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1화 (131/160)

-버텨야지-

“예전에 나는…….”

정교랑을 바라보던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바보라는 이유로 너를 괴롭혔어. 그러니까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너 자신이 바보라는 걸 원망해서는 안 된다고. 상처받고, 괴롭힘을 당하고, 재수 없는 사람이라고 자신을 탓할 게 아니라, 그렇다는 이유로 너를 괴롭힌 그 사람들을 원망해. 이 세상에 괴롭힘 받아 마땅한 사람은 없으니까.”

입꼬리를 올리며 웃던 정교랑이 고개를 잠시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주복의 옷자락을 손으로 살짝 끌었다.

“앉아요.”

주복은 다리가 후들거려 자리에 주저앉다시피 털썩 앉았다.

“난 괜찮아요. 단지,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정교랑이 말하자, 주복이 곧바로 물었다.

“그 말?”

정교랑이 마당으로 시선을 옮겼다. 정교랑은 오래전 정평과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이 원하는 게 있으면, 당연히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이 고군분투한다고 해서, 대업을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요?

하지만 노력도 했고 애도 썼는데 왜 그렇게 됐냐고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은 생각해 봤습니까? 그들도 똑같이 노력했을 텐데, 당신만 성공하고, 남은 실패하라는 법이 어디 있어요. 당신에게도 사정이 있겠지만, 그건 남들도 똑같습니다. 어째서 당신한테만 당연할 거라는 기대를 하는 겁니까?”

주복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 그러니까 네 말은, 그놈들이 너와 정사낭을 계략에 빠트린 데에 무슨 타당한 이유라도 있다는 거야?”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당연히 타당하죠. 그들의 이번 목표는 아주 명확했어요. 진안 군왕을 죽여야만 했고, 꼭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만 했죠. 그러려면 가장 큰 변수를 제거해야 했는데, 그 변수가 바로 나였어요. 그리고 나를 막으려면 오라버니가 필요했죠. 그래서 그들은 오라버니를 납치했고, 날 막았어요. 잘 짜인 계획이 참 순조롭게 진행되었네요.”

정말 미쳤군!

주복이 다시 분을 못 이기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좋아. 그럼 내가 지금 진씨 가문에 찾아가서 진호에게 큰절을 올릴게. 진호 그놈이 잘 짜둔 바둑판에 탄복한다고, 그놈이 정사낭을 죽인 일에 아주 탄복한다고!”

주복이 억지로 마지막 한마디를 이 사이로 내뱉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 사람이 죽인 게 아니에요.”

정교랑의 말에 주복이 흠칫 놀랐다.

난 몰라!

내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긴 할 거야?

내가 진작 알았다면, 정사낭을 납치하기까지 한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주육, 자네는 알잖나. 그랬다면, 난 절대로…….

주복의 귓가에 진호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정말로 그자를 믿어?”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물었다.

“믿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자리에 앉은 주복이 두 손으로 몸을 지탱하며 답답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남이 무슨 말을 하든 다 믿는다고? 네가? 내가 널 모를 줄 알고?”

주복이 소리쳤다.

정교랑은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답답해하는 주복을 쳐다보면서 미소 지었다. 정교랑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주복은 긴 한숨을 내뱉었다.

“이번 일은 진호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 네게 연꽃 구경을 가자고 했던 그 순간부터, 너를 속이기 시작했던 그 순간부터 모든 게 다 결정된 셈이라고.”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정교랑은 주복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홀로 생각에 잠겼다.

맞아요. 그 순간부터였죠. 그 순간 이후로 닥쳐올 일이, 이런 일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정말 인생무상이네요.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봐.”

주복이 말했다.

“우선 오라버니부터 안장한 다음에 다시 얘기해요. 오라버니의 부모님께 제대로 된 설명이라도 해 드려야죠.”

정교랑이 대답했다.

“강주로 돌아가려고?”

정교랑은 주복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강주로 돌아간다라…….

정사낭 사건과 관련이 있는 주요 인물들은 모두 죽었다. 덕승루의 주인장은 이 일로 관부에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게 됐고, 기생 어미 막씨는 먼 곳에 노역으로 보내졌다. 두 사람은 이 일과 실질적으로 관련이 없는데도 큰 대가를 치르게 되었고, 정사낭 사건은 결국 기녀들의 질투로 빚어진 일로 흐지부지 끝났다.

“두고 봐. 이 일은 그렇게 쉽게 끝날 일이 아니라고.”

“그때 정 낭자의 의형제들이 죽었을 때 기억나? 폐하한테까지 가서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그 난리를 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무려 사촌 오라비가 죽었으니.”

“어서 서둘러! 이번에는 꼭 좋은 자리를 차지해야지.”

“술동이도 두어 개 더 챙겨 가고, 하인들도 몇 명 더 데리고 가. 술을 뿌린다고 할 때, 아예 그 자리 주변을 에워싸서 받도록.”

온 경성 사람들이 또 한 번 성대한 술판이 벌어지길 기대하며 정사낭의 노제를 기다렸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정사낭의 노제는 치러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 누군가가 무원산 형제들의 무덤 옆에 무자비(無字碑)가 하나 더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나 조용히 안장했다니!

오매불망 노제를 기대했던 경성 사람들은 실망한 기색을 숨길 수 없었다.

“너무하네. 자리를 놓칠까 봐 평왕 전하를 안장하는 것도 구경하러 가지 않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평왕이나 보러 갈 걸 그랬어. 아, 이젠 회혜왕이라고 불러야 하나?”

“하긴, 그렇게 쪽팔린 일로 죽었는데,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서 뭐하겠어? 안 그래도 가문의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 아무렇게나 매장하면 그만이지.”

“체면? 체면이 아주 크게 상하긴 했지요.”

진소가 진 노태야에게 차를 따라 주며 말했다.

“정사낭의 죽음은 눈 뜨고 코 베인 격이지. 그런데도 말하지 못하는 고충이니.”

진 노태야가 대꾸했다.

“그럼 이번 일은 이렇게 흐지부지 끝나는 겁니까?”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여인이 어떤 행동을 할지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아. 손해를 보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은 절대 아닌데.

“그야 물론 아니지.”

진 노태야가 웃으면서 바깥을 가리켰다.

“새로 세워진 비석도 무자비가 아니더냐. 이번에는 누가 그 비석을 꾸며 줄지 두고 봐야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리고 병풍을 바라보았다.

저 병풍에 또 얼마나 많은 동그라미가 더해질지 모르겠군.

“이번 일은 정말로 진(秦)씨 가문에서 계획한 것이더냐?”

진 노태야가 물었다.

잠시 침묵하던 진소는 아내가 진 시강의 부인에게 이 일에 관해 물었던 게 생각났다.

진 부인은 긴말하지 않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깨끗한 자는 깨끗하다고 대답했다지.

“진씨 가문은 은혜를 원수로 갚을 정도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내쉬었다.

“배은망덕이랄 것까지는 없지만, 때로는 가는 길이 다르고, 추구하는 바가 다르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곤 하지.”

진씨 가문은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는 일을 극구 반대하는 세력이야. 지금 유림은 두 분파로 갈렸지. 탄핵을 논하고, 양자 입적을 반대한다는 상소문을 올리는 자들, 그리고 장강주와 같은 편에 서서 양자 입적을 지지하는 자들로.

진소는 잠자코 생각에 잠겼다.

“너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느냐?”

진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진소가 고개를 들고 진 노태야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마마.”

안비의 목소리가 황제의 침궁에 울려 퍼졌다.

“그거 아세요? 혹시 벌써 들으셨나? 큰일 났어요, 큰일!”

황후가 안비를 흘겨보았다.

“자네가 본궁에게 말해 줘야 알게 되는 일이 생긴다면, 그때야말로 큰일이 나는 거겠지.”

안비가 다급히 황후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마마, 이를 어찌하면 좋죠? 결국 경왕이 태자가 될 상황이잖아요.”

황후가 피식 웃었다.

“뭘 어째? 버텨야지. 저들은 경왕이 아들을 낳기를 기다리는 게야. 저들이 그걸로 버티겠다면, 본궁도 그쯤은 기꺼이 버텨주지.”

같은 시각, 조당 안에서는 경왕이 처음으로 조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내시가 큰 소리로 경왕을 태자에 책봉한다는 조서를 읽었다. 내시 몇 명이 경왕을 부축하면서 태자 책봉식을 마친 후, 태후가 경왕을 보좌할 네 명의 대신들을 호명했다.

“그러니 한동안 양위(讓位: 황제의 자리를 물려줌)는 없을 것이오. 경왕이 태자로 책봉되었으니, 훗날 경왕이 낳을 황손이 제위에 오를 것이외다.”

고능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진소를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올렸다.

“앞으로 십여 년간, 수고해 주실 진 대인께 미리 감사드립니다.”

진소가 코웃음을 치고는 답례했다.

“당치도 않소이다. 본관의 노고가 고 대인을 위한 것도 아니고.”

고능준은 진소의 말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이 미소 지었다.

“저는 장강주 선생의 낯짝이 그리도 두꺼울 줄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직도 조정에 남아 있을 생각을 하다니. 원래 성격대로라면 벌써 화를 내면서 사직서를 던지고 나갔을 텐데요.”

고능준이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그 마음은 고 대인이 더욱 잘 알지 않소?”

진소가 냉소를 짓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고 대인, 이제 모든 일이 정리되었는데, 언제쯤 떠날 생각이오?”

고능준이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태자 전하께서 혼례를 치르는 것까지는 보고 가야지요.”

고능준은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어찌 됐든, 태후마마의 손자가 처음으로 치르는 혼사가 될 테니까요. 폐하께서 깨어나 경왕의 혼사를 직접 두 눈으로 보실 수 있다면, 참으로 기뻐하실 텐데.”

기뻐한다고? 태평성대를 이어가던 멀쩡한 조정이 이 지경으로 전락했는데 퍽이나 기뻐하시겠다. 이 일은 훗날 역사서에 얼마나 큰 웃음거리로 남을지.

그렇다 한들, 뭘 더 어쩔 수 있겠나? 정말로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여 제위에 올린다면, 지금보다 더 혼란스러운 시국을 초래할지도 모르는데.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야.

태자가 후대를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인 게지. 하루빨리 혼사를 치르고, 내년 즈음에 예전의 경왕을 닮은 총명하고 정상적인 황손을 낳는다면, 경왕도 제 몫을 다 했다고 할 수 있지.

진소가 집으로 돌아오자,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을 떠났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내다보았다.

“노야?”

문지기가 조심스럽게 진소를 불렀다. 진소는 그제야 시선을 거두고 처소로 발걸음을 옮겼다.

“십팔랑이 왔다 갔소?”

진소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 떠난다고 하던가?”

진소가 또 물었다. 지난번 진소와의 논쟁 이후로, 진십팔랑은 한동안 진씨 저택에 발걸음을 끊은 터였다.

“요 며칠 사이에 간대요.”

진소 부인이 한숨을 쉬고 진소를 바라보았다.

“노야, 아무리 그래도 십팔랑은 아직 어리잖아요. 아비가 되어서 어린 딸자식이랑 그렇게 다퉈야겠어요?”

“내가 다투고자 하는 게 아니라, 십팔랑 스스로 내려놓지 못해서 그런 거요.”

진소가 대꾸했다. 진소 부인이 미소를 짓고는 진소 앞으로 옷 보따리 하나를 내밀었다.

“누가 부녀지간 아니랄까 봐, 고집 센 거까지 똑같네요. 둘 다 마음이 누그러졌으면서 누구 하나 먼저 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으니 원. 이거 봐요. 십팔랑이 지은 당신 옷이에요.”

진소는 옷 보따리를 보며 웃음을 숨기지 못하다가, 이내 민망한 듯 표정을 가다듬었다.

“내가 입을 옷이 부족한 것도 아닌데 뭘.”

진소가 투덜대자 진소 부인은 못 말린다는 듯 그를 흘겨보았다.

“가서 한 번 입어 봐요, 몸에 맞는지.”

시선을 거둔 진십팔랑이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아씨, 다시 돌아가는 건 어떠세요? 깜빡한 물건이 있다고 하시면 되잖아요.”

여종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씨께서 노야의 얼굴도 뵐 겸.

진십팔랑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떠나는 날 뵙게 될 텐데 뭘. 요 며칠 조정에 대거 인사이동이 있기도 했고, 태자가 책봉된 지도 얼마 안 되었으니 한창 바쁘실 거야. 아버지께서도 피곤하실 테니 푹 쉬시게 해 드려야지.”

여종은 알겠다고 대답하고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진십팔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다시 마차 휘장을 들어 올렸다.

“평왕부 앞으로 지나가자.”

마부가 알겠다고 한 뒤 방향을 돌렸다.

회혜왕이 안장되고 평왕부의 편액이 철거된 후, 지금은 관부에서 나와 남은 물건을 정리하고 관리 중이었다.

“내리시겠어요?”

여종이 물었다. 손으로 마차 휘장을 걷고, 잠시 저택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은 고개를 저었다.

“가자.”

진십팔랑이 휘장을 내리려던 찰나, 누군가가 다급하게 마차를 향해 뛰어왔다.

“혹시 진 상공 댁 낭자십니까?”

사내가 예를 올리면서 물었다. 여종이 그렇다고 대답하자, 사내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면서 명첩 하나를 건넸다.

“저희 대인께서 낭자께 부탁드릴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대인? 내게 부탁을?

진십팔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명첩을 받았다.

고능준.

고능준? 고능준이 나를 보자고 했다고?

진십팔랑이 의아하다는 얼굴로 손에 들린 명첩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앞에 평왕의 서재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울던 백발노인의 뒷모습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본디 고능준은 그리 늙지 않았지만, 평왕이 죽은 후로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된 것 같았다.

나에게 부탁이라, 무슨 일이지?

진십팔랑은 잠시 고민하다가 명첩을 소매 안에 넣고 마차 휘장을 내렸다. 마차가 다시 길가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버지, 우린 정말 이대로 떠나는 겁니까?”

고 관인이 고능준의 뒤를 바짝 따라오면서 물었다.

“왜? 돌아가는 게 뭐 어때서? 네가 굶기를 하겠느냐, 입을 옷이 없기를 하겠느냐, 추위에 떨기를 하겠느냐?”

고능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고향에서는 우리 고씨 가문이 그곳의 황제나 다름없지만, 사람이 돈 하나만 추구하는 건 아니잖습니까. 고향에서 제아무리 떵떵거린다 한들, 경성에서 기세등등하게 돌아다니는 것만 하겠냐고요.

“노야.”

제국 부인이 대청에서 두 사람을 맞이했다.

“태후마마는 뵈었소?”

고능준이 물었다.

“네, 마마의 뜻은 여전하세요. 우리 쪽에서 태자비를 골라 주기를 바라셔요.”

제국 부인의 대답에 고능준은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고를 수는 없소.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른 사람에게 넘겨 줘야지.”

제국 부인과 고 관인이 서로 눈을 마주쳤다.

좋은 기회인데, 왜 남에게 넘겨야 하는 거지?

“아, 그리고 마마께서 진안 군왕을 많이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요.”

제국 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하자, 고능준은 탐탁지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인네들의 사사로운 정이란.”

“노야, 진안 군왕은 태후마마께서 손수 키우신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 감정을 어떻게 단칼에 끊어내겠어요.”

제국 부인이 고능준에게 따뜻한 차를 건네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진안 군왕의 몸 상태를 봐서는, 이제 더는 뭘 할 수도 없어 보이고요.”

“십여 년 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상황이었지만 여태 멀쩡히 살아 있지 않소.”

고능준이 곧바로 대꾸했다.

“그래도 마마께서는 내심 안타까우시겠죠. 이젠 군왕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더해졌을 테고요.”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었다.

“미안함과 아쉬움은 차차 시간이 지나면 사라질 감정들이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냥 시간이 흐르기만을 기다리지는 못하겠소. 세상일이라는 게 워낙 예측하기가 힘들잖소.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난 이런 상황이 올 줄은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소.”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그럼 아버지, 확실하게 군왕을 없앨 생각이십니까?”

고 관인이 서둘러 물었다.

“너는 우리를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못 줘서 안달인 게냐!”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다.

“지금은 조정 대신 네 명이 정사를 돌보고 있다. 조정의 각 파벌이 원하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얻으려고 서로 기 싸움을 벌이고 있어. 우리는 이 혼란스러움을 조용히 피해 가야 해. 지금 저들은 저들끼리 싸우면서도, 우리 고씨 가문에 대해서는 다들 의견을 같이할 것이야.”

고 관인이 머쓱한 듯 입을 다물었다.

“태후가 미워하는 것은 진왕 군왕이 아니다. 어쩔 수 없이 미워해야만 하는 건 군왕의 신분 그 자체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면, 일은 더 수월해진다.”

고능준이 잠시 수염을 쓰다듬다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 그럼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 관인이 재빨리 물었다. 고능준이 몸을 일으키고 말했다.

“태후를 뵈러 입궁해야겠다.”

“반근 언니.”

반근이 시녀를 붙잡고 조용히 불렀다.

“우리 진짜로 가?”

시녀가 모퉁이에 서서 반대편에 있는 관저를 잠시 쳐다보았다.

“당연히 가야지.”

“아씨께 한번 여쭤보고 가는 건 어때?”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몸을 돌리고 반근을 쳐다보았다.

“아직도 아씨를 몰라? 아씨께서는 절대로 누굴 찾아가 오해를 설명하시는 분이 아니야. 남이 아씨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아씨께서는 전혀 개의치 않으시니까. 말하자면, 나를 아는 이는 내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이는 나더러 무엇을 찾느냐고 하는 거지(知我者爲我心憂, 不知我者謂我何求 - <시경>).”

반근이 반쯤 알아들은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와 함께 관저를 내다보았다.

“주 공자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잖아. 군왕 전하는 아씨께서 그날 자기를 일부러 구해주지 않은 거라고 오해해서, 아씨를 아예 관저 안으로 들이지도 않으셨대. 그래서 아씨께서는 그날 밤새 경왕부 밖에 서 계셨고.”

시녀가 몹시 속상한 얼굴로 말했다.

“밤새 앉아 계신 거지.”

반근이 시녀의 말을 고쳐주자, 시녀가 반근을 흘겨보았다.

“그게 그거지, 뭐가 달라.”

반근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아씨께서 경성에 계시는 동안 말이 통했던 사람도, 가까이 지냈던 사람도 이젠 전부 없어졌어. 진 공자님은 아씨와 사이가 틀어지는 바람에 원수지간이 되었지. 그건 진 공자님이 선택한 일이지만, 군왕 전하는 달라. 다른 이의 함정에 빠진 아씨를 오해하게 된 상황이잖아. 군왕 전하와 혼사를 치르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아씨께서 정말로 개의치 않으신다고 해도, 나는 도저히 그냥 보고만 있긴 힘들어. 아씨께서 이대로 또 억울하게 한 사람을 잃으시는걸.”

시녀가 조용히 말했다. 반근이 손으로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나한텐 증거도 있어.”

시녀가 자신의 소매를 꼭 잡고 말했다.

“군왕 전하라면, 분명 아씨를 이해하실 거야. 군왕 전하는 늘 아씨를 믿으셨잖아.”

아, 참. 하나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늑대 떼를 사람이 유인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죠?

책에서 봤는데, 늑대 떼는 야밤에 큰길에서 먹이를 찾지 않는대요. 사람이나 마차를 기습하는 일은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요.

아, 참.

아씨께서 말씀하시면, 군왕 전하는 그대로 믿어 주셨어.

“아씨께서 이대로 강주로 돌아가셔선 안 돼.”

시녀가 깊은 심호흡을 한 뒤, 무언가 결심한 듯이 손짓했다.

“가자.”

“전하, 전하.”

이 태의가 잰걸음으로 문턱을 넘어서면서 진안 군왕을 다급하게 불렀다. 안쪽에 있던 내시 두 명이 이 태의를 향해 재빨리 다가와 쉿 소리를 내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이 태의,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전하께선 지금 막 잠드셨습니다.”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이 태의가 미안한 웃음을 보였다.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네.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

“무슨 좋은 일이기에 이렇게 기뻐하십니까?”

내시가 흥분한 표정의 이 태의를 보면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내 그럴 줄 알았다고. 정 낭자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말이야. 정 낭자는…….”

이 태의가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말하던 찰나,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누가 정 낭자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이 태의! 저 두 사람은 뭡니까!”

“고 선생, 저들은 나를 찾아온 것이오.”

“뭐요? 이 태의를 찾아왔다고? 저 여인이 신선거, 태평거의 총 관리인이라는 것을 모를 줄 아시오?”

“예, 저희는 이 태의를 찾아온 게 아니라, 진안 군왕 전하를 뵈러 온 거예요.”

“지금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여기가 너희가 오고 싶다고 해서 올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이 태의, 외부인을 멋대로 왕부 안으로 들이다니, 도대체 무슨 꿍꿍이이요!”

“이보세요, 선생. 우리는 저기 있는 문으로 들어왔어요. 당초 전하께서 우리 저택에 들어오실 때는 담벼락을 넘어서 오셨지만요.”

밖에서 들려오는 대화를 듣던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고 선생, 반근이 온 것인가?”

진안 군왕이 목청을 높여서 물었다. 문밖에서 들려오던 대화가 멈추고, 잠시 뒤 누군가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시녀가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보고 침상 가까이 다가가려 걸음을 뗐다.

“잠깐, 멀찌감치 떨어져라.”

고 선생의 말에, 시위 두 명이 즉시 경계하는 눈빛으로 시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시녀가 걸음을 멈췄다.

“전하, 소인은 그날 저희 아씨께서 전하를 구하러 오시지 못한 이유를 알려드리고자 이곳에 온 거예요. 그때 저희 아씨는 누군가의 협박을 받고 있었어요. 진씨 가문의 공자님이 저희 아씨를 속여 연꽃 구경을 데려가고, 그 틈을 타서 곧바로 사공자님을 납치해 아씨를 협박했거든요.”

시녀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침상을 짚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시중을 드는 시녀가 재빨리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그래? 그랬던 거로구나.”

휘장 사이로 보이는 진안 군왕의 허약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시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반근이 안심한 듯 옆에서 눈물을 훔쳤다.

“그럼요. 제가 증거도 가지고 있어요.”

시녀가 서둘러 대답하고, 소매에서 조심스럽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볼 필요 없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젓자, 시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 정도면 충분해.”

진안 군왕이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이 맞았어. 정사낭은 나 때문에 변을 당한 것이야.”

진안 군왕의 말을 들은 시녀는 눈물이 왈칵 쏟을 정도로 기뻐했다.

“소인은 알고 있었어요. 전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고요.”

시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렸다.

고 선생이 시녀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아 냉소를 지으며 종이 위의 글씨를 훑어보았다.

“낭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래 몇 마디를 그대로 말하시오. 만약 한 글자라도 틀렸다가는 정사낭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오.

무슨 일이죠?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고 선생이 종이 위에 쓰인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시녀와 반근이 고 선생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저기에 쓰여 있는 말처럼, 그날 아씨께서 하신 말씀은 아씨가 정말로 하시려던 말씀이 아니었어요.”

고 선생이 실소를 터트렸다.

“틀렸다. 우리가 문제라 여기는 건, 네 아씨가 했던 말이 아니야.”

시녀와 반근이 멈칫했다.

“네 아씨가 했던 행동이 문제인 거지.”

고 선생이 손에 쥔 종이를 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에게 뭐 하나만 물어보마. 만약 이 종이에 쓰여 있는 말이, 전하의 병을 고치지 말라는 게 아니고 전하를 죽이라는 말이었다면.”

고 관인이 종이에서 시선을 거두고 시녀를 바라보았다.

“네 아씨가 어떻게 행동했을 것 같으냐?”

우리 아씨께서 어떻게 했을 것 같냐고?

우리 아씨께서는…….

“아니에요! 저희 아씨께서 절대로 그럴 리 없어요. 저희 아씨께서는 남을 먼저 해친 적이 없단 말이에요!”

반근이 소리쳤다.

고 선생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먼저 해치는 상황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지. 협박을 받는 상황이라면, 너희 아씨가 남을 해칠까, 해치지 않을까?”

고 선생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시녀와 반근을 쳐다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너희는 정 낭자의 측근이니, 정 낭자의 답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겠지.”

고 선생이 침상에 누운 진안 군왕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 전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혼인은 내게 사소한 일이에요.

정 낭자에게는 사소한 일이겠지.

“고 선생, 그 말은 틀렸네. 내가 해를 입은 건 정 낭자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 해를 당한 결과도 정 낭자가 책임져야 할 문제가 아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러자 고 선생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영명하십니다, 전하.”

고 선생이 표정을 가다듬고, 더는 이 주제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전하께서는 그만 쉬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요양에 전념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진안 군왕은 고 선생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 시녀들이 휘장을 내리자, 시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전하.”

“그만 나가시오.”

시위들이 시녀와 반근에게 손짓했다.

시녀는 미동 없는 휘장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숙인 채 방을 나갔다. 반근도 서둘러 눈물을 훔치고 시녀의 뒤를 쫓아갔다.

“총 관리인.”

고 선생이 문을 나선 시녀를 불러 세웠다. 시녀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이걸 놓고 갔더군.”

말이 끝나자마자, 고 선생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아무렇게나 찢어 내팽개쳤다. 찢어진 종이가 허공에 흩뿌려지자, 시녀는 애써 참았던 눈물이 또 한 번 왈칵 쏟아져 나왔다.

“찢지 마세요! 찢으면 안 된다고요!”

시녀가 앞을 가로막는 시위들을 밀쳐내고 고 선생 앞으로 달려와 바닥에 흩어진 종이 쪼가리들을 하나하나 주웠다.

울면서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줍는 시녀를 보던 반근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찢지 마세요! 찢으면 안 된다고요!

같은 시각 황궁 안. 태후가 놀란 표정으로 고능준을 쳐다보았다.

“지금 뭐라고 했나? 태자의 혼사는 급선무가 아니라고? 그럼 그보다 더 급선무인 일이 도대체 뭔데?”

“마마, 올해 궁에 악운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을 보십시오.”

고능준이 한숨을 쉬면서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평왕이 죽고, 황상이 쓰러지고, 애가는 대신들의 눈치만 보다가 이젠 애가의 친정까지 경성에서 내쫓기는 신세가 되었지.

태후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악운이 끊이질 않는구나.

“그러니 이참에 혼사로 액막이를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그래야 액막이 후에 거행할 태자의 혼사도 길해질 테고요.”

고능준이 말했다.

“혼사로 액막이를 하자고?”

태후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누구의 혼사로?”

“그야 당연히 길한 사람의 혼사로 액막이를 해야지요. 지금까지 황궁에 복을 불러온 사람은 진안 군왕이었잖습니까.”

고능준이 당연한 듯이 말하자 태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군왕이 있었지. 그래. 군왕이 있으니 참 다행이구나. 태자도 하루빨리 아들을 얻을 수 있겠어.”

어허, 진안 군왕이 또 송자동자 노릇을 하면, 군왕을 더 아쉬워할 거면서. 여인네들은 허구한 날 생각하는 게 꼭 이런 것뿐이라니까!

고능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지. 그쪽으로 말하는 게 일이 더 쉬워지겠어.

“그렇지요. 우선 진안 군왕의 혼사를 치르고 나면, 진안 군왕의 병도 액막이하고, 동시에 황실 또한 여러모로 액막이할 수 있으니, 겸사겸사 좋잖습니까.”

고능준이 웃으면서 말했다. 태후도 손뼉을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애가가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가 액막이할 때가 되기는 했지. 위낭도 참 다사다난했어. 당초 황상도 위낭의 혼사를 치러야겠다고 했었는데, 아직도…….”

태후가 말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왕비를 고르는 건 태자비를 고르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이렇게 급히 구해서야 제대로 된 사람을 구할 수나 있겠나?”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종이 한 장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그 위를 가리켰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왕비는 이미 골라 두었잖습니까.”

태후가 고능준이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그곳에는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주 정씨.

뭐라고?

그 여인을?

“그 재수 없는 여인이 길하긴 뭐가 길하다고! 그 여인 때문에 이런 재수 없는 일들이 줄줄이 일어난 것이거늘.”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치면서 호통쳤다.

그렇긴 하다만…….

고능준이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의술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원래 진안 군왕이 그 여인과 혼사를 올리려던 것도 경왕을 돌보기 위함이었고요.”

태후가 눈을 흘기면서 호통쳤다.

“의술이 대단하다고? 경왕도 치료하지 못하고, 폐하를 깨어나게 하지도 못하는데, 대단하기는 무슨! 다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야! 그 여인이 아둔한 백성들을 현혹한 거라고!”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요.”

고능준이 말하자, 태후가 멈칫했다.

허풍으로 만들어진 명성이라면, 당연히 그만한 의술이 없으니 경왕을 치료하거나, 황제를 살려낼 수 없어. 물론 온몸에 독이 퍼진 진안 군왕도 구해 낼 수 없지.

세간에는 정교랑이 신선의 비방을 가진 자라고 알려져 있으니, 사람들은 분명히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치료할 수 있다고 믿을 거야.

하지만 그 의술이 허풍이라면 진안 군왕이 쾌유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군. 게다가 조정이 종친의 체면을 차려줄 좋은 구실이 되니, 더할 나위 없어.

“더군다나, 정 낭자와 진안 군왕의 혼사는 폐하께서도 윤허하셨던 일입니다.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이니, 조정 대신들도 아무 말 못 할 겁니다. ”

천자가 바뀌면 그 아래의 대신들도 바뀌는 법이다. 대신들이 태후의 수렴청정을 극구 만류하는 이유는 조정과 정사를 잘 모르는 태후가 권력을 쥘 경우, 태후를 현혹시킨 간신들이 권력을 남용할 우려가 커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현재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질서가 흐트러지고, 각자 취하기로 했던 이득이 어지럽혀질 수도 있었다.

태후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영명하십니다, 태후마마.”

고능준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황궁을 떠난 고능준은 곧장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어느 찻집으로 향했다. 고능준이 찻집에 들어서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진십팔랑이 보였다.

“늦어서 미안하오.”

고능준이 말하자, 진십팔랑이 말없이 답례했다.

“외람되게도 이리 만나자고 청한 건, 특별한 일 때문은 아니오.”

고능준이 말하면서 수하를 향해 눈짓했다.

수하가 작은 보따리 하나를 바치자, 진십팔랑의 여종이 보따리를 받아와 매듭을 풀었다. 보따리 안에는 책 몇 권이 들어 있었다.

“이건 회혜왕의 유품이오. 회혜왕의 유품을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도 하고, 다른 건 몰라도 이 책들은 버리기엔 아까워서 말이오.”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그렇구나.

진십팔랑이 한 권을 집어 들자, 그 위에 찍힌 평왕의 인장이 선명하게 보였다. 진십팔랑은 상심한 표정으로 잠시 책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네. 전하께서 살아생전 책을 무척 아끼셨는데, 책은 소중히 다루지 않으면 낭비하는 것이라는 말을 항상 입에 달고 사셨습니다.”

진십팔랑이 고능준을 향해 예를 표했다.

“진 낭자, 곧 경성을 떠난다고 들었소만?”

고능준이 물었다.

“낭군이 진사가 된 후로 아직 고향에 내려가지 못해서요.”

진십팔랑의 대답에 고능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아, 그럼 당연히 가 봐야지. 이 일은 없던 일로 해야겠구려.”

“고 대인,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히 말씀하시지요.”

진십팔랑이 곧바로 말했다.

“실은 태후마마께서 진 낭자가 공주들의 교습을 그만둔 걸 못내 아쉬워하셔서 말이오. 더군다나 곧 태자비도 간택해야 하는데, 궁에 계시는 폐하와 태후마마께서는 연로하시고, 귀비마마께서는 병으로 쓰러지셨잖소. 황후마마께서는 계속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셔야 하고, 태자는 또 그런 처지니, 태후마마 혼자서 태자비를 가르치시는 것은 무리지. 성인이 된 공주도 없는 터라, 공주들에게 부탁할 수도 없고. 그러니 진 낭자가 태자비를 돌봐 주는 역할을 맡는 것은 어떨까 해서 말이오.”

고능준의 말에 진십팔랑이 서둘러 예를 표하면서 대답했다.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한낱 신하의 아내로 비천한 신분인데, 어찌 감히 그런 중임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낭자의 집안일이 우선이지. 다만 비천하다는 말은 쓰지 마시오.”

고능준이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감탄 섞인 어조로 이어서 말했다.

“아무래도 태자가 바보다 보니, 태자비를 고르는 게 무척 조심스러운 일이긴 하오. 아무리 잘 고른다고 한들, 또 한 명의 가남풍이 나와 조정을 혼란에 빠트릴지 누가 알겠소이까.”

“대인! 지금은 중신들께서 조정을 잘 이끌어 가고 있으니, 결단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진십팔랑이 목청을 높였다.

조정을 이끄는 중신 중 한 명이 진소인데, 고능준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진십팔랑의 아버지인 진소를 욕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고능준이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사과했다.

“그렇소. 이건 폐하의 강산이고, 원래 회혜왕의 강산이어야 하기도 하지. 무슨 일이 있어도 결단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오.”

고능준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십팔랑도 몸을 일으켜서 답례하고 고능준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십팔랑이 다시 책 몇 권을 내려다보면서 손으로 책들을 매만졌다.

“언니!”

갑작스러운 외침에 진십팔랑이 깜짝 놀랐다. 문가를 쳐다보니, 진단랑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있었다.

“언니, 왜 여기서 혼자 차 마시고 있어?”

진단랑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진십팔랑이 책을 여종에게 건네고 밖으로 걸어 나왔다.

“나는 할아버지랑 잡극 보러 왔지. 언니 마차가 밖에 있길래 한번 와 봤어. 난 또 언니가 집에 간 줄 알았지.”

진단랑이 헤헤 웃으면서 진십팔랑을 따라 걸었다. 진십팔랑은 웃기만 할 뿐 대꾸하지 않았다.

“언니도 우리랑 같이 잡극 보러 가자. 이제 경성을 떠나 멀리 떠나면 거기 말씨는 여기랑 다를 거 아니야. 그럼 노래나 연극도 경성이랑은 다를 테고.”

진단랑이 진십팔랑의 옆에서 쉴 새 없이 재잘댔다. 진단랑을 바라보던 진십팔랑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언니?”

갑작스러운 진십팔랑의 행동에, 진단랑은 고개를 들고 진십팔랑을 올려다보았다.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진십팔랑의 표정을 보고 진단랑이 물었다.

“왜 그래?”

진단랑이 자신의 얼굴을 매만지면서 또 물었다.

“나 화장 다 지워졌어?”

올해로 열한 살이 된 진단랑은 슬슬 진소 부인이나 자매들과 함께 손님을 맞이하고 출타하기 시작했다. 옅은 화장을 하기 시작한 진단랑은 아직 자신의 화장 실력에 자신이 없어 했다.

“아니.”

진십팔랑이 웃으면서 손가락으로 진단랑의 코끝을 가볍게 쳤다. 그리고 진단랑의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이제 가 봐.”

“언니, 우리랑 연극 보러 안 갈 거야? 연극 보고 집에 가서 다 같이 저녁도 먹자. 오늘 아버지도 집에 계셔. 그런데 언니 언제 떠나? 떠나면 다시는 경성으로 안 돌아와?”

꾀꼬리 같은 진단랑의 목소리가 쉼 없이 들려왔다.

찻집의 마당까지 걸어 나온 진십팔랑이 진단랑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침내 한마디 대꾸했다.

“아니.”

“안 돌아온다고?”

진단랑이 속상해하면서 되물었다.

“아니, 안 간다고.”

진십팔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진단랑이 놀란 얼굴로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던 찰나, 거리에서 익숙한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진단랑이 물으려던 말을 뒤로하고 손으로 거리를 가리켰다.

“어? 반근 언니들이다!”

반근?

진단랑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기자, 휘장을 반쯤 걷어둔 마차에 반근 둘이 앉아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이 보였다.

“반근 언니들이 왜 울고 있지? 가서 물어봐야겠다.”

진단랑이 미간을 찌푸리며 마차를 쫓아가려고 하자, 진십팔랑이 진단랑의 손을 붙잡았다.

“상을 치르는 중이니 우는 게 당연하지. 괜히 가서 방해하지 마.”

진단랑은 걸음을 멈추고 짧게 탄식하며 마차가 유유히 거리를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반근 언니들이 진짜 서럽게 우네.”

진단랑이 한숨을 푹 쉬면서 속상한 듯이 얼굴을 찌푸렸다.

시녀가 앞을 내다보고 반근의 손을 잡았다.

“그만 울어. 곧 집에 도착하잖아. 아씨께서 우리가 운 걸 알아보시면 어떡해.”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눈물은 또 금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디 갔다 온 거야?”

황씨가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반근과 시녀를 보며 물었다.

“저희는…….”

반근이 머뭇거리면서 입을 열자, 시녀가 한발 먼저 대답했다.

“무덤에 잠시 다녀왔어요.”

황씨가 아, 하고는 두 사람의 퉁퉁 부은 두 눈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어서들 가 봐. 시누이가 보면 속상해하겠다.”

두 반근이 예를 표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반근 언니, 왜 사공자님의 무덤이라고 하지 않았어?”

반근이 물었다.

“무덤은 불길한 곳이지만, 사공자님의 무덤은 불길한 곳이 아니니까.”

시녀가 대답하자, 반근이 멈칫하면서 물었다.

“불길하다고?”

“응. 좀 전에 우리가 간 곳만큼 불길한 곳이 또 어딨어?”

시녀가 콧방귀를 뀌면서 대꾸하자 반근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반근 언니!”

반근이 못 말린다는 듯이 시녀의 어깨를 때리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정교랑의 거처에 도착했다. 정교랑은 회랑 아래서 두 몸종과 함께 긴 풀로 새들을 어르고 있었다.

“아씨, 잠깐 나갔다 왔어요.”

시녀가 말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의 얼굴을 잠시 살폈다.

화장도 다 지워졌고, 눈도 퉁퉁 부었고, 코도 빨간 것이…….

반근이 민망한 듯 고개를 숙이자, 시녀가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이 상해서요.”

시녀의 말에 정교랑은 음, 하고 대꾸하고는 두 사람을 쳐다보던 시선을 거두었다.

“저희는 가서 세수 좀 하고 올게요.”

시녀가 말하고는 서둘러 반근을 데리고 곁방으로 가다가, 갑자기 발을 구르고 제자리로 되돌아 왔다.

“아씨, 제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는 거 알고 계시죠? 아씨께서는 제 말을 믿지 않으시면서 딱히 묻지도 않으시니 오히려 제가 답답해서 못 견디겠어요.”

반근이 경악한 얼굴로 시녀를 쳐다보았다.

언니가 이번에 정말 제대로 마음이 상했나 봐. 행동까지 이상해지고.

정교랑이 시녀를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올리고 물었다.

“어딜 다녀왔는데? 어쩌다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

“반근이랑 경왕부에 다녀왔어요.”

시녀가 말했다.

회랑 아래서 새들을 어르고 놀던 몸종들이 서둘러 풀을 내려놓고 놀란 얼굴로 황급히 물러났다.

시녀가 경왕부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자, 반근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시녀는 이야기하는 데에 더 집중하느라 반근처럼 눈물을 쏟지는 않았다.

“그게 뭐 울 만한 일이라고.”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그 사람들이 해도 해도 너무하잖아요! 자기들이 뭔데 아씨를 의심해요!”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의심한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한 거잖아.”

정교랑이 말했다. 시녀가 고개를 들고 정교랑을 쳐다보자, 정교랑이 말을 이었다.

“진안 군왕은 황제가 아니야. 그러니 충효의 도리에서, 진안 군왕을 구하는 게 충이라 할 순 없지. 효를 우선시한다면, 난 당연히 내 가족을 먼저 택해야 해. 그러니 그들은 그런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고, 나 또한 그들의 질문에 화나지도, 속상하지도 않아.”

시녀와 반근이 멍한 표정으로 생각했다.

하긴, 아씨의 말씀이 맞긴 해. 아니, 사실이 그렇잖아!

생각하던 시녀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누구나 다 그렇게 했을 텐데, 제가 그들한테 반문한다는 걸 깜빡했네요.”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다는 생각을 잊어버리기도 하잖아.”

정교랑이 대꾸했다.

남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지를 잊곤 하지.

“그걸 잊어버리면, 걱정이 늘어나는 법이야.”

정교랑이 말을 덧붙이자, 시녀가 곧바로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게요. 걱정이나 잔뜩 하라지!”

정교랑과 시녀가 한창 대화하던 도중, 황씨가 다급하게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궁에서 사람이 왔는데, 혼사와 관련해 이야기할 게 있대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혼사?

시녀와 반근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황씨를 쳐다보았다.

정교랑도 다소 의외라는 표정으로 황씨에게 시선을 돌렸다.

“혼사라니요?”

범강림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물었다.

“범 군감, 농이 지나치십니다. 당초 폐하께서 윤허하셨던 일이 아닙니까. 그야 당연히 정 낭자와 진안 군왕의 혼사지요.”

내시가 웃으면서 말하자, 범강림이 놀란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 그게 아직도 유효하단 말입니까?”

내시가 웃음기를 싹 거두고 호통쳤다.

“황당하외다! 폐하의 성지를 뭐로 여기는 겁니까!”

진안 군왕과 정교랑이 혼사를 올린다는 소식은 채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온 경성에 퍼졌다. 사람들이 이 소식을 신나게 전하던 도중, 또 하나의 새로운 소식이 들려왔다.

진안 군왕이 이 혼사를 거절했다는 소식이었다.

“이 일은 결코 내가 제안한 일이 아니오. 전하께서 직접 내리신 결정이오.”

“나 말이오? 나야 당연히 전하의 결정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태후가 그 여인을 시켜 신혼 첫날밤에 전하의 목을 꺾어 버리라고 했을지 누가 아나?”

문이 쾅 하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들려오던 논쟁이 끝났다.

방문이 다시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희미한 빛이 방 안으로 스며들어왔다. 침상으로 다가가려던 이 태의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시녀가 가까이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

“태의? 침을 놓으시려고요? 아니면 진맥을 하시려고요? 전하께서는 아까 막 잠드셨어요.”

“그렇군.”

이 태의가 조용히 말하고 내려진 휘장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됐다. 나중에 전하께서 깨어나신 뒤에 다시 오마.”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태의는 다시 침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몸을 돌리고 천천히 밖으로 나갔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조심스럽게 팔을 들어 올리며 나무 조각을 손에 쥐고 이리저리 굴렸다.

“마마, 전하께서는 차마 그러실 수 없어 거절하신 듯합니다.”

태후궁 안, 내시가 감탄하며 말했다.

“전하의 건강이 몹시 안 좋아졌으니, 정 낭자만 억울할까 봐서요.”

태후가 눈을 흘기면서 언짢은 기색으로 대꾸했다.

“뭐? 정 낭자가 억울해? 그 악운 덩어리가 뭔데 억울하네 마네야? 황실로 시집오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퍽도 억울하겠다. 난들 그 여인이 좋아서 들이려는 줄 알아?”

내시가 깜짝 놀랐다.

아이고, 태후마마, 그리 말씀하시면 아주 큰일 납니다!

“마마, 그래도 전하께서 이렇게 홀로 쓸쓸하게 가시도록 두면 안 되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정 낭자에 대한 전하의 마음이 이리도 깊은데요.”

그래. 제 복에 겨워 정신 못 차리는 것 같으니라고. 애가가 너를 꼭 진안과 순장해 주마. 진안이 결국 독을 못 이겨 목숨을 잃으면, 당연히 너도 같이 땅에 묻혀야지.

“괜히 그 여인에게 절개가 곧다는 미명만 덧씌워주는 꼴이군.”

태후가 냉소를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우리 회혜왕이 죽었을 때, 세간에서 그 죽음을 두고 얼마나 웃고 떠들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려.

“마마, 그리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 여인의 미명은 결국 우리 황실과 마마를 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시가 아첨의 미소를 보이면서 차를 바쳤다.

“그럼, 소인은 가서 마마의 교지를 전달하겠습니다.”

태후가 찻잔을 받아오며 음, 하고 대꾸했다.

경왕부 안.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내시 몇 명이 사다리를 타고 대문 위에 걸린 편액을 바꾸고 있었다. 경왕부 세 글자가 쓰인 편액이 내려지고, 진안 두 글자가 쓰인 편액이 그 자리를 채웠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관저는 진안 군왕께서 들어오실 때 싹 수리했던 곳입니다. 혼사를 치르고 차차 손보면 수고를 덜 수도 있고요.”

관저를 관리하는 내시들과 관아의 관리들이 말했다. 궁에서 온 내시가 낮게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눈썹을 치켜세웠다.

“말을 그렇게 하면 쓰나. 되도록 빨리 준비하라고 했지, 수고를 덜기 위해 대충하라는 게 아니오.”

내시가 관리들을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호통쳤다.

“태후마마의 체면을 상하게 했다가는, 그 후환을 책임질 수나 있겠소이까?”

관저의 내시들과 관리들이 재차 알겠다며 잘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궁에서 온 다른 내시가 진안 군왕의 방 안에 들어가 웃는 얼굴로 태후의 교지를 전달했다. 진안 군왕의 침상 옆에 서 있던 내시가 무릎을 꿇고 태후의 교지를 양손으로 받았다.

교지를 건넨 내시가 눈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전하, 잘 들으셨지요? 태후마마께서 더는 말썽을 피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내시는 한숨을 쉬고 말을 이어 갔다.

“어찌 됐든 간에, 이건 폐하께서 일찍이 윤허하셨던 일이니, 폐하께서도 전하의 혼사를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어쩌면 너무 기뻐 깨어나실지도 모를 일이고요.”

침상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머리로 베개를 두어 번 살짝 쳤다. 큰절을 올린다는 뜻이었다.

“알겠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내시는 그제야 활짝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신신당부했다.

“태후마마께서 말씀하시기를, 전하께서 앓아누워 계시긴 하나, 꼭 정성을 다해 준비하라고 하셨네. 다만, 전하의 회복이 우선이니, 전하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최대한 간소하게 준비하게.”

방 안의 사람들이 내시를 향해 큰절을 올리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침상 위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은 천천히 두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정씨 저택의 마당 안. 범강림이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큰절을 올렸다.

“시간이 촉박하니, 너무 많이 준비하지 않아도 되오.”

내시가 말했다.

“하지만 해야 할 건 해야지요. 아무리 그래도 혼인은 인륜지대사잖습니까. 집안 어른들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요.”

범강림이 말하자, 내시가 눈썹을 꿈틀대며 그의 말을 끊었다.

“아이고, 강주가 얼마나 먼 곳인데, 한번 왔다 갔다 하려면 족히 한 달은 걸리잖소.

그리고 이게 누구 잘못이오? 폐하께서 일찍이 두 사람의 혼사를 윤허하셨는데, 왜 진작 준비하지 않고? 정 낭자의 부모는 뭐가 그리 급해 갑자기 강주로 돌아간 것이며, 외숙까지 전부 떠났다지? 다들 이상하리만큼 황급하게 떠나던데, 당최 뭘 하자는 건지.”

내시의 말에 범강림은 속으로 뜨끔했다.

“강주에 계신 노부인의 병세가 악화되어 그렇습니다.”

범강림이 서둘러 말하자, 내시가 기다렸다는 듯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하는 말이오. 그럴수록 더 서둘러야 하지 않겠소? 삼년상을 치르기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범강림이 고개를 숙이고 민망해하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내시가 투덜거리면서 대문을 나서자, 마당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범강림이 몸을 돌리고 마당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놓인 예물이 담긴 함들을 바라보았다.

역시 뭐든 서둘러 진행하려고 하는군. 교지를 전달함과 동시에 예물을 보내와서 혼사를 정했어. 더는 서로 오가는 절차 없이 곧바로 혼사를 치를 수 있도록 말이야.

혼사라……. 혼사는 인생 중에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인데.

범강림이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훑어보았다. 다들 전혀 기뻐하는 기색 없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조용히 서 있었다. 마당 한쪽에 놓인 큼직하고 붉은 예단 함들과 대비되는 분위기가 더욱 기이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서둘러 준비하세.”

범강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어렵게 입을 열었다.

범강림의 말이 떨어지자, 마당 안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적막함을 걷어냈다. 시녀는 집사를 데리고 예물 목록을 작성했고, 범강림은 사람을 시켜 강주와 섬주에 서신을 썼다.

“서북에도 한 통 보내고.”

범강림이 말했다.

방 안의 등불이 밝혀졌다. 범강림과 함께 탁자에 둘러앉은 집사가 붓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썼습니다.”

집사가 대답했다. 범강림이 몸을 돌리고 손으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병부의 사람을 쓰는 게 더 빠를 게야.”

범강림이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사위 될 분이 군왕이시니, 우리가 굳이 서신을 쓰지 않아도 벌써 강주와 섬주에 있는 관리들이 앞다투어 소식을 전했을 겁니다.”

집사가 웃으면서 대꾸했지만, 범강림은 집사의 말에 웃지 못했다. 집사가 머쓱해하며 입꼬리를 올리고는 고개를 숙인 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서신 작성을 마친 집사가 범강림에게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범강림은 세세하게 퇴고를 거칠 겨를도 없이 내용만 맞으면 된다고 했다. 그러자 집사는 서둘러 서신을 접어 물러나 수하들에게 이를 전달했다.

황씨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도 빠짐없이 준비하긴 글렀어요.”

황씨가 자리에 앉으면서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농토와 점포는 이미 있는 것이니 괜찮다지만, 금은으로 만든 장신구들은 당장 구하기가 어려워요.”

범강림은 황씨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멍하니 일렁이는 촛불을 바라보았다.

“넷째 아우한테는 전에 말해 놨으니, 일찌감치 준비해 뒀을 텐데.”

범강림이 입을 열었다.

“준비해 뒀어도, 혼사를 치르기 전까지 도착하기는 어렵잖아요.”

황씨가 말했다.

혼수는 혼례 당일에 가져가야 혼수라고 할 수 있고, 혼수로서의 의미가 있는 법이었다. 혼례를 치른 뒤에 가져가는 것은, 아무리 많아도 혼수로 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하지 뭐. 혼수를 보려는 사람도 없을 텐데.”

범강림이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황씨도 범강림을 따라 촛불을 바라보았다.

“드디어 시집을 가긴 하는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딴판이네요.”

황씨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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