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6화 (126/160)

-오늘을 위해-

“황후가 경왕은 천일지표가 없다고 했다는군.”

“천일지표가 뭔데?”

“쉽게 말하면 못생겼다는 뜻이지.”

“뭐? 못생겼으면 황제도 못 하나?”

“거 아둔한 사람 같으니라고. 경왕이 왜 못생겼겠나? 바보니까 못생겼지! 황후께서는 바보가 황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 거요.”

“바보가 어떻게 황제를 해? 황후께서 맞는 말씀을 하셨군!”

“그래도 경왕은 폐하의 유일한 혈통인데, 친자를 내치고 양자를 들여 황위 계승을 하고 싶겠소?”

세간은 황위 계승과 관련된 이야기로 왁자지껄했다.

“조당은 어떠한가?”

진 노태야가 물었다.

“조당도 어지러워졌습니다.”

노복의 대답에 진 노태야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당도 어지러워졌다고? 그건 좀 의외구나. 정말로 종친을 태자로 책봉하고자 하는 이가 있단 말이냐?”

진 노태야가 손에 든 잔을 빙글 돌리면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장강주가 황후의 제안에 동의할 줄은 아무도 몰랐겠지요. 그가 앞장섰으니, 고민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도 당연지사입니다.”

노복이 대답했다.

하긴, 무슨 일이든 맨 처음 나서는 사람이 없어서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태반이야. 누구든 먼저 앞장서기만 한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이해득실을 따지며 좀 더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지. 진소가 제일 먼저 나서서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겠다고 말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 아닌가.

진 노태야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그 뒤에는?”

노복이 쓴웃음을 지었다.

“태후께서 황후께 삿대질하며 욕을 하는 바람에 조당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어사대 관리들이 나서서 상황을 중재하고 조회를 중단했지요.”

조당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애들 장난이 아니고, 집안 다툼이 아니다. 그런데 태후가 툭하면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와 욕을 한다고?

이렇게 감정 기복이 심하고, 자신의 기분조차 조절하지 못하는 태후가 자신의 앞가림도 하지 못하는 천자를 손아귀에 움켜쥐고 수렴청정을 한다면, 훗날 조정이 얼마나 혼란스러워질지는 안 봐도 뻔하구나.

“태후가 그런 식으로 나오게 되면, 본디 아무 생각 없이 경왕을 태자로 세우려던 대신들도 다른 생각이 들기 시작하겠지. 태후가 또 점수를 잃었군.”

진 노태야가 갑자기 진소는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노야께서는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습니다. 조당이 혼란스럽다 보니, 모두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하고 계시지 않을까요.”

노복이 대답했다.

혼란스럽기야 하겠지. 원래는 섭정과 수렴청정, 이렇게 두 분파로 나뉘면 될 것을, 양자 입적 이야기까지 나왔으니. 이렇게 되면…….

“이렇게 되면 모든 게 뒤엎어지겠구나. 꽤 소란스러워지겠어.”

진 노태야가 중얼거리다가 미간을 찌푸리고 읊조렸다.

“황후는 왜 갑자기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냈을까?”

비록 황제의 친자가 바보라고는 하나, 황제의 대를 이을 유일한 혈통이다. 그런데 황후는 어째서 양자 입적을 생각했을까? 황후가 무슨 배짱으로?

황후, 배짱, 장순.

정교랑, 정교랑!

진 노태야가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설마 그럴 리가. 이건 무려 황태자 자리를 좌지우지하는 것이고,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일인데!

그 여인이 감히? 어찌 감히!

“공자님!”

진호가 다급하게 걸음을 옮기자, 깜짝 놀란 시녀들이 그를 불렀다. 하지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시녀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황후와 접촉했던 사람은 정 낭자밖에 없어. 그리고 정 낭자가 출궁하자마자, 황후가 조당에 가서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냈고.

정 낭자가 장순과 직접적인 교류는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 아는 사이긴 해. 서로 시녀를 한 명씩 맞교환했으니까. 장순이 결정적인 순간에 정교랑을 위해 나서서 입을 연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고. 장순은 항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나서서 말 한마디로 모든 상황을 반전시켰어.

황태자,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을 좌지우지하다니!

정 낭자가 그럴 리 없어!

더욱 빠른 걸음으로 걷던 진호는 대문을 나서고 나서부터 뛰기 시작했다.

종친 중에 양자로 입적할 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황후가 고른 사람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 자라 황자들과 비슷한 위치인 사람이 그 사람 말고 또 누가 있겠냐고!

정 낭자가 진안 군왕과 혼인하게 된다면!

황태자! 천자!

태후와 영영 풀지 못할 원한은…….

잘못도 없고, 잘못한 적도 없는데, 왜 항상 그 여인이 피하고 물러서야 하지?

그 여인이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피하지 않겠다면, 상대에게 맞서고, 상대를 넘어서는 방법밖에 없어.

이번엔 정말로 그 여인이야. 정말 그 여인이!

아니야!

진호가 갑자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아니야, 그 여인일 리가 없잖아. 나는 왜 또 그 여인을 의심하고 있는 거지? 왜 자꾸 그 여인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야.

거리의 소란스러운 소리가 진호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주위를 둘러보자, 그는 어느새 강가에 다다라 있었다. 진호는 발길을 따라 근처에 있던 노점상의 차일막 아래로 향했다.

이렇게 깔끔하고 준수한 청년이, 이런 길가에 있는 허름하고 작은 노점에 자리할 일은 없을 텐데.

노점 찻집의 주인장이 놀람과 불안이 섞인 표정으로 얼른 진호가 앉을 의자와 탁자를 꼼꼼히 닦았다.

“관인, 어떻게 준비해 드릴까요?”

진호가 손을 휘휘 젓고는 돈주머니 한 개를 주인장에게 던졌다.

“필요 없소. 잠깐 쉬다 갈 테니 방해하지 마시오.”

생긴 건 온화해 보였는데, 잔뜩 찌푸린 미간을 보니 괴팍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원래 부잣집 도련님들 성격이 이상하긴 하지.

주인장은 생각을 떨치고 돈을 세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비켰다.

진호가 탁자에 손을 올린 채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침착하게 생각하고, 어떻게 된 일인지 한 번 정리해 보자.

분명 황후가 나서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게 순조로웠어. 진소가 경왕의 태자 책봉을 청했고, 양견 일화를 말하면서 고씨 가문을 사지로 몰았지. 고능준이 사직을 청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태후가 수렴청정할 기회도 빼앗아버렸고.

태자의 자리가 보장되고, 황제의 혈통으로 대가 이어지면, 조당도 자연스럽게 여러 분파로 나뉘어 서로를 견제하며 한 사람의 권력 독식을 막을 수 있었을 거야. 이는 갑자기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병세가 위독해진 상황에서 가장 완벽하지 않지만,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국면이지.

하지만 황후가 갑자기 양자 입적을 언급하면서 모든 게 어지러워졌어.

양자 입적, 양자 입적이라니! 황후가 어찌 그런 생각을!

분을 이기지 못한 진호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옆에서 다른 손님에게 차를 우려 주던 주인장은 화들짝 놀라면서도,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쳐다보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진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누추하고 낡은 탁자를 잡고 있던 진호의 손등에는 시퍼런 핏줄이 솟아 있었다.

황제의 친자가 있는데도 굳이 양자 입적을 하려는 속셈이 뭘까? 황후가 왜 그런 생각을 했지? 황후가 두려워하는 게 뭐길래? 황후가 두려워하는 게, 태후밖에 더 돼?

후궁의 싸움 때문에 황제의 대를 어지럽히다니!

종친이라…….

진호가 냉소를 지었다.

황후가 말한 종친은, 궁에서 황자들과 함께 자란, 총명하고 유능한 진안 군왕이겠지?

경왕에 비하면, 칠척장신에 오뚝한 콧날과 날카로운 턱선을 가진 진안 군왕이야말로 천일지표를 가진 자가 아닌가.

진안 군왕, 무슨 일이 있어도 황궁이 있는 경성에 눌러앉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구나.

거리의 떠들썩한 소리가 진호의 귓가에 스치고, 진호의 시선이 머무르는 강 위에는 배들이 쉼 없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얘기 들었소? 조정에서 종친을 데려다가 황위를 계승하겠다는군.”

“황후께서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셨다던데?”

“정말? 황후께서 먼저? 남들에게 손가락질받는 게 두렵지도 않나?”

“그러게 말이오. 우리 셋째 숙부님의 처제의 둘째 큰할아버지는 아이를 못 낳아서, 그 댁 부인이 가산을 다 탕진해 가며 첩실을 들였다니까. 곧 죽어도 양자 하나 들이자는 말을 못 해서 말이오.”

“양자 입적이라. 평생을 쏟아 일군 강산을 그리 남의 손에 넘기기에는 너무 아깝지 않나. 세상에 그런 거저먹기가 어디 있소? 양자를 들이면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건데, 누가 그러고 싶나?”

사람들이 웅성웅성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던 진호가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돌렸다.

맞아. 세상에 그런 거저먹기가 어디 있다고.

폐하의 대를 이을 친자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자들이 어찌 감히, 창피한 줄도 모르고 어찌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폐하께서 병중이라 말씀을 하지 못하신다고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벌이는 건가? 폐하께서 멀쩡하셨더라면,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대신들을 질책하셨을 텐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대역무도한 짓을 저지르다니, 제대로 된 신하들은 다 죽어 없어졌구나!

진호가 또 한 번 세게 탁자를 내리쳤다. 주인장이 깜짝 놀라서 저도 모르게 진호를 쳐다보았다.

“차.”

진호가 짧게 말했다. 주인장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는 노점에서 가장 깨끗한 찻잔을 골라 차를 따른 뒤,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은은한 차향이 퍼지자, 진호의 시선이 다시 강가로 옮겨졌다.

황후는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양자 입적을 주장한 거지? 자신에게 무슨 후환이 닥쳐올지 생각하지도 않는 건가?

집에서는 오로지 효도만을 생각하고, 조당에서는 군주를 위한 충의만 생각해야 하거늘(在家思孝, 事君思忠. - <세설신어(世說新語)>). 황후는 어찌 공공연히 태후의 뜻을 거역하고, 황제에게 친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충불효의 오명을 짊어져 가며 양자 입적을 제안했을까? 도대체 무슨 배짱으로?

장순이 지지해 준다는 자신감에?

장순이라…….

진호가 찻잔을 매만졌다.

장순은 황위 계승과 관련된 일에 관여할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당연히 황후와 어떤 연관이 있지는 않을 터. 그런데 장순이 왜?

“사실 황후가 이런 결정을 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이유?

진호가 대화가 들려오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노점에 앉아 있던 네다섯 명의 사람들이 조용히 이 주제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의 옆에 깃발 한 개가 놓여 있었고, 깃발 위에는 철구직단(鐵口直斷)이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었다.

진호와 나머지 사람들이 미간을 찌푸리면서 점쟁이를 쳐다보았다.

“무슨 이유? 무슨 이유가 됐든 가업을 남에게 줄 수는 없지.”

“댁들이 뭘 안다고 그러시오? 황실의 가업과 자네가 말한 둘째 큰할아버지네 경우가 같을 수가 있나? 자고로 황실은 천명을 따라야 하는 법이거늘.”

천명?

“황후가 그 제안을 하기 전에 누굴 만났는지는 알고 있소? 정 낭자를 만났다고! 신선의 제자, 정 낭자 말이오! 태백성에 대해서는 알고들 있으신가?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가며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예고를 했다지. 이는 곧 황실의 가업을 이어받을 사람이 바뀔 거라는 뜻이오.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이니, 당연히 하늘이 점지한 천자가 누구일지도 알고 있는 게요.”

쨍그랑 소리가 점쟁이의 말을 끊었다.

사람들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청년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노점 안에 정적이 흐르고, 점쟁이는 자신의 깃발을 슬쩍 챙겨 들고 잽싸게 도망쳤다.

이런 시기에 조정을 논하고 황제의 적통을 운운하는 것은 반역죄로 목이 달아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어떤 종친은 천상학 책을 봤다는 이유만으로도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를 뒤집어쓴 전례가 있기도 했다.

하물며 이들은 서로 머리를 맞대고 누가 하늘이 점지한 천자인지를 논의하고 있었으니, 더는 숨 쉬며 살기가 귀찮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점쟁이가 냅다 도망치자, 나머지 사람들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한꺼번에 자리를 피해 달아났다. 불쌍한 노점 주인장은 그들을 쫓아가서 돈을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젊은이를 쳐다보았다.

“아이고, 관인, 소인은 저들과 무관한 사람입니다. 소인은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주인장이 떨리는 두 손으로 포권의 예를 표했다.

진호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렇구나. 그 사람들이 이용하려던 게 바로 이거였어.

작금의 시기에 황후가 갑자기 정 낭자를 궁으로 불러들인 뒤 양자 입적을 제의한 것은, 하늘이 점지한 천자라는 이야기로 백성들의 여론을 몰아가려 했던 거야. 정 낭자의 명망을 이용해서.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갔다!

그러게 내가 일찍이 말했었잖아. 진안 군왕은 정 낭자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 황후와 진안 군왕 둘 다 정 낭자를 이용하고 있어!

황후가 정 낭자를 만난 직후에, 양자 입적을 제안했다? 하, 제발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했는지 추측하는 이가 없기만을 바라야 하나. 태자가 위태로워질 거라는 말을 했으니, 하늘이 점지한 태자가 누구인지 말한 것도 당연한 일로 여겨질 텐데.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진 시강은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이미 거기까지 생각했을 거다. 황후가 양자 입적 이야기를 꺼낸 시기를 보면,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지.”

진 시강이 말했다.

“이건 다 황후와 진안 군왕이 미리 계산했던 겁니다. 태백성이 하늘을 지나간 그날부터, 두 사람의 계획은 이미 시작되었던 거라고요.”

진호가 말했다. 진 시강이 잠시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너는, 정 낭자가 두 사람의 계획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네, 정 낭자는 모를 겁니다. 정 낭자는 솔직하고 거짓말을 할 줄 모르니, 누가 정 낭자에게 물을 배짱만 있다면, 정 낭자 또한 대답할 배짱이 있는 것뿐이죠. 그들이 무엇을 위해 정 낭자에게 묻는 건지는 정 낭자에게 중요하지 않고, 신경 쓰지도 않아요. 정 낭자는 자기 할 말만 할 뿐이니까요. 말하는 이에겐 의도가 없어도 듣는 자가 마음을 어떻게 쓰는지에 따라, 행하는 이에겐 아무런 의도가 없었어도 구경하는 자가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니까요.”

진호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저도 모르게 손을 주먹 쥐었다.

“진안 군왕은 바로 정 낭자의 그런 점을 이용한 겁니다.”

진 시강이 진호를 쳐다보았다.

“십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에는 사심이 들어 있느냐?”

진 시강이 갑자기 물었다. 진호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쓴웃음을 보였다.

“아버지, 소자도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에게 몰래 상을 내리면 안 되고,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에게 몰래 벌을 내리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愛人以私賞之, 惡人以私罰之. - <관자, 임법(管子, 任法)>). 아버지의 눈에는 소자가 그런 사람이었습니까?”

진 시강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말은, 누구나 사심이 생기면 공평함을 잃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와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전이지만, 소자가 진안 군왕을 어떻게 평가해 왔는지는 아버지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단 한 번이라도 소자의 생각이 달라졌던 때가 있습니까?”

진호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진 시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황족들은 줄곧 폐하께서 진안 군왕을 궁에서 키우는 것을 못마땅해했지. 특히 진안 군왕이 장성한 후에도 경성에 남아 있는 것은 더더욱.

지금 상황을 보니, 그때 우리가 불필요한 걱정을 한 것도 아니로군.

“그럼 장순은 어떻게 된 게냐? 그는 우매한 백성도 아니거늘, 어찌 그런 터무니없는 천문 현상을 믿는 게야?”

진 시강이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진호가 입을 꾹 다물었다가 진 시강을 쳐다보았다.

“아버지,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물 한 방울의 은혜에도 넘치는 샘물로 갚고, 사소한 수고에도 허리 숙여 고마워한다죠. 혹시 그런 부류의 사람을 보신 적 있습니까?”

“음,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많지는 않지. 말로 하는 건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든 법이니까.”

진 시강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하자, 진호가 입꼬리를 올렸다.

“소자도 본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그런 사람이 세상에 딱 한 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어쩌면 두 명일 수도 있겠더군요.”

밤이 찾아오면서, 실내는 컴컴한 어둠 속에 잠겼다.

“전하!”

누군가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등불을 켰다. 탁자 앞에 멍하니 앉아 있는 진안 군왕의 모습이 등불에 비쳤다.

“전하, 다 쓰셨습니까?”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위에는 ‘신(臣)’이라는 글자 하나만 쓰여 있었다.

“전하! 더 이상 미루셔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 더 미뤘다가는, 만인에게 비난을 받으실 겁니다!”

막료가 애원하듯이 말했다.

황후가 양자 입적을 하겠다는 말이 광풍처럼 경성을 휩쓸었다. 안 그래도 긴장감이 감도는 조정은 또 한바탕 혼란에 휩쓸렸고, 조정 대신들과 황족, 종친들도 혼란에 빠졌다.

황족과 종친들은 모두 대문을 굳게 닫고 손님을 일절 받지 않았다. 혹여나 대역무도한 생각을 품었다는 비난을 받을까 봐서였다.

그리고 그들 중 단연 돋보이는 사람은 바로 진안 군왕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 황제의 눈앞에서 자랐고, 군왕의 신분으로 친왕부를 거처로 삼았으며, 황제의 신임과 태후의 총애를 얻은 종친.

그런 진안 군왕보다 양자 입적에 더 적합한 사람이 어디 있으랴!

황후가 양자 입적을 하겠다는 말은 너무 의외의 것이었다. 황제가 위독하고,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유일한 혈육인 경왕이 바보인 지금, 이 상황을 노린 황후가 종친인 진안 군왕과 도모하여 황위를 탐했다는 오명을 뒤집어쓴다면, 유생이나 백성 모두 다들 두 사람이 반역을 도모했다며 등을 돌릴 것이다.

이런 상황이니, 진안 군왕은 필시 상소를 올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했다. 자진해서 봉지로 나가겠다는 청을 올리고, 황위에 아무런 욕심이 없다는 것을 밝혀야 하므로.

“내가 가면, 육가아는 어떡하고?”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전하, 궁에 있는 모든 사람이 경왕을 극진히 모실 것이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실상 경왕이 황제가 된 것이나 다름없는데, 누가 감히 경왕을 함부로 대하겠습니까.”

막료가 다급하게 말하자, 진안 군왕이 피식 웃었다.

“그래, 우리 육가아가 황제가 되었으니, 아무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아무도 그를 사람 취급하지 않을 것이야. 자네는 궁에서 나온 이야기도 못 들었나? 태후 쪽 사람들이 육가아를 어떻게 대하는지? 육가아가 소리 지르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잠에 들게 하는 탕약을 강제로 먹이고 있다잖아! 그리고 태후께서 육가아를 어떻게 대하는데? 태후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가아의 몸이야. 폐하의 대를 이을 신분을 가진 몸. 궁에 있는 사람들은 육가아를 사람 취급하는 게 아니라, 물건 취급하는 게야. 원하는 일을 하고자 할 때 쓰는 도구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거라고!”

진안 군왕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막료가 시선을 내리깔고 한숨을 쉬었다.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들이 그렇게 한다 해도 경왕에게 문제 될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자들이 어떻게 경왕을 대하든, 경왕에게는 전부, 다 똑같을 테니까요.”

정성껏 돌봐 주든, 대충 돌봐 주든, 감정이 없고 더위와 추위도 구분하지 못하는 경왕에게는 다 똑같을 테니까.

“나에겐 다르다.”

진안 군왕이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나에게는 달라! 나는 그 생각만 하면 치가 떨리고, 육가아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고!”

막료가 가만히 진안 군왕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뭘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제는 전하께서 더는 경왕을 보살필 수 없으십니다. 그리고 그는 더 이상 경왕이 아니라, 태자이고, 황제입니다. 그런데도 전하께서 경왕을 돌보신다면,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살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진안 군왕의 말에 막료가 흠칫 놀랐다.

“전하, 지금 전하의 뜻은, 봉지로 나가지 않겠다는 말씀입니까?”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내 결백을 위한답시고 이렇게 경성을 떠나고, 경왕을 버릴 수는 없네. 나를 비난할 사람들은 실컷 비난하라 그러라지.”

진안 군왕은 말하다 말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본왕이 봉지로 나가겠다는 청을 올리면, 황위에 한 치의 욕심도 없다며 눈물 콧물이 쏙 빠지도록 억울함을 토로하면, 나를 향한 비난이 정말 사라질 것 같은가?

본왕이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본왕에게 숨은 의도가 있을 거라며 날 비난할 것이고, 본왕이 간다고 해도, 내가 마음에도 없는 행동을 하고, 체면을 차리기 위해 마지못해 떠나는 것이라며, 온갖 수작을 부려 명예를 얻는다고 비난하겠지.

그러니 본왕이 뭘 어떻게 하든 간에 날 비난하려는 사람들은 날 비난할 것이다. 왜냐면, 그들은 본왕이 뭘 해서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그저 본왕을 비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지. 그런 거라면 왜 굳이 그들의 비난을 신경 써야 하나? 나는 지금 내가 뭘 하려는지 아주 잘 알고 있고, 나 스스로 도리에 어긋나지 않은 행동이라고 자부하네.”

진안 군왕의 입가에 냉소가 번졌다. 진안 군왕을 쳐다보던 막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럼 전하께서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막료가 조용히 말했다. 진안 군왕이 탁자 위에 놓인 종이를 손으로 아무렇게나 뭉쳐 구겨 버리고는 한쪽 구석으로 던졌다.

“그런데 황후께서는 왜 갑자기 양자 입적을 하시겠다는 걸까요? 그리고 듣기로는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본 뒤에…….”

막료가 무언가 생각난 듯이 말끝을 흐렸다. 진안 군왕이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그야 쉽지. 정 낭자한테 직접 물어보면 되는 것을, 뭐하러 뒤에서 수군거리나?”

진안 군왕이 탁자를 손으로 짚고 몸을 일으켰다.

물어본다고?

막료가 놀란 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지금?

“전하, 해가 저물었습니다.”

막료가 말했다. 벌써 밖으로 걸음을 옮긴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본왕은 지금 비난을 받는 대상인데, 어디 벌건 대낮에 그 여인을 보러 갈 수 있겠는가? 그랬다가는 아마 사람들이 튀기는 침에 익사하고 말 게야. 본왕이 비난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긴 하나, 죽고 싶진 않아.”

깊은 밤, 정씨 저택에 무언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는 등불 하나가 흐리게 켜져 있었고 촛불의 흔들림에 따라 휘장에 비치는 그림자도 흔들렸다. 휘장 너머에 앉아 있던 황씨가 곤히 잠든 아이를 품에 안고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금세 사라졌다. 황씨는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아이를 품에 더욱 꽉 끌어안았다.

누군가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리자, 황씨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나요.”

범강림이 말했다. 황씨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보, 누, 누구예요?”

범강림이 쇠뇌를 다시 침상 머리맡에 걸어두었다.

“누이를 찾아온 사람이오.”

범강림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우리 편.”

시녀가 머리를 올려묶고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회랑 아래에 등불을 등지고 서 있던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이제는 담벼락을 오르는 게 아니라, 아예 담을 넘어서 다니시네요?”

진안 군왕은 머쓱한 듯 웃고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가 방 안쪽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는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폐를 끼쳤습니다.”

진안 군왕이 예를 표하자 정교랑이 답례했다. 시녀가 자리를 비키자, 진안 군왕이 안으로 들어갔다.

“언니, 이렇게 야심한 밤인데 둘만 있기는 좀 그렇지 않아? 큰 도련님이랑 같이 보시게 하는 건 어때?”

반근이 시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좀 그렇긴 뭐가 좀 그래. 예비 신랑 신부끼리 얼굴 보는 건데.”

시녀가 별일 아니라는 듯이 대꾸했다.

예비 신랑 신부!

반근이 무릎을 탁 쳤다.

아, 하마터면 잊어버릴 뻔했네.

“그런데 확정된 일은 아니잖아.”

반근이 중얼거렸다.

“무려 폐하께서 윤허하신 일인데, 확정된 거나 다름없지.”

시녀가 대꾸하고는 반근에게 어서 차를 우리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황제 폐하는 병세가 위독하셔서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계시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도 폐하의 윤허가 소용이 있나?

반근이 속으로 말하면서 자리를 떠났다.

“급하게 손님을 맞이하게 됐네요. 실례할게요.”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진안 군왕이 웃으며 등불 아래 비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정교랑의 새하얀 옷 위로 묶지 않은 검은 긴 머리가 자연스럽게 어깨선 아래로 떨구어져 있었다.

“실례하는 쪽은 나죠.”

진안 군왕이 답례했다.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황후께서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자는 이야기를 꺼내셨는데, 낭자는 알고 있었어요?”

진안 군왕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정말 황후마마께서…….

“역시 괜히 낭자에게 불똥이 튄 거였군요.”

정교랑이 웃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 이야기는 황후마마가 아니라 내가 먼저 꺼냈어요.”

진안 군왕이 경악했다.

문가에 앉아 있던 시녀가 눈이 휘둥그레진 채 고개를 들었다.

그럼 이 모든 게 아씨의…….

차를 들고 걸어오던 반근이 시녀의 안색을 보고는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진안 군왕은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잠시 고민하다가, 어쩐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왜요?”

“난 죽고 싶지 않으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랬던 거로구나. 경왕이 제위에 오른다면, 태후마마와 고씨 가문이 권력을 잡게 될 확률이 높다. 태후마마는 차치하고, 당장 고씨 가문부터가 분명 정 낭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여 버리고자 하겠지.

아니지, 그들이 해치우려는 사람이 어디 정 낭자뿐일까. 이미 나도 그들의 명단에 이름이 올라가 있을 텐데.

“그건 다 나중의 일이니, 지금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진 상공 등이 이미 고씨 가문의 폭주를 저지했고, 설령 고씨 가문이 낭자를 건드린다 해도 지금은 아닐 겁니다. 아마 경왕이 제위에 오른 지 한참 지났을 때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화를 면할 시간은 충분해요. 더 나아가 우리가 먼저 그들을 칠 수도 있고요.”

진안 군왕의 말에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내겐 그럴 시간이 없어요.”

삼백 년 후의 일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일은 변하고 있어. 새로운 황제가 나타났고, 새로운 역사의 수레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할 거야. 이 수레바퀴가 삼백 년 후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아주 작은 가능성도 놓칠 수 없어.

그녀의 부친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가르치고 키웠다. 그녀의 가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녀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마지막 희망을 남에게 걸 수도 없고, 나중이라는 말에 기대는 건 더더욱 불가능했다.

여기 있는 한, 난 내 눈앞에 놓인 상황만 볼 거야. 나에게는 만약이란 것도 없고, 나중이란 것도 없으니. 지금 내가 여기서 살아남게 된다면, 훗날에도 살아 있을 테고, 내가 여기서 죽게 된다면, 훗날에도 죽고 말겠지.

“하지만 양자 입적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고씨 가문과 태후도 물러서려 하지 않을 테고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진지하게 말했다.

“그건 모를 일이에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왜요?”

진안 군왕이 또 한 번 흠칫 놀랐다.

“지금은 태평성대니까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태평성대?

진안 군왕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천기(天機) 때문이 아니고요?”

진안 군왕이 웃으며 반신반의한 얼굴로 물었다.

천기는 누설하면 안 될 때도 있지.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리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돼.

정교랑은 대답 대신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경왕부의 쪽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가 닫혔다.

“전하.”

방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진안 군왕이 들어오지 않자, 막료가 직접 그를 찾아 나섰다. 시종의 말대로 막료는 뒷마당에서 진안 군왕을 찾을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진안 군왕을 발견하자, 막료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전하, 설마 정 낭자가 정말로…….”

진안 군왕이 경악한 막료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웃었다.

“황후마마께서는 고작 말 몇 마디로 누군가에게 설득되실 분이 아니네. 다들 각자 살길을 도모할 뿐이지.”

평왕도 죽고, 귀비도 미쳐버렸으니, 고능준과 태후에게는 황후나 정 낭자나 모두 똑같은 원수로 보이겠지.

“그렇다면, 두 사람이 정말로 제 살길을 도모하다가 이 방법을 생각해 낸 거라고요? 아니면 정 낭자가 어떤 다른…….”

막료가 추측하는 눈치로 묻자,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시선을 거두고 막료를 쳐다보았다.

“아니네. 정 낭자는 단지, 지금이 태평성대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하늘이 점지한 운명이나 뭐 그런 걸 줄 알았는데.

막료가 은근히 실망한 기색으로 시선을 떨궜다. 진안 군왕이 방으로 걸음을 옮기자, 막료가 서둘러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전하, 정 낭자의 말이 맞긴 합니다. 지금은 태평성대인지라, 양자 입적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닌 듯합니다.”

막료가 조용히 읊조렸다. 그러나 진안 군왕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멈추지도 않았다.

막료가 무언가 결심한 듯 이를 악물고 진안 군왕을 앞질러 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전하, 양자 입적이 실제로 추진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막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진안 군왕이 드디어 걸음을 멈췄다.

만약 양자 입적이 된다면, 경왕은 강산을 쥘 수 없다.

“이건 육가아의 강산이다.”

진안 군왕이 천천히 말했다. 막료가 고개를 들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전하, 경왕이 황제가 될 수 없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꿰차는 것을 보고만 있으실 겁니까, 아니면…….”

아니면, 직접 그 자리에 앉으실 겁니까.

여름밤에 불어오는 바람이 경왕부 사이사이를 조용히 쓸고 지나갔다.

“원조 형, 이쪽일세.”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한원조가 고개를 들었다. 정오의 햇빛이 너무 밝은 터라, 그는 위층 창가에서 자신을 부르는 동료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지 못했다.

“손님, 이쪽으로 드시지요.”

점원이 한원조를 반기면서 그에게 다가왔다. 한원조는 시선을 거두고 눈앞의 식당과 편액 위에 쓰인 태평거 세 글자를 바라보았다.

“관인께서도 이 글씨를 좋아하시나 봅니다. 무원산 비석에 새겨진 글씨만큼 정교하진 않지만, 그래도 이 글씨들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지요.”

점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한원조가 대답 대신 미소를 보이며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원조 형, 내가 밥을 사려고 했던 곳이 여기인데, 어때? 저번에 시 쓰는 내기에 져서, 내가 밥을 사기로 했잖나.”

별실 안에 있던 두 동료가 한마디씩 얹었다.

“좀 멀긴 해도, 이곳 태평거가 경성의 이름있는 식당들과 별반 차이가 없어.”

“가격도 만만치 않고.”

한원조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때, 갑자기 옆방에서 큰소리로 웃고 떠드는 소리가 전해져 왔다.

“누가 일부러 그자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한 거 아니야? 취한 척하면서 옥좌를 두드리라고.”

“옥좌까지 안 간 게 어디야. 정말 그자가 옥좌 앞까지 갔다면, 한쪽 눈을 감은 채 모른 척하면서 그를 나무라는 황제 대신 태후가 또 휘장을 찢고 나타나 삿대질하면서 욕을 했겠지.”

“욕? 에이, 아마 손찌검을 하지 않을까?”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웠을지도 모르지.”

그 말을 끝으로 옆방 사람들은 또 한 번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한원조와 동료들은 어색하게 눈을 마주치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옆방은 죄다 학생들 같아 보였는데”

한 동료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말에 거침이 없군!”

다른 동료가 고개를 저었다.

감히 나랏일과 조정을 웃음거리로 삼다니!

“저런 말이 나오게끔 했으니까 그렇지.”

한원조가 대꾸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두 동료가 화들짝 놀라며 연신 손사래를 쳤다.

“원조 형, 우린 이제 말을 가려서 해야 하네. 부주의한 말을 삼가야 해.”

“부주의한 행동이 있었으니까 부주의한 말이 나오지. 조정에서 먼저 그런 행동을 했으니, 우리도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라고.”

두 동료가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물었다.

“그럼, 원조 형은 강주 선생의 편인가?”

두 사람이 조용히 물었다.

“나는 덕행이 있는 쪽의 편을 들 뿐일세.”

동료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황실의 혈통과 덕행은 무관하지 않나? 특히나 지금은 폐하의 뒤를 이을 황자가 딱 한 분뿐이니.”

그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옆방의 누군가가 목청을 높였다.

“어째서 양자 입적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오? 왜 꼭 경왕을 고집해야만 하지? 다 태조의 자손인데, 다른 종친이라고 해서 안 될 건 또 뭐요?”

“굳이 혈통을 논하고자 한다면, 진안 군왕의 부친인 수왕의 혈통이야말로 태조의 적통이지.”

이 말을 들은 동료 두 명은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유학을 배우는 학생들이 조정의 일을 논하고, 조정 관리들을 즐겨 평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고, 하면 안 되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지나가는 말처럼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기도 하고, 그들의 논의나 평가가 조정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저들의 입을 단속하겠다고 나선다면, 당대의 황제가 가혹한 정치를 펼친다는 비난을 받게 될 터였다. 세상 어느 황제와 대신들이 그런 오명을 쓰고 싶어 할까? 더군다나 지금의 황제는 체면을 몹시 중요시하는 성격이었기에 더욱 그런 가혹한 정치를 펼칠 리가 없었다.

하지만 학생들의 논의가 점점 더 현실과 동떨어지고, 황제의 혈통까지 운운하자, 동료들은 더는 들어주지 못하겠다며 씩씩댔다.

“가세, 가자고. 이런 곳에 더는 있으면 안 되겠어.”

한원조가 웃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태평거를 나온 두 동료는 흥이 깨져버린 듯 풀이 죽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식재료를 사다가 저기 나무 아래서 낙득자재나 해 먹을 걸 그랬어.”

한 동료가 길가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른 한 명은 입맛도 사라졌는지 먼 곳을 내다보며 읊조렸다.

“벌써 세간의 논의가 이 지경까지 왔단 말인가. 보아하니 이번 태자 책봉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겠군.”

원래 이 주제에 대해서 입을 열지 않으려던 동료가 길가를 가리키던 손을 거두고 말했다.

“듣기로는 진 상공도 어느 쪽에 설지 모르나 봐.”

동료가 목소리를 잔뜩 낮추고 자신이 들은 비밀을 전했다.

“뭐라고?”

“진 상공은 경왕을 밀던 거 아니었나?”

한원조도 놀란 기색으로 반문했다. 앞선 동료가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말했다.

“원래는 그랬는데, 강주 선생께서 한마디 하셨거든.”

“뭐라고?”

한원조가 물었다.

“경왕을 제위에 올리는 것을 진혜제와 진안제 때와 비교해 보시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지금의 폐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지금의 조정을 어떻게 이끌어 가려는 건지 잘 생각해 보시구려.”

동료가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면서 말했다.

경왕은 바보이나, 태자로 책봉되면 훗날 황제가 될 것이다. 역사에도 경왕처럼 지능이 낮은 사람이 황제가 됐던 선례가 있긴 했다. 그러나 진혜제와 진안제가 제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황제의 권력이 바닥에 떨어지고, 몇몇 간신과 대신이 권력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두 황제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고, 반란이 끊이지 않아 강산의 운이 다했다.

“강주 선생의 그 말씀은, 누가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려 한다면, 폐하를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로 본다는 뜻이지.”

동료가 말을 덧붙였다.

술에 취해 비빈을 희롱했다는 이유로 비빈의 손에 죽임을 당한 그 황제. 어느 황제가 천고의 웃음거리와 비교당하고 싶을까!

“누가 경왕을 옹립한다면, 그자는 못된 마음을 품고 권력을 잡아 대주를 멸망시킬 간신이라는 뜻이군.”

“와,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누가 감히 경왕을 옹립하겠나? 강주 선생은 욕을 한번 했다 하면 정말 정신도 못 차릴 정도로 무섭게 하네.”

동료 두 명이 여운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멍하니 서 있자, 한원조가 박장대소했다.

“지금은 태평성대인데,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지. 그런 일을 벌인다면, 조정 대신들과 유림이 무슨 낯으로 성현을 공부하고 백성들을 마주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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