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2화 (132/160)

-경사스러운 분위기-

시녀가 방 안에 들어설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반근의 밥상에 놓인 음식들도 그대로 있었다.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았다.

반근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반근, 아직 밥도 안 먹은 거야?”

시녀가 물었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어. 나중에 먹을게”

반근이 말했다. 시녀가 반근 옆으로 다가가 자리에 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밥 먹을 시간은 있어야지.”

“밥 한 끼 안 먹는다고 굶어 죽진 않아.”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반근이 대꾸했다. 시녀가 반근을 쳐다보다가 바닥에 펼쳐진 붉은 혼례복을 매만졌다.

“포목점에 가면 잘 지어 놓은 혼례복도 있어.”

시녀가 말했다.

“안 돼.”

반근이 손을 멈추고 고개를 홱 들었다. 반근이 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다시 외쳤다.

“안 돼!”

시녀는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반근이 당황스러웠는지, 깜짝 놀라서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무튼 안 돼!”

반근이 소리치면서 눈물을 왈칵 쏟았다. 반근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바느질을 이어갔다.

“아무튼 안 돼. 다른 건 다 없어도 되는데, 아무것도 없어도 되는데, 아무리 그래도 아씨께서 남이 만든 혼례복을 입고 혼사를 치르게 할 수는 없어. 언니,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반근의 말을 들은 시녀가 입을 틀어막고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생각했던 아씨의 혼례는 이런 게 아니야.”

반근이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고는 재빨리 소매로 눈물을 닦고 바느질을 이어갔다.

“이런 게 아니라고.”

한창 꽃다운 나이에, 그 행렬이 가히 십 리에 이를 정도로 풍성한 혼수여야 했는데.

내가 생각한 아씨의 혼례는 이런 게 아니야. 이런 게 아니라고!

같은 시각, 잠들지 못한 사람은 비단 시녀와 반근만이 아니었다. 몸을 뒤척이던 진소 부인이 결국 옷을 걸치고 침상 위에 앉았다.

“또 왜 그러시오?”

진소가 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속상해서요. 그리고 생각을 정했어요.”

“뭘 정했단 말이오?”

진소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단랑을 위해 준비해 뒀던 혼수를 내일 다 정씨 저택으로 보내려고요. 고운 처자가 시집가는데, 그렇게 촉박하고 초라하게 보낼 수는 없어요.”

진소 부인이 단호하게 말했다.

“초라하기는. 돈은 우리보다 훨씬 많을 텐데.”

진소가 웃었다.

“하지만 돈 말고는 가진 게 없잖아요. 돈이라는 건,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정 낭자가 돈을 돌 보듯 하는 거겠지.

잠시 생각하던 진소가 정적을 깼다.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시집간 뒤에 잘 지내는 게 관건이지, 혼례 때 체면 차리는 게 중요한 건 아니지 않소.”

“그건 별개의 일이죠. 하여간 남자들은 이해를 못 한다니까.”

진소 부인이 진소에게 핀잔을 주자, 진소는 실소를 터트리고 부인에게 사과했다.

“알겠소, 알겠소. 부인, 내가 잘 몰라서 그렇소. 부인이 원하는 대로 하시오.”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꼭 정 낭자의 체면이 제대로 설 수 있게 시집 보낼 거예요.”

말을 마친 진소 부인은 내친김에 침상에서 내려왔다.

“어어? 부인, 이 꼭두새벽에 뭘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진소가 웃으면서 묻자, 진소 부인은 대꾸도 하지 않고 당직 서는 여종을 불렀다.

“사람을 전부 부르거라. 내 딸 시집보내는 거라고 치고 준비해야겠다.”

진소 부인의 마당은 밤새 시끌벅적했고, 해가 뜰 무렵까지도 좀처럼 조용해지지 않았다.

“나도 갈래요. 나도요!”

진단랑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다들 바쁜데, 가서 말썽 피우려고? 집에서 얌전히 공부하고 있거라.”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혼사 당일엔 분명 아씨를 데리고 가실 거예요.”

옆에 서 있던 유모도 조심스럽게 진단랑을 어르며 달랬다.

진소 부인이 화사한 옷으로 갈아입고 여종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밖으로 걸어 나왔다.

“전복인(全福人: 부모님이 건재하고, 남편과 아들, 딸이 모두 있는, 여러 면으로 원만한 부인. 혼례식 날 신부를 맞으러 가는 부인의 자격이 주어짐)도 꼼꼼하게 잘 고르고.”

진소 부인이 말했다.

“고르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모두가 부인처럼 생각하는 건 아니라서요.”

집사 부인이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 대답했다. 지금의 정 낭자를 태후가 얼마나 못마땅해하는지는 모두가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모두는 아니더라도, 한 명쯤은 있기 마련이야.”

진단랑이 진소 부인의 다리를 와락 껴안았다.

“어머니, 저도 가서 도와주고 싶어요.”

또 빠트린 게 없나 곰곰이 생각하던 진소 부인이 갑작스럽게 안긴 진단랑 때문에 화들짝 놀라서 넘어질 뻔하자, 여종들이 재빨리 진단랑을 진소 부인에게서 떼어냈다.

여종들의 손에 붙들려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진단랑을 보며 진소 부인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같이 가자. 가서 도와주기다?”

진단랑이 환호하면서 껑충 뛰어올랐다.

“단랑이 가서 무슨 도움이 된다고!”

진소가 고개를 저었다.

“단랑이 있으면 더 흥겨워지겠죠.”

진소 부인이 대꾸하고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른 여종을 불렀다.

“여봐라. 단랑뿐 아니라 우리 집안 며느리들도 다 같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자고 해라. 경사스러운 일인데, 사람이 복작복작해야 신혼 분위기가 더 나지.”

여종들이 웃으면서 알겠다고 대답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진소 부인이 막 나가려던 그때, 여종이 진(秦) 부인의 방문을 알렸다. 진소 부인은 며느리와 아이들에게 먼저 나가 마차에 탈 준비를 하라고 일러두고, 혼자서 진 부인을 맞이했다.

“출타하는 데 방해 안 되게, 시간 오래 끌지 않고 딱 한 가지만 이야기하고 갈게요.”

진 부인이 자신의 여종에게 손짓하자, 여종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이건 내 마음이에요.”

진 부인이 말했다. 진소 부인이 받은 종이 위에는 농토와 점포의 목록이 적혀 있었다.

진소 부인이 복잡한 표정을 짓자, 진 부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도 알아요. 정 낭자는 절대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죠. 얼마나 큰 은혜를 베풀었든 간에, 정 낭자는 항상 자신과 무관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할 거라는 것도요.”

진 부인은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정말 겁쟁인가 봐요. 뭐가 그리 두려운지 모르겠어요.”

진소 부인은 잠자코 진 부인을 쳐다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뭐가 두려운데?”

진소 부인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진 부인의 말을 반복했다. 진 부인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세상 이치가 그렇잖아요. 좋은 마음이 꼭 좋은 일로 연결되는 건 아니죠. 아무튼 이건 받아 줘요. 언니 이름 빌려서, 언니 덕 좀 보게요.”

진소 부인이 작게 한숨을 쉬고는 종이를 다시 진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정 낭자가 어떤 사람인지 그렇게 잘 알면서 이래? 자네한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생각이 나서 누군가를 보러 왔을 땐, 꼭 그 사람을 보지 않아도 마음이 전해진다는 말이 있잖아. 자네한테 정 낭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있으니 그걸로 충분해. 무엇보다 나는 정 낭자를 속이고 싶지도, 정 낭자에게 그 선택을 떠넘기고 싶지도 않아.”

진소 부인이 진 부인의 손을 두어 번 정도 따뜻하게 다독였다.

“그러니까 이 일은, 그냥 이렇게 두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종이를 여종에게 건넸다.

“언니, 사실 나도 알아요. 그래도 언니한테 와서 말이라도 해 보고 싶었어요.”

진 부인이 미소 띤 얼굴로 예를 표하자,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어서 가 봐요. 타향에서 온 의형제 부부가 얼마나 막막하겠어요.”

진 부인의 말에, 진소 부인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진소 부인이 며느리와 아이들을 데리고 정씨 저택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정씨 저택 사람들은 전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범강림과 황씨는 혼례를 치른 경험이 있긴 했지만, 그건 서북에서의 일이었다. 몰락한 집안의 회계 선생의 딸과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장수의 혼례였다. 그래도 돈은 있으니 성대한 혼례를 올리긴 했지만, 그래도 지금 정교랑의 혼사와는 비교가 안 됐다.

“전복인은 어디 가서 찾지?”

밤새 한숨도 못 잤는지 눈 밑이 퀭해진 황씨가 중얼거렸다. 그녀가 자책과 후회 섞인 말투로 범강림에게 말했다.

“내가 맨날 뒤에 숨어만 있고, 뭐든 다 시누이가 알아서 하게 떠넘긴 탓이에요. 남은커녕, 당신의 동료나 친인척 중에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네요.”

“괜찮소. 내가 가서 찾아보리다. 내가 아는 자들이라고는 죄다 병사나 장수들이긴 하지만, 누이는 별로 그런 걸 개의치 않아 할 거요.”

범강림이 말했다.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겠네.

황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범강림이 전복인을 찾으려 대문을 나서려던 때였다.

진소 부인이 웃는 얼굴로 마당 안에 들어섰다. 진소 부인의 방문에 범강림과 황씨는 놀라기도, 기뻐하기도 하면서 그녀를 맞이했다. 곧이어 그녀의 마차에 실린 크고 작은 예단 함을 보고는 당황하여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아이고, 저걸 어떻게 받습니까.”

황씨가 황급하게 말했다.

“당연히 받을 수 있지요. 이건 범 군감 내외 때문이 아니라, 내가 정 낭자에게 해주고 싶은 겁니다.”

진소 부인이 말하면서 예물 함을 안으로 들이라고 지시했다. 며느리와 아이들이 전부 마차에서 내리자, 정씨 저택 안은 일순간 시끌벅적해졌다.

황씨는 서둘러 시녀와 몸종들에게 차와 물을 내어오도록 명하고, 진씨 가문의 아이들에게는 사탕과 꿀에 절인 과일을 나눠 주었다. 갑자기 어린아이들과 여인네들이 많아진 덕에 정씨 저택에는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분주할 것 없어요. 혼사 준비는 어디까지 했죠? 이제부터는 나한테 맡겨요.”

진소 부인이 부드럽게 말했다. 황씨가 황송해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말하려던 찰나, 범강림이 공손하게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그럼 부인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소 부인이 미소 짓자, 황씨도 더는 아무 말 하지 않고 진소 부인을 대청 안으로 모시고 들어가 혼사 준비를 논의했다.

“갑자기 바깥이 왜 저리 시끄럽지?”

시녀가 정리하고 있던 물건들을 내려놓고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진소 부인께서 가족들을 데리고 오셨어요.”

어린 시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집에 사람이 턱없이 부족하던 터라, 시녀는 혼자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혼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태후 때문에 정교랑의 일을 선뜻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시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웃었다.

“아씨, 이제 큰아씨의 입가에 포진이 좀 덜 나겠어요.”

시녀가 말하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서 인사드려야겠다.”

시녀가 서둘러 정교랑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그럼 이 문서들은…….”

시녀가 탁자 위에 놓인 종이들을 쳐다보면서 묻자, 정교랑이 탁자 위를 훑어보고 대답했다.

“전부 강주로 보내.”

시녀가 알겠다고 대꾸하고는 어린 시녀에게 정교랑의 시중을 부탁하고 탁자에 앉아서 바쁘게 움직였다.

황씨에게 진행 상황을 들은 진소 부인은 이런 일이 익숙하다는 듯 빠르게 여종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여종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자, 황씨는 진소 부인의 곁에 남아 같이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볼일부터 보고 나서 낭자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

진소 부인이 자신을 향해 예를 표하는 정교랑을 보며 말했다.

“사촌 오라비인 주 공자가 경성에 있어서, 주 공자한테 신부를 데려다주는 신행을 부탁했어요. 그리고 전복인은 내가 몇 명 엄선해 봤는데, 낭자와 따로 논의할 필요는 없을 거 같네요. 낭자는 다른 거 신경 쓰지 말고, 마음 편히 있다가 시집가면 돼요.”

진소 부인이 황씨에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그 일들은 부인이 말할래요? 아니면 내가 가르쳐 줄까요?”

그 일들이라면…….

혼사를 치른 지 몇 년이 지난 황씨지만, 그 일들이라는 말에 얼굴이 새빨개졌다. 진소 부인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부인도 아직 새댁이라는 걸 내가 깜빡했네요. 내가 알려 줄게요.”

황씨가 민망해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짓던 순간, 갑자기 마당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집에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건 처음이라 잔뜩 신이 난 소보아가 몸종과 여종들의 손에 이끌려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소보아는 낯도 가리지 않고 내내 까르르 웃으면서 아이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녔다.

마당 안에서 천진난만하게 뛰어노는 아이들의 모습과 웃음소리를 듣던 황씨는 어쩐지 눈시울이 붉어졌다.

드디어 경사스러운 분위기가 나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무더운 날씨였지만, 방 안의 창문과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밖과는 다르게 방 안은 숨 막히는 더위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시가 방으로 들어오면서 구석에 놓인 얼음 대야를 쳐다보았다.

“가서 새것으로 바꿔오거라.”

시녀가 얼음 대야를 곁눈질로 쳐다보았다. 대야 안에 아직 얼음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하지만 따져 물을 엄두가 나지 않았는지 시녀는 조용히 얼음 대야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내시가 좌우를 살피더니 등 뒤에 숨겨온 보따리 하나를 풀어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잰걸음으로 침상 쪽으로 다가갔다.

“전하?”

내시가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부르며 휘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고개를 빼꼼 들이밀었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내시를 쳐다보자, 내시가 헤헤 웃으면서 휘장을 반쯤 걷었다.

“전하, 이것 좀 보십시오.”

내시가 말하면서 보따리에서 꺼내온 옷을 펼쳤다. 반쯤 걷힌 휘장 너머로 짙은 붉은색 혼례복이 햇빛을 받으며 빛나고 있었다.

저건…….

“혼례복이 완성되었습니다. 몰래 가지고 와서 보여 드리는 겁니다.”

내시가 눈가에 웃음기가 잔뜩 서린 모습으로 말했다.

온통 붉은색인 혼례복 위로 정교하게 수놓아진 금빛 무늬가 햇빛에 비치며 눈부시게 빛났다.

진안 군왕이 눈을 감았다. 내시가 또 무슨 말을 하려던 그때, 시녀가 들어와서 내시를 불렀다.

“경 공공, 고 선생께서 찾으십니다.”

내시가 황급히 혼례복을 진안 군왕의 몸 위로 던져 두고 휘장을 내렸다.

“또 무슨 일로 날 찾는 것이냐? 글쎄 신경 쓸 필요 없다니까. 궁에서 온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좋을 대로 하라지. 어차피 우리 관저에서 뭘 어쩌지는 못할 텐데.”

내시가 구시렁거리면서 방을 나갔다.

시녀들은 내시가 나가는 것을 배웅하고는 새 얼음 대야를 들고 들어왔다. 시녀들이 나지막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진안 군왕의 귓가에 들려왔다.

“신방 봤어?”

“여기를 신방으로 꾸미지 않고?”

“고 선생이 여기 말고 저쪽 반대편에 있는 처소에 마련했어. 얼추 다 꾸민 거 같던데? 되게 예쁘게 해 놨더라.”

“왕비께서 몇 명이나 데리고 들어오시려나?”

왕비라…….

진안 군왕이 눈을 떴다.

왕비.

진안 군왕은 이불에서 손을 꺼내고 자신의 몸 위에 덮인 혼례복을 찬찬히 만졌다.

혼례복. 이게 혼례복이라는 거구나.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자, 시녀들은 얼른 입을 다물었다.

“경 공공.”

인기척이 느껴지자, 진안 군왕은 서둘러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고 눈을 감았다.

내시는 휘장을 들어 올리고, 잠든 듯한 진안 군왕을 쳐다보고는 서둘러 혼례복을 다시 보따리 안에 넣고 물러났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지자, 진안 군왕은 눈을 감은 채 손으로 베개 아래서 나무 조각을 꺼내 손바닥에 꼭 쥐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집사와 저택을 관리하는 아낙, 그리고 주복의 시중을 드는 사환과 시녀밖에 남지 않은 주씨 저택이었지만, 주씨 저택의 마당은 시끌벅적했다.

“공자님, 이것들이 노야께서 남기고 가신 전부입니다.”

집사가 문서 몇 장을 건넸다.

“이건 고방에서 고른,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과 비단 옷감이에요.”

다른 아낙이 말했다.

“안 봐도 된다. 전부 다 보내거라.”

주복이 성가시다는 듯이 대꾸했다.

집사와 아낙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아낙이 집사에게 눈짓을 보내자, 두 사람은 더는 말하지 않고 알겠다며 물러났다.

마차를 꾸미고, 예단이 담긴 함을 마차로 옮기느라 마당 안이 또 한 번 왁자지껄해졌다. 주복은 잠시 마당을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마당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던 두 시녀가 주복을 보고는 서둘러 그의 시중을 들러 다가왔다.

“저리 가, 가라고.”

주복이 시녀들을 향해 손을 휘휘 젓자, 그의 성격을 잘 아는 시녀들은 웃으며 물러났다.

다시 조용해진 방 안에서 주복은 잠시 넋을 놓은 듯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뒤, 그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옷궤를 열고 몸이 다 들어갈 정도로 깊숙한 곳에서 상자 한 개를 끌고 나왔다.

주복은 맨바닥을 자리 삼아 앉아 상자에 달린 자물쇠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자신의 뒤통수를 스스로 팍 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주복이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좌우를 살폈다.

“열쇠를 어디에 뒀지?”

주복이 중얼거리면서 탁자와 책장을 마구잡이로 뒤졌다.

“공자님, 뭘 찾으세요?”

사환이 문밖에서 고개를 내밀고 묻자, 깜짝 놀란 주복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나가!”

주복이 갑자기 화를 내자, 사환이 화들짝 놀라고는 혀를 내밀면서 물러났다.

주복은 문가로 다가가 주변에 또 다른 사람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고, 다시 대청 중앙에 섰다. 그가 미간을 찌푸리고 허리에 손을 올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생각난 듯 이마를 탁 하고 쳤다.

침상 아래에서 작은 상자를 꺼낸 주복이 그 안에 든 열쇠를 보고 기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주복이 열쇠로 자물쇠를 열고 상자 뚜껑을 젖혔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지난번에 주복 혼자서 상자를 열고 그 안을 들여다보던 때보다 물건 몇 개가 더 늘어 있었다. 물론 여인들이 쓸 법한 아기자기한 물건들이었다.

주복이 상자에서 물건을 하나씩 꺼내어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주복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으며 물건들을 보고 읊조렸다.

“이건 상사(上巳: 삼월 삼짇날) 때 산 선물이고.”

“이건 단오절 때.”

“음, 이거는 보자마자 사야겠다 싶어서 산 거고.”

주복이 상자에 있던 모든 물건을 하나씩 꺼내서 조용히 읊조린 뒤, 자신의 소매에서 조그마한 상자를 꺼냈다.

작은 상자 안에는 팔보여의(八寶如意) 금비녀가 놓여 있었다. 주복이 조심스럽게 비녀를 집어 들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새빨간 보석과 눈부신 금빛이 더없이 아름다웠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금비녀를 손에 쥐고 한참을 감상하던 주복이 천천히 비녀를 조그마한 상자 안에 넣어두고 손을 놓았다. 달칵 소리와 함께, 비녀가 든 상자는 온갖 장신구와 아기자기한 물건이 담긴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혼인 축하해.”

주복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인 축하한다, 정교랑.

여종들이 몇 차례나 마차를 오가며 분주하게 상자들을 내렸지만, 아직도 짐을 다 옮기지는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조용히 불경을 읊었다.

방 안에서는 정 대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그 계집이 준 걸 원한다더냐!”

정 대부인이 휘청거리며 방에서 뛰쳐나왔다. 그러고는 마당에 놓인 상자 몇 개를 들어 힘껏 집어 던졌다. 상자 안에 들어있던 장신구들이 바닥에 쏟아지자, 금은으로 만들어진 장신구들이 햇빛을 반사하며 번쩍거렸다.

여종과 몸종들이 재빨리 바닥에 널브러진 장신구들을 주우려고 했지만, 정 이부인이 한발 빨랐다. 정 이부인이 누구보다도 빠르게 장신구들을 치마폭에 주워 담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정 대부인이 울면서 주먹으로 가슴을 내리쳤다.

“내 아들의 목숨을 판 것이야! 내 아들의 목숨을 판 돈이라고!”

정 이부인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정 이부인은 옆에 서 있는 여종과 몸종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빨리 장신구들을 챙기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목숨을 팔기는 무슨. 사낭은 기루에서 기녀에게 죽임을 당했다던데, 그게 우리 교랑과 무슨 상관이라고. 괜히 우리 교랑한테 불똥만 튀었지. 그렇지 않고서야, 군왕의 왕비가 되는 건데 이렇게 촉박하고 초라한 혼례를 올릴 리가 있겠어?”

중얼거리던 정 이부인은 갑자기 부아가 치밀어 올랐는지 서재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정 대부인이 숨넘어갈 정도로 우는 통에, 몸종과 여종들은 모두 정 대부인의 곁에 머무르며 그녀를 부축하고 다독이고 있었다. 정 이부인이 슬쩍 눈치를 보고는 자신이 주운 것들을 품에 안고 자리를 떠나고자 몸을 돌렸다.

문가에 서 있던 두 몸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정 이부인을 바라보았다.

“이부인.”

몸종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정 이부인을 부르자, 정 이부인은 도리어 눈을 부릅뜨고 몸종들을 흘겨보았다.

“왜? 이건 우리 교랑이 보내온 게야.”

정 이부인이 바닥에서 주운 상자 두 개를 품에 꼭 안으며 말했다.

나는 교랑의 계모인데, 이 정도도 가지면 안 돼?

몸종들은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몰라 가만히 선 채로 멀어져 가는 정 이부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서재 안. 정 대노야도 정 대부인이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노야, 이것들은 저희 아씨께서 무엇을 보상하고자 보내신 것들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조귀가 입을 열자, 정 대노야가 손을 들어서 그의 말을 끊었다.

“긴말할 것 없네. 나도 잘 알고 있어.”

정 대노야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교랑이 정말로 무정한 아이였다면, 그때 나더러 서둘러 가족을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았겠지. 경성에서 교랑이 얼마나 많은 위험과 험난한 상황들을 겪고 있는지,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게 됐네. 내가 교랑을 도울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할 뿐이야.”

조귀가 정 대노야를 향해 예를 표했다.

“대노야께서 아씨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니 감사합니다.”

조귀가 떨리는 목소리로 고개를 숙였다. 정 대노야가 손으로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사낭도 다른 사람의 손에 죽은 거지, 교랑이 해친 게 아니야. 교랑이 그의 목숨을 구하고 명성까지 안겨 줬지만, 결국 사낭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어. 사낭의 명줄은 딱 거기까지였던 게야. 무엇보다도, 교랑이 이 일로 자기 탓을 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리고 이것들은…….”

조귀가 큰절을 올리자, 정 대노야는 그가 내민 문서들을 내려다보았다.

“곧 혼례를 치를 텐데 시간이 이리도 촉박하다는 것은, 황실에서 교랑의 체면을 조금도 챙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이것들을 강주로 보내와서 뭐 하겠나? 최소한 경성에 남겨 두고 교랑의 기를 세워 줬어야지.”

조귀가 고개를 저었다.

“아씨께서 그런 겉치레를 신경 쓰시는 분도 아니잖습니까. 아씨께서는 본디 집안 어른께서 보관해야 할 문서이니, 집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관부를 거친 문서인데, 판결을 무시할 수는 없잖습니까. 아씨께서는 소인에게 아씨의 모친께서 남기신 혼수만 경성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습니다.”

조귀의 말에, 정 대노야가 막연한 표정을 지었다.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에 옮기고, 실행하면 반드시 끝을 본다.

그 애는 농담도 안 하고 에둘러 말할 줄도 몰라. 무슨 일이든 대강하는 법이 없고.

“알겠네.”

정 대노야가 깊게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끄덕였다.

“교랑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게. 교랑이 피땀 흘려 얻어낸 이 재산들을 절대로 망치지 않겠다고.”

“예. 그럼 소인은 내일 경성으로 떠나겠습니다.”

조귀가 대답했다.

“사람들은 다 데리고 갈 건가? 자네가 데리고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몇 명뿐이니, 집에서 시종들을 더 데려가게.”

“괜찮습니다. 아씨께서는 사람 수에 연연하지 않으시니까요.”

사람 수만 많은 것보다는 일을 잘하는 사람 하나를 더 좋아하시지요. 예를 들면, 저처럼요.

조귀가 조용히 득의양양한 미소를 보였다.

정 대노야가 한숨을 쉬면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혼례가 모레라고 들었는데, 자네가 아무리 빨리 가더라도 혼례에 참석할 수는 없겠군. 우리도 그 전에 도착하기는 글렀고.”

“아씨께서 말씀하시기를, 절대로 노야께서 경성으로 오시면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조귀가 서둘러 말했다. 정 대노야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내가 가면 안 될뿐더러, 우리 집안 자제들도 경성으로 가지 못하게 잘 감시해야지. 한동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강주를 떠나지 못하게 해야겠어.”

정 대노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마당에서 노부인과 정 이노야의 대화가 들려왔다.

“지금 뭣들 하는 것이냐. 당장 마차부터 준비하지 않고. 우리 교교가 혼례를 올린다잖아. 황실의 종친한테 시집가는데 친정에서 안 가면 쓰겠느냐?”

“어머니,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아비라는 자가 군왕과 혼사를 치르는 걸 뻔히 알면서 강주로 돌아온 게냐?”

“어머니, 그게 다 형님 때문 아닙니까!”

대화를 듣던 조귀가 동정 섞인 표정으로 정 대노야를 바라보았다.

“그럼, 노야께서 말씀 좀 잘 해 주십시오.”

조귀가 몸을 일으키고 예를 표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는 홀로 차디찬 강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노부인과 아우를 상대하러 갔다.

교랑이 이렇게나 많은 재산을 주었는데, 내가 우리 정씨 가문의 안위 하나 지키지 못한다면, 대노야 소리를 듣기도 창피한 일이지.

북정을 떠난 조귀는 각 점포에 들러 관리인들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해가 질 때쯤 남정으로 돌아왔다. 남정에는 새로 지은 저택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었고, 지저분했던 흙바닥도 모두 새로 깨끗하게 깔려 있었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해도 빗물이 넘치고 벌레가 진을 치고 있던 옛 남정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었다.

여름 저녁, 시원한 곳을 찾아 나온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골목에서는 어린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조 집사.”

조귀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남정 사람들이 그에게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며 저녁을 먹고 가라고 했다. 조귀가 웃으면서 사람들에게 인사하다가, 한쪽을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정평!”

큰 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둘러앉아 침을 튀기며 이야기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던 정평이 조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금은 바쁩니다. 제일 중요한 부분이라서요.”

정평의 대꾸에 조귀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잃는 것은 얻기 위함의 첫걸음이고,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게 있기 마련이다. 나아가는 것은 물러나는 것을 위한 것이고, 물러나는 것은 나아가는 것의 근간이다. 복은 화의 시작이 되고, 화가 오기 전에는 필시 복이 먼저 온다.”

정평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어린아이들이 투정을 부리듯 외쳤다.

“도경 읊지 말고요. 이야기 들려주세요. 재미난 이야기요.”

“에이, 이야기 한 번 하면서 도경도 한 번 읊는 거지. 너희들, 내가 이야기 들려주는 걸 영광으로 알아야 한다. 내가 무려 십여 년 동안 책을 읽어서 그중 가장 중요한 내용만 뽑아내 말해 주는 거거든. 내 이야기는 아무나 듣고 싶다고 해서 다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여기에는 교훈이 무지막지하게 녹아 있다고.”

정평이 우쭐한 얼굴로 말했다. 조귀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었다.

“정평, 정말로 나와 함께 경성으로 가지 않을 텐가?”

정평이 고개를 저었다.

“일백 문을 다 벌었으니, 이제 문을 닫고 경서 공부에 매진할 겁니다.”

정평이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뭐, 물론 나도 언젠가는 경성으로 가겠지만요. 우린 그때 다시 보도록 하지요.”

조귀가 입술을 삐쭉였다.

“고작 일백 문 가지고 어떻게 문을 닫아걸고 공부만 하겠다는 건가? 굶어 죽는 게 무섭지도 않나.”

조귀가 아이들에게 이어서 이야기하는 정평을 보며 중얼거리고는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조귀가 저택으로 돌아오자, 두 시녀가 그를 향해 공손하게 예를 올렸다. 비록 정교랑이 이 집에서 살고 있진 않았지만, 집은 항상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저녁때면 언제나 등불을 밝혔다.

조귀는 주인 없는 안채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리고 두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녀들이 밥상을 막 들여왔을 무렵, 정계가 몇 사람을 데리고 저택으로 찾아왔다.

“집사 어른, 저희가 더 도울 게 있을지요?”

정계가 물었다.

“괜찮소. 치울 것도 별로 없고.”

조귀가 대답했다. 정계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작은 상자를 조귀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조귀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아씨께서 혼인을 치르시지 않습니까. 저희가 약소한 마음이나마 담아 보았습니다.”

정계의 말에 조귀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괜한 돈을 쓰고 그러시오. 댁들이 잘 지내는 게 바로 아씨께 가장 큰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나?”

정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잘 알지요.”

정계가 작은 상자를 열면서 말을 이어갔다.

“사실 귀한 금은보화는 아니고, 저희가 와당을 한 개 만들어 봤습니다.”

와당?

조귀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상자 안을 들여다보자, 그 안에는 정말로 와당 한 개가 놓여 있었다.

“이건…….”

조귀가 와당에 새겨진 무늬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연꽃 절지 무늬입니다. 정씨 선조의 고택에서 쓰이던 표식인데, 아씨께서 어릴 때 강주에서 지내신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나서요. 이제 곧 시집을 가시니 저희가 뭐라도 해 드리고 싶은데 아씨께서 딱히 부족한 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래서 그리움이 담긴 기억을 선물하고자 준비했습니다. 아씨께서 어딜 가시든, 정씨 가문은 언제나 아씨의 고향이고 집이라는 걸 알려 드리고 싶어서요.”

정계의 말에, 조귀가 웃었다.

“좋소. 마음을 담은 선물이니, 아씨께서는 분명히 좋아하실 걸세.”

정계 등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조귀를 따라 웃었다.

“그럼 아씨의 선물을 전했으니, 이제 집사 어른께도 선물을 하나 드려야지요.”

한 사내가 술동이 한 개를 꺼내어 탁자 위에 탁 하고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 어디 한번 코가 삐뚤어지도록 마셔 봅시다!”

조귀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시녀들을 불렀다.

“좋지! 술상을 내오너라. 오늘 한번 취할 때까지 마시세!”

정계 등과 거하게 회포를 푼 조귀는 숙취로 인해 아침 일찍 출발하지 못하고 해가 중천에 뜨고 나서야 떠날 채비를 마쳤다. 조귀는 여러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남정 골목을 나섰다.

깨끗하게 치워진 북정 거리에 긴 탁자와 의자 몇 개가 놓여 있었다. 행인과 마차가 쉼 없이 지나다니는 곳에 벽을 따라 차양막이 설치되고 있었고, 한쪽에서는 간이 화로를 만들고 있었다.

“저게 뭐지?”

조귀가 놀라서 물었다.

“집사 어른, 정 낭자께서 내일 혼례를 올리시니, 정 대노야께서 아무나 와서 음식과 술을 먹고 갈 수 있도록 사흘 동안 길거리에서 연회를 여신다고 합니다. 저기 덕흥루에서 가장 유명한 숙수를 데려와 요리를 준비하시고요. 강주성에 사는 그 누구든 편히 와서 연회를 즐기되, 축의금은 내지 않아도 된답니다.”

구경하던 사람 중 한 명이 들뜬 얼굴로 말했다.

“숙수가 힘들어 죽으면 어떡하오?”

조귀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정 대노야께서 마차 한 대에 가득 실릴 정도의 값을 치르셨답니다. 힘들어 죽는다 해도 이 일은 꼭 해야죠.”

다른 구경꾼이 외치자,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조귀도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이런 경사스러운 일에는 사람이 많이 모여서 시끌벅적하게 축하해야지. 눈앞에서 볼 수는 없다 해도, 이 마음들은 전해질 테니.

조귀가 말 위로 몸을 휙 날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강주 정씨 저택의 마당도 북정 거리만큼 시끌벅적했다. 대청 안에 앉은 정 노부인은 정 대노야가 어디서 구해 온 사람인지도 모를 아낙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노부인께서 참 복도 많으시지.”

“안 그래도 제가 얼마 전에 마당에서 커다란 꽃을 따는 꿈을 꿨는데, 역시 길몽이었나 봐요.”

“노부인께서 귀한 군왕 손주사위를 보시네요.”

아낙들의 아첨에 정 노부인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그녀가 두 눈을 반짝이면서 목청을 높이고 말했다.

“우리 교교의 할아비는 교교가 남다르다는 걸 일찍이 알았네. 교교에게 이름을 지어주겠다면서 반년 내내 작명에 관한 책을 들여다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마음에 드는 이름이 없다는 거야. 낳기 직전까지도 이름을 정하지 못하다가, 어느 날 길을 지나가는 노승을 만났어. 그 노승이 입을 열자마자 한 글자를 딱 뱉었는데…….”

말하던 정 노부인은 턱 하고 말문이 막혔다.

그 바보 이름이 뭐였더라?

“방이요.”

옆에 서 있던 여종이 재빨리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그게 바로 방(昉)이라는 글자였네.”

노부인이 자연스럽게 말을 덧붙이고는 눈이 없어질 정도로 웃음 지었다.

“게다가 더 신기한 게 뭐였는 줄 알아? 그때 노야께서 고개를 숙이고 혼잣말로 정방이라 중얼거리고는, 그 노승에게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하고자 고개를 들었는데, 그 노승은 흔적도 없이 바람처럼 사라졌다고 하더라고.”

“어머나, 그럼 부처님을 만나신 거 아니에요?”

주위에서 감탄 섞인 목소리로 호들갑을 떨었다. 문밖에 서 있던 정 이부인이 눈썹을 꿈틀대며 눈을 흘겼다.

“뻔뻔스러운 할망구 같으니라고. 누가 들으면 교랑이 황후마마라도 되는 줄 알겠어. 뭐? 부처님이 이름을 지어 줘? 그 애가 바보라는 걸 알자마자 요강에 빠트려 익사시키려고 했다더니만. 참 나, 부처님이 내리실 벌이 두렵지도 않나.”

정 이부인은 구시렁대며 욕을 내뱉고는 대문 앞으로 나갔다.

거리에는 길거리 연회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쌀이 왔네, 고기가 왔네 하며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사람들과 술장수들이 술동이를 내리는 모습을 보던 정 이부인은 속으로 계속해서 불경을 읊었다.

“저게 다 무슨 낭비람. 역시 사람들은 자기 돈이 아니면 아주 있는 대로 낭비하려고 발악을 하네.”

같은 시각 경성의 정씨 저택에서는 여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왔어요. 왔어요.”

여종 몇 명이 소리치며 방 안으로 들어와 휘장을 내렸다.

창가에 있던 정교랑이 몸을 돌리고 방 안으로 들여지는 옷걸이를 바라보았다. 옷걸이에는 온통 붉은색 바탕에 금실로 수놓은 혼례복이 걸려 있었다.

여종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어린아이들이 문가에 기대어 호기심 어린 얼굴로 혼례복과 정교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뒤이어 다른 부인들 그리고 젊은 새댁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온 진소 부인이 혼례복을 찬찬히 살펴보고는 잘 만들었다는 칭찬을 하고 상서로운 말들을 했다.

“잠시 이리 와요. 낭자에게 해 줄 말이 좀 있어서.”

진소 부인이 정교랑의 손을 이끌고 자리에 앉으려던 찰나, 동씨 가문의 부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진소 부인이 바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중에 다시 얘기해 줄게요.”

진소 부인이 방을 나가자, 부인들과 젊은 새댁들도 자연스럽게 진소 부인을 따라 방을 나갔다.

실내가 조용해지자, 정교랑이 천천히 옷걸이 앞으로 걸어가 혼례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창문과 문틈 사이로 들어와 부서지는 햇빛 때문에 실내는 몹시 환했다. 혼례복 위에 수놓아진 금빛이 강가의 윤슬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예뻐요?”

누군가가 문밖에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문가에서 고개만 빼꼼 내민 진단랑이 서 있었다.

“예뻐.”

정교랑이 싱긋 웃었다. 진단랑이 방 안으로 들어와 정교랑의 옆에 서서 정교랑과 함께 혼례복을 쳐다보았다.

“나도 예쁘다고 생각해요.”

진단랑이 정교랑의 소매를 흔들면서 졸랐다.

“언니, 한번 입어 봐요.”

정교랑이 입꼬리를 올리고 혼례복을 잠시 바라보다가, 혼례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정교랑의 마당에 도착한 주복이 열린 대청 문 사이로 한 여인을 지켜보았다. 여인은 두 팔을 벌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주복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붉은색…….

온통 붉은색이네. 눈부신 붉은색에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은 꽃까지.

시집가는 여인은 예전에도 본 적이 있지만, 지금껏 살면서 저런 붉은색을 처음 본다고 주복은 생각했다.

저렇게 아름다운 붉은색은 본 적이 없어.

항상 우중충한 무채색만 입던 여인이 저렇게 눈부신 붉은색을 몸에 걸치니, 깊은 밤 만개한 모란꽃 한 송이가 따로 없군.

사실 무채색의 옷을 입어도 어디서나 돋보이긴 했지. 그런 여인이 저리 돋보이는 옷을 입으니, 눈부시게 빛나서 쳐다보기도 힘들 정도구나.

정말 유일무이해. 저 여인은.

“혼례복이 정말 예뻐요!”

대청 안에서 진단랑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단랑은 정교랑의 주위를 빙글빙글 뛰어다니며 연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옆에 놓인 구리거울을 바라보았다.

주복은 그런 정교랑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주복의 눈에 정교랑은 구리거울 속에 비친 혼례복을 입은 자신의 모습을 감상하는 것 같기도, 앞으로의 나날들을 기대하는 것 같기도, 어딘가 모르게 들뜬 것 같기도 했다.

혼례복이 정말 예쁘네.

“주 공자?”

여인의 목소리가 주복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깜짝 놀란 주복은 심장이 멈춰버린 듯이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가 도둑질하다 걸린 사람처럼 재빨리 몸을 돌렸다.

“주 공자의 옷도 준비해 뒀는데, 입어 봤어요?”

진소 부인이 웃음기 서린 눈으로 물었다.

주복이 정교랑의 신행을 담당했지만, 주씨 가족이 모두 섬주로 내려간 탓에 황씨가 그의 예복을 준비했다. 주복은 고개를 숙인 채 짧게 네, 하고 대답하고는 서둘러 마당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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