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
천둥소리가 지나가고, 바람이 잦아들고 비가 멎을 때쯤, 황궁에 있던 태후도 보고를 받았다.
“애가는 그럴 줄 알았다. 평왕은 절대로 천벌을 받은 게 아니야.”
“예, 마마. 허수아비 주위로 네다섯 명이 서 있었는데, 그들이 바닥에 엎드렸더니 번개가 딱 허수아비에만 내리꽂혔습니다. 벼락에 맞는 건 단순히 누가 더 높이 있냐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밝혀졌고, 전하께서 변을 당하신 것 또한 사고라는 게 증명되었습니다.”
내시의 말을 들은 태후가 눈물을 훔쳤다.
“정말 잘됐구나, 참으로 다행이야. 역시 사고였어, 사고.”
태후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멈칫했다.
잘됐어? 다행이라고? 다행이긴, 이게 무슨 좋은 일이라고!
내 손자가 죽은 건 똑같잖아! 어떻게 죽었든 간에, 죽었다는 건 매한가지야!
태후가 통곡하면서 소리쳤다.
“이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일꼬.”
태후가 거의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울부짖자, 주위의 내시들과 궁녀들이 서둘러 태후를 토닥였다.
“마마, 봉체(鳳體: 태후, 황후 등의 몸에 대한 존칭)를 보존하시옵소서. 이제 마마께서 감당하셔야 할 무거운 짐이 많습니다.”
내시들이 눈물을 훔치면서 말했다.
황제가 위독하여 나라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보니, 태후는 마음껏 울고 싶어도 울 수 없었다. 그 생각에 더욱 서러워진 태후는 더 큰 소리로 울었다.
“아이고, 가엾은 우리 아가.”
내시 한 명이 앞으로 나서서 태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마마, 이 소식을 황후마마께도 알리는 게 어떠실지요?”
황후?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물었다.
“황후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으시고, 계속 폐하의 곁을 지키고 계십니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했다.
태후가 탁자에 기댄 채 잠시 침묵했다. 고능준이 했던 말들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태후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평왕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이 궁 안에 몇이나 있다고. 마음 쓰는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알게 될 터이니, 마음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굳이 가서 알릴 필요 없느니라.”
평왕이 사고로 죽고, 황제가 쓰러지면서 황궁 안 분위기는 침울해졌다. 어둠 속에서 숨을 죽이고 때를 기다린 거친 생각들이 황궁 곳곳에 넘실거렸다.
내시가 고개를 숙인 채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귀비는 어떠하더냐?”
태후가 다시 물었다.
“귀비마마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약을 드시고 나면 잠드셔서 난동을 부리진 않습니다.”
내시가 대답했다.
평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 순간부터 귀비는 광증이 도졌다. 증세가 심각해진 귀비가 울고불고하며 난리를 치고 쉼 없이 소름 끼치는 말들을 해대는 통에, 태후는 어쩔 수 없이 귀비에게 약을 먹여야 했다.
태후는 늘 밝은 모습으로 자신과 담소를 나누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 귀비를 떠올렸다. 그리고 다시 지금의 귀비를 생각해 보니, 한탄스럽기 이를 데가 없었다.
모든 게 다 한순간이로구나. 이 무슨 고생인고.
또다시 울컥해진 태후가 눈을 감던 찰나, 문밖의 내시가 소식을 알렸다.
“마마, 제국(齊國)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제국’은 고능준 부인의 봉호다. 지금 고능준의 관직으로는 황제 곁을 지키는 당직을 설 자격이 되지 못해 부인을 대신 보낸 것이었다.
제국 부인은 천자로부터 봉호를 받은 부인이자 외척이기도 하니, 이러한 때에 태후의 병문안을 오는 것은 몹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정 중신들은 제국 부인이 고능준을 대신해 입궁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강경하게 고능준을 막는 것도 곤란하다고 생각되어, 제국 부인의 입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눈감아주기로 했다.
또 무슨 이야기를 하러 온 건지 모르겠네. 애가는 울고 싶어도 마음 놓고 울지도 못한다니!
태후가 탁자를 손으로 짚어 자세를 고쳐 앉고는 이를 악물고 침상을 두어 번 내리쳤다.
그렇다 한들, 또 무슨 방법이 있겠는가. 손자를 잃고 아들까지 쓰러진 마당에, 이대로 아들이 일군 강산마저 쇠락하게 둘 수는 없느니. 절대로, 절대로 그럴 수는 없지!
“들라 하라.”
황제의 침궁 문이 열리자, 누군가가 다급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마마, 마마.”
내시가 허둥대며 황후를 부르자, 침상 옆에 앉아있던 황후가 고개를 홱 돌렸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며 내시를 흘겨보고는 휘장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시가 서둘러 황후 가까이에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마마, 정말로 정 낭자가, 조금 전에 금수원에서 번개를 불러왔다고 합니다.”
내시의 목소리는 흥분한 기색이 역력했다. 황후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같은 소식을 들은 황후와 태후는 분명 같은 말을 뱉었지만, 두 사람이 뱉은 말의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본궁은 정 낭자가 분명 무사할 줄 알았다.”
황후가 이어서 말했다.
“그야 당연하지요. 정 낭자는 신선의 제자가 아닙니까.”
내시가 대꾸했다.
“정말로 신선의 제자였다면, 오늘 같은 일을 겪을 필요가 있겠느냐?”
황후가 고개를 젓고는 몸을 돌려 휘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얇은 휘장 너머로 침상에 가만히 누워 있는 남자가 보였다.
건재할 때는 별 소용 없어 보이더니, 쓰러지고 나서야 쓸모가 생겼네.
저렇게 겨우 숨만 붙은 상태로 누워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저 남자가 죽는 날만 기다리면 되겠지. 이제 보니, 내가 제명에 못 죽을까 봐 불안해했던 나날들이 참…….
“마마.”
다른 내시가 불안에 떨며 침궁 안으로 들어왔다.
“제국 부인께서 또 오셨다고 합니다.”
황후가 고개를 돌리고 내시를 쳐다보았다.
“그래, 무슨 이야기를 하더냐?”
내시가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작은 목소리로 황후에게 속삭였다.
이야기를 들은 황후는 잠시 표정 없는 얼굴로 생각에 잠기더니,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의 웃음에는 비아냥과 같잖음이 잔뜩 서려 있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구나. 결국 또 그자의 손에 넘어가다니.”
바깥에서 뭐라 떠들어대든, 황궁 안에서 얼마나 많은 희비가 교차하든, 정씨 저택은 여전히 여느 때처럼 조용했다.
“이건 저희 노야께서 보내신 명첩입니다.”
“저희 부인께서 아씨의 안부를 물으셨어요.”
두 시종이 선물을 건네며 정교랑을 향한 윗전들의 안부를 전했다.
“시기가 시기인 지라, 댁에 방문하기가 어려워 직접 오시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두 분께서는 늘 낭자를 걱정하고 계십니다.”
시녀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답례했다.
“진(陳) 상공 내외께서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씨께서는 잘 지내고 계세요.”
진씨 가문의 시종들은 긴말하지 않고 간략하게 예를 표한 뒤 곧바로 마차에 올라탔다.
시녀는 지금 같은 시기에 진씨 가문의 사람이 정교랑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은 꽤 불편한 일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하인을 보내 안부를 묻는 것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짧은 안부 인사 하나만으로도, 내일쯤이면 어사대에 진소를 탄핵하는 상소문이 쌓일 터였다.
진씨 가문의 마차가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 앞을 떠나자, 누군가가 급하게 문 앞으로 달려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진 공자님?”
시녀가 놀란 기색으로 불렀다. 진호가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물었다.
“너희 아씨를 볼 수 있겠느냐?”
시녀가 진호를 쳐다보며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지금 같은 시기에, 공자님은 무섭지도 않으세요?”
진호가 피식 웃었다.
“나야 아직 관직 임용도 못 받은 신분이잖느냐. 상공 대인도 아닌데, 무서울 게 뭐 있다고.”
진호가 문가에서 걸음을 옮기지 않고 그대로 서서 공손히 말했다.
“낭자에게 내가 왔다고 알려 주게.”
“알리긴 뭘 알려? 십삼, 왜 또 괜히 모양새 잡는 거야?”
문 안에서부터 들려오는 핀잔에 진호가 고개를 들자, 목소리의 주인공인 주복이 거들먹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왔으면 그냥 들어오면 될 것이지. 가마라도 대령해 안으로 모셔다드리리?”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하지만 진호는 주복의 말에 장난스럽게 대꾸하지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문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날 이후로, 내가 낭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서 그래.”
“진 공자.”
어두운 밤하늘 아래, 여인의 눈빛에서는 놀라움이나 기쁨 같은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진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당신, 입니까?”
하지만 이 말을 내뱉은 순간, 여인의 표정이 일순간 암담해진 것을 보고 진호는 조금 전 자신이 본 여인의 눈빛이 진짜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진호는 늘 정교랑이 자기 앞에서 다른 표정을 짓기를 기대했지만, 그 표정을 그 순간에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정교랑의 눈빛에서 살짝 스쳤던 놀라움과 기쁨은 진호의 뇌리에서 한 번, 또 한 번 떠오를 때마다 날카로운 칼이 되어 심장을 찌르는 고통을 안겼다.
아냐, 칼이 된 건 내 말이야. 내 말이 낭자의 마음을 찔렀을 거야.
진호의 주먹 위로 힘줄이 툭 불거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주복이 진호의 팔을 덥석 붙잡았다.
“반근한테 듣기로는 네가 그날 궁문 앞에서 저 여인을 기다리고 있다가, 두, 둘이서…….”
“내가 낭자를 의심했어.”
진호가 주복을 쳐다보면서 그의 말을 끊었다. 주복은 멈칫했다가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난 또, 그게 무슨 큰일이라고. 저 여인을 의심하는 게 네놈 하나도 아니잖아.”
주복이 입술을 삐죽이면서 턱으로 황궁을 가리켰다.
“저 여인을 의심하는 사람이라면, 저곳에만 해도 수두룩할 거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찾아내는 게 더 힘들걸? 그리고 나도, 내 아버지도, 그리고 범강림도 속으로는 똑같은 생각을 했을 거야.”
“그래도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러면 안 됐어.”
진호가 대답했다. 주복이 진호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리고는 주먹으로 진호를 밀쳤다.
“그래서 오늘 찾아온 이유가 뭐야. 저 여인이 넓은 아량으로 너를 용서해 주길 바라서? 그렇게 네 마음이 편해지자고?”
주복의 얼굴에서 차츰 웃음기가 걷혔다. 그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진십삼, 네가 남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 사람이길래 그렇게 말하는 거지? 그리고 왜 네가 남과 다르다고 생각해? 네가 그래야만 하는 이유는 뭐고, 그래서 너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데?”
주복의 말이 맞아. 나는 낭자에게 사과하러 온 게 맞나?
아니, 사과할 건 또 뭐야? 이미 할 말 다 해놓고, 굳이 또 찾아오는 건 낭자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라고 강요하는 것밖에 더 돼?
진호가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세게 내리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내가 낭자를 너무 업신여겼어.”
진호가 주복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고는 곧장 말을 타고 떠났다.
옆에서 가만히 서 있던 시녀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진호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주복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 공자님, 가서 아씨께 알, 알려야 할까요? 아마 지금쯤이면 아씨께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셨을 텐데.”
시녀가 안쪽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관둬라. 괜히 저런 한가한 사람들 상대해 줄 필요 없어.”
주복이 몸을 홱 돌리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두어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주복의 등 뒤에서 급하게 멈추는 말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주복은 벌써 말에서 내려 성큼성큼 걸어온 진호와 마주쳤다. 진호의 뒤에는 급보를 알리기 위해 말을 타고 온 사환 하나가 있었다.
“공자님, 공자님, 뭐 하시는 겁니까. 노야께서 속히 집으로 돌아오라고 하셨습니다.”
사환이 다급하게 진호에게 소리쳤다. 진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으로 걸어갔다.
“어이, 어이! 아직 널 볼지 안 볼지 물어보지도 않았단 말이야!”
주복이 소리쳤지만, 진호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정교랑은 회랑 아래에 서서 황씨와 몸종이 마당에서 소보아를 데리고 노는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진호가 들이닥치자, 황씨는 재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올케, 그러지 않아도 돼요. 여기서 놀고 있어요. 우리가 들어가서 이야기 나눌게요.”
정교랑이 황씨에게 말하고는 진호를 향해 안으로 들라는 손짓을 했다. 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딱 한 마디만 하고 가면 되거든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띠고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낭자를 다시 보게 됐을 때 어떤 모습일지 몇 번이고 상상해 봤지만, 딱히 평소와 다를 게 없네.
내가 내려놓을 수 있다면, 낭자도 내려놓을 수 있고, 내가 따지지 않는다면, 낭자 또한 따지지 않아. 군자와 교우하는 게 이리도 쉬운 것이었다니.
진호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웃다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하게 말했다.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데려갔습니다.”
진호의 뒤를 따라오던 주복이 놀란 표정으로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경왕!
정교랑이 아, 하고는 마당으로 시선을 돌렸다.
진호가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가자, 마당에서 풍차를 손에 쥔 채 황씨와 시녀들과 꼬리잡기 놀이를 하면서 까르르 웃음을 터트리고 있는 소보아가 보였다.
한없이 약한 어린아이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하지 못하고, 슬픔과 기쁨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가장 천진난만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경왕부 안은 몹시 소란스러웠다. 끊임없이 밖으로 옮겨지는 크고 작은 상자들이 마차 한 대를 금방 채웠다.
“전하, 이런 것들은 챙기지 않으셔도 됩니다.”
품계 높은 내시가 웃으면서 진안 군왕에게 말했지만, 진안 군왕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다 경왕이 쓰던 것들이네. 마음대로 바꿨다가는 경왕이 난리를 칠 것이야.”
진안 군왕이 고개를 돌려보자, 내시 몇 명이 경왕을 어르고 달래면서 간신히 밖으로 데리고 나오는 것이 보였다. 경왕은 놀고 있던 차에 갑자기 끌려 나온 것이 몹시 불만인지 이리저리 팔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댔다.
“육가아, 우리 궁에 들어가서 함께 마마를 뵙자. 거기 가서 계속 놀면 돼. 이 형님이 같이 놀아 줄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경왕의 손을 잡고 다독였다. 그러나 진안 군왕의 말을 알아들을 리 없는 경왕은 여전히 심통 가득한 얼굴로 옹알이를 하면서 그의 손을 뿌리쳤다.
품계가 높아 보이는 내시가 웃으면서 경왕을 마차에 태웠다. 진안 군왕이 경왕을 따라 마차에 올라타려던 찰나, 내시가 갑자기 진안 군왕의 앞을 조심스럽게 가로막았다.
“전하, 직접 바래다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소인들이 경왕 전하를 잘 모시고 가겠습니다.”
내시가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진안 군왕이 멈칫하고는 내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내시가 웃음기를 거두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태후마마께서는 경왕 전하를 모시고 입궁하라는 지시를 내리셨습니다. 종친이 지금 같은 시기에 태후마마의 전갈 없이 입궁하기는 어렵사옵니다.”
그렇구나.
진안 군왕이 마차를 짚었던 손을 천천히 내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황궁의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 갔지만, 진안 군왕은 제자리에 서서 요지부동이었다. 경왕부 근처에서 이 장면을 몰래 지켜보던 눈길들이 진안 군왕에게 집중되었다.
“전하, 그만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안 군왕 곁에 있던 내시가 조용히 속삭였다. 진안 군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몸을 돌리고 천천히 왕부 안으로 돌아갔다.
문이 닫히자, 마당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은 또 넋이 나간 모습으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왕부의 절반이 텅 빈 느낌이구나.”
진안 군왕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실상은 겨우 사람 일곱이 없어진 것뿐인데.
진안 군왕이 대부분의 시간을 경왕과 함께 보내며 그를 보살핀 덕에, 경왕의 시중을 드는 내시는 여섯 명뿐이었다. 그 여섯 명의 내시들은 경왕과 함께 자연스레 궁으로 돌아갔다.
내시가 진안 군왕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전하, 지금도 좋지 않습니까.”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도 나쁘지 않지.”
사실, 오늘만을 기다려오지 않았는가.
“아직 적응이 안 돼서.”
진안 군왕이 말했다.
진안 군왕이 경왕과 함께 보낸 시간은 족히 십여 년은 되었고, 특히 최근 삼 년 동안은 더욱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삼 년 동안 경왕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로 자랐고, 진안 군왕은 그런 경왕의 곁을 지키며 유모처럼 그를 살뜰히 챙기고 보살폈다.
“전하, 이제 적응하셔야지요. 지금 이 순간부터 경왕은 더 이상 어린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아이를 세심하게 보살피는 유모의 역할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건 궁녀와 내시들이 알아서 잘할 것이고, 전하께서 하셔야 하는 일은 더 큰, 그리고 더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경왕에게 하셨던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진안 군왕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내가 얼른 적응해야지. 육가아가 경왕이 됐던 그때처럼. 아무도 육가아가 그런 모습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지만, 그래도 적응해야만 했던 것처럼.
이제야 좀 적응됐다 싶었던 경왕이 어느새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하게 되더라도, 나는 그 모습에 다시 적응해야만 한다.
경왕이 어떤 모습으로 변하든, 그 아이는 항상 내가 알고 있는, 나의 육가아니까.
“육가아, 형님이 네게 천하를 쥐여준다고 했었지.”
진안 군왕이 천천히 손을 앞으로 내밀고 주먹을 쥐었다.
“이건 너의 천하니라. 드디어 천하를 네 손에 쥐게 되었으니, 이 형님이 꼭 너의 천하를 지켜 주마.”
“태후가 경왕을 궁으로 다시 들였다고? 설마 경왕을 제위에 올리려는 건가?”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그는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 세수를 하고 죽을 한 그릇 먹은 뒤, 입궁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인, 설령 그렇게 되더라도 비난받을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어찌 됐든 경왕은 폐하의 유일한 혈통이니까요.”
막료가 말했다.
“하지만 경왕은 바보가 아닌가!”
진소가 손에 쥐고 있던 빈 그릇을 탁자 위로 던졌다.
“그럼 나중에 시호(諡號: 사람이 죽은 뒤 생전의 업적, 행동 및 품성에 의해 정해지는 호)를 혜(惠)로 해야 할까, 안(安)으로 해야 할까?”막료가 멈칫하고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안(安)으로 하지 않겠습니까?”
막료는 과거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진안제(晋安帝)와 진혜제(晋惠帝) 중에 진안제가 더 바보라고 생각하여 대답했다. 진안제는 덥고 추운 것도 구분할 줄 모르고, 입이 있으나 말을 할 줄 모르니, 그런 점들이 더욱 경왕과 비슷하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진소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막료를 흘겨보았다.
“자네는 지금 그런 농담이 재밌다고 생각하는가?”
진소가 소매를 홱 털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막료가 민망한 듯 웃으면서 서둘러 진소의 뒤를 쫓아갔다.
“대인, 재밌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이런 농담을 실행에 옮기려는 사람이 있으니 드리는 말입니다. 대인, 이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당연히 작은 일이 아니지.
황궁의 마차가 경왕부 앞에 멈춰 선 그 순간부터, 소식은 경성 전역에 퍼졌고 덕분에 경성이 발칵 뒤집혔어.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긴 했지만, 그건 백성들에게 보여 주는 눈요깃거리에 불과했다. 조정 관리들에게 지금 이 순간 가장 긴박하고 중요한 문제는 앞으로의 국정 운영이었다.
황제의 병이 위중하여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 유일한 황위 계승자였던 평왕까지 갑작스레 변을 당한 상황이었다. 옥좌는 단 하루도 비워 둘 수 없는 법, 군주가 누가 될 것인가에 따라 향후 왕조가 결정되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앞길이 결정됐다.
“말도 안 되는 소리잖아. 바보가 어떻게 황제를 해?”
“뭐가 말도 안 돼? 바보가 왜 황제를 못 해? 전례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어허, 전례 얘기는 꺼내지도 마쇼. 그 시기에 나라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몰라서 그런 소리를 지껄이는 거요?”
“다들 알지, 다들 알아. 그런데 오늘날의 태자소부(太子少傅: 태자의 스승) 위관(衛瓘)이 누가 될지가 관건이지. 바보에게 넘어갈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술김에라도 할 수 있을 위인이 누굴지.”
“고능준은 태후가 수렴청정하기만을 바라겠군.”
주복이 말했다.
경성에 무슨 소식이 퍼지든 간에, 언제나 그랬듯 정씨 저택은 고요했다. 진호는 태후가 경왕을 데려갔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곧장 정씨 저택을 떠났다.
진호의 입장에서는 정교랑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험할 수 있는 일이었다. 지금 조당이 혼란에 빠지기도 했고, 황제가 위독한 데다 평왕까지 없어진 마당에 중신들의 관계도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었다.
진(秦)씨 가문은 진소만큼 중임을 맡고 있는 것도 아니고, 고능준의 가문을 능가할 정도로 세력이 막강한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꽤 명망 있는 황족이었다. 따라서 진씨 가문의 일거수일투족은 조정 대신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지금 정교랑은 아주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일은 평왕이 사고로 죽은 것이며, 천벌을 받아 죽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정 관리들은 정교랑이 번개를 불러온 이유가, 자신이 평왕을 죽이지 않았다는 걸 태후에게 증명해 보인 것에 불과함을 잘 알았다.
하지만 그것을 증명했다고 뭐가 달라질까?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정교랑을 향한 의심의 씨앗이 심어졌다. 지금 당장은 평왕의 명성을 지키기 위해 대놓고 정교랑을 꺾으려 하진 않겠지만, 평왕이 황릉에 안장되고 태후의 수렴청정이 안정기에 접어들면 고능준이 뿌려둔 작은 의심의 씨앗이 무럭무럭 자라 싹을 틔우고 하늘을 찌르는 거대한 나무가 될 터였다.
“이게 아씨랑 무슨 관련이 있다고요! 아씨께서 그 사람들을 해친 것도 아니고, 아씨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인데, 어째서 아씨를…….”
반근이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관련이 없어?”
주복이 미간을 찌푸리고 반근에게 반문했다.
“평왕은 죄를 뉘우치다가 벼락에 맞았다. 평왕이 무릎을 꿇고 죄를 뉘우치게 된 이유는 귀비가 누군가의 모함에 빠졌기 때문이지. 잘 생각해 봐. 태후 입장에서는 귀비를 모함에 빠트린 사람이 안비일 거야. 그럼 안비는 무엇을 빌미로 귀비를 모함할 수 있었을까? 그야 당연히 안비가 당시 회임하고 있던 황자가 아니겠어? 그런데 안비가 어떻게 회임을 했지? 그건 바로 진안 군왕이 보낸 간식을 먹고 나서부터야.”
주복의 말을 들은 시녀와 반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주 공자님도 말씀을 꽤 잘하시네요.”
시녀의 말에 주복이 눈썹을 치켜뜨고 시녀를 흘겨보았다.
“그, 그래도 아씨와는 관련이 없는걸요?”
반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주복이 콧방귀를 뀌고는 정교랑에게 시선을 돌렸다.
“진안 군왕의 간식은 어떻게 만들어진 걸까?”
간식?
그날 진안 군왕이 경왕부에서 연회를 열어 아씨를 초대했고, 아씨께서는 칠현금으로 액막이를 해 주셨지. 그리고 진안 군왕은 아씨께서 알려 준 대로 간식을 새로 만들어 입궁하며 폐하께 그 간식을 드렸고, 폐하께선 또 그걸 안비에게…….
“아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예요? 그게 어떻게 우리 아씨 때문이라는 거예요? 순 억지잖아요!”
반근은 씩씩대며 눈을 부릅떴지만 주복은 콧방귀를 뀌었다.
“너희 여인네들은 그런 억지 잘 부리지 않느냐. 연달아 손자와 아들까지 잃게 된, 검은 머리카락 한 올 나지 않는 백발의 노파는 오죽할까? 태후는 언제나 그 위상이 드높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어서 황제조차도 태후의 말을 거역한 적이 없다. 그런 여인이 이런 충격을 받고도 도리나 이치를 운운할 수 있을 것 같더냐?”
하긴, 한꺼번에 아들과 손자를 잃어 비통함과 분노에 휩싸인 노부인이라면, 절대로 도리나 이치 같은 걸 안중에 두지 않을 거야. 게다가 고씨 가문까지 합세해서 태후가 억지를 부리도록 부추기고 있으니.
“평왕만 없어지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태후가 있을 줄이야.”
시녀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평왕이 살아 있었을 때도, 아씨께서 혼사를 거절해 체면을 구기고 창피를 당했다는 이유로 태후는 화가 났다지만, 그 정도의 분노는 아씨께서 경성을 떠나신다면 끝날 일이었어.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아씨가 경성 밖으로 내쫓기는 정도에 그치지 않을 거야. 지금 태후에게 아씨의 존재는, 같은 하늘 아래서 숨쉬기조차 싫을 정도일 테지.
정말 끝도 없구나. 산 넘어 산이네.
방 안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아버지께서는 벌써 짐 정리를 하고 계신다. 사직서도 이미 작성해 두셨고.”
주복이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을 이어갔다.
“나도 곧 서북으로 돌아가야 해서, 아버지와 가족들을 섬주로 바래다줄 생각이야. 그러니까 교랑, 나와 같이 가자.”
정교랑이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진안 군왕과 혼사를 치를 생각은 그만 접어 둬. 이미 불가능한 일이 됐잖아. 태후가 절대로 동의하지 않을 거야.”
주복이 목소리를 내리깔고 말했다.
“아니요.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정교랑이 문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말을 덧붙였다.
“다만, 아직 내가 떠나는 걸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어서요.”
* * *
작가의 말:
진혜제(晋惠帝) 사마충(司馬衷)과 진안제(晋患帝) 사마덕종(司馬德宗) 두 황제는 모두 지능이 낮으나 제위에 올랐던 황제들입니다.
진혜제 사마충은 진무제(晋武帝)의 정실 둘째 아들입니다. 적장자가 죽고 나서 자연스럽게 사마충이 태자에 책봉되었는데, 지능이 낮고 바보라는 이유로, 태자의 스승인 위관(衛瓘)은 술기운을 빌려 옥좌를 손으로 치면서 귀중한 옥좌가 아깝다는 말을 했습니다. 위관은 취하지 않았지만, 황제에게 사마충이 태자로 책봉되면 안 되고, 나아가 제위를 이어받으면 더더욱 안 된다는 충언을 한 일화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