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사색-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문밖에서 몸종들이 일제히 예를 올렸다.
진안 군왕은 서둘러 바른 자세로 고쳐앉았다가,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다시 재빨리 팔걸이의자에 등을 붙이고 골똘한 표정으로 찻잔을 들었다.
“밤참은 지금 드시겠어요?”
소심이 정교랑에게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밤참은 드셨는지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가까이서 들리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온 정교랑은 이미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뒤였다. 치마저고리는 평소와 같은 암청색이었지만, 장미꽃 같은 진한 보라색 치마를 입은지라 전보다 훨씬 화사해 보였다.
신혼은 신혼이네.
사실은, 이 여인도 내심 신혼을 몹시 중요하게 여기는 거겠지? 그러니까 옷차림도 저리 신경을 쓰는 거고.
진안 군왕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직요. 잠시 쉬고 있었어요.”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물었다.
“왜 아직도 옷을 안 갈아입었어요?”
“좀 힘들어서요. 일단은 조금 쉬려고요.”
진안 군왕이 편히 대답하고는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하자,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따라갔다. 진안 군왕은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시녀들이 가져다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내 물건들은 다 여기로 옮겼느냐?”
진안 군왕이 물었다.
“옷가지만 조금 가져왔습니다.”
시녀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은 더는 묻지 않고 욕실을 나섰다.
정교랑은 연자줏빛 내의를 입은 채로 침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다가오자, 반근이 서둘러 보양탕이 담긴 그릇을 그에게 건넸다.
“이 태의가 뭐라고 하던가요?”
진안 군왕이 그릇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정교랑의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의 약 처방에 관해서 이야기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약을 더 먹어야 합니까?”
정교랑이 책을 내려놓고 진안 군왕을 보며 웃었다.
“약 먹는 게 무서워요?”
진안 군왕이 풉 하며 웃고는 수저도 쓰지 않고 보양탕 그릇을 통째로 들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당신 것은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난 약을 먹을 필요가 없어서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보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지금 날 놀리는 건가? 누굴 놀릴 줄도 아는 사람이었군.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미처 몰랐던 면을 점점 더 알게 되네.
“그래도 이 약은 꽤 맛있네요.”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그릇에 남은 보양탕을 마저 들이켰다. 차를 가져온 시녀가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에게 차를 바치자, 진안 군왕이 차를 머금고 입을 헹궜다.
“시간이 늦었어요. 종일 피로했을 텐데, 일찍 쉬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일찍 쉬자는 말에 당황했는지, 진안 군왕은 입을 헹구던 차를 꿀꺽하고 삼켜 버렸다.
방 안의 시녀들이 서둘러 예를 표하며 물러났고, 소심은 잠시 주춤했다.
“야간 당직은 필요 없어. 그러니 너희도 그만 가서 쉬어.”
정교랑이 말했다. 소심과 반근이 서로 마주 보고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바깥의 등불이 하나둘씩 꺼졌다.
“집에 있을 때도, 누가 야간 당직 서는 걸 싫어했어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나도요.”
진안 군왕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고, 곧 묘한 긴장감이 채워졌다.
“오늘, 또 하나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침상으로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그때 은은한 등불 빛이 정교랑의 얇은 연자줏빛 여름 내의를 비추었다. 가벼운 재질의 내의 아래로 부드럽고 매끈한 새하얀 속살이 비쳤다.
진안 군왕이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하, 참 잘됐네요.”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는, 어깨를 돌리고 팔을 펴면서 홀가분한 척을 했다.
“드디어 안 아파도 되겠어요. 모처럼 잠을 푹 잘 수 있겠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건 모를 일이죠.”
등불이 꺼진 방 안, 진안 군왕이 눈을 힘껏 크게 뜨고 천장에 걸린 휘장을 바라보았다. 옆에 누운 정교랑은 밖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기에, 조금 전처럼 서로의 몸이 닿는 일은 없었다.
진안 군왕은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아주 조금 스친 것일 뿐인데, 저도 모르게 몸을 안쪽으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진안 군왕이 재빠르게 몸을 피하자, 정교랑도 몸을 옆으로 돌려 누웠다.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진안 군왕이 밑도 끝도 없이 말하자, 옆에 누워 있던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진안 군왕은 입을 닫자마자 곧바로 자신이 한 말을 후회했다.
이 바보야, 그럼 정 낭자는 익숙하겠냐? 게다가 낭자는 무려 여인인데.
“내 말은, 몰랐다고요. 우리가 혼례를 치를 줄.”
진안 군왕이 잠시 뜸을 들이다 덧붙였다.
“꼭 꿈을 꾸는 것 같아요.”
“원래부터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에요. 그냥 이런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소를 지으며 한 손을 머리 뒤로 받쳤다. 그는 긴장해서 얼음처럼 꽁꽁 얼어버린 몸을 조금씩 풀며 자세를 편안하게 고쳤다.
“원래대로라면, 혼사는 참 좋은 일이어야죠.”
그런데, 우리의 혼사는 내가 독에 중독되어 곧 죽을 지경이었을 때, 동시에 정사낭이 기루에서 살해당했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 누군가의 계략이었음을 빤히 알면서도 시기를 놓쳐 흐지부지되었을 때 겨우 치러졌지.
게다가 태후마마 때문에 강제로, 심지어는 액막이라는 명목으로 다급하게 치러졌어.
이건 내가 생각해 온 혼인이 아니야. 그리고 이런 식으로 혼례를 올리고 싶지는 않았다고.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사실 당신이 이 혼인을 거절한다 해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당신이 정말 나와 혼인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어요.”
눈이 점점 어둠에 익숙해지자,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휘장의 색은 점차 푸른 빛을 띠었고, 곧이어 얇은 재질까지 눈에 보였다. 진안 군왕은 여전히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은은하게 퍼지는 익숙한 향을 맡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자, 옆자리에 누운 정교랑의 굴곡진 등허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하긴, 만약 정 낭자가 원하지 않았다면, 태후가 아무리 압박한다고 하더라도 낭자는 혼사를 치르지 않았겠지.
그런데 왜 동의했을까? 더군다가 그런 상황에서.
진안 군왕은 심장이 더욱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고는, 심호흡을 하며 손을 머리 뒤에서 빼내 조심스럽게 가슴 위에 얹었다.
“진작 끝난 얘기 아니었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을 등지고 누워서인지, 정교랑의 목소리가 조금 낮고 침울하게 들려왔다.
일찍이 혼인을 약조하긴 했지. 내가 청혼했을 때, 정 낭자도 좋다고 했고.
하지만 그땐 지금과 상황이 달랐잖아. 그때만 해도 난, 내가 정 낭자에게 이렇게 해를 입힐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정사낭이 나 때문에 죽을 줄은 더더욱 몰랐고.
“이미 정한 건데,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어디 있어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정 낭자는 뭐든 결정을 내리면 번복하는 일이 없고, 무슨 일이든 한번 말한 건 반드시 실행에 옮기며,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보는 사람이다. 그게 도리라는 건 나 또한 잘 알지만…….
진안 군왕이 다시 손을 머리 뒤로 넘겼다. 왠지 모르게 휘장 안이 조금 답답하다고 느껴져 그는 옆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침상은 커 봤자 침상일 뿐이었다. 두 사람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크기인지라, 몸을 뒤척이던 진안 군왕은 허리에 얇은 이불을 덮고 몸을 옆으로 돌린 채 누워 있던 정교랑을 품에 안고 말았다.
화들짝 놀란 진안 군왕은 재빨리 뒤로 몸을 옮기려다, 쿵 소리를 내며 침상 끝쪽 난간에 부딪혔다.
“왜 그래요?”
정교랑이 물어보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무것도.”
진안 군왕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는 자꾸만 불에 덴 듯 튕겨 나가는 자신에게 화가 났지만, 서둘러 바른 자세로 눕고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말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자요.”
정교랑은 더는 묻지 않고 다시 옆으로 몸을 뉘었다.
괜히 내가 먼저 말을 걸어 놓고, 또 나 혼자 난리를 치고 있네. 정 낭자는 거의 잠들기 직전이었을 텐데.
진안 군왕이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려 눕고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는 한참을 꼼짝하지 않고 누워있다가, 몸이 저리기 시작할 때쯤에야 서서히 긴장을 풀고 편한 자세로 누웠다.
옆에 누운 정교랑은 깊이 잠들었는지 고른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정 낭자는 하나도 불편하지 않은가 보네. 내가 이틀 동안 죽은 듯이 잠들었을 때, 낭자는 멀쩡한 정신이었으니 이젠 익숙해진 건가.
하긴, 익숙하지 않을 건 또 뭐야. 첫날밤에는 내가 굳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온 것이니.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옆으로 누운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짙은 어둠과 한데 섞인 정교랑의 까만 머리카락이 보였다.
사실 그날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대청으로 나가 맞절을 한 뒤에 합환주를 마셨고, 그 뒤로는 거의 의식을 잃었다. 한참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꼭 눈 깜짝할 새가 지난 것 같았고, 현실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 선생이 왜 자신을 따돌렸냐고 경 공공과 이 태의를 욕하던 상황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이 한바탕 꿈을 꾼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태로 정말 혼례를 올렸을 줄이야.
그때 나는 생각했지. 오늘 정 낭자와 혼례를 올렸다니. 신혼 첫날밤이면 동방화촉을 밝혀야지, 신부 혼자 독수공방하게 할 수는 없지, 하고.
그래서 난 일부러 괴롭다고, 아파서 죽을 거 같다고 말고, 이 태의와 아경이 나를 신방으로 옮겨야겠다고 통 사정한 덕에 고 선생도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웠는지 그러라고 말했어.
그 뒤로는 정말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온몸이 아팠고, 너무 아파서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였어. 나는 엄살이 심한 편도 아니고, 아픈 것도 꽤 잘 참는 편인데, 그때는 정말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너무 아팠어. 그랬더니 내 입에 하얀 천 같은 무언가를 쑤셔 넣었던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질 않네.
아니, 그런데 감히 내 입에 천을 쑤셔 넣어?
진안 군왕이 옆에 누운 정교랑을 보면서 실소를 터트렸다.
용케도 그런 생각을 했네.
웃고 또 웃던 진안 군왕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나를 불편하게 할 수는 없어요.
그놈들은 정 낭자를 계략에 빠트리고, 정 낭자의 가족을 죽였어. 그리고 태후는 정 낭자에게 액막이를 이유로 들며 나와 강제 혼사를 치르게 했지. 하지만 액막이는 그저 빌미일 뿐이었어. 실은 내가 죽으면 같이 순장시키려고, 내 죽음을 핑계로 정 낭자를 같이 죽이려고 혼사를 치르게 한 거야.
물론,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 의미도 없어. 그놈들의 바람대로 정 낭자가 나와 혼례를 올렸지만, 일은 그놈들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으니까.
이 또한 결국 그 어떤 것도 정 낭자를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
낭자는 태후마마의 교지를 거역하고, 이번 혼사를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아도 일은 순조롭게 풀렸고. 정 낭자를 계략에 빠트렸던 사람들은 바라던 바를 이루지 못했고, 나도 정 낭자 덕분에 살아남았어.
그럼, 이렇게 된 것이 결국엔 좋은 일인가?
하긴, 만약 그놈들이 바라던 대로 이뤄졌다면, 이 혼인 자체가 성사되지도 않았겠지.
그런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진안 군왕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아, 괜히 내가 잠을 깨우는 건 아닐까.
진안 군왕이 손을 재빨리 거뒀다.
그래도, 머리카락 조금 만진다고 해서 깨지는 않겠지? 머리가 엄청 길잖아. 여기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은 만져도 아무 느낌 없을 테니 괜찮을 거야.
진안 군왕이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뻗었다. 정자세로 누워 정교랑을 만지기에는 불편했는지, 그는 조심스럽게 정교랑이 누운 쪽으로 몸을 조금 더 가까이 가져갔다.
두 사람의 베개는 바짝 붙어있는 상태였다. 게다가 진안 군왕의 자세 때문에 두 사람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코끝을 스치던 은은한 향이 더욱 진해졌다.
그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정교랑의 옆으로 베개를 더욱 가까이 옮기고, 베개 아래로 손을 넣어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진안 군왕의 머릿속에 갑자기 여러 가지 생각이 뒤엉켰다. 내일은 무얼 해야 할지, 정교랑이 이 방에서 지내기가 불편하진 않을지, 왕부 내에 조금 더 큰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건 어떨지 같은 것들을 신나게 생각하다가, 다시금 이 모든 것들이 괜히 정교랑을 번거롭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진안 군왕의 눈꺼풀이 점점 더 무거워지더니, 결국 눈이 감겼다. 그는 정교랑의 뒤통수에 머리를 대고 저도 모르는 사이에 까무룩 잠들었다.
사람들이 가장 깊이 잠들기도, 가장 졸리기도 할 동이 틀 무렵의 시간. 이때, 누군가가 이 태의가 묵는 거처 앞을 조심스럽게 지나갔다.
마당 안에서 소리 내며 울던 벌레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가 다시 시끄럽게 울기 시작했다. 모든 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아침이었다.
귓가에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금세 멈췄다. 진안 군왕은 몸을 뒤척이고 또다시 깊은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누군가의 손이 그의 손을 가벼이 쓰다듬다가 무언가에 걸린 듯 미끄러졌다. 순간 눈을 번쩍 뜬 진안 군왕은 정교랑과 눈이 마주쳤다. 새벽빛 속에 반짝이는 검은 두 눈이 그를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벌떡 일어나 앉으려 했지만, 정교랑이 손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그의 몸 아래로 깔린 머리카락을 빼냈다.
“아직 새벽이에요. 좀 더 자요.”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으로 진안 군왕의 얼굴을 쓸어 보았다.
“역시 아프니까 좀 조용히 자네요.”
검고 반짝이는 두 눈이 밝게 빛났다.
또 나를 놀리고 있어!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른 진안 군왕은 손을 탁 풀고 도로 누웠다.
“혼자 자야 조용히 자죠. 시끄럽게 하지 마요.”
정교랑은 말없이 미소를 짓고는 침상에서 내려와 휘장을 내려 주었다.
밖에서 시녀가 나지막이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자, 진안 군왕은 귀를 쫑긋 세웠다. 정교랑이 욕실에 들어가 간단히 몸을 씻은 다음 옷을 갈아입고 나오는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바깥에 있던 시녀는 벌써 맞은편 대청 벽에서 장궁을 꺼내 들고 있었다.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고요해졌다.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이던 진안 군왕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날이 훤히 밝았을 무렵이었다. 휘장을 들어 올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경 공공이 보였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고단하실 거라며 더 주무시랍니다.”
경 공공이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눈으로 진안 군왕의 몸을 이리저리 훑었다. 귀여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안타까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딘지 모르게 뿌듯해하는 것 같기도 한, 아무튼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눈빛이었다.
진안 군왕은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아이고, 조심하셔야죠.”
경 공공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진안 군왕은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인지 눈은 여전히 뻑뻑한 감이 있었다.
경 공공이 진안 군왕 앞으로 약차를 올렸다.
이것도 그 여인이 특별히 날 위해 우린 거겠지?
진안 군왕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손을 뻗어 찻잔을 받았다.
“전하.”
경 공공이 바짝 다가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이 밤새 달였사옵니다.”
거무스름한 진안 군왕의 눈가를 보자 경 공공은 마음이 아팠다.
“원기를 보하는 것이니, 어서 쭉 들이켜시지요.”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 손에 든 찻잔을 보며 물었다.
“네가 달였다고?”
여부가 있겠습니까.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쩡하기만 한데 무슨 원기를 보한다고.”
진안 군왕은 손에 든 찻잔을 도로 내려놓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난 아무거나 안 먹는다.”
이게 어떻게 아무거나란 말씀입니까.
경 공공은 초조해졌다.
“전하, 전하는 아직 춘추 미령하여 잘 모르시겠지만, 이런 일에 젊음만 믿고 몸 생각을 안 하며 제때 원기를 보하지 않으면 큰일 나십니다.”
도통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원.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열려는데, 마당 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부인, 큰일 났어요.”
정교랑이 문 안으로 들어서자 시녀 하나가 황급히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진안 군왕은 즉시 일어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당에는 이 태의가 울상을 짓고 서 있었다.
“늙었구먼, 늙었어. 약을 달이다가도 깜박 잠이 들다니.”
이 태의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린 내시들이 물통에 있는 물을 끼얹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연기마저 사그라들었다.
“부뚜막이 좀 탔을 뿐인걸요. 사람만 무사하면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건 단순한 부뚜막 문제가 아닙니다.”
집사 하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거운 표정을 지었다.
이곳은 군왕부의 안마당이고, 바로 옆에 진안 군왕의 대청이 있었다. 오늘 부뚜막이 탔다면, 내일은 마당 전체가 탈지 모를 일이었다.
“이만한 일은, 딱히 큰일이라 할 수도 없지.”
뒤쪽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가 황급히 몸을 돌리고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여전히 손에 활을 들고 있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어서 정리들 해라.”
진안 군왕이 뒤돌아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일을 덮겠다고 했으니, 정교랑도 굳이 따지려 들지 않았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따라 들어가 씻고 옷을 갈아입자, 아침상이 준비되었다.
“내 왕부는 이래요.”
진안 군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가만히 내려놓고 진안 군왕을 보며 귀를 기울였다.
“여기뿐 아니라 예전에도 그랬어요. 어디서나 똑같았죠. 이런저런 사람들이 곁에 섞여 있었어요. 오고 싶은 사람은 오고, 가고 싶은 사람은 갔죠.
내 옆에는 바람이 새는 벽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무슨 색깔 내의를 입는지조차 밖에서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 알아낼 수 있어요.”
풉 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서 있던 반근이 웃음을 터트리다 말고 얼른 입을 가렸다. 정교랑도 따라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죠. 폐하께서는 경성 밖에 있는 친왕들의 일거수일투족까지도 빠짐없이 소상히 알고 계세요. 황궁에서 자란 데다 친왕의 아들이기도 한 당신한테야 오죽하겠어요?”
진안 군왕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 여인과 이야기하면 늘 이렇게 가볍고 마음이 편했어.
“남 앞에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할 일은 없으니, 드러내요. 보고 싶으면 보라죠.”
정교랑이 말했다.
보여 주고 말고는 내 일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꿰뚫어 볼 수 있을지는 내 소관이 아니지.
진안 군왕은 또다시 웃음을 터트리고, 한결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반찬을 집어 입에 넣었다.
“어서 먹어요. 난 경왕이랑 같이 지내느라 밥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게 습관이 됐어요. 안 그럼 경왕이 잠시도 제대로 앉아 있질 못하거든요.”
정교랑이 내려놓은 젓가락을 보며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입을 열 때부터 정교랑은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려놓고 있었다.
얼핏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작에서 그녀의 예법이 드러났다. 의식하고 행동하는 게 아닌, 자연스러우면서도 편안한 움직임이었다.
“난 앉아 있을 수 있어요.”
정교랑의 말에 진안 군왕도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은 말없이 젓가락을 들었다.
반근은 웃음기를 감출 수 없는 눈으로, 머리를 맞대고 마주 앉아 밥을 먹는 부부를 바라보았다.
밥을 먹고 나니 경 공공이 이 태의와 함께 들어왔다.
“몇이던가?”
진안 군왕은 두 사람을 힐끔 보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경 공공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왕부의 안마당까지 들어 올 수 있으면서 이 태의 곁을 지킬 수 있는 내시라면 전부 고르고 고른 자들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하나씩 줄고 또 줄었기에, 남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매번 하나씩 줄어들 때마다 분노가 이는 동시에 가슴 아픈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본왕을 노렸으면서 약을 태우다니 아둔하군. 약을 더 넣었어야지.”
진안 군왕이 웃으며 말했다.
“전하의 약 때문이 아닌 듯합니다.”
이 태의가 소매 속에서 함 하나를 꺼내며 말했다.
저건?
진안 군왕과 경 공공이 놀란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부인, 제가 몸에 늘 지니고 다녔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았지요.”
이 태의가 말했다. 정교랑이 손을 뻗자 소심이 이 태의의 손에서 함을 받아 정교랑에게 건넸다.
“열어서 세어 봤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이 태의의 안색이 싹 변했다. 탁 소리와 함께 정교랑이 함을 열었다.
“두 개네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자, 이 태의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대청 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넓고 환한 대청 안.
고능준은 손수건으로 감싼 가느다란 암홍색 향을 두 손가락으로 집어 햇빛에 대고 이리저리 비춰 보았다.
“이거란 말이지?”
“네. 자세한 내용은 듣지 못했지만, 군왕을 해독하는 일과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고능준의 물음에 막료가 대답했다.
“향으로 해독을 한다?”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종이 연 하나로 벼락도 불러오지 않습니까.”
하긴. 기괴한 방법을 많이도 아는 여인이니까.
“물건을 보내온 자가 경 공공의 분부로 신방의 향내를 확인하는 일에 직접 참여했다고 합니다. 향을 입수한 후 냄새를 맡아 보고는 이 향이 틀림없다고 확인해 주었고요.”
측근이 말을 덧붙였다. 냄새를 맡아 보았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코를 가져다 대던 고능준은 코 앞에서 얼른 동작을 멈추었다.
“이게 무슨 향인지 알아내라.”
고능준은 함에 향을 도로 담고, 손수건도 아무렇게나 던져 버렸다.
“알아내면, 약을 가감할 방법도 논의하고.”
막료가 멈칫했다.
“대인, 그 약을 계속 쓰시겠단 말씀입니까? 저쪽에서도, 대비를 할 텐데요?”
“그러니 이 향이 무엇인지 알아내라는 걸세. 상극에 맞춰 약을 가감해야지.”
막료는 고능준의 말을 대번에 알아들었다.
승부수를 던지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상대방은 대응 방식을 바꿔 대비할 텐데, 우리는 계속해서 같은 방식으로 공격할 수는 없지. 그렇다면 상대방의 새 대응 방식은 통하지 않을 테고, 옛 방식을 다시 쓴다 한들 상극에 맞춰 가감했으니 그 또한 통하지 않겠지.
“네.”
대답을 마친 막료는 향 두 개를 들고 물러났다.
대청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나가자 고능준도 회랑 아래로 나왔다. 눈부신 햇빛 아래 늦여름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서늘하기만 했다.
내가 너무 방심한 탓에 성공을 눈앞에 두고 어그러졌구나. 무언가를 한다는 게 이렇게 어려운 일일 줄이야.
그때 사환 하나가 황망한 표정으로 급히 달려왔다.
“대인, 노부인께서 또 기침이 심해지셨습니다.”
사환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고하자, 고능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고능준의 부친은 진작 세상을 하직했다. 그때만 해도 고능준의 관직은 중요하다고 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기에 집에서 마음 편히 삼년상을 치르며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모친은 늘 정정했지만, 아무리 정정하다 해도 여든 노인이었다.
좀 더 일찍도 아니고, 좀 더 늦게도 아닌, 하필 지금 같은 때에…….
말하자면 운이 안 좋았다. 월식 때 진소의 함정에 빠진 후로는 뜻대로 풀린 일이 하나도 없었다.
황제, 평왕, 귀비, 태후에게 연달아 일이 터졌고, 매번 그 규모가 커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중 한 가지 일만 겪어도 혼란에 빠져 어쩔 줄 몰랐으리라.
그래도 그렇지, 재수가 너무 안 좋은데.
모친의 건강만 해도 그랬다. 본디 정정한 분이었는데, 모친의 병환을 핑계로 대며 부임지에서 경성으로 돌아온 후부터 차츰 건강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래서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기가 무섭게 고능준은 얼른 마음을 다잡았다. 그는 운이니 예언이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이 하는 일이니, 일을 성사시키는 것 또한 사람일 뿐. 그 어린 여인이 괴상한 짓을 많이 저지른다고 해서, 아둔한 이들처럼 덩달아 허튼 생각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기 시작하면 행동에 제약이 생기기 마련이야. 나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주저하거나 위축되는 부분이 생긴다면 이는 곧 큰 화로 이어질 공산이 커.
이 모든 건 사람의 계산으로 이루어진 일일 뿐이다. 사람은 누구나 계산할 수 있다. 누가 더 계산을 잘하느냐, 그 차이가 있을 뿐.
“어머니를 뵈러 가야겠다. 어느 태의를 불렀느냐?”
심호흡을 하고 난 고능준은 표정을 수습하고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고능준이 막 발을 떼던 그때, 누군가가 헐레벌떡 달려 들어왔다.
“아버지, 아버지, 큰일 났습니다!”
고 관인이 소리쳤다. 고능준은 순간 숨이 쉬어지지 않아 옆에 있던 사환을 확 붙잡았다. 고 관인 역시 부친의 안색을 보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간신히 숨을 고른 고능준이 인상을 찌푸리며 무거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냐?”
고씨 저택의 서쪽에 위치한 건물 앞에 여러 사람이 서 있었다. 문은 열려 있었지만 감히 그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없었다.
“아무 움직임도 없이 저렇게 죽어 있었습니다.”
고 관인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린 채 안쪽을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안에는 사람 서너 명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엎어져 죽은 사람 주위로는 바닥에 피가 흥건했고, 천장을 보며 누워 죽은 사람은 푸르뎅뎅한 얼굴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일곱 구멍에서 피를 쏟은 상태였다.
고능준이 곁눈질로 힐끔 보며 손에 든 손수건을 내리려 할 때였다.
“대인, 안 됩니다.”
옆에 있던 이가 불안한 표정으로 황급히 말렸다.
“벌써 반나절이나 지났는데, 일이 생길 거였으면 자네들도 지금 이 자리에 못 서 있었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고능준은 더 이상 손수건을 내리지 않았다.
“향 한 개를 빻았는데, 너무 잘게 빻은 탓에 한 가지 약밖에 못 알아냈습니다. 그러자 고(古) 선생이 불을 붙여 향을 맡아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야 더 정확하게 판별할 수 있다면서요. 처음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차 한 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그만…….”
“독인가?”
고 관인이 코와 입을 가린 채 물었다. 이미 고능준의 서재로 돌아온 후인데도, 고 관인의 손수건은 내려올 줄을 몰랐다.
무슨 향인지 알아내고자 이리저리 살필 때, 고 관인도 구경 삼아 그 자리에 있었다. 사환이 와서 차를 다 우렸다고 하지 않았다면, 마침 새로 배합한 차가 아니었다면, 혹 냄새가 섞이진 않을까 염려되지 않았더라면, 그는 차를 그리로 가져오게 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쯤 고 관인 자신 또한…….
이리저리 널브러져 죽어 있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떠오르자 순간 오싹 소름이 돋았다.
죽음을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집안 아랫것들을 아무렇게나 패 죽인 일도 많았고, 밖에서도 심기를 건드리거나 눈에 거슬리는 자가 있으면 은밀히 자객을 고용해 해치운 일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남의 죽음일 뿐, 고 관인 자신의 죽음과는 무관했다.
고 관인은 죽음이 자신과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것도 이토록 소리 없이 다가와 있을 줄은.
그 생각만 떠올리면 고 관인은 온몸에 식은땀이 나는 것 같았다. 향내가 어렴풋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앞으로 바짝 다가가 가루가 된 향을 들여다봤잖아. 혹시 내 몸에도 이미 독이…….
손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던 고 관인이 갑자기 격렬한 기침을 시작했다.
“못난 놈!”
고능준은 고 관인을 향해 찻잔을 집어 던지며 썩 나가라고 했다. 고 관인 역시 그 자리에 멍하니 있기보다는 서둘러 태의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지라 서둘러 자리를 뜨려 했다.
“잠깐. 감히 태의를 찾아갔다간, 네놈의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주마.”
고능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순간 얼어붙은 고 관인은 울상을 지으며 뒤돌아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관인, 지금 저들은 누가 향을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관인께서 태의를 찾아가시면, 이는 곧 우리 소행임을…….”
막료 하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 방 먹었는데 꾹 참기까지 하라고? 우는소리도 못 내고?
고 관인이 분을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태의라 해서 안다는 보장도 없잖습니까. 이런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찾아가 보시지요.”
막료가 타이르듯 말했다.
약초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고씨 저택에도 있었다. 지금은 죄다 저쪽 건물에 죽어 있지만.
고능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 보거라.”
그 말이 곧 부친의 동의를 뜻함을 잘 아는 고 관인은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물론 여전히 초조한 표정이었다.
약초를 잘 아는 사람을 당장 어디 가서 찾는단 말인가. 찾는다 한들 잘 아는 사이도 아닌데, 어떤 사람일 줄 알고.
마음이 급해진 고 관인은 허둥대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했다. 사환이 얼른 부축해 주었지만, 열이 받은 고 관인은 사환에게 발길질을 하며 분을 풀었다.
대청에 있는 고능준 역시 부아가 치밀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쉽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고의로 독을 썼다고 단언할 순 없습니다. 고 선생도 유심히 살펴봤지만, 딱히 이상한 점을 찾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반응이 오자 고 선생은 버둥거리며 우리가 군왕에게 썼던 약을 드셨죠.”
독으로 독을 치료하는 이독치독(以毒治毒). 독이 든 향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쓴 약을 해독하는 기능이 있다면, 역으로 이 향에 중독됐을 때 우리가 쓴 약으로 해독할 수 있을 터였다.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급히 들어와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고 선생은 힘들 것 같습니다.”
안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역시 안 되는군요.”
한숨을 쉬던 막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 너무 늦게 써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 더 시험을…….”
시험해 보자고? 진안 군왕 쪽에 가서 향을 더 가져오라고?
“이렇게 된 이상, 우리가 가져가도록 저들이 고의로 내준 게 아니라 해도, 고의로 내준 것으로 만드는 수밖에.”
고능준이 냉소를 지었다.
고의로 향을 가져가게 하고, 고의로 향에 불을 붙이게 해서, 고의로 화를 자초하도록 했다는…….
고능준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몇이나 죽었지?”
고능준의 물음에 막료들의 표정이 암담해졌다.
“다섯입니다. 상 선생까지요.”
누군가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상 선생은 고능준이 가장 믿고 의지하는 막료 중 하나였다. 향을 살펴보겠다고 굳이 들어갔다가…….
약초를 다루는 이들 또한 고씨 가문에서 여러 해 동안 길러 온 고수들인데 이번 일로 한꺼번에 넷이나 죽고 말았다. 네 명이 많다고 볼 순 없지만, 그중엔 나머지 고수들의 스승 격인 고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 선생은 가히 일당십의 능력을 가진 숙련가였다.
어디 그뿐인가. 진안 군왕부에 심은 밀정 셋도 이번 일로 더 이상 못쓰게 될 것이다.
고능준의 말이 맞았다. 이 향이 정말 해독용이든 아니면 진안 군왕부 사람들이 이들을 속여 고의로 넘겼든 간에 이제 고씨 가문 사람들로서는 후자라고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상대에게 음모를 간파당하고 무서운 경고까지 받은 이상, 행동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모든 계획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은 참으로…….
“물러들 가게. 별일 아니야. 상대가 나를 알고 나 역시 상대를 아는 상태였어. 망사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있었을 뿐이지. 그렇다면 찢어져도 그만 아닌가. 호들갑 떨 것도 없네. 어차피 시간문제였으니.”
담담한 어조로 말하는 고능준을 보며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덩달아 고개를 끄덕였다.
“가 보게. 다른 건 서두를 필요 없어. 하나씩 해 나가면 돼. 우선 상 선생 등의 장례부터 잘 치르고 수습해야지. 노모와 자식들이 걱정 없이 살도록 잘 챙겨 주고. 상대가 돌멩이 하나를 던졌다고 해서 당황하여 허둥대서는 안 될 것이야.”
막료들이 알았다고 대답했다.
“입단속 잘하게.”
고능준이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남의 물건을 훔쳤다가 독살당한 건 떠벌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상대는 아직 누가 훔쳤는지 모를 수도 있는데, 괜히 소란을 키웠다간 스스로 정체를 폭로하는 꼴이 아닌가.
이번 일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속으로 삭이는 수밖에 없었다.
막료들은 다시 한번 알았다고 대답하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대청은 다시 고요를 되찾았다. 고능준은 팔걸이 의자에 기대 눈을 감았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고능준은 한참 만에 심호흡을 하고 눈을 번쩍 떴다. 탁자를 짚고 일어서려는데 손이 저린 느낌이 들었다.
고능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순간 자신의 손가락으로 향을 집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손수건을 덧대고 잡긴 했으나, 고능준 자신 또한 냄새를 맡아 보려 하지 않았던가.
얘기를 들어 보니, 향을 들고 냄새를 맡는 것까진 문제가 없으나 불을 붙이고 나면 죽는다고 했는데…….
하지만 그 여인은 독하고 잔인한 수법을 쓰는 사람이었다. 갑작스레 중풍을 얻은 유 교리에게 그 여인이 무언가 약을 쓰지 않았다고 단언하긴 힘들었다.
고능준은 자신의 손을 쳐다보았다. 저린 증상이 점점 심해지는 듯싶더니, 힘을 주려 해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똑바로 서는 것조차 힘들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고능준은 늘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고능준 자신마저 당황하여 허둥대면,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더욱 어찌할 바를 모를 테니까.
고능준은 심호흡을 하고, 어떻게든 몸을 지탱해 일어서려 애썼다.
“대인! 대인, 큰일 났습니다!”
급히 달려오며 자신을 불러대는 사환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순간 고능준의 몸이 굳어졌다.
“진안 군왕부에서 우리가 전에 말을 키우는 데 쓰라고 보낸 사환 몇 명을 돌려보냈습니다.”
그 일이었군.
고능준은 다시 긴장을 풀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전에 이런 일이 없었던 것도 아니고.
고능준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을 제대로 못 했으니 쫓겨온 게지. 우리 가문의 체면을 떨어뜨렸으니 마구간으로 데려가 패 죽여라.”
고능준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사환은 얼른 대답하지 않고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인, 이미 맞아 죽었습니다.”
뭐가 어째?
고능준은 멈칫했다.
“벌써 패 죽였습니다. 수레로 실어와 대문 앞에 버려두고 갔어요.”
사환이 우물쭈물하며 고했다.
패 죽이고, 대문 앞에 버려뒀다고?
이런 빌어먹을 놈을 봤나! 네놈이 감히!
고능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아 호흡이 가빠졌다.
“대인.”
막료 하나가 급히 다가왔다. 그 역시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었다.
“우리뿐만이 아닙니다. 여러 집 대문 앞에 버려졌답니다. 그뿐 아니라…….”
막료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고 말을 삼켰다.
“그뿐 아니라 뭔가?”
고능준이 물었다.
“황궁으로도 보냈답니다.”
막료가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황궁으로?
“내시 넷인데, 다리에서부터 허리까지 뼈 마디마디를 분질러 놨습니다. 간신히 숨만 붙은 상태로 수레에 실려 황궁으로 들여보냈는데, 마침 문을 나서던 태후마마께서 뜻하지 않게 그 광경을 목격하는 바람에 충격으로 쓰러지셨답니다.”
고능준은 몸을 떨었다.
“어찌 이런 일이!”
고능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일갈했다.
그렇게 된 내시를 어떻게 궁으로 들여보냈단 말인가! 게다가 뜻하지 않게 태후마마께서 그 광경을 목격하시다니! 이건 무슨 의미지?
“내궁의 황 공공이 죄를 시인하는 글을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습니다. 자신이 엄히 단속하지 못해 아랫것들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질렀다면서요.”
황 공공은 내궁에서 어린 내시들의 출입을 관리하는 태감이었다.
고능준은 하,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엄히 단속하지 못한 죄를 시인하고 자결했다? 진안 군왕과 짜고 태후마마를 겁박한 일은 죽을죄에 해당하는 걸 알고 깔끔하게 선수를 친 게 아니고?
대총관 위치에 있는 태감까지 목숨을 바쳐 진안 군왕에게 충성하다니!
내시가 매질을 당해 초주검이 된 건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놀라운 건 초주검이 된 내시가 태후 앞으로 보내졌다는 사실이었다.
이번엔 내시 몇 명이 보내졌다지만 다음번엔 무엇이 보내질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으랴.
고능준은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차츰 호흡이 가빠지면서 목에 무언가가 걸린 기분이 들어 기침을 하자 가래가 나왔다.
귓가에 놀라며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래 좀 뱉은 걸 가지고 호들갑은!
부아가 치민 채로 시선을 돌리던 고능준은 순간 멈칫했다. 바닥의 청석판 위로 핏덩이가 꽃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 피를 토하다니!
고능준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는가 싶더니 몸이 휘청였다.
“대인!”
주변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은 손에 든 함을 도로 닫았다.
“정말 안타깝네요. 겨우 두 개 가져갔어요.”
정말 안타깝다고? 그런데 ‘겨우’란 말은 또 뭐지?
반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
향 두 개를 훔쳐 간 일이 안타까운 게 아니라, 겨우 두 개밖에 안 훔쳐 가 안타깝다는 말 같잖아.
“이 태의 쪽에 두는 게 안전하지 않다면, 반근, 우리가 간수하는 게 낫겠어.”
말을 마친 정교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근은 얼른 대답하며 조심스레 함을 챙겼다.
황제의 침궁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더니 또 금세 잦아들었다. 문밖에 선 내시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아무 소리도 못 들었다는 듯이.
“마마, 정말이에요. 그때 태후가 어땠는지 못 보셨죠?”
안비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말했다. 웃음소리는 잦아들었지만 눈가에는 여전히 웃음기가 가득했다.
황후가 안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본인이 직접 본 것처럼 말하네.”
안비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상상만 해도 훤히 보이죠, 뭐.”
거기까지 말한 안비는 또 무언가 떠오른 듯 긴장한 채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이제, 마마께서 태후가 되실지도 모르겠어요.”
황후가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된다면야 좋겠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리 쉽다던가.
평왕이 죽고, 귀비가 미치고, 황제가 병을 얻는 충격을 받으면서도 죽지 않은 태후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내시들 몇 명을 보았다고 설마 그 충격에 죽을까 봐?
“태후께선 이미 깨어나셨네. 태후마마가 어떻든 본궁은 관심 없어. 본궁이 기쁜 것은, 진안 군왕의 병이 진짜로 좋아져서지.”
황후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좋아지면 좋아진 거지, 가짜로 좋아지는 것도 있나?
안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맞장구를 쳐 주었다.
“네, 맞아요. 정 낭자가 있는 한, 이제 군왕이 병을 앓는 일은 없을 거예요.”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군왕의 곁에 정 낭자가 있으니, 본궁은 이제 안심이야. 마음 푹 놓고 기다려도 되겠어.”
“뭘 기다려요?”
안비가 물었다. 그러자 황후가 안비를 힐끔 쳐다보았다.
“죽음을 기다려야지.”
진안 군왕의 병세가 좋아졌다는 소식은 금세 경성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직접 혼례까지 올린 걸 보면, 당연히 좋아진 거지.”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로 병자의 액막이를 했으니, 염라대왕께서도 한 수 접어 주신 게야.”
아래층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별실에 있던 이가 손을 뻗어 창문을 닫자, 바로 소리가 차단되며 조용해졌다.
“그럼 그때 태후께서 진안 군왕부에 왔을 땐 진안 군왕이 정말 죽었던 건가?”
별실 안에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별실 안에는 네다섯 사람이 앉아 있었다. 전부 소탈한 평복 차림이었지만 말투에서 느껴지는 기품이며 행동거지로 보아 관리 신분이 분명했다.
“그렇다니까. 옷까지 갈아입히려 했다더군.”
다른 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옷이라면 당연히 수의를 말함이렷다.
“죽은 지 그리 오래됐는데도, 정 낭자가 살려냈단 말이냐?”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죽은 척한 게 틀림없네.”
“범죄 혐의를 피하고자 미친 척하는 종친이 어디 한둘이던가. 죽은 척을 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지.”
모두가 왁자하게 웃고 떠드는 가운데 누군가가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죽은 지 한 시진 만에 살려낸 건 놀라운 일도 아니지.”
죽은 지 한 시진 만에 살려냈는데도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모두가 고개를 돌려 입을 연 사람을 쳐다보았다.
“정 낭자는 죽은 지 한나절이나 된 사람을 살려낸 일도 있거든.”
한원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한나절!
다들 놀란 표정으로 한원조를 쳐다보았다.
“그럼 원조 자네가 봤다는 말인가?”
누군가의 물음에 한원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고모님 일일세. 오 년 전 내 고모님은 안장하기 직전이었는데, 정 낭자가 살려냈어.”
자리에 있던 이들 모두 그런 얘기는 금시초문이었기에 다들 멍한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군.
“편작도 죽은 지 한나절이나 된 괵국(虢國) 태자를 살려내지 않았던가.”
누군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세상엔 오만 가지 병이 있으니 병을 치료하는 희한한 방법 또한 셀 수 없이 많을 거야.
“괵국 태자는 시궐(尸厥: 정신이 아찔하여 갑자기 쓰러져 인사불성이 되는 위급한 증상)이었고, 진안 군왕은 중독이잖나.”
“그래서 그게 뭐? 병을 치료할 수 있는데, 독인들 해독 못 할까?”
별실 안은 이런저런 논쟁으로 시끄러워졌다. 한원조는 미소를 머금은 채 가만히 들으며 술을 음미했다. 그때 옆에 있던 이가 바짝 다가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원조 형, 그럼 정 낭자와 오 년 전부터 알고 지낸 건가?”
한원조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웃었다.
“아닐세. 그땐 아직 정 낭자를 모를 때였어.”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순간 멈칫하여 한원조의 팔을 확 붙잡았다.
“그때는 아직 모를 때였다고?”
상대는 한원조의 말을 따라 하며 눈빛을 반짝였다.
“그 말인즉, 나중엔 정 낭자를 알게 됐고?”
나중엔…….
한원조는 술잔을 손에 쥔 채로 굳어졌다가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알게 됐지.”
한원조가 고개를 들었다.
“정씨는 만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모르는 사람이 있나?”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별안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가 다급히 들어왔다. 별실에 있던 이들은 들어온 사람을 보고 환호했다.
“자네 늦었구먼. 어서 이리 앉아. 벌주 석 잔부터 마시게.”
별실로 들어온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그만들 마시라고. 큰일 났어. 진안 군왕이 종복 열댓 명을 장살(杖殺)하여 관리들 저택의 대문 앞에 던져 놨대.”
장살!
종복을 때려죽이면 문책을 받는데! 그것도 한꺼번에 열댓 명이나 때려죽이다니!
별실 안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한원조가 술잔을 든 손을 움찔거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살인이라…….
“황당하군!”
진소가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지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안에 있던 시녀들은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고, 회랑 아래에 있던 시녀들과 여종들도 얼른 물러났다.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야!”
진소는 분이 가시지 않는 듯 손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쳤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으니 그럴 만도 하죠. 강요를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마신 건데, 그게 독주였으니…….”
거기까지 말한 진소 부인은 가엾어 못 견디겠다는 듯 손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 누구라 해도 견디기 힘들 거예요.”
“해도 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 법이오.
아랫것을 벌하려거든 율법을 따라야지, 멋대로 사람들을 장살하면 군왕을 해치려 했던 자들과 다를 게 뭐 있소? 국법을 무시하고 잔악무도한 짓을 저지른 것도 모자라 초주검이 된 내시들을 황궁으로 보내 태후마마를 놀라게 하다니! 대체 뭐 하자는 짓이야!”
“진안 군왕이 그리 잔악무도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늘 공손하고 예의 바른 분이었어요. 늘 친절하고 온화한 분인 걸 문무백관이 다 알죠. 어릴 때부터 귀여움을 받고 자랐잖아요. 이번 일은 분명 군왕의 뜻이 아닐 거예요.”
그 말에 진소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군왕의 뜻이 아니라고? 그렇다면…….
그렇지. 진안 군왕답지 않은 행동이긴 했어. 내 앞을 막는 자에게는 죽음뿐이라며 그리 잔인무도한 짓을 저지르는 건 분명…….
또 그 여인인가?
진 노태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병풍을 힐끔 쳐다보았다.
누군가가 손을 써 진안 군왕이 중독된 거라면, 다시 생각해 봐야 할 일이 있다. 이를테면 정사낭의 죽음이라든가.
진 노태야는 손을 뻗어 탁자를 쓸어 보았다.
같은 날 일어난 일이야. 사람이 죽는 건 드문 일도 아니지만, 그게 하필 정 낭자의 가족이었다면…….
역시 그랬던 게로군.
진안 군왕이 중독되면서 피해를 입은 건 진안 군왕 한 사람만이 아니었어. 무고하게 연루된 정사낭도 포함해야겠지.
정사낭은 살아 있는 사람이었어. 정 낭자가 천금을 주어서라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가족이었고.
진 노태야는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이 일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군.”
진 노태야는 느릿느릿 말하고 문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성문 밖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자비(無字碑)가 있는 걸 잊어선 안 되지.”
늦여름의 경성은 뜨거운 열기로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이번 화제의 중심은 정교랑 혼자가 아니었고, 진안 군왕이 더해졌다.
두 사람의 혼사에서 시작해 진안 군왕이 죽다 살아난 것도 모자라 정상으로 회복됐다는 소식이 다 전해지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중독은 누군가의 음모였고, 진안 군왕이 종복 열댓 명을 죽여 대신들의 집 앞에 뿌렸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본왕은 누가 본왕을 해치려 했는지 모르기에, 깔끔하게 죽여 버린 것이다. 어쨌든 본왕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않았으니 죽여 마땅한 놈들이지.
소문에 의하면 진안 군왕이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억울하게 죽는 이가 나올지언정 의심이 가는 놈은 단 한 놈도 살려 둘 수 없다며 죄다 죽이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 해도 남몰래 집에서 처리할 일인데, 시신을 남의 집 앞에 뿌려대기까지 했으니 그 잔악무도하고 오만방자한 행실에 모두가 혀를 내두를 수밖에.
노신 중 여럿은 황궁으로 달려가 무릎을 꿇고 폐하를 부르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조당이 시끄러워지고 온 경성이 들썩이면서 태후 앞에는 불과 하루 만에 탄핵 상소가 수북이 쌓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고능준이 침상에서 내려오려 하자, 침상을 지키고 있던 제국 부인과 첩실들이 울음을 터트렸다.
“노야, 어서 누우세요.”
고능준은 성가시다는 듯 이들을 밀쳐 냈다.
“괜찮다.”
방 안에 있던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휘장 밖에 있던 막료들도 고능준을 말릴 수밖에 없었다.
“태후마마께서 급히 대인을 뵙자고 하십니다. 겸사겸사 진안 군왕에 관한 대책도 물으시겠다면서요. 그냥 내시들에게 말씀을 전하시지요.”
막료의 말에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게 어디 말을 전해서 될 일인가? 상대는 태후란 말이다. 귀비가 아니라!
귀비는 고집 세고 자부심 강한 성격에 머리도 좋았다. 하지만 태후는 지금껏 순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안으로는 선황의 보호와 황제의 존경을 받았고, 밖으로는 고씨 가문이 든든하게 뒷받침해 주었으니, 지금과 같은 곤경에 처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
누가 몇 마디 한다고 해서 위로가 될 리 없었다.
“난 괜찮네. 태의도 말하지 않았던가. 열화가 치밀어 의식을 잃었으나, 피를 토했으니 별일 없을 거라고.”
제국 부인이 통곡을 했다.
“태의 말을 어떻게 믿어요. 상대는 정 낭자라고요. 십사도 지금 병석에 누웠어요!”
열이 받은 고능준은 하마터면 또 피를 토할 뻔했다.
신선의 제자로 명망을 얻은 그 여인을 두고, 조만간 큰코다칠 일이 있을 거라며 비웃곤 했다. 그래서 제재를 가하기보다는 어떻게 나오나 은근히 부추겼는데, 그 여인이 아니라 자신이 먼저 그 명성으로 인해 큰코다칠 일이 생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십사 그 녀석은 멀쩡하오. 태의며 의원도 다들 괜찮다는데, 그 녀석 혼자 끙끙 앓고 죽는소리를 하는 게야.”
고능준은 노기를 숨기지 않으며 호통을 쳤다.
“그놈을 당장 방에서 끌어내라. 어디 죽나 사나 내 눈으로 봐야겠다.”
고능준이 울고불고하는 여인들을 밀어내며 소리쳤다.
“마차를 준비해라. 입궐하겠다!”
소란스러운 바깥에 비에 이 모든 소란의 근원지인 진안 군왕부는 여느 때처럼 조용하기만 했다.
대청 안에서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회랑 아래에서 여종과 이야기를 나누던 소심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힐끔 쳐다보았다. 소심의 입가에 있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왕비 전하를 맞으신 후로, 전하께서 건강만 좋아지신 게 아니라 웃음도 많이 느셨네.”
집사 부인 중 하나가 말했다.
“맞아요. 왕비 전하는 마음을 활짝 열게 하는 재주가 있으시죠.”
소심이 눈웃음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가? 냉랭하고 말수도 적은 데다 활 쏘고 글씨 쓰고 책 읽는 것밖에 모르는 듯한 왕비에게 마음을 열게 하는 재주가 있단 말이지? 어떻게 마음을 열게 하는지 궁금하네.
집사 부인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그때 경 공공이 다급한 발걸음으로 다가왔다.
소심은 얼른 안에 대고 통보한 후, 안으로 들어가는 경 공공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또다시 진안 군왕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경 공공의 목소리도 들렸다.
“왕비 전하, 정말 대단하십니다.”
눈짓을 주고받은 집사 부인들은 소심과의 대화를 끝내고 예를 표한 후 물러갔다.
소심이 휘장을 들고 안으로 들어가자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동쪽에 마주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 공공은 신이 난 표정으로 떠들고 있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보내 예의주시했더니, 다른 집들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데 고씨 저택에서만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쉬쉬하며 숨기긴 했지만 어젯밤에 매장한 시체의 수가 우리가 보낸 시체보다 몇 구 더 많답니다.
그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 사이에 태의를 여러 번 불렀고 밖에서도 의원을 불러 갔답니다. 말로는 노부인의 병세 때문이라는데, 듣자니 고 관인과 고 대인의 몸도 편치 않다고 하더군요.”
경 공공의 얼굴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고 대인과 고 관인의 효심이 참으로 지극합니다. 듣자니 노부인께서 병을 얻으시자 근심하다가 병으로 쓰러졌다는군요. 가히 미담이라 할 수 있지요.”
진맥을 마친 후 아직 나가지 않았던 이 태의가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싱글벙글한 표정의 경 공공과 미소를 머금고 있는 진안 군왕에 비해, 천천히 차를 음미하는 정교랑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하기만 했다.
정교랑은 웃지 않고 있었지만, 이 태의의 눈앞엔 어렴풋이 미소가 번지던 정교랑의 그날 모습이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해란, 이런 일을 두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래. 전하께서 저들 손에 죽지 않으셨으니,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손해를 입었다고 볼 순 없지.
“이런 게 보이지 않는 손해군요.”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늦여름 오후였지만, 마당에는 매미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반근은 대청에서 조심스레 총채를 휘두르며 있지도 않은 모기와 벌레를 쫓았다. 그때 마당에서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경 공공과 고 선생 등이 물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문밖에 시립해 있던 시녀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휘장을 들어 올렸다.
“전하.”
반근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인사하며 얼른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주춤하며 내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께서는 아직 안 일어나셨어요.”
반근의 말에 진안 군왕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온 걸 후회하는 듯했다.
“그럼…….”
진안 군왕이 막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반근은 벌써 내실의 구슬발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전하도 들어가서 좀 쉬세요.”
진안 군왕은 또 아, 하는 소리를 내고 잠시 망설이다가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 주변에는 휘장이 내려져 있지 않았다. 담청색 내의 차림의 정교랑은 안쪽을 보며 옆으로 누워 자고 있었고, 손에는 부채가 들려 있었다. 잠깐 쉬는 터라 머리를 완전히 풀지 않은 채 크게 하나로 묶어 뒤로 넘긴 탓에 한결 나른해 보였다.
옆에 있는 탁자 위에는 찻잔 두 개가 놓여 있었다. 그중 한 잔은 반쯤 남았고, 한 잔은 가득 차 있는 게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 진안 군왕이 가득 찬 잔을 들어 마시려 할 때였다. 정교랑의 손에 들려 있던 부채가 스르르 떨어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진안 군왕은 황급히 손을 뻗어 부채를 받았다.
백우(白牛)의 뿔로 만든 부채인지라 바닥에 떨어지면 소리가 날 게 분명했다. 소리가 나면 당연히 잠에서 깰 테고.
부채를 잡은 진안 군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잠시 침상 곁에 서서, 잠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깊이 잠들었는지 맑고 보드라운 얼굴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진안 군왕은 저도 모르게 옆에 앉아 부채질을 해 주었다. 곤히 잠든 여인은 이따금 콧방울을 움직이고, 머리를 뒤척이기도 했다. 기분 좋은 편안함이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이렇게 간드러지는 자태를 보일 때도 있다니.
진안 군왕은 흥미로운 듯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부채질하는 손동작도 한층 부드러워졌다.
그때 정교랑이 눈을 떴다.
“돌아왔네요.”
잠기운이 남아 있는 나른한 목소리였다.
잠에서 막 깬 여인의 두 볼은 발그스름하게 상기되어 있었고, 아른아른한 눈빛은 촉촉해 보였다. 그 또한 진안 군왕이 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진안 군왕은 잠시 넋을 놓고 바라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방금 들어왔어요.”
손에 힘이 들어가면서 부채질이 더욱 빨라졌다. 흡사 무언가를 쫓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안 군왕이 물었다.
“물 마실래요?”
정교랑은 베개를 베고 누운 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도 한숨 자요.”
진안 군왕의 마음이 순간 움찔했다.
“좋아요.”
물을 들어 단숨에 비운 진안 군왕은 한 손으로 침상 머리맡에 있는 탁자를 짚으며 다른 한 손에 든 부채로 정교랑을 쿡쿡 찔렀다.
“안으로 들어가요.”
정교랑은 살짝 멈칫하면서도 별다른 대꾸 없이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신을 벗고 침상에 반듯이 누웠다.
푹신하고 향기로운 베개를 베고 있노라니 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진안 군왕은 다시금 손에 힘을 주어 부채질을 하기 시작했다. 침상에 걸린 휘장이 그 부채질에 마구 펄럭였다.
“더워요? 얼음을 더 가져오라고 할게요.”
정교랑이 일어나려 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방금 봤는데 아직 남아 있었어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은 아, 하고 대꾸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도로 누웠다.
“내일 일찍 일어나지 않아도 돼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입궐하는 거 거절당했어요?”
정교랑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옆으로 돌려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눈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당연히 거절당했죠. 아마 당분간은, 마마께서 날 보려고 하지 않으실 거예요.”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마 앞으로는 쭉 보고 싶어 하지 않으실걸요.”
부드러운 목소리, 미소를 머금은 얼굴, 향긋한 숨결, 이토록 가까운 거리…….
진안 군왕은 또다시 후끈 열기가 올라 손에 쥔 부채를 힘주어 부쳤다.
이 여인과 함께 머리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있을 날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네.
진안 군왕은 경성을 떠나 무평으로 가기 전 작별 인사를 하러 찾아갔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정교랑의 집에서 몸을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대청에 앉아 시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순간 집에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무평에 있던 동안 수시로 반복해서 떠올랐다.
집이라는 게 뭘까? 사랑하고 아껴 주는 가족들이 있는 곳이지.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가족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은. 그래서인지 경성에서 정교랑의 혼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며, 태후가 직접 나섰다는 말까지 듣자 그는 불안해 견딜 수 없었다.
앞으로 그 여인은 다른 이의 가족이 되겠지.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생각을 하자 진안 군왕은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최대한 빨리.
부랴부랴 돌아와 정확히 뭘 할 건지는 계획조차 없었지만, 돌아와 여인의 얼굴을 보자 아내로 맞이하고 싶다는 말이 저도 모르게 나와 버렸다.
거기까지 생각한 진안 군왕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가족이 되었네. 내 가족이자 내 아내, 훗날엔 내 아이의 어머니가 될 사람…….
아이!
뭐야,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진안 군왕은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쉭쉭 소리가 날 정도로 마구 부채질을 하자, 손 하나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의 손은 가늘고 긴 손에 붙잡혀 있었다.
“마구 부친다고 해서 바람이 센 건 아니에요.”
정교랑이 부채를 천천히 흔들며 말하자, 부드러운 바람이 은은하게 불어왔다. 진안 군왕은 멋쩍어하며 똑바로 누웠다.
“보기 싫으면 보지 말라죠. 고 선생은 죄를 반성하는 글을 써 올리거나 해명을 하라는데, 그런 시늉도 귀찮아요.”
진안 군왕은 아까 이야기하던 화제를 이어 말했다.
“당신이 기분 좋으면 됐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당신이 기분 좋으면 됐다고? 하지만 세상사가 어디 그렇던가.
진안 군왕은 웃으며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정말 기분만 좋으면 뭘 해도 다 괜찮아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그야 당연하죠.”
정교랑도 고개를 돌리며 진안 군왕을 보고 미소 지었다.
“나쁜 일을 하면, 당신 기분이 좋을 리 없잖아요.”
진안 군왕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눈앞에 있는 작고 오뚝한 코를 보고 있노라니 손을 뻗어 쥐어 보고 싶은 마음을 참을 수 없었다.
“당신은 입만 열면 남을 속이잖아요. 뭐라고 하든 늘 당신만 옳죠.”
손을 잡자 보드랍고 매끄러운 느낌이 들었다. 꼭 태평거에서 사 온 두부 같았다. 진안 군왕은 가까이에 있는 커다란 두 눈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부채질을 하던 정교랑의 손동작도 돌연 멈췄다.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눈이 마주치자, 진안 군왕의 눈이 점점 커졌다.
뭐, 뭐 하는 거야?
정교랑의 손에 들린 부채가 다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은은한 바람이 불어오면서 방 안의 경직된 분위기를 깼다. 진안 군왕도 정신을 차리고 손을 확 풀며 뒤로 물러났다.
“조심해요.”
정교랑이 붙잡아 주려고 손을 뻗으며 일어났지만, 진안 군왕은 이미 침상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지던 그 순간, 진안 군왕은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고 정교랑이 내민 손을 붙잡았다.
“아씨!”
소리를 듣고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반근의 눈에 들어온 건 침상 위에 꼭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비록 자세는 좀 야릇했지만.
순간 얼굴이 새빨개진 반근은 얼른 뒤돌아 밖으로 뛰어나가면서도 내실의 문을 꼭 닫는 일을 잊지 않았다. 마침 안으로 들어가려던 소심이 놀라 무슨 일인지 물어보려는데, 반근이 손을 내저으며 소심을 밖으로 몰았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시녀들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다들 물러가.”
반근이 새빨개진 얼굴로 말하자, 시녀들은 영문을 몰라 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소심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반근은 여전히 붉은 얼굴로 내실을 힐끔 쳐다보았다.
“전하와 아씨께서…… 낮잠을 주무셔.”
반근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말뜻을 알아들은 소심도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니, 이런 대낮에도…….
신혼이라 그러시겠지. 이제 막 그 맛에 눈을 뜨게 된 젊은 부부이니, 아마도…….
이게 좋은 건가, 나쁜 건가? 집안에 웃어른이 안 계시니…….
소심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언제 기회를 봐서 황씨 부인한테 물어봐야겠다.
밖에서 몸종들이 이런저런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안에 있던 정교랑은 벌써 진안 군왕이 일어나도록 붙잡아 주고 있었다.
“침상이 너무 작네요.”
진안 군왕은 어색함을 떨치고자 짐짓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엔 나도 잘 몰랐거든요. 제대로 보지도 않았고. 전부 아랫것들이 고른 거예요.”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리며 침상을 쳐다보았다.
“바꿔야겠네. 지금 당장 바꾸라고 해야겠어요.”
그러더니 그는 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예 거처를 바꾸는 게 낫겠다.”
진안 군왕은 허리를 붙잡고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이며 말을 이었다.
“원래 내가 생각했던 신방은 여기가 아니었어요. 내가 지내고 있는 저쪽이죠. 이제 입궐할 필요도 없고, 일이 이 지경이 되기도 했으니, 출타하긴 힘들 거예요. 집에서 할 일도 없는데, 짐을 옮기고 있으면 되겠네요.”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는 동안, 화끈거리던 진안 군왕의 얼굴도 차츰 원상태를 회복했다. 진안 군왕은 주전자를 들어 물을 따른 다음 고개를 젖혀 가며 벌컥벌컥 마시고, 정교랑에게도 한 잔 따라 주었다.
“어때요?”
진안 군왕이 물잔을 건네며 물었다. 정교랑은 중얼중얼 떠들어대는 진안 군왕의 말을 들으며 침상에 앉아 부채질을 하다가 물잔을 받았다.
“좋아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난 정교랑이 다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럴 필요 없을 거예요.”
진안 군왕이 멈칫했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곧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진안 군왕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죠. 아마 이번엔 내쫓길 테니까.”
진안 군왕은 다시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너무 걱정 마요. 날 내쫓는 게 그리 쉽진 않을 거예요.”
정교랑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이번엔 아마 떠나고 싶어도 그리 쉽진 않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