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감히-
정교랑이 돌아왔다는 소식에 주복이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당은 붉게 저무는 석양을 배경 삼아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여기, 여기, 그건 여기에 넣어야 해.”
“안 들어가면 괜히 쑤셔 넣지 말거라. 그냥 버리고 가면 돼.”
주 노야는 마당에서 사환과 여종들을 부리면서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떠나지 않아도 됩니다.”
주복이 주 노야에게 다가가 말하자, 주 노야가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교랑이 돌아왔어요.”
주복이 말했다.
등불을 환히 밝혀 둔 대청에서 주 노야는 식객들과 사환들의 말을 듣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진 상공이 태후를 이용해서 고능준을 내쫓으려고 해? 게다가 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도 반대했다고? 정말이지 배짱 두둑한 자로구나. 양견 이야기까지 꺼내면서 태후를 몰아붙였으니, 고능준이 조정에 남을 수 있는 구실을 원천적으로 차단한 셈이야.”
주 노야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진소가 섭정하는 것 또한 조조(曹操) 꼴이 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막료가 말했다.
“그게 무슨 대수라고. 조정 대신들은 진소가 조조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앞다투어 강직한 충언을 바치고 외로운 군주를 목숨 바쳐 보필할 생각이겠지. 어쨌든 바보를 태자로 책봉하려던 사람과 자기가 섭정을 하겠다며 태후에게 물러나라는 말을 한 사람이 각각 오명을 떠안은 셈이니, 나머지 대신들은 마음 편하게 어린 황제를 보필하며 깨끗한 신하 노릇을 하면 되지 않겠나. 누군들 청사에 이름을 남기고 두고두고 기억될 명성을 얻고 싶지 않을꼬.”
주 노야가 감탄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진 상공은 폐하를 위해서, 폐하의 혈통으로 강산을 이어가고자 한 것이니, 오명을 뒤집어쓰는 일을 감수하며 후환을 제거할 생각이로군. 그자는 절대 폐하의 성은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야. 나였다면, 절대로 진소와 같은 결정을 할 수 없었을 걸세.”
방 안의 사람들도 감상에 젖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 노야가 갑자기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하지만 그건 우리와 무관한 일이다. 교랑이 풀려났다는 건, 태후와 고씨 가문이 지금은 교랑을 손 볼 시간이 없다는 뜻이야. 일단 태자를 책봉하고, 수렴청정부터 시작하는 게 급선무라는 소리지, 교랑이 앞으로도 무사할 거라는 뜻이 아니다. 태자가 책봉되고 누가 정사를 보좌할지 결정된 후라면, 황실은 분명 교랑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주 노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재촉했다.
“어서 빨리 짐을 챙기거라. 밤사이에 경성을 나가 섬주로 향할 것이다.”
주복이 다급하게 일어서서 주 노야의 팔을 붙잡았다.
“아버지, 그야 모를 일이잖습니까.”
주 노야가 주복을 쳐다보았다.
“뭐가 모를 일이라는 것이냐?”
“태자가 책봉되고 누가 정사를 보좌할지 결정된 후에도, 교랑이 처단될지는 모를 일이라고요.”
주복이 주 노야의 눈을 응시하면서 천천히 말했다.
주 노야는 갑자기 머릿속이 펑 하고 터진 듯했다.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아 참, 그게 평왕이었지!
그렇다면, 이번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겠군.
이 일을 해결하는 건 쉽지만, 그 대가로 우리 주씨 가문의 미래를 맞바꿔야겠지.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그래, 맞아! 더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도 교랑은 사소한 일이라고 했어. 그리고 지금은 정말로 교랑의 말대로, 그때의 일이 사소한 일이 되어 버렸고.
설마, 평왕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닌가?
주 노야의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어머니, 보이십니까. 어머니께서 그토록 애지중지하시던 외손녀가 이런 괴물이었습니다!
“얼마나 좋으냐.”
고능준이 책을 내려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런 믿음직한 충신이 있으니, 폐하께서 얼마나 마음이 편하시겠느냐.”
고 관인이 다급하게 고능준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아버지, 태후마마께서 더는 조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하셨더니, 진소 그 망할 놈이 궁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합니다. 그놈이 정말 마마를 사지로 모는 게 아닙니까!”
“그런 말까지 했으니, 진소도 이미 자기가 끝난 걸 잘 알고 있겠지.”
고능준이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하면 됩니까?”
고 관인이 미간을 좁히고 물었다.
진소 그놈이 양견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고씨 가문은 이도 저도 못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어.
고능준이 웃었다.
“그야 쉽지.”
고능준이 상소문 하나를 고 관인을 향해 던졌다.
“네가 아비를 대신해서 주청을 올리고 오너라.”
뭐라고요?
의아한 얼굴로 상소문을 펼쳐 본 고 관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직을 청하다니!”
상소문을 건네받은 태후가 놀라서 소리쳤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진소 그놈 때문에 내 손자와 나를 내팽개치고, 앞으로는 신경 쓰지도 않겠다는 게냐!”
태후가 격노했다.
“이건 우리 방씨 가문의 황위이니라. 황권은 방씨 가문의 손에 있는 것이지, 대역무도한 간신들이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진소 그놈이 애가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둘러 나라를 망칠 사람이라고 욕을 했었지? 그렇다면 애가가 진소의 그 충심을 받아들여 그 목을 베어 버리겠다!”
고능준이 웃으면서 예를 올렸다.
“마마, 마마께서 받아들이실 것은 진소의 성의가 아니라, 폐하의 강산입니다.
진소의 말이 맞습니다. 경왕이 제위에 오르면, 만천하의 사람들이 우리를 비웃을 겁니다. 조정 또한 불안에 떨 테고요.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진소의 말대로 해야 합니다.
마마와 경왕을 위해서라도, 마마께서는 꼭 그리하셔야 합니다. 마마께서 진소의 섭정을 허락하시는 것은, 그의 뜻에 굴복해 윤허하시는 게 아니라, 방씨 가문이 무사히 대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태후가 흐린 시야로 고능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흘렸다.
“자네가 가면, 우리는 어떡하라고? 저들은 자네가 떠나기도 전부터 벌써 애가를 이리 못살게 굴고 수렴청정도 못 하게 하는데.”
“마마, 얻고 싶은 게 있다면, 먼저 내어주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이잖습니까.”
고능준이 고개를 들고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자가 달라고 했으니, 우리는 주면 그만입니다. 그렇게 달라고 해서 가지게 된 것을, 그자가 잘 지켜 나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고, 우리의 탓도 아닙니다.”
진소가 궁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지 하루 만에 태후가 근정전에서 조회를 재개했다. 내시가 고능준이 올린 사직 상소를 읽고 나자, 일순간 근정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이제 만족하시오?”
태후의 목소리가 휘장 너머로 들려왔다.
“마마께서 진정 현명하십니다.”
태후의 삐딱한 태도에도 진소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허리를 숙이고 예를 올렸다.
“신 진소는 경왕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시길 간청하옵니다.”
뒤이어 다른 대신들도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신, 경왕 전하를 황태자로 책봉하시길 간청하옵니다.”
더 많은 대신이 차례로 나와 무릎을 꿇고 청을 올리자, 태후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허하겠소.”
태후가 입을 열자마자, 문밖에서 내시 하나가 잰걸음으로 들어왔다.
“황후마마 납시오.”
황후?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돌렸다. 휘장 뒤에 있던 태후도 미간을 찌푸렸다.
“황후가 어찌 나랏일을 논하는 조당에 들어오는 것이오!”
어사대 관리가 나와서 말했다.
“폐하께서 위독하시니, 황후 또한 대리청정을 위해 조회에 들어올 수 있소.”
누군가가 어사대 관리의 말을 반박했다. 역사에 황후가 대리청정한 선례가 있기에, 어사대 관리는 뭐라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주춤했다.
어사대 관리가 주춤하는 사이, 황후는 이미 근정전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문밖에서 당직을 서는 내시들도 감히 황후의 앞을 막지는 못했다.
화려한 장식에 조복을 갖춰 입은 황후는 원래 황궁 내에서 서열 3위였지만, 가장 높은 서열이었던 황제가 쓰러지면서 자연스럽게 서열 2위가 되었다.
“황후, 전갈도 없이 어찌 조회에 나온 것인가?”
태후가 물었다.
황후가 대신들 사이를 가로질러 옥좌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황후는 태후에게 정중히 예를 올린 뒤, 몸을 돌려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본궁이 듣자하니 태자 책봉을 논하고 있다던데, 결론이 무엇이오?”
황후의 말을 들은 대신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황후가 정말로 어떤 결론이 났는지 궁금해서 물어본 게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 결론이 궁금했다면, 굳이 근정전까지 행차하지 않아도 조회가 끝남과 동시에 알 수 있었을 테니까.
“황후! 태자 책봉 안건은 이미 결정났네. 그러니 거처에 가서 조서를 기다리시게.”
태후의 호통에도 황후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물었다.
“누가 태자로 결정되었습니까?”
“당연히 경왕이지.”
태후의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애가가 아직 제대로 따지지 못한 것도 있는데, 감히 먼저 나서서 소란을 피워?
“경왕은 천일지표(天日之表: 하늘의 해와 같은 모습. 곧 제왕의 얼굴을 가리킴)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본궁은 동의하지 못합니다.”
황후가 말했다.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역시, 역시!
관리들이 속으로 외치면서 결례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들어 두 여인을 올려다보았다.
태후가 화를 참지 못하고 휘장을 들어 올리며 밖으로 나왔다. 조복을 입은 채 옥좌 앞에 대립한 두 여인은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었다.
“황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겐가?”
태후가 격노하여 소리치는데도 황후는 담담했다.
“경왕은 천일지표가 없고 정신이 온전치 않기에 태자로 책봉될 수 없습니다.”
더욱 놀란 조정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동시에 그들은 황후와 태후 사이의 간극이 엄청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황후가 불충과 불효의 오명을 무릅쓰고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할 정도라면…….
“그럼, 황후마마의 뜻은 어떠신지요?”
황후와 태후가 대치 중인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조정 대신들이 감히 끼어들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누군가가 정적을 깨고 물었다.
모두의 시선이 갑작스럽게 들려온 목소리로 향했다. 황후의 뜻이 어떻냐고 묻는 것은, 진소가 태후에게 태자 책봉을 청한다는 말만큼이나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말이었다.
누구지?
무수히 많은 시선이 사람들 사이를 뚫고 키 큰 사내에게로 향했다.
장순! 또 장순이라니!
올 게 왔다는 생각에 몸 앞으로 내려두었던 황후의 손이 미세하게 떨려오기 시작했다.
대단한 여인이로구나! 무려 장순을 설득하다니! 황후가 언제 장순을 설득했지? 무슨 말로 장순을 설득했을까?
장순은 혈통의 존비를 가장 따지고 가리는 유학자인데, 어떻게 양자 입적에 동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모든 사람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장순이 홀판을 든 채 침착하게 예를 올렸다.
“황후마마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장순이 두 번째로 질문했을 때, 하마터면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할 뻔한 황후가 정신을 차렸다. 황후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종친을 양자로 입적하고자 하오.”
종친, 양자, 입적!
황후가 조당에서 내뱉은 이 말에 거대한 폭발이 일어난 것처럼 경성 곳곳이 들썩였다.
* * *
작가의 말:
복의(濮議) 논쟁
송나라 인종(仁宗)은 후사가 없었기에, 그가 죽은 뒤 조정에서는 복안의왕(濮安懿王) 조윤양(趙允讓)의 아들인 조서(趙曙)를 양자로 들여 황위를 계승케 하였습니다. 그가 바로 송나라 영종(英宗)이지요. 그런데 영종이 제위에 오른 지 보름 만에 당시 재상이었던 한기(韓琦)가 영종의 생부, 즉 복안의왕에 대한 명분을 정확히 하라는 주청을 올려 조정에서 한바탕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문무백관이 팽팽히 대립하던 중, 영종은 생부인 복안의왕 또한 아버지라고 부르고 싶어 여회(呂誨), 여대방(呂大防), 범순인(范純仁) 세 사람을 지방으로 좌천시키고,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18개월 만에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였습니다.
조(曹) 태후 이야기
송나라 영종과 양모 조 태후의 사이가 좋지 않아, 조 태후가 재상에게 울면서 영종의 불효를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