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만 사는 벌레-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문밖에서 들려왔다.
“아씨.”
여종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던 찰나, 진십팔랑이 문을 활짝 열었다. 방에서 마주 앉은 채 대화를 나누던 진소와 진 노태야가 고개를 돌렸다.
“아씨.”
뒤늦게 쫓아온 여종들이 민망해하며 진십팔랑을 밖으로 끌어내려 했다. 진 노태야가 여종들을 향해 손짓하고는 진십팔랑에게 웃으며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냐? 자, 이리 와서 앉아라.”
여종들이 물러나면서 문을 닫았다.
“아버지.”
진십팔랑은 자리에 앉자마자 예를 표할 겨를도 없이 진소를 향해 다급하게 말했다.
“왜 갑자기 경왕을 황태자로 책봉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거예요?”
진소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난 그런 말을 한 적 없는데?”
“아버지, 이미 소문이 파다해요. 아버지가 장강주와 만났고, 장강주의 말에 반박하지 않았다고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반박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진소가 대꾸했다.
장강주는 변론에 능하고 박학다식한 자였다. 도리를 논하고 진리를 따지고자 한다면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진십팔랑이 허리를 곧추세우고 소리쳤다.
“그럼 아버지도 장강주의 생각에 동의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버지도 종친을 황태자로 책봉하는 데 동의하신다고요? 아버지, 어쩜 그러실 수가 있어요!”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리고 진십팔랑의 말을 끊었다.
“십팔랑, 아비에게 어찌 그런 무슨 말버릇이냐? 이게 효도하는 자식의 태도더냐?”
“그럼 아버지의 행실은 충효로써 군주를 섬기는 것인지요?”
진십팔랑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방 안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들은 폐하께 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폐하의 친자를 제치고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겠다고 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쓰러지지 않으셨더라면, 감히 이런 일을 추진하지는 못했겠죠. 그들이 감히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은, 폐하의 병세가 위독하여 말씀하지 못하신다는 점을 악용하려는 거예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항상 폐하의 은덕을 마음에 담아 두시고, 폐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 아버지께서 폐하의 은덕에 어찌 이런 식으로 보답하시죠? 이게 바로 아버지께서 말씀하신 충효예요?”
진십팔랑이 격앙된 얼굴로 외쳤다.
진 노태야가 한숨을 쉬었다.
“십팔랑, 이럴 때 나라의 기강이 흔들리고, 조정을 혼란에 빠뜨리는 것 또한 폐하께 대한 불충이고 불효니라.”
“할아버지! 그래서 아버지는 조정을 혼란에 빠트리는 나쁜 신하라는 말을 듣기 싫어서, 자신의 주장도 펼치지 못하고 대세를 따르시겠단 건가요?”
“내가 만약 그런 오명이 두려웠다면, 당초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나서지도 않았을 게다.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고, 태후가 수렴청정하지 못하도록 태후를 협박하여 나를 보정대신으로 임명하도록 청했다. 이 행동만으로도 네 아비가 세간에 어떤 질타를 받을지, 어떤 사람으로 취급될지 너는 정녕 모른단 말이냐!”
진소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십팔랑은 슬프기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진소의 표정을 보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떨구었다.
“그런데 왜 그런 아버지께서 변하신 거죠? 성인께서 말씀하시기를, 자신의 행동을 돌이켜보았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하늘에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면, 천군만마 앞이라 해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를 해내지 못하시는 건가요?”
통곡하는 진십팔랑을 보자, 진소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십팔랑, 이 일은 그렇게 단순한 일이 아니다. 너는 이해하지 못할 게야.”
너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말 한마디에 진십팔랑이 눈을 번쩍 뜨면서 자세를 고쳐앉았다.
“아버지, 제가 모른다고요? 제가 뭘 모르긴 하지만, 경왕 전하께서 폐하의 친자라는 것은, 폐하의 대를 이을 유일한 혈맥이라는 것은 잘 알아요. 그자들이 새로운 황제를 옥좌에 앉히려고 한다면, 경왕 전하는 어떻게 되는 건데요!”
진십팔랑이 눈물을 뚝뚝 흘렸다.
“십팔랑, 경왕은 옥좌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다.”
진소가 한숨을 쉬었다. 진십팔랑이 진소를 잠시 바라보다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어울리지 않는다고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는 결국 그 여인의 말을 믿고, 하늘이 점지한 천자를 고르시겠다는 뜻인가요?”
“그 여인이라니 누구 말이냐?”
진소가 물었다.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고 말했던 여인이요.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뜻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따로 있다는 뜻이겠죠. 그 뒤로 황후가 양자 입적을 제안하셨잖아요.”
진십팔랑이 말했다.
“십팔랑! 아둔한 백성들의 말을 믿는 게냐! 그 여인의 입에서 그런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느냐?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거늘, 어찌 감히 ‘그 여인의 말’이라고 단언하는 것이냐!”
진소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되게 호통쳤다.
믿는 사람이 얼마나 더 많아야 하죠? 그 여인을 믿는 사람이 아직도 적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 여인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요?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요, 아니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타고나야 해요!
분명히 경왕이었어야 하는데, 경왕이어야만 했는데! 이건 논의의 여지도 없었던 사실인데!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면 벼락에 맞아 죽을 것이다.
친자든 적통이든 상관없이, 하늘이 점지한 사람이 아니라면, 태자가 될 수 없다.
“저는 믿지 않습니다.”
진십팔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는 아버지께서 정말 이렇게 하실 거라고 믿지 않았어요. 진혜제와 진안제가 제위에 올랐던 것이 난세였기 때문이라고요? 그럼, 다들 그 이유로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지 못하는 거예요? 조정 대신들은 하늘을 무서워하는 건가요, 아니면 태평성대를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무서운 건가요? 성인의 말씀은 그저 입으로나 떠들 뿐이지, 그 말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군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진십팔랑은 몸을 홱 돌리고 방을 나갔다.
“십팔랑!”
진소가 외쳤다. 진 노태야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부를 필요 없다. 여름에만 사는 벌레가 어떻게 겨울의 얼음을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내버려 두어라.”
진십팔랑의 마차가 진씨 저택을 떠났다. 마차 밖에 있는 여종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마차를 따라갔다. 마차 안에서 들려오는 진십팔랑의 울음소리가 천천히 진정되는 듯했다.
진씨 저택과 진십팔랑의 신혼집은 그리 멀지 않았다. 진소 부인이 일부러 두 사람을 가까이 두고 돌봐주려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의 저택을 사들인 덕이었다.
모퉁이를 돌 때쯤, 진십팔랑의 목소리가 마차 안에서 전해졌다.
“집으로 가지 말고, 평왕부로 가자.”
평왕부?
여종들이 놀란 기색으로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아버지, 그 여인이 맞다니까요!”
고 관인이 서성이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쳤다.
“황후는 태후 때문에 폐하의 침궁에 갇혀 있느라 그 여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은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니 그 여인밖에 더 있습니까!”
고 관인이 고능준의 앞으로 다가갔다.
“아버지, 두 사람이 일찍이 내통했던 게 분명합니다! 황후, 정씨, 진안 군왕까지 셋 다 일찍이 내통한 겁니다! 이 모든 게 태백성이 하늘에 나타났다고 했을 때부터 꾸며진 음모라고요! 아버지, 그들이 반역을 도모하는 겁니다! 황후는 반역을 꾸민 거라고요!”
“멍청한 소리 하지 마라.”
고능준이 고 관인의 말을 끊었다.
“이게 어떻게 멍청한 소리입니까? 그들은 진안 군왕을 황제로 옹립하려는 거잖습니까!”
고 관인은 다급하게 외쳤지만, 고능준은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니까 멍청한 소리라는 게지. 그들이 옹립하고 싶다고 해서, 정말로 옹립할 수 있을 성싶으냐?”
지금이 어느 때인데 웃음이 나오시나?
고 관인은 더욱 조급해졌다.
“아버지, 지금 세간에서 나오는 말들은 경왕에게 불리한 것들뿐입니다.”
“말? 영종이 생부인 복안의왕을 추존하며 묘역을 새로 꾸미려고 하자, 대간(臺諫) 관리들이 모조리 관직을 낮추기를 자청했다. 관리들뿐만 아니라, 영종이 잠저에 있을 때 그를 따르던 막료인 왕엽(王獵)과 채항(蔡抗)까지도 나서서 영종을 반대했지. 그때도 만천하의 사람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어댔으나,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느냐?”
고능준이 비웃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땅이 천자의 것이고, 사람 또한 전부 천자의 신하이니라. 그러니 황위는 천자가 주겠다고 해야 신하들이 받을 수 있는 것이야. 천자가 주지 않겠다고 하는데, 신하들이 감히 뺏을 수 있겠느냐?”
고능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시 나가서 걸어야겠다.”
고 관인이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갔다.
“소자가 함께 가겠습니다.”
고능준이 고개를 저으면서 그를 제지했다.
“혼자서 좀 걷고 싶구나.”
고 관인이 걸음을 멈추고 고능준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바람 좀 쐬고 오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이미 속으로 계산을 다 하셨겠지만, 이렇게 연달아 일이 터지니 피곤하실 수밖에요.
그러고 보니, 나도 바람을 좀 쐐야겠구나. 기분 전환도 좀 할 겸.
“여봐라, 여봐라. 나도 나가야겠다.”
고 관인이 말하자, 수하 두 명이 그를 따라갔다.
고능준의 마차가 조용히 문 앞에서 사라지고, 고 관인의 마차도 곧이어 대문 앞을 떠났다.
마차는 천천히 길가를 따라 움직였다. 고 관인의 예상대로 고능준은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는 잠시 머릿속을 비우고 아무런 생각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목적지 없이 마차를 타고 길가를 따라가던 고능준의 눈앞에 평왕부가 보였다. 고능준은 순간적으로 목구멍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고능준은 불필요한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평왕이 궁을 나온 이후로 일부러 평왕부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평왕부로 가자.”
고능준이 말했다.
평왕부는 이미 예전의 모습을 잃은 듯했다. 원래 평왕부에 있던 내시들은 궁으로 돌아가 다른 곳으로 배치되거나, 심문을 받거나, 평왕이 안장된 후 능을 지키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시 몇 명만이 남아 평왕부를 지키고 있었다.
고능준은 별다른 제제 없이 평왕부 대문을 넘어섰고, 왕부를 따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그는 평왕부의 서재에 들어서자마자 더는 걷는 게 힘들었는지 느릿느릿 자리에 앉았다.
서재의 책장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고 탁자 위에는 붓 여러 개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었다. 벽에는 각종 서예 작품들이 걸려 있었는데, 전부 노력하여 부단히 학문을 탐구하라는 내용이었다.
전하께서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하다 잠드십니다.
전하께서는 유희를 즐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전하께서는 오직 독서를 좋아하시지요.
주위를 훑어보는 고능준의 눈에 늘 단정한 자세로 단 하루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소년이 아른거렸다.
없어졌어, 없어졌어. 참으로 무정한 세상이로구나.
고능준의 목구멍이 화끈해지면서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찌 천도는 이리도 무정하고 불공평한 겁니까. 어떻게 평왕을, 어떻게 우리 고씨 가문을 이렇게 대할 수 있느냔 말입니다!
파도가 연달아 밀려오고, 한고비를 넘겼더니 또 한고비가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마지막에는 아예 불을 지피는 장작까지 빼앗아가다니요.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군요. 세상살이는 이처럼 어려운 일이에요.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마음껏 흐느끼던 고능준은 문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깜짝 놀라 울음을 멈췄다. 그가 곧장 몸을 일으켜 호통을 치며 문을 열었다.
“게 누구냐!”
문밖에는 여인 하나가 놀란 표정으로 서 있었다.
“고 대인.”
진십팔랑이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고능준이 흠칫 놀랐다. 그는 눈물로 흐릿해진 눈가를 소매로 닦은 뒤에야 진십팔랑을 알아볼 수 있었다.
“진 낭자였군.”
고능준이 창피한 듯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실례했습니다. 저, 저는 대인께서 여기 계신 줄 몰랐어요.”
진십팔랑이 서둘러 예를 표했다. 뒤늦게 진십팔랑을 따라 들어온 내시들이 고능준에게 연신 죄송하다며 사죄했다.
“괜찮다.”
고능준이 급하게 눈물을 닦고 옷매무시를 정리한 뒤, 호기심 섞인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진 낭자가 여기는 어쩐 일로?”
진십팔랑이 고개를 숙였다.
“아직 여기에 남아 있는 서첩을 챙기러 왔습니다.”
고능준이 아, 하고는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편히 일 보시지요.”
진십팔랑이 예를 표하고는 서재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들도 자연스럽게 진십팔랑을 뒤따라 들어왔다.
“원래 여기 있던 내시들이 모두 궁으로 돌아간지라, 전하께서 서첩을 어디에 두셨는지 저희는 잘 모릅니다.”
내시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탁자 위에 놓여 있을 걸세. 전하께서 항상 책을 읽으실 때마다 모사를 하셨으니.”
진십팔랑이 먼저 탁자 앞으로 다가가면서 말했다. 내시들이 서둘러 탁자 위를 뒤적거리다가 진십팔랑이 말한 서첩을 발견하고는 기뻐하며 그녀에게 건넸다.
내시들이 탁자를 뒤적거린 탓에 뿌연 먼지가 곳곳에 날렸다.
“왜 청소를 하지 않는 것이냐? 전하께서는 더러운 것을 가장 싫어하시거늘!”
진십팔랑이 분노 섞인 목소리로 호통쳤다. 화들짝 놀란 내시들이 겁먹은 모습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진십팔랑도 자신이 추태를 보였다고 생각했는지, 급하게 서첩을 챙기고 곧장 서재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 낭자, 전하를 생각해 주어 고맙소.”
진십팔랑이 밖으로 걸어 나오자, 일부러 자리를 피해 문가에 서 있던 고능준이 말했다.
이제 평왕을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거늘.
진십팔랑은 조금 전 자신이 들은 울음소리가 생각나 주춤했다.
“고 대인.”
진십팔랑이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우선 다른 논쟁은 잠시 내려놓고, 하루빨리 평왕을 안장하고 시호를 정해야 합니다.”
태자 책봉, 수렴청정, 섭정 등 풍파가 연이어 지나는 동안, 평왕의 봉호는 여전히 정해지지 않았고, 죽은 황자에 관한 그 어떤 애도 의식도 치러지지 않았다.
평왕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것 같았다. 우스운 죽음을 맞이했고, 죽은 뒤에도 어떠한 추모조차 없었다. 친왕의 존엄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고능준이 엄숙해진 표정으로 진십팔랑을 향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낭자가 그리도 평왕 전하를 생각해 주니, 고마울 따름이오. 평왕 전하께서 비록 돌아가시긴 했으나, 덕분에 한스러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실 듯하오.”
한스럽겠지. 이렇게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것도 모자라, 사람들의 추모를 받지도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갔는데, 어찌 한스럽지 않을 수가 있으랴.
진십팔랑은 대답 대신 가볍게 답례하고 걸음을 옮겼다.
진십팔랑이 멀어져가는 것을 본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서 서재를 쳐다보았다. 내시들이 두려움에 떨면서 고능준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인들이 당장 이곳을 깨끗하게 청소하겠습니다. 더는 이곳을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내시들이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찧으면서 말했다.
고능준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미 이승을 떠난 사람이니, 그럴 필요 없어.”
고능준은 서재를 나간 뒤, 평왕부를 떠났다.
“노야, 거처로 모실까요?”
종복이 물었다.
“아니, 궁으로 가자.”
고능준이 말했다. 종복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마부를 재촉하려던 찰나, 고능준이 다시 그를 불렀다.
“아, 그리고 내 명첩을 진 상공에게 가져다주어라. 그자와 이야기를 좀 해 봐야겠다.”
“마마.”
내시 몇 명이 고개를 숙인 채 침전 안으로 들어오더니, 나지막한 소리로 침상 옆에 앉아 있던 황후를 불렀다.
조당에서 태후에게 삿대질을 당하며 온갖 욕을 들을 때는 반박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서 있기만 했던 황후였지만, 태후가 천자의 거처에서 나가라는 말을 했을 때는 단호하게 그럴 수 없다며 태후에게 맞섰다.
본궁은 폐하께서 책봉한 황후입니다. 본궁이 폐위되지 않는 한, 아무도 본궁에게 황제 폐하의 곁을 떠나라는 명령을 할 수 없습니다.
폐위?
태후는 당장이라도 황후를 폐위시켜 버리고 싶었지만, 말 한마디로 쉽게 황후를 폐위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즉시 조정 대신들을 불러 이 안건을 논의하도록 했지만, 전갈을 받은 대신 다섯 명 중 세 명이 입궁을 거절했고, 나머지 두 명은 지금 급선무는 태자 책봉이 우선이라고 했다.
조정 대신들은 자신들이 후궁 여인들의 암투에 관여할 만큼 한가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특히나 오늘 태후는 조당에서 체통도 지키지 않은 채 황후에게 삿대질까지 하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인 터였다.
여인이 홧김에 한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면 쓰나. 그리고 홧김에 한 말이 아니라고 해도, 태후는 평소 감정 기복이 심하고, 다분히 편파적인 결정을 내리곤 하지. 그러니 태후가 홧김에 한 말을 가지고 우리까지 덩달아 설친다면, 황실과 조정이 온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기를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겠는가.
그런 대신들의 반응에 태후는 화가 나서 펄쩍 뛰었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당장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마마, 태후마마께서 또 조회를 열겠다고 하셨습니다.”
내시의 말에 황후는 가볍게 웃고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서 한 번 들어나 보거라. 이번엔 또 무슨 이야기를 할지.”
일련의 일을 겪으며 황후는 다시 후궁을 장악할 권력의 일부를 되찾게 되었다. 내시가 알겠다며 물러가자, 침상 옆에서 황제의 손을 닦고 있던 안비가 고개를 들었다.
“마마, 태후께서 마마를 폐위시키겠다고 대신들을 협박하면 어떡하죠?”
안비가 물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폐위에 동의하지 않는 한,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황후가 혼수상태인 황제를 내려다보았다. 안비도 황후의 시선을 따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마마, 폐하께서 깨어나셔서 우리가 한 일을 아신다면, 마마께서는 필시 폐위되실 거예요.”
안비가 황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였다. 황후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럴 일은 없을 게다.”
깜짝 놀란 안비가 고개를 돌렸다.
“마마, 마마의 뜻은 그럼…….”
안비가 목소리를 낮추고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황후가 기가 찬다는 듯이 소리쳤다.
“본궁이 먼저 죽더라도, 네가 어떻게 죽을지는 알고도 남겠다!”
황후가 고함쳤다. 그러자 안비는 흠칫 놀랐다가 곧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마마, 신첩은 어떻게 죽습니까?”
“멍청해서 죽는 게지!”
“하지만 마마, 신첩은 정말 몰라서 그래요. 태의들이 폐하의 병세가 더 악화되지는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악화되지 않을 거라고 했지, 언제 깨어나신다고 했느냐. 만에 하나 폐하께서 깨어날 수 있었더라면, 정 낭자는 절대 입궁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당에 도착한 조정 대신들은 태후가 태자 책봉을 언급하지 않고, 평왕에게 시호를 추서하자는 이야기만 꺼내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물론 일부 대신들이 태자 책봉을 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리기는 했지만, 의외로 태후는 화를 내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저 가족을 잃은 평범한 노파처럼 슬픔을 감내하는 표정과 말투로 오늘은 태자 책봉을 논하지 않겠다며 거절했다.
“애가의 황손이오. 사람이 죽은 게 우선이어야 하지 않겠소? 다른 일은 애가가 장손을 먼저 안장한 뒤에 다시 논하는 게 어떻겠소?”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 봤을 때 그 누구라 해도 차마 상심한 조모를 붙잡고 정사를 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 조회에서는 더 이상 다른 논의들을 진행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대신들은 태후의 뜻대로 평왕의 시호를 결정했다.
본디 평왕이 벼락을 맞아 죽은 게 천벌이냐 아니냐를 두고 조정 대신들 간에 의견 차이가 있기는 했다. 그러나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오는 것을 보여준 덕에 평왕이 천벌을 받았다고 말하는 시호가 모두 기각되었기에, 이제 조정 대신들은 평왕의 시호에 대한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평왕의 시호는 회혜(懷惠)로 정해졌고, 사흘간 조회를 중단하며 평왕의 죽음을 추모하기로 했다.
다실(茶室)로 들어선 진소의 눈에 방 안에서 먼저 차를 마시고 있던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조정이 혼란에 빠졌으니, 대인과 인사치레는 생략하겠소이다.”
고능준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폐하의 총애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진 대인인 만큼, 그 은덕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겠지요. 하지만, 이 사람 또한 그렇습니다.”
진소가 실소를 터트리고는 아무런 대꾸 없이 자리에 앉았다.
“나는 선황의 부탁을 받았단 말이외다!”
고능준이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고 소리쳤다.
“그래서 조정을 고 대인의 집으로 삼아 쥐락펴락했던 겁니까?”
진소가 똑같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호통쳤다. 두 사람은 인상을 쓴 채 그렇게 잠시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 일을 논하려고 오늘 대인을 찾아온 건 아닙니다.”
먼저 정적을 깬 고능준이 진소 앞으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진소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엇이오?”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대가 끊기는 것은 못 보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우리 두 사람이 싸울 때가 아니지요. 나는 사직을 청하여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외다.
여기 명단에 적힌 사람들은 다 내 사람들이니, 이들을 지방으로 좌천시키십시오. 그리고 다른 유능한 인재를 뽑아서 제위에 오른 경왕을 보필하시지요.”
진소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진소는 종이를 펼치고 놀라움과 분노가 담긴 표정으로 그 위에 쓰인 이름들을 훑어보았다.
고능준이 몰래 심어둔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니! 게다가 나와 가깝고, 쭉 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자들까지 포함되어 있어!
“다들 경왕을 제위에 올리면 백성들이 고난에 허덕이고 나라가 망할 거라고 말하더이다. 그러나 보십시오. 아직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의분에 가득 찬 것처럼 말하는 관리들은 사실 제 이득을 따지는 것일 뿐이지요.
실상 천자를 생각하고, 천자를 위한 일을 하는 사람이 나와 대인 외에 또 누가 있겠소이까? 그러니 우리 둘이서 마음을 허투루 쓰지 않고 힘을 합친다면, 어떻게 진혜제, 진안제 때와 같은 난세가 찾아오겠습니까? 어떻게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를 수 있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일과 사람은 다 비슷하다고는 하나, 어떻게 모든 일의 결과가 다 똑같겠습니까? 아니, 같은 사람에게 같은 일을 하라고 해도, 결과는 충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능준은 진지하게 말을 이어 갔다.
“이 선택이 더 낫네, 저 선택이 더 별로네를 따지기 전에, 사실 옳고 그른 선택이란 이 세상에 없다는 것부터 알아야지요. 일단 그 자리에 걸맞는 사람을 앉히는 게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선택이 옳았는지는,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겁니다. 강직한 신하가 될지, 권력을 남용하는 간신이 될지, 충의를 다하여 태평성대를 이어갈지, 아니면 난세를 불러올지는, 다 사람 하기 나름이지 않습니까.
백성을 대신해 목소리를 낸다고요? 그럴 리가, 우리 같은 관리들은 백성의 마음을 이용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다들 저마다의 신념과 정의가 있거늘, 누가 옳고, 누가 그른지를 어떻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백성이라, 이제야 백성을 논한다고요? 저들은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 따위를 두려워하는 게 아닙니다. 다들 이 판국에서 떨어질 콩고물을 바라거나, 좋은 자리 하나 꿰차려는 생각들뿐이지요.”
고능준의 말이 끝나자, 진소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그건 고 대인의 생각일 뿐이오.”
고능준이 너털웃음을 터트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게 바로 제 생각이지요. 그리고, 나는 우리 고씨 가문이 영원히 황실의 외척이길 바랍니다! 진 대인, 그럼 먼저 일어나겠소이다.”
고능준은 망설임 없이 일어나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다실 안이 조용해지자, 진소는 손에 쥔 명단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종이를 고이 접어 소매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윽고 집에 도착한 진소는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기도 전에 또 궁에서 온 전갈을 받아야 했다. 진소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전갈을 받들고 궁으로 향했다.
태후가 진소를 황제의 침궁으로 불렀다.
“황후, 잠시 물러나 있게.”
태후가 말했다. 황후는 단정하게 예를 표한 뒤, 별말 없이 자리를 비켜주었다.
“진 대인, 폐하를 한 번 보시구려.”
태후가 황제의 침상 옆에 걸터앉아 황제를 바라보았다. 진소도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두 눈을 감은 채 조용히 침상에 누워 있는 황제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황상이 후손에 대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는, 그대도 잘 알고 있겠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진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요. 폐하께서는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시며 제 앞에서 눈물을 흘리신 적도 있었습니다.
“황상은 대가 끊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자신의 향불을 밝혀 줄 사람이 남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소. 황상이 바라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피가 섞인 친 혈통이 이 강산을 이어가는 것뿐이지.
진 대인, 저들은 모두 경왕이 황제가 될 수 없다고, 양자 입적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말하고 있소. 그런데 이 늙은이는 도무지 모르겠군. 저들이 생각하는 최선이, 누구를 위한 최선이오? 진 대인, 가슴에 손을 얹고 한번 말해 보시구려. 황상이 쓰러지지 않았다면, 과연 양자 입적을 윤허했겠소?”
당연히 아니지요.
진소가 말없이 침상 위에 누운 황제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소매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진소의 모습을 보던 태후는 지금이 가장 중요한 한마디를 해야 할 때라고 생각되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진 대인, 저들이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겠다고는 하나, 그렇다면 훗날 경왕의 자손들은 어쩌란 말이오?”
경왕의 자손?
진소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태후를 쳐다보았다.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잖소. 다들 잊은 게지, 경왕이 어렸을 때 얼마나 총명했는지. 평왕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어.”
태후의 눈가에 눈물이 비쳤다.
그랬지요.
진소는 아득히 먼 옛날에 본 것 같던 어린 이황자의 모습을 떠올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그때의 귀엽고 영리한 어린 이황자의 모습은 이제 생각나지도 않는구나. 하지만 예의 바르고 폐하와 슬기로운 문답을 나누던 이황자의 모습은 눈앞에 선해.
“경왕은 선천적인 바보가 아니라 다쳐서 바보가 된 것이오. 그런데, 경왕이 낳을 아이들도 바보겠소?”
태후가 이어서 말했다.
“마마, 지금 마마의 말씀은 경왕이…….”
진소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태의를 부르자, 고개를 숙인 채 잰걸음으로 들어온 태의가 말했다.
“경왕 전하께서는 올해 열한 살이시며, 신 등이 살펴본 결과 자손을 이어 가실 수 있는 몸이십니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니!
진소의 표정이 급변했다.
편전 안에서 고개 숙인 내시를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손을 이어 갈 수 있다고…….
“일이 예사롭지 않게 돌아가고 있어. 경왕이 아들을 낳을 수도 있다는군.”
“누가 벌써 아들이래? 딸일 수도 있는 거잖나.”
이때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짝이 부서졌다. 안에서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누구요!”
안에 있던 학생들이 화가 난 표정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본 학생들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겁에 질렸다.
팔짱을 낀 채 문에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바로 고 관인이었다. 그가 험상궂은 표정으로 방 안의 학생들을 노려보았다. 고 관인의 곁에 있던 수하들도 학생들을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로 노려보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즐겁게들 하실까? 나도 그 즐거운 이야기 좀 듣고 싶은데.”
고 관인이 느긋하게 말했다. 학생들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고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경왕을 비웃었으니, 이는 죽을죄를 지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학생 한 명이 다리를 바들바들 떨면서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쓸모없는 놈들!”
고 관인이 냉소를 보이고는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떠났다.
“이쯤 되니, 그 정가 놈이 대단한 것 같기도 해. 짜증 나는 놈이긴 하지만 보통 배짱이 아니었어.”
고 관인이 말했다.
“다 관인께서 아량이 넓으신 덕입니다.”
수하들이 입을 모아 아첨했다. 고 관인이 떠나자, 안에 있던 학생들이 우르르 밖으로 몰려나왔다.
“어서 가자, 빨리!”
“그나저나, 고 관인이 덕승루까지 오는 걸 보면, 이 일이 어떻게 될지는 이미 정해졌다는 거 아니야?”
학생들이 수군거리면서 얼른 자리를 피했다.
“언니, 제가 악보 챙기는 걸 깜빡했어요.”
춘령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 왜 그렇게 덤벙대.”
다른 시녀가 핀잔을 주었다.
“다녀와.”
앞서 걸어가던 주 낭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춘령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재빨리 왔던 방향으로 뛰어갔다.
주 낭자가 다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때, 등 뒤에서 춘령의 비명이 들려왔다.
“이년이 눈깔이 삐었나! 어딜 보고 다니는 거야!”
수하가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 춘령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그러더니 뺨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발길질까지 하려고 발을 들었다.
춘령은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연신 사죄하면서도, 수하의 발길질을 피할 배짱이 없어 겁에 질린 얼굴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관인, 부디 관용을 베푸시지요.”
주 낭자가 외쳤다. 성가시다는 듯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던 고 관인이 고개를 돌려보자, 잰걸음으로 다가오는 주 낭자가 보였다.
시종의 발길질에 얻어맞은 춘령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 관인.”
가까이 온 주 낭자가 춘령의 옆에 서서 몸을 낮추고 예를 올렸다.
“소인이 대신 사죄드릴게요.”
고 관인이 주 낭자를 쳐다보다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웃었다.
“주 낭자였군요. 어이쿠, 제가 감히 주 낭자의 사죄를 받을 수 있습니까. 도리어 제가 낭자에게 사죄해야지요. 그러니 부디 낭자의 은인께 좋게좋게 말씀해 주시길 바랍니다. 저도 벼락에 맞아 죽을까 봐 두렵거든요.”
주 낭자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던 별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고십사,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가?”
진호가 문가에 서서 눈썹을 치켜세우며 소리쳤다. 예상치도 못한 사람을 덕승루에서 마주치자, 고 관인이 의아한 얼굴로 대꾸했다.
“이런 우연이 다 있나. 진십삼, 자네도 여기 있었는가?”
고 관인이 진호의 등 뒤를 흘깃 엿봤다. 젊은 사내 일고여덟 명이 별실 안에 앉아 있는 모습이 보이자, 고 관인은 흥미로운 듯 눈썹을 꿈틀대며 물었다.
“여기서 무슨 이야기를 그리들 재밌게 하는가?”
진호가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와서 좀 들어보겠나?”
고 관인이 잠시 진호를 바라보다가 헤헤 웃었다.
“그럴 줄 알았어. 진십삼, 나는 자네가 아둔한 사람이 아닐 거라 생각했네.”
별실 문이 닫히고, 복도는 다시 조용해졌다.
춘령은 바닥에서 일어나면서 한쪽 손으로 조금 전에 맞은 어깨를 움켜쥐었다. 춘령이 고통으로 낮은 신음을 내자, 넋을 놓고 있던 주 낭자가 정신을 차렸다.
“조심 좀 하지?”
다른 시녀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투덜댔다.
“그, 급해서 그랬어.”
춘령이 울먹였다.
“괜찮아. 다음부턴 조심해.”
주 낭자가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춘령이 서둘러 주 낭자의 뒤를 따라가며 조용히 말했다.
“아씨, 진 공자님이 아씨를 위해서 나서주셨어요. 고 관인이 아씨한테 뭐라고 하지 못하도록요.”
진 공자님은…….
주 낭자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진 공자님은 나를 위해서 나선 게 아니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마.”
진 공자님은 은인 얘기, 벼락 얘기가 나오고 나서야 안에서 나왔으니까.
정 낭자가 그토록 힘들게 세상 사람들 앞에서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일을 증명한 건, 단지 평왕이 천벌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야. 실은 사람이 번개를 불러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증명한 거고, 자신이 마음대로 누군가를 벼락 맞혀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 거야.
그런데 고 관인이 정 낭자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자신에게 벼락을 내려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니까, 진 공자님은 정 낭자의 험담을 듣다 못해 달려 나오신 거지.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위해서 나선 거고, 진 공자님은 그 여인을 지켜주려고 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주 낭자가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웃었다.
진 공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어.
“진안 군왕이 아직도 봉지로 나가겠다고 자청하지 않았다더군. 몇몇 황족들은 성 밖에 영험하다고 소문난 도관과 사찰에 찾아가서 폐하의 건강을 위한 향불을 올리고 있다던데 말이야.”
권문세가의 자제로 보이는 젊은 관리가 차분하게 말하자, 고 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십삼, 역시 자네 쪽이 이야기하기가 편하네.”
고 관인이 웃으면서 진호에게 말했다.
“편하다? 관인은 고 대인과 함께 떠나나? 아니면, 집안 여인들과 먼저 출발하나?”
진호가 고 관인을 힐끔 보며 말하자, 고 관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런 말은 듣기 거북하군.”
진호는 고 관인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진혜제, 진안제를 논하면서, 대신들이 권력을 남용하여 강산에 위기가 찾아올 거라고들 말하는데, 다들 외척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만 보이고, 황족과 종친이 권력을 남용하는 건 보이지 않는가 보군.”
진호의 말에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안제가 제위에 오른 뒤에는 당시 가장 가까운 종친이었던 계왕(稽王)이 그를 보필했지.”
한 사람이 말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아마 계왕도 뒤에 숨어서 권력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았을 것이야. 할 수만 있다면 아마, 제위까지 탐냈겠지.”
다른 사람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고 관인이 팔꿈치로 진호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야, 다들 지금 누굴 얘기하는 거지?”
진호는 그런 고 관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진안 군왕이 봉지로 나가는 것을 자청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연대 서명을 해서 상소문을 올려야 하네. 그를 봉지로 내보내 달라고.”
진호가 진지하게 말했다. 고 관인이 혼자서 턱을 쓰다듬다가 미소를 지었다.
별실 안의 사람들은 술을 몇 잔 더 기울인 뒤에 자리를 떠났다.
고 관인이 진호를 붙잡고 웃으면서 말했다.
“십삼, 이리 좀 와 보게. 한 번 만나기도 힘든 사람을 이렇게 우연히 마주치는 게 바로 인연이고 하지? 우리 잠시 앉아서 이야기 좀 나누는 건 어떻겠나? 술은 내가 사지.”
“내가 덕승루 술값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해 보이나? 술만 사면 뭐하나, 기녀가 없는데.”
진호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대꾸하자 고 관인은 하하 웃으며 상등 별실로 걸음을 옮겼다.
“여봐라, 아무도 없느냐? 가서 영롱(玲瓏)을 불러오거라. 영롱의 비파 연주로 흥을 돋워야겠다.”
문가에 서 있던 점원이 불안해하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기, 그게, 영롱 낭자가 선약이 있어서요.”
젠장, 왜 또 이런 일이 일어난 거야?
점원이 속으로 욕을 했다.
“그런데 영롱 낭자는 정말로 선약이 있어서 그런 거지, 다른 건 절대…….”
점원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이다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격노한 고 관인에게 뺨을 맞았다.
“내 앞에서 썩 꺼져!”
고 관인이 호통쳤다. 바닥에 고꾸라진 점원이 정신을 못 차린 채 넋을 놓고 있자, 고 관인의 수하 두 명이 그를 양쪽에서 붙잡아 일으켰다.
“다른 게 있는 게 아니라고?”
고 관인이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때리더라도 얼굴을 때리지는 말아야 하고, 욕을 해도 아픈 곳을 건드리지는 말아야 하는 법이다. 다짜고짜 뺨부터 맞은 점원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때의 화괴 다툼 이후로, 고 관인은 평소와 다름없이 덕승루를 찾았다. 이는 그가 그 일을 전혀 개의치 않아 한다는 뜻을 보여주기 위함이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그가 그 일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주길 바라서였다. 하지만 그게 남들이 면전에 대고 그 이야기를 언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관인, 고 관인, 소인이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점원이 금방이라도 바지에 오줌을 쌀 것 같은 표정으로 손을 모아 싹싹 빌었다.
작은 소란 때문에 주위의 시선이 고 관인의 무리를 향해 꽂혔다. 별실의 몇몇 사람은 고개를 빼꼼 내밀고 밖을 살피기도 했다.
“괜한 소란 피우지 말게. 당장 내일이라도 경성을 뜨고 싶어 그러는가?”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진호는 고 관인이 당장 내일 경성에서 쫓겨나든 말든 상관없었다. 하지만 멍청한 고 관인이 정말 내일 경성을 뜨게 된다면, 분명히 오늘의 치욕 또한 정 낭자 탓을 하며 정 낭자를 더욱 미워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꼭 이렇다니까. 정 낭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결국에는 모든 원망이 정 낭자에게 향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는 인간이든, 우스갯소리를 하다가 얼떨결에 낭자에게 불똥을 튀게 하는 놈들이든, 다 똑같아.
“이 몸은 어차피 경성을 뜨게 될 텐데, 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안 되나? 자네는 이가 적으나 많으나 간지러운 건 똑같다는 속담도 몰라?”
고 관인이 냉소를 보였다.
“고 관인.”
꾀꼬리 같은 맑은 목소리가 저편에서 들려왔다. 모두가 고개를 돌리자, 칠현금 연습을 마친 주 낭자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영롱 언니 대신, 소녀가 관인을 위해 보잘것없는 재주를 보여 드려도 되겠는지요?”
주 낭자가 예를 표하며 말했다.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 낭자라면 제가 감히 모시지 못할 텐데요.”
주 낭자가 다시 한번 예를 표하고는 고개를 들고 싱긋 웃었다.
“지난번 일은 이 아형이 실례했어요. 아형이 어리석어 본분을 잠시 잊었네요. 부디 관인께서 넓은 아량으로 너그러이 봐주시기 바랍니다.”
고 관인은 예상치 못한 주 낭자의 반응에 의심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정씨 년이 또 주 낭자를 통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가?
“주 낭자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쳤다고 하니, 안으로 들게.”
진호의 말에 고 관인의 추측이 끊겼다. 주 낭자는 진호를 쳐다보지 않고 알겠다고 대답한 뒤, 먼저 별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지금 뭐 하는 거요? 나는 남이 남긴 걸 주워 먹는 취향이 아닐세.”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리고 진호에게 말했다.
“웃기는 소리군. 이런 곳에 깨끗한 게 어디 있다고. 어차피 다 즐길 거리일 뿐인데.”
진호가 코웃음을 치면서 대꾸했다.
“주 낭자는 정씨 가문의 사람이잖나.”
고 관인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주 낭자가 정말로 정씨 가문의 사람이었다면, 지난번에 관인이 벌인 그 창피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진호가 별실 중앙에 앉아 칠현금을 조율하고 있는 주 낭자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여인이 정 낭자와 무슨 상관이라고!
진호가 소매를 홱 뿌리치며 별실 안으로 들어갔다.
감미로운 칠현금 연주가 별실 안을 가득 채웠다.
“말하고 싶은 게 뭔가?”
진호가 고 관인에게 말했다.
고 관인이 곁눈질로 주 낭자를 흘깃 쳐다보았다.
정말로 신경 쓰지 않아도 되려나? 정말 주 낭자는 그 정씨 년과 티끌만큼도 관련이 없나?
고 관인은 황친인 진씨 가문이 항상 남을 업신여기는 태도를 몹시 싫어했지만, 진씨 가문의 그 녀석은 사리 분별을 참 잘하더라는 고능준의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좀 전의 사람들이랑 반나절을 토론한 결과가, 군왕을 봉지로 보내 달라는 청을 올리겠다는 건가?”
고 관인의 말에 진호가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관인은 어떤 고견이 있을지?”
고 관인이 웃었다.
“내가 책이랑은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긴 하지만, 잡초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는 옛말은 잘 알지.”
고 관인이 느릿느릿 말했다.
귓가에 들려오는 칠현금 연주 소리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이어졌다. 칠현금을 연주하는 사람은 마치 고 관인이 한 끔찍한 말을 전혀 듣지 못한 듯 보였다.
주 낭자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연주에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눈가에 눈물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지만, 그녀를 자세히 보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이야 쉽지. 당신네들이 예전에도 제거하지 못했던 뿌리를 지금 와서 무슨 수로.”
진호가 여유롭게 웃으면서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러게 말일세. 게다가 지금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쳐 낸다는 신의까지 그놈 곁에 붙었으니.”
고 관인이 대꾸했다.
“그놈과 정 낭자가 무슨 상관이라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자네가 죽을병에 걸린다 해도, 그 여인은 자네를 살려냈을 걸세. 남들과 똑같이 말이야.”
진호가 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자, 진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인가? 내가 정 낭자에 대해 아직 잘 모르는군.”
때마침 한 곡이 끝나고, 별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고 관인이 주 낭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하마터면 까먹을 뻔했군. 주 낭자는 정 낭자와 몹시 가까울 텐데, 정 낭자에 대해 잘 아나 모르겠네?”
주 낭자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관인, 무슨 말씀이세요. 정 낭자와 가까운 사람을 꼽자면, 소인의 생각에는 단연 진 관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가로 걸어가던 진호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드디어 내게 눈길을 주시네. 내게 염증을 느끼는 듯 냉랭한 눈빛이긴 하지만.
주 낭자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진호를 쳐다보았다.
“진 관인의 다리를 고쳐 준 사람이 바로 정 낭자라지요.”
진호의 차가운 눈빛에 몸이 얼어붙은 듯 움직여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주 낭자는 끝내 하려던 말을 내뱉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주 낭자는 그 말을 내뱉자마자 후회가 되어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 진 공자님이 나를 한 번이라도 더 쳐다봐 주시길 바라서?
아니면, 정 낭자가 나와 관련 없는 사람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굳이 이 자리에 나를 끌어들인 진 공자님이 너무 미워서?
전에는 내가 일부러 두 가문을 이간질한 거라고 말하질 않나, 오늘은 아예 내가 있는 자리에서 고 관인이 저런 위험한 말을 내뱉도록 유도하질 않나.
그리고 고 관인이 내 앞에서 장차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사람을 죽이겠다는 말까지 했으니, 앞으로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고 관인 쪽에 묶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정 낭자의 사람이 아닌 이상 영원히 고 관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된 셈이야.
진 공자님이 어떻게 나한테 이러실 수 있을까? 어쩜 이리도 독하게 나를 내다 버릴까?
아니, 아니야. 진 공자님은 비난받을 이유가 없어.
누구나 자신이 아끼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잖아? 더군다나 나는 진 공자님이 아끼는 그 여인을 고씨 가문의 원수로 만든, 천한 계집이니까.
“맞네. 다만, 나는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사람이야. 물론 어떤 자들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원수로 갚지만.”
별실의 문이 언제 닫혔는지도 모른 채, 주 낭자는 고 관인과 진호가 떠난 별실 안에 홀로 남아 있었다. 주 낭자는 칠현금 앞에 멍하니 앉아 아직도 귓가에 맴도는 진호의 말을 되새겼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주 낭자는 갑자기 온몸에 힘이 다 빠진 듯이 맥없이 바닥에 쓰러져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하기 시작했다.
“관인, 이만 돌아갈까요? 아니면 좀 더 둘러보다가 가실는지요?”
수하가 복도에서 고 관인에게 물었다. 고 관인이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 쪽은 이야기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모르겠네.”
그가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구석에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수하들이 재빨리 고 관인의 앞을 막고 그를 보호했지만, 튀어나온 사람은 다짜고짜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머리를 땅에 찧고 있었다.
“또 네년이냐? 지금 뭐 하는 게야!”
수하가 춘령을 알아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좀 전에 수하에게 맞은 뺨이 여전히 빨갛게 부어 있었다.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는 춘령의 모습은 몹시 불쌍하게 보였다.
“관인, 소인, 소인이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춘령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인?
“무슨 증인?”
고 관인이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물었다.
춘령이 무릎을 꿇은 채 고 관인 앞으로 기어갔다. 수하가 춘령을 막으려고 하자, 고 관인이 손을 들어서 수하를 제지했다.
“소인이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이 있습니다. 정 낭자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것을요.”
춘령이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 * *
“소인이 어찌 감히 고 관인께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덕승루의 다실 안, 춘령이 들어와서 무릎을 꿇은 채 자리에 앉은 고 관인에게 예를 올렸다.
“벼락으로 허수아비를 죽이는 걸 본 게 아니고?”
고 관인이 입술을 삐쭉이며 물었다.
“아니에요, 아닙니다. 고 관인, 제 말씨를 잘 들어 보세요.”
춘령이 연신 손사래를 치면서 화제를 바꿨다.
말씨?
고 관인이 멈칫하더니 이내 춘령의 말뜻을 이해했다.
“강주!”
고 관인이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외쳤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강주 말씨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쩐지. 경성 기녀의 시중을 드는 몸종이 어떻게 그 정씨가 벼락을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걸 봤나 했다.
“설마 그 여인, 강주에서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는 게냐?”
고 관인이 조금 놀란 눈치로 물었다.
그 여인의 나이라고 해 봐야 고작해야 열몇 살 정도인데, 몇 년 전에도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면 도대체 몇 살 때부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한 거야?
“네.”
춘령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 관인이 강주 말씨를 못 알아들을까 봐 경성 말씨로 재차 대답했다.
“소인은 원래 강주 정씨 가문이 운영하는 도관에서 지내던 몸종이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정씨 가문에서 정 낭자를 도관으로 보내왔죠. 그런데 도관에 계시던 관주님과 정 낭자 사이에 무슨 다툼이 있었나 봐요. 데리고 있던 몸종과 정 낭자가 합세해서, 비바람이 몰아치던 밤에 번개를 불러와 벼락을 내려 관주님을 죽여 버리고, 저와 제 동생은 굶겨 죽일 작정으로 아주 먼 도관으로 보내 버렸죠. 천만다행으로 저희 자매는 도관에서 몰래 도망쳐 나왔는데, 도망치던 도중 제 동생은 궂은 날씨를 견디다 못해 병을 얻었고, 버려진 사찰에서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어요.”
춘령이 울먹이며 눈물을 훔쳤다.
그랬던 거로군. 고 관인이 손끝으로 탁자를 두드리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랬군.”
고 관인이 눈을 게슴츠레 뜨고 춘령을 내려다보았다.
“그렇다 해도, 단지 증인만으로는 부족해.”
춘령이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러고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관인, 관인께서도 어찌하실 수 없는 건가요? 소인은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이 너무 무서워서요. 그 여인이 평왕 전하까지 죽였다기에, 소인은 더욱 겁에 질려 차마 관아에 이 사실을 발고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목숨을 걸고 고 관인께 말씀드린 건데. 정말 고 관인께서도 그 여인을 어찌하실 수 없는 겁니까?”
춘령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이미 끝난 일이라 다시 언급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다시 언급한다고 한들 달라질 것도 없고.”
고 관인이 대꾸했다.
“소인이 증명할 수 있습니다. 소인이 얼마든지 증인으로 나설 수 있어요.”
춘령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열심히 말했다.
“너 혼자로 세상 사람들을 설득시키기엔 역부족이야.”
고 관인이 재차 안 된다고 말했다. 춘령은 망연자실한 모습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얼굴을 소매에 묻은 채 대성통곡했다.
“네가 그리도 오래 숨겨왔단 말이지. 그럼, 지난번의 일도 사실 네가 계획한 것이겠구나?”
고 관인이 갑자기 허를 찌르는 질문을 하자, 화들짝 놀란 춘령은 몸을 살짝 떨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잠시 뒤, 울음소리가 차츰 잦아들더니 춘령이 고개를 들었다.
“관인, 목숨만은 살려 주십시오.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소, 소인은 그저…….”
춘령이 바닥에 이마를 찧으며 사죄했다.
“너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정 낭자를 상대할 수 있다고 여긴 거고?”
고 관인이 춘령의 말을 이어서 물었다. 춘령은 허리를 숙인 채 몸을 떨면서 대답하지 못하고 울음을 삼켰다.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나를 과대평가했다. 지금은 내가 누굴 도울 처지가 못 되기도 하고, 네가 말한 그 정 낭자 때문에 나는 경성에서 아주 쫓겨날 판이거든.”
고 관인이 두 팔을 쭉 펼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춘령이 다급하게 고 관인의 앞으로 기어가며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관인, 제발 소인 좀 살려 주세요.”
춘령이 눈물을 흘리면서 애원했다. 고 관인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손끝으로 춘령의 작은 턱을 치켜들었다.
“좋다. 내가 경성을 떠날 때 너를 같이 데리고 가마. 같이 도망가자.”
고 관인이 미소 띤 얼굴로 말하고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자리를 떠났다.
“관인, 저 약아빠진 계집을 저대로 놔둬도 되겠습니까? 증인으로도 쓸모가 없어 보이는데.”
고 관인의 뒤를 바짝 따라온 수하가 안쪽을 돌아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고 관인이 피식 웃었다.
“내가 보기에는, 저년은 증인을 하겠다고 날 찾은 게 아니야. 저 얍삽한 계집년이 나와 정씨 년 사이에 한 줄을 그었으니, 잘 남겨 두면 두 번째 줄을 긋게 할 수도 있겠지. 남겨 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을 거야.”
다실 안에 있던 춘령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고 얼굴에 남은 눈물을 소매로 슥슥 닦았다. 그러고는 여유로운 모습으로 손부채질을 했다.
내가 고 관인을 만난 이유는 증인 따위를 서기 위해서가 아니야. 나를 잘 남겨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지.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고씨 가문과 그 여인이 손을 맞잡고 화해하며 나를 희생양으로 쓸 리는 없을 테니까.
같은 시각 고능준은 태후궁에서 태후와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태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폐하의 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신은 다시는 마마를 뵐 수 없다고 해도 괜찮습니다. 마마께서 고씨 가문 사람과 접촉하지 않는다면, 자연스럽게 황후도 송씨 가문과 접촉할 수 없겠지요. 그렇게 되면 마마께서는 현숙하고 덕을 갖췄다는 명성을 얻게 되십니다.”
“현숙하고 덕이 있다는 명성 한번 얻기 힘들구려.”
태후가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마마, 폐하께서 평소 느끼시던 고충을 이제는 아시겠지요?”
고능준이 웃으면서 술잔을 들이켰다.
오늘은 태후가 특별히 고능준을 위해 송별 연회를 연 날이었다. 태후가 직접 주최한 연회인지라, 조정 대신들도 굳이 나서서 연회를 막지는 않았다.
한숨을 쉬던 태후는 황제가 생각나 다시 미간을 찌푸리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경왕을 대신들에게 맡기자니, 애가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아.”
고능준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조정에는 진소가 있고, 신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경왕에게 다른 마음을 품는 자들은 없을 겁니다.”
고능준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이어갔다.
“하오나, 신이 마음을 쉬이 놓을 수 없는 점이 한 가지 있긴 합니다. 마마께서 조심해야 할 사람이지요.”
태후가 깜짝 놀라 자세를 고쳐앉았다.
“누구?”
“진안 군왕이요.”
고능준이 대답했다.
“그 아이가 그럴 리 없네. 여태껏 벌어진 일들은 다 황후 혼자서 벌인 짓이야. 위낭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 위낭은 경왕을 위해서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내어줄 아이인데, 어찌 그런 대역무도한 생각을 한단 말인가.”
태후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마마, 사람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고능준이 태후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마마, 조회에도 세 번 정도 참석하셨고, 근래의 정무도 모두 마마께서 보셨지요. 그 소감이 어떠십니까?”
태후가 멈칫했다.
“어떻긴 뭐가? 짜증 나고 힘들기만 하지.”
태후가 대꾸했다.
“하지만, 천하를 손에 쥔 느낌은 참 좋지 않으십니까?”
고능준이 웃으면서 물었다. 태후의 표정이 잠시 변하나 싶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사내들이나 하는 생각이지. 좋긴 뭐가 좋다고?”
고능준의 얼굴에 있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마마, 진안 군왕 또한 사내입니다. 예전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폐하께서 진안 군왕에게 중임을 맡기시기도 했고, 군왕은 조회에 올라온 정사를 평왕과 함께 논한 적도 있습니다.”
태후는 눈빛이 미묘하게 변하면서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평왕이 있으니, 진안 군왕도 다른 생각을 품지 않았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황후가 양자 입적을 제안했고, 조정 대신 중에도 그 제안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꽤 많지요. 마마, 역사적으로도 종친이 조정을 어지럽히고 반역을 도모한 일이 결코 적지는 않습니다.”
태후는 입을 꾹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고능준도 더는 덧붙이지 않고 소매에서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태후 앞으로 내밀었다.
고능준이 건넨 종이봉투를 본 태후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몸을 뒤로 내뺐다.
“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태후가 목소리를 낮추고 호통쳤다. 태후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과 두려움이 섞여 있었다. 고능준은 굳은 표정으로 태후를 바라보면서 작은 종이봉투를 더욱 앞으로 쭉 내밀었다.
“마마,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내리시지 않는다면 필시 환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마마께서는 차츰 늙어 가실 테고, 군왕은 점점 더 혈기왕성해질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미리 방비해야만 합니다.”
고능준이 집에 돌아오자, 고 관인이 긴장한 기색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고 관인이 고능준의 안색을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고능준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짐은 다 챙겼느냐? 네 어미와 다른 가족들은 먼저 가라고 했다.”
고 관인이 기뻐하면서 다 챙겼다고 대답하고는 고능준과 함께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서재 안에는 오랫동안 고능준을 기다린 식객들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태후마마께서도 대국을 더욱 중시하시네. 그리고 누가 마마의 친손자인지도 잘 알고 계시고.”
고능준이 담담하게 말하자 식객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기뻐했다.
“지금이 딱 시기적절할 때입니다. 젊은 관리들이 연합해서 진안 군왕을 봉지로 보내 달라는 상소문을 올렸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궁으로 불려와 태후마마의 설득을 들은 진안 군왕이 경왕부로 돌아가 음독자살하는 그림이 그려지겠군요.”
식객 한 명이 말하자, 다른 식객이 감탄했다.
“참으로 강직한 연의왕(燕義王)이 따로 없구먼!”
서재에 앉은 사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일제히 웃음을 터트렸다.
“나중에 우리가 조정 대신들을 연합해서 진안 군왕에게 꼭 절호의 시호를 정해 주세.”
“왕으로 봉합시다. 왕으로.”
“진안 군왕마저도 제 목숨을 내놓으면서 결백을 주장하는데, 감히 또 어느 종친이 딴마음을 품을 수 있을까요?”
“나중에 장강주가 또 양자 입적을 입에 올리면, 아마 제일 먼저 그와 담판을 지으려는 자들이 황족과 종친일 거요. 장강주가 양자 입적을 또 이야기한다는 건, 종친들을 사지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지.”
식객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얹으면서 웃고 떠들었다. 서재 안은 꽤 오랜만에 여유로움을 되찾은 듯했다.
“잠깐.”
고 관인이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고능준을 보며 말했다.
“아버지, 이번 일도, 혹시 모릅니다.”
사람들도 웃고 떠드는 것을 멈추고 고 관인을 쳐다보았다.
“고 관인, 안심하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절대로 실수할 리 없는 약입니다.”
한 식객이 말했다.
“태후마마께서 머뭇거리신다고 해도, 태후궁의 사람들에게 이미 잘 이야기해 두었습니다.”
다른 식객이 말을 덧붙였다. 고 관인이 손을 세차게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고 관인이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버지, 지금 경성에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방 안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정 낭자!
하지만 사람들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에이, 그래도 그만한 의술 실력은 없지 않을까요? 지금껏 본 바로는, 신선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사람이 그 낭자에게 잡다한 기술을 전수한 것처럼 보이던데요. 번개를 불러오는 것이며, 병을 치료하는 것이며, 정말 신선의 제자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해서 된 것들은 없었잖습니까.”
식객이 말했다. 고능준이 손을 들어서 식객들이 말하는 것을 제지했다.
“맞는 말이야. 뭐든 철두철미하게 준비해야지. 방심했다가는 큰코다치기 마련일세. 이미 여러 번 다쳤지 않나.”
고능준이 말했다.
“그럼 일단 그 여인부터 없애죠. 늘 말하지만, 일찍이 그년을 죽였어야 했는데, 그때 덕승루에서 괜히 머뭇거리는 바람에.”
고 관인이 씩씩대면서 말하자 고능준이 고개를 저었다.
“그 여인의 주변에도 사람이 있어. 게다가 항상 신중에 신중을 더하는 성격이지. 염탐한 자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 여인은 자주 출타하지도 않을뿐더러, 출타한다 해도 우리는 그 여인의 마차가 어느 것인지 알아볼 수 없다.
그리고 신비궁과 돌포탄도 만들어 내는 여인인데, 또 어떤 무시무시한 무기를 갖고 있을지는 모를 일이야. 그러니 그 여인을 직접 건드리는 건 섣부르고 무모한 일일 뿐이다. 괜히 일만 더 키워서 우리의 손해만 막심해질 거야.”
사람들이 수긍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럼 어찌하면 좋을까요?”
“우리의 목적은 그 여인이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일세. 그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해선 안 돼. 이 기회로 그 여인의 목숨까지 빼앗으려 들어서도 안 되고. 목적은 오로지, 그 여인이 진안 군왕을 진료하지 못하게 하는 것뿐이어야만 하네.”
고능준이 말하다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 일은 더없이 쉬운 일이 되는 게야. 그리고 이 기회에 진안 군왕의 죽음이 하늘의 뜻이라는 이야기도 덧붙일 수 있겠지.”
사람들은 고능준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우리는 그 여인을 죽이지 않을 걸세. 그러니 그 여인의 입에서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이 나오게끔 해야 해.”
고능준이 미소 띤 얼굴로 사람들을 둘러보면서 말을 덧붙였다.
진안 군왕을 치료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 여인의 입에서 나오게 만든다고?
“그 여인은 황후, 그리고 장강주와 함께 진안 군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자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진안 군왕이 죽어 가는 것을 멀뚱멀뚱 보고만 있단 말입니까?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고 관인이 눈을 크게 뜨고 의아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고능준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없다고? 이 세상에 그럴 리가 없는 일이 어디 있지? 누구나 다 취하는 것과 버리는 것이 있기 마련이거늘.”
해가 중천에 뜰 무렵, 정교랑이 정사낭의 손에서 금침을 뽑았다.
“사공자님, 약차 드세요.”
반근이 따뜻한 차를 정사낭에게 건넸다. 정사낭이 다치지 않은 손으로 차를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오라버니, 어서 떠나요.”
정교랑의 말에 정사낭이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누이, 정말로 휴가를 내야 해?”
“네. 앞으로는 침 치료 없이 탕약만 잘 챙겨 먹으면 돼요. 그러니까 오라버니도 강주로 돌아가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사낭이 아, 하고는 무릎을 매만지다가 다시 말했다.
“그래도 내가 경성에 남아 있는 게 좋을 거 같아. 어떻게 누이 혼자만 두고 가.”
정교랑이 대답하기 전에 황씨가 아이를 안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사공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다 여기 있잖아요.”
황씨가 정사낭을 향해 눈짓을 보내며 장난스러운 말을 덧붙였다.
“누이 말을 잘 들어야죠.”
정사낭이 웃음을 터트렸다.
맞는 말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고 해서 누이를 도울 수는 없지요. 그러니 누이의 말을 들어 누이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해지도록 해야죠.
“알겠어. 그럼 나는 관청에 휴가 내러 갈게.”
정사낭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사낭을 배웅했다.
“곁을 지킬 사람은?”
정교랑이 멀어지는 정사낭의 뒷모습을 보면서 시녀에게 물었다.
“있어요. 네 명이나 붙여 두었어요.”
시녀가 회랑 아래서 웃으면서 대답하고는 정교랑에게 다가왔다.
“아씨, 이제 활쏘기하실 시간이에요.”
* * *
작가의 말:
송나라를 세운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차남 조덕소(趙德昭)의 봉호가 연의왕(燕義王)입니다.
태조 조광윤이 죽은 뒤, 그의 아우인 태종 조광(趙光)이 즉위하면서 조덕소는 태자가 될 기회를 잃게 됩니다. 태종은 조덕소를 무공 군왕(武功郡王)에 봉하여 조회 때 재상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게 했죠.
그러나 태평흥국(太平興國) 4년, 태원 지역으로 출정을 나갔던 태종은 어느 날 밤 우연한 사건으로 잠시 군영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때 병사들이 아무리 주변을 수색해도 태종의 모습을 찾을 수 없자, 누군가가 덕소를 제위에 올려야 한다는 발언을 했죠.
수도로 돌아온 태종은 북벌의 상황이 좋지 않아 태원 전투와 관련한 장수와 병사들에게 오랜 시간 포상을 하사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조덕소가 태종에게 태원 전투에 참가한 장수와 병사들의 논공행상을 언급하자 태종은 격노하며 “네가 황제가 된 후에 포상을 해도 늦지 않겠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날 조회에서 물러난 조덕소는 곧바로 자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송태종은 조덕소가 자살했다는 이야기에 몹시 후회하여 곧장 그의 거처로 달려가 “바보야, 왜 이렇게까지 한 것이냐!” 하고 외치며 조덕소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통곡했죠. 그는 조덕소를 중서령(中書令)으로 추증하고 위왕(魏王)으로 봉하며 시호를 하사했습니다. 그 후에는 오왕(吳王)으로, 더 나중에는 월왕(越王)으로 추봉하기도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