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권 - 129화 (129/160)

교랑의경 22권

-빌어먹을-

두 시위가 더는 달려들지 않고 새빨개진 눈으로 씩씩대며 왔던 방향을 향해 뛰어가자, 주복이 손을 거두고 자세를 바로 했다.

육선관의 도사들은 나무 뒤에 숨어서 고개만 빼꼼 내민 채 싸움 구경을 하고 있었다. 시위 두 명이 자리를 떠나자, 그제야 무리에게 등 떠밀려 나온 한 도사가 불안한 기색으로 주복에게 말을 걸었다.

“선인, 관, 관, 관내에서는 싸우시면 안 됩니다.”

도사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더듬었다.

“폐를 끼쳤습니다.”

주복이 공수의 예를 표했다.

도사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하나둘씩 나무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그들이 나무 뒤에서 나오자마자, 두 시위를 무자비하게 때리던 살벌한 사내가 한 손으로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내를 바닥에 내리꽂았다.

사내의 힘이 얼마나 셌는지, 바닥에 먼지가 일고, 땅이 미세하게 진동하기까지 했다.

또 싸우려나 봐, 또!

도사들이 악 소리를 내지르고는 다시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진십삼! 네가 어떻게!”

주복이 바닥에 엎어진 진호를 팔로 짓누른 채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네놈이 감히!”

목구멍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에, 주복은 힘겹게 같은 말만 되뇌었다. 이 짧은 말만으로도 숨이 턱 막히는 건 진호도 마찬가지였다. 바닥에 얼굴이 짓눌린 진호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난 아닐세. 난 아니야.”

바닥에 눌려있던 진호가 어금니를 꽉 물고 주복을 밀쳐냈다. 그러더니 몸을 일으키고 정교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종이를 보여 주십시오. 어서요! 거기에 뭐라고 쓰여 있는지!”

도대체 뭐라고 쓰여 있길래!

빌어먹을 놈! 그 빌어먹을 놈이!

주복은 그의 말을 듣자마자, 진호를 향해 주먹을 세게 휘두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교랑을 향해 걸어갔다.

정교랑은 여전히 얇은 종이를 손에 꼭 쥐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주복의 주먹을 맞아 몸을 일으키지 못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진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주복이 정교랑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챘다.

“낭자를 찾아오는 사람에게 아래 몇 마디를 그대로 말하시오. 만약 한 글자라도 틀렸다가는 정사낭의 시신을 보게 될 것이오.”

주복은 계속해서 종이에 쓰인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무슨 일이죠?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주복이 한 마디씩 끊어 읽고는 있는 힘껏 종이를 구겼다. 주복은 포효하다시피 소리를 내지르고, 바닥에 드러누워 있던 사내를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말해!”

주복이 고함쳤다. 종이를 들고 왔던 사내가 낄낄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요. 낭자는 여기서 여유롭게 연꽃 구경이나 마저 하면 됩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라는 건지요?”

사내의 말이 끝나자, 주복이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무거운 주먹에 코뼈가 휜 듯한 남자가 몸을 부들부들 떨며 피를 토했다.

진호가 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붙잡으며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정교랑에게 다가갔다. 정교랑이 몸을 돌려 진호를 쳐다보자, 진호의 걸음이 주춤했다.

“어디 있어요?”

정교랑이 물었다.

어디 있어요?

결국 내게 이 말을 묻는구나.

진호가 눈을 지그시 감고 한숨을 토했다. 그가 눈을 뜨려던 찰나, 주복의 주먹이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난 몰라!”

진호가 소리쳤다. 그가 몸을 비틀어 주복의 주먹을 피하고 주복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내가 모른다고 하면, 믿어주긴 할 거야?”

주복은 새빨갛게 충혈된 두 눈으로 진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진십삼, 너라면 믿을 수 있겠어?”

주복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하면서 진호의 멱살을 쥐었다.

“너라면 믿을 수 있냐고! 네가 언제부터 연꽃 구경을 다녔어? 단 한 번이라도 그런 적이 있긴 해?”

진호가 말없이 주복을 쳐다보았다. 주복 또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진호의 멱살을 잡고 있던 주복의 손이 점점 더 세게 떨려왔고,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도 경련이 일어난 것처럼 떨리고 있었다.

“진십삼! 말해!”

주복이 애원하듯이 소리쳤다.

“내가 진작 알았다면, 정사낭을 납치하기까지 한 걸 알았다면, 난 절대로…….”

천천히 고개를 젓던 진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주복의 팔을 잡고 있던 손도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주육, 자네는 알잖나. 그랬다면, 난 절대로…….”

납치하기까지 했더라면? 지금 ‘까지’라고 한 거야?

주복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포효하고 진호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주복의 주먹을 그대로 받아낸 진호가 허리를 숙이며 뒤로 몇 걸음 밀려났다. 곧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주복이 곧바로 진호에게 달려들어서 그를 붙잡고 연달아 소리쳤다.

“말해! 정사낭은 지금 어디에 있어?”

어디에 있냐고?

진호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고십사가 나에게 정 낭자를 데리고 나가 차를 마시러 가라고 하긴 했지만, 나 진호는 절대 고씨 가문이 시키는 대로 한 게 아니었어. 내가 정 낭자에게 함께 가자고 한 건, 누가 나에게 시켜서 그랬던 게 아니야. 내가 정말로 정 낭자와 함께 가고 싶었기 때문에 청한 것이라고!

바로 내가 원했기 때문에 정 낭자에게 청한 거라고!

내가 고십사의 말 때문에 차를 마시자고 한 줄 알아? 나는 정 낭자를 데리고 꽃놀이를 하러 온 거야. 4월의 그때처럼 말이야!

그나저나 고씨 가문이 정말 진안 군왕에게 손을 쓸 줄이야.

어떻게 한 거지? 암살?

아니야, 그럴 리는 없어. 일이 이렇게 시끄러워질 정도라면, 고씨 가문도 죽음을 자초하는 것일 테니. 아니, 아니지.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야.

정사낭, 정사낭!

정사낭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잘 들으시게. 오늘 오찬 이후에 정 낭자를 덕승루로 불러서 둘이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있게나.

진호가 고개를 홱 들었다.

“덕승루!”

주복이 진호를 밀쳐내고 냅다 밖으로 뛰어갔다.

주복은 밖으로 나가는 길에, 비틀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사내에게 또 주먹을 휘둘렀다. 바닥에 고꾸라진 사내는 더 이상 몸을 꿈틀거리지도 못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정교랑도 주복의 뒤를 따라 뛰기 시작했다.

“교랑.”

진호가 몸을 일으키면서 외쳤다. 하지만 정교랑은 진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처럼, 잠깐의 멈칫거림도 없이 진호의 시야에서 점점 더 멀어져갔다.

“교랑!”

진호가 다시 한번 쉰 목소리로 외치면서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한편, 정교랑을 따라 뛰던 시녀는 갑자기 생각난 게 있는지 제자리로 돌아와 무언가를 찾는 듯 바닥을 더듬거렸다.

“언니, 언니.”

시녀를 따라 구르다시피 뛰어온 반근이 울부짖었다.

“언니, 나 마차 있어, 저기 마차 있어.”

시녀는 주복이 구겨놓은 종이를 찾아내 품에 넣고, 반근을 부축하며 다시 밖으로 뛰어갔다.

말에 올라탄 주복이 미친 듯이 채찍질을 하며 박차를 가하자, 뒤를 따라오던 시종들과의 거리가 점점 더 벌어졌다. 그런데 주복의 뒤에서 들려오던 말굽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나 싶더니, 아예 주복을 앞서갈 기세로 속도를 냈다.

내 수하 중에 나를 능가할 기마 기술을 가진 놈이 있었던가?

주복이 곁눈질로 뒤를 쳐다보았다. 말에 탄 사람을 본 주복은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말을 탄 정교랑이 주복의 옆을 스치며 그를 추월해 갔다.

저 여인이 말도 탈 줄 알았어? 게다가 꽤 잘 타네.

그런데, 치마를 입고 어떻게 말을 모는 거지?

자신을 앞서가는 정교랑을 쳐다보며, 주복은 하마터면 놀라서 말에서 떨어질 뻔했다.

측기(側騎: 두 발을 한쪽으로 내리고 몸을 옆으로 튼 채 말을 타는 기술)!

“죽고 싶어서 그래? 멈춰!”

놀란 주복이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말에 박차를 가하면서 소리쳤다. 하지만 아무리 박차를 가해도 정교랑을 쉽게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주복은 화가 났던 것도 잊은 채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여인은 항상 마차만 타지 않았나? 기마는 언제 배운 거지? 그냥 탈 줄 아는 정도가 아니라, 아주 수준급의 기마를 하잖아!

측기라니! 군에 있는 고급 척후병들도 저렇게 빠르게 안정적으로 달리기는 힘든데!

저 여인이 활을 쏠 줄 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어느 정도 실력을 갖췄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만, 기마까지 할 줄은 몰랐어. 심지어 저렇게 잘 탈 줄은 더더욱 몰랐다고!

저 여인이 우리에게 아직 보여주지 않은 기술은, 또 뭘까?

주복이 머리를 흔들며 잡생각을 떨치고, 서둘러 기합을 넣으면서 질주했다.

저녁이 되었다. 뜨거웠던 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벌써 거리로 나와 저잣거리를 메우고 있었다. 덕승루는 예전만큼 사람이 많지 않았지만, 여전히 등불을 화려하게 밝히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소리가 덕승루 밖으로 새어 나왔다.

시끌벅적하던 덕승루는 갑작스럽게 안으로 들이닥친 사람들 때문에 더욱 소란해졌다.

“찾아라!”

주복이 소리쳤다. 시종들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대청 안에 있던 점원들이 놀라서 소리쳤다.

“왜요! 무슨 일이에요!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점원들이 소리치자, 누군가가 그들을 향해 돌진해왔다.

여인이잖아?

점원들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무언가를 물어보려던 찰나, 여인은 손을 뻗어 그들을 양쪽으로 밀쳐냈다. 주복이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손목을 어루만졌다.

좀 전에 저 여인이 내 손아귀를 벗어날 때 느꼈는데, 여자 치곤 힘도 엄청나게 세. 아마도 매일 활쏘기를 했던 탓이겠지? 그나저나, 저 여인이 앞장서게 놔둘 수는 없지.

주복이 발걸음을 재촉하고는 길을 막는 점원들을 휙휙 밀치면서 정교랑에게 길을 터줬다.

“어머나, 이게 누구람. 정 낭자 아니에요?”

소식을 듣고 대청으로 뛰어나온 기생 어미 막씨가 정교랑을 반갑게 맞이했다.

오만 관도 서슴없이 뿌리는 귀한 정 낭자잖아? 그때 일로 내가 아주 단단히 기억해 놨지.

“내 오라버니는 어디에 있죠?”

정교랑이 물었다. 막씨가 아첨의 웃음을 보이면서 서둘러 위층을 가리켰다.

“당연히 아형이랑 같이 있죠. 온 지 한참 됐어요.”

정교랑은 막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를 지나쳐갔다. 막씨가 민망한 듯 입술을 삐쭉이고는 고개를 돌려 살갑게 말했다.

“낭자, 재밌게 놀다 가요.”

조금 이상하게 들리긴 해도, 할 말은 해야지.

한발 빠르게 위층으로 올라간 주복은 복도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여유롭게 웃고 떠들고 있는 시종들을 발견했다. 그들은 원래 주씨 가문의 시종들이었지만, 지금은 정씨 가문의 시종들이 된 터라 주복은 단번에 그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시종들도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주복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주복의 뒤로 걸어오는 정교랑이 보이자, 시종들은 재빨리 자세를 고쳐 서서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아씨.”

뭔가 이상한데? 정말로 납치당한 거라면, 시종들이 이렇게 여유롭게 잡담이나 하고 있을 리가 없잖아. 이놈들이 정사낭을 납치한 놈들에게 굴복했을 리도 만무하고.

“정사낭은?”

주복이 물었다.

“사공자님은 방 안에 계십니다. 주 낭자도 같이 있고요.”

시종이 별실을 가리키면서 대답했다.

방 안에서 칠현금 소리가 새어 나왔다.

사기당한 건가? 진십삼 그놈이 이런 수작을 잘 부리긴 하는데! 아니면, 정말로 약속을 지키고 사람을 놓아 준 건가?

어떻게 됐든 간에, 주복은 내내 허공에 떠 있던 심장이 드디어 제자리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금방이라도 다리가 풀릴 듯 후들거렸다.

주복이 다짜고짜 시종의 뺨을 후려쳤다.

“쓸모없는 놈! 누가 너희더러 정사낭을 따라 여길 오라고 했냐?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갑자기 맞게 된 시종은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반박할 엄두를 내지 못해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사죄했다.

지금이 기루를 들락거리면서 기녀나 끼고 놀 때야? 게다가 한가하게 칠현금 연주까지 듣고 앉아 있어?

“나는 누구 때문에 놀라 죽을 뻔했는데, 그 누구는 이렇게 여유롭게 놀고 계시다 이거지?”

주복이 투덜대면서 별실 문을 발로 걷어찼다. 주복의 과격한 발길질에 정교랑은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단번에 문짝이 나가떨어지고, 방 안에서 들려오던 칠현금 소리도 멈췄다.

“정사낭, 네가…….”

소리치던 주복은 말문이 막혀 말을 잇지 못했다. 주복의 뒤에 있던 정교랑이 앞으로 걸음을 내디디려 하자, 주복이 갑자기 몸을 홱 돌리고 정교랑을 품에 끌어안았다.

옆에 있던 시종들과 주복을 따라온 시종들이 모두 깜짝 놀랐다.

별실 안의 광경이 너무 자극적이어서, 혈기왕성한 주 공자님이 못 견디고 저러시는 건가?

아무리 못 견디겠다고 하더라도, 여인에게 저렇게 결례를 보이면 안 되지! 게다가 정혼자가 있는 여인에게 저런 결례를 범하면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을 텐데!

시종들이 경악한 사이, 정교랑이 주복을 밀쳤다.

“보지 마.”

주복이 더욱 세게 정교랑을 끌어안고 갈라진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내 말 들어. 교랑, 들어가지 마. 들어가지 말고, 보지도 마.”

주복의 말을 들은 정교랑은 몸이 굳어 버렸다.

아방, 보지 마! 가지 마! 아방! 가면 안 돼! 보지 마!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런 말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아. 내가 여길 온 건 그런 말을 듣기 위해서 온 게 아니라고!

“비켜!”

정교랑이 소리치면서 두 팔로 주복을 밀쳤다. 주복은 그대로 뒷걸음질 치면서 방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들이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시종들의 안색도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사공자님!”

시종들이 외치면서 별실 안으로 쳐들어갔다.

방 안에는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들 정도의 낯뜨거운 장면 대신, 선홍빛으로 붉게 물든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별실의 바닥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주 낭자는 탁자 위에 엎드려 있었고, 정사낭의 사환은 벽에 기댄 채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정사낭은…….

푸슉 소리와 함께, 두 손이 피로 젖어 있는 춘령이 정사낭의 가슴팍에서 비수를 뽑아냈다.

“이거 봐요. 일부러 몇 번 더 찔렀으니까, 확실하게 죽었을 거예요. 아주 확실하게 말이에요. 절대로 당신이 살려낼 수 없을 정도로요.”

춘령이 해맑게 웃으면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당신한테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능력이 있다는 걸 알아서 내가 특별히 신경을 좀 썼죠.”

주복과 시종이 춘령을 향해 달려들기 전에, 정교랑이 한발 먼저 춘령 앞으로 다가갔다. 춘령이 돌연 비수를 들고 정교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정교랑이 비수 날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교랑!”

주복이 소리를 지르며 춘령을 때리려고 손을 들었다.

“네가 한 짓이니?”

정교랑이 주복을 제지하고 춘령을 뚫어질 듯이 쳐다보면서 물었다. 춘령은 정교랑의 손에서 비수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정교랑이 칼날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는지, 손에서 새빨간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데도 비수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응, 내가 했어.”

춘령이 흥분한 얼굴로 턱을 치켜들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한 줄 알아?”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네가 한 짓인지 아닌지일 뿐이야. 네가 왜 이런 짓을 했는지는 상관없어.”

상관없다고? 어떻게 상관이 없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춘령이 크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목에 무언가 차가운 것이 닿는 느낌이 들더니, 서걱 소리와 함께 시선이 반대편으로 돌려졌다.

어? 왜 그 여인이 보이지 않지? 왜 창문이 보이는 거야? 내가 언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지?

춘령의 뇌리에 이런 생각들이 스칠 때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게 느껴졌다.

이럴 리가 없어! 이럴 리가 없다고! 난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직 말하지 못했다고!

저 여인에게 아직 말하지 못했어,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네가 나와 내 동생을 내쫓아서, 네가 너무도 악독하고 잔인한 여인이라 나와 내 동생에게 살길조차 남겨 주지 않아서, 네가 내 동생을 버려진 사찰에서 쓸쓸히 죽게 만들었다고!

그래서 드디어 오늘, 아끼는 사람을 눈앞에서 잃는 기분이 어떤 건지 너도 알게 해 준 거라고!

다 너 때문이야!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이라고!

아직 말하지 못했어, 아직 말하지 못했다고! 저 여인은 아무것도 모른단 말이야!

정사낭을 곤경에 빠트린 사람도, 정사낭을 죽인 사람도 나야. 너희는 모르겠지만, 다들 내 손에 놀아난 거라고!

마침내 복수했을 때, 원수가 자책하며 땅을 치고 울부짖는 모습을 내 눈으로 봐야 하는데,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알려 줘야 하는데, 다 네년이 저질렀던 짓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걸 알려 줘야 하는데!

너 때문이라는 걸 알려 주지 못한다면, 모든 게 다 헛수고가 되잖아! 그럼 이게 다 무슨 소용이냐고!

난 아직 죽으면 안 돼. 아직 말해 주지 못했어!

저 여인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잖아!

“나, 는…….”

꺽꺽 소리를 내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하려 했던 춘령은, 결국 찢어질 듯 두 눈을 부릅뜬 채 숨이 끊어졌다.

진호가 말에서 내려와 덕승루 안으로 뛰어 들어왔을 무렵, 덕승루 안에 있던 사람들은 전부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진호의 눈에 비친 덕승루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 그 자체였다.

“살인이야! 살인이야!”

인파에 휩쓸린 진호는 덕승루 밖으로 밀려날 뻔했지만, 시종들이 길을 터준 덕에 재빨리 위층으로 뛰어 올라갈 수 있었다.

기생 어미 막씨가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소리를 질러댔다.

“살인이야! 아이고, 살인이야!”

소리를 하도 지른 탓에 목이 쉬었는데도, 막씨는 쉴 새 없이 외쳤다.

주복은 전장에 나가 칼을 휘두르는 장수이니 두려울 게 없을 테고, 정 낭자도 규방에서 고이 자란 소녀가 아니니까 무서워하지는 않을 거야.

더군다나 저 사람들이 납치한 자는 바로 정사낭이니까.

무려, 정사낭.

고능준은 정 낭자를 협박하기 위해 정 이노야를 강주에서 데려와 대리시로 부임케 했지만, 그런 협박은 낭자에게 있어서 표면적으로나 압박으로 보일 뿐이지.

부모에게 효도하고 부모의 명에 따라야 한다지만, 그 여인에게 부모의 명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저 여인에게 부모란, 기껏해야 공경하게 대해야 하는 사람들, 또는 혼사처를 정해 주는 사람들에 불과할 텐데.

저 여인이 예의를 차리는 대상은 비단 부모만이 아니야. 옷깃만 스치고 지나가는 낯선 사람이라 해도, 언제나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단정한 태도로 대하니까.

더구나 혼사를 사소한 일로 여기는 여인이니, 혼사를 결정하는 부모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세상엔 예외가 있는 법. 저 여인이 예외로 여기는 상대가 있다면, 그게 바로 정사낭이다.

어리석고 줏대 없으며 비리비리한 서생에 불과한 정사낭이 바로 정 낭자를 협박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물론 진호는 그게 대체 무슨 이유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돕는 것으로 따지면 정사낭보다는 주육이 정교랑을 훨씬 많이 도왔고, 정사낭은 도움을 주기보다는 늘 골칫거리만 안겨 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정교랑은 그런 정사낭을 늘 다정하고 부드럽게 보듬어주었다.

다정하고 부드럽게 대한다?

의외로 단순한 이유였을지도 모르겠군. 상대방이 자신을 대하는 그대로 상대방을 대하는 마음.

낭자에게 경외감을 느끼거나, 낭자를 신뢰하거나, 낭자를 도와주려 하거나, 낭자를 정말로 좋아하거나 하는, 정 낭자를 향한 온갖 감정들 속에서 유일하게 부족한 것이 딱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순수하고 선량한 마음씨로 저 여인을 생각해 주는 것이리라.

우리 누이는요?

우리 누이를 괴롭히지 마세요.

우리 누이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데요.

참으로 독한 수를 두었구나!

진호가 주먹으로 기둥을 세게 쳤다.

죽어 마땅해!

감히 그런 정사낭을 납치한 놈들이라면 죽어도 마땅하지! 아직 괜찮을 거야. 아직은 구할 수 있을 거야!

문가로 다가가 별실 안의 광경을 본 진호는 온몸이 얼음장처럼 굳어 버렸다.

아, 안 돼…….

안 돼.

안 돼!

“공자님, 미혼약을 탄 차입니다!”

주 낭자와 사환의 옆에 있던 시종이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물을 끼얹어 깨워라.”

주복이 말했다.

방구석에 놓여 있던 얼음 대야 안의 얼음은 전부 녹아 물이 되어 있었다. 시종들이 대야를 들고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찬물을 끼얹었다.

“어우, 차가워!”

화들짝 놀라 깨어난 사환은 머리가 어질어질한지 오만상을 찌푸리며 이마를 쳤다. 머리카락이 축축하게 젖은 사환이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 났어요?”

시종이 사환의 뺨을 세게 쳤다.

“지금 그걸 우리한테 묻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시종이 사환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우며 어금니를 꽉 깨물고 소리쳤다.

시종의 손에 붙들린 사환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서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사낭에게로 시선이 향한 사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쪽에!

“고, 고, 공, 공자님…….”

사환은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사환의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동시에, 주 낭자의 비명이 별실 안에 울려 퍼졌다.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주 낭자가 붉게 물든 자신의 치맛자락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피로 물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정사낭과 춘령, 그리고 정교랑을 차례로 쳐다보았다.

왜 사방이 전부 피로 물들어 있는 거지? 피가 왜 이렇게 흥건한 거야! 그리고 저 여인의 손에도 피가 묻어 있어!

세상에, 세상에!

“그건 너한테 물어야지.”

주복이 이를 부득 갈고는 눈을 부라리면서 주 낭자를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누구야! 누가 네게 정사낭을 죽이라고 시켰냐고!”

정사낭을 죽이라고 시켰다고?

겁에 질린 주 낭자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연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아무도 그렇게 말한 적 없어요. 정사낭을 죽이려 하는 자는 없었다고요!

“이 돈은 네가 가지고 있거라.”

“아닙니다. 소인은 관인의 돈을 받을 수 없어요.”

주 낭자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 돈을 가지고 있다가 정사낭에게 돌려줘. 그리고 너와 정사낭의 사이는, 이로써 깨끗하게 정리되는 거라고 전하고.”

그렇단 말이지?

주 낭자는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찾아온 남자를 쳐다보았다.

“네가 고 관인의 체면을 얼마나 깎았는지는 잘 알고 있겠지. 우리 관인의 체면을 어떻게든 되찾아야겠으니, 네가 먼저 정 공자와의 사이를 끝내. 그리고 칠월 칠석에 우리 관인께서 너를 연회에 초대할 예정이니, 그때는 정 공자가 아니라 우리 관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자식이 우리 관인 대신 웃음거리가 될 테니까.”

정말, 오로지 고 관인의 체면 때문이라고?

주 낭자가 자신의 앞에 놓인 비전 증서 몇 장을 내려다보았다.

뭐, 이것도 나쁘진 않아. 정 공자님은 애초에 이 일에 끼어들지 않아도 됐는데, 나 때문에 괜히 이 일에 휘말린 거니까.

나는 이미 진흙탕에 빠진 몸이야. 그러니까 지금이라도 내가 정 공자님을 이 진흙탕에서 구해내야 해.

그래. 고 관인이 나중에 내게 무슨 짓을 할진 모르겠지만, 우선 정 공자님과는 깔끔하게 정리하는 게 좋겠어.

그런데 이게 다 무슨 일이야? 대체 왜…….

“정 공자님, 정 공자님.”

주 낭자가 발버둥을 치면서 주복을 밀쳐냈다. 몸을 제대로 가누기 힘들었는지 주 낭자는 이리저리 부딪히다가 정사낭의 위로 엎어졌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던 중 옆에 누워 있던 춘령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가 괴상할 정도로 꺾인 춘령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주 낭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세상에, 세상에!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제가 차를, 저는 딱 한 잔만 마셨는데,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요! 공자님! 공자님!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사환이 울부짖으면서 정사낭 곁으로 기어와 이마를 땅에 쾅쾅 찧었다.

시종이 주전자 한 개를 들고 오며 주복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전자 안에 약을 탄 차가 들어 있었습니다.”

“중간에 잠시 칠현금 연주가 멈추긴 했는데, 말소리는 계속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고 계시나 보다 했죠. 그 뒤로 또 칠현금 연주가 들려오기에 저희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시종들이 이를 악물고 말하다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울먹였다.

그 뒤로 칠현금 연주가 띄엄띄엄 들리긴 했지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시종들이 이마에 피가 날 정도로 바닥에 머리를 찧으면서 울먹였다.

참으로 독하구나. 참으로 독하구나!

“누가 시킨 거냐고!”

주복이 바닥에 엎어져 있던 주 낭자를 들어 올리고 다시 소리쳤다.

“저는 몰라요.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어떻게 이럴 수가.”

주 낭자가 눈물을 흘리면서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주복이 주 낭자의 뺨을 세게 후려치고 윽박질렀다.

“말하라니까.”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시종들에게 명령했다.

“여기 덕승루에 있는 사람 중, 단 한 명도 놓치지 마라!”

그때 넋을 놓은 채 문가에 서 있던 진호가 주복의 시야에 들어왔다.

진호?

진호!

주복이 주 낭자를 내팽개치고 진호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너냐! 너라면, 내 손으로 직접 죽여 주마!”

주복이 진호를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다. 진호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주복이 보이지도 않는지,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그 안에 앉아 있는 정교랑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정교랑은 이 소란스러움이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다는 듯 미동 하나 없이 앉아 있었다.

그놈들은, 저 여인의 마음을 납치한 것도 모자라, 저 여인의 마음을 죽여 버렸어.

교랑, 교랑…….

“공자님.”

누군가가 진호를 뒤로 잡아끌고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교랑을 바라보던 진호의 시야가 가려지고, 진호의 귓가에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둔탁한 주먹질 소리, 그리고 거친 바람 소리처럼 들리는 옷소매 휘날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 공자님, 정말로 저희 공자님은 아닙니다!”

진호의 앞을 가로막은 시종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것은 시종의 고통스러운 신음뿐이었다.

앞이 가려졌어. 가려져서 정 낭자가 안 보이잖아!

“교랑! 교랑, 내 말 좀 들어 봐요.”

진호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며 자신을 붙잡고 있던 시종들의 손을 떨쳐내고 별실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교랑, 내 말 좀 들어 봐요. 제발, 제발 내 말 좀 들어줘요.

“죽어 버려!”

주복이 있는 힘껏 발길질을 날렸다.

진씨 가문의 시종들이 재빨리 진호를 보호하며 그를 에워쌌지만, 주복의 발길질에 뒤로 나동그라지면서 진호도 다시 별실 밖으로 밀려났다.

여기에 더 남아 있다가는, 주복이 정말로 진호를 죽일 것만 같았다. 진호의 수하가 또다시 달려 들어가려는 진호를 붙잡고 소리쳤다.

“공자님, 어서 가셔야 합니다!”

간다고?

지금 가 버리면 어떡해. 난 정 낭자를 저대로 두고 갈 수 없어.

이대로 갈 순 없다고!

진호는 발버둥을 치면서 수하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우르르 몰려든 시종들이 진호를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진십삼!”

주복이 포효하자, 진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정교랑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진호가 멍한 얼굴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눈이 새빨갛게 충혈된 주복이 자신에게 들러붙은 진호의 시종들을 떼어내려고 애쓰며 주먹을 휘둘렀다.

“진십삼!”

진십삼.

“공자님, 정씨 가문 사람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에요. 지금은 무슨 말을 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겁니다. 일단 지금은 자리를 피하시고,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세요.”

수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진호는 점점 더 멀어지는 주복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나중은 없어. 나중은 없다고.

이제 더는 없어.

정교랑이 더는 피가 돌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 버린 정사낭이 가슴팍을 매만졌다.

“아씨, 아씨.”

“사공자님, 사공자님.”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울부짖는 소리.

여기저기서 울부짖는 소리와 매서운 불길, 그리고 새까만 연기.

내가 늦었어요.

동산 오라버니, 내가 늦었어요.

“아방, 그만 봐! 거기 내버려 두고 어서 이리 와!”

어떻게 내버려 두라는 거예요, 동산 오라버니잖아요. 이건 동산 오라버니잖아요.

“아방! 소용없어! 어서 서둘러! 그만하라고!”

소용없어. 다 소용없어.

동산 오라버니, 내게 이렇게 많은 걸 가르쳐 줬지만, 다 소용없었어요.

다 소용없다고요.

정교랑이 손을 뻗어 칼로 난도질당한 옷자락을 찢어냈다.

“어서 실과 바늘을 가져와. 실이랑, 바늘을 가져와. 내가, 내가 꿰맬 수 있어. 내가 봉합할 수 있어.”

정교랑이 울면서 중얼거렸다.

“교랑, 교랑!”

황급히 정교랑에게 돌아온 주복이 정신을 차리라며 정교랑의 어깨를 잡고 세게 흔들었다.

“손 놔, 어서 이 손 놓으라고. 소용없어. 정사낭은 이미 죽었어! 어서 내려놔, 네 손에도 상처가 났다고!”

“소용없다고요?”

정교랑이 고개를 들고 주복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정교랑의 막연한 표정과 정신없는 모습에, 주복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곧이어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교랑.”

주복이 애써 눈물을 참으며 정교랑의 어깨를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슬퍼하…….”

슬퍼하지 말라고?

에라이! 이보다 더 쓸모없는 말이 어딨어! 이 상황에 슬퍼하지 않을 수가 있나!

내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여기서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어!

주복은 고개를 치켜들고 슬픔을 토해내는 듯 포효하고는 정교랑을 품에 안았다.

소용없어.

주복의 품에 안긴 정교랑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차피 다 죽었잖아. 삼백 년 후나, 지금이나, 다 소용없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사공자님이 왜 돌아가신 거예요?”

시녀와 반근이 울면서 물었다.

왜냐고? 나 때문이겠지. 내가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겠지.

품에 안겨 있던 정교랑이 갑자기 버둥거리자 주복이 손에 힘을 풀었다. 정교랑은 주복을 확 밀쳐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교랑!”

주복이 소리치면서 재빨리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설마 이상한 생각 하는 건 아니겠지?

“아씨!”

시녀와 반근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가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이 빠른 속도로 덕승루의 층계를 내려와 대청을 가로지르며 달려갔다. 수수한 치맛자락에 묻은 붉은 핏자국이 괴이한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마침 소식을 들은 관부의 관졸들이 덕승루에 도착했다. 그들은 피가 덕지덕지 묻은 정교랑이 치맛자락을 휘날리면서 뛰어가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주복이 문밖으로 쫓아 나왔을 무렵, 정교랑은 벌써 말을 타고 석양 속으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공자님, 여긴 어떡하죠?”

시종들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탄 주복에게 물었다.

관부에서 사람이 나왔으니, 조사할 만한 사람들을 모조리 데려가 사건의 진상을 밝히겠지. 만에 하나 누군가가 거짓말을 하거나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면…….

주복이 관졸들을 훑어보았다.

“차라리 잘됐다. 안 그래도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모르던 차였는데.”

주복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하고는 서둘러 채찍을 휘둘렀다.

거리에 어렴풋이 보이던 정교랑의 뒷모습이 저물어가는 노을 속으로 사라졌다.

그들은 내 앞을 막으려고 하지만, 절대로 그들 뜻대로 되지는 않을 거야.

그럼 더 강해져야죠. 아직은 결론이 난 게 아니잖아요. 아직 운명에 순응할 때가 되지 않은 거죠.

아직 기회가 있는 건가요? 아니라면 내가 강해진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죠? 이젠 그들이 없는데.

낭자가 있잖아요.

그래. 아직 내가 살아 있잖아. 그러니까 아직 끝난 게 아니야. 끝난 게 아니라고!

누군가가 대청 안에 서서 이리저리 서성이며, 바구니에 있던 약을 들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이 태의!”

접시를 들고 있던 내시가 참다못해 소리쳤다.

“도대체 약을 어떻게 처방해야 하냐고요!”

이 태의가 떨리는 손으로 앞에 놓인 약을 한 줌 쥐며 중얼거렸다.

“내가 어떻게 알겠나.”

“이 태의!”

내시가 답답해하며 발을 굴렀다.

“나는 못 고친다고 했잖나. 하지만 전하께서는 꼭 나으실 걸세.”

이 태의가 자신 앞에 놓인 각양각색의 약 바구니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내시가 눈썹을 치켜뜨며 소리쳤다.

“그럼 어서 고쳐야죠!”

“내가 못 고친다고 하면, 정 낭자가 고칠 수 있어.”

이 태의는 그 말만 남긴 채 몸을 돌려 냅다 밖으로 뛰쳐나갔다.

“내가 다시 정 낭자를 모셔 오겠네!”

부아가 치민 내시는 이 태의의 옷을 확 붙잡았다. 내시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밖에서 다른 내시가 뛰어 들어왔다.

“전하께서 또 피를 토하셨습니다.”

또 피를 토하셨다고?

이 태의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점점 서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또 구토를 하셨어. 이대로 밤이 될 때까지 상태가 나아지지 않는다면 더 이상 토하기도 힘드실 거야. 구하는 것도 불가능해질 테고.

“이 태의,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는 걸 이 태의는 왜 못 고친단 겁니까? 정 낭자가 고칠 수 있다면, 분명히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까! 이 태의, 한평생을 의원으로 살았는데 고작 그 한마디 때문에, 그 여인 하나 때문에, 스스로 자신을 업신여겨서야 쓰겠소이까?”

내시가 이 태의의 멱살을 쥐고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내가 나를 업신여기는 게 아닐세. 내가 나를 과대평가한다 해도 감당하지 못할 일이라고.”

이 태의가 쓴웃음을 지었다. 내시도 결국 힘이 빠진 듯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 낭자를 모셔 오기에는 이미 늦었습니다. 이제 전하께는 오직 이 태의뿐이에요.”

전하께는, 오직 나뿐이다.

“이 태의가 고칠 수 없다 해도, 이대로 전하께서 돌아가시는 걸 속수무책으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 알려 드려야죠! 우리가 전하께서 죽어가는 것을 그저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고, 전하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 있다고!”

그래. 죽기 살기로 한다는 말은, 이럴 때 나온 거겠지.

이 태의는 밖을 한번 힐끔 내다보고는 몸을 홱 돌리고 약재들을 접시 위에 주섬주섬 챙겨 담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달여 목욕통에 넣게. 이건 전하께서 드실 수 있는 탕약으로 달이고.”

이 태의의 말대로 착착 준비되자, 이 태의는 진안 군왕이 누워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가에 다다랐을 때쯤, 한 막료가 이 태의를 붙잡았다.

막료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 태의를 바라보면서 무언가를 묻고 싶은 눈치로 머뭇거렸다. 막료의 의중을 알아차린 이 태의가 느릿느릿 말했다.

“해가 지고도 전하께서 더는 토하지 않는다면 성공한 것이오. 하지만 계속해서 토하신다면…….”

이 태의가 말끝을 흐리자, 막료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이 태의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 태의는 잠자코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밖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참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지면…….

“사부님, 여기 금침이요.”

방 안에 있던 아이가 상자에서 금침을 꺼내왔다. 다양한 길이의 금침들이 등불에 비쳐 쨍하게 빛났다.

이 태의는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진안 군왕을 바라보았다. 작은 욕실 안에 뜨거운 김이 자욱하게 꼈는데도 진안 군왕의 검푸른 피부는 선명하게 보였다.

경맥을 따라 독기를 한 줄씩 밀어내는 방법으로.

이 태의는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려 손목을 두어 번 털었다.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침술이지만, 본 적은 있어.

본 적이 있어!

정 낭자,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하오?

어둡고 음침한 분위기가 걷힌 방 안,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흐릿한 빛이 무릎을 꿇고 앉은 여인의 얼굴을 비췄다.

여인이 고개를 돌리고 이 태의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봐도, 배울 수 없거든요.”

세상에 배울 수 없는 게 어디 있다고! 배울 배짱이 있는지가 중요하지. 더는 물러설 길이 없을 때, 배우고자 하는 배짱만 있으면 뭐든 가능해.

이 태의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해졌다. 그가 손끝으로 긴 금침 하나를 뽑아 들었다.

“사부님, 할 수 있으세요?”

아이가 이 태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해 봐야 아는 법이야.”

이 태의가 대답하고는 허리를 숙이고 침을 놓기 시작했다.

문밖에는 꽤 많은 사람이 서 있었다.

“떠나야 할 사람들은 지금 짐 정리를 하고 떠나시오.”

한 막료가 대뜸 입을 열자, 모두가 막료를 쳐다보았다.

“고(顧) 선생, 지금 저희더러 떠나라는 겁니까? 지금 이럴 때, 전하를 내버려 두고 가라는 말씀이세요?”

까무잡잡한 사내가 갈라진 목소리로 호통쳤다.

“그대들이 죽기를 무서워하니 떠나라는 소리가 아니오. 그대들이 살아 있어야 훗날 전하의 원수를 갚을 수 있지 않겠소. 먼저들 가서 우리 쪽 사람들이 잘 뭉칠 수 있도록, 마음을 다잡을 수 있도록 다독이고 있으시오.”

고 선생이 진지하게 말하자, 한 사내가 처량한 미소를 보였다.

“전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저희가 뭉쳐 봐야 얼마나 가겠습니까.”

나무가 쓰러지면 원숭이도 흩어진다는 말이 괜히 있겠나. 예로부터 지금까지,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었다고?

“뭉칠 수 있을 때까지 뭉치는 거지. 일 년이 됐든, 이 년이 됐든, 복수는 할 수 있을 때까지 하는 거요.”

고 선생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선생들, 아무래도 다들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내시가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내시를 쳐다보았다.

“우리 같이 전하를 모시는 아랫것은, 전하께서 돌아가신다면 필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시는 소매 안에 손을 숨긴 채 담담하게 말을 이어갔다.

“선생들께서는 장차 큰일을 하실 분들인데, 이대로 목숨을 잃게 된다면 너무 아깝지 않겠습니까? 선생들의 능력은 언젠가 나라를 위해, 백성들을 위해 쓸 날이 올 겁니다. 나라를 위해 힘쓰고, 백성들의 고단함을 덜어 줄 수 있다면, 그게 설령 경왕을 돕는 일이라 해도 군왕 전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고마워하실 겁니다.

지금 떠나신다면 살길이 있겠지요. 벌써 밖에 진을 치고 있는 자들이 있다고 해도, 필사적으로 뚫고 나가실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더 지체하다가, 전하께서…….”

내시가 머뭇거리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붉은 노을에 물든 구름이 바람을 따라 점점 더 멀어져갔다.

“그때는, 더 이상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내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침은 다 놓았습니다. 이제 전하를 방으로 옮겨 주세요.”

아이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하늘 끝에 걸려 있던 노을마저 사라지고, 방 안에 등불이 밝혀졌다. 침상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그림자가 바닥에 일렁였다.

“전하, 전하?”

모두의 시선이 진안 군왕에게 집중되었다. 내시가 무릎을 꿇은 채 작은 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그러나 침상 위에 누운 진안 군왕에게서는 작은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 태의에게 옮겨 갔다.

“전하의 안색이 아직도 검푸른 색입니다. 도대체…….”

누군가가 이를 악물고 조용히 읊조렸다. 이 태의는 굳은 얼굴로 입을 다문 채, 침상에 누운 군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때, 진안 군왕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또 구토를 하시려나 봅니다!”

여태껏 진안 군왕이 피를 토할 때마다 몸을 떨었던 터라,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황급하게 소리쳤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또 피를 토하시게 된다면, 그건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뜻인데.

“아닙니다!”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타구를 받치고 있던 내시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닙니다! 전하께서 피를 토하시지 않았어요!”

피를 토하시지 않았다고?

사람들이 침상 근처로 우르르 몰려와 진안 군왕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몸을 떨던 진안 군왕이 금세 진정된 모습으로 숨을 고르게 쉬었다. 군왕의 입가에 흐르는 것은 침이지, 조금 전까지 토해내던 검붉은 색 피가 아니었다.

“이 태의! 지금 이건…….”

사람들이 일제히 기대에 찬 눈빛으로 이 태의를 쳐다보았다. 내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자, 이 태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진맥했다.

“드디어 괜찮아지셨습니다. 또 한 번 염라대왕에게서 전하를 끌어왔어요.”

이 태의가 허리를 곧추세우고 한숨을 토해냈다. 모두가 뛸 듯이 기뻐하며 무언가를 더 물어보려던 찰나, 이 태의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쓰러졌다.

방 안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 태의가 너무 기뻐서 혼절했나 보오.”

“아니에요. 사부님은 힘들어서 쓰러지신 거예요.”

“어서 다른 태의를 불러 이 태의의 상태를 살피게 하시오.”

“이제 궁에 서신을 써야겠군. 이제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거짓말로 아무 일 없는 척 꾸며댈지 궁금하군.”

“그래도 내일 보내는 게 어떻겠소?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전하께서?”

“그게 아니라, 만에 하나 그놈들이 기어코 여기까지 쳐들어와 전하의 목숨을 끊으려고 하면 어떡하오? 여기 있는 사람으로 그들을 막는 건 턱도 없잖소.”

사람들이 화기애애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누던 그때, 밖에서 누군가가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선생, 정 낭자가 왔습니다.”

문이 쾅 닫히자, 정교랑이 주춤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문 앞을 밝히는 등불이 켜져 있지 않은 탓에, 정교랑은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에 홀로 서 있었다.

정교랑이 다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지 마시오!”

누군가가 문 너머에서 소리쳤다.

“청을 받고 왔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문 너머에 있던 사내가 냉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정 낭자, 이제 와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이미 거절하셨던 것 아닌지요?”

사내가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정교랑이 사내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우선 상태부터 본 다음에 다시 얘기하죠.”

정교랑이 문 안으로 들어서려 발을 뗐을 때였다.

동시에 차락 소리가 들리면서, 검 네다섯 자루가 일제히 정교랑을 향해 겨눠졌다.

“정 낭자,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오늘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사내가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괜찮은가요?”

정교랑이 물었다.

“네. 전하께서는 이제 괜찮아지셨습니다.”

사내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졌구나.

정교랑이 아, 하고는 또 앞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래도 내가 한번 보는 게 좋겠어요.”

정교랑이 걸음을 떼자, 그녀를 향해 칼을 뽑은 시위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등롱에 비친 검들이 서늘한 빛을 내뿜었다.

“정 낭자, 볼 필요 없습니다.”

사내가 정교랑의 앞을 막아서고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낭자를 믿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온 사내를 본 방 안의 사람들이 서둘러 그를 맞이했다.

“정말로 정 낭자였소?”

사람들이 물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누군가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정 낭자에게 한번 봐 달라고 하는 건 어떻겠소? 전하께서 조금 더 빨리 나아지실 수도 있고.”

그러자 방 안에 서 있던 고 선생이 실소를 터트리며 비아냥대는 투로 말했다.

“전하께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나아지실까 봐, 부랴부랴 달려온 거라고 생각되진 않소? 시간이 이렇게 오래 지났는데도 전하의 부고가 들리지 않으니, 그게 걱정된 누군가가 정 낭자를 보낸 걸 수도 있잖소? 정 낭자가 전하 가까이에서 전하를 해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았소?”

사내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자, 고 선생이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하나둘씩 밝혀지는 등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신의로 명성을 떨치는 사람이긴 하나, 신뢰할 수 있는 우리 사람은 아니오. 이번에도 정 낭자를 믿으며 무턱대고 기다리기만 했다면, 전하께서는 벌써 목숨을 잃으셨을 거요. 그랬다면, 당연히 더 빨리 나아지실 거라는 기대도 하지 못했겠지.”

사람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방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오자, 다들 재빨리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새로 온 태의가 진안 군왕의 진맥을 하고 있었다. 진안 군왕은 의식을 찾은 듯 잠시 끙끙거리다가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전하께서는 어떠하시오?”

사람들이 긴장한 기색으로 물었다. 태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위험하시긴 하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믿을 만한 태의 두 명이 모두 진안 군왕이 고비를 넘겼다는 말을 하자, 사람들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우리에게도 믿을 만한 자들이 있소. 우리 사람을 믿어야지, 굳이 정 낭자까지 안으로 들일 필요는 없어.”

고 선생이 단호하게 말하자, 방 안의 사람들도 동의했다.

“하온데…….”

대문 앞에서 정교랑을 만났던 사내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하온데?”

고 선생이 물었다.

“하온데 정 낭자가 어딘지 좀 이상해 보였습니다.”

사내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이상하다고?

“이상하다고? 역시 수상하다 했어! 절대로 정 낭자를 여기로 들여서는 안 되오. 혹 억지로 들어오겠다고 한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야 하오.”

아니, 아니, 그런 이상함이 아니라, 정 낭자의 모습이…….

사내가 또 무언가 말을 하려던 찰나, 고 선생이 말을 이었다.

“다시는 전하께 착오가 생겨서는 안 될 것이오.”

하긴, 전하께 다시는 착오가 생겨서는 안 돼. 지금은 그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사내가 하려던 말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방을 나갔다. 침상을 지키는 태의 외에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방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시녀는 이불을 정리하던 중, 진안 군왕이 손을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태의.”

시녀가 서둘러 태의를 불렀다.

태의가 다급하게 침상 곁으로 다가왔다. 이불 안에 있던 진안 군왕의 손이 무언가를 찾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이내 무언가를 손에 쥔 것처럼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태의와 시녀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시녀가 조심스럽게 이불을 걷고 진안 군왕의 손을 뒤집자, 진안 군왕이 무언가를 꼭 쥐고 있는 게 보였다.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을 자세히 본 시녀와 태의가 깜짝 놀랐다.

“나무 조각? 전하의 이부자리를 깨끗이 정리하지 않았던 게냐?”

태의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서둘러 고개를 젓고는 재빨리 진안 군왕의 손에서 나무 조각을 빼내려고 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은 나무 조각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듯 손에 힘을 주며 더욱 세게 쥐었다.

“놔두거라. 전하께서 통증이 심하여 잡을 것이 필요하신 걸 수도 있다. 쥐고 있는 동안 통증이 완화될 수도 있으니, 그냥 두어라.”

태의가 조용히 말했다. 시녀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진안 군왕의 손을 다시 이불 속으로 넣고 휘장을 내렸다.

실내에 정적이 흐르고, 밤이 찾아왔다.

다시는 열리지 않는 문을 바라보던 정교랑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층계 위에 서서 어둠이 드리운 거리를 내다보았다.

내가 필요 없다면, 사실 그것도 좋은 일이긴 하지.

맞아, 좋은 일이야.

“교랑!”

말에서 뛰어 내린 주복은 경왕부의 구석진 외벽에 쪼그려 앉은 정교랑을 발견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이었기 때문에, 새하얀 말이 푸르릉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았더라면 주복은 정교랑이 저기 앉아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주복이 덕승루에서 시종들과 두어 마디를 말하는 사이, 정교랑은 종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정교랑이 진호를 찾으러 간 줄 알고 하마터면 진(秦)씨 저택으로 갈 뻔했다.

주복은 정교랑이 진호를 죽이러 갔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정사낭을 죽인 몸종의 목을 꺾어 버렸던 것처럼.

전장에서 사람이 죽는 걸 수없이 많이 본 주복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주복도 깜짝 놀랐다. 정교랑의 힘이 그렇게 셀 것이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활쏘기에 기마를 잘하는 것도 모자라, 근거리에서 일격에 사람을 죽이는 기술까지 구사할 줄 알았다니.

게다가 정교랑이 갑자기 그 몸종의 목을 꺾어 버린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정교랑을 꽤 오랜 시간 동안 가까이서 지켜본 주복은 알고 있었다. 정교랑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고 느낄 일에도, 언제나 담담하게 사소한 일을 대하듯 행동했다는 것을. 또 평소에는 상대에게 직접 수를 쓰는 것은 고사하고, 상대와 말 한마디를 섞는 것조차 귀찮아했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에, 게다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몸종의 목을 꺾어 버리다니.

주복이 황급히 정교랑에게 다가가 정교랑의 어깨를 붙잡았다.

“왜 안 들어갔어?”

주복이 물었다.

왜 여기서 혼자 쪼그려 앉아 있는 거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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