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살-
이 태의가 고개를 돌리고 경 공공을 향해 눈짓했다.
“부인, 반나절 내내 고생하셨는데, 잠시라도 편히 쉬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경 공공이 정교랑에게 다가와 공경한 태도로 말했다. 정교랑이 가볍게 대꾸하고는 방을 나갔다.
“부인, 서재에 자리를 정리해 뒀어요.”
“책부터 읽으시겠어요?”
반근과 소심이 참새처럼 재잘대면서 정교랑과 함께 다른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 태의가 몹시 기분이 나쁘다는 듯이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아직 다 묻지도 못했는데.”
이 태의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했다.
“이 태의는 바보입니까? 도대체 부인께 뭘 묻는 겁니까!”
경 공공이 이 태의 못지않게 언짢은 기색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경 공공이 이 태의의 소매를 잡고 구석으로 끌고 가서 조용히 말했다.
“전하께서 어떻게 달라지셨는지 말씀해 보십시오.”
“어떻게 달라졌냐고?”
이 태의가 되물었다. 경 공공이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당연히 전하께서, 그, 그러니까, 진, 진정한 사내가 되신 게지요.”
경 공공의 말에, 이 태의가 멈칫했다.
“그런데 그걸 물어보겠다고요? 정, 정녕 창피도 모르는 겝니까! 아무리 부인을 스승으로 모신다지만, 삼가고 조심해야 할 건 지켜야지요.”
경 공공이 민망함을 무릅쓰고 말까지 더듬으면서 이 태의를 나무랐다. 그가 손끝으로 먼지를 털 듯이 이 태의의 어깨를 살짝 쳤다.
“부인께서 어떻게 대답하라고 그런 질문을 드린단 말씀입니까.”
이 태의가 그제야 눈치챈 듯이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고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그런 건가?”
그런 치료법은 듣도 보도 못했는데? 하지만 본디 의술이라는 것은, 배우고 또 배워도 끝이 없는 것이니. 그때는 정 낭자가 진 노태야를 사흘 만에 침상에서 내려오게 만들 줄도 미처 몰랐으니까.
두 사람이 대화하던 사이,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마른기침을 했다.
“전하.”
두 사람이 쏜살같이 침상으로 다가와 다정하게 진안 군왕을 불렀다.
“물러가거라.”
이 태의와 경 공공이 흠칫 놀랐다.
“시끄러우니까.”
진안 군왕이 짤막하게 말하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이 태의와 경 공공이 서로를 탓하듯이 눈짓했다.
말소리에 전하께서 시끄러우셨구나. 전하께서는 죽었다 살아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만 푹 쉬셔야 해.
두 사람이 서둘러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갑시다. 부인께서 여기 계시니,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경 공공이 회랑 아래서 쉽게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이 태의에게 말했다.
“걱정할 필요야 없지.”
이 태의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서재 쪽을 바라보았다. 얇은 휘장 너머로 정교랑이 단정하게 책을 읽는 모습을 보던 이 태의가 말을 덧붙였다.
“아직 부인께 가르침을 받을 것이 한참 남았는데.”
경 공공은 혀를 찬 뒤, 서재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고 휘장을 향해 예를 올렸다.
“부인, 전하께서도 쉬겠다고 하셔서 소인들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으니, 언제든 필요하신 게 있다면 불러 주십시오.”
경 공공이 공손하게 말하자, 정교랑이 손에 쥔 책을 잠시 내려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정교랑이 대답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경 공공 등이 물러나자 소심은 서둘러 휘장을 들어 올렸고, 정교랑은 침실로 걸음을 옮겼다.
침상에 누운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잠든 듯했다.
“부인?”
반근이 조용히 정교랑을 불렀다.
“너희도 그만 가서 쉬어. 이래저래 놀라서 피곤할 텐데.”
정교랑이 말했다. 소심과 반근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방에서 물러났다.
방 안이 조용해졌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자신의 옆에 앉아 조심스럽게 책장을 넘기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한여름의 매미 소리가 울려 퍼지고,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치자, 진안 군왕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진안 군왕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방 안에 등불이 켜졌을 무렵이었다. 방 안에서 또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봐. 이건 분명히 어린아이가 쓴 걸 거야.”
“그러게. 이 점은 아씨께서 쓰시는 점이랑 비슷해!”
뭘 보고 있는 거지?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기뻐하면서 재빨리 군왕이 깨어났다는 것을 알렸다.
휘장 너머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추고, 대청에서 구슬발이 걷히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안쪽으로 들어왔다.
“전하, 어서 다시 누우세요.”
소심이 반쯤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을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정교랑은 미소를 지으며 진안 군왕의 가까이로 다가가 그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이 많이 맑아졌어. 오래 누워 있었으니 잠시 앉아 계시게 해.”
정교랑의 말에 시녀들이 서둘러 베개를 가져와 진안 군왕의 등 뒤에 받치고 바르게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너무 오래 누워 있긴 했나 보군. 눈이 어질어질해.
이때, 누군가의 손이 진안 군왕의 어깨에 닿았다. 얇은 여름옷 위로, 손의 부드러운 촉감과 따스한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입술만 적셔요.”
정교랑이 한 손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그의 입가에 찻잔을 가져다 댔다. 진안 군왕이 순순히 정교랑의 말에 따라 입술을 적셨다.
“부인, 밥상은 어디에 차릴까요?”
시녀가 바깥에서 물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앉아서 식사를 하신다고?”
바깥 곁채에서 밥을 먹고 있던 고 선생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감격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걸음을 옮겼다.
“전하께서 일찍이 정 낭자와 혼인을 맺지 않은 게 후회될 정도지요?”
경 공공이 웃으면서 물었다.
“일찍이? 일찍이었다면, 전하께서는 정 낭자와 혼례를 치를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 정 낭자를 순장시킬 작정이 아니었다면, 태후마마께서는 절대로 전하와의 혼사를 추진하지 않았을 걸세.”
그리고 지금쯤 태후마마께서는 땅을 치며 후회하고 있겠지.
“정 낭자가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들었다만, 소문으로 듣는 것과 실제로 그 대단함을 목도하는 것은 사뭇 다르군.”
고 선생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심지어 이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다 별일 아니라는 느낌이 들 정도예요. 마음이 참 홀가분해졌습니다.”
경 공공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정말 군왕부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위험했어. 하지만 그때 들어온 정 낭자는 단 몇 마디만으로 국면을 반전시켰지. 하늘과 땅을 뒤엎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일 테지.
다른 건 다 제쳐 두고, 전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게 관건이야. 전하께서 다시 살아나실 수 있었던 건, 절대적으로 정 낭자 덕분이고.
유가의 제자로서 귀신이니 신선이니 하는 이야기를 믿지는 않지만, 도무지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질 않으니, 신선의 제자라는 말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가 없군.
“제비집 죽을 한 그릇 드셨소.”
이 태의가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몹시 기뻐하는 얼굴로 소리쳤다.
“한동안 식사를 일절 못하시지 않았소이까. 그렇게 많이 드신 것은 처음이로군.”
고 선생이 더욱 기뻐하면서 말했다.
“그런데 자네는 여기서 뭘 하는 건가? 자네가 자리를 피할 필요는 없는데, 어찌 밖에 나와서 게으름을 피워?”
이 태의가 뒤늦게 경 공공을 발견하고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경 공공이 이제 가 보겠다며 일어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먼저 손을 들어 경 공공을 제지했다.
“왕비께서 주위에 사람이 많은 것을 꺼리시네. 우리를 먼저 부르시지 않는 한, 괜히 가서 귀찮게 하지 말게.”
이 태의가 고 선생을 흘겨보면서 말했다.
“어디서 들어본 말인 것 같은데? 고 선생, 그런 건 참 빨리도 배우시는구려.”
방 안에서 세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문가에 서 있던 사환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헤헤 웃었다.
왕부에서 저리 즐거운 웃음소리가 난 게 얼마 만이야. 정말 제대로 액막이를 했나 보네.
은은한 등불이 방을 밝히고, 열린 창문 사이로 들어온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이 얇은 휘장을 흔들었다.
정교랑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반근이 입가심용 차를 내왔다.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들이 방으로 들어와 밥상을 치웠다.
정교랑과 진안 군왕이 식사를 마쳤다는 소식에, 경 공공과 이 태의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의 맥을 짚으면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진안 군왕은 아직 정상적인 대화를 할 수는 없었지만,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나아진 상태였다. 이 태의는 너무 기쁜 나머지 쓸데없는 말까지 해가며 이것저것 물었다.
진안 군왕은 이 태의의 말을 흘려들으면서 그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가에 앉아 경 공공과 대화하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의 피부는 더욱 뽀얗고 매끄러워 보였다. 정교랑은 두 눈을 반짝이면서 진지하게, 때로는 여유롭게 경 공공의 말을 경청했다. 그런 정교랑의 태도 덕분에, 말하고 있던 경 공공은 정교랑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던 동시에 다소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전하?”
이 태의가 진안 군왕의 시야를 가리고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제 말을 들으셨는지요?”
“말할 게 뭐 있다고. 먹어야 할 약이 있다면 먹고, 놔야 할 침이 있다면 놓으면 되지. 이 태의는 말이 너무 많아.”
이 태의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 이 태의가 고개를 돌리고 진안 군왕의 시선이 머물렀던 정교랑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교랑과 대화하고 있던 경 공공이 경악한 기색으로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진안 군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전하께서도 가셔야 한다고요?”
경 공공은 내일 혼례 풍습 중 하나인 신부의 친정 나들이에 대해 정교랑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진안 군왕의 몸이 좋지 않다 보니 당연히 내일 일은 미뤄지거나 취소될 줄 알았는데, 정교랑이 내일 경성에 있는 친정에 가면서 진안 군왕까지 데리고 가겠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전하의 몸 상태가…….”
내용을 들은 이 태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교랑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다 나아요.”
정교랑이 말했다.
내일이면 다 낫는다고?
이 태의와 경 공공이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진짜야 가짜야?
군왕부에 밤이 찾아왔다. 정교랑이 목욕을 마치자, 진안 군왕도 내시와 궁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치고 다시 침상 위로 돌아왔다.
“머리는 말렸고?”
정교랑이 묻자, 어린 내시가 공손하게 예를 올리며 대답했다.
“부인, 전하는 머리를 감지 않으셨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만 물러가거라.”
내시들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물러갔다. 반근과 소심이 방 안에 있던 등불 두 개를 끄고 내시들을 뒤따라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내가 여기서 당직을 설게. 너는 방에 가서 자.”
소심의 말에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낮에 그리 큰일이 있었잖아. 나도 여기 남아 있을래.”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두 사람이 조용히 대화하는 사이, 안채에서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벗어요.”
일순간 몸이 굳어진 반근과 소심이 놀란 토끼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지, 아니야. 사람이 잠을 자려면 당연히 옷을 벗어야지.
“오늘도 또 하려고요?”
진안 군왕의 허약한 목소리가 뒤이어 들려왔다.
반근과 소심이 재빨리 서로의 눈을 피했다. 얼굴이 불에 덴 듯 빨갛게 달아올랐다.
소심이 반근의 손을 덥석 잡고 허둥대며 대청을 빠져나가서 곁채로 달려갔다. 소심이 재빨리 방 안의 모든 등불을 끄자, 어둠이 드리워진 저쪽 침실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소심이 침상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아씨, 부디 전하를 살살 다뤄 주세요.
동이 트고, 문이 열릴 무렵이었다. 경 공공은 사람들을 데리고 정교랑의 거처 대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정교랑이 시간에 맞춰 나오자, 경 공공 등이 공손히 문안 인사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반근과 함께 연무장으로 향했다.
마당에 있던 소심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여종들에게 오늘 출타할 때 챙겨야 할 것들을 지시하고 있었다. 마당 안으로 경 공공이 들어오자, 소심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전하께서 아직 주무시니 방해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소심의 말에, 경 공공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께서 참으로 다정하시네.”
소심이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고는 경 공공에게 차를 올리라고 시녀에게 지시했다.
“저는 보양탕이 잘 끓고 있나 보러 갈게요. 부인께서 특별히 전하를 위해 끓이라고 당부하셔서요.”
경 공공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소심 낭자, 어서 가서 볼일 보게나.”
경 공공은 대청 안에 서서 편안하게 숨을 골랐다. 이른 아침의 맑은 공기가 더없이 상쾌했다. 바람이 불어오자, 어딘가에서 풍경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라? 이제야 봤네. 풍경을 언제 달았대.”
경 공공이 작게 웃으면서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신방을 꾸밀 때는 없었는데. 역시 여인은 여인이야. 이런 작은 장식품에도 신경을 쓰고 말이야.
경 공공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방 안을 둘러보았다.
크게 변한 건 없는 것 같은데, 곳곳에 신경 쓴 티가 나는군.
향로, 나무와 새가 그려진 병풍, 그리고 자단목으로 만들어진 낮은 받침대.
저런 자그마한 가구들을 들여왔을 뿐인데, 방 안의 분위기가 사뭇 편안해졌네. 그래, 이런 곳이야말로 집이지.
몇 사람이 대청 안에 서서 기다리던 중, 내실에서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경 공공이 서둘러 안쪽으로 들어가 문을 열었다.
휘장 안쪽에서 삐져나온 손이 휘장을 걷으려는 듯 버둥거렸다.
“전하.”
경 공공이 기뻐하면서 잰걸음으로 침상에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갑자기 비치는 햇살에 눈이 부셨는지, 진안 군왕이 음, 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볼 겨를이 없었다. 그저 입이 떡 벌어진 표정으로 휘장에서 손을 놓지 못할 뿐이었다. 그러다 경 공공은 연민이 섞인 눈빛으로 진안 군왕을 내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이번에도 윗옷을 입지 않은 채 침상 위에 엎드려 있었다. 이번에는 어깨뿐 아니라 등 전체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제 손으로 꼬집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같은 곳을 또 마구잡이로 꼬집었는지, 몇몇 곳에서는 혈흔까지 보였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네. 그래서 부인께서 보양탕을 끓이라고 하셨구나. 정말 제대로 보양하셔야겠어.
“목욕을 하고 싶네.”
진안 군왕의 낮은 목소리가 이불 사이에서 들려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경 공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어린 내시들을 재촉하면서 따뜻한 물을 준비하게 했다.
“너무 뜨겁게 하진 말거라. 상처가 따가우실 테니.”
경 공공이 조용히 당부하고는, 방을 나가는 내시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태의에게 약이라도 좀 받아 와야 하나?
궁에는 그런 약이 많기는 한데, 다 여인들에게 쓰이는 것이었어. 사내에게 쓰는 약이 있다고는 듣지 못했는데. 감히 폐하의 옥체를 이런 식으로 상하게 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경 공공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그떄, 그의 등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경 공공은 그 자리에서 얼어버린 듯 입을 떡 벌린 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윗몸을 훤히 드러낸 채, 속바지만 입고 휘청거리면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한 걸음씩 내디디며 혼자 욕실로 들어갔다.
“전, 전, 전, 전하!”
경 공공이 말을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내가 부축해 달라고, 부탁이라도 해야 하나?”
진안 군왕의 성가시다는 표정과 불쾌한 말투에 경 공공은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댔다. 그러고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면서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전하! 아이고, 전하!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경 공공이 허리를 숙이고 엎드린 채 울먹였다.
적절한 온도로 맞췄음에도 불구하고, 목욕통에 몸을 담그던 진안 군왕의 몸은 잔뜩 움츠러들었다.
“아프시지요?”
경 공공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면서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의 몸에 물을 끼얹었다.
“이런 건 아픈 축에도 못 낀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하긴, 이 상처들을 만들어 낼 때가 더 아프셨겠지.
경 공공이 울상을 지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남녀 사이의 그런 일들이 꼭 다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네.
경 공공은 진안 군왕에게 연민의 눈빛을 보내며 더욱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따뜻한 물 속에 편하게 누운 진안 군왕은 조금 전보다 고통이 덜한지, 천천히 몸에 힘을 빼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때, 실내에서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향이 그의 코끝을 스쳤다.
낯선 이유는 그가 군왕부에서 지내며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했던 향이기 때문이고, 익숙한 이유는 요 며칠 내내 은은하게 맡았던 향이기 때문이다.
진안 군왕이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작은 욕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옆에 세워진 옷걸이에는 여인의 치마저고리가 걸려 있었다.
이제 여기는 나 혼자만 쓰는 곳이 아니구나. 같이 쓰는 사람이 한 명 더 늘었어.
“부인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밖에서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가 안으로 들어섰다.
“보양탕이 준비되었어요. 부인께서 먼저 드셔 보시겠어요?”
부인!
진안 군왕의 심장이 갑자기 쿵쾅대기 시작했다. 그가 저도 모르게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내, 부인!
“전하? 괜찮으십니까?”
경 공공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괜찮다. 요즘 계속 혼미한 탓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구나. 여기서 일어난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 읊어 보거라.”
경 공공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려던 찰나, 진안 군왕이 목욕통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진안 군왕이 말하면서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아직 몸이 허하시고, 여긴 욕실이라 바닥도 미끄러울 텐데, 어찌 그리 바삐 움직이십니까.
경 공공이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진안 군왕이 욕실에서 걸어 나오자, 대청에서 들려오던 웃음소리가 멈췄다. 구슬발 너머에서,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서둘러 진안 군왕을 향해 예를 올리던 시녀들은 진안 군왕이 두 발을 땅에 딛고 욕실에서 혼자 걸어 나온 것을 눈치채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다시 고개를 홱 들었다.
진안 군왕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안채의 창가에 앉았다. 경 공공이 그의 곁으로 가서 꿇어앉았다.
두 시녀와 내시가 욕실 안으로 들어가서 빠르게 욕실을 정리했다.
“부인, 이제 씻으시러 가시지요.”
정교랑이 욕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경 공공이 아, 하고 짧게 감탄했다.
아침마다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니, 당연히 땀을 씻어내셔야지.
“왕비께서 정말 부지런하십니다. 역시 보검은 연마해야 다듬어지고, 매화향은 한겨울의 찬바람을 맞으며 피어나는군요.”
“전하, 보양탕을 드시지요.”
진안 군왕의 시녀가 그릇을 들고 다가왔다.
“왕비께서 전하를 위해 특별히 만들라고 하신 겁니다.”
경 공공이 웃으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진안 군왕이 손으로 그릇을 받아오면서 말했다.
“하던 얘기부터 마저 하자.”
여전히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진안 군왕의 기세는 많이 회복된 듯했다. 경 공공은 감격스럽기도, 기쁘기도 하여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시녀들이 자리를 비키고, 경 공공이 조용조용 말하는 소리만이 실내를 채웠다.
같은 시각 욕실 안에서는 반근이 신난 얼굴로 재잘댔다.
“아씨, 전하께서 정말로 다 나으셨나 봐요!”
반근이 정교랑의 머리카락이 젖을까 봐 조심스럽게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올려 묶고 있었다.
“병에 걸린 것도 아니잖아.”
정교랑이 가볍게 물을 두어 번 끼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서 느릿느릿 나을 필요가 없는 거예요?”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하얀 천으로 정교랑의 몸을 감쌌다. 그러고는 옷걸이에서 새로 꺼낸 치마를 정교랑에게 입혀 주었다.
“나았으면 됐지요. 하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정교랑은 치마저고리를 건네받고 천천히 입으며, 헤실대는 반근을 보고 피식 웃었다.
“정말 안 나을 줄 알고 걱정했어? 그럴 리가 있겠니?”
반근은 마냥 좋다는 듯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었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정교랑이 말하고는 치마저고리를 마저 입고 욕실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죽은 건, 한 명으로 족해.
사공자님 한 명이면 족하지.
반근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으면서 눈가에 슬픔이 드리워졌다.
정교랑이 욕실에서 나오자, 경 공공은 하던 말을 멈추고 정교랑을 향해 예를 올렸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이고 대청으로 걸어갔다.
“이제 알겠으니, 그만 물러가거라.”
진안 군왕의 말에 경 공공이 흠칫 놀랐다.
아, 아직 못다 말씀드렸는데요?
경 공공은 진안 군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진안 군왕의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춘 정교랑을 슬쩍 보고는 잠자코 예를 표한 뒤 물러났다.
“지금 밥 먹을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그러자 진안 군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쥔 보양탕 그릇을 내려놓았다.
“밥상을 들여라.”
정교랑이 말하자 문밖에 서 있던 시녀들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자네는 어째 툭하면 자리를 비우는 것인가?”
풀이 죽은 듯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걸어오는 경 공공을 본 고 선생이 물었다. 경 공공이 소매 안으로 손을 넣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고 선생은 경 공공이 암울한 표정으로 한숨까지 쉬자 깜짝 놀랐다.
“왜 그러나? 전하께 또 무슨 일이 생긴 겐가?”
고 선생이 다급하게 물었다.
“전하께서 변하셨습니다.”
경 공공이 또 한숨을 푹 쉬면서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전하의 몸 상태가 또 변했다는 겐가?”
고 선생이 몸을 앞으로 내밀면서 물었다.
“전하의 몸 상태가 변한 게 아니라, 전하께서 변하셨다고요.”
경 공공이 손을 휘휘 저으면서 말하자, 고 선생이 멈칫했다.
“예전의 전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는 걸 제일 좋아하셨습니다. 시끌벅적한 걸 싫어하셨지요. 심지어는 선생 같은 막료들과 대화하는 것도 별로 안 좋아하실 정도로요.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내게 이야기하시고,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항상 내 이야기만 들으시고, 내게만 말을 거셨어요. 그런데 지금은 왕비만 보였다 하면, 내 말도 끝까지 안 듣고 밖으로 내쫓으신다니까요.”
경 공공이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푹 쉬면서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내게 눈길 한 번을 안 주시지 뭡니까. 내가 방해라도 된다는 듯이.”
경 공공의 말을 듣던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그때 문밖에서 사환이 뛰어 들어왔다.
“주씨 가문의 공자님이 오셨습니다.”
신부의 친정을 방문하는 날에는 신부의 오라버니 중 한 명이 직접 찾아와 집으로 초대를 하며 신부를 데리고 가야 했다. 하지만 정사낭이 없다 보니, 주복이 그를 대신해서 정교랑을 데리러 온 것이었다.
고 선생은 서둘러 사환에게 주복을 안으로 모시라고 한 뒤, 경 공공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만 울게나. 손님 맞이할 시간이네.”
경 공공이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내가 손님맞이 할 게 뭐 있습니까?”
경 공공은 노비 신분이기 때문에 손님을 맞이할 필요 없이, 신부의 사촌 오라버니가 당도했다고 안에 통보하기만 하면 됐다.
고 선생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벌써 스스로 시어머니처럼 굴고 있지 않나. 그러니 당연히 친정의 사촌 오라버니를 직접 맞이해야지.”
“주 공자님, 전하와 왕비께서는 지금 식사 중이십니다. 마차는 미리 준비해 뒀으니, 잠시 안으로 들어 기다리시지요.”
고 선생이 객청에 서 있는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하자 주복이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그 여인은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이니까.
주복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밖에서 사환이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전하와 왕비께서 나오셨습니다.”
거봐, 시간 맞춰 나올 줄 알았다니까.
주복의 입가에 득의양양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던 주복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더니, 급기야 경악한 얼굴로 밖을 바라보았다.
주복의 표정을 본 고 선생도 그 시선을 따라 밖을 내다보다가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당을 걸어오던 사람 중, 가장 앞서서 걷던 사람은 주복이 기다리던 정교랑이 아니라 젊은 사내였다.
다소 어두운 계열의 주홍색 비단옷을 입은 젊은 사내가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디며 다가왔다. 조금 느리긴 했지만, 진중하게 한 걸음씩 내딛는 모습이 위풍당당해 보이기도 했다.
그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주복은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볼 수 있었다. 무척 야위어 보이는 그의 얼굴은 허약하고 희멀건 색을 띠고 있었지만, 커다란 두 눈만은 빛이 나고 생기가 넘쳤다.
“전, 전하.”
고 선생이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설마 헛것을 보고 있나? 아니야, 틀림없이 전하야.
고 선생이 다시 눈을 떴을 때에도, 눈앞에 보이던 그 젊은 사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점점 가까이 걸어와 층계를 오르고 회랑 아래에 멈춰 서기까지 했다.
“육낭이 왔군.”
진안 군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주복을 보며 미소 지었다.
어떻게 저 모습이 된 거지?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내시들의 부축을 받으면서 힘겹게 걸음을 옮겼고, 혼례 때 맞절을 하면서도 곧 쓰러질 거 같았던 모습이었는데? 심지어는 내시 둘이서 부축을 해도 힘에 부쳤다고.
태후가 부랴부랴 출궁해 달려올 정도라던 말은, 다 거짓말이었나?
주복이 대청 안으로 들어오는 진안 군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직 안색이 어둡긴 했지만, 화사한 주홍색 옷 덕분인지 심각할 정도로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피부에서는 어렴풋하게 광채가 느껴졌고, 온화한 표정 속 깊고 큰 두 눈은 더욱 반짝여 보였다.
진안 군왕은 누가 보아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생기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왜 잠시 앉다 가지 않고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복이 정신을 차리고 진안 군왕의 뒤에서 걸어오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겼다.
내가 저 여인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니! 진안 군왕의 등장이 모든 사람의 이목을 빼앗은 거야? 저놈한테 뭐 볼 게 있다고!
주복은 속으로 씩씩댔다.
신혼이었기에 정교랑도 진안 군왕처럼 붉은색 비단옷을 입긴 했지만 평소처럼 나무 비녀와 작은 은빗 외에는 별다른 장신구를 하지 않았다.
맑은 눈빛과 담담한 표정, 붉은색 옷을 제외하고는 모든 게 그대로인 것 같았다.
“다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
주복이 시선을 거두고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가는 건 어떻겠나?”
진안 군왕이 말했다. 대청 안팎에 있던 사람들이 진안 군왕의 말을 따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주복이 정교랑을 흘깃 보고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의 의장 행렬이 대문 앞을 떠나자, 고 선생과 이 태의는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하고 싶다가도, 무슨 말로도 마음속의 이 감격스러운 감정을 표현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고 선생이 먼저 정적을 깨고 고개를 끄덕였다.
“왕비께서는 역시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보시는군.”
전하께서 오늘 나을 거라고 말씀하시더니, 정말로 전하를 낫게 하셨어.
마차는 정씨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본 정씨 가문의 사람들은 고 선생이나 이 태의, 그리고 주복보다도 더욱 놀란 얼굴이었다. 정씨 저택 주위에서 진안 군왕을 염탐하는 사람들 또한 그러했으리라.
진안 군왕에 관한 소식은 금세 경성 전역에 퍼졌다.
“스스로 걸을 수 있다고?”
고 관인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예, 남들의 부축도 없이 비틀거리지도 않고 혼자서 잘만 걷더라고요. 심지어 정 낭자가 마차에서 내릴 때, 군왕이 몸을 돌려서 정 낭자의 손을 잡아 주기까지 했습니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연기한 거겠지.”
고 관인은 미간을 찌푸렸고, 고능준은 콧방귀를 뀌었다.
“죽을 때는 연기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더니, 멀쩡하게 살아 있으니까 연기라고 의심하는 게냐?”
고 관인이 민망해하면서 말했다.
“아, 아버지. 이렇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누군가가 문밖에서 다급하게 들어왔다.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진안 군왕부에 심어 둔 사람도 말을 전해 왔습니다. 어제부터 몸이 점점 나아져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아예 침상에서 내려와 걸을 수 있게 되었다고요. 내실에서 대문까지 걸어 나가는 동안 아무도 군왕을 부축한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 태의는 오늘부터 약을 달이거나 침을 놓는 일도 일절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군왕비가 진안 군왕은 완전히 나았다고 말해서요.”
막료가 말을 끝내자, 고능준이 잠시 침묵했다.
고 관인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멀쩡하게 나을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없다니?
고능준이 탁자에 손을 올렸다.
“그 여인이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는 걸 잊은 게냐.”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다시 막료에게 물었다.
“그쪽에는 몇 명이나 남아 있지?”
“어제 한 번 정리가 되긴 했지만, 다행히도 아직 세 명이 남아 있습니다.”
막료의 대답에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정말로 발각되지 않은 자들이고?”
“예, 그 세 명은 처음부터 진안 군왕의 시중을 들던 사람들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진안 군왕의 곁에 있던 자들이고, 저희와 직접 접촉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막료가 말했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왜 갑자기 나아졌는지, 무슨 치료법을 썼는지 제대로 조사하라고 하게. 그걸 알아내지 못한다면, 우리의 다음 행보는 방향조차 잡지 못할 테니 말이야. 죽었다 살아나는 건 한 번이면 족해!”
막료가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고씨 저택의 암담한 분위기에 비해, 정씨 저택에는 즐거운 분위기가 넘실거렸다. 정씨 저택에는 범강림 내외뿐만 아니라, 진소 부인도 같이 있었다.
진안 군왕을 본 진소 부인은 환하게 웃으면서 진심으로 기뻐했다.
“나았으면 됐네요. 다 나았으면 됐어요. 그날 어찌나 놀랐는지.”
진소 부인이 말했다.
그날 태후가 급히 군왕부로 달려갔다는 소식을 듣고, 진안 군왕이 위독하다고 생각한 사람이 많았다.
“내가 나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마께서 특별히 날 보려고 행차하셨던 겁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좋지 않았던 탓에, 마마께서 신경을 많이 쓰셨거든요. 안 그래도 이미 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내일 내가 직접 궁으로 가서 태후마마의 은혜에 감사드리려고요.”
진소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 군왕이 폐하와 태후마마의 총애를 독차지했다던데, 이러니 당연히 예뻐할 수밖에.
진안 군왕이 나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범강림은 간단하게 안부 인사를 한 뒤 사람들을 연회석으로 초대했다.
“오늘은 이대작과 반근이 요리를 했습니다.”
범강림이 말했다.
이대작과 찬모 반근이 정교랑과 진안 군왕 앞으로 다가가 큰절을 올렸다. 경 공공이 서둘러 두 사람에게 붉은 천으로 감싼 돈 봉투를 건넸다.
“그날 아씨를 배웅해 드리지 못했어요.”
몸종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울먹였다.
그날 제가 얼마나 걱정했는데요. 아씨의 친영 행렬이 초라할까 봐, 군왕 전하의 몸이 버티지 못할까 봐.
“배웅을 못 하다니, 진짜 아쉬웠겠다.”
소심이 웃으면서 몸종에게 팔짱을 끼고 분위기를 띄웠다.
“그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와서 아씨를 배웅했는데.”
“나도 봤어, 나도! 그날 정 언니한테 글씨 써 주는 사람도 엄청 많았고, 하늘에서는 예쁜 불꽃이 팡팡 터졌어!”
진단랑이 방방 뛰면서 끼어들었다.
몸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웃었다.
“저도 봤어요. 저도 문가에 서서 봤어요. 불꽃놀이는 족히 반나절이 넘도록 하늘을 수놓고 있던데요? 집에 있던 사람들도 전부 나와서 그걸 보느라, 거리 하나가 다 막힐 정도였어요.”
물론 장 노태야께서 밖으로 나와 제가 썩 듣고 싶지 않은 말을 중얼거리긴 했지만요.
그날을 회상하자, 몸종의 웃음이 더욱 짙어졌다.
방 안의 사람들도 그날을 떠올리자 저마다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이제말을 배우기 시작한 소보아도 신나서 끊임없이 옹알이를 했다.
“하지만 아쉬운 게 하나 있어요. 이씨 가문에서 그날 썼던 폭죽들을 팔지 않겠다고 하더라고요. 정 언니, 그 사람들한테 가서 딱 한 개만 나한테 주라고 해 줄 순 없어요?”
진단랑이 울상을 지으면서 말하고는 손으로 정교랑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폭죽뿐만이 아니야. 최 악공네 집에는 사람들이 문턱이 닳을 정도로 찾아갔는데, 악보를 절대로 보여 주지 않겠다고 하더라고. 지금 세간에 떠도는 정씨 송혼곡은 그날 최 악공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이 기억을 더듬어 짜깁기한 거야. 어디선가 누가 정씨 송혼곡을 연주할 수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난리를 치며 우르르 몰려가 자리다툼을 할 정도라니까?”
진소 부인이 웃으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대청 안에 있던 사람들은 여종이고, 몸종이고 할 거 없이, 다들 신이 나서 자신이 보거나 들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웃고 떠드는 소리 덕분에 연회석은 몹시 즐거워 보였다.
한쪽에 앉은 진안 군왕이 세 반근과 진단랑에게 둘러싸인 정교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장면에 진안 군왕의 입가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때,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어깨를 툭툭 쳤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보자, 주복이 그를 향해 눈짓했다.
“잠시 측간에 다녀오겠네.”
진안 군왕이 말했다. 범강림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찰나, 주복이 먼저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겠습니다.”
주복이 말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진안 군왕이 범강림에게 괜찮다는 의미의 미소를 보이고 주복을 따라 연회석을 나섰다. 문턱을 넘어서던 진안 군왕은 자신의 등 뒤로 들려오는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을 느꼈다.
아무래도 내가 있을 때는 다들 조심스러운가 보군.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릴 때,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 하나가 진안 군왕의 옷을 잡고 모퉁이로 끌고 갔다. 주복이 진안 군왕을 벽으로 몰아세우며 눈을 부라렸다.
“연기하신 겁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다 연기한 거냐고요! 애초에 아무 일도 안 생겼던 겁니까?”
주복이 떨리는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진안 군왕은 그의 손도 같이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군왕께서 왜 연기를 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고, 묻지도 않겠습니다. 무슨 필요가 있어서거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겠지요. 다만, 제가 아는 건 딱 한 가지입니다. 정사낭이 죽었습니다. 정사낭이 죽었다고요!”
진안 군왕이 주복을 빤히 바라보다가, 옷을 잡고 있던 그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연기한 게 아닐세. 정말로 그 여인이 나를 치료한 거야.”
하지만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주복은 여전히 진안 군왕의 옷을 놔주지 않았다. 주복의 퀭한 눈 밑은 그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음을 설명해 주고 있었다.
“육낭, 나는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 여인까지 믿지 않을 수 있겠나? 이 모든 게 가짜이고 연기인데, 정사낭의 죽음만 진짜라면, 내가 이리 멀쩡하게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주복이 진안 군왕의 옷깃을 놓았다.
하긴, 그 여인은 원한과 은혜를 명확히 구분하는 사람이야. 이놈 말대로 만약 그 모든 게 가짜였다면, 그 여인이 절대로 자신의 체면을 위해 진안 군왕을 치료해 줬을 리 없어.
“육낭, 나는 그 여인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네.”
진안 군왕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단호한 눈빛으로 말을 덧붙였다.
“전에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걸세.”
주복이 진안 군왕을 노려보았다.
“육낭이라고 부르지 마십시오.”
주복이 몸을 돌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이봐, 자건.”
진안 군왕이 입꼬리를 올리고 주복을 불렀다. 주복의 자(字)는 자건(子健)이었다.
“자건!”
진안 군왕이 또 그를 불렀다. 주복이 씩씩대면서 고개를 홱 돌리자, 진안 군왕이 그를 향해 빙긋 웃었다.
“측간은 어디에 있지?”
<교랑의경> 2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