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랑의경 23권
-중요한 사람-
진안 군왕이 다시 대청 안으로 들어설 때도, 연회석에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회랑 아래에 걸음을 멈춘 주복이 창살 사이로 보이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옆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정교랑이 미소를 짓자, 흑옥 같던 두 눈이 호수에 잔잔하게 이는 물결처럼 반짝였다.
사실 주복은 정교랑이 웃는 걸 별로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예전 정교랑의 얼굴은 늘 표정이 없었고, 두 눈도 공허하기만 했었고.
앞으로는 저 여인이 웃는 걸 더 보기 힘들어지겠지.
주복은 갑자기 더는 이곳에 머무르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고 자리를 떴다.
“공자님, 지금 가시게요? 아직 식사도 안 하셨잖아요.”
사환이 말을 끌고 오면서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장씨 가문의 그 유명한 찬모가 손수 만든 음식에다가, 태평거에서 보낸 태평 두부까지 있는데? 조금 전엔 그 왼손잡이 숙수가 태평 두부로 꽃을 조각하는 걸 다른 사환들이랑 같이 봤어. 부엌에 있는 여종 말로는 인원수대로 만든 거라, 이따가 다 하나씩 먹을 수 있다던데. 그 맛있는 꽃 두부를 한입에 넣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먹긴 뭘 먹어.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기라도 하냐?”
주복이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하고는 말 위로 올라타려고 말고삐를 건네받았다.
“주 공자님!”
소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소심이 품에 보따리를 하나 안은 채 정교랑과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돌아간다.”
주복이 고개를 숙인 채 먼저 입을 열었다.
“네, 그럼 먼저 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소심이 주복에게 보따리를 건넸다.
“이건 아씨께서 지으신 옷이에요. 부모님과 누이들이 집에 없으니까, 공자님 스스로 잘 챙기셔야 해요.”
“내가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주복은 작은 소리로 대꾸하다가,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사환을 향해 바닥에 있던 작은 돌멩이를 찼다.
사환이 아파서 아야, 하는 소리를 내며 주복을 쳐다보았다.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니라면서요.
사환은 얼른 보따리를 받아 오면서, 미간을 찌푸리고 속으로 투덜댔다.
“행장을 꾸린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주복이 음, 하고 대꾸하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퍼뜩 들었다.
“난 어디 안 가.”
그러고는 냉소를 지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정사낭도 아니고.”
이 말을 뱉자마자 주복은 땅을 치며 후회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왜 또 칼로 마음을 도려내는 말을 해 가지고는!
“걱정할 필요 없어. 큰 병영으로 옮기기도 했고, 종 장군께서도 날 살뜰히 챙겨 주시거든. 종 장군의 병영에까지 마수를 뻗을 수는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너나 잘 챙겨. 네가 잘 지내면, 나도, 아니 우리도 잘 지낼 테니까.”
당황한 주복이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았다. 그러고는 말 위로 훌쩍 몸을 날린 후 서둘러 말을 움직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내게 숨기려고도, 나를 피하려고도 하지 마요. 꼭 나한테 와서 말해요.”
정교랑이 주복의 등 뒤에서 말했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짤막하게 알겠다고 대꾸했다.
“당신은 정사낭이 아니에요. 하지만, 남들이 내 약점으로 쥐고 협박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당신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당신은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정교랑의 마지막 말을 듣자, 주복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발걸이에 힘을 주어 말의 복부를 걷어찼다. 그 힘이 너무 셌는지, 말이 히이잉 울부짖으며 곧장 내달렸다.
주복도 말이 갑자기 이렇게 빠르게 달려나갈 줄은 몰랐는지, 몸이 뒤로 기울면서 말에 끌려가는 듯한 모습으로 대문 앞을 떠났다.
한참을 달리던 주복은 언제, 어떻게 달려왔는지도 모를 거리에 멈춰 섰다.
“너도 내게 중요한 사람이다.”
주복이 천천히 말했다.
“아니, 네가 더.”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연회가 끝나고,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이 정씨 저택 앞을 떠났다.
“지름길로 가자.”
진안 군왕이 마차 앞에 있던 경 공공에게 말했다. 경 공공이 멈칫했다.
앞뒤로 긴 의장 행렬이 있던 터라, 정씨 저택으로 올 때는 큰길을 따라서 왔다. 하지만 지름길로 가게 된다면 좁은 골목을 통과해야 해서 행렬을 분산시키고 최소한의 시위로 호위하며 가야 했다.
그러기엔…….
군왕부를 나서고부터 지금까지 쉬지 못하셔서 몸이 힘드신가?
문득 긴장한 경 공공이 곧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단해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향해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하자, 정교랑은 더는 묻지 않고 마차에 두었던 책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마차가 좁은 골목을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해가 지고 한낮의 무더위가 가라앉은 시간이라 골목 곳곳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좁은 골목에 삼삼오오 모여서 더위를 식히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오는 의장 행렬을 보고는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진안 군왕의 의장이야!”
“오늘은 왕비가 친정 나들이를 가는 날이었나 보네!”
“저거 보라고. 군왕비도 같이 있나 봐.”
“그럼 오늘도 불꽃놀이를 하려나?”
길가에 서서 목을 빼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본 진안 군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책을 읽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책을 읽느라 바깥의 사람들이 전혀 보이지 않는 눈치였다.
“정방.”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부르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 봐요.”
창가 밖을 가리키던 진안 군왕의 눈가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정교랑도 진안 군왕이 가리키는 곳을 보면서 그를 따라 웃었다.
“그날 사람이 정말 많았잖아요.”
오늘 정씨 저택에서 가장 많이 대화한 주제가 바로 혼례 당일, 정교랑의 친영 행렬과 그 외의 놀라운 광경들이었다. 다들 그런 광경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진안 군왕은 사람들의 대화를 잠자코 듣고 있었는데, 진소 부인이 그의 눈치를 보면서 화제를 돌렸었다. 신랑이 친영 행렬이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모르니, 정말 아쉽겠네, 하면서.
“원래 친영 행렬은 다 떠들썩하잖아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미소 지었다.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또 웃었다.
“정방, 나도 봤어요.”
나도 봤다고?
정교랑이 의아한 듯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이 기다렸다는 듯 활짝 웃으면서 또 한 번 말했다.
“그날, 나도 내 두 눈으로 봤어요.”
진안 군왕은 ‘나도’와 ‘내 두 눈’에 힘을 실어 말했다. 정교랑이 다소 놀란 기색으로 진안 군왕에게 물었다.
“그날, 당신이 왔었어요?”
진안 군왕은 여유롭게 두 손을 목 뒤로 깍지낀 채 방석에 몸을 뉘었다. 그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마차 천장 너머가 보이는 듯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엄청 천천히 따라갔어요. 최 악공의 칠현금 연주는 잘 못 들었지만, 사람들이 글씨를 쓸 때 시를 읊었던 건 잘 들었어요. 몸을 일으킬 수 없어서 그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다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앉고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다만, 불꽃놀이는 잘 봤어요.”
저녁인지라, 마차 안을 비추는 은은한 불빛이 진안 군왕의 두 눈을 더욱 반짝이게 했다.
“온 하늘을 뒤덮을 정도던데요? 휘장 너머로 봤는데, 진짜 예쁘더라고요. 대낮에도 그렇게 오색찬란한 불꽃놀이를 할 수 있는 줄은 몰랐어요.”
“어디 있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마차 휘장도 있고, 칠현금 연주도, 글씨를 쓸 때 시를 읊었던 것도 들었다고 한 걸 봐서는 같은 시간에 이 거리에 있었던 거 같은데.
“내가 말했었죠. 이 혼사는 내게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요. 그래서 그날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진안 군왕이 말하고 다시 방석 위에 누웠다.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그날로 되돌아간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갔다.
“나를 마차에 실어 달라고 하고, 왕부 밖으로 나왔어요. 그리고 이 거리에서 당신을 기다렸죠. 친영 행렬이 이 거리에 도착할 때쯤, 몰래 행렬 뒤쪽으로 붙어서 따라갔어요. 마차에 누워 있어야 하긴 했지만, 다행히도 천장이 천으로 되어 있어서, 몸을 일으킬 수는 없어도 천을 걷으니 바깥 광경이 보였어요.”
진안 군왕이 혼자 피식 웃었다.
“그때 당신은 앉아 있었겠죠? 붉은 천 때문에 바깥도 볼 수 없었을 거고요.”
그랬던 거구나.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사실 나는 불꽃놀이는 못 봤어요. 어때요, 예뻤어요?”
“네, 정말 정말 예뻤어요.”
진안 군왕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크지 않은 마차 안, 진안 군왕은 누워 있었고 정교랑은 앉아 있었다. 가까이 있었기 때문인지, 진안 군왕은 익숙하고 은은한 향을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정교랑의 얼굴을 보자, 어디서 갑자기 용기가 샘솟았는지 그가 손을 뻗어 정교랑을 자신 쪽으로 확 당겼다.
“누워서 보니까 더 예쁘던데요? 불꽃놀이가 얼마나 잘 보였는지 당신도 한번 상상해 봐요.”
갑작스럽게 끌어당긴 진안 군왕 때문에, 무방비 상태로 앉아 있던 정교랑은 그의 가슴팍을 팔꿈치로 찍으면서 그 위로 엎어졌다.
마차 안에서 낮은 신음이 들려왔다.
“전하?”
마차 앞에 앉아 있던 경 공공이 황급히 휘장을 걷고, 작은 문을 열고 물었다.
마차 안의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반쯤 엎어져 있었다. 공교롭게도 정교랑의 손에 진안 군왕의 앞섶이 걸려 풀어 헤쳐지는 바람에 진안 군왕의 가슴팍이 드러났다.
에구머니나!
경 공공은 문을 쾅 소리가 날 정도로 닫고, 재빨리 휘장을 꼼꼼하게 쳤다. 얼굴이 화끈거려 귀까지 빨개져 있었다.
세상에! 잠, 잠, 잠시도 못 기다리시는 건가?
경 공공이 앞을 내다보자, 벌써 군왕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지금 군왕부로 곧장 들어가면, 혹시 두 분의 흥취가 깨지는 건 아닐까?
이박삼일 만에 전하께서는 약을 드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몸이 나아지셨어. 이대로 몇 번만 그 일을 더 한다면, 원기 왕성하여 활력이 넘치시겠지?
여기까지 생각이 닿은 경 공공은 이를 악물고 무언가를 결심했다.
황당하면 뭐 어때? 그야 남들 눈에 그리 보이는 거지. 전하의 몸을 위해서라면…….
“여봐라.”
경 공공이 목소리를 낮추고 손짓하면서 옆에 있던 시위를 불렀다.
말을 타고 있던 시위가 서둘러 경 공공의 옆으로 다가가, 경 공공의 귓속말을 들었다. 시위는 조금 놀란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명령에 따랐다.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은 정교랑은 진안 군왕의 앞섶을 잘 여며 주었다.
“뜯어졌네요.”
“이것도 밤에 하는 거랑 비슷한 효과예요?”
진안 군왕이 이가 훤히 보일 정도로 헤헤 웃으면서 물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가슴을 문지르며 실망한 듯 탄식했다.
“아, 그럼 괜히 아팠네.”
정교랑이 이를 드러내고 웃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진안 군왕의 새하얗던 이빨은 어느새 검게 그을린 듯 변해 있었다.
그 독이 이 사람에게 평생 지우지 못할 흔적을 남겼네. 하긴,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을 어찌 잊을까. 절절히 느껴지는 아픔인데.
잊자, 잊어. 잊는 게 제일 나아.
아니야. 그럴 수는 없어!
양산! 그럴 수는 없다고!
정교랑이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뺨을 쓰다듬었다. 진안 군왕의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괜히 아픈 게 아니에요. 오래 아픈 것보단 짧게 아프고 넘어가는 게 낫죠. 그럼 나중에는, 아프지 않을 테니까.”
굳은살이 박인 정교랑의 손바닥은 마냥 부드럽기도, 무언가 까슬한 게 느껴지기도 했다. 진안 군왕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는 정교랑의 손길이, 어릴 때 안겼던 어머니 품속처럼 느껴졌다.
종낭(琮郞), 무서워할 것 없어. 하나도 안 아파.
몹시 아득해서 이제는 잊어버린 듯한 기억이 순식간에 휘몰아쳤다. 눈시울이 붉어진 진안 군왕은 누웠던 몸을 반쯤 일으켜 또 한 번 정교랑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정교랑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정방.”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교랑의 몸이 살짝 굳었다. 정교랑은 반사적으로 진안 군왕을 밀치려 하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밀치려던 손을 내려놓았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나 때문에 아파하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소심이 마차 휘장을 걷어 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아직도 도착하지 않은 거지?”
지름길로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지름길은 혼례 날에 이미 가 봤는데? 사람이 그리 많았는데도 한 시진이면 갔었어. 평소라면 반 시진도 안 걸려서 도착할 길인데, 왜 혼례 당일보다도 오래 걸리는 거 같지?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훑어보던 소심은 깜짝 놀랐다.
“이게 지금 무슨…….”
“왜 그래?”
반근이 소심의 옆에서 머리를 내밀고 밖을 내다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주위 환경은 낯설기만 했다.
“지금 뭐 하는 거지? 여기는 군왕부가 아니잖아?”
소심이 앞쪽을 내다보면서 중얼거렸다.
마차의 앞뒤에 붙어있던 의장 행렬이 없어지고, 시위 열댓 명만 남아 간격을 두고 마차 주변을 호위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마차는 앞쪽에서 천천히 움직였다.
“여기는 군왕부잖아.”
반근이 갑자기 말하면서 옆에 있던 담벼락을 가리켰다.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 같은데?”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
반근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자, 소심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군왕부 안은 아직 익숙하지 않지만, 경성 곳곳을 누비고 다녔던 소심은 뒤늦게나마 이곳을 알아보았다.
저건 정말 군왕부 후원의 담벼락인데, 지금 어딜 가려는 거지?
“뒤를 따라오라고만 하시고, 어디로 간다고는 알려 주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지금은 군왕부를 끼고 계속 돌고 있어요.”
마부가 조용히 말했다.
군왕부 주위를 돌고 있다고?
소심과 반근은 서로 마주 보다가 다시 앞쪽의 마차를 내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지?
“중독된 이후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아요. 깨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나를 당신 저택에 데려갔던 거 같은데. 그때 당신이 집에 없었어요. 거기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당신이 거기에 있지 않아서…….”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정교랑의 허리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는 무언가를 꽉 잡으려는 듯이 한 손을 세게 주먹 쥐었지만, 손바닥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손을 폈다.
“그 후로는 계속 혼수상태였어요. 이대로 정말 죽는구나 싶었는데, 또 잠시 깨어났죠. 깨어나자마자 정사낭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고.”
정사낭이 죽었다. 무려 정사낭이. 정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진심으로 그녀를 아껴 주던 그 정사낭이.
정사낭이 죽다니, 심지어 그녀가 보는 앞에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얼마나, 그녀가 얼마나 아플까. 그런 아픔은 대체 어떤 아픔일까.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생각만 떠올리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숨이 턱 막혔으니까.
“정방, 미안해요.”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자, 정교랑의 매끈하고 쭉 뻗은 목이 보였다. 언제 어디서든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정교랑의 습관 때문일 것이다.
“나 때문이 아니었다면, 당신과 정사낭도 이렇게 남의 계략에 빠지지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 이 일도 결국 내 탓이 돼요.”
정교랑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말했다.
정교랑의 옆모습이 진안 군왕의 눈에 들어왔다. 정교랑의 오뚝한 코가 먼저 보였고, 위아래로 움직이는 짙은 속눈썹이 보였다.
“만약 내가 의술을 모르고, 죽을병이 아니면 고치지 않는다는 원칙이 없었더라면, 남들의 계략에 이용되지도 않았을 거고, 오라버니도 죽지 않았겠죠.”
정교랑이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그런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방, 미안해요. 내가 말을 잘못했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 무엇을 잘못 말했는지 설명해 주기를 기다리는 듯한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았다.
언제나 평온하고 담담해 보이는 얼굴.
속상하고 마음 아픈 일들이 그렇게 많았는데도, 이 여인의 얼굴에는 그런 상심이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저 얼굴 뒤로, 얼마나 많은 슬픔을 홀로 억누르며 감당하고 있을까.
늘 내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이라고 믿어 왔는데, 이 여인은 매번 나보다 더 불행한 일을 겪어.
생각해 보니 우리가 천생연분이긴 하네. 남들 눈에는 화려하기만 한데, 우리가 겪은 일은 그 누구보다도 참혹하잖아.
진안 군왕의 귓가에 작은 기침이 들려왔다.
“계속 이렇게 앉아 있으면, 가슴팍이 아플 텐데.”
이렇게 앉아 있으면? 내가 어떻게 앉아 있지?
진안 군왕이 뒤늦게 자신의 자세를 내려다보고는 불에 덴 듯이 화들짝 놀라면서 뒤로 튕겨 나갔다.
쿵 소리와 함께, 마차가 잠깐 흔들거렸다.
마부 대신 직접 마차를 끌고 있던 내시가 덩달아 몸을 살짝 떨었다.
안전을 위해 이 마차를 탄 게 천만다행이었네. 여름에 조금 덥긴 해도, 휘장이 아니라 문과 창문이 다 달린 마차라 방음도 잘 되고 말이야. 마차 안에 타 있는 사람도 여기가 길 위인지, 왕부 근처인지 전혀 모를 거야.
좋은 마차야. 워낙 방음이 좋아서 그런지, 큰 소리가 새어 나오지도 않고, 조용히 대화하는 듯한 말소리만 간간이 들려오네.
이렇게 큰 소리가 난 건 처음인데.
“괜찮아요?”
“아파요!”
마차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공공은 머릿속에 단단히 자리 잡은 음란한 생각을 황급히 떨쳐내고, 앞을 바라보며 오늘 정씨 저택에서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를 곰곰이 곱씹었다.
두부, 음, 꽃으로 조각된 두부를 먹었지. 태평거에서 만든 태평 두부가 유명하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는데, 말로만 듣던 태평 두부를 직접 먹은 건 또 처음이네.
미간을 찌푸리면서 뒤통수를 매만지는 진안 군왕을 보며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아픈 걸 알면 됐어요. 아픈 걸 모르면, 오히려 곤란해지죠.”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눈을 피한 채 민망하게 웃으며 애써 괜찮은 척을 했다.
“맞는 말이에요. 아픈 건 살아 있다는 증거죠(痛則生).”
진안 군왕의 귀는 거의 녹아버릴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미치겠네. 내가 뭘 한 거야!
“통해야 산다(通則生), 아니에요?”
정교랑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말했다.
“비슷한 거 아니겠어요? 아플 통이나, 기가 통할 통이나.”
여전히 정교랑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있던 진안 군왕은 정교랑의 표정이 몹시 궁금했지만, 괜히 헛기침을 하며 점잖은 모습으로 창문을 열고 중얼거렸다.
“집에 당도할 때가 다 됐는데?”
“거리로 따지면, 세 바퀴째겠네요.”
정교랑이 말했다.
“세 바퀴째요?”
멈칫했던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듣고 마차 문을 벌컥 열었다.
“아경!”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돼지찜을 먹은 뒤에 생선 요리를 먹었는지, 전분으로 만든 어묵을 먹었는지 헷갈려 하던 경 공공은 깜짝 놀라 하마터면 마차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무릎을 꿇어 엎드린 채로 한 손으로 문을 열고 자신을 노려보는 모습이 보였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말 산책이라도 시키려고?”
진안 군왕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말 산책이 아니라, 사람 산책이지요.
경 공공이 속으로 말하고는 앞섶이 터진 진안 군왕의 옷과 머리카락이 삐져나온 관을 빤히 바라보았다.
“되게 빨리 끝나셨네.”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중얼거렸다.
진안 군왕이 굳은 얼굴로 뒷짐을 진 채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의 안색을 살피고는 그의 뒤를 따라 민망한 듯 손을 모으고 따라오는 경 공공을 쳐다보았다.
쯧쯧, 자네는 정말!
고 선생이 경 공공을 향해 눈으로 말하고는 서둘러 진안 군왕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군왕 내외가 신방으로 돌아오자, 시녀들이 서둘러 옷을 갈아입도록 시중을 들었다.
“먼저 씻어요. 난 잠시 저들과 상의할 게 있으니.”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불러세웠다.
“이쪽 거처에 서재를 하나 마련했으니, 그쪽으로 가서 이야기 나눠요.”
진안 군왕이 놀란 듯이 멈칫했다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전하, 이쪽으로 가시지요.”
소심이 길을 안내했다. 진안 군왕이 나가는 모습을 확인한 후, 정교랑은 그제야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경 공공, 고 선생과 함께 들어온 막료 서너 명이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다.
전하의 서재인 줄 알았는데, 내원에 있는 서재일 줄이야.
“전하께서 여기에도 서재를 만드신 게냐?”
고 선생이 물었다.
“왕비께서 쓰시는 겁니다.”
소심이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천천히 차를 따랐다.
“왕비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내원에서 논의하는 게 가장 좋을 거 같다고 하셔서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소심의 말에 맞장구쳤다.
“좋다마다요. 여기에 계시면, 왕비께서도 언제든 전하를 뵐 수 있으니.”
뭐? 나를 한 시도 떠나보낼 수 없어서, 언제든 보고 싶어서 내원에 앉아 있으라고 하는 거 같아? 대체 어딜 봐서?
진안 군왕이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도대체 중독됐던 사람이 나야, 아니면 경 공공이야? 어째 사람이 부쩍 멍청해진 거 같단 말이지.
음, 아니면, 어쩌면, 아마도, 그러니까……. 저 여인이 멀리 가고 싶지 않아서, 혹시라도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나를 돌보기 불편하니까 그런 게 아닐까?
너무 조심하는 거 아니야? 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생각에 잠긴 진안 군왕이 입을 삐죽이며 웃는 것을 본 고 선생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진안 군왕의 얼굴을 차마 더는 보지 못하겠는지, 일부러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설마 쭉 저렇게 지내시는 건 아니겠지?
소심은 진안 군왕의 시녀가 아니기에, 사람들을 서재로 안내한 뒤에 곧바로 예를 올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안 군왕의 시녀들도 밖으로 물러났다.
“이번 일에 관련된 자들은 우선 가둬 두었습니다. 늘 하던 대로 처리할까요?”
고 선생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서재 안을 훑어보았다.
내실만 한 크기의 서재는 그리 넓지 않았고 원래 쓰던 외원의 서재에 비하면 몹시 작았다.
놓여 있는 가구들도 다 간소하네. 탁자, 방석, 책장, 향로…….
“간소하게 놓인 것들이긴 하나, 다 좋은 물건들입니다.”
진안 군왕의 시선을 따라가던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감탄했다.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헛기침을 했다.
이 두 사람 좀 보게. 분명히 자기 집인데, 꼭 남의 집 희귀한 세간살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굴잖아!
고 선생이 눈치를 주자, 경 공공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전에는…….”
진안 군왕이 탁자를 손끝으로 두드리면서 입을 열었다.
진안 군왕의 주위에는 사람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보내 준 사람들.
태후가 상으로 내린 사람, 황제가 먹을 갈라고 보내 준 사람, 귀비가 차를 따라 주라고 보낸 사람, 그리고 대신들이 보내 준 말을 관리하는 사람이나 마차를 모는 마부 등. 심지어 어떨 때는 차 맛이 좋다고만 해도 차를 우린 시녀를 보내오고, 고개를 살짝 끄덕이거나 미소만 지어도 그 사람을 보내 주곤 했다.
물론 진안 군왕이 직접 고른 하인들도 있긴 했다. 궁에 새로 들어온 내시나 궁녀를 배정할 때면, 습관처럼 편히 사람을 고르곤 했으니까.
시중을 드는 하인들의 출신은 복잡하지만, 어떻게 보면 아주 간단하기도 했다. 진안 군왕이 직접 고른 사람들은 자기 사람이고, 나머지는 전부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본분을 지키지 않거나 버르장머리 없는 하인들을 종종 걸러냈다. 그게 자기 사람이면 그 자리에서 때려죽여 버렸다. 과거 그가 신임했던 집사가 일부러 늑대 떼를 불러왔다는 것을 알고 바로 때려죽였던 것처럼.
하지만 자기 사람이 아니라면, 붙여줬던 사람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굳이 자기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까.
“우리 사람이라면, 하던 대로 하면 돼.”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며 미소를 지었다.
“누가 보내 준 사람이라면 돌려보내고.”
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냥은 말고, 때려죽여 보내게.”
고 선생이 흠칫 놀랐다. 옆에서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서 있던 경 공공도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이 놀랐던 건, 누구를 때려죽이라고 한 말 때문이 아니었다. 선물 받은 하인을 돌려보내는 것은, ‘당신의 꿍꿍이가 탄로 났으니, 이들을 돌려보낸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돌려보내진 자들은 결국 자신의 주인 손에 죽음을 당했다. 단지 진안 군왕의 손을 거치지만 않았을 뿐.
하인들에게는 돌아가서 죽나 죽고 나서 돌아가나, 죽는 건 매한가지겠지만, 하인을 돌려받는 주인에게 있어서는 그 의미가 확연히 달랐다.
고 선생이 표정을 가다듬고 숙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중에는 궁에서 보낸 자도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손바닥으로 천천히 탁자를 쓸었다.
매끈하고 부드러워. 어디서 이렇게 좋은 물건을 구해 오나 몰라. 고작 탁자일 뿐인데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네. 꼭 저 여인처럼.
“황궁 사람이니 더욱 봐줘선 안 되지. 그들이 저버린 건, 본왕의 호의가 아니라 태후마마의 호의이니까. 감히 태후마마의 호의를 저버렸는데,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럼 이번 일이 전하께서 황제 폐하와 태후마마의 명성을 지켜 드리고자 재차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전하께 독을 써서 벌어진 일임을 밝히자는 말씀이신지요?”
이는 불순한 의도를 품었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했기 때문에, 충절을 지키고 결백을 밝히기 위해 음독자살을 시도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음해로 중독됐음을 알리기로 한 것이다.
이들을 때려죽여 돌려보내는 순간, 이 일은 명확하게 규정될 테고, 엄청난 파란을 일으킬 게 자명했다. 이미 다사다난한 시기를 보내는 조정으로서는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서재 안에 정적이 흘렀다. 바깥마당에서도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진안 군왕의 웃음이 정적을 깨트렸다.
“아, 숨은 조금 붙여 두지. 궁에 들어가 마마께 사죄할 마지막 숨은 남겨 둬야 하니까.”
고 선생과 경 공공은 또 한 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본왕이 이러는 것은 다 마마와 폐하의 명성을 위한 것일세. 본왕이 전에 체면을 지키고자 자결을 시도한 일로 마마께선 상심이 아주 크셨지. 본왕에게 다시는 절대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말라고 울며 당부하셨는데, 그 후로 며칠이나 지났다고 벌써 마마의 마음을 외면하고 재차 자결을 시도하겠는가? 그건 태후마마를 무시하고, 마마의 뺨을 후려치는 일이야. 그럼 세간에서 태후마마를 얼마나 욕하겠나? 본왕이 마마의 은혜를 저버리고 이리도 제멋대로 구는 것은 다 태후마마께서 본왕을 오냐오냐 버르장머리 없이 키웠기 때문이라고 험담할 것이 뻔해.”
진안 군왕이 설핏 웃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서늘함이 가득했다.
“본왕이 제멋대로 군다는 소리를 듣는 건 괜찮지만, 마마께 본왕을 오냐오냐 키웠다는 비난을 받게 할 순 없지.”
진안 군왕이 말을 끝내자, 고 선생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말씀하신 대로 처리한다면, 반대로 전하께서 제멋대로라는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으실 텐데요.”
한 번에 하인 열댓 명을 장살하고, 또 몇 명은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정도로 살려두어 황궁으로 돌려보냈다는 소문이 퍼지면, 진안 군왕은 필히 그 흉악무도함으로 유명세를 떨칠 터였다.
“바깥세상의 사람들은 전하께서 정말로 남이 쓴 독에 중독이 됐는지 아닌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을 겁니다. 그저 전하께서 괜한 화풀이를 하신다고 믿겠지요.”
이어지는 고 선생의 말에 진안 군왕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바깥세상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본왕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본왕이 중독됐을 때, 그들이 본왕을 대신해서 아파 주기라도 했는가? 본왕이 다 낫고 나니, 이제야 이러쿵저러쿵 떠들기는.”
고 선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습니다. 전하께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생을 하셨는데, 이 정도 분풀이는 하셔야죠. 그렇다면 이 일은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고 선생이 몸을 일으키자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만, 부인께서 이 태의에게 이쪽 가까운 곳으로 거처를 옮기라고 하셨습니다.”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난 다 나았는데, 굳이 가까이 올 필요가 있나?”
웬 이 태의? 왕비가 곁을 지키는데 뭘 굳이…….
경 공공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전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거겠지? 부인께서 계시니 괜히 와서 알짱거리지 말라고.
“부인께서 그리 분부하신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겠지요. 지금은 전하의 건강이 우선이니, 뭐든 조심해야 할 시기입니다.”
고 선생이 웃으면서 말했다.
부인께서 내리신 결정이니, 당연히 반대하시지 않겠지.
진안 군왕이 대꾸가 없자, 고 선생은 예를 표하고 물러날 준비를 했다.
“종일 바쁘셨을 텐데, 일찍 쉬시지요.”
고 선생이 멀뚱멀뚱 서 있는 경 공공을 향해 눈짓했다.
“경 공공, 그만 가세.”
경 공공이 멈칫하고 곧바로 대꾸했다.
“소인은 전하의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부인께서 계시니 자네가 시중들 필요는 없네. 그리고 자네 손아귀 힘이 꽤 쓸 만하지 않은가. 새파랗게 어린놈들은 이런 일을 통 해본 적이 없을 터이니, 괜히 단번에 다 때려죽일까 겁나는군. 그러니 자네가 가서 시범이나 한번 보여 주게나.”
고 선생이 말했다. 경 공공은 언짢은 기색으로 가만히 서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자신을 남겨 두려는 기색을 보이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알겠다며 예를 표했다.
“이런 일은 소인도 하기 싫습니다. 이제야 손톱을 좀 길렀더니만.”
“직접 때리라는 것도 아니잖나. 그냥 서서 지켜보기만 해도 된다니까.”
두 사람이 소곤거리면서 방을 떠나자,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고 서재를 자세히 둘러보았다.
그 여인은 이 중에 무슨 책을 읽을까? 글씨를 연습할 때 썼던 종이가 이렇게나 많네.
한참을 서재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던 진안 군왕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에게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추고 안채를 바라보았다.
환한 불빛 아래로 활짝 열려 있는 문과 창문이 보였다. 얇은 휘장에 새겨진 모란꽃이 불빛에 비쳐 은은한 색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시녀 한 명이 지나갔다.
“전하.”
인기척을 느낀 소심이 휘장을 걷어 올리고 밖으로 나와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표했다.
소심이구나.
“볼일은 다 보셨어요? 부인께서 전하를 위해 밤참을 준비하라고 하셨어요.”
밤참을 준비했다고? 나를 위해서 특별히 준비하다니, 다정하기도 해라.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두 시녀가 휘장을 걷어 올리자 방 안으로 들어온 진안 군왕은 다소 어색하게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정교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부인께서는 이 태의와 이야기하러 가셨어요. 전하, 이쪽으로 와서 앉으시지요.”
소심이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진안 군왕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소심의 안내를 받으며 창가에 앉았다. 소심이 다른 사람에게 밤참을 가져오라고 시키자, 진안 군왕은 소심을 제지했다.
“지금은 됐다. 일단 차부터 한 잔 마셔야겠어.”
소심이 알겠다고 대답하자, 진안 군왕의 시녀가 서둘러 차를 우리러 갔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찻잔을 들어 올리고 팔걸이의자에 기대 편안한 자세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여기가 내 신방이구나.
내가 직접 꾸미지 못해서인지, 왕부에서 꽤 구석진 곳으로 정해졌네. 정 낭자와 혼사를 치르고 싶은 마음만 굴뚝같지 어떻게 치를지 곰곰이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어. 혼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물론 낭자에게는 사소한 일이겠지만, 내게는 일생일대의 가장 중요한 일이니 꼭 성대하게 치르고 싶었어. 여러 사람이 축하해 주는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하지만 이건 생각지도 못했군. 혼례를 얼렁뚱땅 대충대충 치를 줄이야. 죽을 날을 받아 놓은 신랑과 상중인 신부라니.
진안 군왕이 한숨을 푹 쉬고는 손에 쥔 차를 단숨에 들이켰다.
“부인의 말씀은, 전하께서 아직 다 나은 게 아니라는 뜻입니까?”
이 태의가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가, 곧 풀 죽은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제가 맥을 짚었을 때는 분명 멀쩡하셨는데.”
아니지, 맥을 짚었을 때 멀쩡하면 뭐해? 그때도 분명 맥이 짚이지 않았는데, 이 여인이 오자마자 다시 살아났잖아.
“사실, 나는 병을 고칠 줄 몰라요.”
정교랑의 말에 이 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부인, 너무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겸손한 게 아니라, 할 줄 아는 건 할 줄 아는 거고, 할 줄 모르는 것은 할 줄 모르는 거죠. 일부러 남에게 숨기거나 말하지 않는 건 없어요. 우리 정씨…….”
정교랑이 돌연 말을 멈췄다. 이 태의가 고개를 들자,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스승님께서 내게 가르쳐 주셨던 것은 매산도(梅山道)지 의술이 아니었어요.”
매산도! 매산동만(梅山峒蠻)! 그곳은 무당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경악한 이 태의는 등골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지금 조정에서는 무당을 매우 금기시하는 분위기야. 게다가 정 낭자는 황실 종친의 일원이 되었으니, 앞으로 더욱 주의해야 할 텐데.
“저마다의 길이 있는 게지요. 위급할 때 사람을 돕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주제에 대해 깊이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이 태의가 서둘러 말했다.
정교랑이 이 태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 태의가 이해하는 것 같기에 정교랑도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았다.
“내가 전하를 해독하긴 했지만, 이미 몸이 너무 많이 상했어요. 앞으로 더욱 요양에 힘써야 하니, 이 태의가 신경 좀 써 줘요. 내가 있다고 괜히 손 놓고 있지 말고요.”
이 태의가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이 태의의 의술은 나보다 훨씬 뛰어나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는 순식간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한 머쓱함에 웃음 지었다.
“아닙니다, 당치도 않지요. 어떻게 제가 감히요.”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다른 게 아니라, 의술을 말한 거니까.”
정교랑이 말하자, 이 태의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이 여인도 참!
이 태의가 헛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이 옆에 서 있던 반근을 쳐다보자, 반근이 서둘러 작은 함 하나를 이 태의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이 태의가 물었다.
“내게 물어봤던 향이에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가 멈칫했다가, 동방화촉을 밝힌 다음 날 자신이 물어봤던 것을 떠올리며 민망해했다.
초야를 치른 후 온몸의 기가 빨린 진안 군왕을 보고 이 태의는 한동안 방 안에 머무르면서 곳곳을 조사했다. 방을 조사하던 중, 그는 왕부에서 한 번도 맡아본 적 없던 향을 느꼈다. 분명 약 냄새가 섞인 향이었다.
“다만, 전하께서만 쓰실 수 있는 향이에요. 다른 사람이 이 향을 써서는 안 돼요. 언제 또 필요해질지 모르니, 잘 보관해 둬요.”
정교랑이 말했다. 이 태의가 놀라서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렇다면, 전하의 해독은 이 향과 관련이 있었던 겁니까?”
“그래요. 없어서는 안 될 향이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랬던 거로군.
이 태의가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정중하게 함을 받아왔다.
“한동안은 집에 계실 때도 많이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사람을 대대적으로 정리하긴 했지만, 얼마나 많은 자가 이곳에 숨어 있을지는 아직 모를 일이죠. 이번 일로 보이지 않는 손해를 본 사람이 있을 테니, 결코 순순히 물러나진 않을 겁니다.”
이 태의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정교랑이 담담하게 미소지었다.
“보이지 않는 손해? 글쎄요. 이런 건, 보이지 않는 손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