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5화 (135/160)

-소심-

“부인께서 사용하실 서재를 다 정리했는데, 어떤지 한번 봐 주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다리도 좀 바쁘네.”

반근이 부채로 시녀의 어깨를 톡 치고는 헤헤 웃었다. 시녀가 웃으면서 여종과 반근을 따라 서재로 향하려던 그때, 안채에서 정교랑이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인, 필요한 게 있으세요?”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손에 쥔 붓을 멈추고 시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넌 이름이 뭐지?”

정교랑의 물음에 시녀는 깜짝 놀라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아씨, 왜, 왜 그러세요? 아씨, 안 돼요. 절 내쫓지 마세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왕부 여종들과 웃고 떠들며 똑 부러지게 이야기하던 시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정교랑이 빙긋 웃었다.

“전에는 너희가 내 곁에서 이렇게 오래 머무를지 몰랐어.”

시녀가 고개를 들고 눈물이 고인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하긴, 난 아씨 곁을 지키던 몸종을 대신해 온 거잖아. 그 몸종을 반근과 바꿨던 거고.

“그래서 너희를 굳이 기억하려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정교랑의 미소를 보자, 시녀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떨궜다.

분명히 아무런 말도 아닌데, 왜 듣자마자 눈물이 나오는 걸까?

기억하지 않으면, 잃게 되었을 때 괴롭지 않아서였을까?

“그런데 지금 보니까, 너도 딱히 갈 곳이 없어 보이네.”

정교랑의 말에, 눈물을 흘리던 시녀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웃는 순간에도 눈물이 떨어졌지만.

그렇긴 하네. 이제는 아무도 아씨께 섣불리 몸종을 맞바꾸자고 요구하지 못할 테니까.

그래, 난 아씨의 곁에 쭉 남아있을 거야. 영원히.

“그래서, 네 이름이 뭐라고?”

정교랑이 물었다. 시녀가 눈물을 훔치고 바른 자세로 고쳐앉은 뒤, 정교랑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이고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소인 소심(素心), 아씨를 뵈옵니다.”

“소심.”

정교랑이 소심의 이름을 한 번 되뇌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서 일 봐.”

소심이 알겠다고 한 뒤, 예를 표하면서 물러났다.

“소심.”

문밖에서 반근이 소리쳤다. 소심이 반근을 보면서 왜 부르냐는 눈짓을 보냈다.

“소심.”

반근이 헤헤 웃으면서 또 한 번 시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녀가 피식 웃고는 반근을 향해 못 말린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어 시녀 소심은 고개를 들고 마당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여종을 쳐다보았다.

“갈까요?”

소심이 눈을 반짝이면서 말했다.

화기애애한 신방 분위기에 비해, 진안 군왕의 거처에는 묵직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거요?”

고 선생이 서성이던 걸음을 멈췄다. 이 태의가 손등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생각하는 중이오.”

고 선생이 또 이리저리 서성이기 시작했다. 내시는 침상 옆에 꿇어앉아 따뜻한 수건으로 진안 군왕의 어깨와 가슴을 닦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 여전히 윗옷을 걸치지 않고 침상 위에 누워있었다. 그래서인지 어깨와 가슴팍에 새파랗게 멍든 자국이 더욱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이건 손으로 꼬집은 것이 분명합니다. 어찌 전하께 이리도 잔인하실꼬.”

내시가 울먹이면서 말했다.

“그걸 말이라고? 맨손으로 사람 목도 꺾어 버리는 여인이잖나. 잔인하지 않은 게 이상한 거지!”

고 선생이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치자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렸다.

“우리 불쌍한 전하, 도대체 이게 무슨 고생이십니까.”

“지금 전하를 탓하는 겐가?”

고 선생이 몸을 홱 돌리고 더욱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건 다 자네들이 꾸민 짓이 아닌가! 그 여인이 군왕부로 들어오자마자, 그 여인이 든든한 뒷배라도 되는 듯 모시며 떠받들고 있었으니 원. 전하의 상태가 위독했을 때도, 그 여인의 도움 없이 고비를 잘 넘겼거늘!”

고 선생이 말하는 사이, 잠시 밖으로 나갔던 이 태의가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아니면, 부인께 한 번 여쭙는 것이…….”

“이사신!”

고 선생의 포효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이때, 황궁에서 태후의 전갈을 전하러 온 내시가 진안 군왕의 거처로 발을 들였다. 그가 들어오자, 고 선생은 어쩔 수 없이 입을 꾹 다물었다.

태후의 내시가 침상 가까이 다가가 진안 군왕을 보고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세상에나! 어찌 전하께서 이리되신 것이오!”

태후의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방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따지듯이 물었다.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 않았소?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오?”

방 안의 사람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고 허리 숙여 사죄했다.

“소인들이 무능하여 그렇습니다.”

태후의 내시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전하의 몸은 본디 안 좋으셨으니.”

내시는 말을 바꾸며 정교랑에게 예를 표했다.

“그래서 마마께서는 특별히 시일을 앞당겨 부인을 왕비로 책봉하고자 하십니다.”

정교랑은 그제야 무릎을 꿇고 내시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께 감사드립니다.”

정교랑이 큰절을 올리고는 내시가 건넨 금책(金冊)과 인장 등을 받았다.

“그럼 군왕비께서는 소인과 함께 입궁하여 감사 인사를 올리시지요.”

내시의 말에 정교랑이 대답했다.

“알겠네, 공공, 잠시 기다려 주게.”

정교랑은 안채로 들어가 군왕비의 대례복으로 갈아입은 뒤, 내시와 함께 마차를 타고 떠났다.

고 선생을 포함한 군왕부 사람들은 그제야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왜 군왕비 책봉을 서두르시는 거지?”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어차피 이 혼사는 액막이를 위한 것이니, 뭐든 빨리빨리 처리하시려는 거겠지요.”

한 막료가 대답했다. 하지만 고 선생은 고개를 저었다.

“진심으로 액막이를 하려던 것이었다면, 혼례 당일까지 그토록 신부를 홀대하진 않았을 거요.”

고 선생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차츰 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내다보았다. 그가 잔뜩 찌푸린 미간을 펴지 못하고 조용히 물었다.

“궁에 아직 우리 사람이 있는가?”

내시가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대답했다.

“조금은 남아 있을 겁니다. 태후마마 측근에 사람을 두기는 힘들지만, 소식을 전하는 정도는 가능하지요.”

고 선생이 한숨을 쉬었다.

“대단한 능력이 있는 여인 아닌가. 적어도 저 자신을 지킬 능력은 있겠지.”

고 선생이 콧방귀를 뀌면서 말하고는 고개를 돌리고 방 안으로 들어간 이 태의를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자네, 이 태의! 자꾸 누구에게 기대려고 하지 말고, 빨리 전하를 낫게 할 방법을 생각해 내는 게 좋을 걸세!”

이 태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알겠다고 했다.

“가자. 약을 바꿔 봐야겠다.”

이 태의가 아이에게 말하자, 아이는 내시 두 명을 데리고 서둘러 이 태의를 따라갔다.

황궁 안.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군왕비에 책봉한 은덕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절을 올렸다.

태후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자, 옆에 있던 궁녀가 서책 한 권을 들고 여칙(女則)을 줄줄이 읊었다. 정교랑은 태후의 가르침에 감사하다며 다시 한번 태후를 향해 절을 올렸다.

“다들 군왕비가 엄청난 의술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데.”

태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후는 ‘다들’과 ‘엄청난’이라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태후의 말투에는 냉소와 비아냥이 가득 묻어 있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숙인 채 태후의 말을 듣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일찍이 황상에게 이 혼사를 윤허해 달라는 청을 올렸기에 이번 혼사가 성사된 것이야. 그러니 위낭의 진심을 절대 저버리지 말고, 지아비를 하늘처럼 떠받들며 잘 모셔야 한다. 무엇보다 군왕이 하루빨리 건강을 되찾을 수 있도록 잘 돌봐 주고.”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했다.

“위낭은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어. 궁에 들어올 때는 위낭이 참 어렸지. 툭하면 여기가 아프고, 툭하면 저기가 아파서 애가가 얼마나 고생하며 위낭을 키웠는지 몰라.”

태후가 회상에 젖은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태후의 눈앞에 아장아장 걷던 어린아이가 점점 더 자라나 늠름한 청년이 되어 환한 미소를 짓는 모습이 떠올랐다.

마마, 저는 마마의 궁에 와서 노는 게 제일 재미있습니다.

마마, 마마께서 내주시는 음식이 제일 맛있습니다.

태후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마!”

옆에 있던 내시가 다급하게 무릎을 꿇고 태후를 불렀다.

“우리 위낭은 애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니, 꼭 잘 보살펴야 한다.”

태후가 회상을 멈추고 울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태후를 힐끔 쳐다보고는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예, 그건 신첩의 본분이지요.”

“마마, 눈물을 흘려서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의 혼사는 경사가 아닙니까.”

내시가 웃으면서 태후를 다독이고는 궁녀에게서 따뜻한 수건을 받아와 태후에게 건넸다.

“마마께서 더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된다는 태의의 당부가 있지 않았습니까. 만에 하나 태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군왕 전하께서 얼마나 근심하시겠습니까.”

내시가 말했다.

태후마마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군왕 전하께서는 근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근심하시겠지요.

태후가 내시의 말을 알아듣고 수건을 받아 눈물을 닦았다.

“그래. 이건 경사스러운 일이니, 어서 황상에게 가서 소식을 전해 황상을 기쁘게 해 드리거라.”

태후가 정교랑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정교랑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몸을 일으키고 태후궁 밖으로 물러났다.

황제를 보러 가라는 말인즉 황후를 만나러 가라는 뜻과 다름이 없다. 정교랑이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본 황후는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태후가 이리로 보낸 것이냐?”

황후가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문을 닫은 내시를 보며 정교랑에게 물었다.

“너와 본궁이 도둑이라도 되는 듯 경계하고 막으면서, 오늘은 어째서 이리로 보낸 거지? 태후도 분명 알고 있을 텐데. 여긴 태후의 사람이 들어오지 못한다는 것을.”

태후의 말에 정교랑이 아, 하고 대답했다.

“이젠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겠죠.”

막을 필요가 없어졌다고?

미간을 찌푸리던 황후가 갑자기 무언가를 알아차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큰일 났구나!”

황후가 경악한 얼굴로 말했다.

“됐다.”

이 태의가 더는 부글부글 끓지 않는 약탕기를 바라보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번에는 약재도 새로 바꿨고, 뭉근하게 타는 불과 세차게 타는 불을 번갈아 가면서 탕약을 끓였으니, 분명 효과가 나타날 거야. 적어도 전하의 정력 보충은 될 터이니 곧 잠에서 깨어나시겠지.

아이가 약탕기에서 탕약을 따른 뒤, 한참 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어린 내시에게 그릇을 건넸다.

“가자.”

이 태의가 말했다. 약방을 나와서 짧은 회랑을 지나면 바로 진안 군왕의 거처가 있었다.

“경 공공은?”

방 안에 들어선 이 태의가 물었다. 방 안에는 두 내시와 두 시녀만 있을 뿐, 항상 자리를 지키던 경 공공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전에 고 선생이 부르셔서 잠시 나가셨습니다.”

시녀가 대답했다.

이 태의가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들이 서둘러 진안 군왕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게 했다. 한 내시가 학취호(鶴嘴壺: 학의 부리를 닮은, 주둥이가 얇고 긴 주전자)에 탕약을 따르고 어린 내시와 함께 진안 군왕에게 조심스레 약을 먹였다.

“이제 됐다. 너희는 여기서 전하의 상태를 잘 살피거라. 전하께서 깨어나신다면 즉시 나를 부르고. 나는 약방에 가서 새 약을 달여야겠다.”

내시와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경 공공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침상 옆에 꿇어앉은 두 시녀와 얼음 대야를 새로 가져다 놓던 두 시녀를 쳐다보았다.

“이 태의는? 아직도 약을 달이고 있다더냐?”

경 공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이미 전하께 약을 한 차례 올렸습니다. 태의께서는 또다시 새로운 약을 달이러 가셨고요.”

경 공공이 그제야 미간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려진 휘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 태의께서 전하께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경 공공이 서둘러 침상 가까이 다가가 휘장을 걷었다.

“전하?”

경 공공이 휘장 안으로 고개를 내밀면서 작은 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하지만 진안 군왕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경 공공이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을 자세히 살펴보고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전하? 전하!”

경 공공이 두 손을 뻗어 진안 군왕의 몸을 덥석 잡았다. 진안 군왕의 몸은 차갑고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안 돼!

황급하게 손을 뗀 경 공공은 그만 뒤로 쓰러져 버렸다.

“전하!”

어린 내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새로 달인 약을 들고 문턱을 넘어서던 이 태의는 갑작스러운 비명에 깜짝 놀라서 손을 살짝 떨었다. 어린 내시가 안쪽에서 구르다시피 밖으로 뛰쳐나왔다.

“전하께서, 전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어린 내시가 울부짖으면서 외쳤다.

돌아가셨다니?

쨍그랑 소리와 함께, 이 태의가 손에 쥐고 있던 탕약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문과 창문을 굳게 닫고 휘장까지 친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방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은 방구석에 놓인 얼음 대야 속에 있는 것처럼 온몸이 으슬으슬하고 소름이 돋았다.

고 선생이 손을 떨며,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이, 이 모습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지 않소? 혼수상태이신 거 아니오?”

고 선생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침상 옆에 있던 경 공공은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아 있었다.

“눈이, 눈이 안 감겨. 내, 내가 전하의 눈을 감기려고 했는데, 눈을 감지 못, 못하시네.”

경 공공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방 안에 들어온 뒤로도, 경 공공은 바보가 된 듯 계속 같은 말만 되뇌었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다니.

중얼거리는 경 공공을 보던 고 선생은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이 태의!”

이 태의는 침상의 반대편에 앉아 손바닥으로 펼쳐진 금침들을 이리저리 쓸고만 있을 뿐, 그중 하나라도 들어 올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몸이 차네. 몸이 차.”

이 태의가 중얼거렸다.

“도대체 이 어찌된 일이오!”

고 선생이 이 태의의 멱살을 잡고 소리쳤다.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전하께서 왜 돌아가신 것이오!”

전하께서 돌아가시다니, 고 선생도 전하의 죽음을 인정한 거로구나.

고 선생마저 진안 군왕이 죽었다고 말하자, 다들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혹시 어젯밤에 그 여인이 한 짓 때문은…….”

누군가가 조용히 말하자, 이 태의가 멈칫하면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 여인!

“살릴 수 있습니다. 그 여인이라면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어요!”

이 태의가 고개를 홱 들고 소리치며 곧장 문밖을 향해 달려갔다. 고 선생이 이 태의의 팔을 단번에 붙잡고 그를 멈춰 세웠다.

“전하께서 누구 때문에 이리되셨는데, 지금 누구를 찾으러 가려는 게요! 이사신, 자네는 도대체 누구의 사람인 게야!”

눈이 벌게진 고 선생이 고함을 질렀다.

“정 낭자 때문이 아니오. 독이 번진 것이오. 독이!”

이 태의가 소리쳤다.

독이 번졌다고?

“무슨 독?”

고 선생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반문했다.

“똑같은 독이오! 그 독이 다시 번진 거라고!”

이 태의가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때, 누군가가 밖에서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조사해 보니, 여기에서 독이 나왔습니다.”

막료가 빈 그릇과 학취호를 들고 오며 말했다. 실내에 있던 시녀와 내시들은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허망한 얼굴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안 군왕이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면, 독을 쓴 범인이 누구든 간에 진안 군왕 가까이서 시중을 든 하인들은 모두 죽은 목숨이기 때문이었다.

“저, 저는 약방에만 있었어요! 저는 계속 사부님의 말씀을 따라서 약방에서 약을 달이고 있었다고요!”

아이가 이 태의의 다리를 붙들고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역시 막으려야 막을 수는 없는 건가.”

고 선생이 읊조리면서 바닥에 주저앉은 시녀와 내시들을 훑어보았다.

저들 중 누구지?

혼례를 올린다는 것을 빌미로, 궁에서 시녀와 내시들을 참 많이도 보냈지. 불순한 의도를 품은 자가 분명 있을 거라 여기고, 전하의 곁에서 수발드는 자들을 신중하게 고르고 또 골랐는데.

그 와중에 전하께서는 고집을 부리며 직접 혼례까지 참석하시느라 기력이 많이 상하신 상태였고, 거기에 태후궁에서 마시지 않고 버린 그 독약 반 잔까지 마저 드셨으니.

전하를 기필코 죽이려는 속셈이야.

누군가가 혼자서 계획한 걸까, 아니면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계획한 걸까.

“가서 부인을 모셔 오거라! 부인께서 살리실 수 있다! 전하께서는 병을 앓으시는 게 아니라, 독에 중독된 것이니, 부인께서는 전하를 살릴 방법을 분명 알고 계실 것이다!”

이 태의가 고 선생의 손을 뿌리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금 그 여인을 부른다고?

또 이렇게 되었네. 전하께서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 때마다, 그 여인은 전하 곁에 없어.

지난번에는 한가롭게 연꽃 놀이를 하러 갔고, 이번에는 황궁에 들어갔고.

고 선생이 힘없이 웃었다.

“태후마마께서 그 여인을 이토록 급히 군왕비에 책봉하시려던 이유가 이거였군. 아니면, 이미 그렇게 하기로 그 여인과 사전에 얘기가 됐겠지. 그것도 아니라면, 또 형제자매나 친인척이 볼모로 잡혀 있다거나.”

이게 정녕, 전하의 운명이란 말인가.

온몸에 힘이 쪽 빠진 고 선생은 뒤에 놓여 있던 의자에 풀썩 앉았다. 그는 허탈한 표정으로 점점 더 멀어지는 이 태의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떻게 됐나?”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순조롭게 끝난 듯합니다.”

수하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럼 정 낭자는?”

고능준이 또 물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인.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황궁에 불러들인 후에 손을 썼습니다. 군왕부에서 황궁까지는 오가는 거리가 있으니, 시간은 충분히 벌었을 겁니다.”

수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자, 고개를 끄덕이던 고능준의 눈가에 안도감이 비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만에 하나의 실수도 없겠지? 세상에 그 정도로 명줄이 질긴 사람은 없을 거야.

제아무리 질긴 명줄이라고 해도, 이토록 치밀한 계획을 이길 수는 없을 터.

고능준이 찻잔을 단숨에 비웠다.

태후궁에서 태후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고, 내 새끼. 어서, 어서 가자. 애가가 당장 가서 우리 위낭을 봐야겠다.”

태후가 다급하게 몸을 일으키자,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부축했다.

“그리고 군왕비에게 당장 왕부로 돌아가라고 전하거라!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아직도 어디서 미적대고 있다는 게냐! 어찌 그리도 한가한 것이야!”

태후가 지팡이를 홱 휘두르면서 소리쳤다.

황후가 한숨을 쉬고는 자신 앞에 평온하게 앉아있는 여인을 바라보았다.

“본궁 생각으로는, 지금 떠난다면, 넌 분명히 잘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황후가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교랑은 황후를 보고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신첩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황후가 웃었다.

“누가 도망치는 것을 좋아할까. 다만, 지금은 좋고 말고를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게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황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두 사람이 정말 천생연분이긴 하네. 예전에도 본궁이 군왕에게 황궁을 떠나 자유롭게 살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 아이도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렸지.”

황후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본궁도 그냥 해 본 말이다. 지금 내 코가 석 자인지라, 남을 도울 처지가 못 돼.”

정교랑이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께서 그리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마마, 마마.”

내시 한 명이 전각 안으로 다급히 뛰어 들어왔다.

“태후마마께서 출궁하여 군왕부로 향하신다고 합니다.”

황후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은 지금쯤 날개를 달아도 도망치기가 힘들겠군. 정 낭자, 그럼 본궁이 더는 붙잡고 있지 않으마. 더 지체했다가는, 이 황궁도 못 빠져나가겠어.”

정교랑이 예를 표하고 작별을 고했다. 정교랑이 밖으로 나가자, 휘장 뒤에서 안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이미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 둔 게 아닐까요?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세상 태평하게 여유를 부리진 않을 거 아니에요. 주씨 가문은 혼례도 치르기 전에 죄다 도망가더니, 역시 진작 예상했나 봐요.”

안비가 입술을 삐쭉이면서 말하다가 황후를 바라보면서 투덜댔다.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이니까 당연히 문제없이 도망칠 테고, 정작 날개가 필요한 사람은 우리 같은데요?”

황후가 안비를 보면서 풉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네게 날개를 달아 준다 한들, 날아갈 수는 있고?”

금군 병사들이 매서운 기세로 말에 박차를 가하며 달려오자, 행인들이 서둘러 길 옆으로 몸을 피했다. 반대편에서 말을 타고 오던 주복은 혹시나 행인들이 자신의 말에 부딪혀 다칠까 봐 말고삐를 당겨 말을 멈췄다.

“궁에서 귀인이 출타하시나 봐요.”

사환이 의장 행렬의 규모를 보면서 말했다.

지금 궁에서 출타할 수 있는 귀인은 딱 한 명밖에 없을 텐데.

생각에 잠겼던 주복의 표정이 급변했다.

주복은 갑자기 말에서 훌쩍 뛰어내리고는, 옆으로 비켜선 행인들 사이를 비집고 금군 병사들이 향하는 곳으로 뛰어갔다.

“공자님!”

사환이 당황해하며 주복을 불렀다.

“그쪽으로 가시면 안 돼요!”

“공자님, 군왕부에 무슨 일이 생겼나 봅니다.”

주점 안, 수하가 창밖의 한 방향을 가리키면서 조용히 말했다. 진호는 고개를 들어 수하가 가리키는 곳을 흘깃 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술을 마셨다.

“태후마마께서 출궁하실 정도라면, 일 처리는 확실히 됐다는 뜻이겠지요. 저들이 이렇게 빠르게 손을 쓸 줄은…….”

수하가 말끝을 흐렸다.

“빠르다니, 뭐가 빨라? 족히 십여 년을 질질 끌었는데.”

진호가 콧방귀를 뀌면서 웃었다. 수하가 진호를 따라 어색하게 웃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진안 군왕이 죽든 말든 그건 저희와 상관없는 일이라지만, 정 낭자는 무사하시겠지요? 저들이 원하는 것은 일거양득일 텐데.”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꺾어서 술잔을 비웠다.

“고능준은 아직도 자신의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나 보군. 고능준은 자신이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릴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지난번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린 사람은 그자가 아니야!”

진호가 술잔을 손으로 세게 쥐었다.

정 낭자를 함정에 빠트린 건 바로 나, 진호지!

혹은, 정 낭자 자신일지도. 정 낭자는 믿지 말아야 할 사람을 믿은 거니까!

진호가 고개를 들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가슴이 아파오고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정 낭자는 무사하시다는 뜻이군요.”

수하가 한결 여유로워진 표정으로 말하다가 눈빛을 반짝였다.

“저기, 정 낭자가 군왕부로 돌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수하의 말에 벌떡 일어난 진호가 창가로 다가가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한 마차가 혼란스러운 거리 위를 다급하게 지나가고 있었다. 화려한 장식이 달린 여름 휘장이 바람에 흩날리면서 마차 안에 단정하게 앉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진호는 지난번 일식이 있던 날, 아비규환인 거리 위에서 홀로 등불을 밝힌 채 유유히 지나가던 정교랑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는 지금처럼 주점의 위층에 서서 정교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교랑을 못 본 지 이 년이나 지났을 때였지만, 그때는 꼭 어제 본 것처럼 정교랑이 친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은 고작 며칠 정도 못 봤을 뿐인데, 꼭 평생토록 정교랑을 만나지 못한 느낌이었다.

진호는 지난번에 자신이 냉큼 아래층으로 달려나가서 정교랑의 마차에 올라탄 뒤, 정교랑을 향해 미소 지었던 일이 생각났다.

납니다.

그리고 그때, 정 낭자는 부채를 흔들며 내게 미소 짓고 있었지. 그러니 지금도 뛰어갈 수 있어. 어서 가!

진호는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지만, 결국 발걸음을 떼지 못한 채 창가에 멍하니 서서 점점 더 멀어져 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고 선생, 고 선생, 태후마마께서 오셨습니다.”

“고 선생, 군왕부 사방이 포위되었소이다.”

다급한 목소리가 고 선생의 귓가에 끊임없이 들려왔다. 하지만 고 선생은 그 말들을 일절 무시했다.

잠시 후,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태후마마, 들어가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태후마마, 슬픔을 거두소서.”

고 선생을 부르던 목소리 대신, 문밖에서 내시들이 태후를 위로하는 말들이 들려왔다.

고 선생은 한숨을 쉬고 손을 들어 소매 속에 든 작은 주머니를 바라보았다.

“경 공공, 그래도 우리가 그간 알고 지낸 정이 있으니, 내가 좋은 것을 좀 나눠 주겠네. 그래야 전하의 뒤를 따라갈 때 조금 더 편히 따라갈 수 있을 테니.”

고 선생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직도 침상 옆에 앉아 몸을 일으키지 못하는 경 공공을 향해 말했다.

경 공공이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이렇게 고생만 하다 가셨는데, 아랫것인 제가 어찌 편히 가겠습니까.”

경 공공이 손으로 바닥을 짚으면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는 잠든 것 같은 얼굴로 침상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빤히 바라보았다.

“전하의 옷을 갈아입혀 드려야겠습니다. 추우실 텐데 이렇게 둘 순 없어요.”

경 공공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벌컥 열리고, 금군 병사들이 방 안으로 우르르 쳐들어왔다.

“당장 끌고 나가라!”

앞장서 있던 금군 병사가 소리치자, 뒤에 있던 병사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어 경 공공과 고 선생의 손을 뒤로 꺾으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

마당에는 금군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갔던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가마에 앉아 있던 태후에게 조용히 말을 전했다.

“몸이 차고, 아무런 맥도 잡히지 않습니다.”

“아이고, 내 새끼.”

태후가 그제야 가마에서 내려왔다. 태후는 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면서 목놓아 울부짖었다.

“군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군왕비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태후가 입을 열자마자, 문밖에서 누군가가 호들갑을 떨면서 소리쳤다.

지금 돌아와서 뭐해! 저 아둔한 사람 같으니라고, 왜 돌아온 게야! 기왕 나갔으면 돌아오지 말지, 여길 뭐하러 돌아와!

고 선생이 문밖에서 구르다시피 뛰어오는 이 태의를 보면서 탄식했다.

이 태의의 뒤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정교랑의 모습이 보였다. 정교랑은 조금 전에 군왕부를 나설 때만큼 침착하고 담담한 모습이었다.

“너는 군왕의 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는 게냐! 어찌 곧바로 왕부로 돌아오지 않은 것이야! 애가가 황상의 침궁으로 너를 보낸 것은, 폐하를 뵈라는 뜻이었지, 황후와 한가하게 노닥거리라고 보낸 게 아니다! 감히 황후와 대화를 하다니! 어찌 감히 황후와 대화를 나눈단 말이냐!”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그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진안 군왕의 거처를 가리켰다.

“황후가 종친 양자 입적을 제안한 일로 이미 한 번 죽을 고비를 넘겼던 아이인데, 네가 또 황후를 찾아가 그 일을 떠들다니! 그러니 위낭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택했겠지!”

태후의 말을 듣던 고 선생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여인도 태후의 계략에 넘어갔던 거로구나.

정교랑이 태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무슨 말씀이시죠? 전하께서 죽다니요?”

태후가 흠칫 놀랐다.

그럼, 안 죽었다는 건가?

태후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던 사람을 쳐다보았다.

이자들이 거짓을 고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그 약이 얼마나 독한지는 애가가 그 누구보다 잘 알거늘.

“군왕비께서 아직 모르시나 봅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돌아가셨습니다.”

태후의 옆에 서 있던 내시가 서둘러 말했다.

“그래요? 들어가서 봤어요?”

내시가 멈칫했다.

상심이 너무 커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건가?

내시가 고개를 들고 연민의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태후도 내시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더는 말하지 않고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마,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더는 눈물을 흘려서는 안 됩니다. 태의가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소인들이 마마를 대신하여 울 테니, 부디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두 내시가 태후를 부축하면서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는 내시들의 말을 무시한 채 통곡하기 시작했다.

“위낭, 왜 이렇게 바보 같은 게야. 왜 애가의 말을 듣지 않고.”

울면서 말하던 태후가 침상 쪽을 바라보았다. 그때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사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면서 손을 뻗었다.

“물.”

사내의 갈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의 울음소리가 뚝 끊기고, 모두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시신이 움직인다!”

찰나의 정적이 지난 뒤, 누군가가 비명을 질렀다.

겁에 질린 태후는 침상 위에서 천천히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새하얀 얼굴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숨이 턱 막힌 태후가 눈을 뒤집으면서 혼절했다.

시신이 움직이고 있어!

“그럴 리가 없다!”

고능준이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쓸모없는 것들! 진짜로 죽은 것과 죽은 척 연기하는 것도 구분하지 못한단 말이냐!”

“대인!”

수하와 식객들이 다급하게 고능준의 말을 끊었다.

“구분하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직접 손을 썼기 때문에, 절대로 착오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약을 달일 때 한 번, 그리고 약을 먹일 때 또 한 번 썼습니다. 대인, 군왕부에 있던 사람이 주전자에 조금 남은 약을 개에게 먹여 봤더니,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했습니다! 군왕은 그 약을 한 사발이나 마셨고요!”

“맞습니다. 그때 자리에 있던 사람이 얼마나 많았는데요. 족히 한 시진이 넘는 시간 동안, 정말로 죽어 있었단 말입니다!”

더욱 부아가 치밀어 오른 고 관인이 수하와 식객들을 다그쳤다.

“그럼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냐! 심지어 깨어나자마자 말까지 해? 며칠 전에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했던 사람인데, 죽다 살아나니까 다 나았다는 게냐? 귀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냐고!”

수하와 막료들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귀신을 본 게 아니라면, 누군가가 수작을 부린 거겠지. 분명히 그 정씨 여인이 무슨 수작을 부린 것이야!”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죽은 사람을 살릴 줄 아는구나.”

고 관인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정 낭자는 당시 자리에 있지도 않았습니다. 독이 군왕의 몸에 퍼지고 나서부터 군왕이 깨어날 때까지, 그 여인은 군왕 근처에도 오지 않았습니다. 상태를 볼 기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군왕을 치료한단 말입니까!”

식객이 다급하게 말했다.

방 안에 정적이 흐르고, 사람들은 저마다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정말 귀신이라도 본 건가?

태후가 눈을 천천히 끔뻑이며 깨어났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귓가에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소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마마를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요.”

태후가 또 숨통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어 재빨리 손으로 가슴팍을 치면서 눈을 크게 떴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태후의 상태를 살피던 태의가 빠르게 침을 놓아 태후의 기를 통하게 했다. 태후가 긴 한숨을 내쉬면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너, 너!”

태후는 몸을 반쯤 일으키고,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무도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자리에 있던 태의들도 말문이 막히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 마마의 홍복 덕분이지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태후가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마마께서 혼사로 전하의 액막이를 해 주신 덕분에, 전하께서 몸이 좋아지셨습니다.”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방 안팎에서 정적이 흘렀다.

그런 거였나?

아니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야. 마마께 경하드린다고 말해야 하나? 진안 군왕이 호전되긴 했으니까?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내시 한 명이 쿵 소리를 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마마의 홍복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마당과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그 사람을 따라 무릎을 꿇고 복창했다.

“경하드리옵니다, 마마! 마마의 홍복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태후는 귓가가 웅웅 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혼사로 액막이가 되어 진안 군왕이 나아졌다고?

그럴 리가 없어!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기에는 이 일을 설명할 길이 없잖아?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이 짜고 쳐서 애가를 속일 수야 있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독약과 그 사람들, 그리고 애가가 직접 보낸 사람들까지…….

태후가 요란스럽게 쿵쾅대는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럴 리 없다! 그럴 리 없어! 모두가 애가를 속였을 리가 없잖아!

설마 정말 저 여인이…….

태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사람들과 함께 예를 올린 정교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미소 띤 얼굴로 태후를 바라보았다.

태후는 죽도록 정교랑이 싫었지만, 정교랑이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은 인정해야 했다. 따뜻하고 편안한 미소에 단정한 자세, 그리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일거수일투족까지. 궁에서 예법을 가르치는 상궁조차도 감히 정교랑의 자세를 지적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저 여인의 두 눈…….

새까맣고 빛나는 두 눈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 같아. 저 여인을 보면 볼수록, 저 새까만 두 눈 때문에 등골이 서늘해져.

사람의 생사를 쥐락펴락할 수 있는 여인이라.

저도 모르게 몸을 살짝 떨던 태후의 눈가에 두려움이 스쳤다.

“마마, 어쩌면 폐하의 병세 또한 호전될지도 모릅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황상!

맞아. 이 여인이 황상의 침궁에 갔었지! 거기서 황후와 한참을 대화했을 텐데, 둘이서 무슨 얘기를 하고, 황상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어떻게 알아!

“궁으로 돌아가자! 어서!”

태후가 눈을 번뜩이면서 소리쳤다.

여기 있으면 안 되겠다. 저 여인의 앞에 더 있어서는 안 되겠어!

큰일 났네. 벌써 숨이 잘 안 쉬어지는 것 같아. 저 여인이 벌써 애가에게 무슨 수를 쓴 건 아니겠지? 염라대왕이 벌써 붓을 쥐고 애가의 이름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 거면 어떡하지?

어서 가야 해. 당장 여기를 벗어나야 해!

“전하, 몸조리 잘하십시오. 또 태후마마를 놀라게 하지 마시고요.”

태후가 정신없이 방을 나가자, 태후의 내시가 서둘러 안부의 말을 덧붙였다.

“자네들, 전하를 잘 돌보게나. 무슨 일이 있으면 즉시 궁에 알리도록.”

내시는 방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상황을 원만하게 수습하고, 서둘러 의장 행렬을 갖춰서 군왕부를 떠났다.

길가에 앉아 있던 주복이 벌떡 일어났다. 그는 군왕부에서 떠나가는 태후의 의장 행렬과 문가에서 행렬을 배웅하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주복은 문가에 서 있던 사람 중 정교랑이 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먼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주복의 눈엔 사람들의 표정이 아주 잘 보였다. 다들 하나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살아남은 것에 기뻐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표정들은 여느 때처럼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는 정교랑의 얼굴과 크게 대비되었다.

다행이다. 무탈하구나. 역시 아무 일 없을 줄 알았어.

주복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옆에 있던 벽을 짚었다. 주복의 몸은 온통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말을 타고 거리를 지나가던 진호는 뒤에서 들려오는 금군 병사들의 소리에 모퉁이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공자님, 태후마마께서 오가시는 게 이리도 빠른 것을 보니, 정말로 진안 군왕이 무사한가 봅니다.”

수하가 진호의 뒤에서 말했다.

“그 여인이 있는데, 무슨 일이 있겠나.”

진호가 고개를 돌리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사람들은 항상 그 여인을 믿지 않아. 그 여인은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한 사람인데도 말이지. 특히나, 그 여인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뼛속 깊이 새겨야 할 텐데 말이야.”

그 여인이 당신들을 얼마든 상대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리고, 당신들 뜻대로 되게 그 여인이 내버려 두지 않을 거란 것도.

“어서 가서 확인하거라!”

태후가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서 바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황상은 깨어났느냐?”

내시와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의 곁으로 다가와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으셨습니다.”

“너희는 가 보지도 않고 그걸 어떻게 아느냐?”

태후가 소리쳤다.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마마, 신이 조금 전에 다녀왔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는 여전히 깨어나시지 않으셨습니다.”

고능준이 미간을 펴고 부드럽게 말했다.

태후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했고, 눈빛도 어딘가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여인이, 폐하께서 깨어나실 수도 있다고 했는데. 정말로 액막이를, 액막이를 한 거였어.”

태후가 중얼거렸다. 고능준이 옆에 서 있던 내시를 향해 눈짓하자, 내시가 서둘러 탕약을 바쳤다.

“마마, 걱정하지 마십시오. 폐하께서 깨어나실 리가 없…….”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가 격노하며 내시의 따귀를 후려쳤다. 내시가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손에 들려 있던 탕약 그릇이 바닥으로 떨어져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 났다.

“마마,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내시가 소리가 날 정도로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면서 울먹였다. 하지만 태후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질하면서 소리쳤다.

“당장 끌고 나가서 쳐 죽이거라!”

뒤에 서 있던 내시들이 황급하게 그 내시를 일으켜 밖으로 끌고 나갔다.

“애가는 황상이 깨어나길 바란다. 애가는 천 번이고 만 번이고 황상이 깨어나기를 바란다고! 황상이 깨어나지 않는 것이 애가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데, 더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괴롭구나.”

전각 안에 태후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능준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입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해결될 텐데요.”

고능준은 태후보다도 더욱 간절하게 황제가 깨어나길 바랐다.

안 그래도 사리 분별을 못 하던 노파인데, 이번에는 정말 놀라서 그런지 더욱 정신이 오락가락하는군. 저런 노파를 보좌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야.

“하지만!”

태후가 별안간 소리치고는 몸을 떨면서 눈을 크게 뜨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태후가 고능준을 향해 가까이 오라고 눈짓했다.

“그 여인, 사람의 생사를 쥐락펴락하잖나. 황상을 깨어나게 할 수 있다면, 필시 애가도 죽게 만들 수 있겠지? 맞아, 맞아. 그 여인은 분명히 그럴 능력이 있을 게야. 벌써 애가의 목숨을 어떻게 끊을지 궁리하고 있을지도 몰라.”

고능준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지금 상황에서 말해 봤자 태후가 귓등으로 흘려들을 것 같은 바른말 대신, 천자는 하늘이 점지한 군주며 태후의 목숨은 염라대왕이 어찌할 수는 없다는 등의 위로의 말들을 전했다.

태후의 상태가 조금 나아지자, 그는 내시에게 새로 탕약을 가져오라고 한 뒤 태후가 잠드는 것을 지켜보고 태후궁을 나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됐길래 태후마마께서는 저렇게 정신이 없을 정도로 놀라셨을까?

고능준이 마차 위로 몸을 싣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번에는 확실히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으로 그 여인에게 당하다니.

태후마마께서 의장 행렬까지 대동하면서 황궁을 떠나 군왕부로 갔으니, 반나절이 채 되기도 전에 온 경성에 그 소식이 퍼졌을 거야.

진안 군왕이 혼사를 올리고 액막이를 한 덕에 몸이 나아졌다고. 그 여인이 또 한 번 새로운 신화를 쓴 거지.

고능준이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마차를 세게 쳤다.

이번 일은 분명히 그 여인이 벌인 짓이야. 하지만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진안 군왕을 처리하는 자들에게 내가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고, 재차 확인했는데. 절대로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았고, 만일의 경우도 전혀 없었는데.

도대체 그 여인은 뭘 한 거야?

그게 뭐인지 꼭 밝혀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날카로운 칼을 손에 쥐고 있다 해도 헛짓거리하는 꼴이나 다름없으니.

“이상한 게 하나 있긴 한데.”

고 관인이 다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방 안의 사람들이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초야 말이오.”

고 관인이 말했다.

“초야에도 저희 사람들이 그 여인을 예의주시했습니다.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는 않았어요. 약도 달이지 않았고요.”

막료가 대답했다. 고 관인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다들 너무 식견이 너무 좁은 거 아니오? 사람을 치료하는 데 꼭 약을 달이고, 침을 놔야 하는 줄로만 아나?”

그럼 또 뭐가 있지?

고 관인이 헛기침을 한 번 했다.

“채음보양(采陰補陽: 음기를 취하여 양기를 북돋는다는 도가의 방중술 중 하나).”

“황당하구나!”

귀를 쫑긋 세우고 진지한 표정으로 고 관인의 말을 듣고 있던 고능준이 찻잔을 탁자 위로 내던지며 욕을 뱉었다.

“아버지, 황당하긴 하지만, 지금껏 황당한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믿기 어려우신 마음은 알지만, 변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람도 그대로고, 약도 그대로입니다.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바로 신혼 초야에 동방화촉을 밝힌 것인데…….”

고 관인이 말하다가 목소리를 낮췄다.

“게다가 듣기로는 아주 격렬한 초야였다고 합니다. 진안 군왕이 어찌나 몸을 혹사했는지 이튿날 혼수상태로 들것에 실려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채음보양을 했다는 뜻인데.”

막료 한 명이 고 관인의 말을 믿는 듯이 중얼거렸다.

“아, 채음보양이 아닐 수도 있소. 먼저 양을 취한 다음, 음으로 다시 양을 보충했을지도 모를 일이지. 도가의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소? 도가에서는 그런 방중술이 흔하잖소.”

다른 막료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고능준은 차마 더 듣고 있을 수가 없었는지, 탁자를 손으로 세게 내리쳤다.

“황당하기가 이를 데가 없군. 제대로 조사나 하게! 아무런 근거 없이 그런 황당무계한 말만 지껄이지 말고!”

황당하든 말든, 효과만 있으면 됐지.

진안 군왕부 안, 한 무리의 사람들과 함께 정교랑의 거처 앞에 서 있던 고 선생이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번에 여기 앞에 서 있을 때가 불과 반나절 전의 일인데, 내 마음가짐이 완전히 달라졌군.

이른 아침에 진안 군왕을 모시러 정교랑의 거처에 왔을 때, 고 선생은 안 그래도 반쪽짜리였던 진안 군왕의 목숨이 또 반 토막이 난 것을 보고는 부아가 치밀어 정교랑의 거처에 불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분명히 죽었다고 믿었던 진안 군왕이 다시 반쪽짜리 목숨을 가지고 되살아나자, 고 선생은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다. 똑같은 반쪽짜리 목숨이어도, 고 선생은 지금이 더욱 기뻤다.

“선생, 이 태의가 조금 전에 이미 여쭤봤다고 합니다. 왕비께서 이 태의더러 원래 하던 대로 전하를 치료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러니 우리는 방해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왕비의 노여움을 사서는 안 되지요.”

경 공공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경 공공을 흘겨보았다.

“지금 나는 왕비께 전하를 치료해 달라고 온 게 아닐세. 이 태의가 어떻게 침을 놓고, 약을 달이든 그건 내 알 바 아니지. 나는 단지 전하를 거처로 모셔 온 것뿐일세. 이미 혼례를 올린 부부인데, 거처를 따로 하는 법이 어디 있나? 이제부터는 여기가 전하의 거처이니, 전하를 이리로 모시고 온 것일세.”

경 공공이 의아한 얼굴로 고 선생을 쳐다보았다.

“선생, 무슨 꿍꿍이십니까?”

경 공공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고 선생이 찾아온 이유를 들은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은 서둘러 여종과 몸종들을 데리고 침상을 정리한 후, 진안 군왕을 침상으로 옮기는 것을 도왔다.

이번에는 정교랑이 고 선생에게 나가라고 말하기 전에, 경 공공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휘장 옆에 서서 잠자코 있던 고 선생이 경 공공을 따라 나가다가, 회랑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휘장 너머에 있는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왕비 전하, 아무쪼록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정교랑이 네, 하고 대꾸했다.

고 선생은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도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도, 입술만 달싹이고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주저했다.

고 선생이 드디어 결심한 듯이 이를 악물고 정교랑을 향해 또 한 번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다만, 전하께서 아직 몸이 허약하십니다. 부디 전하를 가엾이 여기시어, 살살 다뤄 주십시오.”

그때, 종일 여종들에게 이것저것 지시하느라 말을 많이 했던 소심이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곁채에서 회랑을 통해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소심은 고 선생의 말을 듣자마자 입에 머금고 있던 차를 풉 하고 뿜어냈다.

지, 지, 지금 무슨 뜻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거래?

우리 아씨를 대체 어떻게 보고! 정말 황당하네!

“부인의 음식은 어느 쪽으로 차려 놓을까요?”

“아씨, 입에 맞는지 한 번 드셔 보시겠어요?”

“아직도 아씨라고 하면 어떡해.”

“아차차, 깜빡했어.”

여인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귓가에 들려왔다.

내 방에서는 한 번도 저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린 적이 없었는데.

나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도 싫고, 누가 가까이서 시중을 들겠다고 내 옆에 붙어있는 것도 싫었어. 혼자 있는 게 제일 편했지.

그런데 지금 저 소리를 듣고 있어도, 전혀 싫지가 않고 도리어 편안하다는 느낌이 드는군. 따스한 봄날에 창문을 열자 불어온 봄바람이 뺨을 어루만지는 것 같아.

진안 군왕이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눈을 뜨려고 했다.

“전하!”

귓가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눈을 뜨자, 경 공공이 그의 얼굴 앞에 바짝 다가오더니 흥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또 잠든 건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잠들어 있었던 거지?

“부인, 부인,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경 공공이 고개를 돌리고 목청을 높였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진안 군왕은 흐릿하기만 했던 시야가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다.

“깨어났네요. 물 마실래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 물을 드리게.”

정교랑이 말하고는 자리를 비켰다.

경 공공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두 시녀를 불러와 조심스럽게 진안 군왕을 침상에 앉혔다. 시녀 두 명이 한 모금씩 천천히 진안 군왕에게 물을 떠먹였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대청으로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 태의에게 전하께서 깨어나셨다고 알리게. 이제 약을 드실 수 있다고.”

정교랑이 말했다. 문가에서 대기하던 어린 내시가 알겠다고 말한 뒤, 급하게 이 태의를 찾으러 뛰어갔다.

정교랑이 대청에서 진안 군왕이 보이는 방향으로 앉자, 두 시녀가 정교랑에게 그릇과 젓가락을 쥐여주었다. 이어 두 시녀와 무슨 말을 나눈 건지, 정교랑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은 그 모든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별안간 누군가가 진안 군왕의 시야에 불쑥 들어와 정교랑의 모습을 가렸다.

“전하, 물 드셔야지요.”

경 공공이 진안 군왕의 코앞에서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멍한 표정인 데다가, 어딘가 넋이 나가신 것처럼 보이는군.

연이어 두 번이나 맹독에 중독되었으니, 전하께서도 몸이 많이 상하셨겠지? 가만 보니 눈빛도 흐리멍덩해지신 것 같고.

진안 군왕이 눈을 감고 다시 침상 위로 누웠다.

“됐다.”

이제 겨우 두세 모금밖에 안 드셨는데!

진안 군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경 공공은 못내 아쉬워하는 얼굴로 더는 물을 권하지 않았다. 진안 군왕은 언제나 마음을 한 번 정하면, 절대로 그 결정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누가 그의 결정에 대해서 재차 확인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하게 방 안으로 들어온 이 태의가 식사를 하고 있던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한 뒤, 진안 군왕의 맥을 짚으러 침상으로 다가왔다.

“정말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정말 많이요.”

진안 군왕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피던 이 태의가 흥분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에게 약을 먹이고 침을 놓는 사이, 식사를 마친 정교랑이 그에게 다가왔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얼굴을 자세히 보기도 전에 이 태의가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정교랑을 한쪽 옆으로 모시고 갔다.

“부인, 분명히 같은 독이었는데, 왜 이번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겁니까?”

“같은 독이지만, 중독된 사람이 예전과 달라졌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군왕 전하께서 달라지셨다는 뜻인가?

이 태의가 의아한 눈빛으로 침상 위에 누워있는 진안 군왕을 돌아보았다.

어디가 달라지셨다는 거지?

“부인, 그럼 전하를 어떻게 달라지게 하신 겁니까?”

이 태의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대화를 듣던 경 공공이 민망한 듯 큰 소리로 헛기침을 했다.

왜 저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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