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3화 (133/160)

-혼례-

주복이 떠난 뒤, 실내를 향해 시선을 돌리던 진소 부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이참, 혼례복을 지금 입으면 어떡해요. 단랑, 혼례는 놀이가 아니야. 어서 혼례복에서 손 떼. 손자국 남으면 내일 어떡하려고 그래.”

저녁이 되자, 북적이던 사람들이 떠난 정씨 저택 마당은 다시 평소와 같은 조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반근과 시녀는 여전히 방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반근과 시녀는 이미 싸 둔 상자와 보따리를 몇 번이고 확인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겼는지 재차 확인했다.

“빠트릴 게 뭐 있겠어. 너무 신경 쓰지 마.”

정교랑이 잔뜩 긴장한 두 사람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집에서 가장 한가한 사람은 정교랑이었다. 정교랑은 목욕을 마친 뒤, 창가에 앉아서 어린 시녀들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맡기고 손으로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사람만 있다면, 뭐든 다 갖출 수 있어.”

정교랑이 자신의 손에 들린 책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예를 들어 이 책은, 안 가져가도 상관없어. 새로 한 권 사면 그만이니까.”

정교랑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녀가 잰걸음으로 다가와 정교랑의 손에서 책을 가져갔다.

“말씀 안 하셨으면 까먹을 뻔했어요.”

시녀가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책 몇 권도 모두 정리해 반근에게 건넸다. 정교랑은 웃으면서 반근이 책들을 상자 안에 넣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거 읽어야 하는데.”

“오늘은 그만 읽으세요. 매일 읽으시니까 딱 오늘 하루만 건너뛰어요, 네? 내일 밤에 마저 보시면 되잖아요.”

시녀가 헤헤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의 머리카락을 빗던 어린 시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은 신혼 초야잖아. 아, 그런데 신랑이 친영도 못 오고 맞절하는 의식도 못 치른다던데, 그럼 동방화촉은…….

아씨께서 시간이 많긴 하시겠네.

그래도 너무 가엾으시네. 무려 신혼 초야인데.

어린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 정교랑의 긴 머리카락을 천천히 빗었다.

내일이면 이 머리카락 위로 봉관이 씌워지고, 아씨는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시겠지.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여름 곤충들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경.”

휘장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바닥에 앉아 졸고 있던 내시가 깜짝 놀랐다. 내시는 눈도 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침상 쪽으로 기어갔다.

“전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혹시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물 드릴까요?”

내시가 휘장을 살짝 걷으며 연달아 물었다.

어둑한 등불 때문에 휘장 안은 더욱 어두워 보였다. 침상 위에 있던 진안 군왕이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내시는 서둘러 그를 제지하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태의가 되도록 몸을 일으키지 않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전하, 어디 불편하십니까?”

“난 괜찮다.”

진안 군왕이 대답하고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내일이냐.”

내시가 웃었다.

“예, 내일입니다.”

내시가 침상 옆에 꿇어앉아 태사국에서 계산한 친영을 출발하기에 좋은 시간과 신부가 가마에서 내리는 시간, 신랑 신부가 맞절하고 천지신명과 부모님께 절을 올리는 시간 등을 하나하나 손으로 꼽으며 소상히 설명했다.

“영헌(永軒) 국공야(國公爺)께서 전하를 대신하여 여기서 신부를 맞이하실 것이고, 대공주 부마와 이 한림께서 친영 행렬로 가실 겁니다.”

내시가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자, 진안 군왕의 호흡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의 표정 또한 몹시 평온해 보였다.

진안 군왕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내시의 말을 끊었다.

“그럼 혼례복은…….”

진안 군왕의 말에 내시가 멈칫했다.

“그럼 국공야가 내 혼례복을 입는 건가?”

진안 군왕이 묻자, 내시가 웃으면서 휘장을 걷었다.

“전하, 전하의 혼례복은 여기 있습니다. 국공야께서는 혼례복을 입지 않습니다. 혼례복은 오직 신랑 신부만 입는 것이지요.”

짙은 밤하늘 때문인지, 침상 옆에 세워 둔 옷걸이에 걸려 있는 혼례복은 무슨 색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전하,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어찌 됐든 혼례식은 일종의 의식일 뿐이고, 앞으로 두 분이 함께 보내실 나날이 더욱 중요합니다.”

내시가 웃으며 말하자,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나면, 내일이 되겠지. 드디어 이날이 왔네.

하늘빛이 아직 푸르스름한 새벽이었다. 시녀가 정교랑을 깨웠다.

“친영은 오후라고 하지 않았어?”

정교랑이 평상시 입던 치마저고리를 걸치며 벽에 걸려 있던 활을 집어 들었다.

“아이고, 우리 아씨.”

시녀가 깜짝 놀라서 소리치고는 정교랑의 손에서 활을 빼앗았다.

“아씨, 활쏘기하시라고 일찍 깨운 게 아니에요.”

반근은 방 한쪽에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머리 손질해 주는 사람이 온 다음에 세수하는 게 나을까, 아니면 세수한 다음에 기다리는 게 나을까?”

반근이 어린 시녀에게 정교랑이 오늘 할 장신구들을 꺼내 놨는지 확인했다.

“안 꺼내 놔도 돼. 방이 이렇게나 작은걸. 두어 걸음이면 다 닿잖아.”

정교랑이 천천히 구리거울 앞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반근,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돼. 밤새 한숨도 못 잤잖아. 일단 네 화장부터 하고 와.”

시녀가 말하자, 반근은 그제야 아차 싶었는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내 정신 좀 봐. 아씨를 창피하게 해서는 안 되지!”

반근이 소리치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허둥대며 문턱을 지나가던 반근은 하마터면 발이 삐끗해 넘어질 뻔했다. 문가에 서 있던 어린 시녀들이 호들갑을 떨며 반근을 부축했다.

대청 안으로 들어오던 황씨가 반근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반근이 왜 저렇게 긴장해?”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워낙 중차대한 일이잖아요. 큰아씨께서는 큰 도련님께 시집온 날, 어떠셨어요?”

시녀가 미소 띤 얼굴로 황씨에게 물었다.

“어, 그때는…….”

황씨가 곰곰이 회상하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무 긴장해서 머리가 새하얘졌다는 거 말고는 잘 기억이 안 나. 아, 맞아. 그날 아침에 어머니께서 과일 한 개를 손에 쥐여주셨던 게 생각나네. 그런데 나는 그걸 먹을 생각도 못 하고, 결국 손에 그대로 쥔 채로 신방까지 들고 갔어.”

시녀와 몸종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정교랑도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때 나는…….

황실에서 시중들러 온 사람들이 집 안팎을 가득 채웠고, 정씨 저택도 신부를 배웅하는 정도 이상으로 성대하게 꾸며져 있었다.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저택만큼 화려한 모습이었다.

정교랑은 쿵쾅대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모가 준 인삼 절편을 손으로 으깨고 있었다.

친영 행렬은 성을 반 바퀴 더 돌고 나서야 궁으로 향했다. 아침부터 먹은 게 하나도 없었던 정교랑은 하마터면 실신할 뻔했다. 옆에 앉아 있던 양산이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삼 절편을 조용히 정교랑의 손에 쥐여주었다.

“자. 네가 허둥대는 걸 보니까, 분명히 뭔가 빠트린 게 있을 줄 알았어.”

양산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웃으면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너는 칼도 잘 쓰고, 활도 잘 쏘고, 기마도 잘하면서, 배고픈 건 왜 잠시도 이렇게 못 견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난 배가 고팠던 게 아니라, 긴장했던 거야.

귓가에 시녀의 웃음소리가 들려오자, 정교랑이 정신을 차렸다.

“아씨께서도 긴장하신 거죠?”

시녀가 웃으면서 물었다. 시녀가 정교랑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정교랑에게 새 신발을 신겨 주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요. 내가 나중이 되어서야 후회한 게 있는데, 혼례를 올리는 날이 내가 살면서 제일 한가했던 날이더라고요. 모두가 다 나를 위해 고생하고 바삐 움직이는데, 나는 마음 편히 손 놓고 그걸 지켜보고만 있었으니까요. 그런 날은 아마 살면서 딱 한 번밖에 없을 텐데, 그때 실컷 즐길 걸 그랬어요.”

황씨가 웃으면서 말했다.

어린 몸종이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와 진소 부인이 도착했음을 알리자, 황씨가 서둘러 진소 부인을 맞이하러 문가로 다가갔다.

방 안이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다.

정교랑은 구리거울 앞에 앉아 다른 사람의 손에 머리카락과 화장을 맡기고, 주위에 있는 부인들과 젊은 새댁들이 들려주는 축복의 말들을 잠자코 듣고 있었다.

날이 훤히 밝고, 모든 준비가 끝났지만, 정교랑은 계속 방 안에 앉아 진안 군왕의 친영 행렬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언니, 이상해요.”

진단랑이 웃으면서 말하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이상하긴 하네. 그때는 신부 화장이 지금처럼 짙고 화려하지 않았는데.

“너 괜히 쓸데없는 말 하지 마. 신부 화장은 원래 다 이래.”

진십팔랑이 말했다.

“아니, 언니가 저렇게 있을 때는 안 이상했는데, 정 언니가 이러고 있으니까 엄청 이상해.”

진단랑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이제 곧 연회석이 준비됩니다. 이제 다들 나가셔요.”

진소 부인의 여종이 방으로 들어와 고하자, 진십팔랑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같이 있어 줄까요?”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하긴, 우리가 여기 남아 있는 게 더 어색할지도 모르겠네요. 식사를 마치고 나서 수다 떨러 다시 올게요.”

진십팔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진소 부인이 데려온 젊은 새댁들과 부인들도 정교랑에 관한 이야기는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여인네들 대하듯 웃으면서 담소를 나누기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다들 고마워요.”

정교랑이 몸을 일으키고 여인들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에이, 괜찮아요.”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단랑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던 여인들이 밖으로 나가자,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씨, 배는 안 고프세요?”

반근이 물었다.

“배고파도 드시면 안 돼. 신혼 첫날인데 속이 안 좋아지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아씨, 오늘 하루만 좀 참으세요.”

시녀가 말했다.

“그래도 엄청 오래 걸리잖아.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드셨는데, 부모님께 절하는 의식까지 끝내고 나면 아마 밤일걸?”

반근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진안 군왕의 요양을 방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하라는 지시가 있었지만, 바깥마당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지금이 몇 시지?”

진안 군왕이 휘장을 걷으며 물었다. 두 시녀가 서둘러 대답하자, 문밖에 서 있던 내시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내시가 침상 위에서 몸을 일으킨 진안 군왕을 보며 물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는데, 왜 아직도 가지 않는 것이냐?”

진안 군왕의 물음에 내시가 웃으며 대답했다.

“전하, 급하실 거 없습니다. 정씨 저택에서 여기까지는 지름길로 올 터이니, 금방 다녀올 겁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지름길로 온다고?”

혼례를 올리는 이유는 여러 사람의 축하를 받으며 시끌벅적하고 경사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함이었다. 혼례를 올리는 날, 신랑은 신부를 맞이하는 기쁨을 자랑하고, 신부는 혼수를 자랑했다.

특히나 요즘은 날이 갈수록 경성 규수들의 혼수가 더욱 풍성해지는 추세였다. 그래서 꽤 명망이 있는 집안이라면, 신부의 혼수를 자랑하기 위해 족히 경성 한 바퀴를 다 돌면서 가곤 했다. 아무리 별 볼 일 없는 집안이어도, 혼례 날에는 경성에서 가장 떠들썩한 저잣거리를 가로지르며 징을 치고 북을 두드리면서 많은 사람에게 경사를 알렸다.

그런데 지름길로 오가겠다고? 무슨 도둑질하고 도망을 치는 사람처럼?

이게 혼례를 올리는 거야, 아니면 도둑놈을 몰래 집으로 들여오는 거야?

“태후마마의 분부십니다.”

내시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음, 하고 대꾸하고는 다시 침상 위에 천천히 누웠다. 그의 시선이 침상 옆에 놓인 혼례복으로 향했다.

바깥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전해졌다.

“왔어요. 왔어요!”

어린아이들이 외치면서 마당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반근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왔네. 뭐 이렇게 느릿느릿 와.”

반근은 친영 행렬이 영영 안 오는 줄 알고, 오늘 혼례를 올리는 것이 꿈이었나 하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아씨, 어서 붉은 천을 쓰세요.”

반근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붉은색 천을 얼굴 위로 덮자, 정교랑의 시야 안에는 온통 붉은색밖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교랑은 눈을 감고 저도 모르게 두 손을 주먹 쥐었다.

“아씨, 긴장하지 마세요.”

시녀가 정교랑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다른 한쪽에서 반근의 투덜거림이 들려왔다.

“아씨께서도 긴장하실 거라고 했잖아. 누가 아씨는 긴장하지 않으신대?”

“그래도 아씨께서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으셨다니까? 완전 남 일인 것처럼 홀가분해 보이시길래.”

“아직 때가 안 돼서 그러신 거겠지.”

정교랑이 주먹을 쥐었던 손에서 다시 힘을 뺐다. 정교랑은 긴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눈에 가득 들어오는 붉은색을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덮쳐오는 선명한 붉은색이라니. 우리 정씨 가문이 멸족당했을 때, 그리고 꿈에서 무수히 많이 보았던, 온 하늘을 뒤덮었던 그 붉은색.

“왜 이렇게 늦게 온 것이오?”

친영 행렬이 마당 안으로 들어오자, 주복이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일찍 와서 뭐 합니까?”

“집안 어른들이 없으니, 차를 올릴 필요도 없잖습니까.”

“도착하자마자 바로 출발하면 되고, 오가는 시간도 짧으니까요.”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하게 대답하면서 웃는 소리가 들려오자, 범강림의 표정이 점점 더 굳어졌다.

“됐다, 어서 서두르거라. 길한 시간 놓칠라.”

내시가 성가시다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경사를 위해 고른 시간인데, 괜히 지체하다 놓쳤다가는 헛수고만 한 꼴이 아니냐.”

체면은 조금도 챙겨 주지 않겠다 이거로군.

정씨 저택의 마당 안에 서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몇몇은 일부러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주복이 마당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고는 정교랑의 거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육공자께서 아씨를 배웅해 주십니다.”

진행을 맡은 이가 목청 높여 외치자, 주복이 정교랑을 등에 업었다. 이는 주복과 정교랑이 가장 가까이에서 한, 가장 친밀한 접촉이었다. 아마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고.

주복이 천천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문턱을 넘어선 주복이 조심스럽게 층계를 내려갔다.

“만약…….”

주복이 저도 모르게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때, 요란스러운 폭죽 소리와 북소리며 징 소리가 터져 나왔다. 어색했던 마당이 드디어 혼례를 올리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오라버니, 뭐라고요?”

소란스러운 와중에, 주복은 자신의 귓가에 정교랑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느꼈다. 정교랑의 목소리는 주위의 소음보다 훨씬 작았지만, 주복의 귀에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니다.”

주복이 대꾸했다.

등에 업힌 정교랑이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복은 고개를 들고 점점 더 가까워지는 대문을 향해 걸어갔다. 주위의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서 아득히 멀어지고, 눈앞에 보이는 길도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지는 듯했다.

만약 이대로 계속 걸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씨 저택의 대문 앞은 벌써 인파로 인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오성병마사 위병들이 질서를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마차가 지나갈 공간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나왔네! 나왔어!”

키 크고 우람한 사내의 등에 업혀 나오는 신부를 보자, 대문 앞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구경꾼들은 신부의 모습을 더욱 가까이서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다른 혼례를 구경할 때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구경꾼들의 손에 술동이가 몇 개씩 들려 있다는 것이었다.

“술 있소? 술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외쳐댔다.

하지만 신부는 그대로 가마에 올랐고, 친영 행렬도 마차와 말에 올라탔다. 그 옆으로 여종과 몸종들이 나란히 줄지어 섰다. 오성병마사의 위병들이 길을 트자, 건장한 사내들이 신부가 탄 가마를 번쩍 들어 올렸다. 모든 것이 여느 여인들이 시집가는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다른 건 없어?”

대문 앞에서 아쉬워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떻게 된 일이람. 의형제 몇 명 죽었을 때는 그리도 거창하게 노제를 지내더니만.”

“그러게 말일세. 과거에 급제한 진사들을 축하할 때도 술을 빚었잖소.”

“정작 자기 일에는 하나도 신경을 안 쓰네. 얼마 전에 정사낭이 죽었을 때도 그렇고, 오늘처럼 본인이 혼례를 치르는 날에도 아무것도 없다니.”

누군가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퍼뜩 들고 기대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면, 거리에 볼거리가 있는 거 아닐까?”

“맞아, 그럴 수도 있네. 신선거 쪽으로 가 보세!”

경성에서 가장 북적북적한 번화가인 저잣거리로 몰려가려던 사람들이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걸음을 멈췄다.

“어라? 이상하다?”

사람들이 놀란 모습으로 소리치며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친영 행렬을 손으로 가리켰다.

“왜 저 좁은 골목으로 가는 거야?”

말 위에 타 있던 주복이 앞쪽에서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정말로, 체면이라고는 아주 조금도 챙겨주지 않을 작정이군.

친영 행렬 뒤에서 신행을 함께하고 있던 사람들도 무언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눈치챘다.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행렬을 따라 걷던 몸종과 아낙들이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이상하다. 길을 잘못 든 거 아니야?”

혹시나 혼례 당일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날까 봐, 진소 부인은 직접 전복인을 자처해서 정교랑의 신행에 함께했다. 마차 밖을 내다보던 진소 부인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서둘러 마차 휘장을 들어 올리며 내시에게 물었다.

“노국 부인(魯國夫人: 진소 부인의 봉호), 폐하께서 쓰러지시고, 군왕 전하께서도 요양 중이셔서 모든 것을 간소화하여 진행하라는 태후마마의 당부가 있었습니다.”

내시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의 뜻이라는 말에 진소 부인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억지웃음을 짜내며 휘장을 내렸다. 진소 부인은 좁디좁은 골목을 향해 가는 친영 행렬을 내다보며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 신부인 정 낭자의 체면을 바닥까지 끌어내리려는 황실의 뜻이 이리도 명백할 줄이야.

가마 옆에서 같이 걸어가던 반근의 안색이 하얗게 질리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아씨께서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제야 알겠어.”

반근이 중얼거리자, 시녀가 조용히 물었다.

“무슨 말?”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말.”

반근이 대답했다.

거리 곳곳을 누비면서 경성 한 바퀴를 돌고, 온 경성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친영 행렬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가장 가까운 지름길을 통해 신부를 맞이하려는 거구나. 그래서 아씨께서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하셨던 거야. 금방 식사를 하실 수 있을 테니까. 금방이면, 다시 쉬면서 책을 읽으실 수 있을 테니까.

반근이 앞쪽을 내다보았다. 황궁에서 온 영인들은 악기를 건성으로 연주했다. 흥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음악이었다.

좁은 골목에서 지나다니던 행인들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친 친영 행렬에 깜짝 놀랐다.

멀쩡한 큰길을 놔두고 이렇게 좁은 골목을 골라서 시집가는 신부도 있어? 시집가는 신부 댁이 얼마나 남 보기 부끄러운 초라한 집안이길래?

하지만 행인들은 친영 행렬 가장 앞쪽에 보이는 오성병마사 위병과 금군 병사들을 보고 더욱 놀라며 재빨리 길을 비켰다.

저 정도면 신랑이 최소한 친왕 정도는 돼 보이는데. 그런데 친왕이 왕비를 맞이하는데, 친영 행렬이 이리 초라하다고?

행인들이 호기심 섞인 눈빛으로 친영 행렬을 구경했다.

“내 말이 맞지?”

친영 행렬을 이끌던 두 사내가 한가롭게 잡담을 나눴다.

“이 길이 큰길보다 좁긴 해도, 행렬이 거뜬히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는 널찍하다니까.”

모여드는 구경꾼들을 내쫓을 필요도, 행렬을 에워싸고 함께 행진하는 구경꾼들 때문에 발걸음을 늦출 필요도 없어.

“그러게 내가 술 한 사발 더 마시고 나가도 된다고 했잖아. 우리끼리 한잔하는 게 더 중하지.”

다른 사내가 하품을 하면서 취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사내를 원망했다. 잡담을 나누던 사내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때 골목 앞쪽 모퉁이에서 느닷없이 마차 한 대가 튀어나오더니 행렬 앞에서 느릿느릿 나아갔다.

길을 터는 금군 병사들이 어이, 어이 하면서 마차를 향해 고함쳤지만, 마차를 끌던 늙은이는 귀가 먹었는지 금군 병사들의 호통도 아랑곳하지 않고 느긋하게 마차를 몰았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참다못한 금군 병사가 말에 채찍을 휘두르며 늙은이를 향해 달려갔다.

아니지, 꼴이 말이 아니어야 더 좋지. 태후마마의 뜻이 바로 이런 게 아니겠는가. 혼례를 엉망진창으로, 꼴이 말이 아닐 정도로 진행해야 더 좋을 테지.

내시가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금군 병사를 불러 세웠다.

“별로 멀지도 않고 길이 좁기도 하니, 비키라고 하는 게 더 번거롭네. 먼저 가라고 하게나. 우리가 조금 더 천천히 가면 되지.”

“그러게 말입니다. 급한 것도 아닌데요.”

누군가가 웃으면서 내시의 말에 맞장구쳤다.

친영 행렬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자, 좁은 골목길에서 작게 울리던 영인들의 악기 소리보다 사내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보다 못한 반근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반근은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면 화장이 망가지진 않을까 걱정하며 고개를 더욱 푹 숙였다.

친영 행렬은 금세 좁은 골목을 벗어났다.

“여기서 꺾어서 거리 하나만 더 지나면 되네.”

“이따 가서 계속 마셔야지.”

친영 행렬에서는 시답잖은 말들과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친영 행렬이 모퉁이를 돌자, 갑자기 앞쪽에서 칠현금 소리가 들려왔다. 경쾌하고 시원시원하게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 소리가 사내들의 잡담 소리를 덮었다.

누가 거리에서 칠현금 연주를 하는 거지?

친영 행렬의 사람들이 잡담을 멈추고 앞을 내다보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한 사내가 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라? 최 악공이잖아?”

누군가가 소리치자, 더 많은 사람이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황궁 영인인 최 악공은 황실에서 주최하는 중대한 행사나 중요한 제사 때 연주하는,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영인이었다. 권문세가에서 연회를 열 때도, 최 악공을 초청할 수 있는 것을 영광으로 여길 정도로 유명한 악공이었다.

그런데 그런 최 악공이 왜 길바닥에서 연주를 하는 거지?

최 악공은 연주에 심취한 듯, 친영 행렬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친영 행렬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최 악공의 칠현금 연주도 점점 더 경쾌해졌다.

친영 행렬의 북소리가 끊임없이 울리고, 사내들의 잡담도 다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모든 사람의 귓가에는 최 악공의 칠현금 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사람들의 귓가에 맴도는 그의 연주는, 눈앞에 백 마리가 넘는 새들이 지저귀며 무리 지어서 날아왔다가 다시 힘찬 날갯짓을 하며 다른 쪽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는 듯했다.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두 팔을 활짝 펼치고 새들을 따라가거나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최 악공의 연주를 들은 사람들은 삼삼오오 거리로 몰려들었고, 지나가던 행인들도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칠현금 연주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은 최 악공의 연주에 흠뻑 취했고, 연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신나는 음률이 마냥 즐거웠다.

“저 곡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친영 행렬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 악공이 새로 쓴 곡인가 봐!”

“그런데 최 악공이 왜 여기까지 와서 저러는 거지?”

누군가가 물었다.

친영 행렬은 이미 최 악공을 지나쳤지만, 사내들은 여전히 그의 연주에 홀린 듯 고개를 돌리면서 귓가에 들려오는 연주를 감상했다.

“벌써 잊은 거야? 최 악공이 누구의 연주를 듣고 신의 경지에 이르게 됐는지?”

정 낭자!

칠현금 연주로 경왕부의 액막이를 했을 때, 정 낭자는 바보인 경왕을 춥다고 느끼게 하고, 최 악공을 칠현금 연주에 홀리게 했었다.

“그렇다면, 최 악공은 지금…….”

사람들은 무언가 깨달은 얼굴로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최 악공을 돌아보았다.

일부러 여기까지 와서 정 낭자의 혼인을 축하하는 거구나.

“곡이 진짜 너무 좋잖아!”

“언젠간 꼭 최 악공을 집으로 모셔서 저 곡을 연주해 달라고 부탁할 거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감격에 찬 표정으로 같은 말을 뱉고, 최 악공이 연주하고 있는 곡명이 무엇인지 물어보러 가고 싶어 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지금 친영 행렬에 속해 있는 게 원망스럽기만 했다.

“맞아, 맞아. 나도 꼭 모셔 올 거야. 모셔 와서 저 곡을, ‘정 낭자 송혼곡(送婚曲)’을 연주해 달라고 해야겠어!”

정 낭자 송혼곡?

곡명이 정해졌으니, 정 낭자가 시집가던 날 최 악공이 이 곡을 작곡해 바쳤다는 이야기 또한 오래도록 입에서 입을 타고 전해지리라.

거리 곳곳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어서 가 보자. 저쪽에 황궁 악사가 정 낭자에게 송혼곡을 바치고 있대!”

“엄청 듣기 좋은 곡이래!”

정 낭자? 저리 좁은 거리에 그렇게 좋은 볼거리가 있다고?

인파가 순식간에 좁은 거리를 향해 모여들었다.

친영 행렬이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면서, 최 악공의 연주 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하지만 몇몇 사람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끊임없이 고개를 돌리곤 했다.

사내들이 아쉬워하며 앞을 내다보던 찰나, 누군가가 소리쳤다.

“저기 봐! 저 사람들이 지금 뭘 하는 거야?”

또 누가 칠현금 연주를 하나?

모두가 일제히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리 양쪽에 언제 모인 건지 모를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무리에는 노인과 청년, 어린아이가 모두 섞여 있었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제각각이었다. 같은 점은 단 하나, 그들의 손에 붓과 먹이 들려 있었다는 것이었다.

저게 뭐지?

친영 행렬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앞을 내다보던 사이,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의 앞으로 두 사람이 손에 커다란 종이를 들고 재빠르게 뛰어갔다. 새하얀 백지가 두루마리 비단처럼 사람들 앞에 펼쳐졌다.

“붓을 드시오!”

누군가가 외치자 양쪽에 서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붓을 쥐었다.

최 악사의 칠현금 연주를 뒤로하고, 새로 연주를 시작하려던 영인들이 멈칫했다. 영인들도 눈을 휘둥그레 뜬 채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줄지어 서 있는 사람들은 나이도, 옷차림새도, 신분도 제각각인 듯했다.

거리의 사방에서는 인파가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다.

“글을 쓰시오!”

조금 전에 소리쳤던 사람이 또 외치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자신의 앞에 놓인 백지 위로 붓을 휘두르며 먹물을 찍어내기 시작했다.

지금 저게 무슨…….

친영 행렬에 속해 있던 사람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말고삐를 당기지 않은 탓에 말들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지만, 말 위에 올라타 있던 사람들은 털끝이 삐쭉 서는 듯한 느낌에 온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들은 놀란 얼굴로 백지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머리가 새하얀 백발이 된 노인, 젊고 준수한 사내, 머리를 땋은 어린아이가 섞여 있었지만, 다들 진지하고 집중한 표정으로 각자 손에 들린 붓을 휘둘렀다. 값비싸고 귀한 붓을 든 사람도, 털이 다 빠진 닭털 붓을 쥔 사람들도, 각각 백지 위에 노련하거나 서툰 솜씨로 크거나 작은 글씨들을 써 내려갔다.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점 하나, 획 하나에도 저마다의 순서와 도가 있다고 했네.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을 먼저 쓰니,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사람들이 먹을 흩날리며 붓을 움직이자, 누군가가 큰소리로 시를 읊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이, 그 뒤로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시를 낭송하기 시작했다. 연로한 노인의 목소리와 어린아이의 맑은 목소리가 한데 섞여 자아내는 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한 번 또 한 번 때렸다.

친영 행렬의 사람들은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긴 화폭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말에 탄 사람들은 더는 시답잖은 농담을 하지도, 장난스러운 웃음을 보이지도 않았다. 최 악공의 연주가 더는 귓가를 맴돌지 않는데도, 사내들은 격하게 요동치는 감정을 느꼈다.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문 앞에서 바닥을 자리 삼고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자신이 글씨를 쓰는 모습을 보여 줬던 정교랑은, 자신이 글씨를 쓴 종이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나눠 주었다.

누군가를 가르쳤다고 한 적은 없지만, 뭇 사람들에게 스승으로 섬겨지는 사람.

시녀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다들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 모두가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

아씨께서 말씀하지 않으셔도, 부탁하지 않으셔도, 모두가 다 잊은 게 아니고, 선물하지 않는 게 아니야.

언제 몰려왔는지 모를 사람들이 거리의 사방을 가득 메웠다. 좁은 골목이었지만, 경성에서 가장 시끌벅적한 저잣거리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모인 듯했다.

“정 낭자의 혼삿길을 배웅하는 건가?”

“세상에, 이런 배웅은 난생처음 봐.”

“엇, 저기 글씨를 쓰는 사람 중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어. 저분은 맹림관에서 무척 유명한 선생이신데!”

“나도 아는 얼굴이 하나 있어. 우리 옆집의 셋째 아들내미가 저기 있네?”

거리 양쪽으로는 족히 백 장(丈)은 되어 보이는 종이가 펼쳐져 있었다. 친영 행렬의 입장에서 백 장 정도는 순식간에 지나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지금은 아주 느릿느릿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친영 행렬을 이끄는 사람들이 인파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탓이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몰려든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전방의 금군 병사들은 길을 트느라 진땀을 뺐다.

“아무리 가까운 지름길로 가도, 못 막는 건 여전하네.”

친영 행렬의 사내가 중얼거렸다.

어디로 가든,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그 길로 시집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정 낭자인 것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얼른 돌아가 술이나 마시고 싶다고 했던 사내조차도 숙취가 가득한 얼굴 대신 경외감 가득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내다보았다.

이때 갑자기 어디선가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거리에서 시끌벅적하게 구경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두리번거리던 그때, 하늘에서 폭죽이 터지며 노을을 품은 구름 같은 연기를 뿜어냈다.

해가 뜬 대낮에 노을을 품은 구름 같은 폭죽이라니!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일제히 할 말을 잃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인산인해 속에서 기이한 정적이 흐르자, 사람들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폭죽 소리가 한 번, 또 한 번 울려 퍼지면서, 하늘에 오색빛깔의 연기가 구름처럼 떠다녔다.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말해 뭐해. 이것도 ‘그 해에 정 낭자의 가르침’을 받았던 누군가가 축하 선물을 하는 거겠지.”

누군가가 중얼거리자, 친영 행렬 중 다른 사내가 장단을 맞췄다.

“그러게. 태후마마께서 축하해 주지 않으신다고 해도…….”

친영 행렬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고개를 들고 하늘에 끊임없이 수놓아지는 색색의 폭죽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텅 비었던 거리가 꿈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군.”

그리고 이런 축하는, 아무리 존귀한 태후마마라 해도 받기 어려울 거야.

“그 해 정씨 여인이 서예를 가르칠 때,

점 하나, 획 하나에도 저마다의 순서와 도가 있다고 했네.

붓을 내리기 전에 마음을 먼저 쓰니,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가을 나무들조차 놀라서 우수수 낙엽을 떨구리!

반근이 가마의 창가를 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아씨, 아씨.”

반근이 울음을 터트렸다.

“보셨어요? 보이세요? 엄청 많은 사람이 아씨를 배웅하러 나왔어요! 정말 엄청 많은 사람이 아씨의 혼례를 축하하러 나왔다고요! 아씨, 이번에는 아씨께서 틀리셨어요. 친영 행렬은, 금방 끝나지는 않을 거예요!”

가마 안에서 시종일관 눈을 감은 채 단정하게 앉아 있던 정교랑이 천천히 손에 힘을 풀었다. 정교랑이 느릿느릿 눈을 떴다. 조금 전에 봤던 그 붉은색이 여전히 시야 안에 들어왔다.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어졌어.

“아씨, 아씨. 보이세요? 저렇게 많은 사람이 다 아씨를 기억하고 있어요. 아씨, 저들이 다 아씨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허공에서 팡팡 터지는 폭죽 소리와 함께, 격앙된 반근의 목소리가 정교랑의 귓가에 들려왔다.

보여. 나도 보여.

앞을 직시하는 정교랑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하늘 여기저기서 끊임없이 터지는 폭죽이 알록달록한 연기를 만들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래로, 오색찬란한 연기를 등지고 유유히 거리를 지나가는 친영 행렬은 더없이 화려해 보였다.

“무원산 형제들의 노제를 지낼 때, 대낮에 볼 수 있는 가장 화려한 폭죽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보다 더욱 화려한 불꽃놀이를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이런 걸 보고 청출어람이라고 하는 거지?”

“훌륭한 스승 밑에서 뛰어난 제자가 나온다고 해야지.”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속에서 웃고 떠드는 소리와 어린아이들의 환호와 감탄이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른들의 어깨 위에 목말을 탄 아이들이 하늘을 가리키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친영 행렬이 거리의 끝에 다다르자, 분주하게 폭죽을 쏘아 올리는 이씨 가문 사람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씨 가문 폭죽 점포의 점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이, 누군가가 점포로 다가왔다. 새 옷을 입은 이무가 그 사람을 향해 공손하게 예를 표했다.

“이 대인.”

친영 행렬에 있던 누군가가 말에서 내릴 겨를도 없이 몸을 내밀고 물었다.

“저 폭죽은 이번에 점포에 새로 들인 물건입니까?”

“예.”

이무가 대답했다.

대낮에도 오색찬란한 폭죽을 터트릴 수 있다니. 저런 건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아마 친영 행렬이 다 끝나기도 전에 이씨 폭죽 점포는 문턱이 다 닳겠지. 손님들이 수없이 찾아올 테니 말이야.

다만…….

그 사람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미간을 찌푸리고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딱 이번 한 번만 공개하고, 판매하지 않는 물건은 아니겠지요?”

이무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예, 판매는 안 합니다. 스승님의 혼례를 축하하기 위해 특별히 만든 거거든요.”

이무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이 못내 아쉬워하며 탄식하자, 그 대화를 듣지 못한 사람들도 이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아쉬운 탄식이 앞쪽에서부터 행렬 뒤쪽까지 파도처럼 퍼져나갔다.

“또 저러네!”

“그 스승에 그 제자라더니, 저렇게 좋은 걸 만들어 놓고 또 팔지는 않겠다고 하는 거요?”

“사람들의 구미만 당겨 놓고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게 해 버리다니. 이 광경을 다시 보려면 꿈이나 열심히 꿔야겠군그래.”

이무는 주위의 원성을 들어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내내 미소 띤 얼굴로 친영 행렬을 향해 예를 표하고 있었다. 신부의 가마와 혼수가 줄지어 그의 앞을 지나쳐 가고는 동안, 하늘에는 여전히 화려한 불꽃놀이가 터지고 있었다.

거리의 한 찻집 안에 있던 고능준이 시선을 거두었다. 불꽃놀이에 비친 그의 표정은 다소 복잡한 듯 보였다.

“아깝군.”

고능준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체면을 깎으려고 해도 또 저리 기세등등하게 시집갈 줄이야. 정말 아깝게 됐네요.”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친영 행렬을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제자리에 남아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는 사람도 많았다. 다들 저마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정교랑이 받은 축하 선물들을 이야기했다.

그런 모습을 볼수록 부아가 치민 고 관인이 바닥에 침을 퉤 하고 뱉었다.

“저만한 규모에 저리 많은 사람을 대동하면서, 오만 관으로 충분했을지 모르겠네요.”

고 관인이 고개를 들고 부친을 쳐다보자, 부친도 자신을 쳐다보는 모습이 보였다. 다만 그 표정은 다소 이상했지만.

“아버지?”

고 관인이 의아해하며 불렀다.

그때 내가 한발 늦은 게 참 아쉽군. 조금만 더 일찍 정 낭자를 볼 수 있었더라면, 저런 성대한 축하를 받으면서 친영했을 사람은 바로 우리 고씨 가문이었을 텐데.

고능준은 한숨을 내쉬고 창가 밖으로 보이는 군왕부로 시선을 돌렸다. 친영 행렬이 질서정연하게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고 모든 게 결정됐으니, 저 문을 넘어선 이상 저 여인을 도로 꺼내 오고 싶다고 해도 소용없겠지.

“아깝네.”

고능준은 또 한 번 탄식했다.

저렇게 재능이 뛰어난 여인이라는 게 참으로 아깝군. 조금만 더 일찍 저 여인을 만나 흉금을 터놓으며 같은 도를 추구했다면, 저 여인은 분명히 우리 고씨 가문으로 시집왔을 텐데.

아니, 아니지. 아까워할 때가 아니야.

한 걸음 잘못 내디뎠다고, 계속 잘못 내디딜 순 없어. 저 여인의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절대로 아깝다고 생각해서는 안 돼.

“준비는 잘 해 두었느냐?”

고능준의 물음에 고 관인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고능준은 고개를 들고 불꽃놀이를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불꽃놀이가 눈부실 정도로 화려하긴 한데, 오래 못 본다는 것이 참으로 아쉽구나.”

친영 행렬이 군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바깥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자연스럽게 차단되었다. 하지만 군왕부의 마당에 서 있던 사람들은 여전히 흥분한 표정으로 조금 전 거리에서 봤던 광경을 떠들어댔다.

“어찌나 흥겹던지, 그런 진풍경은 예전에 우리가 알던 그런 친영 길이 아니었어.”

“거리 양쪽에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붓을 내려서 글을 쓰는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지 뭐야. 왠지는 모르겠지만, 일흔두 명의 제자들이 공자 성인이 떠나시는 길을 배웅하는 모습이 상상되더라니까?”

“에이, 무슨 소리야. 나는 노자가 소를 타고 서쪽으로 떠나는 모습이 그려지던데?”

“쉿, 더는 말하지 말자. 괜히 우리 말이 황궁으로 전해졌다가는…….”

“전해지면 뭐 어쩔 거야. 우리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뭘.”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끊기지 않았다. 하지만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들을수록, 정씨 가문 사람들은 득의양양한 표정 대신 짜증 섞인 표정이 얼굴에 떠올랐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죠?”

진소 부인이 더는 화를 참지 못하고 진안 군왕 측의 전복인을 향해 작은 소리로 호통쳤다. 진소 부인을 못 알아볼 리 없는 전복인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제가 가서 한번 여쭤볼게요.”

전복인은 속으로 이번 일을 수락한 것을 몹시 후회했다. 물론 수락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진 상공 정도라면 태후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지만, 나는 그럴 배짱이 없으니 할 수 없지.

전복인이 잰걸음으로 후원에 들어서려 하자, 시위 두 명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총관 대인께 한 번만 여쭤봐 줄 수 있나요? 군왕비께서 이미 당도하셨는데, 왜 아직도 대례(大禮)를 시작하지 않지요?”

전복인이 후원 문 앞에 서서 물었다.

조금 전 혼사를 진행하는 내시들이 모조리 불려간 뒤,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마당에는 신부 가마와 친영 행렬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황실의 종친이니 망정이지 다른 집에서 이리 대했다면, 신부 측에서 당장이라도 가마를 돌릴 정도의 무례였다. 사실 제아무리 황실 사람이라 해도 이런 식으로 신부를 홀대한다면, 진소 같은 중신들이 일단 가마를 들고 떠난 뒤 황제를 찾아가 따졌을 것이다.

하지만 정 낭자는…….

진소 부인께서 신부 배웅을 해 주신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 낭자가 진씨는 아니니까.

전복인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후원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든 전복인은 눈앞에 보이는 광경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설마 수탉을 못 찾았나?”

주변에 서 있던 여종이 나지막이 속삭이자, 반근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돌려 여종을 흘겨보았다.

진안 군왕의 병세가 위독한 탓에 신부 맞이도 다른 사람이 대신해야 했고, 맞절을 올릴 때도 다른 사람이 수탉을 안고 진안 군왕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는 결코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액막이를 위한 혼사 자체가 신부에게는 치욕이었다.

“저들이 어떻게 나오냐에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하면 돼.”

반근이 조용히 읊조리자, 시녀가 쿡 하고 웃으면서 반근을 놀렸다.

“반근, 언제 그렇게 차분해졌대?”

반근이 고개를 치켜들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아씨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처럼, 살아 보지도 않았는데 좋을지 나쁠지 어떻게 알아.

문을 나서기 전까지는 오늘처럼 이렇게 많은 사람이 아씨를 축하해 줄 줄 몰랐어. 걱정했던 것처럼 군왕부까지 오는 길이 쓸쓸하지도, 초라하지도 않았지.

아직은 두 사람이 대례를 올리기 전이니까, 무서울 건 하나도 없어. 바로 다음에 또 무슨 일이 일어날 줄 누가 알아?

반근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칠 때,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던 반근은 무언가를 보고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저, 저건…….

시녀가 또 농담을 하려고 반근을 쳐다보던 찰나, 전에 없이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을 짓던 반근이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직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반근의 눈가에 또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반근이 또 왜 그러지?

시녀가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반근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곧이어 시녀도 반근만큼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 저건!

가마 밖에서 나지막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가마 안에 있던 정교랑은 수군대는 소리를 크게 개의치 않아 했다. 정교랑에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밥 먹는 일만큼 익숙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아마 하루 내내 같은 자세로 앉아 있으라고 해도, 정교랑은 별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가만히 앉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정교랑이 종일 앉아 있어야 할 날이 아니었다. 가마 밖에서 수모(手母: 신부의 단장 및 그 밖의 일을 곁에서 돕는 여자)의 과장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신부는 가마에서 내리시지요.”

가마가 낮춰지자, 낯선 여인이 손을 뻗어 정교랑을 부축했다.

붉은 천 때문에 주위의 시야가 가려졌지만, 다행히도 발밑은 잘 보였다. 정교랑은 눈을 내리깔고 발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정교랑이 가마에서 내려오자, 주위에서 들려오던 소란스러운 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가마 앞까지 쭉 이어진 붉은 깔개와 붉은 치맛자락이 시야에 들어왔다. 해가 질 무렵인지라, 노을에 비친 붉은색이 더욱 환하게 느껴졌지만, 정교랑은 눈을 감지 않고 침착하게 치맛자락을 보고 있었다.

붉은색 비단이 정교랑 앞으로 내밀어지자, 정교랑은 비단의 끝을 잡고 잠시 기다렸다. 비단의 반대편을 잡고 있던 사람의 미세한 움직임이 전해지자, 정교랑 옆에 있던 전복인이 걸음을 옮기라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정교랑은 한 걸음 한 걸음 안정적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교랑이 바닥에 놓인 말안장을 넘고 천천히 대청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청 안은 몹시 조용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옷깃 스치는 소리, 그리고 비녀와 장신구가 서로 부딪히는 작은 소리마저 들리지 않았더라면, 아무도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고요했을 터였다.

누군가가 정교랑 옆에 섰다. 붉은 혼례복의 옷자락이 충분히 보일 만한 거리였다.

“천지신명께 일 배!”

혼례를 진행하는 이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대청 안에 울려 퍼졌다.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허리를 숙였다.

천지신명께 절 올립니다.

“부모님께 이 배!”

정교랑이 또 허리를 숙이고 절을 올렸다.

부모님께 절 올립니다.

“신랑 신부 맞절!”

정교랑의 시야로 들어와 있던 붉은 옷자락이 뒤로 사라졌다.

수모가 정교랑을 부축하면서 천천히 옆으로 돌았다. 정교랑이 허리를 숙여 절을 올렸다.

낭군께 절 올립니다.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던 비단이 또 살짝 움직였다. 신방으로 들라는 진행자의 외침과 함께 정교랑이 걸음을 옮기자, 주위에서 소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한꺼번에 들려왔다. 그 소리에 정교랑은 많은 사람이 자신을 뒤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신방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정교랑은 금세 방 안으로 발을 들일 수 있었다. 방 안에서는 장신구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려왔고, 연지향이 더욱 짙어졌다.

정교랑은 신방에 같이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여인들일 거라고 생각했다.

침상 위에 바른 자세로 앉은 정교랑의 귓가에 주위에서 수군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원래대로라면 벌써 붉은 천을 걷어야 했음에도, 또 모든 게 멈춰 버린 듯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랑이 혼례에 참가하지 못하니까, 붉은 천을 걷는 것도 생략하는 건가?

정교랑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치던 찰나, 붉은 천이 걷히고 눈앞이 환해졌다.

태양이 이미 서쪽으로 졌지만, 낮이 긴 여름인지라 아직 어둑해지기 전이었다. 방 안을 밝힌 등불 덕분에 명암이 교차하던 정교랑의 시야가 점점 더 선명해졌다. 휘황찬란한 옥 장식과 비단에 정교랑은 눈이 부셨다.

“어머나, 신부가 정말 예쁘시네요.”

귓가에 들려오던 수군거림 대신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인들의 재잘대는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정교랑은 호기심 가득한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면서 실내의 밝기에 눈이 적응하는 것을 느꼈다. 앞에 서 있는 사람과 방 안의 장식이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정교랑이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돌리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조금 전, 붉은 천 아래로 보이던 혼례복의 옷자락이었다. 그 위로 검은색 옥대가 보였고,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탕기가 쥐여 있었다. 그리고 정교랑이 좀 더 위로 시선을 옮기자,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한 얼굴이 보였다.

정교랑은 살짝 놀랐는지 멈칫했다.

부쩍 야위어진 사내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서 있었다. 살이 많이 빠진 탓인지, 사내의 얼굴은 오늘따라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 안색이 어두워 그런지, 그의 두 눈동자는 더욱 그윽해 보였다.

정교랑이 자신을 쳐다보아도, 진안 군왕은 변함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일순간 두 사람의 시야와 귓가에서는 방 안에서 시끌벅적하게 호들갑을 떨던 사람들이 사라진 듯했다.

정교랑이 놀란 기색을 내비치고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그럼 조금 전까지 다 이 사람이었던 건가?

그랬군요, 당신이었어요.

“자, 전하, 이리로 와서 앉으시지요.”

여인의 말이 울려 퍼지면서 재잘대는 주위 목소리도 더욱 가까워졌다. 정교랑은 시선을 내리깔고, 내시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진안 군왕을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시녀 두 명이 쟁반을 손에 받치며 걸어왔다.

“전하의 건강을 생각해 오늘은 신방에서 장난을 치는 일은 생략할게요. 두 분이 합환주를 한 잔씩 하신 뒤에 혼례를 마치도록 하죠.”

전복인의 말에 시녀들이 무릎을 꿇고 쟁반을 높이 받쳤다.

정교랑이 쟁반 위에 놓인 술잔을 집어 들자, 진안 군왕도 술잔을 손에 쥐었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 진안 군왕을 정면으로 쳐다보자, 진안 군왕이 술잔을 든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정교랑은 진안 군왕이 내민 팔을 술잔을 든 손으로 감싸고 손등으로 가볍게 진안 군왕의 손등을 부딪혔다.

팔을 엇갈리게 낀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술잔을 들고 있었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향해 살짝 고개를 젓자, 진안 군왕이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들이 두 사람의 작은 동작을 눈치채지도 못할 만큼 눈 깜짝할 사이에, 정교랑이 고개를 꺾어서 술잔을 비웠다. 진안 군왕은 입술을 적시는 정도로만 술잔을 기울이고 정교랑을 따라 쟁반 위에 술잔을 내려놓았다.

* * *

작가의 말:

옛날에 합환주를 마실 때는 본문에 묘사한 것처럼 마시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애틋한 모습을 표현하고자 각색한 것이니, 독자 여러분께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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