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160)

-이미 늦었어-

“괜찮다네요. 내가 볼 필요가 없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주복은 잠시 놀랐다가 이내 격노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저 새끼들이!”

주복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문가를 향해 돌진했다.

경왕부 안에 있던 시위들이 무기를 꺼내 들고 경계 태세를 갖췄다. 주복이 문가를 향해 뛰어오는 것도 모자라 문에 대고 발차기를 날리자,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시위들은 재빨리 문가를 향해 뛰어갔다.

주복의 발차기로 경왕부 대문에서 쿵 하는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경왕부를 수리할 때 진안 군왕이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튼튼한 재질로 바꾸라고 신신당부했던 터라, 대문은 소리만 났을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교랑을 안 들여보내?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 건데! 지금 우리를 갖고 노는 거야? 네놈들만 아니었다면, 그런 참담한 일을 겪을 필요도 없었다고! 문 열어, 문 열라고! 이 새끼들아, 당장 문 열어!”

대문이 열리고, 일렬로 서 있던 시위들이 일제히 활시위를 당기며 주복을 조준했다. 등불 아래 비친 화살촉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날카로워 보였다.

“죽여, 어디 한번 죽여 봐! 네놈들 때문에 이미 우리 사람 한 명이 목숨을 잃었어. 한 명 더 죽는다 해도 상관없으니까, 나도 죽여 보라고!”

주복이 냉소를 지으며 소리쳤다.

“뭐 하는 거예요? 돌아와요.”

정교랑의 목소리가 주복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주복은 시위들을 죽일 듯이 노려보다가 몸을 홱 돌리고 문가를 떠났다.

시위들이 일사불란하게 차례로 활을 거두자, 대문이 굳게 닫혔다.

대문 앞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조용해졌다. 그러나 등불에 비친 대문에는 조금 전의 일이 정말로 일어났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주복의 커다란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마당에 있던 시위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고 경계 태세를 유지했다.

“선생, 저대로 내버려 둬도 됩니까?”

시위가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한 막료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들이 뭘 하고 있는가?”

문가에서 밖을 몰래 내다보던 시위가 뛰어와서 대답했다.

“또 구석진 벽에 가서 가만히 앉아 있습니다.”

“내쫓을까요?”

시위의 물음에 막료가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움직이지 않음으로써 움직임을 제압할 때다. 군왕께서 확실히 깨어나시기 전까지는 뭐든 조심해야 해. 저들이 쳐들어오지 않는 이상, 저대로 내버려 둬라. 우리가 문을 여는 틈을 노리는 걸 수도 있으니.”

“정 낭자가, 정말로 청을 거절했던 것이 후회되어 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다른 시위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하지만 막료는 냉소를 지었다.

“이미 늦었어.”

주복이 애꿎은 벽에 발길질하기 시작했다.

“여긴 왜 왔어?”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면서 물었다.

“내가 도울 수 있는 게 있나 싶어서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이젠 네가 필요 없다는데, 왜 아직도 여기 남아 있는 거야?”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정교랑은 대꾸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바닥에 난 상처에서는 더 이상 피가 나지 않았지만, 살갗이 찢어진 통증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잠시 앉아 있고 싶어서요.”

정교랑이 뒤늦게 입을 열었다.

“저들한테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니지?”

주복이 경왕부를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네가 미안할 일이 아니라, 저들이 우리에게 빚을 진 거야! 오늘 일어난 일은 다 저놈들 때문이잖아! 우리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을 맞은 꼴이라고!”

정교랑이 허탈한 듯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정교랑은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결국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서 무슨 말이라도 해 봐.”

주복이 움찔거리는 정교랑의 입술을 보며 다그쳤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주복이 정교랑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알아듣지 못할 테니, 말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말해 봤자 나는 알아듣지 못할 테고, 네가 무슨 말을 하든 헛수고일 테니까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 정교랑,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진십삼 그 자식이 여기 같이 있었다면, 저 여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을 텐데.

진십삼…….

주복이 주먹을 쥐고 벽을 세게 쳤다.

왜 이렇게 된 거지?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어.

주복은 힘없이 벽에 손을 대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따귀를 올려치는 맑은소리가 짝 하고 울렸다. 고 관인이 손으로 뺨을 쥐고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아버지.”

고 관인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고능준을 불렀다.

“누가 네놈더러 정사낭을 죽이라고 했느냐? 내가 몇 번을 얘기해! 괜히 섣불리 움직이지 말라고, 무슨 일이든 신중에 신중을 더해야 한다고! 죽일 거였으면, 그 여인이나 죽였어야지. 정사낭을 죽여서 뭐에 쓰겠다고! 풀을 베어 뱀을 자극하는 꼴밖에 더 돼?”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를 질렀다. 고 관인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눈물이 나오지는 않았다.

“아버지, 저는 정사낭을 죽이라고 한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대로, 정사낭이 주 낭자와 보내는 시간을 조금 더 늘려 달라고만 했죠. 그 잠깐 사이에 얍삽한 몸종 년이 정사낭을 죽일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고능준이 다시 손을 올리자, 고 관인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감싸 안고 뒷걸음질 쳤다.

“아버지, 아버지, 저는 정말로 모르는 일입니다. 저도 그 몹쓸 계집한테 당한 거라니까요! 정사낭을 죽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어요!”

고능준이 소매를 홱 털고 손을 거두었다.

“그래서 시신은?”

고능준이 한쪽에 서 있던 식객들에게 물었다. 불안에 떨고 있던 식객들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고 대답했다.

“검시관이 시신을 확인했고, 정사낭의 시신은 정씨 가문으로 옮겨졌습니다. 덕승루에 있던 이들은 전부 하옥되었고요.”

이리저리 서성이던 고능준이 고 관인에게 물었다.

“기녀한테는 뭐라고 말했고?”

“아버지,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자의 체면 이야기만 했지, 다른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습니다. 그 몹쓸 계집에게도 정사낭이 덕승루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해 달라고만 했어요. 그 외에 다른 말은 일절 안 했습니다. 그 몹쓸 계집은 이미 정교랑의 손에 죽었고요.”

고 관인은 말하면서도 소름이 돋아 몸을 살짝 떨었다.

수하의 말에 의하면, 이름이 무슨 령인가 했던 그 몸종은 단번에 목이 콱 꺾여서 죽었다고 하던데.

무시무시하군. 목을 꺾어서 죽이다니!

“그러니까 아버지, 이번 일은 아무리 조사해도 저희와는 무관한 일일 겁니다.”

고 관인이 이어서 말했다.

“그 여인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고능준이 돌연 물었다.

“경왕부에 있다고 합니다.”

식객이 서둘러 대답했다.

“경왕부라고?”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대인,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 낭자는 경왕부 문턱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문전박대를 당해 경왕부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고만 합니다.”

식객이 웃으면서 말했다.

“경왕부 사람들은 다 정 낭자를 의심하는 듯했습니다. 진안 군왕의 병이 급하긴 하나, 아무 의원이나 부를 수는 없었겠지요.”

다른 식객이 맞장구를 쳤다.

“그리고 정 낭자가 경왕부를 떠나지 못하는 걸 보니, 상황이 심각해진 건 분명합니다. 들리는 말로는, 암암리에 태의 두 명을 더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고능준이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군. 일찍이 경왕의 병을 고치라는 어명도 거역했던 정 낭자인데, 군왕의 병까지 고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 여인은 이제 끝났어. 일석이조, 일거양득이로구나. 그리고 설령 군왕이 죽지 않는다 해도.”

고능준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이 일을 계기로, 그 두 사람은 멀어지겠지.”

고능준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에 잠겼다.

다시는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니 뭐니 하는 말들로, 예상치 못한 전개가 펼쳐질 일은 없을 게야.

“대인, 틀렸습니다.”

한 식객이 손가락 세 개를 세우면서 말했다.

“일석삼조입니다.”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야비한 웃음을 지었다.

“아, 맞네, 일석삼조죠. 이 일을 우리가 저질렀다는 걸 아는 이가 한 사람 더 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멍청한 정씨 가문 사람들은 절대 그 사람 말을 믿지 않을 테지요.”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는 울먹이는 소리와 흐느끼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발에 걸린 쇠사슬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가 멀리서부터 들려왔다.

“빨리 걷지 못해!”

거칠게 떠밀린 주 낭자는 요란스러운 쇠사슬 소리를 내며 창살을 붙잡았다.

“들어가! 썩을 년.”

우람한 체격의 여자 옥졸이 호통을 치며 주 낭자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쥐고는 옥방 안으로 떠다밀었다.

주 낭자는 악 소리를 지르며 옥방의 바닥으로 철퍼덕 엎어졌다. 옥졸은 옥방 안으로 발을 들이지도 않고 곧바로 자물쇠를 걸어 잠갔다.

주 낭자가 힘겹게 몸을 일으키자, 좋은 옷감을 쓴 비단옷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람은 낭자의 은인이잖소.”

주 낭자의 머리 위에서 진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간신히 땅을 짚고 허리를 펴려던 주 낭자는 순간적으로 팔에 힘이 빠졌다.

“소인도 알고 있습니다. 정 공자님은 좋은 분이지요.”

“아니, 정 공자를 말하는 게 아니오. 내가 말한 사람은, 당신 가문의 원수인 유 교리를 죽인 사람이지.”

진호가 담담하게 말했다. 주 낭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 정말 그 여인이!”

유 교리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한동안 저잣거리를 뜨겁게 달구긴 했으나, 누가 유 교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증거를 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유 교리를 그렇게 만든 사람에 대해 별별 소문이 다 돌았지만, 주 낭자는 그 사람이 정 낭자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진호는 주 낭자를 내려다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어두운 감옥 안, 기름 등잔의 불빛 아래로 비치는 진호의 미소는 부드럽고 따뜻해 보였다.

“당연하지. 내가 정 낭자와 함께 한 일이거든.”

주 낭자가 놀란 표정으로 진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 물론 대부분은 정 낭자가 했고, 나는 옆에서 살짝 거들기만 했지. 그러니 주 낭자는 주씨 가문에서 기념비를 세워야 했을 은인을 제 손으로 해친 셈이오.”

진호가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주 낭자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면서 울먹였다.

“아니에요. 소인이 그런 게 아닙니다. 소인이 아니에요.”

주 낭자가 진호의 옷자락을 붙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진 공자님, 정말 소인이 그런 게 아닙니다. 제가 그런 게 아니에요. 소인은 정말로 정 공자님을 죽이려고 한 적 없어요. 그런 생각조차도 한 적 없습니다. 정말이에요.”

그런 생각조차 한 적이 없다고? 누군들 그런 생각이나 했겠어?

나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어. 하지만…….

진호가 혐오스럽다는 듯이 주 낭자를 흘겨보면서 손을 내쳤다.

“하지만 결국엔 당신 때문에 정사낭이 죽었어! 당신이 정사낭을 죽인 거라고!”

진호가 주 낭자의 멱살을 붙잡고 그녀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당신은 정 낭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죽였어. 정 낭자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을! 정 낭자가 이미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잃었는데! 당신 때문에 또 소중한 사람을 잃었다고!”

목에 옷이 걸려 얼굴이 새빨개진 주 낭자는 숨쉬기가 힘들어 캑캑거렸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내가 한 짓이 아니라고요.

진호를 바라보던 주 낭자가 말없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마 지금이 진 공자님과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순간이겠지.

주 낭자는 자신의 얇은 여름옷을 붙잡고 있던 진호의 손에서 어렴풋한 온기를 느꼈다.

“차가 식었을 텐데. 호흡이 안정적이지 않은 걸 보니, 주 낭자도 나처럼 마음속에 응어리가 있는 것 같네요. 그러니 따뜻한 차를 마셔요.”

“그럼, 공자님께서 말씀하신 ‘나처럼’이라는 말에 감사드릴게요.”

주 낭자가 자신에게 따뜻한 차를 건넨 사내를 쳐다보았다.

주 낭자는 사내의 속에 응어리가 있다는 것을 알아보았고, 사내는 주 낭자의 노랫소리를 듣고 주 낭자의 걱정과 관심을 눈치챘다.

“지음(知音)에 감사하는 게 아니고요? 지음이 아니었다면, 낭자가 내 마음을 위로하려고 연주했다는 걸 알지 못했을 텐데.”

사내가 설핏 웃으면서 말했다.

“그건 공자님의 몫이지요. 지음인지 아닌지는, 공자님께서 소인의 뜻을 알아주시는지 아닌지에 달렸습니다. 공자님을 위해 어떤 곡을 연주해야 할지는 소인의 몫이죠.”

주 낭자가 미소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인의 본분이기도 하고요.”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좋소. 참으로 좋은 본분이오. 그러고 보니 꼭 그 여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진 공자님이 웃었던 것도, 기분이 좋아 보였던 것도, 사실은 나 때문이 아니었겠죠. 진 공자님은 그 여인과 어딘가 닮아있는 저의 본분 때문에 웃었던 거예요.

주 낭자가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진호가 주 낭자의 멱살을 놓자, 주 낭자는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정사낭을 직접 죽이지는 않았지만, 당신이 정 낭자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진 게 정사낭을 죽게 만든 거야. 그런데도 아직 당신이 억울하다고 생각하나? 이 모든 게 다 당신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진호가 소리치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주 낭자가 웃음을 터트렸다.

“예, 다 소인 때문이에요.”

주 낭자가 고개를 들었다.

“진 공자님이 소인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정 공자님은 소인 때문에 죽은 겁니다.”

주 낭자를 내려다보던 진호의 얼굴에서 냉랭한 웃음이 번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알고 있겠지.”

진호가 천천히 말했다. 주 낭자가 눈물을 머금고 미소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인, 잘 알고 있습니다.”

진호는 대답을 들은 즉시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문이 닫히자, 주 낭자는 텅 빈 옥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낮은 의자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의자를 향해 기어가, 허리띠를 풀고 몸을 일으켰다.

주 낭자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의자 위에 올라섰다.

이 옥방에는 창문도 있네.

주 낭자는 기뻐하며 창틀에 천천히 허리띠를 묶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매듭지은 허리띠 사이로 머리를 집어넣었다.

아, 바깥이 보이네. 곧 해가 뜨겠구나.

더 높이, 더 높이. 더 잘 보이게, 더 높이.

주 낭자가 까치발을 들었다.

애초에 어머니가 이렇게 돌아가실 때, 나도 같이 데리고 가셨어야 했어. 뭐, 지금도 늦지는 않아. 곧 있으면 어머니와 아버지를 뵐 수 있을 테니까.

이번 일로 내 명성은 바닥을 치게 됐지만, 내 바람대로 순결을 지켰으니 괜찮아.

주 낭자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미소 지었다.

이 정도면, 꽤 잘 살았어.

탁 소리가 들리고, 낮은 의자가 옆으로 쓰러졌다.

동쪽에서 해가 떠오를 무렵, 감옥 밖에 서 있던 진호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한 놈씩.

진호는 얼굴을 가릴 정도로 두모를 푹 눌러 쓴 채, 말을 타고 떠나갔다.

해가 차츰 방 안으로 들어올 무렵,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던 내시가 잠에서 깼다. 내시는 반사적으로 침상을 바라보았다.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사람이 두 눈을 뜨고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시는 잠시 넋이 나간 얼굴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침상을 바라보다가 손으로 눈을 비볐다.

“전하?”

내시가 흐리멍덩한 눈으로 진안 군왕을 부르자, 진안 군왕이 작은 소리로 음, 하고 대꾸했다. 내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습니다! 전하께서 깨어나셨어요!”

대문이 쾅 소리를 내면서 활짝 열리자, 벽에 기대어 앉아 있던 주복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마차 한 대가 황궁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었다.

설마…….

몸을 일으킨 주복은 무언가에 홀린 듯 앞으로 몇 걸음 내디뎠다. 갑자기 주복의 등 뒤로 말이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주복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어이?”

말에 올라탄 정교랑의 모습을 본 주복이 놀라 소리쳤다. 정교랑이 주복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가요. 날도 밝았고, 앉고 싶을 만큼 앉아 있었으니 그만 돌아가야겠어요. 아직 해야 할 일도 많이 남았고요.”

주복이 경왕부를 흘깃 쳐다보고는 정교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복도 서둘러 자신의 말을 끌어와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탔다.

새벽녘의 파란 하늘이 점차 밝아지는 가운데, 두 사람은 앞뒤로 말을 타고 나란히 거리를 가로질러 갔다.

“마마!”

안비의 목소리가 황제의 침궁에 울려 퍼졌다.

황후는 황제에게 마지막 탕약 한 숟가락을 먹인 뒤, 궁녀가 건넨 따뜻한 손수건으로 황제의 얼굴을 조심스레 닦아주고 있었다.

“마마, 지금 용안이나 닦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안비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침상에 걸터앉은 황후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진안 군왕한테 일이 생겼대요.”

“무슨 일이?”

황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왕부에서 사람이 왔는데, 군왕 전하가 맹독에 중독되었다는데요? 태후마마께서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우셨고요. 어제 전하에게 그런 말을 하면 안 됐다고, 자기 때문에 전하가 음독을 시도한 것 같다면서요.”

안비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황후가 경악하며 중얼거렸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구나. 그 늙은이가 그리 독하게 나올 줄이야.”

“마마, 정말로 태후마마일까요?”

안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태후 외에 또 누가 그 아이를 해칠 수 있겠느냐.”

황후가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사람은, 대개 그 사람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지.”

“그럼 전하는 지금…….”

안비가 말끝을 흐리면서 물었다.

“어제 일어난 일을 지금에서야 보고한다는 것은, 군왕의 생명엔 지장이 없다는 뜻이야.”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쉬고 침상에 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종친들은 더욱 겁을 먹을 텐데요. 더는 마마와 양자 입적을 논하지 않으면 어쩌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하자, 황후는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야 모를 일이지. 이 세상에는 죽는 것을 두려워하기보다,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목숨을 거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이거든. 진안 군왕이 없어진다면, 그 기회가 다른 종친들에게 갈 가능성이 더 커지지 않겠느냐?”

황후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말을 덧붙였다.

“누가 제위에 오를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무도 단정 지을 수 없겠지.”

경왕부 안. 휘장을 내린 실내는 어둑했다.

“태후마마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냐?”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이 허약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이고 그렇다고 대답했다.

“소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태후마마께서 먼저 전하께서 음독자살을 시도한 것이라며 단정 지으셨습니다.”

하긴, 태후마마께서는 필히 내가 음독자살했다고 말씀하셔야겠지. 그게 아니라면 태후궁 내에서 내게 독을 쓴 사람을 조사하셔야 할 테니까.

몸이 회복되지 않은 터라, 진안 군왕은 아직 바깥바람을 쐬지 못했다. 방의 구석진 곳에 휘장을 친 채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마마께서 내가 연의왕이 되길 바라신다면, 내가 마마의 바람을 이뤄 드려야지.”

“죽지 않았다고?”

경왕부의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진안 군왕이 죽지 않았다는 소식은 결국 새어 나갔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알게 된 고능준은 부아가 치밀어 탁자를 내리쳤다.

“일이 또 이리 틀어지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정 낭자를 감시할 게 아니라 이 태의를 먼저 해치울 걸 그랬습니다. 우리 쪽에서 독의 함량을 늘린 만큼, 저쪽 이 태의의 의술도 늘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막료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지금 그런 말을 해서 뭐 하나?”

고능준이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하지만 대인, 죽지는 않았지만, 거의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진안 군왕은 이제 반쪽짜리 목숨밖에 안 남은지라, 어쩌면 남은 세월을 침상에서만 보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수하가 서둘러 말했다.

“그 말이 참이냐?”

고능준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예. 소인이 태후마마께서 보낸 사람과 함께 진안 군왕을 보러 다녀왔습니다. 정말입니다.”

수하는 조금 전에 자신이 본, 생기 없는 얼굴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진안 군왕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렇단 말이지? 그럼 이제 누구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으니, 아무도 경왕을 비웃을 수는 없겠구나. 진안 군왕 그놈의 명줄이 꽤나 질기군. 이번엔 어찌어찌 살아남았다지만, 또 수상쩍은 행동을 했다가는 그땐 놈의 숨통을 기필코 끊어 버려야겠다.”

고능준의 말에 모두가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경왕의 일을 좀 의논해볼까?”

걸음을 떼려던 고능준이 무언가 생각났는지 고개를 돌렸다.

“아 참, 그리고 나머지 종친들도 잘 지켜보거라. 또 누가 연의왕을 자처할지도 모를 일이니.”

태후가 보낸 사람이 돌아가자, 경왕부는 진안 군왕을 보러오는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마침내 조용해진 방 안에서 내시와 이 태의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태의, 어서 가서 잠깐이라도 쉬십시오.”

“전하께서는 어떠하신가?”

“약을 드시고 아까 막 잠드셨습니다.”

이 태의는 휘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고, 이불을 살짝 걷어 진안 군왕의 손을 이불 밖으로 꺼냈다. 진맥을 짚고자 진안 군왕의 손을 뒤집던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이 무언가를 손에 꼭 쥐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뭐지?

이 태의가 맥을 짚으려던 손으로 진안 군왕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빼내려 했다. 진안 군왕이 손을 움찔거리고는 이불 안으로 손을 숨겼다.

이 태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두 눈을 뜬 채 이 태의를 쳐다보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보였다.

“전, 전하를 방해했습니다.”

이 태의가 서둘러 말하고는 기쁜 기색으로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또 이 태의 덕분에 살았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선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는 말이 있지요. 다행히도 하늘이 무심치 않았습니다.”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전하, 신이 맥을 한 번 짚어봐도 되겠습니까?”

진안 군왕이 손을 이불 밖으로 빼내고 천천히 손바닥을 펼쳤다. 그의 손바닥에 올려진 나무 조각을 본 이 태의가 흠칫 놀랐다.

아, 이거였구나.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정 낭자를 기다려야 해. 기다리기로 해 놓고, 내가 낭자를 기다리기로 해놓고, 먼저 가버리면 안 돼.

이 태의의 눈앞에 죽을힘을 다해 문틀을 붙잡고 있던 진안 군왕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태의는 시선을 떨구고 조용히 맥을 짚었다.

“어제 전하의 용태는 꽤 위독하셨습니다. 오늘 아침에 바로 약을 중단하고 침으로 경맥까지 막았는데, 견디실 수 있겠습니까?”

내시가 걱정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견딜 수 없어도 견뎌내셔야지. 그렇지 않으면, 더 견디기 힘든 일이 생길 테니.”

막료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태의가 손을 거두고 몸을 일으키자, 내시와 막료가 일제히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아니면, 정 낭자를 다시 모셔와 상태를 보게 하는 건 어떻겠소이까?”

이 태의가 말했다. 내시와 막료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럼…….”

내시가 놀라서 소리치자, 이 태의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니. 그런 뜻이 아니오. 그래야 좀 더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 그렇소.”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 낭자가 마음 편히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제 이 태의가 혼자 힘들게 전하를 구하고 쓰러질 필요도 없었겠지요. 이 태의는 정 낭자 없이도 전하를 구해 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더는 자신을 하찮은 사람으로 취급하지 마십시오.”

막료가 콧방귀를 뀌면서 말했다.

“전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이만 물러나시지요.”

내시가 마른기침하고는 진안 군왕을 향해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내시와 막료는 침상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휘장이 내려지고, 밖으로 걸어가던 막료가 이 태의에게 말했다.

“자꾸 정 낭자 이야기 좀 꺼내지 마십시오.”

“정 낭자의 의술이 정말 대단해서 그렇소.”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그 여인은 우리 사람이 아니잖습니까! 전하께서 사경을 헤맬 때도 고치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뭐하러 머리를 조아리면서 애걸복걸해야 하냔 말입니다! 전하의 병은, 정 낭자가 없어도 낫지 않았소이까!”

휘장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에 진안 군왕은 나무 조각을 천천히 세게 쥐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나뭇결이 손바닥을 찌르는 느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 낭자가, 내 병을 돌봐 주지 않겠다고 했다고?

“고 선생, 듣다 보니 그 말은 좀 이상하외다. 만약 정 낭자가 없었다면, 전하께서는 정말로 가망이 없으셨을 것이오.”

진안 군왕이 손을 세게 쥐면서 이야기를 더 자세히 들으려고 고개를 들었다.

정 낭자가…….

“내가 전하께 쓴 침술은 정 낭자를 보고 배운 것이오. 당초 진 노태야의 병세가 위독했을 때, 정 낭자가 썼던 침술을 옆에서 보고 배웠지.”

“그럼 그건 이 태의 스스로 배운 것이지요. 그러니 이 태의가 전하의 목숨을 구한 겁니다. 정 낭자에게만 의지했더라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돌아가셨을 겁니다.”

막료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꾸하자, 이 태의의 표정이 굳어졌다.

“고 선생, 그리 말하는 것도 틀렸다 볼 순 없지만, 정 낭자가 아니었다면, 전하께서는 일찍이 오 년 전에 목숨을 잃으셨을 것이오.”

막료와 내시가 흠칫 놀랐다.

“우리처럼 손재주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항상 스승을 존경해야 하오. 그러니 침 하나의 가르침도 스승으로 모셔 마땅하지. 고 선생이 정 낭자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내가 상관할 바 아니나, 최소한 내 앞에서는 정 낭자 험담을 하지 마시오.”

이 태의가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막료와 내시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 태의는 다 좋은데, 사람이 저렇게까지 겸손해서야 원.”

막료가 고개를 저으며 실소를 터트렸다.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진안 군왕이 누워 있는 방을 바라보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면, 이 태의 말대로 정 낭자를 한번 모셔 오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번에 몸이 정말 많이 상하셨잖습니까.”

막료가 내시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정말 많이 상하셨지. 지금 전하의 몸으로는 조금의 풍파도 견디지 못하실 걸세. 그래서 나는 감히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없네.”

“정 낭자가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지요?”

내시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렇다더군. 수위들 말로는 우리가 궁에 사람을 보낼 때가 돼서야 자리를 떠났다고…….”

막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안 군왕의 방에서 쿵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를 들은 내시가 쏜살같이 방 안으로 달려갔다. 막료가 내시를 뒤따라 뛰어 들어갔을 무렵에는, 시녀 두 명이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을 부축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휘장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키려고 버둥댔다.

“또 구토하시려는 건가?”

내시가 놀라서 사색이 된 얼굴로 물었다. 시녀들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침상 위에 걸터앉은 진안 군왕이 힘없이 뒤로 쓰러졌다.

“여길,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물었다.

누굴 말하는 거지?

내시가 멈칫했다.

“정 낭자가, 어제, 여길 왔었다고?”

진안 군왕이 내시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또박또박 끊어 말하자, 막료가 내시를 흘겨보고는 한발 먼저 나아가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막료가 대답했다.

진안 군왕이 숨을 몰아쉬면서 웃음을 터트렸다. 몸 옆으로 늘어뜨린 두 손을 꼭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러게 내가, 내가, 기다리자고 했잖나. 내가, 정 낭자를 기다리지 않아서, 내가, 믿음을 져버린 것이야. 정 낭자가, 화, 화나진 않았겠지?”

진안 군왕이 침을 삼켜 가며 어렵게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신뢰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하께서 믿음을 져버리신 게 아닙니다.”

막료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진안 군왕은 웃음을 터트렸다.

“허튼소리. 만약 이 세상에서, 아직,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남아 있다면, 그건 분명히, 정 낭자일 걸세.”

진안 군왕은 숨을 헐떡이느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전하, 정 낭자는 어제 전하의 상태를 보지도 않고 치료를 거절했습니다.”

막료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면서 말했다.

“그럼, 정 낭자가, 치료할 수 없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곧바로 반박했다.

막료는 눈만 부릅뜰 뿐, 진안 군왕의 말에 대꾸하지 못했다.

내시는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시녀가 건넨 손수건으로 진안 군왕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잠깐의 시도와 짧은 몇 마디만 했을 뿐인데, 진안 군왕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제, 왜 정 낭자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는가?”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적군과 아군을 구분할 수 없었던 때인지라, 정 낭자를 섣불리 안으로 들일 수 없었습니다. 어제는 정말 상황이 너무 위험하고 긴박했습니다.”

막료가 대답했다.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앉아 있었다고?

그 여인이 어제 문밖에서 밤새…….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지금 이런 시기에 어찌!”

막료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진안 군왕은 막료를 쳐다보면서 같은 말을 반복했다.

“정 낭자를 만나야겠다.”

“뭐지?”

정씨 저택 앞에 도착한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저택 대문에 붙어 있는 하얀 종이를 바라보았다. 선홍색 도부(桃符: 악귀를 쫓는 복숭아나무 부적) 또한 가려져 있었다.

상중인가?

“나를 찾아왔다고요?”

방에서 걸어 나온 여인이 회랑 아래에 서서 물었다. 문가에 서 있던 남자가 서둘러 예를 표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소생은 진안 군왕 전하의 사람입니다.”

남자가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는 차마 회랑 아래 선 여인을 똑바로 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 옆에 서 있던 시녀를 곁눈질로 흘깃 쳐다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부었고, 여전히 눈물이 그렁그렁하군. 정말로 상을 치르는 중인가?

경왕부 사람들은 경계 태세를 취하며 밤을 꼬박 지새웠고, 조정 중신들과 금군 병사들의 동태를 살피느라 잔뜩 긴장해 있던 터라 다른 소식은 일절 접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물었다. 남자가 잡생각을 떨치고 다시 한번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전하께서 낭자를 뵙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집에 상이 있습니다.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아 직접 상을 치러야 해서, 지금은 따로 손님을 만나기 힘들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남자가 경악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정씨 가문에 또 일이 생겼다.

소식은 이미 어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한 터라, 오늘은 다리 위에서 차를 파는 노점의 점원마저도 그 일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었다.

“주 낭자가 품에서 비수를 팍 꺼내고는 비장하게 한마디 하더이다. ‘당신이 내 마음을 저버린다면, 소인이 당신의 그 마음을 파내 버리고 말겠어요.’”

점원은 한 손으로 엄지와 중지를 구부려 난초 모양을 만들고, 국자가 들린 다른 한 손으로 허공을 휘휘 저으며 연극에 심취해 고개를 흔들었다.

이야기를 듣던 사람 중 하나가 점원의 말을 끊었다.

“어이, 어이. 그게 아니잖소. 정 공자를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라던데? 정 공자가 주 낭자를 강제로 겁…….”

“에이, 말도 안 되는 소리. 오만 관이나 내놓은 정 공자가, 강제로? 오만 관이면 덕승루에 있는 모든 기녀와 하룻밤을 보낸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데, 뭘.”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당시 별실 안에는 주 낭자와 정사낭, 그리고 그들의 시중을 드는 시녀와 사환뿐이었다고 했습니다. 정씨 가문의 시위들이 바로 문밖에 서 있었는데, 그들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고 하고요.”

“차에 약을 탔다더군. 정사낭을 죽인 건 주 낭자의 시녀인 춘령이고. 아, 춘령도 강주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럼 그 시녀는 무슨 이유로 정사낭을 죽인 거요?”

소문을 들은 막료와 수하들이 한마디씩 거들던 사이, 한 막료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수하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주 낭자는 어제 감옥에서 허리띠로 목을 매달아 자결했고, 춘령은 정 낭자가 현장에서 목을 꺾어 죽였어요. 당시 정 낭자는 별실에 도착하자마자 춘령에게 딱 한마디를 물었다고 하는데.”

“네가 한 짓이냐?”

어딘가에서 허약한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갑자기 이 대목에서 저런 목소리가 들리니, 수하와 막료들은 깜짝 놀라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모두가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베개에 몸을 기댄 채 침상 위에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보였다.

“그 여인이 그리 물어봤지?”

진안 군왕이 말을 덧붙였다.

수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이자 진안 군왕은 힘없이 미소지었다.

“네. 전하께서 생각하신 말씀이 맞습니다. 정 낭자의 물음에 그 시녀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정 낭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수하가 말끝을 흐리면서 두 손으로 목을 꺾는 시늉을 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누군가를 직접 죽인 적은 없지만, 살면서 한 번 이상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렇지만 정교랑이 춘령의 목을 꺾어 죽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다들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여인이 이성을 잃고 칼로 마구 찔렀다면, 거기까진 그래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손으로 사람의 목을 꺾어 죽였다면…….

그건, 피를 보는 것보다 더 참혹한 방식이야.

“그래서 어제 정 낭자가 어딘가 이상해 보인다고 제가 그랬잖습니까.”

한 사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사내에게 향했다.

“자네가 말했었던가?”

누군가가 물었다.

말했긴 했나?

“어제 보니까, 정 낭자의 옷에 피가 잔뜩 묻어 있었습니까.”

사내가 대답했다.

어제 정 낭자는 덕승루에서 곧장 이리로 왔던 건가?

“이번 일이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그 말씀인즉, 정 낭자가 전하를 치료하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누군가가 정사낭의 목숨을 가지고 협박했다는 겁니까?”

고 선생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너무 공교롭지 않나.”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전하, 세상에 공교로운 일이 어디 한둘입니까? 정사낭이 덕승루에서 겁도 없이 날뛸 때, 정 낭자가 나서서 천금을 썼던 것도 주 낭자의 계략이었지요. 주 낭자에게 당한 게 있으니, 정사낭은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주 낭자를 희롱했을지 누가 압니까? 정사낭을 납치하는 게, 그리 쉬웠겠습니까? 당시 정씨 가문의 시위가 넷이나 현장에 있었답니다. 주씨 가문의 사람과 정 낭자가 덕승루로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문 앞에 서 있던 시위들은 한참 후에야 윗전이 죽은 걸 발견했을 겁니다.”

고 선생이 조소를 보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제가 보기에는 누군가가 정사낭을 납치한 것도 아니고, 당시 정사낭이 덕승루를 떠나지 못할 만한 상황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정사낭 본인이 덕승루를 떠나고 싶어 하지 않았던 거죠.”

말을 끝낸 고 선생이 시위 한 명을 불렀다. 문밖에서 시위가 들어오자, 고 선생이 말했다.

“그날 네가 본 것과 정 낭자가 대답한 바를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예. 그날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의 십삼 공자와 꽃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하의 병은 고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전하의 상태는 볼 필요도 없고, 자기는 고칠 수도 없다면서 저희더러 다른 의원을 부르라는 말도 했습니다. 그래도 저희는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오려 했는데, 주씨 가문의 육공자가 갑자기 저희를 때렸습니다.”

시위의 말이 끝나자, 고 선생이 고개를 돌려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들으셨는지요? 정 낭자는 그날 진십삼과 같이 있었다고 합니다.”

고 선생이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상소문으로 가득 찬 함이 놓여 있었다.

“저건 태후마마께서 전하께 보내온 상소문 더미입니다. 전부 전하를 탄핵하는 내용이지요. 그리고 저 상소문을 쓰도록 앞장선 자가 바로 진씨 가문 자제이고요.”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 아무래도 정 낭자는 진씨 가문을 선택한 듯합니다.”

실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말없이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을 본 내시가 마른기침을 했다.

“고 선생, 말씀이 많으셨습니다.”

내시가 웃으면서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진안 군왕을 부축했다.

“전하께서 깨어나신 지가 얼마 안 되었잖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진안 군왕도 지쳤는지, 내시의 손길을 따라 천천히 침상에 누웠다.

이때, 고 선생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그리고 오늘 정 낭자를 모셔 오려고 했는데, 정 낭자가 또 거절하더군요. 뭐라더라? 집에 상을 치러야 하는데 집안에 어른들이 계시지 않으니 손님을 만나기가 영 불편하다고요.”

고 선생이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냉소를 지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오? 지금처럼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땐 불러도 안 오겠다면서, 위험천만했던 어젯밤에는 왜 기어코 들어오겠다며 밤새 기다린다? 그 여인을 안으로 들이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어젯밤에 그 여인이 들어왔으면 그 몸종뿐 아니라 우리 전하의 목도 꺾었을지 모르는 일 아니오?”

“고 선생!”

내시가 목청을 높이며 고 선생을 흘겨보았다.

“집에 상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집안 어른이 계시지 않으니, 당연히 정 낭자가 자리를 비우기 불편하겠지. 정 낭자가 손님을 만나기 불편하다고 말했다면, 정말로 손님을 만나기 불편한 상황인 걸세.”

고 선생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진안 군왕이 입을 열었다. 고 선생이 진안 군왕을 향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께서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요. 어서 편히 쉬십시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전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는 겁니다.”

고 선생이 허리 숙여 예를 표하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도 그를 따라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내시는 시중드는 시녀들에게 당부한 후, 자신도 자리에서 물러났다.

“왜 자꾸 쓸데없는 소리만 골라서 하는 거요! 전하께서 하루빨리 쾌차하시기를 바란다면서 그런 말을 늘어놓다니.”

“솔직한 말을 했을 뿐이오.”

“솔직한 말이어도 때를 골라서 할 줄 알아야지. 안 그래도 전하와 가깝게 지내는 사람이 몇 없지 않소. 게다가 지금은…….”

작게 대화하는 소리가 휘장 너머로 점점 더 멀어지더니, 차츰 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지금은…….

진안 군왕이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서 손바닥을 펼쳤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나무 조각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손에 꼭 쥔 채 팔을 내렸다.

그래, 잠이나 자자. 지금 가장 중요한 건 내가 하루빨리 회복하는 것이야.

절대로 죽어서는 안 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해. 아무리 힘들어도, 꼭 살아남아야 해.

휘장 옆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두 시녀는 더 이상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들은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까치발을 들고 걸어가 휘장과 몇 걸음 떨어진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오후의 방 안이 한밤중처럼 조용해졌다.

주씨 저택의 마당 안, 마차들이 뿌연 먼지를 흩날리면서 차례로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주복이 다급하게 마차 한 대를 쫓아갔다.

“아버지! 지금이 떠날 때입니까?”

주복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치자, 주 노야가 휘장을 들어 올리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그럼 이 판국에도 떠나지 말란 말이냐! 여기 더 남아 있다가는 우리가 관에 들어갈 판이야!”

주 노야는 주복에게 삿대질을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놈아! 네가 우리를 따라 섬주로 가지 않겠다면 네 맘대로 하거라. 이미 종 장군에게 당장 너를 데리고 서북으로 돌아가라고 얘기해 뒀으니.”

“아버지!”

주복이 원망 섞인 눈빛으로 소리쳤다.

“우리는 떠난다지만, 우리 집이나 여기 있는 집기 같은 건 마음대로 써도 되니까, 교교더러 다 가지라고 해라. 무슨 일이 있으면 섬주로 서신을 보내면 되고, 섬주로 오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된다고 전해. 아, 절대 우리를 남으로 여기지 말라고 전해 다오.”

주 노야는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하고는, 주복이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마부를 재촉하며 급히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주복은 하는 수 없이 주 노야를 성문까지 배웅해 주고, 주 노야 일행이 점점 더 멀어져 까만 점이 되어갈 때까지 바라보다 말을 돌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고 난 주복은 말에 채찍을 가하며 어디론가 내달렸다.

“저기 보게, 주 공자님이 또 오셨네.”

진(秦)씨 저택의 대문 앞. 한가롭게 수다를 떨고 있던 문지기들이 시위들을 불러오며 일사불란하게 경계 태세를 갖췄다.

“주 공자님!”

집사가 말에서 내려 활을 집어 든 주복을 향해 외쳤다.

“저희도 주 공자님께 예의를 차리고 싶지만, 진씨 가문의 대문 앞에서 무기를 보이셨으니 저희도 무기를 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복은 집사와 진씨 저택의 마당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당장이라도 자신에게 달려들 기세로 소매를 걷어붙인 문지기와 시종들을 훑어본 주복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주 공자님?”

집사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주복은 웃으며 손으로 자신의 옷자락 한쪽을 찢어내더니, 번개처럼 빠른 속도로 활시위를 당기며 화살을 쏘아냈다.

문지기와 시종들이 흠칫 놀라던 찰나, 텅 소리와 함께 문짝에 화살이 꽂혔다. 화살촉에는 조금 전 주복이 찢어낸 옷자락이 걸려 있었다.

주복이 웃음기를 거두고 진씨 저택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 머리를 틀고 자리를 떴다. 진씨 저택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알겠다. 물러가거라.”

진호가 손을 휘휘 젓자, 사환이 고개를 숙이고 서둘러 물러났다. 자신의 앞에 놓인 찢어진 옷자락과 화살을 바라보던 진호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식이 언제 할포단의(割袍斷義: 절교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옷을 찢어서 내비침)까지 배웠담.”

진호는 화살과 옷자락을 집어 들고 자신의 거처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한 걸음 한 걸음 몹시 더디게 걸었다. 주복이 남기고 간 물건을 세상에서 가장 진귀한 보물을 대하듯 양손으로 조심스럽게 떠받들고서.

같은 시각 주복은 정씨 저택의 대문을 넘어서고 있었다.

마당에는 장례를 치를 때 쓰는 물품들이 갖춰졌고, 범강림과 황씨는 각자 분주한 모습이었다.

주복을 발견한 황씨는 잠시 주저하다가 여종을 시켜 삼베를 가져오게 했다. 주복은 잠자코 삼베를 받고 별다른 인사치레 없이 정교랑의 처소로 걸음을 옮겼다.

활짝 열린 대청 문 사이로 정교랑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옆에 앉은 반근은 정교랑의 손을 잡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천으로 한 번 싸매기라도 하지 그러셨어요. 상처가 이렇게나 깊은데.”

반근이 말했다.

아씨께서는 어제 덕승루를 떠나신 뒤로 밤새 집에 들어오시지 않으셨고, 집으로 돌아오시자마자 사공자님의 장례를 준비하느라 종일 바쁘셨어. 입관할 때는 몸도 못 가눌 정도로 우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씨의 손에 이렇게 큰 상처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네.

손바닥에서는 더 이상 피가 흐르지 않았지만, 보기 흉한 흉터가 정교랑의 손에 커다랗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천으로 싸 놓으면 낫는 게 더뎌.”

정교랑이 말했다.

“그렇지만 흉터가 생길 텐데요?”

반근이 울먹이면서 정교랑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괜찮아. 흉이 지면 지는 거지 뭐. 하나 더 늘어나는 것뿐인데.”

정교랑이 손을 거두었다.

그때, 내가 죽었을 때는 사방에서 날아온 화살이 내 온몸에 박혔어. 아마 내 마지막 모습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가시가 돋아 있는 모습이었겠지.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지금 웃는 건가?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문가로 다가갔다.

“큰 도련님께서 사공자님의 장례 준비를 마치셨어요. 아씨, 그 외에 또 분부하실 일이 있으세요?”

반근이 눈물을 훔치면서 물었다.

무원산 도련님들이 돌아가신 뒤로, 아씨께서 도련님들의 명예를 바로 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아씨의 노력으로 도련님들은 역사서에 이름이 올라갈 정도로 유명해지셨어. 아씨께서 비석에 새긴 천하제일 행서와 온 경성 사람들을 탄복시킨 무원산 술 덕에 누구든 행서나 술 이야기를 꺼내면, 모두가 자연스레 무원산 형제들의 이야기를 떠올리곤 하지.

하지만 사공자님은 기녀의 손에 죽었고, 주 낭자까지 옥에서 자결하면서 이번 일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었어. 경성에 떠도는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왜곡되었지.

아씨는 분명 사공자님께서 돌아가시게 된 이유를 밝히고, 사공자님의 명예를 되찾아 주시겠지.

“화장한 뒤에, 유골은 사람을 시켜 강주로 보내. 그리고 경성에는 의관총(衣冠塚: 소지품 옷가지 등을 묻은 무덤)을 하나 마련하고.”

정교랑이 말했다. 반근은 정교랑을 바라보면서 정교랑이 다른 말을 덧붙이기를 기다렸다.

“그게 다인가요?”

반근이 물었다.

“아, 비석에는 글씨를 새기지 마.”

정교랑이 무언가 생각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당초 도련님들의 비석을 세울 때도 처음엔 글씨가 없었어. 도련님들의 억울함을 풀어 드린 후에야 아씨께서 손수 비석에 글씨를 새기셨지. 그러니 이번에도, 아씨께서는 사공자님의 복수를 한 뒤에 비석에 글씨를 새기실 생각이신가 보네.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고 물러났다.

주복이 문 앞의 회랑 아래서 옷을 정리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하면 돼? 말만 해.”

주복이 단도직입적으로 입을 열었다.

진 공자님을 어떻게 해치울 거냐는 말인가?

반근이 발을 헛디디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누굴 해치우려는 겁니까?

반근의 눈앞에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면서 목소리를 낮추고 묻던 과거 진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때 누구를 해치울 거냐고 묻던 사람이, 이제는 해치워지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거야?

한여름 오후의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어오자, 회랑 아래에 달린 풍경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사실, 손 하나 없다 해도 별일 없었을 텐데.”

정교랑이 주복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주복이 멈칫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정 대노야가 강주로 돌아갔을 때, 정사낭은 손목을 치료하기 위해서 강주로 돌아가지 않았지. 설마 지금, 그때 정사낭을 경성에 붙잡아 뒀으면 안 됐다고 후회하는 건가?

주복이 갑자기 허리를 곧추세웠다.

“별일이 없긴 뭐가 없어! 멀쩡히 나을 수 있는 손을 왜 잃어야 해? 내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오늘을 허투루 보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어?”

정교랑은 입꼬리만 살짝 올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약! 이 여인이 지금 만약을 생각하고 있잖아?

이 세상에 만약 같은 건 없어요!

이 여인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은 바로 이런 말이라고!

예전의 정교랑이라면 절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거야. 눈앞에 만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간식을 내어주면서 애들은 저리 가서 놀라는 투로 대했으니까.

그땐 그 어린아이 달래는 듯한 말과 행동이 아주 기분 나빴는데, 지금은 왜 그때의 정교랑이 이토록 그리운 거지?

정교랑, 차라리 그때처럼, 만약을 이야기하는 나를 귀찮다는 듯 내쫓아 버려. 난 네가 이렇게 후회하고 자책하는 거 죽어도 보고 싶지 않다고.

“정교랑.”

주복이 한쪽 무릎을 앞으로 꿇고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이를 악물고 단호하게 말했다.

“정사낭의 죽음은 너와 무관해.”

“무관하다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주복은 정교랑의 눈을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았다.

“그래. 네가 정사낭의 누이라서, 너한테 죽을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어서, 네가 그 자식의 목숨을 살려 놓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어. 전부 너와 관련된 건 사실이지만, 이 중 단 하나라도 네 의지로 선택할 수 있었던 게 있어? 네가 정사낭의 누이가 되기를 선택했어? 너는 너 자신이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었어?”

주복이 분이 풀리지 않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이리저리 서성였다.

“너는 피해자야. 우리는 피해자라고! 그런데 왜 네가 자책해야 하는 건데!

그놈들이 그런 수법까지 쓰는 걸 네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해서, 정사낭이 사람을 잘 믿는다고 해서, 그 죽음이 전부 네 탓이 되고 정사낭의 탓이 되는 거야? 너희는 원래 그렇게 남들의 계략에 걸려들어야 하고, 남들의 손에 죽어야 해? 누가 그렇게 정하기라도 했어?

세상에 그런 법이 어디 있냐고! 사람을 죽이고, 계략을 짠 놈들은 그 빌어먹을 놈들이야! 진호, 진씨 가문, 그리고 종친의 양자 입적을 반대하는, 우리가 얼굴도 모르는 놈들이라고!

그런데 어째서 너는 스스로를 탓하고 원망하는 거야? 네가 그렇게 자책하는 걸 알면, 우리의 원수들이 얼마나 기뻐하겠어?”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주복을 쳐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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