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대수-
같은 시각 경 공공도 대청으로 들어와 식사 중인 진안 군왕과 정교랑에게 같은 소식을 전했다. 옆에 있던 반근은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으로 가슴을 쓸었다. 부처님께 감사 인사를 올리는 듯 입술을 달싹이기도 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표정엔 변함이 없었다. 경 공공이 말을 하는 동안 잠시 젓가락을 멈추었을 뿐이었다.
“알았다.”
진안 군왕은 간단하게 대꾸한 후 고개를 숙이고 계속해서 먹기 시작했다. 정교랑 역시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대청 안은 고요했고, 젓가락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만 이따금 들렸다. 경 공공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반근 역시 밖으로 나와 회랑 아래에 있던 소심에게 눈짓을 하며 웃었다.
“거 봐, 자식 아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어?”
반근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소심이 쿡 웃었다.
“거 있잖아, 왜.”
반근은 멈칫하다가 부정 타는 소리 말라는 듯 퉤 침을 뱉고 웃음을 터트렸다. 어쨌거나 아랫것인 두 사람이 정교랑의 손윗사람을 비난하는 것은 예가 아니었다.
“어마어마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지만, 그래도…….”
반근이 아까 이야기하던 화제를 이어 갔다.
그래도 바보잖아.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평생을 바보와 함께하길 바라겠어.
소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감정 기복이 너무나도 컸던 하루를 보내고 마침내 안도하게 된 반근이 이런저런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아씨는 진 대인이 동의할 거라고 하셨는데, 이번엔 아씨께서 틀리셨네.”
반근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속삭였다. 하지만 그 말을 들은 소심의 웃음은 다소 어색하게 굳었다.
아씨의 말씀이, 언제 틀린 적 있어?
하지만 웃으며 기뻐하는 반근을 보고 있노라니 차마 그렇게 대꾸할 수는 없어 소심은 말을 삼켰다.
“부인과 전하께서는 괜찮으시지?”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남의 집 일은 어찌 됐든 남의 일이고, 두 사람이 신경 써야 할 건 어디까지나 아씨의 일이었다.
진씨 가문에 관한 생각을 내려놓은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며 대청 안을 힐끔 쳐다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은 것처럼 보이기는 한데, 기분이 영 그래.”
둘이 함께 앉아 밥을 먹은 것은 두세 번밖에 안 되지만, 지난번에 같이 먹었을 때는 진안 군왕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대청 안을 가득 메웠다. 그에 비해 오늘의 고요한 식사 자리는 답답한 기분이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소심 역시 대청 안을 힐끔 쳐다보았다. 등불을 환히 밝힌 대청 안에 있는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인 채 묵묵히 식사 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 시녀들이 뒷정리를 시작하자,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재 쓸 거예요?”
진안 군왕의 물음에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고 대답했다.
“여기서 책 읽으려고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일을 논하러 서재로 갈게요.”
정교랑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 탁자에 놓인 책을 집어 들었다.
시녀가 문발을 들어 올리자 진안 군왕이 대청을 나섰다. 어둠이 내린 마당을 보고 있노라니, 등롱을 든 내시가 막료들을 인도해 걸어왔다.
오늘 밤 서재엔 몇 명이나 모였을지 모르겠네.
진안 군왕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방 안에 등잔불이 또 하나 켜졌다. 시녀는 등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소리 없이 물러갔다.
진 노태야는 등불 아래에서 조서를 필사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나마 다행이구나. 폐하께서 내리신 조서는 아니야.”
진 노태야의 말에도 진소의 표정은 풀어지지 않았다.
“딱히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황제의 성지든 태후의 교지든 조서가 내린 건 분명했고, 공개적인 선언인 만큼 모두가 알게 됐다. 중요한 건 조서의 규격이 아니라 조서를 내렸다는 행동 그 자체였다.
“별일 아니다.”
진 노태야는 손에 든 종이를 내려놓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일도 아니고, 자식들의 혼사가 아니냐. 충분히 상의할 여지가 있는 일이야. 저쪽에서 원할 수 있는 만큼 우리도 거절할 수 있어. 떳떳지 못하거나 경우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다.”
진소의 표정이 더욱 복잡해졌다.
평범한 집안이었다면 당연히 별일 아닐 것이고, 황실의 황자라 해도 별다를 건 없었다. 혼사란 본디 양측이 서로 원해야 이루어지는 것이다. 화목하지 않은 부부를 맺어 주고 싶어 하는 이는 없으니까.
다만 문제는 지금 이 황실의 황자가 바보라는 데 있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진소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진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 노태야가 말을 끊었다.
“아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신 것이었다면, 이렇게 빨리 조서가 내려오진 않았을 게야.”
진 노태야의 말투는 단호하고 명확했다. 오전에 진단랑을 봤는데 오후에 조서를 내렸다면, 그건 절대 태후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태후의 성격은 진소 부자가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우유부단하고 변덕스러우며 주견이 없는 데다, 신분이 존귀한 탓에 고집스러운 면이 있었다.
단랑이 마음에 든 것이라면 거듭 고민하며 재고 따졌을 터였다. 하룻밤도 넘기지 않고 결단을 내릴 리 만무했다.
“이 조서는, 누군가가 사전에 작성해 놓은 것이다. 단랑이 입궐하길 기다렸던 게지.”
진소의 얼굴에 분노가 스쳤다. 한바탕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입안을 맴돌 뿐 밖으로 나오진 않았다. 뭐라고 욕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듯했다.
“이건 틀림없이 고씨 가문의 뜻일 거다.”
진 노태야의 목소리에 진소는 정신을 차렸다.
“누구의 뜻이든, 네 마음 또한 분명하지 않느냐. 상대가 쓴 방법 그대로 돌려준 것뿐이야.”
외척이라는 이유로 고씨 가문을 조당에서 축출하고 태후의 수렴청정을 반대했으니, 그렇다면 진소 너도 외척이 되어 봐라?
“우리는 외척이 되고 싶지 않으니, 헛된 소란을 벌인 셈이지. 교지야 거역하면 그만이다. 태후의 심기는 좀 불편하겠지만서도.”
거기까지 말한 진 노태야는 다시금 웃음을 터트렸다.
“태후는 본디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니, 너 때문에 한 번 더 불편해졌다고 그 무슨 대수겠느냐.”
진 노태야의 농담 섞인 말에 진소가 부친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다소 억지스러운 웃음이긴 했지만.
“그래, 이미 거절 의사를 밝혔으니, 이 일은 이제 지나간 거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고씨 가문을 절대 경성에 둘 수 없다는 것이야.”
진소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내일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고씨 가문이 고의로 이 일을 벌인 걸 우리가 알았다면, 다른 이들도 분명 알 겁니다. 이렇게 버젓이 태자의 혼사에 간여하며 천자의 집안일을 좌지우지하려 들다니, 더는 경성에 남겨 둘 수 없지요.”
진 노태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것이다.”
“아버지도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일찍 쉬십시오.”
진소가 예를 표했다. 진 노태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물러가는 진소를 바라보았다.
사환이 등롱을 들고 진소를 인도해 마당에서 사라지자, 대청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 노태야의 얼굴에 웃음기가 싹 걷혔다.
천천히 돌아선 진 노태야는 병풍 앞에 놓인 장궁을 바라보며 읊조렸다.
“긴 칼을 차고 진나라 활을 낀 채로, 머리와 몸 떨어져도 이내 마음은 후회하지 않으리(帶長劍兮挾秦弓, 首身離兮心不懲 - 굴원, <국상(國殤)>).”
회랑 아래에 선 내시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무어라 말하자, 순간 반근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네, 알겠어요.”
반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고는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갔다.
벌써 씻고 나와 내의로 갈아입은 정교랑은 내실에 앉아 책을 보고 있었다. 어린 시녀가 정교랑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반근이 고개를 숙이고 다가갔다.
“부인, 전하께서 잠시 나가신대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며 미간을 찌푸렸다.
“왕부 밖으로 나가시는 건 아니고, 이쪽 마당을 잠시 벗어나신다네요. 누가 와서 보러 가신대요. 아씨께 말씀드리라고 하셨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도 반근은 바로 나가지 않고, 잠시 머뭇거렸다.
“부인, 전하께 다녀오시라고 할까요?”
정교랑이 반근을 힐끔 보며 웃었다.
“응. 집이잖아. 괜찮아.”
반근은 그제야 네, 하고 대답한 후 자리를 떴다. 내시는 여전히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반근이 말을 전하자 내시는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하고, 서재로 돌아갔다. 얼마 안 가 진안 군왕이 여러 사람과 함께 서재에서 나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본디 서재 안에는 사람이 꽤 여럿 있었지만 별로 소란스럽지 않았다. 대화 소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도 그들이 자리를 뜨자 반근은 어쩐지 이쪽 마당이 전보다 훨씬 조용해진 기분이 들었다. 너무 고요하여 울적할 정도였다.
어둠이 짙게 깔리자, 마당에서 당직을 서던 시녀는 저도 모르게 하품을 했다. 소심이 다가왔을 무렵, 내실은 마지막 하나 남은 등잔불마저 꺼진 후였고, 객청에 남은 등잔 하나만이 희미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이.
“아무 말 없었어?”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묻자 반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등롱에 비친 눈에서는 눈물이 어른거리며 반짝이는 듯했다.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
반근이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근은 다른 시녀들에게도 물어봤지만, 전부 고개를 가로저으며 모른다고 했다.
“저희도 마당을 벗어나지 않아서요.”
반근이 시녀들에게 가서 물어보라고 하자, 시녀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아랫것이 먼저 가서 물어보면 안 되는 게 이곳 규율이에요.”
시녀들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전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한…….
이곳은 진안 군왕부지 정교랑의 저택이 아니었다.
반근의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 소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반근을 쿡 찔렀다.
“괜히 의심만 많아서 지레짐작하고 있네. 전하와 부인께서 그리 서먹한 사이야? 내가 가서 물어볼게.”
소심이 뒤돌아 자리를 뜨자, 반근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소심을 바라보았다. 얼마 안 가 소심이 돌아왔다.
“어떻게 됐어?”
반근이 얼른 다가서며 서둘러 물었다. 소심이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전하께서는, 외서재에서 쉬신대.”
그 말인즉, 돌아오지 않는단 거잖아. 아씨와 동침하지 않으시겠단 거고.
반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이것 봐. 괜찮은 것처럼 보여도, 실은 아니었어!
깊은 밤, 진소는 몸을 씻은 후 피곤하고 지친 기색으로 들어왔다.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등불에 비친 눈가는 여전히 부어 있었고, 얼굴에도 눈물 자국이 남아 있었다.
“단랑은 모르지?”
진소의 물음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몰라요. 내가 이 이야기는 함구하라고 단속을 해 두었어요.”
얘기가 나오자 진소 부인은 또다시 눈물이 나왔다.
“어쩌다 이런 일이 생긴 거죠?”
진소 부인이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갑작스레 무슨 봉변인지…….”
진소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소가 벌컥 화를 냈다.
“봉변이라니? 태자 전하와 혼담이 오가는 게 봉변이란 말이오?”
그 말에 진소 부인은 화들짝 놀라 진소를 쳐다보았고, 진소 본인도 멈칫했다.
“노야.”
진소 부인은 믿을 수 없다는 눈길로 진소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에요?”
캄캄한 밤에 돌연 목청을 높이자, 그 소리는 더욱 귀를 자극했다. 밖에서 숙직하던 몸종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 황급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진소 부인은 찻잔을 손에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그럼 이 일이 대단한 경사란 말이에요?”
진소 부인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등잔 아래에 비친 진소의 낯빛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나더러 어떻게 말하란 거요? 누구 편에서 말할까?”
태자가 혼인하여 황실의 핏줄을 잇는 건 엄청난 경사였다. 동시에 진소가 바라 마지않는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딸자식을 바보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진소 부인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했다.
“세상에 태자와 혼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잖아요. 꼭 우리여야 하는 것도 아니고요.
당신이 할 일은 태자를 보필하여 폐하의 강산을 지키는 것이지, 태자의 혼사를 책임지는 게 아니에요. 해야 할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요. 노야, 군자의 도마저 잊은 거예요?”
진소는 한숨을 쉬고, 흐느껴 우는 아내를 토닥여 주었다.
“알고 있소. 난 그저 이 일을 말한 것이었소.”
“이 일은 더 이상 논할 여지도 없어요! 노야,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잊으면 안 돼요. 노야는 고능준 같은 작자와 다르잖아요. 태후의 뜻을 거역하고, 태자가 불구의 몸이라고 꺼리는 게 어때서요? 나라와 군주를 위한 마음만 변치 않고, 올곧게 행동하면 되는 거예요.”
진소가 웃음을 지었다.
“그래, 알고 있소. 난 단랑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이 일을 얘기하는 거요.
이 일이 알려지면, 또 한바탕 풍파가 일겠지. 당신과 단랑은 한동안 다른 곳에 머무는 게 좋겠소.”
진소 부인은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 듯 눈물을 닦았다.
“당신만 단랑을 아끼는 줄 아시오? 나도 아비인데, 난들 왜 안 그렇겠소.”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진소 부인은 눈물을 닦으며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은 다 내 잘못이에요. 단랑을 궁으로 보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내가 방심했어요.”
태후가 그런 일을 벌일 줄은 꿈에도 몰랐지.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고씨 가문에서 작정한 이상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다른 수를 썼겠지.”
진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십팔랑도 소식을 들었을 거요. 십팔랑도 많이 속상해할 테지.”
태후가 혼인을 명한 건 진단랑을 본 후의 일이었고, 진단랑은 진십팔랑을 따라 궁으로 들어가 태후를 만난 터였다.
진소 부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사람을 시켜 말을 전했어요. 오늘은 올 필요 없으니, 내일 다시 얘기하자고요.”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늦었군. 그만 쉽시다.”
“내일도, 많이 바쁘겠죠.”
방에 있는 등불이 꺼졌다.
멀찌감치 떨어져 서 있던 몸종들은 불이 꺼지는 모습을 보고도 한참 후에야 발소리를 죽이며 숙직하는 방으로 돌아왔다.
진소가 몸을 계속 뒤척이는 동안, 진소 부인은 어둠 속에서 눈을 말똥말똥 뜨고 있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건, 아마 진소도 마찬가지리라. 이런 때에 잠이 올 리 없지 않은가. 위로하는 말도 소용없을 테고.
진소 부인은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미동도 않고 누워 있었다.
진안 군왕이 침상에서 몸을 뒤척였다.
외서재는 평소 그가 쉬던 곳이었다. 이곳에서 잠을 자지 않은 건 이제 열흘도 채 안 된 때였다.
이불도 새것이고, 휘장까지 새것으로 전부 바꾸었다. 창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벌레 소리는 기분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뒤척이며 팔을 베개 삼아 베고, 바람에 따라 살랑살랑 흔들리는 휘장을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기분이 상했나? 이거 참…….
그런 짓을 저지르다니, 그때 정신이 어떻게 됐었나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순간 침상에 누운 정교랑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어른거렸다.
희고 고운 얼굴, 붉은 입술, 검은 머리, 반짝이는 눈.
평소엔 다소 창백해 보이던 얼굴이 손으로 만지니 어찌나 보드랍던지. 게다가 얼굴보다 부드러운…….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앉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혼인한 사이라고는 하나, 혼사의 시기가 적절치 않았다. 부득이한 상황에 치른 혼사인데, 어찌 거리낌 없이 그리 대했단 말인가. 아무리 부부라 해도, 이런 시기에 그리 경박한 행동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인데.
경성에서 정교랑과 잘 아는 이는 본디 얼마 되지 않았고, 그나마 가장 친숙하고 왕래가 빈번한 게 진 상공 가문이었다. 혼례 때도 진소 부인은 자기 일처럼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던가.
단랑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그 여인의 마음도 말이 아니겠지. 그런데 내가 그리 반색을 하고, 멋대로 그런 짓까지 저질렀으니…….
발로 차 침상 아래로 떨어뜨린 건 그나마 애교겠지. 평소 그녀의 성격이라면 목을 비틀어 버렸다 해도 지나치지 않았을 테니.
분명 후회되는 일인데, 어찌 된 일인지 그때를 떠올리자 진안 군왕은 쿡 웃음이 나왔다. 생각할수록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진안 군왕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웃었다.
“전하?”
경 공공이 밖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한참이나 잠을 못 이루고 침상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사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다니, 그것도 이 오밤중에…….
안에서 진안 군왕의 대답 소리 대신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누군가가 칸막이를 돌아 나왔다.
어둠 속에 비친 형체는 크고 우람했다.
“전하?”
경 공공이 놀라 소리치며 얼른 등롱을 들고 다가갔다.
“무슨 일입니까?”
경 공공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상대는 바람을 일으키며 경 공공의 옆을 훅 지나쳐 갔다.
“돌아가야겠다.”
돌아간다고? 어디로?
벌써 저만치 걸어간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멈칫하던 경 공공은 발을 굴렀다.
뭐야, 대체!
“여봐라, 등롱을 밝혀라.”
경 공공이 얼른 뒤따라가며 소리쳤다.
소심이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옆에 있던 반근도 벌떡 일어났다.
“뭐지?”
소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문밖에서는 시녀의 놀란 목소리도 들려왔다.
전하라니!
소심과 반근은 화들짝 놀라 허둥지둥 침상에서 내려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신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문을 열고 나왔다.
밝은 등롱 불빛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심은 얼른 불빛을 피했다. 반근이 대청으로 들어가 등불을 밝히려 했다.
“됐다. 깨우지 마라.”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내실로 들어갔다.
소심과 반근은 대청에 멍하니 선 채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욕실이 잠시 환해지는가 싶더니 곧 불이 꺼졌다. 실내는 다시 어둠에 휩싸였다.
어두운 실내의 불빛에 적응한 진안 군왕이 조심스레 문발을 들어 올렸다. 침상 위의 여인은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다. 전처럼 안쪽을 비워 둔 채 바깥쪽에서 자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긴 다리라면, 정교랑을 가볍게 넘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진안 군왕이 다리를 들어 올렸다.
문밖에 있던 반근과 소심은 이미 방으로 돌아와, 덮고 있던 이불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 계속 여기서 숙직하는 거야?”
반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소심이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내실에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랐다.
아래에 깔린 이가 손을 뻗어 막았지만, 진안 군왕의 몸은 여전히 반쯤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몸이 불에 닿은 듯 화끈거리자 진안 군왕은 다시 몸을 훅 돌려 내려오려고 했다. 순간 발이 침상을 차면서 텅 하는 소리를 냈다.
실내의 분위기가 굳어졌다.
“이제, 막 나아서…… 몸이 아직 허약해요.”
진안 군왕이 머쓱한 듯 말하자, 정교랑은 바깥쪽으로 몸을 옮기며 진안 군왕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고, 이내 자리에 똑바로 눕게 된 진안 군왕이 숨을 골랐다.
“나 때문에 깼네요.”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안 자고 있었어요.”
안 자고 있었다고…….
진안 군왕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난, 당신이 날 귀찮아할까 봐 겁나서, 밖에서 자려고 했어요.”
이불을 들고 발소리를 죽이며 밖으로 나가던 반근과 소심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회랑의 등롱이 비추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소심이 고개를 내젓자 반근은 얼른 걸음을 옮겼다.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은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고개를 돌린 소심은 기뻐 입을 다물지 못하는 반근의 얼굴을 보고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게 사서 걱정하지 말라니까.”
소심이 타박하는데도 반근은 웃기만 했다. 소심은 고개를 돌려 안쪽을 힐끔 보고, 마음이 놓이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뭐든 터놓고 말하면, 아무 일 없어.”
귓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희미한 어둠 사이로 정교랑도 고개를 돌렸다.
“그럼, 이제 겁 안 나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겁나요.”
진안 군왕이 베개 위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어깨를 쿡 찔렀다.
“이게 겁나는 거예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을 진 채로 말하는 터라 목소리가 멀리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이번에는 한 손가락이 아니라 두 손가락으로 어깨를 쿡쿡 찔렀다.
“방백종.”
정교랑이 고개를 돌렸다.
째려보고 있겠지. 어둠 속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진안 군왕은 손을 치우고 다시 베개를 베고 누워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네?”
진안 군왕은 대답하고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진안 군왕은 베개 위에서 고개를 이리저리 놓아 보고, 몸도 이리저리 뒤척이며 편안한 자세를 찾으려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네.”
진안 군왕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날 발로 차서 떨어뜨려 봐요. 다시 누워야 좀 편해질 것 같아요.”
옆에 있던 정교랑이 풉 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짧은 찰나의 웃음이었지만. 깊은 밤이라 사방이 고요하지 않았다면 들리지도 않았을 만큼 작은 웃음이었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웃음을 지으며 팔꿈치로 정교랑의 등을 쿡쿡 찔렀다.
“당신 생각도 그렇죠?”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난 쭉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이 헤헤 웃으며 대꾸했다.
“첫 혼인이라 그래요.”
순간 옆에 있던 몸이 움찔하며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진안 군왕의 목소리도 뚝 끊겼다.
“말실수를 했네요.”
진안 군왕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농담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첫 혼인이라니. 두 번째 혼인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직 신혼인 데다 전혀 경사스럽지 않은 분위기 속에 올린 혼례였다. 실로 해서는 안 될 농담이었다.
방 안의 분위기가 어색해지는가 싶더니, 정교랑이 몸을 움직여 돌아누웠다.
“아니에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말실수한 거 아니에요. 내가 잘못 생각한 거죠.”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숨소리가 느껴질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이 여인은 늘 이랬어. 항상 남부터 생각하고, 남 탓을 하는 법이 없지. 무슨 일이든 자기 책임으로 돌려.
진안 군왕은 마음이 뻐근해졌다.
“정방, 알겠어요.”
진안 군왕이 손을 들어 정교랑의 팔을 쓸어 주다가, 얼른 손을 거두며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어 주었다.
“어서 자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눈을 감았다.
맑고 은은한 향, 편안하고 따스한 분위기. 여기가 바로 내게 익숙한 곳이야. 옆에 누군가가 생긴 지 며칠도 채 안 됐는데, 왜 벌써 습관처럼 익숙해진 거지?
베개가 살짝 움직였다. 긴장이 풀리며 안도하자 순간 졸음이 엄습했다. 막 잠 속으로 빠져들려던 진안 군왕이 돌연 눈을 번쩍 떴다.
방 안은 고요했고, 옆에 있는 사람도 조용히 누워 있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부르며 팔로 몸을 받치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잠 안 오면, 나랑 얘기해요.”
정교랑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전엔 나도 무슨 일이 있으면 혼자 삭였어요. 말할 사람이 없었거든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웃음을 지었다.
“지나고 나서 돌이켜보면 아무 일도 아닌 일이 많지만, 그 당시엔 또 그렇지 않잖아요.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면, 좀 나아질지 몰라요.”
진안 군왕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다시 고요해졌다.
“물론, 말을 할지 말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내 말은 뭐? 왜 이렇게 주절주절 떠드는 거야?
상대는 정방이야. 육가아가 아니라고.
“당신이 답답해할까 봐요.”
본디 말이 많지 않은 사람인데, 내가 이러면 성격을 바꾸라고 강요하는 꼴이잖아. 누군가에게 강요당하는 기분은 별로인데.
진안 군왕은 또 후회스러웠다.
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싫어할 짓만 하지? 남이사 날 싫어하든 말든 상관없다지만, 어떻게 이 여인이 날 싫어하게 해?
진안 군왕은 손을 들어 코를 문지르고 다시 누웠다.
“단랑의 일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잠이 안 오네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진안 군왕의 마음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진안 군왕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너무 걱정 마요.”
진안 군왕은 심호흡을 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 대인이 교지를 받들지 않았으니 좀 성가셔지긴 하겠으나, 이 악물고 버티면 될 일이에요. 참고 견디면 지나갈 거예요. 단랑이 장차 혼사를 치를 때 다소 껄끄럽긴 하겠지만, 지금에 비하면 훨씬 낫죠.”
이번 일로 진단랑의 혼삿길이 험난해질 것은 자명했다. 분명 경성에 있는 부모를 떠나 먼 곳으로 시집갈 터였다.
그래도 신체 건강하고 정신이 온전한 남편에게 시집갈 수 있으니, 바보인 육가아와 혼인하는 것보단 낫겠지.
우리 육가아는 평생 좋은 일과는 인연이 없을 거야. 잔혹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인걸.
좋은 여자와 혼인하든 나쁜 여자와 혼인하든, 사실 육가아와는 상관없는 일이지. 정작 육가아 본인은 뭐가 뭔지 알지도 못하고, 신경 쓰지도 않으니까.
“그럼, 당신은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나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보며 웃었다.
“솔직히 대답할게요. 어떤 여인을 맞이하든 태자에겐 다 똑같다는 걸 알지만, 난 그래도 좋은 아내가 태자의 짝이 되었으면 해요. 태자비가 진씨 가문의 여식이라면, 무척 기쁠 거예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켰다. 어둠 속에서 정교랑의 시선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당신은, 태자가 정말 태자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정교랑이 불쑥 붇자, 진안 군왕은 멈칫했다. 순간 가슴이 쿵쾅거리며 낯빛이 변하는가 싶더니, 곧 원상태를 회복했다. 물론 캄캄한 어둠 속이라 티가 나진 않았다.
“당연하죠.”
진안 군왕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태자는 폐하의 자손이잖아요. 유일한 혈육이요. 그러니 당연히 태자여야 하죠.”
“하지만, 적합하지 않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도 자리에서 일어나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방, 적합한지 적합하지 않은지는, 사람이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진안 군왕이 완곡한 어조로 말했다.
혈통과 출신은,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하늘이 정하는 거라면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정하는 거라면, 우리 같은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죠. 하늘이 정하길 기다려 보죠. 그렇다면 더더욱 고민할 것도 없겠네요.”
기다린다?
“천도는 순응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사람이 천도를 따라 움직여야 하기도 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며 담담하게 말했다.
“난 그런 거 몰라요. 난 내가 뭘 해야 할지 알 뿐이죠. 천도라……. 천도는 너무 높고 멀리 있어요.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죠(天道遠, 人道邇, 非所及也).”
천도는 멀고, 인도는 가까우니, 서로 상관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하지만…….
“우린 알잖아요.”
정교랑이 중얼거렸다.
알고 있으니, 천도를 따르는 것이 소임이리라.
손 하나가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움찔하면서도, 그 손길을 피하진 않았다. 손이 정교랑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자, 정교랑도 몸의 긴장을 풀었다.
도(道)를 얻으려면, 무언가는 포기해야 한다. 더없이 분명한 이치지만, 어째서인지 그녀는 괴로웠다. 진단랑이 바보 태자에게 시집가기 때문일까?
바보에게 시집가는 건 분명 슬픈 일이겠지만, 죽음에 비한다면?
예를 들어 누군가와 혼인하면 죽음뿐인 걸 알면서도, 결국 딸을 그리로 시집보낸 부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정교랑은 천천히 몸을 눕혔다.
대화를 멈춘 방 안은 다시 고요 속으로 빠져들었다. 하지만 좀 전의 분위기와는 달리 사뭇 편안해진 분위기였다. 정교랑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하늘이 밝아 오고 있었다.
몸 위에 무언가 무거운 게 얹힌 느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 누군가의 팔뚝에 손이 닿자, 정교랑은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금방이라도 닿을 듯 바짝 붙어 있는 진안 군왕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곤히 잠들어 있었다.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한 손은 그녀의 몸에 얹은 채.
두 사람은 꼭 껴안은 듯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교랑의 움직임에 진안 군왕이 눈을 떴다. 바로 눈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 진안 군왕도 놀랐는지 얼른 뒤로 물러났다가, 곧 다시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아침이에요. 좀 더 자요.”
진안 군왕은 눈을 가늘게 뜨고 휘장 밖을 쳐다보며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과 함께 그는 반사적으로 정교랑을 토닥여 주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정교랑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가만히 치웠다. 그러면서도 일어나지는 않고 몸을 돌려 바깥쪽으로 얼굴을 향한 채 눈을 감았다.
그녀 뒤에 있는 진안 군왕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눈을 뜨지 않고, 정교랑의 몸 위로 다시 손을 올리지도 않았다. 베개만 정교랑 쪽으로 살짝 움직여서, 풀어헤친 정교랑의 긴 머리로 바짝 다가가 다시금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같은 시각, 밤새 한숨도 못 잔 진소 부부는 벌써 일어나 있었다. 씻고 나서 막 아침 식사를 하려다가, 진십팔랑이 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십팔랑.”
문 안으로 들어서는 진십팔랑을 보자, 진소 부인은 퉁퉁 부은 눈에 또다시 눈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진십팔랑의 얼굴도 진소 부인과 비슷한 걸 보니 밤새 한숨도 못 잔 눈치였다.
진십팔랑이 대청 안으로 들어와 앉으며 예를 표했다.
“사위는?”
“소식을 알아보러 갔어요.”
진소의 물음에 진십팔랑이 대답했다.
어제 조서가 내려왔다는 소식은 하룻밤 사이에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오늘은 온 조당과 경성이 이 일로 소란스러울 터였다.
“알아볼 것도 없다. 뭐라고 말할지, 내게 생각이 있느니라.”
진소의 말에 진십팔랑은 침묵을 지켰다.
“십팔랑, 난 단랑을 데리고 잠시 집을 비울 생각이야. 너도 네 남편이랑 그만 가 봐.”
진소 부인의 말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단랑의 일에 대해 결단을 내리셨어요?”
진십팔랑이 물었다. 진소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진소 부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십팔랑, 걱정 말거라. 이미 지나간 일이니, 너도 괜한 생각 안 해도 돼. 단랑이 입궁했던 일은, 그저 뜻밖의…….”
진소 부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십팔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끊었다.
“아버지, 어머니.”
진십팔랑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힘주어 쥐며, 고개를 들어 진소를 바라보았다.
“단랑의 입궁은 뜻밖의 일이 아니에요.”
진소 부부가 멈칫하며 진십팔랑을 바라보았다.
“제가 태후께 단랑을 천거하려고 데려간 거예요.”
진십팔랑은 심호흡을 하고, 무릎 위에 올려둔 손에 힘을 풀며 또박또박 말했다.
뭐라고?
진소 부부의 안색이 싹 변했다.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진십팔랑의 목이 돌아갔다. 머리의 떨잠에 있는 진주가 새벽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들은 화들짝 놀라 황급히 물러났다.
“십팔랑! 다시 한번 말해 봐!”
진소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진소 부인의 손에 힘이 실려 있었기에, 따귀를 맞은 진십팔랑의 새하얀 볼에는 붉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하지만 진십팔랑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다. 분노로 몸을 떠는 진소 부인의 시선 앞에서도 두려움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기색이었다.
“제가 단랑을 태후께 천거했다고요.”
진소 부인이 다시 손을 높이 쳐들자, 진소가 입을 열어 제지했다.
“그만하시오. 지금 때려 봐야 무슨 소용이오?”
하지만 진소 부인의 손은 그대로 진십팔랑을 향했고, 따귀를 후려치고 난 후 진소 부인 본인도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체 왜 그랬어?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해!”
진소 부인이 또 분을 못 이기며 소리쳤다. 진십팔랑의 얼굴에 난 붉은 자국이 더 짙어졌지만, 진십팔랑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줄곧 차분하기만 한 진십팔랑의 표정은 놀란 진소와 분노를 참지 못하는 진소 부인의 모습과 더 확연한 대비를 이루었다.
“전 제가 무슨 일을 했는지 알아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그래서 무슨 짓을 저질렀는데? 십팔랑, 네 동생의 손을 잡아끌고 궁으로 들어가면서, 조금도 괴롭지 않았느냐?”
진소가 진십팔랑을 보며 물었다.
진소의 말을 듣자 진소 부인은 어제 진단랑이 싱글벙글한 얼굴로 진십팔랑의 손을 잡고 자신에게 작별 인사를 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게 자신의 딸을 진흙탕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일 줄 누가 알았으랴.
진십팔랑은 붉어진 눈으로 엎드려 바닥에 머리를 찧으며 큰절을 올렸다.
“아버지, 어머니, 사전에 이 일을 고하지 못함은 소녀의 불효예요. 송구합니다.”
진십팔랑이 목멘 목소리로 말했다.
“넌 송구한 게 아니다.”
진소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가 어찌 송구할 수 있겠느냐? 네가 사전에 고하지 않고 이 일을 행한 것은, 사전에 고했다면 우리가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 아니더냐?”
납작 엎드린 진십팔랑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누가 너더러 이리하라고 시켰느냐?”
진소가 불쑥 물었다.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딸이 혼자서 이런 일을 생각해 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십팔랑, 네가 저지른 일이 무슨 의미인지 아느냐? 이건 아비의 퇴로를 끊어 버리는 일이야.”
진소가 비통함을 감출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황실에서 명한 이번 혼사에서 진씨 가문은 불리한 국면에 위치할 수밖에 없었다. 태후의 교지가 내려온 것은 진단랑을 본 후의 일이기에, 남들 눈엔 진씨 가문에서 먼저 혼사 의중이 있었던 것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세간의 추측에 불과했다. 뚜렷한 증거가 없는 한, 진씨 가문은 당당하게 교지를 거역할 수 있었고, 한동안 시끄럽긴 하겠지만 종국에는 잠잠해질 일이었다.
그런데 진십팔랑의 말로 그 추측은 더 이상 추측이 아닌 기정사실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이 일은 더 이상 교지를 거역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군주를 기만한 죄를 지은 게 된다.
이랬다저랬다 말을 바꾸며 황실을 농락했으니, 모든 잘못은 진씨 가문에 있었다. 진씨 가문은 신의를 잃을 것이고, 황실만 웃음거리로 만든 게 아니라 진씨 가문 역시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신의가 없는 자는 군자라 할 수 없는데, 군자도 아닌 자가 어찌 태자를 보필하여 강산을 안정시키고 문무백관을 이끄는 우두머리의 중임을 맡을 수 있으랴.
진소로서는 분노보다 비통함이 더 컸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이것저것 다 재고 따지며 계산했건만, 그의 몸 깊숙이 칼을 찔러 넣은 건 다름 아닌 그의 딸이었다.
진십팔랑이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 그럼 아버지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으세요?”
진십팔랑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십팔랑, 넌 어째서 이 아비가 그리하길 원한다고 생각하느냐?”
진소가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물었다. 그러자 진십팔랑이 모친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어머니, 언니로서, 왜 이런 일을 하면 안 되는지 알아요. 또 아버지자 어머니로서, 두 분이 왜 이 일을 원치 않으시는지도 알고요. 하지만…….”
진십팔랑의 시선이 다시 진소에게로 향했다.
“폐하의 신임을 받는 중신이자 성은에 부응해야 할 보정대신으로서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