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하지 마세요-
관청 앞, 누군가가 진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내가 고 관인과 작별 인사를 할 만큼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진호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대꾸했다.
“일부러 자네를 찾아온 건 아니네. 인수인계할 게 있어 잠시 들렀다 가려던 참이지.”
진호가 별다른 대꾸 없이 웃으면서 공수의 예를 표하고 곧장 걸음을 옮기려 하자, 고 관인이 서둘러 그를 다시 붙잡았다.
“아, 마주친 김에 부탁 하나만 하지.”
진호가 고 관인의 손을 뿌리쳤다.
“무슨 부탁?”
“경성에서 정 낭자를 불러 차를 한 잔 마실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진 않은 것 같아서 말이지.”
고 관인이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호가 고 관인의 팔을 덥석 쥐었다.
“그 여인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진호가 목소리를 낮추고 경고했다. 고 관인이 재빨리 진호의 손을 다독이면서 그를 진정시켰다.
“내가 바보도 아니고 미친놈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겠는가! 잘 들으시게. 오늘 오찬 이후에 정 낭자를 덕승루로 불러서 둘이 오붓하게 차나 한잔하고 있게나.”
고 관인의 말에 진호의 표정이 급변했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고 관인이 진호를 향해 씩 웃고는 진호의 손을 자신의 어깨에서 떼어냈다.
“고마워할 필요는 없고, 미인과 즐겁고 여유로운 시간 보내길 바라네.”
고 관인이 말하고는 진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진호가 몸을 돌려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말에 오른 고 관인은 진호를 향해 이가 다 보일 정도로 웃으면서 재차 손짓하고 말머리를 틀었다.
진호는 어두운 표정으로 관청을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황궁을 내다보았다.
뿌리를 뽑아야 한다라……. 이게 다 그놈 때문이야. 그놈 때문에 정 낭자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결단을 내려야 할 때를 놓치면 안 돼. 송두리째 뽑아버려야지.
황궁 안, 태후가 손을 휘휘 젓자, 내시 몇 명이 상소문으로 가득 찬 탁자를 얼른 옆으로 치웠다.
“마마, 고생 많으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했다. 태후가 그를 쳐다보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폐하는 뵙고 왔느냐?”
태후의 물음에 진안 군왕은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눈시울을 붉혔다.
“마마, 강녕하셔야 합니다.”
진안 군왕이 울먹이면서 말하자, 갑자기 태후의 눈에서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옆에 서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태후에게 다가왔다.
“전하, 어서 마마께 그만 우시라고 위로의 말씀을 올리십시오. 마마께서 도통 눈물 마를 날이 없이 지내신 터라, 더 우시다가는 실명할 위험까지 있다고 태의가 말했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깜짝 놀란 진안 군왕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무릎을 꿇은 채 태후에게 다가갔다.
“마마, 마마, 어서 눈물을 거두시옵소서.”
진안 군왕이 자신의 눈물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으면서 말했다.
“이거 보세요. 소손도 울지 않습니다. 소손도 울음을 그쳤어요.”
태후가 진안 군왕의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 우리는 더 이상 울어서는 안 됩니다. 마마께서도 봉체를 보존하셔야지요. 폐하와 경왕, 그리고 저도 마마께서 안 계시면 아니 됩니다.”
진안 군왕이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꾹꾹 눌러 담으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애처롭게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눈물을 닦는 동안, 궁녀들이 따뜻하게 데운 수건을 가져와 태후의 눈을 닦아주고 차를 다시 우려 다과상을 올렸다.
“너도 참 오랜만에 오는구나.”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이 눈을 내리깐 채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신도 조심해야지요.”
“애가 앞에서 계속 신이니 뭐니, 그렇게 말하지 말아라. 네가 무슨 신하라고.”
태후가 화가 난 표정으로 내시들이 한쪽에 치워둔 상소문을 가리켰다.
“네가 조심한다는 게, 다 저기 쌓인 탄핵 상소를 말하는 게지? 뭐?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해야 한다고? 저들이 어찌 애가의 자손들에게 이래라저래라한단 말이냐!”
진안 군왕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가에는 감동한 기색이 역력했다.
“마마, 마마의 뜻은 소손도 잘 알지만, 앞으로 그런 말씀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소손은 탄핵을 받아 마땅합니다.”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저들은 왜 몰라주는 게냐.”
진안 군왕이 서둘러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마마, 더는 눈물을 흘리셔서는 안 됩니다. 소손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마마께서 계신 한, 소손은 두려울 게 없습니다.”
태후가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시들에게 명했다.
“경왕을 데려오너라.”
진안 군왕은 경왕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시선으로 내시들의 뒤를 따라가며 좌불안석한 모습을 보였다.
육가아를 못 본 지가 아주, 아주 오래됐네.
“둘이 안 본 지 이제 며칠이나 됐다고.”
진안 군왕의 모습을 본 태후가 못 말리겠다는 듯이 웃었다. 진안 군왕이 태후를 쳐다보고 헤헤 웃으며 대답했다.
“지난 무평 출정 이후로는, 이번이 경왕과 가장 오래 떨어져 있던 때입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끝내자마자 또 시선을 문밖으로 돌렸다. 태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둘의 우애가 참 돈독하구나.”
태후가 감탄하면서 또다시 눈시울을 붉혔다. 붉어진 그녀의 눈가에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는 머뭇거림이 어렴풋하게 비쳤다.
“마마, 또 눈물을 보이시면 안 됩니다.”
내시가 조용히 마른기침을 하며 태후에게 수건을 건넸다. 내시의 말을 들은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렸다.
“마마, 우시면 안 됩니다.”
진안 군왕은 태후가 수건을 쥐고 눈가를 꾹꾹 누르는 것을 본 뒤에야 안심한 듯이 태후를 바라보았다. 이때, 경왕이 괴성을 지르면서 태후궁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개를 돌렸다.
“에구머니나, 깜짝 놀랐네.”
태후가 실소를 터트렸다. 진안 군왕은 눈 깜짝할 사이에 문가로 뛰어가 뒤뚱뒤뚱 걸어오는 경왕을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육가아, 육가아.”
진안 군왕이 반가움에 연신 경왕을 불러댔다. 그가 활짝 웃으면서 경왕의 어깨를 붙잡고 분주하게 상하좌우를 살피며 물었다.
“이 형님이 보고 싶었지?”
경왕은 누군가에게 잡혀있는 것을 몹시 싫어할뿐더러, 지금처럼 이렇게 덥석 잡히는 것은 더더욱 싫어했다. 그래서 경왕은 진안 군왕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경왕의 짜증에도 진안 군왕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그를 다독이며 이리저리 살폈다.
“이 형님 안 보고 싶었어? 형님이 너 주려고 맛있는 것도 잔뜩 챙겨왔는데.”
진안 군왕이 주절주절 우스운 말을 내뱉자, 곁에 있던 내시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면서 웃음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물었다.
형님이 보고 싶진 않았냐고? 누가 누구인지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형님은 무슨!
“경왕을 돌보시느라 마마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진안 군왕이 다시 점잖게 자리에 앉아 태후에게 예를 표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하느냐. 원래부터 애가가 잘 돌봤어야 하는데, 너무 오랫동안 네게 떠넘겼던 것이지.”
태후가 고개를 저으며 식사 준비를 지시했다. 식사를 준비하라는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경왕을 잠시 쳐다보다가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 소손이 궁에 남아 식사까지 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오늘 궁에 머무른 시간이 꽤 길어서요.”
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애가가 밥 한 끼 먹이겠다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게냐! 여봐라! 가서 저 상소문을 모조리 불태워 버려라!”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고 탁자를 쾅 내리치며 상소문을 가리켰다.
“마마, 아니 됩니다. 고정하시지요.”
진안 군왕이 서둘러 태후를 말렸다. 그런 진안 군왕을 보자 태후는 또 눈물이 차올랐다.
“네가 조심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조정의 신하들이 또 얼마나 가시 돋친 말만 해댈지. 그래, 그만 가 보거라.”
태후가 경왕을 향해 손짓하면서 그를 불렀다.
“경왕, 이리 와서 형님과 인사해야지.”
하지만 태후의 말을 이해할 리 없는 경왕은 탁자 위에 놓인 찻잔을 손으로 쥐고 입안에 넣으려 했다. 진안 군왕이 그의 손에서 찻잔을 빼앗았다.
“경왕이 배가 고픈가 봅니다.”
진안 군왕이 다정한 눈빛으로 경왕을 바라보았다. 그가 아쉬운 듯 경왕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었다.
“식사를 들여오라 하시지요. 소손도 마마께서 내어주시는 음식을 먹지 못한 지 꽤 오래된 듯합니다.”
태후의 뺨에 살짝 경련이 일더니 태후가 앞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태후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술을 움찔거리던 찰나, 옆에 있던 내시가 한발 앞서서 외쳤다.
“식사를 준비하라.”
내시가 진안 군왕을 향해 눈웃음을 지었다.
“전하께서 오실 줄 알고, 마마께서 특별히 전하께서 어렸을 적부터 즐겨 드시던 것으로 상을 준비하게 하셨습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태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마마께서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태후가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감탄했다.
“너는 워낙 어릴 때부터 철이 들어서 그런지, 편식도 하지 않고 뭐든 잘 먹어 애가의 속을 썩인 적이 없었어.”
얹혀사는 주제에 까탈스럽게 굴어서 좋을 게 뭐 있습니까. 주는 대로 잘 먹어야지요.
진안 군왕이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태후를 향해 빙긋 웃었다.
오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태후는 기분이 울적한 탓에 몇 입 먹지도 않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음식을 먹는 둥 마는 둥 장난을 치던 경왕은 금방 배가 찼는지,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이리저리 배배 꼬았다.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을 간신히 어르고 달래면서 밥 한 그릇을 겨우 먹였다. 하지만 경왕은 더는 앉아 있기가 힘들었는지 허공에 대고 손을 허우적대면서 아무렇게나 발길질을 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됐다, 됐어. 이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해라.”
태후가 말했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젓가락을 내려놓고,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경왕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하지만 경왕은 성가시다는 듯이 진안 군왕을 힘껏 밀치고 옹알이를 하면서 뛰쳐나갔다. 내시들이 서둘러 경왕을 뒤쫓아 뛰어갔다.
진안 군왕은 몸을 일으키고 저도 모르게 경왕의 뒤를 두어 걸음 따라가다가 멈춰 섰다.
“괜찮다. 나중에 자주 들어와서 경왕을 보면 되지.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우리는 한 식구야. 서로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으니, 저들이 뭐라고 하든 애가는 두렵지 않다.”
태후의 말에 진안 군왕이 몸을 돌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소손도 두렵지 않습니다.”
내시가 진안 군왕에게 다가와 차를 올렸다.
“전하, 차를 드시지요.”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하게 말했다.
진안 군왕은 내시가 바친 차를 잠시 바라보다가, 손으로 찻잔을 가져와 고개를 꺾고 그 안에 든 차를 단숨에 비웠다.
“마마, 소손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담담하게 태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태후가 몸을 일으키고 애처로운 표정으로 진안 군왕이 예를 올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태후가 눈물을 머금고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진안 군왕을 불렀다.
“위낭.”
태후가 그를 ‘위낭’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 진안 군왕이 입궁한 뒤로 처음이었다. 진안 군왕이 고개를 들고 태후를 바라보았다.
“위낭.”
태후가 진안 군왕을 마주 보며 또 나지막한 소리로 그를 불렀다.
“마마, 울지 마세요. 소손이 또 마마를 찾아뵙겠습니다.”
진안 군왕이 말하고는 다시 예를 표했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뒷걸음으로 문가에 다다른 진안 군왕을 바라보던 태후가 결국 참지 못하고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부축하면서 걸음을 옮겼다.
“위낭.”
태후가 거의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진안 군왕을 불렀다.
“마마, 오늘은 뙤약볕이 너무 심하니 밖으로 나가시진 마옵소서.”
문가에 서 있던 내시가 태후에게 말했다. 문턱을 넘어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빙긋 웃었다.
“마마, 나오지 마세요. 이제 들어가서 좀 쉬셔야죠. 소손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진안 군왕은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태후궁을 떠났다. 점점 더 멀어지는 진안 군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태후는 끝내 참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냈다.
“내 새끼, 애가의 마음이 찢어질 듯이 아프구나.”
가슴에 손을 올리며 힘겹게 말을 내뱉은 태후는 곧바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이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내시와 궁녀들이 재빨리 태후를 부축했다.
경왕부 안. 내시와 막료들은 속이 타들어 가는 심정으로 진안 군왕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경왕부 안으로 들어서자, 모두가 다급하게 그를 에워쌌다.
“전하, 왜 이렇게 오래 계시다 오셨습니까?”
막료 한 명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마마께서 오찬을 준비하셨다.”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막료들의 얼굴이 일순간 사색이 되었다.
“전하, 말씀드렸잖습니까! 절대로 궁에서 식사하시면 안 된다고요. 어서 이 태의를 불러오너라!”
“그러게 말입니다. 지금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뭐든 주의하고 철저히 대비해야 합니다.”
막료들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진안 군왕이 표정 없는 얼굴로 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안색이 바뀌면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전하?”
사람들이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추고 진안 군왕을 살폈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고 소매 속을 쳐다보았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다.”
진안 군왕이 갈라진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 반 잔을 버렸어.”
무슨 뜻이지?
사람들이 의아한 얼굴로 진안 군왕의 시선을 따라 그의 소매를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오른쪽 소매가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소매 안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는데!”
진안 군왕이 갑자기 목청을 높여서 외쳤다.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고개를 치켜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안 군왕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마, 소손이 소매 속으로 차를 반 잔이나 버렸습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안 군왕이 입에서 검붉은 피를 뿜어내며 앞으로 푹 쓰러졌다.
“전하!”
“어서 이 태의를 불러라!”
정사낭이 식당에서 나오자, 앞을 지키던 시종 한 명이 조용히 좌우를 살피다가 손짓했다. 구석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말을 끌고 다가왔다.
“문유 아우, 그럼 우리는 이만 가겠네. 아우가 떠날 채비를 마치고 출발할 때 다시 배웅하겠네.”
동료들이 포권의 예를 표하자 정사낭이 서둘러 답례했다.
“노부인의 일에 유감을 표하네.”
동료들이 다정하게 말했다.
정사낭이 휴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다들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정 대노야와 이노야가 강주에 계신 노모의 병세가 위독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 전 서둘러 강주로 돌아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료들은 정사낭까지 강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노부인의 병세가 차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정사낭이 다시 한번 감사의 예를 표하고 떠나는 동료들을 배웅했다.
“사공자님도 그만 돌아가시지요.”
시종이 가까이 와서 말했다.
정사낭이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에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나 시종이 재빨리 정사낭의 앞을 막은 덕에 그 사람은 정사낭 가까이로 가지 못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은 시종의 어깨에 부딪혀 아이고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 때문에 품에 안고 있던 작은 보따리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공자님, 잠시만요.”
춘령이 겁먹은 표정으로 소리쳤다. 상대가 춘령이라는 사실을 알아본 정사낭이 깜짝 놀랐다.
“춘령?”
“사공자님, 저, 저, 저는…….”
춘령이 말을 더듬다가, 결국 말 한마디를 다 하지 못한 채 작은 보따리를 시종의 손에 밀어 넣었다.
“이거,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춘령이 큰소리로 외치고는 곧장 몸을 돌리고 뛰어갔다.
언니?
“춘령!”
정사낭이 다급하게 춘령을 불렀지만, 춘령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이게 뭐지?
정사낭은 시종이 보따리를 푸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사공자님, 비전 증서입니다. 오만 관이에요.”
시종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비전 증서 위에 쓰인 금액을 읽었다.
오만 관!
저희 언니가 돌려드리라고 한 거예요.
정사낭이 인파 속으로 사라져가는 춘령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종의 손에서 비전을 가져왔다.
이게 지금 다 뭐 하는 거야!
“춘령, 기다려라!”
정사낭이 한숨을 쉬고는 말에 올라타는 것도 잊은 채 춘령의 뒤를 쫓아갔다. 시종들이 서둘러 정사낭을 따라갔다.
같은 시각 진호는 정씨 저택의 대문을 두드렸다.
“진 공자님.”
마당 안으로 들어서는 진호를 본 시녀가 조금 놀란 눈치로 그를 불렀다가 이내 웃으면서 예를 표했다.
“식사는 했어요?”
진호가 회랑 아래로 시선을 둔 채 물었다.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얇은 치마저고리로 팔을 반쯤 가리고, 구름처럼 풍성한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어 올린 정교랑이 회랑 아래서 고개를 돌렸다. 정교랑의 손에는 새들을 어르며 놀 수 있는 길고 가느다란 풀이 들려 있었다.
정교랑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대답했다.
“한발 늦었네요.”
진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을 들었다.
“그럼 차를 마시러 가자고 하는 건, 아직 늦지 않았죠?”
시녀가 고개를 돌려서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수고할 거 없다.”
진호가 말하고는 정교랑에게 공손하게 초대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와 밖에서 차를 한잔해도 될는지요?”
“이번엔 무슨 꽃을 보러 가는데요?”
정교랑이 물었다. 지난번에 두 사람이 함께 나들이를 나가 벚꽃을 구경했던 일을 떠올린 진호의 눈가에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자고로 유월에는 연꽃이 예술이지요.”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올게요.”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이 옷을 갈아입으러 안으로 들어가자, 반근이 시녀를 향해 손짓했다.
“언니, 오늘 점포에 나갈 거야?”
반근이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시녀가 반근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왜? 늑장 부리고 싶어?”
“아니. 그게 아니라, 조금만 더 서두르면 아씨의 혼례복이 완성돼서 그래.”
반근이 충혈된 눈을 비비면서 말했다. 시녀가 반근의 붉어진 눈을 보고는 속상한 마음에 반근의 이마를 손끝으로 콕 찔렀다.
“내가 말했지. 급할 거 없다고. 당분간은 혼사를 치를 수 없다니까.”
반근은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투로 발을 구르면서 입술을 삐쭉였다.
“언니! 아무튼, 나는 일단 아씨의 혼례복을 다 만들어 놔야겠어.”
시녀가 웃으면서 손을 저었다.
“가 봐, 가 봐. 내가 아씨랑 같이 다녀올게.”
정교랑이 옷을 다 갈아입고 진호와 함께 문을 나서려고 할 때, 찬합을 든 반근이 쫓아왔다.
“이 간식들 지금 막 만든 거예요. 나들이하며 먹기에도 좋을 거고요.”
진호가 웃었다.
“꽃놀이하는 곳에는 없는 게 없을 텐데.”
“거기에 우리 아씨께서 직접 만든 간식도 있대요? 진 공자님은 안 드시고 싶은가 봐요?”
반근이 질 수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나중에 또 먹으면 되지.”
진호가 여유롭게 말했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웃으면서 어린 시녀에게 찬합을 안겨 줬다.
나중에는 못 드실 수도 있잖아요.
반근이 가볍게 던진 농담에 진호의 웃는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자, 자, 그만 갈까요?”
시녀가 말했다. 드디어 걸음을 떼나 싶었는데, 진호가 갑자기 어린 시녀의 품에서 찬합을 빼앗아 반근에게 돌려주었다.
“어?”
반근이 놀라서 소리쳤다.
“이건 저녁에 네 아씨가 돌아온 뒤에 먹자. 내 것도 남겨 줘.”
진호가 웃으면서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진 공자님이 어째 주 공자님처럼 고집이 세진 것 같아.”
반근이 투덜댔다.
“아유, 됐어. 뭐하러 이런 사소한 일까지 신경 써. 나가서 진 공자님이 사주시는 거 먹지 뭐. 돈 쓰고 싶다고 하시는데, 쓰게 둬야지. 내가 돌아오면서 네 것도 많이 챙겨 올게.”
시녀가 웃으면서 반근을 다독이자, 반근은 그제야 헤헤 웃으면서 정교랑 일행을 배웅했다.
고통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침상 끝에 걸터앉아 있던 진안 군왕이 허리를 숙이며 또다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타구를 들고 있던 시녀의 몸에 피가 한가득 튀자, 시녀는 겁에 질린 채 울먹이면서 목청껏 태의를 불렀다.
밖에서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왔다.
진안 군왕은 구토를 얼마 하지도 못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서 엎드린 자세로 축 늘어졌다. 내시가 서둘러 진안 군왕을 부축하여 그의 몸을 뒤집자,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은 진안 군왕의 얼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안 군왕의 얼굴은 검푸른 색으로 변해 있었다.
“해독할 수 있다면서요! 괜찮아질 거라면서, 왜 전하께서는 아직도 피를 토하시는 겁니까! 왜 안색이 검푸른 빛을 띠냔 말입니다!”
내시가 새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이 태의를 향해 소리쳤다. 이 태의의 몸이 조금씩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가 재빨리 한쪽 무릎을 꿇고 진안 군왕의 맥을 짚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럴 리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때, 침상에 누워있던 진안 군왕이 또 격렬하게 기침을 하며 피를 토했다. 진안 군왕의 온몸으로 피가 튀자, 방 안의 시녀들이 울음을 터트리면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이 태의, 도대체 할 수 있는 겁니까, 없는 겁니까! 어서 전하를 살려내란 말입니다! 어서 전하를 살려내라고!”
내시가 미친 사람처럼 이 태의의 멱살을 잡고 그를 흔들었다. 이 태의가 서둘러 약 상자를 열고 금침을 꺼내 들었다. 그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하면서, 간신히 숨을 몰아쉬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할 수 있냐고? 치료해낼 수 있냐고?
모르겠어. 약을 쓰고, 침을 놨는데도, 왜 아직도 안 되는 거지?
“할 수 없소!”
이 태의가 금침을 내팽개치고 진안 군왕의 어깨를 잡았다.
“전하의 몸에는 옛날부터 쌓였던 여독이 남아 있어서, 반 잔만 마셨다 하더라도 독이 퍼지는 속도가 너무 빠르오! 난 못 해. 난 전하를 살려낼 수 없소!”
내시가 이 태의를 옆으로 밀치고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어서 정 낭자를 모셔오너라.”
정 낭자.
미동 하나 없었던 진안 군왕이 갑자기 자신의 어깨를 잡고 있던 이 태의의 팔을 붙잡았다.
“전하!”
깜짝 놀라서 진안 군왕을 쳐다본 내시가 눈물을 머금고 그를 애타게 불렀다.
“전하.”
진안 군왕이 힘겹게 입술을 움직였다.
“이 태의.”
진안 군왕이 손을 허공에 올리자, 이 태의가 서둘러 그의 손을 맞잡았다.
“전하, 전하. 지금 정 낭자를 모시러 갔습니다.”
이 태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정 낭자를 데려오지 마십시오. 정말, 정말 이 태의가 나, 나를 살려줄 수는 없는 겁니까? 정, 정 낭자에게는 원칙이 있습니다.”
진안 군왕이 안간힘을 쓰면서 한 글자씩 내뱉었다.
원칙?
이 태의가 흠칫 놀랐다.
“병을 고쳐 준 사람과는 혼인을 맺지 않는…….”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읊조리듯 말했다. 이 태의가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지금 그럴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이 태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시간이 없다. 정 낭자를 모셔 올 게 아니라, 당장 전하를 그리로 모셔라!”
반근이 손에 쥔 바늘과 실을 내려놓고 눈을 비볐다.
“반근 언니, 물 좀 마셔요.”
어린 시녀가 서둘러 반근에게 물을 건네자,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잔을 받았다.
이때,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밖에서 전해져 왔다.
“무슨 일이지?”
반근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반근이 고개를 돌리고 밖을 내다보자, 인상이 흉악한 사람들 무리가 살벌한 모습으로 이쪽을 향해 뛰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정 낭자, 정 낭자, 사람 좀 살려 주십시오!”
반근이 깜짝 놀라서 손을 떨었다. 물잔에 들어있던 물이 반근의 앞에 놓여있던 혼례복에 쏟아졌다.
“어서 정 낭자를 모셔와!”
한 시위가 고함을 치면서 황씨의 옷을 잡아당겼다.
“정말로 집에 안 계세요. 정말이에요.”
황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당에 있던 몸종들과 시녀들이 비명을 질렀다. 반근이 황급히 뛰어나와서 소리쳤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어요.”
“반근 낭자.”
내시 한 명이 반근을 불렀다. 반근이 그 내시를 쳐다보고 놀라며 내시의 뒤에 있던 가마로 시선을 옮겼다.
저건, 누구지?
내시가 가마의 휘장을 들어 올리자, 반근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반근은 자신의 손 틈 사이로 새어 나오려는 비명을 간신히 참아냈다.
저건 누구지? 저게 누구지? 저 사람은 내가 아는 그 젊은 군왕 전하가 아니야. 눈부신 햇살보다 밝은 미소를 가진 그 군왕 전하가 아니라고!
반근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세상에나!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전하, 전하,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반근이 울면서 가마에 매달렸다.
“지금은 그런 걸 물어볼 때가 아니다. 어서 정 낭자를 찾아와야 해.”
이 태의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다급하게 말했다. 반근이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아씨께서는 출타하셨다고요!”
“어디로 갔느냐?”
두 막료가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연꽃을 보러 간다고 하셨어요.”
반근이 곧바로 대답했다.
“경성 내외에서 연꽃을 볼 수 있는 곳은 족히 일고여덟 곳은 되는데, 대체 어디로 간 거지?”
한 시위가 끼어들어 물었다. 반근과 황씨가 멈칫했다.
연꽃 구경을 할 수 있는 곳이 한 곳이 아니란 말이야?
전에는 아씨께서 어딜 가면 간다고 말씀을 해주셨는데, 하필 이번에는 진 공자님의 초대였어. 진 공자님께서 우리에게 어디 간다고 말해 주는 걸 깜빡하셨나?
“진 공자님이 말씀해 주지 않으셨어요.”
반근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누이가 어디로 가는지는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어요.”
황씨도 불안해하며 대답했다.
이럴 수가!
내시와 시위들 모두가 막료들을 쳐다보았다.
“찾아라. 사람들을 전부 동원해라. 한 곳 한 곳 전부 다 뒤져서라도 꼭 찾아내야 한다!”
막료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인지라, 시종들은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뛰어갔다.
“너희도 어서 가서 찾아봐.”
황씨가 주변에 있던 시녀들에게 지시했다.
“절대로 큰 소리를 내면 안 된다. 절대로 울며불며 소리쳐서도 안 되고.”
막료가 신신당부했다.
“무슨 일이야?”
누군가의 목소리가 막료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사람들이 고개를 돌리자, 손에 빗장을 든 채 달려오는 주복의 모습이 보였다.
진안 군왕 일행은 문 앞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어서 그들의 앞을 가로막는 문지기와 시종들을 모조리 때려눕히고 곧장 정교랑의 거처로 달려왔다.
그런 상황에 뒤늦게 집에 도착한 주복이 바닥에 쓰러진 문지기와 시종들을 보고는 얼굴이 사색이 되어 빗장을 쥐어 들고 허겁지겁 달려온 것이었다.
“댁들은…….”
주복이 사람들을 훑어보면서 소리치려던 찰나, 반근이 재빨리 말했다.
“전하예요. 어서 아씨를 찾아야 해요!”
반근이 주복을 지나쳐서 밖으로 뛰어갔다.
전하?
시녀와 다른 시종들이 서둘러 반근을 뒤따라 밖으로 뛰어가자, 주복의 시선이 가마로 향했다. 가마 안에 누워 있는 사람을 알아본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했다.
진안 군왕!
막료가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떼려던 찰나, 주복이 빗장을 내팽개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반근과 시녀들을 금세 제치고, 진안 군왕의 시위들까지 지나쳐서 바람처럼 사라졌다.
“정 낭자의 방으로…….”
진안 군왕이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키면서 중얼거렸다. 이미 시야가 흐릿해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눈앞에 있는 정교랑의 대청만큼은 또렷하게 알아보았다.
내시가 진안 군왕의 의중을 알아차리고는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를 안으로 모셔라. 방에서 정 낭자를 기다려야겠다.”
내시가 다시 진안 군왕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전하, 정 낭자가 금방 올 겁니다. 그러니 꼭 버티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버티십시오.”
그래. 나에겐 아직 정 낭자가 있어.
나는 꼭 정 낭자를 기다릴 테다. 기다려서, 낭자를 만날 수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덕승루 안. 마음이 조급해진 정사낭이 별실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한번 가 보거라.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수하와 사환이 알겠다고 하고 문을 열려던 찰나, 누군가가 밖에서 문을 열었다. 화려하게 단장한 주 낭자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정 공자님께서 오실 줄 몰라, 단장하는 데 시간이 조금 걸렸어요. 부디 공자님께서 넓은 아량으로 양해해 주세요.”
주 낭자가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정사낭이 답례하고는 앞에 놓인 작은 보따리를 가리켰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저건, 내 것이 아니니 도로 가져가요.”
“공자님의 돈이에요.”
주 낭자의 말에 정사낭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 돈이 아니에요.”
정 낭자의 돈이죠.
주 낭자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럼 소인은 더욱 저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소인은 저만한 가치가 안 돼요.”
“저 돈은 주 낭자에게 주는 것도 아닙니다.”
정사낭의 말에 주 낭자가 고개를 들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정사낭을 쳐다보았다.
“주 낭자의 값을 매긴 돈이 아니니, 낭자와는 상관없는 돈입니다. 저 돈은 내 누이가 나더러 쓰라고 준 돈이죠.”
정사낭이 입꼬리를 올리며 자랑스럽고 기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여인 이야기만 나오면, 모든 사내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가.
“그러니까 공연한 생각은 마요. 이미 내게 줘서 써 버린 돈인데, 그걸 다시 돌려달라는 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정사낭이 또 웃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누이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해도 내가 직접 번 돈으로 돌려줄 겁니다.”
주 낭자가 정사낭을 바라보면서 웃었다.
“정 낭자에게 공자님 같은 오라버니가 있다는 게 참으로 부럽네요.”
주 낭자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인에게도 오라버니가 있었는데, 어린 나이에 요절했거든요.”
정사낭이 불안한 기색으로 다독였다.
“우, 울지 마요. 사실 부러워할 것도 없어요. 나 같은 오라비를 둬서 어디에 쓴다고. 우리 누이가 아마 낭자보다 훨씬 더 불쌍할걸요?”
정사낭이 어쩔 줄을 몰라 하며 위로랍시고 정교랑의 이야기를 꺼냈다.
나보다 더 불쌍하다고? 남의 모함 때문에 부모님을 잃고 교방사로 들어와 기녀의 삶을 살게 된 나보다 더?
주 낭자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요. 정 낭자가 선천적으로 바보라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하지만 나중에는 신선 같은 스승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었잖아요.
내게 새 삶을 가져다줄 신선 같은 스승, 나는 평생 만나지 못할 거예요.
“웃지 마요. 우리 누이는 진짜로 불쌍한 사람이라니까요? 누이도 속이 말이 아닐 거예요. 힘들다고 말한 적은 없지만, 내 눈에는 보여요. 그런데도 난 딱히 도와줄 수도 없고.”
주절주절 늘어놓던 정사낭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머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내가 왜 낭자를 붙잡고 이 얘기를 하는 건지 원.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주 낭자가 웃으면서 손으로 정사낭을 붙잡았다.
“정 공자님, 이왕 여기까지 오신 거, 소인이 본분을 다할 기회는 주셔야지요? 이 돈도 안 받겠다고 하셨으니…….”
주 낭자가 입꼬리를 올리면서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일부러 정사낭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주 낭자의 미소 한 번에 방 안이 온통 환해지는 듯했다.
정사낭과 사환은 그런 주 낭자를 바라보면서 넋을 놓았다.
본분을 다한다?
기녀가 다할 수 있는 본분이라면…….
“아닙니다. 낭자의 쉬는 시간을 더 이상 방해하지 않도록 난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정사낭이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서둘러 말했다.
“춘령.”
주 낭자가 고개를 돌려서 춘령을 불렀다. 춘령이 재빨리 칠현금을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공자님, 저희 아씨께서 본분을 다하실 수 있게 좀 도와주세요. 오늘이 지나면 언제 또 보실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춘령의 말을 들었어도, 정사낭은 여전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던 찰나, 주 낭자가 별실 중앙에 자리를 잡고 칠현금 연주를 시작했다. 감미로운 칠현금 연주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주 낭자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동안의 정이 얼마나 깊었을까. 석양 비추는 깊은 산속에는 가을비가 내리네(一往情深深几許, 深山夕照深秋雨, 靑塚黃昏路).”
쓸쓸하기도, 아련하기도 한 노랫소리에 정사낭은 결국 걸음을 멈춰 섰다.
“황사가 햇빛을 가리면 눈가에 가득 차는 황량함은 그 누구에게 말할 수 있을까. 소슬한 가을바람은 단풍나무의 붉은 잎을 쓰다듬고 지나가는데, 끝없는 근심과 처량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구나(滿目荒涼誰可語? 西風吹老丹楓樹. 從來幽怨應無數.)”
방 안에서 칠현금 소리와 노랫소리가 새어 나오자, 시녀가 정사낭에게 붙여준 네 명의 시위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나지막이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수면이 일렁이고, 꽃잎과 나뭇잎이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 진호가 연못에서 반쯤 꽃을 피운 연꽃을 따왔다.
“들키면 혼나실걸요?”
시녀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진호가 웃으면서 연꽃을 정교랑에게 건네자, 정교랑이 연꽃을 받았다.
“낭자는 무슨 꽃을 좋아해요?”
진호가 물었다.
“좋고 말고가 없어요. 다 좋으니까.”
정교랑이 미소 띤 얼굴로 손에 올려진 연꽃을 들여다보았다.
“꽃도 똑같다는 말이에요?”
진호가 웃음을 터트리며 묻자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낭자한테 똑같지 않은 건 대체 뭘까.”
진호가 혼자 중얼거리는 듯이 말하고는 손으로 한쪽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저쪽의 꽃이 더 만개했네요. 저기로 옮겨서 볼까요?”
정교랑이 진호가 가리키는 곳을 내다보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걸음을 옮겼다.
“종이와 붓을 준비해 왔어요. 지난번에 낭자가 내게 그림을 선물했으니, 오늘은 내가 낭자에게 그림을 한 폭 선물해 주려고요.”
진호가 말했다.
“그림까지 그리시려고요? 해가 질 때쯤이 되어야 다 그리시는 거 아니에요? 그럼 저녁도 진 공자님이 사주셔야 할 텐데?”
시녀가 장난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원에서 뛰어나온 반근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헉헉댔지만, 쉴 틈도 없이 마부에게 물었다.
“또 어디 있죠?”
반근이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마부가 채찍을 휘둘러 말에 박차를 가했다.
“동쪽으로 조금 더 가면, 어느 식당 뒤편에 큰 연꽃 연못이 있을 거요.”
마부가 말했다.
“어서 서둘러요!”
반근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죽으면 안 돼. 절대로 죽으면 안 돼.
군왕께서 돌아가시면, 아씨께서 다시는 혼사를 치를 수 없을지도 몰라.
평왕이 사고로 벼락에 맞아 죽은 것도 아씨 탓부터 하는 사람들인데, 군왕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씨께서 어떤 취급을 당할지는 안 봐도 훤해!
마차는 빠르게 동쪽으로 내달렸다.
마차가 채 멈춰 서기도 전에 반근은 마차 밖으로 튀어 나갔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발을 헛디딘 반근이 바닥에 넘어졌다. 마부가 반근을 부축하러 다가오기도 전에, 반근은 재빠르게 몸을 일으키고 식당 안으로 돌진했다.
이때, 누군가가 식당 안에서 뛰어나왔다.
“주 공자님!”
반근이 소리쳤다.
“여긴 없어.”
주복이 짧게 대꾸하고는 휘파람을 불어 옆에 세워 둔 말을 불렀다. 말이 자신의 앞에 오기도 전에, 주복은 두어 걸음 뛰어서 말 위로 몸을 휙 날렸다.
주복이 먼지를 일으키며 바람처럼 사라지자, 반근은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마차에 올라탔다.
주복이 말을 타고 저잣거리를 가로질러가자, 행인들과 주변 노점상들이 주복을 향해 삿대질을 하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복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뒤로 한 채 미친 사람처럼 질주했다.
진 공자님이 제일 좋아하는 연꽃 연못이 어디예요?
주복은 반근이 물었던 질문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좋아하기는 개뿔! 십삼 그 자식이 퍽이나 꽃 감상을 하겠다. 떨어지는 낙엽이나 다 시들어 죽어가는 꽃 따위를 좋아하는 놈인데, 연꽃 나들이를 하더라도 가을에 다 져가는 시든 연잎이나 보러 가겠지!
시든 연잎?
주복의 눈앞이 번쩍였다.
육선관(六仙觀)의 연꽃은 별 볼 일 없네. 하지만 나중에 이곳 시든 연잎 구경은 올 만하겠어.
꽤 오래전에 진호가 했던 말이 주복의 귓가를 스쳤다.
육선관!
주복이 말고삐를 잡아당겼다. 질주하던 말이 앞발을 들면서 울부짖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면서 자리를 피했다.
주복이 그대로 말 머리를 틀어 서쪽을 향해 달렸다.
진호가 붓을 쥔 채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자, 옆에 서 있던 시녀가 미간을 찌푸렸다.
“진 공자님, 아직 한 획 남았어요.”
“이 한 획이 너무 중요해서 그런지, 붓을 내리기가 무섭네.”
진호가 대꾸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호를 쳐다보았다.
“낭자가 마지막 한 획을 그어 주는 건 어때요?”
진호가 손에 쥔 붓을 정교랑에게 건넸다. 정교랑이 붓을 잡으려던 찰나,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정교랑!”
주복의 외침과 함께, 붓이 탁자 위로 떨어져 검은 먹이 사방으로 튀었다.
“아이고, 그림 아까워서 어째!”
시녀가 소리쳤다.
“미안해요. 내가 못 받았네요.”
정교랑이 말하자, 진호가 웃었다.
“제가 잘 못 건네서 그래요.”
진호가 성큼성큼 탁자 쪽으로 걸어오는 주복을 쳐다보고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 저놈 때문입니다.”
주복은 진호의 말을 무시한 채 정교랑의 손목을 낚아챘다.
“빨리 가자.”
주복이 고개를 홱 돌리고 정교랑을 끌고 가려 했다.
“무슨 일이에요?”
놀란 시녀가 발을 구르면서 외치고는 재빨리 두 사람을 따라갔다. 정교랑은 벌써 주복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탁자 뒤에 앉아 있던 진호도 한숨을 쉬고 정교랑의 뒤를 쫓아갔다.
“정 낭자.”
갑자기 누군가가 그늘 밑에서 걸어 나와 정교랑의 앞을 막았다. 그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쟁반 하나를 받치고 있었고, 쟁반 위에는 고이 접힌 종이 한 장이 올려져 있었다.
“누가 말을 전해 달라고 해서요.”
깜짝 놀란 진호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얼굴은 일순간 사색이 되었고, 곧이어 몸까지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진호가 몸 옆으로 늘어트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빌어먹을 놈!”
주복이 앞을 막아선 자에게 호통치고는 비키라며 손짓했다.
“썩 꺼져!”
하지만 그 사람은 미동도 없이 서서 다시 한번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정 낭자, 이걸 안 보고 가신다면 분명 후회하실 겁니다.”
주복이 쟁반 위에 놓인 종이를 가져가려고 손을 뻗자, 그 사람이 몸을 피했다.
“안 보신다면, 분명 후회할 겁니다.”
그 사람이 같은 말을 되뇌자, 격노한 주복이 한 손으로 상대의 멱살을 쥐고 들어 올렸다. 주복 때문에 쟁반이 흔들려 얇은 종이가 쟁반 위에서 떨어져 내렸다. 정교랑은 떨어지는 종이를 낚아채 망설임 없이 종이를 펼쳤다.
“아씨?”
정교랑의 표정을 살피던 시녀가 가까이 다가오면서 물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직감에 시녀도 긴장하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와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 낭자가 저기 있다!”
“정 낭자!”
두 시위가 정교랑을 향해 달려왔다.
“정 낭자, 전하께서 낭자의 거처에서 낭자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속히 돌아가시지요.”
시위가 숨도 채 고르지 못하고 다급하게 말했다.
전하!
시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녀의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죠?”
정교랑이 시위들을 바라보면서 물었다.
“묻긴 뭘 물어, 어서 가자.”
주복이 이를 악물며 조용히 읊조리고는 정교랑의 손목을 더욱 세게 잡았다. 정교랑이 손목을 틀어 주복의 손을 뿌리쳤다. 빈손이 된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놀란 눈으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낭자.”
시위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전하의 몸에 문제가 생겼는데, 이 태의마저도 전하를 구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빨리 저희와 같이 돌아가시지요.”
시녀가 작게 헉 소리를 내고는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무슨 문제길래 태의도 못 고친다고 하고, 아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거지?
혹시, 죽을병? 세상에나, 죽을병이 분명해!
어떻게 그럴 수가!
시녀가 서둘러 뛰어가려던 찰나, 여전히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종이를 손으로 꼭 쥐고 있는 정교랑이 보였다.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어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낭자!”
두 시위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소리쳤다.
정교랑의 말에 깜짝 놀란 것은 주복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시선이 정교랑이 손에 쥐고 있는 종이로 향하자, 그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굳어 버렸다.
누구지?
“낭자, 아직 전하의 증상을 보지도 않았잖습니까!”
시위가 말했다.
“볼 필요 없어요. 전하의 병은 내가 고칠 수 없습니다. 다른 의원을 찾아봐요.”
이때, 뒤늦게 뛰어 들어온 반근이 정교랑의 말을 듣고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반근 또한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금 사람을 잘못 본 건가? 우리 아씨 맞나?
아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죠?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게냐!”
방 안에 있던 이 태의가 좌불안석하며 밖을 두리번거렸다. 태의의 등 뒤로 다시 한번 낮은 신음이 들려오고, 내시가 비명을 질렀다.
“태의, 태의!”
이 태의가 재빨리 몸을 돌려보자, 가마 위에 누워 있던 진안 군왕이 또 피를 토하고 있었다. 환해 보였던 방 안은 순식간에 진안 군왕의 안색과 비슷한 어둠 속으로 빠져드는 듯했다.
이 태의가 진안 군왕에게 달려들듯 다가가 금침을 꺼냈다. 그러고는 그의 앞섶을 풀어 헤치고 왼쪽 가슴 주위에 침을 놓았다.
“태의, 전하의 몸까지 까매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시가 소리쳤다.
“나도 알고 있네!”
이 태의가 외치고는 진안 군왕의 가슴을 훑어보았다.
나도 잘 알고 있다고. 군왕이 작고 여린 어린아이일 때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본 적이 있어! 그때의 야위고 왜소했던 몸이 이제는 탄탄하고 튼실해졌는데, 왜 달라진 게 없지? 왜 또다시 검게 변했냐고!
예전과 똑같아.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결국 사람은 정해진 숙명을 벗어나지 못하는 거야.
“정 낭자는 아직인가!”
이 태의가 고개를 홱 돌리고 처절한 소리로 외쳤다.
“왔습니다. 왔습니다!”
문밖에서 발걸음 소리와 시끄러운 목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면서 문가로 달려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사람은 시위 둘뿐이었다. 간절히 기다리던 정교랑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인의 걸음이 느려 뒤늦게 도착하는 건가?
이 태의가 시위들을 밀치고 뒤를 내다보았다.
“대인, 정 낭자가 고치지 않겠다고 합니다.”
시위 한 명이 주저앉다시피 무릎을 꿇고 엎드린 채 울먹이면서 말했다. 방 안의 사람들은 당혹스러움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무슨 헛소린가! 정 낭자가 전하를 고치지 않겠다고 할 리가 없잖아!”
고개를 돌린 이 태의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대인, 정 낭자가 정말로 고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다른 명의를 부르라면서요!”
다른 시위가 소리쳤다. 내시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가 바닥에 엎드린 시위의 목덜미를 잡고 이를 부득 갈면서 말했다.
“정 낭자가 고치지 않는다고 했다고? 어떻게든 정 낭자를 데려왔었어야지!”
시위가 고개를 들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러려고 했지만, 못 데려왔습니다.”
내시는 그제야 시위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먹으로 맞은 듯한 새파란 피멍이 군데군데 보였다.
“오지도 않을뿐더러, 너희를 때리기까지 했어?”
중얼거리던 내시의 동공이 떨려왔다.
“정 낭자는 진씨 가문 공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시위가 덧붙여서 말했다.
진씨 가문 공자, 진씨 가문이라면…….
그래서 집에 없었구나, 그래서 갑자기 연꽃을 보러 간 거였고, 그래서…….
“난 못 믿겠다! 정 낭자는 그럴 사람이 아니야!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내가 직접 가서 찾아오겠다. 내가 직접!”
이 태의가 갑자기 목청을 높이고 소리치면서 문가를 향해 걸어가려 했다. 한 막료가 재빨리 이 태의를 덥석 붙잡았다.
“이사신(李四申)! 전하께서 더는 기다리실 수 없소! 정 낭자가 고치지 못한다면, 대인이 고쳐야 하오!”
이 태의가 고개를 저었다.
“난 못 하오. 그때도 제대로 고치지 못했어. 그때도 내 손으로 전하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고! 지금은 더더욱 고칠 수가 없어!”
이 태의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쉼 없이 중얼거리자, 막료가 손을 높이 들고 이 태의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자네가 고치지 못하면,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는 걸 왜 모르나! 어렸을 때처럼, 전하는 자네의 손에 죽는 것이라고!”
막료가 고함을 질렀다.
어렸을 때처럼.
태의, 태의, 나 죽기 싫어요.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이 태의의 소매를 쥐었다. 그러고는 가엾은 새끼 고양이처럼 이 태의의 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를 살려 줄 수 있어요? 난 아직 죽고 싶지 않아요. 부왕과 어머니께서 나를 데리러 오기로 하셨단 말이에요. 난 기다려야 해요.”
이 태의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좋소이다. 내가 고치겠소. 내가 고치겠다고! 잘못된다 해도 기껏해야 내 목숨 하나 날아가는 것일 테지? 죽는 게 뭐가 무섭다고. 나는 무섭지 않소.”
이 태의가 무언가 결심한 듯 소리쳤다.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발걸음 소리, 시야로 흐릿하게 들어오는 사람들의 어지러운 뒷모습에 진안 군왕이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건가?”
진안 군왕이 거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고는 기를 쓰면서 몸을 일으키려고 했다.
“전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내시가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아간다고? 왜 돌아가? 정 낭자가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왜?
“전하, 더는 기다리지 말고, 돌아가셔야 합니다.”
내시가 더욱 울먹이는 목소리로 힘겹게 대답했다.
왜 기다리지 않는다는 거야? 왜 더 기다리지 않고?
“아니다. 기다려야 한다. 정 낭자를 기다려야 해. 기다리기로 해놓고, 내가 낭자를 기다리기로 해놓고, 먼저 가 버리면 안 돼.”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움켜쥐고 명령했다.
“가마를 내려라.”
“전하!”
내시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를 악물고 시위들에게 손짓했다.
“가자.”
가마가 천천히 문밖을 향해 갔다. 흔들리는 가마 때문에 진안 군왕이 팔걸이를 놓치면서, 몸이 힘없이 뒤로 눕혀졌다.
“안 돼.”
진안 군왕이 소리쳤다. 가마가 갑자기 덜컹거리더니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가마를 들고 있던 시위들이 깜짝 놀라 앞뒤를 살펴보자, 진안 군왕이 가마 안에서 손을 뻗어 문틀을 붙잡고 있었다.
“전하!”
내시가 더욱 울컥하여 눈물을 쏟으면서 진안 군왕의 팔을 잡았다.
“전하, 손을 놓으십시오.”
안 돼.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만 해! 나는 정 낭자가 오기만을 기다릴 거야.
진안 군왕은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문틀을 꽉 붙잡았다. 그런 그의 손마저 이미 얼굴만큼 거뭇한 빛깔을 띠고 있었다.
“가자!”
내시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소리치면서 문틀을 쥐고 있던 진안 군왕의 손을 힘껏 떼어냈다.
몇 번이나 피를 토하고, 거의 죽기 직전일 정도로 몸이 허약해진 진안 군왕이었지만, 문틀을 붙잡고 있는 힘은 가히 괴력에 가까울 정도였다. 쓸 수 있는 마지막 힘까지 끌어모아 문틀을 쥐고 있는 듯, 내시는 좀처럼 문틀에서 진안 군왕의 손을 떼어내지 못했다.
“가자니까!”
내시가 목청을 높이고 울부짖자, 시위들이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문틀을 붙잡던 진안 군왕의 손이 열려 있던 문짝으로 향했다. 문짝이 가마에 부딪히는 쾅 소리와 함께 시위들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다른 시위들이 재빨리 다가와 문짝을 반대편으로 치우자, 가마는 다시 안정적으로 나아갔다. 진안 군왕의 손은 여전히 가마 밖으로 나와 있었고, 그의 손에는 문짝에서 손가락으로 파내다시피 뜯어낸 작은 나무 조각이 쥐여 있었다.
기다려야 해. 기다려야 해!
<교랑의경> 2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