 처자가 머리를 더 푹 수그리고 거의 들리지도 않을 듯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물쭈물하며 웅얼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모두가 알았다.
태후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안 되겠어. 아직은 너무 어린 게지.”
“내년이면 태자도 열셋이니 어리지 않습니다. 바깥엔 그만한 나이에 아이 셋을 둔 아비가 된 사람도 있는걸요.”
고능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하고, 태의에게 물었다.
“태자의 몸에 이상이 있는 것인가?”
“문제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태자께선 정신이 온전치 않으시다 보니, 자극을 받으면 좀…… 예민하게 반응하거나 강하게는…….”
“나이를 먹으면 좀 나아지는가?”
고능준의 물음에 태의가 눈을 반짝였다.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태의가 얼른 한마디 덧붙였다.
“저희가 보약을 더 지어, 태자 전하의 기를 보하겠습니다.”
고능준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그렇다면, 최대한 성심을 다해야 할 걸세. 태자의 몸이 최대한 빨리 좋아지도록. 길게 보고 꾸준히 요양해야 좋아진다는 말은 집어치워. 길다는 게 얼만데? 열흘이나 보름도 길다면 길고, 일 년이나 삼 년도 길다면 길지. 이 세상엔 시간이 자네를 기다려 주지 않는 경우도 많아. 지금 당장이 중하단 말일세.”
눈치 빠른 태의는 바로 알아들었다.
시간이 기다려 주지 않는다. 최대한 빨리, 지금 당장. 지금 가장 중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황손이 태어나 황실의 혈통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태자야 어떻게 되든…….
“네.”
태의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서재에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은 심드렁한 태도로 탁자를 만지며 고 선생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그들을 데려와야만 합니다.”
“하나 그리 대대적인 움직임을 보이면 분명 발각될 겁니다.”
“발각돼도 어쩔 수 없지요. 태자가 국혼을 치르고 나면, 전하는 더 위험해지십니다.”
“겁날 게 뭐요? 왕비 전하께서 계시는데 또 독이라도 쓸까 봐?”
“왕비 때문이 아닙니까. 왕비께서 늘 그런 식이시니, 우리가 매번 끌려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진안 군왕이 탁자를 탁탁 내리치자,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추고 군왕을 쳐다보았다.
“함부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닐세. 그런 일을 했다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게야.”
경 공공이 뭐라 대꾸하려 했자, 고 선생이 진지한 얼굴로 알겠다고 대답하며 말을 막았다.
“그자들을 데려오고자 한다면, 쉬운 일일세. 지금이 절호의 기회지.
태자의 국혼을 맞이하여 신중히 움직이는 건 우리만이 아닐세. 지금 경성은 아주 복잡한 상황이야. 누구든 서로 의심하고, 누구든 서로 경계하지. 이 혼란과 무질서를 얼마든 역으로 이용할 수도 있어.”
고 선생 등이 웃음을 터트렸다.
“네, 그리 준비하겠습니다.”
고 선생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고 선생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잇자, 진안 군왕이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이번엔 왕비와 국공께서도 오십니다.”
고 선생이 말했다.
물론 이 왕비는 아까 말하던 왕비와 다른 사람이었다.
“어머니께서 오시는군. 정말 잘된 일이야.”
진안 군왕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가을 정오의 연무장에서 피융, 피융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한 발 한 발 쏘아진 화살들은 과녁을 향해 날아갔고, 과녁엔 어느새 화살이 꽃송이처럼 모여 있었다.
“정말 뛰어난 궁술입니다.”
진안 군왕이 감탄하며 걸어왔다. 한쪽 옆에 있던 반근이 머뭇거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바쁜 건 끝났어요?”
정교랑이 활을 내리며 물었다.
바쁜 게 끝났으니 왔지. 하나 마나 한 질문을 하네. 하지만 때로는 가까운 사이만이 이런 불필요한 질문을 하곤 하지.
진안 군왕이 활짝 웃으며 손을 뻗어 정교랑의 활을 받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교랑이 화살 하나를 건넸다.
진안 군왕이 심호흡을 하고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활시위를 떠났지만, 과녁의 정중앙에 있는 꽃을 맞히지는 못했다.
“당신도 훌륭해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은 이를 악물며 웃음을 짓고는 활을 내렸다.
“어디 아파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가슴을 쫙 펴고 대답했다.
“장난친 거예요. 화살 좀 당겼다고 아프겠어요?”
정교랑은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가슴께로 손을 뻗었다. 진안 군왕은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리며 피하려 했지만, 정교랑의 손은 계속해서 따라왔다.
“어디 좀 봐요.”
손을 결국 그의 가슴께에 얹혔고, 이곳저곳을 천천히 유영했다.
“아니, 벌건 대낮에, 뭐 하는 거예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함부로 만지지 마요.”
연무장에 있던 반근을 비롯한 시녀들은 이미 고개를 숙인 상태였다.
“진짜 괜찮아요. 괜찮다고요.”
진안 군왕은 웃으며 정교랑의 손목을 흔들었다.
“가슴을 쫙 펴면 좀 아픈데, 지금은 괜찮아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멈추었다.
“며칠 지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무거운 병기는 들지 마요.”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뜨거운 햇빛 아래 송골송골 땀이 맺힌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요. 얼른 가서 씻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진안 군왕은 잡고 있던 정교랑의 손을 풀지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몸을 돌렸지만, 이미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그의 모습에 정교랑은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면서도 굳이 손을 빼지 않고 잠자코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씻고 나왔을 무렵에도, 진안 군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내가 저 여인의 손을 잡고 그대로 돌아왔단 말이지?
사실 별것도 아니잖아. 육가아의 손을 잡았을 때랑 똑같지. 호들갑 떨 게 뭐 있어?
육가아의 생각이 스치자 진안 군왕의 표정은 대번에 어두워졌다.
“왜 그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어 정교랑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육가아, 아니, 태자가, 궁에서 잘 못 지내서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며 다소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태자가 궁에서 잘 지낸다고 생각했어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육가아가 궁에서 잘 지낸다고 생각했냐고?
아니,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한 적 없어. 아니, 그보다는, 그 생각 자체를 안 했지. 내가 생각한 건 언제나…… 신분이었어.
진호가 말고삐를 홱 잡아당기며 앞쪽을 쳐다보았다.
병부 관청의 정문 앞에서 몇 사람이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중 한 사내가 홱 고개를 돌렸다.
열여드레 일이구나.
진호가 속으로 생각했다.
열여드레 일이나 못 봤어. 주복, 오랜만이다.
주복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거두고 사내들과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진호는 고개를 돌리며 말에 박차를 가하려다가, 갑자기 멈춰 섰다.
“서북으로 돌아간다더냐? 종 장군이 돌아갔으니, 뒤따르는 자들도 길을 나섰을 터인데.”
옆에 있던 시종 하나가 말 머리를 돌리며 대답했다.
“제가 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진호가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시종이 돌아왔다.
“주 전직은 서북으로 안 가신답니다. 종 장군께 금군에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청했답니다.”
진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경성에 있는 이십 만 위수(衛戍) 금군은 경성의 수호자였다.
“어디 소속이라더냐?”
“마군사(馬軍司)입니다.”
황궁을 지키는 금군이 아니라…….
진호는 다시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황궁 수비는 경성 방위의 핵심인데, 주복을 그런 자리로 보낼 리는 없지. 진소가 허락하지 않을 테고 고능준 또한 허락할 리 없으니까.
성 밖에 있다고는 하나 경성에 붙어 있을 수 있겠네. 마음껏 종횡무진할 수 있는 서북을 버리고 손발이 묶일 게 뻔한 경성에 남다니, 녀석이 지키려는 건 아마 그 여인이겠지.
“십삼 공자, 대인께서 부르십니다.”
사환 하나가 들어와 말했다.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 상공이 보냈다고요?”
부친이 내민 상소문을 보며 진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끝도 없군요. 우릴 심부름꾼으로 여기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것도 우스운 일로 말이다.”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리며 대꾸했다. 상소문을 펼치던 진호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진안 군왕을 경성에서 축출하겠다고요?”
“그래,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태후와 완전히 틀어진 데다가 종친의 양자 입적 일순위에 올랐던 자를 어찌 경성 밖으로 내보낸단 말이냐. 죽을 때까지 연금하려는 게지.”
진호는 상소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진 상공이 말하는 건 진안 군왕이 아닙니다. 실은…….”
그 여인이죠.
진안 군왕비, 라는 말을 자신의 입으로 내뱉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 진안 군왕비를 경성에 둔다면, 민심과 조정을 불안케 할 일들을 벌일지도 모르지. 진 상공도 신선의 제자란 말을 믿을 줄이야.”
진호는 잠자코 상소문을 보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럼 주육은 어쩌지? 공연히 헛수고만 하는 꼴이네.”
“누구?”
진 시강의 물음에 진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사실 애초에 헛수고라고 할 것도 없지. 그 녀석이 경성에 남아 있다 한들, 뭘 어쩌겠어. 자기 위안이나 하는 거지.
하여간 아둔하다니까. 아둔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호는 미소를 짓다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이번 일은 해 볼 만합니다.”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 일에서도 진소를 돕자는 말이냐?”
진 시강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경성에서 내보내지 않는 게 나아. 결국 우환거리가 될 거다.”
“태자의 국혼으로 각지에 있는 친왕들이며 종친들이 속속 상경하잖습니까. 이런 때에 진안 군왕을 경성에서 내쫓는다는 것은, 그자의 신분이며 지위, 체면 따위는 완전히 무시하겠다는 뜻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일입니다. 명성이 바닥을 친 일개 군왕 따위가 무슨 우환이 되겠습니까.”
진호는 상소문을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더군다나, 이건 기회이기도 합니다.”
기회라고?
“무슨 기회?”
진 시강이 물었다.
“하늘이 주신 절호의 기회요.”
진호가 눈빛을 반짝이며 말했다.
깊은 밤, 가을벌레들의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몸을 뒤척이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칠흑 같은 어둠을 바라보았다.
손 하나가 그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은은한 빛을 내는 두 눈이 보였다. 손은 여전히 그의 등을 가만가만 토닥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돌연 우스운 생각이 들었는지, 손을 뻗어 옆에 있던 이를 품으로 확 끌어안았다.
워낙 돌발적으로 저지른 행동인지라 군왕 자신도 이렇게 쉽게 성공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품 안으로 들어온 이의 몸이 살짝 굳자, 군왕 역시 다소 경직됐다.
조용한 실내 분위기에 숨 막힐 듯한 긴장이 흘렀다.
“난…….”
진안 군왕이 먼저 입을 열며, 경직된 분위기를 깼다.
“나 때문에 시끄러웠어요?”
“네.”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 여인은 말하는 게 참…….
진안 군왕이 쿡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을 와락 끌어안으니 가슴에도 충격이 갈 수밖에 없었다.
“정방.”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머리카락에 머리를 파묻고, 긴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내가 잘못한 거죠?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난 한 번도 그 아이를 지켜 주지 못했어요. 난 어떻게 해야 하죠?”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품에 부드럽게 안겨 있는 사람이 고른 숨소리를 냈다. 진안 군왕이 살짝 상체를 들어 품에 안긴 이를 쳐다보았다.
또 잠든 건가?
“아니에요.”
말하지 않아도 진안 군왕이 일어난 이유를 알고 있다는 듯,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면서 웃었다. 진안 군왕도 정교랑을 보며 풉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는 굳은 몸을 천천히 다시 뉘었다.
손을 뻗어 끌어안을 땐 자연스러웠는데, 지금 풀자니 좀…….
“나도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잘 몰라요.”
품속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하고 짙은 밤이라 그런지, 평소에는 담담하다 못해 무뚝뚝하게 느껴지는 정교랑의 목소리가 잔잔하고 평온하게 들렸다.
“마지막에 후회하지 않는다면, 옳은 거겠죠.”
후회하느냐, 후회하지 않느냐.
진안 군왕은 품에 안겨 있는 정교랑을 조금 더 세게 끌어안았다. 부드럽고 은은한 향이 나는 정교랑의 머릿결이 진안 군왕의 턱 아래에 닿았다.
궁에서 전해온 소식에 의하면, 태자는 예전보다 살이 더 많이 쪘다고 했어. 게다가 태후가 태자를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가두다시피 해서, 괴성이 들리는 일도 많이 줄어들었다고. 심지어 태자가 말썽을 피우지 않고 얌전히 있도록 탕약까지 먹이고 있다지.
“태자가 경왕부를 떠나던 날, 태자와 함께 궁으로 갔던 내시들은 모조리 다른 궁으로 배치됐어요. 어제 그중 하나가 태자궁으로 가서 몰래 전각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태자가 전각 안에 멍하니 앉아 있더래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자, 정교랑은 허리춤에 손을 올려 자신을 안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손에 자연스럽게 깍지를 꼈다.
“알다시피, 육가아는 절대 조용히 앉아만 있을 아이가 아니에요.”
정교랑의 목 뒤에 머리를 묻고 있던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차츰 울먹이듯 들려왔다.
“대체 육가아에게 약을 얼마나 먹였길래. 정방, 난 이제 어쩌면 좋죠?”
정교랑이 눈을 감은 채 음, 하는 소리를 냈다.
“당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나도 몰라요. 난 당신이 아니니까요.”
어떨 땐 말하는 게 꼭 토라진 어린아이가 말하는 거 같다니까.
진안 군왕은 왠지 모르게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린아이라……. 사실 어린아이들은 꾸밈없이 솔직한 말만 하지.
“하.”
진안 군왕은 팔을 안쪽으로 굽혀 정교랑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마치 아무리 끌어안아도 품에 다 들어오지 않는 것을 껴안는 것처럼.
그가 웃음기 있는 얼굴로 정교랑을 탓하듯 말했다.
“괜히 이야기가 길어질까 봐 말을 아끼는 거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 줘요. 듣기 좋은 얘기든 안 좋은 얘기든, 일단 다 듣고 싶어요.”
“좋은 이야기인지, 안 좋은 이야기인지는 당신도 이미 알고 있네요. 그런데 뭐하러 내 입을 통해서 들어요?”
정교랑이 대꾸하자,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도 난 당신이 이야기해 주는 게 듣고 싶은걸요.”
진안 군왕이 나지막이 웃으며 정교랑의 목으로 얼굴을 가져다 댔다. 하지만 뜨거운 콧김이 정교랑의 목에 부딪혔다가 다시 돌아오자, 또다시 얼굴이 화끈거리며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정교랑의 작은 귓불이 진안 군왕의 코끝에 닿을락 말락 했다. 캄캄한 어둠 속,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정교랑의 검은 머리카락에서 윤기가 흘렀다.
진안 군왕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며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정교랑의 허리춤에 감은 손에 힘을 주고, 정교랑의 귓불로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품 안에 있던 정교랑이 돌연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진안 군왕을 슬쩍 피하고는 물었다.
“정말로 내 이야기가 듣고 싶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품을 벗어나며 몸을 반쯤 일으켰다.
지금, 일부러 나를 피한 건가?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머릿속에 온갖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에 결정을 내리는 건 자신이라고들 말하지만, 사람은 늘 다 변명거리를 찾으려 해요.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남에게는 박한 법이죠.”
정교랑의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잡생각을 떨치며 허공에 멈춰 있던 손을 거두고는 몸을 일으키면서 웃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런 마음을 품고 물어봤을 수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절대 그런 의도로 묻지 않아요. 남들은 자신의 잣대로 좋고 나쁘고를 이야기하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니까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칭찬하지 않아도 알아요. 난 내가 말하고 싶으면 말할 거예요. 남들이 날 원망하든 고마워하든, 내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요?”
정교랑의 말투에서 오만함이 묻어났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시야가 어두워서인지,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신난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대는 게 보이는 듯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랐다.
눈빛을 반짝이며 이렇게 생생한 표정을 짓다니, 꼭 다른 사람 같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교랑은 다시 평소 같은 담담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부인, 말씀하시지요.”
진안 군왕이 바른 자세로 고쳐앉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당신은 육가아를 지켜주고 싶은 건가요, 아니면 육가아의 천하를 지켜주고 싶은 건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둘에 무슨 차이가 있죠?”
진안 군왕이 중얼거렸다.
“아, 예전에는 차이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네요.”
정교랑은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듯 말을 덧붙였다. 진안 군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지금은 정말로 둘 사이에 차이가 존재하지 않아. 육가아를 지켜주고 싶다면, 육가아의 천하 또한 지켜줘야 해. 육가아에게 천하가 없다는 건 곧 목숨이 없다는 것과 다름없어.
“그렇다면, 육가아의 천하를 어떻게 지켜줘야 할까요? 당신이 경성이라는 우리에 갇힌 상태로 육가아를 지켜낼 수 있겠어요?”
이어진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경성을 떠나야 한다는 건가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
“방백종, 천하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요?”
천하가 무엇이냐고?
“천하란, 천자가 앉은 자리를 뜻하는 게 아니에요. 그 자리 이외의 모든 것을 뜻하죠. 천하를 본 적이 있나요?”
정교랑이 또 물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본 적 있어요.”
붓으로 그린 듯 우뚝 솟은 큰 산, 각지의 크고 작은 성, 저마다 열심히 사는 백성, 쉼 없이 떠들썩한 거리, 척박하거나 비옥한 농토, 졸졸 흐르는 시냇물과 세차게 흐르는 강물.
“본 적은 있겠지만, 그 안으로 뛰어든 적은 아직 없겠죠.
당신의 능력으로 한 사람만을 지킬 게 아니라, 그 사람을 대신해 천하를 지켜야 해요. 이건,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당신이 잘 알겠죠. 육가아 같은 사람이 제위에 오르면, 조당에서는 잡음이 끊이지 않고, 천하도 혼란에 빠질 거예요.
당신이 해야 할 일은, 그 혼란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고, 육가아를 대신해 악인과 소인배들을 경계하며, 육가아를 대신해 백성들을 돌보는 거예요. 이 강산과 백성이 안정되어야 천하가 안정됐다고 할 수 있고, 육가아의 천하가 태평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러니 당신 스스로 더욱 강해져야 해요. 당신이 강해지는 건, 한 사람만을 위한 일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을 위한 일이에요.
그런 힘을 가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고, 사람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강해진 당신이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세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이죠.
하지만 경성은, 당신의 세상이 아니에요.”
고 선생 등이 안으로 들어올 무렵, 막 해가 떴다. 진안 군왕은 벌써 서재에 앉아 있었다.
이렇게나 일찍?
고 선생이 흠칫 놀랐다.
“동이 트기도 전에 이미 와 계셨습니다.”
경 공공이 조용히 말했다.
동이 트기도 전에?
“또 왕비와 불화가 있으셨던 건가?”
고 선생이 눈썹을 꿈틀대면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경 공공이 입술을 삐쭉이며 투덜거렸다.
“행여나 그러시겠습니다.”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진안 군왕은 가만히 서서 병풍에 걸려 있는 지도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전하?”
고 선생이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지도 위를 가리켰다.
“이곳이 송평(松平)이지?”
진안 군왕이 물었다.
송평?
고 선생이 멈칫했다가 이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가리키고 계신 곳이 바로 송평입니다.”
진안 군왕이 지도 위에서 거리를 재는 듯이 손바닥을 펼쳤다.
“여기에서 여기까지.”
그의 손끝이 멈춘 곳은 경성이었다.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그리 먼 것도 아니네.”
고 선생이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진안 군왕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때로는 멀다는 게 꼭 거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내게 먼 건 거리가 아니라, 기회다.
진안 군왕이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돌렸다.
“서둘러 준비하게. 경성을 떠나야겠네.”
“떠나신다고요?”
고 선생 등은 자신들이 뭔가를 잘못 들은 줄 알고 놀란 기색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새벽 댓바람부터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경성 밖으로 떠나기 위해서일 줄이야. 각지에 흩어진 전하의 사람들을 경성으로 들이는 일을 논하시려는 건 줄 알았는데,
“난 경성을 떠난다만, 그 사람들은 예정대로 경성으로 불러들이게. 내가 떠나기에 경성엔 더 많은 사람을 남겨 둬야 해. 경성 방위엔 쓸 만한 사람을 최대한 끌어모아 배치하도록 하고.”
경성을 방위하는 직무는 경성의 숨통을 지키는 것과도 같다.
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지금 이야기해야 할 것은 이게 아닌데.
“그런데 전하, 왜 떠나시려는 겁니까? 황실이나 조정 대신들이 우리를 놔주지 않을지도 모르고, 설령 놔주더라도 길 위엔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경 공공이 다급하게 물었다.
경성을 떠나면, 기나긴 여정을 지나고서야 송평에 도착할 수 있다. 그러니 길 위에서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이유는 없다. 떠날 때가 되었으니 떠나는 것이야. 안 그래, 아경? 우리는 사 년 전에 이미 떠났어야 했어.”
진안 군왕이 미소지었다.
“하오나…….”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안전하게 떠날 수 있는 사 년 전에 가지 않고, 지금에서야 가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나도 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완전히 늦은 건 아니야.”
진안 군왕은 경 공공이 하려는 말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서재 안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했다.
경 공공이 입을 열려던 찰나, 고 선생이 먼저 입을 열었다.
“늦지 않았습니다. 늦을 게 뭐 있습니까? 전하께서 떠나고자 하신다면, 저희도 전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고 선생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위험합니다.”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고 선생에게 말했다. 고 선생이 경 공공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틀렸네, 경 공공. 우리는 언제나 위험했어.”
언제나 위험한 거라면, 지난날 떠났든 지금 떠나든 별 차이는 없다.
경 공공이 멈칫했다.
“전하, 전하, 고능준이 파직당했습니다.”
갑자기 문밖에서 누군가가 잰걸음으로 들어오더니, 허리 숙여 예를 표하며 말했다.
뭐라고?
서재 안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가 이내 다시 침착해졌다.
고능준을 조정에서 밀어내려는 움직임은 계속 있었지만, 매번 실패했어.
“진 상공이 주청을 올린 것이냐? 그가 고능준을 파직할 만한 이유가 더는 남아 있지 않을 텐데?”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는 들어온 사람에게 물었다.
예전이라면 외척이 섭정한다는 이유를 들어 탄핵 소추를 할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진 상공도 외척이 됐는데.
“진 상공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말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진(秦) 시강입니다.”
진 시강?
서재 안의 사람들이 또 한 번 놀랐다.
“그것도 황제 폐하의 조서로 고능준을 파직했습니다.”
이번에는 진안 군왕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황제 폐하의 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