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권 - 120화 (120/160)

교랑의경 21권

-이런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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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까지 치네.

“전하, 전하, 괜찮으십니까?”

황궁 안, 천둥 번개 때문에 놀라서 자빠질 뻔한 내시들이 황급히 우산을 고쳐 쓰고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우두커니 빗속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의 머리카락과 옷은 벌써 비에 흠뻑 젖은 채였다. 그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놀란 표정으로 감탄했다.

“엄청난 천둥 번개로구나.”

멀리서 천둥소리가 몰려오자, 내시들이 재빨리 진안 군왕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며 재촉했다.

“전하, 어서 가시지요. 근정전으로 가서 비를 피하셔야 합니다.”

진안 군왕과 내시들이 더욱 빠른 걸음으로 근정전을 향해 걸어가고 있을 때, 진안 군왕이 돌연 걸음을 멈췄다.

“저 앞에…….”

진안 군왕이 다소 놀란 기색으로 웅장한 근정전 앞을 내다보았다.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평왕 전하, 전하!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데, 제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더는 이렇게 무릎을 꿇고 계셔서는 안 됩니다. 번개까지 치고 있습니다!”

내시들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평왕을 말렸지만, 비에 흠뻑 젖은 평왕은 일어날 기색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좀 전에 내리친 번개에 놀라지는 않았지만, 주위 사람들이 천둥 번개에 놀라 기겁하며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며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평왕의 얼굴에는 웃음이 걸려 있었고, 눈빛도 반짝이고 있었다.

“아니다. 본왕은 죄를 뉘우치는 중이니라. 폐하께서 아직 본왕을 책망하지도 않으셨는데 어찌 자리를 뜬단 말이냐.”

평왕이 큰 소리로 외치고는 고개를 들고 활짝 열린 근정전 문을 올려다보았다.

비 때문에 날씨가 흐려져 근정전 안은 더욱 어둑했다. 평왕의 시야에는 근정전 안에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사람들만 보일 뿐,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본왕은 굳이 보지 않아도, 저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있지.

놀랐거나, 화가 났거나, 두려워하는 거겠지?

죄를 뉘우친다고? 본왕이 무슨 죄를 뉘우쳐야 하는데?

죽은 놈들은 죽어 마땅하니까 죽었겠지, 본왕과 무슨 관련이 있다고! 똑똑한 데다 노력까지 열심히 하는 본왕을 모두가 칭찬했어.

그런데 본왕을 어찌 감히 그 바보와, 살아남지도 못한 그 고깃덩이와 비교할 수 있단 말이냐!

폐하, 두 눈 똑바로 뜨고 보시지요. 누가 폐하에게 있어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아들인지!

지나가는 고양이나 개 따위는 그리도 아껴 주시면서, 어찌 소자에게는 한없이 야박하신 겁니까!

평왕이 이를 악물고 안간힘을 쓰면서 속에서 외쳐대는 말들을 삼켜냈다. 입가에 웃음이 걸려 있던 평왕의 얼굴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아바마마, 통촉하시옵소서! 다 소자의 잘못입니다. 부디 소자를 외직으로 보내 주시옵소서!”

평왕이 소리쳤다.

“전하, 하실 말씀이 있다면 안으로 들어가서 폐하께 아뢰시지요.”

내시들이 한쪽에서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 평왕을 위해 가져왔던 우산도 평왕이 힘껏 내던지는 바람에 비바람에 쓸려 멀리 날아가 버렸다.

“천둥 번개가 치고…….”

내시가 덧붙여 말했지만,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천둥소리가 내시의 목소리를 덮었다.

대전 안에 있던 조정 관리들도 가만히 보고만 있기가 힘들었는지, 서로 눈짓으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대치하면 어떡합니까? 어서 말려야 합니다.”

“누굴 말리자는 뜻이오?”

“폐하를 말리자는 게요? 지금 그게 무슨 뜻이오? 폐하의 말씀이 틀렸다는 것이오?”

그럼 어쩔 수 없이 평왕을 말려야겠지.

평왕이 이런 식으로 난리를 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폐하께서 기가 차서 말씀도 못 하실 정도니.

진소는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진소가 걸음을 옮기자, 관리 몇 명이 재빨리 진소의 뒤를 따랐다.

“가지 말라! 아무도 평왕에게 가서는 아니 된다! 무릎을 꿇겠다고 하니 저대로 꿇고 있게 두어라!”

황제가 눈썹을 치켜뜨고 호통쳤다. 진소를 뒤따르던 관리들은 걸음을 멈췄지만, 진소는 예를 표하며 말했다.

“폐하, 근정전 앞에서 결례를 보이는 것은 친왕이어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신이 필히 가서 제지해야 합니다!”

진소가 엄숙한 얼굴로 말하고는 황제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곧바로 근정전 밖으로 나갔다. 황제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근정전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자, 평왕은 더욱 흥분했다.

하! 하!

“전하, 소란 피우지 말고,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진소가 목청을 높여서 외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회랑 아래에 서 있던 내시들이 서둘러 진소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며 그를 따라갔다.

“본왕은 소란 피운 적이 없소!”

평왕이 큰소리로 대답하면서 벌떡 일어나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본왕의 뜻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진심으로 벌을 받겠다는 것이오! 본왕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오!”

평왕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하늘이 쩍 하고 갈라지는 듯한 폭발음 같은 굉음이 들려왔다.

진소는 순간적으로 두피부터 발바닥까지 찌릿한 느낌이 들더니, 곧이어 그 자리에 풀썩 쓰러졌다. 쓰러지던 순간, 진소의 앞에 있던 사람도 쓰러지는 게 진소의 눈에 들어왔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진안 군왕에게 우산을 씌워 주던 내시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고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심지어 몇 명은 혼절하기까지 했다.

진안 군왕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빗속에 서 있었다.

세상에나.

다른 쪽에 서서 근정전을 내다보던 고 관인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평왕 전하인 게냐?”

“예, 전하께서 폐하께 죄를 뉘우치신다고 저렇게 반나절 가까이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계십니다.”

“자식, 독하기는 엄청…….”

좀 전까지만 해도 내시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던 고 관인은 마지막 말을 채 끝내지도 못한 채, 눈앞의 광경을 목격했다.

고 관인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젠장!

이건 고 관인의 뇌리에 남은 유일한 말이었다.

이런 젠장!

천둥소리가 근정전 위를 지나가는 동안, 굵은 빗방울이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무거운 적막이 근정전 앞을 짓눌렀다. 그런데 누군가가 갑자기 쓰러진 평왕에게 달려가면서 모든 것이 멈춰 버린 듯한 적막을 깼다.

넋이 나간 사람들이 빗속을 내다보았다. 뛰어온 사람은 진안 군왕이었다.

“여봐라, 여봐라! 어서 태의를 불러오너라!”

진안 군왕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진안 군왕의 외침과 함께 사람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렸다.

“여봐라, 여봐라!”

사람들이 뒤늦게 소리치기 시작했지만, 아무도 평왕 근처에 다가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가 내리는 근정전 앞, 여러 사람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은 벼락에 맞아 죽어서가 아니라, 질겁하면서 넘어지고 정신없이 울부짖느라 일어설 힘이 없어서였다.

근정전 앞의 광경은 털끝이 삐쭉 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이 와중에 귀가 찢어질 듯한 천둥소리가 또 한 번 사람들의 머리 위에서 울려 퍼졌다.

또 누가 벼락에 맞을지 어떻게 알아. 벼락 맞은 평왕을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하느님께서 화가 나 또 누군가에게 벼락을 내리꽂으시면 어떡해?

고 관인이 속으로 미친 듯이 외쳤지만, 이는 아무런 의미 없는 외침들이었다.

벼락에 맞았어! 벼락에 맞았어!

본왕의 뜻은 지금 이 자리에서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는 것이고, 진심으로 벌을 받겠다는 것이오! 본왕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오.

정말로, 진짜로, 진짜로 벼락에…….

고 관인이 악 소리를 내지르고는 잽싸게 몸을 돌려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리가 후들거린 탓에, 그는 몇 걸음도 못 가 바닥에 넘어졌고 버둥거리며 기어갔다.

바닥에 쓰러졌던 진소도 간신히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아직은 하반신이 마비된 것처럼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그는 앞에 쓰러져 있던 평왕을 쳐다보며 그에게 힘겹게 기어갔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무슨 일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황제의 목소리에 근정전 문 앞에 서 있던 조정 관리들이 깜짝 놀랐다.

큰일 났다!

문가에 있던 사람들 그 누구도 황제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

며칠 만에 연이어 자식을 둘이나 잃은 아비를 어떻게 봐야 하지? 게다가 그 아비는 하필이면 황제여서, 뒤를 이어 강산을 돌봐야 할 계승자를 둘씩이나 잃어버린 셈인데.

대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소.”

황제가 목청을 높여 다시 한번 물었다. 좀 전에 머리가 울릴 정도로 컸던 천둥소리 때문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던 황제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고 곧이어 조정 관리들이 모두 문가에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좀 전에 벼락이 친 것 같은데, 비명이 들린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누가 벼락에 맞았나?

설마 진소인가? 좀 전에 대전을 나갔던 사람은 진소인데. 설마 진소가 벼락에 맞은 거야?

“무슨 일이냐니까!”

황제가 답답한 마음에 소리쳤다. 관리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진소의 목소리가 대전 안으로 들려왔다.

“어서, 어서 대전 안으로 모시고 가거라.”

황제가 한시름 놓은 얼굴로 생각했다.

참으로 다행이구나. 저 힘찬 목소리가 그대로인 것을 보니, 진소는 무사하군.

참으로 다행이야. 절대로 진소에게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돼. 진소는 평왕을 잘 보좌하고, 그의 성장을 책임지고 지켜 봐야 하니까.

“어서 태의를 불러오거라, 태의를.”

누군가가 분주하게 외치자, 호통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태의를 부를 때가 아니오!”

모두의 시선이 호통을 친 대신에게로 쏠렸다. 평왕을 들고 회랑 아래까지 온 내시들도 황급히 걸음을 멈췄다.

대신이 고개를 숙여 평왕을 살펴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정 낭자를 부르시지요.”

대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면, 바로 장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하나?

아마 바로 장례를 치른다 해도 어렵진 않을 거야. 태상시와 예부에서 황후의 장례를 준비해 온 지 몇 년은 됐을 테니, 수의는 새로 짜긴 해야겠지만, 관곽이나 다른 것들은 바로 쓸 수 있을 거야. 무덤도 이미 준비되어 있을 거고.

다만, 평왕이 황릉에 안장될 수 있을지가 문젠데. 어찌 됐든, 벼락에 맞아서 죽은 것이니까. 황제 앞에 죄를 빈다는 명목이긴 했지만, 귀비가 안비를 해친 죄를 평왕이 대신…….

잠깐, 내가 지금 너무 많은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

대신의 뇌리에 마지막 생각이 스치던 찰나, 그의 등 뒤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왕을 둘러싸고 있던 조정 관리들이 놀란 기색으로 고개를 들어보자, 언제 가까이 다가온 건지 모를 황제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폐하!”

대전 안이 다시 소란스러워졌다. 황제는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다. 새까맣게 탄 평왕의 얼굴만이 그의 눈앞에 둥둥 떠다녔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저 사람은 짐의 아들, 평왕이 아니다. 절대 아니라고!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진소는 무사할지언정, 그가 보필해야 할 평왕이 더 이상 없는데!

이 생각을 마지막으로 황제는 짙은 어둠 속에 빠져들었다.

벌떼처럼 황제를 둘러싼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진소는 황제에게 달려가지 않고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항상 진중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이던 진소였지만, 지금은 몹시 남루한 꼴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관복, 빗속에서 평왕을 향해 기어가느라 잃어버린 신발 한 짝, 엉망이 되어버린 버선발까지.

진소는 멍하니 제자리에 선 채 아무도 돌보지 않는 평왕과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황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정말 큰일이 났구나.”

진소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럴 수가?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게 꿈이라면,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악몽이 아닌가.

궁 안이 한창 혼란스러울 때, 정교랑의 마차가 드디어 궁문 앞에 도착했다.

“데려다줘서 고마워요. 그만 돌아가세요.”

정교랑이 몸을 돌려서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진호는 자신에게 예를 올리는 정교랑이 아닌, 그녀의 뒤를 내다보았다.

왜 저렇게 소란스러워 보이지?

정교랑이 진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자, 궁문 너머에 서 있던 위병이 정교랑을 손으로 가리켰다. 곧이어 몇 명의 내시가 비틀비틀 허둥대며 정교랑을 향해 뛰어왔다.

“정 낭자, 정 낭자, 드디어 오셨군요. 어서, 서둘러야 합니다.”

내시들이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황제가 정 낭자를 부른 이유는 문답하기 위함일 텐데, 어째 내시들의 표정과 태도가 영 이상하네.

진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사이, 정교랑이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진호가 무의식적으로 정교랑의 손목을 잡았다.

반근이 깜짝 놀랐다.

대낮에 모두가 보는 궁문 앞에서 어쩜 저런 행동을 하시는 거야! 우리 아씨는 이미 군왕 전하와 혼인을 약속했는데!

반근이 진호를 밀어내려고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가려던 찰나, 진호가 입을 열었다.

“무언가 일이 틀어진 것 같습니다.”

반근이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뭐가 또 틀어졌다고?

“아이고, 어서 서두르세요!”

내시들이 발을 동동 구르며 정교랑을 끌고 갈 기세로 소리쳤다. 정교랑이 웃으며 진호에게 예를 표했다.

“괜찮아요.”

머뭇거리던 진호는 결국 손을 놓았다. 정교랑의 손을 놓음과 동시에 그는 무척 괴로워졌다.

마음이 왜 이러지? 이 손을 놓으면, 앞으로 낭자를 영영 보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참 이상하기도 하지.

아니야,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어. 혼사는 사소한 일이니까.

아, 혼사가 사소하다면…….

멈칫했던 진호는 이내 막연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설마 지금까지의 모든 게, 다 낭자의 예상 안에 있었던 일인 건가? 그렇다면…….

아니야! 절대로 그럴 리 없어! 이 모든 일은 다 낭자와 무관한 일이야!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그건 전부 진안 군왕이 낭자를 이용했기 때문이야.

진호가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그럼 가 봐요. 난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고맙지만, 그럴 필요 없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내가 호기심이 많은 것으로 칩시다. 낭자의 소식을 제일 먼저 듣고 싶어서 그래요.”

진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정교랑이 더는 대꾸하지 않고 예를 표하자, 기다리다 못한 내시들이 곧바로 정교랑의 팔을 잡고 끌다시피 하면서 그녀를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진호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시들의 손에 끌려가는 정교랑의 모습을 보고 설핏 웃음이 났다.

저 여인도 참 대단하지. 내시들에게 끌려 저리 빠른 걸음으로 가는데도, 넓은 보폭으로 여전히 안정감 있게 걷다니.

궁 안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사방에 깔린 금군 병사들은 무기를 더욱 세게 쥐고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경계 태세를 취했다.

근정전 안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은 연로한 조정 중신들인지라, 강산이 변하는 일도 직접 겪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도 이번 일은 가히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소란스러움이 멈추자, 대신들은 차분함을 되찾고 질서정연하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했다.

하지만 근정전을 향해 걸어오는 정교랑을 본 순간, 수위를 서던 금군, 내시, 그리고 대신들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정 낭자, 우선 이쪽으로 와 보십시오.”

진소가 말했다.

사람들 대부분은 근정전 안쪽에 있는 황제에게 가 있었고, 진소와 몇 명의 대신들만이 자리에 남아 평왕을 지켰다.

정교랑이 진소를 쳐다보았다. 정교랑은 진소의 말에 놀란 기색도 없이 조용히 그를 따라 근정전의 편전으로 갔다.

대전에 서 있던 사람들은 모두 편전을 향해 귀를 쫑긋 세웠다.

저 신의 낭자가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살리는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까?

근정전의 편전은 대신들이 잠시 쉬는 곳인지라 그리 넓은 공간이 아니었다. 편전 안에는 침상 위에 홀로 누워 있는 사람 외에 아무도 없었다.

진소가 걸음을 멈췄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 뒤섞였다.

“정 낭자, 이분은 평왕 전하입니다.”

진소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평왕 전하?

무덤덤하던 정교랑의 안색이 미묘하게 변했다.

저 사람이 바로 평왕 전하로구나.

침상 위로 시선을 옮기고 좀 더 가까이 다가간 정교랑의 표정에 놀라움이 더해졌다. 하지만 진소의 눈에 정교랑은 놀란 게 아니라 감탄하는 것처럼 보였다.

“벼락에 맞았네요.”

벼락에 맞다니.

정말 재미있네, 아주 뜻밖의 일이야.

원래대로라면, 평왕은 내년에 제위에 올라 장장 사십오 년 동안 나라를 통치할 다음 황제가 될 텐데, 이렇게 없어지다니. 역사서에도 평왕에 대한 기록은 없어지겠군.

역시 바뀌는구나.

하늘이 내 성의를 외면하지 않았고, 나를 속이지 않았어. 하늘은 나를 속이지 않아.

우리 정씨 일족이 멸문의 화를 입을 거라고 하니 멸문의 화를 입었고, 변할 거라고 하니 정말 변했어.

바뀔 수도 있구나. 정말 바꿀 수 있어.

정교랑은 저도 모르게 주먹 세게 쥐었다.

아버지, 보세요. 정말로 바꿀 수 있어요.

“정 낭자.”

정교랑의 표정을 보다 못한 진소가 목소리를 높여서 말했다. 그는 정교랑에게 이렇게 많은 표정이 있는 줄 오늘 처음 알았다.

놀라서, 그런 거겠지?

정교랑이 감정을 다스린 뒤, 진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히 보라고 데려온 게 아니오.”

진소가 목소리를 낮추고 다급하게 말했다.

“그럼 대인께서는 제가 뭘 했으면 하시는지요?”

정교랑이 물었다.

또 바보인 척하는 거냐!

진소가 이를 악물었다.

“살릴 수 있습니까?”

진소가 평왕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정교랑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대답했다.

“대인,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요?”

“죽을병이어야만 고친다 하지 않았소?”

“대인, 저는 죽을병에 걸린 사람을 고친다고 했습니다.”

정교랑이 침상에 놓여있는 평왕의 시체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아니라요.”

죽을병에 걸렸다는 것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인 거고, 이미 죽은 사람은 시체에 불과하다.

평왕은 죽었어. 벼락에 맞은 그 순간에 죽었다고.

진소가 속으로 탄식했다.

그건 나도 알고, 다른 사람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대신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황제에게 달려가진 않았을 테지.

지금의 평왕은 그저 시신 한 구일 뿐이다. 이제 아무런 의미 없는 존재가 되었으니, 자연스럽게 잘 보이려는 사람이나, 지키려는 사람이 없어진 거지.

그래도 평왕은 황제의 유일한 혈육이자, 건강하게 자란 황자인데, 이를 어쩌면 좋을꼬. 이젠 없어졌다. 평왕이 없어졌어.

“진 대인, 진 대인.”

대전 밖에서 내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를 부르십니다.”

황후가 정 낭자를?

설마 폐하도…….

진소는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면서 숨이 가빠왔다.

폐하까지 무슨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지금 이 시기에 폐하까지 쓰러지시면 안 돼!

진소가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그를 본 내시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대인, 태의들이 이미 폐하를 진맥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은 일단 무탈하나, 황후마마께서 정 낭자가 궁에 들어온 김에 폐하의 용태를 한번 봐 주십사 하셔서…….”

지금은 일단 무탈하다…….

진소는 귀가 웅웅 울리는 느낌에 다소 경직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탈하시면 됐다. 잠시여도 좋으니, 무탈하시면 됐다.

“대인께서도 어서 그리로 가시지요.”

내시가 조용히 진소에게 말했다.

진소가 곁눈질로 편전을 훑어보았다. 내시의 눈빛에는 불쾌감과 두려움, 그리고 당장이라도 이곳을 피하고 싶다는 기색이 여과 없이 드러났다.

불과 일각 전까지만 해도, 평왕을 저런 눈빛으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겠지.

무려 평왕이야. 제위를 이어받을 황위 계승자이고, 장차 우리가 충심으로 모셔야 했던 천자. 하지만 눈 깜빡할 사이에 모든 게 바뀌었어.

평왕이 시체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히 충격적이지만, 더욱 골치 아픈 건 벼락에 맞아서 죽었다는 사실이다. 제아무리 평왕이라도, 벼락 맞아 죽은 자의 시체라면 황릉에 안장되지 못할 수 있어.

내시들까지 저렇게 불쾌감을 내비치다니, 참으로…….

입술을 움찔거리던 진소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돌려서 잠시 편전을 쳐다보았다.

하늘은 참으로 무정하구나.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기니.

“가세.”

진소가 짧게 말을 뱉고는 걸음을 옮겼다.

비가 그치자,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바닥에 아직 마르지 않은 빗물만이 좀 전의 폭풍우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황제의 침전은 평왕의 시신이 놓여있는 편전보다 시끌벅적했다. 아무리 근정전에서 대조회를 참가하는 조정 관리들이라고 해도, 황제의 침전까지 출입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너나 할 거 없이 모두 황제의 침전에 몰려들었다.

관리들은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은 일이 너무도 소름 끼쳤다. 아직까지도 그 일이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침전 안에서 어린 여자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진소가 침전을 향해 걸어오자, 관리들이 빠르게 그에게 다가갔다.

“평왕 전하께서는…….”

가장 앞장서 있던 관리가 목소리를 낮추고 진소에게 묻자, 진소는 말 대신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거기에 그대로 두기에는…….”

관리가 재빨리 화두를 돌려서 말했다.

그렇게 참혹하게 죽었는데 버림까지 받은 친왕은 아마 평왕이 처음일 테지.

“폐하께서 결정하실 일이오. 폐하는 어떠신가?”

진소가 안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마마, 정 낭자를 모셔왔습니다.”

내시의 말을 듣자,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던 황후와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진안 군왕이 시선을 돌렸다.

“들라 하라.”

황후가 말했다.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정교랑이 고개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왔다.

“황후마마를…….”

정교랑이 무릎을 꿇고 예를 올리려던 찰나, 황후가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예는 됐다. 어서 이리 와서 살피거라. 폐하께선 어떠하시냐?”

정교랑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고개를 들자, 정교랑과 황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저 여인이 바로 정 낭자로구나. 과연 신선의 제자다운 모습이로군.

황후가 속으로 생각했다.

정교랑이 곧바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다가갔다. 황제의 침상 옆에 서 있던 태의들이 정교랑을 위해 자리를 비켰다. 비빈들과 공주들은 울음을 멈추고 긴장한 기색으로 정교랑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정교랑이 황제의 안색을 살핀 뒤, 손목의 맥을 짚었다. 정교랑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서 있던 이 태의도 정교랑의 모든 행동을 주시했다.

침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교랑이 낯설 수도 있겠지만, 이 태의는 정교랑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당초 정교랑이 경성에 들어와 처음으로 진료를 봤을 때도 이 태의는 정교랑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이 여인이 진 노태야를 대할 때는 무척 여유롭고 담담해 보였어. 그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조차 없었지.

하지만 지금 이 여인은 온 정신을 집중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고 있고, 표정도 꽤 다양하군. 정말로 이 여인이 황제를 치료할 수 있을까?

역시 중풍이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중종은 올해 조회를 진행하다가 갑자기 중풍으로 쓰러지게 되고, 일 년을 병상에 누워 지내다가 세상을 뜬다고 되어 있어.

재미있네. 바뀐 것도 있고, 그대로인 것도 있으니.

정교랑이 혼수상태인 황제를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이고 몹시 진지한 모습으로 황제의 맥을 짚었다.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과 부드럽고 따뜻한 피부.

이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사람인데, 역사서에는 싸늘한 네 글자만 남았지.

질, 년후훙(疾, 年後薨: 병을 앓다가 이듬해에 훙서하였다).

후세의 사람들은 ‘질(疾’)이라는 글자 하나에 응축된 슬픔과 걱정스러움, 두려움과 황공함을 결코 느끼지 못하겠지. 싸늘하기만 한 그 네 글자를 볼 뿐.

매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현실인걸.

우리 정씨 가문이 멸족당한 일도 역사서에 기록되었겠지.

정씨모역, 족멸(程氏謀逆, 族滅: 정씨 가문이 모반을 꾀하여 멸문의 화를 입었다).

그건 아마 이 한마디일 거야.

정교랑이 손을 들고 손끝으로 수를 셌다.

여섯 글자. 역사서에 여섯 글자나 남길 수 있다니, 그것만 해도 대단해. 짧은 여섯 글자가 어찌나 그리도 쓸쓸한지.

귓가에 들리는 기침 소리에 정교랑이 고개를 들었다. 이 태의가 눈을 부릅뜨고 정교랑에게 물었다.

“정 낭자, 어떻습니까?”

“풍질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고칠 수 있습니까?”

이 태의가 곧바로 물었지만,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대답 한번 깔끔하네.

“정 낭자, 폐하께서 풍질에 걸려 깨어나지 못하시게 된다면, 그 또한 죽을병이 아닙니까? 그런데 무슨 연유로 고치지 못한다는 건가요?”

비빈 한 명이 다급하게 물었다.

“스승님께서 풍질을 고치는 방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셨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정교랑이 의학적 이론을 말하거나 원칙을 논하며 해명하리라 기대했던 사람들은 정교랑이 이런 대답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다들 놀라서 할 말을 잃었다.

신의 낭자가 할 줄 모른대. 그럼 정말 아무런 방법도 없다는 건데.

정 낭자가 정말로 못하는 건지, 못한다고 거짓말을 하는 건지는.

침전 안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울음소리를 들은 진소와 대신들이 결례를 무릅쓰고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황제가 위중한 게 아니라, 정교랑이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울음을 터트렸다는 말을 듣자, 진소를 포함한 대신들의 안색이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여전히 혼수상태인 황제를 바라보던 진소 등의 낯빛은 다시 어두워졌다.

풍질은 일찍 깨어나면 깨어날수록 희망이 있는 것인데, 만약 이대로 쭉 깨어나지 못하신다면…….

침전 안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나라에는 하루라도 군주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지금 황제는 혼수상태에 빠졌고, 유일하게 대리청정을 할 수 있던 평왕마저도 벼락에 맞아 잿더미가 되어 버렸어.

지금 상황에서 누가 대리청정을 할 수 있지?

아니, 대리청정은 차치하고, 더 중요한 것은 황위의 계승자야.

“큰일 났습니다, 큰일 났어요!”

내시 한 명이 황급하게 침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고 대인께서 궁에 쳐들어오셨습니다!”

고 대인이!

진소 등의 안색이 급격하게 변하더니 곧바로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아버지, 아버지.”

사력을 다해서 외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려왔다. 고 관인은 일어서지도 못한 채 고능준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아버지, 아버지, 평왕 전하께서, 평왕 전하께서…….”

갈라진 목소리로 울부짖는 고 관인의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다.

평왕 전하, 평왕 전하!

고능준이 편전 안으로 한 걸음씩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그는 홀로 쓸쓸히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고능준은 온몸이 떨려오는 것을 주체하지 못했다. 평왕을 향해 내민 그의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노야, 노야, 마마께서 용종을 회임하셨다고 합니다.

고능준의 귓가에 십여 년 전의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참으로 좋은 소식이로구나. 마마께서 드디어 용종을 회임하시다니.

그래, 좋은 소식이지. 귀비마마께서 용종을 얻게 되었으니, 잘 낳기만 한다면 그 아이는 폐하의 장자가 되는 셈이야.

태후에 이어 귀비까지, 고씨 가문이 두 황제를 거쳐 황실의 종친으로 지낼 수 있다니.

외척이 뭐 어때서? 여인의 치맛바람으로 세력을 얻은 외척이라고 세간의 비웃음을 산다 해도, 그게 뭐 어때서?

황실의 외척도 충분히 공을 세워서 이름을 날리고, 조상을 빛내고, 업적을 쌓을 수 있어.

나 고능준이 가진 뛰어난 재능과 출중한 지략이,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의가, 고작 외척이라는 신분에 묻히랴?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사람들의 비웃음을 등에 지고 가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원대한 포부를 포기하고, 걱정 없이 마음 편히 먹고 마시는 한심한 외척이 되어야 하는가?

외척도 외척 나름이야. 나 고능준이 앞으로 이뤄나갈 것은, 역대 외척들이 해내지 못했던 것들일 거야. 나는 세력을 만들어 권력도 거머쥐고, 명성까지 쌓아 나갈 테니.

그리고 나는 그걸 해냈어. 수십 년 동안 흔들림 없이 공들여서 쌓아낸 나만의 성은 무너지지 않았다고.

나를 해치려는 자들과 내 앞길을 막으려던 자들은 모두 차례로 쓰러졌고, 간사한 외척이라며 하루빨리 나를 경성 밖으로 쫓아내려던 자들도 결국엔 나의 디딤돌이 되었지.

한 걸음, 딱 한 걸음. 내가 쌓은 탑 꼭대기까지는 딱 한 걸음만 더 가면 되는데.

“노야, 노야, 큰일 났습니다. 평왕 전하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허튼소리! 다 허튼소리야!

평왕 전하께서 돌아가실 리가 있나!

평왕 전하는 절대로 죽을 분이 아니다!

고능준이 떨리는 손으로 침상에 누워있는 평왕의 어깨를 잡았다.

“전하, 전하, 어서 일어나십시오.”

고능준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조용히 읊조리다가, 이윽고 평왕의 어깨를 점점 더 세게 흔들면서 목청을 높였다.

“어서 일어나세요! 어서 일어나라고!”

문밖에서 어지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고능준, 이 무슨 짓이오!”

진소의 목소리가 편전 밖에서부터 전해져 왔다. 고능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문밖에서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마마, 마마.”

진소가 누군가를 제지하려는 듯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진소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누군가가 편전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사가아! 사가아!”

귀비가 침상 위를 보고는 소리를 지르면서 통곡했다. 그녀가 무릎을 꿇고 평왕 위로 엎어지다시피 그를 껴안았다.

“사가아, 사가아, 이게 어떻게 된 거냐?”

귀비가 평왕을 꽉 끌어안고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지경에 이른 평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귀비가 두 손으로 평왕의 얼굴을 감싸고 소리쳤다.

“어서 일어나거라, 어서! 이 어미를 놀리지 말고, 이 어미를 놀리면 못써!”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난리를 치는 귀비를 보던 고능준은 도리어 침착해지기 시작했다. 그가 고개를 들고 문가에 서 있는 진소와 대신들을 쳐다보았다.

“조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게, 그리도 해서는 안 될 일입니까?”

고능준이 천천히 말했다. 진소가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미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귀비를 쳐다보고는 말을 아꼈다.

편전 안에는 처량한 울음소리만 맴돌았다. 진소와 몇 명의 대신들만 편전을 지키고 있던 좀 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이 편전 안에 있었지만, 사람이 적을 때보다 지금이 몇 배는 더 스산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귀비가 중얼거리면서 평왕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평왕을 홱 밀쳤다.

“아니야, 아니야. 이건 우리 사가아가 아니다, 우리 사가아가 아니야!”

귀비가 뒷걸음질 치면서 겁에 질린 모습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저리 가, 저리 가!”

귀비가 무언가를 쫓아내려는 듯이 허공을 향해 휘휘 손을 저었다. 그 모습을 본 내시와 궁녀들이 두려움에 몸을 벌벌 떨었다.

“육가아다! 보이지 않느냐! 저건 육가아라고! 육가아가 괜히 장난질을 치는 게야!”

귀비가 악을 쓰며 소리치자, 그녀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때, 고능준이 갑자기 손을 들고 귀비의 목덜미를 세게 내리쳤다.

진소와 대신들이 무의식적으로 헉 소리를 내뱉고는 그대로 풀썩 쓰러지는 귀비를 쳐다보았다.

“마마께서 더는 자극받아서는 아니 된다. 어서 마마를 궁으로 모시고 태의를 부르거라.”

고능준이 자신이 결례를 보인 것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시와 궁녀들이 재빨리 귀비에게 몰려가 그녀를 양쪽으로 잡고 편전 밖으로 물러났다.

고능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는 더는 평왕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더는 의미가 없어졌어. 의미가 없는 일은 빨리 잊고, 의미 있는 일을 해야 해.

“고 대인, 이제 그만 돌아…….”

진소가 몸을 돌리면서 말하던 찰나였다. 고능준이 잽싸게 편전 옆을 돌아서 후궁을 향해 달려갔다. 그 광경을 본 진소와 대신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놈이 감히!

사람들이 서둘러 고능준의 뒤를 쫓아갔다.

“막아라, 어서!”

진소의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곳곳에 배치된 금군 병사들이 고능준을 둘러쌌다. 금군 병사들에게 포위당한 고능준이 갑자기 옥대를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리고 소리쳤다.

“나 고능준은 선황의 당부를 받아 폐하께 충의를 다했소. 나는 태후의 친조카로서 태후마마와 폐하께서 편찮으시다기에 병문안을 하러 가는 길인데, 감히 누가 내 앞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고능준의 우렁찬 목소리에 포위망을 좁혀가던 금군 병사들의 발걸음이 주춤했다.

“저건 선황께서 고능준에게 하사하신 옥대다.”

진소가 탄식을 하고는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쓰러졌다는 일은 숨길 일도 아니고, 언젠가는 백성들에게도 알려야 할 일이지.

언젠가?

진소가 속으로 실소를 터트렸다.

언젠가는 무슨. 아마 지금쯤이면 벌써 경성에는 온갖 소문이 돌고 있겠지.

황제의 침전 안에 있던 태의들이 쉬지 않고 황제의 몸에 침을 놓으며 약을 달였다. 황후는 비빈과 공주들을 데리고 잠시 물러나 있었다.

정교랑은 이미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고 말한 터였다. 그러나 고능준 때문에 진소와 조정 대신들이 자리에 없기도 하고, 황후도 고개를 숙인 채 눈물을 훔치며 계속 황제 걱정만 하는 통에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정교랑을 신경 쓰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에게 물러나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아 정교랑은 가만히 제자리에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정교랑에게 누군가가 다가갔다.

“겁나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속삭였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려서 진안 군왕을 쳐다보았다.

정신없는 와중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진안 군왕의 옷을 갈아 입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듯했다. 진안 군왕의 머리카락과 옷은 여전히 젖어 있었다.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어서 그런지, 각진 얼굴선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고 눈빛이 더욱 그윽해 보였다.

“뭐가 겁나요?”

정교랑이 대꾸했다. 문밖에서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휘장이 홱 하고 들어 올려졌다.

“폐하!”

고능준이 소리를 지르며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가 무릎을 꿇은 채 앞으로 기어가면서 울음을 터트렸다.

“폐하!”

황후가 깜짝 놀라며 서둘러 침상 옆으로 갔다. 그녀가 입을 열려던 찰나, 고능준의 시선이 정교랑에게 향했다.

“진 대인!”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자신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가 정교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외신(外臣)들은 안으로 들이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저 여인은 어찌 여기 있는 겝니까!”

“폐하께서 정 낭자를 조회에 불러 하문하시고자 하셨소.”

진소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께서 무엇을 하문하시려고 했답니까?”

고능준이 곧바로 큰소리로 추궁했다.

“그건 고 대인께서 알 필요 없소이다. 고 대인은 폐하의 문병을 온 거요, 폐하를 질책하러 온 거요?”

진소가 단호하게 호통치자, 고능준이 화두를 바꿨다.

“폐하께서 이 지경이 되셨는데, 왜 아직도 궁에 남아있는 겁니까? 누가 저 여인을 폐하의 침전까지 들였고요? 저 여인도 여길 들어올 수 있는데, 왜 나는 막는 겁니까!”

고능준이 격노하면서 목청을 높였다.

어째 어린아이가 성질부리는 것처럼 보이네. 고능준도 충격이 너무 컸던 나머지 귀비처럼 정신을 놓은 건가?

“고 대인, 정 낭자는 본궁이 황제 폐하의 진료를 위해 안으로 들였소.”

황후가 입을 열었다. 고능준이 황후에게 시선을 돌리고 아, 하고 대꾸했다.

“그런 거였습니까?”

고능준이 말끝을 늘리면서 천천히 말하고는 서슬 퍼런 눈빛으로 황후를 쳐다보았다.

“언제 천둥 번개가 치고, 어떻게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지를 너무도 잘 알아서, 폐하와의 내기에서 지면 벼락을 맞아서 자결하겠다고 했던 그 정 낭자를요? 그 정 낭자를 모셔와 폐하의 진료를 보게 한 사람이 바로 황후마마셨군요.”

편전 안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지면서 순식간에 정교랑에게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소녀도 믿습니다. 서북의 병사들을 조사한 결과, 제 오라비들이 충분한 위로금을 받았고 그 죽음에 전혀 억울한 게 없다고 밝혀지면, 만백성을 부추겨 하소연한 만큼 이번에도 소녀가 만백성에게 알리겠습니다.

뭘 어찌 알리겠단 것이냐?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는 벌을 받겠습니다.

정교랑과 황제가 했던 대화가 대신들의 귓가에 맴돌았다. 구석에 서 있던 정교랑을 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더 이상해졌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정교랑과 되도록 멀리 떨어지고 싶은 건지 뒷걸음질까지 쳤다.

번개를 불러 죽는 벌.

번개를 불러 죽는 벌!

침전 안의 분위기가 기이해졌다. 정교랑은 의형제들을 위해 공로를 따지면서, 분명 황제 앞에서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는 선언을 했다.

당시 정교랑의 말을 두 귀로 직접 들은 사람이 많지는 않았지만, 정교랑의 명성이 날로 유명해지면서 정교랑에 관한 모든 이야기가 전설처럼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따라서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는 말도 자연스레 모두가 아는 일이 되어 버렸다.

이러니 성패나 좋고 나쁨이 모두 한 사람에게 달렸다(성야소하패야소하成也蕭何敗也蕭何-성공하는 것도 소하에 달려 있고, 실패하는 것도 소하에 달려 있다'라는 뜻으로, 한 사람의 손에 성패가 모두 달려 있음을 비유)는 옛말이 있는 게지. 그때는 허무맹랑하고 요사스러운 말로 명성을 얻었을지 모르나, 지금은 그 말들이 칼이 되어 네 목을 노릴 것이야.

고능준이 정교랑을 쳐다보는 눈빛에는 음험함이 서려 있었다.

번개를 불러 죽겠다던 수단은 저 여인 스스로 말한 것이고, 번개를 불러오겠다고 한 이유 또한 그날 황제가 저 여인에게 직접 물어 알게 된 것이다. 이 자리에는 그날 저 여인이 한 말들을 똑똑히 들은 대신들이 수두룩해.

저 여인은 자신이 한 말에 제 발이 저려 서슴없이 살인까지 저지르는 사람이야.

맞아, 바로 저 여인 때문이야! 오늘 벌어진 모든 일도 다 저 여인 때문이다! 저건 사람이 아니라 불길한 요괴가 틀림없어!

주위 사람들의 경악과 공포, 두려움 가득한 표정을 보라고! 저들도 틀림없이 저 여인을 요괴라고 믿는 것이야.

아니, 아니지. 저 요괴뿐만이 아니다. 제 입으로 요괴를 불러왔다고 한 황후도 있고, 진안 군왕까지 있어! 저 세 사람이 협심하여 평왕을 해치고, 황제의 목숨을 노린 것이야!

속으로 포효하면 할수록, 고능준은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왔다.

“고 대인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거요? 어린 처자가 내기하며 홧김에 내뱉은 치기 어린 말을 곧이들었소?”

황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치기 어린 말이라고요? 황후께서는, 그 말이 곧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는 뜻이라는 걸 모르십니까?”

고능준이 냉소를 보였다.

“무엄하다!”

황후가 눈썹을 치켜뜨고 소리쳤다.

“고능준, 어찌 그리 결례를 보이는 것이오!”

진소도 고능준에게 호통쳤다. 하지만 두 사람의 호통에도 고능준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잘 보시게나. 여기 있는 사람들의 눈빛에 서린 꺼림칙함과 의심, 그리고 불쾌한 기색을. 의심의 씨앗은 이미 벌써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를 잡고 싹을 틔우기 시작했어.

저런 요괴를 이 자리에 계속 있게 놔두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저 요괴가 번개를 불러와 평왕을 죽이고, 황제의 분통을 터트려 쓰러지게 했는데, 그다음은 누가 될지 어떻게 알아?

“황후께 여쭙습니다, 태후마마께서는 어디 계신지요?”

고능준이 두 사람의 호통을 가뿐히 무시하고 물었다. 애초에 고능준은 반박하려고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니라, 질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그는 굳이 길게 싸울 마음이 없다는 듯이,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질문 하나하나만을 내뱉었다.

“태후마마께서는 얼마 전 황자를 잃은 슬픔에 아직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계시오. 폐하와 평왕은 모두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분들이지. 본궁은 아직 병상에 누워계신 태후마마께 이 일을 섣불리 알릴 수가 없었소.”

섣불리 알릴 수가 없었다고? 일부러 알리지 않으려던 거겠지.

저 기세등등한 모습 좀 보게나. 황후, 내가 정말로 황후를 얕봤구려.

고능준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폐하와 평왕이 모두 태후마마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하셨지요? 태후마마께서는 폐하의 모친이고, 평왕의 조모입니다. 태후마마께서 겪으실 슬픔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태후마마께서는 단지 누군가의 어미나 조모이기에 앞서, 일국의 태후십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태후께서 수렴청정하시어 나랏일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니 태후마마를 뵙는 것 또한 막아서는 아니 되지요!”

고능준은 마지막 한마디를 할 때 황후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막는다는 표현을 들은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황후에게 향했다.

역시 보통내기가 아니네. 저런 사람이라면 황제를 후궁으로 피신하게 만들 정도긴 하겠어. 저 사람은 침전 안으로 들어온 뒤, 고작 말 몇 마디로 뜻밖의 사고를 철두철미한 음모로 바꿔버리고, 나와 황후를 모든 사람의 적으로 만들었어.

정교랑이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가 뒤에서 정교랑의 어깨를 살짝 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의아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왜 웃어요?

별거 아니에요.

정교랑이 눈빛으로 답한 뒤, 입꼬리를 내렸다.

고능준의 외침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감히 누가 막아서겠느냐고 물었소!”

고능준이 눈썹을 치켜뜨고 자리에 있던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진소, 대인이 막을 거요?”

태자가 있다면 태자가 대리청정하는 것이 맞지만, 지금은 아직 책봉된 태자도 없을뿐더러, 그나마 남아 있던 유력한 황위 계승자마저 죽어 버렸다. 그리고 태자가 없을 때, 황제가 앓아눕는다면 관례에 의해서 태후가 수렴청정을 해야 한다.

진소가 대답을 하지 못하자, 고능준의 시선은 다른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대들이 막을 텐가?”

고능준이 목청을 높여서 소리쳤다.

침전 안에 정적이 흘렀다.

“태후마마 납시오.”

문이 열리고 휘장이 들어 올려지자, 태후가 두 궁녀의 부축을 받으며 침전 안으로 허둥지둥 들어왔다.

고능준이 황후를 노려보았다.

내가 입궁한 순간부터, 후궁은 더는 황후의 관할이 아니게 됐습니다.

황후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고개를 숙인 채 태후에게 예를 올렸다. 고능준도 서둘러 몸을 돌려서 큰절을 올리며 울먹였다.

“마마.”

자리에 있던 대신들도 고능준을 따라 태후를 향해 큰절을 올렸지만, 태후는 그들을 무시한 채 황제가 누워있던 침상으로 곧장 달려갔다. 예를 올리고 있던 황후는 태후가 데려온 궁녀들에 의해 한쪽으로 밀려났다.

“황상!”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치고는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살벌한 대화에 찍소리도 못 내던 비빈들이 이때다 싶은 마음으로 태후와 함께 울음을 터트렸다.

“황후!”

통곡하던 태후가 잠시 뒤 눈썹을 치켜세우며 황후를 노려보았다.

“황후, 어찌 애가에게 알리지 않은 것인가! 이렇게 큰일이 났는데, 왜 애가에게 말하지 않았느냔 말이야!”

황후가 두려운 기색 없이 다시 한번 예를 표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대답했다.

“신첩은 마마께 어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랐습니다.”

어찌 저런 당당한 태도로, 저런 염치없는 말을!

태후가 눈을 부릅떴지만, 예상치도 못한 염치없는 말에 딱히 추궁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첩은 마마께서 감당하기 힘드실까 봐 염려되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이 일로 화병을 얻으셨고, 귀비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고 들었는데, 신첩이 어떻게 마마께 말씀드릴 수 있었겠습니까. 신첩은 감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귀비가 광증을 보이는 바람에 고능준이 귀비를 기절시킨 일은 불과 얼마 전의 일이었지만, 황후는 침전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는 곧, 황후가 후궁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을 뜻했다.

고능준이 황후를 쳐다보면서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태후가 황후를 흘겨보고는 고개를 돌리고 태의를 불렀다.

“황상의 용태는 어떠한가?”

태후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의들이 태후에게 가까이 다가가 황제의 병증을 소상히 말했다. 황제가 언제 깨어날지 모르고, 깨어난다고 해도 지각이 있을지는 모를 일이라는 말에 태후가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세상에나, 세상에!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거야? 지금 애가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마마, 마마, 슬픔을 거두시옵소서.”

고능준의 말에 태후는 당장이라도 혼절해 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니야. 고능준이 보냈던 사람이 한 말처럼, 애가가 죽기만을 바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절대로 그들의 뜻대로 되게 둬서는 안 되지!

“정씨!”

태후가 갑자기 소리쳤다. 정교랑이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 예를 표했다.

“죽을병이 아니면 못 고친다더니, 왜 지금 와서는 못한다는 말인가?”

태후가 물었다.

“폐하께서 깨어나시게 된다면 죽을병이 아니기에 소녀는 고칠 수 없습니다. 혹 폐하께서 깨어나지 못하시더라도, 풍질 같은 중증은 소녀가 고칠 줄을 모릅니다. 스승님이 제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황제가 깨어나든 깨어나지 않든, 나는 황제의 병을 고칠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왜 중풍 치료법만은 가르쳐 주지 않으셨던 걸까?

정교랑이 침상 위에 누운 황제를 쳐다보았다.

이유야 간단하겠지. 아버지께서는 내가 황제의 병을 고치지 않길 바라신 거야. 꼭 일 년 후에 붕어해야만 하는 황제의 목숨을 구해 주지 말라고.

“황당하구나!”

태후가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당연히 고칠 수 없겠지. 네가 악한 마음을 써서 평왕을 해치고, 폐하를 해친 것이 아니더냐!”

태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일제히 경악했다.

“마마!”

진안 군왕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 입 다물라!”

태후가 단호하게 호통치고는 정교랑을 노려보면서 삿대질했다.

“여봐라, 당장 저 계집을 가두어라!”

침전 밖에 있던 시위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정교랑을 매섭게 노려보는 고능준의 눈빛에 광기가 비쳤다. 고능준은 애써 억누르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손과 몸이 떨려오기 시작했다.

저 계집을 가둬라! 그리고 목을 베어라! 목을 베어!

“마마.”

시위들을 제지한 진소가 태후를 불렀다.

“무엄하다! 황상이 깨어나지 못하니 이제는 눈에 뵈는 게 없더냐! 애가의 말은 말 같지도 않아서 듣지 않겠다는 게야?”

태후가 격노했다.

“말도 들어줄 수 있는 말 나름이지요!”

누군가가 거침없이 소리쳤다. 침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누구야? 누군데 저런 말을 함부로 하는 거야?

사람들이 소리를 쫓아가자, 조용히 뒤에 서 있던 키 큰 사내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장순! 또 네놈이로구나!

고능준의 심장이 더욱 빨리 뛰었다.

“지금 네, 네가 감히 애가의 말이 말 같지 않다는 소리를 하는 게냐!”

태후가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그럼 마마께서 하신 말씀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장순이 가차 없이 대꾸했다.

“장순, 태후마마를 모독하고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려 하시오? 어사는 어디에 있는가!”

고능준이 눈을 부릅뜨고 호통쳤지만, 장순은 고개를 젓고는 그의 말을 따라 했다.

“어사는 어디에 있는가! 저 잔챙이 놈이 조정의 기강을 어지럽히려 하는 게 보이지 않느냐!”

잔챙이 놈이라니! 저 빌어먹을 놈이 입을 열자마자 욕을 해?

창피한 줄도 모르는 놈이 사람 꼴을 하고는 입만 열면 욕지거리를 내뱉다니, 대유학자라는 칭호는 무슨 술수를 써서 얻은 건지 모를 일이군!

고능준이 뭐라 대꾸를 하기도 전에 장순이 고개를 돌려 태후에게 소리쳤다.

“마마께서 이리하시는 건, 천자와 평왕을 어질지 못하고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신은 조정의 중신으로서, 폐하와 평왕을 대간대악한 자로 몰아세우는 마마를 제지해야만 합니다. 마마를 제지하지 않는 것이 바로 눈에 뵈는 것 없고 나라에 불충한 간신이 되는 것이지요!”

“허튼소리, 허튼소리! 애가는 폐하와 평왕을 위해 저 요괴를 가두려는 게야!”

태후가 반박했다.

평왕이 벼락에 맞았어, 벼락에 맞았다고!

하느님, 어떻게 평왕에게 벼락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 천벌로 벼락을 맞아 죽은 자라는 오명이 천추에 남을 텐데, 그렇게 되면 평왕이라는 봉호도 남기기 힘들단 말입니다!

죽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치지요. 그런데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죽인단 말입니까, 하느님!

안 돼, 절대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고 할 수 없어!

평왕은 벼락에 맞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저 요괴의 손에 죽은 것이야! 저 요괴가 평왕을 해쳤어! 그렇게 해야만, 그렇게 해야만 평왕의 명예를 지킬 수 있고, 황실의 체면을 지킬 수 있다!

“마마, 반강현에서 일식을 불러온다는 요승을 죽였던 사건을 기억하십니까?”

장순이 눈썹을 치켜뜨고 말했다.

반강현 일식 요승 사건.

태후가 멈칫했다.

그 사건은 경성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었지만, 정교랑의 명성을 따라 자연스럽게 경성까지 소식이 전해졌고, 후궁의 여인들도 당연히 알게 되었다.

작년에 일식이 일어났을 때, 정교랑이 반강현에서 일식을 빌미로 백성을 현혹하는 요승의 목을 벤 적이 있었지.

“사람들에게 대사라고 추종받던 승려는 목이 달아나자마자 요승으로 몰렸습니다. 그리고 그 요승의 목을 벤 정씨는 인간계에 내려온 보살이라는 명성을 얻었고요. 마마께 묻겠습니다. 백성들에게 보살이라고 추종받는 정씨가 아무런 연유 없이 마마께 벌을 받는다면, 백성들이 어찌 생각하겠습니까?”

반강현의 스님은 요승이었기 때문에 정교랑의 손에 죽은 것이고, 그럼 정교랑의 손에 죽게 된 평왕은…….

태후의 표정이 급변했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시오! 그건 정씨가 백성들을 현혹했던 요사스러운 말이오! 정씨는 그런 요언을 퍼뜨린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했어야 마땅하오!”

고능준이 목청을 높였다. 장순이 고개를 홱 돌리고 고능준을 쳐다보며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정씨가 요사스러운 말로 백성을 현혹했다고 하였소?

그럼 평왕이 어찌 벼락에 맞아 죽었는지는 알고 있소? 평왕은 당시 하늘에 맹세컨대 만약 자신이 한 말에 한 치의 거짓이라도 있다면, 기꺼이 하늘이 내리는 벼락을 맞을 것이라고 하였소.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하늘에서 번개가 내리쳤지.

황제, 문무백관, 내시, 금군 병사까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평왕의 말을 들었고, 벼락이 내리치는 광경을 지켜보았소. 평왕은 하늘에 맹세하였고, 그 맹세가 지켜지지 않았으니 하늘이 그에게 벌을 내린 것이오.

고 대인에게 묻겠소이다. 이보다 더 사실대로 정확하게 말할 수 있소이까?

그리고 태후마마께 묻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과연 평왕이 한 행동을 요괴의 소행이라고 생각하겠습니까?

태후께서 정씨를 가두겠다는 것은, 정씨가 번개를 불러 평왕을 죽였다는 이유에서겠지요. 하지만 태후께서는 만백성의 눈에 보살인 정씨가 하늘을 대신하여 정의를 구현한 게 아니라고 설득하실 수 있겠습니까? 정씨의 손에 죽은 평왕이, 또 한 명의 요승이 아니라고 어떻게 설명하실 겁니까!”

장순의 우렁찬 목소리가 침전 안을 가득 메웠다.

침상을 짚은 채 몸을 일으키려던 태후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태후는 불안한 기색으로 자신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거리를 좁혀오던 장순을 쳐다보다가 결국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설득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야.

애가의 손자가, 정말로 천벌을 받아서 죽게 된 걸까?

평왕이 용서받을 수 없는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아 죽게 됐다고 알려지면, 황릉에 안장될 수도 없어. 이리도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죽어서도 외로이 지내게 된다니.

태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통곡했다.

안 된다. 우리 가엾은 평왕을 그렇게 둘 수는 없어!

“하지만 정씨는 번개를 불러올 줄 안다고 했소! 그건 정씨가 스스로 했던 말이고 세상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오!

반강현에서의 일은 정씨가 그 요승과 아무런 원한 관계가 아니었지만, 이번 일은 다르오. 정씨를 우리 가문으로 시집보내자는 제안은 평왕이 먼저 꺼냈고, 그 말을 따라 태후마마께서 혼인을 명하시고, 황제 폐하께서 윤허하게 된 일이외다. 정씨는 이 혼사에 대해 불만을 품었고, 태후를 만나러 오지 못하게 집안 어른의 다리까지 부러트린 사람이오.

게다가 그 이전에는 사촌을 시켜 내 아들을 암살하려고까지 했지! 정씨의 불순한 의도가 이리도 투명하게 보이는데, 어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게요!”

고능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고 장순을 노려보았다.

“물론 장 대인께서는 다르겠지요. 장 대인과 정씨는 같은 고향 출신이기도 하고, 정씨에게 큰 은혜를 입어 서로 시녀를 교환할 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들었습니다.”

고능준이 다른 대신들을 훑어보았다.

“진 대인께서도 정씨에게 은혜를 입었다지요?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지금은 정씨와 아무런 사이가 아니라지만, 언젠가 죽을병을 고쳐 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잖소이까!”

“고 대인,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억지 부리지 마시오.”

진소가 격노했다. 고능준이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억지 부리는 게 뭐 어때서? 말도 안 되는 궤변으로 억지를 부리는 것보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물러나는 게 과연 낫다고 할 수 있나?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건 맞지만,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사람이라면 다들 각자의 이득을 위한 사심이 있기 마련이니까!

태후가 울음을 멈추고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그래, 장순과 진소에게 있어서 저 여인은 은인일 테니, 그들은 저 여인을 위한 말을 할 테지. 다들 한통속이야! 한통속이라고!

“정씨, 이제 와서 번개를 불러오지 못한다고 할 수 있느냐?”

태후가 이를 악물고 물었다. 태후와 대신들의 대화를 흥미진진하게 듣고 있던 정교랑이 태후를 향해 예를 표한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을 덧붙였다.

“소녀, 번개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정교랑의 대답이 끝나자 침전 안은 쥐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물론이고, 정교랑에게 질문했던 태후조차 놀라서 흠칫했다.

뭐라고?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고 인정을 했어?

그럼 애가가 반나절 동안 대신들과 말씨름을 한 게 뭐가 돼? 지금 이게 장난으로 보이나?

태후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소녀가 불러오는 번개는 소녀 스스로에게만 불러올 수 있지, 남에게 불러올 수는 없습니다. 당시 소녀가 폐하께 약조했던 것도 소녀 스스로 번개를 불러 죽겠다고 한 말이었습니다.”

뭐라고? 지금 말장난하는 건가?

“허튼소리! 그럼 평왕이 스스로 번개를 불러와서 죽은 것이니, 천벌을 받았다는 뜻이더냐!”

태후가 호통쳤다. 정교랑이 고개를 끄덕였다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평왕이 자신을 해친 것은 맞으나, 천벌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지?”

황후가 불쑥 끼어들었다. 고능준이 매섭게 황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고입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사고?

“그럼, 평왕의 죽음은 천벌이 아니라는 것을 낭자가 증명할 수 있소이까?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러서 천벌을 받은 게 아니라, 사고로 그리되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겠냐는 소리요.”

장순이 이어서 물었다. 고능준의 시선이 이번에는 장순에게로 향했다.

저놈은 지금 질문을 하는 게 아니라, 태후와 대신들에게 설명하는 것이야.

평왕의 죽음은 천벌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벗을 수 있다고, 황실이 세간의 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할 방법이 있다고.

엄청난 유혹이로구나!

정교랑이 장순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가능합니다.”

“아무도 믿지 않을 거요!”

고능준이 악을 쓰면서 소리쳤다. 정교랑이 고능준에게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고 대인께서는 소녀가 명망이 있다 하셨지요. 그리고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 모두가 알고 있다고 하셨고요. 그러니 소녀는 세상 사람들을 믿게 할 수 있습니다.”

명망이란 것은 참 좋은 것이야. 어떻게 쓰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지니까.

“고 대인께서는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면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없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정교랑이 고능준을 쳐다보면서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세상 사람이 다 내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는 줄로 믿는다면서요. 그 믿음을 이용해서 평왕의 오명을 씻고, 황실의 체면을 지키고 싶지 않나요?

당신들은 평왕의 명성이, 황제 폐하의 명성이, 황실의 명성이 신경 쓰이지도 않나요?

엄청난 유혹이로구나.

고능준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딴 건 신경 쓰이지 않아.

평왕이 십 대 죄악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떨치든 말든, 천벌을 받아서 죽은 것이든 아니든, 나는 지금 그딴 게 신경 쓰이는 게 아니라고.

지금 내 머릿속에 있는 건, 평왕이 죽었다는 사실뿐이야. 이미 벌어진 죽음이라면, 절대 허탈한 죽음이 되어서는 안 돼.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든 사람들을, 정말로 죽어야 하는 사람들을 꼭 사지로 몰아넣어야 해!

하지만 고능준과는 달리, 누군가는 평왕의 명성과 황실의 명성을 신경 쓰고 있었다.

“정말로 가능하다는 말이냐?”

침상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태후가 정교랑을 쳐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태후가 물음을 던지자, 많은 사람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되었구나.

진소는 손바닥이 흥건한 느낌에 손을 살짝 문질렀다. 정교랑의 말이 끝난 뒤, 사람들은 질식할 것만 같은 적막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여인…….

진소의 시선이 정교랑에게로 향했다.

침전 안에서 살벌한 말들이 쉼 없이 오갔지만, 저 여인은 무사태평한 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 분명 자신에 관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꼭 강 건너 불구경하는 사람처럼 흥미진진하게 남의 얘기를 듣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

물론, 오늘 같은 상황은 풍림이 저 여인을 탄핵했던 지난번 상황과는 완전히 달라. 이 자리에서 변명 같은 건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지, 변명 한마디 하지 않고 깔끔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어.

모든 일에는 좋고 나쁨이, 복과 화가 동시에 오는 법. 저 여인은 번개를 불러올 줄 안다는 말을 했기에 오늘 같은 죄를 뒤집어쓰게 됐지만, 바로 그 말 덕분에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구나.

어떻게 보면 참 단순한 일이었는데, 내가 괜히 긴장하고 장순까지 나서게 되었네.

저 여인은 항상 심장을 부여잡을 만할 일들에 휘말리지만, 항상 마지막에 나타나서는 한없이 단순하고 손쉬운 방법으로 모든 일을 해결하는군. 꼭 우리를 바보 취급하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 아니, 우리가 바보 같은 게 아니라, 너무 똑똑해서 생각을 너무 복잡하게 하는 것일지도. 저 여인은 바보였던 시기가 있기에 뭐든 단도직입적으로 간단명료하게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거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다라……. 사람은 저마다 품고 있는 사심이 있고, 원하는 것이 있기 마련이지.

“어떻게 증명할 테냐?”

태후의 목소리가 진소의 생각을 끊었다. 진소가 표정을 가다듬고 진지한 얼굴로 정교랑을 쳐다보았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오는 날이면, 세상 사람들에게 소녀가 번개를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정교랑이 대답했다.

“그런 날씨가 한 해나 반년이 넘도록 없다면 어떻게 할 거요?”

고능준 쪽의 관리 한 명이 물었다.

고능준은 조금 전 광기를 보이면서 목청을 높이던 것과는 딴판으로 입을 다물고 잠자코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고능준의 침묵은 그가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서슬 퍼런 눈빛으로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것임을.

“그래. 평왕이 그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느니라.”

태후가 말했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닷새 이내로 또 그런 날씨가 올 거예요.”

정교랑이 말했다.

“정 낭자가 참 대단한 능력을 갖췄습니다. 비바람을 불러올 줄도 알고.”

어떤 관리가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정교랑이 그 관리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비바람은 어디에나 있고, 다양한 방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있어요. 그 비바람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이 아둔하기 때문이죠.”

누군가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지만, 곧바로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삼켰다.

지금 상황에서 웃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꼴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모든 사람의 이목이 정교랑에게 집중이 되어서 웃음을 터트린 사람을 굳이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정교랑에게 말을 건넸던 관리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씩씩대며 콧방귀를 뀌고,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하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누가 강주 사람 아니랄까 봐.”

그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고능준의 편에 서지 않은 장순을 욕했다. 혼잣말보다도 작은 목소리인지라, 그의 말이 장순의 귓가에까지 닿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중서문하성에서 이 일을 관장해 주시오.”

태후가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기진맥진한 모습으로 말했다. 진소가 앞으로 나아가 태후의 명을 받들었다.

“폐하의 병세가 어찌 될지 모르니, 신 등은 궁에서 교대로 당직을 서겠습니다.”

태후는 더는 대꾸할 힘도 남지 않았다는 듯이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진 대인이 알아서들 하시구려.”

태후는 고개를 돌리고 의식 없이 침상 위에 누워있는 황제를 보더니, 다시금 비통함이 몰려오는지 침상을 잡고 통곡했다.

“폐하.”

비빈들이 또 울음을 터트리자, 침전 안은 다시 울음바다가 되었다.

같은 시각, 황궁 밖.

평왕이 변을 당하고, 황제의 상태가 위태롭다는 소식은 이미 밖으로 새어 나왔다.

궁문이 워낙 굳게 닫혀있기도 했고, 조정 관리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한 탓에 구체적인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고능준은 선황이 하사한 옥대를 앞세워 궁문을 돌파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럴 배짱이 없었다. 이럴 때 난리를 피우면 분명히 금군 병사들의 칼에 목이 달아나도 싸다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고능준이 옥대까지 들고 궁에 난입했다는 것은, 그 소문이 사실일 확률이 매우 높다는 뜻이었다. 궁 밖에 있던 관리들은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소란을 피웠다.

주 노야의 서재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고여덟 명의 식객들이 분주하게 붓을 들고 서신을 써 내려갔다.

“간단하게 쓰게, 간단하게. 다들 바보가 아니니까 대충 알아볼 것일세. 지금은 서신을 빨리 보내는 것이 중요해.”

주 노야가 이리저리 서성이면서 재촉했다.

“서북 쪽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니 몇 통 더 쓰고, 섬주는 두 통만 쓰면 될 걸세. 집안 어른께 한 통, 지부 대인께 한 통.”

“노야, 지부 대인께는 저희가 아니어도 벌써 보내려는 사람이 수두룩할 겁니다.”

한 식객의 말에 주 노야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주씨 가문의 서신이 빠져서는 안 되지.”

고향에 본가까지 다 섬주에 있는데 체면이라도 차리려면.

식객은 서둘러 알겠다고 대답한 뒤, 계속해서 서신을 써 내려갔다.

다른 방에 들어가 보니, 주 부인이 여종들을 데리고 온갖 서랍을 뒤져가며 장례를 치를 때 입는 옷들과 옷감을 찾아내고 있었다.

주 노야는 번잡한 방 안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걸음을 돌렸다. 하지만 마당도 분주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자식들이며 조카들이 집사와 사환을 데리고 나와 빨간 등롱을 떼어 내고, 붉은 칠을 한 조각들을 가리기 바빴다.

그때, 유독 바쁘지 않아 보이는 한 사람이 주 노야의 시야에 들어왔다.

“평왕이 정말로 죽은 겁니까?”

주복이 멍한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죽었지, 그럼 가짜로 죽었겠느냐? 진짜가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소문을 퍼트린다고. 심지어 폐하까지…….”

주 노야가 성가시다는 투로 대답하다가 말끝을 흐렸다. 자신의 저택 안인데도 주 노야는 뒷말을 내뱉는 것이 두려웠다.

주복이 고개를 돌려 주 노야를 쳐다보았다.

“그럼, 혼사를 치를 필요가 없겠네요?”

엉? 뭐라고?

주 노야가 멈칫했다.

“교랑이 혼사를 치를 필요가 없잖습니까.”

주복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황제가 붕어한다면 국상 기간에 정교랑의 혼사가 치러질 가능성은 전무했다. 황제가 붕어하지 않고 병상에 앓아눕기만 해도, 그 혼사는 치러지지 않을 것이다.

주 노야가 아, 하고 대꾸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버지, 평왕이 죽었습니다.”

주복이 죽었다는 말에 힘을 실으며 되뇌었다.

평왕이…….

주 노야가 흠칫 놀랐다가 무언가 생각났는지 안색이 갑작스레 변했다.

아버지, 유 대인이 풍질에 걸렸다고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 애가 해치운 게 틀림없습니다. 그 애를 넘보는 사람은 모조리 해치워 버렸으니까요

남의 손을 빌려 무뢰배들을 쏴 죽였을 때나, 강주 소현묘관의 관주와 그 정부한테 벼락을 내리쳐 죽였을 때처럼 했겠죠.

언젠가 주복과 나눴던 대화가 주 노야의 귓가에 맴돌았다.

다 죽었어.

유 교리, 관주, 태평거에 찾아온 무뢰배, 명성이 바닥에 떨어져 경성 밖으로 쫓겨난 풍림.

그 여인과 갈등이 있었던 사람, 그 여인의 재물을 탐했던 사람, 그 여인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든 사람이나 위협을 가한 사람들까지.

설마 잊은 거요? 제일 처음 중매를 언급하고, 이 혼사를 추진시켰던 장본인이 누군지?

평왕!

평왕은 태자 책봉의 유일한 후보이며, 훗날 제위에 오르게 되면 꽤 오랜 시간 동안 황제로 지냈을 사람이지. 그러니 평왕의 희로애락은 분명 조당을 좌우할 것이고, 자연스럽게 평왕의 후손에게도 영향을 줄 것이고, 평왕이 있는 한, 주씨 가문이나 정씨 가문의 재기는 불가능했어.

혼사는 사소한 일이에요.

주 노야의 귓가에 정교랑이 몇 번이고 했던 말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그러게 말이야. 어디 사소한 게 혼사뿐이랴? 평왕도 사소한 일이 되었는데. 이젠 평왕까지 죽었어.

정말, 그 아이의, 소행일까?

주 노야가 하마터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한 말을 간신히 삼켰다. 그 말은 주 노야가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감히 묻지 못할 말이었다. 그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쭉 빠지는 바람에 재빨리 기둥을 붙잡았다.

아이고, 세상에나!

“그러게 내 뭐라 했느냐. 반근, 혼례복을 지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누가 네 아씨와 관련될 일이 생기면, 분명히 재수가 없어질 거라고 했잖아.”

장씨 저택 안, 장 노태야가 우스갯소리를 했다. 몸종의 울음소리가 더욱 서러워졌다.

“아유 정말, 노태야, 반근 좀 그만 놀리십시오. 지금 때가 어느 때인데!”

노복이 발을 굴리면서 장 노태야를 나무라고는 서둘러 울고 있는 몸종을 다독였다.

“다들 확실하진 않다고 하더구나.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소문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국상 기간이 끝나고 혼사를 치르면 될 일이야. 이참에 혼례복도 천천히 준비하면 되고.”

“에이, 그야 모를 일이지. 반근이 우는 이유는 혼례복을 짓지 못해서가 아닐 텐데?”

장 노태야가 노복의 말에 곧바로 반박했다. 몸종이 흠칫 놀랐다.

“반근, 평왕 전하께서는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구나. 이것 때문에 우는 게지?”

장 노태야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벼락에 맞아 죽었다고 하더구나.

몸종이 바닥에 엎드린 채 꺼이꺼이 울었다.

“아이고 정말, 그 얘기는 왜 또 꺼내시는 겁니까!”

“왜? 이 얘기는 하면 안 되는 얘긴가? 우리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 누굴 속이려고.”

“노태야, 지금 남의 재앙을 고소하다고 여기시는 겁니까 뭡니까? 배고픈 병이 안 도지신 지 꽤 됐지요?”

“어허, 만평, 너희들은 도대체 장씨 가문 사람이냐, 정씨 가문 사람이냐? 어째 다들 그 여인만 싸고돌아? 내가 골칫거리를 몰고 온 것도 아닌데, 왜 나한테 화풀이를 하느냔 말이다. 정말 재수가 없네, 재수가 없어. 역시 내 말이 맞았다. 정 낭자와 관련이 있는 일이라면, 무조건 재수가 없어진다니까.”

“정말 뜻밖이네요.”

정교랑의 등 뒤에서 조용히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정교랑이 고개를 돌리자, 진안 군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따라오고 있었다.

황궁을 떠나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 때쯤이었다. 진안 군왕의 뒤로 펼쳐진 첩첩산중 같은 궁전 사이의 노을이 오늘따라 더욱 방대해 보였다.

“정말 뜻밖입니다. 분명히 화창한 날씨였는데, 어떻게 갑자기 그렇게 변할 수 있는지.”

진안 군왕이 정교랑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고 붉게 물든 하늘을 쳐다보았다. 진안 군왕은 평왕이 죽기를 몇 번이고 바랐다. 직접 문둥병에 걸린 환자까지 찾아내어 평왕을 해치려고 한 적도 있지만, 결국 계획에 그쳤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사이에 평왕이 갑자기 죽어 버렸네. 심지어 그리도 참혹하게.

진안 군왕은 평왕의 머리 위로 벼락이 내리꽂히는 장면을 그 자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지금 다시 그 광경을 회상해 보아도, 진안 군왕은 여전히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죽었어.

진안 군왕의 시선이 궁에 머물렀다. 그는 방금 전 홀로 침상 위에 외로이 누워 있던,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된 소년의 모습이 떠올렸다.

불쌍하다? 기쁘다?

진안 군왕은 복잡하게 뒤엉킨 감정 때문에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표현해 내기 힘들었다.

하지만…….

진안 군왕이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내가 화가 나는 건, 그 자식은 죽는 순간까지도 남을 곤경에 빠트린다는 거야.

“이게 바로 무상 아니겠어요.”

정교랑이 잠시 뜸을 들이고 말을 덧붙였다.

“세상사가 무상한 건 당연한 거기도 하고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에게 시선을 옮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상사가 무상한 건 당연하니, 두렵다고 느낄 필요는 없는 거겠죠.”

두 사람이 궁문을 나서자마자 긴장과 불안 속에 궁문은 곧바로 닫혀 버렸다.

어가에 세워 둔 마차들이 모두 내쫓긴 터라, 두 사람은 어가를 따라서 쭉 걸어갔다. 어가의 끝에 다다르자 길가에 세워진 마차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왔다.

“아씨, 아씨.”

눈물을 머금은 반근이 등불을 들 겨를도 없이 뛰어왔다.

밝게 불이 밝혀진 어가 때문에 마차가 세워진 길가가 더욱 어둑해 보였다.

“갈게요.”

정교랑이 말했다.

“내가 데려다줄게요. 한동안은 서로 보기 어려워질 테니까요.”

진안 군왕이 말했다.

“정 낭자.”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정교랑이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어두운 모퉁이에서 진호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진 공자.”

정교랑의 목소리에서 조금 놀란 기색이 묻어나왔다.

정말로 여기서 계속 날 기다린 거야?

“전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정 낭자와 둘이 할 말이 있어 그러니 자리를 좀 비켜 주시지요.”

진호의 말에 진안 군왕은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자신의 마차에 올라탔다.

“진 공자, 여기서 기다…….”

정교랑이 입을 열려던 찰나, 앞으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온 진호가 정교랑의 말을 끊었다.

“당신, 입니까?”

진호가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등불 아래 정교랑의 얼굴이 굳어졌다.

* * *

진호는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평왕이 죽었다고? 평왕이 어떻게 죽을 수가 있어?

그 소식을 전한 사람이 미친 거겠지?

무려 평왕이야. 황제에게 남은 유일한 황자고, 황위를 이어받을 유일한 계승자인데.

누가 평왕을 죽게 놔뒀겠어? 평왕이 죽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고, 누가 감히 평왕더러 죽으라고 하고, 평왕을 죽게 만들 수 있겠어?

“고 대인, 고 대인,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감히 내 앞을 막는 겐가!”

진호가 고개를 들자, 관복이 아닌 일상복 차림으로 미친 사람처럼 궁문으로 쳐들어가려는 고능준이 보였다. 평왕에게 무슨 일이 났다고 했을 때, 가장 조급해할 사람들은 단연 고씨 가문일 터였다.

고씨 가문은 다르지.

고씨 가문은 달랐다. 고씨 가문은 조정의 신하인 동시에 황실의 외척이었다.

신하는 누구나 할 수 있고, 누구나 신하가 될 수도 있지만, 황실의 친척은 하고 싶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다 평왕을 끼고 있어서 그런 거 아냐. 평왕이 없었으면, 고씨 가문이 어떻게 경성에서 그렇게 날뛸 수 있겠어.

평왕?

평왕? 평왕이 무슨 대수겠어, 그 여인의 눈에는 다 사소한 일이겠지.

이때 갑자기 천둥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에 진호가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번개가 쳐서요.

진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말하던 정교랑의 모습을 떠올렸다.

번개.

빗물이 진호의 얼굴에 떨어졌다. 이상하게도 한여름의 빗방울이 뼈를 찌르는 듯 차갑게 느껴졌다.

그럴 리 없어, 그럴 리 없어.

“공자님, 정말이에요. 노야께서도 말씀하셨고, 공자님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셔야 해요. 이 소식은 당장 천주로 전해질 거라고 하셨어요.”

아니, 난 이곳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거다. 난 이 자리에서 그 여인을 기다릴 거야.

멀리서 진안 군왕과 함께 걸어오는 정교랑이 보이자, 진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인가요? 아니면, 진안 군왕입니까?

눈앞의 여인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는 것 같았다.

“나였다면, 난 아마 이곳에 없었을 거예요.”

만약 그녀였다면, 그녀에게 그런 게 가능했다면, 그녀는 어떻게 이곳에 오게 됐을까. 어떻게 가족들을 뒤로 한 채 혼자 이곳에 왔고, 혼자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을까.

그녀가 정말로 남에게 번개를 내릴 수 있었다면 양씨 일족에게 벼락을 내렸을 것이다. 그랬다면 정씨 가문도 멸족되지 않았을 테고, 그녀가 이곳으로 올 일도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세상에 만약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정교랑의 대답을 들은 진호는 커다란 돌덩이가 땅에 내려앉은 듯했다.

낭자가 아니래. 낭자가 아니라고 했어.

진호가 앞으로 한 걸음 내디디며 말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절대로 낭자가 아닐 줄 알았어요.”

정교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몰랐잖아요.”

흠칫 놀란 진호가 다급하게 고개를 저으며 또 한 걸음 내딛고 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교랑, 나는 그런 뜻이 아니라……. 교랑, 나는 그런 뜻이…….”

일렁이는 등불 아래, 정교랑이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고 쉿 하는 소리를 냈다. 정교랑은 가벼운 미소를 보인 후, 작별을 고했다.

정 낭자가 괜찮다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고 했어.

그저 사소한 일일 뿐이라고, 말할 필요 없다고. 더는 할 얘기가 없다고.

진호는 입술 끝까지 차오른 말을 결국 뱉지 못하고 정교랑이 옆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밤바람에 흔들리는 정교랑의 치맛자락이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진호는 몸을 돌리고 싶었지만, 끝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낭자의 말이 맞았어요. 나 또한 다른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일 뿐이군요.

똑같아요. 그들과 똑같은 시선으로 낭자를 봤어요.

“정방.”

진안 군왕의 목소리가 옆에서 전해져 오자, 정교랑이 걸음을 멈췄다.

“좀 걷고 싶지 않아요?”

진안 군왕이 물었다. 정교랑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이런 때엔, 적절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진안 군왕이 머쓱하게 웃고는 웃음기를 거두었다.

이런 때엔, 웃는 것도 적절하지 않긴 하지.

“음, 내가 또 졌네요.”

진안 군왕이 정교랑을 쳐다보다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정교랑이 무슨 의미냐는 눈빛을 보내자, 진안 군왕이 대답했다.

“확실히 당신이 나보다 불쌍해요.”

정교랑이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때엔, 웃는 것도 적절하지 않죠.”

정교랑이 표정을 가다듬고 말했다. 진안 군왕이 눈썹을 으쓱하고는 뒷짐을 진 채 한숨을 내뱉었다.

“이런 때엔, 우리가 운다고 해도 믿어 주는 사람 하나 없겠죠.”

정교랑은 또다시 미소를 지었다.

“울고 웃는 건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게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믿거나 말거나 상관없어요.”

진안 군왕이 잠시 정교랑을 빤히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난 이만 가 볼게요. 아 참,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어요.”

진안 군왕이 손으로 정교랑의 어깨를 두어 번 다독이고는 고개를 돌려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는 진호를 돌아보았다.

“정방, 너무 슬퍼하지 마요.”

정교랑이 예를 표한 뒤, 진안 군왕의 마차가 먼저 떠나는 것을 눈으로 배웅했다. 마차가 서서히 움직이자, 반근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보았다.

진호는 제자리에서 몸을 돌린 채 정교랑의 마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흔들리는 불빛 때문에 반근에게는 진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반근이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집에 도착하자, 대청 안에서 정교랑을 기다리고 있던 범강림과 황씨, 그리고 정사낭과 주복이 일제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들은 각자의 불안함과 걱정스러운 마음을 최대한 표정에서 숨기려고 노력했다.

“아직 식사 안 했죠? 밥은 다 됐으니까 금방 준비해 올게요.”

황씨가 서둘러 몸종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주복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요. 내가 본 건 평왕이 죽고, 황제가 쓰러진 다음의 일들이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평왕은 어쩌다가 죽은 거야?”

소식을 들었을 때도 깜짝 놀랐지만, 정교랑의 입을 통해 그 소식을 다시 들은 범강림은 또 한 번 놀랐다.

“벼락에 맞아 죽었어요.”

정교랑이 대답했다. 범강림과 주복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지만, 자초지종을 모르는 정사낭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쩜 그렇게 공교로운 일이…….”

범강림이 말하다가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 형제들 때문이 아니었다면, 당초 누이가 그런 맹세를 할 필요도 없었을 거고, 오늘 같은…….”

범강림이 말끝을 흐렸다.

누구나 놀랄 만한 맹세를 했으니, 모두가 기억하고 있겠지. 하필이면 평왕이 또 누구나 놀랄 만한 방식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으니.

누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할 정도야. 설사 정말로 누이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분명 누군가가 사람들의 마음에 의심의 씨앗을 뿌릴 거야.

이것 봐. 주 노야는 벌써 숨느라 급급해서 주복 혼자 생떼를 써서 이곳에 왔잖아.

“세상일이 어떨 땐 꼭 이렇게 공교롭기도 하죠.”

정교랑이 말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황실의 승계와 관련된 큰일이라는 것도 알고 있고, 미래의 황제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천문 현상이 내게 알려주지 않았던 건, 태자가 위태로워진다는 게 이렇게 갑작스럽게 벼락을 맞아 죽음에 이름을 뜻한다는 사실이었다.

진소가 침상에 누워 있는 사람이 평왕이라고 했을 때, 정말로 좀 놀랐어. 역시 하늘의 위엄은 감히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네.

생사는 지극히 흔한 일이지만, 어떻게 죽는지는 예측할 수가 없어. 심지어 평왕이 죽은 방식은, 과거에 내가 했던 말과 관련이 되어 있고.

참으로 공교롭기도 하지. 고능준이 광기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해.

대전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기이한 시선도 당연하고, 진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물어본 질문과 범강림과 주복이 나를 피하려는 기색도, 다 당연해.

그런 일과 표정들은 정씨 가문의 자제로서 익숙한 것들이야.

천도를 관찰하는 이유는 하늘의 뜻에 따르기 위함이었다. 하늘의 뜻은 사람의 힘으로는 거역할 수 없는 것이며, 천도는 항상 변하지만, 세상 사람이 그것을 관찰해 내지 못할 뿐이었다.

본디 사람들은 자신이 모르는 일에 관해서는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어서, 무슨 일이 생기면 그에 관련된 온갖 추측들을 하기 마련이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저 사람들이 우리한테 손가락질하면서 뭐라고 하는데요?

저들을 뭣 하러 신경 써?

큰 키에 백발과 흰 수염을 기른, 신선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노인이었지만, 실은 언제나 철부지 같은 면모가 있었어.

정교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들을 뭣 하러 신경 써?

“그럼,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겠지?”

범강림이 재차 묻고는 머뭇거리면서 또 물었다.

“그런데, 네 말을 믿어 줘?”

“아니요. 아직은 잠시나마 내가 필요할 때라서요.”

정교랑이 범강림과 주복을 향해 미소 띤 얼굴로 대답했다.

그들이 믿든지 말든지,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라고. 믿으면 믿는 거고, 믿지 않으면 믿지 않는 것일 뿐.

당장이라도 나를 산 채로 잡아먹을 기세였던 고능준도 잠시 물러났고, 태후도 불쾌감을 잠시 거두고 인내하기로 했다.

그런데 그들을 뭣 하러 신경 쓰나.

범강림이 정교랑의 대답을 듣고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때마침 황씨는 몸종들을 데리고 밥상을 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주복이 몸을 일으켰다. 정교랑을 본 후로, 주복은 딱 한 마디만 하고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던 마음이었다.

“주 공자님, 같이 식사하고 가세요. 여기서 반나절이나 계셨는데.”

황씨가 서둘러 주복을 붙잡았지만, 주복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고마워요, 오라버니.”

정교랑의 목소리에 주복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오라버니.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우리도 잘 지내지 못해서 그래. 널 위해서 걱정하는 게 아니니까, 고마워할 것도 없어.”

주복은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네, 최대한 나한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어요.”

정교랑이 말했다.

최대한 나한테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게 노력하고 있다니.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길 바라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는 무서운 일들을 감당하고 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그 고난을 어떻게 노력만으로 이겨낼 수 있겠어.

“누가 너더러 노력하래?”

주복이 몸을 홱 돌리고 화가 난 모습으로 소리쳤다.

“나는 단지 너한테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해서, 너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돼서 그래.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아니, 우리가 있잖아.”

주복은 희미한 불빛을 받으며 회랑 아래에 서 있던 정교랑의 얼굴에 어렴풋하게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정교랑이 예를 표했다.

“그래서, 오라버니한테 고맙다고요.”

밤새 뜬눈으로 당직을 선 진소는 해가 밝아질 무렵이 되어서야 드디어 교대 시간이 되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대문을 넘자마자 마당에 서 있는 진십팔랑을 보고 깜짝 놀랐다.

초췌한 몰골의 진십팔랑은 두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진소는 진십팔랑의 옆에 함께 서 있던 여종이며 몸종들의 표정과 한쪽에 놓인 방석들을 보고는, 진십팔랑이 여기서 꼬박 하룻밤을 지새우며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십팔랑, 지금 뭐 하는 것이냐?”

진소가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아버지, 평왕 전하께서 정말로, 정말로…….”

진십팔랑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사람을 시켜 소식을 전하지 않았느냐. 그런 일을 어찌 함부로 말하겠느냐.”

진소가 한숨을 쉬었다. 진십팔랑이 고개를 젓고는 뒷걸음질을 치면서 눈물을 흘렸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가.”

진십팔랑이 중얼거렸다.

누군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나! 평왕이 벼락에 맞아 죽자, 온 황궁의 사람들은 당황해서 헉 소리를 내는 것 말고는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어.

진소가 탄식하고는 넋이 나간 진십팔랑을 쳐다보았다.

평왕의 스승이기도 하고, 꽤 오랜 시간을 함께했으니 감당하기 힘들 수도 있겠군.

진소가 진십팔랑을 다독이려고 입을 열려던 찰나, 갑자기 진십팔랑이 고개를 돌리고 어디론가 뛰어갔다.

어떻게 그럴 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진십팔랑의 시야가 점점 더 흐릿해져 갔다.

평왕 전하만큼 노력하고 열심인 사람이 또 어디에 있다고. 평왕 전하는 분명히 좋은 성군이 되셨을 텐데.

그런데 왜, 노력과 부지런함은 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야? 어떻게 이렇게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없어져 버릴 수가 있어?

연습만 많이 하면, 낭자처럼 좋은 글씨를 쓸 수 있을까요?

아니요. 때로는 타고나야 해요.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때로는 타고나야 한다고? 열심히 노력하는 건 아무런 소용도 없어?

왜 아무런 소용이 없는 거야! 왜, 왜 그런 거야!

걸음을 멈춘 진십팔랑이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느님, 어찌 이리도 불공평하십니까!

전 그 말을 인정할 수 없어요, 절대로 인정할 수 없다고요!

“십팔랑도 저렇게 속상해하는데, 풍질로 쓰러진 폐하께서는 오죽했겠어요.”

진소 부인이 심신을 진정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향에 불을 붙이고, 진소가 죽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며 한숨을 쉬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네요. 일이 이렇게 되다니.”

진소 부인의 말에 진소가 미간을 꾹 누른 채 음, 하고 대꾸했다.

“그나저나, 평왕께서는 정말로 벼락에 맞아서…….”

진소 부인이 말끝을 흐리며 묻자 진소가 눈을 뜨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까지 벼락에 맞을 뻔했소.”

당시 상황을 회상한 진소는 벼락에 맞을 뻔했다는 두려움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천벌이라는 게 참으로 무서운 것이더군.

남편까지 벼락에 맞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은 진소 부인은 화들짝 놀라며 서둘러 의원을 불러 진료를 받자고 했다.

“이미 궁에서 태의가 봐 주었소. 별 문제는 없다더군.”

진소가 몸보신용 약도 먹었다는 말을 덧붙이며 부인을 달래자, 진소 부인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럼 폐하께서는…….”

진소 부인이 또 물었다.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겠소. 그런 병은…….”

진소가 조심스럽게 대답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그런 병은 완쾌가 힘들다고 봐야지. 설령 깨어난다 해도, 예전과 같을 수는 없을 테고.

진소는 의식을 잃은 채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리고 젊고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옥좌에 앉아 있던 과거 황제의 모습을 회상했다.

경에 대해서는 익히 들었소. 오늘 드디어 이리 보게 되다니, 참으로 반갑구려.

젊은 시절의 황제는 중신들과 함께 과거의 전례와 현재의 문제 등을 논하느라 끼니를 놓칠 때가 많았기에, 수라를 준비하는 궁인들이 푸념을 늘어놓기 일쑤였다.

생각에 잠겼던 진소가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희끗희끗해진 자신의 모습이 구리거울에 비치자, 그는 다시 한번 침상에 누워 있던 황제의 얼굴을 떠올렸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속절없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이 한탄스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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