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160)

-죽을 각오-

진소는 목이 메는 듯한 느낌에 소매를 들어 입가를 가리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진소 부인이 진소의 침울한 모습을 단번에 눈치채고 한숨을 쉬었다.

“교랑은 정말로 폐하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하던가요?”

“마음 같아서는 경왕부터 고쳐 달라고 하고 싶소.”

진소가 소매를 내리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병을 어떻게 고치겠어요. 교랑을 정말 신선으로 여기는 거예요?”

진소 부인이 고개를 저으며 진소를 나무라듯 말했다. 진소는 자신의 말을 듣고, 우습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던 정교랑의 표정을 잊지 못했다.

“그 여인은 경왕이 병을 앓는 게 아니라, 다친 것이라고 생각하오. 한데 그 여인은 외상에 능숙하고,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가지고 있지 않소. 심지어 두 동강이 난 손도 이어붙일 수 있으니, 나는…….”

진소가 탄식했다.

병이 급하다 보니 닥치는 대로 의원을 찾는 꼴인 게지.

“그럼 폐하께서는 병을 앓으시는 게 맞고, 지금 그리 위독하시다는데…….”

진소 부인이 서둘러 묻자, 진소는 다시 한번 한숨을 푹 쉬었다.

“위독하긴 하지만, 풍질은 고칠 줄 모른다고 했소.”

“진짜로 못 고친다고 했어요?”

진소 부인이 곧바로 물었다. 진소가 고개를 들고 부인을 쳐다보았다. 진소의 시선을 느낀 진소 부인이 민망한 얼굴로 그의 눈을 피했다.

“아, 교랑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난 단지…….”

“인지상정이지.”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랬다. 평소 무엇이든 해내던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상황이 딱 한 번만 와도 온갖 의심과 추측에 시달리기 마련이었다. 평소 늘 남을 돕던 사람은 딱 한 번만 도와주지 않아도 원성을 듣고 미움을 받지 않던가. 인간이란 본디 그러하니 인지상정이라고 할 수밖에.

내가 그 여인이었더라면, 그렇게 솔직하게 고칠 줄 모른다고 말하기는 두려웠을 텐데.

그 여인의 스승이라는 자는 알고 있었을까.

그 여인에게 수많은 기술을 가르쳐 주고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 했을 때, 그 여인이 그 많은 기술을 구사할 수 있기에 마주해야 할 위험에 대해서는 생각해 봤을까.

“노야,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마세요. 어서 조금이라도 더 주무셔야죠. 이따가 또 궁에 들어가야 하잖아요.”

황제가 쓰러졌다. 황제의 생사는 불분명하고, 그의 뒤를 이을 황위 계승자가 없는 상황이기에 곧 조정에는 격변의 바람이 불 터였다. 이럴 때 진소마저 쓰러진다면, 조정은 끔찍한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될 것이 자명했다.

진소가 고개를 끄덕이고 걸음을 옮겼다.

휘장을 내리고 잠을 청하러 간 남편을 바라보던 진소 부인의 표정이 차츰 어두워졌다.

“역시 천문 현상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네.”

진소 부인이 중얼거렸다.

월식은 대흉을 뜻하고, 천하가 혼란스러워질 것을 암시하지.

경성 황궁의 소식은 쏜살같이 달리는 말들과 서신을 타고 각지로 흩어졌다.

마차가 준비된 지 반나절이 넘었는데도 정 대노야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정 이노야는 소매를 홱 털고 정 대노야가 묵는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갈 겁니까, 말 겁니까? 언제는 뭐에 쫓기듯이 서둘렀으면서, 지금은 또 왜 이렇게 미적대는 거요? 당최 강주로 돌아가자는 겁니까, 다시 경성으로 가자는 겁니까?”

투덜대면서 방 안으로 들어온 정 이노야의 눈에,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로 가만히 앉아 서신을 읽는 정 대노야의 모습이 들어왔다.

“형님, 도대체 뭘 기다리는 거요?”

“서신을 기다린다.”

정 대노야가 넋이 나간 모습으로 중얼거렸다.

서신을 기다린다고?

“무슨 서신을요?”

정 이노야가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

정 대노야가 기다리는 것은 경성에서 오는 서신이었다. 진안 군왕과 정교랑의 혼사가 결정된 후에도 정 대노야는 경성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무시하고 강주로 가는 길을 재촉했지만, 자꾸만 머뭇거리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어쩌면 경성에 있는 사람들이 너무 정신이 없어 자신에게 서신을 쓰는 것을 잊었거나, 누군가가 벌써 서신을 썼는데 그 서신이 아직 길 위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쨌거나 분명히 다음 서신이 올 것이고, 그 서신의 내용에 따라 경성으로 돌아가야 할 거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 대노야는 길을 재촉하다가도, 저도 모르게 속도를 늦추기를 반복했다. 이는 언제든 갑자기 서신을 받았을 때, 경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너무 멀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드디어 오늘, 정 대노야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경성의 서신이 도착했다.

정 대노야가 고개를 들자, 정 이노야는 깜짝 놀랐다.

“형님, 왜 그러시오?”

정 대노야의 안색은 눈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잔뜩 서려 있었다.

억지로 치르는 혼사니, 평왕의 위협이니 하는 것들은 다 사소한 일이었어. 다 사소한 일에 불과했다고! 그 애가 그렇게 말한 이유가 있었어!

누구에게 시집갈지는 일단 나중에 다시 이야기해요. 우선 지금은 당장 백부님께서 제 아버지를 데리고 강주로 돌아가셔야겠습니다.

경성에 남아 있으면 여러모로 불편할 거에요. 그러니까 일단 강주로 돌아가세요.

정 대노야의 두 손이 격하게 떨려왔다.

그렇게 된 거였다니, 그렇게 된 거였다니!

이것도 다 그 애가 저지른 일인가?

그 생각이 뇌리에 스치자, 정 대노야는 거의 질식할 정도로 숨쉬기가 어려워졌다.

아니야, 아니야.

정말 그 애가 한 짓이라면, 서신을 받기도 전에 나는 벌써 관졸과 병사들에게 포위됐겠지. 그럼 그 아이는 정말로 하늘을 읽고, 귀신이 부리는 요술 같은 걸 행할 수 있다는 건가?

뭐가 됐든, 경성에 남아 있으면 안 되겠구나. 당장 강주로 돌아가야 해. 지금 당장!

정 대노야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속히 강주로 돌아가자.”

정 대노야가 소리쳤다.

정 대노야의 안색을 살피려고 가까이 다가가 고개를 숙였던 정 이노야는 갑자기 벌떡 일어난 정 대노야의 정수리에 턱을 세게 부딪히고, 악 소리를 내지르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정 대노야는 정 이노야가 괜찮은지 살피지도 않은 채 곧장 밖으로 후다닥 뛰쳐나갔다. 정 이노야가 코와 입을 닦고 손바닥을 펼쳐보니,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너무하네, 진짜!”

정 이노야가 어금니를 깨부술 듯이 이를 부득 갈며 외쳤다.

정씨 가문의 사람들이 말과 마차를 타고 허둥지둥 역참을 떠나자, 누군가가 황급하게 역참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이고, 큰일 났소! 평왕은 벼락에 맞아 죽고, 폐하께서는 분통이 터져 돌아가셨다는군!”

역참 안으로 뛰어 들어온 행인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럴 리가 있나.”

“소식이 벌써 사방에 퍼졌다니까!”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그럼 천벌 받아 죽은 거 아니오?”

“아니, 조정에서 사고라고는 하는데.”

“에이, 그게 어떻게 사고야?”

“진짜 사고라고 했다니까? 게다가 신선의 제자인 정 낭자가 평왕이 벼락 맞아 죽은 게 사고였다는 걸 직접 증명해 보이겠다 했소. 번개는 사람도 불러올 수 있는 거라나? 그래서 평왕이 벼락에 맞은 건 우연한 사고고, 천벌을 받은 게 아니라고 하던데?”

“벼락에 맞아 죽는 게 천벌이 아니란 말이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정 낭자가 직접 번개를 불러오겠다 했소. 정 낭자 말대로, 번개가 정말로 사람이 불러올 수 있는 거라면, 그걸 천벌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이제야 소식을 접한 역참 사람들과는 달리, 경성 사람들은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사람이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날짜와 장소를 공표했기 때문이다. 이틀 뒤, 금수원에서 번개를 불러오는 것을 구경할 수 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정월 꽃등 놀이 때보다 더욱 흥분했다. 그 광경을 지켜보기 위해 사방팔방에서 사람들이 몰려왔고, 금수원의 자리는 천금을 주고도 얻기 힘들게 됐다.

“에이, 다 허튼소리겠지. 번개를 피한다는 소리는 들어 봤다만, 번개를 불러온다는 건 살면서 또 처음 듣네.”

“그러니까 정 낭자가 신선의 제자라고 하는 거 아니요. 당연히 자신만 아는 방법이 있겠지.”

“정말 그 여인이 신선의 제자라면, 벼락 맞아 죽는 게 천벌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 자체가 모순이지 않소?”

방문이 열리자, 열린 문 틈새로 떠드는 소리가 방 밖으로 새어 나왔다. 방 앞을 지나가던 몸종 하나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지만, 방문이 닫히면서 방 안의 왁자지껄한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됐다.

“너도 가서 구경할 거야?”

“구경이야 하고 싶지만, 그 인파를 어떻게 뚫겠어.”

술을 따르는 기녀 두 명이 속닥이면서 방 앞을 지나갔다. 춘령이 방 안을 흘깃 쳐다보고는 난간 너머로 보이는 대청을 내려다보았다.

평왕이 갑작스럽게 죽고, 황제도 위독한 상태이다 보니, 경성 전역에서 노랫소리가 멈추었다. 덕승루를 찾는 손님들도 몇 없었지만, 그 몇 안 되는 손님들마저 모두 번개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춘령이 시선을 거두고 관기들이 쉬는 층으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한가한 관기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벌써 도박판이 열렸다던데, 너는 어느 쪽에 걸었어?”

“당연히 정 낭자 쪽 아니겠어요?”

춘령이 불쑥 끼어들자 관기 두 명이 춘령에게 시선을 돌렸다.

“정 낭자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데요.”

춘령이 눈을 끔뻑이며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자랑하듯이 말했다. 관기들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긴, 네 언니의 은인이니 당연히 대단하시겠지.”

“그러니까 언니들, 꼭 많이 거세요. 분명히 큰돈 챙길 수 있을 테니까.”

춘령이 진지한 얼굴로 재차 말했다. 관기들이 반신반의한 얼굴로 웃자, 춘령이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걸 수 있는 만큼 다 걸어, 이 바보들아.

그 여인이 주 언니의 은인이기 때문에 대단하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여인이 어떻게 번개를 불러와 사람을 죽였는지 내 눈으로 똑똑히 봤기 때문에 단언하는 거야. 그 여인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데.

춘령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고씨 가문 따위가 무슨 적수가 된다고, 황자인 평왕도 서슴없이 죽이는 여인인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니, 나는 반드시 잘 숨어 있어야 해. 절대 그 여인이 날 발견하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계산해서 꼭꼭 숨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그 여인에게 복수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장씨 저택 안. 여인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씨께서는 거짓말을 하시지 않아요. 정말로 스스로 번개를 불러올 수 있으시다고요.”

몸종이 훌쩍이면서 눈물을 훔쳤다.

“그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그때 얼마나 위험했는지 어떻게 알겠어요.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미친 듯이 휘몰아치던 밤이었어요. 제가 지붕 위에 엎드려 밧줄을 아래로 힘껏 던지는데, 거센 바람 때문에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정도였죠. 머리 위로 천둥소리가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저는 제가 벼락에 맞은 줄 알았다니까요.

그때 아씨는 방 안에 계셨어요. 자기가 꼭 방에 들어가서 창문과 문을 다 열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씨께서는 그 음탕한 악인 둘만 벼락에 맞게 하려던 게 아니라, 어쩌면 자기 자신까지 벼락에 맞을 각오로 그 방 안에 들어가신 거예요.

만약 아씨께서 마지막 그 순간에 방에서 나오지 못하셨더라면, 벼락이 내리치기 직전에 그 방에서 나오지 못하셨다면, 아니면 그 두 사람이 아씨를 따라 나왔더라면, 아씨도 그 자리에서 같이 죽었을 거라고요.

아씨께서 그러셨어요, 조금이라도 틀리면, 우린 다 죽는 거라고.

그토록 어렵고 위험한 일인데, 아씨께서 멀리서 손가락 하나만 까딱하면 번개를 불러와 사람을 죽이는 거라고 말한다고요? 세상에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있겠어요.”

몸종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복이 감탄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세상 모든 일은, 자기 자신까지 사지에 몰아넣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지. 남을 죽이기 위해서는 나부터 죽을 각오로 달려들어야 해.”

옆에서 듣고 있던 장 노태야가 입술을 삐죽였다.

“그런 말은 해서 뭐해? 자기한테 제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남들이 어디 그런 걸 신경이나 써야 말이지.”

노복이 장 노태야를 향해 이를 악물고 눈치를 줬다. 몸종은 더욱 서럽게 통곡했다.

“하지만, 저희 아씨가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씨가 너무 억울하다고요. 그 사람들은 왜 아씨의 말을 믿지 않는 거예요? 왜 이렇게까지 아씨를 벼랑 끝까지 몰아세우고, 사지로 내모는 거냐고요!”

장 노태야가 혀를 찼다.

“어리석은 것아. 얼마나 많은 세상 사람들이 자신의 잣대를 가지고 남을 판단하더냐? 네가 뭐라 말한들, 그건 다 네가 하는 말밖에 안 되는 게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사람의 일이지, 꼭 네가 원하는 대로 생각해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니 너도 그만 속상해하거라. 네가 네 아씨를 누구보다 더 잘 알지 않느냐? 네 아씨가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가, 몸이 안 좋아서라고 했지? 한데 정말로 몸이 안 좋아서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아마 말하기도 귀찮고, 딱히 할 말도 없기 때문일 게야. 말을 하나 안 하나, 남들 생각은 똑같을 테니까.

“왜 저희 아씨만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냐고요!”

몸종이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장 노태야가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재수가 없다고? 그 여인은 절대로 재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야. 그 여인이 언제 손해 본 적 있느냐? 그리고 지금도, 그 여인 입장에서는 엄청난 이득을 보는 것이야. 그런데도 네가 그 여인을 위해 울면, 정작 울어야 할 사람은 어떡하라고?”

몸종이 깜짝 놀란 기색으로 퍼뜩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이 상황이 엄청난 이득이라고요?

“아버지, 이러면 그 천것한테만 좋은 일이 되는 거 아닙니까!”

고능준이 집에 돌아왔다는 소식에 침상에 누워있던 고 관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가 고능준을 향해 달려오면서 소리쳤다.

“그때 그 자리에서 그 계집의 목을 베었어야 했습니다!”

고능준은 대꾸 대신 고 관인의 뺨을 세게 후려쳤다. 뒤로 몇 걸음 밀려난 고 관인이 두 손으로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면서 두렵기도, 억울하기도 한 표정으로 고능준을 바라보았다.

고능준은 고 관인의 멱살을 잡고 가까이 끌고 와서 시뻘게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도대체 평왕한테 뭐라고 말한 거냐! 네놈, 대체 무슨 얘길 지껄인 거냐고!”

“아버지, 저는 아버지께서 시키신 대로 했습니다. 폐하께 잘못을 빌라고요.”

고 관인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왜 벼락에 맞아 죽었단 말이냐? 왜!”

포효하던 고능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어떻게 죽을 수 있냔 말이다. 왜, 왜 죽었냔 말이야.

“아버지.”

고 관인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정말로 죄를 뉘우치고 계셨습니다. 폐하께 진심을 보이고자 근정전 밖에서 무릎까지 꿇으셨고요.”

고능준이 고 관인의 따귀를 다시 올려쳤다.

“네놈 눈에는 그게 진심으로 보이더냐? 모두가 폐하의 눈치를 보면서 쉬쉬하고, 그 얘기는 입에 올리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평왕이, 평왕이 문무백관 앞에서 그 일을 큰소리로 외쳐대는 게 폐하의 따귀를 후려치는 게 아니고는 무엇이야! 그건 폐하께 대한 협박이자 대역무도하고 불충, 불효한 짓이니라!”

고능준은 귀신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평왕이 그런 말을 내뱉자마자, 뒤이어 벼락이 내리쳤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그는 그것이 천벌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폐하의 뺨을 후려치고 그런 말까지 했으니, 천벌을 받아 마땅하지!

고 관인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아버지, 저는 전하께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라는 말씀 같은 건 올리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저와는 무관한 일입니다! 전하께서 제 말을 무시하고 기어코 가시겠다는데, 저 따위가 무슨 수로 평왕 전하의 앞을 막겠습니까.”

그래, 막을 수 없었겠지.

민간에 그런 말이 있지. 염라대왕께서 삼경(三更)에 데려가고자 마음먹으셨다면, 그 누구도 그 사람을 오경(五更)까지 붙잡아 둘 수 없다고.

“이러니 사람이 세운 계획은 하늘의 계산에 못 미친다는 게지.”

고능준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가 허무한 표정으로 고 관인을 밀쳐내고는, 온몸에 힘이 빠진 듯 축 늘어진 채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주위에 있던 막료들이 서둘러 고능준을 부축하러 다가갔다. 막료들의 표정도 예전만큼 여유롭지 않고, 얼굴 가득 불안함이 서려 있었다.

평왕이 죽었어. 평왕이 죽다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꼬.

“평왕이 없어졌다고 해도, 우리에겐 아직 태후가 남아 있다.”

벌써 눈물을 깨끗이 닦은 고능준이 팔걸이 의자에 기대앉아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황제가 위독하니, 이제부터 태후가 수렴청정을 맡을 거야.

“그러니 아직까지는, 우리 고씨 가문이 가장 권위 높은 외척이다.”

막료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하지만 대인, 태후마마께서 수렴청정하신다 해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한 막료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황제가 영영 깨어나지 못한다면, 태후는 열흘, 보름, 아니 길면 반년 넘게 수렴청정을 하겠지만, 조정의 대신들은 결코 태후가 영원토록 수렴청정을 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나이 많은 태후가 오랫동안 수렴청정 자리를 유지하는 것 또한 힘든 일이 될 것이고.

그러니 황제의 대리로 수렴청정을 할 적임자는, 태후가 아니라 황후가 될 것이 분명했다.

황후!

“대인, 밤사이에 송씨 가문 사람들이 경성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막료 한 명이 조용히 말했다.

황후는 내양(萊陽) 송씨였다. 후궁 깊숙이 숨어 그 존재가 잊혔던 황후처럼, 세상 사람들도 내양 송씨가 황후의 본가였다는 사실을 거의 잊고 살았다.

그래, 좋다.

고능준이 이를 부득 갈았다. 막료와 고능준의 대화를 듣고 있던 고 관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아버지, 송씨 가문은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 아닙니까. 그리고 태후께서 수렴청정하신다면, 그네들이 황후로 바꾸고 싶다고 해서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버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그 망할 정씨 계집입니다. 내일모레면 바로 그 계집이 번개를 불러오는 날이에요. 그 계집이 정말로 번개를 불러온다면, 이번 일은 그럼 단순한 사고로 끝나는 겁니까?”

고능준이 고개를 돌려 고 관인을 쳐다보자, 고 관인은 고능준의 따가운 눈빛을 피하려 고개를 숙였다.

“그럼 일을 어떻게 더 키우고 싶은 게냐? 태후가 그 여인에게 가능하냐고 물었던 그 순간부터, 이 일은 이미 끝난 일이 된 게다!”

고능준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멍하니 서 있던 고 관인이 저도 모르게 물었다.

“만에 하나 번개를 불러오지 못하면요?”

고 관인은 질문을 내뱉자마자 아차 싶은 마음에 재빨리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역시나 고능준은 옆에 있던 찻잔을 고 관인을 향해 냅다 던졌다.

“불러올 수 없다면, 더더욱 그 여인과 관련 없는 일이 되는 거지!”

“번개를 불러온다면, 그 여인과 관련 있는 일이 되는 거요?”

금수원 안, 가장 좋은 자리에 설치된 차일 아래에 앉은 두 관리는 광활한 사격장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내다보고 있었다.

사격장 주위로는 차일이 빽빽하게 쳐졌고, 차일 아래에는 사람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서 있었다. 관부 관리들이 현장으로 나와 질서를 유지했다.

“저 분주한 사람들 좀 보시오. 그리고 저 이상한 물건들은 죄다 어디에 쓰는 거지? 종이 연이며, 쇠막대며…….”

차일 아래 여유롭게 앉아 있던 관리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나지막이 읊었다. 그러고는 시선을 거두고 옆 사람에게 말했다.

“저리 많은 물건을 써야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 거라면, 어떻게 아무도 몰래 사람을 해친단 말이오? 게다가 평왕은 근정전 바로 앞에서 그런 변을 당한 건데, 누가 감히 저런 물건들을 꺼내놓고 번개를 불러올 수 있었겠소?”

옆에 있던 관리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흥미진진하게 사격장 안을 쳐다보고는 웃는 얼굴로 물었다.

“돈은 걸었소?”

“뭐하러 거나? 아예 한쪽으로 다 쏠려서 도박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하던데.”

앞서 말하던 관리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두 관리가 고개를 돌리면서 왁자지껄한 인파를 둘러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일이란 말이오. 새해 연회 때보다 사람이 더 많이 온 것 같소.”

관리가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차자, 옆 사람이 웃으면서 대꾸했다.

“그래도, 저들이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게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폐하의 병이 급하니, 태후께서는 아무 의원이나 붙잡고 싶은 심정일 것이오.”

관리가 감탄하면서 말하자, 옆 사람이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붙잡을 의원이 있으니 다행이군.”

두 사람이 담소를 나누던 중, 갑자기 인파 속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이 서둘러 사격장으로 시선을 돌리자, 이제 막 도착한 듯한 정교랑이 보였다.

“다른 건 됐고, 비바람과 번개를 불러오는 것만 볼 수 있어도 난 충분하겠네.”

두 사람이 웃으면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부터 내리쬐던 뙤약볕이 사라지고 하늘이 흐려졌지만 바람은 한 점도 불지 않았다. 가뜩이나 꿉꿉하고 무더운 날씨에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서 있던 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짜증이 났다.

반근이 정교랑에게 부채질을 해 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씨, 아씨, 제가 하게 해주세요.”

몸종이 옆에서 다급하게 말했다. 장씨 저택을 뛰쳐나와 어제부터 정교랑과 함께 있던 몸종은 한시도 쉬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했다.

“아씨, 저, 저는 예전에도 해 본 적 있잖아요.”

몸종이 작은 소리로 덧붙였다.

주복이 몸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몸종이, 그때 강주 도관에 같이 있었던 몸종인가?

“지난번에는 네가 번개를 불러오는 역할을 했으니까, 이번엔 서로 바꿔 보자. 내가 번개를 불러올 테니, 넌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정교랑이 묻자, 몸종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할 수 있어요!”

“아씨, 저도 할 수 있어요!”

시녀와 반근도 뒤질세라 다급하게 소리쳤다. 정교랑이 반근 셋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좋아. 너희는 그럼 저기 허수아비 근처에 서 있어. 이따 꼭 내 말 잘 들어야 해.”

정교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진지하게 말했다.

“내 말, 꼭 잘 들어야 해. 조금이라도 틀리거나 조금이라도 늦는다면, 정말 죽을 수도 있어.”

세 반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드넓은 사격장의 중앙을 향해 뛰어갔다. 사격장 중앙에는 허수아비 한 개가 세워져 있었다. 세 몸종이 다급하게 뛰어가는 모습을 본 구경꾼들이 더욱 시끌벅적해졌다.

“이제 시작하는 건가?”

“이제 시작하는 거요?”

“시작은 무슨. 번개는커녕 바람 한 점 안 불고 있잖소.”

정교랑은 주위의 시끌벅적함을 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덤덤하게 종이 연 하나를 손에 쥐었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종이 연은 아름답게 채색되어 있었다.

“나도 연을 날려 본 지가 꽤 오래됐네.”

정교랑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고는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들고 앞에 있던 사람들에게 물었다.

“너희 중에, 나랑 연 날리고 싶은 사람 있어?”

정교랑의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은 집에서 데려온 시녀들이었다. 시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높이 들고 자기가 하겠다며 나섰다.

“나.”

서너 명의 시녀들이 목청을 높이는 사이,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하고는 팔을 쭉 뻗어서 종이 연을 낚아챘다. 연을 낚아챈 사람이 주복이라는 것을 알아챈 시녀들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섰다.

정교랑도 별다른 대꾸 없이, 옆에 놓여 있던 구리철사와 방울을 연에 묶고 철사로 만들어진 실타래를 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정교랑이 하늘을 쳐다보자, 주위의 이목이 모두 정교랑에게 집중되었다.

“이제 됐어요.”

정교랑이 시선을 거두고 주복을 쳐다보면서 미소를 지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정교랑은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정교랑의 치맛자락이 흩날리면서, 갑자기 어디선가 광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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