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0화 (140/160)

-장궁-

“할아버지, 정 언니가 전에는 정말 가엾었겠죠? 바보인 사람을 본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바보는…… 그런 사람이었어요.”

존귀한 신분의 태자인데도 내시들과 궁녀들이 무시하고 깔봤어. 발로 밟기까지 하고. 어쨌든 바보는 통증도, 수치도 못 느끼고, 말할 줄도 모르니까.

하물며 정 언니는 그때 아무 신분도 아니었던 데다 가족들한테 버림까지 받았으니, 얼마나 가엾은 나날을 보내 왔을지.

누군가의 손이 진단랑의 어깨를 잡았다. 고개를 돌리자, 진 노태야의 놀란 표정이 보였다.

“단랑, 오늘 태자 전하도 뵌 게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단랑이 입궁했었니?”

정교랑이 앞에 있는 진씨 가문의 시녀를 보고 물었다. 살짝 놀란 표정이었다. 시녀가 예를 표하며 네 하고 대답했다.

“십팔랑 아씨가 궁에서 공주님들께 글씨를 가르치는데, 태후마마께서 사람이 너무 적다며 글동무를 찾아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오늘 십팔랑 아씨께서 십구랑 아씨를 데려가셨고요.”

공주나 황자의 글동무가 되는 건 좋은 일이었다.

“태후마마께서 십구랑 아씨를 보고는 무척 마음에 들어 하셨어요. 상도 많이 주셨고요. 십구랑 아씨께서 특별히 골라 이리로 보내신 거예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에 놓인 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반근, 내 대청에 있는 장궁을 가져와.”

반근은 멈칫했고, 안에서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책을 보고 있던 진안 군왕도 멈칫했다.

장궁?

진안 군왕은 반근이 들어와 벽에서 장궁을 꺼내 객청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건 내가 단랑에게 주는 거야.”

앞에 놓인 장궁을 보고 진씨 가문의 시녀도 순간 어리둥절해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반근이 눈치를 준 후에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예를 표하며 감사 인사를 올렸다. 그러고는 당황하며 장궁을 들고 물러갔다.

진안 군왕은 마당으로 걸음을 옮기는 그 시녀의 모습을 창문으로 확인하고는 얼른 고개를 숙이고 반나절 내내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책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다 되도록 정교랑이 들어오지 않자, 결국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정교랑은 여전히 객청에 앉아 있었다. 팔걸이 의자에 기대 다소 멍한 표정으로.

진안 군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결국 객청으로 나갔다.

“당신은 정말 재미있어요.”

진안 군왕이 월동문(月洞門: 보름달 모양으로 둥글게 구멍을 낸 문)에 기대 웃으며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보통 영웅에겐 보검을, 미인에겐 연지분을 주잖아요. 진씨 가문의 어린 낭자한테 왜 장궁을 줄 생각을 한 거예요?”

“왜냐면…….”

정교랑은 말을 하다 말고 멈추더니, 침묵에 잠겼다. 묻는 말엔 늘 바로바로 대답하던 정교랑이었다. 이렇게 중간에 말을 그만두는 일은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로 다가왔다. 정교랑은 표정도 어딘지 모르게 이상해 보였다. 착잡한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한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복잡한 표정이었다.

그런 복잡한 표정이 정교랑의 얼굴에 드러나는 건 드물고 기이한 일이었다.

“정방, 왜 그래요?”

진안 군왕이 웃음기를 거두고 물었다.

“어쩐지, 조금…… 익숙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익숙해서?

진안 군왕은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익숙하다니 뭐가요?”

익숙하다니 뭐가?

“양국공 댁에서 즐겁게 놀았느냐?”

“즐거웠어요. 아버지, 양국공께서 선물도 많이 주셨어요. 이것 좀 보세요.”

미소를 머금고 있던 사내는 해맑게 웃는 여자아이를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활을 꺼냈다.

“이 아비도 아방에게 줄 게 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벽은 텅 비어 있었다.

“아방, 이제부터는 활쏘기를 열심히 익혀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어째서요? 아버지께서 계시잖아요. 아버지가 절 지켜 주시면 되죠.”

“언젠가는, 아비한테 그럴 겨를이 없을지도 몰라.”

“아방!”

누군가가 목청 높여 소리치며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퍼뜩 정신을 차린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려 했다. 그런데 누가 한발 먼저 그녀의 가슴을 쓸어 주었다.

“왜 그래요? 여기가 안 좋아요?”

진안 군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얇은 옷을 입는 여름날, 보드라운 가슴께에 손이 닿았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순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진안 군왕은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왜 이렇게 차가워요!”

진안 군왕의 비명이 울려 퍼지자, 밖에 있던 반근도 허둥지둥 달려 들어왔다.

“이 태의를 불러라.”

진안 군왕이 반근을 향해 소리쳤다. 놀라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반근이 얼른 뒤돌아 나가려 했다.

“필요 없어.”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리자 반근은 우뚝 걸음을 멈췄다.

“아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부축하며 초조한 목소리로 불렀다.

“날 아방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말을 끊으며 그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났다.

“난 괜찮아요. 여긴, 언제나 늘 차가웠어요.”

언제나 늘 차가웠다고?

말이 안 되잖아. 사람의 명치께가 어떻게 차가울 수가 있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멀쩡하다가, 갑자기 왜 그래요?”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디가 멀쩡해요? 언제나 늘 안 좋았어요. 지금은 더 안 좋고요.”

“장궁을 줬다고?”

시녀가 내민 장궁을 보며 진 노태야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정 언니가 나한테 주는 거야?”

진단랑은 도리어 기쁜 표정이었다. 막상 활을 보자 다소 어찌할 바를 모르는 눈치긴 했지만.

세워 놓으면 진단랑의 키만 한 활이었다.

“정 언니가 나더러 활쏘기 연습하라는 건가?”

진단랑은 다시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진 노태야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활쏘기 할래요. 저도 정 언니처럼 훌륭한 궁술을 익힐 거예요.”

진 노태야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언니처럼 하거라, 언니처럼.”

진 노태야의 시선은 장궁을 향해 있었다.

평소의 그 여인이라면 답례로 먹을 걸 주었을 텐데, 왜 갑자기 장궁을 보냈을까? 정말 단랑이 활쏘기를 익히게 하려고?

그런데 왜 갑자기 단랑한테 활쏘기를 익히라는 거지? 보아하니 평소에도 자주 쓰던 활 같은데…….

진 노태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한쪽 옆에 있는 병풍을 쳐다보았다.

이 활은 사람의 목숨을 취해 본 적 있을까? 이 병풍에 있는 죽음 가운데 이 활 아래 목숨을 잃은 혼령도 있으려나?

반근은 정교랑이 일어나 내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그 자리에 한쪽만 무릎을 꿇은 채로 엉거주춤 앉아 있었다.

정교랑이 벌떡 일어나 자리를 뜬 게 뜻밖이었는지, 손도 여전히 앞으로 뻗은 상태라 다소 어색한 자세였다.

반근은 저도 모르게 손을 꽉 쥐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잠시 머뭇거렸다.

“전하, 저희 아씨는…… 아씨의 말씀에 다른 뜻은 없어요.”

반근이 앞으로 다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반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도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이 태의의 진맥이 필요 없으면, 약차라도 마시는 게 어때요?”

진안 군왕은 반근의 말을 전혀 못 들은 듯 정교랑에게 물었다. 반근도 더는 입을 열지 않고, 내실로 들어간 두 사람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살짝 안도가 되면서도 눈썹이 찌푸려졌다.

문밖에서 안의 동정을 들은 시녀에게 말을 전해 들은 소심이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소심이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반근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다고 하기엔 무슨 일인지 알 수 없었고, 아무 일 없었다고 하기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 전하께서 약차를 달여 오라고 하셨어.”

반근이 소심의 옷소매를 잡아끌며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전하께서 시키셨다고? 아씨가 아니라?

소심은 놀란 눈으로 반근을 쳐다보고,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반근의 표정에 얼른 따라 나왔다.

“그게 다야?”

반근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소심은 더욱 놀란 눈치였다. 반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도 싸운 거라고 봐야 하나?”

반근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것도 싸운 건가?

“그건 아니지. 아씨께서 그러셨잖아. 전하께서 아방이라고 부르는 게 싫으시다고. 전에도 말씀하신 적 있고.”

소심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는 반근을 토닥여 주었다.

“괜한 생각 마. 아씨께서 어떤 분인지 아직도 몰라? 아씨께서 말씀하시는 그대로야.”

반근은 다소 안도가 되는 듯 고개를 돌려 안쪽을 바라보았다.

부디, 군왕 전하께서도 괜한 생각을 안 하셔야 할 텐데.

방 안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했지만, 분위기는 다소 달랐다. 진안 군왕이 침상에 앉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난…….”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말을 제대로 끝내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다가가 자리에 베개를 놓아 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좀 누워요.”

정교랑은 진안 군왕을 힐끔 본 후 자리에 누웠다.

“난 내가…….”

정교랑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이번에도 진안 군왕이 먼저 말했다.

“정방, 난, 당신을 어떤 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르겠어요.”

침상 근처에 앉은 진안 군왕이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혼인도 했는데, 이름을 그대로 부르는 건, 좀 결례 같아서요.”

그렇다면 아명인 교랑도 있는데.

진안 군왕은 손을 뻗어 옆에 있는 부채를 들며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이 부르는 이름으로 당신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빠른 속도로 중얼거리고 난 진안 군왕은 부채를 들고 똑바로 앉아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기억해 둘게요.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말을 마치고 난 진안 군왕은 정교랑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그런 진안 군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정교랑이 입을 열었다.

“그냥 호칭일 뿐이에요.”

호칭은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호칭하는 사람이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양산이 아니야. 공연한 트집을 잡아 억지를 부려서는 안 돼.

“나도 앞으론 안 그럴게요. 당신 좋을 대로 불러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어 주었다. 진안 군왕의 눈 속에 놀라움이 스쳤다. 아니, 놀라움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앞으론 안 그럴게요.

이거 사과 맞지? 이 여인이 사과도 할 줄 아네?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하진 않아도 되네. 조용히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 그냥 가 버렸다면, 이 일은 이대로 지나갔겠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을 테고, 이런 말도 안 했을 거야.

웃음꽃이 활짝 핀 진안 군왕의 부채질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옳지 않아요.”

진안 군왕은 손으로 정교랑을 살짝 밀며 편안히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요. 나 좀 앉게.”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당신은 정말…….”

정교랑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 누구도 감히 이 여인을 이렇게 귀찮게 할 수는 없단 생각을 하니, 진안 군왕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그들은 이 여인의 성격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리라.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체하고, 침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계속해서 부채질을 해 주었다.

“어떻게 나 좋을 대로 하라고 해요? 내가 나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에요?”

거기까지 말한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런 것도 같네.”

진안 군왕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게 아니라면 때려죽인 사람을 남의 집 문 앞에 던져두진 않았겠지. 태후가 놀라도록 고의로 겁주지도 않았을 테고.

그러니 내가 좋으면, 남이사 좋아하든 말든 신경 안 쓴다고 하지.

“내가 나 좋아하는 것만 생각하고, 당신은 신경 안 쓰는 사람이에요?”

진안 군왕이 말을 바꾸어 물었다. 멈칫하며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정교랑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무뚝뚝하던 표정이 순식간에 걷히고, 커다랗고 검은 두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녀가 누군가로 인해 웃음을 터트리는 일은 드물었다. 이렇듯 그녀를 웃게 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교랑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정방, 기분 상해 있지 마요. 당신 기분 나빠 하면, 난 좀 겁이 나요.”

정교랑의 몸이 살짝 경직되면서 얼굴에 있던 웃음도 굳어졌다가, 곧 원상태로 회복됐다. 사내의 손이 얼굴을 어루만진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기분 나쁜 거 아니에요. 난 다만…….”

거기까지 말한 정교랑이 말을 멈췄다. 무언가를 말하려다 마는 것 또한 그녀에게는 전에 없던 일이었다.

진안 군왕은 부채를 내려놓고, 나머지 한 손을 마저 뻗어 두 손으로 정교랑의 얼굴을 받쳐 들었다.

“다만 뭐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동작은 다소 기이했지만, 그의 질문은 진지했다.

“난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한 번도 즐거웠던 적이 없다…….

그녀의 삶이 자신보다 더 비참했다고 얘기하곤 했지만, 그녀 자신이 그런 말을 꺼낸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불평이나 원망이라 할 수도 없는 간단한 말 한마디에, 진안 군왕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동시에 기쁜 마음이 들기도 했다. 어릴 적 육가아가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앳된 목소리로 형님이라고 불러 주었던 때 받았던 느낌이었다.

나를 신뢰하고 있다는 느낌.

진안 군왕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긴 눈썹, 반짝이는 눈, 작고 오뚝한 코를 바라보던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몸을 기울여 앞으로 다가갔다. 어린 육가아를 껴안아 주었을 때처럼, 입을 맞춰 주고 싶었다.

촉촉한 입술을 볼에 갖다 대면서 부드러운 피부와 탄탄한 피부가 서로 맞닿자, 두 사람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순간 몸이 경직됐다.

이, 이, 이건, 육가아한테 뽀뽀해 주던 느낌과 달라.

온몸에 기름을 끼얹은 후 불을 붙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화르르 불타오르듯 들끓는 피가 온몸 구석구석을 돌아다녀 제대로 앉아 있을 수조차 없었다.

문득 그녀를 처음 껴안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깊은 밤이면 절로 그 순간이 기억나 밤잠을 못 이룰 때가 많았다.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은 선 채로 그녀를 껴안을 때와는 또 달랐다. 몸 아래 눌린 몸은 비단처럼 부드러웠다.

진안 군왕의 목구멍에서는 꿀꺽하는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났다. 손을 뻗어 몸 아래 깔린 허리를 끌어안자, 볼에 갖다 댔던 입술이 그대로 미끄러져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

창 아래 쪼그려 앉아 있던 반근과 소심 또한 주먹으로 얼굴을 강타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뒤로 넘어갔다. 둘은 허둥지둥 일어나 도망치면서도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지만, 반근과 소심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나무 아래로 도망친 둘이 눈을 마주쳤다. 둘 다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두 분은 부부잖아.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야.”

반근은 뭐라 맞장구를 치려 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아 새빨개진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이런 일에 나 끌어들이지 마.”

소심이 반근을 째려보며 말했다. 반근이 말없이 웃기만 하자, 소심도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막 웃고 있는데, 마당 문 밖에서 경 공공이 허둥지둥 들어오며 소리쳤다.

“전하, 전하.”

반근과 소심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뻗어 막았다.

“중요한 일로 긴히 드릴 말씀이 있다.”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전하와 부인께서는…… 바쁘세요.”

반근이 새빨개진 얼굴로 대꾸했다.

두 분이 바쁠 일이 뭐가 있다고!

경 공공이 발을 굴렀다.

“성가시게 굴지 마라. 정말 중요한 일이야.”

경 공공이 앞을 막아서는 반근을 밀치며 말했다. 어릴 때 입궁하여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무공까지 잃은 건 아니었기에 여자 둘의 힘으로 막기는 역부족이었다. 경 공공은 둘을 가볍게 제치고 층계를 올랐다.

소심과 반근은 당황해 어쩔 줄 몰라 했지만, 다행히 경 공공은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문밖에 서서 예를 표했다.

“전하, 전하.”

전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낭패인 모습으로 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얼른 몸을 일으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내실을 빠져나온 진안 군왕은 금세 후회가 됐다.

얼굴이 어떤지 모르겠네. 옷매무새는 가지런한가? 욕실에 들어가 정리를 좀 하고 나오는 게 낫겠어.

경 공공은 쓸데없는 말을 주절주절 잘도 떠드는 사람이잖아. 에라, 모르겠다. 물어보면 호통을 쳐 입을 막아 버리지 뭐. 내 집에서 내 옷이 좀 흐트러진 게 무슨 대수라고…….

진안 군왕이 이런저런 생각에 정신이 없던 그때, 경 공공이 휘장 너머에서 힐끔 보고는 곧장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에 진안 군왕은 욕실로 들어갈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전하.”

경 공공은 평소와 달리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지 않고, 서둘러 입을 열었다.

“큰일 났습니다.”

같은 시각, 귀가한 진소는 찻잔을 탁자 위로 내동댕이치며 불쾌함을 토로했다.

“안 좋을 게 뭐 있냐고?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오?”

진소 부인이 억울한 듯 따졌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요. 노야께서 싫으시다니, 십팔랑한테 십구랑을 데려가지 말라고 할게요.”

진소가 한숨을 내쉬었다.

“글동무를 하러 입궐하는 건 나쁠 게 없지. 내 말은, 지금은 시기가 안 좋다는 뜻이오.”

진소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지금 태후마마께서 태자비를 고르고 계시오. 단랑의 나이라면 피하는 게 좋아.”

무슨 말인지 퍼뜩 깨달은 진소 부인이 곧 웃음을 터트렸다.

“그걸 걱정하셨군요, 노야.”

진소 부인은 다시 차를 따라 주며 말을 이었다.

“태후께서 단랑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 해도, 우리 쪽에서 동의하지 않으면 그만이에요. 태후께 그런 마음이 있다면, 자연히 노야한테 물으시겠죠. 노야가 어디 태후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던가요?”

태후는 관두고 황제의 말에 반박하고 나선 것도 한두 번이 아닌 진소였다. 진소는 찻잔을 받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다만 만에 하나…….”

진소가 막 입을 열려는데, 밖에서 시녀가 급히 들어왔다.

“노야, 노태야께서 하실 말씀이 있다며 부르세요.”

진소가 말을 멈추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옷 갈아입고 가려던 참이다.”

진소가 말했다. 진소 부인이 태후가 단랑에게 상을 하사한 일을 말하면서 잠시 시간이 지체된 터였다.

진소가 막 문을 나서려는데, 이번에는 집사가 급히 달려왔다.

“노야, 궁에서 조서가 내려왔습니다.”

진씨 저택에서 황궁의 조서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허둥댈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조서가 내려오다니?

보통의 경우 조서를 내리는 건 형식적인 일에 불과했다. 조서를 내리고 그 조서를 받는 건 전부 사전에 어느 정도 소통이 이루어진 후의 일이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미리 연통도 없이 무슨 일로 갑자기 조서를 내리지?

“큰일이라니?”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경 공공은 그런 진안 군왕의 모습에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태후께서 태자비를 정하여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누구더냐?”

진안 군왕이 긴장하며 물었다. 그때 누군가가 진안 군왕보다 더 큰 목소리로 물었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의 목소리였다. 어느샌가 정교랑이 나와 있었다. 진안 군왕은 하던 말도 잊은 채 몸을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태후가 태자비를 정하면서,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경 공공을 보며 재차 물었다.

부군의 말을 끊기까지 하고…… 너무 무례하시네.

경 공공은 못마땅한 듯 속으로 투덜대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태후마마께서 진소 상공 가문의 십구랑 낭자를 태자비로 간택했다며 조서를 내리셨습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질문에 관한 내용에 더 힘을 실어 대답했다.

진소 상공 가문!

진안 군왕은 놀란 표정이었고, 정교랑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조서를 내렸다고…….”

정교랑이 천천히 되뇌었다.

대청에 선 진 노태야가 손을 놓자, 손에 들려 있던 장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커다랗고 무거운 활이 지면에 닿으면서 육중한 소리를 냈다. 안팎에 있던 시녀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다.

진 노태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조서라…….”

진 노태야가 중얼거렸다.

“진 상공 댁 십구랑 낭자가 틀림없습니다.”

반근과 소심은 문밖에 서서, 대청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홍조를 띠고 있던 두 사람의 얼굴은 이미 창백해진 상태였다.

진단랑이! 태자비가 된다고!

태자비가 되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경사였으나, 지금의 태자는 바보이니……. 바보에게 시집가는 건 결코 경사라 할 수 없었다.

어쩌다 진단랑이?

“단랑이 오늘 황궁에 갔었지?”

“네. 오전에 갔었습니다.”

경 공공이 정교랑의 물음에 대답했다.

정교랑은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휘장 너머로 마당을 물들인 노을빛이 보였다.

“하룻밤도 안 지났는데, 참 빠르네.”

정교랑이 말했다.

“당연히 서둘러야지. 이런 일은 지체하면 안 되거든. 시간을 끌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야.”

같은 시각 고능준은 회랑 아래에 서서, 고양이를 데리고 노는 첩실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때 시간을 끌지 않았더라면, 오늘 처한 상황은 달랐으리라.

“진소 부자의 기민함이라면 분명 진 낭자의 입궁이 석연치 않음을 눈치챌 거야. 태자와 놀아 준 덕에 태후께서 상을 내리신 걸 알면, 분명 대책을 세우겠지.”

그래서 지금이어야 해. 저들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 전에 선수를 쳐서 기선 제압을 하면 저들은 수동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거든.

진소도 이런 맛을 느껴 봐야지. 월식 사건 이후로, 내가 화를 아주 오래 참았단 말이다. 속 좁은 사람으로서는 정말 견디기 힘든 맛이지.

“조서는 진작 작성해 놨었습니다. 오늘을 기다렸지요. 이렇게 빨리 쓸모가 생길 줄은 몰랐지만 말입니다.”

막료 하나가 웃으며 말하자 고능준도 웃음을 터트렸다.

“호부(虎父) 밑에 견자(犬子) 없다더니.”

고능준이 수염을 쓸며 말을 이었다.

“진씨 가문의 십팔랑이 아주 과단성 있더군.”

“무엇보다 태후께서도 마음에 들어 하시잖습니까.”

막료가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단순히 태후께서 마음에 들어 하는 것만으로는 안 돼.”

고능준이 손을 휘휘 젓자, 한쪽 옆에 있던 시녀가 얼른 부축하여 의자에 앉게 해 주었다.

“진소가 어떤 자던가.”

늦여름 저녁 무렵의 마당엔 바람이 머물고 있었다. 고능준은 한숨을 토하고 홀가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치는 이해관계를 따져야지, 어찌 좋고 싫음으로 결정한단 말인가. 마음에 드는 일이 여러 개라 한들 전부 다 할 수는 있고? 당초 폐하도 그자의 질책과 반박으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해 못마땅해하셨던 게 한두 번이 아니야. 그렇다면 그 반대도 마찬가지지. 그자 또한 싫어도 해야 하는 일이 있을 수밖에.

나라와 정치에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봐야지.

진 상공은 충신이야. 나는 그자와 사이가 좋지 않지만, 그 점은 부인하지 않아.”

막료들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고능준을 치켜세웠다.

“대인은 포용력이 뛰어나십니다.”

그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진 대인으로서는 꽤 뜻밖일 겁니다.”

어디 뜻밖 정도겠는가. 놀라고 분노하다 못해, 필경 반대하고 나서겠지.

“세상사가 어디 원하는 대로 술술 풀리던가.”

고능준은 미소를 지은 채 다리를 흔들며 흡족한 속마음을 표현했다.

“딸자식도 이치를 깨닫고 결단을 내렸으니, 아비도 응당 그리하겠지.”

“어쩌다 단랑 아씨께서?”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심은 반근과 별다를 게 없는 표정으로 반근을 향해 쉿 하는 동작을 하고는 계속해서 안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근자에, 태후께서 여러 가문의 부인들을 그 여식과 함께 궁으로 부르셨습니다.”

경 공공이 말했다.

태자를 책봉하면서 국혼에 관한 일도 자연스레 궤도에 올랐다. 태후의 부름을 받은 부인들이 무슨 일로 궁에 드나드는지는 모두가 훤히 아는 일이었다.

다만 부인들 중 대다수는 권세 있는 황족일 뿐, 조정 중신의 부인은 포함되지 않았다. 진소 가문은 더더욱 아니었고.

그런데 뜻밖에도 진소 부인은 입궁하지 않은 상황에 진단랑이 입궁하여 태후에게 상까지 받게 된 것이다.

“그 많은 사람 중에, 진 상공 댁 낭자만이 상을 받았답니다.”

경 공공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태자비의 인선이 명확해졌군. 그 말인즉, 얘기가 끝난 일이란 말인데…….”

진안 군왕이 복잡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런 시기에 진단랑이 입궁할 리가 없지 않은가.

“진씨 가문 낭자가 태자 전하와 함께 공놀이도 했답니다.”

경 공공이 덧붙였다. 그러자 진안 군왕이 반가워하며 웃음을 지었다.

“진 낭자는 육가…… 아니, 태자를 무서워하지 않나?”

그러더니 긴장되면서도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같이 놀았다더냐? 아니면…….”

아니면, 시늉만 한 건가?

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아는 진안 군왕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은 고사하고, 피를 나눈 황궁 누이들도 무서워하며 피하는 상대인데…….

그 누구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아.

태후는 그 아이를 돌볼 마음조차 없어 내시들과 궁녀들에게 맡겨 버렸어. 내시들과 궁녀들은 점점 더 무성의하게 대하고 있지.

어쨌거나 바보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말도 못 하고.

어딘가에 부딪히지 않게 하고자 전각 안에 가둬 둔 채 밖으로 나와 놀지도 못하게 하고, 가만히 앉아 있게 하고자 시도 때도 없이 먹을 걸 주는 바람에 점점 살만 찌게 할 텐데.

당초 이 태의는 태자가 배고픔과 배부름을 모르는지라 살이 찌기 쉽다며 많이 뛰어놀게 하고, 먹는 걸 관리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안 군왕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우리 육가아를 무서워하지 않고 싫어하지도 않으면서, 어떤 목적을 위해 시늉만 하는 게 아닌 사람이 있다면…….

“아닙니다.”

그런 진안 군왕의 마음을 잘 아는 경 공공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소인이 직접 물어보고 거듭 확인했습니다. 태자 전하를 처음 뵈었을 당시엔 진 낭자도 겁을 먹었는데, 나중엔 자발적으로 태자 전하의 공을 주워 건네며 태자 전하와 함께 공놀이를 했답니다. 귀찮아하거나 일부러 무섭지 않은 척하는 일은 전혀 없었고요.”

혼자서, 그것도 아직 열한두 살 남짓한 어린 소녀가, 자신의 진실된 감정을 숨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리라. 특히 남의 눈치를 살피는 데엔 도가 튼 황궁 사람들의 눈까지 속여 가면서.

“정말 착한 아이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감탄하고,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진씨 가문의 어린 낭자가 당신이랑 아주 일찍부터 알았죠? 그 낭자가 아니었다면, 그때 진 노태야는 어느 의원을 찾아가야 할지도 모르는…….”

진안 군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정교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걸어 나갔다. 진안 군왕과 경 공공은 멈칫하여 놀란 표정을 지었고, 곧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경 공공은 부아가 치밀었다.

어찌 저런 사람이 있단 말인가. 해도 너무하는군!

밖으로 나오는 정교랑을 보며, 문밖에 있던 반근과 소심 역시 당황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감히 막아서거나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서재로 들어가는 정교랑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반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정교랑을 따라갔고, 소심은 심호흡을 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저희 아씨께서는…… 그, 글씨를 쓰셔야 해서요.”

소심이 웃음을 쥐어짜며 해명했다.

“너희 아씨?”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 듯 웃으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소심의 웃는 얼굴이 더욱 어색해졌다.

“소인이 말실수를 했…….”

소심이 바로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소심이 무릎을 제대로 꿇기도 전에, 진안 군왕이 말을 끊었다.

“알고 있다. 말 안 해도 돼.”

‘알았다’가 아니라, ‘알고 있다’고 했다. 한 끗 차이지만 엄연히 다른 말이었다. 게다가 말할 필요 없다는 말까지 덧붙였고.

마음이 쿵 하고 내려앉은 소심은 용기를 내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웃음기 없는 얼굴이었지만 딱히 다른 정서가 드러나지는 않는 표정이었다.

소심은 담벼락에 기대 몸을 앞으로 쭉 빼고 아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소년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 참.”

담벼락 위의 소년이 기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긴 길이 나 있었고, 영리한 늑대 떼도 먹이를 구할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으니 길에 오래 머물 리 없었어요. 타고난 천성이 후천적인 관성을 덮지 않는 한.”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피였어요. 그놈들이 뒤에서 말의 피로 유인했더라고요. 우린 밤길을 재촉하고 있었고, 어둠에 덮여 눈치채지 못했지만요.”

“난 <밀림재사록(密林齋事錄)>을 봤는데, 낭자는 무슨 책에서 봤어요?”

눈앞의 소년에게선 이제 풋풋함을 찾아볼 수 없었고, 얼굴은 더욱 날카로워져 있었다. 동시에 전혀 변한 게 없는 것 같이 보이기도 했다.

소심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네.”

짤막하게 대답하면서도, 소심은 큰절을 올렸다.

“장씨 집안에서 가르친 아이라 그런지 예의가 바르군요.”

물러가는 소심을 보며 경 공공이 말했다.

장씨 집안 아이다. 정교랑의 시녀가 아니라.

진안 군왕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남이 예의 바른지 아닌지는, 결국 자신의 마음에 달린 것이다. 예의 있고 말고는 자신의 느낌일 뿐이거든. 평가할 자격 같은 건 없어.”

어리둥절해 하던 경 공공은 곧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결국 저 여인을 감싸 주시는 거잖아.

“아경, 사실, 내가 무례했던 거다.”

진안 군왕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난 내 마음을 따른 거야. 저 여인의 마음은, 또 다르겠지.”

잠시 멈칫하던 경 공공은 곧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

태자를 싫어하지 않고 잘 대해 주는 태자비를 얻는 건, 진안 군왕에게 안심이 되고 흡족한 일이다. 태자의 가족으로서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태자비 쪽 가족으로서는 아끼고 사랑하는 자식이 바보에게 시집가는 일이 아니던가. 상대의 신분이 제아무리 고귀하다 해도 결코 기쁜 일이라 할 순 없었다.

정교랑으로서는 태자에 비해 진단랑 쪽이 더 가까운 게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결정하신 일도 아니잖습니까.”

경 공공이 억울한 투로 말했다.

전하는 저 여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주시는데, 저 여인은 왜 그러지 못하지? 그리 정색을 하며 가 버릴 것까지야.

그것도 아랫것까지 있는 자리에서. 전하의 체면은 조금도 챙겨 주지 않다니, 해도 너무하잖아.

“그리고, 전하께서 좀 좋아하시면 안 된답니까?”

“나야 당연히 좋아할 수 있지. 그렇다면 그 여인이 좋아하지 않는다고 야박하게 굴 건 없잖아?”

서재 안.

정교랑의 표정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지만, 정교랑이 써 내려간 글씨의 먹물은 평소보다 진했다.

한쪽 옆에 꿇어앉은 반근은 멍하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이따금 눈물을 떨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누가 볼세라 황급히 닦기도 했다.

“울고 싶은데 울지도 못하면, 그것도 집이라 할 수 있겠니?”

정교랑의 말에 반근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아씨, 진 대인께서 어떻게 단랑 아씨를 태자 전하께 시집보내실 수 있죠?”

반근이 울며 묻자, 정교랑이 손에 든 붓을 멈추었다.

“진 대인이 동의한 것 같진 않아.”

반근이 멈칫하여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동의한 게 아니라고?

경 공공 말로는 태자비 간택이 이루어지는 시기에 진씨 가문에서 단랑을 궁으로 들여보냈다고 했어. 그렇다면 당연히 그럴 의사가 있다는 뜻인데.

그게 아니었단 말이야?

반근이 환해진 얼굴로 기대에 차 물었다.

“그럼, 단랑 아씨께서 시집가지 않으셔도 되는 거예요? 진 대인께선 절대 동의하지 않으시겠죠?”

정교랑은 반근을 쳐다보지 않은 채, 종이 위의 글씨를 보며 천천히 대답했다.

“내 생각엔, 동의할 것 같아.”

반근은 어리둥절했다.

진 상공이 동의한 건 아니라더니, 이젠 또 진 상공이 동의할 거라고?

진 대인께서 동의하실 리가 있나? 단랑 아씨의 일인데!

반근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손을 꽉 쥐었다. 금세 또 눈물이 차올랐다.

진씨 저택의 마당.

향로를 올려놓는 탁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석양빛이 땅을 붉게 물들였다.

손에 조서를 들고 있는 내시의 이마는 땀으로 흥건했다. 내시는 자신의 앞에 오래도록 꿇어앉아 있는 진소를 바라보았다.

“진 대인, 이게 무슨 뜻입니까? 뭐라고 말씀이라도 하셔야지요. 이리 시간만 허비하지 말고, 체통을 지키십시오.”

진소가 고개를 들었다. 해가 지고 난 후 석양도 그 빛을 다한 때였지만, 진소는 여전히 눈이 부시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다시 눈을 뜬 진소는 평상시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결단을 내린 듯한 표정이었다.

“용서하십시오, 태후마마. 신은 받들 수 없습니다.”

진소가 납작 엎드렸다.

뒤쪽에 꿇어앉아 있던 진소 부인은 그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를 막았다. 그러면서 안간힘을 다해 엎드렸다.

조서를 가져온 내시는 놀란 표정이 아니었다. 일찌감치 예상한 듯했다.

“그러하십니까?”

내시는 일부러 말꼬리를 길게 빼며 눈썹을 꿈틀거리고, 납작 엎드린 진소를 내려다보았다.

“진 대인, 잘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거지요?”

어둠이 내렸을 무렵, 조서를 가져온 태감들이 진씨 저택을 줄줄이 빠져나갔다. 화려한 복장과 등에 진 황금색 보따리에서 그들의 신분과 방문 목적이 드러났다. 거리를 오가던 행인들은 자연스레 이들의 행렬을 주목하며 수군거렸다.

“진 상공 댁에 다녀가는군.”

“진 상공의 작위를 더 높여 준 건가?”

진 상공 댁에서 황궁의 조서를 받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기에, 백성들은 그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조서를 가져왔던 태감들이 황궁으로 돌아간 후 얼마 되지 않아, 황궁을 빠져나온 수많은 사람이 어둠을 헤치며 경성 곳곳으로 달려갔다.

고씨 저택의 안마당은 여느 때처럼 등불로 환히 밝혀져 있었고, 다정한 말들이 오갔다. 사치를 좋아하는 고능준은 밖에서 자신의 권세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리 몸을 낮추고 검소하게 지내도, 뒤에서 수군거리는 말을 피할 순 없는 법이다. 그러느니 자유롭게 즐기는 게 낫지.”

대청에서는 가희들의 노랫소리가 흘러나왔고, 방들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웃고 떠들며 장난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황제가 병석에 누운지라 영업을 하는 점포에서 주안상을 곁들여 노는 것은 중단된 상태였으나, 저택 안에서의 유희는 차츰 예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누군가가 급히 마당으로 달려 들어왔지만, 곧 회랑 아래에서 막혔다.

“대인께서 한창 기분이 좋으시니, 흥 깨지 마라. 무슨 일이냐?”

문밖에 있던 고능준의 측근이 물었다. 달려 들어온 사람이 초조한 투로 목소리를 낮추어 대답했다.

“궁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진 상공이 조서를 거부했답니다.”

그 말에 측근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이 일은 보고할 필요 없다.”

달려온 사람이 멈칫했다.

“진 상공이 수락했다면, 그건 보고할 만한 일이지.”

측근은 시시덕거리며 웃고 떠드는 소리가 흘러나오는 안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때마침 시녀 하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옆을 지나가자, 측근은 시녀를 살짝 꼬집어 주었다. 시녀는 간드러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됐으니 자네도 가서 술이나 한잔하게. 이건 우리가 고민할 일이 아니야. 고민할 사람은 진 상공이지.”

측근이 소식을 가져온 자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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