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합한-
“어서 내쫓게. 아주 멀리 내쫓아 버려.”
황궁 안. 태후는 고능준을 앞에 두고 울며 하소연했다.
“그 애는 미쳤어. 제정신이 아니야.”
거기까지 말한 태후가 돌연 말을 멈췄다.
“아니지, 미친 게 아니야.”
태후는 불안에 떨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 애는 이제 위낭이 아니야. 그 여인이 불러들인 야차가 몸에 들러붙었어.”
고능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마마, 틀렸습니다. 이게 바로 진짜 위낭입니다. 예전의 그 아이는 폐하와 마마의 비위를 맞추고자 연극을 한 것뿐이었고요.”
의심할 여지가 없다는 듯 무거운 어조였다.
“그러니 이제 절대 경성을 떠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태후가 멈칫했다.
“왜 또 보내지 말라는 게야? 빨리 경성에서 내보내라며 재촉할 땐 언제고? 그리 말 잘 듣고 온순할 땐 쫓아 보내려 하더니, 이제 저 꼴로 변하니까 남겨 두라는 게야?”
“전에는 그나마 연극이라도 했잖습니까. 기꺼이 연극을 한다는 건 본분을 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이제는 연극도 안 하겠답니다. 다시 말해 본분을 내팽개치겠단 거죠. 본분조차 내팽개친 사람입니다. 마마, 그런 자를 풀어 주어 경성에서 멀리 떠나게 하는 건, 호랑이를 키우는 꼴입니다.”
“그, 그 애가 뭘 할 수 있는데? 모반이라도 꾀한단 말인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반’이라는 단어를 내뱉으며 태후는 저도 모르게 탁자를 내리치기도 했다.
“어서 죽여 버리게. 죽여 버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죽여 버리려고 경성에 남겨 두겠단 겁니다. 경성에서 내보내면 죽일 기회는 더 줄어듭니다. 그런 일을 벌여 조당을 시끄럽게 하고 유림이 원성을 쏟아내게 했으니, 경성에 남겨 두는 건 우리에 가둬 두는 꼴과 다름없지요. 죄를 묻기도 더 쉬워지고요.”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더구나 지금 가장 시급한 건, 진안 군왕 그 대역무도한 놈을 처리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보다 시급한 게 있다고?
“애가를 해치려 든 아이야. 황후의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태후가 초조한 듯 탁자를 치자 고능준이 웃음을 지었다.
“양자로 들어가 태자가 되기엔, 아직 그만한 수완이 없습니다. 우선 스스로 명성을 땅에 떨어뜨렸으니 양자 입적을 하더라도 진안 군왕에게로 차례가 돌아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태자가 있는 한, 그 누구를 양자로 들이더라도 명분이 서지 않지요.
그러니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태자의 국혼입니다. 서둘러 황태손을 봐야 폐하의 혈통이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딴마음을 품는 이들도 그만 단념할 테고요.”
그렇지. 태자의 국혼을 깜빡했군.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초조한 투로 물었다.
“그럼 태자비 자리에 적당한 인선은? 우리 집안에 적당한 여식이 있는가?”
고능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마, 우리 집안은 그 어느 가문보다 적절치 않습니다. 하오나 염려 마십시오. 더 적합한 사람이 있습니다.”
더 적합한 사람?
태후가 멈칫하며 물었다.
“그게 누군데?”
고능준이 웃으며 대답했다.
“지금 의사를 물어보고 있는데,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정확한 소식이 오거든 마마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태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서두르시게. 하루라도 빨리 정해져야 마음이 놓이지. 요즘은 이게 사는 건지 뭔지도 모르겠어.”
태후는 또다시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마마, 염려 놓으십시오. 복과 화는 붙어 있다지 않습니까. 곧 좋은 날이 올 겁니다.”
고능준은 웃으며 태후를 위로한 후, 작별을 고하고 물러갔다.
같은 시각, 측전.
오늘은 진십팔랑이 닷새에 한 번씩 입궐해 공주들에게 글씨를 가르치는 날이었다.
“진 낭자, 이렇게 쓰는 거 맞아요?”
나이가 가장 어린 사공주가 앳된 목소리로 묻자, 진십팔랑이 다가가 몸을 낮추고 글씨를 들여다보았다.
“정말 잘 쓰셨어요, 공주님.”
진십팔랑이 웃으며 칭찬하자, 예닐곱 살쯤 된 공주는 기쁜 얼굴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붓을 들어 글씨를 더욱 열심히 따라 썼다. 진십팔랑은 한쪽 옆에 꿇어앉아 사공주의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한편 나이가 좀 더 많은 이공주는 글씨 쓰기에 전념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진단랑을 쳐다보며 말했다.
“십구랑, 글씨를 정말 잘 쓰네요.”
진단랑이 미소를 지으며 이공주를 향해 예를 표했다.
“진 낭자한테 오래 배웠나 보네.”
진단랑과 동갑인 삼공주가 질 수 없다는 듯 끼어들자,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젓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언니한테 배운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아요. 정 언니한테 더 오래 배웠죠.”
정 언니?
시선을 주고받은 두 공주가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글씨를 잘 쓰는 언니가 또 있어요?”
이공주가 물었다.
“아니요, 정 낭자요. 아, 아니지, 진안 군왕비 말이에요.”
진단랑은 절로 싱글벙글해진 얼굴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안 군왕비가 대문 앞에서 자리를 깔고 글씨를 쓰자 이를 견학하려는 이들이 몰려든 건 아시죠?”
두 공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 낭자에 관한 일은 황궁에서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다. 이야기는 음으로 양으로 끝도 없이 전해지고 있었다.
“그럼, 정 낭자를 스승으로 모신 거예요?”
“그때 그 광경을 직접 봤어요? 어떤 광경이었는지 빨리 얘기해 봐요.”
신분의 차가 있고 처음 만난 사이라 다소 서먹하긴 했지만, 열한두 살 남짓한 아이들은 금세 어울려 떠들기 마련이었다. 특히 공동의 화제가 있을 땐 더더욱 그랬다.
누군가가 무거운 헛기침을 하자, 서로 머리가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모여 있던 셋은 얼른 떨어져 단정히 앉았다.
진십팔랑이 엄숙한 표정으로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배울 땐 온 심혈을 기울여야 해요. 단랑, 넌 공주님들과 함께 글씨 쓰라고 데려온 거야. 함께 어울려 떠들라고 데려온 게 아니라.”
진단랑은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공주들과 눈웃음을 교환하는 걸 잊지 않았다. 두 공주도 고개를 숙이며 쿡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문밖에서 궁녀 하나가 웃으며 들어왔다.
“진 낭자, 태후마마께서 부르세요.”
진십팔랑은 얼른 알았다고 대답하고, 공주들에게도 예를 표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세 공주도 자리에서 일어나 반절로 답례했다.
“단랑,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진십팔랑의 당부에 진단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궁녀들과 함께 나가는 진십팔랑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구랑, 우리랑 같이 가서 놀아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정 낭자랑 같이 글씨 공부한 얘기 좀 들려줘요.”
삼공주도 맞장구를 치며 거들었지만 진단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니가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요.”
“진 낭자는 정말 엄격하네요.”
삼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단랑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추고 덧붙였다.
“언니가 혼인한 후로 점점 더 엄격해져요.”
뒤에서 남 이야기를 하는 데다 그 상대가 자신의 언니다 보니, 진단랑은 민망한 듯 혀를 날름거렸다. 하지만 세 공주는 그 말 덕분에 진단랑과 한결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래도 우리랑 같이 가서 우리 궁에서 놀아요. 진 낭자한테는 우리랑 같이 글씨 연습하러 갔었다고 하면 되잖아요. 그럼 나무라지 않을 거예요.”
이공주가 말했다.
“맞아요. 지금쯤이면 새로운 다과를 가져왔을 거예요. 싱싱한 과일도 들여오고요. 십구랑, 같이 가서 먹어요.”
대공주도 거들었다.
또래가 보이는 선의에 진단랑도 마음이 흔들렸지만, 어머니와 언니의 당부가 생각났다. 진단랑은 결국 고개를 가로저으며 감사 인사를 표했다.
“앞으로는 언니와 자주 올 거예요. 다음에 갈게요.”
이공주와 삼공주는 서로 눈빛을 주고받고, 무언가를 말하려다 삼켰다.
“그럼 그렇게 해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공주가 진단랑 옆으로 오더니 손을 뻗어 진단랑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커다란 눈을 찡긋거렸다.
“십구랑.”
앳된 목소리의 사공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태후마마한테는 가지 마요. 거긴 태자가 있거든요. 엄청 무서…….”
사공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옆에 있던 이공주와 삼공주가 동시에 사공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 바람에 사공주는 말을 끝맺지 못하게 됐다.
“그럼 십구랑은 여기서 기다려요. 우린 이만 갈게요.”
이공주는 그 말만 남긴 채 진단랑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사공주를 잡아끌며 황급히 자리를 떴다.
“숙녕, 손 상궁이 말한 거 잊었어?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니까.”
“숙혜 언니가 왜 현비마마께 보내져 자란 건지 잊은 거야?”
나지막이 속삭이는 목소리와 함께 세 사람이 태후의 침궁을 떠나자, 측전은 고요를 되찾았다.
“낭자, 앉아서 차 드세요.”
두 궁녀가 미소를 지으며 차와 간식을 올렸다.
“고마워요, 언니.”
진단랑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두 궁녀는 더 밝게 웃으며 곁에 꿇어앉아 진단랑의 말벗이 되어 주었다.
한창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가 문에 쾅 하고 부딪히다시피 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아이가 가죽으로 만든 공을 손에 든 채 와아 하는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측전에 있던 이들은 갑작스러운 등장에 비명을 질렀고, 진단랑 역시 얼른 두 궁녀의 뒤로 숨었다.
“겁내지 마세요, 겁내지 마세요.”
궁녀들이 진단랑을 안아 주며 말했다. 그중 한 궁녀가 기둥 주변을 빙글빙글 도는 사람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서 잡아라, 어서!”
“전하는 왜 나온 거야?”
전하?
‘전하’라는 말을 들은 진단랑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궁녀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제 황궁에 ‘전하’는 한 분뿐인데.
그 전하라는 분은 신체 건장하고 힘센 내시 둘에게 허리가 붙잡혀 있었다. 달리기가 워낙 빠르다 보니 우악스럽게 붙잡은 통에 태자는 그대로 바닥에 나자빠지고 말았다.
쿵 하는 소리에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몸을 떨었다. 측전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울면 안 돼요. 울면 안 됩니다.”
바보는 울음소리 또한 정상인과 달라 괴이하게 들렸다. 진단랑이 다시 고개를 돌리고 쳐다보았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태자를 내시 몇 명이 마구 잡아끌며 일으키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태자는 일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며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거렸다. 측전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뭣들 하는 거냐. 어서 데려가라니까. 못 나오게 문단속 단단히 하라고 했잖아.”
진단랑 옆에 있던 궁녀가 진단랑을 다독인 후, 짜증을 내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태후마마는 조용히 쉬셔야 한다니까.”
“전하가 비명 못 지르게 해.”
“그 약 안 먹였어? 왜 또 멋대로 뛰어다니는 거야?”
두 궁녀가 툴툴거렸다. 순간 태자의 울음소리가 뚝 그치더니 웁웁 하는 소리만 났다. 진단랑이 고개를 돌리자, 내시가 태자의 입에 헝겊을 마구 욱여넣은 모습이 보였다. 궁녀들의 재촉 때문인지 발버둥 치는 태자 때문에 인내심이 극에 달한 탓인지, 내시들은 거칠고 우악스러운 동작으로 태자를 뒤로 끌어냈다.
뚱뚱한 태자는 웁웁 하는 소리를 내고 발버둥 치며 손을 마구 휘저었다. 화가 난 건지 답답한 건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더욱 무서워 보였다.
함부로 끌려나가다가 손까지 밟히고…….
진단랑은 저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었다.
바보인 사람은 통증도 못 느끼나?
두 궁녀도 앞으로 다가가 함께 거들었다. 한창 실랑이를 벌이는데 누군가가 공을 건네주었다.
“전, 전하, 이거, 말씀하시는 거죠?”
모두가 놀라 고개를 돌리자,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겁먹은 표정의 진단랑이 보였다.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내시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태자가 진단랑에게 확 달려들었다. 진단랑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고개를 돌리면서도 여전히 앞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손이 확 잡아 당겨지나 싶더니, 누군가가 공을 낚아챘다. 예상한 바와는 달리 때리는 등의 행동은 전혀 없었다. 상대는 하하 웃고는 괴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진단랑은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곧게 펴고, 저쪽으로 달려가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공처럼 둥글둥글하면서도 뒤룩뒤룩한 사람이 전각에서 기쁘게 뛰어놀고 있었다. 손에 든 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가 줍고, 다시 떨어뜨렸다가 또 주우면서.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야?”
이쪽의 소란을 들은 태후가 진십팔랑의 부축을 받으며 급히 다가왔다. 측전 문 앞에 선 태후는 돌연 걸음을 멈추고 놀란 표정으로 안을 쳐다보았다.
내시들과 궁녀들은 전부 서 있고, 놀랍게도 도통 제대로 앉아 있질 못하던 태자는 앉아 있었다. 몸을 배배 꼬고 뒤틀긴 했지만, 앉아 있는 건 분명했다.
그때 옆에서 공 하나가 굴러왔다. 전각에 괴성이 울려 퍼지더니, 바보가 손을 뻗어 공을 잡았다.
“전하, 이리 다시 주세요.”
진단랑이 태자를 향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손짓을 하며 이쪽으로 던지라는 신호를 보냈다. 맞은편에 앉은 태자가 손에 든 공을 밀어 주었다. 공이 이리저리 삐뚤빼뚤 굴러가자 진단랑이 얼른 손을 뻗어 잡았다.
“전하, 정말 대단하세요!”
진단랑이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맞은편에 있는 바보 태자도 따라서 박수를 치며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그 바람에 침은 더 많이 흘러내렸지만.
“아이고.”
태후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모습이었다.
“아, 아니, 저게 누구네 집 아이지? 태자와 어울려 놀 수 있다니.”
낯선 사람은 관두고 궁에서 늘 함께 지내는 내시와 궁녀조차도 저렇게 태자와 함께 논 적은 없었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본, 열두세 살 남짓한 어린 낭자가 바보와 함께 놀다니 놀랄 수밖에. 무서워하지도 않고.
태후 뒤에 선 진십팔랑이 눈을 살짝 내리깔고, 서글픈 눈빛을 숨기며 대답했다.
“제 동생, 십구랑이옵니다.”
탄핵을 하든 다른 벌을 내리든 진안 군왕으로서는 관심 밖이었다. 경성에 한바탕 거대한 풍랑을 일으킨 진안 군왕이지만, 진안 군왕부는 조용하기만 했다.
오늘 아침은 다소 시끄러웠지만.
“정말 옮기신대?”
반근이 소심에게 물었다.
“바로 옮기는 건 아니고.”
소심은 군왕부의 장부를 넘기며 말을 이었다.
“칠도 새로 하고, 칸막이도 설치하고, 새 가구도 들이고 하려면 못 돼도 중추절은 돼야 할걸.”
반근은 아, 하고 대꾸한 후 옆에 있는 쟁반에 놓인 해바라기 씨를 먹기 시작했다.
“한가해 보이네?”
소심이 물었다.
“아씨는 글씨 연습 중이고, 전하는 대청에서 쉬고 계시니, 나도 자유를 즐겨야지.”
반근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심이 장부 한 권을 던져 주었다.
“할 일 없으면 이거나 대조해 줘.”
반근은 피식 웃고 장부에 손도 대지 않은 채 해바라기 씨만 깠다.
“자유를 즐기겠다고 했잖아. 난 언니랑 달리 이런 일 못 해.”
두 사람이 한창 웃고 떠드는데, 어린 몸종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부인께서 전하를 급히 찾으세요.”
반근과 소심이 놀라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마당에 있는 어린 몸종들은 벌써 우왕좌왕하며 군왕을 찾으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전하께선 잠깐 누워 있다 나가셨어.”
“같이 간 사람이 있긴 해. 어디 가시는지는 안 여쭤봤고.”
나지막이 소곤거리는 목소리도 들렸다.
“무슨 일이야?”
소심이 시녀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아씨께서 글씨 연습을 마치고 나오셨는데, 전하가 안 보이자 찾으셨어요.”
붙잡힌 시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심과 반근이 멈칫하며 회랑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회랑에 선 정교랑이 문밖을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오매불망…….
소심의 뇌리에 불현듯 ‘오매불망’이라는 단어가 스쳤다.
“무슨 일이냐?”
소식을 들은 진안 군왕이 원래 지내던 처소 쪽에서 급히 달려오며 물었다.
“모르겠어요. 왕비께서 전하를 찾는다고만 하셨어요.”
시녀가 불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묻지 않고, 방금 찾은 나무 조각을 품에 넣어 고이 간직한 후 이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 문을 들어서기도 전에 회랑 아래에 선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오래 기다린 듯한 모습에 진안 군왕은 걸음을 재촉했다.
“무슨 일이에요?”
진안 군왕의 목소리엔 본인도 미처 감지하지 못한 긴장이 묻어났다.
“어디 갔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저쪽 대청에 갔었어요. 정리가 잘 되고 있나 보려고.”
진안 군왕의 대답에 정교랑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별일 아니에요. 그냥 어디 갔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진안 군왕뿐 아니라 마당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멈칫했다. 정교랑은 벌써 뒤돌아 대청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뭐야! 하루를 못 봤는데도 삼 년이나 떨어진 것 같다더니, 한시만 눈에 안 보여도 저리 당황하나?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리고, 직전의 긴장을 훌훌 털어 버린 채 가벼운 걸음으로 층계를 올랐다.
경 공공은 어이가 없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나는 중요한 일을 논할 때도 정신이 딴 데 가 있다가 빨리 말하라고 다그친 후 내쫓아 버리질 않나, 다른 하나는 잠시만 눈에 안 보여도 큰일 난 것처럼 굴지 않나,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다.
“됐다. 그만 일들 보거라.”
경 공공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시녀가 건네는 차를 받고 손을 휘휘 내젓자, 시녀가 얼른 자리에서 물러났다.
“잠이 안 와서 저쪽에 가 봤어요. 당신은 글씨를 쓰고 있으니까 방해 안 하려고 했죠.”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해도, 몸종들에게 언질 한마디는 해 줄 수 있었다. 다만 그 나무 조각을 찾으러 간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아 슬쩍 간 것이었다.
“갑자기 가 보고 싶어서요. 다음부턴 꼭 말할게요.”
규모가 큰 왕부가 아니었기에, 굳이 말하지 않아도 물어보면 금방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진안 군왕은 끊임없이 해명을 늘어놓았다.
어쩌면 아씨는 정말 군왕을 찾으려던 게 아닐지 몰라. 아씨께서 말씀하신 대로 별 뜻 없이, 그냥 어디 갔는지 물어보신 것일지도.
다만, 아씨의 입에서 그런 질문이 나오니, 듣는 사람의 생각이 달라질 수밖에.
왕비께서 군왕 전하에 대해 물으셨어. 왕비께서 군왕 전하를 찾으시는 거야.
군왕 전하는 어디 계시지? 어서 전하를 찾아봐. 왕비께서 지금 당장 군왕 전하를 만나시겠대.
반근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삐죽이며 웃었다.
“그래요. 그래야 만에 하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을 빨리 찾을 수 있잖아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날 걱정하고 있었네.
순간 진안 군왕은 마음이 따스해졌다.
생각해 보니 처음 만난 후로, 이 여인은 늘 자신을 걱정하며 도와주었다. 죽을 위기를 몇 번이나 넘긴 것도 다 이 여인 덕분이었다.
그러고 보면 난 이 여인 앞에서 늘 위험에 처하고 궁지에 빠진 모습만 보여 줬네. 기뻐할 만한 일은 전혀 없었던 것 같아.
이런 날 싫어하지 않기도 쉽지 않을 텐데.
“난 참 쓸모없는 놈이에요. 집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안 놓이게 하다니.”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아니에요. 당신은 아주 쓸모가 많은 사람이에요. 그러니 더 조심해야죠. 쓸모없는 사람이라면, 누군가가 당신을 해치려 애쓰지도 않을 거예요.”
사람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에게만 공을 들이는 법이다. 그게 잘해 주는 것이든 해치려 하는 것이든 간에. 누군가를 해치고자 한다면, 사랑할 때보다 배로 공을 들여야 하지 않던가.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당신도 칭찬할 줄을 아네요.”
아씨께서도 칭찬할 줄 아신다고?
반근은 이해가 안 가는 듯 고개를 돌려 소심을 쳐다보았다. 소심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듯 웃음을 보였다.
“정방, 이리 와요.”
진안 군왕이 동쪽 곁채 쪽으로 걸어가며 손짓하자, 정교랑이 따라갔다. 소심은 반근을 향해 눈짓하고, 함께 물러났다.
“방금 보니까 내가 지금 지내는 건물도 별로 안 좋은 거 같아요. 그냥 새로 짓는 게 낫겠어요. 이쪽에 가림벽을 치면 어떨까요?”
진안 군왕은 벌써 탁자 앞에 앉아 붓을 들고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정교랑은 옆에 앉아 조용히 이야기를 들으며 그림을 들여다보았다.
밝은 햇살 아래 젊은 남녀가 웃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아리따운 여인과 준수한 사내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소심의 입가에 번진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아씨께서 사람 마음을 저렇게 잘 달래시는지 미처 몰랐네.”
소심이 소곤거리자, 반근이 소심을 힐끔 보며 혀를 찼다.
“아씨는 원래 그 누구보다 배려심 많은 분이야.”
배려심이 많아서, 무언가를 설득하거나 강권하지 않고, 상대가 어떻게 생각하든 따지거나 해명하지 않으시지.
그런 종류의 배려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아씨께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이 아씨의 좋은 점을 느낄 수 있지.”
소심이 웃으며 반근의 코를 톡 쳐 주었다.
반근과 소심이 휘장을 들고 문밖의 회랑 아래로 나왔다. 안에서는 진안 군왕의 낭랑한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고, 정교랑이 짤막하게 대답하는 소리도 이따금 들려왔다. 그래도 진안 군왕은 신이 나서 계속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같은 시각 진 노태야의 방도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할아버지, 이것도요. 그리고 이것도 태후마마께서 상으로 주셨어요.”
진단랑이 홍마노를 내려놓고 다른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싱싱한 과일이며 간식들이 한가득 들어 있었다.
“공주님들의 말씀으로는 새로 진상한 거래요. 저더러 같이 먹으러 가자고 하셨는데, 어머니 말씀이 기억났어요. 예의 바르게 초청한다고 해서 무조건 가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참, 태후마마께서 이것도 상으로 주셨어요.”
진단랑의 맑은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할아버지, 여기 수정병도 있어요.”
진 노태야는 진단랑의 말을 흐뭇한 표정으로 들었다. 이따금 맞장구를 치며 칭찬도 해 주고, 태후마마께 감사 인사는 올렸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감사 인사도 올렸죠. 큰절을 올리며 머리를 조아렸어요. 조금의 실수도 없었다며 언니도 칭찬해 줬는걸요.”
진단랑이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단랑이 그리 열심히 배웠으니, 실수할 리가 있나.”
진 노태야도 칭찬을 해 주자 진단랑은 헤헤 웃음을 터트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꿇어앉으며 물었다.
“아씨, 이것들을 정리할까요?”
진단랑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가 정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단랑이 돌연 손을 뻗어 붙잡았다.
“조부님.”
진단랑은 고개를 들어 진 노태야를 보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네 물건이니,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거라.”
진 노태야는 진단랑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번에 알겠다는 듯 자애롭게 웃어 주었다. 진단랑이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며 간식과 과일이 든 함을 가리켰다.
“그럼 이것들은 정 언니한테 보낼래요. 정 언니는 간식 만드는 걸 좋아하니까, 먹는 것도 좋아할 거예요.”
그러던 진단랑이 돌연 한숨을 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은 익살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어쩐지 안타까워 보이기도 했다.
“언니한테 들었는데, 군왕께서 태후마마의 심기를 건드렸다면서요. 태후께서 군왕 부부는 입궐도 하지 말라고 하셨대요.”
진 노태야가 웃음을 터트렸다.
“정 언니 쪽에선 그런 거 신경도 안 쓸 게다.”
옆에 있던 노복이 가벼운 헛기침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무리 집 안이라 해도 아이 앞에서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입에 올리는 건 안 될 일이었다.
진 노태야는 웃으며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주고 싶으면 갖다 주려무나.”
잠시 후 진 노태야가 말했다.
기뻐하며 시녀에게 어서 포장하라고 명하던 진단랑은 또다시 손을 멈추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조부님, 이래도 괜찮을까요? 태후마마의 물건을 정 언니한테 줬다고, 언니가 기뻐하지 않으면요?”
진 노태야가 진단랑을 쳐다보았다.
“태후마마께서 네게 상으로 주셨으니, 이젠 네 것이지 않느냐. 네 물건을 정 언니한테 주는 거야. 대답해 봐라. 정 언니가 기뻐하겠느냐, 기뻐하지 않겠느냐?”
진단랑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기뻐하죠!”
진단랑이 시녀의 손에서 빼앗으려던 함을 얼른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대답했다. 그러고는 정교랑에게 줄 선물을 진지하게 골랐다.
“이게 좋겠다. 이것도 좋고…….”
진 노태야는 그런 진단랑의 모습을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 다음, 노복을 시켜 진단랑이 심사숙고 끝에 고른 선물을 진단랑의 시녀와 함께 가서 직접 전하도록 했다.
노복이 자리를 떴는데도 진단랑은 여전히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언니는 저한테 어떤 맛있는 걸 줄지 모르겠네요.”
진 노태야가 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일부러 놀리듯 말했다.
“이제 보니 언니의 답례가 탐났던 게로구나.”
“그야 당연하죠. 제가 정 언니한테 잘해 주면, 정 언니도 저한테 잘해 주는걸요.”
진단랑이 헤헤 웃으며 대답하자 진 노태야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진단랑이 또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