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해하지 말고-
“전하, 그만 돌아가셔서 휴식을 취하셔야 합니다.”
기다리다 못한 내시가 재빨리 진안 군왕을 재촉했다.
진안 군왕이 입을 열고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내시가 다급하게 진안 군왕을 부축하며 몸을 일으키게 했다.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이 휘청이자, 내시가 고개를 돌리고 소리쳤다.
“여봐라.”
문밖에서 내시 두 명이 들어왔다.
“가마는 밖에 있느냐?”
내시가 묻자, 방으로 들어온 내시들이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를 모시고 가거라.”
내시의 명에, 두 내시가 빠르게 진안 군왕의 좌우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킨 뒤, 두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가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부인, 소인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내시가 정교랑을 향해 예를 표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자, 내시는 그제야 공손하게 물러났다.
방 안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그, 그럼 부인도 편히 쉬세요.”
전복인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손짓했다.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혼인을 축복하는 말 몇 마디를 건네고는 우르르 밖으로 물러났다.
“다 나은 줄 알았어요.”
“그럴 리가 있나. 내시 한 명이 부축하는 것도 힘들어 보이던데. 그래도 신랑 노릇을 하겠다고 사람들을 다 불렀네.”
“아까 그때 진짜 깜짝 놀랐잖아요.”
“그러니까요. 다들 봤죠? 전하의 얼굴이 갑자기 굳어졌을 때, 나는 전하께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시는 줄 알았다니까? 하마터면 혼례도 못다 치르고 상을 치르는 줄 알았잖아요.”
“아, 퉤퉤! 어떻게 감히 그런 말을 입에 올려!”
문밖 회랑 아래 서 있던 시녀와 반근은 여인들이 목소리를 낮춰 수군대면서 방을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두 사람은 놀라 서로를 마주 보고는 황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방 안에 있던 정교랑은 구리거울 앞에 서서 혼자 봉관을 벗으려고 하고 있었다.
“아씨, 저희가 해 드릴게요.”
시녀와 반근이 서둘러 다가갔다. 정교랑이 자리에 앉아서 두 사람에게 머리를 맡겼다.
“아씨, 군왕께서 직접 맞절하러 나오실 줄은 몰랐어요.”
반근이 머뭇거리다가 기대 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혹시 다 나으신 거 아닐까요?”
진안 군왕이 혼례복을 입고 나타났을 때, 반근은 기쁘다 못해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진안 군왕은 가마를 타고 나타났다. 그리고 내시 두 명의 부축을 받으며 신부 가마를 향해 걸어왔고, 두 내시의 부축을 받으면서 정교랑을 이끌고 절을 올리는 곳까지 왔다.
이 정도면 충분해. 여인 일생에 가장 중요한 일이 드디어 원만하게 끝났네.
“아니.”
정교랑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반근의 눈가에 기대가 사라지면서, 정교랑의 머리에서 장신구를 떼어내던 손이 살짝 떨렸다.
“하지만 아씨께서 계시는 한, 분명 차차 나아지실 거예요.”
시녀가 웃으면서 말했다. 반근이 또 기대에 찬 눈빛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이 뭐라 대답하기 전에, 군왕부의 시녀가 연회석을 차리러 들어왔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세 사람은 물 한 방울도 마시지 못했다. 반근과 시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까지 종일 가슴을 졸이며 전전긍긍하느라 배고픔을 느낄 새가 없었지만, 혼례가 원만하게 끝난 지금은 허기가 한꺼번에 몰려와 눈앞에 별이 보이는 듯했다.
“다른 건 일단 내려놓자. 지금은 밥 먹는 게 가장 중요해.”
시녀의 말에 반근이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밥부터 먹고 아씨의 목욕을 도와드릴게.”
“그리고 우리가 늘 지니고 다니는 상자가 어디에 있는지 물어봐 줘. 아씨께서 평소 쓰시는 물건들을 꺼내 놓자.”
“아, 어디 있는지 알아. 사람들이 동쪽 곁방에 두는 걸 봤어.”
시녀와 반근이 들뜬 모습으로 말했다.
밤하늘이 짙어지고, 활짝 열린 창문과 문 사이로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방 안에서 간간이 대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안 군왕이 대청에 마련한 연회가 끝나자, 사람들이 슬슬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군왕부 밖에서 말에 올라타려던 주복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군왕부를 바라보았다.
“주 공자.”
진소 부인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내가 정씨 저택에 들렀다 갈게요”
주복이 서둘러 진소 부인에게 다가가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부인께서 며칠을 고생하셨는데, 괜찮습니다. 어서 가서 편히 쉬십시오. 여기 일은 제가 돌아가서 범 형님과 형수님께 말씀드리겠습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진소 부인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찌 됐든 간에, 전하께서 직접 맞절을 하러 나오실 정도면 분명히 몸이 많이 나아지셨다는 거겠지.”
주복이 머뭇거리며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진안 군왕이 가마를 타고 나타났을 때는 주복도 꽤 놀랐다. 진안 군왕의 안색은 누가 봐도 안 좋아 보였지만, 그래도 내시의 부축을 받으면서 두 발로 걸어 다닐 수는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중에 연회석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과 들려오는 말들로 인해 주복은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연회 음식을 먹는 사람도 몇 없었을뿐더러, 다들 고개를 숙이고 수군대기 바빴기 때문이다. 마지막에는 진안 군왕이 신방에서 혼절했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주복은 나중에 사람을 시켜 반근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반근은 직접 주복을 만나러 와서 그런 일은 없었다고, 괜찮다고 대답했다. 반근의 대답을 들은 주복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였다.
“공자도 너무 걱정하지 마요. 교랑이 곁에 있으면 전하의 몸도 차차 나아지겠죠. 그리고 전하께서는 병이 든 것도 아니니.”
주복의 안색을 살피던 진소 부인이 위로를 건넸다.
병이 아닌 게 더 두렵습니다. 병이면 고치기라도 할 텐데, 명줄은 어찌할 수가 없으니.
주복이 고개를 숙이고 알겠다고 대답했다.
소란스러웠던 군왕부 앞은 마차와 말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면서 평소와 같은 조용함을 되찾았다.
주복 등이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씨 저택이 시끌벅적해졌다.
“낮에 혼례 행렬이 얼마나 떠들썩했는지. 그 사람들이 족히 백 장은 되어 보이는 종이를 글씨로 가득 채워서 진왕 군왕부에 보냈대요.”
“엄청난 명필은 아니라고 해도, 그 많은 사람이 전부 붓을 들고 아씨의 혼사를 축하하는 게, 꼭 백성들이 만민산(萬民傘: 선행을 많이 베푼 관리에게 백성이 바치는 우산. 커다란 우산에 수많은 비단 조각을 붙여 백성의 이름을 수놓았기에 붙은 이름)을 바치는 광경 같았다니까요.”
“그러게요. 거리에 있던 사람들이 다들 글씨 구경을 하느라, 아씨의 혼수 구경도 잊을 정도였어요.”
방 안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혼수를 볼 일이 뭐 있어. 우리 교랑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인데.”
황씨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아씨, 군왕 전하께서도 직접 나와서 맞절을 하셨어요. 직접이요! 게다가 아씨를 모시고 가마에서 내리는 것부터, 신방에 들어가 붉은 천을 걷고 합환주를 마시는 것까지 모두 다 직접 하셨어요.”
여종 두 명이 흥분한 표정으로 말하자, 범강림은 기뻐하면서 고개를 젖혀 술잔을 비웠다. 그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얼굴로 반대편에 앉은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
“주 공자님.”
범강림이 불렀지만, 주복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주 공자님?”
범강림이 목청을 높여서 다시 한번 주복을 불렀다. 주복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범강림을 바라보았다.
“주 공자님도 며칠 내내 고생했을 텐데, 어서 들어가서 쉬십시오.”
범강림이 무언가 생각난 듯 주복에게 말을 덧붙였다.
“아니면, 여기서 하룻밤 묵는 건 어떻습니까? 집으로 돌아가도 혼자일 텐데.”
주복이 고개를 젓고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먼저 가 보겠소.”
범강림과 황씨가 서둘러 주복을 배웅하러 나갔다. 주복은 홀로 말을 타고 짙은 어둠 속으로 천천히 멀어져갔다.
“그래도, 좀 불쌍하네. 저 아이도 참 괜찮은 아이인데.”
황씨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범강림은 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주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문지기에게 술동이를 하나 가져오라고 명했다.
“왜요?”
황씨가 물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범강림의 말에 황씨가 새까만 하늘을 올려다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날도 어두워졌고, 당신도 며칠 동안 고단했을 텐데, 이 시간에 어딜 간다는 거예요?”
범강림은 황씨의 물음을 뒤로하고 술동이를 품에 안은 채 말을 타고 집을 떠났다.
한여름 밤의 경성은 무더운 대낮보다 더욱 떠들썩했다. 큰길로 가던 범강림은 강가를 따라 동쪽 성문으로 쭉 나갔다. 성문에서 몇 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더는 화려한 불빛이 보이지도,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망망한 어둠이 사방에 드리워지고, 여름벌레들과 올빼미 소리가 주위에서 들려왔다.
범강림이 옷을 정리하고 바닥에 털썩 앉았다. 그가 술동이 뚜껑을 열더니 무덤에 대고 말했다.
“아우들아, 내 술이 좀 늦었지? 형님인 내가 먼저 벌주 석 잔을 마시마.”
말을 마친 범강림이 고개를 젖혀 가며 술을 꿀떡꿀떡 몇 입 마셨다.
“자, 이제 너희들이 마셔라. 나는 셋째 아우랑 이야기 좀 해야겠다.”
범강림이 웃으면서 손에 쥔 술동이를 무덤 위로 깨트렸다. 독한 술 냄새가 번지면서, 형제들이 자기가 먼저 술을 마시겠다며 술동이를 들고 장난치는 모습이 범강림의 눈앞에 떠올랐다.
범강림이 헤벌쭉 웃고는 자신의 앞에 있는 비석을 바라보았다.
“셋째야. 누이는 속상해하지 않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범강림의 말이 끝나자, 무덤 앞에 정적이 흘렀다.
“너도 속상해하지 말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범강림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밤하늘이 더욱 어두워지자, 거리에 있던 사람들도 차츰 흩어졌다. 야식을 파는 점포들 외에, 길가의 노점들도 전부 철수했다.
두 다리가 저려 더는 못 걷겠다고 생각한 사환이 주복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자님, 시간이 많이 늦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가고 있잖아.”
주복이 언짢은 기색으로 사환을 노려보자 사환은 입을 삐죽거렸다.
그런데 경성을 족히 반 바퀴는 넘게 돌고 있으시면서.
“공자님, 속상하신 건 알겠는데요. 공자님께서도 며칠 내내 고생하셨잖아요.”
“누가 속상하대?”
주복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러고는 더욱 기분 나쁘다는 표정으로 사환을 노려보았다.
“그냥 좀 걷고 싶어서 그런 거야!”
사환은 머쓱해져서 고개를 끄덕이고, 더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주복이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얼굴에 여기가 어디냐는 듯 막막한 표정이 드러났다.
“돌아가자.”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한 뒤, 몸을 날려서 말에 올라탔다.
멀리서 주씨 저택의 대문이 보이자, 사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돌아왔네.
사환이 기뻐하던 찰나,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기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사환이 무슨 반응을 하기도 전에 그는 곧장 길가로 달려갔다.
무슨 일이지?
낮은 신음이 들려오는가 싶더니, 진호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주복이 또 주먹을 휘두르려고 손을 들자, 진호는 주복의 손을 피하지 않은 채 웃고 있었다. 진호가 손에 쥔 술동이를 주복에게 보여줬다. 술동이를 본 주복은 이를 악물고 진호에게 주먹을 몇 번 더 휘두르고는, 바닥에 누워 웃고 있는 진호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주복이 화를 냈다. 진호가 손에 쥔 술동이를 힘겹게 들어 올리며 흔들었다.
“술 마시려는 거지.”
진호가 빙긋 웃으면서 술동이를 기울였다. 술이 얼굴 위로 쏟아지면서 진호의 앞섶을 흠뻑 적셨다.
주복은 진호를 내려다보다가 발로 세게 걷어차고는 몸을 홱 돌리고 걸음을 옮겼다.
“육낭.”
진호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복의 걸음이 멈칫했다.
“나와 같이 마시지 않겠나?”
진호는 바닥에 누워 주복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복이 고개를 돌리자, 여전히 자신을 향해 술동이를 흔드는 주복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이, 네 말을 믿는다고 했어.”
주복이 밑도 끝도 없이 말했다.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알아. 그 여인이 내 말을 믿는다는 걸.”
진호의 얼굴에서 술인지 눈물인지 모를 촉촉한 물기가 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주복이 진호를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여인은 스스로를 믿는 거지, 널 믿는 게 아니야.”
주복이 말을 끝낸 뒤, 고개를 돌리고 걸음을 뗐다.
“주육! 술 마시는 것도 안 돼?”
진호가 주복의 뒤에서 외쳤다. 하지만 주복의 발걸음은 다시는 멈추지 않았고, 주복은 그대로 대문을 넘어섰다. 사환이 서둘러 주복의 말을 끌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주씨 저택의 대문이 잠시 열렸다가 닫히고, 어두컴컴한 거리는 다시 조용해졌다. 진호가 바닥에 누워서 또 술동이를 들고 자신의 얼굴에 술을 부었다.
“술 마시는 것도 안 돼? 축하 선물도 주면 안 되고?
아무것도 안 되는 거야? 이젠 더는, 아무것도?
진짜 꿈 같네. 이 모든 건, 다 꿈이겠지.”
꿈일 거야! 분명 꿈일 거야!
술이 바닥났다. 술동이를 두어 번 흔들던 진호는 술이 더 없는 것에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 그가 손에 있던 술동이를 세게 던지자, 술동이가 산산조각이 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내게는 미인이 그려준 그림 한 폭이 있네, 향기로운 포도주로 축하를 해야지. 어떤 미인이 있었다네. 한 번만 봐도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지.”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져 흐느끼는 듯한 노랫소리와 간간이 섞인 웃음소리가 어두운 밤하늘에 번졌다.
마당에 있던 주복이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고는 술을 동이째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하루만 보지 않아도, 미칠 듯한 그리움이 사무치네. 기나긴 그리움은 영원한 추억이 되고, 짧은 그리움 또한 한이 없구나.”
깊은 밤, 욕실을 나온 반근은 정교랑의 시중을 들겠다는 군왕부 시녀들을 재차 사양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온 반근은 잠시 어리둥절하여 멈칫했다.
등불은 방 안에 놓여 있던 여덟 개 중 두 개만 남아 있었고, 휘황찬란하고 화려한 장식품은 모두 치워져 있었다. 창가 앞에는 탁자와 방석이 놓여 있고, 벽에는 정교랑이 매일 쓰는 활이 걸려 있었다. 익숙한 향로와 낮은 의자 등도 놓여 있었다.
반근이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자, 탁자 앞에서 팔걸이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책을 읽고 있던 여인이 반근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반근이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렸다.
“아씨, 제가 꿈꾸고 있는 줄 알았어요.”
반근이 미소 띤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우리 집이지.”
정교랑은 가볍게 대꾸하고 다시 책으로 시선을 옮겼다.
우리 집…….
하긴, 앞으로는 여기가 아씨의 집이지. 아씨가 계신 곳이 바로 우리 집이고, 집이라면 다 똑같으니까.
반근의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렸다. 반근은 재빨리 정교랑 옆으로 다가가 따뜻한 차를 따랐다.
“아씨, 정말 책을 읽으시려고요? 종일 힘드셨을 텐데, 일찍 주무시는 건 어떠세요?”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이 한 장만 다 보고.”
반근이 침상으로 가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붉은색 이불과 베개가 두 사람을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반근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 사람이 쓸 베개와 이불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개켰다.
이때, 갑자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반근이 깜짝 놀랐다.
정씨 가문의 시위들은 자연스럽게 정교랑과 함께 군왕부로 들어와 정교랑의 하인을 자처했지만, 군왕의 내원까지 들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군왕부는 안전하다는 사실을 잘 아는데도, 반근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아씨.”
시녀가 문을 열고 다소 당황한 기색으로 들어왔다.
“전하께서 오셨어요.”
이 시간에 오셨다고? 전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침상 옆에 서 있던 반근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반근의 귓가에 전복인과 여인들이 방을 나오며 수군대던 목소리가 맴돌았다.
게다가 아씨께서는 전하께서 나아지신 게 아니라고 하셨어. 설마 정말로 몸이 더 안 좋아져서, 아씨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오시는 건가?
반근은 다리에 힘이 풀려 침상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반근이 품에 안고 있던 베개가 침상 아래로 떨어졌다.
방 안에 등불 한 개가 더 밝혀지고, 가마와 함께 사람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을 뵙습니다.”
휘장을 사이에 두고, 바깥 대청에서 이 태의가 감격에 찬 얼굴로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정교랑이 안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스승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태의가 또 한 번 예를 올리자, 정교랑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서 예를 피했다.
“부인, 당초 진 노태야의 병을 고칠 때, 제가 옆에서 침놓는 것을 볼 수 있도록 해 주셨잖습니까. 이번에 제가 전하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의 침술을 쓴 덕분이었습니다. 아니, 제가 구한 게 아닙니다. 부인께서 군왕 전하의 목숨을 또 한 번 살려주신 겁니다.”
이 태의가 흥분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말하자, 옆에서 누군가가 마른기침을 했다.
“이 태의, 시간이 늦었으니, 다른 날을 골라 회포를 푸시지요.”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아, 그렇지, 그렇지. 오늘은 정 낭자의 신혼 초야잖아. 아무래도 신부이니, 종일 신경이 곤두서서 피곤하기도 할 테고.
이 태의가 민망한 듯 손을 비비고는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실은 이렇습니다. 전하의 상태가 갑자기 급격하게 나빠지셔서요.”
이 태의의 말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던 반근의 다리가 또다시 후들거렸다. 옆에 있던 시녀가 반근을 부축하자, 반근이 손을 떨고 있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갑자기 휘장이 펄럭이면서, 정교랑이 밖으로 나갔다. 반근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시녀도 재빨리 정교랑을 따라 휘장 밖으로 나갔다.
바깥 대청에 있던 사람들과 몇몇 막료들도 정교랑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밖으로 나올 줄 몰랐는지, 깜짝 놀라 옆으로 몸을 돌리면서 고개를 숙였다. 막료들이 어색해하며 속으로 정교랑을 원망했다.
흠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까지 산발해서는 그대로 나오다니. 여인의 몸으로 어딜.
막료들과 달리 이 태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얼굴로 정교랑을 가마 앞으로 데리고 갔다. 시녀가 등불 한 개를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여름용 겉옷을 걸친 진안 군왕은 굳은 표정으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얼핏 보면 깨어있는 건지, 잠든 건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정교랑이 잠시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곧추세웠다.
“상태는 괜찮아요.”
이 태의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더 나빠지진 않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영 안심이 되질 않습니다. 저녁에는 약도 드시지 못하셨습니다.”
이 태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 선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 자네들이 허튼짓을 해서 그런 것 아닌가!”
저 사람의 허튼짓이라는 말은, 아마 군왕 전하께서 직접 맞절하러 나오신 걸 뜻하는 거겠지.
시녀가 곁눈질로 진안 군왕을 힐끔 쳐다보았다. 고 선생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침상에서 내려오지도 못하시던 분인데, 대체 전하께 무슨 짓을 한 건가? 그렇게 오래 서 계시게 한 것도 모자라서, 그 먼 길을 직접 걸으시게 하다니!”
그랬구나. 하긴, 침상에 오래 누워 있던 사람은 병이 다 낫더라도 갑작스럽게 많이 걷게 해서는 안 되지. 군왕 전하께서도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였는데 갑자기 이렇게 많이 걸으셨으니. 그래서 합환주를 마신 뒤에, 내시 한 명으로 전하를 부축하기 버거웠구나.
“이 태의, 이 태의까지 이럴 줄은 몰랐소이다. 저들과 짜고 날 따돌리기까지 하다니. 존경하는 스승을 위해서라면, 전하의 건강도 내팽개치는 건가!”
고 선생은 말할수록 부아가 치미는지, 결례를 따지지도 않고 고개를 치켜들며 방 안에서 이리저리 서성였다.
“맞절이 그렇게 중요한가? 그까짓 맞절 한 번 안 했다고 해서, 뭐가 잘못되기라도 하냔 말이오!”
고 선생의 말에, 내시와 이 태의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잠자코 고 선생의 꾸짖음을 듣고만 있었다. 방 안에는 고 선생의 목소리만이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한 여인의 목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떠들 거면 나가서 해요.”
고 선생은 말문이 턱 막혔다.
“난 쉬어야겠으니까.”
나는 노비도 아니고, 막료이자 식객인데, 나를 이렇게 무례하게 내쫓다니!
고 선생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이 태의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풉 하고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여인이 말을 저런 식으로 해서 사람을 당황시키는 것은, 나도 익히 겪었지.
“제 불찰입니다. 제 불찰로 군왕 전하께서 이렇게 된 것이니, 부디 부인께서 전하를 하룻밤만 돌봐 주십시오. 그래야 저희가 안심이 되어서요.”
이 태의가 상황을 수습하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라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어서 전하를 부축해서 안으로 모셔라.”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진안 군왕의 측근 내시였다. 나머지 사람들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자, 시녀들이 서둘러 휘장을 걷었다. 내시 네 명이 진안 군왕을 조심스럽게 부축했다.
“어서 이부자리를 깔아 놓자.”
시녀가 아직도 멍한 표정의 반근을 재촉하면서 다급하게 침상 쪽으로 갔다.
반근은 바닥에 떨어진 베개를 허둥지둥 주워 들고 시녀와 함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진안 군왕이 아직도 혼례복을 입고 있었던 터라, 시녀와 내시들이 서둘러 그의 옷을 갈아입혔다.
방 안에 등불이 두어 개쯤 더 밝혀질 무렵, 창밖은 이미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 있었다.
“부인, 밤사이 시중을 드는 사람들을 두 명 정도 더 남겨 드릴까 싶은데, 어떠신지요?”
내시가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괜찮네.”
정교랑이 대답했다.
“저희 아씨, 아니, 부인께서는 밤새 시중드는 사람이 있는 걸 불편해하세요. 그러니 공공, 사람들을 데리고 가서 쉬셔도 됩니다.”
바깥 대청에 있던 고 선생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나려 했지만, 진안 군왕이 걱정되어 차마 발걸음을 떼지는 못했다. 시녀의 말을 듣던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래서야 쓰나? 전하께서 저 지경이 되셨는데.”
“저 지경이 되었는데, 당신들이 곁에 있다고 해서 나아질 수가 있나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이 태의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가 얼굴이 새파래진 고 선생의 소매를 붙잡고 조용히 다독였다.
“갑시다. 고 선생은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정 낭자는 치료할 때 주변에 누가 있는 걸 허락하지 않소.”
“맞습니다. 정 낭자 한 사람이 우리 열 사람보다도 강할 테니, 우리는 그만 자리를 비켜 드리지요.”
내시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한마디 거들었다.
회랑 아래로 나온 고 선생의 얼굴은 붉은 등롱에 비쳐 더욱 새빨갛게 보였다.
“다들 아주 마음이 편하신가 봅니다.”
고 선생이 비꼬면서 눈을 흘겼다. 내시가 마당을 돌아보고는 작은 한숨을 토했다.
“선생, 때로는 운명을 따라야만 합니다.”
운명을 따라?
“정 낭자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믿지 못할 사람인지조차도 다 전하의 운명이라는 말이지요.”
내시가 조용히 말하고는 손을 몸 옆으로 늘어뜨린 채 고개를 숙이고 층계를 내려갔다.
그게 다 무슨 소리요! 분명히 피할 수 있는 일들인데, 어째서 이게 운명을 따라야만 하는 일이 되는 게야?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태의가 고 선생의 옆을 지나가면서 말했다.
“선생,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낭자가 못 미더울 사람이라면, 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고 선생은 방에서 차례로 나오는 시녀들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이미 문가에 다다른 내시와 이 태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하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좋게 말할 때 들으시오. 나를 속일 생각은 두 번 다시 하지 말라고!”
고 선생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고 선생을 등지고 걸어가던 이 태의와 내시가 겁이 난 것처럼 어깨를 으쓱하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시녀는 등불 두 개를 끄고, 탁자 앞에 앉아 책을 읽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아씨, 차를 더 드릴까요?”
“괜찮아.”
정교랑이 대꾸하고는 잠시 책을 내려놓고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향을 피워 봐.”
시녀가 흠칫 놀랐다.
“아씨께서 직접 만드신 그 향이요?”
반근의 물음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근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향을 찾으러 동쪽 곁채로 걸어갔다.
“아씨께서 향도 만드셨어?”
시녀가 서둘러 반근의 뒤를 쫓아왔다.
동쪽 측방의 짐 상자들을 뒤적이던 반근이 기쁜 기색으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응. 사공자님께서 안 계시던 며칠간, 아씨께서 매일 조금씩 만드셨어.”
반근이 대답했다. 시녀는 점포 일들로 바빠서 자주 집에 없다 보니, 당연히 이런 사소한 일들을 알지 못했다. 시녀가 아쉬워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거 엄청 좋은 향이죠?”
시녀가 불을 붙인 향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씨께서 만드신 거니까 당연히 좋은 향이죠.”
시녀의 말에 정교랑이 웃었다.
“그건 맞아. 내가 잘 만들긴 하지. 너희도 이제 그만 가서 쉬어.”
정교랑이 두 사람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와 반근이 예를 표했다.
“아씨, 저희는 바로 바깥쪽에 있을게요.”
방 안이 조용해지자, 정교랑은 마지막 한 글자를 읽은 뒤 책을 내려놓았다. 밖에서 들려오던 시녀와 반근의 부스럭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고, 간간이 코 고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종일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던 반근과 시녀는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침상을 바라보았다. 사내 역시 침상에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 그 위에 걸터앉고 젊은 사내의 그늘진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저기, 물 좀 마실래요?”
정교랑이 물었다. 진안 군왕이 긴 속눈썹을 살짝 떨며 천천히 눈을 떴다.
“나는…….”
진안 군왕이 정신을 못 차리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며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당신이네요.”
진안 군왕은 짤막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지금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가 베개에 머리를 댄 채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은 고개를 끄덕인 후,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침상 옆의 등불을 껐다.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방 안이었지만, 진안 군왕의 눈에는 또렷하게 보였다. 침상에 걸터앉은 여인이 자신의 옆에서 휘장을 내리고 얇은 이불을 덮으며 눕는 모습이.
가뜩이나 마음을 들뜨게 만드는 여름밤, 두 사람은 거의 팔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서로의 체온을 느꼈다. 향기롭고 부드러운 여인의 내음이 진안 군왕의 코끝을 스쳤다.
진안 군왕이 두 눈을 뜬 채 천장을 쳐다보았다.
아까 저녁에 침상에 잠깐 앉았을 때, 천장에 향낭 같은 게 걸려 있었던 거 같은데, 지금은 누가 치웠나? 침상 위에는 말린 과일이 뿌려져 있었는데, 누운 자리가 부드럽고 편한 걸 보니 그것도 같이 치웠나 보네. 휘장까지 내렸으니 더울 텐데, 방 안에 얼음 대야를 몇 개나 갖다 놨지? 그걸로 충분하려나?
진안 군왕의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찰나, 여인의 손이 그의 몸에 닿는 것이 느껴졌다. 진안 군왕은 일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지면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의 몸에서 손이 잠시 떨어지고, 잠시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다시 그의 몸에 손이 닿았다. 여인의 손은 진안 군왕의 몸에 닿았다가, 떨어지고, 닿았다가 또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진안 군왕이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이 느낌은…….
“자요.”
여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며, 동시에 진안 군왕의 몸에 닿아 있던 손이 거둬졌다. 진안 군왕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그의 곁에 누워 있던 여인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어 밖을 보고 누웠다. 곧이어 여인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오자, 참다못한 진안 군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정교랑을 불렀다.
“정방.”
정교랑이 음, 하고 대꾸했다.
“난, 견디기 힘들어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을 등지고 누워있던 여인이 그의 쪽으로 몸을 돌리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이런 일에, 견디기 힘들지 않은 게 더 이상하죠.”
잠에 취한 반근의 귀에 방에서 어떤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오는 듯했다. 애써 눈을 떠보려고 했지만, 잠이 쏟아져 도무지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생겼나?
어서 일어나, 어서 잠에서 깨야 해!
힘껏 눈을 떴지만, 눈앞엔 새카만 어둠뿐이었다. 반근이 깜짝 놀라 입을 크게 벌리고 숨을 쉬었다. 만물이 조용해진 시간, 방 안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더없이 선명하게 들려왔다.
반근은 조금 전에 자신이 들은 목소리를 다시 들으려고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앉았다.
꿈이 아니었어!
반근의 움직임 때문에 시녀도 잠에서 깼다. 시녀가 잠에 취한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안쪽에서…….”
반근이 안채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반근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안채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아파요.”
반근과 시녀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살짝 떨었다. 반근은 다급하게 맨발로 땅을 디뎠고, 시녀도 서둘러 몸을 일으켜 앉았다.
“말했잖아요. 이런 일은 힘든 게 당연하다고. 조금만 참아 봐요.”
작은 목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 뒤로, 안채에서는 더 이상 말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낮은 신음만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시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이 굳어졌다.
설마…….
시녀는 반신반의한 얼굴로 추측하면서도, 서둘러 손을 뻗어 반근을 제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미 바닥에 발을 내리고 걸음을 옮기려던 반근은 갑작스럽게 자신을 붙잡는 시녀 때문에 몸이 휘청였다.
“언니?”
반근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시녀가 반근의 소매를 꼭 잡고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별일 아니야. 정말 별일 아니니까, 어서 이리 와서 자자.”
반근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중얼거렸다.
“그럼 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저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아마, 신혼 초야라면 응당 있어야 할 움직임 때문이겠지.
시녀는 예전에 나이든 여종들과 모여 몰래 잡담을 나눌 때, 신혼 첫날밤에는 꼭 저런 소리가 난다고, 그리고 조금 아플 거라고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얼굴이 귀까지 빨개진 시녀가 반근의 귓가에 무슨 말을 속삭이자, 반근도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 그, 그럴 리가 없잖아.”
군왕 전하께서 여기 오신 건, 몸이 안 좋아서였잖아? 그, 그런데 어떻게 그런 일을?
“우리는 직접 맞절하러 오실 줄도 몰랐었잖아.”
시녀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하긴, 오늘 예상치 못한 일이 참 많기는 했지. 그, 그래도 초야까지 치르실 줄은…….
“아씨께서 우리를 부르지 않으셨으니까, 우, 우리도 상관하지 말자.”
시녀가 조용히 말하고는 재빨리 자리에 누워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시녀의 모습을 보자 반근은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반근은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싶지만, 차마 그럴 엄두는 나지 않아 서둘러 시녀의 옆에 누워 눈을 꼭 감았다.
여름밤이 점점 더 깊어지면서, 방 안에서는 간간이 무슨 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같기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머릿속에 드는 온갖 생각을 떨치던 반근과 시녀가 잠들면서, 실내는 다시 고요해졌다.
어제, 시녀와 반근은 자신들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게다가 밤새 꿈을 꾼 터라 버둥거리며 깨어났을 땐 다소 어리둥절했다. 눈에 들어오는 낯선 환경을 보며 반근은 정신을 차렸다.
“언니?”
반근이 몸을 일으키고 시녀를 깨우자, 잠에서 깬 시녀는 파랗게 물들기 시작하는 창밖을 보고 서둘러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씨?”
시녀가 문밖에서 정교랑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안에서 정교랑이 응, 하고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시녀는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문 앞에서 머뭇거렸다. 반근이 팔꿈치로 시녀를 쿡 찌르고 나서야 시녀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정교랑은 편한 일상복 차림으로 간단하게 머리를 올려 묶고 덧옷을 걸치고 있었다. 시녀와 반근이 반사적으로 침상을 쳐다보았다.
휘장이 아직 내려져 있는 것을 보아하니, 침상 위에 있는 사내는 아직 잠들어 있는 듯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침상 아래로 향하자, 반근과 시녀는 뜨거운 무언가에 덴 듯이 홱 하고 고개를 돌리며 시선을 피했다.
휘장 아래로 삐져나온 것은 다름 아닌 연두색 내의였다.
아씨께는 저런 색의 내의가 없는데, 그럼 저건…….
“부인, 일어나셨는지요?”
문밖에서 낯선 아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낯선 소리에 시녀와 반근은 깜짝 놀라 문가를 쳐다보았다.
아낙은 정교랑의 시중을 들라고 궁에서 보낸 시녀였다. 정교랑이 밤새 당직을 서며 시중드는 것을 거절한 탓에, 시녀들과 여종들은 모두 마당 옆의 곁채에서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동이 틀 무렵인데도 벌써 마당에서는 발자국 소리와 비질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벽에 걸린 활을 집어 들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자, 시녀와 반근은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나섰다.
반근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시녀의 팔을 붙잡고 휘장 아래로 보이는 옷자락을 가리켰다. 시녀가 발을 구르고는 내의를 재빨리 끄집어내서 옆에 있던 옷걸이로 휙 던졌다. 그러고는 잰걸음으로 정교랑을 따라갔다.
문이 열리고, 정교랑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본 내시와 궁녀들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으니, 들어가 보게.”
정교랑의 말에 내시가 몹시 기뻐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정교랑은 내시와 함께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활을 든 채 내시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정교랑의 손에 들린 활을 본 궁녀와 시녀들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시선을 피했다.
“부인, 무엇을 하시려는 건지요?”
내시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희 아씨, 아니, 저희 부인께서는 아침마다 연무장에서 활쏘기 연습을 하세요.”
시녀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호칭으로 정교랑을 칭하며 내시에게 대답했다.
활쏘기 연습?
내시와 궁녀들이 일제히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궁술이 몹시 뛰어나고, 팔 힘과 악력이 센 여인이란 말은 익히 들었어. 그 실력이 부단한 노력과 연습의 결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신혼 첫날에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을 줄이야.
“예, 알겠습니다. 여봐라.”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 한 명을 불러와 정교랑에게 연무장으로 향하는 길을 안내하도록 지시했다.
“전에 여기 계시던 경왕 전하께서 워낙 뛰노는 것을 좋아하시다 보니, 본디 연못이었던 곳을 흙으로 메꾸고 넓은 연무장으로 만들라는 군왕 전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아, 거기구나. 알겠네.”
내시가 멈칫했다.
하긴, 전하께서 정 낭자를 데리고 왕부 곳곳을 돌아다니셨던 적이 있었지. 연무장 옆에 있던 꽃밭도 정 낭자가 제안한 음양도로 바꿨었고.
시녀도 정교랑을 따라 연무장에 가고 싶었지만, 반근이 한발 빠르게 말했다.
“언니는 여기 남아서, 부인께서 돌아오시는 대로 씻으시게 준비해 줘.”
반근이 속사포로 말하고는 도망치듯이 자리를 떠났다.
발을 구르며 반근의 뒤를 쫓아가려던 시녀는 결국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는 내시와 궁녀들을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반근 낭자, 저희는 부인의 입맛을 잘 모르는데, 아침 식사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내시가 무언가 생각난 얼굴로 말하자, 시녀가 기뻐하면서 얼른 대답했다.
“내가 알아요. 내가 가 볼게요.”
시녀의 말에, 내시가 얼른 다른 이를 시켜 시녀를 부엌으로 안내하도록 했다. 시녀는 다른 궁녀에게 따뜻한 목욕물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한 후 부엌으로 떠났고, 내시 등은 그제야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뒤늦게 도착한 이 태의가 내시를 따라 방 안으로 들어갔다.
“전하?”
내시가 조심스럽게 휘장을 들어 올렸다. 아침 햇살이 침상을 비추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실눈을 뜨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대며 말했다.
“전하께서 간밤에 숙면을 취하셨는……. 악!”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던 내시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내시의 비명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태의, 태의!”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뒤를 향해 손짓하자, 한달음에 다가온 이 태의가 휘장을 홱 걷었다.
“왜 그러는가?”
황급하게 묻던 이 태의가 내시를 따라 침상 위를 바라보았다. 침상 위로 펼쳐진 광경에 태의 또한 내시만큼 놀란 얼굴로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문밖에서 시녀 한 명이 들어오더니 내시를 향해 말했다.
“부인께서 침상 정리를 명하셨습니다.”
침상을 정리하라고 했다고?
방 안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침상 위로 시선을 옮겼다. 내시와 이 태의가 각자 좌우로 휘장을 활짝 열어젖힌 덕에, 휘장 너머의 광경이 훤히 보였다.
진안 군왕의 상반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져 있지 않았고, 그의 허리 아래로 이불이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세상에! 어젯밤 여기에 들어오실 땐 저런 모습이 아니셨는데!
이부자리가 어지럽다니! 앓아누워 제대로 몸도 못 가누는 분께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주무셨을 리 없잖아!
설마!
모든 사람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어디선가 팍 소리가 들리자,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떨었다.
“자, 자네, 자네들이 한 이 대단한 짓 좀 보시게!”
고 선생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침상 앞에 서 있던 내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내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고 선생이 당황한 듯 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참으로 황당하군!”
고 선생이 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물며 중얼거렸다.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소?”
“어, 어쩌면 그런 게 아닐 수도…….”
내시가 어색하게 굳은 얼굴로 조용히 대꾸했다.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실에 있던 궁녀가 야릇한 웃음을 지으며 걸어 나왔다. 흰색 비단을 손에 쥔 궁녀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저기, 그…….”
궁녀의 시선이 이 태의에게 진맥을 받던 진안 군왕에게로 향했다.
“경, 경하드리옵니다. 전하.”
경하?
몇 사람이 무의식적으로 궁녀의 손에 들린 흰색 비단을 바라보았다. 그 위에는 새하얀 눈밭에 점처럼 피어난 매화 같은 혈흔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사람들의 머릿속이 펑 하고 터졌다.
고 선생과 이 태의는 벌써 슬하에 손자까지 둔 나이 든 사내인지라, 당연히 저게 무엇을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내시는 사내라고 할 수 없으나, 궁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지라 어젯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양이 조금 적긴 하지만, 그래도 저기 묻어 있는 건 확실히 혈흔이야.
역시, 그, 그 일을…….
이 태의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쥐고 있던 베개를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떨어트렸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전혀 미동 없는 모습으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그는 조금 전 휘장을 걷을 때 잠깐 의식을 찾았던 것 빼고는 계속 의식을 잃은 채 잠들어 있었다. 잿빛이 된 진안 군왕의 얼굴에 희미하게 창백한 안색이 비쳤다. 목 주변으로 새파란 멍 자국이 어렴풋이 보였다.
저건 손으로 꼬집어서 만든 상처 같은데…….
방 안에 또 한 번 기이한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고 선생이 이를 악물고 그 사이로 두 글자를 뱉었다.
“짐승!”
“그럴 리 없어.”
“전하께서 저 지경이신데, 어떻게 그런…….”
수군대는 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오자, 욕실에서 목욕물의 온도를 확인하던 시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엌으로 갔던 시녀는 차마 안채로 오기가 두려워 이곳저곳으로 피해 다녔지만, 그래도 결국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시녀가 안채로 돌아오자마자, 궁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시녀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이건 부인의 것이니, 잘 보관해 둬요.”
시녀는 당황한 나머지 하마터면 상자를 집어던질 뻔했다.
“부끄러워할 게 뭐 있어요.”
입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궁녀의 표정은 시녀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궁에서 평생을 지낸 궁녀인지라, 귀인들이 초야를 치르는 모습을 수없이 목격한 터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도무지 어떤 축하의 말을 건네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부인께서 드실 대추 연밥죽도 하나 더 만들어요.”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드디어 한마디 생각해 낸 시녀가 궁녀에게 말하고는 다시 실내로 시선을 돌렸다.
시녀는 조금 전에 본, 거의 잿빛이 된 진안 군왕의 안색과 혼신의 힘을 다한 듯 피곤한 모습을 떠올리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지, 보양식을 드실 건 전하인가?
어젯밤에 진짜 뭔가 있었나 보네. 전하께서 먼저 시작하신 걸까?
맞아, 분명히 전하께서 먼저 시작하셨을 거야. 우리 아씨는 그런 분이 아니잖아!
전하께 아직 그럴 힘이 남아 있을 줄이야.
시녀가 잡생각을 떨쳐내려는 듯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시녀는 다시 목욕통 안에 손을 넣어 온도를 확인하고, 어린 시녀에게 뜨거운 물을 더 가져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 후 식사를 대령하라고 했다.
“식사를 옮겨 달라고 해.”
어린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곧장 밖으로 뛰어나갔다. 시녀는 입을 꾹 다문 채로 욕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럴 리가 없기는 왜 없어? 잘 맡아 봐. 방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잖아.”
“고 선생이 물었는데, 이 태의도 이런 향은 생전 맡아 본 적 없대. 무슨 약 냄새가 난다고.”
“혹시 최음제가 아닐까?”
향! 어제 그 향!
시녀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다면, 어젯밤에는 아씨가 먼저…….
시녀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것을 본 여종들이 재빨리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이불을 새로 교체한 뒤, 깨끗해진 침상을 확인한 두 여종은 서둘러 시녀에게 예를 표하고 밖으로 물러났다.
아씨께서 먼저 시작하셨다 해도, 분명히 아씨만의 이유가 있을 거야. 아씨께서 절대로 틀린 결정을 내리실 리는 없으니까!
시녀가 깊이 심호흡을 하고는 허리를 곧추세웠다.
문밖에서 부인의 문안을 묻는 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는 더욱 마음을 굳게 먹고 잰걸음으로 문가로 향했다.
문밖에 서 있던 고 선생은 내시들이 가마를 들어 올리는 모습을 굳은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그 옆에 서 있던 내시와 이 태의의 표정도 다소 어두워 보였다. 그들은 반대편에서 걸어오던 정교랑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춘 후 복잡한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정교랑은 청색 치마저고리 차림이었고, 끈으로 동여맨 소매는 아직 내리지 않은 상태였다.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해를 등지고 서 있던 정교랑의 화장기 없는 얼굴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정 낭자는 저리도 혈색이 좋아 보이는데, 저기 가마에 타 계신 우리 전하께서는 거의 초주검이 되어서 지금껏 주무시고 계시네. 이 태의가 침을 두 번이나 놓았는데도 깨어나시지 못할 정도라니.
이다지도 짐승 같을 수가!
고 선생이 속으로 이를 부득 갈았다.
“부인!”
고 선생이 억지로 화를 누르면서 정교랑을 불렀다. 정교랑이 걸음을 멈추고 고 선생 일행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돌아가려는 건가요?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든 불러요.”
언제든 부르라고?
고 선생은 부아가 치밀어 올라 거의 혼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또 부르면, 전하께 또 그런 짓을 하려고? 저 짐승 같은 여인이!
“부인, 전하께서 몸이 더 안 좋아지신 듯합니다.”
이 태의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정교랑은 이 태의를 바라보며 손을 들고 말을 제지했다.
“원래부터 안 좋았어요. 난 일단 씻으러 가야겠으니, 이따 얘기하죠.”
정교랑이 유유히 안채로 들어가자, 문밖에 서 있던 세 사람은 경악하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이사신! 내 또다시 그대의 말을 믿는 날이 온다면, 그날부로 나는 그대의 성을 따를 거요!”
고 선생이 눈을 부릅뜨고 이 태의를 향해 호통쳤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시들을 향해 손짓했다.
“어서 전하를 거처로 모셔라! 궁에서 태의도 한 명 더 부르고!”
황궁 안에서 궁녀와 내시들의 말을 듣던 태후는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태후가 찻잔을 내려놓고 재차 물었다.
“설마, 정 낭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내시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과장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지요. 군왕부에서 태의를 더 데려갔는데, 전하의 속이 너무 허하다 보니 약도 넘기시지 못한다고 합니다. 침을 놓아도 깨어나지 못하는 상황인지라, 군왕부에 있는 사람들은 근심이 되어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합니다.”
“마마, 맞습니다. 전하의 안색은 산 사람의 안색이 아니었어요. 바싹 마른 나뭇가지처럼 보였다니까요.”
옆에 있던 궁녀가 한마디 거들었다. 태후가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지금 몸 상태가 말이 아닌데, 그 와중에 그런 짓을 하면 기가 다 빨릴 수밖에!”
“그래도 전하께서는 정 낭자를 진심으로 아끼어 혼례 때도 직접 참석하셨는데, 정 낭자가 그리 나올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쯧쯧.”
궁녀가 고개를 저으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러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급할 게 뭐 있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네요.”
급하다?
태후가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하루라도 더 빨리 회임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되면, 진안 군왕이 이 세상에 없다 해도 속 편히 반평생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역시나 계산적인 여인이었어. 어쩜 그리도 악독할까.
혼례를 올리던 날도, 백성들을 선동해 눈꼴 사나운 꼴을 보이더니, 그것도 자기가 군왕비가 되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서였겠지? 최음제를 써서라도 회임만 한다면, 장차 진안 군왕이 세상을 뜨더라도 그 여인은 안전하고 무탈하게 살 수 있을 거야.
그 여인은 경왕의 치료를 한사코 거절했고, 또 황후와 진안 군왕을 부추겨 회임에 좋은 비방을 넣은 간식을 안비에게 전해 주었어. 그리고 태백성을 운운하면서 평왕을 해쳤고, 귀비를 광증에 걸리게 했으며, 황상을 풍질로 쓰러지게 했지.
마마, 황후마마께서는 달리 의지할 곳이 없을 겁니다. 아마 황후마마께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정교랑이겠지요. 시간이 지날수록, 진안 군왕도 정 낭자에게 더욱 의지하게 될 것이고요.
훗날 그들이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를 때, 분명히 그 일에 대한 명분을 찾으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정교랑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명분을 얻고, 명성까지 얻게 되었잖습니까. 신선의 제자, 일식과 월식, 태백성, 번개를 부르는 일 등, 정교랑은 모두가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만들어 왔지요. 장차 정교랑이 누군가를 가리켜 하늘이 점지한 천자라고 한다면, 백성들은 분명히 그 말을 믿고 따를 것입니다.
고능준의 목소리가 태후의 귓가에 들려왔다.
마마, 마마께서 정말로 이 독버섯을 제거하고, 백성들의 의심을 사지 않고자 하신다면, 이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치셔서는 안 됩니다.
태후가 한숨을 쉬고 두 손을 꼭 쥐었다.
그래. 더 기다릴 수는 없지.
“여봐라, 군왕비를 궁으로 부르거라.”
황궁의 내시들이 태후의 명을 전하러 궁을 나설 무렵, 정교랑은 아침 식사를 마친 뒤 평소와 똑같이 글씨 쓰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 딱 한 가지 있다면, 오늘은 서재가 아니라 침상이 있는 안채에서 글씨를 쓴다는 것이었다. 군왕부에는 아직 정교랑의 서재가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시녀는 군왕부의 여종들과 대화하며 관저와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과 한참을 대화하던 시녀가 드디어 할 일을 마친 듯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옆에 있던 반근이 서둘러 부채를 들고 다가가 시녀에게 부채질을 해 주었다.
“반근 언니, 고생이 많아.”
반근의 말에 시녀가 풉 하고 웃었다.
“반근 언니, 밖에서 점포 관리하는 것보다, 여기 있는 게 더 힘들지?”
반근이 또 물었다.
“안 힘들어. 어디서 뭘 하는 사람들인지 확실히 알아 놓고, 각자 하던 일을 잘 하라고 했을 뿐이야. 우리는 입만 바쁘면 되니까.”
시녀가 대답하던 사이, 여종 한 명이 다가왔다.
“반근 언니.”
여종의 부름에 시녀와 반근이 무의식적으로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여종이 흠칫 놀라자, 반근이 혀를 날름거리며 민망한 듯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