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짱-
“설마 태후 쪽 사람들을 말하는 거야?”
주복이 몸을 반쯤 일으키며 다급하게 말했다.
“그건 안심해. 태후 쪽 사람들은 아직 너를 건드릴 수 없을 거야. 우선 네가 번개를 불러온 일 때문에 네 명망이 더욱 높아졌고, 지금 그들은 널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다. 그러니까, 네가 경성을 떠나기 가장 좋은 시기는 지금이야. 경성을 떠나 섬주로 가게 되면 아무래도 황궁과는 꽤 거리가 있을 테니, 그들이 무슨 짓을 벌이려 한다 해도 네가 경성에 있을 때만큼 쉽지는 않을 거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주복을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내가 말한 사람은, 그들이 아니에요.”
그, 그럼 혹시 진안 군왕을 말하는 건가?
주복이 이를 부득 갈며 속으로 생각했지만, 차마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진 못했다.
아마 내가 물으면, 곧이곧대로 그렇다고 대답하겠지? 난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아. 전혀 듣고 싶지 않다고!
이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이, 누이.”
범강림은 자리에 있는 주복을 신경 쓰지도 않고 곧바로 정교랑에게 말했다.
“궁에서 전갈이 왔어.”
궁에서?
주복이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범강림의 뒤로 두 내시가 회랑 아래에 서 있었다.
“정 낭자, 황후마마께서 뵙자고 하십니다.”
두 내시가 웃으면서 공손하게 예를 올린 뒤, 황궁의 전갈을 건넸다.
황후?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설마 네가 말한 사람이, 황후였어?
황후의 교지?
시녀가 내시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주복이 한발 빠르게 앞으로 걸어갔다.
“신의 결례를 용서하십시오. 시기가 시기인지라 신이 먼저 교지를 확인해야겠습니다.”
평왕이 죽고 황제가 위독하니, 황궁의 대소사를 통치할 권력은 자연스레 태후가 도맡게 될 것이고, 그런 태후의 배후에는 고씨 가문이 있었다.
조정이 혼란한 시기에는 허위로 성지를 전달하는 일이 간혹 있기도 했고, 정교랑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어도 연약한 여인 하나에 불과했다. 게다가 황궁은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정교랑이 황궁 안으로 들어가 무슨 사고를 당한다 해도 궁 밖의 사람들은 그저 멀뚱히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내시는 주복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손에 있던 교지를 그에게 건넸다.
주복이 교지를 받아 펼쳐 보니, 황후의 인장과 중서성의 서명날인이 보였다. 황후의 인장은 누군가가 몰래 가져다 쓸 수 있을지 몰라도, 중서문하성의 서명날인은 절대로 가짜일 리 없었다. 지금은 진소가 두 눈에 불을 켜고 중서문하성을 지키며 조정을 감시할 때라, 진소 측 사람이 중서문하성에 상주할 게 당연하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있는 한, 황궁의 태후나 고씨 가문이 함부로 황후를 빌미 삼아 허위 교지를 내려 정교랑을 음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주복이 교지를 접어서 다시 내시에게 건넸다. 교지를 받은 내시가 웃으며 주복을 향해 예를 표하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교랑은 벌써 몸을 일으켜 가만히 서 있었다.
“황후마마께서 무슨 일로 절 부르시죠?”
정교랑이 물었다.
“마마께서 낭자를 궁으로 모셔와, 진료를 청하고자 합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주복의 표정이 싹 변했다.
“풍질은 고칠 줄 모른다고 했을 텐데요. 이미 그날 말씀을 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의 누이는 절대로 폐하께 거짓을 고하지 않습니다.”
주복이 곧바로 대답하자 예상치 못한 반응에 내시의 표정이 굳어졌다. 정교랑이 앞으로 몇 걸음 내디디고 말했다.
“괜찮아요. 황후마마께서 부르셨으니, 소녀가 다녀와야죠.”
미쳤어?
주복이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너 미쳤어? 거길 왜 가!”
주복이 내시의 존재를 무시한 채 고함쳤다.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으니까.”
오라버니, 마음 편히 가져요.
정교랑이 주복의 소매 한쪽을 살짝 잡아끌자, 주복은 부드러운 깃털 한 개가 마음을 간지럽히는 듯한 느낌에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그는 입을 열어 뭐라 말을 하려고 했지만, 하려던 말들이 목구멍에 걸려서 입술까지 올라오지 못했다.
내시가 정교랑의 말에 몹시 기뻐하면서 혹여나 정교랑이 다시 안 간다고 말을 번복할까 봐, 서둘러 예를 표하고 정교랑을 마차로 모셨다.
“낭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태후의 눈을 피할 수 없었다. 황후가 중서문하성에 교지를 보내자마자, 태후는 바로 이 일을 알게 되었다.
“마마, 쫓아가서 막을까요?”
내시가 물었다.
“황후가 뭘 하려는 게야?”
태후가 손으로 미간을 짚은 채 물었다.
“황후마마께서는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살피고자 하십니다. 폐하의 호흡이 계속 불안정하나, 태의들은 죄다 속수무책이라고만 한답니다. 당초 진안 군왕이 경왕에게 가져다준 탕약이 심신안정에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고 하여,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상태를 진단한 뒤 비슷한 탕약을 처방할 수 있을지 묻고자 하신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그래? 그 탕약의 효과가 탁월하다는 건 애가도 들어 봤다만.
“그런 거라면, 데려오라고 해야지.”
태후의 말에 다른 내시가 불안한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마마, 아니 되옵니다. 황후께서는 분명 경왕이 입궁한 것을 보고, 마음이 급해져 폐하의 옥체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라는…….”
내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태후는 눈썹을 치켜세우며 내시의 따귀를 후려쳤다.
“당장 이놈을 끌고 가서 쳐 죽여라!”
태후가 호통쳤다.
내시는 겁에 질린 채 무릎을 꿇고 목숨을 애원했지만, 주위의 내시들이 서둘러 그 내시의 입을 틀어막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한 여인의 목소리가 밖에서 전해져왔다.
“제국 부인, 오셨습니까.”
내시들이 태후궁 안으로 들어오는 여인을 보고 예를 표했다.
“마마, 왜 그러세요?”
제국 부인이 태후에게 물었다. 부아가 치밀어 오른 태후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주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구나. 황상이 하루빨리 쾌차하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도 생기다니. 어찌 뚫린 입으로 그런 대역무도한 말을 할 수 있느냔 말이다.”
태후가 손으로 가슴을 내리치면서 한탄했다.
“황상은 나의 아들이니라. 애가가 이 몸으로 낳아 키운 귀한 아들이라고. 누가 애가더러 당장 황상과 목숨을 맞바꾸라고 한다면, 애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리할 것이야. 그런데 감히 애가 앞에서 그딴 말을 지껄여? 꼭 애가가, 황상이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황상의 옥체가 안 좋아지면, 애가는 얼마나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서!”
제국 부인이 태후를 따라 굵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마마, 그러니까요. 어미의 마음은 다 똑같죠. 폐하께서 쾌차하실 수만 있다면, 마마께서도 마음 편히 하루하루를 즐기실 텐데, 어디 지금처럼 제대로 드시지도 주무시지도 못하고 마음 졸이며 하루하루를 보내시겠습니까.”
태후가 제국 부인의 손을 맞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하오나 마마, 궁에서는 아무나 어미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모두가 저희처럼 폐하께 진심이지도 않을 테고요. 그러니 마마, 꼭 폐하의 침궁에 주의를 기울이셔야 하옵니다.”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여봐라, 황상의 침전에 사람을 더 보내거라.”
아무리 금실 좋은 부부라 해도, 큰 재난 앞에서는 각자 뿔뿔이 흩어지기 일쑤지. 부부가 어디 피를 나눈 모자만큼 가까울쏘냐?
그리고 황후는 애초에 기댈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 지금은 일단 급한 불부터 끄고,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황후와 결판을 낼 것이야!
태후가 이를 악물었다. 내시들이 태후의 명령에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태후궁 밖으로 나갔다. 내시들이 모두 나가자, 제국 부인이 직접 차를 우려 태후에게 건넸다.
“사실 신첩은 폐하께서 깨어나시는 게 두렵기도 합니다.”
제국 부인의 말에 태후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마마, 신첩은 폐하께서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걱정이옵니다. 평왕이 폐하의 눈앞에서…….”
제국 부인이 서둘러 말을 덧붙이고 눈물을 보이자 태후가 통곡했다.
“황제가 바로 그 일 때문에 분통이 터져 이 지경이 된 것 아니더냐.”
자기 아들이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목격한 아버지보다 고통스러울 사람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폐하께서 후손을 잇기 워낙 힘드셨다 보니, 궁에 있는 아이들을 진귀한 보물 대하듯 아끼시던 게 눈에 선합니다.”
제국 부인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자, 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이들 중 한 명이라도 열이 나거나 머리가 아프다고 하는 날에는, 아이 걱정에 하룻밤을 꼬박 지새운 적도 있었지.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서 어디 다치기라도 하면, 꼭 자기가 다친 것처럼 속상해했어.”
살짝 스치거나 넘어져도 그리 속상해했는데, 멀쩡하던 평왕이 자기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본 황제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할지.
태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대성통곡했다.
“그래도 지금은 경왕이라도 있으니, 폐하의 혈통이 아예 끊겼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마마, 경왕을 꼭 잘 보살피셔야 합니다.”
제국 부인이 울먹이면서 말했다. 경왕 이야기가 나오자, 태후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눈물을 멈췄다.
“경왕은 잘 있느냐?”
태후가 묻자, 궁녀가 서둘러 대답했다.
“아주 잘 계십니다. 식사를 마치고 잠시 뛰어노시다가, 지금은 잠드셨습니다.”
태후가 한시름 놓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내시 한 명이 밖에서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마마께 아뢰옵니다. 정 낭자가 폐하의 진료를 마쳤습니다.”
“뭐라고 하더냐?”
태후가 물었다.
“정 낭자의 말로는 경왕이 마시는 탕약은 경왕의 병에 한한 것이오며, 폐하께는 들지 않는 약이라 하였습니다.”
태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언짢은 기색으로 말했다.
“그 여인, 귀신 농간을 할 때부터 알아봤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 같으니라고.”
태후가 이를 부득 갈면서 욕을 했다.
“마마, 그 여인을 불러 폐하의 병을 보게 하는 것부터가 적절하지 않습니다.”
제국 부인이 담담하게 말했다. 태후가 고개를 돌려 제국 부인을 쳐다보자, 제국 부인이 말을 이었다.
“마마, 잊으셨습니까? 폐하께서 쓰러지시기 전에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그 죄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 폐하께서 깨어신다면, 아마 가장 먼저 손볼 사람은 바로 정 낭자지 않겠습니까?”
제국 부인이 태후궁 밖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태후가 흠칫 놀라고는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애초에 그 여인을 궁에 들인 것부터가 잘못이었어!”
“아닙니다, 마마.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면, 정 낭자에게 마마를 공격할 빌미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마마께서 폐하를 인자하지 않고 자상하지 않게 대하신다는 빌미요. 하지만 그 여인이 제 발로 궁에 들어온 이상, 이제 마마께서는 그 여인을 궁에 남겨 두실 수 있겠지요.”
제국 부인이 말했다. 태후가 멈칫하고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 재수 없는 것을 궁에 남겨서 뭐에 쓰려고? 황제를 해칠 수도 있는 사람이야.”
“정 낭자는 이미 폐하를 해쳤습니다. 다만 정 낭자가 해쳤다는 증거, 그리고 정 낭자를 벌할 수 있는 증거가 없을 뿐이지요. 이왕 황후가 정 낭자에게 폐하의 병을 봐 달라는 교지를 내렸으니, 정 낭자에게 좀 더 오래 폐하의 병을 봐 달라고 하면 될 일이잖습니까?”
제국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에 하나 정 낭자가 궁에 있는 동안,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런데도 폐하의 병을 살피고 있던 정 낭자에게 아무런 죄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땐 태후가 목청을 높여 그자들을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태후가 어두운 표정으로 서서히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가 보낸 내시의 말을 들은 황후는 무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궁에 남아 있어야 한다면, 태후마마께 소녀의 집에 서신 한 통만 보내 달라는 청을 올려도 될까요?”
정교랑이 먼저 입을 열자, 내시들이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혹시 정 낭자께서 더 필요하거나, 집에서 가져다드릴 물건이 있으실지요?”
내시 중 한 명이 세심하게 물었다.
“바깥의 물건을 어찌 감히 궁에 들이겠습니까. 소녀는 괜찮습니다.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공.”
재미있는 여인일세.
제국 부인이 추측했던 것처럼 난리를 피우지도 않고, 조용하고 담담하게 명령에 따르다니. 아무리 신선의 제자라고 해도 황실이 무서운 건 매한가지인가 보군.
내시가 속으로 혀를 차고는 다른 내시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황후가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괜히 낭자만 곤란하게 만들었네. 본궁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아서.”
황후가 황제의 침전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폐하가 없으면, 본궁도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되네. 본궁은 진심으로 폐하께서 쾌차하시길 바라는 마음에, 무모한 일인 줄을 알면서도 낭자에게 전갈을 보냈어. 정 낭자가 직접 폐하의 상태를 봐줬으면 해서. 그리고, 사실 본궁은 낭자가 본궁의 청을 수락해 입궁할 줄 몰랐다네.”
황후가 다시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본궁이 낭자를 보는 건 오늘로 두 번째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아. 그 아이가 본궁을 자주 보러온 덕에 낭자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거든.”
황후는 진안 군왕의 환한 웃음과 목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마마, 그 여인이 웃을 줄도 알더라고요.
황후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신나게 떠들어대던 진안 군왕이 눈앞에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그 여인’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마다 반짝이는 진안 군왕의 눈동자가 황후의 기억에 아로새겨졌다.
마마, 그 여인이 얼마나 대단하냐면요.
진짜 못 하는 게 없더라니까요? 다 할 줄 알아요.
그 여인이 정말로 좋은 사람이더라고요. 세상에 어쩜 그렇게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죠?
황후가 걸음을 옮기자, 눈앞과 귓가에 떠오르던 진안 군왕의 모습과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 아이를 통해서 꽤 오랫동안 낭자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어. 본궁이 낭자를 직접 본 적은 손에 꼽지만, 낭자가 똑똑하고, 선량하고, 용감하고, 배짱 있는 여인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정교랑을 쳐다보면서 말을 이어갔다.
“낭자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그 누구도 낭자를 협박해서 그 일을 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도 잘 알아. 낭자는 이번에 입궐할 때도, 아마 들어오기는 쉽지만, 나가기는 힘들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을 테지.
사실 본궁의 부름을 거절했더라도, 낭자는 조정의 신하도 아니고, 의원도 아니니 도리에는 어긋나지 않아. 누군가가 차후에 그것을 빌미로 트집을 잡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야.
뭐, 그 이유를 근거로 삼아 어떤 사람들은 낭자를 더욱 싫어하겠지만, 딱히 손해 볼 것도 없을 테고. 누군가의 미움을 사는 건, 낭자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일이니까.”
한창 말을 하던 황후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었을 텐데도 궁에 들어온 이유가 뭐지?”
창백한 얼굴의 황후가 호기심을 숨기지 않자, 정교랑이 미소를 지었다.
“마마께서 소녀에게 입궁하여 진료하라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폐하의 풍질은 고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더냐.”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지금 와서 신선의 비방을 얻어 풍질을 고칠 수 있게 됐다고 하면, 분명 황제에게 거짓을 고했다는 이유로 목이 달아날 텐데.
“폐하의 풍질은 소녀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닙니다. 하지만 소녀는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황후마마께서 앓고 계신 죽을병!
정교랑을 바라보던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 낭자, 역시 배짱이 두둑한 여인이로구나.”
황후가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서신을 전달하러 온 내시가 떠나자, 범강림의 안색은 잿빛이 되었다.
“역시.”
“여보, 시누이에게 별일은 없겠죠?”
황씨가 가까이 걸어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범강림의 안색이 잿빛이라면, 황씨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범강림의 고향은 산간벽지인 무원산. 과거 그가 품었던 가장 큰 소망은 군량미를 먹을 수 있는 병사가 되는 것이었을 뿐, 오늘처럼 높은 관직을 얻어 어딜 가나 대인 소리를 들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범강림이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당초 태평거의 무뢰배들을 거쳐서, 수십 년을 한 자리에서 장사했던 두칠과 경성의 고위 관리인 유 교리, 탈영의 죄를 판결했던 대인들부터 서북 일대를 책임지던 장수까지, 뒤이어 황실의 종친을 거쳐 이제는 태후라…….
나를 포함한 다른 무원산 형제들이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들이야. 요즘엔 밤에 자다가 깼을 때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지금까지 겪은 일들이 도저히 어떻게 된 건지, 나는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범강림이 침을 꿀꺽 삼켰다.
“괜찮을 거요.”
범강림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씨는 범강림의 말이 못 미더웠는지, 고개를 돌려 주복에게 물었다.
“주씨 오라버니, 시누이는 정말로 무사한 거죠?”
황씨는 너무 긴장한 나머지 제대로 된 호칭을 부르지 못하고, 서북에서 남을 부를 때 자주 쓰던 호칭으로 주복을 불렀다.
“별일 없을 겁니다.”
주복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황씨는 주복이 적어도 범강림보다는 세상 물정에 더 밝고, 조정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가에 서 있던 시녀가 의아한 얼굴로 반근에게 물었다.
“반근, 왜 안 울어?”
반근이 평온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울 일이 뭐 있다고.”
시녀가 장난스럽게 혀를 찼고, 반근은 속으로 생각했다.
만약 아씨께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난 혀 깨물고 자결하면 그만이야. 난 살아서도 아씨의 사람이고, 죽어서도 아씨의 귀신이 될 거야. 나는 살든 죽든, 언제나 아씨 곁을 지킬 테니까.
반근이 입술을 꾹 다물고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었다.
황씨를 안심시키고 방으로 들여보낸 범강림은 주복을 문 앞까지 배웅했다.
“정말로 무사한 겁니까?”
끝내 불안함을 참지 못한 범강림이 주복에게 물었다. 주복이 범강림을 쳐다보았다.
무사하다라…….
아마 소식을 들은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을 싸서 야반도주하셨겠지.
“무사할 거요. 내가 진(秦)씨 가문에 가서 물어보겠소.”
아, 공주부 진씨 가문도 황족이지. 고능준과는 다르게 진씨 가문은 늘 누이와 사이가 좋았으니까.
“그럼 잘 좀 부탁…….”
범강림이 서둘러 공수의 예를 표하자, 갑자기 주복이 그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외쳤다.
“정교랑은 내 누이요!”
주복이 말에 힘을 실으며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친누이!”
주복이 말을 끝내고는 곧바로 소매를 홱 털고 자리를 떴다.
정교랑은 내 누이라고! 내 친누이! 친오라비도 아닌 네가 잘 좀 부탁하기는 개뿔!
말을 타고 빠르게 달려가던 주복이 갑자기 말고삐를 당겨서 말을 멈췄다. 그의 뒤를 바짝 따라오던 사환이 주복을 앞질렀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의아한 얼굴로 주복에게 물었다.
“공자님?”
주복이 고개를 들고 앞을 내다보았다. 거리의 끝에는 진씨 가문의 저택이 있었다.
“지금 이 날씨에 과로신선을 먹으러 가겠다고? 너무 덥지 않겠어?”
“에이, 이럴 땐 또 뜨겁게 먹는 맛이 별미야! 이열치열도 몰라?”
지나가던 두 행인의 수다 속에서 ‘과로신선’이라는 네 글자가 주복의 귀에 콕 박혔다. 주복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시선으로 두 사람을 쫓았고, 점점 더 멀어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로신선.
그자가 협박한다고 겁을 먹은 게냐?
정말 그놈들이 하는 게 형편없어서 특별히 가르쳐 준 거냐고!
그렇다니까요. 그 사람들이 만든 건, 정말 형편없었어요. 음식이 아까워서, 가르쳐 준 거예요. 사람들과 함께 즐겨야, 진짜 맛있잖아요.
그 여인은 단 한 번도 남의 협박을 두려워한 적이 없어. 누군가가 그 여인의 것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도 그 여인은 전혀 개의치 않겠지만, 절대로 그 여인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돼.
만에 하나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긴말할 것 없이 대뜸 활시위부터 당기고 화살을 쏠 테니까.
시정잡배든 악인이든, 처음 보는 낯선 사람이든, 단 한 번 인연이 닿았던 사람이든, 그 여인을 건드렸다가는 필시 주저 없이 그 여인의 화살에 맞겠지.
은혜는 은혜로, 원한은 원한으로 갚는 여인이었어. 잘해 주는 자에게는 물 한 방울의 은혜도 넘치는 샘물로 갚겠지만, 맞서려 들다가는 가차 없이 활을 들어 올릴 테지. 어떤 상황에서도 고개를 숙이거나 자리를 피할 줄 모르는 교만한 여인인데, 어찌 허리를 숙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번 적수는 태후, 그리고 황실이야. 황실의 권력 아래에서 반기를 드는 자는, 그게 설령 귀신이라 하더라도 자비와 예외가 따르지 않을 것이야.
주복이 고개를 돌려 다시 거리의 끝을 내다보았다.
저 자식의 성은 진씨, 저놈은 공주부 진씨 가문의 열셋째, 진호다. 그 여인이 허리를 숙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진호는 황실에 허리를 숙이라고 말할까?
주복이 말고삐를 다시 쥐었다.
“공자님?”
사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복을 쳐다보았다.
그렇게 급하게 박차를 가하면서 여기까지 왔는데, 왜 진씨 가문에 가질 않으시고 거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만 하시지?
“어머니!”
진호가 목청을 높였다.
“알겠어. 그만 좀 불러.”
진 부인이 못 이기겠다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지금 이 어미가 궁에 들어가서 한번 살펴보마.”
“어머니, 일단 가서 정 낭자부터 보세요. 낭자가 제 발로 궁에 들어간 거라면, 궁에서 나오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고 들어간 겁니다. 일단 낭자의 계획부터 먼저 들어 보세요. 태후부터 찾아가 괜한 말씀 올리지 마시고요.”
진호가 다급하게 당부하자, 진 부인이 걸음을 멈췄다.
“말이 참 많네, 우리 아들. 알겠다, 알겠어. 꼭 정 낭자의 말대로 하마.”
진호가 헤헤 웃었다.
“그럼 어머니께 잘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진 부인이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나도 내가 원해서 가는 것이야.”
진 부인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나서자, 진호는 회랑 아래서 홀로 한숨을 쉬었다.
“이따 주복 그 녀석이 오면 장난이나 좀 쳐야겠다.”
진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이 걸리자, 문지기들이 뙤약볕을 피해 안쪽으로 들어갔다.
“설마 아직도 소식을 듣지 못한 건가? 아니면, 주씨 가문은 벌써 야반도주했나?”
진호가 혼잣말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도망가더라도, 그 녀석이 도망가지는 않았을 텐데. 그 녀석은 아마 아무 데도 가지 못할걸. 낭자와 함께 정씨 저택에 남아 있겠지.”
진호가 중얼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아, 이따가 주복이 와도 장난은 치지 말아야겠다. 괜히 열 받아서 혼절이라도 하면 나만 곤란해져. 난 죽을병에 고친 사람을 살리는 비방도 모르는데.”
정오의 뜨거운 햇볕이 온몸을 찌르듯이 내리쬈다. 사환이 소매로 땀을 닦으면서 물었다.
“공자님, 언제까지 여기에 가만히 서 계실 겁니까? 들어가서 기다리는 것도 똑같지 않습니까?”
진호는 대꾸하지 않고 문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똑같지 않아. 그들은 내게 남다른 존재다. 내가 그들을 다르게 생각한다는 걸 그들에게도 알려 주고 싶구나. 그러니 난 여기서 기다릴 거다. 주복 그 자식이 들어오자마자 날 볼 수 있도록.”
진호가 뒤늦게 입을 열자, 사환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예전엔 한 번도 이러신 적이 없었는데.
후덥지근한 공기를 몰고 온 오후의 바람이 마당 안을 쓸고 지나갔다. 땡볕에 못 이겨 시들해진 나뭇잎이 나른하게 흔들리던 때에, 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진호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문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왔구나! 드디어 왔어!
하지만 진호의 환한 웃음은 바로 어색하게 굳어버렸다.
“십삼.”
진 부인이 마차에서 내리며 부채로 햇볕을 가리던 찰나, 자신을 마중 나온 진호를 보고 깜짝 놀랐다. 곧이어 그녀가 웃으면서 진호에게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아들, 그렇게 급했니? 설마 여기서 쭉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린 건 아니지?”
진 부인이 부채로 진호의 머리를 살짝 쳤다.
“이 바보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여기서 기다리나 방에서 기다리나 똑같은데, 왜 굳이 이렇게 더운 날에 땡볕에서 기다린 거야? 아들, 이 어미를 기다린 거니, 아니면 정 낭자가 걱정돼서 여기까지 와서 기다린 거니? 마차에서 내린 사람이 나여서 망정이지, 다른 집안의 여인이었다면 나는 화냈을지도 모르겠다. 색시도 맞이하기 전에 벌써 이 어미는 뒷전이라고.”
웃음을 쥐어 짜내던 진호가 손으로 진 부인의 부채를 잡았다.
“어머니, 장난치지 마세요.”
진 부인이 웃으면서 진호에게 팔짱을 끼고 안으로 들어갔다.
“됐다, 됐어. 그렇게까지 걱정할 것 없다. 예전엔 안 그러더니.”
너무 오래 햇볕 아래 서 있었던 탓인지, 진호의 몸이 휘청였다. 그는 티 나지 않게 재빨리 자세를 고치고 걸음을 옮기다가, 또 한 번 문가를 돌아보았다.
문 앞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머니, 정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진호가 시선을 거두고 진 부인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안 만났어.”
진 부인의 대답에 진호가 멈칫하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마 벌써 갇힌 겁니까? 어머니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요?”
어머니께서는 항상 태후의 총애를 받아왔는데, 설마 정 낭자를 보겠다는 어머니의 청조차 거절한 건가?
“고씨 가문 사람들이 너무 기고만장합니다. 태후는 고씨 가문만의 태후가 아니잖습니까!”
진호가 버럭 화를 내자, 진 부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태후께서 나의 청을 거절하실 리가 있나.”
진 부인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내가 정 낭자를 보지 않은 게다.”
진호가 다시 한번 놀란 기색으로 진 부인을 쳐다보자, 진 부인이 발걸음을 멈추고 진호를 돌아보았다.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보고 있대서.”
진안 군왕?
그래요?
“아, 진안 군왕이 정 낭자를 보는 건 당연한 일이죠. 하지만 어머니께서 정 낭자를 보는 것과는 별개의 일인데, 왜 군왕이 정 낭자를 보고 있다는 이유로 어머니께서는 정 낭자를 만나지 않으신 겁니까?”
진호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말하자, 진 부인이 싱긋 웃었다.
“태후께서는 자애롭고 선량한 분이시다. 진안 군왕이 현명하다면 정 낭자는 무사할 테고, 내가 굳이 정 낭자를 볼 필요도 없잖니.”
진호가 진 부인을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만약, 그자가 현명하지 않다면요?”
“어때요? 여긴 지낼 만해요? 벌써 적응했으려나?”
진안 군왕이 주위를 둘러보면서 물었다.
이곳은 황제의 침궁 근처에 있는 작은 편전이었다. 황제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피함과 동시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빠르게 달려갈 수 있는 위치였다.
정교랑이 진안 군왕을 따라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적응했어요.”
진안 군왕이 웃었다.
“누가 들으면 낭자는 전에 황궁에서 지냈던 사람으로 알겠어요.”
황궁이라…….
황제가 퇴위하고 양산이 그 뒤를 잇게 됐을 때, 황제 즉위식을 올리기 전까지 그녀는 궁에 들어와 살았다. 아직 황후는 아니었던지라 황후궁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양산과 함께 잠시 이전 왕조의 편전에서 지낸 일이 있었다.
왕부에서 지내도 무방했을 텐데, 양산이 왜 그렇게 성급하게 황궁으로 거처를 옮기나 의아했었어. 지금 돌이켜보니, 그래야 날 죽이기 더 쉬웠으니 그랬던 거였네.
실내에 정적이 흘렀다.
“정방, 지금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가 태후마마께 봉지로 나가는 것을 청하고, 낭자와 함께 경성을 떠나는 겁니다.”
진안 군왕이 정적을 깨고 입을 열었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봉지는 아주 멀고 외진 곳으로 정해 달라고 할 거예요. 너무 아득히도 멀어서 사람들이 그런 곳이 있나 싶어 할 정도로 먼 지역으로요. 이번에 경성을 떠나게 되면, 아마 다시는 경성에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하지만 미안해요. 정방,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진안 군왕이 이어서 말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꿋꿋이 해나가겠다는 게, 뭐가 미안하다는 거죠?”
정교랑이 말했다.
“그야, 당신한테 미안하다는 거죠.”
진안 군왕은 어쩐지 웃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어쩔 수가 없는 건가. 이 여인을 보기만 해도, 잠깐 대화만 나눠도 자꾸 웃음이 나오려고 하네. 지금은 분명 웃을 때가 아니고, 웃음이 나와서도 안 될 때인데.
“나한테 미안하다고요? 내가 어떻게 된다고 해도, 그건 내 사정이에요. 나한테 그런 말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걸요.”
정교랑이 담담하게 말하자 진안 군왕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정방, 너무 단순하고 낙관적인 거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죠?”
정교랑이 웃음을 지었다.
“당신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늘어질까요? 아니면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세차게 고개를 저을까요?”
진안 군왕은 정교랑이 말한 모습이 잠깐 상상이 되어 또다시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을 위한 일을 해요. 자기가 선택한 것이라면, 당연히 그에 따른 책임과 결과도 받아들여야죠. 남에게 미안하다는 말은 사실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남을 탓할 수도 없는 거고요.”
정교랑이 말했다.
“하지만 폐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다면, 당신은…….”
진안 군왕이 답답한 마음에 목청을 높였지만, 곧이어 그는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폐하께서 한동안은 괜찮으실 거예요.”
정교랑이 진안 군왕의 생각을 읽은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태후와 고씨 가문은 황제의 상태가 불안정한 틈을 타서, 정교랑이 궁에 남아 있는 동안 황제가 붕어할 경우, 정교랑을 황제와 함께 순장시켜 버리려는 계획을 세운 터였다.
하지만 역사서에 따르면, 황제는 풍질로 쓰러지고 일 년이 더 지나야 붕어할 운명이었다. 태후나 고씨 가문의 사람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이 사실을 모르지만, 정교랑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태후와 고씨 가문이 세운 계략은 정교랑에게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
진안 군왕이 흠칫 놀라고는 다시 실소를 터트렸다.
그래, 이 여인이 절대로 자신을 곤경에 빠트릴 리가 없지. 정말로 요 며칠 안에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길 걸 알고 있었다면, 절대로 순순히 궁에 들어와 폐하와 함께 순장당하는 바보짓을 하지는 않겠지.
하지만 폐하께서는 언젠가…….
“나중의 일은 나중의 일이에요.”
정교랑이 편전 안을 둘러보면서 말을 이었다.
“무언가를 할 땐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너무 많은 생각에 사로잡히면, 우선순위를 구분하지 못하게 되고, 눈앞에 닥친 일을 보지 못하게 되거든요. 당장 눈앞의 일도 보지 못하는데, 나중의 일을 어떻게 결정하겠어요.”
“그럼 당장 눈앞의 일은…….”
진안 군왕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정교랑이 편전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랏일이죠.”
“그 여인을 궁에 남겨 두었다니!”
고능준이 눈앞에 앉아있는 부인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내려오려 하며 소리쳤다.
“멍청한 여편네 같으니라고. 누가 당신더러 그런 소리를 하랬소?”
제국 부인은 불안한 기색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노야, 그 여인을 해치워야 한다면서요. 난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해서…….”
“절호는 개뿔! 그 여인이 바보도 아니고, 우리가 판 함정 구덩이에 순순히 뛰어내릴까? 그 여인이 정말 함정 속에 뛰어든다면, 그건 애초부터 함정이라 부를 것도 아니었다는 거야! 그 여인이 남의 죽을병을 고칠 수 있는 것 외에, 다른 사람의 명줄을 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 몰라서 그런 것이오? 그 여인이 과감하게 궁에 들어온 걸 보면, 황제가 당장은 무사할 거라는 뜻이잖소!”
“폐하께 아직 가망이 있어요? 하지만, 태의 말로는 깨어나기 힘들다고 하던데.”
제국 부인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깨어나지는 못하겠지만, 당장은 아무 일도 없겠지. 아니, 어쩌면 아주 긴 시간 동안 아무 일 없을 수도 있어.”
고능준이 냉소를 지으면서 말을 덧붙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지!”
같은 시간, 황궁 안.
진소가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다.
“신, 태후마마께 태자 책봉을 간청하옵니다.”
황제가 쓰러진 뒤부터 쭉 마음의 준비를 해 왔던 태후였지만, 저 말을 정말로 듣게 되자 그녀는 어쩐지 막연해졌다.
태자 책봉이라……. 차일피일 미루다가, 태자가 없어지고 나서야 청하는 것인가.
“윤허하리다.”
태후가 말끝을 늘리며 대답했다. 태후의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내시가 당직을 서던 한림을 불러와 태후의 뜻을 전달케 했다.
황제의 병세가 위독한 탓에 조회는 중단되었지만, 황궁에서 교대로 당직을 서는 조정 대신들과 나머지 사람들은 줄곧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태후가 뜻을 전달했다는 말에 사람들의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폐하께서 붕어하셨나?
사람들이 몰래 밖을 내다보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황제의 침궁이 아닌 근정전 방향으로 황급히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편, 태후의 가마가 태후궁을 지나 근정전을 향해 갈 때, 태후궁 방향으로 걸어오고 있던 진안 군왕은 걸음을 멈췄다.
“오늘은 마마께서 무척 바쁘신가 보군. 소손은 나중에 다시 뵈러 오겠습니다, 마마.”
진안 군왕이 태후가 떠난 방향을 향해 간단히 예를 표하고 몸을 돌렸다.
“그럼 나는 경왕을 보러 가야겠다.”
경왕은 환궁 후 태후궁에서 지내고 있었다. 진안 군왕이 태후궁 근처에 다다르자, 괴성을 지르는 경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네.”
진안 군왕이 중얼거리면서 걸음을 서둘렀다.
“전하.”
어딘가에서 튀어나온 내시가 진안 군왕 앞에서 허리를 숙인 채 길을 막는 바람에 진안 군왕의 걸음이 주춤했다.
“전하, 경왕 전하께서 곧 낮잠을 주무실 시간입니다. 다음에 다시 오시는 건 어떨지요?”
내시가 말했다.
낮잠?
“경왕이 이 시간에 낮잠을 잘 리가 없는데?”
내시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야 예전의 일이지요. 경왕 전하께서 태후마마를 따른 후로는, 지금 이 시간이면 늘 낮잠을 주무십니다.”
내시가 여유롭게 말했다. 진안 군왕이 내시를 잠시 쳐다보더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하더냐. 잘 알겠다.”
진안 군왕은 더는 묻지 않고 발걸음을 돌렸다.
“전하.”
늙은 내시 한 명이 직접 진안 군왕을 배웅하면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전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경왕 전하께서는 잘 지내고 계십니다.”
진안 군왕이 연로한 내시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당연히 잘 지내고 있겠지. 지금은 아무도 경왕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테고.”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서 태후궁을 바라보았다. 궁에서 들려오던 경왕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경왕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게. 워낙 체력이 좋아서 쉬이 지치질 않아. 뛰어 놀고 싶어 하면 뛰게도 해 주고, 너무 답답하게 잡아 두지 말게.”
진안 군왕의 당부에 늙은 내시가 알겠다며 예를 표했다.
“전하, 그만 돌아가시지요. 앞쪽에서 곧 대사를 논할 예정입니다.”
늙은 내시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대문을 나선 진호는 잠시 길가를 따라서 걸었다. 얼마 가지 않아 길바닥에 앉아 있는 주복을 발견한 그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더위를 식히려 여기까지 온 건가?”
진호가 주복 옆에 앉으면서 물었지만, 주복은 진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네가 날 찾아오지 않았던 건 잘한 일이야. 자네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알고 있을 거고, 별로 새로운 소식도 없었거든. 그리고 이번 일은, 누군가 나서서 도와준다면 아주 사소한 일이 될 테지. 그러니 자네가 걱정할 필요도 없어.”
주복이 고개를 돌려서 진호를 쳐다보자, 진호가 고개를 저으면서 웃었다.
“그 누군가는 내가 아니고, 진안 군왕일세.”
“진안 군왕? 지금 이런 일이 생겼는데, 태후가 퍽이나 두 사람의 혼사를 동의하겠다.”
주복이 미간을 찌푸렸다.
“진심으로 간절히 바라면 못 이룰 게 없지. 진안 군왕이 자진해서 봉지로 가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정 낭자와의 혼사를 강행한다면, 태후도 분명 동의할 거야.”
진호가 말했다.
“봉지로 나간다고? 경성에 멀쩡히 잘 있다가 봉지로 나가긴 왜 나가?”
주복이 물었다.
“멀쩡히 잘 있다고? 멀쩡하게 잘 있으니 당연히 봉지로 나가야지. 종친 주제에 무슨 연유로 경성에 남아 있겠어? 황제와 태후에게 총애받는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마음 편히 경성에 있으면서 황실이 유생들과 세간의 비난을 받도록 두고 보란 말이야?”
종친이 진안 군왕처럼 굴면 남의 이목을 너무 끌잖아. 어렸을 때도 송자동자라는 별명 때문에 유생들의 질타를 불러일으키더니, 지금은 장성해서도 경성을 떠나지 않고 있어. 도리어 공까지 세워가면서 명망을 얻으려고 하고 있지.
“지금 평왕이 죽었고, 폐하는 병세가 위중하셔. 그나마 남아 있는 경왕은 불구가 됐지. 그런데도 허구한 날 황궁을 들락거리다니, 진안 군왕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말하던 진호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자가 뭘 하고 싶든 말든, 그건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나는 내 누이의 미래가 궁금할 뿐이라고. 자네 말대로라면, 그 애는 진안 군왕과 함께 경성을 떠나는 건가?”
주복이 진호의 말을 끊고 물었다.
“떠나지 않아도 되긴 하는데, 나한테 시집오긴 싫다잖아.”
진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주복이 진호를 노려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계속 이해가 되지 않는 게 하나 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계속 말하라고 손짓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했지?”
주복이 묻자, 진호는 멈칫했다. 주복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진호에게 다시 물었다.
“그 여인이, 뭘 잘못한 적은 있어?”
진호는 주복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먼저 간다. 그늘 밑에서 쉴 만큼 쉬었어. 그리고, 날 찾아줘서 고마워.”
주복이 진호를 향해 미소를 짓고는 포권의 예를 취했다. 진호는 주복이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점차 멀어져 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 여인은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언제나 다른 사람이 먼저 그 여인을 건드리고, 의심하고, 미워하고, 계산한 거야. 잘못도 없고, 잘못한 적도 없는데, 왜 항상 그 여인이 피하고 물러서야 하지?
상대가 황실이라서? 그 여인이 피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공자님!”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진호는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진 시강의 수하가 이쪽으로 급히 달려오고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궁에 계실 텐데, 설마 궁에 무슨 일이라도?
진호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태자 책봉을 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진호 곁에 멈춰선 수하가 목소리를 낮추고 조용히 말했다.
근정전 안에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아직도 애가의 말이 명확하지 않소?”
침묵을 참지 못한 태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 게야!”
태자 책봉을 결정하라며? 이놈의 조정 대신들은 죄다 들어왔으면서 왜 아무도 본론을 꺼내지 않는 게야! 황상의 용태와 평왕 안장에 대해 묻고 이것저것 잡다한 이야기까지 다 끌어다 논의하고는, 그게 끝이야?
이러니 당초 평왕이 조회에 나가길 꺼렸던 게로군. 정말 무료하기 짝이 없구나. 애가는 지금 여기서 이런 이야기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가 않단 말이다.
태후가 또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진소가 물었다.
“마마께서는 누구로 결정하고자 하십니까?”
태후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표정으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쓸데없는 소리. 누가 또 있다고?
“당연히 경왕이 아니겠소.”
태후의 대답에 근정전 안은 또 한 번 침묵에 휩싸였다.
“대신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를 게야.”
황제의 얼굴을 세심하게 닦아주던 황후가 말했다.
“아니요. 그들은 모르는 게 아니라, 말할 수 없어서 하지 않는 겁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말이다. 바보를 보필하여 제위에 올렸다는 명성을 얻고 싶은 대신은 아무도 없겠지. 정말 우스운 농담이긴 하나, 이 농담에 웃을 수가 없다는 게 참.”
황후는 몸을 일으키고 여전히 의식을 잃은 채 곤히 잠들어 있는 황제를 바라보았다.
“특히 본궁은 더욱 웃을 수가 없지.”
황후가 말하던 도중, 문밖에서 궁녀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마마, 큰일 났습니다. 안비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
황후의 안색이 급변했다.
“설마, 못 구한 것이냐?”
황후가 물었다.
“구해 냈습니다. 하지만 식음을 전폐하고, 약도 드시지 않겠다며 거부하셔서요.”
궁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황후가 한숨을 내쉬고는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안비가 폐하를 흠모하는 마음이 몹시 깊은지라,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는 거의 실신하기 직전까지 갔었어. 어쩌면 본궁이 안비를 본받아야 할 수도 있겠군.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본궁이 폐하를 따라 저승으로 함께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그러게요. 그렇게 되면, 황후마마께서는 폐하와 함께 안장되는 영광을 누리고 명예롭고 마음 편한 죽음을 맞이하시겠지요. 앞으로 닥칠 고난의 나날을 굳이 견디지 않으셔도 되고요.”
정교랑의 대답에 놀란 황후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 낭자, 아무래도 본궁이 낭자의 배짱을 얕봤나 보군.”
“소녀는 거짓말을 싫어할 뿐입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그래도 말이 너무 과한 게 아닌가. 본궁은 황후야. 설령 폐하께서 부재하시더라도, 본궁은 여전히 황후지.”
황후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마마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경왕을 태자로 세우고 폐하께서 양위하시면, 태후마마께서는 필시 수렴청정을 하실 겁니다.”
“그럼 본궁은 황태후가 되겠지.”
“그야 모를 일이지요. 양(楊) 태후는 폐서인되어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 죽지 않았습니까.”
정교랑이 태연하게 말하자, 황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조정에는 가남풍(賈南風)이 없지 않으냐.”
황후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하지만 곧 진혜제(晋惠帝)가 생기지 않습니까. 가남풍은 진혜제가 나온 후에야 나왔죠.”
정교랑이 바로 맞받아치자, 황후가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저었다.
“가남풍이 나온다 해도, 본궁의 친가에는 직권을 남용하는 간신이 없느니라. 정 낭자가 너무 많은 생각을 한 듯하구나. 본궁은 한낱 여인일 뿐이야. 조정의 일과 나랏일은 본궁이 알 수도 없고, 관여할 수도 없는 일이지. 조정의 일은 대신들이 알아서 할 것이니, 본궁은 그저 궁에 틀어박혀 하늘이 보우해 주시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
정교랑이 웃었다.
“마마, 마마의 부친께서는 직권을 남용하여 다른 사람의 심기를 건드린 적 없다지만, 마마께서는 이미 다른 사람을 노하게 만드시지 않았습니까. 귀비의 광증과 평왕의 죽음에 대해서, 태후마마께서 의심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설마 소녀 하나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황후의 표정이 또 한 번 변했지만, 정교랑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께서도 충분히 잘 알고 계신 것들인데, 굳이 소녀의 입을 통해서 다시 들으셔야겠습니까.
소녀에게는 기껏해야 공모의 죄가 있겠지요. 태성(台星)이 하늘을 지나간 일을 숨기고, 안비가 회임했던 태자를 잃고, 평왕이 벼락에 맞아서 죽고, 폐하께서 쓰러지신 것까지 소녀의 몫으로 칠 수는 있겠습니다.
하지만 태후마마는 절대로 소녀를 놓아주지 않으려는 만큼, 이 일의 주모자 또한 놓치지 않으려 하실 겁니다. 태후께서 어떠한 일을 빌미로 소녀를 죽일 수 있다면, 주모자에게도 똑같은 죄목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하실 테지요.
어쩌면 태후께서는, 지금 당장 주모자를 확실하게 죽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시간을 좀 더 끌면서 차츰 권력을 키운 후에 후궁과 조정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그때 이 일을 다시 처리하시려는 걸 수도 있고요.
그때가 되면, 누가 황태후의 존재를 신경 쓸까요? 황태후의 생사를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요?”
“감히!”
황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정교랑은 더는 입을 열지 않았지만, 황후는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서성였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의 병을 위해 최선을 다하기는커녕, 내궁을 이간질하러 온 게냐! 천벌을 받아 마땅하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치켜세웠다.
“본궁이 죽을병이라더니, 이 일을 말함이더냐? 아주 허튼소리를 잘도 지껄이는구나.”
정교랑은 황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창가로 다가가 봉선화 화분을 들어 올렸다.
“지금 무엇을 하려는 게야!”
황후가 호통쳤다. 정교랑이 손에 든 화분을 망설임 없이 바닥에 내던지자, 깜짝 놀란 황후가 비명을 질렀다.
“소녀의 견문이 짧았네요. 궁에서는 봉선화를 보약까지 먹여 가며 키우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정교랑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산산조각이 난 화분 사이로 흙과 탕약 찌꺼기가 섞여 있었다.
“태후께서 황후마마의 노고를 고맙게 여기시어 보약을 지어다 주셨다는데, 약을 마시면 어떨게 될지, 한번 맛이라도 보지 그러셨습니까?”
정교랑이 말했다.
“누가 네게 말해 줬느냐? 진안이 말해 준 것이냐?”
황후는 조금 전의 침착함을 잃고 손수건을 두 손으로 꼭 쥔 채 물었다.
“마마, 소녀는 황제 폐하의 풍질을 고칠 줄은 모르나, 의술과 약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침궁에 계신 폐하께 쓰는 약과 이런 보약의 향은 확실히 다르지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진 모르나, 소녀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는 말문이 턱 막힌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 이 탕약을 들지 않으셨죠? 이 탕약을 드시고, 폐하께서 붕어하실 때 함께 뒤따라가신다면 부부의 은애를 과시하기에는 퍽 좋지 않습니까? 얼마나 처연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되겠는지요.”
정교랑이 이어서 말했다.
황후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듯했다.
“그래, 낭자의 말이 맞아. 지금 본궁은 죽을병에 걸렸다. 한데, 그런다고 뭘 어쩌겠느냐.”
팍 소리와 함께, 태후가 성난 목소리로 고함쳤다.
“말해 보시오! 도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속셈이오? 경왕이 바보인 게 싫고, 그대들의 명성에 경왕이 오점으로 남을까 봐 두려운 거라고 말을 해 보라고!
그렇다면 대안을 내놓아야지. 경왕이 아니면 어쩌라는 말인지! 황제가 남긴 혈통이 경왕 하나뿐인 것을 어떡하겠소? 애가인들 좋은 명성을 포기하고 싶었을까!”
“마마, 고정하시옵소서.”
대신들이 예를 올리며 말했다.
“빈말은 집어치우시오! 애가는 지금 이렇게 그대들과 한가하게 여담이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란 말이오. 애가에게 남은 손자는 경왕 하나뿐인데, 앞으로 어떻게 할지 그대들이 한번 말해 보라니까!”
말씀이 지나치시네. 어찌 조정 대신들에게 황위 계승자를 결정하란 말인가! 역시 기분이 오락가락한 게 종잡을 수가 없는 여인이야.
대신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저었다.
경왕이 등극한다면, 분명 태후가 수렴청정하게 될 터. 이렇게 원리원칙을 무시하고, 감정 기복까지 심한 여인이 권력을 잡게 된다면, 조당은 아수라장이 될 것이 자명하지 않은가.
“신, 경왕을 황태자로 책봉하기를 청하옵니다.”
진소가 침묵을 깨고 앞으로 걸어 나왔다.
조당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진소가 먼저 나서서 바보인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이야기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조정의 기강이 갈수록 무너지는구나. 이젠 위관처럼 취한 연기를 해 보려는 사람조차 없다니. 황제가 없으니, 진소도 소신껏 말하지 못하는 건가.
대신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다른 대신들뿐만 아니라, 고능준과 태후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고능준의 예상으로라면, 경왕의 태자 책봉에 가장 먼저 안 된다고 소리칠 사람이 바로 진소였다. 그래서 고능준은 진소가 입을 열기만을 기다리며 진소와 결판을 내려고 별렀다. 그는 진소가 분명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다는 듯 강직한 태도를 취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태후와 끝까지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소매를 홱 털고 사직을 청하며 조당을 떠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찍이 조당에서 내쫓겨야 마땅한 진소인데, 어쩌다가 제일 먼저 경왕을 태자로 책봉하자는 말을 한 사람이 되었는지! 지금 이게 뭐 하는 수작이야!
대신들은 서로 눈치를 보면서 쉬이 입을 열지 못했지만, 태후는 진소의 말에 몹시 기뻐했다.
태후는 고능준이 진소를 싫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황제가 진소를 중용하고 신뢰했다는 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태후는 황제가 쓰러지자마자 그가 총애하는 대신을 궁 밖으로 내쫓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된다면, 유림과 백성들이 얼마나 자신의 욕을 해 댈지 눈을 감고도 상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참 잘됐구나. 이렇게 되니 얼마나 좋아?
“암, 그리해야지.”
태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조서를 준비하라고 명령하려던 찰나, 진소가 또 한 번 예를 표하면서 말했다.
“폐하의 옥체가 위독하시고, 태자 전하는 지병이 있으시옵니다. 그러니 태자의 정사를 보필할 수 있도록, 청컨대 신을 보정대신(輔政大臣: 국정을 보필하며 섭정할 대신)으로 임명해 주시옵소서.”
진소의 낭랑한 목소리가 조당 안을 가득 메웠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진소를 쳐다보았다.
대단하군, 대단해! 취한 척하면서 소심하게 한 마디 내뱉고는 두 번 다시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위관과 저 강직한 진소를 어찌 비교할 수 있으랴!
역시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었어!
탁 소리가 들리고, 옥좌 뒤의 의자에 앉아 있던 태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부아가 잔뜩 치밀어 오른 태후가 진소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그런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진소! 애가는 안중에도 없구나!”
“그 후로 진 상공이 태후께 뭐라 말씀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내시가 무릎을 꿇은 채 조용히 말하다가 머뭇거렸다.
“않았지만?”
황후가 물었다.
“양견(楊堅)이 수나라를 세웠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황후가 통쾌하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진 상공이 아예 면전에 대고 태후를 욕한 것이나 다름없구나. 그런 욕을 누가 견딜 수 있겠느냐.”
“네, 태후마마께서는 탁자를 발로 차서 뒤엎고 휘장을 홱 뜯어내시고는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뜨셨습니다.”
내시가 말했다.
“태후가 수렴청정하고 싶다고 해도, 그리 쉬운 일이 되진 않겠구나.”
황후의 눈가에 웃음기가 가득 서렸다.
“태후가 수렴청정하든 말든, 그건 조정의 일이지요. 후궁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을 겁니다.”
정교랑의 말에 황후의 웃음이 어색하게 굳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달라지지?”
정교랑이 황후를 쳐다보았다.
“양자를 들이셔야 합니다.”
양자!
황후가 흠칫 놀라고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씨! 도대체 본궁이 어찌하길 바라는 것이야!”
* * *
안 그래도 내시와 궁녀의 수가 적은 황제의 침궁에서 또 몇 명의 내시와 궁녀들이 물러났다.
“태의 말로는 폐하께서 조용히 요양하셔야 하고, 황후마마께서도 좀 쉬셔야 한다는군.”
“그래, 황후마마께서도 좀 쉬시긴 해야지.”
궁 밖으로 나온 내시 몇 명이 목소리를 낮춰 가며 말했다. 침궁에서 물러나는 궁녀들과 내시들을 보고 저쪽에 서 있던 내시 몇 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나온 거요?”
미간을 찌푸리던 내시가 물었다.
“태의가 안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게. 황후마마께서도 침전 밖으로는 한 걸음도 나가지 않으시니.”
밖으로 나온 내시가 아무 문제 없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두 궁녀가 침전 문을 닫고 황후를 향해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정씨,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고는 있는가?”
황후는 그제야 목소리를 낮추고 간신히 화를 참으면서 말했다.
“양자 입적이라니, 어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있느냐! 황실의 권력을 어찌 남의 손에 넘기겠다는 것이야!”
황후가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말했다.
“양자 입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양자 입적으로 황실의 대를 잇는 것인데, 남의 손에 권력이 들어갈 리가 있나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으면서 황후의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대로 폐하의 혈통만을 고집한다면, 황실의 모든 권력은 결국 남의 손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평왕처럼 제정신이었던 황자도 강산을 망쳐 버릴 정도니, 정신도 온전치 않은 경왕이 그 뒤를 잇는다면, 아마 지금 황제가 재위했던 사십오 년간 이룬 치적들은 전부 무위로 돌아갈 터였다.
황후가 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대를 이어? 폐하께 아무런 혈육도 없었다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폐하의 혈육이 남아있느니라. 가남풍이니, 혜제니 말이 나와서 그런데, 왜 무제(武帝)는 혜제가 바보인 것을 알면서도 황위를 넘겨주었을까? 혜제가 자신의 혈육이라서, 자신의 대를 잇는 아들이기 때문이겠지!”
“양자도 충분히 그리할 수 있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복의(濮議) 논쟁은 양자여도 일어날 수 있다. 본궁은 폐하의 대를 남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고, 재상과 문무백관들 앞에서 눈물로 호소하고 싶지도 않아. 양자 입적이라니. 그런 짓을 하고도 본궁에게 열성조를 뵐 면목이 남아 있겠느냐. 또 무슨 낯으로 천하 만백성을 대하고? 본궁은 차라리 부부의 정을 중시하며 폐하와 함께 안장되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그런 오명은 뒤집어쓰고 싶지 않느니라.”
황후가 이를 악물고 말하자 정교랑이 그런 황후를 쳐다보았다.
“조(曹) 태후는 그런 오명을 짊어지지 않았어요.”
그런 오명은 양자 입적을 결정했던 황제와 조정 대신들에게 씌워졌지.
황후가 잠시 멈칫했다.
“어쨌든 안 된다! 그런 일은 하고 싶은 사람더러 하라고 해. 본궁은 아니야. 본궁은 절대로 양자 입적을 언급하지 않을 것이다.”
황후가 소매를 홱 털며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 일은 황후마마께서만 언급하실 수 있습니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는 힘드니까요.”
정교랑이 말했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는 힘들다?
황후가 정교랑을 바라보았다.
신하들이 먼저 입을 열기 힘들다고 했지, 입을 열 수 없다고 하지는 않았어. 그렇다면…….
밖에서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궁녀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옴과 동시에, 누군가가 휘장을 들어 올리고 편전 안으로 들어왔다.
안으로 들어온 이가 내시인 것을 확인한 황후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무엄하구나!”
황후가 소리쳤다. 황후의 호통에도 내시는 전혀 긴장한 기색 없이 정중하게 예를 올렸다.
“태후마마께서 정 낭자에게 여쭐 것이 있어서요. 정 낭자, 폐하의 병을 고치거나 호전되도록 치료할 수 있는지요?”
내시가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자신이 잠시 쉬는 편전에까지 들어오고, 자신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도 뛰어넘은 채 정교랑에게 질문하는 모습에 황후는 몹시 화가 났다.
정교랑이 황후를 힐끔 쳐다보고 내시에게 대답했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녀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만 출궁하시지요.”
내시가 말했다.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황후를 향해 예를 올렸다.
“마마, 봉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이토록 많이 회복되었는데, 허망하게 건강을 잃는다면 얼마나 아깝겠습니까. 드셔야 할 약은, 드셔야 하옵니다.”
정교랑이 말했다.
내시가 미간을 찌푸리고 정교랑과 황후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때, 궁녀 하나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탕약 한 그릇을 황후에게 바쳤다.
“마마.”
“황후가 약을 끊었었다고?”
태후가 묻자 내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듯하옵니다. 정 낭자가 직접 황후마마께 다시 약을 드시라고 권했습니다.”
태후가 콧방귀를 뀌었다.
“황후는 저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난리가 났구나. 좋은 보약을 줘도 안 먹어? 정 그리 죽고 싶으면 알아서 죽으라지. 급할 게 뭐 있다고. 어차피 죽을 목숨인데.”
태후가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자, 내시들은 감히 대꾸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 여인은 내보냈느냐?”
태후가 또 물었다.
“예, 소인들이 직접 궁 문 앞까지 배웅했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쉬던 태후가 갑자기 얼굴을 일그러트리면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진소 그 몹쓸 놈만 아니었다면! 분을 참을 수가 없구나!”
편전 문이 굳게 닫히자, 황후는 순간 온몸에 힘이 쭉 빠진 듯 침상에 몸을 비스듬하게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누군가가 휘장 뒤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어 좌우를 살피고는 조심스럽게 휘장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안비가 황후의 침상 옆에 무릎을 꿇고 소매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트렸다.
“관둬라. 본궁은 아직 살아 있다.”
황후가 눈을 감은 채 담담하게 말했다.
안비가 울음을 뚝 그치고 황후를 올려다보았다. 눈가에 눈물 자국 하나 없는 안비가 또 좌우를 열심히 살폈다.
“눈알을 굴리긴 왜 굴려? 할 말이 있으면 하여라. 본궁이 아직 말도 못 하고, 듣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으니.”
황후가 여전히 눈을 뜨지 않고 말했다. 안비가 헤헤 웃고는 무릎을 꿇은 채 황후 가까이 다가갔다.
“마마, 정 낭자가 뭐라고 하던가요?”
황후가 헛웃음을 터트리고는 눈을 떴다. 입을 열려던 그녀는 안비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간을 찌푸렸다.
“연기를 하려면 좀 제대로 해야지. 적어도 목에 붉은 밧줄 자국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나? 식음을 전폐한다면서 입가에 간식 부스러기까지 잔뜩 묻혀 놓고.”
안비가 민망한 듯 웃으면서 서둘러 소매로 입가를 슥슥 닦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마마를 뵈러 온 것이 아닙니까. 신첩이 두려울 게 뭐 있다고요.”
황후가 안비를 빤히 바라보았다.
“본궁은 자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때가 참 많아. 도대체가 배짱이 두둑한 건지, 아둔한 건지.”
안비가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미소를 보이며 대꾸했다.
“신첩은 당연히 아둔한 거죠. 신첩의 간덩이는 콩알만 해요. 사실 신첩은 지금 상황이 몹시 겁이 나요. 폐하와 마마께서 돌아가신다면, 신첩도 죽은 목숨일 테니까요.”
황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럼, 어쨌든 자네는 죽어도 본궁이 죽은 뒤에 죽겠다 이 말인가?”
안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마마께서는 꼭 봉체를 보존하셔야 해요.”
어쩌면, 저런 아이이기 때문에 나와 함께 귀비를 상대로 연극을 펼칠 수 있었던 거겠지.
이것 참…….
황후는 이마를 손으로 꾹꾹 누르다가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켰다. 그런 황후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정교랑과 대화할 때의 분노나 불안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정 낭자야, 정 낭자가 해야 할 말을 했지. 그 여인은 똑똑한 사람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본궁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뭔지 잘 알고 있어.”
황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안비가 미간을 찌푸렸다.
“똑똑한 사람이 말을 할 때는 상대가 듣고 싶은 말만 해 준다는 뜻이야.”
황후가 덧붙여 설명하자, 안비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마마, 정 낭자는 마마께서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마마가 원하는 대로 말한 거고요? 그래서 그 여인의 생각은 어떻대요? 마마의 환심을 사려고 빈말을 한 건 아니겠죠?”
“당연히 빈말은 아니겠지. 정 낭자나 본궁이나 피차일반인 상황이니.”
황후가 대꾸했다.
정 낭자가 내 생각과 다를 거라고 생각했다면, 애초에 그 여인을 궁으로 부르지도 않았을 터. 정 낭자 또한 내 생각을 몰랐더라면 궁에 들어오지도 않았겠지.
죽을병은 본궁 혼자서 걸린 게 아니니까. 서로 죽을병 걸린 사람들끼리 한마음으로 협심할 수 있다면, 그 후의 일은 순조롭게 진행될 것이야.
“마마, 이번에는 제발 운이 따랐으면 좋겠어요.”
안비가 무릎에 손을 얹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난번에는 분명히 모든 게 다 계획대로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평왕이 갑자기 벼락에 맞아 죽고, 폐하까지 쓰러지시는 바람에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어. 거기에 고능준과 태후가 반격해 오니 더는 손 쓸 틈도 없었지.
“마마, 그런데 정 낭자가 말한 신하가 어느 신하일지 모르겠네요. 때가 됐는데도 아무도 나서지 않아서, 또 계획을 망치면 어떡하죠?”
안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되든 안 되든, 일단 해봐야지.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본궁은 늘 운이 좋았다. 그리고 이렇게 많은 일을 했는데 지금 와서 수포로 돌아간다면 너무 아깝지 않느냐.”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본궁은 죽은 목숨이다. 그러니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이번을 마지막 기회로 삼아 봐야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바보가 제위에 오르고, 태후가 수렴청정하면서 고씨 가문이 황실을 장악하는 꼴은 못 본다.
방법은 두 가지야. 바보가 제위에 오르게 됐을 때 태후를 해치우고 본궁이 수렴청정하는 방법, 그리고 태후를 처리하지 않고 바보도 제위에 올리지 않는 방법.
하지만 이제 와서 태후를 해치우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 제위에 올리는 태자를 바꿀 수밖에.
황후가 깊은 심호흡을 하고 두 손으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 * *
작가의 말:
양(楊) 황태후 이야기
진혜제의 황태후인 양지(楊芷)의 부친 양준(楊駿)은 권력을 남용하여 당시 황후였던 가남풍의 미움을 사게 됩니다. 가남풍은 여남왕(汝南王)과 초왕(楚王)을 설득하여 피비린내 나는 정변을 일으키고 양준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대신들을 종용하여 황태후 양지가 반역에 동참하였다는 상소문을 쓰게 했습니다. 진혜제는 황후 가남풍이 원하는 대로 황태후 양지를 폐서인하고 금용성(金墉城)에 유폐했죠. 한때 황태후였던 양지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양견(楊堅)이 수나라를 세웠던 이야기
주선제(周宣帝)가 죽자, 당시 8살이었던 우문천(宇文闡)이 제위에 올라 주정제(周靜帝)가 됩니다. 주선제의 외조부였던 양견은 재상의 신분으로 주정제의 섭정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자 양견은 주정제를 폐하여 개공(介公)으로 삼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국호를 수(隨)로 바꿨죠. 이로써 북주(北周)가 망하고 수나라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